청몽채화-관계자외출입금지 1. 악동들을 소개받다. “이 노무 새끼!!! 정말 너 거기 안 서!!!!!??” “............” “야, 이 자식아!!!!!!” 뒤를 쫒는 경찰들의 말에 아랑곳 하지 않고 묵묵히.. 그러나 빠르게 달려가는 한 소년. 땀방울을 날리며 뛰는 와중에도 입가에는 함박웃음을 머금고 있다. 그의 손에 들린 건 값비싼 귀금속 가게에서 훔친듯한 진주세트 한 쌍. 열나게 뛰던 그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높은 철창을 보고 멈칫하더니만. 곧 피식 웃고는 자신의 뒤를 쫓는 경찰들을 향해 뒤돌아서서... 눈을 찡긋하며 윙크를 날려주고는, “아저씨들 안녕!!!” 이라는 말과 함께 날렵하게 철창을 뛰어넘어버린다. 경찰들이 허무하고도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면... 그는 들고있던 진주세트를 철창 사이로 던져 경찰들의 손에 넘겨주고... “너 이 새끼!!!! 지금 장난치나!!!?” 김형사님이 호통을 치면... “그거 줬으니까 이제 쫒아오지마요!!! 그거 돈으로 바꾸려면 어차피 나도 귀찮으니까. 그래도 아저씨들 윗분들한테 깨질까봐 불쌍해서 주는 마음이 더 커요. 내 맘 알죠?“ “너.........너........너!!!!!” “돈으로 만족할게요~” 귀금속 가게에서 보석 뿐 아니라 돈도 훔친 듯... 그가 주머니 안에 손을 집어넣자 만원짜리가 한 가득. 진주세트를 찾고 안도했던 경찰 아저씨들의 안색은 다시 허옇게 변한다. “너.......너.....너.... 언제 돈까지....” “이거 어차피 돈 많은 재벌 아저씨들꺼니까 내가 쫌만 가질게요.” 만원짜리 여러장을 부채처럼 펴들더니... 돈에 가볍게 키스하고 뒤로 도는 놈. “요즘 우리가 돈에 조금 쪼달리거든요.” “야아!!!!!” “굿바이!!!!” 밝게 웃는 미소. 귀여운 외모. 그러나 빠르고 정확한 범행. 그는 경찰들을 남기고 어디론가 뛰어가버린다. 폴짝폴짝. 산 속에서 뛰노는 다람쥐마냥. NO.1 강 휴인 “일단 이 놈 이거... 제일 골치아픈 놈이고...” 김형사님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넘어간 화면에는- 담배피우며 담벼락에 기대선 남자. 잿빛 담벼락과 어울리는 분위기, 그리고 그의 얼굴에 해맑게 드리워지는 햇살 한 줄기. 날카로운 눈매와 날렵한 턱선. “이거... 다 처리하면...?” 옆에 있는 놈에게 그가 중얼다면... 옆에 있던 얍삽한 얼굴의 학생이 크게 소리친다. “30만원 보장할게!!! 정말 어떻게 좀 해 줘. 나 맨날 걔들한테 괴롭힘 당하느라...” “오케이. 쓰잘데기 없는 소리는 생략하자.” 30만원이라는 말에 만족하 듯 미소지은 그는... 담을 넘어 학교안으로 들어서려 하더니... 얍삽한 놈에게 한마디 한다. 아주 진지한 얼굴로. “선불.” .......뭐냐, 저 놈은? 지금 개그하나? 겉만 멀쩡하지, 속은 푼수인건가? “그건 안돼!!! 니가 일을 제대로 끝내면!!! 그 때” “나는 의뢰 해결 못한 적 없다. 나 바뻐. 내 소문 듣고 먼저 의뢰한 건 너잖아. 돈 줄거야, 말거야?“ 결국 30만원은 받아낸다. 의뢰받고 애들 패주는 깡패새낀가본데? 그 때... 또 다시 등장한 경찰들이 삐익- 호루라기를 불면... 얍삽시럽게 생긴 놈은 도망, 깡패새낀 담을 넘어 학교안으로... NO.2 지 환영 “이 놈도 요주의 인물이죠. 이 날 우리가 잡기도 전에 의뢰받은 다섯 명은 다 패놓고 사라졌댑니다.“ 김형사님 말에 크게 한숨쉰 우리 아부지가 화를 참으며 묻는다. “이 놈 나이는?” “다들 동갑입니다. 열 여덟살. 그리고 학교는” “자세한 이야기는 잠시 후에 하지. 다음.” 또 다시 넘어간 화면. 붐비는 지하철 안. 긴 생머리에 야구모자를 푹 눌러쓴 늘씬한 여자. 이리저리 주위를 살피더니 육중한 몸집을 자랑하는 아저씨 곁으로 다가선다. 기름끼 묻은 아저씨의 손이... 점점 그녀의 몸쪽으로 가까워지면. 흠칫 놀라는 그녀. 뭐야, 저거...? 세 번째는 성추행범인가? 저 아저씨? 라는 나의 생각이 무색하게도... 그녀는 싱긋 미소지으며 그 남자에게 안기듯 기대버린다. 헉!!! 그렇다면 저것은 공공장소 음란행위!!!? 그것도 아님 원조교제? 불륜? 이라는 나의 생각이 또 다시 무색하게도... 화면을 찍은 듯한 카메라가 그녀의 손을 줌 인 하면. 아저씨의 끈적한 손길을 태연하게 받아내며 그 대머리 아저씨의 허리를 안아버리는 그녀. 그리고... 그 아저씨의 뒷주머니에 꽂혀있는 지갑을 태연하게 꺼내버린다. 그 지갑을 아저씨 몰래 자신의 가방에 쏙 넣는 그녀. 고단수다. 이윽고 아저씨를 휙 밀어낸 그녀는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튀어나간다. 지갑이 없어진 아저씨가 놀라서 사람들을 헤치고 빠져나오려 하지만... 문이 철컥 닫혀버린다. 그녀는 아저씨를 향해 미소 띄며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준 후... 입모양으로 한마디 건넨다. 윙크도 해주면서. “나한테 팁 줬다고 생각하세요.” ...........저런 간 큰 년. 지하철이 떠나가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확인. 두툼한 지갑을 보며 만족한 그녀... 높이 던져올린 지갑을 다시 휙 낚아채며 혼자 기쁨의 세레모니 중. NO.3 백 민서 “유일한 여자입니다. 악명높은 소매치기죠. 키도 크고 얼굴도 이쁘장하다는군요. 항상 쓰고있는 흰 야구모자가 특징이랍니다.“ “........다음은?” “다음 화면 보겠습니다. 이 놈이 마지막이죠.” 비현실적인 몽환적 분위기. 주황색 불빛이 흔들거리는 술집 룸. 뭐냐, 이것은............ 호스트빠!!!!!????? 내 예상을 맞추듯이 모피코트를 입은 아주머니들이 오순도순 앉아있다. 그리고 검은 정장 차림의 잘생긴 남자가 문을 벌컥 젖히고 들어온다. 거리낌없는 태도와 싸가지 없는 눈빛. “어머!!! 얘가 그 유명하다는 애야?” “너무 잘생겼네!!! 웬일이니!!!” 좋아죽는 아주머니들... “이 호스트빠 골드회원만 받는 애라잖아요. 그 중에서도 스페셜한 애라고.” “너, 너랑 하룻밤 보내려면 얼마 필요하니?” 으으... 가장 비싼 호피무늬로 온 몸을 둘러싼 아주머니가 물어보면... “같이 자는 그딴 짓은 안합니다.” “뭐?” “같이 술마셔주는 거 뿐이지, 노래, 춤, 스킨쉽 이딴 건 바라지 마십시오.” 건방진 말투에 기분 상한 듯한 아주머니가 쏘아붙이듯 말을 건다. “그런데도 니가 여기서 돈 받아먹니? 그럼 니가 대체 여기서 하는 일이 뭐야?” “그래도 환장한 아줌마들 많던데요?” “...........뭐..... 뭐?” “그래서 유명하긴 한데 돈은 별로 못 법니다. 성격이 지랄맞아서요.” NO.4 신 비원 2. 게임 스타트 “상대하기 힘들만큼 성격이 냉정하답니다. 거기다 이리 튀고 저리 튀어다녀서 경찰들이 잡아오기도 지친다는군요.“ “그래봤자 꼬맹이들이야. 이 꼬마들 네 명 잡기가 그리 힘들단 소린가?” “잡아놓으면 뭐합니까!!! 아주 도망치는 데 신이 들렸는데!!!” 우리 아부지인 검사님과 김형사님의 싸움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푸욱 내쉬는 나. 그리고 처음으로 한 마디 건넨다. “이 화면은 누가 찍었어요? 이거 찍을동안 잡으면 되지.” “이 화면은 이온이가 찍은거고.” 이온이........ 정이온........ 내 동생. “그 애가 도둑 잡는 건 좀 무리가 있지않느냐....” 열일곱살 이온이는 원래의 취미가 파파라치 행각이었다. 그러나 검사인 아부지에게 그 특별한 능력을 인정받아 들키지않게 범죄자의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고는 했다. 희한하게도 이온이의 주위에는 범죄나 특이한 일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그 애는 어릴 때 유괴도 당해봤다. 아부지 탓에 금방 구조되긴 했지만... 그래서 범죄는 증오하는 내 동생. 웬만한 일에 겁먹지도 않는 강인한 내 동생. “에이, 그래도 아부지!!! 명색이 대한민국 검찰인데 이런 거 하나 못 잡아서야!!!” “무턱대고 잡으면 안돼.” “예?” “네 놈은 모두 친구며 같은 집에 산다.” “......... 예?” “주동은 한 놈이고.” “넷 다 악질인데요?” “그리고 한 사람은 세계적 재벌 아들내미다.” “아.......... 아....” “시언아.....” “예, 아부지.” “그게 니가 할 일이다. 주동이 누구고 재벌아들이 누군지, 찾아내라.” “아부지.........!!!! 제가 왜!!!” “주동하는 놈은 소년원으로 집어넣어야하고, 재벌아들은 무사히 영국에 있는 집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거기서 기숙학교에 보낸다나.“ “아니, 그게!!!! ...........재벌 아들이 누군데요?” “그걸 찾으라니까!!!!” "그 재벌이 자기아들 인상착의 말 안해줘요?? 사진 좀 달라그래요!!!“ “사진이 없댄다. 워낙 가출을 밥 먹듯이 해서 백일사진이 전분데 그 때는 우량아라 살이 뒤룩뒤룩 쪄서 누군지 못 알아보겠더라.“ “........그럼... 이름이 뭔데요, 그 재벌...? 성만 맞춰보면 알잖아요.” “딸아... 그 놈들은 천재야.” “예?” “성과 이름을 바꿨다. 몇 놈은 가명인 모양이고, 몇 놈은 이름을 서로 바꿔치기한 모양이야. 잡혀도 그건 끝까지 숨기고 악착같이 탈출해대서 방도가 없다,“ 아아아악!!!!!! 이 무슨 말도 안되는!!!!! “더 크면 무슨 짓을 저지를 지 모른다. 빨리 잡아야 해.” “어릴 때 외모.... 정말 못 알아봅니까? 어차피 한 명은 여자니까, 남은 놈들은 셋. 그럼 사진보고 대조하면 한 놈 정도는 이목구비가 맞아떨어지겠죠!!!!“ “화면 봤잖냐.” “예, 봤습니다!!” “다들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냐.” “좀.......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근데 뭘 또 물어보냐?” “예........ 죄송합니다.” “닮은 외모도 놈들의 계략이다.” “모여사는 이유가 대체 뭐랍니까!!!” “낸들아냐!!!! 그걸 알아내란 말이다!!!!” “거, 참!!! 더럽게 어린 놈들이!!!” “.............” “그래도 재벌아들은 찾기 쉬울 것 같은데요. 그 쪽에서 비서 하나만 보내서 그 쪽 도련님 찾아가라 그러면“ “중학생 때 가출했는데 그 때까지 비만아였다더라. 그래서 아무도 모른단다.” “몽타주 대충 만들어보면 되잖아요!!” “몽타주 대충 만들어서 똑같이 들어맞은 적이 없다!!” 그래... 그건 그렇다. 동감한다. “회장부부가 죽었단다. 그 밑에 직원들이 충성심은 투철했던 모양인지 자기들이 회사를 가지지않고 그 도련님을 찾는단다. 후계자로 키워져서 모든 걸 다 알거라면서. 기숙학교에서 모든 걸 다 배우면 그 때 바로 회장으로 모신다고.“ “그 놈은...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 안 돌아왔대요?” “무덤에 국화가 놓인걸로 봐서 왔다간 것 같긴 한데 장례는 안 왔다나... 암튼 고이 모셔야지...“ 뭔가 이상한데... “주동은 완전 악마같은 놈이란다. 나머지 세 명을 꼬드겨서 그딴 식으로 살고있다나. 예상을 뒤엎고 여자가 주동일 수도 있지.“ “움....” “한 달이다.” “예?” “한 달 안에 이 사건 해결해야한다. 나머지 두 놈은 재교육 정도로 끝낼테니까...” “아부지....!!! 저기 그게, 다른 사람을 알아보시면, 저 말고 좀 전문적인.” “이 사건으로 질질 끈다고... 모든 지원이 끊겼다. 인원보충도 더 이상 안되고. 이 애비가 오죽하면 엄마없이 자란 불상한 너랑 이온이를 써먹겠느냐.“ 평소에는 잘만 써먹어놓고. “한 달 안에 해결못하면 김형사는 해고 당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 애비도 무사하지는 못할게다....“ 말 끝을 흐리는 아부지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내 손을 꼭 붙드는 김형사님. “시언아... 우리집에 곰같은 마누라와 토끼같은 자식들이 셋인데... 나 해고되면 몬산다. 다섯 가족이 길거리에 나앉아서... 그렇다고 다른 사건도 밀렸는데 그 놈들을 옆에서 잠복근무 해대며 찾고 기다릴수만도 없는 노릇이고.....“ “김형사님....” “아이고, 내 팔자야아!!!!!!” 오버액션을 취하며 쓰러지는 김형사님을 쳐다보다가... 아부지에게 시선을 돌리면... “시언이 넌 심리학과 학생이잖니. 잘할게다.” 정말 웃는 모습이 흔치 않은 아부지 앞에서... 차마 수업도 안들어가고 학점도 안따놔서 학사경고를 받았다고 말할 순 없었다. 그렇다. 난 대학갈때도 성적이 안되서 어쩔 수 없이 심리학과를 지원했던 것이다. 난 심리학에 대해 전혀 몰랐다. “그 놈들의 심리파악. 그래서 정체 알아내기.” “아부지........” “이건 그 놈들과 너의 두뇌게임이다. 알아듣냐?” 스물 두 살 정시언. 검사인 아버지에 의해... 나보다 네 살이나 어린 악동들과 함께.... 게임... 스타트.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한 번 놀아보자... 3. 관계자 외 출입금지 [네 명 다 자퇴를 했단다.] 방금 들은 김형사님의 목소리가 귀 속에서 웅얼웅얼... 도대체 어떤 놈들이기에 교복입고 학교의 울타리안에서 아장아장 걸어댕기는 걸 거부한 채 경찰을 가지고 놀고 있는거야...? 꼭 이 누님이 나서야 하는거니? 뻔할 뻔자지... 잡아놓으면 그럴거지? 눈물 뚝뚝 흘리면서. [잠시의 방황을 견디다 못해 가출한거여요. 별다른 뜻은 없답니다.] 내 바람이다. 제발 그렇게 말하고 가정의 품 속으로 돌아가거라. 악질이라는 주동자놈은 그리 쉽게 굴복하지 않을테지만. “이유가 뭐니?” 김형사님이 내 손에 쥐어주신 놈들의 사진 네 장에 대고 아주 진지하게 물어보는 나. 순간적으로 나 정시언, 지금이 집에 돌아가는 중이었다는 걸 깜빡했구나.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흡사 날 정신 나간 여자 쳐다보듯 힐끔거린다. 허나 이미 체면 따위는 날려 보낸 지 오래, 난 계속 사진을 향해 말을 건다. “네 명이 몰려다니는 이유가... 대체 뭐니?” 단지 가출... 그 뿐? 그나저나 이거... 한 명은 여자니까 제낀다 치고라도... 남자 세 명... 닮아도 너무 닮았잖어... 그래, 이건 얼굴 그 자체가 닮았다기보다는 꾸민거야. 이미지, 스타일... 모두 의도적으로 똑같이 꾸미고 있어. 이 정도로 목숨 걸고 들키지 않으려는 이유가 뭐야... 반항, 가출... 아니면 더 큰 이유? 아니지, 달랑 나이 열 여덟 개 먹어놓고 그리 거창한 이유가 있을라구. 그 나이 땐 다 열정과 패기가 넘쳐흐르는 법이지. 더구나 경찰을 상대로 재밌는 술래잡기라니. 그 나이에 최고로 흥미로운 모험담이려니. 이 누님도 니들만할 땐 사고도 많이 치고, 놀기도 많이 놀았느니라. 머리를 긁적이며 담배를 하나 빼물자 익숙한 풍경이 눈 안에 들어왔다. 벌써 우리 아파트 도착했구나... 담배나 한 대 피우고 들어갈 겸 출입문에 슬쩍 기대어 섰다. 눈 앞에 펼쳐든 악동 네 명의 사진 위로 내가 뿜어낸 흐릿한 담배연기가 낀다. “니들이 알긴 아니?” 매캐한 향. “잘못 걸렸다... 이 누나가 화나면 무섭지.” 캬, 내가 생각해도 멋진 대사다. 영화 만들어도 되겠어. “무섭긴 개뿔. 가지가지한다, 정말.” 으헉!!! 그 때 내 뒤에서 들리는 앳된 여고생의 목소리. 놀란 내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나와 눈이 마주친 건... 캠코더를 들고 있는 새하얗고 도도한 인상을 지닌 교복차림의 내 동생 이온이. “너... 너...!!! 너 언제 왔냐!!!” “어쨌든 걸렸어, 정시언... 캠코더에 당신의 담배피는 모습이 그대로 담겼어. 아부지 퇴근하시면 같이 보자.“ 저 잔인한 년. “야, 오바야, 너...!!! 사랑스런 언니가 담배 한 대 피웠기로서니!!!” “언니가 알긴 아니?”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며 자신의 뒤를 우적우적 쫒는 내게 묻는 이온이. “뭘!!!?” “잘못 걸렸다. 이 동생이 화나면 무섭지.” ... 너 지금 내가 아까 멋지게 날린 그 대사 따라한 거 맞지? “야, 너 어쨌든 아부지한테 보이기만 해 봐. 나 담배 안 끊은 거 아부지한테 들키면 호적에서 내 이름 파일지도 몰라.“ “그럼 용돈!!!” “뭐?” “요즘 돈이 궁합니다. 용돈!!!” 어느 새 땡 하고 열린 엘리베이터 안에 탄 채 뜨악한 표정의 나를 향해 태연하게 중얼대는 그녀. “사랑하는 나의 동생 이온아... 우리는 피를 나눈 사랑하는 자매잖니.” “엘레베이터 안 타?” 저... 저... 도도한 표정 좀 보래요... “타!!! 탈거야!!!! 타긴 탈거야!!! 탈건데!!!! 그래, 지금 탔다!!!!” 횡설수설 난리치며 영악한 동생에게 꼼짝 못하는 불쌍한 나, 정시언. 우씨... 나도 돈 없는데 정말 미치겠네. “이온아......” “왜?” 삼면이 거울로 둘러싸인 엘리베이터 안. 나는 동생 얼굴만 힐끔힐끔 쳐다보는 중. 붕 뜨는 느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한 층 한 층 올라가면... 나의 절망적인 마음 또한 뭉클뭉클 커져만 간다. “너 정확히 3일전에는 내가 술마시고 늦게 들어온 걸로 꼬투리 잡아서 한달간 식사당번이랑 설거지 당번 나한테 미뤘잖니!!!“ “그래, 그러니까 이번엔 돈.” “너도 알잖아, 나 돈 없!!!” “아부지가 안 주셨어?” “응?” “불량소년 잡기로 했지? 근데 설마하니 아부지가 용돈 한 푼 안주셨을까.” 무서운 기집애. 저거 누구 닮은 거야? 돌아가신 우리 엄마도 저런 성격은 아니었다는데. “그럼 반띵 하는거다? 나 10만원 받았으니까 5만원씩...” “싫어, 8 대 2로.” “내가 8?” “아니, 내가 8!!!” 저게 칼만 안들었지, 완전 강도네, 강도. “카메라 장비도 사야하고... 돈 필요해, 나... 언니는 백수잖아.” “난 대학생이지!!!!” “그렇지, 막 나가는 날라리 대학생. 어제 학교 안 나간 것도 아부지한테 말 해?” “이 무서운 년!!! 너 대체 누굴 닮은 거냐!!! 그 빽빽한 유전자를 물려준 사람은 아부지냐, 엄마냐!!!!!?“ “난 모르지.” 아차, 내가 말을 잘못 꺼냈다... 차가운 냉기를 뿜어내는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변한 이온이는 나를 향해 싸늘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원래 엄마 살 파먹고 목숨건진 년들은 다 나 같은가 보지.” 때마침 12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땡- 소리와 함께 열리자 이온이는 재빨리 그 안에서 내려버린다. 아직도 저런건가, 이온이는... 저 죄책감. 엄마는 이온이를 낳다가 돌아가셨기에 그 애의 죄책감은 해가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온이는 태어나서 한 번도 자신의 생일을 챙긴 적이 없었다. 그 날이 바로 엄마의 제삿날이니까. 괜히 자기 때문에 아부지와 내가 엄마를 잊고 산다고 생각했달까. 우린 생각보다 그리 구질구질하게 사는 것도 아닌데. 엄마가 없어서 제일 힘든 건 이온이일텐데. 나는 엄마에 대한 추억이라도 있지, 자기는 엄마에 대한 기억도 없으면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한숨을 푸욱 내쉰 나는 먼저 그 안에서 내린 동생을 뒤따라 우리 집인 1207호에 섰고. 무표정으로 문을 따고 있는 동생을 향해 흰 봉투를 통째로 내밀었다. “뭐야?” “용돈 받은 거. 10만원.” “8 대 2로 나누자니까.” “그냥 너 다 가져. 대신 앞으로 그런 말 입 밖에 내지마.” 역시 나는 미치도록 멋진 인간이었다. “고마워, 언니...” 이온이도 감동한 듯 말끝을 흐렸으나... 그러나... 역시 10만원 돈은 그녀의 주머니 안으로 쏙 들어간다. 젠장, 그래도 만 원만 주지... 아니면 오천원이라도. “돈 아까워하지는 마. 다 우리 집 살림을 위해서니까. 앞으론 담배도 끊구.” 결국 나에게 윙크하며 집 안으로 뛰쳐들어간다. 그렇지, 이온이가 우리 집 돈줄을 꽉 잡고있다. (원래 내가 하다가 적자 되는 바람에 짤렸다...) 멋진 척 한 것을 후회하며 궁시렁 궁시렁...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있자... “그나저나 언니... 그 놈들 희한하지 않아?” “누구?” “불량청소년 넷.” “그래, 뭐... 대단하더라.” “묘하게 닮았어... 언니도 직접 마주치게 되면 알거야.” “난 니가 더 희한하다. 안 무섭디, 그 동영상 찍는 거?” “기술이지.” “기술?” “원래 어릴 적부터 내 전문이 파파라치 행각이잖아. 잘생긴 놈들 사진 몰래 찍어다 팬들한테 팔고 돈 받고. 그러다보면 요령이 생겨.“ “...엉?” “잘생긴 것들은 평균적으로 성격도 좋진 않고, 주변에 친구 많고. 노는 여자들도 붙지. 그러니까 중요한 건 장소, 시간 그리고 비밀. 그 놈 스케줄 파악하고 몰래 찍는거지.“ “.........오오...” “첫 번째 놈은 김형사님 연락받고 따라가서 대놓고 찍었어. 두 번째 놈은 정보통 내 친구한테 알아봐달라고 부탁하고 잠복해서 찍었고. 세 번째 여자는 몇 개월 전에 등교하다 돈 될까 해서 찍어뒀는데 우연적으로 맞아떨어진거지. 그 여자, 지하철 소매치기... 하면 딱 거론되는 인물이니까.“ “... 네 번째는... 어떻게 찍었어? 너 호스트빠 숨어들어갔어?” “날 좋아하는 어떤 오빠가 그 호스트빠 웨이터래. 몰래카메라 설치해달랬어. 그거 부탁하느라도 일부러 밥도 한 끼 먹어줬지.“ 내 동생이다만... 파파라치 행각이 결코 올바른 것도 아니다만... 저 프로정신은 배워야 하지 않을까... 예쁘고 도도한 외모, 넘치는 인기, 전교 10등 안에 드는 두뇌. 더불어 프로정신까지. “암튼 잘해봐, 언니. 찍다보니 나도 궁금하던데. 주동이 누구고 재벌이 누군지.” “....... 휴~우.....” “쉽진 않을거야. 네 명 단합이 대단하니까. 유치한 이유로 모인 건 아닐거야.” “.... 그래?” “그렇다고 옹호하는 건 아니야. 난 범죄는 증오하니까.” 니 파파라치도 엄밀히 따지면 범죄란다, 이온아. “정보통이라는 내 친구한테 들었어.” “뭘?” “그 놈들 별명이래. 네 명만 단합된 분위기. 다른 사람은 절대 그들의 세계에 끼워주지 않는 거 때문에. 별면 듣고보니 대단하더구만. 언니가 그거 파헤치려면 힘들거야.“ “별명이... 뭔데?” “출입금지.” “뭐?” “관계자 외 출입금지.” 관계자 외 출입금지 강휴인, 지환영, 백민서, 신비원 VS 완전태평 정시언 4. 예상치 못한 찬스 아침에 눈을 뜨니 오전 11시였다. 한 시간만 있으면 해가 중천에 뜨겠구만. 오늘도 학교수업은 두둥실, 물 건너 가버렸다. 어디보자, 이온이는 학교 갔을테고, 아부지도 일하러 나가셨겠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침대에서 어기적 어기적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우리 가족이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일. 거실에 걸린 화이트보드 확인하기. 그것은 서로 각자의 일에 바쁜 우리 가족의 단 하나밖에 없는 의사소통 수단이었다. 역시나 내게 고하는 두 마디가 써 있는 화이트보드. [저녁식사 준비해놔. 반찬은 콩나물 무침하고. 반찬 살 돈은 언니 책상 위에 (이온)] 빈틈없는 잔소리쟁이 이온이의 메모. 우리가족이 토끼도 아니고... 맨날 채소야... [시간날 때 잠시 들러라. 할 말 있다. (아부지)] 아부지는 무슨 말을 하시려고... 불량청소년들 때문인가. 일단 콩나물부터 산 다음에 아부지한테 가볼까. 대충 묶인 머리를 긁적대며 내 방으로 다시 들어가 책상을 살피면... 가지런히 놓인 돈 1360원... ... 짠순이... 망할년 정이온. 십원단위까지 챙겨주는거냐... 콩나물 1360원 어치를 사라는게냐... 적어도... 내가 너라면 말이다. 한 푼도 없는 언니를 위하여 몇 만원 정도 슬쩍 끼워넣어주는 센스를 발휘하겠다. 안 그래도 차비도 없어서 아부지 만나러 걸어가야 할 판국이구만. 어쩔 수 없이 돈을 고이 집어 주머니 안에 집어넣고, 한숨을 포옥 내쉬며 밖으로 나서는 나. 참고로 세수도 안했다. 회색 츄리닝에 삼선쓰레빠를 질질끌며 집 밖으로 나서고 있다. 이래뵈도 나의 이런 털털한 모습은 동네에 아주 잘 알려져있다고나 할까. 아주머니들에게는 순박한 동네처녀로, 아저씨들에게는 꾸밈없는 처자로, 이 근방 동생들에게는 닮지 말아야 할 대상으로, 청년들에게는 쌩까야 할 대상으로. 제길, 제대로 이미지 박힌 게 없구만. 나도 한 때는 다리 좀 떨고, 침 좀 뱉고, 머리도 2:8로다가 깻잎으로 쫙... 뭐, 다 철없을 때 이야기려니. 어쨌든 지금의 나는 이 동네의 슈퍼스타, 오호로이히!!! 요상시런 주문과 함게 몸 전체를 웨이브로 튕겨주며 흐물흐뭏 채소가게로 도착했다. “박씨아줌마!!! 여기 콩나물!!!” “아이고, 시언이 오랜만이다!!” “그러게 말입니다!! 철민이는 대학 갔습니까?” “지금 우리 철민이 삼수한다고 흉보는가?” 맞다, 철민이 삼수중이지. 맨날 까먹는다니까. “콩나물 얼마치 가져갈랑가!!?” 박씨 아줌마의 시선은 순식간에 날카롭게 변해버렸다. 그 상태에서 쫌생이처럼 1360원어치를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던가. 아니, 뭐... 솔직히 사실은... 나도 뭔가 남겨먹는 이익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1000원 어치요.” 오물오물. 역시 우리 동네 300원짜리 쮸쮸바 맛은 일품이야. 마음까지 푸짐하구나. 1000원어치 콩나물, 300원 쮸쮸바 사먹고, 60원의 이익을 얻었다. 이제 콩나물을 달랑달랑 든 채 아부지를 만나러 가볼까. 아, 맞다!! 그 전에 세탁소 가서 옷 찾아와야지. 머리를 긁적이며 꾸불꾸불한 골목길을 돌아 세탁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느때와는 달리 세탁소 앞에서 주인아저씨가 큰 한숨을 들이쉬며 담배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아저씨!! 일 안하세요?” “아, 시언이 왔냐...?” “예, 저 옷 찾으러 왔는데요. 돈은 선불로 냈구요... 아, 왜 그거 있잖아요. 대빵만한 하트박힌 티!! 거기 카레가루랑 김치통 엎어서 얼룩 제대로 진 거요.“ “에~휴...” 너무나 절박한 세탁소 아저씨의 한숨, 절망적인 표정. “왜 그러세요. 얼룩이 안지던가요? 괜찮아요, 어차피 집에서만 입을건데. 전에 그 상태보다 더 심하지만 않으면 돼요.“ “한 대 필라냐...?” 잿빛 계단턱에 쭈그려 앉아 내게 담배를 권하시는 아저씨. 본시 사양은 하지않는 성격인지라... 어제 담배 피지 말라던 이온이의 충고는 저 멀리로 던져버리고 아저씨 옆에 쭈그려앉았다. “팔자도 사납지...” “왜 그러세요, 아저씨.” 대수롭지 않게 아저씨가 건네 준 담배와 라이터를 받아 한모금 빨아 하늘을 향해 후욱 - 내뱉었다. “돈도 없고, 애들도 아직 어린데...” “근데 아줌마는 어디 가셨어요?” “시언아... 이제 어떡하냐...” “뭐가요?” “늦바람이 무섭다더니...” 고개를 푹 숙이는 아저씨. 이거, 이거... 쉽게 여길 일이 아닌 듯 한데. “왜... 왜 그러세요, 아저씨...” “이 여편네가!!” 아저씨 눈에서 쭉 흘러내리는 투명한 눈물줄기. “이 여편네가 바람나서 호스트빠에 댕긴다아!!” 잠시 멍해지는 기분. 뭐라고? 내 기억에 그토록 수수하셨던 모습의 아주머니가... 욕지거리를 지껄이며 애새끼들의 교복을 줄여주시던 그 투박한 손길의 소유자. 세탁소 아주머니가... 호스트빠에서 어리고 반반한 것들의 외모에 홀려 그 모습에 열광하고 계신단 말인가...? 가만... 호스트빠...? 설마.. 그 악동중의 한 명이 출근해대는 그 빠가 아닐까? “아저씨!!! 그 호스트빠... 이름이랑 위치 아세요?” “이름은 모르겄고... 위치는.... 아 왜!!!” “아줌마 잡아올게요!!!” “진짜로?” “콩나물을 걸고.” 1000원 어치 콩나물을 세탁소아저씨 눈앞에 들어보이며 비장한 표정으로 각오를 밝히고. “유명한 호스트빠라더만. 그 쪽 사내애들이 반반하다고 있는 돈, 없는 돈 털어 그 쪽으로 진출했지. 시내 나가서 말이여...“ 여자로서의 직감이랄까. 그래, 그 곳엔 그가 있을 것이다!!! 그 놈의 면상으로 볼 때 아줌마들끼리 입소문이 파다할 만 하고, 귀 얇은 세탁소 아주머니도 솔깃하여 그 판타스틱한 세계속에 몰입하셨으리라. 아저씨가 가르쳐주신 호스트빠 위치를 머릿속에 꼭꼭 담아두고, 아줌마를 잡아올 사명을 되새기며 그 곳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사실 진짜 목적은 악동들을 잡기 위한 사전조사지만. “그럼 아저씨!! 콩나물을 담보로 맡기고 떠나보겠습니다!!! 제 대신 콩나물을 지켜주세요!” 장렬하게 외치며 눈물을 머금고 나를 배웅하는 아저씨를 향해 빛나는 미소 한 방을 날렸다. 기다려라, 악동 애기야. 누나가 간다. 넘버 4 악동 신비원, 내가 간다. 5. 도도한 남자 오후 2시. 길치인 내가 헤매고 헤매며 도착한 이 곳. 호스트빠 <로맨스> 거, 참... 호스트빠 이름하고는. 가정파탄 내는 본거지인 주제에. 근데 이런 거 영업은 밤에 하지않나. 일단 어두울 때까지 이 앞에서 기다리며 잠복근무를 해야하나.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일단 호스트빠 문이라도 두드려보기로 결심했다. 숨 들이쉬고!!! 정의와 깡 빼면 시체인 이 정시언!! 간다!! 라고 다짐하며 무지막지하게 큰 로맨스의 불꺼진 간판을 향해 한 발자국 들여놓으려 할 때!!!! “수고하셨습니다!!!” 쏟아져나오는 남정네들. 허억!!! 너무 놀라서 나도 몰래 기둥 뒤에 숨어버렸다. 우아, 씨... 심장 터지는 줄 알았네. 어림잡아 열댓명... 모두 반반한 기생오래비 얼굴, 저것들 다 선수인가? 딱 보니까 지금 퇴근하나본데... “몸 존나 뻐근하네. 청소까지 우리를 시키고 지랄이야. 웨이터도 있고 청소부도 따로 있으면서.“ “불평 그만해. 그래도 니가 받은 여자는 돈 많은 여대생이었지. 그냥 꽉 물어.” “그 년 상판떼기 봐라. 애 셋은 낳은 아줌마더만.” 상스러운 말투, 저마다 근무 중 겪은 일에 대해 열변을 토하며 기지개를 켜고있다. 나는 서둘러 악동들의 사진을 펼쳐들고 신비원과 흡사한 인물을 찾고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어이, 신비원!!!” 누군가가 내가 찾은 그 이름의 인물을 우렁차게 불러제끼고!!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소외된 듯 홀로 걷던 저 멀리의 사람이 천천히 뒤돌아본다. 아, 맞다!! 맞다!!! 신비원이다!! 사진 속의 인물과 내 20미터 앞에 있는 인물을 미친 듯 비교하고 있던 찰나, “아이고, 우리 고고한 순백의 영혼아~ 너 어제 장사 잘되더라. 많이 불려다니더만. 얼마 벌었냐?“ 남자새끼들만 몰린 호빠라도 나름대로의 텃세는 존재하는 것 같았다. “.... 용건이 뭐야.” “너도 어차피 몸 파는 거면 우리랑 똑같은 새끼 아니야? 뭘 그렇게 튕겨? 같이 밑바닥까지 떨어진 인생인데, 니 새낀 뭐가 그리 잘났다고 비싸게 굴어!!?“ 세 명의 뺀질이 형제가 신비원 주위를 빙빙 에워싼다. 저건 뭘까? 단순히 질투인가? 아니면 그냥 시비 거는건가? “비켜, 가던 길 계속 가게.” “싸가지 없는 새끼. 야, 장난까냐? 마담형이 너 이뻐하는 건 알겠는데 씨발, 너 게이냐? 얼굴도 얄쌍하니, 너 남자한테 몸 팔지?“ “유치하게 놀지 마.” “유치? 하, 유치이?? 이 어린 노무 시키가 뭐래냐!!?? 십팔세 먹은 씨방새가 어따대고 나불거려? 앞으로 몇 시간 있다 또 출근해야 되는데 너 그전까지 우리 좀 보자? 고객들이 환장한다는 그 얼굴 좀 망가뜨려보자.“ 안 돼!!! 쟤도 일단 내 소관인데!!! 건들면 안돼!!! 고민하는 내가 안절부절하며 눈 깜빡할 그 사이였다. 퍽-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뺀질이 형제가 신비원의 턱주가리를 주먹으로 가격해버린 상황이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아우, 제기랄!!!” 그리고, 그 어떤 설명 불가능한 감정으로 인하여 내가 그들 앞에 나섰고... 정말 앗!!하고 소리칠 사이에 난 신비원의 손을 잡고 미친 듯 휘달리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야, 뭐야!!! 야~아!!!!” 멀리서 들려오는 고함소리. 터질듯한 심장박동과... 숨가쁘고 쉴 새없는 우리의 달리기. 잠깐... 근데 이건 첫눈에 반하는 순정만화 같은 게 아니잖아? 라는 나의 생각이 온 몸을 스윽 스치고 지나가는 동시에 우뚝 서버리는 신비원. 그리고 자신의 팔목을 붙잡고 있는 내 손을 휙 패대기 쳐버린다. “우억!!!” 요상한 고함소리를 내며 내가 몇걸음 떠밀려가자... 그 놈은 싸가지없는 표정으로 한 쪽 눈썹을 찍 찌그러뜨리며 위협적으로 묻는다. “넌 뭐야?” “아, 나는 그러니까 그게...” 솔직히 이 상황에서 [나는 강력반 정검사님의 딸로서 범죄심리학을 전공한다. 아부지의 부탁으로 너를 포함한 악동 네 명의 연구를 맡았으므로 일단 니들을 멀쩡한 상태에서 가만두고 지켜봐야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던가!! 그래, 그냥 코믹하고 자연스럽게 나가는거다, 자연스럽게. “일단 내가 니 생명의 은인인데... 고맙단 말부터 하는 게 순서 아니겠니?” 팔자에도 없는 웃음을 지어보이며 실실대자니... 놈이 나를 심히 노려보는 것이 나의 심기를 꿈틀꿈틀 건드렸다. “생명의 은인? 놀고있네. 난 원래 한 대 맞고 시작하는 놈이야. 오히려 너땜에 기분잡쳤어. 찌질이 새끼들한테 한 대 맞기만 하고 내빼는 꼴 됐잖아, 일진더럽게.“ 그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듣자마자... 내 머릿속에 가득차는 생각. 건방지다, 건방지다, 건방지다!! 짜증난다는 듯 입고있는 정장을 툭툭 털고 가려는 방향으로 몸을 비트는 신비원. 왠지 그를 놓쳐서는 안된다는 느낌이 나를 엄습해왔다. “야, 야아!!!” 내 말을 아랑곳않고 그저 걸어간다. “나 사실은 너한테 용건이 있어 온건데!!” 여전히 무시. 진짜 우습게 볼 놈이 아니구만. “우... 우리 엄마 어딨냐!!?”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 그리고 그제서야 뒤돌아보는 신비원. 6. 그들을 만나다 “우... 우리 엄마가!! 지, 집안 살림을 버려두고 호스트빠에 갔는데... 그게, 저기... 세탁소가 그러니까... 운영이 안돼서...“ 졸지에 세탁소 아줌마 딸이 되어버렸다. 그 아줌마 진짜 딸 초등학교 3학년인데. 우리 진짜 엄마는 저기 하늘에 계신데... 엄마, 미안. 더듬거리며 말을 잇는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터벅터벅 내 앞으로 걸어오며 중얼대는 그 자식. “하긴, 지금 이 시간에 츄리닝 입고 찾아오는 게 고객은 아닌 거 같더라니.” 뭐? 이 새끼 날 지금 고객으로 봤다는 건가. “근데 니네 엄마가 어딨는지 내가 어떻게 아냐?” “그럼... 어떡해. 호스트빠 가서 안오는데.” “완전 콩가루 집안이구만.” “우.. 울 아빠 울어. 엄마 어딨어?” “빠 안에서 자겠지. 거기서 찾아봐.” “... 으, 응?” “너도 아까 거기서 튀어나온 거 보면 로맨스가 호빠인 거 알았을 거 아냐. 경찰 단속 피해서 아무리 일반 술집처럼 만들어놨어도 그렇게 그런데인건 뻔하니까.“ 말빨에서 내가 지고있는 듯한 이 더러운 기분은 뭐지? “집안 파탄내기 싫으면 니네 엄마 빨리 데려가.” “.....” “그리고 우리가 다시 볼 일은 없겠지만 외간 남자 손몰 마구 잡지마. 누가 나 건드리는 거 질색이야. 아줌마들 장단 맞춰서 놀아주다보니까 이제 구역질밖에 안 나오니까.“ 저 말하는 싸가지하고는... “뭐, 그래도 정 날 건드려 봐야겠다면... 나 밤 12시가 출근이니까 그 때 그 시간에 맞춰오든가. 술은 같이 마셔주지. 엄마랑 딸이랑 둘이 다정하게 손잡고 가장파탄. 좋네.“ 이종격투기 배울걸. 배워서 저 놈을 엎어뜨릴걸. 괜히 쓰잘데기 없는 호신술만 배워가지구 공격도 못하고 백날 방어만 해야되잖어. “야, 야!! 우리 이럴 거 없이... 일단 통성명이나 하자!!” 뜬금없이 내뱉은 내 말에 감정없는 눈으로 나 내려다보더니 다시 가던길을 가는 그 놈. 나는 그 뒤를 따라 쉴 새 없이 조잘대며 걸어갔다. “내 이름은 정시언. 스물 두 살이다.” 내 나이를 듣고 멈칫거리는 놈. “너 아까 어핏 듣자하니 열 여덟이더만. 왜 나한테 반말까냐? 나보다 네 살이나 어린게.” “생각보단 나이많구만. 스무 살일줄 알았는데.” “근데 왜 누나라고 안 부르냐!!?” “너랑 나랑 다시 볼 사이도 아니거니와, 난 나이값 못하는 인간한테는 존대따위 안 써.” “그, 그게.” “너 나한테 반했냐?” 전혀 예상치 못한 놈의 미친 소리에 잠시 내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채 욕을 지껄여버렸다. “개소리 그만해.” 그러나, 나의 그러한 반응 또한 그의 계산 속에 들어가있었던 듯, 순식간에 차가운 표정으로 변한 놈은 무섭게 한 마디 꺼냈다. “그럼 따라오지마. 지금껀 경고야.” 움찔. 그 말을 듣는순간 몸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내가 겁먹고 있는건가? 내가? 내가? 이 천하의 정시언이? 나보다 네 살이나 어린 놈한테? 놈이 정녕 무서운 인간인걸까, 아니면 내 깡이 줄어든걸까. 내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새에 놈은 벌서 저 앞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가고있었다. 그러나 나의 망설임도 잠시, 눈 앞에 나타난 목표물을 두렵다는 이유로 헛되이 놓쳐버릴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나는 곧 멀어져가는 놈의 뒤를 따라 슬금슬금 쫒아가기 시작했다. 세 걸음 정도 걸어가다보니 놈이 매서운 눈으로 나를 홱 노려보았고.. 소심한 스물 두 살 나, 정시언은 무슨 코미디프로 찍는 것도 아니고 다시 멈춰서 딴청을 피고 먼산을 바라보는 포즈를 취해주었다. 그런 상황을 세 번쯤 반복, 화내기도 귀찮은 듯이 신비원은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않는 굳건한 상태로 아지트를 향해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적당히 빠르면서도... 적당히 여유롭게. 끝까지 와보라는 듯. 누가 이길지 한 번 보자는 듯. 근데 이거... 왜 이렇게 벌써 숨이 차는거냐... 은근히 오르막길인데... 저 놈이 일부러 꼬불꼬불하고 가파른 길만 골라가는겐가!! 그래도 군소리없이 따라가는거야. 그래, 난 미행중이니까. 저들의 아지트를 찾아내면 아부지도 나를 이뻐해주시겠지. 30분 정도 걸었을까. 훌쩍 지나버린 시간과 오늘따라 부쩍 흐린 날씨탓에 어두워졌다. 그렇게 당도한 놈들의 ‘집’은- 근데 이거.... 뭐야... 달동네.. 잖아, 완전히... 모서리가 다 헐어버린 좁은 계단 아랫집. 건드리면 무너질 것처럼 위태위태한 집 한 채. 쥐구멍에 거미줄, 바퀴벌레도... 심심하진 않겠구나... 그나저나 왜 이런데 사는거야? 도둑질에 소매치기, 업소에다, 의뢰받고 폭력도 행사해주면서.. 그 돈은 다 어쩌고 이런 집에서 사는거야? 한 명도 아니고 네 명이나 그런 부당한 일을 하면서 대체 무슨... 정말 알아갈수록 이해불가능한 놈들이다. 범죄의 목적이... 돈이 아닌가? 그럼 뭐지? 열 여덟살 주제에 무슨 거창한 생각을 하고있기에 이러는거야? “나 지금 대문 열건데.”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으로 인해 멍해진 나에게 30분만에 말을 건네는 신비원. “후회... 안하지?” “뭐?” 내가 따라온 게 아니라 지가 나를 끌고 온 듯. 우씨, 지금 협박하냐? 내가 투덜댈 약간의 시간조차 주지않고... 신비원은 녹슨 파란 대문을 덜컹대며 열어제꼈다. 7. 정체불명 - 그들의 존재목적 그리고 내 눈앞에 보인 건... 꽤 넓은 마당에 놓여진 목재평상. 그 위에 앉은 두 명의 남자와 서서 담배를 피우는 한 여자. 난 해냈다!!! 이 놈들을 찾았어!! 후딱 친해진 다음에 빨랑 재벌아들이랑 주동자 찾아내고 쉬자. “오우~ 시간초과!! 늦었네요, 우리 자기!!” 어제 놈들의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본 효과가 나타나는구나. 이온이가 찍은 영상도 도움이 컸고 말이야. 남자 세 명 다 닮았지만 구분이 간다, 누가 누군지. 방금 발랄하게 지껄인 게 넘버 원 도둑질쟁이 강휴인. 선하게 미소짓는다. 진짜 귀엽네. 애기같다, 애기. 영상에서 본 것처럼 진주세트와 돈을 들고 튀는 간큰 놈으로는 안 보여. “너 한 번 더 늦으면 뺀찌야. 민서 화났다.” 저 놈은 지환영. 조용하고 차분한 가운데 엉뚱함이 묻어나오는... 영상에서 보고 남자답고 터프할거라 예상했는데 은근히 기지배같다, 곱상한 게. “진짜 뭐야? 왜 이렇게 늦었어?” 그리고 백민서. 영상에서 본 것처럼 캡모자를 푹 눌러쓴 채 담배연기를 휘날리며 이쪽으로 터벅터벅 걸어온다. 어린 년이 보통이 아니게... 섹시하다. 정말 머릿속에 번쩍 드는 생각. 이 애는 보통이 아니야. “청소 시키더라. 늦을 수 밖에 없었어. 밤에 또 나가야되.” “그 가게 진짜 지랄하네. 아주 돈독올라 죽을라고 환장...” 신비원의 대답에 피식 웃으며 검은 가죽옷의 주름을 바로잡다가 멈칫하는 그녀. 드디어... 나를 발견했다. “.... 뭐야, 이건...?” 내가 물건도 아니고 말이지... 그래도 사람인데... ‘이 사람은 누구니?’ 정도로만 표현해줘도 난 너에게 무척 고마워했을 것이야. “우리 호빠 고객 딸이다.” 신비원은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은 말투로 대답했고 피곤한 듯 눈을 두어번 쓰윽 문지르고는 위의 자켓을 벗어 평상 위에 던져놓았다. 나를 아주 무존재적인 미생물 벌레로 생각하는 건가. 저 대수롭지 않은 태도를 보게. 그러나 그를 제외한 나머지 친구들은 모두 놀란 듯 했다. 특히 민서. 그녀는 인상을 찍 찌그러뜨리며 신비원에게 되물었다. “뭐?” “신경쓰지마.” “왜 데리고 와?” “냅두면 언젠간 집에 간다.” 신비원은... 말을 참 기분 나쁘게 하는 요상시런 재주를 지니고있다. “우와. 불쌍해. 엄마가 호빠에 다닌대. 엄마 찾으러 왔나봐.” “근데 왜 신비원을 따라왔대, 지 엄마 안 찾고..?” “바보야, 비원이한테 반한거지. 척 보면 모르냐?” 왠지 모를 냉전상태에서 저렇게 웃기지도 않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 강휴인과 지환영이었다. “아, 좀 닥치고. 일단 민서야, 이거 30만원.” 신비원은 안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봉투를 꺼내 민서에게 건넸고, 그녀는 쭉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마지못한 듯 무서운 시선을 거두고 그가 주는 봉투를 받아내었다. “됐다!!! 그럼 200만원 다 채운거다!!!” “근데 민서야, 우리 방값은 일단 내면 안돼? 두 달치 집세 밀렸어.” 오호라. 그래 뭔가 껀수 잡혔어!! 니들 대체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는거냐!! 나는 이때다 싶어 잽싸게 쭈그려 앉았고, 왕따처럼 손가락으로 마당의 모래에다가 이런저런 낙서를 해대는 척!! 그들의 이야기에 대해 전혀 신경쓰지 않는 척!! 하면서 그들을 향해 귀를 쫑긋 세웠다. 다행히도 그 아이들은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주었다. “안돼, 잊었어? 저번에도 달랑 100만원만 지원해놓고.” “전엔 일이 없었잖아.” 뭐야... 조폭들 뒷돈 대주나? “복지관 지원은 다음으로 미루자. 대충 궁금해하면서 우리 신분 들춰내려는 거 같애. 우리 알려자면 안되잖아.“ “이름없이 돕는 사람들 많을텐데 왜 그러는거야?” “상 주려는 모양이던데. ‘이 달의 천사’ 뭐 그런 명목으로.” “푸하하!! 그거 좋은데? 천사래!! 나 지금껏 살면서 악마새끼란 말만 들어봤는데!!” “농담 그만하고, 이번엔 고아원에 갖다줘야지. 그 중에 한 명이 병 걸렸다던데. 백혈병 수술하려면 우리 지원금은 턱없이 부족해.“ “일단 200만원 지원하고... 그 후에 상황을 봐서 더 지원을....” ......뭐? .....지금..... 뭐라구...? 복지관? 고아원...? 지원금...? 왜... 저 애들이... 대체 왜?“ 저 놈들은 나쁜애들이잖아. 소년원에 쳐넣어야할만큼 악독한 놈들이잖아. “일단 고아원 가보자!! 이렇게 시간 낭비하고 있지말고!!” 휴인이놈이 밝게 웃으며 그렇게 외쳤을 때... 놀란 토끼눈을 하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내 눈과... 아까부터 내가 못마땅한 듯 인상쓰고 있던 민서의 눈이 마주쳐버렸다. “아... 진짜 짜증나게...” 빨간 입술 사이로... 꽤 중성적인 그녀의 목소리가 짜증섞인 어투로 흘러나오고... “야, 니들 먼저 가고있어.” 감정없이 중얼댄 그녀의 말에 나머지 세 놈은 피식 웃으며 녹슨 대문을 통해 밖으로 쑥 나가버린다. 휴인이 놈은 하트모양을 날리며 몸을 이리저리 씰룩대는 댄스까지 선보이며 걸어갔다. “대충하고 나와.” 비원이 또한 귀찮은 듯 말을 던지고는 사라졌다. 이것들은 정녕 나를 물로 보는겐가... “접근하지 마.” 무서운 카리스마를 뿜어내던 민서의 첫마디. “응? 아니, 나는 그게 있잖어...” 예리한 년. 내가 일부러 접근한 걸 눈치챈건가. “하루종일 쫒아다닌 모양인데.” “아, 저기 나는... 엄마 찾으러...” “험한 꼴 당하기 전에 관 둬.” 반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지보다 언닌데. 내가 네 살이나 많은데. 반말이다. “우린 나름대로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거야. 후회없고 포기안해. 그러니가 꺼져.” 간뎅이 부은 년. 난 여기서 대체 어떤 모션을 취해주어야 하는가. “야, 난 무슨, 으하하!! 엄마 찾으러 왔다니까!! 헛소리하기는...” 스스로도 내 연기가 참으로 낯뜨겁다...고 생각했을 때... “건드리지 마.”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목소리로 중얼대는 그녀. “그 애들은 누가와도 흔들리지 않아. 포기해.” “..............” “그 애들은.” “....?” “내 말만 들어.” 설마........ 설마................ 민서가- 주동자.............???? 8. 불타오르다 “아부지!!!” 미친듯이 외치며 서울지검 검찰청 앞으로 난동부리듯 진입하는 나. 크하하, 분명 아부지도 나를 칭찬해주시겠지? 그 놈들의 집을 찾아냈으니 보너스로 살포시 용돈을 쥐어주실지도 몰라. “김형사님, 김형사님!! 아부지 어디계세요?” 드디어 그 애들을 만나고, 집을 찾아내고, 주동자의 윤곽이 서서히 민서처럼 밝혀진다는 기막힌 진실을 말씀드려야 한다. “아, 시언이 왔구나.” “아부지요.” “검사님 지금 잠시 나가셨는데. 커피 뽑으러.” “형사님 지금 제가 굉장한 걸 알았는데요.” “맞다, 검사님이 너한테 전해주라 그랬는데.” “아,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좀 있다 주시구요, 이건 진짜 최고의 사건!! 진짜 놀라운 건데요!!!“ 이온이가 시킨 콩나물 심부름을 하다말고 뛰쳐나온 보람이 있었지. 그러나 김형사님은 내 이야기를 건성으로 들으며 바지 주머니와 책상 위를 쉴 새없이 뒤적거리고 계셨다. “김형사님!!!” “응응, 그래, 듣고있어. 아, 내가 도대체 그걸 어디다 뒀더라? 어제 너한테 주려다가 잊은건데.“ 우씨, 그래, 뭐 그냥 이야기 해놓고보면 나에게 주의를 집중해주시겠지. “제가요, 콩나물 사고오는 길에 우연히 그 놈들을” “찾았다!!” “그러니까 그 놈들의 집을” “자, 이거 걔네들 주소!!” ............엥? 뭐라고? 지금 뭐라고? “뭐예요!!?” “이거 그 악동들이 사는 집 주소라고.” 나 지금껏 뭐한거야? 나 혼자 병신짓 한거야? 나 바보야? “이... 이걸 어떻게 알아요?” “이 정도야 쉽지. 애들이 굳이 숨기려 하지도 않고.” “아, 집을 아는데 왜 안 잡아가요!! 그냥 감옥에 쳐넣어요!!” “잡은 적은 많아. 다 놓쳐버려서 그렇지.” “아니, 이 무슨...” “시언아, 우리가 너에게 바란 건 애들을 잡아오라는 게 아니었어.” “예?” “주동자와 재벌 아들을 찾아낼 것. 우리가 너에게 시킨 건 바로 그거야. 재벌 아들을 소년원으로 보내버리면 큰일이라고 말했었잖아.“ ....맞다, 그렇지... 그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네 명의 얼굴이 머릿속에 핑글핑글 돌아간다. “이사가거라.” 바로 그 때 내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서둘러 뒤를 돌아보았다. 김이 폴폴 나는 커피를 들고계신 아부지가 내 눈에 비춰진다. “아부지...?” “그 놈들 옆집 비워놨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한 달만 거기서 살아라. 말하자면 숨지않는 잠복근무, 친구같은 감시체제다. 학교도 한 학기만 휴학해. 이미 다 처리해놨다.“ “아부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애들의 정체를 알아내다오.” “난 전문가도 아닌걸요. 꼭 그렇게까지 해야돼요?” “미안하다, 시언아...” 내가 너무 우습게 봤군. 대한민국 검찰인데. 그래, 집도 알고, 잡을 수도 있고. 그러나 단 하나. 존재이유와 정체를 모르는거지. 무슨 짓을 해도 입을 열지 않을 놈들이니까 친구처럼, 옆집 누나처럼 행동해서 그걸 알아내라는 소리겠지. “근데요, 아부지... 그 애들요, 그리 나쁜 것 같지는 않던데요.” “말도 안되는 소리.” “아니, 돈을요... 고아원이랑... 그런 데 지원을.. 그러니까, 돈을 막 벌면서도 왜 그리 허름한 집에....“ “범죄는 범죄다.” “......” “.... 그 놈들한테 그 어떤 사정이 있다 하더라도.” 감상적으로 행동하지 말자, 정시언. 이성적으로 행동해. 어쨌든 그 애들은 범죄자야. 그래, 그렇고말고. “알았어요. 그럼 되도록 빨리 집 챙겨서 그 애들 옆집으로.” “이미 짐 옮겨놨어, 시언아.” “뭐라구요, 김형사님?” “검사님이 명령하셔서 우리가 니 방에 있는 물건 다 그 쪽으로 옮기고 있어. 지금쯤 정리까지 다 끝났겠다.“ ....... 누구 맘대로!!!! “아부지!! 이건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흠... 그럼 난 이만 회의에 들어가봐야...” 쫒아내는거야, 이건... 내가 밥도 많이 먹고, 늦게 들어온다고 이제는 기어이 집에서 쫒아내는거라구. 이렇게 교묘하게 난 버려지는거야. “김형사님!!!” “아... 나, 나도 회의에 같이....” 말 돌리지 말라구요오.... “시, 시언아. 그래도 우리가 집세도 내고, 너 살기좋게 신경써서...” 그딴거 하나도 고맙지 않다구요... “아부지가 이러실 줄은 몰랐어요.” 평소에는 하지않는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아부지께 말했다. “시언아....” “결국엔 저를 이용하시려는 거죠. 잘 알았어요.” 아부진 알고계신거다. 궁지에 몰려야만 불타오르는 게 ‘나’란 인간인 것을. 난 고3때도 수능보기 2개월 전에만 미친듯이 공부했다. 그래, 정말 미친듯이. 밥도 거의 안 먹고, 잠도 거의 안 자고. 그래서 수능친 후에 집에 돌아와서는 저녁을 다섯 끼 먹고 사흘간 잠만 잤다. 내가 그토록 집념을 가지고 무언가를 해본 것은 그 때 단 한 번 뿐이지만 아부지는 그런 내 성격을 알고계셨다. 왜냐면- 이런 내 성격은... 울 엄마를 꼭 빼닮은 것이기에. 집에서 쫒겨나면서까지 이뤄내야 하는 일. 그러면 그것은 아주 긴급하고도... 절대적인 일. “축하드려요, 아부지.” “응?” “불타올랐어요.”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란거지. 간단한 마음으로 달려들어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일. 고3때 이후로 처음이다. 이렇게 불타오를만큼 내 도전과 승부욕을 자극하는 건. “저 불타오른 거 같아요. 아주 재밌겠는데요.” “그래, 니 성격을 이용한 건 나중에 사례할테니... 그 기세로 열심히 할 수 있겠지? 이제 그 일의 필요성과 사건을 해결할 의지도 생긴 건 같으니.“ 피식 웃으며 아부지가 말씀하신다. “당연하죠. 기대하세요.” “내가 그런 면에 반했단다.” “...네?” “니 엄마의 그런 면이 좋았지.” 평소에 엄마이야기를 꺼려하시는 아부지의 한마디에 기분이 좋아져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한 달 후에 뵈요!!” 9. 잔인하게도 굳센 각오를 다시 한 번 다지며 돌아섰을 때, 김반장님의 다급한 목소리가 내 발목을 쑤욱 휘감았다. “아, 참!! 맞다!! 시언아!!” “예?” “새롭게 알아낸 사실이 하나있어.” “... 뭔데요...?” “재벌아들 말이야, 왼쪽이마에 상처가 있대. 어릴 적에 제주도에 놀러가서 말타다가 떨어졌다나. 여덟바늘 정도 꿰맸기 때문에 상처가 잘 보일거라고. 그 놈 맡았던 보모한테 들었다.“ 에? 뭐야? 그럼 왼쪽이마에 상처만 찾아내면 재벌아들 찾기는 식은 죽 먹기잖아? “오케이!! 감사해요, 김형사님!!” 씨익 웃은 후 다시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 순간, 마주친 것이다.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그와 맞딱뜨렸다. 정말... 잔인하게도. 그것도 이렇게나 추한 상태를 한 채. “정선배님!! 저 예전 사건 파일 좀... 어? 시언아...” 날 발견해내고 급변하는 놀라운 음색, 지겹도록 익숙한 그 음색. “아, 이검사. 그러게 자기 물건 간수도 못하나.” 그러나 자신에게 핀잔주는 우리 아부지의 말에 금세 나에게 시선을 거두고 머리를 긁적인다. 그래, 아무도 모른다. 우리 아부지조차도. 하늘 아래 그와 나밖에 모르는 사실. 아부지의 후배. 서른 살 이검사. 1년간 사귀었던 나의 연인 이진한. “시언이 오랜만이네요.” 하, 그의 말에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터져나온다. 오랜만? 불과 두 달 전에 일방적으로 나한테 이별을 선언해놓고? 연락도 안 받고, 집에 찾아가도 만나주지 않았으면서 뻔뻔하게 오랜만? 그의 말에 아부지는 커피를 원샷하며 무심하게 대답하신다. “응, 시언이가 검찰청 들른 게 오랜만이니까.” “근데 무슨 일이예요, 시언이가?” “아, 그러고보니 시언이가 할 일이 자네하고도 연관 되겠구만. 자네가 ITS제일그룹 회장부부 사망사건이랑 비리조사 맡았지?“ “예...” “거기 후계자 아들내미 시언이가 찾아내기로 했네.” “아, 그래요? 앞으로 서로 도움 많이 되겠네요. 잘 부탁한다, 시언아.” 밝게 웃으며 내게 손을 건넨다. 씨발, 어떻게 엮여도 이렇게 엮이고 지랄이야. “아부지. 저 그럼 이만 가볼게요.” 악수해주지 않은 채 그의 손을 무안하게 내버려두며 돌아서는데... “아, 같이 나가자. 나랑 김형사도 회의실 가는 중이니까.” 커피를 다 마신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며 말씀하시는 아부지. 그리하여 아부지, 김형사님, 이검사, 나는 나란히 복도를 걷게 되었으니. 원래 과묵하신 우리 아부지와 침묵을 지키는 나 덕분에 수다스러운 김형사님은 어색하신지 이검사에게 말을 건넨다. “에, 맞다!! 이검사님 결혼은 언제 하십니까?” “아, 뭘요... 쑥스럽게.” “약혼식 때 보니까 약혼녀 정말 이쁘던데요.” 그 순간 우뚝, 발목이 무거운 족쇄에 걸린 듯 걸음이 멈춰버렸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거야? “방금 그거... 무슨... 말이예요?” 억지웃음을 띄며 김형사님께 물어보면... “아, 시언이는 모르는구나. 이검사 약혼했어, 얼마전에. 서른인데 곧바로 결혼하지 않구서 왠 약혼이야~“ 약혼? 나랑 헤어진 뒤 두 달도 안되서... 약혼이라고? “회의시간 늦겠네, 김형사. 우린 빨리 들어가지. 시언아, 너는 오늘 바로 새로 구한 집에 가서 수고 좀 해줘야겠다. 대신 연락 자주하고, 응?“ “...예...”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로 간신히 대답을 끄집어내는 동시에 아부지와 김형사님은 회의실 문을 쾅 닫고 사라져버리고.... 나는 옆에 있는 이검사를 무시하고 바르게 계단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 때!!! “시언아, 잠시만!!” 묶어버린다, 나를... 꼼짝도 할 수 없도록. “머리... 잘랐구나... 전엔 머리 굉장히 길었었는데.” 뻔뻔해. 내가 지랑 헤어진 후 슬픔에 못 이겨서 머리 자른 거. 생각만 조금하면 알 수 있을텐데. 숏커트 쳐버린 내 머리를 굉장히 빨리 길어서 이미 마구 뻗친 단발의 모습을 하고있었다. 야한 생각 별로 안했는데 더럽게 빨리 긴다니까. “........ 약혼... 했어요?” “시언아....” “거짓말이었어요? 사랑... 한다고 했잖아요... 나를요.” “나가서 이야기하자.” 울컥, 치솟는 감정. 샘솟는 눈물. 그러나 이를 악물고 버틴다. 울지마, 울지마, 정시언. 나를 보는 눈은 아직 저렇게 다정한데... 멍하니 서있는 나를 보며 이검사... 아니, 진한오빠는 한숨을 내쉬더니 내 팔을 잡아 밖으로 이끌고 나간다. 제기랄, 어둑한 바깥날씨는 너무나도 평화롭고 평온했다. 선선한 바깥바람, 그 속에 섞여오는 풀내음. 모두 옛날 그대로였지만 그와 함께했던 시절에 느껴왔던 행복감은 이제 내 것이 아니었다. “이제... 말해봐요.” “나한테... 너는 너무 어려, 시언아.” 8살의 나이차이. 그랬다. 우린 평범한 커플들보다는 나이차가 많은 편이었다. “거짓이었어요...? 나랑 사귄 거. 어떻게 오빠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요?” 진부해, 내 질문 소름 끼칠 정도로 진부하다. 그는 익숙하게 속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빼물었다. “사랑했어, 근데 사랑만 갖고 세상 사는 거 아니잖아. 그녀도 나를 원했어. 남들 보기에도 이상적인 커플로 보여지고 있고. 너랑 나는 이미 끝난 사이잖아.“ 하, 코웃음치면서 나 또한 주머니에서 담배를 빼물었다. 씨발, 꽁쳐둔 마지막 한 개빈데. “잔인하다, 당신. 죽여버리고 싶어.” 드디어 반말이 튀어나왔다. 사귈 때 그러했던 것처럼. 계속 존대 써주려고 해도... 참아지지 않는다. “넌 씩씩하니까 괜찮을거야, 시언아. 앞으로 자주 볼텐데 우리 그냥 편한 사이로 돌아가자. 지난 두 달 간은 약혼사실 감추려고 너 피한거야, 상처 많이 받을까봐.“ 적어도 난 결혼까지 생각한 사람이었다. 그의 온기, 난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데. 이것 봐, 그는 더 이상... 담배피고 있는 나를 말려주지 않아. “현실을 보는 남자가 되어서... 미안하다, 시언아.” 곧 그는 등을 보이며 건물 안으로 모습을 감춰 사라져버린다. 그제서야 참았던 내 눈물이 터져나왔다. 나는 악에 받힌 듯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끄집어내어 소리친다. “어떤 여자야!!?” 작은 한숨소리와 함께 내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나보다 세 살 어린 여자. 집안이 좋은 여자. 직업이 디자이너인 여자. 그리고.... 너와는 다른 여자.“ “.............. 좆같애......” “이러니까 니가 어린거야. 그럼 조심히 들어가라.” 돌아올거라고 생각했다. 일방적인 통보는 헤어짐이 아닐거라고. 그러나... 지금 난.... 완벽한 혼자다. 10. 침입이라는 이름의 희생 터덜터덜... 힘빠진 걸음걸이로 그 외진 달동네로 향했다. 앞으로 내가 살아야 할 집으로. 사랑에 배신 당해놓고도 내가 하소연할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더 잔인한 홀로서기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 익히 한 번 본 적이 있는 녹슨 파란 대문 앞에 당도했다. 지친 내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거칠게 대문을 열어제꼈다. 문은 쉽게 열렸으나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휑한 마당의 목재평상과 방문이 모두 열려져있는 집안꼴은 녀석들이 문단속 따위 생각지않고 살아간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하긴, 훔쳐갈 것도 없겠구만. 낡았으나 큰 집이었다. 두 채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숫자 1자처럼 생긴 구조 한 채와, 놈들이 거주하는 것으로 예상되는 기역(ㄱ)자의 집 한 채였다. 앞서 말했듯 그 두 채의 집 앞에는 목재평상이 떡하니 놓여있고, 유치원생 애새끼들 너댓명이 뛰어놀만한 넉넉한 마당이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집의 겉모습과는 달리 안은 튼실해보였다. 은근히 괜찮은 집인데... 근데... 저 녹슨 대문은 좀 어떻게 안되겠니? 오늘 여기 두 번째다. 그러나 아까와는 다른 느낌. 처음 왔을 땐 문제아들의 거주지로 이 집을 찾아왔고, 지금은... 앞으로 한 달동안 지내야 할 나의 보금자리로서 이 집과 대면하고있다. 그래서 집이 더 새롭게, 더 자세하게 보여지고있다. 씨발, 난 저 숫자 1자 구조의 집은 부엌 겸 화장실인 줄 알았는데. 근데 내가 검찰청에 쪼르르 달려가던 사이에 내 방에 있던 짐을 이리로 다 옮겼다이거지. 재빠르게도 하셔라. 그렇게 급히 해결할 일인가, 이게. 한숨밖에 안나오는 나의 집을 향해 인상 한 번 써주고 안으로 들어갔다. “에그머니나!!” “으헉!! 아줌마 누구세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나를 보고 기겁하는 아주머니, 그 아주머니를 보고 더 놀란 나. “아이고, 아가씨가 이 집에 세 들어온다는 사람이구만. 정시언..... 맞나?” “예... 그런데요....” “내가 집주인이네. 오늘 사람 들어온다길래 걸레질 좀 하고있었는디 뭘 그리 벌컥 들어오나그래.“ 많이 놀라셨는지 가슴을 쓸어내리는 아주머니. 나는 멋쩍게 웃으며 방을 스윽 한 번 둘러보았다. 음, 제법인데. 원룸 형식이구나. 부엌 겸 거실, 화장실도 현관 옆에 하나 딸려있고. 이거 내 생각보다 일이 잘 되어가는지도 모르겠다. 독립은... 바로 나의 꿈이었으므로. 비록 침대는 없지만 냉장고, 티비, 옷장, 노트북 컴퓨터는 갖춰져있었다. 옮겨진 박스는 총 세 개. 하나는 옷가지들, 하나는 이불과 베개, 나머지 하나는 생활용품. “내 이렇게 짐 빨리 옮기는 사람은 처음보네.” “그러게요, 좀 빠르긴 했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갑자기 집 세들어산다길래 알았다고 했더니만 아저씨들 7명이 짐을 뚝딱 옮기는데, 아 글쎄, 여기 안 비어있으면 어쩔 뻔 했나.“ 또 형사아저씨들 시켜서 짐꾼으로 쓰셨구만... 아부지도 참... “아, 그럼 아줌마는... 어디 사시는거죠?” “아, 나는 이 앞집이여. 여기는 세만 주고있고.” “그래요? 아, 여기 집세는 이미 냈죠? 그 아저씨들이.” “응응!! 아, 그려, 깜빡 잊을 뻔 했네. 늙으니까 건망증이 심해서... 이거 그 아저씨들이 생활비라고 주라더구만.“ ...이 아주머니 위험한 분일세. 내 생활비를 거머쥐어놓고 잊을 뻔 했다니. “감사합니다, 맡아주셔서.” 홱 낚아채다시피 아주머니의 손아귀에서 돈봉투를 거머쥐고 돈을 세기 시작했다. 아주머니는 나의 그런 모습을 보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기 아가씨, 내가 궁금해서 그러는데...” “네, 뭐요?” 10만원 짜리 수표가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60만원. “아가씨 조폭인가?” 뜬금없는 아주머니의 물음에 난 경악했다. “제가 어딜봐서요!!?” “아니, 급하게 이사오는 것도 그렇고, 건장한 아저씨들이 짐 옮기니...” 생각해보니 꽤 신빙성있는 소리였다. 이 상황을 모르는 사람 앞에서는 이상하게 보였으리라. “그런 거 아니예요, 걱정마세요.” “그럼 다행이네. 하이고~ 나는 범죄잔 줄 알고.” 허나 아직 안심하시면 아니됩니다, 아주머니. 건너편 기역(ㄱ)구조 집에 사는 애새끼들은 범죄자입죠. “아, 그리고 저기에는 학생들 네 명이 사니까 알아두고.” 마침 그들의 이야기를 꺼내는 아주머니. 좋아, 때는 이 때다. 그들에 대한 정보를 캐내보자. “학생들이요?” “응, 학교는 안 다니는 모양인데 그냥 어리니까 내가 학생들이라고 불러. 다들 아르바이트 다니느라 밤늦게 들어오고 그러니까 그리 신경은 쓰지말고. 남학생 세 명이 여자 하나 총 네 명이 사는데 두명은 성격이 서글서글하고, 나머지 두명은 쫌 까칠하네. 시언씨는 대학생이라고 들었는데, 여기 사는 애들은 열여덟살 정도 되었을거야. 지금 사내놈들 한참 혈기왕성할 때니까 어리다구 얕보지말구 시언씨 문단속 잘하고 자. 으이구. 하나있는 기지배는 얼마나 발랑 까졌는지 남자 세 명하고 같이 살고... 다행히 저 쪽에는 방이 하나 있어서 잠은 따로 자는 것 같아 안심이야.“ 수다스런 아주머니는 시원시원하게 이야기를 해주셨다. 굳이 내가 부탁하지 않아도 혼자 알아서 열정적으로. 그나저나 고놈들 참 뻔한 것들일세. 분명히 서글서글한 건 강휴인과 지환영, 까칠한 건 백민서와 신비원이렸다. “어떤 애들인데 지들끼리 모여산대요?” “뭐, 하는 꼴보면 고아들 같기도 한데... 그냥 가출청소년들 아니겄는가? 하긴, 근데 가출청소년들이라 하기엔 돈을 열심히 벌러 댕기긴 하네. 잘 모르겄네. 밤에들 들어오니까 이야기할 기회도 없어서.“ 에이씨... 밤늦게 들어오면 나는 이제 수사를 위해 야행성이 되어야 하는가? 맞다, 난 원래 야행성이지? 허허. “아이고, 그러고보니!!!” “예? 왜 그러십니까, 아줌마!!” “저 쪽 학생들이 두 달이나 집세를 안냈네!!! 에라이, 돈 벌어서 어디다 쓰는게야!! 안되겄다, 내 오늘 결판을 봐서 쫒아내든가 해야지. 그놈들 쫒겨나면 아가씨가 저 건너편 쓸랑가? 더 넓은데 10만원 더 받긴하네.“ 뭐라? 그 놈들을 쫒아내? 안 돼!! 그럼 내가 이 곳으로 이사온 목적이 사라진다. “아줌마!! 쫒아내는 건... 너무 야박하지 않을까요... 하하하.” 팔자에도 없게 실실 웃고 있다니. 제기랄. 오늘은 실연의 아픔에 좀 젖어볼랬더니만. “아니네, 내 오늘 이것들을 정말....” 씨발, 거 문제아 새끼들 오늘 번 돈 모아서 고아원에 기부한댔는데. 내가 아까 들었는데. 200만원 기부한다고. 개새끼들, 집세나 빨리 내지. 무슨 정의의 사도 흉내내냐고, 왜 집세 안내고 지랄이야. 가만보자, 여기 내가 사는 곳이 한 달에 20만원. 그 애들이 사는 건너편은 10만원 더 받는다니까 30만원. 제기랄, 어쩔 수 없잖아. 방법이 없어, 정시언. 지금 내 손에 들린 돈, 60만원. 그 애들의 밀린 집세 두 달치 60만원. 눈물날 정도로 딱 들어맞는다. 나는 고래고래 소리치며 허공에 대고 성질내는 아주머니를 향해 말했다. “저기요....” “왜 그러는가, 아가씨?” “이거... 60만원... 그 애들 집세로 좀...” “엥....? 아니, 아가씨가 왜....” “그냥 이야기 듣고보니까... 애들인데, 딱해서요.” 씨발, 내 생활비. 제기랄. 정말 지금 내가 웃는게 웃는 게 아니구만. “하이고, 아가씨 정말 착하네 그려.” 아주머니는 기어이 내 손에 꽉 들린 돈을 빼앗아갔다. 난 잊지 못할 것이다. 해맑은 아주머니의 미소를. 그들을 살리기 위해, 나는 오늘 빈털터리가 되었다. 11. 지독한 밤의 숨결 방 안은 주인 아주머니가 대충 다 청소해주셨으므로 나는 간단한 짐정리만 하면 되었다. 세 박스뿐인 짐은 금방 정리되었고... 나는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던 오늘 하루를 돌이키며 이불을 펴고 누웠다. 아, 이온이가 저녁 콩나물 무침 하랬는데. 아, 콩나물 세탁소 아저씨한테 담보로 맡기고 왔는데. 아부지한테도 잘 도착했다고 연락 드려야 되는데. 근데.... 내 휴대폰... 아씨, 티비 위에 있는데. 퍼질러 누워있는 이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은 상당한 짜증과 귀찮음을 유발하느니. ...그냥 내일 연락하자. 세탁소 아줌마는... 가정으로 돌아가셨을까...? 걱정이다. 휴, 한숨을 내쉬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내 방 천장과는 달라. 내 방 천장은 하얀색인데... 여기도 본래는 하얀 색이었던 듯 싶지만... 때가 타서 회색이다. 그것도 진회색. 아, 드러워. 그 뿐인가? 내 방은 바닥도 목재였는데... 여기 바닥은 샛노란 장판. 침대도 없고. 더 중요한 건... 생활비가 없다는 것. 당장의 밥값도 없다. 아악!! 나 이제 어떡해!! 아부지가 일부러 딸을 생각해서 없는 지원금에다가 보태고 보태서 생활비 60만원을 마련한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는 나다. 이런 상황에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면, 상황이야 어쨌든 좋아지겠지만 아부지께 그런 부담따위 안겨드리고 싶지 않았다. 이거, 이거... 아르바이트라도 해야겠는데... 막막해.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모르겠... 그 순간 그의 얼굴이 생각나버렸다. 이진한... 이미 약혼을 했으니... 또 눈 깜빡할 새에 결혼까지 하겠지. 결혼은 현실이라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생각하기 싫은데. 내 자신이 너무 비참햐져서. 너무 초라해져서 생각하기조차 싫은데. 이거봐, 벌써 베개가 젖었어. “안울어... 울지마, 정시언... 쪽팔려, 울지마.” 다른 생각을 하기위해 머리맡에 놓인 리모컨을 들어 티비를 켰다. 8시 뉴스가 한창이구나. 나 뉴스에 흥미없는데. 승질내며 다시 티비를 꺼버리고는 엎드려 누웠다. 제기랄, 머릿속이 이진한 그 놈으로 꽉 차버렸어. 또 눈물이 한 방울 또르륵 굴러내렸다. 거, 참 미치겠네. 나 어릴때도 눈물없어서 장군감이란 소리 들었는데. 엄마 돌아가셨을 때도 아부지가 안쓰러워서, 아부지가 불쌍해서... 그 어린 다섯 살 나이에도 딱 일주일 울고 말았는데. 대신 그 일주일은 너무 울어서 탈진상태까지 갔지. 일주일 지나고나서는 아부지 마음 아플가봐 안 울고... 엄마 대신 살린 이온이가 꼼지락거리는 게 마냥 신기해서 활짝 웃어보이기도 했는데. 이온이가 세 살 때 그 애 납치되었을때도... 딱 3일 울고나서는 이온이 살리러간다고 식칼이랑 후라이팬 들고 납치범 찾아나서기도했지. 두 시간만에 주변 어른들에게 잡혀서 돌아오긴 했다만. 휴, 이 놈의 불타오르는 성격은 이렇게도 애를 먹이는구만. 이진한.... 넌 얼만큼이면 되겠니. 얼만큼 울어야 내 안에서 자리 비워줄거니. 3일? 일주일? ..... 한 달은 아니지? 너무 길어... 씨발, 돌아올거라 생각해서 두 달 전에도 안 울었어. 난 오빠가, 그냥 화났을 뿐이라고 생각해서.... 그 때 사소한 걸로 다퉜는데, 우린 한 번 삐지면 원래 오래 갔으니까. 헤어지자 그래놓고도 결국 다시 만나는 걸 반복해왔으니까. 물론 그 날 헤어지자는 말이 평소보다 차가웠지만. 한 달이 지나도 연락 한 번 없어서 의아했지만. 내가 먼저 굽히고 찾아갔는데도 만나주지않아서 이상했지만. 곧 있으면 우리 500일 되는 날이니까. 그 때 놀래켜주려고,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라고... 그러니까 난 많이 화난 척하다가 못 이긴 척 적당히 넘어가줘야겠다 라고.... 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근데... 약혼이라니... 약혼. 눈치챘어야 했어. 그 날 우리가 다툰 이유. 오빠의 짜증 때문이었어. 이유없는 짜증이 늘어가서. 일이 힘든가 생각해서 다 받아줬는데. 그게 다 의도된 거였어. 오빤 그저 헤어질 핑계를 만들고 싶었던거야. 그 여자랑 약혼해야 되니까 나랑 빨리 헤어져야 했던거야. .... 날 사랑하긴 한 거야...? 1년 넘게 오빠를 만났어. 씨발, 이번엔 쉽게 진정이 안돼. 1년은 울게 될 것 같애. 여기가 우리집이었으면, 눈치빠른 이온이 때문에 조심해서 울어야 되는데... 근데 나 혼자거든. 이제 오빠도 없으니까... 나 이제 진짜 혼자거든. 함께 한 세월을... 우리 함께 했던 추억을, 기억을, 습관을.... 다 버리고 지우고 잊어야 하는데... 일주일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야. 1년은 족히 갈 것 같은데.... 오빠 내가 부탁할테니까.... 제발 몇 달로 끝내주라. “울기 싫은데.... 아, 제발.... 정시언 울지마.” 세뇌시키자. 내 자신에게..... 울지마, 울지마.... 그러나 곧 울컥 올라오는 울음 때문에 난 내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그의 흔적이 너무 많아 짜증이 났다. 아직 그의 번호가 1번으로 저장되어있는 내 핸드폰도, 그가 헤어지자고 해서 두 달전에 홧김에 빼버린 커플링도, 지금 입고있는 커플 잠옷도, 컴퓨터에 저장된 우리의 수많은 사진도. “..........오빠........ 진한오빠....” 울지 않겠다던 내 다짐이... 한순간에 무너져간다. 그렇게 울고, 울고, 울다 지쳐 난 잠들어버렸다. “누군데 우리 집세를 대신 내준거야?” “되게 착한 여잔가보다!! 주인아줌마 밀린 집세 받아서 기분 엄청 좋은거 같더라, 그치??” “다행이지, 뭐. 난 대문앞에 주인아줌마 서있길래 이제 쫒겨나는 줄 알았는데 아줌마가 새로 이사온 여자가 집세 대신 내줬다고, 그 여자한테 감사하라 그래서 완전 놀랐어.“ “그래도 맘에 안들어. 다른 사람 같이 지내면 불편해.” “우와, 신비원 완전 싸가지없다!! 고맙게 생각해, 임마!!! 정 불편하면 넌 집 안에서 나오지말고 처박혀있든가!!“ “씨발, 그럼 담배 어디서 피라고.” “그래, 뭐니뭐니해도 담배는 여기 평상 위에서 피워야 돼. 방 안에서 피면 눅눅해서 냄새 완전 쩔어!!“ “.........제기랄....” “그럼 비원아, 아르바이트 시간 더 늘려. 그럼 불편할 일 없을걸.” “호스트빠 역겨워, 개새끼야. 너나 좀 돈 벌어와. 요즘 강휴인 수입 제일 딸려.” “아아, 잔소리 그만!! 근데 옆집여자 누군지 궁금하다!! 야, 우리 고맙다고 인사해야 되는 거 아냐? 문 두드려 볼까?“ “하지마, 강휴인!! 지금 시간을 봐, 새벽 두 신데 당연히 잘걸,” “후잉, 얼굴 보고픈데.” 잠결에 놈들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난 몽롱한 상태였기에 계속 잠을 청했다. 온통 눈물로 젖어버린 축축한 뺨이 느껴지는 이 현실과 달리 꿈 속에서는 진한오빠가 나를 향해 웃어주고 있었으므로. 12. 숨겨진 진실 목이 말라 잠에서 깼다. 반짝... 아니, 게슴츠레 눈을 떠 냉장고까지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렇다, 일어나서 냉장고까지 걸어가는 것조차 나에게는 귀찮았던 것이다. 생수 한 병을 따서 벌컥벌컥 다 들이켜버렸다. 아싸라뵤. 난 진정 물먹는 하마의 후예인가. 찬 물 덕분에 정신이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니 주변이 어두운 것이 아직 새벽인 모양이었다. 아씨, 잠 다 깼는데... 티비나 볼까. 아무렇게나 던져둔 리모컨을 찾아 전원버튼을 띡 눌렀는데 그런데... 8시 뉴스가 시작하고 있다. 잠시만... 나 자기전에 8시 뉴스가 진행중이었는데... 그래서 그냥 끄고 잔 건데, 지금 어떻게 뉴스가 시작... ...설마... 나... 하루동안 잠만 잔거야? 서둘러 핸드폰을 바라보니 날짜는 분명 내가 하루종일 잤다는 사실을 명백히 드러내주고 있었다. 부재중 전화 23통, 문자 5개. 이것은 아부지와 이온이가 내 걱정을 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문자 내용을 뻔한 것이었다. [아부지한테 들었다. 언니 한 달간 잠복근무한다며? 그동안 못보겠네.] [지금 뭐해? 아부지가 전화하래. 잘 도착했어?] [연락좀 해, 언니씨.] [정시언, 죽고싶니?] [야!!!] 내 동생 이온이가 언니인 나를 칭하는 다양한 호칭들을 보라. 언니 → 언니씨 → 정시언 → 야 변화무쌍하구나. 귀여운 년. 걱정 많이 했군. 지금 전화를 하면 이온이뿐만 아니라 아부지에게도 온갖 쌍욕과 잔소리를 들을 것이 뻔했으므로 나는 문자 하나를 이온이에게 보냈다. [언니 잠복근무 중이라 바뻐. 잘 살고있으니 위급할 때만 연락해.] 캬, 이 화려한 거짓말. 근데 이걸 어쩌나. 하루를 그냥 날려버렸네. 걔네들 집에 굉장히 늦게 들어오는 것 같던데... 뭔가 캐낼 시간이 부족해. 미행하다가 들키면 의심 받을테고... 자연스레 쫒아다닐 방법없나. 에라이, 뭐, 시간은 많은걸. 난 휴학중이니까!! 흐흐, 학교를 쉬니 역시 좋구만. 그동안 땡땡이 치면 노는 건 좋아도 마음은 안 편했는데. 아, 근데 돈이 없구나. 생활비 벌기위해 아르바이트 하려다가 걔네랑 생활이 어긋나버리면 큰일인데. 상황이 복잡해져서 바람이나 쐬며 머리 좀 식히려고 밖으로 나갔다. 아, 아직 시간은 8시. 걔네들이 들어오기엔 이른 시간이니까 지금은 아무도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성큼성큼 마당을 지나 목재평상 쪽으로 다가갔다. 슬리퍼 질질 끌고, 파란 잠옷입고, 머리 높게 올려묶고, 세수도 안하고. 마음편히 평상에 다다랐는데... 근데... 담배를 꼬나문 채 나를 바라보는 너는... 너는... 아닐거야, 잠이 덜 깼나, 왜 헛것이 보이지? 나를 향해 인상을 찌그러뜨리고 있는 저 놈은 신비원이 아닐거야. 아닐거야, 그럼, 아니고말고. “아, 씨발!!!” 싸가지없는 음성이 내 귓전을 파고든다. “야, 너냐??” 화난 목소리로 내 앞까지 뚜벅뚜벅 걸어온 이 놈... 신비원 맞구나. 아, 좆됬다. 쪽팔리게 왜 여기서 마주치고 지랄이야. “어머, 안녕.” “니가 여기 왜 있어.” 너야말로 여기 왜 있냐, 미친새끼야. “너는 일 안가니?” “오늘 일요일이야.” “아, 호스트빠 일요일에 제일 붐비지않나.” “나 주말에 일 안나가는데, 넌 뭐냐고.” “나는 인간이다, 왜?” 쯧쯧, 사내새끼가 노려보기는... 저러다 눈알 빠질라. 왜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이 복고개그에 반응하지 않는거냐. “정체가 뭐야?” 뜨끔... 아따, 거 참 의심많은 애새끼로구나. “신경쓰이게 거슬려, 너. 어젠 엄마 찾는답시고 내 뒤꽁무니 졸졸 쫒아다니더니 왜 계속 눈까리에 띄는거야.“ “아, 내가 뭐.” “저 집에 세든 사람 너 맞잖아.” “어.” “우리 집세 대신 내준 것도 너고.” “어.” “왜 그러는거야?” 잠깐, 이거 오히려 내가 취조당하고 있는 분위기다. 나는 특유의 화려한 언변으로 이 위기를 넘기기로 했다. “아, 몰라!! 어쩌다 우연이 겹친거지. 쓰잘데기 없는 소리 그만하고 나 담배 한 개비만 줄래?” 그렇다. 화려한 언변은 개뿔. 그딴 게 나에게 존재할 리 만무했다. 무조건 배째라 정신으로 모른다고 우기면 모든게 해결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 세상을 22년 살면서 터득한 나의 노하우며 진리다. 역시나 신비원은 질문을 중단하고 썩은 표정으로 나에게 담배를 건넨다. 담배 한 개비에 라이터까지 곁들여서. 개새끼, 담배매너는 참 좋구만. “고맙다.” 앞머리를 가볍게 날리는 바람을 느끼며 목재평상에 주저않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 순간 뒤에게 시끌벅적한 기운이 느껴졌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뻘건 담뱃불 세 개가 허공에서 흔들리며 점점 평상쪽으로 가까이 오고있었다. 신비원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인듯 한데... 이 놈들 일요일에는 일 쉬나, 왜 단체로 집에 있는겨... 그나저나 이 새끼들도 어지간한 골초인가보다. “신비원!! 치사하게 혼자 먼저 담배피러 내빼냐... 어? 여자다!!” “어? 뭐야, 뭐야, 뭐야? 아, 설마 그 친절한 여자분? 신비원 뭐냐!!! 치사하게 지 혼자 먼저 인사하고!!! 나도 저 여자 얼굴볼래!!!“ 안봐도 알겠다. 저 대사 지껄인 것들 지환영이랑 강휴인이다. 아, 다른놈들은 그렇다치고라도... 나 민서는 쪼끔 무서운데. “어??? 이 사람 어제 그!!!!” “어제 비원이 따라온 사람 맞지? 누나, 어제 그 누나 맞죠, 그쵸?” 마치 비상하는 새처럼 평상위로 날아올라와 어느새 내 얼굴을 확인한 두 바보. 놈들의 발악을 뒤로하고 나는 담배만 뻐끔뻐끔... 에라이, 어차피 지금 잠옷하며, 내 머리스타일 하며 이 놈들이 모두 봐버렸으니 제대로 된 이미지 잡기는 틀렸구만. 난 왜 항상 이 모양이지? “누나, 누나, 반가워요. 누나가 우리 집세 내줬어요?” 휴인이란 놈이 내 앞에 쭈그려앉은 채 얼굴을 들이밀며 묻는다. 헉!! 귀, 귀엽다!!! 제기랄, 순간 긴장해서 놈의 동그란 눈을 피하며 고개를 홱 돌렸다. “아, 뭐... 그, 그래...” 씨발, 고개 돌렸다가 민서랑 눈 마주쳤다. 독한 년. 그만 좀 노려봐. 방금 전 충분히 신비원한테 째림 당했다구. “이봐요, 당신 정말...” 본격적으로 나를 공격하려고 빨간 입술을 여는 민서를 막아서는 건- 지환영. “고마우셨나봐요, 비원이한테.” 어라? 이건 웬 뜬금없는 소리? 내가 왜 저 싸가지에게 고마워해야한다는 거지? “응?” “비원이가, 댁 엄마 돌려보냈잖아요, 집으로.” 13. 합류 순간 시간이 멈춰버린 듯, 나는 담배가 타들어가는 것도 잊고 비원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야, 너....” 쑥스러운 듯 시선을 피하며 머리를 긁적대는 놈. 그리고 괜히 승질. “아, 뭐!!! 니가 하도 귀찮게하니까!!! 별뜻없다, 정말!!!” “야, 그래두... 고마... 아뜨뜨뜨!!!!!!! 아악!!!! 앗, 뜨거!!!!!!!!!!” 썅!!!! 이 망할 담뱃불. 감동적인 분위기 좋았는데 빌어먹을. 필터끝의 끝까지 빨고 싶었는데 바닥에 떨어뜨렸다. 젠장, 아깝다. 그리고, 그런 나를 바라보던 비원이의 입에서는... “아, 존나... 병신.” ..... 내가 왜 나보다 네 살 어린 놈에게 병신소리를 들어야하는가. “아니, 근데 왜 이 새끼는 볼때마다 반말이여!!!” 그래, 반말을 트집잡은 것은... 이제 더 꼬투리잡을게 없는 탓이었다. “근데요, 누나 왜 여기서 살아요? 이제 누나 엄마도 집에 갔는데... 이제 누나가 가출한거예요?“ 내 잠옷자락을 끄집어당기며 묻는 휴인이. “응? 아, 아 그냥 나는 저기 독립. 얘들아, 나는 진짜로!!! 그냥 내 친구가 이쪽 주변에 집이싸다 그래서!!! 부동산 통해서 집 구했는데, 근데 그게 우연찮게 이 집이 된거다!!! 난 진짜로 딴 마음 없었다!!!! 우연이다, 이거!!!!“ 나, 참.... 되는대로 말이라고 다 지껄이는구나. 갑자기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거야? 휴인이가 나를 향해 해맑게 웃고있어서? 환영이가 방금 내 옆 평상 위에 털썩 앉아서? 민서가 드디어 그 무섭게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어줘서? 비원이가 세탁소 아줌마를 가정으로 되돌려 보내줘서? “근데 저기.... 도대체 너... 우리 엄마는 어떻게....” “아 그거!!! 누나 그거 비원이가요!!!” “아 씨발!!! 말하지마, 강휴인!!!! 뒤진다!!?” 비원이의 협박에도 아랑곳않고 즐겁게 중얼대는 휴인이. “오늘 아침에요, 안 쉬고 다시 업소 찾아가서요!! 자고 있는 그 아줌마 설득시켜서 딸이 기다린다고, 집에 가라그랬대요!!! 그 아줌마가 막 가족들한테 미안해서 잘못한 거 깨우치고 울면서 가니까요, 사장이 손님 왜 내쫒냐 그래서 비원이 혼났대요!!! 대신 몸으로 때우기로 하고 호스트빠 청소했대요!! 얘 방금왔어요. 화장실까지 청소했대요. 그리구요, 앞으로 그 아줌마 호스트빠에 들여보내지 않기로 사장님하고 약속했대요. 대신 비원이 앞으로 아르바이트 시간 한 시간씩 더 늘린대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럴 애가 아닌데, 나도 이렇게 감동받으면 안되는건데. 근데 대체 왜... 내가 대체 뭐라고 그렇게까지 해준거야? 나쁜 놈들인데. 얘네 범죄잔데... “씨발, 강휴인 너 나중에 몇 대 맞을 줄 알어, 쪽팔리게, 썅.” 거칠게 비원이가 승질을 내자 휴인이는 그를 향해 앙증맞게 혀를 쏙 내밀어보인다. 이 놈은 하는 짓도 참 귀엽단말여. 원래 기지배 성격이 이래야 하는데. 민서 저 년은 왜 저래. 카리스마만 확확 뿜어내고. “고맙다....... 정말 고마워.” 진심을 다해 감사인사를 건네는데... “물어볼 게 있어.” “응, 뭔데?” “그 아줌마가 울면서 그러더라. 자기 딸 초등학교 3학년인데 어떻게 만났냐고.” 헉!!! 거짓말 들켰다. 나 맞아죽는 거 아냐? 어떡하지, 어떡하지? “그래서 말인데.” 어떡해... 나 진짜 어떡해. 너무나도 진지한 얼굴로 나를 향해 질문하는 신비원. “설마.....” 안돼, 안돼!!!! 나 스파이란 거 들키면 아부지한테 죽...!!!! “너 초등학생이었냐?” ....................엥? 이 바보새끼가 뭐래? “푸하하하하!!!!! 야, 너 지금 뭐랬냐? 푸하하하하하하하!!!!!” 긴장이 풀리자 배를 붙잡고 박장대소하는 나. “으하하하!!!! 엄청 진지하게 묻는 게, 초등학생이냐고? 하하하하!!!! 야, 넌 내가 그렇게 어리게 보이냐?“ 신비원은 내 웃음에 빈정상한 듯 다시 인상을 써보였고, 나는 새로운 거짓말을 생각해냈다. “사실 나 그 아줌마 진짜 딸 아니야. 그 아줌마는 그냥 나랑 친한 이웃사촌이야. 본의아니게 속인 것 같아서 미안하다. 그래도 화내지는 마라. 난 그 아줌마 진짜 엄마처럼 따르거든.“ 순간, 기분 좋은 바람이 우리를 스쳐갔다. “왜냐면, 나는....” 거짓말 해야하는 조마조마한 내 마음과는 달리 오늘 밤하늘의 달빛은 밝고도 눈부셨다. “고아거든.” 거짓말 후, 주위를 살폈다. 어라, 다들 표정이 숙연해진다. 이거 은근히 잘 먹히는데? 민서의 눈빛도 한층 누그러졌다. 그리고 그녀는 한숨쉬며 말을 꺼냈다. “휴, 그런 주제에 왜 또 우릴 돕고 난리야.” “..........” “되도록 돈 빨리 갚을테니까, 걱정마요. 꼴을 보아하니 풍족하지도 않은 것 같구만. 기다려요, 한달 후 월급날 되면 무슨일이 있어도 돈 갚을게요.“ “아, 그 대신!!!” 민서 말을 듣고있자니, 좋은 생각이 났다. 하루종일 일초도 떨어지지 않고 이 아이들 옆에 붙어있을 수 있는, 아주 좋은 생각이. “돈은 안 갚아두 되니까!!! 그냥 한 달만 나 좀 책임져 주면 안될까?” “뭐요?” “나 생활비가 없거든. 그니까 그동안 밥 좀 같이 먹구, 그러자... 어차피 똑같잖아. 어차피 니네가 내 돈 갚으려면 한 달 있어야 하는데.... 난 그 한달간 먹고 살 것도 없고.. 응? 돈 갚는 대신 나 좀 먹여살려라. 그리구 나도 앞으로 살려면 아르바이트 해야되니까. 니들 좀 쫒아다니자. 니들 일하는 거 보면서 나도 뭐 아르바이트 자리없나 알아보게... 아니면 내가 니들 아르바이트 하는거 도와줘도 되고, 흐흐흐.“ 너무나 훌륭한 계획을 생각해낸 내가 대견해서 끝에 능글맞은 웃음을 흘려버렸다. 그러나 너무 스토커같은 계획이었는지 민서가 또 다시 승질을 냈다. “당신 뭐하자는거야? 지금 장난해? 우리 옆에 딱 붙어다녀서 어쩌겠다는거야?” “아니, 나는...” “........” “미안해... 사실 그냥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어. 정에 굶주려서... 항상 외로웠거든. 미안하다.” 에이씨, 그래, 너무 속보이는 계획이었나. 그냥 다른 걸 생각해보..... “좋아!!!!” 뭐? 무어라? 강휴인 너 이 시키. 방금 뭐랬냐? “강휴인!!!! 이게 너 혼자 결정할 일이야?” “외롭다잖아, 민서야..... 이 누나 외롭다잖아....” “야, 강휴인.........!!!!!!!” “응? 한번만!!!! 사람 살리는 셈 치고!!!! 응?” “진짜 내가 미치겠어, 너 때문에......” “허락하는거지? 헤헤......” 단숨에 민서의 허락을 받아낸 채 나를 보며 히죽대고 있는 놈. 그 때, 놀라 벙쪄있는 내 위로 무언가가 떨어져내렸다. 에에? 환영이가 입고있던 쟈켓인데.... “아까부터 떨고있길래.” “............” “새로운 멤버 합류 축하하는 의미에서.” 14. 달빛아래, 우리 다섯명 기분좋은 온기가 등 뒤에서 따뜻하게 전해져온다. 환영이가 벗어준 쟈켓은 눈물날 정도로 포근했다. 아, 나 진짜 왜 이러지. 계속 감동받으려고 한다. 마음이 쉽게 누그러지려고한다. 이 아이들을 믿고싶어진다. 심장이 터질 듯 두근두근... 미칠 것 같다. 이 자식들 별명이 ‘관계자 외 출입금지’랬는데... 그래서 끼어들기 참 힘들겠다, 라고 생각했는데... 이 아이들은 너무 쉽게 나를 받아들여주었다.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아이들은 자신들을 무시하고 협박하는 이들에게는 벗어나려 하지만 외롭고 힘없고 아픈 사람은 누구나 받아들여 주는 게 아닐까. 여기저기 낭비되는 돈은 온갖 나쁜 짓을 다 해서라도 긁어모으지만... 결국 그 돈은 가진 게 없는 자들에게로 전달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버렸다. 아부지나 이온이가 말했듯 말도 안되는, 그런 바보같은 생각을 말이다. 마음을 다잡으며 나 자신에게 쉴 새없이 세뇌를 걸었다. 아부지는 말하셨다. 당신의 한평생을 걸고 지녀온 진리를. [범죄는 범죄다. 그 놈들에게 그 어떤 사정이 있다 하더라도.] 그래, 제발 이 말을 마음 속에 새기란 말이다, 정시언. 난 아부지의 딸이니까. 그래, 그러니까. “내 이름은 휴인이예요, 누나!! 강휴인!! 근데 누난 이름이 뭐예요?” 그러고보니, 그제서야 깨달았다. 난 이 아이들의 이름과 나이 등 기본적인 것을 알고있었지만.... 이것들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으리라. 뭐, 신비원은 알고 있겠지만. “아, 내 이름은 정시언. 스물 두 살이야.” “우와!!! 우리보다 네 살이나 많다!!!” 그러니까 까불지 말란 말이다. 우리가 사는 동방예의지국에서는 장유유서가 법도란다. “원래 대학생이야, 난... 근데 학비가 모자라서 휴학중이고.” “힘들었겠네요, 그래도 대단하다!!! 자기가 돈 벌어서 공부하구... 우린 다 중졸인데.” “쓸데없는 소리하지마, 강휴인.” 역시나 뭔가 지들 신변에 관계된 이야기가 나올라치면 민서가 말꼬리를 잡아먹어버린다. 그나저나... 찔리는구나... 얘네들 눈엔 내가 열심히 살아가는 가난한 대학생이겠지... 실상은... 학사경고 두 번 받은 날라리 대학생이거늘. 아, 그 순간 불현듯 무언가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김형사님이 하신 말씀. [재벌아들 말이야, 왼쪽 이마에 상처가 있대.] “어제 누나가 따라댕겼던 애 이름은 신비원이구요, 누나한테 쟈켓 벗어둔 애는 지환영이구요, 여기 무서운 여자애 이름은 민서해요, 백민서!!! 우린 다 열여덟살이예요!!!“ 휴인이 말을 듣는 척 하며 아이들의 얼굴을 쓰윽 훑어보았으나... 씨발, 이 새끼들... 이 새끼들... 앞머리가 너무 길잖아!! 앞머리를 까고 댕기란 말이다, 이 자식들아!! 자고로 이마가 이뻐야 진정한 남자인거다!! 쉽게 재벌아들을 찾아낼 수 있는 단서를 알고서도 난 그것을 확인할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사이에 놈들 이마를 대놓고 까뒤집어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근데 니들은... 왜 같이 살아? 아무래도 민서는 여자니까... 같이 살기는 좀 불편하지 않아?” 재벌아들 찾기는 뒤로 미루고, 놈들이 함께 사는 이유를 알아내기 위하여 조심스레 질문을 꺼냈다. “괜찮아요. 우린 예전부터 함께였으니까.” “응?” “구질구질하게 과거이야기 해서 뭐해요? 짜증만 나잖아요!!” “아니, 그게 저기...” “우린 누나 과거 물어본 적 없어요!!!” 휴인이의 말에 반박하려 했으나,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 난 거짓말을 하기위해 내가 먼저 나서서 과거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분명 그들이 나에게 먼저 내 과거를 묻진 않았다. “과거는 중요한 게 아니예요!! 지금, 현재 살아가는 게 중요하죠!! 지금은, 누나랑 우리가 만난게 중요한거예요!! 어디서 뭘 하다가 어떻게 왜 무슨 사정으로 만나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죠.“ 동그란 눈을 크게 뜨며 제법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휴인이 녀석. “그래, 그렇네...” 마지못해 내가 수긍하면... “뭐, 그래도 일단 정 궁금하면요!!” 다시 그 놈은 해맑게 웃으며 대답한다. “우리도 고아라도 해두죠!!” “응?” “우리도 가족 없거든요!! 그니까 우린 친구가 가족이예요!!” “.....” “이제 누나도 여기 끼워줄게요. 외롭댔잖아요.” 혼란스럽다. 가까이서 본 아이들에게 악의따위는 없었다. 오직 천진난만한 웃음, 따뜻한 배려, 해맑은 마음 뿐이었다. “얘들아, 미안한데.” 나는 낮은 한숨을 쉬며 그들에게 부탁했다. 비굴하게. “나 담배 하나만.” 김빠지는 내 부탁에 비원이는 인상을 쓰며 궁시렁댔다. “아, 진짜 옷차림도 그지같은 게 하는 짓도 그지네.” “야, 너 뭐라 그랬어!!!?” “아까 하나 빌려서 핀 주제에 웬만하면 좀 참아라!!” “아니, 근데 이게 진짜 끝까지 반말이네!!? 니넨 뭘 잘했냐!!? 미성년자인 주제에!!” “미성년자한테 담배 빌려서 피는 넌 뭐냐!!?” “이 새끼가!! 야, 니네 담배 압수야, 내놔!!” “아, 진짜 미쳤냐? 기지배가 담배나 피고!!” “민서는 기지배 아니냐?” 그렇다. 민서는 아까부터 계속 줄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던 것이다. 내 갑작스런 지적에 그녀는 몸을 움찔거렸다. “민서는 괜찮아요, 누나.” 그리고 또 끼어드는 휴인이. “뭐가?” “민서는 어차피 담배 많이 피면 환영이한테 혼나요!! 민서 좀 있다가 집에 들어가면 환영이한테 맞을걸요?” “응? 왜?” 민서가 누군가에게 맞는다는 건 상상이 되지않는걸. “둘이 사겨요.” “응.... 뭐, 뭐라???” 아따, 씨껍했네. “민서랑 환영이랑 사귄다구요. 왜 그렇게 놀라요?” “아... 아니야...” 그럼 안 놀라게 생겼냐? 니 눈엔 저 두 명이 어울리냐고!! 경악스런 내 눈빛에 민서는 짜증난 듯 담배를 땅에 던져버리고, 환영이는 옅은 미소를 띄고 있었다. “아, 그나저나 담배 좀.” 원치않던 충격을 받아 아까보다 한층 더 절실하게 담배를 찾았다. 휴인이 놈은 또 다시 해맑게 웃으며 나를 향해 담배곽을 내밀었다. 이 놈아, 그만 좀 웃어라. 여자들 쓰러지겄다. 웃음을 아끼란말이다. “어? 너두 이거 펴? 나도 이거 피는데!! 신비원이 피는 건 너무 독하지?” “응, 우린 네 명 다 담배 취향이 달라요.” “고맙다, 잘 피우마.” 놈의 담배곽에서 담배 한 개비를 빼들었을 때... 담배곽을 잡고있지않은 휴인이의 다른 한 쪽 손이 내 손목을 강하게 붙들었다. 이... 이 놈 실실 웃고있길래 약한 줄 알았는데 보통 힘이 아니다. “야, 야!! 왜 그래!! 나 너 몰래 두 개비 쌔벼가는 짓은 하지않아!! 진짜 하나만 가져갔어!! 보이지?” 허겁지겁 변명하는 나를 향해... “대신요, 누나.” “응?” “앞으로 담배필 땐, 나한테 혼날 각오하고 피워요.” 그 날, 달빛은 왜 그리 눈물나도록 아름다웠을까. 난 확신한다. 그 날 우리의 풍경은, 세상 그 어느 것보다도 아름다웠을 것이라고. 15. 행동개시 “누나, 누나!! 빨랑 일어나요!!” 아, 더럽게 시끄럽다... 난 졸려, 잘거라구, 건들지마, 음냐음냐... “누나, 아씨, 자꾸 이러면 그냥 문 열고 쳐들어갑니다!!” 꿈이지? 이거 꿈이겠지? 쳐들어와봐, 임마. “셋 셀 때까지 나와요. 하나! 둘! 셋~!” 새끼, 누군진 모르겠지만 까불고있네. 근데 이거... 꿈 맞겠지? “아, 진짜 누나 첫날부터 이럴거예요?” 드르륵. 방문 열리는 소리. 흥, 웃기지마. 남정네가 다 큰 처녀가 자는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그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올 리가 없잖아? “빨리 일어나요!!” 그 소리와 함께 내가 덮고있던 이불이 위로 휙 들어올려진다. 이불이 사라지자 찬바람이 내 온 몸을 감싸고 지나갔다. 그러나, 난 아직도 이 상황이 꿈이라 믿고있었다. 왜냐면... 잘 때의 내 모습은 굉장히 추하다고 내 주변 사람들이 익히 이야기해주었으므로, 아부지를 제외한 ‘남성’이 내 자는 모습을 본다면 그는 내 추한 몰골을 본 댓가로 나와 결혼해야 한다는 나의 굳센 신조가 그 때까지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꿈이라고 믿고있었다. 그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뾱뾱!! “일어나라, 일어나라...” 잠깐, ‘일어나라’는 그렇다치고... 저 생생한 ‘뾱뾱’은 무슨 소리지? 게슴츠레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을 때. 심드렁한 얼굴로 자는 내 얼굴을 바라보는 휴인이가 보인다. 그리고, 뽀인뜨! 그 놈이 박자를 맞춰가며 내 이마에 내리치고 있는 이 빨간 것. 뾱뾱소리를 내고 있는 이것은... 뿅망치...? “....헉!!! 야, 야, 너 임마!! 야, 너 지금 이 새끼!! 너 지금... 지금 너 뭐하냐?” “누나 잠 깨워요.” “너 지금, 너... 너,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누나 방.” ...심각하게 단순한 이 놈과 싸워봤자 내가 질 것 같았다. 아니다!! 쉽게 넘어가서는 안된다. 이 놈은 남자란 말이다!! 남자가 여자 자는 방에 몰래 들어온 것. 이것은 범죄란 말이다!! 거기다 휴인이놈은 어제 나에게 고백 비스무리한, [앞으로 담배필 땐, 나한테 혼날 각오하고 피워요.]라는 낯간지러운 말도 했다구! 물론, 나도 그 말에 설레어서 잠을 설치긴 했다만... 그, 그래도!! 이건 말도 안돼!! 내 오늘 이 놈에게 따끔하게 한 마디!! “야!!” “빨리 씻구 밥먹어요.” 뿅망치를 어깨에 걸치고 여전히 심드렁한 얼굴로 내게 중얼대는 휴인이. 너무 당당해서 할 말이 없다. 근데 저 놈, 어제는 방긋방긋 잘만 웃더니 오늘은 왜 저래? 쟤 나 좋아한 거 아니었나? 하긴, 대놓고 고백한 건 아니었지. 아, 제기랄!! 쪽팔리다!! 나 혼자 오버해서 어제 잠도 설쳤단말인가? “환영이가 밥 하는데요, 그거 꽤 먹을 만 하거든요.” “어, 그래...” “이 뿅망치요, 어제 길가다 주웠어요.” “그, 그래? 좋겠구나...” “먼지가 수북.” “응?” “꺄하하하하하하하하” 지금껏 웃음 참느라 힘들었다는 듯, 자지러지게 웃어제끼며 마당으로 튀어나가는 휴인이놈. “야, 너 왜 그래?” “깨끗이 씻는게 좋을 거예요, 누나!!” 통통 튀어서 사라진다. 쟨 가끔 미친거 같애. 한숨을 푸욱 내쉬며 수건을 목에 하나 걸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서서 거울을 봤는데. 봤는데............. “아악!! 썩을놈!!!!!!!!!” 이마에 선명하게 찍힌 먼지와 검댕이. 강휴인 이 자식, 주워온 뿅망치로 남의 이마에 수많은 자국을 남기며 즐거워했다는 것인가!!? 바로 웃어대면 내가 알아챌까봐 일부러 표정관리하다가 다 깨우고 나갈 때쯤 되어서야 깔깔대며 웃었다 이거지? 결국 나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검댕 덕분에 얼굴이 아플 정도로 세수를 해야했다. 하도 벅벅 문질러서 얼굴가죽 벗겨지겄네... 너무 씻어서 벌게진 몰골로 수건을 목에 대롱대롱 걸고 놈들의 집으로 향했다. 물론 머리는 사정없이 뻗어있었고, 여전히 잠옷 차림이었으며, 쓰레빠를 신은 채였지만. 그렇다. 난 이들에게 ‘동네형’같은 존재로 인식될 각오를 해놨던 것이다. “애기들아, 안녕!! 하이루 방가방가!!” 이온이의 친구들에게서 배운 통신용어를 남발하며 놈들의 집 문을 드르륵 열어제꼈다. 그리고 내 몰골과 귀여운 말투의 불일치로 인하여 충격받은 비원이는 국을 떠먹다말고 한 마디 지껄였다. “아, 진짜 밥맛없게...” 저 새낀 나만 보면 시비야. 아침이란 게 무색하리만큼 놈들의 모습은 깔끔했다. 특히 민서와 비원이는 가히 결벽증이 의심될 만한 모습이었다. 민서 저 년 저거는, 기지배, 화장도 안하는 거 같은데 볼살은 하얗고, 입술은 뻘겋고... 분명히 초딩 때 친구라는 기지배들이 시샘했을게야. 얼굴도 이쁜 게 대낮부터 방 안에서 캡모자를 쓰고있다니. 여름엔 더워서 어떻게 사나몰라. 민서는 나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밥먹기에만 열중했다. 부러운 년, 먹는 모습도 이쁘다. 세상에서 제일 이쁜 건 우리 이온이라고 생각했는데. 두 년 다 아주 맞먹네, 맞먹어.... “우하하!! 누나 얼굴 벌게!!” 그리고 나를 비웃는 건 역시나 강휴인군. 얼굴을 말끔했으나 입고 있는 옷은 허름했다. 박스티와 반바지. 손엔 거슬리는 뿅망치. “강휴인, 그만 떠들고 밥 먹어.” 환영이는 휴인이의 뿅망치를 빼앗아들며 따끔하게 한마디 했다. “우에, 내 망치!!” “아, 내가 이거 버리랬지!! 집주인 아줌마 아들이 버린건데 왜 계속 주워오냐!!?” “우엥, 내 꺼.” 울상짓는 휴인이놈. 아, 제발 이 놈아. 그렇게 대책없이 귀여우면 어쩌란말이냐. “밥 다 먹으면 줄게. 늑장부리지 말고 다 먹어.” “엉.” 휴인이는 바로 그릇에다 얼굴을 박고 조용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 “야, 저 새끼 반찬투정 안하니까 좋다. 앞으로 밥먹기 전에 항상 그거 압수해라.” 지금 이 순간, 휴인이에게는 너무나 잔인할, 비원이의 한 마디. 하, 그래도 역시... 애들은 애들이구나... 하는 짓, 귀엽다. “아, 누나!! 여기 밥!!” 그 때, 환영이가 밥을 한 가득 푼 그릇을 나에게 건네준다. “아, 고마워.” “먹을 만 한 지 모르겠어요. 내가 요리에 취미가 있긴 한데. 그래도 우리 애들 중엔 휴인이 빼고 다 잘 먹는 편이예요. 강휴인 이 새끼는 반찬투정이랑 편식이 심해서.“ 어제는 어둠 속에 있어서 눈치채지 못했었나보다. 지금 발견했다. 환영이 입술이 터져 있는 것, 눈가가 살짝 찢어졌고, 목부분에 멍이 들어있는 것. 물론, 휴인이도 반바지 밖으로 나와있는 다리에 멍이 들어있고 온갖 파스가 붙여져있었다. 아저씨들을 대상으로 돈을 소매치기 하기 위해 짧은 스커트를 입는 민서와, 호스트빠에 출근하기 위해 항상 검은 정장을 입는 비원이를 제외, 도둑질로 돈을 버는 휴인이와, 돈을 받고 폭력을 행사해주는 환영이. 그 둘은 일정한 활동장소가 없으므로 평소에는 다른 방식으로 돈을 버는 듯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도망치는 데 신들려서 날쌘돌이라 불리는 강휴인이 다리에 저렇게 파스를 다닥다닥 붙이고 다닐 이유가 없었다. 무패신화라는 지환영이 다칠 이유 또한 더더욱 없었다. 내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비원이의 호스트빠 출입과 민서로 인한 소매치기 껀수가 늘어난 것에 비하여 요즘 강휴인과 지환영은 놀고 있다고 착각될 정도로 범죄가 중단되어 있었다. 도대체 뭐지? 새로운 범죄에 손대고 있는건가? “누나!! 오늘은 나 따라올래요? 나 따라오면 오늘 누나도 아르바이트 할 수 있어요!!” 때맞춰 고개를 쳐들고 중얼대는 휴인이. 나는 손으로 오케이 표시를 해보였다. 그래, 좋아. 내 관찰감시 대상 1호는 너다, 강휴인. 16. 약자 이야기 “오오♪ 끈적이는 내 손길이 너믜 젖은 눈빛으로, 컴온~ 컴온~ 베이베. 갈고 하얀 손가락이 내 머리를 헤집으면 자 이제 우리의 키스타임♬“ 민서와 비원이, 환영이를 모두 먼저 내보내고 마지막으로 집을 나서는 휴인이와 나. 환영이가 집을 나섬으로 해서 휴인이와 나 단 둘이 있게 된 지 2분 돌파. 함께 길을 걷게 된 건 30초 경과. 휴인이와 같이 있게 되어서 떨리던 내 마음이 산산조각 난 건 10초 전. 대체 저 외설스러운 가사의 노래는 뭐냐!! “휴인아... 어이, 강휴인!!” “응? 누나, 왜요?” “대체 그 노래의 정체는 뭐냐?” “아, 이 노래 열라 좋죠? 이 동네 사는 내 친구들 노랜데, 걔네가 언더그라운드 랩퍼거든요. 이건 걔네들의 명곡 중에 하나예요!!“ 자랑스러운 듯 미소를 띄며 말하는 휴인이를 앞에 두고... [ 이 쉐끼야, 그딴 요상스런 음악이 어떻게 명곡이 될 수 있냐!! 당장 그 친구들과 절교해, 임마!!] 라고 외치면.... 난 나쁜사람이 될런가? “나 이 노래 부르니까 완전 섹시하죠?” ... 휴인아, 너 섹시의 뜻을 알긴 하는거니... 누나가 널 잠시 넘보긴 했다만, 나 뿅망치 든 애를 섹시하게 여길 정도로 굶주리진 않았단다. “비원이랑 민서랑 환영이는 나더러 섹시하다고 해줬는데!!” 니가 항상 조르니까 귀찮아서 해준거겠지. 넌 그냥 귀여운 컨셉으로 나가야 한단다, 아가야. 섹시란 건 말이다, 민서같은 기지배!!! 비원이같은 남정네!!! 그런애들한테 쓰는 거란다. “그리고 이 노래 지은 랩퍼 친구들고 나보고 너무 섹시하다구, 막 팀에 합류하라구 그랬어요.” 그 랩퍼라는 아이들의 사고회로가 궁금해진다. 대체 무슨 사상을 가지고 있기에 요상시런 노래를 짓는 것도 모자라서 휴인이에게 섹시하다는 말을 해주는겐가!!? “휴인아, 누나 담배 좀.” -뾱!!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머리위로 뿅망치가 날아왔다. 놀라운 속도와 무서운 스윙으로. “악!! 아프잖아!!” “담배 피지 말랬잖아요!!” “니가 쓸데없는 소리하니까 그렇지!!” “흥!!” “너 그 뿅망치 안 버리냐!!?” 승질내며 내가 휴인이에게 달려드려는 순간, 놈은 갑자기 나를 껴안고 내 몸을 자신의 쪽으로 휙 돌려놓았다. 갑작스런 행동에 놀랐는지 내 심장이 미친듯이 두근거렸다. 새... 새끼, 그렇게 안 보이는데... 힘은 더럽게 쎄네... 남자는 남잔가보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나를 꽉 잡고 있는 휴인이의 팔 안에서 빠져나왔다. “야!! 너 갑자기 왜!!” “나한테 고마워해야 될 껀데.” “응?” “저거 밟을 뻔 했잖아요. 조심해요, 누나.” 내게 눈을 찡긋 하며 밝게 웃는 휴인이. 놈이 가리킨 손 끝을 따라가보면... 우에? 죽은 참새 한 마리. 저거 밟았으면 물컹, 했겠지? 으윽, 생각만해도 소름끼친다. “불쌍해.” “응?” 휴인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주머니를 뒤졌다. 곧 주머니에서 웬 종이 한 장이 나왔고, 휴인이는 쭈그려앉아 종이로 참새를 곱게 싸기 시작했다. “야, 뭐해? 그냥 가자.” “기다려봐요.” 휴인이는 종이에 싼 참새를 길가 주변의 풀숲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손으로 흙을 파더니 참새를 고이 묻어주고 있었다. “참 할 짓 없다. 그런 거 묻고있고.” “불쌍하잖아요.” “뭐가 불쌍해. 참새 한 마리, 지 명대로 살다가 죽은거지.” “원하는 삶을 살다가 죽었을까요?” “응? 무슨 말이야?” “날아다니고 싶은 데 다 날아다니고, 먹고싶은 거 다 먹고, 사랑하고 싶은만큼 사랑하고 죽었을까요?” “뭐?” “사람도 그래요. 고작 20년을 살아도 내가 하고싶은 거 다 하면서 살았던 사람이 있고, 80년을 살아도 내가 하고싶은 거 전혀 못했던 사람도 있죠.“ 그래서, 니들이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있는거니, 묻고싶었다. 아니, 휴인이의 눈으로 보면 나는 대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인지, 묻고싶었지만 나는 귀찮은 척 고개를 돌렸고, 휴인이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죽은 후에도 초라하게 버려두는 건 슬프잖아요. 사람이든, 동물이든. 원하는 삶을 살았든, 아니든.... 내가 죽은 후에 슬퍼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 그리고 조그만 친절이나마 어딘가 묻힐 수 있었다는 거, 그게 그래도 행복이죠. 죽은 건 슬퍼도, 단 하나의 위안을 주고 싶었어요.“ “너 미쳤냐? 그런 말도 안되는.....” “우리 엄마아빠가 그랬어요. 난 그 마지막도 못 봤지만. 나는요, 누나.... 울어주지도 못했어요. 슬펐는데, 슬픈 거보다 분노가 더 커서요.“ 옛날이야기다. 놈들의 생활에 대해 실마리를 잡을 수 있는 옛날이야기. 슬픈 이야기를 담담히 이야기하려는 휴인이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그의 아픔보다는, 범죄의 배경에 집중하고 있었다. 부모가 죽었다... 라. 그럼 휴인이가 재벌후계자? 그러기엔 너무 꾸밈없는 모습인데. 재벌 아들. 유모와 비서와 운전기사, 경호원들이 날 때부터 따라다녔던 귀한 존재. 그렇다면 거리낌없고 거만한 태도를 지녔을 테고, 언제나 당당했을 것이다. 태도 하나하나가 우아하고 품위있는 존재. 그럼, 그건 비원이일 가능성이 높다. 휴인이의 파워는 네 명 중에 상당히 얕은 편. 투정 부리고, 어리광 피는 걸로 봐서 정에 굶주려서 그냥 친구따라 범죄 저지른 스타일? 아니, 아니, 반찬투정은 휴인이 혼자 한댔지. 만약 재벌아들이라 입맛이 고급이라면? “휴인아.....” 한숨섞인 내 목소리에 휴인이는 쭈그렸던 다리를 쭉 펴고 일어났다. “아아!! 싫다, 이런 분위기!!” “응?” “저기예요, 누나!! 우리가 아르바이트 할 곳!!” 난데없이 저 먼 곳을 가리키는 휴인이. 에...? 뭐야, 저건? 공사장? “난 저기서 노가다 뛰고, 누나는 밥 퍼주고!!” “뭐야!! 전혀 고급스럽지 않잖아!!” “돈은요,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는 거래요.” “어울리지 않는 말 하지마!!!” 순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싱긋 웃는 휴인이. 이 놈아, 제발 시도때도 없이 웃지 좀 마, 떨린다구. “저기, 건물요. 뭐게요?” “응? 저거...? 뭐, 글쎄. 규모는 되게 크네. 무슨 회사 건물 짓는거야?” “쇼핑몰이래요. 어느 디자이너를 주축으로 하는 대규모 쇼핑몰.” “우와, 진짜? 아, 맞다, 그래!! 나 얼마전에 신문에서 본 거 같애!! 디자이너 선주린!! 스물 일곱 프랑스 유학파 출신인데 이번에 존나 큰 대회에서 우승했다더라!! 그 여자 아부지가 건설업체 사장이라 이번에 큰 쇼핑몰 하나 세워서 패션거리의 역사를 새로 쓴다고...“ “그거 때문에...” “우와, 그게 저거네. 골격 죽이는구만. 디자인 최고겠다.” “그거 때문에 원래 저기 살던 사람들은 다 피눈물 흘렸죠.” “응?” “강제철거 당했어요. 집이요... 한 100채 정도 있었거든요. 조그만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어요. 소위 말하는 달동네죠. 어느 정도였나면, 지금 누나랑 내가 사는 곳보다 더 못한 집들이었어요. 그래서 우스웠나봐요. 강제철거 당했대요.“ “..............” “집이 다 철거당해서, 지금 살 곳이 없는 사람들은... 지금 뭘 할까요?” “응?” “당연히 일하죠!! 다시 살아야되니까!! 아저씨들은 공사장 일하고, 아줌마들은 밥하구. 웃기죠? 자기네 집을 철거시킨 저 쇼핑몰을 세우기 위해서... 일을 해요.“ “야... 심했다, 그건....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자존심도 없냐?.... 하고 말하고 싶었죠?” “그래!! 내 말이!!” “자존심은 있죠... 그건 있는데... 살아야되니까. 약자잖아요.” “.......뭐?” “아까 죽은 참새 본 거 처럼... 참새같은 목숨, 살려야되니까.” “...........” “왜요? 욕하고 싶어요? 벌레같죠? 구차하고, 쓰레기처럼 더럽고, 바보같죠?” 내가 모르던 세상 이야기를, 아픈 삶 이야기를... 휴인이는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내가 이제껏 본 사람들 중.... 가장 환하고 눈부신 미소를 지으면서. “그런데요, 어쩔 수 없어요. 살아야 되거든요. 약자니까.” 혼란스럽다. 도대체 휴인이의 정체는 뭘까. “철거될 때, 저항은... 했었대요. 두 어린 소녀가요. 근데 한 명은.. 소년원에 끌려갔고, 다른 한 명은 정신병원에 끌려갔대요. 멋 모르고 덤빈거죠.“ “휴인아....” “이상으로, 세상의 약자 이야기... 끝.” 17. 스톡홀름 증후군 “휴인아, 그거...”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내가 시도한 건- 정공법 “니 이야기니?” 대놓고 물어보았다. 휴인이는 또 싱긋 웃어보이며 장난스럽게 소리쳤다. “비밀!!” 만약 휴인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저렇게 웃는거라면, 얼마나 아픔에 무뎌졌다는 뜻일까. 슬픔 오버, 분노 오버, 그 한계치가 넘어야만 지어지는... 말 그대로 미치도록 천진난만한 웃음. 그 웃음에 마음 떨려한 장본인이 바로 나, 정시언인데 저 갓난아이같은 미소가 진정으로 삶에 무뎌진 결과라면... 나, 정말... 인간 대 인간으로서.... 아니, 여자로서 저 남자가 정말 안쓰러워질 것 같다. 아까의 진지한 모습이 다 사라진 휴인이는 내 손을 붙잡으며 공사장으로 휘달렸다. 그러나 내 마음은 아직껏 황폐화. 기분이 좋지 않다. “아저씨, 아줌마들!! 귀염둥이 왔어요!!” 겨우 내가 정신을 차린 건, 휴인이가 공사장 인부 아저씨, 식당 아줌마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눌 때였다. “어이쿠, 휴인이가 웬 여자를 데려왔어!!” “이쁘지, 아저씨?” “우직해보이는구만!! 여자친구야?” 여자에게 ‘우직하다’는 건... 아무리 좋은 쪽으로 해석해보려고 해도... 칭찬은 아닐껀데. ....... 그나저나 여자친구라... 휴인이놈과 내가? “아니!!” 씨발. 설레었던 마음도 잠시, 너무나도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해버리는 놈. 한 대 쥐어박아버릴까, 라고 생각하던 찰나에... “마누라야!! 남편 밥은 직접 퍼주고 싶대서!!” 나는 경악하며 놈을 바라보았으나, 아저씨, 아줌마들은 그의 농담에 그리 즐거우신지 하하호호 웃음꽃이 피어버렸다. “좋아보이네!! 연상이여?” 어떤 아주머니가 나를 툭 치며 물어보시고, 나는 억지웃음을 띄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상의 여자친구라... 휴인이 능력좋은데?” 어떤 아저씨가 휴인이 등을 두드리며 소리치시고... “아저씨, 그런말 하면 아줌마 삐져!!” 라고 대답한 휴인이는 작업복을 입기위해 윗옷을 벗어제꼈다. 얼씨구나!! 저 새끼 얼굴만 귀여운 줄 알았는데!! 몸까지 바람직하군!! 우락부락한 몸이었으면 얼굴이랑 안 어울려서 징그러워했을텐데. 그냥 적당히 근육잡힌 저 몸은.... 징그럽지도 않고, 비리비리하지도 않고... 아, 새끼... 정말 어려도 남자긴 남자구나. 아씨, 침흘러... “그래도, 내가 정말 능력 좋긴 한가봐... 그지, 마누라?” 햇살같았다. 드디어 그 놈의 웃음에 적절한 표현을 찾아냈다. 잔잔해도 눈부시고, 괜시리 기분 좋고, 미치도록 부드러운 햇살같았다. “그나저나 오늘은 식당쪽에 일손이 더 필요했는데, 잘됐네.” 인자해보이는 어떤 아주머니의 말에... 휴인이는 허름한 작업복을 걸치며 묻는다. “왜?” “사장이 온대. 건설업체 사장이, 그 디자이너 딸하고.” 순간, 휴인이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 사람들이, 여기서 밥 먹는대?” “설마 하는거지. 이런데서 식사하겠느냐만은 그래도 점심시간 때 온다고 했으니까.” 휴인이는 말없이 작업복의 단추를 잠궜다. 때맞춰 일을 시작하자는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들려왔고, 아줌마는 나에게 작업용 헬멧을 하나 건네주며 말했다. “휴인이한테 이거 전해주고, 좀 챙겨준 뒤에 식당으로 와요.” 우리엄마가 살아있었다면, 이 정도 나이쯤 되었을까. 내가 웃으며 헬멧을 받아들자 아줌마는 앞치마를 매만지며 임시로 지어진 식당안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식당도 갖추고, 분위기도 좋네.” “응. 거기다 노가다는 일당으로 돈 주니까, 나한테는 땡큐죠.” “다른 노가다랑은 좀 다른거 같은데.” “방식은 아무래도 다르죠. 강제철거 시킨 사장이 좀 미안했는지, 공사 동안은 일거리 주겠다고 약속했거든요.“ “...조금 있으면 그 사장 볼 수 있겠네. 그 낯짝 구경이나 해봐야지.” “그래도 착하잖아. 이 공사 끝나면 그 때는 좀 막막해지겠지만요.” “세상이... 밉니, 휴인아?” 갑작스레 내던진 내 진지한 물음에... 휴인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밉진 않은데요.” 남자치고는 가느다란 미성. “무서워요. 많이.” 지금껏 내가 아부지에게 들어온 악동들은 어딨는건지. 도저히 지금의 이 휴인이가 금은방에서 진주세트와 돈을 훔쳐들고 도주하던 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 “아, 누나 그거 줘요.” 휴인이가 작업용 헬멧을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아, 이거 내가 씌워줄게.” “에에? 진짜 마누라같잖아!!” “아, 맞다!! 이 새끼, 너 진짜 그런 쪽팔린 거짓말 왜 했어!!” “씌워줘요, 빨랑.” 휴인이는 나를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아, 근데 이거.. 지금 쓰면 앞머리 눌리겠다. 그러면 앞머리가 눈 찌르겠는데? 앞머리 까봐.” “에이, 간지 안나잖아요.” “일하는 놈이 간지를 왜 따지냐!!” 승질내며 놈의 앞머리를 넘겨주는 순간, 기억났다. 재벌아들의 왼쪽이마에 상처가 있다는 김반장님의 말씀. 드디어, 확인할 수 있다. 심호흡 후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휴인이의 왼쪽이마 확인. ...... 깨끗하다. 그렇다면 재벌아들의 범위는 좁혀진다. 환영이 아니면 비원이. 휴인이가 재벌아들이 아니라면 아까 했던 강제철거 이야기가 본인의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 이 곳 아저씨들과도 친해보였으니까. 그리고 힘든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는다거나, 나에게 쉽게 기댄다거나, 세상이 무섭다고까지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휴인이는 주동자도 아니다. 분명히 이 놈은, 주동에게 현혹된 두 명 중에 한 명. 주동은 상상할 수 없을만큼 깡도 쎄고, 패기있고, 악독한 놈. 세상을 무섭다고 하기보다는 세상을 엎어버리겠다고 할 놈이다. 거기다 나머지 세 명을 조종할 만한 리더쉽. 역시... 민서일 가능성이 높은데.... 아니, 아니다. 불현듯 생각난 사실. 민서는 환영이한테 꼼짝 못한다고 했다. 사귀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사귀는 것 또한 그녀를 조종하기 위한 장치? 아, 씨발. 진짜 이거 무슨 헐리우드 추리 영화 찍는 것도 아니고 아주 죽겄네. 재벌집 아들은 역시, 비원인가? 기품있긴 하지... 태도라던가... 말투는 시궁창이지만. 내 눈이 멍하니 자신의 왼쪽 이마를 향해있자 휴인이는 황급히 헬멧을 눌러써버렸다. 반사적으로 습득된 행동처럼. 안쓰럽다. 아직 어린 열 여덟 소년소녀들일 뿐이다. 이해가 된다. 믿고있던 세상에게 상처받을대로 상처받은 아이들이다. 조금이나마 세상에 반항해보려 하던 아이들 앞에, 내가 나타났다. 순진한 양의 탈을 뒤집어쓰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나도 외롭다고, 힘들어죽겠다고 투정부리면서, 제기랄, 두렵다. 상황은 조금 다를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절대 있을리 없다고 믿었다. 범죄심리학을 배울 때 지겹도록 들은 말. 스톡홀름 증후군. 인질로 잡힌 사람들이 인질범들에게 정신적으로 동화되어 자신을 볼모로 잡은 범인들에게 호감과 지지를 나타내는 심리현상. 무섭게도, 놈들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18. 충격 “호호, 휴인이가 잘해줘?” “애가 애기같아도 속이 깊다구.” “예, 예...” 얼떨결에 휴인이 마누라가 되어 식당 아줌마들 수다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휴인이는 아저씨들과 함께 영차, 영차 일하는 중이고... 나는 식당에서 아주머니들에게 둘러싸여 나물을 다듬고 있다. “어릴적에도 항상 방글방글 웃고 다녔다구.” 어이쿠,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 “휴인이 어릴 적 이야기를 아세요?” “그럼, 우리들이 다 봐왔는데.” “휴인이 이야기 좀 해주세요!!” 그래, 이 어릴 적 이야기로 휴인이가 지금 왜 범죄자 짓을 하는가에 대해 밝혀내려던 나의 환상은...!!! 처참히 무너졌다. “그래서 동네 안에서 길을 잃었지, 휴인이가.” “그 뿐인가? 배고프다고 풀숲에서 뭐 주워먹다가 독버섯을 먹어서.” “고추 말리고 있는데 그걸 다 밟아놔서, 얼마나 개구졌는지.” 아줌마들... 누구나 있는 그런 뻔한 이야기 말구요. 좀 진지한 걸루... 하긴, 아줌마들 입장에서도 심각한 이야기는 꺼내지 못할 것이다. 그 아프고 심각한 이야기가 바로 강제철거에 대한 것일거고, 그건 동시에 그 분들의 상처이기도 하니까 굳이 숨기는 것일게다. 그러나, 그 순간 단서가 잡혔다. 그것도... 아주 대단한. “효자였지, 휴인이가.” “에이, 효자였던 건 휴인이가 아니고 환영이지!!” “아이구, 그래, 환영이!! 두 놈이 하두 붙어댕겼으니 헷갈려서.” 환영이...? “아줌마들... 환영이도... 아세요?” “알구말구!! 휴인이나 환영이 둘 다 여기 토박인 걸.” “단짝이었지. 어찌나 붙어다녔는지.” “근데 어째 환영이는 요즘 보이질 않네... 아가씨는 환영이 어디서 뭐하는지 알고있나?” 아줌마 말씀엔 대답도 않고 생각에 빠져들어 버렸다. 환영이도.... 이 곳 토박이. 그렇다면 재벌 아들은 밝혀졌다. 비원이. 심장이 터질 듯 떨려온다. 두근두근. 이사온 지 3일째, 재벌 아들을 벌써 찾아냈다. 이제 주동만 찾으면 되는데. 그런데..... 점점 망설여진다. 주동자는 무조건 소년원 직행. 마냥 웃는 휴인이, 애들 잘 챙기는 환영이, 카리스마 민서. 주동은 셋 중 하나. 유력자는 민서. 제기랄, 그래.... 천천히 보고, 신중하게 생각하자. 아직 시간은 많아. 아줌마들이 웃고 떠드시는 사이, 그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난 멍하니 내 생각에만 빠져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12시 10분. 그 순간 그들이 왔다. 사장과 그의 딸. 그리고 비서로 보이는 아저씨 둘. 식당으로 들어와 아주머니들께 인사를 청하는 사장씨. 신사같은 깔끔한 인상이지만... 괜히 역겹다, 저 웃음. “수고하십니다.” “아, 사장님... 아이고, 이렇게 누추한데....” 예의는 차리지만 어색해하는 아주머니들. “공사현장 보고 왔습니다. 잘 되어가고 있더군요.” 잔인한 사람. 그건 말야, 아주머니들께 할 말이 아냐. 사장 옆을 보았다. 신문과 잡지에서 몇 번 접해본 인물. 스물 일곱의 어린 나이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천재 디자이너 선주린. 언론에서는 그녀를 천사라고 표현했다. 얼굴은 연예인이고, 몸매는 모델이며, 능력은 최고고, 성격은 선녀란다. 알아주는 집안에, 재력에, 명성에, 학벌에... 같은 여자로서 저렇게 완벽한 년들... 정말... 재수없다. “점심 여기서 드시고 가시죠, 아 빨리 앉으세요.” 아주머니는 재빨리 그들을 식탁으로 데려갔고, 나는 어쩔 수 없이 행주를 물에 적셔 식탁을 닦기 시작했다. “아, 이 아가씨는 처음 보는데...?” 사장이 중얼대자 아주머니가 중간에 끼어들어 대답을 대신했다. “예, 오늘 하루 일 좀 도와주러 왔어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사장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으나 선주린은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웃어보였다. 악의없는 미소였으나 기분 나쁘다. 행주로 식탁을 닦고 주방으로 들어왔을 때 아주머니들이 나에게 부탁했다. “아이고, 시언학생. 학생이 저 사장님 식사 좀 가져다주겠어? 우린 아무래도 껄끄럽네. 남편들 밥도 갖다줘야하고.“ “예? 밥은 식당에서 다 같이 먹는거 아니예요?” “큰일날 소릴. 원래는 식당에서 먹지만 오늘은 사장이 식당에 있으니까 밖에서 먹게 해야지.” “예? 그런게 어딨어요. 불공평해요. 원래 아저씨들 밥 드시라고 만든 식당인데.” “에휴... 시언학생도 아직 어려서 뭘 잘 모르네... 그나저나 사장이 진짜 여기서 밥 먹을줄은 몰랐네. 여기 밥이랑 국, 반찬은 다 담아놨으니까 이거 운반만 해주면 돼.“ “예... 아니, 그거야 뭐 어렵진 않지만...” “부탁할게. 대신 혼자 있으면 심심할테니까 휴인이 빨리 여기서 보내줄게. 휴인이랑 시언학생은 여기 주방에서 밥 먹어.“ “예? 예...” 승질난다. 웃긴다. 아무리 식당이 임시로 만든거라 좁다지만... 이 식당에서 밥먹어야 될 사람은 아저씨들인데. 힘들게 일해놓고 밖에서 밥 먹어야 되는 건 대체 상식 속의 일인가? 아줌마들은 힘들게 큰 쟁반에다 밥, 국, 반찬을 담고 아저씨들에게 운반한다. 어줌마들도 밖에서 점심을 드시겠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사장에게 줄 음식을 거칠게 쟁반에 담았다. 아줌마들이 재빨리 빠져나간 식당은 지나치게 조용해서 사장네가 하는 말들이 모두 내 귀로 쏙쏙 들어왔다. “건물 디자인은 어떤 거 같니, 주린아?” “아직 골격 뿐이라 자세한 건 완성돼봐야 알겠지만, 괜찮네요.” “다행이구나.” “그건 그렇고, 여기서 일하는 분들 다 전에 여기서 사시는 분들이예요?” “응, 아줌마들은 거의 다고, 공사장 인부들은 뭐 3분의 1 정도? 공사는 아무래도 전문적인 일이니까 우리 회사에서 파견나온 사람이 대부분이지. 집이 강제철거된 사람들에겐 일자리 제공이 먼저니까 무거운 물건 운반, 뭐 그런걸 시키지. 중요한 일은 못 맡겨. 부실공사 문제 때문에.“ 너무 쉽게 나오는 강제철거란 말, 그리고 일자리 제공. 너무해, 그 분들로서는 하나뿐인 보금자리를 잃으신 거고, 그 분들로서는 이게 유일한 생계라구. 당신들과는 달라. “그래도 걱정되네요. 왜, 그 여자애들 두 명.” “됐다. 이미 끝난일이야. 그건 이쪽 사람들도 쉬쉬 하는 이야기라구.” 여자애들 두 명? 설마, 아까 휴인이가 이야기하던? 저항하다가 한 명은 소년원 가고, 한 명은 정신병원 갔다는? “애들이 어리다면서요.” “어렸기 때문에 무모했지. 강제철거하던 우리회사 쪽 부장을 칼로 찔렀으니... 아마 그 애가 열 일곱 일거다.“ “그 부장님은 어떻게 됐는데요?” “죽었다. 급히 병원까지 호송했는데... 여러 번 찔렀던 모양이야. 대신 회사에서 그 유가족들에게 월급은 꼬박꼬박 전달하기로 했다.“ “큰일이네요... 휴, 정신병원 간 여자애는요? 그 애는 열 여섯 살 이라면서요.” “아이고, 됐다. 그만 이야기하자.” 내 생각보다 굉장히 스케일이 큰 이야기다. 그 여자애들은... 누구일까? 아직 어린데... 대체 왜 이런일에 휘말려서... “그나저나 니 결혼 전까지는 쇼핑몰이 완성돼야 할텐데.” “결혼은 여유있게 해도 괜찮아요.” 뭐? 선주린이 결혼한다고? 그래서 얼굴에 행복히 넘쳐보였구만. 결혼할 남자는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일까. 선주린이 입은 하늘색 원피스가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저것도 자신이 디자인한걸까. 쇼핑몰을 차리면 저 한 벌에 얼마 받을까. 염치없다, 저 사람들. “오빠도 결혼은 천천히 해도 된대요. 어차피 약혼은 이미 해놨으니까.” “에이, 무슨 소리. 이제 진한이도 서른인데.” ............뭐.........? “오빠도 맡은 사건이 있어서 당분간은 바쁠거래요.” “그래, 검사니까 바쁘기야 하겠지. 결혼하고 나서도 너무 바가지 긁지마라.” “아빠도 참. 절 어떻게 보시는거예요.” “오늘은 진한이랑 점심먹지 그랬니.” “괜찮아요. 어제 좋은데서 저녁했어요.” “이제 우리 쪽 비리 생기면 웬만한 건 진한이가 다 막아줄거다. 대신 공무원이라 부족한 돈은 우리쪽에서 채워줄 수 있으니까...“ “너무 그런 식으로 몰고가지 마세요. 우리 진짜 사랑해요, 아빠.” “허허, 그래. 아무튼 일등 신랑감이지, 진한이는.” 빌어먹을. 그래, 지금 생각났다. 진한오빠가 한 말. 다시 만나는 여자... 자기보다 세 살 어리고, 집안이 좋고, 직업이 디자이너인 여자. 나와는 다른 여자. ...........선주린이라는 여자......... 19. 슬픈 목소리 진한오빠와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그녀의 말이 거슬려 미칠 것 같았다. 뭐? 사랑해? 진심으로 사랑해? 그런 난, 난 뭐야? 웃기지마, 내가 진짜였고, 내가 먼저였어. 니가 아니라, 내가 먼저였어. 진한오빠랑 진심으로 사랑한 건, 니가 아니라 나였어. 단지 난 조건에서 너한테 밀린거야. 사랑은 내가 한 수 위였어. 나도 모르는 새에 쟁반에 반찬을 담던 내 손길이 멈추고, 대신 큰 물병을 망설임없이 손에 집어들고, 사장네가 이야기 중인 그 테이블로 투벅투벅 걸어갔다. 그리고... 그리고....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삭힐 생각 없이... 선주린, 그녀의 머리위로... 물을 퍼부어 버렸다. 물통을 수직으로 거꾸로 세워서, 그녀의 온 몸이 물에 젖어버린다. 눈 깜짝할 새 1.5리터 정도의 물세례를 받은 그녀.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이런 수모는 못 받았겠지? 미안, 난 물 한 잔 퍼붓는걸로 만족할 여느 여자들과는 달라서 말이야. 근데 있잖아, 그거 알아?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보다 내가 100배는 더 비참해. 그녀는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물이 뚝뚝 흐르는 갈빛 머리카락, 순식간에 젖어버린 하늘색 원피스. “아니, 자네 뭐하는 짓인가!!” 비서 한 명이 일어서 나에게 소리치고, 사장은 딸의 옷을 닦아주는 데 바쁘다. 그런데, 내가 정말 참을 수 없었던 건.... “아니요,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 식당안이 좀 더웠는데 시원하고 좋네요. 괜찮아요. 제가 좀 맘에 안드셨나 봐요. 미안해요.“ 차분하게 미소지으며 말하는 그녀 때문이었다. 씨발, 이진한. 왜 하필 이 여자냐. 왜 내가 미워하지도 못하게 이런 여자냐. 욱해서 난동부린 내가 왜 더 나쁜 년 되냐. 그냥 못된 년 골라잡지. 니 마누라 될 년이, 나한테 물세례 받고 분해서 내 뺨이라도 갈기면, 내가 그 여자 미워할 수라도 있지. 이게 뭐냐. 너는 나쁜 놈인데, 여자는 왜 이렇게 완벽하냐. K.O.네....... 내가 완벽이 졌네. 진짜 오빠 말대로.... 나랑은 다른 여자네. “어이쿠!! 마누라!!! 왜 이래!!” 그 때 혜성처럼 등장한 휴인이. 일을 끝내고 마구 뛰어온 듯 굉장히 더럽고도 급박한 몰골이었다. 작업용 헬멧을 벗어던지고 와서 앞머리 몇 가닥은 이마에 붙은 채였다. 지금 내가 저지른 짓을 보고 상황파악이 된 듯한 놈은 쏜살같이 선주린 앞으로 다가와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뭐야.... 내가 한 짓, 왜 니가 사과해? “죄송합니다!! 이 여자가 제 마누란데 가끔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남들한테 시비를 잘 겁니다. 주의줬어야 하는 건데 죄송합니다. 약 먹을 시간이 조금 넘어서. 약 먹이면 다시 괜찮아져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왜 나를 미친여자로 만드는거야!! “마누라!! 내가 이런 짓 하지 말랬잖아!! 약 먹자, 이리와!! 나가자!!” 내 손을 덥썩 잡고 나가려는 강휴인. 그러나 왠지 모를 오기가 발동한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버팅기기 시작했다. 그 순간, 뒤에서 들려온 말. “전 정말 괜찮아요. 신경쓰지 마세요. 그나저나 어려보이는데, 좋아보이네요, 두 분.” 끝까지, 못되고 비참한 건 나다. 짜증이 차오른다. 휴인이는 한숨을 쉬는 듯 하더니, 방금 전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힘으로 무자비하게 나를 끌어당겼다. 나는 저항조차 못하고 밖으로 끌려나가면서 무지막지하게 소리만 질렀다. “놔!! 놔, 이 새끼야!! 이거 놓으라고!!” 그러나 내 말에 아랑곳않고 나를 질질 끌고가던 휴인이는... 식당과 좀 거리를 둔 공사장 뒷 편으로 와서야 내 손목을 놓아주었다. 휴인이, 표정이 변했다. 가만히 나를 노려본다. 무섭다. “뭐야? 왜 그랬어?” 반말이다. 꼬박꼬박 존대쓰던 놈인데 많이 화났나보다. “니... 니가 상관할 바 아니야.” “그 문제가 아니잖아!!” 큰 고함소리에 나도 모르게 움찔 해버렸다. “누나 행동에!! 여기서 일하는 분들의 생계가 달려있어!! 이 사람들을 화나게 하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어!!! 알아들어?“ 갑자기 눈물이 흘러나왔다. 휴인이가 무서워서도 아니었고, 내 행동이 후회돼서도 아니었다. 당당한 선주린의 따뜻한 눈빛이 머릿속에 박혀서 나를 계속 비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누나 울어?” 휴인이의 말에 거짓말처럼 눈물이 펑펑 쏟아져나왔고, 나는 결국 쭈그려앉아 대성통곡을 해버렸다. “누, 누나... 화내서 미안해. 이렇게 울리려고 한 건 아닌데.” “.......오빠......” “응?” “........ 진한오빠.........” 신음소리처럼 터져나오는 내 중얼거림에 휴인이는 내 앞에 쭈그려앉았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 귓가로 들려온다. “뭐든 말해봐, 누나.... 들어줄게.” 너무나도 감미로운 목소리에 마법에 걸린듯이 나는 나의 이야기를 풀어내었다. “나... 나랑 사귀던 전남자친구가, 으흑, 그 오빠가 으윽... 아... 아까 그 여자랑, 흑... 결혼, 한대. 근데 그 여자가, 흑... 저렇게 나오니까.. 내가 너무 비참“ “.....아직도 사랑해, 그 남자?”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묻는 휴인이. “아니, 그 나쁜놈 내가 왜....” “...........” “......사랑해.... 근데 사랑해.... 그래도 사랑해.....” 사랑한다고 중얼대며 다시 통곡하는 나. 휴인이는 그런 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잔인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누나...” 꿈결에서 속삭이듯 아득한 그의 말투. “남녀가 사귀다 헤어지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 “사람들이 공기로 숨쉬고, 지구가 자전하는 것처럼... 당연한 거라구.” “....” “아파하는 시간이 아깝다구, 응?” “.....” “엄한 사람한테 질투마. 저 여자가 잘못한 거 없잖아. 누나도 그거 알지?” 휴인이 말이 맞았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휴인이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방긋 웃으며 말했다. “저 여자가 억지로 누나 남자 가져간 거면, 그 물 내가 대신 부어줬을텐데. 그 뿐인가? 그 남자가 누나랑 안 헤어지고 저 여자랑 바람핀 거였음 내가 그 남자 반 죽여놨다!!“ “치... 그럼 너 짤려.” “그럼 다른 노가다 찾아야지. 누나도 같이 따라가서 또 내 밥 퍼주고.” 어이없는 그의 말에 피식, 하고 내가 웃어버였다. “이제 드디어 웃었네. 웃었으니까 내가 비밀 말해줄게. 아까 누나가 물어봤던 거. 아까 그거 우리동네 이야기 맞아. 나 이 동네 토박이야.“ “그거 다 알아. 아줌마들이 이야기 해줬어. 뻔하잖아. 그게 무슨 비밀이냐. 환영이도 여기 토박이라며.“ “에에? 그것도 완전 비밀인데!! 그것도 아줌마들이 이야기 해줬어?” “응.” “에이, 아줌마들 완전 수다쟁이!!!” 휴인이는 입술을 댓발 내밀고 승질을 냈고 나는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근데... 환영이는 왜 여기서 일 안해?” “걔는 이 동네 싫어해, 구질구질해서. 걔는 더 힘든 일 하고 있거든.” “... 무슨 일?” “... 그냥 누나가 내일은 환영이 일하는 데 같이 가봐. 보면 바로 알게될거야.” “그럼... 그 여자애들은 누구야? 왜, 소년원 가고, 정신병원 갔다는.” 점점 대담해지는 내 물음. 휴인이는 내 물음을 듣더니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 담배를 빼물었다. “야, 뭐야!! 나는 피지 말래놓고 넌 왜 담배피냐!!?” “...... 모르겠어, 나도” “....뭐?” “나도 몰라. 그 여자애들이 누군지.” 화악 퍼지는 담배연기. 어색해진 분위기. 이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나는 휴인이를 향해 소리쳤다. “야, 이 쉐끼야!! 근데 너 왜 은근슬쩍 말 놓냐!!?” 내 물음에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휴인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휴인이는 오른손으로 내 왼쪽 뺨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누난 대체 뭐냐....” “..........” “..... 강자냐.... 아님 약자냐.....” “.....” “... 나처럼... 우리처럼....” 내가 들은, 놈의 가장 슬픈 목소리. 20. 그 남자들의 진실 1 (작가시점) 휴인은 들어오자마자 방 문을 급하게 걸어잠궜다. “뭐야? 일찍 왔네?” 밥하고 있던 환영의 말에는 답도 않은 채 그는 바로 질문을 퍼부었다. “애들 들어왔어?” “어... 비원인 방금 들어와서 옷 갈아입는 중이고, 민서는 샤워중인데.” “신비원 빨리 불러와.” 시언이 알고있는 평소 휴인의 모습과는 달랐다. 그는 웃고있지 않았으며, 차분했고, 냉소적인 모습이었다. “들어오자마자 왜 그래? 시언이 누나랑 무슨 일 있었어? 그 여자 정체가 뭔 거 같애? 대충 같이 하루 다녀보니까 알겠어?“ 환영은 오이를 칼질하다말고 휴인에게 이것저것 물었고, 휴인은 피곤하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애들 다 모이면 이야기할게. 근데 너 얼굴 왜 그래? 멍 또 들었는데? 무리하는 거 아니야?” 인상 쓴 채 묻는 휴인을 향해 환영은 씨익 웃으며 멍이 든 부분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 하는 일이 그런걸. 어쩔 수 없잖아.” 그 순간, 건넌방에서 옷을 갈아입은 비원이 나왔다. 비원이 나오자 휴인은 그들 방에 놓여져있는 작은 티비의 볼륨을 최대로 키웠다. 온전치 못한 티비가 내는 소음이 지지직 걸렸다. “뭐야, 갑자기? 시끄러.” “어쩔 수 없잖아. 이 집은 방음이 안되어있으니까. 그 누나한테 우리 대화가 들키는 날은 끝장이야. 환영아, 민서 빨리 데려와. 급해. 좀 있으면 시언누나가 밥 먹으러 우리집 올거야. 그 전까지 중요한 이야기 다 전달할게.“ 단호한 휴인의 말에 환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민서가 들어가있는 화장실 문을 노크도 없이 열어제꼈다. “아, 이 새끼야!! 뭐야!! 깜짝 놀랐잖아!! 노크 안 하냐?” 중성적인 민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끼, 새삼스럽게 노크는 무슨... 빨리 나와, 대장님이 하실 말씀 있대.” “야, 지환영. 내가 대장님이라고 부르지 말랬지.” 휴인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환영에게 주의를 주었다. “너 그렇게 부르다 버릇된다. 실수해서 남들 앞에서 그렇게 부르면 정체 들켜.” “아아, 오케이... 주의할게.” 관계자 외 출입금지. 주동자 강휴인. “도대체 뭐길래 또 이렇게 심각해?” 그 때 화장실에서 샤워를 마친 민서가 나왔다. 츄리닝 바지를 입고, 웃통을 벗은 채, 젖은 머리를 말리면서. 웃통을 벗은 그녀, 아니, 그는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 비록 평상시에는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여장을 하고 있었을지라도 웃통을 벗고 있는 그에게는 남자로서의 매력이 철철 흘러넘치고 있었다. “야, 너도 내가 경고했지. 여장 하지않고 돌아다니지 말라고.” “얼마나 답답한 지 아냐? 집 안에서도 가슴에 뽕 넣고 다니질 않나. 긴 여자가발 쓰고 야구모자까지 덮어쓰질 않나.“ “어쩔 수 없잖아.” “신비원이 이제 날 진짜 여자로 보기 시작했다니까? 날 보는 눈빛이 심상치가 않아.” 민서는 여자같이 매끈한 몸매로 신비원을 유혹하듯 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지랄. 안떨어지냐, 너?” 비원의 말에 민서는 씨익 웃으며 윗도리를 집어 몸에 걸치고는 가슴에 솜뭉치를 집어넣었다. 민서의 성격도 시언이 알고있는 카리스마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장난끼 있는 모습으로 똘똘 뭉친 열 여덟 소년일 뿐이었다. “요즘 이 가슴이랑 각선미 때문에 아저씨들이 많이 물린다니까? 내가 남자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하겠지? 아, 역시 내 얼굴은 남자로나 여자로나 먹혀주.. .....뭐야, 왜 이렇게 심각해?“ 자신의 유머가 통하지 않자 민서는 볼멘소리를 하며 가발을 쓰기 위해 긴 머리의 여자가발을 집어들었다. “잠깐, 아직 쓰지마.” “왜, 강휴인? 아까는 여장 하지말고 돌아다니면 안된다며.” “일단 앉아봐.” 휴인의 말에 민서는 바닥에 철푸덕 앉았다. 가발을 쓴다해도 그의 눈매는 남자다움이 느껴질 것 같았다. 그래서 항상 야구모자를 덮어쓰며 눈매를 가리는 모양이었다. “그 여자, 정시언... 대충 경찰에서 보낸 게 확실한 거 같애.” 휴인의 말에 나머지 세 명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무래도 우리 정체 알아내려는 거겠지. 다들 각별히 조심해야 될거야.” “확실해? 그 어리버리가?” 민서가 방항하듯 반문했다. 민서의 눈을 바라보며 휴인이 대답했다. “그 여자가 오늘 내 이마를 살폈어.” “에엑? 뭐야, 생각보다 대담한데? 우리가 의심할거란 생각은 안하나? 일부러 다들 앞머리 길게해서 감춘건데!!“ “어쨌든 난 재벌 아들이 아닌 거 들켰어. 중요한 건, 환영이 정체도 탄로났다는거야.” “.... 뭐? 왜 나까지....” “아줌마들이 말하셨어. 너랑 나 달동네 토박인거.” 휴인의 말에 환영이 좌절한 듯 얼굴을 감싸쥐었다. 방금전까지 농담을 내던지던 민서의 표정도 심각하게 굳어있었다. “정시언 그 여자는 이미 재벌아들은 비원이로 확정지었을거야. 이제 더 이상 눈속임은 안돼. 그러니까 신비원.... 부탁한다.“ 휴인은 한숨을 내쉬며 비원을 향해 작은 칼을 내밀었다. 옆에서 보고있던 환영과 민서는 경악을 했지만 비원은 칼을 받아들며 피식 웃었다. “미친 새끼들....” 민서가 중얼거린 동시에 비원은 민서의 얼굴을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의 이마를 들춰보았다. 민서의 이마에 선명한 상처가 보였다. “꽤 상처가 깊네?” “야, 웃기지 마. 이건 오버야. 난 이거 꿰맨거야. 신비원이 오늘 칼로 째도 병원가서 꿰맬 돈도 없잖아. 거기다 최근에 생긴 상처인 거 티도 다 나고.“ “살짝 째고 대일밴드 붙이고 있으면 지가 알아서 아물겠지.” “무서운 새끼. 그냥 그리면 되잖아!!” “내가 땀 흘려서 그린 거 지워지면?” “니가 땀 흘릴 일이 뭐 있냐? 호스트빠에서 일하는 새끼가!!” “어설픈 눈속임은 안 통한다잖아. 아, 가만히 좀 있어, 상처 위치 좀 파악하게.” “야, 그래두” 민서가 무모한 비원의 행동을 막으려 입을 열었을 때 비원은 이미 자신의 이마를 칼로 상처낸 뒤였다. “으, 독한 놈... 안 아파?” 민서는 얼굴을 찡그리며 비원의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피를 바라보았다. “안 아플 리가 있냐... 참는거야. 야, 휴지 좀.” 비원의 말에 환영이 급히 그의 손에 휴지를 쥐어주고 구급상자를 찾았다. “미안하다, 처음부터 철저히 하는건데.” “됐어, 강휴인. 어차피 내 몸뚱아리에 미련 없으니까. 우리 재벌 도련님 정체 숨기려면 어쩔 수 없지.“ 비원은 중얼거리며 민서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았다. 민서는 여전히 인상을 찡그리며 비원의 피를 쳐다보고 있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재벌 후계자 백민서. 그들의 계략은 천재적이었다. 재벌 아들이 누군인지 탄로 나지 않게 하기위하여 진짜 재벌아들인 백민서를 여장시켜 버렸다. 경찰들은 재벌 아들 백민서가 여자로 확인되자 그들이 이름을 바꿨다고 생각했다. “재벌 아들은 윤곽을 잡아도 상관없어. 주동만 쉽게 잡히지 않으면 무사하니까. 각자 맡은 성격에 충실하자. 연기 잘해. 특히 백민서 너.“ “닥쳐. 난 카리스마 있고 무게있는 터프한 여자 연기 잘 하고 있어. 니 연기가 제일 가증스러워. 귀여운 척. 말도 안돼, 냉정한 강휴인씨가.“ “왜 이래, 나도 어릴땐 애교 많았어.” 휴인의 말에 민서가 혀를 쑥 내밀어보였다. “암튼 내일은 그 누나가 환영이 따라다닐거야. 조심해. 경계하되 거리를 두진 마. 무조건 그 여자가 우릴 믿게 만들어야 돼.“ 휴인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불안했다. 아까 울던 시언의 모습에 마음이 흔들렸었다. 시언이 그들을 믿는 것보다 그들이 시언을 먼저 믿게 될 것 같았다. “근데 강휴인, 너 진짜 그 누나한테 관심있어?” “그, 그럴리 없잖아!!” “근데 담배피지 말란 말 왜 했어?” “관심사를 돌려야 우리 관찰하는 시선이 덜해지지.” 민서는 다행히 휴인의 말에 쉽게 수긍했다. 휴인이 시언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유도하기 위해 그녀에게 낯간지러운 말을 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오늘, 갑자기 그녀에게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 그 여자!! 자, 잘난 게 뭐 있다고 좋아하냐!!” 더듬거리며 말을 잇는 휴인은 아랑곳 않고 민서가 중얼거렸다. “에에... 난 그 여자 좋던데, 귀엽고.” 거기서부터였다. 위험한 러브스토리의 시작은. 바로가기 Daum 카페 음악샵 내 블로그 내 메일 내 쪽지 인터넷소설닷컴 cafe.daum.net/youllsosul 훈장(공개) | 회원수 947,214 카페정보내 정보 가입 110 방문 18313 새글 251 카페지기 [주인]유리 개설일 2002.01.22 프로필 수줍은미소☆ 수정 쪽지 0통 메일 50통 내 글 반응 내가 쓴 글 작성중이던 글이 있습니다. 휴대폰 카페 카페 초대 회원 보기 소모임 바로가기 -------------- [소모임 만들기] 카페 ON (미사용중)채팅 카페 탈퇴 퍼옴- 퍼옴완결방 책임운영자 : 영계 (stylehyejin@hanmail.net) 최신목록 목록 윗글 아랫글 [[　　로맨스]] [청몽채화] 관계자 외 출입금지 21 - 40 글쓴이: [퍼옴·반휘] 조회수 : 27867 08.08.01 13:30 http://cafe.daum.net/youllsosul/KRDt/10636 ▷▶▷▶▷▶▷▶▷▶▷▶▷▶▷▶▷▶▷▶▷▶▷▶▷▶▷▶▷▶▷▶▷▶ 작가 : 청몽채화 감상주실곳 : khyem87@hanmail.net 작가 카페 : http://cafe.daum.net/chaehwa (┗BlueDream┓채화) 작가 버디 : 하얀다섯 ▷▶▷▶▷▶▷▶▷▶▷▶▷▶▷▶▷▶▷▶▷▶▷▶▷▶▷▶▷▶▷▶▷▶ ┗BlueDream┓채화 http://cafe.daum.net/chaehwa 많이 가입해 주세요 ^^♡ ▷▶▷▶▷▶▷▶▷▶▷▶▷▶▷▶▷▶▷▶▷▶▷▶▷▶▷▶▷▶▷▶▷▶ 21. 그 남자들의 진실 2 (작가시점) “맞다, 강휴인. 근데 너 나랑 민서랑 사귄다는 토나오는 이야기는 왜 한거냐?” 환영이 비원의 이마를 휴지로 지혈해주며 물었다. “아, 그거... 민서가 남자인 거 조금이라도 눈치 챌까봐. 의심 차단하려고.” “그런거 알아챌 정도로 똑똑해뵈진 않던데. 지금까지 민서 남자인 거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잖아.“ “그건 그렇더라. 오늘 하루 그 여자 푼수 짓을 얼마나 하던지.” “근데, 그럼 뭐야, 그 여자? 경찰인가?” “젊어보이던데, 설마.” 휴인은 잠시 망설이다 비원에게 말을 걸었다. “비원아, 애들한테 정시언 정체 좀 알아보라고 전해줘.” “오케이~” 비원은 대답하며 피가 멈춘 이마에 대일밴드를 붙였다. 그들이 말하는 ‘애들’은 고아원 출신의 남자 세 명이었다. 그들보다 한 살 어린 열 일곱 살의 소년들로 겉모습은 가난 언더그라운드 랩퍼팀이었다. 고아원에서 살던 당시 입양이 되지않아 중학교를 졸업한 후 셋이 함께 독립하여 살고있는 중이었다. 현재 그들의 뒷집에 살며, 비원을 믿고 따랐던 동생들이라 지금도 그들의 일을 돕고 있었다. 열음, 산이, 준휘. 그들의 본모습은 바로 해커. 그들의 허름한 집 안에는 최신식 컴퓨터 설치가 되어있었다. 경찰들이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정체를 잘 파악하지 못하는 것도 이 어린 해커들의 공이 컸다. 그들은 하늘 아래,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모든 것을 알고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민서의 새로운 주민등록증을 만들어준 것도 그들이었다. 2자로 시작하는, 완벽한 여성으로서의 주민등록증을. 민서 뿐 아니라 ‘관계자 외 출입금지’ 모두의 주민등록증 주소는 현재 사는 집으로 이전이 되어있었다. 아니, 이전이 되었다기보다 위조했다는 표현이 옳겠다. “저, 근데 휴인아....” 그 때 환영이 조심스레 휴인을 불렀다. 휴인은 왜 그러냐는 듯 환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 오늘 환희 면회 다녀왔어.” 휴인의 표정이 굳었다. 민서와 비원도 휴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래... 잘 지내?” “응... 한 번 너 데려오라는 눈치던데. 보고싶어해, 알잖아... 환희 나는 되게 무시하는거.” “그래, 시간나면 한 번 갈게.” 환영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 꺼낸 이야기는 앞으로 할 본격적인 이야기의 맛보기였다. “유인이한테는... 정말 안 가볼거야?” 휴인은 ‘유인’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입술을 깨물었다. “휴인아... 니 동생이잖아, 친동생....” 환영이 달래듯 말하자 휴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보고싶지... 않아...” “... 환희가 제일 걱정하는 것도... 유인이야.” “보고싶지 않다고... 말했다....” “강휴인!!!” “밤마다 발작해!!!!!!!!!!!” 휴인의 고함소리에 모두가 조용해졌다. 그들 사이에 방음을 위해 켜둔 티비만 시끄럽게 소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유인이만 보고오면, 밤마다 발작해... 화나서, 내 동생 저렇게 만든 게 뭔지, 다 엎고싶어서... 세상이 무섭고, 내가 미워서... 참을 수가 없어서....“ “니 탓이 아니야, 휴인아...” “그 애를 혼자 버려둔 건 나야....” “유인이 그렇게 되고 나서... 알아보는 사람은 친오빠인 너밖에 없어... 그러니까, 한 번 가줘....“ “오빠 노릇도 못해줬어, 난... 사춘기 되고나서는 돈 벌겠다고 맨날 가출이나 해댔고. 그래서 나보다 유인이 더 챙겨준 건 너였잖아.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도, 집이 강제철거 됐을 때도... 유인이 옆을 지켜준 건 너랑 환희였어, 내가 아니었다고!! 그게 미안해 미치겠어. 오빠가 돼서 힘들 때 그 애만 홀로 남겨둔 게!!! 죄책감에 잠이 안 와!! 세상천지 그 어느 것에도 반응 없다가, 나만 보면 웃는 유인이 보면, 그 정신병 보면... 밤마다 발작한다구. 정신병원에서 면회 끝나고 돌아서면 유인이가 울부짖어. 가지말라고 미친듯이 울어. 맨날 나 기다리는 애라 측은해. 내가 집에 없었을 때도 나 기다렸겠구나 싶어서. 내 얼굴 보여주는 건 괜찮아. 아무리 내가 괴로워도 유인이만 행복하면 돼!! 근데 내가 돌아서면 애가 미치잖아. 너무 힘들어서 지친 애한테, 다시 내 뒷모습 보여야겠어? 세상에서 제일 착한 애였는데, 난 항상 곁에 있어달라는 그 애 말 무시하고 밖으로 나다녔어. 그러니까... 결국 내 동생 미치게 한 건 나야.“ 길게 토해낸 휴인의 넋두리에 모두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곁에서 휴인의 상황을 모두 봐 오고, 힘든 사건을 함께 겪어왔던 환영만이 그를 이해하는 듯 했다. 민서는 울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세상은 불공평했다. 자신이 겪어온 세상은 부족한 것 없는 천국이었다. 온갖 위선과 비리가 난무하는 천국. 믿을 것 없는 인생이었지만 휴인이나 환영처럼 기본적 의식주를 걱정해 본 적은 없었다. 결국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만나게 된 휴인을 믿고 지옥으로 발을 내딛었다. 천국과 지옥을 파괴하고, 다시 새로운 천국을 세우기 위해. “휴인아....” “알아, 지환영? 나... 환희한테도 미안해 죽겠어. 어린 여자애가 소년원에 들어갔어.” “환희 소년원 간 거, 네 탓 아니야.” “내가 그 때 있었으면!!!” “.....” “내가 그 때 그 자리에 있었으면, 그 새끼 칼로 찌른 거 나야. 환희가 사람 찔렀던 그 칼이 내 손에 있었을 거라구!!“ “환희는.....” “유인이 지키려고 그런거지. 유인이 지키려다 사람을 죽였다구. 만약 내가 있었으면 환희가 손에 피 묻힐 일도 없었을거야.“ “그 땐 나도 그 자리에 없었어, 너무 니 탓 하지마.” “그래, 그 때 넌 병원에 갔었지. 우리 아버지 살리려구!!! 나와는 다르잖아. 아무것도 모르고 사고치고 다녔던 나랑, 어떻게든 내 가족 챙기려던 너랑은 다르잖아.“ “이러지마. 우린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였잖아, 새삼스레....” “환희 변한 것도... 나 때문이야...” 어린 시절, 환영과 그의 여동생 환희, 휴인과 그의 여동생 유인은 늘 함께였다. 그들은 공통점이 많았다. 어머니들은 집을 나갔고, 끼니를 자주 걸렀다. 환영의 아버지는 알콜중독자였고, 휴인의 아버지는 병에 걸려 누워있었다. 그 동네는 다 그랬다. 부모 한 쪽이 없는 건 예사 일이었고, 나머지 부모들도 다 아프거나 알콜에 중독되어 있거나, 폭력을 휘두르거나, 돈 벌어오겠다고 집을 나가있었다. 그러나 그들 네 명은 자신들이 행복하다고 생각했고, 웃는 법도 알고있었다. 환영과 휴인은 동생들에게 언제나 든든한 오빠였다. 환희는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소녀였고, 유인은 걱정이 될만큼 착한 소녀였다. 어린 시절의 추억은 성장하는 그들과 함께 자랐고, 환희는 휴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풋사과처럼 싱그러운 짝사랑이었다. 그러나 휴인에게 있어 환희는 친동생과 다름없는 귀여운 동생일 뿐이었다. 그 즈음, 알콜중독증에 시달리던 환영의 아버지가 죽었다. 언제나 환영남매를 때리고 괴롭히던 환영의 아버지가, 돈이 없어 병원도 못 간 채, 약도 구하지 못한 채 그냥 그렇게 가버렸다. 착한 아들 환영의 지극정성이던 사랑도 마다한 채로. 장례치를 돈조차 없었다. 휴인은 그것에 충격받아 구질구질한 동네를 떠나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픈 아버지는 버려두고, 우는 동생을 겨우 달래놓고 가출했다. 환영이 말리고, 환희가 잡아도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정작 가출한 휴인은 돈을 벌지 못했다. 질풍노도, 사춘기에 시달리던 소년은 그저 사고치고 노는 데 정신이 팔렸다. 주유소에 취직한 그는 친구들과 어울려 밤새 술을 마셨고, 담배를 피웠고, 물건을 훔치고, 패싸움을 했다. 휴인은 한 달에 한 두 번 정도만 집에 들렀고 그 때마다 환영은 그를 다잡으려 해썼다. 그러던 어느 날, 휴인과 환영은 대판 싸우고 되었고, 휴인은 두 달 째 집에 들어오길 거부했다. 그 때, 사건이 터졌다. 대규모 쇼핑몰 계획에 따른 갑작스런 강제철거 소식에 동네사람들은 우왕좌왕.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휴인의 아버지 병도 악화되었다. 환영은 의사를 부르로 인근 병원으로 달려갔고, 환희는 죽을 쑤어 휴인의 집을 방문했다. 그러나 그 순간, 환희는 강제철거를 진행하는 부장이 휴인의 집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 부장은 아픈 휴인의 아버지를 발로 차는 것도 모자라, 그 아버지 앞에서 유인이를 성폭행하고 있었다. 아끼는 이웃동생이 울며 짐승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 애쓰는 걸 보고, 딸을 지켜주지 못해 자신을 저주하며 눈물흘리는 휴인의 아버지를 보고, 분노한 환희는 서둘러 부엌으로 달라가 칼을 가져왔다. 그리고, 휴인의 아버지가 숨을 거두는 그 순간, 환희는 손에 쥐고 있던 칼로 짐승을 찔렀다. 짐승에 피에 젖은 유인이 울부짖고, 환희가 칼을 손에 쥐고 덜덜 떨고 있을 때에야, 의사를 대동한 환영이 도착했다. 그러나 냉정한 세상은 환희를 범죄자로 몰아세웠고, 그녀를 소년원에 수감시켰다. 성폭행과 살인현장의 목격으로 말도 못하고, 그 무엇에도 반응하지 못하는 유인은 정신병원으로 보내졌다. 환영 혼자 그 모든 아픔을 처리하고 있을 때에야, 휴인이 돌아왔다. 그는 죽은 아버지를 위해 울어주지도 못했으며, 정신병원으로 끌려가는 동생을 안아주지도 못했고, 환희에게 용서를 빌지도 못했다. 소년원에 들어간 환희는 환영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워 면회오는 그를 외면했다. 환영은 언제나처럼 동생을 챙기는 오빠의 모습이었지만, 환희는 아픔을 고스란히 견디며 살인자인 동생 뒷바라지에 힘쓰는 오빠가 못마땅했다. 오빠만은, 더러운 자신을 잊고, 세상은 잊고 행복하길 바랐다. 그러나 결국은 그녀도 아직 어린 소녀인지라, 사랑했던 휴인의 면회까지 외면할 수는 없었다. 휴인이 면회를 오면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눴고, 유인의 안부 또한 물었다. 그 무렵이었다, 휴인이 결심한 것은. 분노에 휩싸인 그는 자신을 저주했고 세상에 복수하기로 마음 먹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상처받은 소년들을 모아. 새로운 천국을 위해. 환희를 위해, 유인이를 위해. 모든 상처입은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자신까지 버리고, 새로운 천국을 건설하기로 결심했다. 22. 미안하다 "야아~!! 니들 뭐하냐!!?“ 이 자식들, 정녕 나에게는 이제 밥조차 주지 않기로 결심했단 말인가. 휴인이를 따라다니게 된 관찰조사 첫날. 선주린에게 물을 퍼붓고도 나 자신이 비참해서 엉엉 울던 나를, 휴인이놈은 어르고 달래서 집으로 데려왔다. 바로 집에 와버린 덕분에 휴인이나 나나 일당은 못 받았지만, 내 돌발행동으로 아저씨와 아줌마들이 피해받지는 않은 것 같았다. 억지로 나를 집 안으로 밀어넣은 휴인이 넉분에 지금은 꽤 안정을 취하고 밝은 모습으로 저녁을 얻어먹으러 왔더니만... 우쒸!! 이 새끼들이 문을 잠궈놨다!! “야아!! 나 점심도 못 먹었어!! 밥 줘, 밥!!” 대체 뭐하는거야, 티비소리는 이빠이로 켜놨구만, 무지 시끄럽네. 그 때 급박하게 그들이 우다다다 움직이는 그림자가 흐린 창문 사이로 슬쩍 보이고 비원이가 드디어 문을 열어주었다. “아, 뭐야!! 왜 이렇게 문을 늦게 여냐!!” “밥 주는 것만 해도 고마워해야지, 불평하기는...” “뭔 소리야!! 내가 니들 집세 내주고 그 답례로 밥 얻어먹는거구만!! 난 정당해, 임마!!” .... 내가 갈수록 뻔뻔해지는 느낌... 나는 신비원을 밀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다들 집에 있구만 문은 왜 안 열어줘!!?” “미안, 누나!! 티비보느라 잘 몰랐어!!” 휴인이 저 새끼, 이젠 아주 나한테 반말하기로 작정했구만. “아니, 대체 뭐 보느라....” 그 순간, 내 눈에 띤 티비 속의 장면은... 헉.... 뭐, 뭐냐, 저것은!!? 야.... 야동? “어제는 변강쇠하더니 오늘은 어우동 하는거 있지. 내일은 뭐할까?” “악!! 이 변태새끼들!!” “우와, 저거봐.” “왜, 왜?” 놈들보다 더 흥분한 나. 안 보는 척 하면서 계속 곁눈질로 힐끔힐끔... 에이씨, 어제 변강쇠도 재밌었겠다. 못 봤는데 아깝네. 어머, 어머, 어우동 옷 벗는다!! 어쩜 좋아!! “야, 야... 저거 채널 몇 번이야?” “변녀....” “입 닥쳐, 신비원!!” 티비에 집중하는 휴인이, 채널 궁금해하는 나, 시비거는 비원이. 환영이는 그런 우리를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뒤돌아서 요리 중이었다. 민서는 담배를 척하니 물고 티비에만 시선 고정 중. 역시나 캡모자를 눌러쓰고 있다. “민서야, 근데 너 모자 계속 쓰고있음 안 덥니?” “남이사.” 망할년, 무안하잖아, 젠장. “백민서. 방에서 담배피지 말라니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찌개의 간을 맞추며 중얼대는 환영이. “비흡연자도 없는데 상관 없잖아.” “말 들어. 방에 냄새 난다구. 그러니까 아예 담배 끊으면 되잖아.” “쪼잔해. 잔소리 투성이.” 민서는 불평을 내뱉더니 마당으로 뛰쳐나갔다. 삐지기도 하는구나, 생각보다 귀엽네. “환영아, 나 밥 먹기 싫은데.” 우리의 귀염둥이는 또 다시 어리광을 시작했다. “강휴인, 너 맞고 먹을래, 그냥 먹을래?” “맛 없는걸.” “언제는 내가 해주는게 제일 맛있다며!!” “맨날 풀밭이야. 이러다 되새김질 하겠어. 소처럼 음메음메.” “너 자꾸 이러면 비원이한테 혼내라고 시킨다.” “안 무서워, 신비원 저 새끼.” 강도 높게 개기는 휴인이. 아니나 다를까. “너 뭐라 그랬어, 이리 와봐.” 비원이는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휴인이를 향해 까딱까딱 와보라는 손짓을 보낸다. 휴인이는 흥, 하고 비원이의 말을 무시하는 동시에 재빠르게 마당으로 뛰쳐나간다. ....진짜 저 놈 보면 딱 애새끼란 말야. 근데 아깐 내가 왜 저 놈을 보면서 위로받고 안정이 된 걸까. 왜 마음이 설레는 거냐구!! 쟨 애야, 애!! 소꿉놀이 하는 것 같아. 환영이는 엄마, 비원이는 아빠, 민서는 고모, 휴인이는 아기. 나는... 아직까지는 아무리 잘 봐준다 쳐도... 손님. 빨리 나도 이 가족의 일원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아주 나쁜, 스파이 가족으로. “진짜 말 더럽게 안 듣는다니까.” 환영이는 한 마리 나비마냥 마당에서 펄떡펄떡 뛰노는 휴인이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인이가 원을 그리며 방방 뛰노는 한가운데에 서 있는 민서는 담배를 뻑뻑 피우는데 여념이 없었다. "괜찮겠어? 휴인이 점심도 안 먹었어.“ “진짜요?” 내 말에 환영이는 놀란 듯 반문하더니 이내 걱정스러운 눈길로 휴인이를 바라보았다. 나는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최대한 관심없는 척. “원래 밥을 잘 안 먹나봐, 휴인이?” “네, 겉으론 잘 놀고 그래도 속으론 생각이 많은 놈이라. 하는 일도 막노동이라 좀 잘 먹고 다녀야 하는데, 그래서 억지로 혼내서라도 먹이는 편이예요. 비원이가 화내면 그래도 말 좀 들으니까. 애가 요즘은 불면증인지 잠도 잘 못 자고 뒤척거리고... 괜히 밤에 담배 하나 더 피고오고.... 걱정덩어리죠.“ 본래 웃고댕기는 놈일수록 생각이 더 많은 법이긴 하지. 대체 니들 머릿속엔 뭐가 든거니. 불면증까지 걸리다니, 너무하잖아. 그래서 다들 밤늦게까지 담배피고 노는거구나. 그래놓고도 아침 일찍 일어나고. 나야 올빼미족이라 밤늦게 자는 건 되도 아침 일찍 일어나는 건 힘들구만. 그래도 역시 의리는 있는걸. 휴인이 생활패턴에 맞춰주기 위해서 일부러 다 같이 생활하는 거잖아. 앞으로 나만 죽어가겠군. 바이바이, 나의 축복같은 낮잠들아. “고기를 좀 먹여보지?” “말만 저래요. 사 놓으면 먹지도 않으면서 괜히 먹기 싫으니까 이 핑계, 저 핑계...” 에이씨, 휴인이 핑계로 고기 좀 먹어볼랬드니. 근데, 편식을 하려면 비원이가 해야 되는 거 아냐? 부잣집에서 좋은 음식, 비싼 음식만 먹어왔을텐데. 아무리 편식하지 않는 편이라도 질이 너무 다르잖아. “비원아, 넌 어때? 환영이가 해주는거, 입에 잘 맞아?” “남이사.” 씨발, 민서랑 짰냐, 사람 무안하게 만드는 대답하기로. 비원이는 싸늘하게 대답하고는 일어서서 마당을 향해 소리쳤다. “야, 강휴인. 지금 밥 먹으면 용서한다. 빨랑 와.” “싫어, 안 가.” “너 나랑 약속했지. 살 5키로 더 찌기로.” “너나 찌워.” “난 슬림해야돼!! 퉁퉁하면 아줌마들이 싫어한다구!!” 저 유치한 말싸움, 귀엽기도 하지. “민서야, 저 새끼 끌고 와.” “오케이.” 비원이는 항상 그래왔다는 듯 민서에게 중얼댔고, 민서는 너무도 손쉽게 목덜미를 잡고 집 안으로 질질 끌고 들어왔다. 기집애, 힘도 세네. 휴인이도 힘 완전 세던데 저렇게 질질 끌고 오다니. 하긴, 여자치고 키도 진짜 커, 힐 신은 것도 아닌데 휴인이랑 비슷해. 한... 178 정도 되려나. 우쒸, 내 키도 큰 편인데, 여잔데도 173이니까. 저 년은 키도 크고, 몸매도 좋고... 모델이나 하지. 아, 잠깐... 그러고보니. 휴인이나 민서나... 비원이 말도 굉장히 잘 듣는구나. 문득 떠올랐다. 주동자와 재벌 아들이, 일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 설마... 비원이가 재벌아들이자 주동자가 아닐까. 그 정도 의지가 아니고서야... 가능해? 태어날때부터 몇 천억을 가지고 살아왔던 도련님이, 백 원에 덜덜 떨며 호스트빠에서 한 시간이니, 두 시간이니 알바시간 더 추가해가면서, 또래애들 3명하고 이런 허름한 집에서 부대끼면서 산다는게. 보통 힘든일이 아닐텐데 견디는 거 보면 그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역시 난 천재다. “아, 누나!!” “응? 아, 환영아, 왜?” “내일은 나 따라오죠? 잘 부탁해요!!” 한달 후, 난 이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게 될지. 벌써부터 마음이 저려온다. 미안, 미안하다, 애기들아. 정말 미안. 나중에... 나 용서하지 마라. 그 때 분명 나도 상처 받겠지만 그 아픔은 고스란히 내가 감당할게. .... 정말... 미안하다. 23. 고백 “다... 담배 한 개비만 줘어.....” “야, 이 그지야!!” “뭐라해도 좋으니까 담배 좀...” “뭐냐, 그 수척한 몰골은.” 그날 우리는, 휴인이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네 사람이 어르고 달래는 수법을 구사하며 기어이 목적을 달성했다. 그 후, 지친 심신을 위로하려고 오늘도 모두들 목재 평상에 앉아 담배피는 중... 인데.. “누나 내가 담배 피지 말랬잖아!!” ... 기구한 내 운명. 돈이 없어서 담배도 못 사고, 담배 하나 달랬다가 비원이한테 그지 소리 듣고, 휴인이는 옆에서 담배 피지 말라도 앵앵 대고... 좋다, 이렇게 되면 목표물을 바꿔서 공격하는 수 밖에... “화... 환영아... 누나가 오늘 담배를 하나도 못 폈더니 금단 증상이....” “미안해요, 누나. 난 여자한테 담배 권하는 몹쓸 버릇 없어요.” “씨발, 민서는 피잖냐!!” “쟤는 나중에 집에 들어가서 혼내면 되니까.” 금단 증상으로 손이 떨리고 숨이 안 쉬어진다. “미... 민서야... 언니에게 담배 좀....” “내 담배도 부족해. 나도 쪼들린다구.” 매정한 년. “비... 비원아, 제발....” 마지막으로 또다시 비원이에게 간정한 눈빛을 보냈다. 그는 내가 이제야 측은해보이는 모양이었다. “.... 강휴인, 정시언한테 담배 하나 줘도 돼?” “안돼, 절대 주지마!!!” 아악!!! 이 무식한 새끼!!! 그냥 몰래 건네줘야지, 그걸 강휴인한테 물어보냐!!?? “누나 자꾸 왜 그래, 내가 피지 말랬잖아.” 내가 비원이를 향해 살인의지가 담긴 눈빛을 보내고 있을 때 휴인이는 내 앞에 쪼르르 달려와 잔소리를 시작했다. “강휴인, 그럼 너는 담배 왜 펴.” “난 이쁘니까.” 뭐냐, 그 말도 안되는 개소리는. “너 한 개도 안 이뻐!!” “에이, 괜히 질투나니까.” “넌 밥도 잘 안 먹잖아!! 옛말에 임마. 밥 잘 먹는 애가 어여쁘다는 말이 있다!!” 물론 그따위 말은 내가 지어낸 거다. “그럼 내가 담배 끊는 대신 너도 편식하지마!! 밥 좀 잘 주워먹으란 말이다. 어때?” 내 요구조건에 휴인이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잠시 생각에 빠졌다. 나머지 아이들도 그 협상조건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싫어.” “아, 왜!!” “난 이쁘니까.” 썅, 안 펴, 안 펴, 내가 드러워서 담배 안 피고만다!! 그러나 그 순간, 반짝 하고 떠오르는 나의 아이디어. 크흐흐, 휴인이 이 놈 새끼, 당황 좀 해보라지. “강휴인, 너 나 좋아하지?” “에에?” “그치? 너 나 좋아해서 담배 피지 말라는거지?” 이제 당황해라, 어서. 당황한 나머지 아무 말도 못하다가 내게 사뿐히 담배를 권하거라. 내 예상대로 휴인이는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불쌍해.” “응? 뭐라구?” “못 생긴 게 착각까지 잘해. 말로만 듣던 공주병이야. 불쌍하다.” 이... 이 새끼.... 전혀 당황하지 않았어. 아부지... 아부지 딸은 요즘 어린놈들에게 이렇게 농락당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씨, 원래 담배는 확 끊으면 안돼. 천천히 줄여나가야 되는건데.” 승질난 내가 웅얼웅얼 불평하고 있던, 바로 그 때 였다. 새로운 놈들이 나타난 것은. “형!! 우리 왔어요!!” 삐걱거리는 녹슨 대문을 밀치고 등장한 앳된 3명의 소년들. 그 놈들 또한 ‘관계자 외 출입금지’ 버금가게 곱상한 얼굴들을 지니고 있었다. 나 대학 때려치고, 연예 기획사나 세울까봐. 이렇게 일곱명만 잘 키우면 돈은 쏠쏠하게 들어올거란 말이지. 어떻게 노예계약만 잘 성립시켜서... 이익을 10 이라고 치면, 기획사 사장인 내가 한 9 가지고, 놈들한테는 1 정도... 음, 뭐 휴인이놈은 한 2 정도 줄까? “오우~ 해커!!” 휴인이놈은 그 놈들을 향해 해맑게 달려갔다. 아주 반갑게 맞이하면서. 그나저나... 해커? “누나 내가 말한 적 있죠~? 우리 동네 랩퍼 친구들!! 엄밀히 말하자면 한 살 어린 동생들이지만.” 설마... 설마... 저 애들이... 휴인이가 부르던 그 외설스러운 노래를 부른 장본인들? 휴인이를 섹시하다고 치켜 세워준다는... 그 이해불가능한 사고회로를 가진 아이들? “얘네 팀 이름이 ‘해커’예요.” 랩퍼 팀 이름이 해커라니, 거창하기도 하지. 그나저나 휴인이보다 한 살 어린 거면... 나랑은 다섯 살 차이로구나. 애기구나, 애기. 그러니까... 내가 유치원 댕길 때, 너네는 걸음마를 하고 있었다 이거지. 내가 중학생일 때, 니네는 초등학교 앞에서 뽑기를 하고 있었다 이거지. 내가 고등학생일 때, 니네는... 그 때도 초등학생이었다 이거지!!!! 씨발!!! “인사해. 형들 옆집 사는 변녀다.” 신비원, 너는 정녕 이 애기들에게 비춰질 나의 첫인상마저 박살내야 한단 말이더냐. 어쨌든 갑작스런 상황에 어리둥절해하던 해커 아기들은 비원이의 말에 내게 꾸벅 인사를 해보였다. 귀엽기도 해라. “안녕하세요, 열음, 산이, 준휘입니다.” “에에? 본명이야? 이름 완전 특이하다!!” 특히 열음. 크크, 이름 완전 특이.....하다....라고 생각하며 그의 얼굴을 다시 보았을 때. 난 흡사 처녀귀신과 저승사자의 블루스를 본 것처럼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아직 날이 밝기 때문에 내가 잘못 본 게 아닐터인데. 아직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은게 아니란 말이지. 난 정확히 본 건데. 쟤 머리색깔... 갈색 맞지. 쟤 눈동자 색도... 초록색 맞지. 그러나 완벽한 외국인도 아니고... 설마 혼혈이냐. “고아원에서 정해준 이름은 맘에 안들어서요.” 그 때 나의 시선을 느낀 듯 무표정으로 대답하는 열음. “으... 응? 고... 고마원?” “아마 백인이랑 피가 섞였겠죠. 혼혈이니까 갖다 버렸을테구요.” “아, 아니, 나는... 저기, 나는 혼혈 처음 봐서. 그러니까 나쁘게 본 게 아니구.” “괜찮아요. 사람들 다 놀라니까. 나보고 놀라지 않았던 사람은 형들 뿐이거든요.” “응?” “나도 내가 신기한데 오죽했겠어요. 마음껏 놀라세요. 난 상관없으니까.” 내가 계산해보자면... 너는 지금 열 일곱 살이 맞을건데... 더럽게 섹시하고나. 특히 그 눈매!! 그 눈매 어쩔거야!!! 눈매가 굉장히 야하구나, 비원이를 능가하겠어. 나는 스물두살의 여잔데, 왜 섹시함에서 열일곱의 남자에게 밀려야만 하는가. “우리 이름은 형들이 다시 지어 준 거예요.” 열음이란 아이를 차별의 시선으로 본 것 같아 반성을 하고 있던 그 때, 후드티의 모자를 걸친 산이라는 아이가 대답했다. “새로운 세상을 열으라고 열음, 큰 사람이 되라고 산, 그리고 준휘는.” 말을 멈춘 산이는 준휘라는 아이를 바라보았고, 준휘는 바지 주머니 속에 손을 푹 집어넣고 귀찮다는 듯 말을 이었다. “형들이 지어주는 괴상망측한 이름이 싫어서 고아원에서 지어준 그대로 준휘.” 푸하하!! 순식간에 풀어지는 어색한 분위기. 아, 웃겨, 괴상망측하대!! 나는 그 자리에서 미친듯이 낄낄 웃어댔고, ‘관계자 외 출입금지’ 놈들은 그나마 올바른 정신세계를 소유한 듯한 준휘라는 아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하하. 진짜 웃겨, 아 완전 웃기다, 증말. 그래, 잘 생각한거야, 이 놈들 머리에서 뭘 바라니.” 씨발, 말을 잘못 꺼냈다. 그 말 덕분에 나는 열음이와 산이의 뜨거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그럼 형들이 지어준 이름 달고 사는 우린 뭐요?’ 라고 항의라는 듯한 그 뜨거운 시선. .....나... 나 제대로 살기 위해선 이 자리를 피해야 할 것 같지...? “에... 그럼 자주 보자꾸나. 나는 너무 졸려서 이만 들어가봐야...” 슬금슬금 평상에서 일어나 슬리퍼를 질질 끌고 아이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나. “그럼 다들 바이바이!! 내일 다시 보자!!” “누나!!!” 그리고 휴인이의 부름. “으.... 응?” 아씨, 왜 불러, 나 저 시선 피해서 도망가야되는데. “누나 말대로예요.” “에에? 뭐가?” 갑작스런 휴인이의 존대와 의미심장한 그의 말뜻을 몰라 벙쪄 있는 나를 향해... “나 누나 좋아하는거 맞다구요. 그러니까 오늘처럼 다른 남자 땜에 울지마요. 나 기분나빠요.” 휴인이는... 너무도 멋진 고백을 날려버렸다. 열 여덟살 주제에. 더럽게 멋진 척 한다니까. 24. 스트리트 파이터 누워서 천장을 바라본다. 진한오빠... 나 있잖아,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어. 아직 오빠가 좋아, 사랑해, 사귀고 싶어, 결혼하고 싶은데. 어린 놈 하나가 계속 내 마음을 헤집어놔. 요리 뛰고 조리 뛰면서, 햇살처럼 웃으면서, 말 한마디 한마디 뿅가게 하면서. 오빠 때문에 맨날 맨날 울 줄 알았는데, 이상하지, 그 애들이랑 같이 있으면 눈물이 안나. 범죄자라고 말하겠지. 오빠나 아부지나 이온이나 대쪽같은 성미의 내 주위사람들은 아마도 그 애들을 많이 욕할거야. 근데 믿을 수 있겠어? 속으론 슬픈 생각 그 누구보다 많이 하면서 주위사람들 힘들까봐 햇살처럼 웃는 휴인이를. 밥 안 먹는 친구 걱정하면서 내일 저녁 메뉴 식단에 슬쩍 소고기를 집어넣는 환영이를. 해커 녀석들 왔을 때의 혼란을 틈타 슬쩍 내 손에 담배 한 개비를 던지던 민서를. 내가 방에 들어오자 ‘야, 우리 시끄러워서 변녀 잠 못자겠다. 들어가서 이야기하자.’고 말해주던 비원이를. 그 애들을. 내가 지금 얼마나 소중히 여기게 되었는지, 오빠가... 이해할 수 있을까? 나 지금 간절하게 바라고있어. 비원이가 주동자이자 재벌아들이기를. 그렇게되면 비원이가 주동자라도 재벌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소년원에 못 넣을테니까. 나 그애들 모두 무사하길 바래. 내 손으로 소년원에 못 보내. 한숨을 푸욱 내쉬며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화악 걷어냈다. 머리맡에 고이 모셔둔 담배가 보인다. 그렇다, 민서는 해커 녀석들이 침범한 그 순간 나를 향해 담배 한 개비를 날린 것이다. 물론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던지는 냉정함을 발휘했지만. 입술을 깨물며, 담배를 세동강 내버렸다. 애꿎은 민서 담배만 훔친 꼴이 됐잖아. 그냥 담배 끊을래. 휴인이가 그렇게 담배 피지 말라잖아. 그냥 담배 끊을래. 담배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며, 난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이 들었다. 내일, 환영이와의 하루를 준비하며. 내일, 내가 그 놈들 때문에 또 얼마나 아파질지, 생각도 못한 채로. “일어나요, 정말 잠 드럽게 많네.” 눈을 뜨자마자 쏟아지는 햇살에, 내가 인상을 찌푸리면. 내 앞에 보이는 건 아름다운 그녀, 민서. 방 문을 열고, 오늘도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옷도 완벽하게 다 입어놓고. 이 부지런하다 못해 징글징글한 기지배 같으니라고. “어? 뭐야, 이거!!!” 순간, 그녀가 내 방의 무언가를 발견하고 신경질 내는 소리를 포착. “응?” 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반문하는 찰나. 앗, 그렇구나. 씨발, 어제 쓰레기통에 안 넣었는데. “뭐야!! 내가 피고 싶은거 참아가면서 줬더니만!!!” 그녀가 준 담배는, 여전히 세 동강으로 분리된채 내 머리맡에 나뒹굴고 있었다. “아니, 민서야, 그게 아니다. 난 내가 담배를 못 끊으면 계속 너의 담배를 탐할까봐!! 너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이것들을 장렬히 전사시킨 것이다!!!“ “아 됐어요, 이제 뭐 주나봐라. 아씨, 기분 드럽게. 아, 밥이나 먹어요!!” 짜증을 내며 나가버리는 그녀. 에라이, 저 성질머리. 너 자꾸 그럼 환영이가 결혼 안해준다. 괜시리 민서 욕을 하며 하품을 늘어지게 한 후 눈꼽만 몇 개 떼고 놈들의 집으로 향했다. “그녀와 나의 시선이 마주치지♬. 휘끼휘끼, 우린 강렬한 필을 느껴, 몸을 맞대, 너의 숨결이 느껴진다, 흥분한다, 붸붸. 요, 이제 우리 시작한다♪“ 아침부터 외설스러운 가사를 읊조리는 휴인이의 뒷모습이 눈에 띠고 말았다. 분명 어제 해커 애들한테 배운 거겠지. 저 가사 누가 짓는거야. 열음이야, 산이야, 준휘야? 다들 아직 어린데도 너무 선정적이라구!!! 그나저나... 중요한 건... 아, 휴인이 얼굴 못 쳐다보겠어.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하는 게 좋겠지? 아니, 좀 얼굴을 붉혀줘야 하나? 참 랩 멋지구나. 라고 칭찬하며 머리를 쓰다듬어줄까? 아냐, 저런 외설스런 가사를 맨정신으로 칭찬할 순 없어. “누나 안녕!!!” 내가 뒤돌아서 오만가지 생각을 다 하고 있을때, 휴인이는 먼저 인사를 건넸다. 나는 휘리릭 뒤돌아 아주 부자연스럽게 웃으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아하하하. 그, 그래, 휴, 휴인이도 안녕.” “.... 왜 그래요?” 왜 그러긴, 어제 니 고백 때문에 이러지. “누가 사귀쟀나. 그냥 좋다 그런건데 되게 수줍어한다.” ........... 엄마..... 나 쪽팔려요. 씨발, 굳이 저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됐어, 누가 수줍어한다고 그래, 이 말똥구리 새끼야!!!” 그렇게, 나의 쓰잘데기 없는 설렘은 끝이났고, 더불어 휴인이와 나의 어색함 따위는 눈씻고 찾을래도 찾을 수 없었고, 덕분에 오늘의 아침운동은 내가 휴인이를 조져버리는 레슬링으로 끝이 났다. 오늘에야 밝혀주겠다. 무수한 환영이 얼굴의 상처들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시간이 온거다. 눈가의 멍, 터진 입술, 가끔 얼굴 한가운데를 떡 차지하고 붙어있는 반창고까지. 그렇다, 나는 그동안 굉장히 궁금했던 것이다. 휴인이와 더불어 범죄가 잠시 중단되어 있는 상태인 환영이. 하긴, 환영이는 부탁받고 아이들을 때려주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으니 의뢰가 들어오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는 작업이긴 하다. 과연, 그동안 지환영이란 인물은, 의뢰가 끊겨있을 때 무슨일을 하며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는가. 휴인이는 환영이가 힘든일을 한다고 했는데, 음, 뭐 결국 휴인이처럼 막노동일까. 환영이와 나는 지금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시내 한가운데에 나와있다. 집과는 꽤 먼 곳이고, 공사판은 보이지도 않는데. 과연 이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란 말인가. “오늘 누나 나 좀 도와줄 수 있죠?” 앞서 걷던 환영이는 나를 향해 눈을 찡긋 해보이고. 나는 억지로 웃으며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환영이는 들고있던 여러장의 판때기를 내게 내밀었다. 뭐야, 이 판때기를 들고 나더러 뭐하라는겨. 나는 서둘러 판때기에 적힌 글씨들을 보았다. 누구 글씨인지 참 조잡시럽다. [남자는 3분, 여자는 5분에 오천원.] ....뭐지, 이게. “환영아, 너 뭐하는건데.” “아, 누나는 그냥 그 판때기만 들고 서있어줘요.” “그, 그냥 들고만 있어?” “네, 점심은 맛있는 거 사줄테니까. 지루해도 조금 참아요.” 말을 마친 환영이는 둘러매고 있던 가방에서 웬 권투용 헤드기어를 꺼내 자신의 머리에 착용했다. 그리고 뒤이어 나온 건 권투용 글러브.... 아... 갑자기 나, 뭔가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환영아, 너 설마....” “돈 버는 거, 쉽지 않죠?” 너 그럼... 얼굴에 상처... 그게 다... 왜? 너 싸움 잘하잖아, 너한테 의뢰 부탁하면 누구든 다 패놓는댔어. 설령 그게 조폭이라 하더라도 니가 다 처리한다 그랬어. 내가 니 조사하면서 알아낸건, 니가 싸움을 정말 잘한다는 거 뿐이었어. 그런데 왜, 그런데 어째서? 휴인이의 막노동보다 더 힘들잖아. 니 나이 또래의 남자애들에게, 이건 자존심까지 무너지는 일이잖아. 내가 이를 악물며 눈물을 참고 있을 때, 환영이는 길가는 사람들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안녕하세요!!! 저는 여러분의 스트레스 해소용!!!!” 아부지.... 나요... 이 애들 못 잡겠어요.... “맞아주는 기계, 지환영입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 애들이거든요. “보기싫은 직장상사, 돈꿔간 친구, 헤어진 연인. 다 꼴보기 싫으시죠?” 그 누구보다도... 착한 애들이거든요. “저를 그 꼴보기 싫은 인간이라 생각하시고 맘껏 쳐주세요!!” 세상과... 진정으로 맞서 싸우는 애들이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사람들을 향해 목이 터져라 소리치던 환영이가 별안간 나를 돌아보고 미소지었다. 그리고... “진정한 스트리트 파이터!!” 걱정말라는 듯 치켜든 그의 엄지손가락을 보고... 참았던 나의 눈물이 마구 터져나오고 말았다. 25. 승리 “아우 씨발!!! 진짜 내가 존나 꼴보기 싫었다구!!!” 퍽퍽. 귀를 닫아도 들린다. 둔탁한 소리가. 망할 초시계는 죽어도 3분이란 시간을 쉽게 가리키지 않는다. 내 눈은 오직 아래, 환영이가 맞는 장면은 차마 볼 수 없으니까 오로지 시선은 초시계가 걸려있는 나의 목 아래. 고개를 푹 숙이고 이 시간이 끝나기만을. 지금이 벌써 8번째 손님. 환영이는 팔을 끌어모아 상체를 방어한 채 요리조리 피하기도 하면서 적당히 맞아주고있다. 사람들은 벌써 환영이 주위로 둥그렇게 모여들었다. 가끔 누군가의 주먹이 환영이의 얼굴을 제대로 가격하면 탄성이 터져나온다. 잔인해, 사람이란, 정말 잔인하다. 나는 걱정돼서 미치겠는데, 눈물나는거 겨우 참고있는데. 어제 막노동하며 땀을 바가지로 흘리던 휴인이 모습이 겹친다. 내일이면, 아저씨들의 느끼한 시선과 손길을 억지로 참아내는 민서를 보게 될테고, 그 다음날이면 아주머니들의 술주정과 성적모욕을 받아내는 비원이를 봐야할텐데. 나 벌써부터 자신이 없어진다. 그런 아이들을 볼 자신이, 너무 세상의 더러움을 일찍 알아버린 아이들이 안쓰러워서. 눈물이 한 방울, 또 한 방울. 난... 그 동안 너무 행복하게 살아왔다는 생각만 미친듯이 든다. “아악!!! 죽어버려!!!!”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이 환영이의 어깨를 맞췄을 때. “끝!!!! 3분 됐어요!!! 이제 끝났습니다!!!” 나는 초시계의 3:00 이란 숫자를 보고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다. 여자들한테 맞는 건 그나마 괜찮아도, 남자들한테 맞을 때는 환영이가 힘들어하는 게 고스란히 보인다. “아, 씨발, 뭐야. 이제 기분 좀 플리려고 하는데.” 근데 이번엔, 정말 잘못걸려도 제대로 잘못 걸린 거 같다. 척 봐도 양아치구나, 놀게 생겼구나, 라는 말이 나오게 생긴 이 고등학생 무리는 지금 누군가를 족치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어요, 라고 얼굴에 써놨단 말이다. “아, 한 번 더 해, 한 번 더.” 짱인 듯 보이는 그 학생은 다시 한 번 더 하기를 요구했고, 환영이는 손으로 오케이 표시를 해보였다. “야!!! 대신!! 너 헤드기어 벗어!!!!” 저런 씹쑝!!!!! “뭐라고? 이거 보자보자하니까 정신 나간 새끼 아냐???” 급히 내가 튀어나가보지만 환영이가 말린다. “아아, 그만그만. 손님, 죄송한데 헤드기어 벗으면 저도 좀 아파서요.” 최대한 정중하게 웃으며 말하는 환영이. “뭐야, 병신새끼네, 남자잖아.” 그거 알아? 환영이 너희 때려눕힐 실력 충분해. 니네 따위 우스운데 참고있는거야. 돈 때문에. 고아원에, 병원에, 복지관에, 노인정에 보낼 돈 때문에!! “죄송합니다, 근데 저도 어쩔수가 없” “만원 줄게.” 저런 개자식들. “어차피 너도 돈 벌려고 이 짓하는거 아냐? 만원 줄테니까 헤드기어 벗으라고!!!” 안되겠다. 저 새끼들은 내가 족쳐서라도.... “좋아요.” ........................환영아............... “푸하하, 돈 준대니까 좋댄다. 아 거지새끼 아냐, 완전...” .........저 거지 소리는... 내가 비원이에게 듣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완전 무시하고 조롱하는 말투. “환영아!! 안돼, 됐어, 하지마!! 응?” “누나... 오늘은 돈 더 벌어야죠.” “........환영아...” “휴인이 먹이게 소고기도 사가야되니까.” 제발 웃지마... 이런 짓거리 하면서 웃지 말란 말이야... “야, 만원. 만원 여기 있으니까.” 그 망할 쌩양아치 고딩새끼들은 만원을 땅바닥을 향해 팔랑팔랑 내던졌고 환영이는 그 돈을 주워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그리고는 천천히 헤드기어를 벗어 나에게 쥐어준다. “이거, 내 생명 같은 거니까, 누나가 잠시 보관해줘요.” “환영아.....” “나서면 안돼요. 누나가 지금 내 생명 쥐고 있는거니까, 가만 있어야 돼요.” 건들면 눈물이 터질 것 같은 나를 향해 당부하고 환영이는 맨 얼굴로 돌아선다. 그리고.... 그 미친 개쌩양아치 놈들은... “야, 돼지. 니가 나 대신 해라.” 결국 자기네 패거리에서 제일 덩치큰 아이를 불러내기에 이르렀으니. 키는 적어도 190이 넘겠고, 몸무게는 가볍게 100키로를 넘는 듯한 이 아이에게. 환영이의 순수한 마음이, 친구에게 맛난 걸 사주겠다는 이 순수한 마음이. 짓밟혀지지 않을 수 있을까. “아, 거기 여자!! 초시계 눌러, 빨랑!! 시작하라구!!!” 여기서 아무 도움이 되어주지 못하는 난... 결국 “...시....시작!!” 이란 말과 함께 초시계를 누르고. 제발, 제발 시간이 빨리 흐르기만을 바라고있다. 휴인아, 민서야, 비원아... 너희라면 어떻게 할거니. 너희들도 환영이가 이런 일 하는건 알고있잖아. 근데 이렇게 심각한 건 모르지. 환영이가 이런 모욕까지 감수하는 거 알면, 니들 성격상 바로 관두게 할테니까. 제발, 열음이라도, 산이라도, 준휘라도 슈퍼맨처럼 나타나주면 안되겠니. 이젠 퍽 소리가 둔탁하지 않다. 날카롭다. 맨 살에 와닿는 소리, 휙휙. 퍽퍽. 그리고, 양아치 패거리의 환호성도. “힉... 저건 좀 심한 거 아냐?” “어머, 저거봐. 어떡해. 턱 정통으로 맞았어.” “쟤 항상 저기서 맞아주는 애지. 하루도 안쉬고 불쌍하다.” 사람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귀를 날카롭게 파고든다. 그래도 안돼, 나서면 안돼. 지금 내가 쥐고있는 게 환영이 생명이라잖아. “피다..!!” 그리고 누군가의 작은 중얼거림. 씨발, 내가 돈만 많았어도, 씨발, 내가 힘만 있었어도, 씨발, 씨발, 씨발. 나는 음료수 한 잔도 사주지 못해, 반창고 살 돈도 없어. 백 원도 없는 빈털터리야... 미안해... 미안해, 환영아... 힘없는 누나라... 정말 미안해. 고개를 들면 맞는 환영이 모습에 울컥 해버릴까봐 초시계에만 시선 고정. 1분 20초.... 21, 22, 23... 그 때, 환영이가 내 발밑쪽으로 픽 쓰러졌다. 돼지새끼가 밀쳐서 내 쪽으로 넘어진 듯. “괜찮아, 환영아?” 내가 급히 몸을 숙여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 세상에.... 입술에 피 봐...... “어이, 아직 시간 안 끝났어!!” 히죽 웃는... 저... 돼지새끼를 내가 아주 그냥..... “됐어, 3분 끝났어, 이 새끼야!!!!!” 정시언. 이러면 안되지만 제대로 꼴 받았습니다. 그것도 정확히... 중학교 3학년 때 같은 반 기지배랑 머리채 잡고 싸운 이후로 처음입니다. “웃기지마, 우리도 핸드폰으로 시간 재고 있었는데!!!!” 양아치 패거리 짱의 말씀. 이 새끼들아. 어디보자.... 니들이 지금 고3이라 쳐도... 나보다 세 살이 어리단다. “야 이 개지랄 씹쑝 새끼들아!!! 지금 어디서 머리에 피도 안마른 새끼들이 지랄이야!! 엄마 젖이나 더 빨고와!! 못된 거만 배워가지고 돈으로 사람 무시하고 말이야. 골이 텅텅 비었으면 착하기라도 해야지. 그지같은 새끼들이 누구더러 그지래. 내가 뛰어댕길때 엄마 뱃속에서 발가락 빨고 있던 새끼들이 지금 죽고싶어?? 내가 아주 그냥 니들 배를 째주마!! 등을 딸까? 아님 골을 파줄까?? 니들 진정으로 니네 창자 맛 보고싶어, 엉??? 뒤질래?? 조져봐야 정신차리지!!! 짭새소굴 한 번 가볼까? 우리 맞장 뜰까?“ ..........짭새.... 아부지 죄송해요. 싸움은 이기고 봐야죠. 욕을 해야 상대가 쫄지 않습니까. 나는 랩퍼 못지않은 실력으로 저 말을 단 5초만에 끝냈고. 쌩양아치 새끼들은 나의 욕과 주변 사람들의 야유로 곧 자취를 감추었다. “아우, 못된 새끼들... 환영아, 괜찮아?” “..... 왜 그랬어요... 이거 영업방해야.” 삐진 듯 말하면서도 밝게 웃어주는 환영이 때문에... 마음이, 뭉클하다. “꼭 이 일 해야되냐? 너 싸움 못해? 사나이잖아!!” “.... 누나, 내가 휴인이랑 비원이 이겨요, 제대로 싸우면. 내가 여동생이 있거든요!! 그리고 친한 이웃집 여동생도 있었고. 그래서 어릴 때부터 아주 그냥 내 동생들 울리는 새끼들은 조져버렸다까요.“ “근데 왜 이러고있어!!!” 속상한 맘에 소리쳐버리면... “누나, 싸워보니까요, 상대방을 눕히면 이기는 게 아니더라구요.” “....... 환영아...” “싸움 후에 웃을 수 없으면, 이겨도 이긴 게 아니야. 그 시절 난 항상 졌어요.” “............ 바보같애....” “지금 난. 웃고 있잖아요. 난 항상 이기고있어요, 누나.” 환영이는 승리했지만, 결국 나는 오늘도 울어버리고 말았다. 26. 맹세 “오케이~ 이거 요리 잘하면 휴인이가 반찬투정은 안하겠죠?” “추해, 입가에 피 새어나온다. 반창고 하나 더 붙여라.” 소고기를 손에 사들고 신나하는 환영이를 향해 나는 괜히 시비를 걸어댄다. 기분 나쁘잖아, 뭐야. 지 몸 생각은 안하고 끝까지 애들 생각이네. 설마... 정녕... 이 놈이 주동자인겐가. 퉁명스런 내 말투에 아랑곳하지 않고 환영이는 씨익 웃으며 옷소매를 끌어다 입가의 피를 닦아버린다. “야, 이 놈 시키야!! 뭐하는거야, 드럽게시리.” “빨면 되는데.” “옷 문제가 아니잖아!! 병균 옮아!!” “하하하. 왜 이렇게 화내요. 오늘 기쁜 날인데. 수입이 다른 날 2배는 되겠다. 이게 다 시간계산 잘해서 그런거 같애요. 나 혼자 하면 시간계산이 잘 안돼서 돈은 똑같이 5000원 받는데 정신없이 한 10분 맞아준 적도 있거든요. 누나 앞으로 나랑 같이 일할래요? 장사 잘 되겠다.“ 웃지마, 제발. 난 니 장사 도와줄 생각 없어. 그렇게 맞는 장사, 잘 돼서 좋을게 뭐있다구. “다른 일 알아보면... 안돼?” “... 음... 그건 안되겠다. 다른 애들 수입이 좀 불확실해서요. 그나마 내가 제일 잘 버는 축에 속하거든요. 어쩔 수 없죠, 뭐. 난 괜찮대두요.“ 아니, 보고있는 내 속이 편하지가 않다구... “근데요, 누나.” “뭐.” 불공평한 세상에 화를 내야하는게 당연한데, 내 화를 표출할 곳이 마땅찮다는 이유로 나는 환영이에게 괜시리 짜증을 내고 있었다. “애들한테 비밀로 해줄 수 있어요?” “.... 뭘?” “나 이렇게... 음... 일 열심히 하고 있다는거요.” 환영이는 내 마음이 심란해질 것을 고려해 ‘열악하게 일하고 있다는 것’을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으로 바꾸어 말했다. “걱정 많은 놈들이라. 누나도 겪어봤으니까 알 거 아니예요.” “..... 걔들은 몰라? 니가 무슨 일 하는지.” “아, 맞아주는 일 하는건 아는데요, 이렇게 열심히 한다는 건 모를테니까. 내가 나 일하는데도 일부러 안 가르쳐줬거든요. 애들 속상할까봐.“ 하긴, 환영이가 이렇게 일하는 걸 안다면 가만둘 놈들이 아니다. 동갑인 고등학교 남자애들한테 농락당하면서 피까지 터진다는 걸 알면 아무리 돈이 필요해도 목숨걸고 이 놈을 뜯어말렸을 것이다. 휴인이는 아마 환영이 모습에 눈물을 줄줄 흘려대겠고, 민서는 자기 남자친구가 이런 꼴로 맞아주는 거 알면 마음이 찢어지겠고, 비원이는 알게 모르게 속정 깊은 놈이라 지가 대신 이 일을 하겠다고 나설 지도 모른다. 바보같은 지환영. 역시 이 놈은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엄마 같은 존재다. 힘든 일 모두 숨기고, 날마다 다시 한 번 일어서는 그런 존재. 스파이 노릇 다 때려치고 이 놈 에게 고함치고 싶다. [이 새끼야!! 요즘 폭력의뢰는 안 들어오냐!!? 왜 이러고 살아, 왜!!] 라고. “누나, 약속... 해줄 수 있죠?” 환영이 약속을 지켜주고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단호하게 [아니, 애들한테 다 일러버릴테다!! 그러니까 너도 이 일 관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놈의 눈은 너무나도 간절했다. 세상에 여러 번 상처받은 아이들에게 내가 다시 한 번 죄를 지을 순 없었다. 어쩌면 환영이 입장으로서는, 아이들에게 진실이 알려지는 것이 더 아플테니까. “알았어, 약속 지킬게. 애들한테 말 안해.” 내 말에 환영이는 금세 환한 미소를 지었다. 휴인이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니네는 왜 그렇게 잘 웃는거니. 문득 궁금해졌다. 민서와 비원이도 진심으로 웃으면 저렇게 맑게 웃을까. 너무 해맑아서 보는 사람 마음까지 시릴 정도로 그렇게....? 그렇게 나는 심란한 채로 환영이의 뒤만 졸졸 쫒아다녔고, 환영이는 빨빨대고 마트 안을 돌아다니며 장을 보는데 여념이 없었다. 아니, 그 정도 맞았으면 기진맥진 해야되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구. 저 팔팔함은 어디서 나오는거야? 육체적 아픔에는 익숙해진건가. 환영이에 대한 안쓰러운 생각은 장을 다 본 후 마트 밖으로 나올때까지 이어졌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는 내 옆에서 환영이는 즐거운 듯 조잘대고 있었다. 잡기 싫다. 잡기 싫다. 만나지 말걸. 이렇게 애들 안쓰럽게 여길거면 스파이 하지말걸. “누나... 누나? 누나!!” “어... 어... 응??”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 아니 그냥, 뭐.... 야, 그나저나 너는 그 무거운 걸 혼자 들고있냐!! 이리 내놔!!” 몸도 성치 못한 놈이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있는 것을 목격한 나는, 흡사 한 마리의 사자가 아기양에게 달려들 듯 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 왜 이래요. 나도 남자예요, 누나!!” “나는 정상인이다, 임마. 너 같은 환자가 아니라구.” “나 몸 다친거 아니잖아요. 얼굴만 조금 피 난 건데 완전 유난.” “아, 어쨌건 빨리 그거 내놓지 못할까!!” “아, 됐어요. 남자의 자존심을 걸고 죽어도 못 내놔요,” “지랄하네!!! 내 눈에 니가 남자일 거 같냐!!!? 애기다, 애기!!”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환영이와 같은 나이의 휴인이는 내 눈에 남자였다. 물론 쪽팔린 일이지만 인정해야 할 것은 인정해야 되는 것 아니겠는가. 하긴, 남자로 보인다고는 해도 아직 그 놈에게 사랑을 느낀다거나 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셋 셀 동안 내놔라. 이 누나가 들어준다고 할 때 그냥 고이 바치는 게 니 신상에 이로울거다. 셋 센다. 하나, 둘, 둘 반, 둘 반에 반.“ “그거 알아요, 누나?” “둘 반에 반에 반.” “항상 생각하는 건데...” “둘 반에 반에 반에 반.” “누난, 내 동생 닮았어요.” 향수에 젖은 듯한 환영이의 눈빛에 나는 그만 내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도... 동생?” “내 동생 되게 예뻐요. 누나가 내 동생보다 못생기긴 했는데 그거 빼면 닮았어요.” “.........야, 내가 이래뵈도 어릴때는 막 미스코리아감이라고 어른들이!!” 물론 거짓말이었다. 난 어릴 적에 장군감이란 소리를 즐겨들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애였어요. 활발했고, 밝은 애였어요. 세상에서 내가 본 그 누구보다도. 그리고 강한 애였어요. 내가 울어도 그 애는 나를 위로할 줄 알았거든요.“ “...... 환영아.....” “나중에 같이 면회갈래요, 누나?” 환영이는 눈물을 감추려는 듯 고개를 숙이며 일부러 쾌활한 척 말을 건넸다. “응? 면회....? 지금.... 어디있는데? 면회라면 병원?” “아니, 친동생말고 친한 이웃동생은 병원에 있는데. 누나가 좋다면 병원도 가요.” “친동생은... 어디 있는데.” 의문에 휩싸인 내게 환영이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 소년원!!”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진짜 왜이래. 세상이 왜 이렇게 잔인해. 휴인이가 말한 그 때 그 이야기, 그게 니들 동생 이야기구나. 미친 짓거리. 미친 사람들. 세상에 당한 건 너희들인데, 왜 세상은, 아니, 나조차도 너희를 잡으려 드는걸까. 제기랄,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다. 눈물이 흐르려는 걸 참고 환영이 얼굴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누나...." "응?“ “.........아니, 아니예요.” “뭔데, 말해봐.” “그냥 말 안할래요. 거절 당하면 아프잖아요.” “웬만하면 거절안해. 사람 궁금하게 해놓고 내빼기냐. 뭔데.” 눈물을 참기위해 억지로 퉁명스레 대답한다. 진정한 내 속마음은 숨기고. “지켜주세요.” “............ 뭐라구?” “우리들.... 지켜주세요.” 결국, 떨어지려는 눈물 때문에 나는 내 입술을 꽉 깨물어야했다. 난 안돼, 나한테 이러지마. 난 너희들 잡으러 온 사람이야. 지켜달라니 말도 안돼. “처음이었거든요, 스스럼없이 우리 이름 불러준 사람. 우리 무서워하지 않은 사람. 우리 문제아로 보지 않은 사람, 아무렇지도 않게 말 걸어주고, 옆에 있어준 사람. 진짜 누나같은 사람.“ “환영아.............” “맹세할게요.” “.......” “누나가 우리 지켜주면, 우리도 누나 지켜요.” “...........” “평생, 우리 목숨까지 걸고.” 앞뒤 가릴 것 없이 환영이의 말에 마음이 아파서 나는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진정으로 아이들을 생각했다면 난 그 때 진실을 말해주었어야 했다. 나는 스파이라고. 하지만, 말하지 못했다. 두려웠는지, 아버지를 배신하기 싫었는지, 순간 바보가 된건지 아직도 모르겠다.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한 내가, 그렇게 밉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인생을 살면서 고만고만한 거짓말만 해왔기에, 그 때의 거짓말도 다른 때의 거짓말처럼 쉽게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때의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 휴인, 환영, 민서, 비원이를 송두리째 망쳐버릴만한 그 거짓말만은 하지 않았어야 했다. 내 인생 전체를 통틀어 가장 후회하는 나의 단 한마디. 그러나, 그 순간은 진심이었던 단 한마디. “그래. 내가 너희들 지켜줄게.” 27. 진심과 진실 사이 환영이는 내게 왜 지켜달라는 말을 한걸까. 설마 알아챈건가, 내 정체를?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들을 지켜달라는 그 뜻인가? 아니야, 그럴리 없잖아. 그냥 어쩌다가 우연히 한 말이겠지. 그래도 굉장히 이상한 기분. 나중에 나는 필연적으로 이 놈들에게 배신을 하게 될텐데. 내가 어떻게 그래. 천진난만하게 웃는 이 애들에게, 세상과 맞서 싸우는 이 애들에게. 한숨만 푹푹 내쉬다보니 어느 새 어둠은 내렸고, 환영이와 나는 집에 도착했다. “우와, 왔다!! 누나!! 이거 봐!!” 귀여운 자식들은 이미 하루일과를 모두 끝내고 평상 위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그리고 휴인이는 환하게 웃으며 마치 한 마리의 개새끼마냥 내 앞으로 팔락팔락 뛰어왔다. 내 눈 앞에 만 원짜리 몇 장을 흔들대면서. “뭐야?” “이거, 오늘 받아왔지. 누나 어제 일당.” 아싸!! 돈에 굶주린 나는 휴인이 손에 들린 만 원짜리를 순식간에 낚아챘다. 이 돈의 촉감, 아, 기분이 좋아졌어. 정녕 나는 단순 대마왕이란 소린가. 선주린한테 물 퍼붓고 그냥 뛰쳐나가서 돈 받는건 상상도 안했는데. “오와, 3만원이네!! 고맙다, 휴인아!!” “담배는 사지마.” 예리한 새끼. 그래, 그래, 까짓 거 끊는다구. “나 오늘 수입도 좋았다!! 우리 오늘 고기파티!!” 환영이도 즐겁게 소리치고, “잠깐 지환영, 너 입가에 또 피...” “아, 헤드기어 잘못쓴거야. 신경쓰지마.” “너 정말 요즘” 민서가 환영이에게 잔소리를 시작하려는 찰나에, 운명의 장난, 또 시작. 삐걱거리는 대문 소리가 들려오고, 우리 모두는 그 대문을 열고 ‘해커’놈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새끼들, 먹을 복은 있나보네. 들어와.” 라고 비원이가 말한 것도 그 이유였다. 그러나, 대문이 열리고 들어온 인물은 모두의 예상을 단번에 뒤엎으니. 나에게 제일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당신은, 여기 나타날 사람이 아니잖아. “.....진한 오빠....”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모두들 나에게 시선집중. “에... 누나 아는 사람이예요?” 환영이의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단호하게 대답한다. “아니, 난 몰라, 저런 사람.” 말을 이렇게 해봤자 바보가 아닌 이상 모두 우리 사이를 눈치 깠겠지만. “시언아.” “누구세요?” “피곤하게 이러지 말자.” “.........가, 여기가 어디라고 와? 꺼져, 빨리.” “할 말 있어서 온 거야.” “난 할 말 없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염치없어!! 니가 내 앞에 나타난 것 자체가 재수없다구!!” 씨발, 흥분 안하려고 했는데, 순식간에 욱해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이 애들 앞에서. “시언아.....” “............선주린이라고는 왜 말 안했어?” 그리고, 비정상적으로 폭발해버린 흥분은 속에 있던 비열한 부분까지 모두 끄집어 내버린다. 이런 말 까지는 안 꺼내려고 했는데, 완전 추태야. “니 약혼자!!! 선주린이라고는 왜 말 안했어? 그렇게 내가 우스웠어? 가지고 놀고 싶었어? 속여놓고 뒤통수 치고 싶었어? 그동안 얼마나 우스웠을까? 내가 선주린 이야기 꺼낼 때마다 아주 웃겼겠다? 내가 선주린 대단한 여자라고 치켜세울때마다 우쭐했겠다?“ “...... 내 약혼자, 주린이라는 사실, 최근에 알았니?” “......... 하, 정말 짜증나게....” “그 정도는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주린이 결혼기사 신문이나 잡지에 자주 나오니까.” 그래, 씨발놈아. 나 신문 안본다. “내가 디자이너란 이야기까지 했으니까 그 정도는 눈치챌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말을 내뱉어놓고 아이들 눈치를 보는 진한오빠. 아차, 내 잘못이다. 이렇게 되면 선주린과 결혼하는 오빠 직업이 검사란 게 다 들통나고 말잖아? 아니, 아니야. 검사란 직업 가진 사람이 이 세상에 한둘인가 뭐? 애들은 그저 진한오빠를 나의 옛 애인정도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믿고싶다. 그게 아니라면, 일은 미친듯이 복잡해진다. “암튼 그 일 때문에 온 거 아니야. 너랑 싸우려고 온 거 아니라구.” “........ 어쨌든 난 할 말 없어.” 그렇게 내가 매몰차게 돌아선 순간. “누나 그거 맹세하지?” 내 눈을 빤히 보며 묻는 휴인이. “응?” “그럼 저 남자, 누나랑 모르는 사람인 거 맞지?” “으..... 응.” “오케이, 할 말 없는 것도 확실하지?” “어.” “그럼 시작!!” 말을 내뱉자마자 평상 위에서 훌쩍 뛰어내려와 나와 진한오빠의 사이를 떡하니 막아서는 휴인이. “아, 정말 피곤하게 뭐야. 시언아, 얘기 좀 하자구.” 한숨을 내뱉는 진한오빠 앞에서 휴인이가 당당하게 말한다. “아저씨.” 풉, 아저씨래. 하긴, 나이가 나이니만큼 진한오빠도 쟤들한텐 아저씨겠구나. “내 여자한테 함부로 말 거는거요, 기분 드러워서요.” “...... 뭐?” “내 여자.” “누가?” “정시언.” “넌 뭐야.” “맞춰볼래요? 영계 보디가드 또는 새로운 남자친구. 둘 중에 뭐게요.” 진한오빠는 귀찮다는 듯 인상을 팍 써보였다. “힌트!!! 내가 고백은 했거든요.” “시언이가 왜 너같은 애랑.” “정답. 아직은 영계 보디가드. 대답을 못 들어서요.” “시언이 건들지마.” “그럼 당신은 내 여자 울리지마.” 표정이 완전히 변해버린 휴인이. 존대도 무시하고 반말이다. “너 시언이한테 찍쩝대지마. 확실히 말한다.” “전남자친구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둘이 눈 맞으면 내가 일방적으로 찍쩝댄 건 아니지? 어때, 그럼? 지금 대답 들어볼까?“ “참, 나.” “정시언!!!!” “야. 이 새끼야.” “사귈래, 나랑????????”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내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내 뒤를 막아선 휴인이의 뒷모습이 보이고.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진한오빠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인다. 그리고, 빙글 돌아선 휴인이가 선한 눈빛으로 말을 건넨다. 다시 한 번, 정확한 발음으로. “나랑 사귈래요? 나 딱 겉모습만 보면 이 아저씨보다 꿀릴지도 몰라. 내가 옷 더 싼 거 입었고, 직업있어보이는 이 아저씨랑은 달리 일정한 수입도 없어. 대신 내가 얼굴은 더 잘났고, 속알맹이도 꽉 찬 거 같은데. 난 이것 저것 조건 보고 내 원래 여자 버리는 짓거리는 안하거든요.” 침을 꼴깍 삼킨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사귀는 건 애들 장난이 아니야. 진한오빠의 질투심을 유발하려는 생각도 해선 안돼. 그건 너무 유치해. 진한오빠는 이미 떠났는걸. 난 한 달 후면 떠날 사람이고, 이 애들을..... 지켜주지 못해. 그래. 그러니까 내 대답은............. “그래. 사귀자.” 씨발, 사랑은 이성이 아니고 감성이잖아. 어쩔 수 없어, 좋은 걸 어떡해. 떠날 땐 떠나더라도, 슬플 땐 슬프더라도, 난 그냥 지금 내 감정에 충실할래. 난 어리고, 휴인이는 나보다도 어리지만, 어리다고 사랑 못하는거 아니잖아. 나 그냥 이번엔 생각 없이 뛰어들어볼래. “정시언!!!! 너 미쳤어?????” “오빠가 상관할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 내 행동에 기가 막히다는 듯 한참을 허공에 시선을 두던 오빠는, 마침내 마음을 진정시킨 듯 한숨을 내쉬며 휴인이를 향해 말을 걸었다. “그래, 다 알았다. 근데 지금은 내가 시언이한테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자리 좀 비켜줬으면 좋겠다. 니 허락 받고 둘이서 이야기하는 건 괜찮겠지? 참고로 니 앞에서 이야기하라는 유치한 짓꺼리는 하지말고.“ 휴인이는 그런 진한오빠의 눈을 한동안이나 바라보았다. “좋아. 대신, 내 여자 손 끝 하나도 건들지 말고, 머리카락 하나도 손대지마.” “알았다.” “.........누나, 이 사람이 혹시라도 변태짓 할라 그러면 소리질러. 우린 방에 들어가있을게.” 이제 안정을 되찾고, 진한오빠가 찾아온 이유에 대해 내가 궁금해하던 찰나에, 휴인이는 고맙게도 좋은 결정을 내려주었다. 하지만, 나 정시언. 그 땐 몰랐었다. 휴인이의 본모습이 그 잠깐 사이에 잠시 내비춰졌었다는걸. 내 여자라고 당당히 말하는 모습. 수줍고 귀여운 기색 하나 없이 내게 고백하던 모습. 손 끝 하나라도 건들지 말라고 무섭게 경고하던 모습. 결정적으로, 눈빛 하나만으로 아이들 모두 군말없이 방에 들여보내던 카리스마적인 모습. 바로 그것이 휴인이의 본모습이었다는 걸, 난 그 당시에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의 난, 갑작스런 진한오빠의 방문에 대해 너무나도 당황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 애들에 비해, 너무나도 부족한.... 생각의 한계를 가진 사람이었다. 28. 내 남자 “우리도 방에 들어가자, 시언아.” “여기서 해.” “줄 게 있어.” 그 말을 마친 오빠는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속삭였다. “쟤들이 들으면 안되는 일이야.”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먼저 발걸음을 내 방으로 옮겼다. 손이 떨려온다. 방문고리를 잡을 때, 아주 미세하게. 내 뒤를 뒤따라 방에 들어온 오빠는 바로 문을 걸어잠그고 화를 내듯 말을 내뱉었다. “제정신이야? 진짜 사귄다구, 니가? 저런 새끼랑?” “오빠가 신경쓸 일 아니잖아.” “너희 아버지가 나한테 부탁하셨다. 너 요즘 어떻게 지내는 지 보고 오라고. 본인이 직접 오시기에는 너 쟤들 파악하는데 걸리적 거릴까봐!! 근데 너는 이딴 연애놀음이나 하고 있어? 제대로 알아낸게 있긴 있는거야?“ “내가 알아서해!!!!!!!!!!!” 생각보다 크게 내질러진 내 말에 오빠는 약간 당황한 듯 했다. “어쨌든 진심으로 마음주진 마라. 쟤들 쉽게 생각할 놈들 아니야.” “내버려둬.” “내 말들어, 이미 니 정체 다 파악하고 덤벼드는 행동일 확률이 더 높아!! 진짜 쟤들이 너 좋아하는 줄 알고 방방 날뛰지 말란 소리야!!!“ “그런 적 없어.” “당연히!!! 넌 당연히 그러면 안돼!!!!!” 그리고, 그렇게... 청천벽력같은 진실을 내뱉어버리고 만다. “...........” “왜인지 알아? 사실 너보고 애들 정체 파악하라고 하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어. 이 쪽 분야 전문가가 한 둘인줄 알아? 애초에 추리 시키려면 탐정을 보냈어!!!“ “...........뭐? 그게... 무슨 말이야?” “근데 검찰 측에서는 그냥 친구같은 인물을 보내기로 마음 먹은거야. 왜냐? 그 놈들이 어린 만큼 친구라는 존재에는 껌뻑 죽을테니까!! 아예 친구를 만들어서 쟤들 약점으로 삼아 버리려구!!! 그 약점이 너야. 물론 너는 애들하고 친해져야 할 의무가 있지. 근데 사귀는 짓은 하지 않는게 좋을거다.“ 돌덩이가, 머리 위에 쿵 내려앉는 느낌. 그 이상으로 현재의 내 심정을 잘 대변해주는 문장은 없었다. “무슨 뜻이야. 그럼 지금 아부지가, 날 이용하고 있다는거야??” “꼭 그런식으로 해석하지마. 너희 아버지는 널 믿기 때문에 보낸거야. 그 애들은 널 믿더라도, 너는 그 애들을 안 믿을 걸 아시니까. 니가 쟤들하고 굉장히 친해져서 누가 주동자인지, 누가 재벌 아들인지 찾아내면 그건 일이 정말 잘 되어야만 얻어내는 결과일거고. 지금 검찰이 예상하는 시나리오 상에서는 일이 그렇게 잘 풀릴거라고 기대하지 않아. 오직 니가 저 애들하고 친해졌으면 싶은거다. 저 애들을 조종하기 위해서. 얌전히 감방에 틀어박기 위해서. 순순히 잡아가기 위해서. 니 말 하나에 껌뻑 죽는 애들로 만들고 싶은거야.“ “......... 어떻게 그런....” 치사하고, 치졸한 방법이었다. 한 나라의 경찰이 하는 짓거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아이들을 상대로 연극 찍는것도 아니고, 뭐야, 이게? “못할 이유 없지. 범죄자 잡기 위해서인데 뭔들 못해? 맘 같아선 다 집어쳐넣고 싶은데 재벌 아들 때문에 참는거야!! 그 놈 함부로 잡아넣으면 여러 사람 다치니까. 재벌 아들 집어넣은것도 저 새끼들 계략이야. 재벌 아들이 합류하면 자기들 함부로 못 잡아넣는거 알고 억지로 재벌 아들 끌어들인 거라구!!! 그렇게 영악한 놈들이야. 쉽게 보지마. 저 새끼들이 머리 쓴 짓이 한 두갠 줄 알아?? 그러니까 병신처럼 니가 넘어가는 짓은 하지 말란말야!!!“ “.........” “이온이 보낼까도 생각했었지만 그 애는 아직 고등학생이라 제쳐둔거야. 이온이가 그렇게 붙임성 있는 성격도 아니고 까탈스러우니까 무리도 있었고. 반장님들 자식들은 모두 다 어리고. 적당히 생각 있고, 나이 있고, 휴학도 할 수 있으면서 심리적인 지식도 좀 있는 니가 가장 적절한 인물이었다. 알아들었어?“ “..................” “미안하다. 너희 아버지가 이런 말은 하지 말라셨는데, 니가 저 놈들한테 진짜 호감느껴서 사귀다가 나중에 못 빠져나오게 될까봐.“ 더럽다. 진짜 세상... 미치게 더럽다. 이러다 내가 먼저 구역질 나오겠어. 저 애들은 굉장히 맑고 깨끗한데, 세상이 쟤들을 더럽게 만들어. 아부지, 아부지가 날 믿어 주는 건 좋은데요, 이건 아니예요. 절망적인 기분으로 간신히 서 있는 나에게 진한 오빠는 더욱 승질나는 말 한마디를 내뱉어버렸다. “너 아직 내 여자야. 처신 똑바로 해.” “............뭐...라고....?” 나는 드디어, 기가 차서 말이 안나오는 지경이 이르렀다. “주린이는 내가 결혼할 여자지만, 아직 너에 대한 마음 완전히 다 접은 건 아니다.” “......... 돌았구나, 너.” “그러니까 저런 새끼하고 놀아나지마.” “웃기지마!!!!!!!!!! 이젠 내가 너랑 상종 안해!!! 우린 끝났어!!! 니가 안 끝내도 내가 끝내!!” “과연 그럴까?” “............뭐?” “애초에 확정된 일 아니었던가? 니가 먼저 사랑했고, 니가 먼저 사귀자고 했어.” “...............개새끼.” “니가 나를 사랑해서 못 잊을 확률, 난 거기 100% 건다.” “................ 죽여버리고 싶어.......” 분노의 끝에 치달은 나는 그의 얼굴만 계속 노려보았고, 그는 비열한 웃음을 매단 채 잊을 뻔 했다는 듯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 나온 건 돈봉투. “너희 아버지가 걱정 많으시다. 딸 혼자 이런 곳에 보내놨으니 맘 편하실 리도 없지. 자비로 돈 들여 나한테 보내신거야. 20만원이다.“ “................” “한 번 연락 하라신다. 일 바빠도 연락해드려.” “..............” “재벌 아들 찾으면, 나한테 먼저 알려주라. 요즘 그 새끼 부모 사망관련 조사 하거든.” 그렇게 쉽게 말하지마. 재벌 아들은 이미 알고있어. 하지만 너에겐 안 알려줘. 비원이, 그렇게 이유없이 반항할 애 아니야. 부모님 돌아가신 일로 안 그래도 힘들 앤데, 그딴식으로 지껄이지마. 치솟는 분노는 터져나오지도, 숨겨지지도 못하고 나를 덜덜 떨리게 만들었다. 방금 전까지 내 눈앞에서 방긋 웃던 휴인이 얼굴이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때마침 진한오빠의 주머니에 들어있던 핸드폰이 요란스러운 진동소리를 냈고, 진한오빠는 거리낄 것 없다는 듯 핸드폰 플립을 열어제꼈다. 부럽다, 모든 것을 만만하게 보는 저 태도. 전 여자친구에게 모욕을 퍼부은 지 1분도 안 된 그 와중에, 저렇게 태연하게 전화를 받을 수 있다니. 존경스럽네, 정말. “아, 장모님.” 참을 새도 없이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뻔뻔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 앞에서 반가운 척 말한다. 장모님이라고. “예, 주린이요? 어제는 안 만났는데요, 무슨 일 있었습니까?” 내 눈치도 보지 않고 핸드폰을 한참이나 귀에 대고 있던 진한오빠는 놀란 듯 수화기 속의 장모님을 향해 다시 한 번 되물었다. “주린이가 물벼락을 맞아요? 모르는 여자한테요?” ............설마, 저거... 내가 한 짓 말하는건가....? 그렇지, 진한오빠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 짓을 내가 했다는 거 눈치 못채겠지? 이걸 곤란해 해야 하나, 고소해 해야 하나. “지금 가요, 제가 지금 갈게요, 장모님!!” .......결국 그의 발걸음은, 약혼자에게로 떠나는 걸까. “아니요, 안 바쁩니다!! 제가 지금 감기약 사가지고 갈게요!!” 어쩔시구. 선주린 고거갖고 감기까지 걸리셨대? 아주 순정남 나셨구만, 감기약 사들고 약혼녀 집에까지 가서 신파극 찍겠지. 진한오빠는 급히 전화통화를 끝내고 핸드폰을 주머니 속으로 다시 집어넣었다. “아, 씨발 웬 년이야, 또라이를 만났나.” ........그 또라이 나다. 니 여자 친구에게 물 퍼부은 그 년이 나다!!! “나 가봐야겠다, 일이 있어서. 시언이 너 행동 똑바로 하고.” “.............”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라.” 내가 너한테.... 연락을 왜 하니, 이진한.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진한오빠는 달려간다. 자신을 기다리는 약혼녀를 위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 집을 나가, 대문을 열고, 저 밖으로. 그리고 자신의 자동차를 타고.... 보이지 않는 저 먼 곳으로 점점 사라져간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에야 [관계자 외 출입금지] 놈들이 빼꼼히 문을 열고 나와서 우리 집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아 버린 나는 멍하니 그들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환영이, 민서, 비원이... 그리고 휴인이. 나를 걱정하는 아이들의 시선이 고맙고도 미안해진다. “누나.... 울어?” 그리고 역시나, 이유없이 눈물이 흐르는 나의 얼굴을 살며시 닦아준 건, 이제 나의 남자친구가 되버린 휴인이였다. 29. 너는 나에게 비참해. 내가 왜 진한오빠에게 이런 취급을 당해야 되는건지, 비참하다구. 내가 어려서 만만한가? 선주린에 비해 이것저것 딸려서 가지기는 싫고, 심심한 때 한 번씩 데려다 놀고는 싶은 그런 마음? “이건 뭐냐.” 그 때, 비원이가 상체를 숙여 바닥에 놓인 돈봉투를 집어올린다. 진한오빠가 나에게 주고간 돈봉투. 우리 아버지가 자비를 들여 20만원 넣어주셨다는 돈봉투. 잠깐, 이거 나 돈 받았다는 거 알면 앞으로 지네 패거리에 안끼워주는거 아냐? [이제 그 돈으로 니 혼자 잘 먹고 잘 살아라!!!] 이렇게 나오면 곤란한데. 특히 민서가 그렇게 나올 확률이 높은데. 거, 참 걱정이네. 어떡하지? 뭐라고 둘러대지? “아까 그 새끼가 준거야?” “응...” “웬 돈을 주고가냐, 저 새끼는.” 인상쓴 채 중얼대는 비원이. “........그렇지...? 돈이나 받고, 나 되게 비참하지...?” “...........야...” “저 사람 내가 전에 사귀던 남자친구다?” “.........야, 그건 바보 아닌 이상 눈치 까.” “...... 사귈 때 꽤 재밌었다고 그거 수고비로 주더라. 웃기지?” ........그렇다. 어쩔 수 없다. 아부지가 주신 저 수상스런 돈을 어떻게든 둔갑시켜야 한다. 이왕 이렇게 된 스토리, 진한오빠는 더욱 완벽한 개새끼로 만들어버리고, 나는 더욱 완벽하게 불쌍한 년이 되어버리는 거다. 내 말에 비원이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뭐야, 사람 가지고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이딴 돈 받고 있었냐? 그 새끼 얼굴에 대고 던지던가, 아님 그 앞에서 찢던가 해버리지!!! 왜 이거 받고 질질 짜고 있냐? 니가 이거 받으면 자신이 장난감이었다는 걸 인정하는 게 돼버리잖아, 병신아. 어차피 돈 없는 거, 그냥 우리한테 기대서 지내지, 왜 이 지랄하냐구. 돈이 그렇게 좋아?“ 그러나 불행히도 비원이의 비난대상은 진한오빠가 아닌 나였다. 아, 씨. 내가 예상한 스토리는 이게 아닌데. “........그러니까 비참하지.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분명 연기였는데. 말하다보니까 내 자신이 진짜 비참하게 느껴졌다. 어쨌거나 사귀던 남자친구에게 차인 건 사실이다. 그 남자에게 [아직 넌 내 꺼야.]라는 개 같은 소리를 들은 것도 사실이고. 그리고, 경찰측에게 이용당한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돈 마련해주신 아버지께는 감사하지만, 사실 역겨운 돈인 것은 틀림없다. 사람을 속이기 위한 돈이니까. 아이들에게 친한 친구가 되어주고 받는 수고비용, 용돈... 같은 거니까. 참았던 눈물이 도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내 자신의 의지로 주체할 수 없을만큼. 아이들에게 미안해졌다. 난 나중에 이 아이들에게...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사죄할 수 있을까. 용서를 빌 자격이나 있을까. 나중에 비열하게 웃으면서 이 애들을 깔아볼 자신 따위.... 나에게는 없다. 그렇다고 용서해달라고 말을 꺼낼 용기조차 없다. 얼마나 염치없는 행동인지 알기에. 내 눈물에 놀란 듯 환영이는 성질 내는 비원이를 말리기 위해 그의 어깨를 살며시 잡는다. 비원이는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렸고, 민서는 무표정으로 돈 봉투만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 빼지 말랬는데, 개새끼네, 그거. 누나 울리기나 하고.” 휴인이는 연신 손으로 흘러내리는 내 눈물을 막아주고 있었다. “그거 알아, 누나? 눈물엔 독 들어있대.” 그리고 뜬금없이 심오한 비밀을 알려주듯 내게 속삭인다. 그의 말에 나를 포함하여 다른 아이들까지도 휴인이에게 시선 집중. 나 살다살다 눈물에 독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 그 순간, 휴인이의 입술이 볼에 맺혀있는 내 눈물을 향해 돌진, 그 예상 불가능한 행동범위를 가진 놈은 내 눈물을 먹어버린 것이다. “........휴인아!!” “앞으로 누나 울면 그 눈물 내가 다 먹어야지.” “.............” “눈물에 독 들어있으니까 울지마. 누나 울면 그 눈물 내가 다 먹어야 돼. 누나 많이 울면 나 독 쌓여서 일찍 죽을지도 몰라. 알았지?“ 정말 천방지축. 저런 기발한 발상은 어디서 나오는지. 휴인이의 말을 듣고 피식 웃어버린 나와는 달리, 환영이와 민서는 벙찐 표정으로 휴인이를 바라보았고, 비원이는 토하는 시늉을 열나게 해대고 있었다. 아니, 저 놈의 냉정한 성격으로 보아 시늉이 아니라 진짜 구역질이 나는 걸 수도 있다. 왜냐면 저 놈은... 필요치 않는 액션은 해 보이는 성격이 아니므로. 뭐, 별로 닭살도 아니구만. 이 따위 상황에도 면역이 안되다니. 환영이랑 민서는 되게 황량하게 사귀나 보지? 하긴, 나도 쟤네 닭살 떠는 건 본 적이 없네. 민서는 그렇다 치고, 환영이는 애교 많을텐데. “근데 진심이야? 진짜 사귀겠다구?” 낯뜨거운 그 찰나의 순간을 깬 건, 바로 민서의 날카로운 음성. “둘 다 쇼한거지? 장난치고는 강도가 높았어. 남들이 들으면 진짠 줄 알겠어.” 캡모자를 더 푸욱 눌러쓰는 그녀를 향해 휴인이는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진심 맞아.” “................뭐?” “진심 맞다구.” 휴, 다행이다. 민서 물음에 순간 온 몸 전체에 긴장이 휩쓸고 지나갔다.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간절한 진심이라는 감정이, 휴인이에게는 단지 진한오빠를 물리치기 위한 거짓이고 장난이었을까봐. 하지만, 진짜구나. 진짜 맞구나. 나, 진짜 휴인이랑 사귀게 된거야. “어디보자, 그러니까 오늘이 1일이야, 누나. 나 사실 숫자 세는 거 되게 싫어하는데 그래도 해볼게. 사귀는 날짜 세는 거 처음인데 잘 되려나 모르겠다. 그러니까 누나도 세. 숫자 잘못 세서 100일 기념파티 99일이나 101일에 하면 안되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날짜를 세보는 휴인이. “그러니까 내일은 2일 째, 다음날은 3일 째.” “잠깐만, 휴인아.” “응, 왜, 누나.” “처음.....이라 그랬니, 방금? 사귀는 날짜 세는 거 처음이라구?” “응!!” “....... 왜?” “나 애인 생긴 거 처음이니까.” 오 마이 갓. 잠깐만, 이건 아니잖아!! 내가 순진남 꼬시는 꽃뱀도 아니구!!! 여자 하나 안 사겨본 이런 꼬맹이를 내가 데리고 논다, 이것은.... 이것은... 처녀지를 정복하는 독재자와 같은....... .... 이거 잘못하면 원조교제로 찍혀서 나 범죄자 되는 거 아냐? “말도 안돼, 미쳤어, 강휴인????????” 그러나 나의 경악이 멈추기도 전에, 째질듯한 목소리가 귀청을 파고드니, 그건 장래에 국악 명창을 시켜도 될만한 우리의 민서 목소리였다. “아, 왜.” 휴인이는 귀찮다는 듯 대답을 하며 여전히 날짜 계산 중. “미친 거 아니냐구.” “아니, 그러니까 도대체 뭐가.” “사, 사귄다니!! 그게 말이 되냐구!!!” 민서가 말 더듬는 거 처음본다. “아, 말이 안 될게 뭔데!!! 정신사나워, 말 시키지 말아봐. 그니까 이번달 말이면 26일 째?”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 민서의 입에서 나왔다고 믿기 힘들만큼 유치한 질문. 잠시 우리들 사이에서 차가운 공기가 맴돌고 분위기는 극도로 무거워졌다. 휴인이는 입꼬리를 찍 올리며 장난스레 중얼거렸다. “응, 백민서가 지환영 사랑하는 만큼이나.” 씨발, 감을 못 잡겠다. 그럼 얼만큼 사랑하는거지? 정확한 수치로 말해봐, 휴인아!! 사랑의 완성도가 100이라고 치면 넌 몇이냐!! 나에 대한 니 사랑은 몇 점이냐구!! “관 둬.” 뻘쭘해진 환영이가 뒤에서 잔기침을 해대는 사이, 민서는 휴인이 앞을 막아서고 엄청난 포스가 담긴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시언누나, 얘 봐. 우리보고 관두래.” “장난아니야, 강휴인.” 나조차도 소름끼치는 민서의 말에 휴인이는 물끄러미 민서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래. 내가 말 잘못 했네.” “너.....” “백민서가 지환영을 사랑하는 만큼이란 말 취소. 우리 민서양은 얼음여왕이니까. 아무리 사귄다 해도 그렇게 큰 사랑은 못한다 이거지?“ “야!!!!” “내 삶만큼. 그만큼 사랑해. 이제 됐나?” “네 삶이... 얼만큼의 가치가 있는데?” 그리고 내가 묻고 싶었던 질문을 그대로 해주는 민서. 나도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여자란 말이지. 이런 유치한 질문에 귀를 기울이다니. 그리고 민서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낮게 읊조리는 휴인이의 음성이, 내 귀에 그대로 들어와 박힌다. “나를 살게 하고 나를 죽게 하고 나를 변하게 하는, 절대적인 가치.” 30. 족쇄 .......씨발, 강휴인... 도대체 오늘 나한테 감동을 몇 번 주는 거야. 소름이 돋았어. 진한오빠도 날 그 정도로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않았어. 말이라도 고마워. 내가 누군가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소중한 사람이란 거, 알게 해줘서 고마워. 휴인이 진짜 무슨 말 잘하기 학원 다니나. 어린놈이 쉴 새 없이 날 설레게 만들어. 그러나 감동받은 나와는 달리 민서는 굉장히 흥분한 듯 보였다. “웃기지마!!! 네 인생!! 그거 별 거 아니잖아!! 죽고 싶으면 언제든 죽을 수 있는게 우리잖아!!! 쓸데없는 희망 같은 거 남기지마!!! 다른 사람 엮이게 하지말라구!!!“ “..........” “길가에서 치여죽은 도둑 고양이 새끼랑 똑같애. 차바퀴에 깔린 쥐새끼랑 다를 바 없어. 도살장 가는 소랑 똑같은 입장이라구. 내 말 이해 못해, 강휴인? 우리가 그래!! 우리 인생이 그래!! 우리 삶이 그렇다구, 병신아!!!!“ 무섭게 소리치는 민서. 그리고 그런 민서의 볼을 톡톡치며 웃어보이는 휴인이. “누구에게나 삶은 그의 전부지. 어쩔 수 없잖아. 사랑해야 진실이 보여. 알아, 백민서? 지금 저 여자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나 밖에 없어. 그리고 니가 걱정하고 있는 게 그것만은 아닐걸. 네 맘 다 안다.“ 뭔가... 굉장한 뜻이 담긴 말들이 오간 것 같은데... 이해가 안된다. 그리고 결정적인 휴인이의 한 마디. “미안하지만... 넌 안돼.” 그 말 한마디에 붉게 달아오르는 민서의 얼굴. 뭐지? 뭐야!! 대체 뭐야!!! 대놓고 말을해!!! 니들의 맘을 모두 펼쳐놓아봐!!! 숨 넘어가게 니들끼리만 알지 말란 말이다, 쫌!!!! “뭐, 뭐야!!! 우, 웃기지마, 그런 뜻 아니야!!!! 씨발!!!! 진짜 저 여자 들어오고 나서부터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욕지거리를 남기고는 내 집 문을 거칠게 열고 나가버리는 민서. 서, 설마.... 설마!!!!! 민서가 좋아하는게 환영이가 아니고 휴인이이이이?????? 나 혼자 되도 않는 걸 열심히 추리하고 있을 때, 환영이가 민서 뒤를 쫒아간다. 잠깐, 아이들아. 이러지마. 나에게 일말의 희망이라도 남겨다오. 뭔가 단서라도 좀 달란 말이다!!!! 난 정말 니들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단다. 무슨 암호로 대화하는 것도 아니고 이건 뭐..... 나 혼자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 때, 벽에 기대있던 비원이는 생각에 잠긴 듯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 그런거냐, 강휴인.” “..... 어.” 아니, 뭐가!!! 야, 대체 뭐가!!! 나 좀 가르쳐줘, 신비원!!!!! “....... 백민서 저 년 미쳤네.” 비원이 또한 무언가를 깨닫고서는 특유의 무표정을 유지하며 내 방을 나가버렸다. 어린 것들이 잔머리만 좋아가지구. 니네 다들 중퇴맞냐.... 이건 아니잖냐... 나는 대학 다닌단 말이야. 근데 왜 니들 말을 이해못해, 엉? 이건 말야, 내가 캐나다에서 온 토마스 교수님의 수업보다 더 이해 못하겠다고!! 그것보다 더 외계어로 들린다구!!! “휴인아, 무슨 뜻” 그 순간, 휴인이의 입술이 내 입술로 정확히 와 닿았고, 정시언, 이 집에 머무른 지 단 3일만에... 키스 성립. 근데 이 새끼, 사귄거 내가 처음이라며, 근데 왜 잘해. 유경험자에다가 4살 맞은 누님이 이 상황을 리드해야 하는 게 당연하잖아!! 근데 이 놈 왜 이래. 첫 눈에 반한다는 말,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이트에서 원나잇 스탠드 해대는 내 대학 친구들, 미친듯이 욕했었다. 그러나 정시언, 3일만에 4살 연하랑 눈 맞아서 지금 입술을, 키스를 나눠대고 있다. 내가 이상하단 생각도, 너무 빠르다는 생각도 들지않는다. 그러나 마냥 좋지만은 않은 건... 내가 지금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 대 사람이 나누는 키스는... 여자와 남자가 나누는 키스는... 대화보다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지금 휴인이가 내게 한 키스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사랑해’가 아닌..... ‘미안해’다. 느껴버렸다. 이 애들은... 내 존재를 알고있다. 내가 스파이라는 거... 이 놈들은 알고있다. 진한오빠의 말, 믿고 싶지 않았지만 오빠 말이 사실이었다. 휴인이가 나와 사귀자고 한 건 이 놈들의 계략일까? 대체 어디서부터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거짓이지? 난 그걸 깨달을 수가 없어. 머리가 아파. 물론 너희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나도 미칠 것 같아. 알겠니? 너희들을 좋아하지만 난 이대로 물러설 수 없어. 너희들한테 적당히 져 줄 수가 없단 말이야. 나한텐 홀로 힘으로 나를 키워주신 아버지가 있고, 엄마 없이 지낸 이온이가 있어. 물론, 휴인이를 좋아한다. 이 놈들을 지켜주겠다고 말한 것도 진심이었고, 세상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것도 여전하다. 그러나 내가 이들에게 바라는 건, 그들 죄의 댓가를 치렀으면 하는 것이다. 목적과 목표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죄의 댓가만 치러주면, 그 후에는 이 놈들의 미래와 인생까지 내가 책임져줄테니까. 가난한 이들을 돕는 건 좋지만 범죄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니까, 그걸 깨닫고서 제발 도망치지 말고 순순히 경찰에게 잡혀줬으면 하는 거다. 이런 식으로 사람 마음 찢어지게 하지 말고. 제발 그냥 얌전하게. 이번에는 도리어 내가 휴인이의 입으로 파고들었다. 멈칫, 하는 휴인이의 미세한 떨림이 느껴진다. 그리고 몸을 뒤로 살짝 빼더니 입술을 떼버린다. 나는 진지하게 놈의 눈동자를 쳐다보고, 그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려버린다. “휴인아.” “완전 어색해!! 누나 너무 저돌적이라 내가 겁먹었잖아!!” “..... 휴인아, 난....” “아, 나 처음인데 이건 정말. 후아. 와, 정말 이건 너무해. 새로운 세계로 눈 뜬 기분이야. 비원이는 호스트빠에서 이런 장면 맨날 보겠지. 아 정말 말도 안돼. 나 충격 받“ “휴인아..... 주동자가 누구니.” 정공법. 강하게 나가려던 내 생각과는 달리 내 눈에서는 눈물 줄기 하나가 떨어졌고. 휴인이는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상처 받은 눈으로. 마음이 갈기갈기 수천조각으로 깨진 듯한 그런 눈으로. “누나.......” “......주동자가.... 누구니....” 제기랄, 목소리까지 떨려온다. 울먹이는 내 목소리. 이미 밝혀버린 진실. 이미 내 도박을 시작되었다. 도 아니면 모다. “누나가..... 우리 한 번만 봐주면 안되냐.....?” 그리고 휴인이의 간절한 한마디.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할 때보다, 동생 이야기를 할 때보다... 더 가라앉은 목소리. 더 힘이 빠져버린 목소리. “다 알잖아... 휴인아, 나는 너희가 정말 좋은데... 그러니까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그러니까 너희들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러니까 서로 존재를 눈치챘는데... 나는... 너희가....“ “......주동자 찾는 거 보니까.... 재벌 아들은 이미 찾았나보네.....” “.........휴인아!! 나는 너희들을 망치고 싶어서 이러는게 아냐, 나는!!!” “내 이야기 내 입으로 꺼내는 건... 힘들어, 누나. 난 누나를 믿었어. 그래서 내 옛날 이야기까지 했어. 눈물 참아가면서, 가슴 아파하면서. 누나랑 나누고 싶었어, 우리 사연 함께 나누고 싶었는데 누난 고작 그런 거에만 신경쓰고 있었던 거야!!! 누가 주동자고 누가 재벌 아들인지!!!” “.......... 웃기지마!!! 너희도 알았잖아, 내가 경찰에서 보낸!!!!!!!!!!!!!!!!!!” “알아도 믿어!!!!!!!!!!!!!!!!!!!!!!!!!!!!!!!!!!!!!!!!” “......................” “우린 믿어. 누나니까. 우리 인간으로 대해줬으니까. 사랑하니까.” “....................” “지금도 믿어. 믿음 안 깰거야. 그러니까 누나도 우리 버리지마.” 휴인이의 눈시울이 붉게 변한다. “강휴인..........” “이러지 마, 누나..... 우리 힘들어 죽겠어.....” 씨발... 씨발 정시언 미친 년.... 내가 먼저 배신한거다. 그러나 휴인이는 나를 믿겠다 말한다. 끝까지. 결국 나는 이 더러운 세상보다 휴인이를 아프게 한 셈이 된다. “애들한텐.... 말 안할게, 누나... 나 이 말 못 들은걸로 할게.” 그 와중에도 나에게 다가와 내 눈에 흐르는 눈물에 입 맞추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휴인이. 그리고 걸어간다. 천천히. 떨리는 발걸음으로. 난 오늘, 아이들의 뒷모습을 모두 보고 말았다. 모 아니면 도. 그건 틀렸다. 애초에 이 승부는 0.00001%의 반전이었다. 내가 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무조건 내가 이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들이 내 모든 것을 옮아매고 있다. 절대 배신하지 못하도록.... 믿음이 그렇게 무서울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이들의 정체를 알아도, 그들이 나의 정체를 알았어도.... .........정말 더럽게도.... 나 또한.... 그들을 믿고있다. 31. 엇갈림 (작가시점) 민서는 대문 밖으로 급하게 뛰어나가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담벼락에 기대어 주머니에 있을 라이터를 꺼내기 위해 손을 옷 속으로 집어넣었을 때, 눈 앞에 라이터 불빛이 탁 켜진 채로 일렁거렸다. 뛰쳐나간 자신의 뒤를 따라와 준 환영의 배려였다. 환영은 민서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고는 그의 옆에 나란히 기대어 섰다. “날씨 좋다.... 안 그러냐, 백민서.” “.......... 난 강휴인 새끼 이해 못하겠어.” 민서는 담배연기를 확 뿜어냈고, 환영은 시선을 하늘에 여전히 고정하고 있었다. “나도 그 새끼 정신세계 이해 못해.” 그렇게 말을 꺼냈지만 휴인의 속마음을 그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환영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해왔기에 그들은 친형제 이상으로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내가 자라난 환경이 너희들하고 달라서 이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백민서!! 그런 말 하지마, 너 누구보다 잘하고 있어!!” “그럼 대체 왜!!!!!! 대체 왜 도망을 안 치는거야!!!!!!!!!!!!!!!!!” 민서는 감정을 주체 못한 듯 환영을 향해 소리쳤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넷이 있을 때는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자처하던 민서였기에 환영도 그의 화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다른 경찰은 다 경계하면서 왜!!!! 왜 정시언은 내버려두는거냐구!!!! 차라리 도망치자, 왜 정시언한테는 꼼짝 못해야 되는건데, 왜!!!!! 나 집 나와서 지금까지 너희들 생각 모두 이해했어. 아니, 내 생각이 너희들 생각이었어. 근데 이번만은 도저히 모르겠다, 상황이 이러면 우리한테 절대적으로 불리해!!!!“ “이젠 경찰도 장난이 아닌거지, 우리도 목숨걸고 덤벼들어야해. 그 뿐이야.” “지환영.....!!!!” “아까 휴인이가 말했지. 사랑해야 진실이 보인다구. 우리가 경찰한테 이길 방법은... 이제 하나뿐이야. 누나를 우리 편으로 만드는거야. 그럼 다 끝나. 누나랑 휴인이랑 둘이 사랑하면, 그럼 다 끝나.“ “강휴인 새끼 진심 아니잖아!!!!!!!!!!!!!!!!!!!!!!!!!!!!!!!!!!!!!!!!” 민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마음 속에 응어리진 진짜 속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난 그걸 이해할 수가 없어!!! 개같은 인생인거, 우리 넷 다 똑같애!!!! 살아온 환경이 달랐어도 내 인생 결과는 니들하고 똑같았어!!! 난 죽기 싫어서 뛰쳐나온거야!!!! 내가 그대로 있었으면 우리 부모님이랑 똑같은 꼴이었겠지!!! 알아? 경찰은 지금 우리 가지고 놀고 있는거야!!!! 이진한 그 새끼가 여기 왔잖아!!! 그 새끼가 지금 내 부모님 사망조사하고 있어!! 그 새끼 분명히 뇌물 쳐먹을거고 조사 제대로 안해줄거야!!!! 그 때문에 우린 굴복할 수가 없는거야!!!!! 난 무조건 강휴인한테 걸었어. 그 놈만 믿고 여기로 합류했다구!!! 그 놈이 내 우상이고, 그 놈만 믿었어. 근데 강휴인이 지금 더러운 짓 하잖아!! 강휴인이 진심 아닌 상태로 정시언한테 껄떡 댈수록 우리도 그 새끼들하고 똑같아져!!!! 똑같이 밑바닥에서 구르는 병신새끼들 된다구!!!!!“ “..........민서야.....” “살고 싶어서 너희들이랑 함께 했는데 우리가 왜 이래야 되냐???? 지환영, 내 말 알아듣겠어??? 강휴인 하는 말 들었지??? 사랑한대!!!! 자기 삶만큼!!!! 내가 너 사랑하는 만큼!!! 물론 정시언은 아무 것도 모르니까 못 알아듣겠지!!!! 근데 그 순간 난 존나 구역질 났다. 너랑 나랑 진짜 연인도 아닌데 내가 널 사랑하는 만큼이래. 강휴인 새끼 지 삶엔 애정 조금도 없으면서 지 삶 만큼이래. 결국은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는 소리야!!!! 역겨워, 강휴인이 이렇게 치사해질 줄 알았으면 나도 차라리 죽는게 나았어!!!!!!!“ 환영은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대문 밖으로 또 누군가가 나왔다. 186센티의 길고 호리호리한 실루엣. 대충봐도 그건 비원이었다. “돌려말하지 말고 진심을 말해, 개새끼.” 비원은 민서의 앞에 선 채로 담배를 하나 꺼내 물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지금 니 행동 참 우습다, 라고 몸으로 말하듯이. “너나 나나 환영이나 휴인이 믿고 있는 건 다 마찬가지야. 넌 지금 휴인이가 경찰이랑 똑같이 더러운 짓 한다고 화난 척 하지만 진심은 그게 아니잖아. 휴인이가 그보다 더 더러운 짓 하더라도 평소의 너 같았으면 다 이해했을거야. 결국은 그게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방법이었으니까.“ “................” “나도 니가 왜 그렇게 화내는지 몰랐는데 휴인이가 하는 말 듣고 금방 깨달았다.” “............ 닥쳐....” “휴인이가 그랬지. [지금 저 여자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 민서 네 마음 다 알지만... 넌 안된다]고. 지금 너 이러는 거 유치해. 강휴인은 이미 다 알고있었어.“ “.................” “니가 정시언 좋아하는 거.” “..............씨발.....” “당연하지. 지금 정시언이랑 사귈 수 있는 역할 할 수 있는건 강휴인 뿐이야. 넌 여자 역할 하고 있고, 환영이는 너랑 사귄다고 해놓은 상태고, 난 두 번 다시 사랑 따위 못하는 인간이야. 정시언이랑 사랑해서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니가 정시언한테 접근해봤자 동성애자란 소리밖에 더 듣겠냐? 결국 강휴인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소리다.“ “진심까지 숨기면서.... 그 여자 잡아야겠어?? 우리가 그렇게 유치했어???” “더 유치한 짓도 가능해, 강휴인은. 왜냐면.....” “..................” “그 새낀 강휴인이니까. 무서운 게 없어. 자신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 돕기 위해서라면. 그 새끼 눈 앞에 보이는 거.... 아무것도 없어.“ “................” “사랑은 하지마라, 백민서. 나도 정시언 맘에 들어. 괜찮은 여자고 믿을 만한 사람이야. 근데... 사랑은 하지마라. 그 여자, 강휴인이 사귀자고 말하기 전부터 그 놈 좋아한 눈치야. 괜히 그 여자 때문에 니 중심 놓치지마.“ “...............” “물론 처음이겠지. 명품으로 몸 둘둘 휘감고 머리 텅텅 빈 여자들만 본 니 눈에, 정시언 같은 여자... 솔직하고, 편하게 웃어주고, 거리낌 없이 인간으로 대해주는거. 처음이겠지만... 민서야, 우린 이미 다 버린 놈들이다.“ “.............. 씨발.....” 민서는 담배를 땅에 팽개치며 애꿎은 담배만을 발로 짓이겼고, 비원이는 그런 민서가 안쓰러운 듯 그를 바라보며 묵묵히 담배만 피고있었다. 환영은 비원이 민서를 잘 위로해줄거라 판단하고 대문을 열어 안을 빼꼼히 바라보았다. 휴인이 시언의 집을 나와 자신들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목격한 그는 재빠르게 휴인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민서는?” 휴인은 멀쩡한 모습이었다. 휴인은 그랬다. 언제 무슨일을 당해도 당황하는 법이 없었다. “비원이랑 밖에 같이 있어.” “그 새끼가 진심으로 시언누나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단지 관심인 줄 알았지.” “괜찮겠냐?” “뭐, 그렇게 감정 못 추스르는 놈이라고 생각하진 않아. 앞으로 자주 틱틱거리는 건 감수해야겠지만, 니가 옆에서 좀 잘 잡아줘.“ 곁에서 휴인을 보고 있노라면 환영은 언제나 소름이 끼쳤다. 그는 언제나 무섭도록 냉정했다. “휴인아... 솔직히 나 이번에는 자신없다. 우리에게 승산이 없어.” “끝까지 가봐야 알지.” “....... 이건 정말.....” “아까 정시언이 나한테 대놓고 묻더라. 주동자가 누구냐고.” “뭐??????????????” 환영은 깜짝 놀라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시언은 결국 인정해버린 것이다. 자신이 스파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말을 내뱉었다는 것은 자신이 이길 가능성을 잡아챘다는 증거다. 그토록 길고 길었던 [관계자 외 출입금지]와 경찰의 길고 긴 줄다리기가 곧 끝날 수도 있는 것이다. “걱정마. 시언누나는 주동자가 누군지 감도 못 잡고 있어. 더군다나 경찰이 오랜만에 일 크게 벌였는데... 이렇게 짧게 끝내진 않을거다. 적어도 한 달은 두고 볼거야. 이번엔 나도 피할 생각 없어. 경찰에게 있어서는 시언누나가 스파이지만 우리에게는 인질이나 다름 없는거야. 시언누나가 취할 행동은 둘 중 하나야. 우릴 잡아 쳐넣던지, 우릴 끝까지 숨겨주던지. 어떻게든 우릴 이해하고 도와주도록 유도해야겠지. 어쨌거나 비원이나 민서한테는 말하지마라. 걱정할라.“ “시언누나는 우릴 숨겨줄 만큼 영향력 있는 사람은 아니야!! 다 보이잖아!!! 이진한한테 차인 것도 거짓말은 아닌거 같애!!!” “해커 애들 시켜봤어. 정시언 아버지가 우리 사건 맡은 검사같은데.” “..........이렇게 되면 둘 중 하나야. 모두 다 완전히 끝나던지, 아니면” “그러니까 좀 더 두고보자구.” “이건 얕잡아 볼 사건이 아니야!! 그 여자가 주동자가 누구냐고 물었다는 건!!!!” “그게 왜?” “강휴인!!!!!!”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 아냐? 난 백민서가 누나 좋아할 것도, 누나가 자신의 정체 밝힐 것도 이미 계산하고 있었어.“ 휴인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고, 환영은 완벽한 계획을 세워놓은 휴인을 보며 다시 한 번 돋아오는 소름을 진정시켜야 했다. “근데 환영아...........” “..................” “솔직히 누가 이기게 될 지.... 나도 이번엔 정말 모르겠다....” “휴인아......” “나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딱 하나 생겼다.....” “..............너 설마....” “나........... 시언 누나가 좋아졌어. 진심으로.” 환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정도는 이미 알고있었다. 민서가 충격받을까봐 그에게는 말하지 못했지만 환영은 이미 느끼고 있었다. 휴인은 시언을 자신의 삶 만큼이나 사랑한다고 했다. 휴인은 민서의 말대로 ‘사랑까지 들먹이면서 누군가를 속이는 더러운 놈’은 아니다. 그것은 시언을 너무 좋아해버린 나머지 민서가 오해한 부분이다. 휴인은 진짜 시언을 사랑했기에 그녀에게 사귀자는 말을 건넨 것이며, 휴인에게 있어 삶이란..... 민서의 표현대로 포기할 것이 아닌.... 아무렇게나 버려도 되고, 쓸어버려도 되고, 엎어버려도 되는 것이 아닌.... 그 어떠한 일이 있어도 끝의 끝까지 놓아서는 안될 그의 천국이었다. 결국... 휴인은 시언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가 만들어갈 천국만큼 무한하고 영원한 그런 사랑을. 32. 줄다리기 다음날 아침. 아, 어제는 저녁도 먹지 않고 다들 뿔뿔히 흩어져 잠들어 버렸다. 에라이 씨, 진한오빠만 안왔어도 고기 파티를 즐길 수 있었는데 아쉽다. 하긴, 어제는 나도 저녁 챙겨먹을 정신따위 존재하지 않았었다. 실제로 내가 밥을 챙겨먹지 않는다는 것은 십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일이지만 이 놈들 만나고서부터는 왜 제 때 밥을 챙겨먹지 못하는 것인지. 그래도 어영차, 일어나보자. 오늘은 민서를 따라가봐야 하나, 비원이를 따라가봐야 하나. 휴인이한테 주동자가 누구냐고까지 물어봤는데... 그 놈 얼굴보면 많이 어색하겠지? 사귄지 오늘로 이틀짼데, 벌써 어색해지니 큰일이구나. 겹쳐오는 여러 가지 생각들로 한숨을 내쉬며 씻기위해 몸을 일으키는데. 순간 머리가 핑글, 하면서 눈 앞의 사물이 일그러졌다. 나는 다시 누워 머리를 감싸쥘 수 밖에 없었고, 곧이어 온 몸에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잠깐, 이것은... 설마... 말로만 듣던.... 몸살?????? 머리는 자주 아파봤지만, 몸살에 걸린 건 처음이다. 그것도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심각한 몸살따위는 내 인생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짓은 삼류 드라마 여주인공만 하는 것이라고 22년동안 굳게 믿어왔거늘!! 그 때 내 방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의 머리통이 불쑥 들어왔다. “야!!! 밥 먹어!!!” 비원아... 나 너에게 ‘누나’소리 들어보면 소원이 없겠구나.... “....야....나...... 지...금.....” 이런 제길!!! 목소리까지 제대로 안나온다!!! 내 꾀꼬리같던 목소리가!!!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듯하던 내 목소리가!!! ...... 그래, 정정하겠다. 다른 여인네들에 비해 아주 크고 굵고 낮던 나의 목소리가!!! 잘 안나온다!!!! “뭐라는거야. 아, 빨리 나와. 그리고 나 오늘은 바쁘니까 민서 따라가.” “야.... 나.... 아프다고....” 라고 말을 내뱉었을 때, 비원이는 이미 내 방에서 나가버린 후였다. 저 성질만 급한 애새끼같으니라고. 일단 몸이라도 일으켜보려고 팔로 땅을 짚고 상체를 지탱하자.... 손이 부들부들 떨려오고... 곧 난 일어나기를 포기한 채 놈들이 나를 발견하러 오기를 기다렸다. 밥 먹으러 안 오면 언젠가는 데리러 오겠지, 발견해 주겠지....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나의 헛된 망상에 불과했다. 망할새끼들, 끝내 나를 구원하러 와주지 않는구나아!!!! 나는 손을 옆으로 뻗어 핸드폰을 집어들.... 들.... 집어들면 뭐해!!! 저 개놈들 핸드폰 없잖아아아아아아아아!!!!!!!! 나는 어쩔 수 없이 얌전하게 누워서 두통을 억제하려 눈을 감았고... “누나아~ 뭐해? 밥, 밥, 밥!!! 애들이 먼저 밥 먹을라 그래서 내가 때려줬지~ 원래 윗사람이 먼저 숟가락 들기 전에는 애들이 먼저 밥 퍼먹음 안된대요~“ 나의 남자친구 강휴인이라는 놈이 드디어 등장하셨다. 어젯밤의 어색함은 꿈 따위로 생각하는 듯 너무나도 해맑은 특유의 목소리를 자랑하며. “휴...인아.... 누나가... 지..금...” “뭐야, 아직도 자고 있음 어떡해. 빨랑 일어나, 빨랑, 빨랑!!! 오늘은 누나가 민서 따라가야 되는데 민서는 부지런하니까 빨리 준비해야 된다구.“ 이 새끼야, 아프다고!!! 사람말을 좀 들으라고!!!!!! 그 순간 문이 부서질 듯 거칠게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밥 먹으라니까!!!!!” 짜증내며 긴 머리를 휘날리는 저것은.... 미...민서? 민서야, 반갑다. 내 맹세하고 니가 이리 반가워 보이기는 처음이구나. 내 말은 안 듣고 지 말만 내뱉는 휴인이에게서 나를 구원해주렴. “...... 뭐야.... 아파, 정시언?” 옳지, 옳지!!! 그래, 아파!!! 아프다구, 나 아프다구!!!! “뭐야, 누나 아파??? 아파서 이런거였어????” 그제서야 호들갑을 떠는 나의 남.자.친.구. 휴인이. 여자친구가 아픈 걸 이제야 알아채는 나의 남.자.친.구. 휴인이. “누나, 누나, 누나, 우어, 죽지마, 누나.” 휴인아.... 이 누나는, 결코 몸살따위로 죽지않아. 그나저나 머리 울리니까 제발 좀 떠들지 말라고.... “뭐야, 어디가 아픈거야? 비켜봐, 강휴인.” 내 옆에 꼭 붙어앉아 징징대는 휴인이를 강하게 밀쳐내고 내 곁으로 다가오는 민서. “어디가 아파? 말 할 수 있겠어? 말도 잘 안나와? 정시언, 괜찮아?” 쉴새없이 내게 말을 건네며 내 이마에 길고 흰 손을 얹어보는 민서. “아, 뜨거!!! 으, 완전 불덩이네!!! 감긴가? 몸살이야?” 이렇게 수다스럽고 호들갑 떠는 민서 처음본다. 이제야 좀 기지배 같구나. “지환영!!!! 찬 물에 수건 좀 적셔서 들고와봐!!! 비원이는 서랍 안에 몸살 약 좀 들고오구. 정시언 아픈가봐, 빨리!!!!“ 밖에 대고 뭐라뭐라 지시하는 민서. 그리고 살며시 내 손을 잡는 휴인이의 손길. 말없이 그 손길을 멍하니 응시하는 민서. “손이나 잡고 있는다고 병이 나아?” 적의에 찬 시선으로 휴인이를 바라보며 시비를 거는 민서. “우어어, 누나, 죽으면 안돼~”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징징대는 데 여념이 없는 휴인이. “그만 좀 하라구, 아픈 사람은 정시언인데 왜 니가 그 지랄이야!!!!!!?” 결국 터졌다, 큰소리. 어린놈들이 모여사니 싸움이 숱하게 일어날 거라고 예상은 했었지만 꼭 아픈 나를 가운데 두고 이렇게 싸워야겠니. 나는 속으로 휴인이마저 도발하지 않기를 미친듯이 빌어댔고, 휴인이는 민서를 바라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대신 아플 수가 없으니까 대신 슬퍼해주는건데. 내가 손 잡아주면 나을거야. 약이나 수건보다 내가 더 약효 좋을걸. 내가 남자친구니까.“ 일단 휴인이가 화내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하며 민서의 얼굴을 살폈다. 휴인이를 노려보고 있는 민서. 이거 정말, 내가 어제 예상한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분명 민서는 휴인이를 좋아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사랑하는 환영을 거절못하고 그와 사귀고는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휴인을 끊임없이 흠모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보다 네 살이나 더 많은 나에게 반말을 찍찍 해대고, 이름을 마구 불러제끼며 괜히 나에게 심술맞게 굴고 있는것이다!! 왜? 내가 휴인이랑 사귀니까!!! 아이고... 아이고.... 불쌍한 우리 환영이. 사귀는 여자애가 휴인이를 좋아하고 있으니 이를 어찌할꼬. 민서 하는 짓 보니 휴인이 좋아하는거 다 티나는구만. 애써 모르는 척 하면서 민서랑 휴인이 둘 다 챙기니 많이 힘들겠지. 나 자신의 완벽한 추리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환영이가 급하게 찬 물에 적신 수건을 들고 뛰어와 주었고, 나는 아픈 와중에도 그를 향해 안쓰러운 표정을 지어주었다. 민서는 수건을 받아들고 내 이마 위에 처억 올려놓았다. “참, 나. 어제 그 이상한 남자 만나고서 몸이 쇠약해졌나봐. 왜 그래? 강철도 씹어먹을 것 처럼 생겨가지고는.“ 저 년. 또 시비거네, 또. “괜히 사람 성가시게 만들고. 짜증나게.” “미....민서야... 나, 괜...찮으니까 오늘... 너 일하는 데... 같이 갈...” “같이 가긴 뭘 같이가!!! 그냥 가만히 누워있어!!!!” ..... 오늘 내가 아프니까 쉬라는 말일까, 아님 앞으로도 따라오지 말라는 뜻일까. “돈에 목숨 걸었어?? 어제 그 남자가 준 돈도 있잖아!!! 일하지 말고 한 달간 좀 쉬어.” .....앞으로도 따라오지 말라는 뜻이구나. 젠장, 진한오빠는 도와준답시고 일을 더 이상하게 만들어버린다. “오늘은 내가 간호해줄게. 어쩔 수 없지.” 민서는 한숨을 쉬며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순간 섬뜩함을 느꼈다. 니가? 니가? 환영이도 아니고 니가???? 이것은 생명의 위협이 되는 위기의 상황이다. “아니야, 그냥 내가 있을래.” 질세라 옆에서 거드는 휴인이. “됐어, 강휴인. 니가 짐밖에 더 돼? 내가 있겠다구.” “내 여자친구잖아.” “넌 남자잖아!!! 원래 여자가 더 간호 잘하는거 몰라???” “너 그거 남녀평등에 어긋나는 발언이다? 원래 너처럼 우악스런 여자보다는 나 같은 애가 더 간호 잘해!!!!“ “입 닥치고 일이나 하러가!!!!” “싫어, 누나 내 거야!!!!!!!” .... 이 새끼들. 니들 솔직히 말해봐. 내가 걱정되는 게 아니고 일하러 가기가 싫은거지? “내가 있겠다구. 내가 간호한다구,” “내 여자야.” 둘 사이의 팽팽한 대립. 심상찮은 눈싸움. 급기야 둘 사이에 낑겨있던 환영이가 억지로 미소를 띄며 분위기를 정화시킨다. “아하하, 저기 그러니까 이렇게 싸우지 말고....” 그 때, 구석에 처박혀 있던 약을 찾느라 꽤 많은 시간을 허비한 듯한 비원이가 내 방에 알약 두 알을 던져놓으며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닥치고 일은 둘 다 하러가. 우리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알아? 정시언은 해커 애들한테 맡겨놓으면 되니까 그렇게 하자고.“ ...............그렇다. 무서운 민서나 방정맞은 휴인이만 아니면 모두 괜찮을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해커 아이들 또한 아픈 나에게 커다란 골칫거리가 될 것임을, 그때의 나는 모르고 있었다. 33. 사랑할 자격 비원이의 명쾌한 해답에 민서와 휴인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고. 환영이는 분위기를 풀어보려 과장된 말투로 비원이의 생각에 경의를 표했다. “와~ 그래, 진짜 좋은 생각이야. 비원이 머리 좋은 건 알고 있었지만 최고네. 자자. 그러니까 휴인이랑 민서 둘 다 일어나. 서로 노려보지 말고, 응?“ 그래, 정신 사나우니까 빨리 가버려, 이 놈들아.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올 때 사올게.” 라고 퉁명스레 내게 말을 건넨 사람. 그 사람이 누구였겠는가??? 그렇다!!! 믿을 수 없겠지만!!! 휴인이가 아닌 민서였다!!! 그녀가 나에게 저런 다정시런 말을 건넨 것이다!!! 왜!!! 음식에 독 타서 나 먹이려고???? “그래!!!! 누나 먹고 싶은 거 말해!!!” 휴인이도 질세라 내게 앵겨들었고, 환영이는 골치아프다는 듯 머리를 감싸쥐었다. “누나, 누나, 뭐 먹고 싶어??? 산딸기???” 휴인아... 산딸기는.... 전래동화 속에서 아픈 어머님이 한겨울에 먹고 싶어하시는 음식으로써. 효심깊은 아들이 그걸 찾으러 가는 진부한 스토리가 주를 이루고있단다. 너까지 전래동화 따라할 필요는 없잖아.... “누나!!! 산딸기... 아니면 내가 오늘 산에 가서 산삼이나!!!!” 어이코, 산삼까지 나와주셨구나.... 너는 ‘심봤다’ 외치기가 그렇게 쉬운 건 줄 아느냐? 민서는 휴인이의 조잘거림에 얼굴을 살짝 찌푸리더니 핀잔을 주었다. “됐어, 그만해, 강휴인. 지금 장난해? 넌 그냥 가만있어, 내가 사올테니까. 이상한 음식보다는 차라리 내가 과일로 사올게. 삼키기 편한 걸로. 물기 있는 복숭아나 포도 정도면 괜찮을거야.“ ........ 와, 나 복숭아랑 포도 킬런데. 민서 저 년, 은근히 나랑 통하는 구석이 있군.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고 휴인이는 심통난 표정으로 민서를 바라보았다. “근데 누나 막 식은땀 흘려. 더워서 그래? 이불 걷어내고 있어!! 시원하게!!” 휴인이는 다시 나에게 주의를 돌리고 이불을 걷어내려 손을 내밀었고, 그 순간 민서는 재빨리 휴인이의 손을 턱하니 잡고 그의 행동을 제지했다. “..... 아, 왜!!!!” 기어이 짜증내는 휴인이. “제정신이야? 이럴 땐 땀 빼는 게 최고야. 무조건 이불덮고 가만히 있어, 정시언. 얼굴엔 열나고 더워도 몸은 오한이 들고 춥고 그럴거야. 함부로 일어서거나 돌아다니지 말고, 이불 속에서 땀 빼고 잠이나 자.“ ......왜 나를 두고 이런 신경전이 펼쳐지는 건지. 당황한 나는 양쪽의 휴인이와 민서를 번갈아보았고, 환영이도 언제터질지 모르는 그들의 싸움에 어떠한 태도도 취하지 못한채 억지 웃음만 지어보이고 있었다. 그나마 민서와 휴인이의 싸움을 중단시킬 힘을 소유한 비원이는 해커 아이들을 데려오겠다고 잠시 나가있는 상태였다. 얼어버릴 듯한 침묵. 어색해 죽겠다. 그 순간 아주 반갑게도 대문 쪽에서 왁자지껄 소리가 들려왔다. “형들, 민서누나!! 우리 왔어요!!” “그 나이많은 누나 많이 아파요?” “나 졸린데....” ...............‘나이많은 누나’라고 한 새끼 누구여..... 나는 온 몸에 쑤시는 와중에도 고개를 돌려 해커 놈들을 바라보았다. ...... 옳거니.... 산이 너... 기억해두겠다..... 특유의 무표정인 혼혈 열음이와 만사를 다 귀찮아하는 듯한 준휘가 비원이와 비슷한 느낌이라면.... 산이 저 놈은..... 딱 휴인이다. “있잖아, 이 누나 형 여자친구니까 잘 모셔야 된다!!!!” 휴인이는 놈들을 향해 근엄하게 소리쳤지만... 전혀 무서워보이지 않았다. 아가야, 넌 쟤들보다 더 어리게 생겼어... 그냥 가만있어, 제발. “우와, 진짜 사귀는 거예요? 전에는 그냥 형이 저 누나 좋아한다고만 했잖아요.” “응응, 근데 그냥 사귀기로 했어.” “형이 아까운데.” “그건 당연하고.” 저... 저... 저 썩을것들.... 내가 아프지만 않았어도 분노의 주먹맛을 보여줄텐데. “누나 아프니까 음... 나중에 점심때 슈퍼에서 파는 스프 같은 거 끊여서 먹기좋게.” “죽 끓여.” ......... 순식간에 또 어색해지는 분위기. 열음, 산이, 준휘에게 스프를 끓이라고 명령하던 휴인이의 말을 다시 민서가 가로채버렸다. “아픈데 인스턴트 안 좋아. 어차피 세 명이나 있으니까 한 명은 계속 부엌에서 죽 끓여. 몸 회복하는데는 죽이 최고니까.“ 민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일어섰고, 휴인이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너 대체 왜 그래?” “..... 내가 뭘.” 안된다, 휴인아, 너 잘 참았잖냐!!! 그냥 이번에도 참아!!! “진짜 몰라서 묻는거야?” “다른 사람이 들으면 내가 니 여자친구 죽이려는 줄 알겠다?” “백민서.” “니가 얘 남자친구면 똑바로 해. 제대로 하는 게 있어야 옆에서 방관하든가 하지. 니가 하는 행동이 다 엉터린데 내가 그걸 그냥 보고만 있어?“ “..........야...” “자격없음 사랑하지마.” ....내가 생각해도 방금 저 말... 굉장히 무섭다. 그러나 민서의 그런 말을 들은 휴인이는 자신의 몸을 일으키더니 감정없이 그 말의 반격이 될 한마디를 내뱉었으니. “자격은 니가 없겠지.” 모두가 바라보는 가운데, 분위기는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치달았고. 민서는 휴인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의 멱살을 콱 붙잡아버렸다. 으억!!!! 제발!!! 제발!!! 누나 좀 살려주라, 제발!!!!! “야야야야, 왜이래. 이러지마, 응? 아, 왜이래. 해커 애들도 보는데, 좀만 참자. 민서야, 진정하고... 휴인이도 왜이래, 갑자기.“ 환영이는 다급하게 그 둘의 사이를 막아서며 휴인이의 멱살을 잡은 민서의 손을 푼다. 민서 저 년 성격도 참... 아무리 그래도 휴인이가 남잔데 덤비면 니가 지잖아... 그리고 임마, 니가 휴인이를 좋아하면 나한테 덤벼야지, 왜 쟤한테 덤벼. 더 미움받게시리.. 정말 연애의 기술을 모르는 년이로구나. 휴인이도 여자애한테 저렇게 승질내면 못쓰지... 쟤들 평소에도 저렇게 싸우나? 환영이만 죽어나겠구만. “지랄한다.” 그리고 뒤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신비원. “별 것도 아닌걸로 난리야. 싸워봐, 싸워봐. 피 터지든, 멍이 들든 둘 다 맘대로 싸워봐. 대신 정시언이 안보는데서 싸워. 이렇게 유치하게 굴지말고 차라리 한 판 붙어. 그 땐 환영이 너도 말리지말고. 괜히 니가 말리니까 너 믿고 더 저 지랄이지.“ ........ 브라보. 비원이의 깔끔한 정리에 민서는 휴인이를 밀치며 그의 멱살을 놓았고 휴인이는 한숨을 쉬며 화를 삭히는 듯 했다. 비원이는 이미 대문 밖으로 나가버린 지 오래고, 환영이는 여전히 억지웃음 짓는 중. 뜬금없는 준휘는 비원이의 카리스마 넘치는 대사에 연신 박수를 쳐대고 있었다. 쟤는....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건지, 분위기 파악을 안하는건지.... 굳이 일부러 분위기에 편승되려는 생각 자체를 안하는 것 같다. 딱 지 멋대로 사는 스타일. “아, 씨발!!! 빨리 다들 안나오냐?? 일 안가??” 대문밖에서 비원이의 재촉이 들려온다. “야, 지환영!!! 그 새끼들 말리지 말고 니가 그냥 대충 패버리고 끌고나와!!!” 성격급한 신비원.... 맞다, 그러고보니 넷 중 제일 잘 싸우는 건 환영이랬지.... ....근데 지금 말하는 거 들어보면 비원이가 제일 파워가 센 것 같은데. ....진짜 저 새끼가 재벌 아들이자 주동자인 거 아냐...? 환영이는 [애들을 패버리라]는 비원이의 충고에도 불구, 좋게 좋게 휴인이와 민서를 달래기 시작했다. 민서는 휴인이를 한 번 차갑게 쳐다보고는 몸을 돌려 내 방을 나가버렸고, 휴인이도 “누나, 조금 있다가 봐. 금방올게.” 라는 말을 남기며 환영이와 함께 집 밖으로 나섰다. 어이고 두야. 내가 저것들 때문에 제 명에 못살지. 암, 그렇고 말고. 그들이 나간 집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해커 놈들 세 명은 나를 멀뚱히 바라보며 서 있었다. “자, 그럼.....” 서서히 입을 떼는 준휘. “가위바위 보!!!!!” 뜬금없는 그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어이없는 가위바위보를 시작했고, 열음과 산이도 항상 있어왔던 일인듯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승리한 건... 나의 예상과 같이... 가위를 낸 준휘였다. “오케이, 내가 이겼으니까 나는 집에 가서 좀 쉰다. 열음이 너는 부엌가서 죽 좀 쒀오고, 산이 너는 누나 옆에서 간호해. 열 떨어지게 수건 갈아주고, 땀 닦아주고, 그 밖에 시중 들고, 약 먹이고. 난 자러간다.“ ....... 뭔가 고단수다... 준휘라는 저 놈은... 묘하게 참... 참.... 남다르다. 소리없이 강하고, 신기한 포스가 있으며, 이상한 카리스마가 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놈들 버금가게 웃긴 놈들이다. 그러나 이런 가위바위보 게임은 그들 사이에서 항상 있어왔던 일인듯, 열음이는 역시나 무표정으로 말없이 환영이가 관리하는 금단의 구역, 부엌으로 들어갔고, 산이는 입이 댓발 나온 채로 내 방안으로 쑥 들어왔다. 준휘는..... 지네 집에 갔다. 내가 다 이를거야. 내가 휴인이랑 환영이랑 민서랑 비원이한테 이르고 말거야. 왠지 이들은 그 네 명을 극도로 따르는 분위기다. 무서워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글쎄, 뭐랄까... 존경...하는 분위기랄까. 평범한 고등학교 또래의 남자아이들이 선배를 따르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좀 더 높고 넓고 깊은 의미에서 그들을 ‘받든다’라고 표현하면 될 것 같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해커 놈들도 빼놓아서는 안된다. “어때요? 머리 더 아파요? 불편한 건.....” 그 때, 산이의 시선이 열려있는 내 방문 밖으로 향했고.... 그 곳에 멍하니 서서 나의 얼굴을 바라보는 건.......... “...........언니 아파?” ................나의 이쁜이 동생 이온이였다. 34. 공간에 갇히다 .... 잠깐만, 내 동생 이온이가 이 곳에 올 리가 없잖아? 그래, 헛것이겠지? 헛것일거야. 내 눈을 탓하며 다시 천천히 눈을 감고 아픈 머리를 진정시키는데.... “정시언, 눈 안 떠?” 저 생생한 목소리... 저 싸가지 없는 목소리... 저 앙칼진 음성은 내 동생 이온이 말고는 아무도 못하는건데!!!! 나는 번쩍 눈을 떠 고개를 옆으로 돌렸고, 문 앞에 서 있는 누군가의 얼굴을 확인했다. 이렇게 당황스러울수가!!!! 쟤.... 쟤.... 쟤 내 동생 정이온 맞잖아!!!!!!!!!!!! “야, 야!!!! 야, 니가 여기 왜 있어!!!!???” 어찌나 놀랐는지 나는 고통도 초월한 채 몸을 일으켜 그녀를 바라보았고, 나의 어여쁜 동생은 새하얀 교복을 입고 나를 노려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의 길고 하얀 손가락은 자신의 투박한 가방끈을 꼭 쥐고있었다. 내가 예상컨대, 그녀의 책가방 안에는 교과서 대신 이온이의 보물 1호, 카메라 장비 세트가 득시글대고 있을 것이 뻔했다. 곧게 뻗은 다리, 단정하게 묶은 머리는 이온이의 성격처럼 야무지게 묶여서 그녀의 허리에까지 찰랑거리면서 내려왔다. 저 말총머리... 어렸을 땐 내가 저거 많이 잡아댕기면서 괴롭혔는데.... 정말 내 동생이지만, 나와 이온이는 닮은 구석이 없었다. 그녀가 지금 교복을 입고 나를 노려보고 있는 저 행동 하나!!! 그 모습 하나만 보더라도... 청초함과 청순함과 섹시함과 귀여움과 아름다움이 뒤섞여 누구나 탄성을 내지를 정도니까. 나는.... 뭐, 여자이기를 포기했음 다행이겠지만, 인간이기도 포기했다. 봐줄 것이라곤.... 굉장히 큰 키와...털털한 성격 정도. 하긴, 키가 크면 뭐하나. 기골이 장대하거늘. 성격이 털털하면 뭐하나. 이온이 같은 경우는 유일한 단점인 성격... 저 깐깐하고 까탈스럽고 싸가지없는 성격에도 불구하고 최상의 인기를 유지하고 있거늘. 남자들에게 이온이 같은 경우는 [꽃같은 공주님]이고, 나는 놓쳐서는 안될...... [진정한 친구]인 것이다!!! “야!!!!!! 니가 여기 왜!!!!!” 라고 소리친 나는 급히 산이의 눈치를 살폈다. 이 놈들도 나를 혼자 살아온 고아라고 여기고 있을 터였다. “너.... 너... 너는.... 옛날에 내가 세들어 살던 집의 딸이구나!!! 내가 너에게 과외를 해준 적도 있었지!!! 정말 반갑구나, 허허허.“ 기막힌 임기응변으로 사태를 정리하고 다시 한 번 산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산이는 나의 말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그의 시선은 오직.... 이온이의 새초롬한 얼굴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설마... 저 놈... 저 놈 시키..... 내 동생에게 반한 거야?? 내 동생에게?? 쟤는 지가 다니는 고등학교를 넘어 이 지역 고등학교 13개를 평정한 얼짱이야!! 이온이네 학교 축제만 되면 주변 남고 아이들이 저 아이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고 모인단 말이다. 뿐이냐?? 남자애들이 항상 저 기지배 학교끝날 때까지 교문앞에서 기다린다구. 얼굴 한 번 보고싶어서 아주 넘어간단 말이다. 집에 와서 선물까지 주고가기도 해!!! 물론 그 선물들은 다 내가 접수했지만!!! 이온이는 그딴 거에 신경을 쏟기는 커녕 아주 귀찮아했단 말이다!!! 산아, 너도 물론 뛰어난 외모인 것은 인정을 한단다. 그래, 너 정도면 귀엽지. 또래 기지배들이 졸졸 쫒아다니겠지. 그러나 이온이의 턱없이 높은 눈에 부응할 수는 없다, 포기해라. 내 동생이지만 저 년은 도도하기가 하늘을 찌르니까... 이러지마라. 나의 걱정에도 불구, 산이의 눈은 이온이에게서 멈출줄 모르고..... 이온이는 나의 뛰어난 임기응변에 살짝 눈살을 찌푸리더니 못마땅한 눈으로 산이를 바라보았다. 순간 산이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고, 나는 딱 들어맞는 내 예상대로의 시나리오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산이는 이온이에게 반했고, 이온이는 산이를 귀찮아 하리라. “나 언니랑 둘이 이야기 하고싶어.” 이온이는 나에게 하는 것인지, 산이에게 하는 것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고, 산이는 이온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떡 일어섰다. “예, 예!! 그럼요, 제가 자리를 비켜드릴게요!! 저, 저기, 누나 손님인데 차라도...?” “됐구요, 나가 주세요.” 이온이는 여전히 도도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내 방에 들어왔고, 산이는 더욱 가까이 마주서게 된 그녀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안 나가세요?” 그 불쌍한 사나이에게 표독스럽게 쏘아붙이는 이온이. .....저건 불여시도 아니고 구미호도 아니야. 쟤는 살쾡이야, 살쾡이. ....아이고, 어무니.... 엄마는 저런 걸 어떻게 낳으셨습니까? 저렇게 앙칼지고 표독스러운 걸.... 엄마가 이온이 임신중이었을때 독하게 다이어트를 했던게 분명해. 그게 아니고서야 애가 저렇게 예민하고 신경질적일 수가 없지. “아, 예... 나갑니다... 나가요!!! 저기, 그럼... 편히 이야기 나누세요!!!” 산이는 허겁지겁 내 방 밖으로 몸을 내딛었고, 재빨리 문까지 닫아주는 친절함을 발휘했다. “언니 아프냐? 왜 그러고 있어? 볼썽사납게.” “..... 야... 너야말로 여기 왜 와? 너 학교 안가?” “지금 학교가 문제야?” “... 그럼 뭐가 문젠데.” “어제 진한아저씨가 나한테 연락왔어.” 엥? 진한아저씨??? 이진한??? 그 새끼가 이온이한테는 왜!!! 이온이도 내가 진한오빠랑 사겼던 사실을 모르는데 대체 왜 얘한테!!! “뭐? 뭐라는데??????” “언니 한 번 찾아가보랬어. 남자들한테 둘러싸여서 무지 위태롭게 보이니까 찾아가서 충고해주고 보듬어주라고. 진한아저씨가 아부지 부탁으로 언니 찾아와보니까 무지 열악하게 지내고 있다고 걱정했어.“ “......... 걱정은 개뿔, 날 감시하려고 작정했구만.” “... 진짜 아플줄은 몰랐는데....” “아냐, 걱정할 거 없어. 그냥 몸살이다.” “연락은 왜 안해???” “바빴어.” 그래, 솔직히 바쁜 건 핑계다. 난 그저 연락하기가 귀찮았던 것이다. “짜증나, 정시언......” “아따... 기지배... 그만 좀 노려봐라... 눈 튀 나올라...” 애써 씩씩하게 말하는 나와는 달리 나를 노려보는 이온이의 눈엔 점점 물기가 어렸다. 아씨... 나 쟤 울면 통제불능인데. 엄마없이 자랐기 때문인지 이온이의 눈물은 내게 세상 그 무엇보다 보기 싫은것이었다. 나는 이온이가 싸가지 없게 자라더라도 약하게 자라지만은 않길 바랬다. 그건 나를 위해서였다. 이온이가 울면 내가 무너지니까, 내 동생이니까, 내 혈육이니까. 무엇보다 소중한 내 보물이니까. 힘들었을거다, 엄마없이 자라서... 바쁜 아버지 밑에 자라서.... 이온이의 주변에 있던 건 항상 푼수짓을 해대는 언니 뿐이었다. 그런데 그 언니조차 범죄자 잡는다고 나가버리고 이온이는 혼자 집에 있었으리라. “야, 언니 아프니까 완전 섹시해보이지 않냐?” 이온이의 눈물을 막으려고 되도 않는 말을 지껄였으나, 결국 내 동생 눈은 눈물 한 방울을 툭.... 이온이의 눈물을 봐버리고 말았다. 역시 표독스럽고 앙칼지고 독하다해도 이온이는 아직 열일곱살. ‘관계자 외 출입금지’ 놈들보다도 한 살 어린, ‘해커’아이들과 동갑이었다. 이온이가 억지로 강한 척 하는건, 외로움을 숨기기 위해서인지도 몰랐다. 이 아이가 마음편히 기댈 수 있는 건, 언니인 나 뿐인 것이다. “빨리 돌아와.... 나 미치겠어, 언니......” 나는 기를 쓰고 상체를 일으켜 그녀를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아직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 내가 이 곳에 온 지. 그러나 ‘관계자 외 출입금지’ 놈들과 나는 서로 지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기 시작했고, 내가 없는 집에서는... 나의 존재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며, 검찰은 나를 이용하기 시작했고, 진한오빠는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나, 정시언은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할지 사고회로가 멈추어버렸고, 현재 네 살 연하 강휴인과 사귀고 있는 상태다. 내 존재도, 신분도 다 까발려진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할까. 이 곳에 머무르고 싶고, 이 곳을 탈출하고 싶은 생각이 나를 뒤흔들어 놓는다. 쉽게 여길만한 게임이 아니었다. 휴인이, 환영이, 민서, 비원이에게 나는 애초부터 타인이 아닌 ‘관계자’였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있어 관계자가 아닌 ‘타인’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미 발을 들여놓은 이 공간속에서 나는 겉잡을 수 없이 휘둘리고 있었다. 함부로 들어서서는 안되는 곳이었다. 무섭고, 위험한 이 곳은... 어둠만 자욱한 아득한 공간이었다. 35. 사랑의 작대기 내 품에 안겨 조금 훌쩍이던 이온이는 곧 진정을 되찾고 울음을 그쳤다. “왜? 더 울지.” “됐어, 언니 때문에 우는거 눈물 아까워.” “야박한 년. 매정하기는....” “근데 아까 걔 뭐야?” 이온이는 눈물을 닦으며 내게 물었다. 그러나 난 그녀의 질문은 아랑곳않고 생각했다 ......왜 우는 것도 이쁘지? ...아니, 사람이 울면 눈물 콧물 질질 짜서 코도 빨개지고 입가도 뭉그러져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 되는 게 정상아니냐구. 근데 왜!!! 대체!! 왜!!!! 우는 게 왜 예쁘냐고, 우는 게!!!!! 정말 순정만화 속의 미소녀처럼 눈에서 눈물 한방울만 또로록 굴러내린다. 이온이의 능력에 새삼 감탄을 표하는 바이다. “응? 아까 걔? 산이?” “..... ‘관계자 외 출입금지’에 산이라는 사람이 있었나?” “아... 쟨 ‘관계자 외 출입금지’ 아니야.” “뭐야... 그럼 언니가 집에 외간 남자를 들였다고? 혼자 산다고 그래도 되니?” “아니, 잠깐!! 이야기가 왜 그렇게 돌아가냐!!!??” 이제 이온이까지 날 어린 미소년들 납치하는 유괴범으로 보려는 모양이다. 나, 아직 그렇게 애들을 탐낼만큼 굶주리지는 않았단말이다!! “쟤들은 그냥 같은 동네 사는 애들이야!!! ‘관계자 외 출입금지’랑 친한 동생들인데 오늘 내가 아파서 부탁한거야. 나 좀 돌봐달라고. 그래서 온거다!!“ “역시. ‘관계자 외 출입금지’에 저렇게 어리버리한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이온이는 다시 새침한 여고생의 모습으로 돌아와서 톡 쏘듯이 중얼거렸다. 사실 산이는 어리버리한 아이가 아니었다. 순간 이온이에게 반하는 바람에 애가 잠시 지 중심을 놓친 것 같은데.. 그걸 이온이에게 말해줄까 하다가 그냥 관두었다. 그게 산이를 돕는 길이 될 것 같았다. 이온이는 먼저 좋다고 덤벼드는 남자를 시시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린년, 남자가 먼저 다가와주는 게 얼마나 큰 복인지 모르는구나. 여자 입장에서 먼저 달려들었는데 거절당해봐라!!! 니가 그 수모를 알아? 그 좌절감을 느껴봤어? ........... 하긴, 넌 몰라도 되겠구나. 넌 이쁘니까. 망할년. ......짜증나게 내가 내 친동생에게까지 질투를 느껴야 하는가.... “그나저나... 그럼 언닌 ‘관계자 외 출입금지’랑 많이 친해진거야?” “아, 응... 뭐... 좋은 누나동생, 어색한 언니동생 사이.” 그래, 이보다 더 좋은 표현이 있을까? 휴인이, 환영이는 물론이고, 비원이까지 스스럼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 민서와 나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상태였다. 휴인이와 사귄다는 말은 이온이에게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괜히 이온이가 이 일에까지 신경쓰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말려들어서 좋을 것이 없는 사건이다. “얼굴이나 보려고 했더니 뭐야, 없잖아.” “이 시간에 다 일하러 가지.” “그 일이란 게 결국은 다 범죄잖아. 아부지도 웃겨, 그 놈들 안 잡고 있을 동안에 범죄는 하나 둘 씩 더 늘어만 가는 거잖아.“ “야, 걔들 맨날 범죄만 짓는 애들은 아니야!!!!” 이런.... 이온이의 말에 나도 모르게 반박해버렸다. 이온이는 잠시 인상을 찌푸리며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뭐야, 지금?” “응...?? 아... 아니... 뭐... 뭐가?” “감싸주는 분위긴데....” “아, 아냐!!! 말도 안돼!! 웃기지마!!!!” “흠, 말은 들었지만 그 놈들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응?” “신비원 덕분에 호스트빠 ‘로맨스’는 매출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고 있고, 지환영 잘생겼다는 소문이 돌아서 괜히 시덥지않은 폭력의뢰 하는 애들이 늘어가고, 강휴인 때문에 이 근방 금은방에 아르바이트 자리 좀 달라고 떼쓰는 애들이 생기고, 백민서 얼굴 보려고 고등학교 남자애들이 방과 후면 지하철타고 아무데나 무작정 발길 닫는데로 쏘다닌다는 소문이 자자해. 물론 문제아라는 인식 때문에 대놓고 열광하지는 못하지만 암암리에 얼굴 한 번 보고 싶어서 용을 쓰는 애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간다구. 나한테 ‘관계자 외 출입금지’ 파파라치 사진 요구하는 애들이 한둘인 줄 알아? 학교도 안 다니고, 범죄자인 것 때문에 힘들다고 둘러대면서 나도 거절하고는 있지만 얼굴로 이 일대 평정하는 거 보면 보통 애들은 아니라는 생각, 나도 자주 해.“ “.... 걔... 걔들이.... 그 정도냐?” “그러니까 언니는 얼굴보고 빠지지 말란 소리야. 얼굴이 밥 먹여주니? 인간성을 봐. 언니는 그 사람들 잡으려고 여기 투입된 거잖아. 범죄를 막아야지, 걔들 감싸주려고 여기 있는 게 아니라구. 언닌 한달간 여기 잠복하면서 그 애들 정체 알아내면 다 끝인거, 아냐?“ 소름끼칠정도로 냉정한 이온이의 말에 한기가 들었다. 그러나 무섭게도... 그건 모두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이온아.... 진짜 나도 미치겠는게 뭔 지 아니? 나도 그냥 놈들 얼굴에 빠진 거라면, 그냥 잘생겼다... 이쁘다.. 하고 말았을건데... 걔들은 인간성까지 착하다는 거야. 내가 본 인간의 미소 중에... 가장 밝고 맑고 천진난만해. 주변까지 눈부시게 만드는 그 애들의 미소를.... 너도 모르고... 그냥 그 애들 얼굴만 보고 쫒아다니는 학생들도 모르겠지. 그 애들 미소는.... 햇살이야. 하늘이고, 바다지. 그만큼 깊고 푸르거든. 그래서..... 아프도록 시리거든. “아, 맞다!! 그리고 하나 더 있는데.” “응? 뭐가?” “이 동네 산다는 데, 언니 알고있어?” “누구?” “‘해커’라는 랩퍼팀이 이 동네 산다잖아. 언더그라운드에서 그렇게 인기라는데, 걔들도 파파라치 사진 좀 찍어달라는 요청이 물밀듯이 들어와서.“ 이온아.... 아까 그 놈.... 산이... 걔가 ‘해커’란다.... “특히 그 중에 혼혈아가 한 명 있다는데... 걔는 팬클럽까지 만들어질 정도야. ‘관계자 외 출입금지’는 아무리 좋다, 좋다 해도 일단은 범죄자잖아. 근데 ‘해커’는 그냥 랩퍼들이니까 좋아해도 아무 문제 없는거지." ..... 그 혼혈아.... 지금 저기 부엌에서 죽 끓이고 있는데. 나는 이온이에게 그 사실을 말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 내가 미친듯이 고민하고 있을 때 이온이가 시계를 보고 일어섰다. “이만 갈게. 담임한테 1교시만 빠진다고 했거든.” “.....너 담임한테 말하고 온거냐....?” “아파서 병원다녀온다고 뻥깠어. 내가 누구처럼 무단결석 하는 줄 알아?” “야, 대학생은 무단결석쯤은 그냥 기본으로 해주는거야.” “언닌 고등학교때도 툭하면 조퇴하고, 결석했잖아.” “.... 그건 과거일이고...” “그럼 난 갈게.” 이온이는 도도하게 가방을 둘러매고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 근데 이온아... 담부터 그냥 불쑥 찾아오면 안된다. 나 난감해진단 말야.” “뭘, 잘 둘러대더만. 웃겨, 내가 언니 전에 살던 집주인 딸이라구? 그것도 언니한테 과외를 받던? 참, 나.“ 야, 야.... 그렇게 비웃으면 이 언니가 창피하잖니.... “나도 다신 안올거야. 뭐야, 이렇게 사는거 보니까 굉장히 구질구질하잖아. 대신 연락 자주해.“ 이온이는 그 말을 남기며 내 방문을 드륵 열었고, 산이는 마당에서 부산스럽게 왔다갔다 거리다가 이온이의 모습을 보고 동작정지. ...... 저 새끼 저거 깊이 빠졌구나... 걱정되네. 상사병 걸리는 거 아냐? 그러나 이온이는 여전히 새침한 표정을 유지하며 대문을 향하다가. 부엌에서 나오는 무언가를 보고 놀란 듯 굳어버렸다. 그렇다... 부엌에서 나오는 그는... 우리의 열음이었다. 이온이는 왜 미리 말을 해주지 않았냐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고, 나는 말없이 자리에 드러누웠다. “뭐야, 저건?” 기묘하게 지속되던 침묵을 깬 건, 특유의 무표정을 소유한 열음이었다. 그는 산이가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던 이온이를 ‘저거’라고 표현했다. 산이는 깜짝 놀란 채 열음이의 입을 막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야, 여자분한테 저건이라니!! 심하잖아, 저 분은!! 시언누나가 예전에 과외했던!!” “나? 나 신성여고 정이온인데, 넌 뭐야?” “난 해커 이열음이다.” 투박한 자기소개. “아, 저, 저기 나는 김산이라고 해!!! 해커라는 랩퍼팀의 김산!!!” 그 틈바구니에서 산이는 어렵사리 자기소개를 했으나 이온이는 산이 따위는 관심도 없는 듯 했다. 그리고 이온이는 도도한 표정으로 주머니에 든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더니 말없이 열음이의 사진을 몇 장 찍어대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이온이의 행동에 열음이는 피하지도 않고 그녀의 행동을 바라보았고 산이도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너 뭐야, 사진은 왜.” “혼혈 처음봐서 그런다, 왜!!?? 불만이야?” ......... 열음이도.... 저렇게 당당하게 자신을 신기하다고 칭하는 사람은 처음이리라. 이온이는 사진을 찍어댄 후 핸드폰을 자신의 주머니에 집어넣고 대문밖으로 유유히 걸어나가버렸다. ........그리고 난... 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온이는 자신의 이름을 아무데나 뿌리고 다닐만한 성격이 아니다. 그리고, 그녀는 여고생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다는 열음이를 발견하고서도 돈벌이가 되는 캠코더로 영상찍기를 거부했다. 대신 핸드폰으로 사진을 몇 장 찍었을 뿐인데... 그녀가 핸드폰을 사용한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용도에 쓰인다는 의미. .....그러니까... 열음의 사진을 자기 혼자만 보겠다는 소리다. 결정적으로... 난 보았다. 대문밖으로 뛰쳐나갈 때 발그레해진 이온이의 볼을. 드디어 우리 도도한 얼음공주 이온이에게 첫사랑이 도착했다는 소리다. 나더러 ‘관계자 외 출입금지’ 외모에 빠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더니, 귀여운 년. 오늘 내 눈앞에서... 애기들의 귀여운 사랑 퍼레이드가 두 건이나 펼쳐졌다. 산이는 이온이에게, 이온이는... 열음이에게.... 36. 병신 하나 오랜만에 이온이를 봐서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인지 몸이 움직일만 했다. 조금 몸의 움직임이 둔하고, 약한 두통이 몇 초씩만 찾아오는 걸 빼면 가히 완벽하다고 칭해도 될만한 몸상태였다. “갑자기 웬 개또라이가 쳐들어와서....” 열음이는 이온이를 개또라이라고 표현하며 쟁반에 받쳐든 죽그릇을 내 방으로 들고왔다. ....감히 내 동생더러 개또라이라니!!!! “야, 이... 이쁘잖아....” 산이는 말까지 더듬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외모만 번지르르하면 뭐하냐. 성격이 저따구로 생겨먹었는데.” 물론 이온이 성격이 좋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내 동생이라 해도 그 애가 착한 건 아니지만.. .....열음아... 니 성격도 그다지 봐줄만한 건 아닌거 같은데.... “누나!!! 나 저 여자 소개시켜주면 안돼요??” 결국 산이는 내가 두려워하던 말을 아주 큰소리로 내뱉었고, 나는 실실 웃으며 진땀나게 변명을 해댔다. “아하하하, 그러니까 그게... 나도 쟤를 진짜 오랜만에 본 거라서, 하하하. 모르는 문제가 있다고 찾아왔다네. 집주소도 바뀌고 핸드폰 번호도 바뀌었대. 그냥 지가 필요할때만 날 찾겠다고 휙 나가버려서 나도 소개를 못 시켜주겠네.“ 산이는 곧 울상을 지었고, 열음이는 죽을 내 앞으로 내밀며 중얼거렸다. "내가 할 줄 아는 게 깨죽뿐이라 그거 끓였어요.“ “아, 응... 고맙다.” “고맙긴요, 오히려 내가 고맙죠.” 열음이에게서 들었다고 믿기지 않는 저 대사!! “....왜....왜....?” “형들 웃게 만들어줘서요.” 이제껏 무표정을 유지하던 열음이의 얼굴이 금세 웃음기를 머금었다. 역시 내 예상대로였다. 해커놈들은 ‘관계자 외 출입금지’를 끔찍이 여기고 있었다. “형들, 웃음 보는 거 쉬운 일 아니었거든요. 항상 인상만 쓰고 있었어요, 무섭게. 비원이형이나 민서누나는 말할 것도 없고, 환영이형도 힘든 기색이 역력하고, 휴인이형조차도 억지웃음만 짓고 지쳐 쓰러지는 일이 예사였어요. 근데, 누나오더니 달라졌어요. 다들 웃잖아요. 평소에는 귀찮아서 싸우지도 않던 사람들이었는데... 누나 아프다니까 싸우기도 하고 그러네요. 보기좋아요. 형들이 다른 사람들처럼 살지 못할까봐 겁이 났어요.“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칭찬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사람이 사람을 바꿔놓았다는 말이라고, 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이 좋은방향으로 작용해야 하는 것이겠지만. 사람이 변하는 건 기적이고, 그 기적을 행한 인간은 사랑을 배운다. 난 그 아이들을 사랑하고 있었고, 지켜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건 진심이었다. “누나, 누나, 누나, 누나, 누나, 누나아~~~~~~~~~~” 타닥타닥 쉴 새없이 이어지며 점점 크게 들려오는 발소리, 그리고 숨넘어갈듯이 이어지는 밝은 하이톤의 목소리. 안봐도 누군지 맞출수 있다. 저건 강휴인이다. 그 뒤를 이어 낮은 발소리도 따라 들어온다. 누군가 싶어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대문을 바라보았고, 가볍게 날아오는 듯한 휴인이 뒤에 침착하게 걸어오는 비원이가 있었다. “아, 둘이 같이오네? 민서랑 환영이는?” “응응, 몰라, 우린 그냥 서로 일 마치고 오다가 만난거야!!” 휴인이는 하얀 봉다리를 휙휙 돌리며 내 방으로 쏙 들어왔다. “누나 병은 많이 나았나요?” 귀엽게 물어보며 내 이마 위에 손을 대보는 휴인이. “우와, 열 많이 가라앉았다!!!” 숨김없는 표정, 얼굴에 그대로 나타난다, 기뻐하는 휴인이가. “비원아!!! ‘해커’애들 칭찬해줘!! 누나 많이 나았다!!!” 뭐, 굳이 말하자면 칭찬해줘야 할 것은 해커 애들이 아니라 이온이였다. 이온이를 보자마자 반갑고 놀라운 마음에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굳이 그런 말을 해줄 필요는 없었으므로 난 바보같이 헤벌레 웃고만 있었다. “야, 근데 준휘는 어디갔어?” 비원이는 몸이 뻐근한 듯 어깨를 주무르며 내 방에서 티비를 보고있던 열음이와 산이에게 물었고, 그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고자질을 시작했다. “준휘 지금 집에서 퍼질러 누워가지고 잔대요~” “그 새끼 얼굴못본지 몇 시간 됐어요.” 차례대로 이어진 증인들의 말에 비원이는 인상을 쓰더니 중얼댔다. “이 새끼. 감히 내가 시켰는데 농땡이를 깠다 이거지?” 그는 정장을 갈아입지도 못한 채 쏜살같이 준휘를 찾아 달려나갔고 열음이와 산이는 친구의 죽음을 가까이 보기 위해서 그를 따라나섰다. 그리하여 방안에 남겨진 건 휴인이와 나 단 둘. “이거 봐라, 누나? 내가 사온거!!” 자랑스럽게 휴인이가 내게 내민 것은..... 산딸기였다. .....기어이 실행에 옮겼구나.... “고.... 고맙다....” “응, 누나!!! 한 번 먹어봐!!!!” .....나... 산딸기 싫어하는데.... 텁텁하고 신 맛 때문에.... 산딸기를 사다준 휴인이의 성의를 무시하기도 미안하고, 그렇다고 맛없어보이는 산딸기를 먹을 수도 없었기에 나는 시간을 벌기로 결심했고, 애써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휴인이에게 말했다. “그런데 휴인아, 너 민서랑 화해했어?” “응?.... 아니... 아직.” 금세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 휴인이. 그러더니 또 다시 시무룩해진다. 이 놈은 언제나 다양한 표정변화를 보여준다. “휴인아, 니가 먼저 사과해, 응? 니네 싸우고있으면 내가 불편하잖아.” “민서가 말 함부로 하잖아.” “너도 잘한 건 없잖아.” “그래두 난 멱살도 잡혔는데!!!! 난 민서 안 건드렸는데 민서는 내 멱살잡고!!” “그럼 니가 참아야지, 여자를 때릴라 그랬냐!!!??” 급격하게 흥분한 나를 보고 휴인이는 못마땅한 듯 한숨을 쉬어보였다. “.... 음, 누나 소원이야?” “소원이면 사과할거야?” “.... 그래, 뭐 까짓 꺼... 누나가 원하면 해줄게.” 말은 명쾌하게 해준다고 했으나 휴인이의 표정은 죽을상이었다.... 역시 열여덟살 남자애다. 귀여워. 마침 타이밍은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고 대문을 통해 민서가 들어왔다. 환영이는 오늘도 제일 늦는건가... 대체 오늘은 몇 사람의 주먹을 상대해주고 오는걸까. “아이코, 우리 민서가 왔구나아!!!!” 휴인이는 표정관리를 하더니 해맑은 표정으로 마당으로 뛰쳐나가 민서를 맞이했다. “뭐야, 이 새끼? 왜이래!!” “민서야, 민서야아~ 내가 너 무지 좋아하는 거 알지이?” “징그러, 강휴인!!! 떨어져!!! 안 떨어져!!!???” “아잉~ 우리 민서는 대한민국 두 번째로 최고인 여자.” “..... 첫 번째는?” “우리 시언이 누나.” “.... 재수없어, 떨어져, 개새끼야.” 욕지거리를 지껄이며 민서는 내 방으로 들어섰고, 멀쩡한 내 모습을 보더니 피식 웃어보였다. “살만한가봐?” “응, 열음이랑 산이랑 잘 챙겨줘서. 흐흐.” “과일 사왔어, 지금 먹을래?” “응응, 먹을래, 죽만 먹었더니 배고파 죽겠다.” “배 속에 그지가 들어앉았나.” “아, 넌 왜 또 시비여!!!!” 나는 승질을 내며 민서가 들고온 봉다리를 냉큼 집어들었고, “강휴인!!! 우리 부엌에서 칼이나 가져와, 과일 자르게!!!” “넵!! 근데 내가 산 산딸기는 칼로 잘라 먹는거 아닌데!!!” “너 진짜 기어이 산딸기 사온거야? 내가 미치겠어.” 드디어 예전처럼 돌아온 듯한 휴인이와 민서의 관계, 역시 갑자기 싸운 관계는 순식간에 눈녹듯 풀어져버렸다. 다행이란 생각에 웃음이 터져나왔다. 휴인이가 자기네 집의 부엌에서 열심히 칼을 찾고 있을 때, 나는 민서를 향해 말을 걸었다. “미안하다, 민서야.” 갑작스런 내 말에 카리스마 넘치는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모자를 눌러쓴 그녀의 긴 머리가 바람에 가볍게 흔들린다. “너... 휴인이 좋아하지? 그래서 이러는거지? 내가 미안하다. 니 입장에서는 내가 어쩌다가 굴러온 재수없는 년이겠지, 그래, 내가 다 안다. 근데 난 니가 환영이랑 사귀니까, 휴인이 좋아하고 있는 줄은 몰랐지. 그래도 내가 잘할게. 내가 너한테도 잘하고, 환영이한테도 잘하고, 비원이한테도 잘하고, 휴인이한테는 더더욱 잘할테니까.. 너도 나 계속 미워하지말고 조금만 이뻐해주라.“ 모처럼 진지하게 말을 이은 나. 그런 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민서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 병신.” 그래, 그 때는.... 민서가 보인 심술이 나를 싫어해서인 줄로만 알았다. 그 반대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었다. 그래... 그랬었다. 민서의 말대로... 그 때의 난 정말 병신이었다. 그래... 그랬었다. 37. 치밀한 계획 “전에 못한 고기파티 오늘 하자, 오늘!!! 다들 어떠냐? 좋지!!?” 어제와는 달리 아픈 모습은 씻은 듯이 털어내 버리고 새로운 아침을 맞이한 나. “아, 진짜 돼지 같은 게 먹을 생각 뿐이야." 비원이의 말은 무시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은 옛날에 이미 깨달았다. “니 옛 남자친구, 그 미친놈이 너한테 주고간 돈 있잖아, 20만원!! 너 이제 그거가지고 먹고 살아!! 이제 우리한테 달라붙을 이유 없잖냐!!“ “그거 다시 돌려줄거란 말이다, 좀 닥칠 수 없겠냐, 신비원!!??” 물론 그 20만원은 우리 아버지 돈이므로 다시 돌려줄 생각은 없었지만. 나도 내 나름대로의 비자금은 챙겨야 했기에 그렇게 둘러대며 말할 수 밖에 없었다. “맞아!! 내 여자친구야, 나랑 같이 있을거니까 그런 말 하지마!!” 휴인이 말하는 것 좀 보소. 어쩜 이리 이쁘게 말할까. 껄껄껄. “개새끼, 이제 지 여자친구 생겼으니까 친구는 안중에도 없다 이거지?” “응.” “너 뭐라 그랬어? 이리 와 봐.” “아니, 우리 비원이 멋쟁이라구.” 저 비굴한 새끼. 저렇게 대놓고 비원이를 무서워하다니. 연하 남자친구의 비굴한 모습에 기분이 나빠진 나는 고개를 돌려 환영이에게 말을 건넸다. “고기, 고기!! 고기 있지?” “네, 냉동실에 잘 모셔뒀지요~” “그래, 그러니까 환영이 너도 오늘 빨리 들어와!!” “고마워요, 챙겨줘서.” “아니, 그게 아니라 너 없음 고기 누가 굽니.” “..........누나....” 환영이는 진심으로 배신당했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모른 척 시선을 피했다. 당연히 농담이지, 임마. 니가 그렇게 매일 사람들한테 맞아주다 늦어봐라. 걱정된단 말이야. 친동생처럼 느껴지는 애가 바로 환영이 넌데. 싹싹하고, 말 잘 듣고, 착해서 더 걱정이 되는 사람이 너라구. 내 남자친구이긴 하지만 맨날 뺀질대는 휴인이, 냉정한 민서, 맨날 기어오르는 비원이. 환영이 너는 그 세 명하고는 질이 다르단 말이다, 질이!!! “그럼 난 나가볼게.” 시끌벅적한 틈바구니에서 민서는 쓰고있던 캡모자를 더 푹 눌러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 나에게 ‘병신’이라는 심한 말을 던진 민서는 곧 냉정하고 카리스마 있는 예전의 모습을 찾아 나를 본 척 만 척 하고있었다. 치, 휴인이를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인정하란 말이다. 인정하면 내가 미안해하기라도 하지, 더 미워지게 저 년은 나를 무시한단말여. 나는 일어선 민서를 멍하니 바라보았고, 민서는 나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시언, 너 뭐해?” “응? 나? 왜? 나 뭐?” “나랑 같이 안 갈거냐구!!!!” 헉!! 나랑 같이 나간다는 소리였냐!!! 난 또 니 혼자 홀랑 나간다는 소린 줄 알았지!!! “그럼 우리 다녀올게.” 민서는 저마다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남정네 세 명에게 도도하게 말을 남겼고, 난 급히 그 뒤를 따르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누나, 보고싶을거야!! 그러니까 빨리 들어와, 나도 오늘 빨랑 올테니까!!” 내 남자친구의 낭랑한 목소리가 그 뒤를 잇는다. “이 애교덩어리 자식, 걱정마!! 누나 민서 따라다니다가 금방 올게!!” 뭔가 남자와 여자의 대사가 바뀐 거 같긴 하다만... 뭐 아무렴 어떤가. “저거 둘이 진짜 야밤에 포대기에 싸가지고 버리든가 해야지, 소름돋아 죽겠네.” 비원이는 또 다시 우리의 대화에 비위 상한 듯 머리를 긁적대며 담배를 피워물고 민서보다 앞서 대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참, 나. 가지가지 한다, 정말.” 민서도 어이없는 듯 대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난 휴인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 번 씨익 웃어준 후 재빠르게 민서 뒤를 쫒았다. 오케이, 오늘은 백민서 파악하기 시작. 강휴인과 지환영은 범죄가 중단되어 있는 상태였다. 강휴인은 본래 하는 일이 도둑질이기에 자주 일을 저지르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경찰에 신고되는 즉시 골치아픈 일만 늘어나는 셈이기 때문이다. 지환영은 폭력의뢰가 들어와야만 일을 하기 때문에 요즘은 사건을 일으키지 않고 있었다. 폭력의뢰라고 해도 이것저것 다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 듯 싶었다. 착한 놈들이니만큼 돈벌이가 된다고해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해대는 것이 아니라 지들 나름대로의 철학과 진리를 내세워 거기에 어긋난다 싶으면 그 때 범죄행위를 저지르는 듯 했다. 아버지와 김반장님이 밤마다 내 이메일로 보내주시는 이들의 사건일지를 확인하다보면 그런 의혹은 점점 확신이 되어갔다. 강휴인이 도둑질을 행하는 금은방은 평소 물건값을 지나치게 많이 올려서 값을 받는 가게들이 대부분이었고, 지환영은 주로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거나 교내 폭력단에 의해 피해를 받는 아이들의 의뢰를 주로 받아주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일개 지하철 소매치기인 줄로만 알았던 민서 또한 부정부패를 일삼는 중소기업 고위 간부나 성매매를 행하는 아저씨들을 대상으로 사건을 저질렀다. 비원이가 그저 호스트바에 오신 아주머니들에게 술이나 따라주고 말상대 해주는 것에 비해 다른 세 명의 아이들은 뭔가 획기적인 일을 하고있다고나 할까. 솔직히 비원이의 잘못을 굳이 뽑자면 미성년자 출입금지인 곳에서 일하고 있는 것 뿐이다. 하긴, 재벌 아들이니 심한 짓을 시키기엔 무리가 있었을 것이다. 재벌 아들이 제일 잘하는 짓은 범죄가 아니었을테니까. 그저 곱게 자란 티를 내는 외모나, 살면서 몸에 배어버린 상류층의 행동방식, 어른들에 대한 배려,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어가는 사교성... 그것을 제일 잘 살린 방향이 바로 호스트바의 접대부였겠지. 범죄를 제일 심하게 저지르는 것은 나머지 세 명. 그리고 그 중 두 명은 범죄 중단. 지금 내 옆에 있는 것은 유일하게 3일에 한 번 꼴로 소매치기 짓거리를 해대고 있는 홍일점 백민서. 소매치기 짓거리는 휴인이가 하는 도둑질과는 차원이 달라서 사람들은 굳이 지갑이 털렸다고 해서 경찰에 신고를 하지는 않는다. 그저 재수없는 그 날의 자기 운세만 미친듯이 탓할 뿐. 그랬기에 그녀의 범죄는 쉽게 중단되지 않는 듯 했다. 그러나 내가 궁금해하는 것은 그녀가 어떤 기준으로 사람들의 지갑에 손을 대는지였다. 어떻게 나쁜인간들만 구별해서 그들의 지갑만을 쏙쏙 빼놓는지!! 그리고 범죄를 저지르는 기간은 왜 매일이 아니고 3, 4일에 한 번 꼴인지. 어쨌든, 민서는 내가 경찰에서 보낸 스파이라는 것을 모르는 상태이니 나는 되도록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하게 보일 수 있도록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민서야, 우리 어디 가는거야?” “숫자 1 좋아해?” “응? 쌩뚱맞게 그게 뭔 소리야?” “싫어해도 어쩔 수 없어. 오늘은 숫자 1에 초점 맞췄으니까.”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대며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무는 민서. “귀찮게 둘러대는 거 질색이니까 미리 말해둘게. 두 번 말하는 거 내 스타일 아니니까 한 번 말하면 바로 알아들어, 알겠어?“ “응?” “나 소매치기야. 잔소리 금지니까 닥치고 있어.” 이.... 이.... 이.... 예상 불가능한 년..... 이렇게 먼저 소매치기라고 말해버리다니!!!! 이렇게 황당할수가!!! 자기가 범죄자라고 선수쳐서 말해버린 거잖아, 이 기지배!!!! 정말 얘네는.... 내 상상과는 너무도 다른 아이들이다.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스케일을 가지고 일을 진행한다. 그래서 예상은 불가능, 이들의 생각을 꿰뚫기란 더욱 불가능. 내가 전문적인 탐정이었다면 대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오후 1:04 2009-07-21 “야... 그러니까 지금 니가 한 말은... 니가 소... 소매치..” “두 번 말하는 거 싫다고 했어.” “응? 그... 그래...” 씨발,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 그럼!!! 숫자 1은!! 뭐... 뭔데....?” “1호선.” 그녀의 섹시한 입술에서 담배연기와 함께 1호선이란 말이 튀어나온다. 그럼 알아듣기 쉽게 처음부터 1호선이라고 말할 것이지. “근데... 1호선에 초점을 맞췄다는 게 무슨 말인데?” 민서는 내 말에 피식 웃으며 짧은 미니스커트의 주머니에 쏙 들어가있던 작은 수첩을 나에게 내밀었다. 아니, 이걸 나더러 뭐 어쩌라고... 생각하며 그녀의 수첩을 펼쳐든 순간... 난 너무 놀란 나머지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건... 정말.... 말도 안돼......... 그녀의 수첩안에 빼곡이 들어차 있는 건 수많은 사람들의 사진과 신상명세서. “야.... 이게... 무슨...” “지갑에 돈 좀 넣고 다니는 사람들을 찍어놔야 내 수입도 확실해지지 않겠어?” 라고 민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내뱉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여기 적힌 사람들 다... 성범죄자 아니면 돈 가지고 장난친 회사원 아저씨들, 심하면 악명높기로 소문난 기업의 사장님과 지명수배된 범죄자들이라는 거. 민서의 수첩 안에는 그들이 저지른 범죄의 리스트까지 쫙 적혀져 있었으니까. 그 뿐이 아니었다. 그들의 집 주소, 심지어는 차 번호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아니, 이게... 무슨...” “너 머리 진짜 나쁘구나?” “응?” “대부분이 돈 많은 사람들이야. 다들 자기 자가용쯤은 가지고 있다구. 하지만 아침엔 모두들 자기네 회사로 출근해야하지. 당연히 자기 차를 운전해서 회사까지 이동하겠지. 뻔하잖아?“ “그... 근데?” “근데라니? 생각해봐, 자기 차가 고장났으면, 뭘 이용하겠니?” “........대... 대중교통?” “빙고!” 38. 그녀, 심장이 떨리는 소리, 그리고... 민서가 이렇게 공포스러운 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아니, 내가 생각하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는 이런 놈들이 아니었는데!!! 바보같이 웃을 줄만 알았지, 아기같이 유치할 줄만 알았지.... 이렇게 머리쓰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그래서 이 사람들 차번호가 적혀있는거야?” “응, 내가 어제 여기 적힌 사람들 승용차 펑크냈으니까.” 궁금증이 하나 풀렸다. 백민서가 소매치기 짓을 3일에 한 번 꼴로 하는 이유. 소매치기를 하지 않는 다른 날은 이 수첩에 적힌 리스트의 사람들 집을 찾아가서 그들의 승용차를 무자비하게 펑크내는 짓을 하는 것이다. “근데.... 이 사람들이 택시 이용할 수도 있잖아.” “이 리스트에 적힌 게 한, 두사람이니? 이 많은 사람들이 다 택시를 탈 리는 없잖아. 그리고 비원이가 괜히 호스트바에서 일하는 줄 알아?“ “응?” “이 사람 부인들도 알게 모르게 다 호스트바에 드나드는 아줌마들이라구. 비원이가 아줌마들한테 요즘 택시 위험하다고 이야기만 잘 해주면 그 아줌마들은 집에 가서 남편한테 조잘조잘 다 이야기한다구.“ 그녀의 말을 들으며 다시 한 번 수첩을 들여다보았다. .....그래... 그래서 이들의 가족관계와 그 가족의 이름까지 여기 쓰여있는 것이구나. 비원이와 민서 너의 범죄는 즉... 짜고치는 고스톱이었던 거구나. “그리고 이 사람들은 모두 1호선 주변에 집이 있는 사람들이야. 알아듣겠어?” 그래... 그래서 이 사람들의 집과, 차번호와, 가족관계와, 사진이 수첩안에 적혀있는 게로구나. 이 징하고 독한 것들.... 정말 이건 말도안돼.... 민서는 내 손에 들려있는 수첩을 낚아채 다시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민서야.. 그럼... 그 안에 있는 정보... 니가 다 조사해?” “미쳤어? 내가 이 많은 걸 언제 다 하고있어? 나야 믿는 구석이 있지.” “응?” “아는 동생들 세 명이 있어. 정보통이지. 인터넷 사냥꾼이라고, 들어본 적 있어?” “.... 못 들어봤는데? 그렇게 대단한 애들이 있어?” “...... 너도 아는 애들이야.” “응? 뭐라고? 좀 크게 말해봐, 안들려!!!! 걔들이 누군데, 응?” “...... 힌트를 줘도 못 알아먹으니, 돌겠어, 정말.” “뭐라고??? 안 들린다니까!!!” “됐어, 가자!!! 담배 다 피웠어, 이제 말 시키지마.” 다 피운 담배꽁초를 땅에 떨어뜨리고 높은 구두로 그것을 짓이기는 민서. 그리고서는 눈 앞에 보이는 지하철 역을 향해 걸어간다. 아주 당당하고 섹시한 걸음걸이로. 이 자식들이 이젠 아주 그냥 대놓고 일 저지르기로 작정을 했나. 이제 숨기는 게 아니라 다 까발려보겠다, 이거지? 이게 더 골치아프다. 미치겠다. 민서는 내가 경찰에서 보낸 스파이라는 거 모를텐데 왜 이렇게 나오는거야? 이래서 네 명 다 예측불허라니까. 한 명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다른 한 명은 저런 식으로 나오고. 여기서 정보 흘리고, 저기서 불쑥 튀어나오고, 다음에는 완전 비밀주의고.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의 정보를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민서는 굉장히 대담하게 나왔고, 그 대담함이 밝힌 사실은 모두 다 진실 같았지만 나의 머릿속은 계속 더 복잡한 함정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를 샅샅이 파헤쳐야 하는 것은 나였지만 오히려 내가 이들에게 관찰되어지는 느낌이다. 이 놈들은 지금 나를 지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노는 것이 틀림없다. 자신들의 모든 것을 알려주고, 할테면 해보라는 듯. 이 게임의 중심에 나를 놓아두고 동서남북 네 방향에 네 명이 서 있는 느낌. 모든 비밀의 열쇠를 쥐고, 마치 놀이를 하듯이. 그러나 더 화가 나는 건, 내가 이 놈들을 미워할 수도 없다는 거다. 왜냐면 이 놈들은 지금 나를 가지고 놀고 있는 동시에, 나를 굉장히 믿고있으니까. 나를 우습게 보는 동시에, 나를 굉장히 좋아하고 있으니까. 비밀을 알려주면서도, 자신들을 지켜주길 바라니까. 나를 미치게 만들면서도, 내가 자신들을 동정하게 만드니까. 모르겠다, 민서의 지금 이런 대담한 행동이 개인적으로 저지르는 돌발행동인지, 아니면 네 명이 다같이 상담해서 이끌어낸 고도의 심리전인지. 그래, 어쨌든 집중하자. 일단 이 일에만 집중하자. 다른 건 생각말고 이 일에만. “지하철 타면, 무조건 문 앞에 붙어있어. 내가 지하철 한 번 쫙 둘러보고 먹이감 있나 없나 확인하고 올테니까. 되도록 너랑 가까운 곳에서 일 처리한테니까 넌 지하철 창문으로 내가 내리는지 안 내리는지 유심히 관찰해. 내가 내리면 같이 따라내리라구. 바보처럼 지하철 종점까지 가지말구,“ “..... 니가 내리는지, 안 내리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러니까 되도록 가까운 칸에서 일 처리한다구. 문 앞에 붙어있으면 보이잖아? 내가 내리는지, 안 내리는지.“ “그냥 나도 니 옆에 붙어있음 안돼??” 짜증이 묻은 목소리로 투덜대며 중얼거렸다. “.....너한테 소매치기 하는 모습, 보이기 싫어.” “........ 응?” “다른 모습 다 보여줘도 나쁜 짓 하는 건 보여주기 싫다구.” “..... 나쁜 짓 하는 이야기는 다 해놓고.” “어쨌든 나 따라다니지마. 너 같이 얼빵한 애는 그런거 보고 배우면 안돼.” ...... 이거다, 내가 그들을 미워할 수 없는 이유. 나쁜 짓은 다 해놓고도, 정작 내가 공범이 될 수 있는 입장이 되면 나를 배제시킨다. ‘관계자’에서 ‘타인’으로 만들어 남들에게 내가 나쁜년이 될 수 있는 상황은 아예 만들지 않는다. 자신들은 악당이 될 망정, 나는 끝까지 착한 사람으로 남겨둔다. 내 앞에서 부끄러운 짓은 하기 싫어하는 저 아이들을, 도대체 나는... 어떤 방식으로 감싸주어야 할까. 민서는 여자이지만, 지금까지의 휴인이, 환영이와 비슷하게 나를 감싸주며 행동한다. 괜시리 편안해진다. 민서의 범죄를 눈치채고서도 뭔가 안정되고 편안한... 알 수 없는 느낌. “아씨, 나 눈 나빠서 니가 내리는지,안 내리는지 잘 모른단말야!!!” 나쁜짓 하는 장면은 나에게 보이기 싫다는 민서의 말에 괜히 슬퍼져서 일부러 승질을 내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민서는 나의 손을 잡아 들어 자신의 모자에 턱 올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이거.” “응?” “검은 캡모자.” “이게 뭐.” “이것만 보고있어. 검은 캡만 보이면 무조건 밖으로 튀어나와.” 그녀의 단호한 목소리에 나는 아무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 중성적인 목소리... 진짜 쟤 목소리는 뭔가 중독성이 있단 말이야. 괜히 사람 마음을 뛰게 만들어, 여자 주제에. 카리스마가 넘쳐서 그래, 난 여자목소리에 마음 뛴 적 없는데. 때마침 지하철이 도착했고, 민서는 나의 손을 붙들고 지하철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탄 칸은 지하철의 한가운데 부분이었다. 사람들의 출근시간과 겹쳐 지하철은 ‘지옥철’이라 불러도 될만큼 복잡했다. “씨발, 오늘따라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당분간 못 움직이겠다.” 민서의 속삭임과 동시에 지하철이 출발했고, 나는 중심을 못 잡아 그 많은 사람들 틈에서 중심을 잃고 휘청댔다. “병신, 제대로 하는 게 없냐, 왜.” 민서는 나를 핀잔하는 척, 하더니 내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서 내가 떨어지지 못하도록 잡아주었다. “.....야.... 뭐야, 이 자세.” “내가 너 잡아주는 거잖아.” “여자끼리 남사스럽게.” “변녀, 남녀 사이에 이러는 게 더 남사스러운 거 아니야? 여자끼리 뭘 따져, 그냥 있어.” “아니, 그러니까 왜 허리를 잡냐구.” “이게 허리냐? 넌 너무 굵어서 허리같지도 않아. 그냥 있어.” “너 자꾸 언니라고 안 부를래?” “가만 있어, 좀.” “근데 너 키 진짜 크다.... 나도 여자치고 작은 키는 아닌데, 나 173이거든. 너는 한 178 되냐? 그 키에다 굽있는 거 신으니까 진짜 커보이네. 넌 그냥 모델해도 되겠다, 야.“ “.......180이야.” “응? 뭐가?” “실제 키. 굽 있는 거 안 신어도 178이 아니라 180이라구.” “근데 굽 있는 거 왜 신어? 징한 년, 독한 년. 뭘 먹고 자랐길래 키가 그렇게 커?” 신나게 욕하다가 갑자기 무언가가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가만, 원래 민서는 운동화를 즐겨신었는데? 설마... 오늘 내가 자기 따라오는 거 알고... 일부러 굽을 신은거야? 그러고보니 그녀의 검은색 캡모자도 빨간 반짝이로 장식이 되어있다. 하는 일이 소매치기라 눈에 띄는 의상은 최악일텐데도 불구하고, 평소 칠칠맞지 못한 나를 위해 눈에 띄도록 굽있는 신발로 자신의 키를 더 높이고 빨간 반짝이가 박힌 모자로 내 시선을 잡아주려고 한 것이다. “난 섹시하잖아. 너랑 같냐?” 느껴지는 감동, 오늘따라 굉장히 친근감 느껴지는 민서. 톡톡 쏘는 말투와 카리스마 있는 태도, 냉정한 표정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지만 나를 대하는 행동은 무언가 더 여유있고 편해보였다. 내 눈 앞에 보이는 민서의 목에 작게 톡 튀어나온 목젖이 보인다. 에에? 목젖 있는 여자도 가끔 존재한다고 들은 적 있긴 하다만 실제로 본 건 처음이다. 작게 킥킥 웃고있는데 지하철이 다시 한 번 덜컹거렸다. 워낙 균형을 잡지 못하는 나인지라 다시 한 번 중심을 잃으려고 하는데 민서의 손이 내 허리를 세게 붙잡아주었다. .....휴인이 생각을 하지도 않았는데, 내 심장이 아까부터 괜시리 떨려온다. 기분이... 이상하다. 39. 검고 깊은 지하철 탄 지 5분 경과. 여전히 사람들은 북적거리지만 그럭저럭 내 의지대로 걸음은 옮겨놓을 수 있는 공간이 생겼을 때, 민서는 슬슬 일을 시작하려는 듯 주변을 살폈다. “오케이, 목표물 하나 포착.” 옆칸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녀는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징한 년, 난 사람들이 뭉텅이로 섞여있어서 잘 보이지도 않는구만. 시력이 더럽게 좋은갑다. 민서는 내 허리에 감긴 자신의 손을 풀어 다시 내 손을 꾸욱 붙들었다. “야, 나 다녀온다.” “응?” “금방 끝나. 너무 걱정마.” “그럼 다음 역에서 내리면 돼?” “글쎄, 사람들 헤치고 저 사람 옆에 가는거랑, 저 사람 관심 끄는 거랑, 몸 밀착시켜서 지갑 뜯어내는 거랑, 끝나고 문 밖으로 나가는 거.... 다 합치면 두 세 정거장쯤은 더 가야할 것 같은데.“ “저 사람 관심을 왜 끌어!! 관심 끌면 더 힘들어지는거 아냐?” 소매치기라는 민감한 문제 덕분에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대화가 들리지 않도록 귓속말을 주고받기 시작한 우리 두 여자. “저 사람은 성폭행범이란 말이야, 내 몸매 보면 환장을 할거야. 여자 몸매에 침 질질 흘리는 새끼들은 관심 한 번 흘려주고 나면 지 지갑이 없어지는지, 뇌가 없어지는지 죽어도 눈치 못 채.“ “야, 그럼 너 저 놈이 니 몸을 더듬게 놔두겠다는거야, 지금?” “그래야 훔치지, 그런거 아니면 무슨 방법으로 지갑을 낚아채라는거야?” “이게 미쳤나, 야, 여자는 아무한테나 몸 내주고 그러면 안되는거야, 임마!!” “난 너랑 다르거든요?” “다른 게 뭐 있는데!!” “니 통짜 몸매는 확실히 아무한테나 몸 내주면 안돼지, 충분히 욕 먹지.”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난 괜찮아. 저런 병신같은 새끼들 끈적한 손길 몇 번 받아내주면 돈이 들어와. 그걸로 불쌍한 사람들 도와주면 난 그걸로 만족한다. 저 새끼들 더러운 손이 닿은데는 깨끗하게 박박 문질러 닦아주면 그만이야.“ “너 그러다 험한 일 당하면 어쩌려고!!!” “아무리 붐벼도 지하철 안이야. 알겠어? 만약에 옷 속으로 손이 들어오면 난 그 손모가지 잘라버려, 무슨 뜻인지 알겠어? 내가 적당히 놀아주고 오겠다는 소리야, 저런 새끼들이 선 못 넘기도록.“ “저런 남자들은 쉽게 보면 안돼!! 막 니 다리랑!! 엉덩이랑!! 막 이런데를 아주 그냥” “정 못 참겠으면 뺨이라도 한 대 치고 올테니까 너라도 좀 가만있어라, 응?” “너 정녕 환영이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걔 이름이 지금 여기서 왜 나오는데.” “걘 니 남자친구잖냐!!! 지 여자친구 몸을 개새끼들이 더듬는데 눈까리가 뒤집어지겠구만!!” “안 닳어, 안 닳어!! 내 몸 안 닳는다고!!” “닳고 안 닳고의 문제냐, 이 기지배야? 휴인이라도 생각해라, 쫌!!! 니가 좋아하는 남자에게 당당해야 하지 않겠느냐, 응??“ “...... 내 앞에서 환영이나 휴인이 이야기 좀 하지마, 병신아.” 기어이 나에게 욕을 퍼부은 민서. 그러나 곧 그녀는 내 손을 꽉 잡아 문 손잡이 위에 올려주고는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이거 꼭 붙들고, 나중에 내 모자 보이면 바로 튀어나와. 좀 있다 보자.”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옆칸으로 스르륵 사라져버리는 민서. 아까 수첩에 적혀있던 남자들 대부분이 성폭행범이더니. 그래도 너무하잖아, 저러다 진짜 험한 일 당하면 큰일인데. 하긴, 내가 민서를 처음 접하게 된 이온이의 파파라치 비디오에서도... 민서는 어떤 느끼한 대머리 아저씨의 손길을 받아내고 있었다. 민서는 대놓고 말했다. 불쌍한 사람들 도와주면 그걸로 만족한다고. 알고있다, 민서가 하는 일이 얼마만큼의 용기와 담력을 필요로 하는지. 물론 그녀가 하는 일조차 범죄이긴 하지만. 나는 최대한 고개를 쭉 내밀어 옆칸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보다 월등히 높은 그녀의 키 덕분에 민서의 위치를 파악하기는 쉬웠다. 하긴, 원래 키 180에 저 높이의 힐을 신었으니... 한 186 되겄구만. 비원이랑 같이 서 있으면 환상의 커플이겠구나. 아무리 봐도 저 년 저거는 비원이랑 딱인데. 비원이가 제일 키도 크고 섹시한 게 민서랑 제일 잘 어울리는데 왜 환영이랑 사귀고 휴인이를 좋아하는 건지 이해를 못하겠단 말이야...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목표물에게로 다가가는 민서. 그녀의 옆으로 늘어진 탐스러운 머릿결, 이온이 말로 인근 고등학교 남자애들이 민서 얼굴 보려고 아무 지하철이나 타고 여행을 감행한다더니, 그게 거짓은 아닌 것 같다. 지금은 이른 아침 시간이라 학생들은 얼마 없지만, 방과 후의 혈기왕성한 남자 아이들은 민서 얼굴 보려고 이리저리 힐끗댈 게 뻔하다. 저게... 저게... 보통 외모냐고. 물론 이온이처럼 이쁘장한 타입이 아니라 카리스마 넘치는 섹시한 이미지지만. 그러고보니, 휴인이, 환영이, 민서, 비원이.... 다들 고등학생 교복입은 학생들을 보면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할까. 다들 열 여덟 살이니까, 교복 입으면 되게 예쁠텐데. 말은 안해도 다들 부러워하겠지? 지들 돈으로는 죽어도 교복 못사겠지, 아까워서. 이온이네 학교 교복 이쁘던데 내가 그냥 확 한 벌씩 사줄까보다. ...... 하긴, 어림잡아도 교복 한 벌에 20만원이 넘는데 그건 좀 심한가? 지금 내 눈에 비친 민서는 낯선 남자 옆에 다가서고 있었다. 곧 그 남자의 더러운 손이 민서의 몸 여기저기를 더듬을 것이다. 잠시 후에 벌어질 그 장면을 보면 나도 모르게 그 남자의 머리 위로 주먹이 나가버릴 것 같아서 나는 서둘러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고보니, 민서의 범죄를 말리지도 않고 있는 나 자신이 놀라웠다. 나는 민서가 낯선 이의 지갑을 훔치는 것이 걱정되는게 아니라, 낯선 이가 민서의 몸을 더듬는 것이 짜증날 지경이었으니까. 이런 내 행동이 우습지는 않았다. 단지, 믿을 수 없었을 뿐. 범죄는 범죄일 뿐이라는 아버지의 말씀도 옳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아이들의 말도 절대적으로 옳았다. 그래, 그랬기에... 난 아무 말 않고 그저 눈을 감아버렸다. 이제 나도... 공범인가. 아무렴 어때. 아부지, 나... 감옥에 들어가래도 들어가겠어요. 이 애들과 함께라면 나... 세상 끝까지 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웃기죠, 나 이 애들하고 함게 지낸 시간, 채 일주일도 안되거든요. 내가 토요일에 새로운 집을 얻었고, 꼬박 하루 지샌 후 담배피다 이 애들을 만났고, 월요일에는 휴인이를 따라다니고, 화요일에는 환영이를 따라다니고, 수요일에는 아팠고, 목요일에는 지금 이렇게 민서의 범죄에 동조하고 있어요. 아부지, 죄송한데요, 이건... 나도 어쩔 수가 없을 것 같네요. 아부지는 날 믿고 이 곳으로 보냈지만, 여기서는... 나도 나를 믿을 수가 없어요. 이번에 날 믿은 아부지의 선택은... 완벽한 실패예요. ....미안해요, 아부지... 나... 이 애들하고 함께 있는 한 달은 아이들만 생각하면서, 지켜주면서, 사랑하면서 그렇게 지내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 한 달이 끝나면요...? 글쎄, 그건.... 그건... 그 때 가봐야 알겠죠. 그 때 벌어지는 상황에 따라 내 모든 선택을 맡겨야겠죠. 멍하니 눈을 감고 내 자신의 생각에만 빠져있었다. 우연찮게도 내가 이번 사건을 맡은 날은 이번 달 1일. 그러니까, 31일까지는 아이들을 지켜줄 시간이 주어지는 것이다. 주동자는 대체 누구일까, 그리고 난... 그 주동자 아이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할까. 주동자가 휴인이라면.... 난 그저 [귀여운 자식, 사고칠래?]라고 할 거고. 주동자가 환영이라면.... 난 그저 [뭐가 그렇게 힘들었어?]라고 물을거고. 주동자가 민서라면....... 난 그저 [그렇게 강한 척 안해도 돼]라고 위로할 거고. 주동자가 비원이라면.... 난 그저 [개새끼. 별 짓을 다하는구나]라고 웃어줄 거고. 정말, 정시언... 완전 구제불능. 정시언 완전 바보. 정시언 완전 병신. “정시언, 너 죽을래?????” 그래, 정시언 완전 죽을..... 응? 이게 무슨? 난 급히 눈을 떠 앞을 보았고, 내 눈 앞에는 검은 색 모자를 쓴 민서가 서 있었다. “아, 미안, 내가 못보고.. 지금 내릴....” 내릴려고 하는데.... 썅!!!! 사람들이 밀려드는 바람에 나는 문가에서 상당히 멀어져있었다. 안돼, 민서는 이미 내렸는데!! 여기서 헤어지면 집에서 보는 수밖에 없단 말이다!! 그렇다고 민서가 도로 이 지하철을 타버리면 곧 소매치기로 오해받을 테고!!! 진짜 내가 이 애새끼들한테 핸드폰을 장만하라고 꼬시든가 해야지, 아악!!!! 결국 문이 닫히기 일보직전, 지하철의 문 사이로 검은 물체가 하나 끼어들었다. 민서가 급히 벗은 그녀의 캡모자. “정말 너.... 딴 짓 하다가 속 썩일래.....” 갑작스레 끼어든 캡모자로 인해 지하철의 문은 다시 서서히 열렸고, 나는 그녀의 휘날리는 긴 머리와, 깊은 눈동자를 그 때 처음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검고 깊은.... 슬픈 눈이었다. 40. 의미심장한 말 “야, 너 그냥 모자 벗고 다녀라.” “조용히 해라, 나 화났다.” “모자 벗은 게 훨씬 낫던데!!!” “조용히 하랬다.” “나 니 눈 처음봤잖냐, 내 예상으로는 되게 큰 갈색 눈일 줄 알았는데... 이쁘장한 기지배들이 거의 좀 그런 눈이잖냐, 쌍꺼풀 크게 진 왕방울만한 갈색 눈!! 근데 넌 속쌍꺼풀이지? 눈 색깔 죽이더라, 완전 까매!! 눈이 참 더럽게 섹시하더라.“ “좀 안 닥칠래...?” “너 머리 짧게 자르면 미소년 같을 거야. 느낌이 좀 그렇더라. 하긴, 키도 크니까.” “도, 도대체 지금 뭐라는거야!!!!!!???” 처음 본 그녀의 모자 벗은 모습에 칭찬에 칭찬을 더하고 있을 때, 그녀는 시종일관 조용히 하라고 주의만 주다가 미소년 같다는 내 한마디에 얼굴을 붉히고 성질을 내버린다. 결국 지 분에 못 이겨 사래가 들렸는지 콜록콜록 기침을 해댄다. ..... 미소년 같다는 말, 난 좋던데. 되게 상큼한 이미지 아닌가, 그런거? 어쨌든 난 그녀 덕분에 다시 열린 지하철 문에서 안전하게 내릴 수 있었고, 민서는 내가 내린 후 바로 모자를 다시 푹 눌러써 자신의 눈을 안보이게 가렸다. 그리고 우린 현재, 지하철 역의 벤치에 앉아 다음 지하철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뭘 그렇게 흥분하고 그래, 난 칭찬한건데.” 나는 사래들린 민서의 등을 두드려주며 중얼거렸다. “콜록, 흠. 여자한테... 남자같다는 거... 그건 욕이잖아...” “욕 아니야, 임마!!! 미소년!!! 그 호칭을 아무나 가질 수 있는 줄 아냐!!? 너 설마 니가 미소녀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넌 결코 미소녀의 그 여리여리하고 연약하고 귀여운 이미지를 가질 수 없어!! 넌 그냥... 미소년의 그 카리스마, 터프함, 섹시함, 뭔가 아직 덜 된 듯한... 미성숙한 남자의 향기랄까....“ “변녀....” “아, 그 변녀 소리 좀 그만해라, 좀!!!” 그 때 어우동이 나오던 야동을 보고 함부로 탄성을 내지르는 게 아니었는데, 썅. 괜히 그거 집중해서 봤다가 비원이한테 변녀 소리 듣고, 이제 민서가 그걸 나의 별명으로 굳히려 하고있다. “근데 니가 남자였음 되게 웃겼겠다, 흐흐.” 나는 내가 변녀인 걸 인정하듯 음흉한 웃음소리를 내버렸고, 민서는 나의 웃음소리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조심스레 나에게 물었다. “뭐가... 웃긴데.” “그냥, 그렇잖아. 휴인이나 환영이나 비원이 다 남자잖아, 그것도 아주 잘생긴. 그 뿐인가? 열음이나 산이, 준휘도 다 귀여운 애들이고. 너까지 남자였음 여자는 나 하나였을 거 아냐. 우에, 말도 안돼!!! 나 그래도 니가 있어서 크나 큰 안심이 된다, 민서야. 그렇잖냐, 남자 바글바글한데서 같은 성별 여자애 있는 게 얼마나 든든한데. 다행히 뭐 다들 좋은 애들이라 그렇게 거리낄 건 없지만 여자끼리만 통하는 부분도 은근히 많은 법이거든. 너 그동안 힘들지 않았냐, 혼자 여자라서? 예를 들어 뭐, 생리할 때라든가.“ “뭐? 생일?” “아니, 생리. 우리 여자들 마법 걸릴 때.” 난 오늘따라 너무 편해진 민서 앞에서 조잘대며 이야기를 시작했고, 그녀는 나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얼굴이 마치 토마토처럼 벌게지기 시작했다. 아까 미소년이라고 했을 때는 붉어지는 수준이 홍당무였는데... 지금은 더 빨개졌군. 의외로 부끄럼을 잘 타는 모양이다. “생...!!! 생!!! 무슨!!! 야, 너는 여자가 무슨!!!! 생!!!” “그게 뭐, 같은 여자끼린데.” “아니 그래도 그걸 밖에서 어떻게 말을 할 수가 있어!! 생!! 됐어, 그런 말 하지마!!!” ......그 요상시런 기지배는 필요이상 흥분하여 말을 더듬어댔다. 뭐, 기지배들끼리 있어도 이런 이야기에 특히 창피해하는 아이들이 있기 마련이고, 흥분해대는 민서가 살짝 불쌍해졌기에 난 일부러 화제를 돌려주었다. “근데 니가 남자였어도 멋있긴 했을 거야. 내가 그건 인정한다.“ “......” “음, 뭐랄까. 다른 애들한테도 꿀리지 않는 매력이랄까, 그런게 지금도 있으니까. 니 매력은 여자라서 느껴지는 매력이 아니구, 뭐랄까, 니가 남자라면 더 와닿았을 듯한... 그런 매력이거든.“ 그래, 아까 내 마음을 그렇게 뛰게 하는 것처럼... 여자들의 심장은, 자주 흥분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그렇게 쉽게 반응하지 않으니까. 내가 이래뵈도 남자 보는 눈은 확실하단 말이다. 이온이 고 년이 눈 높은 게 다 이렇게 정확한 눈을 가진 언니를 만나서이기 때문이지. 하긴, 나도 남자 고르는 거 실패한 적은 있구나. 이진한 그 개새끼랑 사귄 건 내 인생 최대의 오점이지. “휴인이보다.... 더....?” 이진한 생각을 하며 이를 갈고 있을 때 민서의 작은 소리가 내 귀에 꽂혔다. “응? 뭐가?” “내가 남자였으면, 휴인이보다 더 매력있을 거 같냐구.” 꼭 이런 애들이 있다. 내가 남자였어도 쟤보단 잘생겼겠다. 내가 여자였어도 쟤보단 이쁘고 참하겠다, 라고 생각하고 비교해보는 애들. 민서에게도 이런 면이 있다니, 왠지 귀여워져서 나는 과장스럽게 말해주었다. “음, 당연하지. 휴인이보다 훨씬 더 멋졌을걸? 지금은 니가 휴인이 좋아하지만, 니가 남자였으면!! 휴인이 좋아하는 기지배들보다 너 좋아하는 기지배들이 더 많았을걸?? 요즘 너 따라다니는 고등학생 남자애들 많다며? 그 남자애들이 싸그리 여자애들로 바뀌었을 거라고, 응? 내 말 이해되지?“ 휴인이를 좋아하는 그녀의 그리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나. “너도.... 그랬을까?” “응?” “내가 남자였으면, 너는... 휴인이랑 나 중에... 누굴 택했을 거 같냐구.” “당연히 너지, 임마!!!” 이왕 한 과장, 조금 더 맛깔스럽게 해보자는 단 하나의 일념으로 난 민서의 기를 팍팍 살려주기로 마음 먹었다. 완전 빈 말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실제로 이루어질 일도 아니니까. 상상은 얼마든지 해도 죄가 되는 게 아니니까. “당연히... 나라고....” “응, 민서 너지!!” “..... 그 말, 후회하지마.” “... 엉? 후회를 왜 해?” “나 그 말, 죽어도 안 잊어버릴 거니까....” “응?” “나중에 니가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잡아떼면... 나 진짜 화낸다.” 갑자기 무섭도록 진지해진 민서. “뭐야, 너 설마 그런거냐? [다음엔 내가 남자로 태어날 테니까 나랑 사랑하자] 이런거? 우와, 완전 닭살!! 역시 너도 날 싫어하는 척 하면서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 그래, 오늘 같이 다녀보니까 내가 나쁜 애만은 아닌거란 걸 알았을거다!! 편히 생각해라, 언니가 널 이뻐해주마!!!“ “모르지.” “응?” “니가 다음에 내 여자가 될지.” “.............” “아니면 이번에 내 여자가 될지.” 민서는 피식 웃으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벤치에서 일어섰다. “뭐라는거야? 무슨 뜻인데?” “몰라도 돼, 바보.” “내가 언니라고 부르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을테니까 욕은 좀 자제해주면 안되겠냐?” “바보가 뭐가 욕이야, 친근감 있어서 좋은데.” “그나저나 너 아까 지갑 잘 훔쳤어?” “난 실패한 적 없어.” “잘난 척 하긴, 얼마 들어있었는데?” “꽤 두툼해, 오늘 거래처 사람들 만나서 밥 사기로 했는지 월척이네. 일 몇 번만 더 하고 들어가자, 오늘 고기파티 하자며.“ 앞서 걸어가는 민서의 뒷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갑자기 아이들이 보고 싶어졌다. 그 천진난만한 미소가 미친듯이 그리웠다. 바로가기 Daum 카페 음악샵 내 블로그 내 메일 내 쪽지 인터넷소설닷컴 cafe.daum.net/youllsosul 훈장(공개) | 회원수 947,214 카페정보내 정보 가입 110 방문 18351 새글 251 카페지기 [주인]유리 개설일 2002.01.22 프로필 수줍은미소☆ 수정 쪽지 0통 메일 50통 내 글 반응 내가 쓴 글 작성중이던 글이 있습니다. 휴대폰 카페 카페 초대 회원 보기 소모임 바로가기 -------------- [소모임 만들기] 카페 ON (미사용중)채팅 카페 탈퇴 퍼옴- 퍼옴완결방 책임운영자 : 영계 (stylehyejin@hanmail.net) 최신목록 목록 윗글 아랫글 [[　　로맨스]] [청몽채화] 관계자 외 출입금지 41 - 60 글쓴이: [퍼옴·반휘] 조회수 : 25024 08.08.01 13:31 http://cafe.daum.net/youllsosul/KRDt/10637 ▷▶▷▶▷▶▷▶▷▶▷▶▷▶▷▶▷▶▷▶▷▶▷▶▷▶▷▶▷▶▷▶▷▶ 작가 : 청몽채화 감상주실곳 : khyem87@hanmail.net 작가 카페 : http://cafe.daum.net/chaehwa (┗BlueDream┓채화) 작가 버디 : 하얀다섯 ▷▶▷▶▷▶▷▶▷▶▷▶▷▶▷▶▷▶▷▶▷▶▷▶▷▶▷▶▷▶▷▶▷▶ ┗BlueDream┓채화 http://cafe.daum.net/chaehwa 많이 가입해 주세요 ^^♡ ▷▶▷▶▷▶▷▶▷▶▷▶▷▶▷▶▷▶▷▶▷▶▷▶▷▶▷▶▷▶▷▶▷▶ 41. 이별선언 “와아!! 누나 왔다~!!” 민서와 내가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마치 한 마리의 강아지처럼 내 품으로 쏙 기어들어오는 휴인이. 허허, 이 자식 애교만 보면 금방 기분이 좋아진단 말이지.. 나는 슬쩍 웃으면서도 혹시나 민서의 기분이 상하지 않았나 싶어 그녀의 얼굴을 슬쩍 살펴보았다. 민서는 그다지 화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내게 안기는 휴인이의 행동을 멀뚱히 보고만 있었을 뿐. “오냐, 잘 있었어?” “응응!!” “일은 잘 했구?” “응, 아줌마들이 누나 보고싶다고 계속 데려오라구 그래서!!” “그래? 너 일하러 가면 또 같이 가야겠다.” “나도 누나 있어야 일이 잘되는 거 있지.” 진짜 연인의 모습으로서 자리를 잡은 휴인이와 나의 모습에 비원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씨발, 여기가 양계장도 아니고, 썅. 닭살 돋아서 미치겠네.” 그 순간이었다. 멀뚱히 우리를 보던 민서가 주방에서 나오는 환영이를 향해 달려든 것을. “자기야~!!! 나 보고싶었지?” 키 180의 민서가 키 182의 환영이에게 안기는 저 모습을 보아라. 물론, 그 모습은 키 180의 휴인이가 키 173의 나에게 안기는 모습보다는 훨씬 안정감 있었지만 그 거인들의 포옹도 그다지 유쾌한 장면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고기파티를 위해 일찍 일을 마치고 왔을 법한 환영이는 약간 놀란 듯 보였다. 하긴, 그럴만도 하다. 지금 막 돌아온 나와 민서에게 인사를 하려고 음식 손질을 하다 밖으로 나왔는데 차갑고 냉정하기만 하던 자신의 여자친구가 덥석 자신에게 안겨버리다니. “미... 민서야...?” “일하는 동안 계속 우리 자기 보고싶어서 죽는 줄 알았지 뭐야.” “......그... 그래?” “일하고 있는데 느끼한 아저씨들이 끊임없이 찍쩝대는 거 있지.” “그... 그런 몹쓸 인간들이 있나, 하하하.” 환영이는 처음 보는 여자친구의 애교에 상당히 당황했다. 민서의 애교를 받아주는 환영이의 말투에서부터 그가 굉장히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억지웃음과 어색한 맞장구. 민서는 갑자기 왜 저렇게 변해버린 걸까. “아, 씨발!!! 진짜 미치겠네!!!” 그리하여 결국 폭발한 건 우리의 신비원씨. “이 새끼들이 분위기 망치려고 작정을 했나, 왜 여기저기서 닭살 뿌리고 지랄이야.” “민서가 미쳤나봐, 비원아.” “닥쳐, 강휴인. 니네 커플도 만만찮어.” “아잉, 섭섭하게~ 내가 우리 비원이 얼마나 사랑한다구.” “니 사랑따위 됐고, 난 해커애들 집에 갈란다.” “왜, 고기파티 해야되는데!!!” “난 그냥 해커애들 집에서 피신할란다!! 고기먹기 전에 소름돋아 죽겠는데 장난하냐?” “그럼 니가 가서 애들도 데리구 와!!” “아, 안 올거라니까!!!” “빨리 덱구와, 자기.” “아, 씨발!!!!!” 비원이는 결국 괴성을 지르며 해커를 데리러 떠났고, 휴인이는 그런 비원이를 보며 장난끼있는 미소를 짓더니 다시 시선을 돌려 여전히 환영이에게 애교를 피워대는 민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시언누나, 나 민서 저러는 거 처음봐.” “뭐, 저러는 게 더 좋지않아? 잘 노는구만.” “누나랑 있으면 애들이 다 이상하게 변해.” “칭찬이냐, 욕이냐?” “민서랑 환영이 잘 어울려?” “왜, 부러워?” “아니, 난 누나 있는데 뭐.” 부드럽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아주는 휴인이. 남자다. 휴인이를 볼 때마다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건 이 생각 단 하나다. 그는 어린소년이 아니라, 듬직하고 진정한 남자다. 한 여자를 책임지고 지켜줄 수 있을 만한 힘을 소유한 한 남자. 그런 그를 보며 미소짓고 기뻐하고, 이 사람을 만나게 된 현실에 감사하는 건... 아무리 터프하고 엽기적이고 털털하더라도 결국은 한 여자일 수 밖에 없는 정시언. 어쩌면 나이라는 건 이 세상이 그어놓은 하나의 편견이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 사이에 나이라는 건 중요한 고민사항이 될 자격도 없었다. 단지 범죄자와 탐정이라는 기묘한 관계만이 우리를 들쑤셨을 뿐. 서로의 정체를 알고있으면서도 휴인이와 나는 사귄지 얼마 안되는 풋풋한 연인의 관계를 계속 이어오고 있었다. 나중에 이 시간이 깨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기억하고 싶었다. 내 인생에 있어서 단 하나의 행운이 될 지도 모를, 이 남자와.... 이 아이들을. 내 온 힘을 다해. 사랑하고 싶었다. “와아~ 잘 먹었어요, 형들.” “환영이형 요리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고기 굽는 것도 잘하네요.” “그거 욕이냐?” “그럴리가요. 근데 칭찬은 아니예요.” “설거지 도와줄 사람?” “비원아, 거기 접시 좀 줘 봐, 치우게.” 고기파티가 끝난 직후, 시끌벅적한 목재평상 위. ‘해커’와 ‘관계자 외 출입금지’ 놈들과 함께 즐거운 식사시간을 가진 후, 우리는 각자 역할분담을 하고 한 마리의 들소가 지나간 듯한 어지러운 평상 위를 치우기 시작했다. 역시 사내놈들이 많으니 먹은 뒤의 흔적이 아주 그냥 무슨 폭풍우가 휩쓸고 간 것 같다. 대부분의 놈들이 부엌안으로 설거지를 하러 들어갔고, 나는 평상위에 깔아놓은 신문지를 치우기 시작했다. “저기, 누나!!” 그 때 뒤에서 나를 부르는 앳된 목소리. “엥? 산이?” “예!! 누나, 저기요... ‘해커’ 이번 주 토요일에 공연해요!!” “그래? 잘해.” “아니, 그게 아니구요, 누나!! 형들하고 같이 오세요!!” “....내...내가?” “네!! 그리구요... 저기...” 갑자기 산이의 볼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그렇다. 나를 공연에 초대한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나의 뛰어난 직감으로 보자면 놈의 목적은.... “그런데요, 누나... 괜찮으시면요... 저기, 그 때 누나가 과외했다던 여자분 있잖아요!! 그 분도 오라고 초대 좀 해주시면 안될까요?“ 역시. 이 새끼. 이온이한테 빠져도 아주 그냥 제대로 빠졌구만. 근데 이온이랑 자주 마주치면 마주칠수록 내 입장은 점점 난감해진단 말이다. “아, 미안. 내가 그 때 말했었지? 나 걔 핸드폰 번호 모르거든.” “집주소도 몰라요?” “어, 걔가... 그러니까 과외할 때 걔가 나를 만나러 오는 식이어서... ..... 어떡하냐? 못 부르겠네....“ “....어쩔 수 없죠. 누나라도 꼭 오세요.” 꼭 와달라는 태도가 어찌 굉장히 애매하고 어정쩡했다. 산이 놈을 측은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 부엌에서 나머지 놈들이 우르르 쏟아져나왔다. “자, 그럼 우린 이제 가보겠습니다!!” “응, 다들 수고했어, 담에 봐!!!” “식사초대 해줘서 고마워요, 형들!!” “응응, 천만에!!” 고기는 환영이가 샀는데 생색은 휴인이가 다 내고있다. “공연준비 때문에 연습해야 돼서 바쁘거든요.” “그래, 잘 가라!!!” 인사를 주고받은 후, 해커 아이들은 녹슨 집의 대문을 열고 자기들의 보금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산이의 축쳐진 걸음걸이가 상당히 불쌍해보였다. 나는 산이의 뒷모습을 보다가 한숨을 쉬며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그 순간 담배연기가 내 눈을 간지럽혔고, 나는 우리의 골초 민서가 담배를 피워대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나 할 말이 있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또 다시 카리스마있는 톤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진지한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 모두가 그녀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지환영.” “.....응?” “우리 헤어지자.” 42. 청천벽력 순간. 우리 다섯 사람 주위를 급격하게 에워싸는 침묵의 공기. 분명히, 아까까지만 해도 생전 처음 환영이에게 애교를 피워대던 민서가 정확한 발음으로 환영이의 얼굴을 보며 말을 내뱉었다. 우리 헤어지자, 우리 헤어지자, 우리 헤어지자...... 급작스럽게 예기치않던 말을 들어버린 충격으로 인하여 내가 멍하니 그 말을 내 입 안에서 웅얼웅얼 반복하고 있을 때, 환영이가 덤덤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그녀에게 물었다. “.... 이유가.... 뭐야.” 그러나 떨리는 목소리. 비원이와 휴인이도 놀란 듯 그들의 행동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니, 민서가 휴인이 좋아하는 건 눈치채고 있었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환영이는 오직 민서만을 바라보며 열심히 살아오는 아이였다구. 생각을 바꿔 다시 한번만 환영이를 바라봐주란 말이다, 민서야!! “이유? 글쎄.” 말 끝을 흐리던 민서의 입술 끝에서 담배연기가 다시 피어올랐다. “나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걸 알았어.” “기회?” “사랑할 기회.” 민서의 말에 휴인이가 벌떡 일어서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휴인이는 환영이의 손짓에 자신의 행동을 멈추고 도로 평상에 앉았다. “백민서.” 언제나처럼 침착한 환영이의 목소리. 잠깐만, 이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거야? 민서는 말했다. 기회가 있다는 걸 알았다고... 사랑할 기회... 설마!!?? 설마?? 이 자식!!! 너 휴인이를 나에게서 빼앗아갈 참이냐??? 용납할 수 없다!! 휴인이와 나는 지금 잘 사귀고 있는 상태란 말이다!! “니가 하는 말, 나 지금은 듣고싶지 않아, 환영아. 그냥 놔 줘.” “너 아까 한 짓은 뭐야. 나한테” “헤어지기 전에.” “.......” “헤어지기 전에 이쁜 짓 한 번은 해줘야지. 안 그래?” “...... 너....” “뭐, 정시언이랑 강휴인이랑 닭살 떠는 거 보니까 나도 한번쯤은 애교떨어보고 싶었어.” 환영이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민서야, 정신 차려.” “나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 “.......” “어색하게 지내지는 말자, 앞으로. 그게 내 부탁인데, 들어주겠지? 헤어지더라도 매일 얼굴 마주쳐야 되는 입장이잖아, 우리는.“ 민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환영이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빼물었다. 분위기에 맞지 않는 말인 건 알지만, 순간 환영이의 모습이 다르게 보였다. 내가 알고있던 환영이의 모습이 아니라, 내가 이 아이들을 만나기 전 이온이의 파파라치용 카메라를 통해서 본 모습. 싸움을 하기 전 담배를 빼어물며 일에 대한 보수를 받던 환영이의 모습. 지금 환영이의 모습은 바로 그 때와 흡사했다. 무자비한 싸움꾼의 바로 그 모습 말이다. “민서 너 너무하잖아!! 환영이가 불쌍해!!” 그 때, 주제를 모르고 나서는 우리의 휴인이. 저 새끼,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나서기만 하면 되는 줄 아나봐. “우리 둘 문제야, 상관하지마.” “헤어지기 전이라서 잘해줬다구? 웃기지마. 역겨워.” 휴인이의 말투와 민서의 표정 사이의 미묘한 대립. 안되겠다, 이것들 또 크게 싸우겠어. 가만보면 민서랑 휴인이는 참 자주 싸운단 말이야. 민서도 좀... 휴인이 좋아하면서 이런 다툼이 생길 것 같으면 성질을 죽여야지. “자기 감정에 솔직한 게 낫지. 헤어지기 전이라서 일부러 잘해준거라면 넌 환영이 마음 이용한거야. 상대방은 진심인데 넌 그 마음 가지고 논거라구. 끝에가면 이렇게 잔인한 소리 할거면서. 끝내는 버릴 거면서!!“ 환영이의 저 말이 왠지 나를 향해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누나, 우릴 진심으로 대해줘, 누나 우릴 버리지마, 잔인해지지 말아줘. 꼭 휴인이가 나를 향해 그렇게 소리치는 것만 같아서, 난 귀를 틀어막고 싶어졌다. “자기 마음에... 솔직하라고?” 민서는 휴인이가 한 말을 다시 한 번 빈정대듯 반복했다. 그녀의 입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기뻐서 짓는 듯한 웃음은 아니었다. 그건 세상에서 가장 믿었던 것에 배신당한 듯한 허탈한 미소였다. “내가 도대체 누구한테 이딴 이야기를 듣는 건지 내 귀를 믿을 수가 없네.” 이를 가는 듯한 말투. 민서는 상당히 화가 난 것 같았다. “돌이켜봐, 제일 가식적인 인물이 누구였지???” 왜 저 말에 내가 찔리냐구. 아니야, 그래도 난 너희들을 진심으로 대하려고 노력했고, 지금도 진심으로 대하고 있다구. 끝에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는 모르지만, 너희들을 버려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나, 나, 지금은.... “백민서, 너 정말.” “헤어지자는 한 마디 한 건데 왜 이렇게 유난인지 나 정말 알 수가 없네.” “........” “강휴인. 어차피 환영이랑 나랑 사귀는데 제일 큰 역할을 한 건 바로 너야. 서로에 대해 이성적인 감정 거의 없었던 환영이랑 나랑 사귀는 데 있어서, 제일 크게 기여한 건 바로 너라구. 지금 그것 때문에 이렇게 발끈하나본데, 이젠 내가 싫다구. 나 환영이한테 아무 감정 없어. 니 논리에 따르자면 아무 감정 없는 애 계속 사귀는 것보다는 이쯤에서 끝내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민서랑 환영이를 서로 소개시켜 준 건 바로 휴인이였나보다. 민서 마음도 이해가 간다. 정작 본인은 얼마나 속이 탔을까. 휴인이가 좋아 죽겠는데, 저 어린놈은 실실 웃으면서 환영이를 소개해줬겠지. 그리고 외쳤을 것이다. [사,겨.라!! 사,겨.라!!] 크으,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만. “백민서!!!!” 휴인이는 크게 소리쳤고, 나는 나설 수 없는 분위기에 겁먹고 조용히 구석에 쳐박혀있었다. 그러나 민서는 휴인이의 고함소리에 전혀 겁먹지 않은 듯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좋아, 그럼 여기까지 온 거 내가 진짜로 한 번 솔직해져 볼게.”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 환영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잖아.” “나한테도 기회가 있다는 걸 알았다고 했지.” “민서야.” “한 번만 말할 거니까 다들 잘들어.” “야.” “한 번 해보려구, 내가 드디어 알 게 됐네.” “민서야, 제발.” “왜, 내가 하면 안돼?” “백민서!!!!” “커밍아웃.” .................... ............................... ........ 잠깐만.... 나 지금 잘못 들은 거 같은데... 뭐? ...커...커밍아웃.... 그.... 그 의미라 함은.......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성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일이 아니던가!!!!! 그, 그러니까.... 그게.... 민서가.... 여자를... 좋아한단 말? 그럼... 그게... 그러니까... 민서가 좋아한 게.... 휴인이가 아니라, 나....란 말이네. 나... 정시언이라는... 말이네... 아니, 내가 여중 여고를 나오며 여자애들에게 고백받은 게 총 일곱 번이긴 하다만. 그래도 나는... 나는 세상의 일반적 지식에 따라 여자로서 남자를 사랑하거늘. 내 머릿속이 전쟁터를 방불케 할만큼 난잡했을 때,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고 민서는 기어이 나에게 치명적인 한마디를 던졌다. “나 어때, 정시언?” 그리고 충격을 추스르며 내가 할 수 있었던 말은... 단 한마디. “저기, 나는.... 여자 사랑하는 취미... 없다.” 그 상황이 닥치니 뭐 ‘민서야 미안하다’, ‘너 왜 이러니’ 이런 말들은 다 제껴두고 여자를 사랑하는 취미없다, 라는 말이 제일 먼저 튀어나와버렸다. 내가 동성애자들을 색안경 끼고 보는 건 아니란다, 민서야. 그저, 그냥 난 좀 빼다오. 순식간에 우리가 머물고 있던 평상위의 상황은 그야말로 초토화. 결국 그 분위기를 참지 못한 환영이는 밖으로 뛰어나가 버렸고, 나 또한 이 상황에서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도리에 어긋난다고 느꼈다. 그래, 내가 자리를 피하면 비원이와 휴인이가 알아서 민서의 성정체성에 대하여 같이 토론을 해줄 것이다. 민서를 혼란스럽게 하는 환영이와 나는 자리를 피하는 게 맞다. “환영이는... 내가 따라가볼게.” 나는 가까스로 한 마디를 내뱉으며 이미 대문밖으로 나가버린 환영이를 찾기위해 발을 내딛었다. 43. 파멸 (작가시점) 환영이 시언을 유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리를 피해주었다. 때마침 시언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환영을 따라 밖으로 나가자마자 휴인은 무서운 속도로 민서에게 달려가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미친새끼, 일 망치려고 작정했어????????” 침착하려 했으나 휴인의 입에서는 큰 소리가 터져나왔다. 민서는 굳이 휴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애쓰지 않았다. 그는 모든 상황을 예상한 듯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커밍아웃? 지랄한다, 놀고있네.” “처음부터 니 잘못 아니야? 그러게 지환영이랑 나랑 사귄다는 개뻥을 왜 쳐, 새끼야!!!” “내가 나를 위해 구라깠어??? 상황판단을 좀 해 봐, 씨발!!!” 휴인의 입에서 그렇게 많은 욕이 나온다는 것은 그가 정말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는 사실을 반영해주는 것이었다. 비원은 언제나처럼 팔짱을 낀 채 그들의 행동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상황판단 너 혼자 하지마, 들키면 다 죽는거야, 알아? 니가 남자라는 거 숨기려고 다들 발악하고 있으니까 너 혼자 튀지 말란말이야, 이 개새끼야.“ 민서의 눈빛이 변했다. 그는 거칠게 자신의 멱살을 잡고있는 휴인을 온 힘을 다해 밀쳐냈다. “봐, 넌 언제나 그래, 또 가식적인 짓거리!!!!” “백민서!!!!” “왜 모든 걸 니가 가지지???” “..... 뭐?” “희생하는 척 하면서 모든 걸 다 가지는 건 언제나 너야!!!! 내가 너희들한테 바란 게 있었어??? 정시언 하나만 원했어!!! 내가 정시언 가질 수 있는 방법이 이거 단 하나밖에 더 있어???“ “지금 여자 밝힐 때가 아니야, 백민서!!! 상황파악을 좀 해봐!!!!!!” “나, 내가 남자라고 지껄인 거 아니다. 병신돼도 내가 병신되는거야. 신경꺼.” 휴인은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민서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었다. 재벌 아들로 부족함 없이 살아왔던 민서는 자신의 입장에서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으면 무조건 항의하고 소리쳤다. 그리고, 모든 상황에서 자신의 판단이 옳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의 안하무인인 자세를 다른이들이 비판하기는 쉽지 않았다. 왜냐면, 민서는 원래 그렇게 살아온 존재이기 때문이다. 환경이 사람을 얼마나 바꾸어놓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휴인이다. 휴인은 마음을 다잡고 부드러운 말투로 민서에게 말했다. “민서야... 지금껏 쌓아왔던 백민서라는 여자의 이미지가 한번에 파탄난거야. 내가 걱정하는 것도 당연하잖아. 우리가 지금껏 쌓아온 시간과 노력이 얼만데. 내 입장도 좀 이해해주면 안되겠냐?“ “....정시언 사랑하냐?” “백민서,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야,” “난 니가 정시언을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이 일에 관해서만큼은 니가 맘에 안들어. 니가 정시언을 사랑한다면, 넌 어쩔 수 없는 척 하면서 니가 원하는 걸 가진 욕심쟁이 새끼가 되는 거고, 니가 정시언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넌 정말 말뿐인 가식적인 새끼가 되는거야,“ 민서는 현재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상태였다. 휴인은 민서를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을 기어이 참고있었다. 사내놈들의 싸움은 곧 상처를 동반하는 것이다. 그 상처가 정시언에게라도 들키게 되는 날은 끝장이다. 휴인은 더 이상의 변명과 핑계거리를 만들어대고 싶지 않았다. 그건 굉장히 귀찮은 일이었으며, 머리 아픈 일이었다. “난 두렵지 않아. 진실? 다 까발려져도 이제 난 상관없어.” 휴인의 민서의 말에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새로운 천국을 만들기 위해 모인 네 사람이었다. 그 이유 하나만을 위해 함께 달려왔던 민서가, 이제 진실따위 상관없다고 말한다. 휴인은 시언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토록 짧은 기간에 어떻게 민서의 마음을 이렇게 다 빼앗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강철같은 자신의 마음을 녹여 사랑의 감정에 빠지게 만들었는지. 자신의 매력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여자는 그 무엇보다도 찬란히 빛난다. 그리고, 시언은 그렇게 빛나는 사람이었다. “요즘 너 하는 짓거리 이제 나도 질렸어. 요새 우리가 얼마나 더럽게 느껴지는 줄 알아? 천국을 만들자고 했지. 누구나 잘 살 수 있는, 누구나 웃을 수 있는. 씨발, 그런게 그렇게 우리가 만들어갈 새로운 세상이 이렇게 더러운 짓을 동반해서야 되겠냐? 이제 난 아무 미련없다. 경찰들, 검사들, 세상 사람들 다 따돌리고 우리끼리 뭉쳐서 얻은 결과가 이 따위냐? 됐어, 진실 그 따위꺼 개나 주라지. 내가 먼저 나서서 사람들 앞에 나서서 진실 던져주지는 않겠지만 언제든 까발려지면 그냥 받아들이겠어. 죽으라면 죽겠다구!!!!!“ 휴인은 허탈한 한숨만이 나올 뿐이었다. 민서는 죽음을 피해 빠져나온 후 그들의 일원이 되었다. 그런 그가, 이제 그냥 죽겠다 한다. 그 때였다. 비원이 휴인과 민서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186의 큰 키를 자랑하는 비원은 망설임없이 민서의 뺨을 한 대 내리쳤다. 짝, 하고 허공을 가르는 마찰음. 민서는 돌아가버린 고개를 바로하며 비원을 올려다보았다. 아주 반항적인 눈빛으로. “죽겠다는 소리 함부로 하지마라.” “........” “이미 니 죄는 내가 다 뒤집어쓰기로 결정났다. 니가 정시언 좋아하든 말든 그건 나랑 상관없는 일이다. 근데 우리가 하는 일 그딴식으로 생각하지 말고, 니 목숨도 그 따위로 하찮게 여기지마. 넌 내가 지키기로 했다. 알겠어? 죽어도 내가 죽어. 니 기억 속에 똑바로 박아놔. 진실 따위 왜곡하고 그냥 이 거짓이 진실이다, 생각하고 있으란 말이다. 내가 재벌 아들이다. 재벌 아들은 백민서가 아니고 신비원이야. 나중에 재벌 아들로 분류되서 그 죽음의 길로 끌려들어가는 건. 니가 아니라 나란 말이다.“ 비원은 짐승이 으르렁대듯 중얼거렸다. 민서는 빨갛게 부풀어오른 자신의 왼쪽뺨을 쓰윽 만지고는 비원을 노려보았다. “좆같애.” “.....” “니가 왜 이러는 지는 모르지만, 니가 이런다고 내가 고마워할 것 같아?” “......” “오히려 짜증나. 내가 자기 몸 하나 못 지키는 몹쓸새끼 된 것 같아서. 괜히 연약해서 보호받는 것 같아서 짜증난다구, 병신아.“ “......” "좆같애. 우리도, 운명도, 인생도.“ 민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더니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거칠게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휴인은 평상 위에 앉으며 비원을 향해 말했다. “왜 때리고 그래?” “말로 해서 안들으면 패야지.” “비원아.” “괜찮아, 상처는 안남아, 세게 안때렸어.” “그 문제가 아니잖아.” “걱정은 하지마라. 저 새끼, 말만 저렇게 하지, 진짜로 이 일 그만둘 생각은 없어. 원래 욱하면 지 되는대로 말 내뱉는 새끼잖냐. 지금 정시언한테 살짝 미쳐서 그런 것 뿐이야. 궁시런대면서도 내일이면 또 지 정체 숨기면서 돈 벌거다.“ 휴인은 아무렇지 않은 듯 기지개 펴는 비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넌 대체... 뭐냐.” “뭐가.” “환영이나 민서나, 둘 다 내가 이 일이 끌어들인 애들이지만, 넌 제 발로 여기 끼워달라고 찾아왔어. 거기다가 민서의 역할을 너한테 달라고 우겼지. 어쩌면 주동자보다 더 위험한 역할을, 넌 생각조차 전혀 안하고 받아들였어. 넌 항상그래. 모든 게 비밀이지.“ “알려줬잖아, 난 어릴적부터 엄마랑 사창가에서 살았다고.” “유리누나 이야기 말고. 니가 여기 들어온 결정적 사건, 있는거지?” “...... 없어, 그딴 거.” “비원아, 난 그래. 너에 대한 일을 다 알아야 내가 제대로” “그냥.” “......” “그냥 나처럼 진흙탕에서 굴러온 새끼가, 다른 사람도 나처럼 되는 꼴 보기 싫어서. 그래서 끼워달라고 요청한 것 뿐이야. 다른 이유 없다.“ “신비원, 너 자꾸 그렇게 너를 숨기면.” “니가 주동자인 건 알지만, 강휴인. 리더인 척 하지마라. 난 이 일에 협조하기로 한 거지, 복종하기로 한 게 아니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왔고, 비원은 담배를 한 개비 꺼내물었다. 휴인도 지친듯 더 이상 그에게 말을 걸지 않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바람이 시리게 그들의 몸 속을 파고들었다. 밤이, 아픈 풍경만을 지닌 채 저물어갔다. 44. 동물, 새 그리고 보석 혼란스러운 집 문턱을 넘어서 밖에 나가자마자 어렵지 않게 환영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환영이는 다른 집 담벼락에 기댄 채 주저앉아 있었다. 환영이의 무기력한 모습은 처음이다. 나는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의 옆으로 다가섰다. 환영이는 그 어떤 미동도 없이 하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훔쳐보다가 나도 그 옆에 주저앉아 담벼락에 기댔다. 근데 이 놈, 왜 아는 척도 안하는겨. 임마, 민서가 날 좋아하는 건 내 탓이 아니란 말이다!! 난 민서의 시선을 차지해 줄 제물이 필요하다구, 나두 곤란한 처지한 말야. 이온이를 민서에게 소개시켜줄까보다. 암, 나보다는 이온이가 훨 낫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이온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일단 나부터 좀 살고보자. 난 지금 휴인이랑 사귀는 중이고, 경찰들의 스파이야. 머리아픈 일에 휘말릴 여유따위는 더 이상 없다구. 솔직히 나는 사람들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바이고, 그렇게 때문에 민서의 커밍아웃을 접하고도 그 애를 색안경 끼고 보지는 않겠지만... 하지만, 앞으로 민서와는 거리를 두게 될 것 같다. 불길한 징조다. 일이 너무 커지고 있다. 난 이 아이들의 인생에 점점 절대적인 존재로서 자리잡고 있었다. 나의 의지나 바람을 넘어, 이건 심각한 상태에 이르고 있다. 나는 환영이에게 나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헛기침을 해댔다. “으흠, 흠... 에헴....” 흡사 조선시대 영감님 같은 헛기침 소리였지만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게 중요한 것은 오직 지금 매우 상심하고 있을 환영이를 위로하는 것이었다. “누나.....” 환영이는 시선을 여전히 하늘에 고정한 채 중얼거렸다. “민서 어떻게 생각해요?” 이건 또 웬 소린가, 뜬금없이.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환영이를 보았으나, 그는 꼭 대답을 바란다는 듯 약간의 미소를 머금고 나를 마주보았다. “말... 했잖아, 나는... 이성애자거든.” 나의 답에 환영이는 피식 웃었던 걸로 기억된다. 어쩌면 비웃음일지도 모를... 그런 미소. “매력이 없어요, 우리 민서?” “매력은 많지. 뭐랄까, 남성스러운 매력이 있는 것 같다고 오늘 좀 느끼긴 했는데 동성애자일 줄은 몰랐네. 자기한테 남성적인 면이 좀 있어서 여자들한테 끌리는 건가봐.“ 조심스러운 내 말에 환영이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 상심하지마, 환영아... 니 잘못이 아니야...” “누나 잘못도 아니예요.” “응?” “누나도 잘못한 거 없으니까 내 앞에서 그렇게 죄지은 것 같은 표정 하지 말란 소리예요.“ 지금의 내 심정을 정확히 읽어낸 환영이. 난 그 애의 한마디에 그제껏 걱정해왔던 것들이 모두 풀리는 것 같았다. “민서는 너무 큰 애였어요. 내 품에 품기는 부족했죠.” “.......” “짐승으로 따지자면 사자같은 애죠. 새로 치면 독수리 같은 애고. 보석으로 따지면 다이아몬드 정도 되려나? 화려하고, 강하고, 크고, 빛나죠.“ “......” “어차피 처음부터 날 좋아하지 않던 애니까, 누나가 걱정 안해도 돼요. 민서 대문에 내가 누나 미워하면 진짜 몹쓸 새끼 되는거죠. 난 우리애들 좋아하는 것처럼 누나도 좋아하고, 우리애들 믿는 것처럼 누나도 믿으니까 걱정말아요.“ 눈을 감아버렸다. 활활 타버릴 것 같았다. 그 젊음의 열기에, 강렬한 믿음의 불꽃에, 피어나는 사랑과 우정의 감정에. 경찰의 스파이,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일원. 두 가지 역할 사이에서 미친듯이 흔들리는 내 마음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천천히 눈을떴다. 환영이는 여전히 하늘을 보고있었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듯 그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고.... 또 촉촉이 젖어있었다. “환영아... 힘들면... 내가 자리 피해줄게.” 솔직히 집안으로 들어가고픈 생각은 없었다. 다시 들어갔다가 민서랑 마주치게 되면 그건 어색함의 결정체다. 그냥 눈 딱 감고 집 안으로 들어가서 내 방에 틀어박혀야겠다. 오늘은, 잠을 한숨도 못 잘 것 같다. 생각할 것이 많다. 내가 이 아이들의 인생에 끼어든 게,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찬찬히 되짚어나갈 필요가 있었다. 검사들의 예상처럼, 난 원치않게 아이들의 약점이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그들을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 애들은 점점 위험에 노출 되어갔다. 나는 한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으나, 내 옆에 있던 환영이가 강한 힘으로 내 팔목을 잡고 나를 다시 자리에 주저앉혔다. “화.... 환영아.,.?” “혼자 있기 싫어요. 힘들 때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다 거짓말쟁이야. 이럴 때는 더 외롭게 만드는 게 고문이예요. 같이 있어줘요, 누나.“ “눈이... 촉촉해.... 울고싶으면, 울어도 돼, 환영아.” “아니, 민서 때문에 힘든 게 아니예요.” 환영이는 흡사 술에 굉장히 취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니, 현실에 지친 모습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힘없이 무너진 사람처럼, 그는 굉장히 지쳐보였다. 실연에 힘들어하는 남자의 상실감과 좌절감이 깃든 표정과는 미묘하게 다른 것이 한 눈에 느껴졌다. 나는 그를 혼자 두지 않겠다는 표시로 아예 양반다리를 한 채 바닥에 퍼질러 앉았고, 환영이는 넋두리 하듯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가 의식하고 있는 청자는 꼭 내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그저 마음 속의 말을 모두 꺼내놓으려는 듯 보였다. “민서가 사자고, 독수리고, 다이아몬드면요, 누나... 휴인이는 또 다르죠. 그 애는 표범이예요. 더 야생적이고, 목표는 놓치지 않죠. 그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아요. 어리고 철 없게만 보여도.... 그 애는 그래요. 새로 따지면요, 매요. 그것도 절대 길들여지지 않는, 길들여질 수 없는. 보석으로 따지면 진주죠. 아주 먼 밑바닥, 저 깊은 속에서부터 온갖 고생 다 하고, 모든 고통 다 겪고서 오랜시간을 거쳐 탄생하는 진주요.“ 나는 도무지 환영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민서랑 휴인이, 그 둘은 사사건건 대립할 수 밖에 없어요. 그 속에서 비원이는 항상 조용하게 지켜보는 역할이죠. 또 동물로 따져보면, 악어. 한 번 마음에 안 들면 강하게 물리치지만 대부분은 그저 지켜보죠. 새로 따지면, 학 같은 거. 되게 고고하고 신비스러운 거. 보석으로 따지면 루비나 사파이어? 개성 강한 그런 보석 있잖아요.“ 환영이는 초점없는 눈빛으로 말을 이었고, 나는 용기를 내 그에게 물었다. “그럼 환영아.... 너는, 너는 어떤데?” 내 질문을 예상한 듯 환영이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쥐요, 그리고 참새,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맹이. 그렇게 하찮은 거요.” “........ 환영아......” “난 전혀 강하지 않아요. 차분하고 침착하고 모두를 챙겨주는 것 같아도 아직 난 약해요.... 누나, 난요......“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환영이를 감싸안았다. 그가 점점 나에게 기대어왔다. “괜찮아, 환영아.... 괜찮아, 더 이상 말 안해도 돼.” 나 또한 종종 잊었다. 다른 아이들의 풍경처럼 조용하고 부드러운 역할을 하던 환영이도 고작 열 여덟 살 먹은 사내아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누나.... 나는.... 세상이... 너무 두려워요....” 나는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오늘도 열심히 일했을 환영이의 몸에 새겨진 멍자국들을 제대로 바라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볼 때 환영이는 아름다운 사슴이었고,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였고, 아픔을 몸 안에 새긴 호박이었다. 45. 너 자신을 알라 “뭐야? 둘이서 바람났나봐.” 내가 환영이를 안고 위로해주고 있을 때 휴인이가 집 밖으로 쪼르르 달려나왔다. “아, 휴인아....” “환영이가 이뻐, 내가 이뻐?” “야, 너 그게 지금 환영이 앞에서 할 소리냐?” 내 핀잔에 곧 휴인이는 입술을 댓발 내밀었다. 환영이는 휴인이가 나오자 내 품에서 빠져나와 촉촉해진 눈을 손으로 문질렀다. 휴인이도, 나도 환영이가 울고있는 걸 알았지만 애써 모른 척 했다. 그리고 휴인이는 어색함을 없애려는 듯 나에게 한마디 건넸다. “나 민서랑 또 싸웠어!!” “아, 왜!! 이것들은 허구한 날 싸움질이야!!” “그 기지배가 화를 돋구잖어.” “야....” “누나, 나 버리고 민서한테 가면 안된다.” “미친놈, 작작 좀 해라.” 휴인이를 구박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쫙 펴는 나. “들어가자, 아가들아. 다 잊고, 내일부터 새로 시작하자.” 그리하여, 나는 새들이 지저귀는 이 아침에 눈을 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밤새 눈을 감은 적이 없었다. 민서의 게릴라 고백은 중고등학생 때 내가 친구라는 기지배들한테 들었던 사귀자는 이야기보다 더 큰 충격을 동반했기에. 쉴 새 없이 생각했다. 나는, 이 아이들을 만나지 않는 게 더 나았을까. 도움 따윈 되지도 않고 매일 계속 폐만 끼치고 있다. 어제 휴인이랑 환영이한테 모든 걸 다 잊고 새로 시작하자고 한 건 바로 난데, 내가 이러면 안되는건데. “뻐꾹, 뻐꾹, 뻐꾸기가 울어요, 밥 드십쇼, 누님!!” 그 순간, 내 방 앞에서 들려오는 휴인이의 목소리. 방 문을 잠궈놔서 무턱대고 들어오진 못하고 소리만 쳐대고 있다. 도대체 뻐꾸기와 아침밥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 진 모르겠지만. 씻고 밖으로 나갔을 때, 다시 본래의 모습을 찾은 듯 부엌과 평상 사이를 오가며 반찬을 옮기는 환영이가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이 반가워 나도 한마디 건넸다. “아기들아!! 하이루 방가방가!!” 이제는 아무도 쓰지않는 세월에 뒤쳐진 통신체 인사에 답해준 건 “오케이!! 하이루 방가방가!!” 똑같이 받아쳐주는 휴인이와, 아무 말 없이 웃어주는 환영이 뿐이었다. 민서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무시했다. 내 자신이 어색해서 민서한테 거리를 둘까봐 걱정했는데... 저 기지배가 먼저 나를 아예 무시해버린다. “너 귀엽지도 않은 그딴 말투 당장 못 때려치우냐?” 비원이는 언제나처럼 시비를 걸며 내 인사에 답했다. “아따, 너무 그러지마라. 나 오늘은 너 따라다니는 거 알지? 잘 부탁한다.” “씨발, 나는 다른 새끼들이랑은 달리 제대로 된 직장인데 꼭 너를 달고 가야겠냐?” “야, 길 가는 사람들 붙잡고 물어봐. 호스트바가 제대로 된 직장이냐고.” 태연스럽게 비원이와 말을 주고받으며 나는 민서의 눈치를 살폈다. 식사 내내 그녀는 그 누구와도 말을 하지않았다. 휴인이랑은 싸웠을테고, 환영이랑은 어색할테고, 비원이는 워낙 남 일에 상관안하는 새끼고. 뭐, 원래 민서가 수다스런 아이는 아니었지만 괜히 그녀의 의기소침한 모습에 신경이 쓰였다. 나는 고민을 하다가 눈 딱 감고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미, 민서야!! 너는 자, 잘 잤냐?” 바보 정시언!! 말을 왜 더듬어, 너 지금 수줍음 타냐? 내 말에 민서는 모자를 푹 눌러쓰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 먼저 나가볼게.” 라는 말을 남기며, 나 또 무시당한건가? 그녀의 표정을 못 본 관계로 그녀가 쑥스러워 하는건지, 기분이 나쁜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모자 좀 벗지. 눈, 되게 이쁘던데. “비원아.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되냐?” 아무 말 않고 큰 보폭을 유지하며 나를 앞서 걷는 신비원씨. “그래, 씹어라, 씹어. 너랑 민서는 아주 그냥 내 말을 잘근잘근 꿀떡꿀떡 잘 씹어드시더라. 맛있냐, 새끼야?“ “.........” “씨발, 아, 근데 왜 호스트바를 이 이른 아침에 가야하는거냐!! 거긴 밤의 유흥업소가 아니더냐!!!?“ “아침청소.” “그것도 니가 해?” “난 밤엔 일 별로 없어. 골드회원만 받거든.” “에에, 꼴에, 니가 뭐라고 너한테만 특혜를 줘?” 비웃는 듯 말했지만 알고있다. 비원이처럼 잘생긴 애는 이리저리 아무데나 불려다닐 군번이 아니하는 거. 전에 세탁소 아줌마를 악의 구렁텅이에서 빼내기 위해 놈이 일하는 호스트바 앞에 가서 정확히 목격했다. 호스트바에서 일하는 놈들이라 모두 낯짝은 곱상하고 반반했지만 그 중에서도 신비원은 으뜸가는 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중에서도 굳이 제일 잘생긴 놈들 꼽으라면 바로 신비원이니까. “그래서 나는 손님이 별로 없어, 골드회원이 나 예약한 날만 받아주지. 마담 형이 예약 전날 말해주거든. 그 날은 새벽까지 근무지. 새벽까지 술 쳐먹고, 부잣집 마누라님들 말상대 해주고. 힘든 건 아니지만 문제는 있지. 선수로 안 뛰면 돈이 안 벌리거든. 그래도 내 한 몸 바쳐 아줌마들 쾌락 채워주기는 구역질 나고. 그래서 다른 새끼들이랑은 달리 아침부터 출근한다. 아침부터 청소하고 마담형 잔심부름 정도 해줘야 밥벌이 할 수 있을만큼 돈이 들어오거든.“ 참, 이 놈도 힘들게 산다. 손님 받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놈은 거의 하루 24시간을 호스트바 안에서 보낼만큼 장시간 혹사당하고 있었다. 휴인이는 자존심 구기며 일하고, 환영이는 상처를 남기며 일하고, 민서는 느끼한 성폭행범들의 손길을 범죄와 맞바꾸며 일하고, 비원이는 마음에도 없는 이들에게 웃어주며 장시간 혹사당하며 일한다. “오늘은... 손님 있어?” “어.” 무심하게 대답하는 놈. “왜 하필 너는.... 이런 일 하냐.” “.......” “그렇잖아, 엄마 뻘 되는 아줌마들한테.” “죄를 갚으려고.” “응?” “그 사람이 겪었던 아픔, 나도 좀 겪어보려고. 썅, 그래봤자 내가 몸 사리는 이상 그 아픔 100분의 1도 못 느끼겠지만.“ 순간, 굉장히 슬퍼진 그의 눈. 지금, 누구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무뚝뚝한 신비원이, 저렇게 슬픈 눈을 하고 중얼거리는 ‘그 사람’은 누굴까. 어떤 사람일까. “참, 나 아까 물어보려고 했던 거 물어봐도 되냐?” 화제를 돌리기위해 과도하게 큰 목소리로 놈에게 소리쳤다. 그는 맘대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사람을 동물로, 새로, 보석으로 표현하면... 난 뭘까, 비원아?” 나는 어제 환영이와 주고받은 대화 중 끊임없이 날 괴롭혔던 질문을 밖으로 내놓았다. 대단한 아이들에 비하여 난 너무 보잘 것 없는 것들로 채워지지 않을까. 객관적인 답을 듣기위해 나는 그나마 제대로 된 상식을 가진 비원이에게 물었고, 그는 생뚱맞은 질문에 당황한 듯 나를 돌아보았다. 46. 깨진 구슬 “뭐?” “아니, 그냥!! 궁금해서!! 말 그대로야!! 내가 동물이면 뭘 거 같애?” 휴인이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그 놈은 무조건 좋은 걸로 갖다 붙일거고, 그렇다고 지금 한창 자신을 비하하고 있는 환영이에게 이런 걸 물어볼 수도 없었고, 민서는 내가 이런 걸 물어보면 바로 무시할 게 뻔했다. 결국 가장 적당한 질문 상대는 비원이였다. 밤새 생각해보았지만 결론 지을 수 없었다. 난 도대체 무엇에 비유될 수 있는 인간일까? “곰.” 비원이 놈은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리며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왜? 내가 그렇게 힘세고 야성적인가?” “곰이 미련하잖아, 그런 말 못들어봤냐? [미련곰탱이].” ...... 대갈빡을 바위에다 쌔려박아도 시원찮을 놈. “그, 그럼 새는!! 새로 따지면 난 뭘 거 같애?” “닭.” “..... 왜?” “닭 기억력이 3초잖어.” 우리 친할머니가 키우시던 닭들이 문득 떠올랐다. 초등학생 때 난 방학을 맞아 할머니댁에 놀러갔고, 할머니는 이온이와 나에게 고구마와 옥수수를 쪄주신다며 부엌에 계셨었다. 그 때, 할머니댁에는 무지하게 큰 똥개 메리가 있었는데, 놈은 심심했는지 마당에서 모이를 쪼아먹던 닭 중 한 마리에게 달려들었다. 이온이와 나는 재밌는 구경거리에 일부러 소리쳐 할머니를 부르지 않고 그 장면을 지켜보았더랬다. 닭은 메리를 피해 달렸다. 근데 그 빌어먹을 닭새끼는 3초후에 지가 왜 뛰는지 잊어버리고 멈춰버린 것이다!! 결국 그 날 할머니의 닭 한 마리는 메리의 뱃 속으로 고스란히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던 이온이는 어린나이에도 이렇게 중얼댔다. “저 닭 완전 병신.” 비원이의 말에 그 닭과 내가 겹쳐지는 듯한 환상이 눈 앞에 어른거렸다. 썅, 죽고싶은 맘이 간절하구나. “...... 그, 그럼 보, 보석은?” 그래, 이 질문에 희망을 걸자. 보석이잖아, 그래도 보석이잖아. “......... 구슬.” 비원이는 잠시 멈칫거리며 대답을 했고, 나는 흥분하여 소리쳤다. “그래!!! 구슬 좋지!! 무슨 구슬? 금구슬? 은구슬? 옥구슬?” “깨진 구슬. 존나 쓰잘데기 없는거.” 망할새끼, 너 내일 세상 빛 못보면 내가 야산에 파묻은 줄 알아라. 나는 쉴 새 없이 궁시렁 궁시렁 대며 놈의 뒤를 따랐다. 메리같은 새끼. 아무리 그래도 내가 지보다 네 살이나 많은데 좀 좋게 말해주면 덧나냐? “여기다. 다 왔어.” 도착했다, 호스트바 <로맨스>. “다 왔음 들어가라?” 아까의 곰, 닭, 깨진 구슬에 빈정 제대로 상한 나는 비원이에게 가시돋친 듯한 말을 내뱉었고, 놈은 나를 돌아보더니 피식 웃어보였다. 아, 그러고보니 비원이 웃는 거, 처음 본다. “휴인인 재밌겠다, 여자친구가 조금만 놀려도 승질내니 괴롭힐 맛 나겠구만.” “아, 내가 뭐!!” “좋아. 대답해줄게.” “뭘!! 빨리 일하러 들어가기나 해!!” “널 보면 생각나는 동물, 여우.” 이건 또 뭔 소리래? 차라리 곰이 낫지, 썅!! “내가 그렇게 약았냐??” “매력있단 소리다. 강휴인 사로잡기가 쉬운 줄 아냐? 거기다 여자인데도 불구하고 백민서도 너한테 빠졌지. 난 그 새끼들을 아무리 이해하려고 애써봐도 니가 왜 매력있는지느 모르겠지만. 이건 뭐, 애새끼들이 단체로 눈이 삐었나.“ “아, 내, 내가 뭐!!” 말을 그렇게 내뱉었지만 내 마음 속으로 스물스물 올라오는 만족감. “생각나는 새는, 오리.” “오.... 오리?” “어, 그냥 오리말고, 미운오리새끼.” “야, 어째 아까보다도 더 욕하는 걸로 들린다? 그냥 닭 할란다.” “니가 물어본거니까 그냥 들어.” 비원이는 불평하는 내 머리를 가볍게 툭 치더니 말을 이었다. “생각을 해 봐, 미운 오리 새끼는 결국 백조야. 힘든 시기 이겨내고 결국은 그렇게 빛나는 존재로 변하지.“ 아, 백조!! 오, 백조!! 나는 감동받은 눈으로 비원이를 바라보았다. “근데 또 내 눈에는 그것만 보인다. 너, 그거 알지? 백조 밖에서는 엄청 우아해보여도 물 속에서는 헤엄치느라 파닥파닥 거리는 거. 솔직히 내 눈에도 너 우왕좌왕, 휘청휘청 대는 것만 보여.“ ....... 뒤에 저런 말들만 안 붙이면 내가 참 이뻐해줄텐데. “그리고 보석으로 보자면.....” 이번엔 뭘까? 백금? 에메랄드? 자수정? “여전히 깨진 구슬.” 엥? 나는 의아한 눈빛을 한 채 비원이를 바라보았고, 그는 웃으며 뒤돌아서려 했다. “야, 뭐야!! 이유를 말해봐!! 왜!! 왜 그냥 구슬도 아니고 깨진 구슬인데!!? 너 내가 그리 우습냐? 너 앞에 여우니 백조니 말한 것도 나 놀리려고 일부러 그런거지? 너 진짜!!“ “얼마나 소중한 건지 알아?” “뭐?” “난 요새도 가끔 봐. 구슬치기 하는 꼬마애들. 우리 동네가 가난해서 그런가, 애들이 그런 놀이만 하더라.“ “말 돌리지 마.” “구슬치기 하다가 구슬이 깨지면, 애들은 그거 안 버리더라.” “..........응?” “다시는 못 쓰는 거 알면서도, 가치 없는 거 알면서도, 필요없는 거 알면서도... 소중히 휴지에 싸서 집에 들고가.“ 스파이 정시언, 아이들에게 불필요한 정시언, 그러나..... “니가 나한테... 아니, 니가 우리한테 그런 존재야, 정시언.” ....... 그러나, 이 아이들에게 그 무엇보다 소중해져버린 정시언. 솟구쳐 오르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 하나도 안 부러워, 비싼 보석 따위. 난 그냥 깨진 구슬 할래. 그 때, 불쑥 내 앞으로 비원이의 손이 내밀어졌다. 뭐야, 설마 좋은 말 해줬으니까 돈 달라는 건 아니겠지? “뭐, 뭐야? 왜?” “악수하자고.” “갑자기 왜?” “너 진짜 골 때린다, 정시언.” 나는 슬며시 놈의 손을 잡으며 이 놈이 왜 이러는지 생각했다. “우리가 처음 만난 장소야, 여기.” 아, 그러고보니 정말이다. 이 곳은 내가 비원이를 처음 본 뒤 무작정 그의 손을 잡고 달려버린... 바로 그 곳이었다. 비원이 놈, 보기보다 세심하고 감동을 잘 준다. 나는 활짝 웃으며 비원이의 손을 잡고 말했다. “반갑다, 여기서 또 보게 돼서. 안녕, 신비원씨.” 내 말에 비원이는 피식 웃어보였다. 그리고 대답한다. “환영해, 또 만나게 돼서. 안녕, 깨진 구슬양.” 47. 데드라인 “저 왔습니다~” 무심하게 인사말을 지껄이며 망설임없이 <로맨스>안으로 성큼 들어서는 비원이. 역시 이 놈에게 <로맨스>는 호스트바가 아닌, 직장의 의미로서 자리잡고 있는 듯 했다. “아, 일찍 왔네.” 호스트바의 마담이라는 남자는 호스트바에서 일하는 놈들 버금가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이십 대 중반쯤 됐을까, 역시 저 사람도 호스트와 손님을 연결해주는 관리자의 입장일 뿐, <로맨스>의 실질적인 주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곳도 다른 밤의 유흥업소와 마찬가지로 조폭들에게 관리되고 있을 터. 스파이 일이 끝나고나면, 아부지한테 부탁해서 이 호스트바도 신고해버려야지. 제일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론 거리에서 맞는 환영이나, 지하철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민서의 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그래도 이건 심하다. 차라리 휴인이처럼 몸은 힘들어도 분위기는 좋은 공사장에서 일하든지. 아직 미성년자인 놈이 호스트바에서 일하다니. 아무리 몸을 팔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애들도 참. 돈이 필요하다고 쳐도 자기 자신을 이렇게까지 망가뜨려야만 할까. [관계자 외 출입금지] 놈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쩌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행복을 만들어줘야 할 약한 사람들...인 것 같다. 그들은 오직 그것만을 위해 움직이고, 일하고, 웃고, 행복해한다. “....아... 저기 그 여자분은....?” 마담은 고급 술잔을 닦다 말고 나에게로 시선을 옮겼고,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비원이 뒤에서 엉거주춤한 채로 서 있다가 고개만 빼꼼히 내밀어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세요.” “내가 아는 누난데요, 형.” “설마 고객?” “아니, 그런건 아니구. 그냥 옆집 사는 평범한 누나예요. 오늘만 여기서 일하고 싶다는데. 청소같은 거 있잖아요, 그냥 잡일 같은 거 시키면 잘할거예요.“ 잡일을 시키면 잘할거라니.... 오냐, 니 눈에 난 귀하게 자란 것 같지는 않다 이거냐? 그래도 스물 두 해를 살아오면서 검사 아부지 밑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거늘!!! “아, 그래도 여자분인데 어떻게 일을.... 아, 앉으세요!!!” 마담이라는 남자는 서둘러 자신이 앉았던 의자에서 일어나 카운터 안으로 나를 잡아끌었다. “예? 아니, 저기 저는!! 그러니까 놀러온 게 아닌데요!!!” “그, 그래도!! 여자 분인데!!” “이러셔도 저는 돈이 없습니다!! 호스트바 고객이 되기에 저는 턱없이 부족해요!!” 고객 확보 작전인가 싶어 빽 소리쳤으나.... 말없이 미소만 씨익 지어주는 마담이라는 남정네.... “그래서 그런 거 아니예요, 아무리 아침이라지만 그래도 남자들이 일하는 곳인데, 괜히 일한다고 돌아다니시다가 위험하실 수도 있어요. 밤새 일하고 아직 남아있는 남자애들이 몇몇 있거든요. 이런 바닥에서 일하는 애들이라 좀 험하고 앞에 벌어질 일 생각도 안해요. 제가 볼 땐 착한 애들이라도 처음 보는 분은 당황스러우실 거예요.“ 침착한 상황설명, 여자에 대한 배려... ........ 여자들이 이래서 호스트바를 오는구나.............. 아니,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나에겐 휴인이가 있다구!!! 휴인아, 미안하다. 누나를 용서해라. 내가 너를 두고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말았구나. “됐어요, 어차피 지금 남아있는 새끼들도 내가 다 아는 놈들인데, 정시언, 카운터에 숨지 말고 이리 나와, 나랑 같이 일하면 되니까.“ 물론, 신비원놈은 나 혼자 노는 꼴은 보지 못하는 놈이었다. “비원아, 너무 그러지마. 그냥 여기서 쉬시게 해. 오늘 너 손님 받는 날인데, 너 끝날때까지 기다리는 것만도 힘드실거야. 일까지 하면 쓰러지실라. 너야 종일 일하는 거 익숙하다지만 처음 해보는 사람은 못 견딘다.“ 옳지, 옳지, 힘내십쇼, 마담양반. “....뭐야, 지우형 오늘 왜 그래요?” “내.... 내가 뭘?” “.....평소랑 다른데? 뭔가 이상한데?” 아무말 않고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마담씨. 비원이는 슬쩍 그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뭔지 알겠다는 듯 특유의 웃음을 지어보였다. 피식, 하고 웃는 기분나쁜 그 웃음.... “아, 나, 미치겠네. 요즘 왜 이렇게 눈이 삔 인간들이 많아.” 무, 무어라? 그렇다면 설마... 저 마담씨도 날? 난 어둠의 세계에서 통하는 미모란 말인가? 이진한, 느낄 수 있겠느냐? 요즘 인기 폭발중인 니 예전 여자친구의 이 활약을!! 넌 복덩이를 차버린거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지만, 누가봐도 난 선주린보다는 훨씬 부족한 여자겠지? “아, 좋아, 좋아. 일단 나 혼자 일하긴 하겠는데요, 지우형.” “....응...?” “그 여자 휴인이 여자친굽니다.” 장난끼있는 목소리로 그 한마디를 툭 내뱉더니 일하러 더 안쪽으로 들어가는 비원이놈. 아, 여기서 일하는 마담이 휴인이도 알고있단말야? 하긴, 알게모르게 우정도 각별한 놈들인데 사전조사를 해본 후에 여기가 더러운 호스트바라는 확신이 들었으면 비원이를 여기서 일하게 만들지도 않았겠지. 마담씨를 보고 괜찮은 사람이라는 판단이 들어서 비원이를 그대로 호스트바에 근무하게 했으리라. 비원이의 말에 멈칫, 하는 마담씨. 지우라는 이름을 가진 마담씨. 그리고 그는 미소를 지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표정이다. “일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예?” “컵 좀 닦아주시죠.” “아니, 아까는 그냥 쉬라고....” “어허!! 원래 손님아닌 여자는 출입금지입니다!! 외부인 출입금지 지역이라구요!! 그런 곳에 들어오셨으면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일을 하셔야죠!!“ ............신비원 개새끼. 복수하고 말겠어, 죽어도 내가 노는 꼴은 못본다 이거지. 이딴 식으로 유치하게 복수를 한다 이거지. 나는 마담씨를 노려보다가 신경질적으로 앞에 놓여진 천쪼가리를 들고 컵을 벅벅 닦기 시작했다. “고급 잔들입니다. 깨뜨리지 않게 유의하고 섬세하게 닦아주세요.” 썅, 저 마담도 그렇지. 남자가 말이야, 첫눈에 반했으면 좀 끈질긴 면이 있어야지. 내가 휴인이 여자친구란 말을 듣자마자 이렇게 바로 태도를 바꿀 수 있느냔 말이야. 휴인이에겐 미안하지만. [저 휴인이 여자친구 아니랍니다, 오호호호!! 저 일안하고 놀아도 되죠?] 라고 저 마담씨에게 말하고 싶은 기분이 간절하구나.... “저기, 몇 살이세요?” 나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마담씨에게 물었다. 컵을 닦으며 일하는 한이 있더라도 비원이가 없는 동안 수다 떨 상대가 없다는 것은 나에게 사형선고와도 같은 것이었다. 나는 수다떨기를 좋아하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숙녀였던 것이다. “스물 여덟이요.” “에에? 더 젊어보이는데.” “당연히 그래야죠, 하는 일이 이런건데요. 그래도 여기선 제일 나이가 많은 편이예요. 여기서 제일 어린 애들은 열 여섯 살이니까.“ “........열 여섯? 그럼 아직 애기들이잖아요.” “비원이는 열 여덟인데요, 뭐.” “....아, 알고 계셨어요?” “왜요, 비원이가 나이 속이고 일하는 줄 아셨어요?” “아니, 뭐 상식적으로.... 미성년자가 이런데서 일하면 신고들어오고, 가게도 벌금내고, 영업정지 좀 먹고... 그러지 않아요?“ “워낙 눈에 띄지 않거든요, 이런 업소는. 일반 술집처럼 위장되어 있죠. 그래서 신고가 들어올 일은 없어요. 경찰도 단속 잘 안 뜨고. 사장이 자주 들르는 편은 아니지만 애들 일은 악독하게 시키는 편이예요. 일도 오래 시키고, 인정사정 안 봐주고, 맘에 안들면 애들 때리기도 하고. 요즘엔 화류계 쪽 여자들도 호스트바에 많이 오니까, 소위 영계를 많이 찾고... 사장 입장에서는 어린애들이 말도 잘 듣고, 장사도 잘 되니까. 어쩔 수 없죠. 비원이처럼 골드회원만 받는 애가 아니면 돈 벌기도 힘들어요. 일하면서도 괜히 빚만 늘게되죠.“ “......힘들겠어요.... 이런 일 하시려면.” “...... 먹고 살아야 되니까요.” 방금 그 말, 예전에 휴인이가 했던 말과 똑같다. “좋아서 이런 일 하는 사람, 없죠. 자신이 선택해서 이쪽으로 흘러들어온 사람도 조금만 일하다보면 금방 나가고 싶어해요. 하지만 한 번 들어오면 나가기도 쉽지않고. 빚에 쫒기거나, 앞날이 막막하거나, 가끔가다보면 팔려온 애들도 있죠. 다들 착하고 귀여운데도 주위 사람들이 보면 더럽고 역겨운 애들로 찍혀버려요.“ 비슷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사람들은 [관계자 외 출입금지] 아이들을 범죄집단으로만 생각한다. 쓰레기같은 놈들이라고, 벌레같은, 말종이라고. 내가 보기엔 그 누구보다도 순수하고 맑은 그 아이들을 말이다. “그에 비하면 비원이는 제 발로 이 곳에 걸어들어오고도 잘 견디는 편이죠. 처음에는 휴인이, 환영이, 비원이 셋이 이 곳에 왔었어요, 일하겠다고. 처음 보는 애들인데도 괜히 딱해보여서 만류했죠. 힘든 일이니까 할 생각은 관두라고. 제가 거절하니까 비원이가 그러대요. 그럼 자기 혼자만 일하겠다고. 다른 애들은 몰라도 자기는 꼭 여기서 일해야 한다고 우기더라구요. 그 이유는 아직도 모르지만, 그래도 비원이는 아끼는 놈이예요. 가끔 휴인이나 환영이도 여기 찾아오니까 자주 보기도 하구요. 휴인이랑 사귀는데다가 애들 옆집에 살면 그 쪽도....“ “아, 시언이예요. 정시언. 스물 두 살이구요, 말 편하게 하세요.” “아, 시언씨도 걔들하고 친하겠네요, 여자애도 하나 있다고 들었는데.” “네, 다들 착해요, 귀엽구요.” 나만큼이나 아이들을 생각해주는 듯한 마담, 아니, 지우씨. 놈들을 한 번 보면 누구도 그 매력에서 쉽게 헤어나오지 못한다. 나도, 지우씨도, 해커애들도. “그나저나, 놀랐어요.” “.....예? 뭐가요?” “비원이요, 원래 여자를 싫어하는 놈인데, 여자를 데려올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네?” “원래 여자를 경멸하는 놈이거든요. 그 정도로 혐오하고, 짜증내고, 증오하고. 그래서 비원이가 시언씨 데려온거 보고 깜짝 놀랐어요. 비원이 눈에 시언씨는 좋은 사람인가봐요.“ 위험한 데드라인. 빨간 신호등 불빛. 넘어서는 한계. 다시 한 번 느낀다. 난.... 이 일을 하지 않았어야 했다. 이렇게 아프고 힘들 줄 알았으면, 이렇게 아이들을 아끼게 될 줄 알았으면, 이렇게 아이들에게 소중한 존재가 될 줄 알았으면.... 난, 이 일을 하지 않았어야 했다. 48. 시발 “나 집에가면 휴인이한테 이를거다.” 대걸레로 바닥을 닦으면서 나를 노려보는 비원이. 간간히 이를 악물고 협박을 해대면서. “내가 뭐.” “좋냐? 일 안하고 마담형이랑 노니까 좋냐?” “입 닥치고 일이나 하시지?” “우리 마담형 존나 잘생겼지.” “.....유치한 새끼.” “어? 잘생겼지? 완전 잘생겼지?” “.... 대답할 가치를 못 느끼겠다.” “잘생겼잖아, 솔직히 진짜 잘생겼지?” “그래, 잘생겼다!! 완전 잘생겼다!! 그러니까 넌 좀 저리로 가라, 일이나 해!!!” “........나 이를거다, 휴인이한테.” 저 개놈새끼........... 아니, 지가 잘생겼냐고 계속 물어보길래 귀찮아서 그렇다고 대답했는데 그걸 휴인이한테 이르겠다고? 저 놈 생긴거 답지 않게 가끔 얍삽하단 말이지. “신비원, 너 자꾸 시비걸지 말고 룸이나 청소해.” “형도 진짜 그러지마요!! 쟤 볼 거 없다니까요? 내가 정말 형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요, 쟤는 여자가 아니예요, 나 밤마다 휴인이가 불쌍해서 잠을 못 잔다니까? 정말 다른 여자 다 좋아해도, 쟤는 좋아하지마요.“ 고급잔이야, 이건 고급술잔이랬어... 그래, 비원이한테 이걸 던지면 안돼, 그거 깨지면 내가 돈 물어내야 한단 말이야. 참아, 정시언, 심호흡, 하나, 둘, 셋. “여자가 되어가지고 맨날 잠옷바람에 머리는 떡져가지고 쓰레빠 질질 끌고다니고. 밥은 또 얼마나 많이 먹는데.“ “이 개쉐끼. 죽여버리겠어!!!!” 심호흡은 개뿔, 난 놈을 죽여버리기 위해 카운터를 가뿐히 점프해 넘었고 비원이는 나를 피해 재빨리 룸으로 들어가 문을 잠궈놓고 태연히 대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민서와 비원이는 점점 휴인이화 되어가고 있다. 감당불가, 주체못하는 장난끼와 대처하기 힘든 말장난으로 똘똘 뭉친. “시언씨가 참아요, 아직 애라 그래요. 그래도 다른 애들에 비하면 비원이는 얼마나 어른스러운 건데요.“ “.....힘드시겠네요, 저런 애들 관리하시면.” 진심으로 존경스러워지는 마담, 아니, 지우씨. “아, 이거 받아둬요.” 지우씨는 분을 풀지 못하고 씩씩대는 나를 향해 무언가를 내밀었다. 아, 명함이다. 하는 일 따위는 적혀져 있지않은, 단지 이름과 연락처만이 적힌 명함. 나는 멍하니 명함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다시 지우씨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그는 따뜻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다른 뜻 있어서 주는 거 아니예요. 애들한테 무슨 일 생기면 연락 주세요. 비원이는 제 동생 같은 애니까요.“ 느껴진다, 정말 비원이와 아이들을 걱정하는 이 사람의 마음이. 이 사람도 나에게서 같은 느낌을 받았을까. 나는 웃으며 그의 명함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고, 카운터 옆의 메모지를 집어 내 핸드폰 번호를 적고 그에게 건네주었다. “비원이한테 무슨 일 생기면 저한테도 연락주세요.” 비록, 한 달 후에는 내 손으로 그 애를 영국의 기숙사 학교로 보내겠지만요. 알고 있나요? 그 애는 이런 일 하고 있을 놈이 아니예요. 재벌 회사를 운영하던 회장의 아들이라구요, 그 회사의 후계자예요. 난 곧 주동자의 품에서 비원이를 빼낸 후 고이 돌려보내야 한다구요. 뒷일은 생각하기 싫었는데도 불구, 생각은 언제나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애써 나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일에 몰두하기로 작정했다. 정신없이 컵을 닦고, 비원이놈과 시비걸고, 지우씨를 도와 잡일을 하고나니 어느 새 어둠이 내려앉는 시각이 다가와 있었다. “형, 나 왔어요~” “지우형, 나 어제!! 어?? 여자다!!!!” 그리고, 하나둘씩 몰려드는 호스트바 아이들의 눈에 꼼짝없이 포착된 나. “아직 손님 안 받을 시간인데, 형 여자친구예요?” “오~ 지우형 이런 타입? 형이랑 안 어울려요.” “마담형한테 흑심품은 아줌마들도 있는데 이러면 안되죠~ 아줌마들 울겠다.” 조잘조잘 재잘재잘 쑥덕쑥덕..... ......이 휴인이 2세같은 새끼들. “그런거 아냐, 그냥 오늘 하루만 일 도와주러 오신 분이니까 조용히 하자.” 내가 비원이를 따라왔다는 말은 하지않는 지우씨. 배려가 몸에 베어있다. 그리고 그의 한마디에 아이들은 금세 나에 대해 관심을 끄고 자신들의 일과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형, 나 어제 2차 갔는데 돈도 못 받았어요.” “옆동네 호스트바에 에이즈 환자 생긴 거 알아요? 우리도 건강관리 확실히 해줘요. 나도 이제 몸 안 팔래요, 아무리 말단이래도 나 이제 힘들어.“ “형, 나 오늘 일 좀 줄여줘요. 나 머리에 열난다구요.” “그러게 2차 함부로 따라가지 말라니까. 건강관리는 형이 알아서 해줄테니까 너무 걱정마. 우리 애들 병에 노출되게는 안 만들어, 그리고 오늘 사장님 안 오실테니까 아프면 그냥 집에가서 쉬어, 괜찮아.“ 부러웠다, 지우씨가. 언제라도 아이들을 감싸줄 것 같은 여유, 책임감. 나는 나 혼자 잘 살겠다고 스파이 짓거리로 골머리를 앓고있는데. 이런 아이들에 비해 너무나 행복하게 살아오고서도 상처받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나를 희생하고 아이들을 위해줄 생각따위는 제로. 지우씨에 비해 난 형편없다. 재수없다, 정시언. “오늘 태형이형 못온대요.” “응? 왜?” “몸살. 어제 사장한테 맞았잖아요.” “.....그 씨발새끼, 애들을 진짜 뭘로 아는거야.” “태형이형 좀 오래 못 나올거 같던데요. 상처가 얼굴에 났다구요, 눈 멍들고, 입 터지고.” “알았어. 형이 알아서 할테니까 다들 됐어. 일단 일해야지. 준비해.” 꼭 권력이랍시고 애들 때리는 데 열올리는 사장들이 있는 법이다. 민서한테 말해줄까보다, <로맨스>사장 지갑 훔치라고. “큰일이네... 오늘 태형이랑 비원이랑 같이 예약되어 있는데.” 아이들을 준비하라고 보낸 후 홀로 곤란한 듯 중얼대는 지우씨, 마침 할 일이 없어 카운터에 있는 메모지로 종이배와 학접기에 심취한 나. “오늘은 애들이 부족한데 큰일이네, 사람이 더 이상 없.....” .........그 순간, 뭔가 오싹한 기운이 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시언씨....” “............네...네?” “...... 키가.... 크시더라구요.” “....자, 작진 않습니다만....” “............비원이가 다 알아서 해줄거예요, 그냥 서 있기만 하시면.” “아니, 저기요. 뭘 부탁하실지 짐작이 가긴 한데, 그래도 그건 쫌....” “오늘 애들이 부족해서 그래요. 골드회원들은 이상한 거 안 시켜요. 그냥 적당히 놀아주면 되거든요, 이야기에 장단 맞춰주고. 손같은 데 만지거나 할 수는 있는데 시언씨는 여자잖아요.“ “................아니, 그래도 저는.....” 차마 거부할 수 없었다. 지우씨의 간절한 눈빛은 백 마디의 말보다도 심금을 울렸다. 제기랄, 정시언, 살다살다... 이제는 남장하고 호스트 짓거리까지 해야한단 말인가!!!! 변신한 내 모습을 보자마자 여기저기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온다. 대충 하나로 묶은 머리, 흰 와이셔츠에 검은 정장, 검은 넥타이, 남자 구두. “단발이라 걱정했는데 그래도 잘 어울리네요. 호스트바에 워낙 곱상한 애들이 많아서 시언씨가 여자일거라고는 생각 못할거예요. 키도 웬만한 남자랑 맞먹으니까.“ “누나, 아까 여자일때보다 더 나은 것 같아요~” “오와, 멋지다.” 지우씨의 말을 선두로 해서, 호스트바에서 일하는 아가들의 칭찬소리가 이어진다. 아니, 저걸 과연 칭찬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욕이겠지? 그러나 무엇보다도 화가 나는 것은, 구석에 서서 계속 실실 웃어대는 신비원 때문이다. 내가 누구땜에 이 개고생인데!!! 씨발새끼, 내가 저 새끼만 안 따라왔어도 이런 짓거리를 안했을건데!!! 키 173. 일평생 원망 한 번 해본 적 없던 내 키가 저주스러워지는 이 순간. 나도 좀 이온이처럼 귀여운 이미지였으면!! 민서처럼 길고 긴 생머리였으면!!! 선주린처럼 딱 봐도 천상 여자였으면!!! 이런 짓 안했을건데!!! “저 누나 원래 성격도 되게 터프해보이던데!! 누나, 그냥 여기서 우리랑 같이 일해요!!” .....나 저 말 내뱉은 새끼 얼굴 기억했어. 일 끝나고 족쳐버리겠어. “시언씨, 이거 들고 가시면 돼요. 잘 부탁해요. 비원아, 곤란할 상황 니가 커버하고.” 걱정스러운 표정과 말투로 나를 보내는 지우씨. 비원이는 웃으며 앞서 예약된 손님들이 있는 룸으로 발을 옮기고, 나는 온갖 양주와 술잔, 얼음이 가득 담긴 쟁반을 들고 그의 뒤를 따랐다. “어이, 신비원, 개쉐끼, 이거 좀 대신 들어주지?” “왜 그러십니까, 형님.” “너 뒈질래?” “문 연다? 각오됐지?” “이게 무슨 꼴이야, 썅!!!” 내 욕을 마지막으로 앞에 있는 룸의 문이 활짝 열리면... 사치스럽게 옷을 입은 채 나란히 앉은 복부인들 네 명이 눈에 띄고.... “안녕하십니까, 예약하신 블랙입니다.” 약간의 미소를 머금고 복부인들에게 90도로 인사하는 비원이. 뭐시? 브, 브, 블랙? 아, 그렇지. 이런데서는 가명쓴다 이거지. 씨발, 나는 가명따위 없단 말이다!!! 나는 애원하는 눈빛으로 비원이를 바라보았으나, 이 망할놈은 날 도와줄 생각은 않고 어서 인사 하라는 듯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 놈의 눈은 날 비웃고 있었다. 이 놈은 지금 내가 당황하는 걸 즐기고 있는 거다. 썅, 이 새끼가 날 엿먹일려고 작정했나!!!! “아. 안녕...하십니까, 저, 저는.... 정시....” 정시언.....이라고 하면 여자 이름이잖아... 거기다가 본명인데.... “정시....시.... 발!!!!!!!......이라고 합니다.” 풉, 하고 들려오는 비원이의 웃음소리. 당황한 복부인들의 표정. .....썅, 왜 난 그 순간 많고 많은 글자중에 ‘발’이란 말이 떠오른걸까. 정시발이 뭐야.... 이럴 줄 알았으면 욕 좀 쓰지말걸... 정시발이 뭐야, 정시발이.... 아, 오늘 하루... 점점.... 좆같아진다........... 49. 호스트 “아...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말해주겠어요? 뭐라구요?” 복부인 한 명이 아주 고상한 말투로, 온화한 얼굴로 내게 다시 묻는다. 빌어먹을 신비원 새끼는 아직도 웃느라 바빴다. 에라, 나도 모르겠다. 될대로 되라지. 두 번 다시 이 호스트바 안오면 그만이지, 뭐. “정시발입니다. 본명입니다. 새로 들어와서 미처 가명 지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목소리를 조금만 깔아주자 아무도 나를 여자라고 의심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이렇게 잘 속아주는 것이... 굉장히... 슬프다. 워낙에 목소리도, 키도, 행동도 남자답다는 소리를 듣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남자 취급을 받은 적은 없었는데. “뭔가 착오가 있었던 듯 한데, 우리는 블랙하고 엑스를 불렀어요.” 가명 꼬라지 하고는. 블랙? 엑스? 놀고있네, 영화찍냐? “으흠, 엑스가 심한 감기몸살을 앓고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시발군을 데리고 왔습니다. 만족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다른 가게에서 스카웃해온 에이스 중에 에이스입니다. 우리 업소에서는 처음 인사드리는 거구요.“ 이제야 나를 거들어주는 신비원. 놈을 욕할 기력도 없다, 난 생전 처음 겪는 이딴 상황에 미칠듯이 당황스럽단 말이다!! “아, 그렇군요... 그럼 시발군은... 몇 살?” 순간적으로 웃을뻔 했다. 교양있는 척 내숭떠는 복부인들이 발음하는 ‘시발군’은 웬만한 개그 프로그램 못지않게 재미있었다. “스물 두 살입니다.” “젊네, 어유, 피부 고운 것 좀 봐. 에이스였다더니 얼굴도 참 곱네. 여자라고 해도 믿겠어. 호스트치고는 키가 조금 작다 싶었더니 그동안 얼굴만 믿고 일해온 모양이야? 몸은 다른 애들보다는 조금 빈약하네.“ 그럼 여자인 내 등치가 우람해야 되겄습니까!!!! 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참아야 한다. 내가 대체 누구를 위해 이딴짓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시키니까 하고보자.... 신비원 새끼를 조져버리는 건 그 다음일이다. 일단 서둘러 내 가슴을 바라보았다. 복부인 아줌마들께 여자라는 걸 들켜버리면 일이 또 시끄러워진다. 가슴도 작은 편인데다가 정장도 큰 걸 입어놔서 그다지 티는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 <로맨스>에 오기전에는 어디서 일했어?” 황당 질문의 연속이다. 나는 이 수많은 고난을 어떻게 헤쳐나가야만 할까. 앞으로 내가 겪어야 할 고비는 대체 얼마나 많아질까. “아, 그건.... 저기, 지방에 있는 데라서 잘 모르실겁니다. <섹시가이>라는 호스트바였습니다.“ “풉.” 내 말을 듣더니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기분나쁘게 웃는 신비원. 그만 좀 웃어, 나는 웃을 기분도 아니란 말이다, 난 나름대로 필사적이라구!! “머리 기르는 건 취민가 봐요?” “아, 예. 제가 좀 헤어스타일에 관심이 많은지라... 허허허.” “블랙이랑 많이 친한가봐.” “....예?” “블랙이 이렇게 많이 웃는 건 처음보네. 항상 무표정이었는데.” 그럼 안 웃기겠습니까? 저 놈이 그렇게 얕보던 정시언이 정시발이 됐는데. <로맨스>전에 일했던 곳이 존재하는 지도, 안하는지도 모르는 <섹시가이>라는데 그게 안 웃기냐고요!!! “여기, 앉아봐요, 시발군, 맘에 드네.” 맘에 드시면 안됩니다. 저 다음부터 여기 발도 안 들여놓을겁니다, 아줌마. 그러나 그녀의 말에 따라 나는 되도않는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나는 복부인1과 복부인2사이에 앉았고. “어유, 우리 블랙은 얼굴이 더 많이 상한 거 같어, 살이 빠졌네.” 복부인3은 아직 서 있는 비원이에게로 다가가서 그의 얼굴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복부인4는 우아한 모양새로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복부인3은 섬세한 손길로 비원이의 머리카락을 넘겨주고 있었다. 연인들이나 한다는 그 짓거리를 말이다!! 그리고 복부인3의 손길이 비원이의 앞머리를 쓸어넘겨줄때!!!! 난 본 것이다. 드디어 보았다. 기어이 보았다. 재벌아들에게만 있다는, 어릴적에 말타다 떨어져서 꿰멨다는, 바로 그 상처를!! 분명히 있었다.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비원이의 이마에는 긴 상처가 나있었다. 이미 확정된 사실이었지만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자 공연히 심장이 떨려왔다. “시발군 처음 왔다는데, 신고식이라도 할까?” “예?” “그래도 에이스인데 벗고 춤추라거나 하는 건 시킬수가 없지. 음, 뭐가 좋을까?” ......벗고 춤을 춰요? 누가요? 내가요? 아마 그거 시켰으면 아줌마들은 대중목욕탕에서 숱하게 봤던 대학생 처녀들의 몸을 감상할 수 있었을 겁니다. “노래하는 건 시끄러워서 우리가 별로 즐기지 않아요. 수준이 떨어지잖아.” .....왜요, 복부인 넷이 손잡고 뽕짝 부르기. 좋구만. “역시 술밖에 없네, 오늘은 우리가 시발군 신고식 해주는 셈 치고, 모두 쏠테니까 걱정말고 마셔요.“ 내가 대학교 처음 들어갔을 적엔 소주 5병을 먹고도 집에까지 멀쩡히 기어들어갔으나, 지금은 주량이 점점 줄어서 소주 3병까지밖에 못 마시는데. 거기다가.... 양주는 즐겨 마시질 않아서 한 잔만 마셔도 곯아 떨어질지 모르는 일이다. “일단 한 잔해요, 응?” “아니, 제가 술은 잘 못하..” “술 더 가져오겠습니다.” 내 말을 자르고 급히 대답하는 비원이. “시발군, 같이 다녀오자, 술이 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 나를 향한 비원이의 눈빛이 말하고 있다. 빨리 튀어 나오라고. “아, 그래야지. 술 가지고 금방 오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검은 정장을 입은 우리 두 사내..... 아니, 남녀는 복부인들을 물리치고 룸 밖으로 나와서야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시발이형, 센스 죽이네요.” “.......닥쳐. 니가 안 도와줘서 그런거잖아,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그거뿐이었어.” “왜, <섹시가이>도 센스 죽여줬는데. 지방에 진짜 그런 데가 있어? 가봤나봐?” “지랄하지마!! 내가 그딴 거 알게 뭐야!!! 아, 내가 왜 이 지랄을 해야되는건데!!” 난 비원이놈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러나 놈은 여전히 실실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너 더 웃으면 나 진짜 너 때릴지도 모른다.” 나는 이를 악물고 협박투로 중얼거렸고, 비원이는 순식간에 웃음을 거두고 말했다. “그래, 웃을 때가 아니야. 이제부터가 문제거든.” “응? 뭐가?” “아까 술 잘 못한다고 말하려고 했지?” “어, 나 양주는 잘 못 마셔서...” “그딴 거 없어, 호스트바는. 못 마신다, 안 마신다 이딴 거 안 통해. 주면 주는대로, 다 받아먹어야 돼.“ “미쳤냐? 아까 못 들었어? 신고식이랍시고 엄청 퍼준다잖아.” “내가 지금까지 여기서 버틸 수 있었던 이유가 뭔 줄 아냐? 솔직히 난 노래도 안해, 춤도 안춰, 말도 시켜야 겨우 하고, 스킨쉽도 약한 것들만 받아줘. 근데 내가 지금껏 골드회원만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지 딱 하나. 술을 잘 마셔서야. 그 뿐이라구.“ “...... 알았어, 먹고 죽으면 되잖아. 어차피 속인거 뽀록나면 골 아파져. 그냥 내가 퍼먹고 쓰러질테니까 나 집까지 확실히 모셔라.“ “병신이냐, 진짜?” “아, 뭐가!! 내가 니 때문에 이 고생중인데!!!!” “고객들이 주는 술은 다 받아마셔야 한다, 거부 못한다, 토해서는 안된다, 술 취해서 울거나 주정부리는 것도 안된다. 물론 쓰러져서도 안된다.“ “...............” “이게 호스트들이 지켜야 될 수칙이야. 너 술 퍼마시고도 게워내지 않을 자신있어? 정신 똑바로 차릴 수 있냐구.“ .........휴인아, 보고싶다... 나 집에 가고싶어.. 지금쯤 애들 다 집에서 쉬고 있을 시간인데. “씨발, 하필이면 그 아줌마들 사이에 앉았냐. 술 바닥에다 버릴 수도 없게.” “아, 거기 앉히는 걸 어떡하냐!!” “따라와 봐.” 비원이는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며 지우씨가 있는 카운터쪽으로 다가갔다. “아, 어때? 안 들켰어? 잘 돼가?” 지우씨는 우릴 발견하고서는 황급히 물었고, “신고식하려고 술 먹인다잖아. 형, 양주 두 병 줘 봐. 하나는 독한거 주고, 다른 하나는 물 탄걸로. 그 아줌마들 먼저 보내버리는 수밖에 없겠어.“ 비원이의 말에 지우씨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방쪽으로 급히 들어갔다. 난 미쳐 돌아가는 상황과 나를 동정하며 한숨을 내쉬었고 비원이는 나를 내려보더니 시선을 다른 곳에 고정하고는 중얼거렸다. “그래도 멋있다, 오늘.” “너 지금 나 놀리는거지?” “아마도.” “나 집에가면 휴인이한테 이를거다, 니 땜에 이런 짓 한 거.” “나 그 새끼한테 몇 대 맞겠네.” 작게 미소지으며 말하는 비원이. “그래도, 고맙다.” 거짓말처럼, 그 한마디에 모든 앙금이 씻겨져 내려가는 것 같았다. 비원이의 냉정한 목소리도, 그 날 밤에는 한없이 달콤했다. 50. 우리집 독한 양주는 2병, 물을 탄 양주는 1병. 룸 안에서 나는 복부인1과 복부인2 사이에 낑겨앉았고, 비원이는 복부인3과 복부인4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자, 한 잔 해요, 시발군.” 저 놈의 시발군. 들을 때마다 짜증나 죽겄네. “마담형님이 오늘은 골드회원분들에게 특별히 좋은 술을 맛보게 해드리고 싶다고 비싼 양주 가져다 주신겁니다. 저희더러 손님들 드셔야 될 술은 건드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시던데요. 저희는 여기 있는 이 양주만 따라주십시오. 이건 싸고 독한거라 저희는 이 술이 제일 잘 맞거든요.“ 복부인2가 내게 독한 양주를 건네자 재빨리 나서주는 비원이. 그는 물을 탄 양주를 독하고 싼 양주라고 속이고 있었다. “그래도 비싼 양주는 한 번 마셔봐야지. 시발군, 일단 한 잔 들어요.” 썅, 나 한 잔 먹고 뻗으면 어떡하지?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술잔을 받아들었다. “저도 한 잔 따라주시겠습니까?” 그 때, 무심한 듯 들려오는 비원이의 한마디. “어머, 블랙이 웬 일이야? 따라줘야만 마시더니, 오늘은 먼저 술을 달라고 하구. 오늘 우리가 잘 오긴 잘 왔나봐.“ “직접 따라주시겠습니까?” 평소의 비원이가 하는 짓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저 영업용 말투와 표정. 그 행동에 홀린듯한 복부인1은 직접 양주병을 들고 테이블을 돌아 비원이 쪽으로 다가갔다. 그 순간, 비원이가 나를 향해 비밀스런 눈빛을 보냈다. .... 새끼, 안 그런 척 하면서도 되게 챙겨주네. 나는 그 덕분에 복부인1이 자리를 비운 틈에 바닥에다 양주를 쏟아버릴 수 있었다. “괜찮아요, 시언씨?” “아, 예, 참을 만 합니다.” 복부인들의 접대를 마치고 구석진 자리에 널부러져 있는 나. 아, 물 탄 양주만 마셨을 뿐인데도 속이 울렁거린다. 더럽게 독하네, 그 아줌마들 뭐야, 진짜 인정사정 안봐주고 그렇게 먹이다니. “그 골드회원들이 시언씨 정말 마음에 든 눈치던데, 나중일도 걱정이네. 시언씨 또 찾으면 뭐라고 둘러댈지.“ 지우씨는 나에게 물 한 잔을 건네고 농담조로 말했다. “다시 <섹시가이>로 돌아갔다고 그래요.” 신비원 저 개놈새끼. 그걸로 언제까지 우려먹을 생각이냐. “응? 그게 무슨 말?” “그런 게 있어요, 형.” “싱겁긴... 비원아, 동현이한테 술 깨는 약 있을거야, 하나만 달라그래. 시언씨 양주 처음이라는데 탈날 수도 있으니까, 과음한 것 같다.“ 비원이는 지우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저 너머의 복도로 사라져갔다. “일한 건 어땠어요? 괜찮았어요?” “아뇨, 힘들어요. 비원이가 이런 일 하는 줄 몰랐어요. 되게 짜증나네요, 이거.” 솔직하게 대답하는 나. “그래도 다른 애들 하는 일 보다는 비원이가 쉬운 편인데.” “지우씨는.... 애들 불쌍하지 않아요?” 지우씨는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채 바닥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거 알아요, 시언씨?” “..... 뭘요?” “대학 다니는 창녀, 그리고 술집나가는 여대생. 그 두 개 다른 점이 뭐게요?” “.....글...쎄요....” “사실 두 개 다 똑같애요. 근데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의미는 큰 차이가 있죠. 대학다니는 창녀, 라고 할 때는 모든 사람들이 동정심을 가져요. 한 편으로는 존경심도 있겠죠, 공부하고 싶어서 저렇게 학비를 버는구나, 창녀지만 그 와중에서도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까지 다니는구나, 하구요. 술집나가는 여대생? 이건 바로 욕먹죠. 공부나 할 것이지, 술집에 나가? 저 여자는 도대체 생각이라는 게 있는거야, 없는거야?.... 이렇게 돼버리죠.“ 진지한 지우씨의 모습과 그가 내뱉는 논리정연한 말에 난 순간 숨이 멎었다. 지우씨가 내게 전하려는 말 뜻이 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난, 우리 애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요. 다만 안타까울 뿐이죠. 난 시언씨도 그렇게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시언씨 눈에 보이는 한 단면만 생각하지 말고, 그 애들 진실을 봐주세요. 눈에 보이는 사실 말고, 정말 그 애들이 속에 간직한 진실이요. 아이들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주는 거, 난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지우씨.....” “저기 비원이 오네요, 전 애들 관리하러 카운터로 가봐야겠어요. 조심히 돌아가요.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고생시켜서 미안하네요. 사례는 비원이 통해서 할게요. 다음에 보게 되면, 서로 말 놓도록 하죠.“ 지우씨는 따뜻한 웃음을 지으며 카운터 쪽을 향해 바쁘게 걸어갔다. 멋진 사람이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 내가 추구하는 그런 인간상. 내 비밀을 다 털어놓고 싶을 정도로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나도 그의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싶었다. 지켜주고 싶었다. 휴인이를, 환영이를, 민서를, 비원이를. 내 말에 책임을 진 채, 온 힘을 다해, 지켜주고 싶었다. “괜찮냐?” “아니, 아직도 속이 울렁거린다. 술에 물 안 탔으면 정신도 헤롱거렸을 거야.” “그래도 입은 살았네. 걱정안해도 되겠다.” “나 오늘 일기에다 꼭 쓸거야. 신비원 때문에 개고생한 날이라고.” “아줌마들 비위 잘만 맞추더만, 술도 넙죽넙죽 잘 받아마시고.” “그럼 거기서 욕하리?” “욕했잖아, 이름 자체가 욕 아니었나, 정시발군?” “너 그거 다른 애들한테 말하면 죽는다!!?” “휴인이가 들으면 되게 웃어줄텐데.” “휴인이한테 말하는 즉시 넌 내 손에 죽는거다!!” 간절한 내 바람과는 다르게 대답없이 담배를 꺼내무는 비원이. “야, 약속해, 엉? 휴인이한테 말 안할거지? 그지?” “너 하는 거 봐서.” 나쁜 노무시키. “그런데 비원아. 너 꼭 이런 일 해야겠어?” “했던 질문 계속 하지마라. 난 한 번 한다면 한다.” 그의 입에서 피어오르는 담배연기. 입에서 담배를 뗄 줄 모르던 비원이의 행동이 점차 이해된다. 답답했겠지, 구역질나고, 짜증이 치밀어오르고. 그가 여자를 경멸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내가 비원이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테니까. “비원아, 그거 알아?” “....뭐?” “너 비밀 되게 많은거.” “딱히 그럴 것도 없는데, 비밀이 아니라 말하고 싶지 않을 뿐이야.” “그게 그거지.” “.............” “넌 다른 애들보다도 뭔가 접근하기 힘든 기운이 느껴져.” “......” “니가 먼저 입을 열기 전에는 결단코 알 수 없는 그런 비밀이 아주 그냥 우글대는 느낌.” “......” “누군가 너에 대해서 파헤치려면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릴거다. 아, 불쌍해라. 앞으로 니 여자친구 될 사람은 얼마나 힘들까? 친해지는 데만도 수백만년.“ 비원이의 까칠한 성격을 생각하며 고개를 내젓는 중. “넌 나랑 친하잖아.” 귓가에 박힌 비원이의 음성. “응?” “앞으로 수백만년만 더 투자해, 혹시 알아? 비밀 들게 될지.” “너 진짜 재수없는 거 알지? 난 너한테 여자생기면 꼭 충고해줄거야, 헤어지라고.” “그런 걱정은 안해주셔도 되겠네, 내 인생에 여자 따윈 없거든.” “야, 세상에 꼭 호스트바에 다니는 여자만 있는 게 아니야, 너 여자가 싫다는 편견을 버려야 돼, 임마.“ 말없이 두 번째 담배를 입에 무는 그 놈. 비원이가 아닌 다른 놈이었다면 그만 피워, 라고 말하면서 담배를 뺐었겠지만 왠지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지금 비원이에게 있어서 마음 놓고 교감할 수 있는 친구는 담배뿐이란 생각이 들었기에. 말없이 놈이 내뿜는 담배연기를 맡으며 그의 뒤를 따라걸은 지 몇 분쯤 되었을까. 드디어 녹슨 파란 대문이 눈에 띈다. 우리집이다!! 원래 이온이와 아부지가 계시는 집이 ‘우리집’이지만 힘겨운 호스트바에서 일과를 마친 뒤라 지금 저 집도 반갑게만 보였다. “야, 애들 아직 안자고 기다리나봐!! 아직 불도 켜져있고, 문도 조금 열려있다.” “먼저 들어가.” “응?” “담배 피우고 들어갈테니까, 너 먼저 들어가.” “오냐, 빨리 들어와라.” 등 뒤에 있는 비원이를 내버려두고, 먼저 대문을 빼꼼히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목재평상 위에 옹기종기 앉아있는 휴인이, 환영이, 민서. “아가들아, 정시언 컴백!!” “와, 누나다!!” 그리웠던 목소리와 안정된 평화. 진짜 우리집처럼, 기분이... 좋다. 51. 비밀 1 (작가시점) 비원은 또 하나의 담배를 꺼냈다, 벌써 마지막 개비다. “젠장.” 그는 짜증을 내뱉고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기 위해 라이터를 찰칵거린 순간, 휴인과 시언이 한 말이 다시 그의 기억 속에 재생되어 들려왔다. [환영이나 민서나, 둘 다 내가 이 일이 끌어들인 애들이지만, 넌 제 발로 여기 끼워달라고 찾아왔어. 거기다가 민서의 역할을 너한테 달라고 우겼지. 어쩌면 주동자보다 더 위험한 역할을, 넌 생각조차 전혀 안하고 받아들였어. 넌 항상그래. 모든 게 비밀이지.] [비원아, 그거 알아? 너 비밀 되게 많은 거. 다른 애들보다도 뭔가 접근하기 힘든 기운이 느껴져. 니가 먼저 입을 열기 전에는 결단코 알 수 없는 그런 비밀이 아주 그냥 우글대는 느낌.] 누가 연인 아니랄까봐, 둘이 말하는 게 똑같았다. 한 번 피식, 하고 웃은 비원은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맑은 하늘에 담배의 탁한 연기가 낀다. “비밀이라...” 좆같이 살아온 인생.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잖아.” 평소에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했던 하늘을 오늘에서야 비원은 제대로 대면해본다. “..... 유리누나.....” 밤공기가 너무 맑아서, 눈물이 난다. 소년은 계단가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어지러운 사창가의 분위기 따위는 제 알 바 아니라는 듯이. 밤이면 구역질 나는 윤락가도 아침마다 어김없이 밝은 햇살이 내려앉았다. 소년은 내리쬐는 햇살을 정통으로 받아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열 다섯 살 된 소년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그 날 아침 병원에서 어머니의 병을 고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암덩어리는 여린 어머니의 몸 속을 점점 잠식해나가고 있었다. 소년의 얼굴은 잡티 하나 없이 말끔했고 그로 인해 그는 귀공자 타입의 외모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그의 상황은 귀공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버지란 사람은 얼굴조차 몰랐으며, 젊었을 적 술집에서 일하던 어머니와 윤락가 건물 지하에 있는 단칸방에서 겨우겨우 하루를 살아나가고 있었다. 그 단칸방조차도 어머니를 좋아하던 건물 주인과 술집 사장이 아니었다면 얻을 수 없었을 터였다. 그의 어머니는 젊은 시절 그 윤락가를 주름잡던 에이스 중의 에이스였다. 어머니가 일하던 윤락가의 마담 아줌마는 말했다. [비원아, 네 엄마는 다른 흔해빠진 기집년들과는 달라, 아무에게나 몸 내어주고 뒹굴지 않았다는 소리야. 이 바닥에서 살기 아깝지. 정말 아름답고 참한 사람이다.] 소년은 아무 죄 없는 벽에다 대고 화풀이라도 하듯 주먹을 내둘렀다. 안 그래도 부실했던 벽이 이제 막 여물어가는 소년의 주먹질 한 번에 옅게 금이 가더니 시멘트 부스러기가 우두둑 떨어져 내렸다. 아버지란 사람을 증오하지는 않았다. 소년은 그의 존재도 몰랐을뿐더러 어머니에게 착한 아버지의 환상을 익히 들어왔던 터였으므로. 한낱 사창가에 있는 수많은 여자 중에 하나였을 소년의 어머니에게 아버지란 사람이 베풀었던 사랑의 단면, 그 한토막 한토막을 들어보면 꽤나 구구절절하긴 했다. 소년은 아버지가 그립다거나 밉지 않았다. 다만, 혼자 남겨진 어머니가 안타까웠을 뿐이다. 소년은 등이 배기는 것은 아랑곳 않고 계단가에 드러누웠다. “응? 나 얘 알아.” 그의 위로 발랄한 소녀의 목소리와 함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소년은 햇살이 사라지면서 생긴 그늘 덕분에 반짝, 하고 눈을 떴다. 하얀 얼굴을 가진 소녀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거꾸로 비춰지고 있었다. “뭐야.” 소년은 몸을 일으켜서 뒤를 돌아보았다. 하얀 얼굴을 한 소녀와, 그녀의 또래로 보이는 다른 두 명의 소녀가 서 있었다. “야, 우리 빨리 가야돼.” “니들 먼저가.” “너 좀 있다 혼나도 우린 모른다?” 얼굴 흰 소녀를 남겨두고 두 명의 친구들은 황급히 어떤 건물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거리에는 소년과 얼굴이 하얀 소녀 단 둘 뿐이었다. “너 저기 살지?” 소녀는 친구들이 들어가버린 건물을 가리켰다. 그 건물의 지하 단칸방이 소년이 사는 곳이었다. “나도 저기 살아. 일하거든.” 그렇다면, 소녀의 직업도 뻔한 노릇이었다. “꺼져.” 구역질이 났다.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소년은 사창가의 여자들만 접해왔다. 자신의 어머니조차 마찬가지였으니까. 어머니는 항상 아버지가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하지만, 그건 거짓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어머니는 소년의 아버지가 누구인지조차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난 윤유리라고 해, 열 일곱 살.” 소년은 소녀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사창가의 여자들 모두 얼굴은 반반한 편이었지만, 소녀는 그 중에서도 손에 꼽힐만한 미모를 소유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녀는 이 곳에 사는 다른 여자들에게서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왠지 모를 기품까지 지니고 있었다. 소년은 그녀가 내민 손을 거칠게 쳐냈다. “너 따위랑 악수같은 거 안해. 더러워.” 짐승이 으르렁 거리듯 위협적인 말투였음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겁먹지 않았다. 더럽다는 말에도 기분이 상하지 않은 듯 싶었다. 소녀는 여전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무해, 딱 봐도 내가 너보다는 누나 같은데. 너 누나라는 말 하기 싫어서 이러는거지?” “꺼지라구.” “나, 남자한테 내 본명 먼저 말한 거 처음이야.” “......” “그러니까 인사해주라. 나 이 주변에서 너 자주봤거든, 친해지고 싶어서 그래.” “............” “빨리, 나 팔 아프단 말이야.” 소년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소녀의 얼굴에 맑은 웃음이 퍼져나왔다. “...... 신비원, 열 다섯 살이야.” 그것이 바로 햇살이 내리쬐는 윤락가에서 이루어진 소년과 소녀의 첫만남이었다. - 1년 후 “아가씨, 이렇게 새벽에 나다니다가 누가 납치해가도 난 모릅니다.” 뒤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유리는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녀의 예상대로 뒤에는 이미 키가 180센티로 자란 비원이 서 있었다. “기다렸잖아.” “엄마가 많이 아파. 주무시는 거 보고 나온거야.” 비원은 익숙한 듯 그녀의 옆에 앉아 자신의 겉옷을 벗었다. “자꾸 춥게 입고 나올거야? 누나 점점 내가 옷 벗어주는 거 즐기고 있어.” “들켰네, 니 옷이 되게 따뜻하거든.” “차라리 건물 안에서 만나자고 하지, 지하에 창고 하나 있잖아.” “싫어, 나 하늘보는 거 되게 좋아하잖아.” “어련하겠어, 누나 가명도 하늘인데.” 비원은 따뜻한 미소로 유리의 몸에 자신의 외투를 걸쳐주었다. “오늘은 이상한 손님 없었어?” 유리는 비원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그의 품에 기대어왔다. “요즘 누나 새벽에 나오는 일이 잦은 거 같애, 사장한테 들키면 혼나잖아.” “괜찮아, 니가 전에 사장님한테 대들어준 이후로는 많이 잠잠해.” “덕분에 나는 그 사장한테 멍이 들게 맞았구만.” “사장님이 너희 어머니 좋아하시잖아.” “우리 엄마 좋아하면 뭐해, 난 그렇게 두드려 맞았는데.” “에게, 멍 조금 든 거 가지고 되게 오버한다.” “엄마한테 사장이 때렸다고 일러바치려고 했는데 사장이 그거 먼저 알아채고 안 보이는데만 골라서 때려서 그래, 누나가 못 본 데도 많아. 나 등짝은 장난 아니었다니까. 화장실 거울로 봤는데 멍이 총천연색으로 물들었어, 무지개 색깔이었다니까.“ 비원의 농담에 유리는 소리내어 웃었다. 비원은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1년이란 세월, 소년과 소녀는 그 누구보다도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있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소년과 사창가에서 일하는 소녀.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온 그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사랑 뿐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평범한 생활을 꿈꿔왔지만, 그것은 정말 단지 꿈에 불과했다. 윤락가의 모두는 어린 그들의 깊은 사랑을 알고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감히 도와줄 생각은 할 수 없었다. 한창 피어나는 나이의 소녀는 소년의 어머니의 뒤를 이어 그 지역에서 알아주는 에이스가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비원은 말없이 유리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그 순간, 비원의 어깨에 무언가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누나... 울어?” 비원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어제... 손님이 나보고 같이 자자고 하더라.” “누나.....” “알지? 나 여기서 일해왔어도 아직 몸 판 적은 한번도 없었어. 나 무서워서, 그래서...” “.....걱정마, 누나. 사장이 나랑 약속했어, 누나 스무살 되기전에는 그런 일 안시킨다고, 그냥 접대만 하면 된다고... 약속했어, 누나... 누나 스무 살 되기전에... 내가 누나 데리고 나갈거야. 걱정하지 말고 나 믿어, 누나....“ 비원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유리는 이내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비원은 그녀를 안아주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난 정말 더러워, 정말 짜증나 죽겠어, 비원아....” “내가 볼 땐, 누나 세상에서 제일 깨끗한 여자야, 그런식으로 말하지마.” 비원은 그녀를 부드럽게 안아 키스를 시작했다. 눈물로 젖은 그녀의 뺨이 차가웠다. 그녀의 손은 비원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비원은 그녀를 향해 아주 작게 속삭였다. “힘 없는 남자라.... 정말 미안해, 누나.....” 52. 비밀 2 (작가시점) “죽기전에,... 그 사람, 한번 꼭... 보고 싶었는데.” “엄마, 괜히 말해서 힘빼지 마요. 지금 구급차 불렀어.” 비원은 어머니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어머니의 손을 놓게 되면 어머니가 어디론가 멀리 떠나버릴 것만 같았다. “비원아, 네 아버지는.....” “그만해, 엄마.....” 비원의 손이 가늘게 떨려왔다. 설상가상. 일주일 전에 유리의 울음 때문에 안 그래도 심란한 비원의 마음이 어머니의 갑작스런 병의 악화로 더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기다려, 엄마. 여기 골목 좁아서 구급차가 큰길까지밖에 못 들어올거야. 내가 가서 구급차 오나 보고, 사람들 빨리 데려올게. 좀만 참아.“ 비원은 어머니의 손을 놓고 재빨리 건물 밖으로 뛰어나갔다. 급하게 나가던 비원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사람과 부딪혔다. 비원과 부딪힌 여자는 손에 쥐고 있던 무언가를 떨어뜨리고 넘어져버렸다. “아, 죄송..... 어? 유리누나....” “.....비원아, 나 너 만나러 가려고.... 어디가?” “엄마가 아파, 구급차 불렀어." 비원은 급한 와중에도 대답을 하며 유리를 일으켜 주었다. 그 순간, 무언가 반짝거리는 물체가 비원의 눈에 들어왔다. 눈부시게 반짝이는 반지였다. 반지를 집어든 비원은 그것을 유리에게 내밀었다. “누나꺼야?” “아니, 그거... 사실, 비원아....” “가게 물건인가 보네. 잃어버렸으면 큰일날 뻔했다.” “비원아, 사실 나 청혼받았어, 자주 오던 손님한테.” 유리의 말에 비원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그에게 당장 중요한 것은 어머니의 안전이었다. “....잠시 후에 이야기해, 누나.” 비원은 유리에게 그 말을 남기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그것이 유리에게 건넨 비원의 마지막 한마디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그렇게 보고싶다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볼 수 없을 것이다. 화장한 어머니의 유골은 더러운 강물에 대충 뿌려졌다. 어머니의 마지막 길을 함께해준 사람은 비원과 마담아줌마 뿐이었다. “비원아,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리고 마담아줌마가 한 한마디는, 비원의 마음 속에 큰 파동을 일으켜놓았다. “네 아버지를 알고있단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처음 만났을 당시 대단한 부잣집 아들이었다고 했다. 친구들에 이끌려서 처음으로 술집을 와 본, 순진한 도련님. 그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눈이 맞았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하려 했지만 집안의 반대로 좌절하고 말았다.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집안에서 정해준 여자 A와 혼인을 해야만 했고, 어머니가 날 임신한 걸 알게된 후, A와 이혼하려 결심하고 그 계획을 실행하려 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내 어머니와 비슷한 시기에 A 또한 임신을 한 것이다. 아이핑계로 A와 이혼하려 했던 아버지는 어쩔수 없이 A와 계속 살고있다...는 것이다. “삼류드라마 같네요, 뻔한 스토리.” “그 남자, 결국 지금 아이 때문에 이혼도 못하고 계속 살았던 거야. 네 어머니도 그 남자가 이혼하는 거 반대했다. 자신 때문에 불행해질거라면서. 너는 자기가 잘 기를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그래서 넌 네 어미 성 따른거고.“ “............” “그 남자, 지금 니가 찾아가도 반갑게 맞이해줄거다. 그 집으로 들어가, 비원아. 내가 그 남자 집주소를 알고있다, 그러니까.“ “됐어요, 아줌마.” “.........비원아.....” “살던대로 살랍니다.” 비원은 마담아줌마의 의견을 무시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유리는 이미 떠난 후였다. “누나 어딨어.” 비원은 반 미친 상태로 업소 안으로 들어와 유리의 친구, 세연을 붙잡고 소리쳤다. “비원아, 나 지금 일하는 중이야.” “우리 누나 어딨어!!!!!!!!!!!” 세연은 손님들 앞에서 난동을 피우는 비원을 밖으로 끌고나왔다. “너 이렇게 장사 방해하면........” “우리 누나 어딨냐구.” “결혼했어.” “...........뭐라고?” “너희 어머니 돌아가신 날, 사실 그 날이 결혼식 날이었어. 그 날 유리가 너 찾아갔었지? 도망치고 싶었대, 너랑. 청혼한 남자가 준 반지들고, 그거라도 팔아서 너랑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대. 근데 그때 니 어머니 돌아가시고... 유리는 자기 탓 같았대. 자기가 옆에 있으면 니가 더 불행해질 거 같았다고. 그 기지배 성격알지? 너 다시 한 번만 보면 흔들릴 거 같다고 떠났어. 바보같은 년, 40먹은 아저씨 두 번째 부인 되는게 뭐가 좋다고 그랬는지 난 모르겠다.“ 빌어먹을 장면, 재생되는 아픔. 똑같았다, 유리는 비원의 어머니와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누나.... 어딨어......” “어디 사는지, 뭐하고 사는지... 이제 아무도 몰라. 그리고 이거, 유리가 너 전해주라더라.” 세연은 비원에게 작은 쪽지를 건넸다. 비원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쪽지를 폈다.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을거야. 너를 위해 떠난다. 우린 다음생에서 행복하자. 안녕, 비원아. 사랑해.] 유리의 눈물자국이 새겨진 작은 메모지에는.... 단지....... 그 말 뿐이었다. 비원이 삶이 그 순간 무너졌다. 비원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이 악물고 참았던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을만큼 흘러나왔다. 그는 결심했다. 이제 아무에게도 누나란 소리는 하지 않겠다고, 이제 그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겠다고. “망나니 같은 새끼, 왜 또 이 지랄이야!!!” “그러게 왜 나랑 한 약속 안 지키냐구요!!!!” “이 새끼야, 내가 유리 스무살 될 때까지 몸 안 팔게만 해주겠다고 했지, 언제 결혼까지 안 시킨다고 했어?“ “주소만 알려달라구요, 어려운 거 아니잖아요!!!!!!!” “모른다고 몇 번을 말해, 이 개새끼야!!!!” “유리누나랑 나랑 사귀는 거 당신도 알았잖아!!!! 돈에 홀려서 사람을 팔아?” “입 닥쳐!! 유리로서는 인생 핀거야, 너같은 새끼랑 사귀어서 유리가 더 나은 인생 살 수 있었을 것 같아? 그 사람 요구 거절하면 우리 업소도 파탄났어!!! 나로서도 어쩔수 없었다는데 자꾸 이 지랄이야!!!“ “........누나 주소 알려줘요.” “이 새끼가 정말!!!” 사장은 비원을 잡고 무지막지하게 때리기 시작했다. 비원은 그가 때리는 대로 가만히 맞고만 서 있었다. 이제 그에게 육체적인 아픔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벌써 1년째, 비원은 끈질기게 사장을 찾아와 유리를 내놓으라고 닦달을 해대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마지막은 저렇게 사장에서 얻어터지기 일쑤였다. 이제 비원의 어머니도 없는 마당이라, 사장의 폭력은 날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었다. 그러나 비원은 숨도 못 쉴만큼 얻어맞고도,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사장을 찾아와 유리를 내놓으라고 악을 써댔다. “너 자꾸 이럴거면 방 비워, 이 새끼야!! 지 엄마 생각해서 방도 내줬더니 날이 갈수록 개기고 지랄이야.“ 사장을 짜증을 내며 밖으로 나갔고, 비원은 입가의 피를 닦아내며 일어섰다. 비원이 힘없이 사장실 밖으로 걸어나오는 순간. 마담아줌마가 달려나와 비원의 팔을 붙잡았다. “왜요, 아줌마?” “비원아, 너....” “괜찮아, 이 정도 맞은 게 하루이틀이야?” “아니, 그게 아니구.....” “왜요?” 마담아줌마는 말없이 반대편 복도를 가리켰다. 비원의 차가운 눈길이 복도에 서 있는 중년의 한 남자에게 가서 박혔다. “비원아, 네 아버지다.” 53. 비밀 3 (작가시점) “잘 컸구나.” “불쑥 찾아오신 이유가 궁금하네요.” 비원은 빨리 카페 안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이런 카페나, 앞에 앉은 아버지라는 사람이나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비원은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면서도 긴장이 되는지 쉴새없이 다리를 떨어댔다. “....그 사람... 소식은 들었다. 미안하구나.” “뭐, 그게 그 쪽 탓입니까? 신경안쓰셔도 됩니다.” “내가 너에게는 정말 미안한 마음 뿐이다. 그런데도 내가 이렇게 찾아온 건... 정말 염치없지만... 너에게 부탁이 있다.“ 비원은 대답없이 눈만 치켜뜬 채 아버지란 사람을 바라보았다. 중년의 남자는 호리호리한 몸매에다 호남형의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짐작해봐도 젊은 시절 여러 여자를 울려봤을 법한 인상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잘나가는 사업가라, 완벽한 사람들을 볼 때 항상 느껴왔던 감정처럼 비원은 구역질이 났다. “나에게 아들이 있다. 네 어머니 말고... 지금 부인하고 내 사이에서 낳은 아들.” “........” “너와 동갑이야.” “.............” “너도 알다시피, 난 지금 대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원래 그런 자리에 있을수록 사람들 시샘과 위선은 높아지지. 생명의 위협을 받는 일도 한두번이 아니란다.“ 생명의 위협이란 말에 비원은 인상을 찌푸렸다. 처음 본 아버지지만 그가 죽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난 내 아들들이 행복하길 바란다.” “........” “그러나 지금 이 상태로는 힘들지. 부하직원들이 지금 여기저기서 나를 치고 올라와. 허울뿐인 회장자리지. 모든 걸 내가 이룩해왔는데 유지하기는 더 힘들구나. 난 곧 내 아들을 가출로 위장한 채 집에서 내보낼 작정이란다.“ “.......” “그게 더 안전하지. 지금 여기저기서 그 애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니까. 그래서 너한테 부탁하고 싶다. 돈은 부족하지 않게 줄테니까, 그 애와 너 둘이서 살면 어떻겠니?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말이다. 나나 내 아들을 제거하려는 세력이 없어지면, 내가 그 때 너희를 부르겠다. 그러니까 그 때 다같이 함께 살자꾸나. 일단 내 아들을 쉼터로 보낼테니까, 비원이 너는 거기서 내 아들과 접촉해라. 이게 내 아들 사진이다, 여기 뒤에 이름도 적혀있고..... 일단 이 애한테는 니 존재를 숨기고 그냥 친구처럼 다가서는 게 좋겠다. 이 놈 성격이 까다로워서 내 아들이 자기 말고 또 있다는 사실을 못 받아들일거야. 모든 일이 정리되고 나면 내가 직접 니가 내 아들이라고 밝힐테니까 그 전에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비원아.” “지금 그 쪽 아들 나보고 지키란 소리 아닙니까?” “그런 뜻이 아니다, 나는!!” “아들이면 사내새끼 아닙니까? 근데 그 새끼는 혼자 지 몸 지킬줄도 모른대요? 돈이든, 집이든, 가족이든 난 지금 아무것도 필요없습니다. 그 쪽 아들내미도 지 알아서 살아가라 그러시죠. 그럼 전 이만 일어서겠습니다.“ 비원은 냉정하게 말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발, 비원아, 부탁이다.” 아버지란 사람이 간절하게 비원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비원은 잔인하게 뒤돌아섰다. 이미 비원에게 있어서, 인생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었다. “비원아, 큰일났어!!!” 이른 저녁에 눈을 붙였던 비원은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에 힘겹게 눈을 떴다. 밤 12시. 찾아올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기에 그는 의아해하며 문을 열었다. 그 앞에는 유리와 가장 절친했던 친구 세연이 서 있었다. “뭐야, 갑자기? 일 안해?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비원아, 유리가.... 유리가.....” “.......왜? 유리누나 어딨는지 알아냈어? 무슨 일인데?” 세연의 눈에서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그녀는 쥐어짜듯 한마디를 내뱉었다. “....유리......... 자살했대.........” “뭐?” “널.... 못 잊겠다고.... 그 애.... 남편이 일하러 나간 사이에 집에서.... 목을....” 비원의 하늘이...... “불쌍해서 어떡해.... 우리 유리 불쌍해서 어떡해.... 비원아.....” 그의 하늘이..... “어떻게.... 어떻게..... 그 애가 자살을.....” 산산조각 나버렸다. 그녀의 아픔을 위로해주지도 못했는데, 찾아서 안아주지도 못했는데, 사랑한다고 제대로 말해준 적도 없었는데 그녀가 박살 나버렸다. 비원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낮게 중얼거렸다. “.......나... 이 집에서 나간다. 사장님한테는 잘 둘러대줘. 다신 보는 일 없을거야.” 비원은 술취한 사람처럼 휘청대며 건물 밖으로 나왔다. 자신의 하늘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는데, 머리 위의 하늘은 아무런 변화조차 없었다. “씨발!!!!!!!!!!!!!!” 메마른 비원의 목소리가 공허한 하늘에 울려퍼졌다. 열 일곱 살의 겨울, 비원은 떠돌이처럼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가끔은 돈을 훔치고, 노숙자처럼 길에서 잠을 청하면서.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기 앞에서 잠을 자던 노숙자가 덮고있는 신문의 헤드라인에 눈길이 박혀버렸다. [제일그룹 회장부부 사망.] 사망원인은 교통사고로 적혀있었으나, 비원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태어나서 딱 한번 밖에 보지 못한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을. 불현듯 아버지가 부탁한 누군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버지의 아들, 자신의 동생. 이제 비원에게 남은 유일한 혈육이라고는 그 뿐이었다. 비원은 결심했다. 동생을 찾아나서기로. 비록 그 동생은 비원이 자신의 형이란 사실조차 모를테지만. 비원은 품 속에서 아버지가 전해준 동생의 사진을 꺼내들었다. 정 따위는 없는 것처럼 행동했어도 형제라고는 없었던 비원에게, 동생이란 남자의 사진을 함부로 버릴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가출상태가 되어버린 비원의 동생은 지금쯤 엄청난 충격에 휩싸여 있을 터였다. 순식간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으니까. 쉼터에 가면, 그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유리를 잃은 비원에게 있어서, 동생은 이제 세상에서 지켜야 할 단 하나의 존재였다. 비원은 옛 기억을 되살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다 핀 담배를 땅에 떨어뜨린 비원은 아직 빨간 불씨가 남아있는 담배꽁초를 발로 짓밟았다. 시언이 막 들어간 집 안에서는 휴인의 감격에 찬 인사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시언도 오늘 하루가 힘겨웠던 듯 휴인과의 상봉을 즐기는 듯 했다. 비원은 집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고개를 들어 천천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실제로 비원은 아버지에게 ‘아버지’라 불러본 적이 없었으나 돌아가신 분에게 여전히 ‘그 쪽’이라거나 ‘댁’이라는 호칭을 쓰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비원은 차분하게 아버지라고 발음했다. 생소한 느낌이 몸 전체에 퍼져오고, 왠지 모를 눈물이 고였다. “저 잘하고 있는겁니까......” 낮고 고요한 비원의 목소리, 작게 떨리는 그의 손가락. 그렇다, 수많은 아픔 속에서도 비원은 아직 이 세상을 살아나가고 있었다. “지키기 위해..... 내 온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동생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비원의 자신의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있었다. 보호를 받는 역할은 비원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뒤에서 누군가를 지키는 사람이었다. 많이 헤맨 끝에 드디어 만나게 된 비원의 동생은, 그의 생각과는 달리 강한 남자였다. 비원은 굳이 동생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혀내지 않았다. 괜한 혼란을 유발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오직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힘없이 쓰러져간 비원의 주변사람과는 다르게, 모든 걸 잃고 혼자 남겨져야만 했던 비원과 그의 동생은 멀쩡히 숨을 쉬며 이 세상을 살아나가고 있었다. “맹세합니다......” 동생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아직도 동생을 없애려는 회사 사람들의 암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비원은 동생을 위해 동생의 역할을 자신이 뒤집어쓰기로 했다. 여차하면, 그를 대신해 죽어줄 수 있도록. 태어날 때부터 더러웠던 비원이 티없이 맑게만 자라왔던 동생을 대신해 죽어준다면, 동생은 더 이상의 위협없이 힘겨운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다행이었다, 자신이 죽더라도, 동생에게는 두 명의 친구가 더 남아있을테니까. “더럽고 좆같은 인생, 나.... 동생을 위해 이어가고 있는 겁니다... 아버지가 원하셨던 대로, 내 목숨 다해서 지킬테니까.... 그러니까 아버지도..... 어머니와... 유리누나를.... 지켜주십시오....“ 결국 비원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태어날 때부터 쭉 불행했던 비원과, 그의 동생 백민서. 비밀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그 때문에 모든 상처를 자신이 품어와야만 했던 비원과, 그의 동생 백민서. 아닌 척 하면서 동생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비원과, 그의 동생 백민서. 동생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준비를 하고 있는.... 비원과..... 아무것도 모르는 그의 동생..... 백민서. 54. 외출 “아싸~!! 오랜만에 쉬는 날이다!!” 방방 뜨는 휴인이의 목소리 덕분에 나 역시도 기분이 좋아진다. 오늘은 토요일. 애들 따라다니랴, 아파서 휴식 취하랴, 주동자 밝히려고 머리 써대랴... 정신사나운 날들이 흘러간 결과, 오늘은 내가 이 집에 눌러앉게 된 지 딱 일주일째다. “원래 주말에는 다들 쉬는 날이야?” 간만에 늦잠을 잤기 때문에 기분이 매우 상쾌해진 나는 아이들을 향해 물었다. “아, 일요일에는 각자 사정이 있어서 추가로 일하러 나갈 때도 있는데, 토요일은 무조건 쉬고 있어요.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특별히 보내고 싶어서.“ 여느때처럼 환영이가 차분하게 답해준다. 하긴, 일주일에 하루라도 안 쉬면 무너져버리겠지. 니들이 하고 있는 일이 보통 일도 아닌데. “근데 지금쯤 출발해야 되지 않겠어? 다들 슬슬 준비해.” 그때, 무심하게 중얼거리는 비원이. “정시언 너도 갈거지?” “응? 어딜?” “오늘 해커 애들 공연하는 날이야.” 아, 맞다. 그러고보니 산이가 오늘 해커 공연날이라고 오라고 했었지, 참. 그 쪼그만 아가들이 입술을 오물오물 대면서 랩이라는 것들을 종알거린단 말이지? 왠지 재롱잔치 보러가는 기분이구나. “그래, 그럼 다들 옷 입고 30분후에 나가자!!” 휴인이의 목소리를 준비 신호로 하여, 모두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자, 어디보자... 외출은 정말 오랜만인데, 나도 한 번 여자로서의 매력을 발산해볼까? 그래, 내가 안 꾸며서 그렇지, 꾸미면!!!! 꾸미면.... 뭐, 이온이보다는 못하지만... 민서보다는 못하지만.... 갑자기 우울해졌다. 나는 아무리 꾸며도 본판이 이쁜 기지배들한테 평생 밀리면서 살아야 하는 운명인 것인가? 그래, 그래도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생각에 나는 옷장에 쳐박힌 채 한번도 세상빛을 구경하지 못하고 잠들어 있던 나의 남색 원피스를 꺼내들었다. 그래도 내 키가 큰 게 다행이다. 기골이 장대한 건 마음에 들지않지만 키마저 작았으면 난 정말 내세울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을 지도 모른다. 못난 딸, 다리라도 길게 낳아주신 나의 어머니께 감사드린다. 남색 원피스에 긴 은색 목걸이를 걸어주고 뻗친 단발머리는 컨셉인 듯 그냥 자연스럽게 내비두니... 이것은.... 어디서 굴러먹던 거지인가..... 입술을 깨물며 내 절망적인 거울 속 모습을 한참 쳐다보다가 나는 진한오빠랑 헤어진 뒤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화장품을 뒤적거렸다. 내가 이래뵈도 진한오빠랑 만날때는 삶의 목표가 꾸미는 데 있었단 말이지. 화장따위, 내 손을 거치면 15분만에 완성할 수 있단 말이지. 시간은 충분하다. 심호흡을 한 번 내쉰 후 화장품을 든 손 끝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내가 바뀌어간다. 피부가 깨끗해져가고, 눈이 커지고, 속눈썹이 탄력있게 올라가고, 얼굴의 경계가 선명해지고, 뺨의 음영이 드러나고, 눈썹이 자연스럽게 휘어지고, 입술에 윤기가 돈다. 이것이 바로, 진한오빠와 연애중일 때 행복에만 휩싸여 있었던 정시언이라는 존재. 이제, 다른 남자를 위해 화장을 시도하게 된 정시언이라는 존재. 자꾸 눈물이 고이려는 눈을 향해 재빨리 손으로 부채질을 해댔다. 아이라인이랑 마스카라 번지면 큰일이지, 큰일. 사람이 참 이상하지, 참 가증스럽고, 참 신기하지. 어저께 그 사람 때문에 울다가도 오늘 다른 사람 때문에 웃는 게 인생인가봐. 그것도 이렇게 복잡한 상황에 얽매여있는데 말이야. 누군가 날 욕해도 난 그냥 받아들이겠어. 거울 속의 나를 향해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였다. 정시언, 잘할 수 있지? 반가워, 이렇게 행복한 나를 다시 만나게 되어서, 정말 반가워. “뭐야, 설마 지금 너 여자인 척 하는거냐?” 그렇다. 저것은 나의 모습을 처음으로 발견한 비원이의 말이었다. “와!! 누나 진짜 이뻐요!! 상상도 못했네, 누나가 화장하면 이런 모습이리라고는.” 감탄해주는 환영이. 그리고 저 멀리서 나를 멍하니 바라보는 두 존재는 휴인이와 민서. 훗, 짜식들, 뻑갔군, 뻑갔어. 속으로 만족하며 웃고있는 나를 향해 내뱉은 휴인이의 한마디는... “에이씨!!!!!!” 응? 뭐? 에이씨? 설마 욕한거니? 나를 향해? 내 이 모습을 향해? “아 짜증나, 짜증나!! 그게 뭐야!! 아, 빨리 화장지워!! 그게 뭐야, 진짜!!” 버럭버럭 승질내는 휴인이. 아니, 칭찬을 해줘야 정상 아니야? 뭐야, 이 상식 밖의 태도는? “아니, 왜... 이, 이상해? 환영이는 이쁘다잖아!!!” “이쁘니까 싫은거지, 병신아.” 그 순간 내 머리 위를 향해 씌워지는 야구모자. 급히 뒤를 돌아보았을 땐, 자신의 모자를 벗어 나에게 씌워준 민서가 애써 태연한 척하며 담배를 빼물고 있었다. “에.....? 저기... 그게.... 아, 그러니까...” 민서의 말과 행동에 놀라 우물쭈물 하는 나. 이상하다, 이 두근거림. 물론 휴인이만큼 나를 행복하게 하는 건 아니지만. 민서는 나로 하여금 묘한 설렘을 불러 일으킨다, 같은 여자에게 품는 감정이라고 보기에는 의아할만큼. 나는 멍하니 휴인이를 바라보았고, 휴인이는 잠시 민서를 바라보더니 다시 나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민서 말이 맞아. 너무 이뻐서 안돼. 민서가 모자 줬으니까 오늘은 그거 쓰고다녀. 다음부턴 화장 하면 안돼!!“ 나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더니 내 오른쪽에 떡하니 자리잡는 휴인이. “저기, 근데 원피스에 야구모자가 과연 어울리는 의상인지 생각은 해봤니?” “그러니까 원피스를 왜 입냐!!!” “아, 좀 입어봤다!! 왜!!!” “누나는 청바지가 제일 어울려, 그딴 치마 입지마!!!” “내 치마 내가 입겠다는데 니가 왜 그래!!!” “누나 내 꺼잖아!!” “내가 왜 니 꺼야!!! 난 내 꺼야!!!!” 결국은 휴인이와 나의 다툼으로 이어진 나의 화장. 그래, 내 주제에 꾸미기는 무슨, 젠장. 비원이와 환영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대문을 열고 급히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민서는 자연스레 내 왼쪽으로 와 서있었다. 그렇게 앞에는 비원이와 환영이, 그 뒤에는 좌민서, 우휴인을 거느리고 원피스에 야구모자 차림으로 거리 한복판을 걷게 된 바로 나, 정시언. “근데, 그러고 보니까 처음이네, 우리 이렇게 다 같이 외출하는 건.” 화장을 못하게 하는 민서와 휴인이에 대한 분노를 금세 잠재우고 들뜬 목소리로 소리치는 내 목소리. 과연 나의 이 즐거움이 이 첫 외출 때문인지, 아니면 잠시 후에 난생 처음 접해보게 될 공연 때문인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근데 휴인아.” “응, 왜, 누나?” “뿅망치 내려놔.” “싫어, 이거 내 꺼야.” “니 꺼란 걸 탓하는 게 아니라 쪽팔려서 이러는거다!! 야!! 대체 요즘 세상에 열 여덟살 먹은 남자애가 돌아다니는 장소마다 뿅망치 들고 있는 게 정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냐?“ “만화에 많이 나오는 변신하는 미소녀 누나들도 다 십대로서는 들고다니기 민망한 마법의 봉 들고다녔어!!!“ “아, 그래서 지금 니가 변신하는 미소녀라는 거야? 뿅망치가 너 변신시켜준대?” “누나도 화장했잖아!!! 그러니까 나도 뿅망치 들고 다닐거야!!!” “나는 니가 화장 싫어하는 줄 몰랐어!!” “나도 누나가 뿅망치 싫어하는 줄 몰랐어!!!” “모르긴 뭘 몰라!!!!!!” 휴인이와 나의 유치한 말싸움은 또 시작되어 버렸다. 내 큰 고함소리에 대항하기 힘든 듯 휴인이는 입이 삐죽 나온 채 혼자 궁시렁대고 있었다. “누나도 모르긴 뭘 몰라.... 쳇.” “아, 할 말 있음 큰소리로 해, 혼자 그렇게 좀스럽게 중얼대지 말구!!” “자기한테 매력있는 걸 자각 좀 하란 말이야!!!” 그 자리에 멈춰서더니 별안간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소리치는 휴인이. “..... 응?” “아, 몰라!!! 싫어, 짜증난단 말이야!!” “이 놈이 갑자기 왜 이렇게 승질이야!!!” “불안하단 말이야!!!!” “뭐가!!!” “이뻐서!!!!!!!!!” “뭐?” “누나가 이뻐서!!! 불안하다구!!!!” 갑자기 우리 사이를 휘감는 침묵의 공간. 휴인이는 곧 빨개진 얼굴을 감추려는 듯 앞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아, 썅, 토나와.” 그 모습을 목격한 비원이는 속이 거북한 듯 인적없는 골목으로 들어가 구역질을 시작했고, 환영이는 그런 비원이의 등을 두드려주고 있었다. 나는, 아무 표정없이 나를 바라보는 민서를 등진 채 쉴 새 없이 떨려오는 내 심장을 진정시킬 뿐이었다. 55. 건방진 그녀 “티켓은?” “어제 애들한테 받아놨어.” 생각보다는 허물한 한 건물의 지하에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비원이는 건물 앞을 지키고 서있는 사람들에게 티켓을 내밀었고, 우리는 곧 계단을 통해 건물 지하로 들어갈 수 있었다. 푸헤헤, 돈 내고 입장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들과 직접적인 친분이 있는 우리들은 공짜로 티켓받고 여기로 들어오는구나. 건물의 지하는 제법 공연이라는 짜임새를 갖춘 듯한 규모의 큰 홀이었다. 어두운 실내 안에서 색색의 조명이 어지럽게 돌아갔다. 한 구석에 마련되어 있는 작은 바에서는 음료수나 맥주가 제공되고 있었다. “목마르면 이 티켓 보여줘, 바에서 음료 줄거야.” 비원이가 건네는 티켓을 낚아채듯 가져오는 나. 낄낄, 그동안 술 못 마신지 한참 됐는데 아싸라뵤. “근데 여기 자리는 없어?”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비원이에게 물어보는 나. “언더공연에 무슨 자리를 찾아, 그냥 서서 보는거지. 저기 구석에 소파 하나 있으니까 정 다리아프면 저기 가서 앉든가. 공연은 30분 후에 시작이야, 지금은 그냥 분위기만 즐겨.“ 하긴, 주변을 둘러보니 그렇게 건전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앞에 마련된 무대 하나와, 서서 담배피거나 술을 마시는 고등학생 또래의 아이들. 어린 것들이, 콱 그냥 쥐어박아 버릴라. 붉은 끼가 도는 조명 때문에 잠시 정육점이 생각났으나, 나는 곧 그 생각을 지워버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 클럽이나 다름없네. 클럽음악이 아니라 랩을 라이브로 들려준다는 것만 조금 다를까.. 공연이라 거창하게 생각했는데 이런 분위기면 나도 좋아하지. 뭔가 익숙하네, 그래, 저기 이온이도 있고 말이야.... 응? 뭐? 잠깐만, 이온.... 이온이??? 뭐야, 정이온 저 기집애가 여기 왜 있어!!!!! 순간 번개를 맞은 듣한 충격이 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잘못 본 것이길 기대하고 내 눈을 몇 번이나 비비고 비볐으나, 저 구석의 소파에서 도도하게 앉아있는 사람은 내 동생 이온이였다. 마치 춤추러 온 듯 온갖 노출을 감행한 기집년들과 달리 내 동생은 교복 차림이었다. 그러나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이온이는 그 공간 안에 있는 다른 여자들보다 월등히 예쁜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 순간, 날라리 패션의 남정네 둘이 내 동생에게 접근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아직 공연이 시작되지 않아 음악따위는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그 날라리들이 내 동생에게 작업거는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뭐야, 아가씨 혼자왔어?” “아직 학생인가봐? 교복 입었는데도 제대로 섹시하다?” 저 썅노무 새끼들을 당장 제거하기 위해 내가 달려나가려는 순간!!! “내가 섹시하긴 하지.” 내 동생의 저 당당한 말투를 들은 나는, 이 재미있는 상황을 조금 더 즐겨보기로 했다. 그래, 괜히 여기서 이온이를 구하러 튀어나갔다가는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휴인이, 환영이, 민서, 비원이가 수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싸가지 없는 내 동생 이온이로서는 저 상황을 극복한 게 한 두 번이 아니었을 터였다. “아주 당당한 게 내 맘에 드네? 어때, 우리랑 같이 노는 게? 혼자왔어?” 능글맞은 날라리의 질문. “혼자 오긴 했는데 너는 내 타입이 아니네. 주제를 알고 들이대야지. 지금 그 몰골을 가지고 내가 너랑 놀아주길 바래? 꿈이 크네. 면상 갈아엎고 와봐. 혹시 알아, 내가 한 번쯤 가지고 놀아줄지? 내가 등쳐먹는 애들도 너처럼 막 생기진 않았거든.“ ............ 자, 모두 박수. 저 싸가지 없는 애가 내 친동생이어요~ “뭐? 와, 이 년이 뭐래냐? 이쁘다고 살살 나가줬더니 지금 장난까냐?” 날라리 새끼의 손이 점점 올라간다. 안돼, 썅!!! 내가 지금 튀어나가도 늦겠다. “휴인아, 비켜봐, 저것 좀 막아!!!!” 라고 내가 소리치는 찰나, 누군가가 날라리의 손을 강하게 붙잡았다. 내 동생 이온이는 여전히 당당한 태도로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그 상황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 그래도 다행이다. 이온이가 맞았으면 난 저 날라리 새끼 죽여버렸을거야... 라고 생각하며 내가 이온이의 생명의 은인을 쳐다보았을 때..... “어? 산이?” 그렇다. 이온이를 날라리의 손아귀에서 구한 건 이온이에게 한 눈에 반한 우리의 산이었다. “공연 보러왔으면 공연이나 쳐보고가지?” “..... 기, 김...산?” “남의 공연 보러왔으면 공연이나 쳐보고 가지, 웬 지랄이냐고, 응?” “아, 저...저기, 저 팬입니다!!!” “난 너 같은 팬 없어. 돈 물러줄테니까 지금 바로 꺼져.” 산아....!! 너 그렇게 카리스마 있으면서 왜 이온이한테는 꿈쩍 못하는거니!!! 공연의 주인공인 산이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홀 안은 금세 시끄러워졌다. “뭐야, 저 여자앤?” 그리하여, 나와 같이 있던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시선도 이온이를 향해버렸다. “산이 저 놈, 웬만하면 대기실에 쳐박혀서 연습할텐데.” “쟤 산이 여자친구야?” “와, 이쁘긴 이쁘네, 산이 능력 좋다!!” “이쁜 정도가 아닌데? 연예인들 사이에 끼어있어도 얼굴로만 보면 1등 먹겠다.” 차례대로 이어진 비원이, 민서, 휴인이, 환영이의 말에도 난 그저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다시 시선을 이온이의 쪽으로 옮겨보았다. 산이는 결국 날라리 둘을 공연장 밖으로 쫒아낸 직후였다. 그리고 이온이를 향해 돌아섰는데, 그의 얼굴은 이미 빨갛게 익을대로 익어있었다. 큰일이네, 해커에서 산이를 지지하는 팬들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고 있어. 다들 이온이를 노려보고 있다구!!!! “저, 저, 저기!!! 그러니까... 또, 또 뵙네요!!!!” “누가 도와 달랬어요?” 내 동생이지만.... 저 앙칼진 년. “예.... 예?” “왜 끼어드냐구요, 내가 고맙단 말이라도 해주길 바래요?” “아니, 그게 저는... 불편하실까봐.....” “참견 잘하시네요. 그딴 거 필요없거든요? 제 얼굴에 달려드는 놈들이 한둘인 줄 알아요?” 이온이의 제일 큰 단점은.... 자기가 이쁜 걸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있다는 것이다. “와, 여자애 열라 드세다. 그지, 누나?” 휴인이가 나를 향해 중얼댔지만 나는 그 어떤 맞장구도 칠 수 없었다. “거 참, 너무하네.” 그리고 또 등장한 다크호스!!! 그건 바로 이온이의 사랑, 열음이었다. 여느때와 다름없는 그의 갈색머리와 초록색 눈은 오늘도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쪽은 고맙단 말도 모릅니까? 도와준 사람한테 괜히 틱틱대기나 하고.” “그러니까 누가 도와달랬냐구요.” 이온아, 니가 열음이를 좋아하면 좀!!! 좀 굽히고 들어가주란 말이다!!! 니가 누군가를 좋아한 게 처음인건 이 언니가 인정한다. 내 평생의 한이다, 이온이에게 누군가를 좋아하는 법을 가르쳐줬어야 했다. “너 내가 좀 알아봤는데.” 열음이는 위협적인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이 근방에서 유명한 애던데, 파파라치로.” “남 뒷조사나 하고 다녔어요?” “정보수집이라면 내가 좀 일가견이 있어서.” “그래서요?” “또 무슨 사진 건지러 온거면 포기하고 집에 가라.” “이딴 조그만 공연에서 건질 게 있기나 있니? 뒤져봐, 카메라 따위 안가져왔으니까.” 순식간에 반말을 찍찍 해대며 싸우게 된 열음이와 이온이. 그 중간에서 쩔쩔매는 산이. 어디 있는건지 보이지도 않는 준휘. 이미 사람들은 몰려들대로 몰려들어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해커의 산이와 열음이 있었고, 그 지역에서 알아준다는 얼짱 이온이가 있었으니까. 그 순간 이온이의 도도한 눈빛과 나의 걱정스런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이온이는 나에게 피식, 웃음을 날렸다. 그리고는 열음이를 향해 중얼거렸다. “나도 정보수집이라면 좀 하는데.” “.........” “뭐, 대충 니가 왜 그러는지 알겠어. 내가 여기 온 걸 왜 두려워하는지. 내가 그 사진 찍으면 그래, 난리나겠지. 경찰에 넘기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아, 설마.... 열음이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를 지키기위해 이온이를 돌려보내려 한 것일까? 이온이가 파파라치 짓이라도 해서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사진을 찍으면 곤란해진다. 사진을 찍어서 경찰에 넘기면 놈들의 몽타쥬 만들기는 식은 죽 먹기니까. 그리고 이 안의 사람들중에 경찰 관계자나 신고자라도 있으면 곤란해진다. 물론 지금 경찰은 나를 믿고 있기에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수사에 전력을 다하고 있지 않는 상태지만, 내가 스파이란걸 모르는 열음이로서는 어떻게든 형들을 지키고 싶었으리라. “걱정마, 내 옛날 과외선생님도 있는데 내가 그리 무식하게 굴겠니?” 이온이가 말하는 저 ‘옛날 과외선생님’은 나겠지? 이온이는 내 왼쪽에 서 있는 민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신비주의자라더니, 모자 벗은 건 처음이네.” “너 조용히 안해?” 대담하게 여러 가지를 까발리는 이온이와, 그녀를 제지하려는 열음이. 중간에서 여전히 쩔쩔매는 산이. “이쁘다더니, 뭐야, 내가 더 낫네.” 그리고 여기서도 발휘대는 이온이의 공주병. “뭐야? 쟤 지금 나한테 말하는거야?” 응, 민서야. 너한테 말하는거야. “좋아, 오늘은 내가 이만 가지. 아, 근데 내 과외선생님한테 이 말 좀 전해줘. 은색 목걸이 내꺼라고. 없어져서 한참 찾았다고.“ 헉, 이거 내가 몰래 지 방에서 빼내온거 어떻게 알았지? 눈치도 빠른년. “올해는 원피스에 야구모자가 유행인가? 그럼 바이바이~” 산이와 열음이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고는 도도하게 밖으로 나가버리는 이온이. 그녀의 당당한 모습에, 그 안의 모든 사람들은 할 말을 잃었더랬다. 56. 비상탈출 나는 이온이가 사라진 자리를 계속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그 때 이온이의 옆에 있던 열음이와 내 눈이 마주쳤고, 열음이는 집게손가락을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댔다. 비, 비밀로 하라는건가? 이온이의 존재를? 왜? [관계자 외 출입금지] 애들이 이온이 존재에 대해 신경쓸까봐? ...... 도대체 왜, 해커 저 애들은 [관계자 외 출입금지]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거야? 대체 서로가 서로에게 무슨 영향을 주고 있길래? “원피스에 야구모자? 누나 말하는거 아냐?” 생각에 잠겨있는 나를 향해 묻는 휴인이. “응? 아니!!! 나 그런 여자애 처음보는데!! 나 그런 애 몰라!!!!” 강하게 이온이의 존재를 부인하는 나. “아까 그 여자애가 하는 말... 뭔가 의미심장하지 않았어?” 그러나 무언가를 의심하는 민서의 한마디. “아까 나를 쳐다보더라니까? 모자 이야기도 하고.” “우연이겠지.” 담배 하나를 빼물며 중얼거리는 환영이. “우리 존재를 아는 거 아냐?” “설마.” “열음이가 괜히 나설 애가 아니잖아.” “백민서, 너 남의 연애사에 신경쓰는 거, 한 번으로 족하다.” 냉정하게 흘러나온 비원이의 목소리. 민서는 입술을 깨물며 비원이를 노려보더니 작게 욕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때였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다!!!” 누군가의 큰 고함소리. 순식간의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들에게로 몰렸다. 아니겠지, 아니겠지, 우리를 뜻하는 게 아니겠지, 라는 나의 얄팍한 바람을 무시하고, 순식간에 여자아이들이 구름같이 이 쪽으로 몰려들었다. “씨발.” 처음듣는 환영이의 욕설, 환영이가 빼물고있던 담배가 땅에 떨어지는 즉시, 민서가 내 팔을 이끌고 무대위로 올라갔다. “내가 이상하다고 했잖아.” 신경질적인 말투로 민서는 무대위에서만 들어갈 수 있는 비상문을 열어제꼈다. “여자 둘인데, 누가 백민서야?” “백민서 모자 벗었다!!!!” “휴인오빠!!!!” “저 사람이 신비원이야?” “범죄자잖아, 재수없어.” “쟤들이 여기 왜 있어? 범죄자도 공연 보러오나?”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외모에 대한 찬사, 또는 범죄에 대한 비난. 두 갈래로 갈라져 맹렬하게 내 귀 속을 파고들었고.... 민서와 내가 비상문을 통해 들어서자 그 뒤를 이어 비원이가 들어왔고, 휴인이와 환영이가 마지막으로 들어와 사람들이 밀려드는 비상문의 문짝을 몸으로 막았다. 비상문은 대기실로 이어져 있었던 듯, 태평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는 준휘와 상황을 직감하고 지금 막 대기실 안으로 들어온 산이와 열음이가 있었다. “오늘도 공연 쫑!!” 그 말은, 분위기 파악 따위 하지 않고 지 멋대로 사는 듯한 준휘의 명쾌한 상황설명이었다. “이러다 해커까지 의심받겠다구요. [관계자 외 출입금지]가 해커 팬이라는 건 영광인지, 불행인지 좀 생각해봐야겠는데.“ “닥쳐, 지금 그런 말 할때야?” 다급한 비원이의 표정. 모르겠다, 여기서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정체가 드러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내가 도대체 어느 상황을 아는 척 해야 하고, 어느 상황을 모르는 척 해야하는지. 이 자리에서 그들과 함께 도망쳐야 하는지, 그들을 빼돌려줘야 하는지. “아까 그 기집애 누구야?” 비원이는 무서운 표정으로 열음이에게 물었고, “그냥 어쩌다 알게 된 애예요.” 열음이는 복잡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이온이와 나의 연결고리를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이온이가 내 과외를 받던 학생이라고 설명했을 시 난처해질 내 입장과, 혼란스러워할 형들의 심정을 생각해준듯 싶었다. 열음이 입장에서는 이온이는 다시는 보고싶지 않은 성가신 존재일 터였다. 나의 위험도는 해커나, 관계자 외 출입금지 놈들 모두 짐작하고 있는 바였으므로 내가 가진 위험요소는 어느 정도 감수하고, 더 이상의 폭탄은 껴안지 않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눈치채고 있었다. 내가 아이들을 파악한 것보다, 이미 아이들이 나에 대해 파악해놓은 정보가 더 많을 것이란 사실을. 정보가 불필요해진 상황에서 생각따위는 불필요했다. 상황은 두 가지다. 이 아이들이 날 더 믿어주거나, 내가 이 아이들을 더 사랑하거나. 전자라면 아이들은 자수하는 방법을 택할 것이고, 후자라면 난 이 아이들을 탈출시킬 것이다. 이젠 그냥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기지배, 우리를 어떻게 알고....” “일부러 튀는 행동 따위 안했어!! 시언누나도 있었으니까 네 명도 아니었고!! 눈치챌 수 있는 상황 따위 애초에 근절시켰는데!!!!“ 비원이와 환영이가 한마디씩 내뱉고.... “파파라치하는 여자애니까 정보입수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겠죠.” 하여튼 정이온 이 망할년!!! 꼭 일을 쳐요, 일을!!! 괜히 내 상황만 더 복잡하게 만들고 말이야!!! “일단 빠져나가야지. 눈에 띄어서 좋을 건 없으니까.” 뭐랄까, 신적인 존재...라고 하면 타당한 표현이 될지도 모르겠다.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관계자 외 출입금지]는 신적인 존재였다. 그 신이 나쁜 신이든, 착한 신이든, 일단 본 것만으로도 굉장한 충격이 되는 존재. 낮에는 이들을 보게되고 자기들끼리 쉬쉬하며 넘어가더라도, 사람이 감정적으로 변하는 이런 밤에는, 거기다 주말의 공연장에서 보게 되는 이런 특별한 이벤트에서, 사람들은 이 신적인 존재를 한번이라도 잡아보려고, 느껴보려고 열광하게 되는 것이다. “하하, 누나 되게 놀랐겠다.”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나를 향해 웃는 휴인이. 지금 비상문을 막느라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내 손이 지금 민서에게 잡혀있는 것을 알면서도 애써 웃어준다. “우리가 왜 피해야되는 지는 알지, 누나? 굳이 설명할 필요 없어서 좋네. 역시 누난 최고의 여자야.” 휴인이의 말에 심장이 바늘에 찔린 듯 아파왔다. 휴인이는 알고있다, 내가 경찰의 스파이란 사실. 그 사실 따위는 아랑곳않고, 그는 말한다. 굳이 상황설명할 필요없어서 편하다고, 내가 그런여자여서 다행이라고. 니들이 범죄조직인 거, 내가 알아봤자 좋을 게 없잖아. 난 힘들어 죽겠는데, 그런 말 웃으면서 하지 말란 말이야, 제발. “어쨌든 바톤 터치.” 휴인이가 말하자 열음이와 산이가 급히 달려와 비상문을 막았다. 아직까지도 [관계자 외 출입금지]를 외치는 여자아이들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온다. “우리 연예인 하면 인기 최고겠는데? 하긴, 범죄자가 연예인 된단 소리는 못 들어봤지만!!” 휴인이 자식, 이젠 대놓고 내 앞에서 ‘범죄자’란 말을 잘도 꺼낸다. 열음이와 산이 덕분에 휴인이와 환영이는 비상문을 막는 임무에서 벗어났고, “탈출해봅시다!!!” 라는 휴인이의 즐거운 비명에 준휘는 웃으며 대기실에서 이어진 또 다른 문을 열어제꼈다. 밖이다. 건물의 뒷문으로 이어지는 골목길. 그리고, “누나 때문에 형들 위험해지면, 나 누나 용서안합니다.” 준휘가 내게만 들리도록 나지막히 말한 무시무시한 음성. 준휘의 눈과 내 눈이 동시에 마주쳤을 때, 민서가 내 손을 끌며 골목길로 내달렸다. 그러나 충격에 휩싸인 나의 발걸음은 그녀의 힘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여기서 시간 끄는 것도 순간이야. 조금 있으면 애들 몰려올거야, 빨리 뛰어.” 나를 설득하듯 말을 꺼내는 민서. “누나, 일단은 우리 말 들어. 집에가자, 뛰어, 응?” 내 뒤에서 중얼거리는 휴인이. 그 순간, 열음이와 산이의 힘이 다한 듯 비상문에서 물밀듯 공연을 보러온 관객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뛰기 시작했으나 민서와 나의 손은 서로 놓쳐버린 지 오래, 복잡한 오거리에서 휴인이, 환영이, 민서, 비원이는 각자 다른 방향으로 뛰었고, 그들을 쫒는 사람들도 여러 갈래로 뿔뿔히 흩어졌다. 그리하여, 결국 길가에 휭하니 남은 건 나 하나 뿐. 몰려오는 더운 기운에 나는 민서가 준 캡모자를 벗었다. 휴인이도 알 거 아냐, 내가 경찰의 스파이면 당분간 자신들은 경찰의 관심 밖일텐데 굳이 저런 사람들한테 휩싸일 것 같다고 도망칠 필요가 있나? 물론 저 사람들이 사진 찍어대고 인터넷에 올려대면 문제는 있겠지만. 그리고 아까 준휘의 그 말은 뭐야? 해커 애들도 내 정체를 알아? 아니면 이온이를 그 자리에 끌어들인 게 나라고 생각하는 건가? 점점 복잡해지는 생각을 멀리하려 애쓰며 터덜터덜 걸었다. 모든 문제의 발단은 정이온, 고 년이야. 아니, 내 일을 망치려고 작정을 했나. 너는 단순히 준휘의 관심만 끌어보려고 한 행동이겠지만, 그건 이 언니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단 말이다!!! 그저 하늘을 향해 한숨만 폭폭 쉬어대고 있는 나를 향해 어떤 우렁찬 목소리가 크게 소리쳤다. “시언아!!! 시언아!! 정시어어어언~!!!!!!” 술에 몹시 취한듯한 한 남자의 목소리. 뭐야, 저건? 나는 주정뱅이랑 친분이 없는데....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을 때 내 눈에 띈 건.... “와~ 이게 무슨 인연이냐... 우리 시언이를 여기서 다보네.... 시언아.. 시언아아..” “....지.... 진한오빠?” 57. 최악의 밤 골목길에 위치한 작은 포장마차. 그 곳에서 내 이름을 애타게 불러대는 저 남자, 이진한. “시언이 맞냐? 너 시언이 맞지.... 아, 정시언, 정시어어어어언!!!!” 모르는 척 지나가야 했다. 당연히 그래야했고, 그게 옳았다. 그러나 상당히 많이 취한 그의 모습에 난 홀리듯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가 그의 옆자리에 살포시 앉았다. 상대가 강한 모습일 땐 강하게 맞서기 쉽지만, 상대가 약하게 나올 땐 나 또한 약해지고 만다. 그것도 내가 심적으로 굉장히 혼란스러울 때는 더 약해져버린다. 더구나, 옛날에 내가 목숨을 바쳐 사랑했던 사람 앞에서는. “미쳤니? 술을 대체 얼마나 마신거야?” “어? 시언이 맞다!!!! 진짜 시언이다!! 화장도 하고, 지금 내가 타임머신을 탔나.. 예전에 시언이 모습이랑 똑같다... 어? 근데 너 머리 왜 이렇게 짧아!! 머리 누가 자르래!!!!“ 아예 정신 놔버린 이진한. 울부짖는다, 내 이름을 외치면서. “아, 정신 좀 차려, 왜이래, 무슨 일 있어?” “두 달 전에 내가 진짜 사랑한 여자가 있었는데, 시언아.... 너랑 나랑 1년을 사귄건데... 1년인데, 그거 긴 시간인데... 넌 어떻게 꼬맹이랑... 그것도 지금 막 범죄 저지르고 있는 꼬맹이랑....“ “먼저 약혼한 주제에 그런식으로 말하지마.” 답답한 마음에 나는 진한오빠 앞에 있는 소주를 병째로 들이켰다. “약혼? 아, 약혼!!! 아, 그래 약혼... 오빠가 했지, 약혼 했다!!! 근데 시언아, 그건 니가 이해해줘야 되는 거거든.... 알지? 오빠는 가진 게 좆도 없는거.... 오빠는 일단 먹고 살 걱정부터 해야되서.. 주린이한테 갈 수밖에 없었다... 오빠도 힘들었다... 누구보다 밝은 너 버리고 가기 힘들었다고!!! 성공하기 위해선 어쩔 수가 없었어, 주린이한테 갈 수밖에 없었어. 그 애는... 그 애는.... 대단한 애니까.... 나 횡재했지? 되게 거물인데... 내가 걔 잡았는데....“ 진한오빤 언제나 그랬다. 성공에 눈이 멀어있었다. 어릴때 가난했던 게 한이라고 했다. 그러나, 왜 그로인해 버려지는 게 나여야만 했을까. 왜 성공을 얻기위해 날 버려야만 했을까. “아줌마, 여기 소주 한 병 더요!!!!” 끓어오르는 분노에 나는 크게 소리쳤다. 옛 연인 둘이서 우연히 포장마차에서 만나 서로의 넋두리 중이라.... 정말 지랄맞은 상황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근데 시언아.......... 나 왜 계속 니 생각이 나냐.............” 심장이 멈춰버린 기분. 침착하려 애써도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너 주린이보다 못하잖아아~~~~~ 근데 왜 나는 계속 니 생각이 나냐고오!!” .... 죽여버릴까, 이 인간? 꼭 내가 더 못하단 소리를 해야겠니? 애틋한 마음으로 변해가던 내 마음을 꼭 이런 살의로 바꿔야겠냐고!!! “그 여자... 좋은 여자잖아. 나도 내 마음에서 오빠 지우기로 결심했어. 그러니까 오빠도 그래줬으면 좋겠어. 오빠 말대로, 선주린은 나보다 훨씬 나은 여자니까, 오빠가, 오빠 힘으로... 행복하게 해줘.“ 선주린 때문에 오빠와 헤어지고나서도 그녀의 편을 들어야만 하는 내가 못마땅해져서 아줌마가 가져다주신 소주를 다시 병째로 내 입안에 밀어넣었다. 콸콸콸, 내가 무슨 망나니도 아니고.... 소주 병째로 들이키는 건 대학 신입생 시절때 빼고 처음이네. 근데 알아, 진한오빠? 나도 많이 힘들었거든. 나 그 애들 만나고나서 갈피를 못잡겠거든. 힘들어서, 힘들어서.... 너무 외로웠거든. 아니, 혼자 있을 틈이 없어서 더 외로웠어, 오빠. 무슨 뜻인지 알겠어? 그 애들의 다정함이... 어디까지 진실인지, 어디까지 거짓인지.... 그걸 가늠하다보면... 나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아. 이 스파이 짓..... 하는 게 아니었어. 진심에 기뻐하고, 거짓에 무너질 줄 알았다면... 이 짓 하는 게 아니었어. 더 미치겠는 건, 오빠... 나도 그 애들한테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거야. 때로는 진심을 보여주고, 때로는 거짓을 보여주고... 더러워.... 사람이 하는 짓들, 다 되게 더러워.... “나는 너 못 지워, 시언아... 니가 나한테 어떤 여잔데.. 난 너 못 지워... 시언아... 너 그 새끼 사랑해? 너 그 꼬맹이 사랑해? 아니지? 너 그런 애 아니잖아. 너 잠시 외로워서 그 새끼한테 기댄거야. 작전상 그 애한테 잘해줘야 할 필요가 있어서 잠시 사귀게 된 거야. 너 제자리로 돌아올거야, 그지? 너 그럴거지?“ 물 마시듯 소주 한병반을 들이켜버린 나는 급속도로 취해갔다. 내 앞에서 진한오빠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듯한 환각이 보였다. “내가... 도라가도... 내가 제자리로 돌아가도 오빠는 안 오꺼잖아.....” 혀가 짧아지기 시작했다. 내 술버릇, 혀짧은 소리 내기. 드디어 시작되었다. “그냥 사랑하면 안되냐.... 나 주린이랑 결혼하고.. 사랑은 계속 너랑 하면 안되냐... 나 되게 뻔뻔한 거 아는데, 시언아.... 잘할게, 내가 잘하면 되지....“ “와, 존나 이기적이네.... 오빠 이기적이다...” 그 날은, 술이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는 걸, 내게 똑똑히 각인시켜준 날이었다. “................ 사랑해, 시언아............” 오빠의 한마디에.... 힘이 쭉 빠져버렸다. 진한오빠와 헤어진 뒤... 그 말을 듣기를 고대하고 희망했었다. 꿈이 아닌 현실에서, 술에 취한 오빠가 내게 말한다. 사랑한다고. 나는 들고있던 소주병을 놓쳐버렸고... 진한오빠는 점점 내게 다가왔다. 오빠의 입술이 가까워온다. 피해야 한다. 피해야 해. 나에겐 휴인이가 있고, 난 휴인이랑 사귀고 있고... 그리고 여자이긴 하지만 민서도 날 좋아하니까... 이런 장면 싫어할건데.. 나 그러니까.... 집에 가야하는데..... “사랑해, 오빠...........”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인다. 이러면 안되는건데..... 나에겐 휴인이가 있는데.......... 근데... 근데 진한오빠..... 사랑해...... 억제해오던 감정이 폭발하듯 넘쳐흘렀다. 휴인이가 내게 사랑의 감정으로 다가온 것은 사실이지만 달랑 일주일간 알고지낸 휴인이와, 1년동안 사랑해온 진한오빠의 존재무게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취기는 더더욱 올라 나에게 이성이 존재할 공간을 남겨두지 않았다. 나는 결국 오빠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오빠와 사귀던 예전의 기억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왔다. 아이들은 이미 쫒아오던 사람들을 따돌린 채 집에모여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나만을 걱정하며 , 오지않는 나를 찾으며, 담배를 뻑뻑 피워대고 있을 텐데... 그러나 못난 정시언은.... 아이들을 놓친 후 포장마차에서 만난 옛 연인과 키스 후, 결국 향했다. 주변에 즐비하게 늘어서있는 모텔로 향해버렸다. 그 날은 내 인생 최고의 실수였다. 있어서는 안될, 저질러서는 안될, 최악의 실수였다. 나는 그 날, 휴인이에게 큰 죄를 저지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목말라...” 밤새 술기운 때문에 뒤척거리다 잠에서 깨어났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숙취를 달래면서 간신히 눈을 떴을 때... 나는 절망했다. 어제밤의 모든 기억이 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막을 틈도 없이, 미처 막을 틈도 없이 순식간에 재생된 기억. 급히 내 옆을 바라보았을 때, 진한오빠는 없었다. 내 몸은 여전히 옷가지 하나 없이 벌거벗은 채였다. 그리고 침대 머리맡에 놓여진 쪽지와, 그 위에 적힌 진한오빠의 필체. [미안하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없었던 일로 했으면 좋겠다. 나 먼저 가볼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라. 차비 두고 갈게.] 휘갈겨쓴 글씨와 대조적으로 곱게 놓여진 2만원. 이진한, 너 끝까지... 사람 비참하게 만든다.... “미쳤어, 정시언......” 죽어버리고 싶은 기분에 쉴 새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정시언............ 미쳤어...........”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지저귀는 새소리가.... 미친듯이 원망스러운 날. 혼자 있는 이 곳이 무서워서 견딜 수 없는 날. 사랑했던 사람에게 또 다시 버림받은 날.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줘버린 날. 내 생애 최악의 날. 절망의 날. 58. 사랑바보 내가 무슨 정신으로 모텔에서 나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마도 주섬주섬 옷을 주워입었겠지, 도망치듯 얼굴을 가린 채 모텔에서 나왔을테고. 정처없이 터덜터덜 걷기만 했다. 이 상태에서 집으로 들어가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 나는 한 순간에 망가질 게 뻔하니까. 진한오빠가 나에게 남기고 간 차비 2만원은 모텔에 그냥 두고 나와버렸다. 나, 그 돈 받으면 정말 더러운 년 되는거 맞지? 돈 때문에 이진한이랑 밤을 같이 보낸 그런 년 되는 거 맞지. 한숨을 쉬며 얼굴을 감싸쥐었다. 물론 처음은 아니다, 진한오빠와 모텔에 가고, 서로 관계를 맺은 것도. 그러나 그 때는 진한오빠도 나도,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이였다. 지금처럼 헤어져놓고도 쓸데없는 미련에 이끌린 상태가 아니었다. 짐승, 진한오빠만 욕할게 못돼, 정시언 너도 미쳤어, 짐승, 짐승같은 년. 구역질 나. 머릿속에 휴인이의 얼굴이 불쑥 떠올랐다. 순간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앞으로 그 애의 순수한 얼굴을 내가 어떻게 마주대할 수 있을까. 휴인아, 누나 미쳤지. 나한텐 니가 있는데, 너를 사랑하고, 난 너랑 사귀고 있는데 다른 남자랑 함께 밤을 보내버렸어. 그래, 예전에 사귀던 남자친구랑. 나 되게 더럽지, 이 사실 니가 알게되면 누나 꼴 보기도 싫을거야, 그치? 나 변명할 자격도 없다, 명백히 내 잘못인걸. 나 왜 이렇게 너한테 미안한 짓만 계속하게 되는건지.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휴인아. 빈털터리였던 관계로 집까지 그 먼 길을 걸어와야만 했다. 오늘따라 날씨는 흐림, 덕분에 얇은 원피스를 입은 내 몸은 오들오들 떨리는 중. 아, 어떡하지? 민서 모자 잃어버렸다. 내가 하나 사줘야겠네. 어제 술 마시다가 포장마차에 두고왔나? 아니면 모텔에 던져놓고 왔나? 사고만 있는대로 치는구나, 정말 미치겠다. 이제는 정겹게 보이는 녹슨 대문을 보며 심호흡 한번. 숨을 내쉬고, 다시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쉰 후, 대문을 열어제끼는 나. 그리고 내 눈에 보인 건, 한 눈에 봐도 불안정한 표정으로 담배를 펴대고 있는 민서. 그녀의 발에 널려있는 담배꽁초들. “야!!!!!!!!!!!!!!” 피고있던 담배를 바닥에 내팽개치며 내게로 달려오는 민서. “너 뭐야!!!! 너 어딨었어!!!! 우리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애들 지금 다 너 찾으러 나갔어. 저녁때도 밤새 기다리다가 꼭두새벽부터 너 찾는다고 나가서. 난 니가 혹시라도 집에 올까봐 아무것도 못하고 여기서 기다리구. 어제부터 걱정을 있는대로 했었는데 너 정말 자꾸.......“ “....................” 민서 얼굴을 보자마자 말문이 막혀버렸다. 웃으려고 했는데, 웃으면서 길을 잃었다고, 태연히 넘겨버리려고 했는데. “..................... 너 자꾸..... 걱정시킬래......” 민서는 아무말없이 고개를 숙인 내 모습에 작게 중얼거리고. “..............미안.........” “..................... 다친 데 없냐.” “............ 응.” 한숨을 내쉬고는 입고있던 옷을 벗어 내게 덮어주는 민서. “........... 나 화났어. 화 풀린거 아니니까 안심하지마.” “................ 응.....” “일단 화내는거 보류. 마음 약해지게 왜 오들오들 떨고그러냐.” “............... 미안해, 민서야.... 모자 잃어버렸어...... 내가 다시 하나 사줄게.” “병신, 지금 모자가 문제냐. 나 모자 많어, 걱정마.” “..............미안......” “....... 어제 어디서 뭐했어.” 일부러 화난듯 퉁명스레 말하는 것 같아도 지금 민서의 목소리엔 걱정이 베어있다. 나는 쓰러지듯 민서의 품에 기댔다. 잠시 멈칫하던 민서는, 곧 아무 경계없이 자신의 품을 내주고... 그제서야 안정이 된 나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려버렸다. 민서는 이따금씩 한숨을 쉬긴 했으나, 나름대로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떨리는 듯한 민서의 손이 점점 나를 감싸안으려 하는 순간.... 쾅- 하고 열리는 대문과, 문이 열리는 동시에 나타난 여섯 사람의 형체. 말할 것도 없이 그건 휴인이, 환영이, 비원이, 그리고 해커 3명. “정시언!!! 너 어떻게 된거야!!!!” 나를 보자마자 큰 소리를 내지른 건 비원이. “에? 뭐야? 길 잃은 건 아니었나보네. 지금까지 형들한테 달달 볶이면서 찾으러 다녔는데. 누난 핸드폰도 꺼놓고 뭐했어요? 거봐요, 내가 어떻게든 집까지 찾아온다고 조금만 더 기다려보랬잖아요.“ 심각한 다른 이들의 표정과 달리 너무나도 태평한 얼굴로 무심하게 중얼대는 준휘. “됐어, 너희들 가봐.” 그러나 진지한 분위기의 위험성을 인식한 환영이가 급히 해커 아이들을 내보내고... “너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긴 아냐?” 해커가 나가자마자 나에게 소리 지르는 비원이와, “그만해.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잖아. 누나, 다친 데 없어요? 아픈 데도 없는거죠?” 그런 비원이의 옷깃을 잡으며 다정하게 내게 묻는 환영이. 그리고 아직도 민서의 품에 안기다시피 한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휴인이. 반대편을 향해 긴 한숨을 내쉰 휴인이는, 곧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고, 내 손목을 휘어잡고는 우리집으로 잡아 이끌기 시작했다. “휴인아........!!” 차마 잡힌 손목이 아프다고는 하지 못하고 휴인이의 이름만 불러댔으나 역시 아무 말 없는 그 놈. “그 손 놔.” 민서의 무시무시한 말조차 무참히 씹어버린다. “내 말 안들려? 그 손 놓으라고, 강휴인!!!!” “넌 닥치고 있어.” 민서만큼이나 화난 듯한 휴인이는 기어이 그녀를 향해 거친 말을 해버린다. 순간 중심을 잃은 내가 휘청거리자 휴인이를 너무나도 가볍게 나를 양 팔로 안아들었다. “누나랑 나랑 이야기 좀 할테니까 니들은 좀 빠져주라.” 차갑게 한 마디 내뱉은 놈은 나를 안고서 우리집 안으로 쑥 들어와 문을 잠가버린다. “휴인아................” “나 지금 무지 화났거든.” “............” “누나 못 지킨 게 너무 화나서, 어제 벽에다가 내 머리 한 스무번은 박았고. 그렇다고 경찰에 신고도 못하고. 우리가 헤어진 그 사거리에서 누나 혼자 울고있을까봐 서른 번도 넘게 다녀왔어, 지금도 애들이랑 흩어져서 동네 다섯바퀴 돌고 온 길이거든.“ “미안해, 휴인아.” “내가 지금 누나 땅바닥으로 확 던져버리면 누나 허리 부러질지도 모르는데. 어떡할까? 나 확 누나 떨어뜨려버릴까?“ “...........미안해.....” “지금 결정해, 내 소원 하나 들어줄래, 아님 허리 못쓰고 몇 달동안 누워있을래?” “뭐든 상관없어, 난... 난 너한테 너무 미안한 게 많아서, 휴인아...” “그래, 그럼 내 소원 하나 들어주는 걸로 하자.” “난 그럴 자격도 없어, 화난거 억지로 안 참아도 돼, 휴인아. 나 때리고 싶음 때려. 나 니들한테 잘못한 거 알아. 걱정시킨거 너무 미안해.“ “돌아왔잖아. 왔으니까 됐어. 나 화난거 거의 다 풀려가.” “그게 아니야, 그렇게 바보처럼 나 믿지 좀 마!!!” 도리어 화난 휴인이보다 더 크게 소리쳐버린 나. “내가 어제......... 무슨 짓을 했는데.... 내가 어제 너한테 얼마나 미안한 짓을 저질렀는데.” “...........누나...” “진한오빠를 만났어.... 같이 잤어.... 나 그렇게 더러운 짓 했어, 너랑 사귀면서 그런 짓 했다구. 나 용서 안해도 돼, 내가 잘못한 거 알아.“ 확 굳어지는 휴인이의 표정. 모르겠다. 숨기려고 했던 사건을, 왜 휴인이에게 시시콜콜 털어놓고 있는 건지. “뭐? 야, 정시언!!!! 너 뭐라 그랬어!!! 야, 너 다시 한 번 말해봐, 뭐라고!!!!??” 눈물만 흘리는 나와, 침묵을 지키고 있는 휴인이와 달리, 밖에서 저렇게 난리치고 있는 건 민서. 방음따위 되지 않는 집이라, 환영이나 민서, 비원이에게 우리의 대화가 고스란히 들렸으리라. “다시 한 번 말해봐, 그 개새끼가 그런 짓 한 거야, 응?” 소란스러운 밖의 소음은 무시하고, 휴인이를 향해 작게 중얼거리는 나. “내가 원했어, 나도 원했어, 내가 나쁜년이야, 휴인아... 그러니까 넌 나 용서하지마, 그냥 니가 빨리 나 차버려, 나 미안해서 니 얼굴도 못 쳐다보겠으니까... 그냥 니가 나 좀 빨리 차 줘.“ 헤어지기 싫다, 휴인이와 헤어지기 싫다. 그러나 휴인이와 계속 사귀기엔 내 죄책감의 크기가 너무나도 크게 자라있었다. 처음 사귄 여자친구가 이 모양이라니, 휴인이의 실망이 어느정도일까. “그래, 헤어지자....” 무표정한 얼굴로 결국은 내게 이별을 고하는 휴인이. 내가 자초한 일이지만 슬픔을 내 안으로 밀려 들어왔고, 덕분에 눈물이 치솟았다. “누나같은 여자 못 만나겠다, 힘들어서. 헤어지자.” 휴인이는 다시 한 번 이별의 말을 반복한다. “너희 둘이 지금 장난하냐? 야, 강휴인!!! 뭐라는 거야? 진짜 헤어진다고? 아, 썅!!! 답답하니까 일단 상황 설명 좀 하자, 씨발!!! 문 좀 열어봐!!!“ 휴인이가 내게 내뱉은 헤어지자는 말 덕분인지 잠잠해진 민서 대신 이번에 시끄러워진 건 비원이. “헤어진 건 헤어진거고, 일단 내 소원은 하나 들어줘야겠는데, 누나.”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꼴이 또 어디 있을까. 남자에게 안겨 울고있는 여자, 남자에게 안겨 이별을 통보받은 여자, 남자에게 너무 미안해서 자기를 차달라고 부탁해버린 여자, 그리고 그 헤어진 여자를 안은 채 소원을 들어달라고 말하는 남자. 그들을 밖에서 지켜보고 있는 친구들 세 명까지. “응.... 말...해....” “눈물 닦아, 나 기분 이상해져.” “아니야, 그냥.... 조금 눈물나다 금방 멈출거야, 신경쓰지마.” “......... 후, 내 소원 꼭 들어줘야돼. 못 들어준다거나, 좀 힘들다거나... 나 그런 말 듣기 싫으니까 그렇게는 말하지마.“ “...내가... 들어줄 수 있는거야?” “무리한 거 안 시켜.” 휴인이의 소원이라. 짐작이 간다. 스파이를 그만두라거나. 자기 눈 앞에서 사라지라거나... 뭐, 그런 식의 말이겠지. 근데 휴인아, 난 그 소원 들어주는 게 제일 겁난다. 너희들 못 보고 살면, 나 살아도 사는 게 아닐 것 같은데. “응, 말해... 들어줄게.....” 눈물을 멈추려 애쓰며 손등으로 눈가를 쓰윽 훔치는 나. 그리고 그런 나를 향해 살짝 인상을 쓰며 중얼댄 휴인이의 한마디는.... 그의..... 한마디는...... “저랑.... 다시 사겨주십시오.” 바보..... 완전 바보.... 바보 강휴인. 59. 지금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너무 놀라서 멈춰버린 눈물로 내가 그의 얼굴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아씨, 원래는 질투나니까 민서랑 자주 놀지 말라는 말 하려고 했는데.” “휴인아....” “나 비원이 표정 상상된다. 벌레 씹은 표정 하고 있을거야, 구역질 난다고, 그치?” “강휴인.... 너 지금.” 나를 너무 감싸주는 놈이 바보같아서 내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자 휴인이는 그저 나를 향해 싱긋 웃어보였다. “왜이래, 너 나한테 왜 이래, 나 나쁜 여잔데 왜 이렇게 잘해줘?” “음, 그러게. 누나 나쁜 여자인거 나도 아는데!! 내가 왜 이러지?” “나한테 너무 잘해주지 마, 휴인아... 나 너한테 이렇게 사랑받을 자격없어.” 내 말에 손가락으로 가볍게 내 이마를 퉁, 튕기는 휴인이. “누나가 이뻐서 이러는 게 아니구요,” “............” “그냥 내 본능입니다.” 어린 주제에, 열 여덟살 주제에, 범죄자 주제에, 멋진 척 혼자 다하지 말란 말이야. “그냥 보면 잘해주고 싶은 걸 어떡하냐. 그냥 보면 좋아서 미치겠는데 어떡하냐. 혼내주고 싶어도 누나 얼굴 막상 보면 안고 싶어지는 걸 어떡하냐. 헤어지고 싶어도 누나 없으면 내가 못 살겠는데 어떡하냐. 사랑안하고 싶어도 그냥 누나만 보면 심장이 막 뛰는데 어떡하냐.“ “.......... 병신.” “나도 알아, 나 병신인 거. 나도 그렇게 생각해.” “바보같애.” “바보는 아니다. 나 이러는 거 사실은 되게 이기적인거야. 나만 생각하는 거야. 내가 누나 사랑해서 내 옆에 잡아두는 거니까.“ “.............” “누나, 이제 나.....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을거야.” 갑자기 진지하게 변해버린 휴인이의 눈빛. “잃을 것도 없었지만, 그래서 섣불리 험난한 세상으로 뛰어들었지만, 또 나에게 있어서 점점 소중한 게 늘어나버렸어. 누나도 그렇고, 친구들도 그렇고, 나 자신도 그렇고.... 나 이제, 아무것도 뺏기기 싫어. 이제 내가 먼저 지킬거야.“ 진심이다. 휴인이의 저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지금 내뱉은 말은 진심이다. “그리구 누나. 이건 그냥 제안하는 건데요.” 순식간에 슬퍼지는 그의 눈동자. “우리 그냥 아무 생각 하지말자.” 멈추려던 눈물이 다시 왈칵 쏟아져버렸다. 휴인이도 힘들었겠다 싶어서, 그 애도 얼마나 아팠을까 싶어서. “있잖아, 머리 아파서 죽겠더라. 난 누나 사랑하는데, 계속 누나를 보면 다른 생각 하게 돼서. 나도 그런데 누나도 그렇겠지. 나를 볼 때, 우리를 볼 때 계속 다른 생각 하겠지, 거기까지 생각하니까 나 되게 짜증나더라. 왜 우리는 평범하지 못한건지, 왜 이래야 되는지.“ “휴인아.....” “사랑할 땐, 그냥 아무 생각 안하면 안되나? 난 그러고 싶은데, 난 앞으로 그럴건데. 누나한테도 강요는 하는 거 아니야, 난 그냥.... 그냥 난 누나....“ “............” “평범함을 선물 받고 싶은거야.” “.............휴인아....” “난 달랐거든, 누나. 어릴 적부터 항상 그랬어. 내가 바란 건 그렇게 큰 게 아니었거든.” 아무 것도 해줄 것이 없었다. 그저 휴인이의 이름을 계속 불러주는 것 외에는. “사람답게 살고 싶었어.” “...........” “응, 난.... 내가 바라는 건 그거 뿐이었어.” “......... 그만해....” 니 마음 아픈 것도 바라지 않고,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린 너를 동정할 나도 싫어. 너를 더 사랑할까봐, 나 무서워, 휴인아. “난 엄마도 없었고, 아빠도 병들었었고, 동생은 바보같이 착하기만 했어. 돈 버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는데 집은 철거될 위기에 놓이고, 아파도 병원 한 번도 못 가고... 난... 아니, 우리 가족은... 그랬어.“ “...............” “누나 그런거 알아? 죽고싶은데... 죽지도 못하는 그런 거. 아픈데.... 아프지도 못하는 그런 거. 힘든데... 힘들지도 못하는, 그런거.“ “..............” “내가 요즘 그래.... 그래서 나, 평범하고 싶어. 적어도 사랑할때는, 누나 얼굴 보고, 누나 생각 하고, 누나랑 같이 다닐 때는, 정말 다른 사람처럼“ 내가 먼저 휴인이의 목을 끌어안아 키스했다. 마음이 아파서, 어려서부터 외로워야만 했던 그 놈이 안쓰러워서. 내가 조금 더 너를 일찍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더 빨리 위로해주고, 더 빨리 사랑해주고, 더 빨리 안아줄 수 있었을거야. 너를 보면 내가 힘들어, 너무 행복하게 산 게 미안해서... 힘들어, 휴인아. 순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주는 휴인이. “미안해, 이렇게 더러운 채로 너랑 키스해서, 어제 다른 남자랑....” 문득 생각난 진한오빠의 생각에 휴인이를 다시 밀쳐내려 했으나.... “더러운 거 내가 다 가져갈래.” 그는 망설임없이 키스를 이어간다. “나는 지금, 정시언을 보고 있어. 경찰이 보낸 스파이가 아닌, 내 여자 정시언을.” 진지하게 중얼거리는 휴인이. 나도 바라던 바야. 나도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르지. 근데 휴인아, 니가 먼저 이렇게 말해주니까 나도 너를 믿고 앞으로 걸어갈 자신이 생겨. 한 번 해보자. 우리 결말이 어디로 향해갈 지 모르지만 우리만 믿고 가보자. “누나는 지금, 누굴 보고 있어?” “...............” “아직 열여덟살에 불과한 꼬맹이? 지명수배 붙기 직전의 범죄자? 미래가 불투명한 문제아? 막노동하면서 실실 웃는 바보? 운 더럽게 없었던 달동네 소년? 아니면.......... 그냥 인간 강휴인?“ “너를 보고 있어...... 그냥 인간 강휴인. 내가 사랑하는 남자. 난 그냥 너를 보고있어.” 사람들은 바보같다고 할 지도 모르지만, 스물 두 살의 정시언은, 네 살 어린 한 소년에게 이 순간. 내 인생을 걸어버렸다. 아니, 걸어버리기로 작정했다. “백민서!!!!!!!!!!!!!!” 그 순간, 찢어질 듯 날카롭게 들려오는 비원이의 고함소리. 휴인이는 놀란 듯 계속 자신의 품에 안겨있던 나를 내려놓아주고, 나는 곧바로 잠겨있는 문을 열어젖혔다. “뭐야, 왜 그래?” 휴인이의 물음에.... “아니, 민서가 갑자기 말없이 뛰쳐나가서....” 걱정스러운 눈빛의 환영이. 당연하겠지, 예전에 사귀던 사이였으니까. “내가 쫒아가볼까?” “됐어, 내가 소리쳐도 뒤도 안 돌아보고 그냥 가는데. 그냥 냅둬라, 지도 생각이 있는데 엄한 짓이야 안 저지르겠지. 괜히 강휴인이랑 정시언 질투나서 저러는거다.“ 걱정하는 환영이와 무심한 비원이. “환영이 넌 면회하러 가 봐, 이제 누나도 왔으니까, 민서는 신경쓰지말고.” 내 방에서 나오며 환영이를 향해 중얼거리는 휴인이. “비원아.” “됐다, 난 백민서 어딨는지 감도 못 잡겠다. 그냥 혼자 둬. 정시언처럼 뛰쳐나가서 안 들어오는 기지배가 아니라니까, 백민서는.“ 나를 노려보며 말하는 비원이. 지금 눈이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다. 어제 저녁에 이어 오늘 아침도 나를 찾아다니느라 심신이 지친 모양이다. “그리고 난 이제 슬슬 일하러 가야지.” 기지개를 쫙 펴는 비원이. 팔다리가 길어서 무슨 행동을 해도 우아해보인다. “저기, 내가... 가볼까, 민서 찾으러?” 망설이며 건넨 내 말에... “됐어, 넌 그냥 앞으로 말 없이 사라지면 우리한테 구박받을 준비나 해라. 괜히 추한 꼴이나 되가지고 집에 기어 들어오고. 너 오늘 휴인이한테 안 혼났으면 내가 가만 안뒀을거다. 나가서 사고 좀 치지마, 누가 강휴인 여자친구 아니랄까봐 사고치는 건 똑같애. 처신 잘해. 니가 못하면, 강휴인이랑 백민서 둘 다 망가져.“ 무심한 듯 하면서도 나에 대한 걱정이 느껴지는 비원이의 말. 오늘은 반발 못한다. 명백히 이런 잔소리 들을만한 짓을 저지른 건 바로 나니까. 내가 네 살이나 많은데, 왜 이 아이들에게는 항상 꼴사나운 모습만 보여주는 걸까. “그럼 민서는 내가 찾아볼게.” 한숨쉬며 중얼대는 휴인이. “어떡하지, 누나 혼자 못 두겠는데.” 그래놓고 나를 돌아보며 굉장히 고민되는 표정을 지어보인다. “됐어, 내가 애도 아니고, 혼자 있을 수 있어.” “혼자 두면 가출할거지?” “장난하냐.” “환영이 따라가.” 좋은 생각에 난 듯 손뼉을 딱!!치며 말하는 그 놈. “뭐?” “환영이 오늘 바쁘니까 따라가서요, 이쁜 여자애들 좀 만나고 와. 되게 착한 애들이니까 좀 보고 배워. 누나보다 어려도 아는 게 많아. 가서 걔들 만나고 오늘 한 짓 좀 반성해.“ 설마.... 지금 휴인이가 만나고 오라고 하는 아이들이... 휴인이와 환영이의 여동생? 전에 환영이가 한 번 같이 면회가자고 한 적은 있었지만... 그래도 오늘 같은 날, 괜찮을까? 너무 갑작스러운데. “휴인아, 그건 좀.” 역시나 만류하는 환영이. “괜찮아, 환영아. 나 누나랑 그냥 아무 생각없이 사랑하기로 했다.” “..............” “서로 아무 생각 안하고 그냥 사랑하기 위해서. 제일 처음 해야하는 행동이 숨기지 않는 거, 그거 아닌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주는 거.“ “............” “드라마같은 거 보면 다 이렇게 말하던데.” 진지한 분위기에서 난데없이 드라마 이야기를 꺼내며 눈을 찡긋, 해보인다. 그 말만을 남기고 휴인이는 대문 밖으로 뛰쳐나가버렸다. 그 뒤를 이어 비원이도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한다. “나도 일하러 간다. 밤에 보자.” 그렇게 해서 남겨진 건 환영이와 나. 이윽고 결심한 듯, 환영이는 옅은 미소를 건네며 내게 중얼거린다. “우리도 가죠, 누나.” 발을 내딛는다. 휴인이와 환영이의 여동생을 향해. 그들의 과거를 향해. 60. 강유인 피곤하지만, 졸리지는 않다. 나를 혼자 두지 않으려 한 휴인이의 배려가 새삼 고마워진다. 휴식을 취한답시고 집에 나 홀로 있었으면 할 수 있는 건 눈물 흘리는 것 뿐이었을테니. “병원부터 가려구요, 괜찮아요?” “난 아무래도 괜찮은데, 니가 안 괜찮아보여, 환영아.” 내 말에 피식 웃어보이는 환영이. 그러나 사실이다. 그의 안색은 창백했고, 잠을 못 잔 듯 눈도 충혈되어 있었다. “항상 이래요. 동생들 만나러 가기전에는 좀 긴장이 돼서. 잘 있나 싶기도 하고. 이번엔 누나 사건도 조금 겹쳐서, 어제 잠이 안 오더라구요.“ 갑자기 미안해진다. 나는 이러나 저러나 다른 이들에게 걱정만 끼치는 존재란 말인가. 진한오빠, 오빠는 지금 무슨 생각 하고있어? 나, 그냥 더러운 거 한 번 봤다고 생각하려 해. 오빠도 마찬가지겠지? 선주린하고 결혼할 오빠에게 난, 귀찮은 존재니까. 오빠에게 나는 지우고 싶은 과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니까. “누나, 옛날 이야기 하나 해줄까요?”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중간에 이어진 어색한 침묵이 싫었는지 환영이가 먼저 내게 말을 건넨다. “잠을 자기 전에 항상 생각나는 장면이 있어요. 굉장히 허름한 집이 한 채 있죠. 난 그 안으로 급히 들어가요. 그럼 그 안에 두 소녀가 있어요. 아니, 다른 사람들도 있지만 내 눈 안에는 두 소녀만이 보이죠. 둘 다 떨고있어요. 정말 무섭고 두려운 듯이. 둘 다 나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게 느껴져요. 나를 보자마자 울거든요. 아니, 한 명은 원래 울고 있었지만 더 미친듯이 울부짖고, 나머지 한 명은.... 울지는 않았지만 울듯한 눈으로 날 바라봐요. 울고 있는 소녀의 몸에는 피가 묻어있고, 울 듯한 소녀의 손에는 칼이 들려있어요.“ “응? 왜? 한 소녀가 다른 소녀를 찔렀어?” 내 말에 고개를 저으며 슬프게 웃어보이는 환영이. 때마침 버스가 왔고, 우리는 그 위로 올라섰다. 외진 동네라 버스 안은 한산했고, 환영이와 나는 맨 뒷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그는 이야기를 계속 시작했다. “정말 착한 여자애가 있었어요. 어느 정도였냐면, 너무 착해서 걱정될 정도. 같은 반 친구가 점심을 굶고 있으면, 자기가 싸온 도시락을 줘버렸어요. 웃긴 건요, 자기도 도시락 싸가는 날이 많지 않았다는 거예요. 자기도 항상 굶으면서, 같은 반에서 친하지도 않는 아이가 굶는 건 못 보는 거죠. 그 애한테 오빠가 있었거든요, 그 오빠는 동생한테 맨날 화를 냈어요. 착한 건 좋다, 그런데 제발 너부터 먼저 생각해라, 세상은 니 생각처럼 만만하지 않아, 라고 혼내고, 혼내고, 또 혼내고. 오빠한테 혼나면서도 그 여자애는 언제나 착한 행동만 했어요. 어제 혼나서 울어놓고도,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면 또 착한 짓을 했죠. 어느 날, 참다못한 오빠가 또 화를 냈대요. 언제나 울던 소녀가 그 날은 안 울었대요, 그리고 오빠한테 한 마디 했어요. 오빠, 나 알고있어. 세상은 오빠가 말한 것처럼 만만하지 않아, 하지만 난 이렇게 살거야. 세상에는 나 같은 사람도 필요한거야. 오빠, 오빤 세상에 언제나 불만이 많지만 난 그렇지 않아. 난 충분히 세상이 아름답다고 생각해. 그래요, 그렇게 웃으면서 말했다네요.“ 환영이가 지금 동생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휴인이나, 환영이나 동생들의 이야기를 할 땐 남의 이야기처럼 말을 시작한다. 지금 등장하는 저 착한 소녀가 누구의 동생일까 생각하다가 그냥 그만두었다. 아까 휴인이와 한 약속처럼 괜한 잣대로 미리 이리 재고, 저리 재는 짓 따위 하기 싫었다. 슬프게 흘러갈 그 이야기를 대강 알고있기에 마음은 벌써부터 아파왔지만, 난 묵묵히 듣기로 했다. 이야기를 막는다면, 환영이가 먼저 무너져버릴지도 모른다. 우리 이온이하고는 참 다르구나, 그 여자애. 물론 나와 비교해도 다르고. 가진 게 없어도 착하게 잘 자란 아이들. 그래서 내가 부끄러워. 너희에게도, 너희 이야기에 등장하는 소녀에게도. “근데, 그 착한 게요. 결국은 문제가 되어버렸어요. 그 달동네에 철거명령이 내려왔거든요. 철거를 감독하는 감독관이 왔어요. 그 소녀한테 소리쳤대요, 빨리 집비워, 기계에 깔려 죽고싶지않으면 빨리 나가는 게 좋을거다, 그렇게 고함치고, 협박하고. 여자애는 미안하다 그랬대요. 그게 생각해보면 미안한 게 아닌데. 갈 데도 없고, 살 데도 없는데, 그렇게 나가라고만 하는 감독한테 도리어 화내지도 못하고 미안하다고 그랬대요. 지금 아빠가 아파서 주무시고 계시니까 제발 조용히 하고 가달라고. 빌었대요, 그 미친 게. 그러니까 그 감독관이 물 한 잔만 달라고 했대요. 또 그 착한 게 남이 힘든 건 못 보잖아요. 그 남자가 미워도, 그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물을 가져다줬대요. 근데요. 그 남자가 갑자기 방 안으로 그 여자애를 끌고 들어가더라네요. 덮치려고 했대요. 여자애 옷을 막 벗기더래요, 병든 그 애 아버지도 보고있는데. 아버지가 우시더래요. 당연하겠죠, 딸이 당하고 있어요. 집을 강제철거하려는 감독관한테. 근데 그 아버지는 딸을 지키기는커녕 일어설 힘조차 없었죠, 근육이 굳어서 말도 못하시는 분이었으니까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짐승, 짐승같아. 사람이 사람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오늘 너무 울어서 더 이상 울기 싫었는데, 환영이 이야기가 나를 또 울려버린다. “옷이 찢겨나가는데, 옷을 그 남자한테 빼앗기면서도, 그 여자애는 말했어요. 죄송해요, 이러지 마세요. 제발 이러지 마세요, 부탁이예요. 진짜 바보죠. 심할 정도로 바보죠. 너무 착한 게 그 애의 단점이었어요.“ “환영아.....” “나중에 내가, 피에 묻어서 덜덜 떨고 있는 그 여자애한테 다가갔어요. 불쌍할만큼 막 떨어요. 진짜 그 애를 지키지못한 나를 죽이고 싶게, 안쓰러운 거예요, 미칠만큼.“ “..................” “피에 젖은 그 애가, 그런 험한 일을 당한 그 애가, 결국은 정신병원으로 끌려갔는데요. 가면서 나한테 한 마디 했어요. 오빠, 미안해요. 씨발, 끝까지 미안하대요. 끝까지 잘못했대요. 누나, 말할 수 있어요? 그 여자애가 잘못한 게 뭐예요?“ 어떡해.... 어떡해....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차라리 혼낼 걸 그랬죠, 누나. 휴인이가 자기 동생 혼낼 때, 나도 같이 혼낼걸. 그렇게 착하면 안된다고, 같이 모질게 한 마디 했어야 되는데. 왜 그러냐고, 애 잡겠다고, 그냥 화내는 휴인이를 말렸어요.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냥 같이 뭐라고 할걸.“ 휴인이 동생이구나. 그 착한 소녀가 휴인이 여동생이었구나. 미치겠다, 정말 미치겠다. 눈물이 떨어질 거 같아서 고개를 뒤로 확 젖혀버렸다. 그러나 조금 흥분한 듯 보였던 환영이는 다시 자신을 안정시키며 버스의 벨을 눌렀다. “내려요, 누나. 우리 유인이 보러 가요.” 정신병원의 이미지는 언제나 언덕 위의 흰 집이었다. 친구들끼리도 우스갯 소리로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았으므로. 외진 산길이긴 하지만 언덕위에 위치한 건 아니고, 그냥 거대한 큰 병원으로 보인다. 병원 입구를 들어가자마자 음산한 기운이 나를 감싼다. 병원 안을 돌아다니는 많은 환자들이 보인다. 그냥 사람인데, 나와 똑같은 사람. 저 많은 사람들은 각자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까. 환영이는 간호사들과 친한 듯 그녀들과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한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면회하러 떠나면서 환영이에게 물었다. “휴인이 동생... 이름이 유인이야?” “네, 이름부터 되게 착해보이지 않아요?” “응.... 그러네....” “아무것도 몰라요. 내가 가도 아는 척 안하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거죠. 휴인이가 오면, 자기 오빠라고 아는 척도 하고, 오빠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러는데. 나중에 병 다 나으면 한 대 때려줘야지. 웃기죠? 면회는 맨날 내가 오고, 자기 챙겨주는 것도 내가 다 하는데, 나는 알아보지도 못하고, 지 오빠만 신경쓰고.“ 어두워진 내 표정을 눈치챈건지, 일부러 밝은 표정으로 웃긴 이야기를 하는 환영이. “유인이요, 사실 그렇게 이쁜 얼굴은 아니예요. 휴인이 아버지가 굉장히 잘 생기셨는데, 휴인이는 아빠 닮았거든요. 근데 어머니는 아니셨나봐요. 휴인이 낳고 바로 집을 나가셨다고 해서, 나도 휴인이 어머니 얼굴은 못 뵜는데, 어른들이 이야기 하기로는 유인이가 어머니 닮았다고 하더라구요. 누나가 처음보면, 진짜 휴인이랑 남매맞나, 싶을 거예요. 나는 동생이라 뭐, 마냥 귀엽긴 하지만. 유인이는 어릴 적에 마을에서도 어른들이 좋아하고 그랬어요, 착하다고. 휴인이가 인기 진짜 많았거든요, 유인이도 잘난 오빠 둔 덕분에 인기는 많았지만, 뭐랄까, 휴인이가 외모 때문에 인기 많은 거에 비해서 유인이는 착한 거 때문에 인기가 많았죠.“ 어린 시절의 너희를 보고싶어. 분명 다들 굉장히 귀여웠을거야. 내가 감싸줄 수 있었을텐데, 나는 그 때 과연 뭘 하고 있었을까. 나랑 이온이는 서로 설거지 당번 내기하고 있었을 거야, 너희들이 그렇게 아팠을 동안, 난 그렇게 웃고 있었을 거야. 많은 생각을 하며, 병원의 복도를 거쳐, 간호사가 안내해주는 한 방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유인아, 오빠 왔어.” 환영이가 밝게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선다. 나도 뒤따라가면, 밝은 햇살이 내리쬐는 병실 안. 오직 침대만이 있는 작은 방 한 켠에, 작은 소녀가 앉아있다.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로. “반갑지? 그 동안 잘 있었어?” 역시나 아무 표정 없다. 몸집이 자그마한 유인이는, 환영이의 말처럼 휴인이와는 닮은 구석이 없었다. 그러나 열 여섯 살 특유의 소녀같은 이미지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눈이 아프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처럼. “유인아, 그리구 이 누나는.” 환영이가 나를 소개하려 유인이 앞으로 내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그 순간, 놀랍게도 유인이의 손길이 내 뺨에 와닿았다. 자신의 친오빠, 휴인이 말고는 아무에게도 반응하지 않는다는 그 소녀가 스스로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뿐만 아니라, 어느 새 흐르고 있었던 내 눈물을 그 어린 소녀가 닦아주고 있었다. 자신에 눈에 흐르는 눈물은 상관도 하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내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바로가기 Daum 카페 음악샵 내 블로그 내 메일 내 쪽지 인터넷소설닷컴 cafe.daum.net/youllsosul 훈장(공개) | 회원수 947,214 카페정보내 정보 가입 111 방문 18422 새글 251 카페지기 [주인]유리 개설일 2002.01.22 프로필 수줍은미소☆ 수정 쪽지 0통 메일 50통 내 글 반응 내가 쓴 글 작성중이던 글이 있습니다. 휴대폰 카페 카페 초대 회원 보기 소모임 바로가기 -------------- [소모임 만들기] 카페 ON (미사용중)채팅 카페 탈퇴 퍼옴- 퍼옴완결방 책임운영자 : 영계 (stylehyejin@hanmail.net) 최신목록 목록 윗글 아랫글 [[　　로맨스]] [청몽채화] 관계자 외 출입금지 61 - 80 글쓴이: [퍼옴·반휘] 조회수 : 23511 08.08.01 13:33 http://cafe.daum.net/youllsosul/KRDt/10638 ▷▶▷▶▷▶▷▶▷▶▷▶▷▶▷▶▷▶▷▶▷▶▷▶▷▶▷▶▷▶▷▶▷▶ 작가 : 청몽채화 감상주실곳 : khyem87@hanmail.net 작가 카페 : http://cafe.daum.net/chaehwa (┗BlueDream┓채화) 작가 버디 : 하얀다섯 ▷▶▷▶▷▶▷▶▷▶▷▶▷▶▷▶▷▶▷▶▷▶▷▶▷▶▷▶▷▶▷▶▷▶ ┗BlueDream┓채화 http://cafe.daum.net/chaehwa 많이 가입해 주세요 ^^♡ ▷▶▷▶▷▶▷▶▷▶▷▶▷▶▷▶▷▶▷▶▷▶▷▶▷▶▷▶▷▶▷▶▷▶ 61. 세상에 발 내딛기 “울면....” 나뿐만 아니라 환영이조차 놀라버린 그 상황에서 서서히 입을 떼는 유인이. “안되는건데...” 역시 착하구나. 남이 우는 꼴도 못보는거구나. 휴인아, 니 동생... 이렇게 착하고 예쁜 애였구나.... 너도 얼마나 힘들었을까, 멀쩡하던 동생이 험한 일 당하고 혼자 정신병원에 갇혀있는데.. 오빠인 너로선 얼마나 세상이 미웠을까. 기어코 내 눈물을 모두 닦아준 유인이가 내게서 손을 거두었을 무렵, 멍해있던 환영이가 재빨리 나섰다. “유인아, 정신 들어? 오빠도 알아보겠어?” 유인이의 손을 잡으며 천천히 물어보는 환영이. 그러나 유인이는 관심없는 듯이 환영이의 얼굴을 한 번 슬쩍 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버린다. 환영이 저 놈 저거 가만보면 참 불쌍하단 말이지. 그리하여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바로 나. 정시언. 나도 천천히 손을 들었다. 아까부터 신경쓰였다. 유인이의 눈에서도 쉴새없이 흐르는 저 눈물이. “너도 울지마, 울면 약해지는 거야.” 무표정한 얼굴에서 끝없이 샘솟는 유인이의 눈물. 내 손이 자신의 뺨에 닿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몸을 피하지 않았다. 다행이다, 나를 경계하지는 않는 모양이야. “유인이는 항상 울어요.” 그 순간, 작게 중얼거리는 환영이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항상 운다구?” “정신병에 대인기피증에 우울증에.... 말하자면 조금 복잡해요, 워낙 여러 가지 병이 겹쳐서. 봐요, 유인이 눈이랑 뺨이랑 다 엉망이죠. 올 때마다 짓무를까봐 약 발라주긴 하는데, 그래도 나아질 기미도 안보이고. 매일 혼자 앉아서 눈물만 흘려대니까 휴인이로선 동생 보러오기 힘든거죠. 나야 안쓰러워서라도 자주 오는 편이지만, 휴인이는 은근히 그런거 있어요. 지 약한 거 죽어도 보여주기 싫어하는 거. 그런데 아무리 강한 놈이라도 동생 앞에 서면 무너지기 마련이니까. 어련하겠어요, 유인이가 반응하는 사람이 휴인이 뿐인데. 오늘 누나 눈물 닦아준 건 나도 놀라긴 했지만. 역시 애인인가봐요, 유인이 눈엔 보이나봐, 누나랑 휴인이 사랑하는 게.“ 내게 눈을 찡긋하는 환영이. “유인아, 이 누나 휴인이랑 사귀고 있어.” 환영이는 자신의 주머니 속에서 유인이에게 발라줄 약을 꺼내며 중얼거리고. 유인이는 더욱 빤히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이거 참, 어린 여자애가 내 얼굴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민망하구만. “오빠 왜 안와요.” 그 순간, 억양조차 없는 유인이의 물음. 너무도 순진하게 묻는다. “으.... 으응?” “우리 오빠. 왜 나보러 안와요.” “응? 그, 그게, 휴인이가, 아니, 그러니까 너의 오빠가.... 뭐, 뭐라고 해야하지? 그러니까 좀 바쁜데. 그래서 이 언니랑 환영이가 대신...“ “우리오빠 화났어요.” ..........억양이 없으니까 모르겠다. 나한테 물어보는건지, 아니면 알려주는 건지. “내가 항상 우는 꼴 보기 싫댔어요. 그래서 안와요.” 행동을 멈추고 측은하게 유인이를 바라보는 환영이. 그의 낮은 한숨소리. “오빠는 착한 게 싫대요. 바보래요.” 계속 눈물을 흘리는 유인이 앞에서... 난 무슨 말을 해야만 할까. “아니야. 그런거.... 아니야, 유인아.” 그저, 아니란 말만 반복할 수밖에. “그럼요, 언니.” 내 옷깃을 강하게 잡아당기는 유인이. “나 이제부터 착한 애 안할테니까, 우리 오빠 좀 오라고 해요.” 하.... 내가 정말 이런 말까진 안하려고 했지만... 강휴인 이 개새끼, 나쁜새끼. 금은방 쳐들어가서 물건 훔칠동안 지 동생이나 좀 보러오지. 나쁜놈. 환영이 따라서 일주일에 한번씩 오는 건 무리더라도,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동생 보러 좀 와주지, 무정한 새끼. 울잖아, 아직 열 여섯 살밖에 안 먹은 어린애가!! 지 오빠 보고 싶다고 울잖아!! 착한 애 안해도 좋으니까.... 너 보고 싶다잖아, 휴인아..... “올거야, 언니가 말해줄게. 유인이가 오빠 많이 보고싶어한다고, 언니가 이야기해줄게.” “언니.” “응?” “착한 게 나빠요.” 이... 이건 나한테 물어보는 것 같은데? “아니야, 좋은거야. 착한 거, 그거 좋은거지.” “근데 우리 오빤 왜 그래요.” “그게.... 그게 그러니까... 못되서 그래, 니네 오빠가 못되서 그런거야.” 나로선 정말 심각하게 말한 거였는데. 옆에서 풉, 하고 환영이가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환영이는 내 편일거야, 집에 가서 이걸 휴인이에게 그대로 일러준다거나 하진 않을거야. “유인이는... 지금 많은 거 생각 안해도 돼. 착하거나 나쁘거나 그런거 보다... 빨리 나아서 병원 밖으로.....“ ..........병원 밖으로? ....... 유인이가 병원 밖으로 나와서 뭘 할 수 있지? 괜히 [관계자 외 출입금지] 애들한테 범죄만 배우면 그게 더 큰일인데. 물론 동생한테 그런 거 가르칠 애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맨날 집비우고, 담배에 찌들어가지구, 욕이나 하구. 그런 언니오빠들 챙기다가는 유인이가 먼저 나자빠질거야. 어이구, 불쌍한 소녀 같으니.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나. 내가 유인이를 위해서라도 그 자식들을 교화시켜 놓으리라. “유인아, 언니랑 약속 하나 할래?” 갑작스런 내 말에 환영이까지 나를 바라보고. “뭔데요.” “진짜 착한 건, 사람들 말 하나하나 다 들어주는 게 아니구, 나쁜 건 나쁜 거라고 말해줄 수 있는 거, 그게 진짜 착한거거든.“ “................” “유인이가 그렇게 변하는 날, 언니가 널 데리고 나가줄게, 세상으로.” 멋있는 영웅인 척 한다고 유인이나 환영이가 비웃을 줄 알았는데 아이들의 표정은 예상외로 진지했다. “누나, 섣불리 그렇게 말하는건....”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혼내려는 환영이가 말을 내뱉기도 전에. “약속했어요.” 유인이가 먼저 나를 향해 말을 건넸다. “언니, 지금 나랑 약속한 거예요.” 거짓말처럼, 눈물을 그친 유인이가 나에게 말했다. 그러면 나, 정시언은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밝은 웃음을 머금은 채 말한다. “당연하지!! 이 언니가 약속 빼면 시체거든!!” “누나는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병원에서 교도소로 가기위해 다시 버스를 기다리는 중. 환영이의 잔소리 퍼레이드는 시작되었다. “상처받은 애라구요, 너무 착해서 세상에 내놓으면 또 아파하는 그런 애. 그런애한테 데리고 나온다고 헛된 희망 심어주면 어떻게 해요.” “착한게 아니구, 무른거지.” “누나!!” “너도 잘못했고, 휴인이도 잘못했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니, 환영아? 넌 유인이보고 착해도 된다고 말했고, 휴인이는 착해선 안된다고 말했어. 너흰 유인이에게 큰 잘못을 저지른거야. 뭐가 착한거고, 뭐가 나쁜건지를 가르쳐주지 않은거라구. 그런 상태에서 한 명은 그대로 있으랬고, 한 명은 그렇게 살지 말랬고. 그럼 그 어린애가 무슨 선택을 했겠냐. 혼란스러워하다 그런 일 당하고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있는 거야. 한창 빛나는 시기에, 제일 아름다운 시기에. 가두어 놓고 지키겠다구? 말도 안돼, 빨리 데려와야 하는거야. 그리고, 진정한 세상을 보여주는거야. 너희들이 무서워하는 그런 세상 말고, 유인이가 진짜 바라던 착한 세상을.“ 오랜만에 주절주절 연설 한 판 해버린 나.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환영이. 이 놈아, 내가 좀 무식해보여도 임마, 이래보여도 내가 응? 심리학과란 말이다. 걱정해야 할 건 유인이가 아니라 너희들이야. 알고있니? 유인이보다 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게 니들이란거. 유인이는 금방 일어설거야. 문제는 니들이라구. 니들 교화시키려면 이제 내가 죽는거다. 머리가 점점 복잡해. 내가 너희들을 어떻게 해야하는 건지, 나도 알 수가 없어. “유인이 믿자, 휴인이 동생이잖아. 내가 볼 때 걔는 지 오빠보다 똑똑해보여.” 웃음섞인 내 말에, “그건 그렇지만.” 환영이도 결국은 동의하고 웃어준다. “어쨌든 유인이 눈물은 막았잖아, 열심히 생각할거야. 뭐가 착하고, 뭐가 나쁜건지. 어? 저기 버스 온다!! 저거 타면 되지?“ 왠지 쑥스러워서 말을 돌려버렸다. “아저씨!!! 사장님!! 김기사!!! 차 세워요, 여기 승객 있어요!!!” 꿈 많은 여고시절에 내가 이런 짓을 하고 있으면 친구들은 나를 피하곤 했다. 이런 내 행동을 이해해주는건 이온이 뿐이었다. 아니, 뭐 굳이 따지자면 이해를 해 준다기보다 무시를 했달까. 버스가 멈춰서자마자 나는 재빨리 그 안으로 쏙 달려들었고, “누나.” 환영이는 뒤에서 나를 불렀다. “응?” “그런 세상이 올까요?” “.............?” “누나가 말한 것처럼요, 유인이가 맘놓고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 오겠죠? 착한 세상, 정말 오겠죠?“ 맑은 환영이의 눈동자. “당연하지. 누나 못 믿어?” “...........믿어요.” “그럼 믿고 따라와. 누나한텐 기대도 괜찮아.” “...............” “빨리 타, 유인이는 만나봤으니까 이제 나머지 다른 소녀 이야기 들어야지. 이번에 이야기해줄 사람은 니 동생이겠지? 기대되네, 환영이 동생은 어떤 사람일지.“ 밝게 웃으며 중얼대는 나를 향해 환영이도 피식 웃어보인다. “근데 누나........” “응!! 뭐?” “.................” “왜?” “..........그 버스 아니예요, 빨리 내려요.” ........... 나는 보았다. 버스 기사님의 붉으락 푸르락 변해가는 얼굴을. 이번 일도 [정시언의 민망한 사건 베스트 파이브] 안에 들어가겠구만. 나를 피하는 친구들의 심정이 미친듯이 이해간다. 지환영, 좀 빨리 말해주지. 애들 교화시키기 전에... 나부터 정신 차려야겠다... 62. 지환희 드디어 제대로 된 버스를 잡아타고, 뒷자리에 나란히 앉은 환영이와 나. “다른 소녀 이야기 해줄까요, 누나?” “닥쳐, 넌 집에가면 뒤졌어.” “왜 나한테 그래요? 내가 이야기하기도 전에 버스에 올라탄 게 누군데.” “아, 그럼 내가 버스에 올라탔을때 바로 끌어내리든가!! 한참 이야기 한 뒤에 그 버스 아니라고 내리라니!! 나 민망했단 말이다!!“ “누난 그게 매력이예요.” 정시언, 완전 단순 대마왕. 그 한마디에 기분이 풀리고 있다. 이래서 칭찬이 여자의 적이라는 거다. “그럼 이야기할테니까 들어봐요.” 못이긴척 환영이의 말에 귀기울이는 중... “선머슴같은 여자애였어요. 되게 밝고, 활발하고, 상쾌한. 그 애를 보는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말했어요, 쟤만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얼굴은 되게 이뻤는데요, 성격은 꼭 남자애 같았대요. 어렸을 땐 남자애들하고 칼싸움 하고 놀더니, 초등학교땐 여자애들 고무줄 끊고 도망가고... 중학교땐 교복치마 대신 체육복 입고 말뚝박기 하고 있고. 친구도 많고, 남자여자 가릴 것 없이 인기 많은 여자애였죠. 불의를 보면 절대 못참는 애였대요, 상대가 남자라 하더라도 한판 붙고 보는 애. 그래서 마지막에 잘못했단 말을 꼭 듣고마는 그런 애요. 그래서 그 애 오빠가 엄청 고생했대요. 싸움 뜯어말리느라. 대신 싸워주느라 얼굴에 상처가 끊일 날이 없었죠.“ 환영이는 정말, 자기 동생 예뻐하나보다. 옛날 이야기를 하면서 정말 즐겁게 웃고있어. 그래, 까짓 거. 나도 딴지 안 걸고 들어주마. “그 여자애 아버지는 알콜중독자였는데, 남매가 어렸을 때부터 많이 때리구 욕했대요. 안 취한 날은 멀쩡하고 다정한데, 술만 마시면 변해버리는 거죠. 하지만 술 취한 날이 더 많으니까... 남매는 어릴때부터 서로를 의지할 수밖에 없었대요. 아버지가 술을 많이 마신다 싶으면, 오빠는 동생 손을 잡고 달렸대요. 그리고 도망갔죠, 휴인이랑 유인이네 집으로.“ 이런 말을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너를 내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너희에게 이제 단순한 추억이 된 이야기였으면 좋겠는데. “그래서인가, 우리 넷은 언제나 같이 다녔었어요. 그 소녀도 유인이를 되게 이뻐했거든요, 자기가 한 살 더 많으니까 언니라고, 끝까지 챙겨줄거라고 그랬었어요. 거의 친자매같은 사이였으니까. 유인이 놀리는 남자애가 있으면 걔는 그냥 그 날로 제삿날이었죠. 그러다가, 남자같은 소녀에게도 첫사랑이 찾아왔어요.“ “에? 진짜? 누구?” “누나 남자친구,” “응?” “그 소녀가, 누나 남자친구를 좋아했다구요.” 맙소사. 라이벌 하나 등장인가? “걱정마요, 짝사랑일 뿐이었으니까, 휴인이는 아직도 모를걸요.” “............” “그 소녀도 그럴때보면 수줍은 여자애에 불과했어요, 아무렇지 않게 휴인이랑 장난치고서도, 돌아서면 얼굴이 벌게져 있었거든요. 유인이가 도와주려고 하면 괜히 아니라고, 신경쓰지 말라고 소리만 버럭버럭.“ 귀여워, 정말 어릴때의 첫사랑처럼 귀엽다. “그 때, 소녀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알콜중독자이던 아버지가. 결국은 약 한 첩 못써보고, 병이 있었는데 고쳐볼 기회도 없이. 소녀의 오빠가 그 때 처음으로 하늘에 빌었는데... 그래도 안되더래요.“ “........ 때리고... 욕하셨다면서... 그래도, 좋았어?” “아버지니까.” “...........” “아버지니까, 그냥 곁에 있어줬으면 했어요. 엄마도 없었으니까. 아버지가 때리면. 까짓 꺼, 뭐. 맞아주면 되죠!! 내 동생 때리면 그건 좀 골치아프지만. 나 때리는 건 얼마든지 참아줄 수 있었어요. 남자잖아요, 원래 남자는 맞으면서 크는 거거든요. 그리고 욕하는 것도, 뭐 욕들으면 명줄 길어진다잖아요, 좋죠, 뭐!!! 어른이 말하는 건 원래 다 조언이고 충고고 그런거잖아요, 잘되라고 그런거겠죠.“ 정말 착한 건 유인이가 아니라 환영이 너야. “근데 죽었어요, 아버지가.” “...........” “그게 되게 구질구질했는지, 휴인이가 돈 벌겠다고 가출을 했어요. 자기 아버지도 우리 아버지처럼 병원도 못가보고 돌아가실까봐 걱정한건가. 우리 아버지 장례치르는 거 도와주더니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었죠. 소녀의 상심은 무지 컸죠, 아버지 잃고, 첫사랑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대신 소녀는 유인이를 더 보살펴주기로 마음 먹었대요. 그리고 첫사랑이 사라진 순간부터 조금씩 여자처럼 변하기 시작했죠. 소녀의 첫사랑은 한 달에 한두번씩 동네에 찾아왔거든요. 그 때 예쁘게 보이고 싶었는지, 머리도 기르고, 말투도 여성스러워지고. 그러다보니까 인기가 장난이 아니었어요. 그 오빠가 동생 쫒아다니는 놈들 처리하느라 하루 24시간이 부족했다니까요?“ 이 못말리는 동생 자랑. 나도 이온이 자랑하고 싶다. 우리 이온이도 열라 이쁜데. “근데 유인이 일이 터진거죠. 때마침 소녀가, 유인이 아버지한테 드리려고 죽을 쒀서 그 집을 방문했었거든요. 휴인이는 당연히 없었고, 나도 아저씨의 병세가 악화되어서 의사 부르러 갔었고. 소녀가 유인이네 집 방문을 벌컥 열었는데요. 당하고 있었대요, 사랑하는 동생이, 친자매처럼 생각하던 동생이. 짐승한테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정신이 없더래요.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있는 아저씨의 얼굴에.... 자기 아버지 얼굴이 겹치더래요. 동생도 울고, 아저씨도 울고.... 그걸 지킬건 자기밖에 없단 생각이 들어서... 부엌에 달려가서 칼을 가져왔대요.“ ..............환영아.... 설마... “칼을 들고 왔는데... 아저씨 숨이 그 순간 넘어가더래요. 너무 화가 나서 자기도 모르게... 짐승의 뒤에서 그냥... 찔러버렸는데... 피가.... 피가 나더래요. 그 소녀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던 게 딱 하나있었는데. 그게 피였거든요. 귀신도 아니고, 벌레도 아니고, 피였거든요. 모기도 못잡을 정도로 피를 무서워하는 애였는데... 칼에 피가 묻고, 바닥도 피로 흥건해지니까... 애 정신이 없는거죠.“ “....................” “소리를 지르면서....... 여러 번 찔렀대요. 그 느낌이.... 아직도 안 잊혀진대요. 밤마다 생각나서 미치겠대요. 피가... 유인이랑 자기 몸에 다 튀었고... 칼을 든 손은 미친듯이 떨리고... 악몽같았대요.“ “...........환영아....” “누나.... 휴인이랑 나랑..... 오빠 자격 진짜 없죠.....?” “................” “동생들이 그 지경이 될 동안.... 휴인이랑 나는.... 왜 아무것도 못했는지....” “.........너희들도 어쩔 수 없었어... 그렇게 말하지마....” 정이온 이 자식아. 너랑 나는 진짜 행복하게 산 거다. 그러니까 기집애야. 너도 싸가지 좀 챙기고 살자, 이제. “휴인이 동생은 유인인데.... 니 동생 이름은 뭐야, 환영아?” “...........환희.” 너무 서글픈 이름이었다. 한순간에 살인자가 되어버린 소녀의 이름치고는... 너무도 아픈 이름이었다. “지환희요.” “............... 좋은 이름이네.” 하지만 난, 환영이 앞에서 그저 웃어버리고 말았다. “자주 오지 말라니까.” 동생 자랑인 줄 알았는데, 환영이의 말은 정확했다. 환영이의 동생 환희는 정말 예쁜 얼굴을 소유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쁜 기지배들 참 많다니까.... 에라이. 이온이가 화려하게 이쁜 편이라면, 환희는 오밀조밀하게 이쁜 편이었다. 수수하지만 눈에 띌 수밖에 없는, 현재 소년원에 있는 소녀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청순한 매력을 있는대로 뿜어내고 있었다. 단발의 머리를 짧게 묶고, 유인이와는 달리 나를 경계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걸 심하게 의식하는 듯 했다. 자신의 친오빠인 환영이에게까지 쌀쌀맞게 굴었으니까. “살인자 자주 봐서 좋을게 뭐있다고 그래.”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니까.” 오히려 환영이 쪽에서 동생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어린 소녀일 뿐이잖아. 억지로 저런 말 꺼내려면 더 힘들텐데. “근데, 누구야?” 환희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조용히 물었다. 아, 근데... 휴인이 여자친구라도 말해도 되나....? 환희가 휴인이 좋아했었다잖아.... 그냥 환영이 여자친구라고 말해버릴까? “아, 나는 환영이 여자친.......” “아, 이 누나 비원이 여자친구....” ............... 동시에 말해버렸다, 환영이랑 나랑. 지환영.... 너 정말 이딴 식으로 타이밍 못 맞출테냐.... 니가 진정 오늘 나를 망신주려고 단단히 마음먹고 온게냐.... 우리의 말에 피식 웃어보이는 환희. 그런데 웃음이... 굉장히 차갑다. “진실 말한다고 내가 잡아먹나.” “...............” “휴인오빠 여자친구죠? 딱 보자마자 느낌이 그랬는데.” 휴인이랑 나랑... 솔직히 그다지 어울리는 커플은 아닌데... 환희는 천재인가. “환희야, 이 누나는 그냥...” “잘해줘요.” “...............” “불 같은 사람이니까, 잘해줘요. 난 이제 잘해주고 싶어도 못해주니까.” 나.,. 주제넘게... 유인이에 이어... 환희에게까지 참견하면 안되는건데... 근데... “뭐냐, 그 기분나쁜 말은!!!!!!!!!!!!” 그래, 내 성질도 좋은 편은 못되니까... 어쩔 수 없다. 저질러버리자. “..........뭐라구요?” “지금 너 가지기 싫으니까 나한테 넘긴다는 거냐!!!?” “누, 누나 왜 그래요?” 급히 끼어드는 환영이. “강휴인 그 새끼가 뭔데, 야, 걔 아무것도 아니야. 잘해주고 싶어도 못해주는게 어딨냐. 그냥 잘해주고싶으면 잘해주는거지. 걔가 신이냐? 잘해주고 싶어도 접근못하게? 그리고 너 선심쓴듯이 나한테 넘긴 척 하지마. 임마, 사랑은 쟁취하는거야. 강휴인 지금 내꺼긴 한데, 쉽게 포기하지마.“ “..................” “그니까, 내 말은!!!! 선의의 경쟁!!! 라이벌!!! 오케이? 넌 어릴적부터 휴인이랑 알고지냈잖아, 대신 난 사귄지 얼마 안됐어, 한달도 안됐거든. 그리고 넌 휴인이보다 어리지만 난 그 새끼보다 4년이나 세상 빛을 빨리봤어. 어때, 이 정도면 너도 나랑 한 번 붙어볼만 한거 아니냐?” 내 스스로 라이벌을 만들고 있다.... 정시언 미쳤어. “난 살인자예요.” “웃기지마, 니가 죽인 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야.” 조용해진 분위기... 그리고 그 순간, 아까처럼 차갑게 피식 웃는 대신 여고생처럼 풋, 하고 웃는 환희. “좀만 기다려요, 나 곧 출소하니까. 아까 언니가 한 제안, 콜. 라이벌 예약해둬요. 내가 더 싱싱하니까 긴장 해둬요.” 정말 예쁘다. 저 애가 웃으니까, 기분이 좋아진다. 63. 미치게 하는 것 “누나.... 고마워요.” 환희를 만나고 난 후, 버스를 타고 집 앞 정류장에 내려서 집으로 걸어가는 길. 한참 침묵을 지키던 환영이의 입이 열렸다. 한동안 유인이와 환희를 안쓰러워하며 생각에 잠겼던 나도 그때서야 정신이 들었고, “응? 뭐가?” “유인이도 그렇고, 환희도 그렇고... 많이 달라졌어요, 오늘 누나를 만나서 조금씩 이야기한 것 뿐인데... 180도 달라진 기분이예요.“ “..............” “유인이는 휴인이를 제외한 다른 사람하고 이야기 한 적 없는데... 휴인이하고 말하더라도 정상적인 대화는 아니었어요, 그냥 휴인이 옆에 꼭 붙어서 가지 말라고, 자기 혼자 두고 가지 말라고 애원하는 것 뿐이었거든요. 환희는, 많이 차가웠죠. 앞으로도 나한텐 계속 차가울 거예요. 내가 찾아가는 것조차 못마땅해 하거든요. 내가 자기를 잊길 바래요. 자기 때문에 나도 망가질거라나. 웃기죠, 내가 오빤데, 우린 친남맨데. 그 앨 어떻게 혼자둬요.“ “아직 어려서 그런거야,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니가 이해해줘, 환영아.” 그 애들... 한 번에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상처를 많이 받은거야. “근데 누나한텐 안 그러잖아요... 오늘 누나 처음봤는데... 누나한텐 안 그러잖아요.” “...............” “내가 잘못한건가 봐요, 누나. 내가 동생들 생각하는 마음이 부족해서....” 그런거 아냐, 말도 안돼. 나도 너희를 안타까워하는 건 진심이지만, 아직 나 자신도 잘 제어못하는걸. 너희보다 나이가 조금 많다고 해서, 나도 세상을 잘아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환영이 니가 나보다 잘못한 건 전혀 없다는 거야. “여자들끼리 통하는 게 있어서 그래.” “................” “그래서 그런거야. 환영이 니 이해심이 부족한 게 아니구, 난 여자니까. 그래서 통하는 게 조금 더 많을 뿐이야. 유인이도 그렇고, 환희도 그렇고. 그래, 민서도 그렇잖아, 민서도 남자들 틈에서 힘들다가 내가 나타나니까 잠시 기댄거라구, 그러니까 지 딴엔 날 좋아한다고 착각하는거지. 난 니가 부러운데, 그렇게 많은 사람 이해하고 신경 써주는거, 너 아니면 아무도 못하는거야. 난 보여, 다들 너한테 의지하는거.“ 진심이다. 진심으로 한 내 말에, 환영이는 피식 웃으며 답한다. “누난 눈치가 부족해요.” “응?” “누나 오고나서 휴인이나 비원이도 나한테 의지하지 않아요.” “.............응?” “나도, 누나 온 뒤로... 속상한 거 혼자 참는 짓, 안해요.” “............” “그래서 난 누나를 질투할 수도 없다니까요. 그래서 되게 얄미워요.” 고백이라도 받은 것 처럼 심장이 쿵쾅댄다. 난 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아니, 실제로도 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평범하디 평범.... 아니, 솔직히 말해 차라리 없는 게 나을 정도의 인간이었으니까. 그러나, 이 애들 앞에서 나는... 없어서는 안될 사람으로 변해버리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나한테도... 이 아이들이 필요하다. 그것도, 절대적으로. “미쳤냐!!! 어떻게 그렇게 용감하게 뛰어들 수가 있는거냐!!!” 엥? 뒤에서 들려오는 이 목소리... 어디서 많이 들어보던.... “닥쳐라... 좋은 말 할때...” “나쁜말 해도 못 닥친다!!! 어우, 씨발!! 말려도 말려도 말을 들어먹어야 말이지!!!” 환영이와 나는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고... 예상대로 그 목소리는 휴인이와 민서의 것이었다. “야, 니들 꼴이 왜 그래!!!” 그리고, 소리치며 그들에게로 달려가는 환영이. 그도 그렇것이 민서는 피투성이인 채로 휴인이에게 안기다시피 부축 당하고 있었고, 휴인이도 입술과 이미가 터진 채 다리를 절뚝거리고 있었다. 너무 놀란 내가 멍해져 있는 사이, 환영이가 재빨리 달려가 휴인이에게 안겨있던 민서를 부축했다. “뭐야,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민서 너 아침부터 어디로 달려나갔길래... 지금 꼴이 이게 뭐야, 장난해? 강휴인, 니가 말해봐, 이게 어떻게 된거야?“ 환영이의 추궁에... “유인이랑 환희 잘 있어?” 동문서답하는 휴인이. “말 돌릴 생각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무슨 짓 한거야?” 휴인이는 엄격하게 묻는 환영이에게 삐졌는지 고개를 홱 돌려버리고. “어디가 아픈지 먼저 묻는 게 예의아니냐?” “야, 강휴인!!!! 너 또 사고쳤지!!?” “지환영이 있었으면 이기는 싸움이었는데!! 이 새끼, 우리 중에 제일 잘 싸우면서 중요할 땐 맨날 혼자 빠져있다니까?“ “내가 너냐? 허구헌 날 이유없이 싸우게?” “이유없이 싸운 거 아니라니까!! 그리고 내가 먼저 덤빈 거 아니다? 백민서 찾으러 나갔는데 저게 그 놈한테 시비 걸어서 한판 붙고 있잖아!! 아, 그 사람들이 보통 인간들이야? 썅, 어쩔 수 없이 나도 나섰다가 아주 그냥 난장판 됐었다니까? 백민서 저건 그 놈만 집중적으로 패니까 나는 그 주변사람들 다 처리하느라 뒤지는 줄 알았다구. 나중에 상황보고 내가 백민서 손잡고 안달렸으면 우리 지금 경찰서에 있다.“ “........무슨 소리야? 그 놈이라니?” 휴인이 이야기에 내가 무슨 상황인지 감도 못 잡고 있을 때... 환영이 품에서 벗어나 힘겹게 내 앞으로 걸어온 민서의 한마디에 의해.. 나의 모자란 머리도 단번에 상황 정리를 해버렸으니.... “........이진한... 그 새끼.... 내가 오늘 반 죽여놨다.....” ...........맙소사. 그럼 지금..... 지금... 그러니까 그게... 민서 니가 아침에 뛰쳐나간 이유가... 이진한을 조져버리기 위해서, 란 말이냐. “뭐? 너 미쳤어?” 놀란 환영이가 다시 민서의 곁으로 다가와 다그치고... “나나 휴인이나... 모자쓰고 있어서... 우리인 건 몰랐을거야... 그럼 된 거 아냐?” 많이 얻어터졌는지 힘겹게 말을 이어가는 민서. “지금 그 문제가 아니잖아!!!!” “그 새끼 혼자만.... 있었으면 이길 수 있었는데... 썅, 다른 검사들이랑 형사들도 다 같이 있길래... 동료들이랑 태연히... 점심 먹으러 가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뚜껑 열리는데.... 어떡하냐....“ “휴인이 없었으면 어쩔 뻔 했어?” “그랬으면 이진한 반 죽이는 게 아니라 ...완전히 죽여놨지,.. 오늘 저 새끼 도움 안됐어. 맘 잡고 싸우려는데 계속 말리길래... 걸리적 거려서.....“ 민서의 힘겨운 한마디, 한마디에 폭발한 휴인이. “씨발, 이게 도와줘도 승질이야!! 야, 나 아님 너 죽었어!!!” 아무리 봐도 쟤네 둘은 정말 안 친하다. 나는 한숨을 쉬며 민서의 앞으로 다가서고.... “너 돌았지?” 걱정보다 먼저 튀어나온 비난. 민서는 그저 고개를 더 숙일 뿐, 내 눈에 비치는 건 그녀 모자의 챙 뿐. “니가 어디라고 거길 가.” “하, 왜? 그 새끼... 많이 다쳤을까봐... 걱정되냐....?” “너 여자잖아, 여자 몸으로 거길 왜 가, 남자들이 작정하고 싸우면 여자들은 한 방에 저 멀리 날아갈 수도 있어, 왜 괜히 객기를 부리고 그래!!!??“ 이렇게 화낼 생각아니었는데... 휴인이도 내 모습에 놀랐는지 아무 말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다. “진한오빠 검사야. 범죄자 때려잡는 검사가 싸움에서 너한테 질 거 같아? 니가 진심으로 나 좋아한다고 해도 이건 진짜 미친거야!!!“ “.......... 내 성질대로 했으면... 그 새끼 죽었어... 강휴인 때문에 그냥 반만 죽여놨어. 기절한 거 같은데 깨어나면.. 다시 멀쩡해지겠지... 그 새끼 걱정 하지마...“ “니들을 걱정하는 거야, 병신아!!!!!!!!!!!!!!!!!!!!” 동네 전체가 울릴만큼 큰 소리로 내질러버린 나. 민서도 놀랐는지 움찔거린다. “내가 이진한 그 새끼를 왜 걱정해!!!!! 니들이 다쳤잖아!!!! 그냥 나만 속상하고 끝날일인데!!! 니가 괜히 나서서!!! 휴인이랑 민서 너랑 둘 다 다쳤잖아!!! 왜 나땜에 그런 일을 자초하냐구, 왜!!!!!“ 진한오빠 따위...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이제 내 눈에 보이는 건 니들 안전뿐인데... 왜 그러냐구.... “누... 누나, 우리 괜찮아. 저기, 잘됐지, 뭐. 몸 잘 풀었어. 그리구 민서도 원래 기럭지가 길고, 비원이랑 자주 싸움하고 그래서 남자들하고 잘 싸워. 쟨 절대 허약한 스타일이 아니거든. 우리 다친거 이것도 내일이면 다 나을건데.“ 눈에 눈물까지 머금으며 소리치는 내 모습에 놀랐는지 휴인이가 급히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나선다. “대한민국 검찰이야... 니들이 지금 뭘 안다고 이래, 니들이 뭘 하겠다고 이래. 이러는 게 나 돕는 거 같아? 진짜 어리게 왜 이래.... 진한오빠를 반 죽이기는 뭘 죽여, 니네가 반 죽어서 들어왔구만. 그러게 괜히 왜 개겨서 이런 꼴로 기어들어오냐구!!!!“ 혼나는 상황에 적합하게 불쌍한 표정을 짓는 휴인이. 내가 화내는 걸 이해하는 듯 한숨만 쉬어대는 환영이.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민서. “아잉, 누나 화 풀어♡ 오늘 하루 완전 보고싶었는데 이러기야?” “휴인이 너도 민서를 말렸어야지....” “말리는데도 저 지랄하는 걸 어떡해, 유인이랑 환희는 잘 보고왔어? 유인이랑 누나랑 되게 닮았지? 울보인 거랑 바보같은 거.“ “.............야, 강휴인....” “아잉, 화 풀어요, 자기♡ 그래도 내가 오늘 자기 복수 대신 한건데 너무 그러지마잉.” 계속 애교를 떨어대는 휴인이 때문에 마음이 가라앉으려는 그 무렵에, “어려서 이러는 게... 아니잖아....” 민서가 조용히 중얼거린다. “어려서 이런 짓 하는거.... 아니라구.” “................” “왜 이런 짓 자초하냐구? 당연하잖아......... 좋아하는 여자가 울고 있는데... 거기서 가만 있는 새끼가 병신이지.....“ “민서야.....” 휴인이를 바라보던 내가 다시 민서에게 시선을 돌리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 “참으려고 했는데, 가만 있으려고 했는데.... 그 새끼가 너 울렸잖아!!!!!!!!!!!” “................” “널 건드렸잖아!!!!!!!!!!!” “................” “나를..................” “...................” “미치게 하잖아..........................” 64. 전쟁 나보다 더 큰 목소리였다. 중성적인 민서의 목소리는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그 상황에 나보다 더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건... 내 남자친구 휴인이였다. “봐주는 것도 한 두 번이야, 백민서.” 그리고, 냉정한 한 마디. 처음이다, 휴인이의 저런 모습. “내 여자야, 내가 지켜. 니가 괜히 나설 거 없단 소리다.” “지킨다구?” “............” “개소리하네. 웃기지마....... 너는 정시언 지킨 적 없어. 감싸주고 위로했을 뿐이지. 되도않는 드라마 따라하는 것도 아니고........ 역겨워.“ “................백민서.” “니 애인 뺐겠다고 한 적... 없어.” “...............” “지키는 건 내 손으로 하겠다는데.... 니가 웬 참견이야. 넌 그냥 닥치고 정시언한테 잘해줘... 헤어지는 즉시 정시언 내가 가져올거니까 간수 똑바로 해.... 이진한 그 새끼한테 또 빼앗기면.... 그 때는 너부터 죽는다, 강휴인.“ 민서는 거의 쓰러질듯한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휴인이와 나를 지나쳤고 환영이는 재빨리 민서의 옆으로 가 그녀를 부축했다.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민서에게도, 휴인이에게도 무슨 말을 꺼내야 할 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제기랄............” 옆에서 들려오는 휴인이의 목소리. “꼴사납다, 강휴인.........” 자기 자신을 향해 욕을 퍼붓고 있는 휴인이. “.........괜찮은거야?” 나는 간신히 휴인이에게 한 마디 내뱉었다. “미안해, 누나.” “........... 뭐가.” “이런 짓 하고 들어오면 누나가 더 심란할 거란 거, 아는데.... 솔직히 백민서 패고 나서 질질 끌고 올수도 있었는데.... 근데... 그러고 싶진 않았어.... 그 남자 아프게 하고 싶었어... 미안해, 누나가 괜한 신경 또 쓰게 해서....” “.........알면 됐어, 다신 이런 짓 하지마.” “이해해, 원래 백민서가 철이 없어서 그래.” .............아니, 지금 누가 누구한테 철이 없다는 소리를...... “아프지.....?” 나는 휴인이의 입가를 매만지며 물었고... 휴인이는 인상을 약간 찡그리면서도 웃어보였다. “괜찮아, 한두번 맞아보나, 뭐!!!” “웃지마!! 상처 더 벌어지잖아!!!” “누나, 지금 키스할래? 비릿할텐데!!” “너 상처 다 나을때까지 나랑 입술 부빌 생각하지마!!!!” “왜이래, 정여사. 오늘 되게 보고싶었는데.” 쑥스러워서 집으로 들어가려는 내 손목을 잡고 나를 다시 확 돌려세우는 휴인이. “내 여잔데.... 탐내는 새끼들 되게 많네....” “............휴인아..........” “그러니까 도장 찍으려구!!” 반사적으로 휴인이를 막으려는 내 두 팔을 간단히 잡아내는 휴인이. 내 팔을 꽉 붙잡은 채로, 다가온다, 놈의 얼굴이. 보기만 해도 설레는 휴인이의 얼굴이. 이런 상황에서 키스라니, 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아버렸다. 구질구질한 동네, 집 앞에서, 우리를 보고있는 건 단지 낡은 가로등 뿐이었지만. 나 행복해, 휴인아.... 미안한데, 민서야.... 나 정말 휴인이 포기 못해. 니가 여자가 아닌 남자라도, 니가 휴인이보다 날 사랑해준대도... 그래도.... 내 마음은 변함없을 거야. 미안해, 나는 휴인이 포기 못해. 사랑해.... 그 놈의 비릿한 피마저 달콤할만큼. 사랑해.... 죽어도 놓지 못할만큼. 사랑해.... 내 임무가 뭔지 잊어버릴만큼. 사랑해.... 이렇게............마음이.... 찢어질만큼............ 그러니까... 니가 포기해.... 니가 잊어.... 니가 버려.... 미안하지만, 니 마음의 나를 포기해줘, 민서야. “뭐야, 이 거지들은?”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그 큰 키로 방 안을 내려다보며 중얼대는 비원이. 놈의 몸에서는 오늘도 독한 양주 냄새가 배어있었다. 신비원은 [거지]라는 말을 굉장히 즐겨 사용한다. 하긴, 지금 상황으로서는 거지란 말을 제외하고 딱히 우리를 표현할 말도 없었지만. 민서는 드러누워 있고, 환영이는 거부하는 민서를 어르고 달래가며 얼굴의 피를 닦아주고, 나는 휴인이 얼굴에 약을 발라주고 있었으며, 휴인이는 엄살을 있는대로 피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들어온 비원이로서는 황당했을 거고,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그 상처는 뭐야?] 등등등... 많고 많은 말을 포함한 한마디가 바로 저 말이었을 거다. [뭐야, 이 거지들은?]............ “정시언 너는 니네 집에 안들어가고 왜 여깄냐.” “너희들 좋아서 있는 거 아니다. 환영이 혼자 이 애물단지들 처리하기 힘들거 같아서 도와주려고 있는 거니까 오늘은 너도 닥쳐주라, 비원아.“ “뭐가 이쁘다고 약을 발라줘, 뭔 일인데?” 비원이의 물음에 그 누구도 답하지 않는 이 뻘쭘한 상황. 그렇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으면 제일 분노할 사람이 비원일거다. 다들 무서운 거다, 놈의 분노가. 비원이 화난거 같으면 난 재빨리 우리집으로 가버려야지. “다친게 누구야, 강휴인이랑 백민서?” “그럼 넌 나까지 사고치길 바라냐.” “응, 환영이는 믿어도 정시언 너까지는 아직 못 믿으니까. 웬일로 같이 사고치진 않았네.” 같이 사고친건 아니지만... 내가 원인이긴 하지.... “근데 휴인이는 그렇다치고... 쟤는 시체야? 왜 누워있어?” 비원이는 정장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고 자신에게서 등 돌리고 누워있는 민서를 보기위해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심각하게 망가진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야, 뭐야!!!!!!!!!!?” 아싸, 분노 스타트!! “씨발, 강휴인, 너랑 또 한 판 붙은거 아냐? 둘이 싸웠지?” ........이 말로 미루어 보았을 때...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휴인이와 민서는 더럽게 자주 싸운다는 것을. 그것도 몸싸움을. 휴인이가 쪼잔스러운 건지, 민서가 우악스러운 건지.... “지환영, 얘네 싸우면 그냥 둘 다 패 죽여놓으라니까, 넌 할 수 있잖아.” “니가 해라, 난 얘네 일에 손 떼고싶다.” 환영이까지 지친 말투... “뭐야, 진짜 둘이 싸운거야? 강휴인, 너 정말!!!” 순간, 긴 다리로 성큼성큼 휴인이에게로 다가와 휴인이의 멱살을 잡아채는 비원이. “야, 뭐야!!! 왜 이래!!!!” 내가 말려봐도 역부족. “내가 백민서 건드리지 말랬지!!!!!!!!!!!!!!” 무.... 무섭다.... 내가 움찔하고 있을 때, 아무 준비도 못하고 멱살을 잡혀버린 휴인이는 그저 무방비 상태. “야, 뭐야, 신비원!!! 놔!!!!” 내가 소리쳐보지만 역부족이다. “내가 몇 번 말했어... 건드리지 말랬잖아, 백민서 건드리지 말라고!!!!!!!!!!!!” ...........설마.... 설마.... 신비원 너까지 백민서 좋아하냐??? 환영이 뿐만 아니라 비원이 너까지??? 아, 정말 이 새끼들..... 관계하고는, 드럽게 꼬였네, 정말!!!! “야, 그런거 아니야!!! 놔!!! 좀 제발 놔!!!!!!!!” “비원아, 상황 좀 알고 화내라!!!! 휴인이한테 그러지마, 둘이 싸운 거 아니야!!!!” 나와 환영이가 피터지게 말려도 비원이의 눈은 분노에서 헤어날 줄 모르고... 그냥 당해주기에는 숨이 막혀 참기 힘들었는지 휴인이의 손은 비원이의 손을 떼내기 위해 힘쓰고 있는 중... “그런 거 아냐, 놔.” 그리고 조용히 들려온 민서의 목소리. 그러나 미동조차 없는 비원이의 말에 민서는 몸을 일으켜 소리친다. “그런 거 아니라구, 놔, 신비원!!!!!!!!!!!!!” 거짓말처럼.... 그 순간 휴인이의 멱살을 잡고있던 손을 놔버린 비원이. “켁, 켁.... 아, 뭐야, 나 진짜 뒤질 뻔 했잖아!! 신비원, 상황 설명 안 듣고 그러기야? 내가 도와준 건.......데......“ 비원이에게 항의하던 휴인이. 환영이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휴인이에게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보내고... “넌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비원이의 분노는 민서에게 향했다. 뭐야, 민서 좋아하는거 아냐? 애증의 관곈가? 비원이가 민서를 대할 때 태도.... 사랑과 증오가 뒤섞인 거 같아.... “제발 가만있으면 안되냐? 너까지 날뛸 일 아냐, 나 좀 쉬게 내버려둬!!!!” 민서까지 짜증 재폭발. 이럴때 우리는 그냥 쥐 죽은 듯 있어야 하는거다. “위험한 일 하지말라고.... 말했었지, 내가.” “니가 무슨 상관이야?” “자꾸 반항한다, 너.” “니가 뭔데!!! 니가 무슨 주제에 나한테 명령조로 대하냐구!!!!” “니 몸 지키랬지.” “닥쳐!!!!!!” “너 다칠 상황 만들지 말랬지!!!!!!!!!!!!!!!!!” “니가 나한테 뭔데 그런” “누군 너 이뻐서 이러는 줄 알아??????????????????????????????” .............밤 늦었는데.... 해커 애들 집에서도 들을 수 있을만큼 큰 목소리. “한 번 말했으면 알아들으란 말이야!!!!!!” “너 나한테 왜이래?” “.................. 씨발............” 심각한거다, 환영이조차 말릴 수 없으면 이 상황 정말 심각한거다. 그냥 민서가 쫄아줬으면 좋겠는데... 그녀에게서 배짱을 빼면...... 시체다. “너 나한테 관심있어? 관심있음 말해, 혹시 알아? 내가 받아줄지? 옷 벗고 춤춰줘? 너무 약한가? 넌 호스트바에서 그런 장면 맨날 보니까?“ 악악악!!! 제발 비원이 화 좀 돋구지마라!!!!!!!!!!! 그 순간 비원이가 손을 높이 치켜들었고, 민서는 피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환영이가 그 상황을 말리기 위해 뛰쳐나가려 할때.... “...... 다 나은 뒤에.... 너 나한테 맞을 각오 하고 있어라.....” 상처투성이인 민서 얼굴을 차마 때릴 수는 없었던 듯... 손을 내려놓는 비원이. 전쟁이다. 하루하루가.... 전쟁처럼 흘러간다... 65. 러브샷 침묵으로 흘러가는 이 상황을 견디다 못한 나, 정시언. 내 방으로 도피하여 이 놈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극악무도한 생각을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책임지고 이 분위기를 바꾸어 놓기로 결심했느니. “어이, 아가들.” 내 발랄한 외침에 모두들 표정을 찡그린 채 날 바라보고... “오늘 다들 소주 콜?” 죽어보자, 이 자식들아... 물론 이 누나가 어제도 진한오빠와 한 잔하느라 급격하게 체력을 소비한 건 사실이지만 대학 신입생 때는 일주일 중에 6일을 술로 보낸 역사가 있는 사람이다. 원래 분위기 팍팍하고 냉냉할수록 술로 푸는 거다. 그리고 이럴때에는 양주나 맥주는 뒤로 미뤄야한다. 오로지 소주인거다. 환영이는 내 말뜻을 이해한 듯 씨익 웃어보였다. “맙소사.” 정말 못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휴인이와, 나를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민서와 비원이. 하지만 이 놈들에게 내가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다. 즉흥적이고 뜬금없이, 때로는 제멋대로이기까지 한 행동 때문에. 나는 이미 [관계자 외 출입금지]안에서 내가 해야만 하는 역할을 완벽히 알고있었다. 왜냐면, 이 곳은 누가 뭐라해도 나의 집이고, 나의 고향이고. 내가 믿고있는 아이들의 작은 세상이니까. “잔 꺾는 새끼는 벌주!!!! 무조건 원샷이다.” 비원이와 민서를 화해시키고, 냉랭한 분위기를 완화시켜보겠다는 의지는 사라진 지 오래. 난 이미 술을 맛 볼 생각에 어른으로서의 의무따윈 잊은지 오래였다. 늦은 밤에 슈퍼까지 가서 소주와 안주를 한아름 사온 환영이만 땅콩과 오징어등을 먹기좋게 접시에 담고 있을 뿐, 나머지 놈들은 나를 마치 괴물로 느끼는 듯 했다. “환영이 너도 빨리 와, 일단 건배하자, 건배!!” 아이들의 뚱한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일단 첫잔을 들어올리고. “나 소주는 입에 안 맞는데....” 비원이가 조용히 중얼거린다. 당연하지, 부잣집 아들일때는 소주란 게 세상에 있는지도 몰랐을거다. 주변 사람들이 마시는 거라고는 칵테일이나 와인밖에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호스트바에서 일한 이후로는 양주만 줄기차게 마셔왔을테고. 민서는 말없이 잔을 들어올렸다. 휴인이는 이미 환영이가 찢어놓는 오징어를 입에 물고 질겅질겅 씹는 중. “자, 다들 잔 들고!! 민서랑 비원이는 러브샷 하는거다!!!” 아직 민서를 마음에 두고 있을 환영이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일단 싸워서 서먹해진 민서와 비원이를 화해시키기 위해 말을 내뱉었다. “미쳤냐?” 비원이의 격한 반응. “야, 원래 싸운 사람들은 술 마시면서 화해하고 그러는거야. 잔말말고 러브샷 해.” “너 어른인 척 하지마, 역겨워.” “나 원래 성인이거든!!! 민증에 잉크도 안 마른것들이 깝치기는, 닥치고 내 말 들어.” “정신연령은 유딩인 주제에....” “너 죽고싶냐?” “너 자꾸 그러면 나 정시발 이야기 해버린다?” .............. 나쁜 새끼, 저런걸로 협박하다니. 다행히 비원이가 내뱉은 ‘정시발’에 큰 관심을 보이는 놈은 없었다. 난 비원이와의 말싸움을 피하기 위해 대화상대를 민서로 급히 바꾸었다. “알았지, 민서야? 비원이랑 러브샷!!” “신비원이랑 러브샷 하면.....” "응?“ “너도 나랑 해줄거야, 러브샷?” 민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휴인이를 쳐다보았다. 입이 댓발나오긴 했지만 딱히 반대하는 분위기는 아니었기에 나는 민서를 향해 고개를 마구 끄덕여주었다. 일단 민서와 비원이의 화해는 시키고 보자는 일념이 강했기 때문이다. 다들 술잔을 쨍!! 부딪힌 후, 소주 원샷, 아따 좋다. 자연스러운 손목스냅으로 술 한잔을 한번에 입 안으로 털어넣은 나는 급하게 민서와 비원이에게 시선집중!! 민서는 인상을 있는대로 쓴 비원이를 자신의 쪽으로 휙 끌어당기더니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러브샷을 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약간 멈칫하던 비원이도 주춤거리더니 소주를 원샷. 저 놈 표정봐, 소주는 정말 못 마시나보다. 저 찌푸린 미간을 보시라. 환영이와 휴인이는 소주를 많이 접해본 모양이었다. 첫 잔을 무난하게 마셔버렸으니까. “그럼 정시언, 나랑 러브샷 해.” 민서가 첫잔을 마시고 쓰러지길 바랬으나... 그건 너무 큰 소망이었다. 그녀는 곧 나에게 러브샷을 해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고, 덕분에 첫 잔을 마신 후 1분의 여유도 없이 두 번째 잔이 시작되었으니... “그, 그래. 다들 잔에 술 채웠지? 그럼 민서야, 너랑 나도...” 빠른 스피드에 당황한 내가 민서의 팔과 내 팔을 교차시키려 했을 때... “누가 러브샷 1단계랬어?” “응?” 벙찐 내 표정을 무시하는 민서. “갈수록 단계가 높아지는 게 맞잖아. 러브샷 2단계하자구.” 러브샷 2단계라 함은... 서로 안고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던가. 내가 대답할 새도 없이 민서는 센 힘으로 나를 자신의 품안으로 끌어들였다. .......... 좋은 향이 난다.... 민서의 품에서. 거칠지만 편안한 휴인이의 품과는 뭔가 다른 기분. 우울하고 그리운 느낌이다. 나도 모르게 민서를 꽉 안아주었다. 거친일을 많이해서 그런가, 여자치고 몸이 꽤 단단하다. 옆에서 거칠게 술잔을 들이키는 휴인이의 모습이 보였다. 저 놈, 지금 티는 못내고 있지만 질투하는거다. 귀엽기는. “이 자식아아~ 난 기분이 나쁘단 말이다아~ 니 멍자국만 보면 마음이 아프다고오~” 무르익은 술자리. 술이 조금 들어간 나는 환영이를 앞에 앉혀놓고 넋두리 중. 환영이는 술을 마셨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멀쩡한 모습이었다. 굳이 정상적인 상태를 자랑하는 사람들의 순위를 매겨보자면 환영 > 나 > 휴인 > 민서 > 비원이라고나 할까. 더구나 이미 호스트바에서 양주로 1차를 마친 비원이의 상태는 과한 정도였다. 비원이는 벽에 기대 널부러져 있었다. 민서는 쭈그려앉아 긴 머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어두운 데서 본다면 처녀귀신의 모습과 흡사하리라. 휴인이는 혼자 술을 따르고, 마시고를 반복하다가 술 깬답시고 밖의 평상에 나가있었다. 아마도 그게 놈의 술버릇인 것 같았다. 그나마 제일 멀쩡한 환영이와 나는 단 둘이 구석에서 이야기 나누는 중. “그 일 말고....... 다른 일도 많잖아, 환영아.” “나, 다른 일도 해요, 누나.” “그니까 내 말은, 아, 이 자식 거참, 말 더럽게 못 알아먹네!! 맞아주는 일 하지마!!” 또 웃는다. 그저 웃는다. 싫다, 이런 식의 웃음, 슬픈데도 억지로 남을 배려하는 이런 웃음. 환영이식 웃음이........ 언제나 날 미치게 한다. 그 때였다. 방문이 드르륵 열린 것은. 휴인인가 싶어서 뒤를 돌아보았을 때 보인 건.... 준휘다. “앗, 넌 해커의 준위가 아니냐, 한잔해라, 여름이랑 잔이는 어디다 두고 왔니.” 앞서 말했지만, 나는 술이 들어가면 혀가 짧아진다. “준위가 아니라 준휘입니다, 누나. 여름이가 아니라 열음이고, 잔이라 아니라 산이죠. 평상에 휴인이형 엎어져있는거 보고 예상은 했지만 가관이네요.“ “들어와, 임마!! 너도 한잔해!!!” 정시언, 내일 아침 일어나면 창피함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애들 데리고 온갖 추태를 다 부리고 있는 이 모습.... “술 안해요, 이래뵈도 해커는 바른 생활 청소년들이거든요.” “재미없는 새끼.” 욕해주고 술 한잔을 더 들이키는 나. “환영이형, 의뢰요.” 문에 기대선 준휘가 곱게 접혀져있는 종이 한 장을 손가락에 끼우고 환영이를 향해 말했다. 순간, 술이 다 깨는 기분. 의뢰? 설마.... 설마... 환영이가 한다는 폭력의뢰? 돈 받고 사람 패준다는... 바로 그 일인가? “도일공고요. 전치 4주 정도만요, 금액이 꽤 커요.” “준휘야..........” “뭐 어때요, 저 누나도 취한 것 같은데.” 그렇다, 언제나 태평한 성격을 자랑으로 삼는 준휘는 내가 취했다고 단정하고 의뢰 소식을 환영이에게 전하고 있었다. 뭐지? 해커애들이............ 진짜 해커? 맙소사, 정시언 바보. 랩퍼팀이라는 건 내 의심을 피하기 위한 속임수였구나. 그래, 정리가 된다. 인터넷에서 의뢰를 받는 건 해커, 그걸 처리하는 건 환영이. 그럼 민서의 소매치기 정보도... 다 해커애들이 해주는 거? ............ 말도 안돼.... [관계자 외 출입금지]보다 더한 놈들이잖아. 아직 열일곱살밖에 안된 애들인데.... 쉽게 볼 능력이 아니야. 소름이 끼친다. 휴인이와 아무 생각 안하기로 해놓고, 그냥 서로 사랑하는 일에만 신경쓰기로 해놓고 어쩔수 없이 이런 생각을 해버리는 나에게 화가 난다. 그러나... 이렇게 대단한 애들을 뒤에 내세운 [관계자 외 출입금지]놈들도 너무했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 작정했어, 이 애들은...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작정한 애들이야... 대체 해커애들은 왜 [관계자 외 출입금지]를 돕고 있는걸까. 저 정도의 실력이면 국가기관에 들어가서 일해도 손색이 없을텐데. 모든 범죄자의 신상명세를 파악하는 건 힘든 일이다. 김반장님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놈들의 범죄현장을 담은 영상을 보던 날이었던 것 같다. - 아마도 뒤를 봐주는 해커가 있는 것 같아, 시언아. - 해커요? - 뭐랄까, 경찰이 이 애들을 못잡는 이유에 그런것도 포함되어 있다고 할까. 놈들의 정보도 항상 바뀌고, 거주지역이라던가, 세부적인 프로필도. - 그럴리가요. - 아니야, 확실해. 뭔가가 미묘하게 어긋나고 있어. 그래서 잠복근무가 필수적인거야. - 넷 중에 한 명이 해커 아닐까요? - 그럴 가능성도 있지, 하지만 이런 수준급의 해커가 이놈들 중에 있다는 게 가능할까? 한 명의 솜씨가 아니야. 적어도 세네명 정도는 동시에 활동하고 있어. 정시언 바보, 완전히 까먹고있었어. 너무 우습게 본거야. 새록새록 피어나는 그 때의 기억에 머리가 터질것만 같았다. “나가, 나가서 이야기하자.” 그 때, 환영이는 일어서서 준휘가 들고있는 종이를 휙 낚아챘다. 그리고 그를 데리고 급히 밖으로 나갔다. 내 눈치를 보는 게 느껴진다. 내가 그들의 대화를 캐기 위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일어서려 할 때... 누군가의 손이 내 손목을 강하게 붙들었다. “누나.................” 66. 하늘과 바다 비원이다. 길고 쭉 뻗은 비원이의 손이 나의 갸날픈... 아니, 그래, 우람한 내 손목을 붙들고 있었다. “.......누나..........” 처음인데, 비원이가 나를 누나라고 부르는 거... 처음이다. 당장 밖으로 나가 환영이와 준휘의 이야기를 엿들어야 했으나, 나는 비원이의 젖은 목소리에 그만 다시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비원이는 제일 굳세고 강한 놈이었으니까, 그런 놈이 이렇게 무너질 줄은 몰랐으니까. 울고 있지는 않았지만 비원이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술은 많이 먹이긴 했나보다... 술 센 비원이가 이렇게까지 망가지다니. “......괜찮냐? 어떻게 소주에 그렇게 약하냐... 내일 속 안쓰리겠어?” “.........가지.......마........” “응?” “........나만 두고...... 왜 떠났어.... 살지 그랬냐... 살지 그랬어..... 보란 듯 살지....” “너 잠꼬대해?”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뭐라고.... 내가 너한테 뭐라고....” “넌 나한테 싸가지.....” 웃음으로 넘기려 했으나 비원이는 농담을 주고받을 상태가 아니었다. “잔인해........” “비원아......” “변해볼.... 기회도 없이, 죽음.....으로 끝나버렸어. 병신같이..... 조금만 더 살아보지. 그러면 나 잊을 수도 있었을텐데....... 그냥 바로 뒤졌어, 그 미친게....“ “그게 무슨 말.............” “...................유.......리........누나............” 나는 그때서야 알아차렸다. 비원이가 애타게 부른 ‘누나’라는 존재는 내가 아니었음을. 온통 비밀투성이인 이 놈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유리라는 사람은 비원이에게 얼마만큼의 존재가치를 지니고 있었을까? “그........ 누나가.... 죽었...어?” 조심스레 물어본 내 질문에.. 비원이는 풀린 눈으로 나의 얼굴을 바라본다. 한쪽으로 쓸려버린 그의 머리카락을 제대로 정돈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때, 비원이의 오른쪽 눈꼬리 밑에서 눈물방울 하나가 똑... 떨어진다. 말도 안돼, 비원이가, 비원이가 울다니 정말 말도 안돼. “비, 비원아.............” “.........유..........리.... 유리.....누나.........”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해야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지켜주지....... 못했어... 아껴주지도 못했고, 사랑...해주지도 못했어....” 비원이의 입에서 나온 사랑이란 말에 소름이 끼쳤다. 저 놈도 사랑하는구나, 냉혈인간처럼 보여도, 기를 쓰고 강해보이려 해도. 사랑하는구나,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구나. “괜찮아.... 그 사람도 알거야, 니가 이렇게 힘들어하는거. 그러니까.... 너 미워하지도 않을거고.... 이해해줄거야. 니가 이러는 거 싫어할거야.“ 되도않는 위로를 지껄이고 있는 정시언. 이 순간, 나 자신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너나 잘해.] “유...........리...누나................ 내..........하늘..............” 비원이의 하늘. 하늘이란 단어에 왜 민서가 떠올랐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미쳤어, 정시언.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생각했다. 그래, 나에게 있어 하늘이 민서라고 치면.... 휴인이는 나에게 뭐지?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재빠르게 휴인이와 겹쳐지는 것이 있었다. 나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너무 어이없어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내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이제 휴인이였다. 휴인이와 겹쳐진 건, 때때로 하늘보다 푸른 빛을 자랑하는 깊고 넓은 바다였다. 비원이는 곧 옆으로 쓰러져 잠에 취해버렸다. 이대로 두면 감기 들겠다싶어 방 한 구석에 쌓인 이불 중에 하나를 질질 끌고왔다. 비원이를 제대로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려는데 뒤에서 내 옷자락을 움켜쥐는 민서의 손이 하나 불쑥 나타난다. 아니, 얘들이 단체로 미쳤나, 왜 이렇게 나를 잡고 늘어져. 자꾸 이러지마, 이렇게 서로 정들다가.... 너희들 없이는 1분 1초도 못 견디는 정시언이 될까봐 겁난다. 그리고, 앞으로 정시언이 없으면 활력을 잃어버리는 너희의 모습도 상상하기 싫다. “민서야........ 넌 또 왜....” “한 박자 느렸어, 그것도 죄야?” 그녀도 분명히 취했으나 비원이처럼 말을 더듬거나 쉬지 않았다. 그녀의 말만 들어보면 절대 취한 사람이 아니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그나저나 한박자 느렸다니, 설마 지금 내가 지보다 비원이를 더 먼저 챙겼다고 질투하는 것인가? 이래서 기지배들은 피곤한거다. “비원이는 지금 너보다 더 취했으니까 내가 어쩔 수 없이....” “죄라면 죄겠지. 힘없는게 죄라고 생각했는데... 느린 게 더 죄네....” “넌 또 왜 그래, 그냥 취하면 쳐자라. 나 힘들다. 한명 한명 다 챙기려니...” 민서를 구박하는 척했지만 사실 그녀가 말하는게 무슨 뜻인지 파악해버렸다. 나에게 고백하는 타이밍이 휴인이보다 늦었다는 걸 탓하고 있는 것이다. “후회할거야.....” 민서는 소주를 따라 또 한 잔 들이키며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의 소주잔을 빼앗아버렸다. “취했어, 그만해.” 이대로 두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내 온 몸을 훑고 지나갔다. 위험하다, 지금 민서의 상태는 굉장히 위험했다. 이 애가 나에게 가진 감정을 호감을 넘어선 상태였다. 지금 이때쯤, 이 자리에서 나는 이 아이에게 내 솔직한 마음을 말해주어야 했다. 너는 아니라고, 쓸데없는 감정은 가지지 말라고, 딱 잘라 못박는 것이 좋았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쓰잘데기 없는 희망고문을 하는 사람이 되니까. 많이 나쁜 사람이 되기보다는, 그냥 나쁜 사람이 되는게 더 나으니까. “민서야, 내가 말한 적 있지? 난 남자를 사랑해, 여자는 사랑하지 않는다구. 니 취향을 탓하는게 아니라, 내 취향이 너와는 다르다는 걸 인정해줬으면 하는거야.“ “...............여자 아니야.” “........... 너도 빨리 자. 너는 저기 건넌방에서 자는거지?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남자애들이랑 뒤엉켜서 자면 안된다, 그럴 놈들은 아니지만 혹시 모르니까 조심해. 큰일날수도 있으니까.“ “지금...... 누가 큰일인지 모르는구나.” “..............” “어떨거 같애? 지금 너를 탐내는 남자와, 니가. 같은 방안에 있는 거라면?” “.........비원이는 나를 탐내지 않는 것 같은데. 휴인이랑 환영이는 밖에 있고.” “그럼 나는 뭔데.” “너는 여자잖아.” “나 여자 아니라구........” 저게 취해서 이제 아무 말이나 막 내뱉는다. “남자가 되고싶은 니 맘은 이해해, 나를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위해 니 취향까지 바꾸려고 하진 마라. 언젠가 너를 좋아해주는 귀여운 여자애를 만날 수 있을것이다. 아직 동성애자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좋은 건 아니다만, 힘내라. 원래 사랑은 다 쟁취해서 얻는거야, 임마.“ 민서의 어깨를 두어번 쳐주고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재빨리 미닫이문을 밀었다. 순간 민서의 한숨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아주 깊숙한 곳에서 끌어올려진 듯한 그녀의 한숨소리는 순간 나까지 슬프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한숨소리와 동시에 나는 방문을 닫아버렸고, 곧바로 내 눈앞에 보인 건 평상에 대자로 뻗어있는 휴인이의 모습이었다. 조금은 차가운 밤이슬과 휴인이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비원이와 민서는 잊고 지금 눈앞에 펼쳐진 모습만 신경쓰자. 그나저나...... 환영이랑 준휘는 어디있는거야. “......누나아............” 죽은 듯 눈 감고 있는 휴인이의 입에서 별안간 튀어나온 ‘누나’ 어쩜 누나라는 소리를 저렇게 간드러지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나온 건 어떻게 알았지? 최대한 소리안나게 나온건데!!! “휴인아...... 안 잤어?” “난 술 마시면 잠이 안와... 그러니까 누나 오늘 새벽까지 나랑 놀아주기다?” “쳐자라고 술 먹여놨더니.” “나도 오늘 갑자기 싸우는 바람에 몸이 쑤셔 죽겠는데... 그래서 자고 싶었는데. 술 먹는 바람에 잠이 안와... 난 취한 뒤에 바로 자면 숙취 장난 아니란 말이야. 술 좀 깬 뒤에 자야돼.“ “근데 휴인아....... 환영이는 어딨어, 아까 준휘랑 같이 나가던데.” 단순히 궁금증 해소를 위해 물어본 것처럼 보이기 위해 애쓰는 나. “아예 대문 밖으로 나가던데.” 휴인이도 별일이 아닌 것처럼 대답해준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휴인이. 어쩐지 비밀을 캐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신경을 곤두세우면 되는 일이 더 없을지도 모른다. 휴인이랑 아무 생각 안하기로 했잖아, 그냥 느긋하게 기다리자, 정시언. 나는 환영이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안달하는 대신 사랑하는 휴인이의 옆에 머물러주는 길을 택했다. 아까 분명히 들었잖아, 준휘는 도일공고라고 말했어. 정 궁금하면 내일 환영이 뒤를 캐거나, 도일공고로 찾아가면 되는거야. 지금은 휴인이 옆에 있자. “누나...........” “왜?” 평상위에 걸터앉아 밤하늘을 보는 나. 바다같다, 밤하늘은.... 꼭 바다같다. 아득하지만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휴인이처럼. “아까 민서랑 러브샷 하니까 좋았냐?” 그러나 저 어린 애새끼는 그저 질투, 질투, 질투.... “귀여운 새끼, 불안했냐? 날 믿어, 임마. 누나는 남자 좋아한다.” 내 말에 휴인이가 피식 웃었다. “그럼 민서가 남자라면, 내가 졌을 수도 있다는 말이네.” 그 웃음이... 순간 미치도록 슬펐다. “아따, 거참... 있지도 않은 일 가정해서 생각하지 좀 마라, 안 그래도 빡빡한 인생 그런 생각하다가 더 살 맛 안나겠구만. 괜히 복잡하고 머리 아프게시리....“ 그 말은 꼭 휴인이에게만 한 말이 아니었다. 내가 내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생각하지마, 정시언. 이 상황에 그냥 니 몸을 맡겨. 누가 주동자인지.... 잠시 덮어두자, 제발. 재벌 아들은 알고있잖아... 서두를 필요 없어. “누나, 나랑도 러브샷 할래?” 휴인이는 몸을 일으켜 평상 위에 있던 보리차를 컵에 따르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장난끼 있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의 눈은 굉장히 진지했다. “.......컵이 하나밖에 없잖아. 기다려, 부엌에서 하나 더 가져올게.” “아냐, 앉아, 누나.” “컵이 없잖아, 러브샷 하자며!!!” 평상에서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가려는 나를 홱 돌려세우는 휴인이. “바보, 러브샷 3단계 하면 되잖아.” 보리차를 한모금 마신 휴인이가 내 목을 끌어당겨 키스한다. 그리고, 휴인이의 입술을 통해 내 목으로 흘러들어오는 보리차. 미치겠다, 정말... 어린 게... 벌써부터 멋진 척이나 해대고. 나중에 휴인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면, 도대체 얼마나 멋져질건지. 불안하고 두렵다. 각자 다른 아픔과, 각자 다른 사랑을 가지고, 오늘 밤도 이렇게 저물어간다. 67. 운명 1 (작가시점) -과거, 첫만남의 그 날- “차라리 유학을 보내줘!!” 민서는 아버지 앞에서 소리치며 얼굴에 붙은 가죽을 뜯어냈다. “민서야!!” “내가 언제까지 돼지 소리 듣고 살아야겠어? 학교에서 애들이 지랄한다구. 따돌림 당하는 건 상관없어, 나도 골 빈 새끼들이랑 어울릴 마음 없으니까!! 근데 둔해보여서 나도 나를 보면 역겹다구. 이 분장 때문에 날 괴롭히는 개새끼들이랑 한 판 붙지도 못한다니까? 일부러 행동까지 둔해지라고 내가 모래주머니도 몇 개를 차고 있는 지 알아? 내가 맞고다니는 게 좋아? 아빠는 왜 나한테 이런 걸 강요하는건데!!?“ 민서의 아버지는 오랜만에 드러나는 아들의 맨얼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급히 집무실의 문을 잠가버렸다. 다른 사람이 민서의 얼굴을 보게 되면 피해가 커지리라. 큰 회사의 회장 자리는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다. 업무는 미친듯이 그를 압박해왔고,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사람들은 그의 목숨까지 위협했다. 때문에 아들은 지켜야 했다, 사람들의 날카로운 눈초리에서 벗어나게 꾸며야했다. 아들을 분장시킨것은 민서가 유치원생이 되던 시절부터였다. 남들 보기에 둔하고 멍청한 사람으로 위장시키기 위해 민서는 억지로 뚱뚱한 척 분장을 하고 다녀야만 했다. 그가 분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민서와 그의 부모님, 아버지의 오른팔인 윤비서, 어릴 적부터 그를 키운 유모, 그렇게 다섯 사람만이 알고있는 사실이었다. 유모는 아침마다 민서를 분장시키기 위해 메이크업 기술자 못지않은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민서야.....” “맨 얼굴로 햇빛을 맞이한 기억이 없어......” 민서의 아버지는 한숨을 쉬었다. 아들의 답답함이야 백번천번 이해한다. 그러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뭔 짓인들 못할까. 자신의 목숨은 이미 날아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스스로 회사의 모든 것을 버린다해도 회장의 자리를 탐하는 자에게는 그의 존재자체가 위협이었다. 아들만은 살려야했다. 그러기 위해 아들의 모습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이런 분장이 불가피했다. 그는 곧 아들을 가출로 위장한 채 내보낼 생각이었다. 회장의 핏줄을 없애버리려는 회사 사람들이 민서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겠지만, 가출로 위장한 아들은 그때부터 맨얼굴로 햇빛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사람들은 민서를 찾지 못할것이다. 진짜 백민서는 멍청하고 둔한 뚱보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민서의 아버지는 아들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신경질이 조금 배어있기는 하지만 맑은 얼굴이다. 특히 고운 턱선과 얼굴형은 여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아들의 얼굴은 젊은 시절 자신의 외모와 꼭 닮아있었다. 그에 반해, 얼마전에 만난 또 다른 아들, 비원은..... 자신보다는 어미를 닮아있었다. 젊은 시절 회장을 사랑의 열정에 들뜨게 만들었던 그녀의 얼굴 그대로였다. 비원에게 느껴지는 안쓰러움은 민서에게 느껴지는 안쓰러움과는 다른 종류였다. 민서에게는 불안과 두려움을 심어줘야 하는 것이 미안했고, 비원에게는 아버지의 부재와 외로움을 안겨줘야 하는 것이 미안했다. 낳아놓기만 하고 제대로 돌봐주지도 못한 둘째아들 비원은 회장에게도 그리운 존재였다. 앞으로 계속 혼자 지내야 할 비원이도 눈에 밟히기만 했다. 비원이 회장의 의견을 승낙했더라면 이토록 아들들의 미래가 걱정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회장은 끝없이 고민했다. 홀로 살아나가야 할 아들들의 외로운 인생을. “유학은 안된다. 너도 알지않니. 외국으로 몸을 숨기면 넌 더 위험해진다. 널 어떻게든 찾아내서 해하려 한단 말이다.” “정체도 모르는 인간을 두려워하면서 살기도 이제 지쳤어!! 왜 당하고만 있는거야? 우릴 헤치려는 사람이 대체 누군데!!! 그걸 먼저 알아내서 우리가 먼저 죽이면 되잖아!! 우리가 먼저 나서면 되잖아!!! 나약하고 비겁하게 왜 내가 웅크려야 해???“ 민서는 아직 어리며,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회장의 자리에 앉아있으면 위험은 언제 어느때나 시시각각 닥쳐오는 법이다. 자존심 강한 아들은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더구나 사내로서 존재감이 확립되어 가던 사춘기 시절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불안감 속에서 살기도 지쳤어... 정 무서우면 탈출해... 같이 떠나면 되잖아.. 왜 아빠는 나만 나가라고 해?“ 어떻게든 아들만은 살리고 싶은 아버지의 생각을 아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회장이 자신의 지위를 내놓는다 해도 위험에서 놓여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깔끔한 뒤처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를 없애기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이다. “이제 얼마 안남았다...” 회장은 훌쩍 커버린 아들을 품에 안았다. 안쓰러움에 미칠것만 같았다. 아들은 아침마다 몇 시간씩이나 걸리는 분장을 해야했고, 몸에는 여러개의 모래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몸을 무겁게 하기 위해서였다. 뿐만 아니라 멍청해보이는 이미지를 위해 학교 공부는 최하위를 유지시켰다. 대신 집에서 독학으로 피나게 공부를 해야만 했다. 학교에서는 멍청한 뚱보로 놀림받으며 언제나 따돌림을 당하는 아들이었다. 어릴 적부터 윤비서를 통해 각종 호신술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민서는 그것을 사용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충분히 방어할 수 있음에도 맞아야 했고, 충분히 상대를 때려눕힐 수 있음에도 욕을 들어야 했다. 아들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두 개의 모습을 한 채 살아온 것이다. “일주일만 참아라....” “.............” “5일 후에 아빠와 엄마는 사업 차 독일로 간다. 회사를 탐내는 놈들은 분명 그 때를 틈 타 너를 먼저 공격할거야. 일단 너는 너를 조종하려 하는 사람들의 말을 고분고분 듣는 척해라. 그들도 너를 바로 해치려 하지는 않을거야, 시간을 두고 니 행동을 살피려 할거다. 그러다가 이틀 후, 탈출하는거다. 니 분장을 집어던지고, 근처의 쉼터까지는 윤비서가 책임지고 데려다줄거다.“ 민서는 아버지의 설명을 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깨문 입술에서 비릿한 피맛이 흘러나왔다. 아직 그는 미래에 대해 까마득하게 모르는 소년에 불과했다. “돈이 남아있어서 다행이야. 이 동네도 10년 안에 재개발 될 예정인가봐. 그래서 집값이 싸더라구, 너랑 내 돈 합쳐서 이 정도 집이라도 얻은 거면 꽤 성공적으로 이사한 거 아닌가?“ 환영은 애써 미소지으며 휴인을 돌아보았다. 전 날, 유인이와 환희의 첫 면회를 다녀온 휴인은 그 후로 계속 저기압이었다. 철거된 동네를 떠나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온 후에도 그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환영은 한숨을 쉬며 평상 위에 털썩 앉았다. 둘이 살기에 이 정도면 충분하다 싶고 혼자 계약하고 짐을 옮겼다. 믿을 수 없게도 휴인과 환영의 짐은 상자 4개에 충분히 담기고도 남았다. “휴인아, 너도 이제 마음 잡아. 환희도 1년 뒤에는 출소하고, 유인이도 그때쯤이면 제 정신 차릴 수 있을거야. 그러니까 우리 둘이 힘 합쳐서 돈 많이 번 다음에.........“ “지환영.” 막 담배 하나를 태운 휴인이 조용히 환영의 이름을 내뱉었다. “지겹지 않냐, 이렇게 사는 거.” 휴인의 말에 환영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동생들의 일로 이성이 마비된 듯한 휴인이의 말에 충분히 위험이 감지되는 듯 했다. “너 무슨 생각 하고 있는거야.” “............갈아엎자, 우리가.” “강휴인.” “빌어먹을 세상, 우리가 바꿔버리자.” “너 미쳤어?” “있는 놈들 상대로!!!!!!! 우리가 한 번 해보자.” 초점이 없는 듯한 휴인의 눈빛에 환영은 겁을 먹었다. 동생들에 이어 휴인까지 잃어버릴까봐 무섭고 두려웠다. 누가 뭐라해도 그 두 명은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 사이였다. 친형제 이상을 서로를 잘 알고있는 친구 말이다. “너 빗나가는 거 더 이상은 못 봐줘. 나 건드리지 마라. 한번쯤 조용히 살아도 되잖아. 제발 이제 마음 잡고 살아봐, 이 미친놈아!!“ 환영은 휴인의 멱살을 잡고 당장이라도 때릴 듯이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휴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좆같잖아, 너도.” “강휴인!!!!!!!!” “어차피 병신처럼 살다가 죽을 거, 바꾸려는 노력은 한 번 해보고 죽자고. 우리가 잘못한 게 대체 뭔지 난 정말 모르겠거든. 착하게 살아온 유인이가 정신병원에 왜 쳐박혀야 되는지 이해가 안가거든. 불의 못 참는 환희가 왜 교도소에 있는건지 난 납득이 안되거든. 가난한 게 죄였냐.... 나 존나 못 배운 놈인건 맞는데... 가난한 게 죄였는 줄은 몰랐다, 그런 말은 교과서에도 없지않냐?“ “.................허튼 생각 하지마.....” “가난한 게 죄면, 어차피 우리는 평생 죄인일거야. 그럴바엔, 진짜 죄인이 돼버리자고.” “휴인아, 제발.....” “대신..... 나쁜사람한테만 죄인 하자.... 착한 사람들 앞에서는 착한 짓 하고... 나쁜 사람 앞에서는 우리도 죄인되자.“ 환영은 휴인의 멱살을 찬찬히 풀었다. 휴인은 진심이었다. 방금 전까지 죽어있는 휴인의 눈이 다시 반짝이고 있었다. “휴인아...........”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넌 항상 내 편이었다. 이번에는 어떡할래?” “.........미친 새끼........” “앞으로 내가 만들어갈 천국에 난 제외되어도 좋아. 다들 나를 죄인이라고 몰아붙이면 그 벌 달게 받지 뭐. 아무리 심해봤자 죽기밖에 더 하겠냐? 단지 난... 약자들이 웃을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하는거다.“ “......생각보다... 정말 위험한 일일수도 있어....” “지환영, 난 나쁜오빠는 할 수 있는데, 약한 오빠는 하기 싫다. 멋대가리 없잖아.” 경찰에 잡혀가는 한이 있더라도 하겠다는 말이었다. 동생들을 위해 세상을 바꾸겠다는 말이었다. 곁에 항상 있어주는 좋은 오빠 대신, 세상을 바꾸는 강한오빠가 되겠다는 말이었다. 그런 휴인의 앞에서 환영은 차마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환영은 결국 휴인의 손을 잡고 말았다. 환영은 태어나서부터 줄곧 휴인의 반대편에 선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68. 운명 2 (작가시점) -과거, 첫만남의 그 날- “...... 아저씨.... 뭐라고 하셨어요?” 민서는 천천히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섰다. 민서의 앞에 서 있는 윤비서의 얼굴은 침통하게 굳어있었다. “회장님과 사모님이 타고 계시던 전용기의 비행사가... 매수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독일로 향하시는 중에 비행기가 추락했고, 두 분 다 즉사하셨습니다.“ 민서의 아버지는 분명히 말했었다. 맨 처음 표적이 되는 것은 민서일 것이라고, 아버지의 예측은 빗나갔다. 한꺼번에 부모를 잃어버린 아픔에 가슴이 먹먹해져왔다. 너무나 갑작스러워 눈물조차 나지않았다. “......... 대체 누굽니까.... 나를!!! 우리 가족을!!! 해치려 하는 게 도대체 누구죠??” 민서는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모두 풀어버리려는 듯 소리쳤다. 그러나 냉정한 윤비서는 이 말이 다른 사람들에게 새어나갈까봐 염려되는 듯 민서를 향해 조용히 하라는 행동을 취해보였다. “지금으로선 불분명합니다. 아니,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십시오, 그 누구도 믿어서는 안됩니다. 필요에 의해서라면 저 또한 믿으셔서는 안됩니다. 아시겠습니까? 도련님의 적은 외부에도, 내부에도 존재할 겁니다.“ 민서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생각이 마비되어 버렸다. “맘대로 하라고 해요, 엄마아빠가 죽었다구요, 나도 마저 죽이라고 해요!!! 내가 귀신이 돼서라도 복수해줄테니까!!!!!!! 나도 죽이라고!!!!!!!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지!!!!!! 설명 좀 해보라고 해요!!!!!!!!!!!!“ 악에 바친 고함소리에 윤비서는 측은한 눈빛으로 민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그런 생각을 멈추었다. 자신까지 약해져서는 안된다. 평생을 믿고 따랐던 회장님이 돌아가셨지만 지금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은 회장님의 후계자로서 키워진 아들, 민서 뿐이다. 고아였던 자신을 거둬준 회장님, 그 분의 아들이란 이유만으로도 충분하다. 윤비서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민서를 구해내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러시면 안됩니다.” “아저씨, 난!!!!!!!!!!!!!!!” “복수를 해도 살아서 하셔야 합니다!!!!!!!!!!!!!!!!!!” 윤비서의 큰 목소리에 민서가 움찔했다. “살아계셔야 합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 뿐입니다. 도련님이 무사히 몸을 숨길 수 있게 될 때까지,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아무리 철부지라 해도 민서는 자기 감정을 절제하는 법을 배워온 사람이었다. 그는 곧 마음을 진정시켰다. 윤비서의 말이 맞다. 약해질 시간은 없다. “아저씨와 유모도 표적이 될 수 있습니다.” “유모는 집에서 내보냈습니다. 언니가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평생 일할 생각이랍니다.” “아저씨는요?” “제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지금 중요한 건 오직 단 하나, 도련님이 무사해야 하는 것 뿐입니다.” 윤비서는 자신이 쥐고 있는 또 다른 사실을 말해야 하는지, 아닌지를 고민했다. 윤비서가 입고있는 정장 주머니에는 한 소년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회장의 또 다른 아들, 비원의 사진이었다. 회장은 윤비서에게 민서가 아닌 또 다른 아들이 있다는 비밀을 털어놓았고, 그를 찾아내달라 부탁했다. 윤비서는 비원에 대한 모든 정보를 끌어내고, 그를 찾아냈었다. 회장은 자신이 죽을 걸 예측하고 있었다. 그 순간이 언제일지, 몰랐던 것 뿐이었다. 윤비서에게 털어놓는 회장의 고민은 자신의 죽음 따위가 아니었다. 오직 두 아들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윤비서는 비원에 대한 일은 민서에게 숨기기로 결심했다. 나중에 말해도 늦지않다. 비원은 민서와 만나는 것을 거부했지만, 생각은 바뀌기 마련이다. 회장이 비원에게 건네준 민서의 사진 뒷면에는 민서를 돌본 유모의 연락처가 적혀있다. 물론 유모는 비원과 민서의 관계를 알지 못하지만, 윤비서는 한 소년이 유모를 찾아오면 그에게 민서의 행선지를 알려주라고 신신당부 해놓은 상태였다. 회장님의 아들들을 살리고, 그 뒤에 자신 또한 회장님의 뒤를 따르는 것. 윤비서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그 뿐이었다. “우리 둘로는 부족해.” 휴인의 말에 환영은 누워있던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사람이 많으면 행동이 더 커지잖아.” “그래도 우리 둘로는 안돼, 우리 둘이 범죄를 저질러도 세상이 바꿔지기는 커녕 2인조 날강도 도둑 등장, 이라는 타이틀만 따게 될걸?“ “........하지만 믿을 만한 사람이 없잖아.” “............세상에 실망한 인간이라면... 가능해. 세상을 증오하고 원망하는 사람은 절대 우리를 배신할 수 없어.“ “........ 그러니까 그런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찾냐구.”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짓는 환영을 향해 휴인은 씩 웃으며 그 날 신문을 펼쳐들었다. 환영의 눈에 [제일그룹 회장부부 사망]이라는 헤드라인이 들어왔다. “어쩌라구?” “이 부부들한테 아들이 있대. 우리랑 동갑이야.” “근데?” “뒤가 구리지 않아? 전용기 조종사가 바뀌었대, 스파이가 있었다는 뜻이지. 조사 좀 해봤어, 2개월 전부터 제일그룹은 좋은 일로 기사가 난 적이 없었어. 내부에도 적이 있고, 외부에도 경쟁사가 많아. 그리고 그 아들은 외동아들로 이제 천애고아가 된거야.“ “.........지금.... 그 애를... 끌어들이겠다는 거야?” “우리가 변한 이유도 동생 때문이지. 가족은.... 때로 한 인간의 인생을 바꿔놔. 더구나, 그 감정이 사랑하는 가족을 죽인 자들에 대한 복수라면.“ “.............” “이 애가 우리편에 들어오면 유리한 점이 많아. 우리에게도, 그리고 이 놈에게도. 이 놈은 적으로부터 자신을 숨길 수 있게 되는거고, 우리는 경찰로부터 공격을 피할 수 있는거야. 이 놈의 적들은 백민서를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어있을거야. 찾아내서 죽이는 게 목적일테니까. 절대 경찰에게 넘어가도록 두지 않을껄. 백민서를 넘겨달라고 요구하겠지.“ “..............” “무슨 뜻인지 알겠어, 지환영? 백민서가 누구인지 헷갈리게만 한다면... 우리는 경찰에게도 잡히지 않을 수 있는거야.“ 환영은 치밀한 휴인의 계획에 말을 잇지 못했다. “일단 가자.” “어딜?” “제일그룹 자택, 또는 본사에서 다른 곳을 지나가려면 어쩔 수 없이 지나치게 되는 차도가 있어. 우린 그 곳으로 간다. 그리고 백민서를 찾는거야. 도로 전체의 차 하나하나를 다 살펴보는 한이 있더라도, 그 놈을 찾아야해.“ “...........” “백민서.... 우리에겐 놈이 필요하고, 놈에겐 우리가 필요해.” 제일그룹의 회장 부부가 사망했다는 신문기사를 접한 뒤 비원은 심장이 터질 듯 답답했다. 그래도 자신의 아버지다. 엄마가 그토록 사랑했던 아버지가... 허무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것도,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배신당한 채로. 이런 기분을 느껴보고 싶은 게 아니었다. 살아줬으면 했다. 엄마가 사랑했던 사람이니까, 자신의 아버지니까. 그냥 웃으면서 행복하게 살아줬으면 했다. 비원의 인생은 쓰레기와 다름없었지만, 아버지는 살아줬으면 했다. 문득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미칠것만 같았다. 세상은 언제나 비원을 공격하고 방해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겪고나니 이제 그 누구도 빼앗기기 싫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엄마, 유리, 그 다음에는 아버지였다. 하나 남은 남동생이 무사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비원은 주머니에 간직해두었던 동생의 사진을 꺼냈다. 얄쌍하고 곱상한 얼굴, 비원과 닮은 구석은 없었지만 그래도 동생이다. 사진의 뒷면에는 한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이 곳으로 연락하면 동생을 만날 방도가 생기리라는 것을 비원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거지같은 꼴로 부랑자처럼 지내던 비원은 한숨을 쉬며 각오를 다졌다.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간 그는 번호 하나하나를 꾹꾹 눌러가며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여자의 목소리다. 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 비원은 곧 의문을 품었다. 일반 가정집의 번호같았기에 이것이 동생의 핸드폰 전화번호가 아닐거라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중년 여성이 받을거란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기에. “저기....... 저는.... 그러니까... 제일 그룹 회장님과 잘 아는 사인데... 그러니까 그 분의 아들을 찾아야.....“ 상대편에서는 말이 없었다. 너무 뜬금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냥 전화를 끊어버릴지도 모른다. “[소망고아원]으로 찾아와주세요. 서울 XX동에 위치해있습니다.” 단지, 그 두마디 뿐이었다. 다른 말 없이, 그 두마디 뿐이었다. 그러나 비원은 그 두 마디에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거지다, 거지.” “이봐요, 지금 다 자란 나이 같은데도 불구하고 이 고아원에서 신세진다는 건 아니죠? 지금 우리도 다 커서 눈치보이는데 그냥 돌아가요!!“ “박준휘, 시비걸지마. 볼일이 있는거겠지.” “노숙자 같은데. 설마 구걸하러 온 건 아니겠지.” 소망고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세 명의 소년이 서 있었고, 비원은 자신의 또래로 보이는 그들 사이로 지나가야 했다. 그 중 한 명은 혼혈아인 듯 싶었다. 갈색머리에 초록색 눈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비켜.” 비원의 위협에 혼혈아는 바로 길을 내주는 듯 싶었으나, 나머지 두 소년은 오히려 비원의 앞을 턱 막아섰다. “그럴수야 있나. 용건 말하시든지, 통행료 내시든지 하셔야죠.” “.........너희들 보러 온 거 아니야, 비켜.” “왜 이러시나, 가는 귀가 먹으셨나... 우린 고아원에서 썩을대로 썩은 놈들이라 예의같은 거 몰라요. 쓰러지기 전에 얌전히 말 들으시는게....“ “손모가지 부러뜨리기 전에.... 비켜.” 고아원의 악동으로 소문난 아이들이었지만, 그들은 비원의 카리스마에 눌린 듯 했다. 준휘라는 아이와 다른 한 명은 비원의 위협에 살며시 자리를 비켜주었다. 혼혈아는 그 장면을 바라보며 재미있는 듯 피식 웃을 뿐이었다. 확실히 고아원에 머무르기에는 나이가 좀 있는 소년들이었다. 그러나 비원은 그런 사실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가 급하게 고아원의 건물 안으로 들어섰을 때는 비원을 기다린 듯한 한 중년 여성이 현관앞까지 마중을 나와있었다. “...........당신이... 나에게 전화한 사람인가요?” “......그런데요.” 여인은 왠지 비원을 꺼리는 것 같아 보였다. 비원은 주머니에서 동생의 사진을 꺼내 여인에게 보여주었다. “맙소사... 분장하기 전의 도련님 사진이군요. 내가 찍은 사진이죠. 윤비서 말이 맞네요.....” “........... 저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그냥 난 윤비서에게 들었을 뿐이예요, 한 소년이 오면 민서도련님의 모든 것을 말해주라고 하더군요. 저는 도련님의 유모였습니다. 그쪽은 민서도련님의 친구신가요?“ “......아... 뭐, 비슷한 겁니다.” 비원은 여인이 사실을 모르는 것에 대해 안도했다. 쓰잘데기 없는 신파는 피하고 싶었다. 그는 동생만 지켜내면 족했다. 가족사 따위 구구절절하게 내뱉고싶진 않았다. “전화로는 안심할 수가 없었답니다. 도청의 위험이 있으니까요. 아시다시피 현재 상황은 좋지 않죠... 회장님이 그렇게 되셨으니... 저도 민서도련님 걱정에 미칠것만 같은데 친구분은 오죽하셨겠어요.“ “................” “도련님은 이틀 후에 움직이실 거예요. 타고계실 차 번호는 1234구요, 쉼터에서 접촉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서 차도에서 만나는 게 좋을 겁니다. 두 분이 만나신 뒤에는 몸을 숨겨주시기 바래요, 최대한 외진 곳으로요. 도련님이 분장을 벗고 이동할거니까 그렇게 마음 졸일 필요는 없어요. 윤비서는 민서도련님을 내려준 뒤에 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할거예요. 말하자면 적들을 유인하려는 거죠.“ 윤비서니 분장이니 뭐니 하는 인간들을 비원이 알고있을 리는 없었다. 다만 중요한 건 동생을 만날 수 있다는 거였다. “이틀 동안 여기서 쉬도록 하세요.” “아, 굳이 그래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예요, 비슷한 또래 아이들이 있으니 적적하거나 어색하진 않을거예요.” 그 비슷한 또래라 함은, 아까 입구에서 만났던 싸가지놈들을 칭한다는 것. 눈치빠른 비원은 그 사실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가보겠어요.” “윤비서에게 또다른 연락이 올수도 있어요. 계획이 변경될 수도 있으니 그냥 여기서 지내줘요, 부탁이예요. 윤비서와 나는 민서도련님을 지켜야 합니다.“ 실소가 터져나왔다. 괜히 온 것 같았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동생을 챙겨주는 사람들은 꽤 있는 듯 했다. “불쌍한 분이랍니다.” 유모라는 사람의 말에 비원은 인상을 찌푸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불쌍하다고? 과연 나보다 더할까? 나보다 더 벌레같은 인생을 살진 않았을 거 아냐!! 당장이라도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비원은 그저 땅바닥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게 되신 분이예요. 태어나면서부터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지내셨다구요, 그 분의 주변엔 온통 적들 뿐이랍니다. 도련님을 진심으로 아껴주는 사람은 없었어요.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살아오셨지요.“ 가슴이 꽉 막힌듯이 답답했다. 자신과는 다른 아픔 속에서 살아온 동생도 나름대로 힘든 생을 이겨왔을 것이다. 비원은 다짐했다. 동생만은 지키겠다고, 아프고 더러운 건, 자신이 모두 가져가버리겠다고. 69. 운명 3 (작가시점) -과거, 첫만남의 그 날- “형, 가지마요.” “너무 늙어서 그래요? 원장님이 안 받아준대요? 왜 벌써가요?” 동생과 만나야하는 운명의 날. 아침 일찍 일어나 고아원 밖으로 나설 준비를 하는 비원을 잡는 두 명의 손길. 준휘와 현우. 혼혈아라는 성재는 그저 구석에 서서 비원을 바라보기만 할 뿐. 비원보다 한 살 어린 그들은 이틀 새에 비원에게 정을 많이 붙인 듯 했다. “우리랑 같이 살아요, 어차피 우리도 독립할거거든요.” 비원은 말없이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눈 앞의 거울을 바라보았다. 이제 드디어 시작이다. “모자 있으면 하나 빌려주라.” 이제 그의 하늘을 버릴때가 된 것이다. 유리는 잊고, 삶의 목표를 동생으로 바꿔야 했다. 하늘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하늘을 보면 그 자리에서 바로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성재는 옷걸이에 걸려있는 자신의 모자를 비원을 향해 던졌다. “돌려줄 수는 있는 겁니까?” 사내새끼가 쪼잔하기는, 비원은 인상을 쓰며 모자를 푹 눌러썼다. 성재는 피식 웃으며 비원의 앞으로 발을 옮겼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불러주세요.” “...........?” “준휘, 현우, 그리고 나. 이래뵈도 꽤 알아주는 해커들입니다. 도움이 될 거예요.” 성재는 비원을 향해 자신들의 연락처가 담긴 종이를 건넸다. 비원은 그 종이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자신의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 놈들과도 연결된 삶이 이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것이 비원과 천재 해커들의 만남이었다. 성재, 현우, 준휘. 아니, 이제 [관계자 외 출입금지]가 새로 지어준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열음, 산이, 준휘. 하늘 아래,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모든 것을 아는 사람들 또한 해커 뿐이었다. 그들은 [관계자 외 출입금지]를 위해 자신들의 생을 내던져준 또 다른 세상이었다. 해커가 없다면, 그들도 없었다. 윤비서는 민서가 말 한마디를 내뱉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아마도 지금 윤비서가 운전하고 있는 승용차에는 도청기와 추적기 등이 설치되어 있을 거라고 말했다. 적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윤비서는 도로 한복판에 민서를 내려줄 것이다. 윤비서는 한결 안심한 표정이었다. 유모에게 연락이 왔다, 신비원이란 사내가 나타났다고 말이다. 도로 한복판에서 신비원과 백민서는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신비원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민서는 유모가 있는 고아원에 당분간 몸을 숨겨야 했을 것이다. 평생을 고급스럽게 살아온 민서를 고아원에 두기는 못내 불안했었다. 그러나 윤비서는 굳이 비원과 접촉해야 한다는 말을 민서에게 해주지않았다.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내버려둬야 한다. 비원은 그 모든 사실을 알고있으니, 그가 알아서 해줄 것이다. 신비원 또한 회장님의 핏줄, 믿어야만 한다. 민서는 빠르게 달리는 승용차 안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눈물 흘릴 시간조차 없었다. 약해져서는 안된다. 윤비서의 말 그대로, 일단 살아야 했다. 일단 살아있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니가 잘못 짚은 거 아닐까?” 이틀간이나 도로 한복판에 서 있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환영은 결국 쭈그려 앉아버렸다. 속력을 높여 휙휙 내달리는 차들이 이젠 무섭지도 않았다. 나중에 여기서 뻥튀기 장사나 해볼까, 환영은 휴인의 과대망상 따위는 무시하기로 결심한지 오래였다. 가난하더라도 죄는 짓지 않고 살아온 인생이다. 환영은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싶었다. 휴인은 환영의 말을 무시한채 그저 조용히 지나가는 차들을 쳐다보기만 했다. 가끔 자신이 찾는 승용차다, 싶으면 차를 세우고 사람을 찾는 무례한 행동도 서슴치 않고 저질렀다. “이러다 신고 들어온다, 도로 한복판에서 차 세우는 미친놈들 잡아가라고.” 환영의 짜증에도 휴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낮으로 접어든 시각, 이제 도로를 지나다니는 차도 없었다. 휴인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예감이나 직감이 틀린 적은 없었다. 이번에는 허탕인가,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자신의 삶에 자괴감마저 들었다. 그 때, 휴인의 눈에 멀리서 미끄러지듯 달려오는 외제차 한 대가 보였다. “...........환영아.....” “아, 왜.” 환상을 보듯이 중얼대는 휴인과 달리 지친 환영의 대답은 무뚝뚝했다. 휴인은 목숨을 걸고서 도로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야, 강휴인!!! 미쳤어?” 휴인이 차에 치일 것을 염려한 환영이 그를 잡기 위해 뒤따랐을 때. 외제차는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휴인의 바로 앞에 멈춰섰다. 차창 너머로 뒷자석에 타고 있는 누군가의 얼굴을 확인한 휴인은 씨익 웃어보였다. “..........이번에는 세상이 우리편인가?” “강휴인, 너 이번에 되게 위험했...” “환영아, 찾았어.” “응?” “백민서, 찾았다.” 환영이 의아한 표정으로 차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뒷자석에서 자기 또래의 한 소년이 거칠게 문을 열고 내렸다. 부티나는 인상, 그러나 며칠 밤 샌 듯 피곤해보이는 표정. “죽고싶어 환장했어? 비켜.” “백민서, 맞지?” “.........뭐?” 차 안에 있던 윤비서는 이들이 비원의 패거리라고 확신했다. 단지 느낌에 의지한 추측은 아니었다. 윤비서는 도로 옆의 인도, 그 한 모퉁이에 숨어있는 소년을 보고 만 것이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는 그 소년은 비원이 틀림없었다. 회장의 지시로 비원에 대한 모든 것을 조사한 적 있는 윤비서다. 이제 형체만 보고서라도 그가 비원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동생과 마주하기 쑥스러워 친구들을 먼저 보낸것이리라고, 윤비서는 생각했다. 윤비서는 천천히 핸들을 꺾은 뒤, 차를 출발시켰다. 도로는 한산했다. 그저 달리기만 하면 된다. 민서의 앞으로의 생활도 궁금하지만, 일단 지금 적들이 설치해놓은 추적기를 속여야 한다. 민서는 나중에라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일단은 비원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비원이 먼저 나타나준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윤비서 혼자 차도에 민서를 두고 가게 되면 그 걱정과 불안감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저씨!!!!!” 민서는 자신이 내렸는데도 다시 출발하는 승용차를 보고 당황한 듯 소리쳤다. 윤비서는 너무 경황이 없어서 자신이 내린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이런 도로 한복판에서 버려진 민서는 꿈 속에 있는 듯 정신이 없었다. “아저씨, 가지말라니.......까............” 민서가 떠나버린 차를 향해 거칠게 항의하는 순간, 한 공간에 모여있던 네 명의 소년들에게 같은 장면이 비춰졌다. 민서를 두고 출발하던 외제차가 영화속의 한 장면처럼 폭발해버린 것이다. 엄청난 굉음과 화염에 사로잡힌 차는 순식간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 아저씨........” 차 안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었던 게 분명하다. 간발의 차로 민서는 목숨을 구한 것이다. 민서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윤비서마저 자신의 곁을 떠난 것이다. 대체 이렇게 악독한 짓을 저지르는 자신의 적은 누구란 말인가. 살아오면서 죄라고는 짓지 않은 자신이, 도대체 왜 이런 아픔을 겪어야 하는가. “아저씨!!!!!!!!!!!!!!!!” 민서는 고함치며 차를 향해 달려갔다. 그 때였다, 모자를 푹 눌러쓴 한 소년이 갑작스럽게 앞에서 튀어나와 민서를 가로막은 것은. 휴인과 환영은 방금 일어난 상황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 듯 멍해있었다. 그것은 민서도 마찬가지였다. 윤비서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하게 된 민서는 짐승처럼 발악하고 있었다. 놀란 건 비원도 마찬가지였다. 민서의 유모라는 사람이 미리 가르쳐준 모퉁이에서 민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보다 먼저 나타난 저 두 명의 소년은 누구며, 차는 왜 갑자기 폭발한 것인가. 네 명의 소년이 생각하는 것보다 문제는 심각했고, 민서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은 사방에 깔려있었다. “넌 뭐야? 니들도 나 죽이러 왔냐?” 민서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휴인, 환영, 비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비켜.” 폭발한 차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민서는 차로 가까이 가기위해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비원을 밀쳤다. 그러나 비원은 쉽게 길을 내어주지 않았다. “비켜, 이 새끼야!!!!!!!!!!!!!!!” “가까이 가도 현실은 안 달라진다.” “비켜..........” 비원의 가슴이 아리듯이 아파왔다. 개같은 세상은 그 누구의 사정도 봐주지 않았다. “가서 뭐하게? 죽은 사람 시체라도 찾을 거냐? 그러다가 너도 죽는다.” “넌 대체 뭐야, 뭐하는 새끼야? 상관하지마!!” “일단 살아!!!!!!!!!! 너부터 살고 봐야 될 거 아냐!!!!” 비원의 말에 민서의 눈물이 거짓말처럼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몰락, 부모님의 죽음, 윤비서까지- 비원이 한 말과 윤비서의 말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았다. 일단 살고봐야 한다, 민서의 목숨은 누구에게나 지켜져야 할 것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이 소년도 민서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그를 막아서고 있었다. 비원은 울고있는 민서를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쓰고있던 모자를 벗어 민서에게 씌웠다. “울지마, 약해질 시간도 없어.” 비원은 모자를 벗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극적인 상황과는 달리 날씨는 미치도록 청명했다. “.........지켜줘, 유리누나.....” 혼자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작게 읊조린 비원은 민서의 손목을 붙들었다. “경찰 몰리기 전에 일단 가자, 어디로든 일단 가자.” 그 때, 한 발자국 옮기는 비원의 귀에 휴인의 목소리가 박혔다. “저기, 나도 이 상황은 잘 이해가 안되는데.” “............” “나도 백민서를 찾고있었거든, 나쁜 의도는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마라.” “...............” “갈 데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우리집으로 갔으면 하는데.” “.....................” “강요는 안해.” “............................” “단지, 세상을 바꾸고 싶으면 날 따라와라.” 비원의 날카로운 눈과 마주하면서도 휴인은 오히려 씩 웃어보였다. 그 순간, 민서의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울면서도,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겪었으면서도, 정신없는 상황 속에 있으면서도 뜬금없이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처음이라는 거였다. 민서는 지금, 처음으로 분장을 벗고, 자신의 본모습으로 세상에 나와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세계에서 알을 깨고 나온 민서를 맞아준 건, 자신과 같은 나이의 소년 세 명이었고, 그들은 애타게 민서를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운명적인 첫만남이었다. 70. 폭발 “누나, 오늘 나랑 같이 일하러 갈래? 아줌마랑 아저씨들이 다 누나 데려오래.” 술이 다 깬 뒤 잠자리에 들어서 그런지 휴인이는 정말 숙취따위 느껴지지 않는 표정이었다. 아침에 보는 휴인이의 얼굴은 언체나처럼 해맑았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이 놈들은 심각하게 잠이 없는 편에 속한다. “아, 글쎄, 누난 오늘 좀 할 일이 있는데.....”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나 원래 거짓말 열라 잘하는데. 근데 이 놈들 앞에서는.... 아니, 특히 휴인이 앞에서는 거짓말을 잘 못하겠다. 괜히 얼굴이 빨개지고, 시선도 못 마주치겠고, 헛기침만 나오고. 너무 맑아서 그래, 휴인이 눈동자는 갓난아기의 눈동자만큼이나 맑아서, 너무 푸르러서, 괜히 맘 아프게 해서. 그러나 오늘은 마음을 독하게 먹어서라도 꼭 거짓말을 해야한다. 왜냐면.... 나는 오늘 환영이를 미행해야 하니까. “누나 맨날 집에서 놀잖아.” 강휴인, 지나치게 솔직한 애새끼 같으니라고. “누나도 임마, 할 땐 하고, 놀 땐 놀고 그래야 되는거지!! 맨날 노냐!!?” “.....그럼 오늘 뭐할건데?” 정말 궁금하다는 저 눈빛..... 병원간다 그러면 쫒아올거고,친구 만난다그러면 안 믿을거고. “그냥 자질구레한거야. 나도 다음학기부터 대학 다시 다니려면 아르바이트도 제대로 된걸로 알아보고 그래야지. 영어공부같은 것도 해야하고, 실력 녹슬면 안되니까.“ 와, 진짜 찔린다. 이게 과연 학사경고를 두 번 받은 자가 할 소리던가. 휴인이는 내 말을 듣고 동그란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와!!! 누나 되게 멋지다!!” ........가방끈이 짧은 휴인이에게 영어공부는 무지하게 멋진 일이었다. “나 정말 궁금한거 있었어, 누나.” “뭐..... 뭔데?” “있잖아, 개미핥기가 영어로 뭐야?” .........아니, 내가 어떻게 그런 걸.... 너 그 요상스럽게 생긴 동물 말하는 거 맞지? 황당한 표정의 나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대답을 기다리는 휴인이. “그, 그건 말이다.” “응응!!!” 여기서 내가 ‘모른다’고 하면 휴인이의 왕성한 호기심을 짓누르는 것인가? “야!!! 밥 먹으러 오라니까!!!!!!!!!” 그 때 멀리서 들려오는 비원이의 고함소리. 하늘에 맹세하고 비원이 목소리가 이렇게 반가웠던 건 정말 처음이다. 나는 휴인이와 함께있던 그 공간을 피해 놈들의 집으로 날아가듯 몸을 피했다. 그러나 불굴의 의지를 가진 휴인이놈은 뒤를 좆아오며 집요하게 물어댔다. “나 되게 궁금했단 말이야, 누나.” “쉿, 밥 먹을땐 조용히 하는 게 예의야, 휴인아.” “개미핥기가 영어로 뭐냐니까!!!” “와, 환영이가 북어국 했구나!! 아침부터 요리하느라 수고했다!!” “간 보는 건 자신이 없어서 맛이 괜찮은지 모르겠어요.” 언제나처럼 평온하고 상냥한 모습의 환영이. 이런 놈이 어떻게 폭력 의뢰를 받는다는 건지, 금세 마음이 씁쓸해진다. “속 부대껴 죽겠네, 소주 못 먹는데도 엄청 퍼먹이더라. 술고래년.” 우리의 비원이는 투덜거리기 시작하신다. 어제 누나를 울부짖던 비원이의 모습이 내 머릿속에서 잠시 되살아난다. 사람들 모두 마음속에 아픈 거 담고 살아가기 마련이지만, 나 왜 너만 보면 이렇게 안쓰러운 건지 모르겠어, 비원아. “오늘 손님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이 상태에서 술을 또 어떻게 마셔. 호스트는 술 게워내면 안되는 거 너도 알잖아, 정시발.“ “너 내가 웃으면서 말할 때 닥쳐라, 블랙.” 으히히, 복수했다. 내 예상대로 ‘블랙’이란 비원이의 호스트명을 입 밖에 꺼내자마자 놈은 입을 다물어주었다. 지도 쪽팔리겠지. 블랙이 뭐니, 블랙이. “누나, 개미핥기가 뭐냐니까~?” 그나저나 강휴인 저 징한 놈. 나 같으면 진작에 포기했겠구만 계속 묻는다. 차마 모른다고 할 수는 없었다. 휴인이놈은 내가 대학생이란 걸 자랑스러워하는 듯 했으니까. 놈에게 대학생은 모든 것을 다 아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아니, 대체 왜 개미핥기의 영어이름을 궁금해 하는거냐!! 난 너의 그 생각이 더 궁금하다!!! “누나아~ 영어로 개미핥기가 뭐” 휴인이가 끔찍한 그 질문을 되풀이하려는 찰나, “anteater" 대답했다. 그 누구도 아닌, 민서가. 매우 귀찮다는 듯이, 시끄러운 휴인이의 입을 막기위해서 인상을 쓴 채로. “와!! 그럼 목도리 도마뱀은?” “frilled lizard” 신난 채 물어대는 휴인이와 계속 답해주는 민서. 군더더기없는 영어발음, 민서 저 기지배 설마...... 어렸을 때 영어신동? 요즘 초딩들도 영어 완전 잘하던데, 전에 내가 지들이 떨어뜨린 100원 주워갔다고 영어로 욕하던데. 나 그때 엄청 쫄았잖아. “민서야, 넌.... 속 괜찮아?” 특별한 질문으로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물었다. 제발 평범한 질문으로 들렸기를. 민서는 멈칫하더니 결국은 대답하기를 거부했다. 이젠 나를 무시하기로 작정했나. 입술이 터진 채 아물지 않은 듯 보였다. 걱정된다, 저거 약 발라야 할텐데. 휴인이야 내가 대놓고 챙겨줄 수 있지만 민서는 아니다. 괜히 참견했다가 민서가 그걸 관심이나 사랑이라고 받아들이면 곤란해지니까. 그 때 비원이가 벌떡 일어나 정장 마이를 입기 시작한다. “어, 다 안 먹어?” 환영이의 물음. “도저히 안 넘어간다, 나 일찍 출근할게.” 살짝 한숨을 쉬던 비원이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뒤적거리더니 민서를 향해 던진다. “약 발라, 괜히 개기지말고.” 연고다. 상처난 곳에 바르는 연고. 안 그런척 하면서 민서 되게 챙긴다니까. “비원아, 나두 아포.” .........휴인아, 어리광 그만 피우고 넌 제발 좀 닥쳐주련? 급격히 혀 짧은 소리를 내는 휴인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비원이. “너도 다 낫기만 하면 나한테 맞을 줄 알어, 강휴인.” “아, 왜!! 난 민서 도와준건데!!” “닥쳐, 넌 다음에 또 사고치면 밧줄로 묶어버릴거야.” “나 진짜 억울해!!! 구해준 것도 죄냐?” “방관한 건 죄야.” “그냥 지켜보기만 한 게 아니라!!” “같이 싸운 것도 죄야. 다음부터 이런 일 생기면 저 새끼 한 대 갈기고 질질 끌고와. 안 그러면 앞으로 니가 혼난다.” 그들의 행동을 보자마자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 주동자는 비원이.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여길수밖에 없다. 물론 나는 비원이가 주동자이기를 간절히 원한다. 재벌 아들이 주동자라면 쉽게 감옥에 집어넣지는 않을테니까. 그러나 괜히 일을 그르치지 않기위해 편견없이 생각하려 해도 언제나 결론은 하나다. 주동자는 비원이다. 아이들에게 지시하는 태도, 거리낌없는 태도와 큰형님처럼 모두를 챙기고 지휘하는 것도. 민서는 비원이가 던져준 연고를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비원이가 민서에게 내던진 한 마디는.... “니가 중심 못잡으면, 모든 균형이 다 깨져. 정신 똑바로 차려.” 나의 모든 사고회로를 중단하게 만들었으니.... 저게 무슨 말이지? 민서는 비원이의 말에 천천히 대꾸했다. “상관말랬지....” “내 화 돋구지 마.” “니가 뭔데 나한테 명령이야....” 불안해, 불안함이 내 온 몸을 휘감는다. “백민서.” “니 말대로 내가 중심이고, 내가 균형이면!!!!!! 너도 나 건들지 말란 말이야!!! 그냥 닥치고 있어, 내가 하는 짓은 상관말고 그냥 보고만 있으란 말이야!! 시비도 걸지말고, 불평도 하지말고, 짜증도 내지마!!!!" ".............너 정말...“ “결국 니가 여기온 것도 내 덕분이잖아!! 내 말 틀려?” ...........주동자가............ 민서....? 민서란 말이야? 민서가 소리치자마자 환영이는 다급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당황한 눈치였다. 그는 황급히 내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니가 어떤 새낀지는 나도 모르지만, 받아줬으면 지랄하지말고 그냥 붙어있어!! 니가 최고인 것처럼 굴지 말란말이야, 재수없어, 니가 뭔데 이래!!?“ 민서는 꾹꾹 담아두었던 감정이 폭발한듯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마치 그 공간에 내가 있다는 건 잊어버린듯이. [받아줬으면 지랄하지 말고 그냥 붙어 있어] 라고....? 뭐야, 그럼 재벌아들인 비원이는 어쩌다 이 곳으로 흘러들어왔고, 주동자인 민서는 비원이를 그냥 받아줬다는 거야? 백민서... 처음부터 끝까지... 니가 나를 정신없게 만들어.... 침묵으로 쌓인 공간. 비원이는 차가운 눈빛으로 민서가 앉아있는 곳까지 성큼성큼 걸어갔고. 그대로 민서의 뺨으로 손을 휘둘렀다. 뺨과 손이 마찰하는 엄청난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운다. 맙소사. 비원이는 서 있었고, 민서는 앉아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손을 휘두른 힘의 강도는 장난이 아니었을텐데. “왜 이래, 그렇다고 여자애를 때리면 어떡해, 너!!!!!!!!!!!” 나도 모르게 민서의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막아선 채 비원이에게 소리쳤다. 비원이는 상처받은 눈으로 그대로 휙 밖으로 나가버렸고, 환영이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비원이를 쫒아 가버렸다. “...........민서야, 괜찮아? 어디 봐봐.” 내가 바로 돌아서서 민서의 뺨을 살피려 했지만, 그녀는 나를 밀쳐내고. 벽에 기대앉은 휴인이는 그 모든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저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71. 동의 “정말 하나같이 다 짜증나. 그래서 견딜 수가 없어!!” 민서는 그렇게 외친 후 벌떡 일어나 집 밖으로 나섰다. 뺨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비원이도 너무해... 여자애를 이렇게 세게 때리다니. 민서에게 있어 나는 ‘나타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사람’ 이었다. 나를 좋아하게 됨으로써 민서의 모든 것이 무너져 버렸으니까. 그녀의 정신상태도, 말투도, 건강도, 심지어는 우정까지... 모든 것이 재빠른 속도로 민서의 곁을 떠나버리고 있다. 고작 나 때문에, 정시언 때문에. 그렇기 때문인가. 나는 일어서는 민서를 붙잡지 못했고, 휴인이는 이상하리만치 잠잠했다. 대문 밖으로 나서려는 민서의 앞을 막아선 것은, 방금 전 비원이를 따라나갔던 환영이었다. 비원이는 결국 환영이의 걱정을 뿌리치고 일하러 간 모양이다. “민서야, 제발.” 환영이는 지친 표정으로 민서의 팔을 붙들고 중얼거렸다. “조금만 참아줄 수 있잖아, 비원이는 너 걱정해서 그런건데, 말 너무 함부로 하는 거 아냐?” "놔.“ 민서는 매정하게 환영이의 손을 내치고 대문 밖으로 나갔다. 환영이는 민서의 모습에 한숨을 쉬며 휴인이와 내가 있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환영이의 눈빛을 짧게 휴인이에게 머물렀다. 왠지 원망하는 의미가 담긴 듯 했다. 사실 그 원망을 받을 사람은 나다. 고요한 그들의 생활이 변화를 일으키도록 주도한 건 바로 나니까. “하아-” 휴인이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벽에 등을 기댔다. 환영이는 말없이 밥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난 뭐라고 해야하지? 농담을 해볼까? 무슨 농담? [비원이가 민서를 짝사랑 하나봐, 허허허] 이런거? 아니다, 그런 농담하면 분위기 더 이상해질거야. 민서의 전남자친구인 환영이 앞에서 그 말을 하는 건 실례지. “누나.” 휴인이의 나직한 음성, 미성이지만 충분히 남자답다. “나 물어볼 거 하나 더 있다.” “뭐? 너 이번엔 바퀴벌레가 영어로 뭔지 물어볼라구 그러지?” 내 말에 피식 웃고는, “천국을 세워도, 지옥에 갈 수 있겠지?” “응? 무슨 말이야?” “천국을 만들어도, 지옥으로 떨어질 수 있을거야, 그치? 그래야 공평하니까.” “.........너 지금 무슨 종교 전파하냐? 나 그런거 질색인데.” 나 길거리에서 [도를 믿으십니까?] 라던가 [얼굴에 복이 많아보이세요] 이런거 수백번은 들었단 말이다. 실제로 고등학교 때는 그 말을 듣고 그들의 본거지로 따라갔지. 제단에 절하고, 돈 바치고... 결국엔 뭔가 이상해서 도망쳐 나왔다만. 이제 그들이 내게 말을 걸면 태연히 웃으면서 [그 쪽은 다단계에 관심있나요?]라고 묻는 기술도 쓸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단 말이다. “그래, 그래야 공평해.....” 저렇게 진지한 휴인이, 처음이다. “누가 날 천국 보내준다 그러면 내가 항의할거야. 난 지옥가야 하거든.” “헛소리 그만해, 일하러 가.” 휴인이의 건조한 어투를 막은 건 내가 아닌 환영이었다. “적어도 세 사람이 피봤으니까 그 죄는 내가 다 뒤집어 써야지.” “그만하랬다, 너.....” 화난 듯한 환영이. 환영이가 저러는 건 처음 본다. “무슨 말이야, 휴인아?” 부드럽게 물어보려 애썼다. 그런 나를 향해 휴인이는 활짝 웃어보인다. 모르겠어, 너는 항상 내가 알아들을 수 없게 말해. “말 그대로야, 누나!! 나 때문에 세 사람이 피를 봤어!!” “응?” “나 어제 싸움했잖아!! 내가 세 명이나 코피 터뜨렸거든!!” “.......그 뜻이었냐?” “응!!! 검찰 관계자들 때리면 천국 못 갈 거 같애서.” “..... 뜬금없긴. 민서랑 비원이 앞에서 싸우고 있는데 넌 그런 생각이나 하고있었어?” “민서랑 비원이는 맨날 싸우는걸, 뭐!! 난 어제부터 계속 이 생각했는데, 지옥 무섭거든.” 휴인이가 귀여워서 풋, 하고 웃어버린 나와는 달리 환영이는 여전히 굳은 표정이었다. 아, 민서가 비원이한테 맞아서 저런가, 기분이 좋을리는 없지. 전여자친구가 남자에게 맞았는걸. “환영아, 오늘 밥상 내가 치울게, 그냥 둬.” “아, 아니요. 괜찮아요, 누나.” “얻어먹는거 미안해서 그래, 설거지라도 할게.” 서둘러 환영이의 손에 들린 밥상으로 다가가는 나. 그와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휴인이. “그럼 안녕!!! 난 일하러 간다!!” “조심해, 휴인아!!! 차조심하고, 주변 잘 살피고.” “알아, 내가 뭐 어린앤가.” “어른은 아니니까.” “누나가 그런 말하면 어색해.” 짜증난 듯 얼굴을 찌푸리는 휴인이놈. “너 지금 나 무시하냐!!? 난 어엿한 성인이란 말이다!!” 내 말을 듣는건지 마는건지.... 휴인이는 폴짝폴짝 뛰어가버린다. 작아지는 그의 뒷모습, 누구보다 귀엽지만 누구보다 진지한 휴인이의 뒷모습. “아, 밥상 줘, 내가 정리한다니까.” “아뇨, 누나. 괜찮아요.” “너도 일하러 나가야되잖아.” “부엌은 내 소관이예요, 내 공간인걸요.” “니가 이렇게 무르게 나오니까 나머지 놈들이 널 무시하지!!! 이제 걔들도 부엌일 좀 시키고 부려먹어!!!“ 힘으로 밥상을 빼앗았다가는 접시나 밥그릇을 다 엎어버릴 것을 염려하며 나는 환영이보다 한 발 앞서 부엌으로 다가가며 중얼거렸다. “그럼 밥상 정리는 니가 해, 설거지는 내가 해줄게.” “아, 누나, 안돼요, 잠깐!!!!!!” 환영이의 목소리보다 빨랐던 건, 내가 부엌으로 다가간 속도. 싱크대에 놓여진 쪽지. 그 안에 적힌 글씨는.... [도일공고 김땡땡, 전치 4주, 의뢰인 이모군] 그 밑에 가지런히 적힌 숫자들은 아무래도 의뢰인 이모군의 핸드폰 번호겠지. “썅..........” 뒤에서 느껴지는 환영이의 욕지거리. 알고있다, 나에게 하는 욕은 아니라는 거. 부주의했던 자신에게 하는 욕일 것이다. 부엌은 온전히 자신의 공간일거라 생각한 것이 환영이의 죄라면 죄였다. “..........못 본 척 해줘요, 누나....” 조심스레 말을 건네는 환영이. “어차피 어제 준휘가 하는 말 들었죠? 완벽하게 누나를 속였다곤 생각 안했어요. 누난 어제 안 취했었으니까.“ 변명조차 하지않는 환영이를 보며, 난 가식적이게도 모르는 척 되물었다. “왜, 이게 뭔데?” “.........몰라서 물어요? 전치 4주라는 말 있으면 알아챘을 거 같은데요.” “핑계라도 대보지...?” “........민서가 하는 일, 누나도 봤잖아요. 우리가 범죄집단인 거 알면서....” 말끝을 흐리는 환영이. 그 목소리가 슬퍼서 더 이상 모르는 척 할수도 없었다. “웃을 수 있었니?” 환영이를 미행할 생각이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하며 그에게 물었다. 환영이는 내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는지 다시 되물었다. “네?” “니가 그랬잖아, 싸움 후에 웃을 수 없으면... 이긴 게 아니라구.” 내 앞에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휴인이. 내 앞에서 범죄를 태연하게 저지르는 민서. 나를 아예 자신의 범죄에 끌어들이는 비원이. 환영이는 그들과는 다르다. 내가 유일하게 범죄를 중단시킬 수 있는 사람. 환영이는 그런 아이였다. “웃을 수 있을거 같아요?” 어두운 부엌 안에서 수수께끼같은 말만 주고받고 있는 환영이와 나. “웃어본 적 없어요, 한번도. 이건 싸움이 아니거든요. 그냥 일방적인 폭력이예요. 내가 휘두르는 그냥 나 혼자만의 폭력이요. 나한테 맞는 사람들은 날 보면 그냥 굳어버리던데요. 나 학교주변에서 꽤 이름있는 놈인가 봐요. 아무도 저항할 생각을 안하던데요. 맞서 싸우려고 하면 미안하지나 않을텐데.“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한숨. “승리할 수 없잖아, 니가 웃을 수 없으면. 그런데도 계속하는거야?” “승리하기 위해 폭력을 휘두르는 게 아니니까요.” 할 말이 없어진다. “니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가 뭔지, 난 도무지 모르겠어.” 내 말에 환영이는 고개를 숙였다. 말하지 않겠다는 의지표현인 듯 했다. “변명을 해보자면요, 누나. 난 착한 사람에게는 손댄 적 없어요. 학교폭력을 조장하는 학생, 깡패놀이에 여념없는 놈들, 여학생들 강간하는 새끼. 그런 애들한테만 주먹 휘둘렀어요.“ “환영아, 세상엔 법이 있어, 폭력은!!!!!!!!” “알아요, 폭력은 정당하지 않아요. 하지만 나에게 맞는 놈들은... 다른 사람한테 폭력을 휘둘렀거든요. 그리고 법은 항상 약자에게 불리했어요. 내가 아는 한은 언제나 그랬거든요.“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 없었다. “누나, 난 내가 정의의 사도라고 생각해본적 없어요. 나 범죄자 맞아요, 그거 인정해요. 근데요, 미안해요..... 내가 할 줄 아는게.... 이거 뿐이라서요.“ “................” “부탁할게요.” “.............” “모르는 척 해줘요, 누나......” 정시언, 꼴 사나워, 거만떨고 있어. 환영이 범죄는 당연히 막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니. 이렇게, 결국은 이 애들의 말에 동의할 수 밖에 없으면서.... 72. 온기 환영이는 결국 폭력의뢰를 해결하기 nl해 나 앞에서 등을 돌려 사라졌고, 나는 그를 차마 붙잡을 수 없었다. 그 애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자신들보다도 더 약하고 힘겨운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 구차한 범죄 뿐이었다. 그 구차한 범죄조차 되는대로 살아온 내 인생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고귀한 것이었기에 난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눈 감아주는 수밖에, 모르는 척 해주는 수밖에, 바보가 되어주는 수밖에. 무력감에 휩싸여 목재 평상에 앉아 어지러운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순간, 주머니속의 핸드폰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정이온 고 년의 문자겠지, 생각하고 가볍게 한숨을 쉬며 무시하려 했으나 멈추지 않는 진동.... 전화다, 실로 오랜만에 오는 전화였다. 그러나 복잡한 이 상황에서 걸려온 전화가 반가울리는 없을 터. 누구에게서 온 전화인지 확인도 않고 폴더를 열어 귀에 가져다댔다. “여보세요?” “통화.... 가능하냐?” “...................아부지...!!” 낯설고도 익숙한 아부지의 음성. 일주일만이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전화도 안 드렸는데. “옆에 아무도 없어?” “아, 예..... 웬일이세요?” “꼭 용건이 있어야 전화하나... 딸을 그런 곳에 보내놓고 마음이 편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어때, 괜찮냐?“ 아니요, 안 괜찮아요, 아부지.... 나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싶어요, 힘들어 죽겠어요. 부정적인 단어들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네, 잘하고 있어요.” 하지만 긍정적으로 답한 이유는, 놈들을 지키기 위해서다. 나 아니면 그들을 지켜줄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믿었기에. 아니, 이것도 거만 떠는거다. 사실은 나를 위해서다. 이제 놈들 없이 살 수 없게 되어버린 정시언을 위해서. “바쁘지 않으면, 한 번 오지 그러냐?” 아부지에게 있어 나는... 사랑하는 부인을 쏙 빼닮은 첫째딸. 아부지를 닮은 이온이와 달리 엄마를 닮은 나는 언제나 아부지의 그리움을 자극했다. 한 번 검찰청에 들르라는 아버지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 건 바로 그 이유에서다. 더 이상 내 생각을 흩뜨리고 싶지않아 가족을 안 볼 생각이었으나 오늘도 나는 아부지의 그리움에 응하고 말았다. 무정을 가장한 부정은, 언제나 내게 가슴속에 사무치는 슬픔으로 새겨져 왔으니까. 일주일만에 [관계자 외 출입금지] 놈들의 간섭없이 바깥출입을 하게 된 듯 하다. 이번 일주일간 난 언제나 그들과 함께였으니가. 열심히 막노동을 하고있을 휴인이, 붉어진 뺨으로 나쁜 사람들의 더러운 돈을 훔치고 있을 민서, 친구들의 걱정을 분노로 위장한 채 표출하고서는 속상한 기분으로 아줌마들이 주는 술을 받아마셔야 할 비원이. 그리고.... 오늘도 승리하지 못한 채, 웃음을 잃고 피에 젖은 손으로 돌아와야 할 환영이. 놈들을 한명한명 어루만지듯 머릿속에 떠올린 후, 기지개를 켜며 내 방 문단속을 한 뒤, 대문까지 꼭 잠그고 집 밖으로 나서려는 그 순간, “누나!!!!” 산이다. 토끼처럼 깡총강총 뛰어오는 산이, 후드티를 즐겨입는 산이, 이온이에게 푹 빠진 산이, 해커일지도 모르는 산이, 그래서..... 경계해야 하는 산이. 그래도 그나마 산이가 제일 낫다. 열음이는 어렵고 준휘는 무섭기 때문에. “어디 나가요?” “어, 나.... 알바 좀 구하려고.” 원치않게 해커놈들에게는 항상 구라를 치게 된다. “안에 형들 있죠?” “없는데? 다 일하러 갔지.” “에에? 비원이형한테 받을 거 있는데.” “호스트빠에 가 봐.” “급한건데... 그리구 호스트빠까지 들고가지도 않았을거예요, 집 안에 있을텐데.” “뭔데 그래?” “우리 랩 가사집인데요, 수정할 내용이 있어서.” “급한 것도 아니구만.” “급해요!! 누나, 대문 좀 열어줘요.” “안돼!! 나 지금 안 튀어나가면 버스 놓쳐, 지금 대문 열어주고, 니 가사집 찾고, 다시 대문 잠글 시간따위 없단 말이다!!“ “그럼 나 대문 열쇠 좀 빌려줘요!!!” “...........엉?” “나 계속 우리집에 있을거란 말이예요!! 누나 외출하고 돌아온 뒤에 우리집 잠깐 들러서 열쇠만 받아가면 되잖아요, 내가 가사집 찾은 뒤에 문단속 다 할게요. 형들네 집 열쇠는 가지고 있으니까 대문열쇠만 있음 되거든요.“ 구구절절 산이의 말이 설득력 있었고, 버스가 올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기에 나는 주머니에서 대문 열쇠를 꺼내 산이에게 건네주었다. “그럼 좀 있다보자, 누나는 간다.” “네!! 아, 근데 누나!!!” “아, 왜!!! 나 나빠, 빨리 말해!!” “아, 아무것도 아니예요!!!!” 나를 불러놓고 아무 말도 못한 채 튀어가는 산이. 어리고 수줍은 놈 같으니. 니 발갛게 달아오른 볼의 홍조만 봐도 알겄다, 이 놈아. 나에게 이온이의 안부를 물으려 했겠지. [신성여고 정이온]하면 이 근방에서 모르는 놈들이 없을정도로 꽤 유명하단다, 산아. 부디 열음이를 물리치고 니가 이온이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인지, 이 내가 지켜봐주마. 내 동생이 비밀많은 너희들과 얽히는 게 좀 걱정되긴 하지마 그래도 어린 것들의 연애질은 굉장히 재밌고 신선한 것이란 말이지. 산이의 뒷모습을 보다말고, 버스를 놓치게 될까봐 나는 황급히 뛰어야만 했다. “굶고 산 건 아니지?” 김형사님의 말에 있는대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난 입 속에 있는 열댓개의 사탕들로 인해 말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으므로. 아부지와 함께한 점심식사의 양이 부족한 건 절대 아니었다. 단지 그 즈음의 나는 금단증상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로 인해 단 것이 매우 그리웠을 뿐이다. 아부지 사무실의 사탕을 내가 다 먹어버린 것에 대해서, 아부지는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였으나 김형사님은 꽤나 신경쓰이는 듯 했다. “알아낸 건 있는거냐?” 아부지의 물음에 지금 이 순간 내가 대답을 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내 입 속의 사탕들에게 미친듯이 감사했다. “시언아, 알아낸 건 있어?” 김형사님이 똑같은 물음을 다시 내게 던지고, 나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알아낸 건 없다는데요, 검사님.” 고맙게도 내 뜻을 대신 전해주는 김형사님. “아직 일주일밖에 안 지났으니 그럴 법도 하지. 정해진 기간은 한 달 안이니 조급해하지마라. 그렇다고 너무 느긋해하지도 말고, 그런곳에 너무 오래있다가 너까지 잘못 될까봐 겁난다.“ 아부지, 솔직히 말하면 나... 이미 잘못된 거 같은걸요. 아니, 이게 과연 잘못된 거라 말할 수 있을가? 나, 새로운 세상을 알게된 거예요. 내가 모르던 어둡고 힘겨운 세상을. 입 속에 있는 사탕들을 우두둑 깨물었다. 입 안에 단 맛이 퍼지지만 날카로운 사탕조각에 베인 혀 끝에는 비릿한 피 향이 감돈다. 내 마음도 마찬가지. 그 아이들을 만나서 누구보다 황홀하지만, 마음 속은.... 상처투성이. “걱정마세요, 아부지. 재벌아들을 누구일지 짐작이 가요.” 짐작이 가기는, 이미 비원이가 확실해졌구만. 그러나 주동자가 누군지 눈치챘다는 말은 끝가지 하지않았다. “다만 난 섣불리 판단하고 싶지 않은 것 뿐이예요. 아부지가 나에게 맡긴 일이니까, 마지막까지 내가 처리할게요. 끝의 끝까지 믿어주세요.“ 내가 처리하긴 개뿔, 믿어달라기는 개뿔. 난 단지 시간을 벌고있는 것 뿐이다. 그 애들을 더 지켜볼 수 있도록, 그 애들에게 더 붙어있을 수 있도록. 내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아부지와 달리 김형사님은 끈덕지게 나를 향해 물었다. “누구야? 누가 재벌 아들인거 같은데, 응?” “............사탕 더 없어요?” 확신한다, 오늘 부로 김형사님은 나를 미워하게 되었으리라고. 아부지의 사무실에서 조금 노닥거리다가 도리어 방해가 되는 것 같아 집에 가기위해 일어섰다. “이온이한테 전화 자주 해줘라, 아무래도 니가 없어서 적적한 모양이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제 그 년 머릿속엔 열음이 뿐일텐뎁쇼. 아부지의 마지막 당부에 웃음으로 답을 하고는 검찰청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검찰청 밖으로 나갔을 때 내 눈 앞에 보인 것은, “괜찮아요? 아파보이는데, 그러게 내가 말렸잖아요. 일요일 근무는 왠지 기분이 안 좋았다니까요.“ “어제 일요일에 근무했던 거랑, 내가 습격 당한 거랑은 상관 없는 거라니까요. 그냥 고등학생들이 시비걸었던 거 같아요.“ “요즘 고등학생들 무섭네요, 설마 조폭이 보낸 거 아니예요? 요즘은 고등학생때부터 조폭에 들어가고 그런다잖아요.“ “설마요, 주린씨는 신경쓰지 말아요.” 내 눈 앞에 보인 것은.... 한 쌍의 드러운 바퀴벌레 커플이었으니. 진한오빠와 선주린. 두 사람이 서로에게 쓰는 존칭은 내 속을 뒤집어놓기에 충분했다. 서로 존중한다 이거지? 난 대체 너에게 뭐였니, 이진한. 어제 아침 너에게 농락당한 뒤 차비로 니가 담겨둔 2만원에 난 울었는데. 넌 오늘 아침 이렇게 선주린에게 위로받고 있구나. 딱 보기에도 그들은 어제 휴인이와 민서에게 습격당한 일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했고, 내가 살짝 엿본 진한오빠의 얼굴은 역시나 처참했다. 도저히 여자의 힘으로 민서가 때렸다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온통 멍과 피딱지로 도배되어버린 얼굴. 민서가 주변인들은 신경 안스고 오직 직한오빠만 조져버리겠다는 일념으로 달려들었다던데, 그 말이 사실이긴 한가보다. 나는 한숨을 내쉰 후 제발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기를 바라며 옆으로 걸어갔고, 불행히도 나를 발견한 듯한 진한오빠의 얼굴을 눈에 띄게 굳어졌다. “시...... 시언아!!!” 자기도 모르게 부른 듯한, 진한오빠가 나를 부르는 그 음성. 듣자마자 구역질이 치밀었다. “저 아세요?” “.........” “아, 저희 아부지 옆방에 계신 젊은 검사 아저씨 맞죠? 전에 주신 용돈 잘 받았어요, 2만원, 너무 고마워서 그거 쓰레기통에 버리고 왔네요.“ 굳어지는 진한오빠의 표정과,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선주린. “누구예요, 낯이 익는데?” 진한오빠에게 묻는다. 기억하지마, 이 여자야. 너한테 물 퍼부은 년이 나인 게 밝혀지면 골 아파져. “아, 선배 검사님 딸요. 요즘 검찰 일 좀 돕고 있어요, 스파이로 잠복근무 하면서. 나랑도 연관있는 일이라 내가 용돈도 주고 했거든요.“ 더러운 새끼. 비겁하고 치사해. “아!!!!” 순간, 내가 기억난 듯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는 그녀. “맞다, 그 때.... 그 때 그 일.... 맞죠?” 생글생글 웃지마, 나한테 물벼락 맞은게 뭐가 좋다고. “힘든 일 하시네요.... 아, 묻고싶은 거 되게 많은데... 다음에 한 번 만나서 이야기해요.” 내가 왜 당신이랑 이야기를 해야하는거지? “주린씨...” “개인적으로 친분이 생겼거든요, 진한씨는 모르셔도 돼요.” 나와 선주린의 만남을 막으려는 진한오빠와 달리 선주린은 환하게 웃으며 악수하자는 듯 내게 손을 내밀었다. 어쩔 수 없이 잡은 그녀의 손은 굉장히 따뜻햇고, 그 온기가 나를 더욱 미치게 했다. 착한 그녀가... 나를 더 슬프게 했다. 73. 해커 푼수인거야? 아니면 미친거야, 나사가 빠진거야? 대체 뭐야? 선주린은 내게 물벼락을 맞았다는 사실을 진한오빠에게 고자질 하지 않았다. 똑똑한 그녀에게 모든 상황은 이해가 갔을거라 생각한다. 잠복근무가 휴인이를 감시하는 일이란 것쯤, 머리 좋은 그녀는 충분히 알아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왜 그녀에게 물을 퍼부었는가는 전혀 모르고 있을텐데, 그 일 때문에 심하게 감기에 걸렸다고도 했는데... 근데 그 여자는 나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웃으면서 다음에 이야기나 하자고 말했을 뿐. 알고있다, 그녀가 완벽한 사람인 것 쯤은. 언론에서 그녀의 소눔능 듣고, 나도 한때는 그녀의 팬이 되어버렸으니까. 눈부신 미모도, 천재같은 재능도, 출중한 두뇌도... 천사같다는 그... 마음씨도.... 잘 알고있다. 그래서 그 누구도 함부로 그녀를 미워하지 못한다고, 안티가 없는 유일한 디자이너라고. 그런 그녀가 선택한 남편감이 진한오빠였고, 그 때문에 모든 언론들은 엄청나게 진한오빠를 칭찬했고 띄워주었다. 준수한 외모에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검사라고. 그러니가 그들의 사랑에서 난 언제나 악역을 맡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의 사랑을 질투하고 방해하는 악역. 그녀가 조금만 덜 착했더라면, 조금만 덜 웃어주었더라면... 나는 숨기없이 모두 말해주었을지도 모른다. 진한오빠와 나 사이에 있었던 그 수많은 일들을. 그러나... 착한 웃음 앞에서 난 무너져버렸다. 씨발 정시언, 이게 무슨 꼴이야. 완전한 악역이 될 수도 없어, 바보같아. 이진한 그 악마같은 남자가 어떻게 약혼녀는 저렇게 완벽한 여자를 만나게 된 건지. 대체 나를.... 얼만큼이나 더 비참하게 만들 생각인지. 해커 놈들이 사는 뒷집은 [관계자 외 출입금지]기 사는 곳보다 작은 곳이었다. 작은 마당, 단칸방으로 된 집 한 채, 거기딸린 부엌과 화장실이 전부였다. 물론 [관계자 외 출입금지]와 내가 살고있는 집만큼 다 쓰러져가는 위험한 집은 아닌 듯했지만. 열려있는 대문으로 들어가 좁은 마당에 진입. “산아!!!” 대답없는 이름이여... 그러고보니 댓돌 위에 신발이 한 켤레도 없었다. 산이 이 새끼... 집에 계속 붙어있을 거라고 해놓고... 들어가서... 열쇠만 가져와도... 되겠지? 잠시 불순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가... 결국 난 그 생각을 실행으로 옮길 결심을 하였다. 마침 변명할 거리도 충분하였으므로. 나는 너무 추웠고, 집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대문 열쇠는 산이에게 있었고, 마침 산이는 집에 없었다. 그러니 나는 열려있는 해커의 집에 들어가, 열쇠만 찾아서 나오면 되는 것이다. 보라, 이론 상으로 완벽하지 않는가!!! 무단침입죄가 성립되지는 않을 것이다.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후 다시 한 번 확인할 겸 문 앞에서 헛기침 소리를 내고는.. “흠, 산아!! 누나..... 들어간다.....?” 해커놈들의 집 문을 벌컥 열었을 때는- ........... 맙소사...... 말도 안돼..... 난 엄청난 충격에 휩싸여 소리내지 않기 위해 내 입을 틀어막아야만 했다. 열 일곱 살 된 소년 세 명이 잠을 잘 공간도 없을 정도로 꽉 찬 방 안. 그리고, 그 방 안을 꽉 채우고 있는 물건의 정체는- 최신식 컴퓨터 세 대와 각종 설비, 회선, 기계들. 다리힘이 자꾸 풀리려고 한다. 이 놈들.... 진짜 해커다. 진짜 해커가 아니고서야 이럴 수는 없다. 그들도 잠도 앉아서 자는 듯 했다. 널부러진 이불이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쩌면 [관계자 외 출입금지]보다도 힘겨운 생활을 하고있는 것이다. 손이 떨린다. 이들의 충성심은 나도 익히 알고있다. 비원이가 죽으러고 명령하면, 진짜 죽을 놈들이 해커다. 그럼 해커의 표적은.... 나일텐데... 바로 나, 정시언일텐데. 감쪽같이 속였어, 나를. 랩을 하는 그룹이라고? 그건 어디까지나 속임수였다. 나보다... 더 대단한 놈들이었어, 서로 얼굴 맞대고 웃으면서 뒤에서는 더러운 꼼수를 쓰고 있었던거야. 이 애들은.... 단 일분 일초도.... 나를 신뢰한 적이 없었어.... 눈물을 참으며 방 한가운데에 옿여진 세 대의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았다. 켜진 채 작동중인 컴퓨터의 화면. 첫 번째 컴퓨터에는 검찰의 활동 상태가, 두 번째 컴퓨터에는 제일그룹의 현황이, 세 번째 컴퓨터에는......... 정시언의...... 신상정보가..... 결국엔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예상했어야 했다. 아침에 비원이가 민서를 때린 것도, 낮에 진한오빠와 선주린을 만나게 된 것도, 다 지금 이 끔찍한 일을 예고하는 경고에 불과한 것이었다.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내가 흐느끼는 것이 느껴졌다. 어서 이 방에서 나가야 한다. 열쇠를 찾기 위해 어지러운 그 방을 미친듯이 뒤졌다. 그리고 열쇠를 찾았을 때, 그 밑에 놓여진 노트를 발견했다. 아까 산이가 말하던 가사집인 것 같았다.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노트를 펼쳤을 때는.... [정시언. 정현식 검사의 2녀 중 장녀, 한국대학 심리학과 3학년 재학, 현재 휴학중. 동생 정이온, 성신여고 2학년 5반. 파파라치로 유명. 아버지 정현식은 현재 3건의 사건을 담당. 부인은 18년전 정이온 출생 당시 사망. 정시언, 20살 봄, 검사 이진한과 교제 시작.......] 눈물이 차오르는 바람에 더 이상은 볼 수 없었다. 그 노트 안에는 나의 모든 정보가 들어있었다. 나조차 모르는 이야기까지도 모두 상세하게. 심지어 대학시절 나의 성적과, 초중고의 내 졸업사진까지도. 나는 지금껏 [관계자 외 출입금지]와 해커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있었고, 그들은 나를 단 한 순간도 진심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스파이로서 활동하면서도 그들 생각에 여념없던 나와 달리 그들은 내 모든 뒷조사를 마쳤던 것이다. 배신이라고 말한다면 내가 너무 나쁜 사람인걸까. 이 모든 사건의 시작은 내가 저지른 것이니까 서로 마찬가지였구나, 하면서 웃어넘겨야 할까. 아까 진한오빠와 마주쳤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아파왔다. 그래도 진심이라고 믿어왔던 모든 것이 거짓이 되어버렸으므로. 휴인이의 웃음이, 환영이의 다정함이, 민서의 수줍음이, 비원이의 따뜻함이 모두 계산된 거짓이었다. 내가 그들을 두고 누가 주동자인지, 누가 재벌 아들인지 찾고있는 동안 그들은 나를 얼마나 비웃은건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며 떨고 있을 때, 뒤에서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났고... “씨발.... 김산 그 개새끼... 문 잠그고 가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그 뒤에는 욕을 지껄이는 준휘와, 무표정한 열음이가 있었다. 방문 옆에 기대 움직일 줄 모르는 준휘와 달리 열음이는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와 나에게 열쇠를 건네며 내가 펼쳐놓은 노트를 덮어버렸다. 그러나 큰 충격에 나는 열쇠를 받을 생각조차 정지되어 버렸고..... “언제부터니, 내 뒷조사 한 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을 땐. “누나가, 우리 앞에 나타난 후부터.” 건조한 말투의 열음이가 아무 감정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내 존재를 아는 건 휴인이 뿐일거라 생각했다. 오직 내가 사랑하는 그 애 뿐일거라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구역질이 치민다. “휴인이, 환영이, 민서, 비원이.... 다 알고있니? 이 노트... 봤어?” “수정할 사항이 있어서 오늘 다시 가져온 겁니다.” “......... 뭐가 잘못되었길래? 내가 말해줄게, 물어봐, 뭔데?” 비꼬는 듯한 내 질문에.... “누나를 움직인게 정현식 검사인지, 이진한 검사인지 알아내고 있었습니다.” 열음이는.... 끔찍할 정도로 솔직했다. “그래서 다들 봤다고, 이 노트를?” “우리한테 이 노트를 만들라고 지시한 건 형들이었으니까요.” 말도 안돼......... “해커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명령 외에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주저앉은 내 앞에 쭈그려앉은 열음이의 초록색 눈이 이토록 무서운 적은 없었다. 몸이 마구 떨려온다. “잔인하다, 너희들....... 미친듯이 잔인해.....” 나의 말에.... 반박한 건.... “먼저 공격한 건 누나였어요.” 처음부터 숨기지 않고 내게 적대감을 표시해 온 준휘. “나는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형들을 힘들게 하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거라고.” “...............” “누나가 불순한 이유로 형들에게 접근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누나에 대한 뒷조사를 시작한 것 뿐이라구요.“ 아니야, 난.... 지켜주고 싶었어, 진심이었어.... “정이온 그 년한테도 전하세요. 더 이상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뒤를 캐내면 그 바닥에서 활동 못하게 해버린다고, 열음이가 키우는 파파라치 몇 명 정이온한테 붙어놨으니까 그렇게 아시고 허튼 짓 못하게 하세요.“ 휴인아, 니 얼굴이 머릿속에 가득차. 니 모든 행동이 거짓이라고는 믿을 수 없어. 보고싶어, 니가 너무 보고싶어. “못 견디면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나가세요.” “..............” “경찰들이 왜 [관계자 외 출입금지]를 잡는데 번번히 실패했는 줄 아세요? 지금은 우리가 우세하니까 하나만 가르쳐드리죠.“ “.................” “해커를 활동중단 시키기 전에는, 절대 [관계자 외 출입금지]를 제압할 수 없어요.” “......................” “더 이상 형들 괴롭히지 말고 나가요. 이런 스파이나 동원하다니, 경찰들도 이번에는 심하게 웃겼으니까. 차라리 전처럼 전면전으로 대항하라고 전해주세요. 그게 더 스릴있고 좋았네요.“ “준휘야...” 거친말을 쉼없이 쏟아내는 준휘와, 그걸 막는 열음이. “난 좋은 말로 달랠 생각 없어. 먼저 시작한 건 그 쪽이야.” 사실이다. 난 반박할 수 없다. 그들을 파괴시키기 위해 먼저 달려든 건 나다. 하지만 내 마음이 이렇게 아픈 건, 내가 진심으로 그들을 대했기 때문이다. 놈들을 지키기 위해 고심했었기에, 정말 믿었기 때문에... 사랑했기 때문에. “김산 이 개새끼는 어디로 간 거야. 일을 왜 이 지경까지 끌고가서....” 아부지. 이 애들은 평범한 청소년들이 아니라구요.... 내 힘으로는 역부족이예요. “누나.............” 나를 달래려는 듯 내 어깨에 손을 올리려는 열음이를 밀쳐내고 열쇠를 집어든 후 미친듯이 집으로 달려갔다. “아아아아아악!!!!!!!!!!!!”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비명소리. 내 방 안으로 들어온 나는 급히 문을 잠가버렸고 숨도 쉴 수 없을만큼 눈물을 쏟아냈다. 그럴 리가 없어, 거짓이 아니야. 해커 따위가 뭘 알아? 내가 시간을 같이 보낸 건 휴인이, 환영이, 민서, 비원이야. 그 애들이 나를 그렇게 생각할 리 없어. 내가 그 애들을 무시하 적이 없듯 그 애들도 마찬가지야. 내가 그 애들을 진심으로 대했듯 그 애들도 마찬가지야. 열음이와 준휘의 말이 계속 들려오는 것 같아 이불로 귀를 막아버렸다. 눈물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둠이 가라앉고,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퇴근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74. 정면돌파 (작가시점) 구불구불한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저 너머로 보이는 집을 향해 휴인은 미소를 지었다. 집은 언제나 몸을 쉬는 곳, 자신을 포함한 네 명의 사내가 신분을 숨기는 곳이었으나 이제는 전혀 달랐다. 숨을 쉴 수 있는 곳, 희망이 넘치는 곳. 아니, 쉽게 말하자면... 그의 사랑이 있는 곳이었다. 물론 아침에 일어난 소동이 신경쓰이기는 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민서를 가장 많이 아껴주는 것은 불쑥 어디선가 나타난 비원이었다. 그런 비원이 민서의 뺨을 때리는 장면은, 본래 잘 놀라지않는 휴인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알고있었다, 자기 자신 때문인 것을. 그러나 나중에 그들에게 사죄를 하는 순간이 있더라도, 아니, 정말 그가 아침에 시언에게 한 말처럼 혼자 지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모든 걸 무시하고 새로운 천국을 만들어야만 했다. 환영, 민서, 비원의 인생이 모두 휴인으로 인하여 망가져왔지만 그들의 의지를 지키기 위해서 휴인은 언제나 냉정해야 한다. 그러나 어색함은 언제나 목적의식에 독이 되는 법이다. 휴인은 집안의 침묵을 풀어보고자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여느때처럼 활발하게 가장하여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하이~ 다들 안녕!! 강휴인 등장~!! 어라, 다들 와있었네? 민서는 그렇다치고 비원이랑 환영이는 원래 늦게오잖아, 역시... 주인공이 제일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지. 다 나 기다린거야? 밥 언제 먹어, 밥?“ 과장해서 웃고 떠드는 새 휴인은 무언가 하나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부족한 것이 시언의 자리임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뭐야.... 누나는?” 환영은 지친듯 평상위에 걸터앉아있었고, 비원은 담배를 물고 있었으며, 민서는 시언의 방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분위기 왜 이래.... 다들 왜 그래?” 억지웃음을 지으며 휴인이 말을 걸면.... “방문을 안 열어줘.” 민서의 날카로운 한마디. “뭐?” “정시언이 방문을 안 열어준다구!!!” “자.... 자는 거 아냐? 아니면 문이 안 열리나? 가만있어, 그럼 내가 열쇠집 아저씨 금방 불러올테니까....“ 당황한 휴인을 향해 비원은 담배꽁초를 땅에 내다버리며 한마디 내뱉었다. “그만둬, 우는 소리가 들려.” “.........어?” “방 안에서 우는 소리가 들려, 무슨 일인지 물어도 대답도 안해주고... 울기만 해. 방문을 아무리 두드려봐도 묵묵부답. 우리도 지쳐서 정신놓고 있던 중이다. 대체 우리 일 나간 새에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비원의 말을 들은 휴인은 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더 이상 일이 꼬이는 것은 원치 않았기에. “누나, 무슨 일이야?” 시언의 방 앞에 있는 민서를 가볍게 밀쳐내며 휴인이 그 앞으로 다가섰다. 비원의 말대로 가늘게 시언의 울음소리가 문틈 사이로 흘러나왔다. 우습게도 그 소리를 듣자마자 심장이 찢기는 것 같았다. 사랑을 처음 느껴본 휴인은 이러한 자신의 감정이 무서웠다. 아마 민서 또한... 그럴 것이다. “누나!!!!” 불러도... 불러도... “누나, 나 휴인이야, 우리 왔다니까? 문 좀 열어, 이야기 좀 해!!!! 어???” 답이 없다. “그만둬.” 격하게 방문을 두드리는 휴인의 행동을 민서가 중단시켰다. “아무리 불러도 소용없어, 문짝 부숴버리겠다고 협박을 해도 끄떡도 안한다고.” 문짝을 얼마나 두드렸는지 빨갛게 부어버린 민서의 손등을 보며 휴인은 무력한 자신을 느끼며 있는대로 주먹을 꽉 쥐었다. 날카로운 손톱에 베인 살이 아파온다. “저기, 할 말이 있어.” 그 순간, 안절부절 못하던 환영이 기어이 한마디를 건넸다. “아침에... 들켜버렸거든. 오늘 의뢰받은 사실을.” 환영의 말에 시선이 그 쪽으로 몰렸다. 그들은 환영의 말을 듣기위해 마당에서 집 안으로 장소를 이동한 상태였다. “미쳤어? 그걸 왜 들켜.” “그러니까... 부엌에... 있다가... 도일공고 깡패새끼였는데... 아무래도 그것 때문인것 같아. 누나가 안가면 안되겠냐고 잡았는데... 내가 기어이 갔거든, 그것 때문에 마음 상한거 아닐까?“ “그러게 너는 신중해야지 왜 그런걸!!!” 환영은 걱정스럽게 아침에 있었던 일을 줄줄히 이야기했고, 비원과 민서는 차례대로 환영의 부주의함을 탓했다. 그러나 휴인의 표정에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단지.... 그것 뿐일까?” “..........응?” “저렇게 몇 시간을 울 각오였다면.... 너를 따라가서 잡는게 더 낫지않았을까, 환영아? 그러니까 내 말은, 누나가 과연 이렇게 무기력하게 울고만 있었겠냐는 거야, 단지 니가 폭력의뢰를 받고, 그걸 해결하러 갔다는 것만으로 저러진 않겠지. 그런걸로 무너질 사람이었으면, 민서가 소매치기 하는 거 봤을 때는 왜 그냥 가만히 있었겠어?“ 듣고보니 맞는 말이었다. 휴인의 말을 들은 환영은 더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뀌었다. “난 그것 때문인줄만 알았는데!!! 그럼 뭐지? 대체 뭣 때문에....” “...........가사집.... 어딨어?” 그 때, 조용히 들려온 비원의 한마디. “응?” “해커애들이 만들어준 정시언 신상정보 적힌 노트 말이야. 어제 마지막으로 본 게 누구지? 어디다 둔 거야?“ “어제 마지막으로 본 건 나야. 책상위에 분명히 잘 숨겨서 올려뒀었어.” 비원이 취조하는 듯 묻자 침착한 말투로 민서가 답하고, “해커애들이 가져갔겠지.” “........... 해커 애들 불러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환영은 휴인의 한마디에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밖으로 나갔다. 환영이 해커를 불러오기 위해 마당으로 나갔을 때에도, 여전히 시언의 울음소리는 옅게 들려오고 있었다. “노트... 어딨어?” 환영에게 불려온 해커 세 명이 나란히 서 있었다. 휴인은 그들을 보며 애써 담담한 척 물었다. “아, 형... 그거 내가 가져갔었어요, 수정할 사항이 있어서....” 산이는 곧바로 노트를 건네며 답했다. 낮에 준휘와 열음이에게 문단속을 안했다고 한바탕 구박을 들은 그의 얼굴은 어딘가 모르게 주눅이 들어있었다. “열음이랑 준휘는 표정관리 잘하는 거 내가 다 알지....” 휴인은 산이에게서 노트를 받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심기가 불편한지 벽에 기댄 민서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근데 산이는 아니지, 거짓말 하면 눈을 못 마주치잖아?” “아니예요, 형!! 그, 그건 진짜예요!!” “........... ‘그건’ 진짜라고? 그럼.... 숨기고 있는건 또 따로 있다는 소린가?” 준휘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준휘는 거짓말을 들킨 뒤 놀라 주눅들어 있는 산이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쳐대고 있었다. “말해, 무슨 일 있었지? 시언누나 왜 저래?” 좀처럼 화내지 않는 휴인이 카리스마를 뿜어내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해커의 리더인 열음이가 나섰다. “모른 척 하고싶었어요... 굳이 알리고 싶진 않았는데.. 말씀드릴게요.” “바보같은 새끼들!!!! 미쳤어, 정말???” 열음이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민서가 날뛰기 시작했다. 열음이는 그러한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산이는 너무 부주의했고, 준휘랑 저는 너무 경솔했죠. 죄송해요.” “이게 죄송하단 말로 끝날 일이 아니잖아, 일을 이 지경으로 망쳐놓고 지금!!” 민서의 호통소리를 들으며 환영은 큰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려버렸다. 믿고싶지 않다, 앞이 깜깜한 현실에 그는 한숨만 토해낼 뿐이었다. 그에 비해 휴인과 비원은 신통할 정도로 냉정한 표정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괜히 나서서 이렇게 됐다... 이거지?”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는 휴인을 보며 민서는 소리를 쳐댔다.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잖아!!! 우리 정체도, 정시언 정체도!! 이런식으로 다 까발려지고, 지금 다들 제정신이야? 다 그르친거야, 우리가 연기한 것도, 친해진 것도!!! 그냥 다 거짓이 된거고, 이제 서로 불신밖에 안 남게 된거야!!!! 지금 정시언이 검찰에 한마디만 꼬지르면 우린 다 잡혀간다고!!!!“ 민서는 앞뒤 가릴것 없이 흥분했다. 걱정은 두 가지였다. 검찰에 잡혀가게 될 자신들의 운명과, 이제 불신과 경멸만 남아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포기해야만 하는 사랑. “그럼 이제.... 하나 뿐이네.” 그에 비해 휴인은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다. “서로 정체 다 알려진 채 한 판 노는거지, 뭐. 별 거 있냐? 어차피 시언누나는 누가 주동자인지, 재벌아들인지도 모르고... 백민서가 남자인 것도 몰라. 아직은 우리가 더 유리해.“ “미쳤어? 다시 해보고 말고를 떠나서 정시언은 지금 우리한테 배신감만 느낄텐데!!” “아니, 그건 나한테 맡겨줘.” 우린 그래도 거짓사랑은 하지 않았거든, 이라고 말하려다가 휴인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괜히 또 민서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해커.” 그리고 마지막 승부수. “.......활동 중단해.” 휴인의 말에 모두가 놀란 듯 순간 모두의 행동이 정지되었다. “형!!!!!!!!” “말도 안돼요, 휴인이형, 우리 잘할게요, 우리 없으면 아무것도 안되잖아요!! 이번 일은 실수라구요, 우리 없으면 형들 잡히는 건 시간문제예요.“ 준휘와 산이가 나섰으나... “어차피 우리에게도 이건 마지막 기회야. 들킨 이상, 또 안 들키리라는 보장은 없어. 활동중단해. 이제 [관계자 외 출입금지]만으로 해볼테니까.“ 휴인의 말에 준휘는 넘치는 분을 주체못한듯 비원에게 소리쳤다. “형, 휴인이 형 좀 어떻게 해봐요!!! 우리 없으면 안돼요!!” 해커가 가장 동경하는 사람은 비원이었고, 준휘나 산이 뿐 아니라 열음이조차도 비원이 그럴듯한 해결책을 제시해줄거라 믿었다. 그러나, 비원은 냉정하게 한마디 건넸다. “우리 리더는 휴인이야, 말 들어.” 그렇게.... 해커의 활동중단이 시행되었고, 이제 남은 건 시언을 다시 일으키는 것, 그리고 [관계자 외 출입금지]와 정시언이 전면전을 펼치는 일 뿐이었다. 골치아픈 서로의 뒷조사는 중단되고, 이제 드러내놓고 서로를 살펴야만 했다. 75. 존경하는 뒷모습 (작가시점) “어떻게 할거야!!!!!!!!?” 준휘의 고함소리에도 열음의 눈빛에는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아무 반응이 없는 열음의 표정에 준휘는 시선을 돌려 산이를 바라보았다. “너 때문이야, 김 산!!!!!!!!!!!! 개새끼!!!! 너 때문에 일이 이 지경으로 망가진거라고!!!!” 좀처럼 흥분하는 일이 없는 준휘였다. 그러나 그는 산이를 잡아먹을 듯이 분노를 내뿜고 있었다. 산이 또한 그의 심정을 이해못하는 바가 아니었다. 자기 자신도 자살을 하고싶을만큼 증오스러운 상황이다. 준휘야 오죽하겠는가. “그만해...........” 열음은 피고있던 담배를 떨어뜨리며 중얼거렸다. 빨간 불씨가 남아있는 담배를 발로 비벼끄며 그는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 “이 새끼가 일을 망쳤어, 이제 형들은 검찰에 잡힌 몸이나 마찬가지야!!!!!!!!!!!” 열음은 가끔 생각했다. 남자들의 세계는 때로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들의 지배를 받고있다고. 준휘와 산이는 비원이란 존재에 대해 광적일 정도로 집착했다. 그들의 충성심은 너무도 투철해서 열음이도 가끔 오싹함을 느낄 정도였다. 소년들이란 그런 것이다. 닮고싶은 자신의 역할모델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을 정도로 무모한 자신감. 비원은 자신들을 인정해준 형이었고, 해커는 비원을 본 순간 결심했다. 그를 위해 인생을 던지겠다고. 뭐랄까, 웬만한 남자아이들이라면 어릴 적에 지구를 지키는 용사를 동경하겠지만 고아원에서 평생을 자라온 준휘와 산이는 비원을 동경했다. 그들은 지구를 지키는 용사보다 비원이 더 멋있는 사람일거라 믿고 살아왔다. 왜냐고 물어보면 할 말은 별로 없다. 텔레비전에서 지구를 지키는 용사를 보지 못한 까닭은 아니다. 고아원 원장은 고아원 아이들이 텔레비전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밖에 나가 노는 것을 더 권장했으니 ‘해커’는 지구를 지키는 용사 따위는 알 바가 아니었다. 굳이 해커가 비원에게 목숨거는 따져보자면.... 비원은 냉정함 속에 따뜻함을 숨기고 있었고, 처음으로 해커를 필요로 하여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으며, 호스트빠 일을 시작하여 그 돈으로 해커가 살 집을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그들의 유일한 특기인 해커짓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 이유만으로도 충분했다. 거기다 더 보태자면.... 비원은 얼굴마저 잘생긴 사람으로 소년들이 바라는 영웅의 이미지와 부합했으며, 그는 ‘해커’에게 있어 처음으로 ‘형’이란 호칭으로 불린 사람이었다. 해커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를 위해 움직였고, 그들을 믿고 따랐지만 세세하게 분류해보자면 그들의 실질적인 정신적 지주는 강휴인이 아닌 신비원이었다. “내가 잘못한 거 알아. 이제 이런 일 없을거야.” “당연하지, 이 새끼야!!! 더 열심히 뛰어야 돼, 이제 형들도 모르게 일 진행해야된다고!! 형들한테도 숨겨야 되니까 앞으로는 더 철저히 비밀로 해.“ 울먹이는 듯한 산이의 말을 자르며 준휘가 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인 산이는 열음을 향해 말을 이었다. “휴인이형이 활동 중단하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일은 계속 진행할거지? 검찰 활동 사항 다 파악했어, 나 이제....“ “아니, 됐어.” 열음은 밤하늘을 보며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준휘의 눈빛이 차갑게 바뀌었다. “이열음.... 뭐라고?” “됐어, 그만해.” “그게 무슨뜻이야, 너?” “활동 중단해. 형들 말 들어.” “너 미친 거 아니지?” “시비걸지마, 박준휘. 난 진심이야.” 열음은 준휘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준휘는 쉽게 주눅들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열음의 초록색 눈과 마주할때면 당당함이 쉽게 사라져버리는 것을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별다른 협의 없이도 해커의 리더 자리는 정해져 있었다. 해커의 리더는 언제나 열음이인 것이 당연했다. 태어날때부터 정해질 일인듯 누구도 그 사실에 반발하지 않았다. 열음, 준휘, 산이는 태어날때부터 고아원 문 앞에 버려져있었다. 열음이가 제일 먼저, 2개월 뒤에 준휘가, 3개월 뒤에 산이가. 그 순서대로 자신들의 서열이 정해진 것 같았다. 그러나 불만은 없었다. 감정절제를 제일 잘하는 사람이 바로 열음이었으니까. 아마도 비원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준휘와 산이가 신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열음이었으리라. 그들은 셋 다 부모도 모르고 자신들의 환경도 모른다. 그러나 우연히도 초등학교 때 장학사들의 지원으로 고아원에 컴퓨터가 생겼고, 동갑내기 세 소년은 그것을 가지고 놀다가 예상치못한 자신들의 재능을 발견했다. “우리가 없으면, 형들은 끝장이야.” “아까 나 혼자만 들은 거 아니잖아, 너도 귀 있으면 들었겠지, 박준휘.” “이열음!!!!!!!!!!!!!!” “휴인이형이 활동중단 하랬잖아!!!!!!!!!!” “내가 걱정하는 비원이형이야!!!!!!” “비원이형은 분명히 말했어, 휴인이형 말 들으라고!!!!!!!!!!” 좀처럼 큰소리 내는 법이 없는 열음이었다. 그런 열음이가 소리치자 준휘는 잠시 멈칫거렸다. 산이는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잊은 건 아니겠지, 비원이형의 리더는 휴인이형이야. 그러니까 우리가 믿고 따라야 되는 건 휴인이형이라고, 기억해둬.“ 열음은 낮게 중얼대며 담배를 새로 하나 빼물었다. “그러다 비원이형이 죽어. 너도 알잖아, 제일그룹 후계자 역을 떠맡은 건 비원형이야.” 준휘는 흥분한 마음을 숨기려 다시 침착한 상태를 유지했다. “우린 말만으로 비원이형 믿은 게 아니잖아, 준휘야.” “이건 믿고 안믿고의 문제가 아니야, 검찰을 상대로 비원형이 숨을 수 있을까? 해커가 없는데!! 그게 가능할까?“ “난 적어도 해커보다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가 더 대단하다고 보는데.” “이열음!!!! 이건 장난이 아니야!!!! 죽어, 비원이형이 죽는다고!!!! 진짜 죽을 수 있다고!!!!!! 제일그룹 새끼들 몰라서 그래? 후계자 찾아서 죽인다고 혈안이 되어있어!!! 겉으로는 가증스럽게 찾아서 유학보낸다고 지랄하면서도 뒷구멍으로는 살인청부업자까지 줄줄히 대기시켜놓고 있다고!!!! 우린 정보사냥꾼이야, 모를 리가 없잖아, 너도 다 알잖아.... 산이랑 내가 주는 정보를 죄종적으로 한 번 더 점검하는 건 너니까!!! 우리가 없으면!!! 비원이형이 죽어!!!!! 민서형을 대신해서.... 비원이형이 죽게 된다구... 제기랄!!! 그러게 왜 비원이형은 제일그룹 후계자 역할을 하겠다고 나선거야, 씨발!! 제일 위험한 역할을 생각도 안하고 받아들이면 어쩌겠다고!!“ 준휘는 울부짖듯 소리쳤다. 도로 감정적인 반응으로 돌아오긴 했으나 구구절절 맞는 말이긴 했다. 그러나 열음의 역할은 해커를 통솔하는 일이었다. 그는 언제나 냉정하게 비원의 말에 복종해야만 했다. “다음부터 또 이 화제로 말 꺼내면 해커는 해체야. 활동 중단해. 그게 우리가 해야할 일이야. 가만히 있는 것, 이제 그게 우리 일이라고. 정시언은 형들한테 맡겨. 우리가 끼어들 일 아니다. 최악의 경우, 비원이형이 정말 위험해지는 상황이 있더라도.... 형들의 지시사항이 따로 없는 한, 해커는 절대 움직이지않아.“ 열음의 냉정한 대답을 듣자마자 준휘는 타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다는 듯 부실한 벽에다가 주먹질을 해댔다. “박준휘, 마음 좀 진정시키고 있어. 산이 너는 들어가서 컴퓨터 전원 다 꺼버리고.” 준휘와 산이에게 명령하듯 말을 내뱉은 후 열음은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비원을 도와 계속 해온 일에 종지부를 찍었다. 열음이라고 해서 마음이 편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처음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처음보는 또래 남자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혼혈아인 자신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자는 맹세코 처음이었다. 그러나 열음은 본래 마음을 잘 주지 않는 성격이었다. 준휘나 산이와 달리 광적일 정도로 한 남자를 선망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비원을 가장 믿고 따르는 사람은 준휘도, 산이도 아닌 바로 열음이었다. 열음이는 알게 된 것이었다. 재미삼아 추적해본 비원의 인생과, 고아원 원장의 동생이었던 민서의 유모. 제일그룹 회장과, 사창가의 에이스. 윤비서. 열음이는 해커의 리더로서 준휘와 산이가 알아온 정보를 통합하는 일을 맡고 있었고, 그 때문에 그에게 허락된 하루의 취침시간은 2시간 정도에 불과했다. 준휘와 산이도 잠을 4시간 정도만 잠을 청했지만, 열음은 그보다 더한 생활을 해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극기훈련같은 짓을 계속해나가다 알게 된 사실이었다. 신비원은, 백민서의 형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비원을 동료 정도로 생각했던 열음이었다. 도움이 필요하다기에 갔고, 일을 해달라기에 해주었다. 준휘나 산이와 달리 그는 비원의 존재에 대해 큰 정당성을 부여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조사를 하며 알게 된 엄청난 사실에 열음은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쉽게 하지 못할 용기있는 행동을 비원은 실천하고 있었다. 그는 목숨을 바쳐 자신의 친동생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두에게 비밀로 한 채로.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열음의 몸에 일순간 전류같은 것이 흘렀다. 그리고 열음은 결심했다. 이제 자신은, 비원을 위해 살겠노라고. 백민서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신비원. 그런 신비원을 위해 이제 자신의 목숨을 바치겠다고. 열음이까지 신비원을 향해 충성을 맹세한 그 날부터 지금까지, 해커는 온 힘을 다해 [관계자 외 출입금지]를 지켜왔다. 옛날 생각에 웃음짓던 열음은 고개를 길게 빼고 [관계자 외 출입금지]가 살고있는 집의 마당을 바라보았다. 키가 제일 큰 비원은 어렵지 않게 열음의 눈에 들어왔다. 아직 정시언 때문에 우왕좌왕 해대는 그들의 모습에 열음은 옅게 한숨을 쉬었다. 비원이 민서의 형이라는 것은 제일그룹의 회장, 신비원, 윤비서만 알고있던 사실이었다. 그렇게 세사람만 알고있던 사실을 천재해커 이열음은 발견해냈다. 그러나 회장과 윤비서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워낙에 알기 힘든 사실이라 준휘와 산이도 그러한 정보를 모르고 있으니 이제 그 사실은 하늘 아래 비원과 열음만이 알고있는 것이었다. 열음은 자신의 집 담벼락에 몸을 기댄 채 비원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열음은 그 모습을 존경하고 동경했다. 존경하는 그 뒷모습에, 괜시리 마음이 아릿해져왔다. 76. 눈물 한 방울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언뜻 시계를 보니 시간은 밤 12시. 귀신처럼 산발을 한 채 끊임없이 울고만 있게 된 지... 총 7시간째로 돌입. 정시언, 제발 그만 좀 울어, 그만 울고 생각을 좀 해보란 말이야. 운다고 해결되는 건 없어, 이렇게 가다간 내 체력만 소비해 버릴거야. 모르겠어? 나도 그 애들을 속였듯 그 애들도 날 속였을 뿐이야. 똑같아, 똑같이 더러워. 그런 주제에 뭐가 그리 서럽다고 울어, 정시언? 웃겨, 정말 웃겨. 울 자격도 없는 주제에, 스파이 주제에. 단지 내가 진 것 뿐이야. 그 애들이 한 수 위였던 것 뿐이야. 솔직하게 생각해봐. 지금 내가 우는 이유는 뭐지? 그 애들이 날 속였다는 점에 화난 게 아니라... 내가 졌다는 사실 때문에 우는 거 아니야? 아무리 냉정하게 머릿속을 정리하려고 해도 금세 흐뜨러지고 만다. 차분히 생각을 해보려해도 결국에 돌아오는 건 눈물 한 방울과 절망 뿐이었다. 내가 울고있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난 진심이었다. 더러운 계획에 개입되어 놈들을 잡으러 온 것도 사실이지만, 그들과 함께 있을 때 울고 웃던 정시언의 모습은 진실이었기에. 그렇기에 난 지금 이렇게 마음 아파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면, 내가 진심이었을 때도, 그들은 나를 의심하고 있었을테니까. 세상에서 버림만 당한 아이들이라 나를 향한 증오심도 컸을 것이다. 물론 그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씁쓸하다. 퇴근한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외침소리에 문을 열지 않은 것은 그들의 행동에 화났기 때문이 아니다. 눈물 때문에 추해질대로 추해진 내 얼굴이 그 첫 번째 이유이기는 했으나 그 애들의 얼굴을 보면 난 그대로 무너질 것만 같았다. 휴인이의 외침과 민서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난 그저 어둠 속에서 눈물만을 흘리고 있어야만 했다. 머릿속엔 그저 아침에 보았던 환영이의 상처입은 표정과, 민서를 때리던 비원이의 눈빛. 분노보다는 슬픔에 가깝던 그 눈빛이 생각나서. 또, 나를 좋아한다고 당당히 밝히던 민서의 목소리와....... 세상이 무섭다고 말한 휴인이의... 말 한마디가 떠올라 버려서. 화난 게 아니야... 나 이해해줄 수 있어? 그저, 내가 너무 미안해서, 니들한테 내가 너무 미안해서 너희들 얼굴을 볼 염치도 없는거야. 내 진심까지 더러워질까봐 나 지금 무서워서 이러는거야. 그리고, 너희들의 진심을 알게될까봐 무서운거야. 아니, 아니..... 사실은 나, 그러니까.... 여기를 떠나야 할까봐, 너희들 얼굴조차 볼 수 없을까봐.... 그게 너무 무서워서... 그래서.... 그래서 이러는거야. 너희들 얼굴 보면... 모두 다 잊고 그냥 안겨버리고 싶을까봐 지금 간신히 참고있는거야. 중요한 건 ‘해커’였다. 그들은 [관계자 외 출입금지]보다 더 대단한 존재였다. 검찰들은 18세의 범죄자 집단을 잡지 못해 우왕좌왕 했으나 오히려 그들의 모든 뒷받침을 해주었던 것은 그들보다 더 어린 17세의 소년들이었다. 천재 해커들. 그들은 오직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명령에만 움직인다고 말했고, [관계자 외 출입금지]를 위험하게 만들면 나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무서운 건 아니었다. 오히려 든든함에 가까웠다. 내가 아니라도 놈들을 지켜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에 미치도록 감사했다. 다만 내가 불안한 건 해커 때문에라도 이제 놈들과 나는 영원히 멀어져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이제 인정하는 것이었다. 정시언은 스파이였고, 그렇기 때문에 이제 이 집을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관계자 외 출입금지]와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이제 그들과는 전혀 상종도 하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을 모두 잊어야만 한다는 그 절망적인... 사실을... “누나............” 그 순간 문 밖에서 휴인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퇴근 후 내 방문앞에서 2시간 정도 웅성거리다가 지쳐서 들어간 듯 싶었는데 휴인이놈은 어느새 또 다시 기어나온 모양이었다. “하아.... 그만 좀 울어, 누나..... 지치지도 않나봐....” 울면서도 휴인이의 목소리를 듣기위해 방문에 몸을 기댔다. 아마 휴인이도 이 방문에 기댄 채 서있을 것이다. 이렇게라도 휴인이를 느끼고 싶다고 말하면, 그것도 너무 큰 바람일까. 휴인이가 이런 내 마음을 안다면 [에이, 누나 너무 야해!!]라며 비웃을까. “그만 좀 울어.... 제발 부탁이야, 누나....” 참으려 해도, 아무리 노력해도, 입술 사이를 비집고 새어나오는 울음소리. “어떻게 해줄수가 없잖아, 문도 안 열고 울면.... 내가.... 아무것도 못하잖아...” 휴인이의 저 목소리는... 진심일까. “누나가 문 열면... 내가 그 눈물 닦아줄 수라도 있지, 내가 그 눈물 먹을 수라도 있지. 누나가 이러면요.... 나 정말 미치겠어요.....“ 정말 간절한 상황에서만 사용하는 휴인이의 존댓말. “내 동생 있잖아, 누나.... 유인이... 되게 울보였거든, 그 때 봤지? 정말 울보였는데... 난 내 동생이 우는 게 왜 그렇게 싫었는지 모르겠어.... 화가 났거든, 쪼끄만 게 시도때도 없이 울기만 하니까... 쥐어박고 싶고, 그냥 한 대 확 때려버릴까 하다가도 환영이가 말리니까.. 결국엔 그냥 승질만 내고 그 꼴 보기 싫어서 집 확 나와버리고 그랬다. 모르겠어, 지금 생각하면.... 동생이 착한 게 싫었던건지, 우는 게 싫었던건지...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 동생을 울리는 모든 것이 다 싫었지. 착한 게 잘못이 되는 이 세상도 싫었고.“ 무슨 말을 하려는거야....... “지금 생각하면 그래... 동생이 우는데. 그거 위로 좀 해줄걸. 나 지금도 어리지만, 누나... 그 땐 더 어려서... 위로하는 방법도 몰랐어. 그래서 화만 내고 그랬네. 나 욕도 되게 많이 했다. 진짜 후회중이야. 뭘 잘했다고 우냐고, 너 지금 눈물 안 그치면 오빠 나가서 안 들어올거라고. 오빠가 하는 말 거짓말 같으면 어디 한 번 더 울어보라고. 내가 그렇게 말하면 옆에서 환영이가 나 때렸지. 그렇게 나쁜 오빠 될거면 너 그냥 지금 나가버리라면서. 아무리 동생이라고 해도 말버릇이 그게 뭐냐고. 나 그 때 환영이 말 좀 잘 들을 걸 그랬나. 나 지금은... 유인이한테 잘해주고 싶어도 잘해줄 수가 없어. 보면 마음이 아프거든. 그래서 그냥 굳어버려, 아무것도 못하겠어.“ 그만해, 더 이상 너 자신의 이야기 하지마, 휴인아. 너도 알잖아, 내가 스파인 거 다 알면서 이렇게 이야기 해주지마. “근데 이상하지, 누나..... 동생이 울 땐 그렇게 화가 났는데....” 그만해... 하지마, 휴인아.... “누나가 우니까 나.... 왜.... 마음이 아프지......” ................ 강휴인 제발.... 나 좀 그만 울려.... “그만 좀 울면 안될까.... 누나, 진짜 그만 좀 울면 안될까.... 내가 미치겠거든요.... 내가 죽겠거든요.... 화를 내도 좋고 욕을 해도 좋으니까요, 실망해도 괜찮으니까요..... 제발 울지만 않으면 안될까......?“ 휴인이도 울고있는 듯 했다. 그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고, 걱정될 정도로 간절했다. 니가 지금 이러고 있는 게 나 더 울리는 거야. 그거, 알고있긴 한거니? 나는 입을 틀어막고 흐느껴야만 했다. 휴인이에게 울음소리를 들키지 않으려는, 내 나름의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안아줘야 하는데, 아직 어린 소년일 뿐인데. 미안해, 휴인아. 누나가 더 약해서... 정말 미안해. 너도 모든 사실을 알고있잖아, 나한테 더 이상 잘해주지마. “민서랑 비원이가... 엄청 화났어, 문이라도 부숴버려야 되겠다고.... 누나가 지금 어떤 꼴을 하고있는지 모르니까 어떻게든 문 열어야겠다고. 환영이랑 내가... 말렸어, 지금은 누나한테 혼자있는 시간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지금 성급히 문을 열었다가는.... 누나가 그냥 뛰쳐나가버릴 것 같았거든.“ 나를 걱정해서 화를 내주는 민서와 비원이. 나를 걱정해서 함께 울어주는 휴인이와 환영이. “많은 거 바라지 않을테니까.... 울지만 말아요, 응?....” 대답없는 나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주는 휴인이. “난 기다릴게. 여기서 꼼짝안하고, 누나 기다릴게요.” 니가 자꾸 이러면, 나 휴인이 니 마음이 나와 같다고 착각해버릴거야. 그러니까 그냥 가, 나 무시하고 더럽다고 욕해줘. 나 떠나야 되는거잖아, 앞으로 니 옆에 있으면 안되는거잖아. “..........춥다.........” 휴인이의 혼잣말이 들린다. 아주 작게 혼자 중얼거린 말. “..............마음이.......... 시리다............” 휴인이의 그 말은 내 심장을 아리게 만들었고, “혼자 멋진 척 하지마, 재수없어. 지가 뭐라고 혼자 영화찍고 지랄이야. 너 혼자 그러고 있으면 누가 상이라도 준대냐? 비켜, 나도 기다릴거야!!” 밖에서 들려온 민서의 말소리. 차가운 바닥에 민서가 철푸덕 앉아버리는 소리가 그대로 들려온다. “오래 버틸 생각 하지마, 정시언!! 내가 주인아줌마한테 맞아죽는 한이 있더라도 언젠간 방문 부숴버리고 말거니까!!!!“ 그녀의 목소리에 또 다시 눈물 한 방울. 그리고........... “일단 나와, 이야기 좀 하게.” 비원이의 목소리에, “너 나올때까지 내 금연을 바친다. 너 아는지, 모르는지는 내가 모르겠는데. 나 금단증상 장난아니거든, 정시언. 내가 담배를 열 다섯 살때부터 피웠다. 담배 세 개비 이상 안 피운 적이 하루도 없거든. 나 죽을지도 모르니까 너 빨리 나오는 게 좋을거다.“ 또 다시 눈물 한 방울. “다들 감기 들려고 작정했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누나, 밖이 추워서 그래요. 우리 이불 정도는 덮고 누나 기다려도 되는거죠? 이 새끼들 감기 걸리면 또 나만 죽어나는 거 아시잖아요.“ 환영이다. “누나, 나 혼자 이 새끼들 챙기려면 진짜 더럽게 힘들어요. 난요, 아니..... 우리는요.....“ 그의 목소리에.... “누나가 필요해요.” 참아왔던 눈물이... 또 한 방울. 더 이상 참을 수는 없었다. 이 추운 날씨에 아이들을 밖에서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방 문고리의 잠금장치를 풀기위해 손을 뻗는 순간. 머리가 핑, 하고 돌았고 7시간 동안 울었기 때문에 급격히 진행된 탈수증상은 나를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지게 만들었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떠드는 그들에게 내가 쓰러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리라. 희미해져가는 의식 속에서도 걱정되는 건........ 오로지, 그들 뿐이었다. 77. 부탁 - 무슨 일 생긴 게 분명해!! 문 그냥 부숴버려야 된다니까!! - 그래, 휴인아. 이렇게 다들 한 끼도 안 먹고... 누나는 쓰러졌을지도 몰라. - 열지마, 그냥둬. - 강휴인!!! - 말 시키지 마. - 야, 너!!! - 지금 문을 연다고 해서!! 니가!! 내가!! 아니, 우리가!!! 대체 뭘 할 수 있는데!!? - 지금 쓰러졌으면 어떡해, 정시언 아프거나 다쳤으면!! - 모르겠어, 백민서? - ........ - 누나가 스스로 극복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아. - 씨발!!!!! - 우리가 먼저 나서게 되면, 누나는.... - ......... - 우리를 떠날거야. 불투명한 의식 속에서도 놈들의 대화가 어렴풋이 들려온 것 같다. 휴인이의 슬픈 목소리와 민서의 한숨소리는 내 마음 속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이러나 저러나 난 그들에게 걱정만 끼치는 존재였다. 그로부터 얼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눈을 떴다. 숨이 멈췄다가 다시 살아난 것 같았다. 오랜 시간의 혼수상태 끝에서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삶은 여전히 잔인했고, 난 그 때문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옆에 놓여있던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핸드폰에 선명히 찍힌 오늘의 날짜는 절망적이었다. 내가 쓰러지고 난 후로 3일이나 흐른 뒤였던 것이다. 꽉 차있던 핸드폰 밧데리도 한 칸 지워진 상태였다. 때마침 요란스럽게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의 액정에 뜨는 이름은, [진한오빠♡] ........ 진한오빠 이름 뒤에 붙어있는 저 하트, 아직도 지우지 않았던가. 받을까, 말까. 순간적으로 망설였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아이들은 여전히 내 방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있을까. 추운 바람에 맞서면서, 애타게 나를 생각하면서? 핸드폰 벨소리가 혹시라도 아이들의 신경에 거슬릴까 싶어서 나는 급히 통화 버튼을 누르고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댔다. [여보세요]라고 말하려 했으나, 탈진하는 바람에 쓰러졌던 내 몸은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고, 내 입술은 그 간단한 말 한마디를 내뱉는 것조차 어려워했다. - 시언아!!! 내 말 들려?? 진한오빠는 왜 이렇게 다급한 목소리인거지...? - 나 지금 니가 사는 집 대문 앞이야. 살짝 들여다보니까 아무래도 분위기가 이상해서. “.... 오... 빠.....” - 무슨 일 있어? 네 명이 다 니네 집 앞에서 진을 치고 있어. 너 집 안이야? “.......... 넷... 다... 아직도.... 내.. 방, 앞에..... 있어?” - 너 감금된거지? 그 애들이 협박해? 다 들킨거야? 계속 이 집에 있는다해도 상황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와서 나는 내 손으로 내 방문을 열 자신이 없고, 휴인이의 강경한 의지로 인해 아이들도 내 방문을 부숴버리지 않을테니까. 그렇다면 나는 지금 나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 저 문을 열고,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줄 사람이. 마음이 복잡하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나는 아이들에게 실망한걸까, 아니면 그들을 두려워하는걸까. 나는 용서해야 할 입장인걸까, 용서를 받아야 하는 입장인걸까. 나는 그들에게 화해를 청해야하는 걸까, 전쟁을 선포해야 하는걸까. “오빠..............” - 어, 그래, 말해. “데리고 나가줘......” - 시언아.... “제발.... 나 좀 데리고 나가줘......” 가라앉은 내 목소리에 진한오빠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 대문은 열려있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 니 방 열쇠는? “나... 감금된 거 아니야, 협박당한 것도 아니고... 내 방 열쇠 나한테 있어.... 그냥 단순히 사정이 있어서 내가 안에서 문을 잠근 것 뿐이야. 근데 도저히 내 발로는 못 나가겠어서 그래, 오빠... 제발... 나 좀 데리고 나가줘....“ - 기다려, 지금 갈게. 진한오빠는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화난듯한 목소리로 내 말을 자르며 대답했다. 걱정되는건가, 진한오빠의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내가 조그맣게 자리하고 있을것이다. 나만의 착각은 아닐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알던 진한오빠는 사랑을 쉽게 하는 스타일은 절대 아니었으니까. 단지 성공에 대한 욕망이 너무 컸을 뿐이다. 다른 이들에 비해 심각할 정도로 말이다. 나는 방문을 열기위해 숨을 죽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곧 온 몸이 부서질 듯이 아파왔다. 이 상태로 일어서는 것은 무리였다. 어쩔 수 없이 앉은 채로 천천히 문 앞으로 다가갔다. 잠금장치를 풀어내자마자, 마당을 걸어오는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집 앞이라는 진한오빠의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구나, 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내 방문이 벌컥 열렸다. 눈이 부셨다. 3일만의 햇빛은 시릴만큼 눈부셨다. 곧 한기가 내 몸을 감싸고,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시언아, 괜찮아????” 다급한 진한오빠의 목소리. “..... 오빠.....” “너 꼴이 왜이래,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 나.....” “병원가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래? 이대로 뒀다간 너 진짜 무슨 일 나겠다.” 누군가를 걱정할 때 나타나는 진한오빠 특유의 표정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는 약간 인상을 쓴 채로 내 이마를 짚어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곧 옷걸이에 걸린 내 겉옷을 꺼내 대충 내 몸을 감싸고는 나를 안아 들어올렸다. 오빠가 나를 안고 방 문턱을 나서는 그 짧은 시간동안 생각했다. 눈을 뜨고 그 아이들을 봐야 할까? 아니면 눈을 감은 채 아이들을 외면해야 하나. 아이들의 눈동자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 진한오빠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작은 궁금증이 먼저 생겨나버렸다. 진한오빠가 아무런 제지도 없이 내 방에 불쑥 들어온 게 수상했던 것이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가 내 방문앞에 있다면, 진한오빠를 막지 않았을 리가 없다.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나는 천천히 눈을 떠버렸고, 그 때문에 보고싶지 않았던 장면을 보고야 말았다. 휴인이, 환영이, 민서, 비원이는 내 방문 앞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진한오빠를 막지못했던 건, 그들도 쓰러져 있기 때문이었다. 추운 바람과 오랜 시간의 기다림에 지친 그들은 나보다도 처참해보였다. 바보같은 새끼들, 진짜 미쳤나봐.... 내가 뭐라고, 나같은 게 뭐라고.... 일하러 가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이 추운데서 3일 밤낮을 기다린거야? 앞뒤 가릴 것 없이,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그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눈물이 먼저 나와버렸다. “안되겠다, 너희 아버지한테는 내가 말씀드릴게, 너 이 일 그만둬.” 내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알아채지 못한 채 심각하게 말을 잇는 진한오빠. 그래, 오빠는 알 수 없어. 아무도 모를거야. 휴인이, 환영이, 민서, 비원이, 그리고 나. 이 다섯명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알 수 없어. 우린 서로를 쉽게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너무 소중해서 조심스러웠고, 너무 신뢰해서 실망해버린거야. 너무 좋아서 함부로 할 수 없었고, 너무 동경해서 애틋함이 남았어. 난 그 애들을 아끼고있고, 그 애들은 나를 지켜준거야. 진한오빠, 나 이제 확실히 깨달았어. 난 그 애들이 나를 속인 것에 화난 게 아니야. 그 애들이 나를 속인 것처럼, 나도 그 애들을 속이고 있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거야. 서로 적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아서, 그 사실을 몸서리칠만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거야. 이 애들을 다시는 못 볼 것 같아서.... 나 너무 무서웠던거야. “일단 먼저 병원가서 입원하고, 너희 아버지한테 연락해서....” 진한오빠의 잔소리가 여전히 이어지던 그 순간이었다. 다급하게 내 방문을 나서던 진한오빠의 발이 멈칫거렸고, 오빠는 자신의 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나 또한 오빠의 시선을 따라서 밑을 내려다보면... 집 담벼락에 등을 기댄 채, 땅바닥에 쭈그려앉아 고개를 숙이고 널부러져 있던 휴인이의 손이 진한오빠의 발목을 꽉 움켜지고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뭐야....” 진한오빠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리고. 휴인이는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간신히 들어올린다. 추우면 그냥 들어가서 기다리지, 저 꼴이 뭐야. 입술이 파랗게 변해버렸어... 얼굴도 꽁꽁 얼었잖아... “이거.... 반칙, 인데요.....” “후, 진짜 짜증나 죽겠는데 이 새낀 또 왜이래.” “........ 지금... 애들 다 지쳐서... 자는데... 그 틈 타서 데리고 가면... 어떡해요...” 입이 얼어서 더듬더듬 말하는 휴인이. “나도, 3일만에 보는... 우리 누난데... 아저씨가 그렇게.. 막 데리고 가면... 어떡해요.” 그 와중에도 진한오빠의 발목을 잡은 손의 힘은 절대 풀지않고 있는 휴인이. “우리랑... 제대로 이야기도 못했는데... 데리고 가면... 어떡해요....” 고개를 들고있는 것조차 힘든지 다시 고개를 푹 숙여버리는 휴인이. “누나가... 아직도 우는데.... 데리고 가면... 어떡해요......” 휴인이의 말에 진한오빠가 내 얼굴을 확인한다. 그리고, 휴인이의 말 그대로 울고있는 나를 한심한 듯이 바라본다. “환영이는.... 그동안... 매일... 하루에 세 번씩, 한 번도 안 거르고.... 식사준비 했어요. 누나가 언제 나올지... 모르니까.... 갑자기 나와서... 배고프다고 투정부릴까봐.... 감기 걸렸는데도... 그래도 되게 열심히 준비한 놈인데.... 저 놈 아파서 자고 있는 동안에... 누나 데리고 가버리면.... 어떡해요.....“ 울지않기 위해 내 입술을 깨물어보지만... 어림도 없다. “민서요... 매일 문 부숴야 된다고 그랬어요, 누나 잘있나... 궁금해서... 혹시나 다쳤을까봐.... 그거 구해줘야 된다고.... 제발 우는 소리라도 들려달라고.... 손이 얼었는데도.... 그 손으로 누나 방 문짝 미친듯이... 두들겨대고... 그랬거든요.... 지금 밤새 걱정하다가 겨우... 잠들었는데.... 근데 누나 데리고 가면.... 어떡해요.....“ 마음이 아프다. 누군가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처럼. “비원이 있잖아요.... 골초거든요... 담배 없이 못 사는 새낀데요... 누나 안나온다고.... 그 동안 진짜 금연했단 말이예요.... 금단증상 때문에 무지 고생했어요.... 일도 안나가서 거기 사장한테 욕먹고, 마담형한테 빌고... 그랬거든요.. 지금 지쳐서... 쓰러져있는건데.... 근데 그 사이에 누나 데려가버리면... 안되잖아요.....“ 그만, 그만해... 제발 그만해, 휴인아. “나요.... 죽는 줄 알았거든요.... 아니, 죽는 거 더 낫다고 생각했거든요... 나 지금 어지러워 미치겠는데요... 그래서 말도 제대로 안나오는데... 그 사이에 누나 데려가버리면....어떡해요....“ 울음소리가 터져나올 것 같아 입을 틀어막았다. “부탁할게요.... 나요, 태어나서... 누군가한테 부탁하는 거... 처음이거든요.... 그러니까 아저씨.... 누나 제발 데려가지마요....“ 금방이라도 돌아버릴 것 같은 나와는 달리 진한오빠는 냉정하게 중얼거렸다. “놔.” “...........” “빨리 놔, 이 자식아!!!!” 갖은 협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휴인이는 진한오빠를 놓아주지 않았다. “........시언이 아파. 빨리 병원 데려가야돼, 놔.” 하지만. 휴인이와의 실랑이 끝에 지친 진한오빠가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털어놓자마자 절대 풀리지 않을 것만 같던 휴인이의 손이 스르르 풀려버렸다. 아직 어린 내 남자친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건강이었던 것이다. 아직 어린 내 남자친구는... 그렇게나 멋진 사람이었다. 아니, 아직 어린 [관계자 외 출입금지]는 내가 만난 사람들 중... 소름끼칠 정도로 멋지고 미칠듯이 아름다운, 가장 눈부시는 아이들이었다. 78. 사랑 VS 성공 눈을 떴을 때, 내 앞에 보인 건 병원의 하얀 천장이었다. 환하게 켜진 병실의 빛 때문에 눈을 찡그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정신들어? 괜찮은거야?” 아직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내 몸을 부축해주는 건 바로 진한오빠. “영양실조 증세가 조금 있대. 탈수증에 빈혈까지.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저 머릿속이 멍할 뿐. “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나.... 또 쓰러진거야?” “내 발목 붙잡아대는 그 새끼 뿌리치고 나오자마자 너 또 쓰러졌어, 기억도 안나? 그러게 그런 곳에 있어봤자 너한테 득될 거 하나도 없다고 내가 말했었잖아. 연애놀음도 그만하고 그 새끼들 버리고 나와. 일단 며칠 입원해. 돈은 오빠가 내줄테니까.“ “필요없어, 그런거.” “내 말대로 해. 씨발, 그 새끼들 그냥 다 잡아쳐넣던가 해야지. 법대로 했으면 딱 좋겠는데 재벌아들이란 개새끼 때문에 이 지랄을 하고 있으니.“ ....... 있잖아, 비원이.... 오빠한테 개새끼라는 욕 들을만큼 나쁜 놈 아니야. ....... 있잖아, 그 애들.... 오빠가 다 잡아쳐넣을 수 있을만큼 쉬운 놈들 아니야. 나 그 애들 때문에 지금 미친듯이 힘들고 아픈 건 맞는데, 진한오빠.... 근데.... 그 애들을 죽고싶을 만큼 힘들고 아프게 만든 것도 나야. 진한오빠, 오빤 나를 버리고 선주린에게 가서 나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줬지만 그 애들은 그런 나를 위로하고 웃게 만들어줬어. 그러니까 내 말은... 나 그 애들 때문에 힘든데도, 오빠가 그 애들 욕하는 건 못듣겠다는 거야. 진한오빠의 말에 순간 화가 치밀었지만 간신히 차오르는 성질을 억눌렀다. 내가 화를 낸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진한오빠는 나를 더 미친사람 취급해댈테고, [관계자 외 출입금지]와 나를 떼어놓기 위해 무슨 수라도 쓸테니까. “여기 어디야....?” “대학병원 응급실이야. 일반병실로 옮겨서 안정 좀 취해. 1인실 예약해둘게.” “........ 재벌인 척 하지마. 역겨워.” 오빠 마누라가 재벌인 건 알겠는데, 그런걸로 거들먹거리지 말란 말이야. “옛날 남자친구 호의라 생각하고 받아들여.” “오빠 약혼녀가 싫어할텐데.” “주린이 착한 사람이야.” 나보다 똑똑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누구이든간에 묻고싶다. 있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난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해야하나요? 슬퍼야 하나요, 화를 내야 해요? 바보처럼 하하 웃어버리는 게 좋을까요? 난 그냥 지금 내가 미쳐버렸으면 좋겠네요. 멍하니 응급실의 칸막이로 걸어진 흰 천만을 바라보며 난 진한오빠에게 물었다. “근데 왜 왔던거야?” “..... 뭐가.” 오빠 또한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이었다. “우리집.... 아니, 내가 지금 살고있는 집에 왔었잖아. 갑자기 왜 왔냐구. 오빠가 예지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무슨 일에 처했는지 오빤 아무것도 몰랐잖아.“ 내 질문에 오빠는 대답하기 곤란한 듯 앞머리를 몇 번 쓸어올렸다. 그건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때마다 나타나는 오빠의 버릇이었다. “그냥, 궁금했어.” “....... 거짓말 하지마.” “진짜야. 괜찮나 싶었어.” “...............” “.........우리... 잤잖아.” 역시나. 그럼 그렇지. 오빤 내가 걱정된 게 아니야. 우리가 함께 잤다는 그 사실을 은폐하고 싶었겠지. 선주린이 그걸 알게되면 골치 아파지니까. 단지 나한테 입막음을 시키려 했던거야. “혹시라도 너한테 상처될까봐, 나 걱정 많이했다.” 맘에 안들어, 저런 말투. “나 멀쩡해. 그리고 그거 오빠 잘못 아니야. 나도 즐겼고, 우린 술김이었어. 선주린한테 입도 뻥긋 안할테니까 걱정마. 나 오빠 좋아하는 마음 접은지 오래거든. 오빠 차지하고 싶어서 오빠 약혼자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일러바치는 짓 안한다구. 그 더러운 짓 한 거 나도 후회하고 있고, 어디 소문날까봐 불안해 미치겠어. 그러니까 오빠도 그 일 입에 올리지마. 나 짜증나거든.“ 반은 진심, 반은 거짓이다. 그 때의 일을 잊고싶은 건 진심이다. 하지만 진한오빠를 완전히 다 잊었다고 말할 순 없다. 선주린에게서 진한오빠를 빼앗고 싶은 마음,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시언아, 내가 너 생각해서 말하는 거다. 그 꼬맹이, 형편없는 새끼야. 헤어져.” 진한오빠. 하지만 난 오빠를 다시 사랑할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어. 오빠를 보면 아직도 심장 한 켠이 아파오지만, 다시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사람은 그 꼬맹이야. 오빤 나를 실망시키지만, 그 애는 나를 감동받게 만들어. 있잖아, 오빠랑 사랑따위 하지 않을 내가 왜 선주린에게서 오빠를 빼앗고 싶은지 알아? “난....... 오빠가 불행했으면 좋겠어.” 난, 오빠가 불행하길 바래. 독기있는 내 말투에 진한오빠는 충격받은 듯 멍하니 서 있더니 고개를 돌려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어떻게 하든, 너한테 나는 죽일놈이겠지. 굳이 용서받을 마음은 없어.” “.................” “넌 내가 불행하길 바랄지 모르겠지만, 난 니가 행복하길 바란다.” “............ 거짓말.” “그러니까, 그 꼬맹이랑은 정리해.” “오빠, 그거 알아? 오빠는 술 취하면 진실만을 말해. 말 그대로 취중진담.” “.............” “오빤 내가 좋다고 말했어. 돈 때문에 선주린한테 가는 거라고. 선주린이랑은 결혼하고, 나랑은 사랑하면 안되겠냐고. 그 날 밤에 그랬어.” “정시언!!” “근데, 나 그딴 말에 감동같은 거 전혀 못 받았어. 오히려 짜증났어.” “..................” “그 짜증났던 일을 왜 다시 이렇게 이야기 하냐고 묻고싶겠지? 오빠 말이 거짓말인게 티가 나거든. 내가 행복하길 바란다고? 웃기지마. 오빤 그저 내가 다른 남자랑 사랑하는 게 싫은거야. 오빠한테 나는 ‘나 갖긴 싫고 남주긴 아까운’, 그런 여자거든.“ 정곡을 찔린 듯 오빠는 그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오빠가 한 말에 내 느낀 바가 없는 건 아니었다. 휴인이와 더 이상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은 힘든 일임에 분명했다. 이제 그 애들을 향해 웃어줄 자신, 난 없었으니까. 그 애들과 나는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셈이었다. 내가 그들을 욕할 자격은 없다. 나도 그 애들을 속인 스파이니까. “나 가볼게.” 내 손등에 꽂힌 링겔을 거칠게 빼냈다. “어딜 가?” 그러나, 삼류드라마에 나오는 청순가련한 여자처럼 이미 약해질대로 약해져버린 나는 곧 진한오빠에 의해 손목이 붙잡혀버렸다. “머리 좀 식힐 시간이 필요해. 잠시 쉬다가 생각이 정리되면, 다시 돌아갈거야.” “돌아가? 어딜? 어딜 돌아가?” “그 애들이 있는 곳으로.” 서로 상처는 받았지만, 난 그 애들을 버릴 권리 없어. 그들의 허락을 받고 그 속으로 합류했듯이, 헤어질때도 마찬가지여야 해. 내 마음대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는 없어. 물론 지금 당장 그 애들을 만나는 건 불가능해, 난 지금 너무 힘들거든. 한꺼번에 너무 많은 사실을 알게돼서, 이제는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겠어. “웃기지마. 다시 그런데로 돌아가게 내가 내버려둘 줄 알아? 나 지금 검찰청으로 다시 돌아가야돼. 같이 가자, 너희 아버지께 내가 부탁할거야.“ “걱정하는 척 하지마, 오빠가 뭔데!!? 오빠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정시언!!” “이건 내 일이야!!! 아무리 한심해 보여도 나!!! 내가 해야할 일은 하고말거야. 아버지한테 말하지마. 나에 대해서 한마디도 꺼내지말라구.“ 오랜만이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강력하게 내 의지를 전달하는 것은. 오빠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럼 약속 하나 하자.” “...............” “너희 아버지한테는 말 안할게. 대신 입원해.” “오빠!!” “........... 그동안 몸 많이 상했어. 그냥 겉으로 딱 보기에도 그래. 많이 말랐어.” “................” “일주일 정도만 입원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할 시간 필요하다며. 괜히 생각한답시고 이상한 데 가서 혼자 쳐박혀있지 말고, 병원에 잠자코 붙어있어. 니가 싫으면 오빤 병원에 안 찾아올게. 대신 병원에 전화해볼테니까 꼭 받아.“ “..............” “병원에서 퇴원한 다음에는, 다시 그 놈들 찾아가든.... 아니면 일 때려치우고 집에가든 니 마음대로 해. 난 상관안하도록 노력할테니까. 그 꼬맹이랑 계속 사귀든, 헤어지든.... 그것도 니 마음대로 해.“ 어울리지 않는다, 이렇게 무기력한 오빠 모습. “대체 나한테 왜이래? 왜 착한 척하고 난리냐구, 사람 짜증나게!!!” 이랬다 저랬다... 오빠도 날 혼란스럽게 만들어. “시언이 니 말이 맞아. 난 아직 너 좋아해. 그래서 이러는거야. 몸 상했으니까... 니가 병원에 있었으면 좋겠어, 몸 좀 추스르게.“ “...............” “그리고, 이건 나도 방금전에야 뼈저리게 깨달은 사실인데.” “.........................” “역시 나는 사랑보다는 성공이다.” “.........................” 오빤 최악이야. “니 말 그대로야. 난 니가 그런 새끼랑 사귀는 거 싫어. 아니, 그 놈이 아니라 그 어느 누구라도 시언이 널 건드리면 난 짜증날거야. 난 너 사랑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한테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어. 내가 주린일 어떻게 잡았는데, 그 애를 포기할 생각은 없다.“ “......................” “내가 이러는 건.... 단지 너한테 미안해서일 뿐이야. 그러니까 빚졌다고는 생각마.” 다들........ 날 비참하게 만드려고 작정한 사람들 같아. “...........너희 아버지께는 비밀로 하겠지만 너 챙겨줄 사람은 필요하겠지? 이온이한테 따로 연락해서 너 챙기라고 말할게.“ “.................. 꺼져.....” 내 눈앞에 다시는 안나타났으면 좋겠어. 오빠에게 나는 사랑놀이를 할 상대방에 지나지 않았던거야. 단지 게임을 즐기듯, 오빠에겐 사랑도 마찬가지였어. 오빠에게 제일 중요한 목표는 성공일 뿐이었으니까. 사랑에 모든 것을 다 걸어버린 나와는 달랐어. 이제 오빠 때문에 흘리는 내 눈물도 아까워. 비참해지면 비참해질수록, 머릿속엔 휴인이의 얼굴만이 떠오른다. 다른 골치아픈 일은 모두 접어두고, 그저 휴인이에게 안기고 싶은 마음 뿐. 휴인아,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있니.... 사랑과 성공 사이에서.... 너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니.... 79. 네가 떠난 자리 “영양실조 맞아?” “.............” “말도 좀 하면서 먹어, 이 인간아!! 안 뺏어먹어, 안 뺏어먹어!! 내가 너처럼 걸신들렸니? 하긴, 생각해보면 영양실조 걸릴만도 하네. 이렇게 잘 먹는 인간을 며칠동안 굶겨놓으니 영양보충이 잘 될 리가 없지.“ 병원밥을 다 축낸 후, 이온이가 사온 빵과 과자를 축내고 있는 나, 정시언. 진한오빠의 연락을 받은 뒤, 이온이는 하나뿐인 언니가 걱정되었는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병실안으로 뛰어들어왔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하루하루 식욕이 늘어가는 언니를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병원에 머물게 된 건, 벌써 5일째. 이온이가 걱정할까봐 밝고 쾌활한 척을 하고는 있지만.... 속은 이미 썩어 문드러졌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그 애들이 없는 내가 이 정도인데.... 걱정된다, 내가 없는 그 애들은 지금 어느 정도일지.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면.... ‘그래, 스쳐가는 여자였을 뿐이야’ 라고 한 번 중얼거리고는 원래 자신들의 생활로 돌아갔을까? 어느쪽이라고 해도... 서글픈 건 마찬가지다. “먹느라 바빠서 왜 영양실조 걸린 건지 말도 안해주네, 정말. 자꾸 이럴거야? 멀쩡하게 잘 살다가 왜 갑자기 영양실조 걸린건데, 응?“ 사실 저 말에 답해주기 싫어서 이렇게 볼이 미어터지도록 음식을 먹고있는거다. “그 범죄자 애들이 밥 안 줘?” 이온이의 앙칼진 물음. “아니, 밥은 주는데 새모이만큼만 주거든. 밥 더 달라그러면 화내더라고.” “그래서 영양실조 걸린거야?” “응, 배고파서 쓰러졌는데 마침 이검사님을 만나가지구.” “쓰러졌는데 이검사 아저씨를 어떻게 만나?” “....... 엉? 아, 그게... 길가다가 횡단보도를 지나가고 있었는데 쓰러졌단 말이지. 근데 마침 그걸 차타고 출근하던 이검사님이 보신거지.“ “그래? 근데 왜 아빠한테 언니 입원한거 말하지 말라는거야?” “..........그러니까.... 그게... 아부지 걱정하시잖냐!!!!!” 모두 박수칩시다, 정시언의 이 빛나는 임기응변을 축하하기 위하여!! 원래 잘 속지않는 이온이도 이번에만은 어쩔 수 없는 듯 내 말을 믿는 눈치였다. 수상쩍다는 듯이 눈을 살짝 흘기긴 하였지만 말이다. “맞다, 근데 언니!!” “왜.” “요즘도 그 애들 만나?” “그 애들이 누구냐?” “아, 왜, 있잖아. 랩하는 애들. 해커. 그 중에 혼혈아, 언니 걔랑 친해? 걔 여자친구 있대? 봤어? 나보다 이뻐? 어느 학교 누구래?“ 이온이의 입에서 나오는 해커.... 그리고 열음이.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유령이라도 본 듯이 모든 행동을 멈춰버리고 말았다. 무서운 감정을 넘어 이미 공포다. 이제 해커는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아, 몰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덕분에 애꿎은 동생에게 화를 내버렸다. 이쁜 내 동생의 아름다운 눈이 있는대로 찌푸려진다. 재수없는 년, 왜 쟤는 어떤 표정을 지어도 이쁜거냐, 짜증나게. “됐어, 나 갈거야.” 정이온 삐졌구나. “자고 가지?” “아빠가 의심하기 시작했다구. 어제도 병원에서 자느라 친구집에서 외박한다고 거짓말 했단 말이야. 학교 끝나고나서도 언니 만나러 오느라 정신없으니까 아빠가 물어보잖아. 요즘 남자친구 생겼냐구, 왜 그렇게 자주 나가냐구.“ ........... 아부지... 내가 이온이 나이때는 일주일 집에 안와도 그런말 안하셨잖습니까. .......... 그래요, 이온이는 이뻐서 걱정된다 이겁니까? 나는 밖에 내놔도 전혀 신경쓰이지 않았단 말이지요!!? 하긴, 어쩐지.... 고등학교때 가출했었는데 찾지도 않더라. 결국엔 지쳐서 내 발로 걸어들어왔는데 내가 없어진 줄도 모르고 계셨었지. “나 갈게.” 학교를 마치고 바로 병원에 들렀던 이온이는 교복매무새를 정리한 뒤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온아.” “왜?” “내일은 떡볶이랑 순대 사와.” “......................” “간 좀 많이 넣어달라 그래.” 어여쁜 한 떨기 장미같은 내 동생 이온이는......... 언니를 땅그지 보듯이 경멸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실밖으로 뛰어나가버렸다. 귀여운 년, 저래놓고서도 내일되면 떡볶이랑 순대를 잘 포장해서 까만 봉다리에 집어넣고 달랑달랑 들고오겠지. 나도 이제 그만먹고 좀 쉬어야지, 라고 생각하며 마지막 남은 과자봉지의 부스러기를 탈탈 털어 입에 넣고있을때였다. 내가 있는 1인실 병실 문이 다시 빼꼼히 열렸다. 뭐지? 의사랑 간호사는 이 시간에 병실에 안 들르는데? 틀림없이 이온이일거라 생각하고 과자봉지의 부스러기를 마무리하는데 여념이 없는 나. “뭐야, 두고 간 거 있어?” 우적우적 과자를 먹어대며 묻는 나. 그리고 그런 나에게.......... “떡볶이랑 순대는 내가 사주면 안되나?” ........................................ 휴인이 목소리다. 깜짝 놀란 내가 고개를 돌려 병실 문짝을 바라보았을 때. 난 내 청력에 이상이 없다는 걸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휴인이었다, 진짜 휴인이가 내 병실안에 들어와있었다. 그 옆에는 있는대로 인상을 찌푸린 비원이도 서 있었다. “나는 간 못 먹거든. 그러니까 내가 사주는 순대 먹으면 간도 누나가 다 먹을 수 있어. 우리가 주는 밥이 새모이만큼 적었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우리가 언제 누나가 밥 많이 먹는다고 화낸적 있었나? 오히려 환영이는 밥 많이 먹으면 좋아하는데. 누나 완전 거짓말쟁이야.” 많이 상한 얼굴로 씁쓸하게 웃으며 농담을 던지는 휴인이.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던 나는 갑작스러운 그들의 등장에 놀라 사래가 들려버렸다. “켁.... 케엑....” 딱딱한 과자가 목에 걸린 것 같아. 어렸을 때 눈깔사탕을 멋도 모르고 삼켜버렸을때랑 느낌이 비슷해. 답답하고,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나.......... “누나, 괜찮아?” 그러나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휴인이는 급히 내 옆으로 달려온다. 탁자에 놓인 물병을 집어들고, 유리컵에다 물을 따라 내 곁으로 내민다. 휴인이가 건네주는 유리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만지면.... 사라질 것 같아. 환상인 것 같아서... 나 널 만지지도 못하겠어. “빨리, 누나. 사래들렸을 때 물 마시면 좀 괜찮아질거야. 그러게 왜 급하게 먹고그래.” 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는 휴인이를 보며 마음을 가다듬고 유리컵을 향해 손을 내민다. 유리컵이 만져지는 걸 보면, 유리컵 안에 담긴 차가운 물의 온도가 느껴지는 걸 보면, 이거 꿈은 아닌 것 같아. 휴인아, 너 정말... 지금 내 앞에 있는거니? “........ 너... 여기... 왜.....” “누나 동생이 나갈때까지 기다렸어.” “......................” “보고싶어서... 올 수밖에 없었어......." 이온이가 내 동생인 걸 알고 있어. 난 고아라고 거짓말 했는데, 근데 너희들은 알고 있어. 역시 알고있었던거야, 내가 거짓말한 모든 것을, 내가 스파이란 사실을, 너희는 모두 다 알고있었어. “데리러 왔다고 하면.... 누나가 화낼까?” “.......................” “아무 생각도 안하기로 했었잖아.” “.............휴인아....” 딱 붙어버린 입술을 달싹여 발음해보는 휴인이란 이름. 미친듯이 그리웠던 그 이름. “있잖아, 남자랑 여자가 사귀다 헤어지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어.” 기억이 난다. 진한오빠와 약혼한 여자가 선주린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녀에게 물을 퍼부은 날, 서럽게 우는 나를 향해 휴인이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남녀가 사귀다 헤어지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지구가 자전하고, 사람들이 공기로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라고. “근데 아니더라, 누나. 직접 겪어보니까 아무것도 아닌게 아니더라.” “..................” “................참지 못해서 올 수밖에 없었어, 견딜 수가 없어서.” “......................” “나... 이해해줄수 있어, 누나?” 휴인이 눈에 점점 눈물이 고인다. 눈을 한번 깜빡이기라도 하면 눈물이 떨어질 것처럼. 바보같은 정시언은 손을 뻗어 그의 눈을 만져주지도 못하고... 병신처럼 고개만 끄덕끄덕. “누나가 경찰에서 보낸 스파이라는 거, 알고있었어. 누나한테 멀쩡한 가족 있는것도 알고있었고, 누나가 다니는 대학이 어딘지도 알아. 누나가 충격받았을 거 알아. 우릴 죽이고 싶었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어.“ 아니, 너희를 미워한 적은 없어. 맹세코, 단 한번도 없어. “그래도 우린 믿었거든. 누나가 스파이인거 알아도, 우린 누나 진짜 좋아했어.” .....휴인아.... “이제.... 아무 생각도 안하고 사귀자는 그런 제안, 안할게. 누나 마음대로 아무생각이나 해도 돼. 우릴 잡아쳐넣고 싶으면 잡아쳐넣고. 우릴 살려주고 싶으면... 살려주면 돼. 우릴 죽이든, 지키든... 우린 가만히 있을게. 그러니까.... 돌아와주면 안돼? 나랑 안 사겨도 좋으니까... 와주면 안돼?“ 목이 메어 아무말도 나오지 않는다. “해커 애들.... 활동 중단하기로 했대. 누나 뒷조사 하는 사람, 이제 아무도 없어.” ...........바보들.... “누나도 알겠지만 우린 범죄자야. 되도않는 영웅심리에 사로잡힌 건지도 몰라. 우린 언제나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어, 앞으로도 그럴거야. 누나는 우리 중에서 주동자랑 재벌아들 찾고있는 거, 알아.... 그게 누군지 가르쳐줄 순 없어. 왜냐면, 그건 우릴 지켜줄 수 있는 마지막 비밀이거든. 누나가 이미 알았는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 “미안해, 누나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놈들이 되어버려서.”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르겠지만.... 미친듯이 눈물이 흘러내린다. “우린 범죄 저질러서 돈을 모았어. 한달에 100만원, 200만원..... 어려운 사람을 돕고싶었거든, 환영이랑 내 동생처럼 불쌍한 사람들 도와주고싶어서. 그래서 고아원이나 복지관에 우리 돈을 몰래 가져다주고 그랬어. 대놓고 가져다 주지도 못했어, 범죄 저지른 돈이니까, 더럽다고 생각할까봐. 그래서 항상 새벽에 몰래 돈 가져다놓고 그랬어. 우린 그렇게 살아왔어, 누나.“ 알아, 너희 착한 애들인거.... 내가 왜 그걸 모르겠어. “근데, 모든 게 멈췄어, 누나가 떠난 후로.” 80. 비난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 때문에 볼이 젖어버렸다. 나로 인해 그들은 많이 힘들고 불안했을 것이다. 무섭다, 나라는 존재가 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을까 생각해보니 소름이 끼친다. 그들이 나를 중요한 존재로 여기는 것 같아 고맙지만.... 앞으로도 이렇게 서로를 소중하게 생각해도 될까. 극과 극의 생활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진실한 사랑과 우정이란 감정이 존재할 수 있을까. “민서도 따라오겠다고 했는데... 그 애 성격상 난동 부릴거 뻔하니까... 이번엔 사정사정해서 떼어놓고 왔어, 민서 혼자 두면 또 일 저지를까봐 환영이한테 감시하라고 시키고... 비원이랑 나만 여기 온 거야.“ 너 하나로 족해, 휴인아. 미치도록 보고싶었던 건 솔직한 내 진심이지만 사실 너희 얼굴을 보면 볼수록 나는 너무 아파. 여느때와 같았으면 휴인이가 내 눈물을 닦아주거나 먹었을텐데도 불구, 그 놈은 그저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자기 자신의 상심이 너무 큰 나머지 제대로 나를 바라보지도 못하고 있는 듯 했다. 아마 내가 우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휴인이는 지금 쓰러지기 직전의 사람처럼 보였다. 나보다도 심각한 상태. 지금 서서 말하는 것조차 힘든 상태. 그가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반면에 비원이는 굉장히 화난 표정. 나에게 화가 난 걸까. [관계자 외 출입금지] 중에서 제일 감정 절제를 잘하는 비원이로서는 내가 미웠겠지. 나로 인해 휴인이, 환영이, 민서의 모든 생활리듬이 다 깨져버렸을 테니까. 친구들을 그 정도로 망쳐버린 내가 짜증났을 것이다. “돌아가자..........” 휴인이가 쥐어짜내듯 힘겹게 꺼낸 한마디. 누군가가 내 심장을 도려내는 것처럼, 미친듯이 아파온다. 너도 알면서, 우리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는 거... 그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모든 걸 포기해도 좋아.” “................” “우리들은 목숨을 걸었어, 누나한테.” “...............” “그러니까.... 버리지만 마..... 우리 무섭거든, 누나.... 또 버려지는 거.... 무서워서 미치겠거든... 그러니까 제발, 제발 와 줘. 우리곁에 있어줘....“ 가고 싶어, 나도. 나도 너희들과 함께 웃고, 함께 느끼고, 함께 즐기고 싶어. 하지만 휴인아, 난 너희에게 독이 될 뿐이야. 검찰은 지금 우리의 이런 감정을 이용하려고 하고 있어. 나 때문에 너희들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꼴, 나중에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될텐데. 그런 미래를 뻔히 알면서 내가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너희한테 갈 수 있겠어? 무엇보다 두려운 건 나야. 검찰도 무섭고, 너희도 무섭고, 해커도 무섭고, 나 자신조차도 무서워. 지금 이 정도에 아파하면 안되는데. 우리 나중에 더 아파질텐데, 그러니까 이 정도에 아파하면 안되는데. 나중에 어떡하려고 그러니, 정말.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진다. 하지만 마음을 독하게 먹고 힘겹게 한마디를 꺼냈다. “.........미안해.” 그냥 기다리지, 내 마음이 정리될때까지 조금만 기다리지. 왜 먼저 나타나서 사람 속을 뒤집어놓니. 이런 상황이 되면 내 머릿속은 마비되어 버린다. 그 어떤 결정을 내리기도 힘들어진다. “나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영화나 드라마나 만화보면, 이런 대답하는 여주인공들이 죽일만큼 미웠었는데, 이런 말이 내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진실을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알아, 내가 먼저 너희 건드린 거. 그 때문에 미안해서라도 지금은 못 가. 아니, 지금 이런 식으로 너희를 따라가면.... 나 절대 다시 못 웃을거야. 계속 너희한테 짐만 될 거라구.“ “.................” “내가 먼저 웃으면서 너희들을 찾아갈 수 있을때까지.... 기다려주면 안되겠니.” “.................. 누나......” “너희들은 나를 받아들여줬어. 그럼 나도 그 호의에 답을 해줘야지. 치사하게 먼저 꽁무니 빼는 짓은 안할게. 내가 먼저 다가갔는데 먼저 사라지면... 너희들 굉장히 외롭게 만드는 거잖아. 알고 있어, 그러니까 돌아갈거야. 어쨌든 지금 누나가 있어야 할 곳은 거기니까. 그러니까... 너희들도 그렇게 믿고 무기력하게 쓰러져있지 마.“ 내 말을 듣고있던 휴인이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떨구어졌다. “씩씩하게... 기다려줄 수 있지, 휴인아?” 가까스로 눈물을 참으며 묻는 나. 그리고 보일듯 말듯 고개를 끄덕이는 휴인이. 지금의 내 대답이 휴인이에게는 상처가 되었을 수도 있다. 지금 함께 가자는 그의 제안을 내가 거부한 셈이니까. 하지만 나는 시간이 필요했다. 앞으로의 내 행동을 결정할 시간, 내 생각을 정리할 시간. “그럼 나 갈게, 누나. 집에서 기다릴게.” 짧게 중얼거린 휴인이는 재빠르게 병실밖으로 뛰어나갔다.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 싫어서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행동인듯 싶었다. 그를 잡고싶었지만 내 손은 이불끝자락만을 꼭 쥐고있다. 손에 땀이 베어나온다. “씨발............” 그리고 들려온 목소리는, 아직도 병실 한쪽의 벽에 기대있는 비원이의 음성. 며칠만에 듣는 비원이의 목소리는 예전보다 더 차가워져있었다. “너 놀랐을 거 알아. 그래도 큰맘먹고 찾아온 저 새끼 이렇게 보내는 건 심하지않냐.” 비난조의 말투. 난 애써 침착함을 가장하며 창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너희만 힘든거 아니야. 나 좀 이해해줬으면 해.” 냉정하게 말을 꺼내자 곧이어 비원이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넌......... 우리 이해하냐?” 처음이다, 저렇게 차가운 말투. 비원이의 말투는 놀랄만큼 무서웠다. 비원이와 처음 마주쳤을 때도 저 정도로 냉정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신비원.....” “니가 우릴 이해한다면, 적어도 니가 어디있는지 정도는 알려줬어야 하는거 아닌가. 너 기다리다가 몸이 굳어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그 새끼들.... 어르고 달래느라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고는 있냐. 버림받고 배신당하는 걸 밥먹듯이 당한 새끼들이다. 나는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지만, 저 새끼들은 당할때마다 아파해. 난 니가 한 짓이나 우리가 한 짓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 왜 용서를 비는 건 우리쪽이어야 되는거냐.“ 무거운 돌이 내 머리를 쿵, 하게 세게 치는듯한 충격이 몰려왔다. “너도 우리 뒷조사를 했고, 우리도 니 뒷조사를 했다. 니 뒤에는 검찰이 있고, 우리 뒤에는 해커가 있었지. 니가 진정으로 원한게 뭐였지? 우리가 힘없이 당하는 거? 그거냐? 우리가 너 때문에 범죄자로 잡혀가면... 넌 우리한테 빌 생각이었냐? 아니면.... 그런 우리들 보면서 깔깔대고 웃을 생각이었나? 언제나 세상에 상처만 받은 우리가.... 자기방어 차원에서 니 뒷조사 좀 한 게... 너한테 그렇게 비참하고 눈물나고 짜증나는 일이었냐? 너도 뒤에서는 똑같은 짓 하고 있었으면서... 왜 아픈척은 너 혼자 하냐. 어리다고 생각했던 해커가 우리 뒤에있으니 놀랐나? 차라리 우리 입에서 듣고싶었어? 해커한테 대신 전해들으니 뒤통수 맞은것 같았어? 넌 나중에 우릴 잡을 생각이었겠지만, 우린 살기 위해 필사적이었어!!! 결국 나중에 상처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우린데!!!!!!! 왜 니가 쳐우냐고!!! 왜 니가 아픈 척이야, 니가 뭘 어쨌는데!!!!!“ ................비원이 말, 하나도 틀리지 않았어.... 다 맞는 말이다..... “지금 우리한테 오면 못 웃을것 같다고? 그래서 못 오겠다고? 웃기지마, 니가 정말 우리를 생각했으면 병원에 갇히자마자 튀어나와야 했어. 너 하나 때문에 목매는 저 새끼들 생각에 안쓰러워서!!! 바로 우리한테 와야했어. 지금 니가 무슨 말을 하든 변명일 뿐이야. 넌 우리한테 와서, 억지로라도 니 미소를 보여줘야 했어. 이렇게 아픈 척 하지말고!! 니가 먼저 와서 그 새끼들 위로해줘야 하는거라고!!!“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어진다.... “우리가 왜 니가 돌아올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거냐.... 니가 먼저 우릴 기다린 적은... 있긴 있었냐....? 무의식중에 너도 우리보다 너 자신을 우월하게 생각하고 있었던거지? 넌 우리를 기다리지 않으면서... 왜 우리는 너를 기다려야 되냐.“ ........... 머리가 아프다. “웃기지도 않는다. 꽁무니 빼는 짓은 안하겠다고? 차라리 도망치고 싶다고 말해. 차라리 그 말이 더 인간적이다. 니가 지금 여기 숨어있는 건.... 그건 꽁무니 빼는 짓 아닌가? 니가 한번도 연락안하는 바람에.... 강휴인이랑 나랑 병원 몇 개를 뒤졌는지 알고는 있냐? 백민서가 몇 번 실신했는지 알고는 있냐? 지환영은 먹은 것도 없으면서 미친듯이 게워내기만 한다. 정에 약한 놈들이야. 너 때문에 신경쓰여서 아무것도 못하고있다고!! 근데 기다리라고? 무기력하게 있지 말라고? 그럼 나도 충고 하나 하자, 너도 무기력하게 있지마, 꼴보기 싫으니까. 니 말대로 니가 먼저 우릴 건드렸는데.... 왜 먼저 사과하는 건 우리인거냐. 너 병실에 누워서 잘 먹고, 잘 자고 있을동안.... 강휴인, 지환영, 백민서... 한 끼도 못 먹고, 한 숨도 못 잤다.“ “...................” “차라리 귀찮다고 말해, 싫다고, 짜증난다고 그렇게 말해. 헛된 희망주지말고!!!” “아니야, 난 정말 너희들을!!!!” “아직도 모르겠냐????” 병실이 울릴만큼 크게 소리지르는 비원이. “해커가 활동중단 했다는 게, 무슨 뜻인지 넌 감도 못 잡고있지????” “....................뭐?” “.........우리가 잡힌다는 말이다.” “.................비원아....” “우리가 검찰한테 잡힌다는 말이라고.....” 맙소사.... 나 때문에... 고작 나 하나 때문에... 너희들 무슨짓을 저지른거야? “니 손에 달렸다고, 우리가 철창에 처박히든, 외국으로 잡혀가서 감금되든.... 지금 다 니 손에 달린거라고.... 그런데 그 새끼들 너한테 살려달라고 했냐? 제발 잡히지 않게 해달라고 했어? 그런말 한마디도 안꺼냈어. 놈들이 바라는 건 단 한가지야. 그냥 너보다 돌아와달라고 했어. 자신들과 함께 있어달라고. 니가 우리를 죽이든, 살리든!!! 너한테 주어진 한달만 함께 해달라고!!!“ “............ 비원아.............” “우린 너를 위해 목숨을 내놨는데..... 너는 우리를 위해 뭘 하고있는거냐, 정시언......” 바로가기 Daum 카페 음악샵 내 블로그 내 메일 내 쪽지 인터넷소설닷컴 cafe.daum.net/youllsosul 훈장(공개) | 회원수 947,214 카페정보내 정보 가입 111 방문 18444 새글 251 카페지기 [주인]유리 개설일 2002.01.22 프로필 수줍은미소☆ 수정 쪽지 0통 메일 50통 내 글 반응 내가 쓴 글 작성중이던 글이 있습니다. 휴대폰 카페 카페 초대 회원 보기 소모임 바로가기 -------------- [소모임 만들기] 카페 ON (미사용중)채팅 카페 탈퇴 퍼옴- 퍼옴완결방 책임운영자 : 영계 (stylehyejin@hanmail.net) 최신목록 목록 윗글 아랫글 [[　　로맨스]] [청몽채화] 관계자 외 출입금지 81 - 100 글쓴이: [퍼옴·반휘] 조회수 : 20670 08.08.01 13:34 http://cafe.daum.net/youllsosul/KRDt/10639 ▷▶▷▶▷▶▷▶▷▶▷▶▷▶▷▶▷▶▷▶▷▶▷▶▷▶▷▶▷▶▷▶▷▶ 작가 : 청몽채화 감상주실곳 : khyem87@hanmail.net 작가 카페 : http://cafe.daum.net/chaehwa (┗BlueDream┓채화) 작가 버디 : 하얀다섯 ▷▶▷▶▷▶▷▶▷▶▷▶▷▶▷▶▷▶▷▶▷▶▷▶▷▶▷▶▷▶▷▶▷▶ ┗BlueDream┓채화 http://cafe.daum.net/chaehwa 많이 가입해 주세요 ^^♡ ▷▶▷▶▷▶▷▶▷▶▷▶▷▶▷▶▷▶▷▶▷▶▷▶▷▶▷▶▷▶▷▶▷▶ 81. 결심 미친놈들, 정말 바보같은 놈들. 비원이 말을 듣고 있을수록 참을 수가 없다. 나는 그들을 생각하는 척하면서... 결국은 나 자신만 챙기고 있었다. 그 애들을 걱정하는 척하면서..... 결국은 나 혼자만 편하게 지내고 있었다. 점점 손이 떨려온다. 비원이는 그런 내 손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조용하게 중얼거린다. “한달이 점점 흐르고 있는 것도 미치겠는데.... 함께할 시간이 짧아져서 그 놈들 다 애태우고 있는데... 그런 우리더러.... 넌 고작 기다리라고.....? 그것도 씩씩하게?” 할말이 없다. 정시언, 아니, 나라는 인간, 진짜 웃긴다. 그동안 혼자 비련의 여주인공인 척 한 거야? 그들은 나를 위해 인생을 포기해줬는데... 난 버린 것도 없으면서.... 그 애들을 위해 내 자신을 희생할 각오도 안했으면서... “너희들은......... 정말 왜 그러는거야....?”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비원이에게 묻는다. “.............. 이런 상황에선.... 제발 떠나달라고 말하는게 정상 아니야? 사실을 다 알았으면 나가떨어지라고..... 우리도 너한테 실망하던 참이었다고... 욕을 한 바가지 퍼부어야되는거 아니냐구, 나한테.“ “.......................” “아니면... 간절하게 부탁을 해야지. 처절하게 울면서... 잡히지 않게 해달라고. 제발 도와달라고, 검찰에게 잡히면 안된다고..... 그동안 너희가 훔친돈은 사실 모두 좋은 일에만 쓰여졌다고.... 그렇게 진실을 말해야지.“ “..........................” “근데 이도저도 아니고.... 그냥 나한테 돌아와 달라니..... 그게 말이 돼? 바보도 그렇게 행동하진 않을거야.... 정말 왜 그러는거야......“ 아까 휴인이를 앞에 두고 눈물만 줄줄 흘려댔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않게... 비원이 앞에서 펑펑 울고있는 나, 정시언. “[관계자 외 출입금지]잖아... 너희들 세계에 그 누구도 발을 쉽게 들이게 해선 안되잖아!! 누구든 경계하고, 누구든 믿지 말아야지!!! 왜 나같은 년한테!! 너희한테 불순한 의도로 접근한 나한테!!! 내가 뭐라고 나한테 그렇게 잘해주냐구!!!!!“ 이제 도리어 내가 성질을 내고있다. 그들이 너무 바보같아서, 내가 너무 미안해서.... 화를 내지않고는 견딜수 없을 것 같다. “원래 우리같은 놈들일수록..... 정에 약해.” 비원이는 내 우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냉정한 목소리를 집어넣고 평소때처럼 무심한 듯하지만 따뜻함이 묻어있는 본래의 음성으로 대답해주었다. “밑바닥에서 구르면.... 그 누구도 우리에게 다정하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아. 넌 우리에게 다가와줬어, 비록 거짓이라 해도.... 웃어줬고, 함께 있어줬고, 지켜줬고, 아껴줬고, 사랑해줬어. 니가 정말 형편없는 애였으면 휴인이나 민서가 너를 사랑하지도 않았을거야.“ “................ 못 가......” “.................... 정시언.......” “니들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면 난 더더욱 못가. 나 자신이 없어, 비원아... 내 손으로 너희를 검찰에 넘기면.... 그보다 아픈 게 어딨어.... 그렇다고 너희를 지켜주기에는... 난 너무 부족해.... 난 힘이 없어.... 너희도 중요하지만.... 하지만.... 이건 우리 아버지가 나한테 맡긴 일이야.... 내가 너희를 잡아넣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어.... 내 마음이 언제 어떻게 흔들릴지 나도 모른다구!!!!!“ 숨도 못 쉴만큼 꺽꺽대며 울고있다. 이제 나,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 비원이는 잠시동안 아무말이 없었다. 잠시 후, 내 머리위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비원이는 자신의 큰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우리는.... 어리지만..... 어리석진 않아.” “...................” “확신할 수 있어, 정시언? 우리중에 누가 주동자이고, 누가 재벌아들인지.” “.....................” “확신할 수 있을때까지, 그때까지 일단 덤벼봐. 아무 생각하지말고. 친구들이랑 게임한다고 생각하고, 뒤에 일은 잠시 접어두고. 일단 맞추는 데만 신경을 집중해.“ “........................” “넌 추리소설 주인공이야. 우리가 장치해놓은 많은 비밀을 풀어나가는거야. 그 소설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작가한테 미뤄두고, 너는 추리만 하면 돼.“ 내가 너희라면... 그렇게 웃어줄수 있었을까? 나를 향해.... 그렇게 웃어줄 수 있을까? 하나같이 눈부셔, 그래서 난 너희들을 바라볼 수도 없어. 신비원, 제일 건방지고 깐깐하게 군 주제에... 그렇게 나한테 웃어주지 말란 말이야. “그 뒤는.... 운명에 맡기자.....” “무서워... 난 무서워, 비원아.....” “우리가 있잖아.” “넌.... 무섭지도 않아?” “.......... 남자잖아.” “어린 주제에... 다들 바람만 잔뜩 들어서... 허세 부리지마.... 개폼만 잡구....” “우리한테 무서운 건 너밖에 없다.” 비원이는 대수롭지않게 대답하며 옆에 있는 티슈통을 집어들어 내게 내밀었다. 나는 추한 내 몰골을 가리기위해 휴지를 마구 뽑아 얼굴을 벅벅 문질렀고, 그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있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사실은 무서웠어.” “..................”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거든.” 아, 설마... 소주먹을 때 이야기하던.... 그 여자? “그 여자만 있으면 바랄 게 없었어. 세상이 무서웠어, 우리를 끝까지 방해할까봐. 이번만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미친듯이 하늘한테 빌었지. 그 여자의 가명이 하늘이었거든. 그 여자는 내 하늘이었어. 너무 사랑했으니까... 지켜주고 싶었어. 근데 그게 안되더라, 날 저주했어. 나중엔 미치겠더라, 아무것도 못하는 내 자신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 “근데 죽은 건 내가 아니라 그 여자였어. 내가 죽인거지. 내가 지켜주지 못해서 그렇게 된거야. 그 때의 난 지금보다 더 어렸었거든. 해줄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어. 못난 남자... 아니, 그냥 못난 꼬맹이였어.“ 다들 아픈 상처 하나씩을 가지고 있다. 나, 이런 아이들에게 다시 돌아가도 괜찮은걸까? “그 여자가 죽고 나니까, 이제 무서운 게 없더라. 더 잃을게 없었거든.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도 모르겠고, 내 하늘은... 사라졌고.“ 비원이한테... 이런 사연이 있었구나. 재벌아들이라 힘든 거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 여자랑은 왜 헤어져야만 했던걸까, 신분차이가 너무 컸나? “그냥 자살하려고 했어, 그 여자 뒤를 따라서... 나도 같이 죽어버리려고.” “.............. 비원아.....” “근데 그 때 정말 말 그대로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치대? 그거 무시하고 자살했다가는 나중에 하늘에서 엄청 혼날 거 같더라고. 그래서 결심했어. 일단 살아보자고. 숨은 쉬어보자고. 내 삶의 질이 어떻게 되던지, 진흙탕에서 뒹굴든지, 비단이불에 휘감기던지. 일단 살아보자고.“ “................” “그러다가 이 애들을 만났어. 강휴인, 지환영, 백민서. 지금 내 삶의 가치는 이 애들뿐이야. 그 애들을 웃게 만들어줘서... 너한테도 고마워. 그 여자는 못지켜줬으니까... 너희들은 어떻게든 지켜보려고.“ 정말 멋있는 놈. “그러니까.... 너도 강휴인한테 잘하라는 소리야. 서로 사랑하잖아. 잃고나서 미친듯이 후회하고, 아파하느니... 사랑할 수 있을 때 마음껏 사랑하는 게 더 나아. 나는 니들 보면 시간이 아까워서 미치겠는데... 왜 망설이냐, 재수없게.“ 나와 휴인이를 위해 자신의 아픈 상처까지 들춰내준 비원이. 덕분에 나는 용기를 내어 한마디 꺼낸다. “............휴인이.... 아파보이더라.” “감기 지독하게 앓았어. 미친놈이 죽어도 방안에 안들어가잖아. 조금만 밖에 더 있었어도 동상 걸렸을 거야. 걱정마, 그 새끼 강철체력이니까.“ “..............환영이는...? 진짜 먹은것도 없으면서 게워내기만 해?” “구토하는 건 맞는데.... 원래 이것저것 신경 많이 쓰는 놈이라... 솔직히 조금만 뒤틀리는 일 있어도 게워내고 그래. 그래도 다른 놈들 챙기려고 아픈 티도 안내고 버티고 있어. 아직은 괜찮아.“ “................민서는....?” “몇 번 쓰러졌었어. 그래도 제일 나은 편이야. 쓰러지는 바람에 따뜻한 방 안에 던져놨었거든. 일어서지도 못해서 얌전히 방 안에만 누워있다보니까 지금은 멀쩡해.“ “.................. 너는?” “...........사흘.” 응? 뜬금없는 비원이의 대답에 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더는 못 참을 것 같애.” “............. 무슨 소리야?” “잠도 안오고, 손도 떨려서 가끔 물건 떨어뜨리고, 말 더듬기도 한다, 바보처럼.” “왜?” “왜라니, 금단증상 모르냐?” ................... 말도 안돼.............. “너 정말.... 그 때 이후로.... 담배 안 핀거야?” “한다면 한다니까.” “너 골초잖아!!!!” “그러니까 앞으로 사흘이 한계라고!!!” “내가 담배 펴봐서 아는데, 임마. 그거 천천히 끊어야지, 확 끊으면 너 죽는다!!” “아, 진짜 더럽게 말 안 통하네.” “끊으면 좋긴 한데, 그래도” “그러니까 돌아오면 되잖아, 병신아.” “응?” “나도 휴인이 옆에 딱 붙어앉아서 씩씩하게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 “사흘안에 돌아와라.” “...........비원아....” “사흘안에 안 돌아오면 나 그냥 담배핀다. 내 입에 담배 물리는 순간까지 너 내 눈 앞에 안 보이면..... 그 후로 그냥 너 쌩깔꺼다.“ 진짜 짜증나... 멋진 척 좀 그만 하라니까..... “그럼 나 간다.” 기지개를 펴며 병실문을 열던 비원이는 잠시 멈칫 거리더니 중얼거렸다. “아, 그리고 이거..... 휴인이가 말하면 죽인다고 했는데.... 그냥 말해줄게.” “............. 응?” “............강휴인 손에 붕대 감긴 거 봤냐?” “..................... 아니.....” “그래, 다음에 보고, 그거 꼭 좀 챙겨줘.” “............... 다쳤어? 왜?” “니 전 남자친구가 밟았어.” 순간, 핑 도는 머릿속. “뭐?” “그 잘나신 검사새끼가 강휴인 손 밟았다고. 너 데려가지 말라고 휴인이가 그 검사 바짓가랑이 잡고 있었다며. 너 병원에 데려놔야 된다고 해서 결국은 놔줬는데 그 뒤에 바로 니가 정신 잃었다더라. 이때다 싶었는지 그 새끼가 강휴인 손 밟고갔다고.“ “......................진.... 짜야?” “우리가 있었으면 죽여놓는건데, 다 추워서 웅크려 자고있느라 어떻게 할 수도 없었네. 휴인이도 말리더라, 너 곤란해진다고, 그 검사한테 손대지 말라던데. 강휴인 그 새끼 그냥 너 보냈다고 민서한테도 존나 얻어터졌어. 다음에 보면 잘해줘.“ 그 말을 남기고는 병실밖으로 나가버리는 비원이. 이진한.... 너 진짜..... 치밀어오르는 감정에 한숨을 깊게 내쉬며 곧추세운 무릎 속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고, 물러설 마음도 없다. 부딪쳐야 한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그들이 있는 곳이 내가 있을 곳이다. 82. 제자리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지금 병실에 가만히 앉아있을 때가 아니라구. 이 시간에도 나를 애타게 기다리는 놈들이 있다. 그것도 네 명이나. 손가락에 힘을 주며 단축번호 1번을 꾸욱 누른다. 그리하여 연결되는 건- [대장님] 그렇다, 나에게 있어 ‘대장’이란 존재는 우리 아부지다. 기본 컬러링으로 제공되는 비발디의 사계 중 봄이 지루하게 울려퍼질 때.. - 여보세요? 우리 아부지의 투박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랜만에 마주한 아부지의 목소리에 왈칵 눈물이 흐르려 했으나, 기를 쓰고 참으며 애써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부지!! 잘 지내셨어요?” - 아, 그래. 시언아. 안 그래도 잘 있나 한 번 연락하려고 했는데. 가끔 집에 전화도 하지. 그렇게 바쁘냐? “...... 그냥, 하루종일 애새끼들 감시하다보니까...” - ...... 힘드니? 아부지의 지친 음성. 걱정이 잔뜩 묻어있다. 난 뭐라고 말해야 할까. 힘들다고 말하면 아부지는 괴로우시겠지? 멀쩡한 딸 고생시킨다고. 아니, 그 뿐인가? 그냥 범죄자 잡는건 혼자 다 감당하겠다고 말하시면서 나를 당장 집으로 불러들이실수도 있다. 그렇다고 즐겁다고 말하면... 범죄자들이랑 깔깔대며 노는 딸을 상상하시면서 한숨이나 푹푹 내쉴테고... “아뇨. 아부지..... 나,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놈들을 지키기 위해서도, 검찰의 스파이로서도. 나...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할 거예요. “근데요, 부탁이 있어요.” - 그래, 뭐냐? “차가 필요해요.” 방법은 이것 뿐이다. 그 애들과 다시 웃으면서 볼 수 있는 방법. - 차? “네, 계속 필요한 건 아니구요, 한 일주일 정도만 사용할게요. 아부지 차 빌려주셔도 되고, 아니면 렌트하게 돈 좀 보태주세요. 이번 일 해결하려면.... 꼭 필요해서 그래요, 아부지.“ 내 말투는 확고했고, 아버지는 웬만하면 딸의 부탁을 거의 들어주는 편이었다. - 김반장이 차를 바꿀 모양이던데, 지금 차는 폐차할 계획이라고. 일주일만 쓸 거면 조금 오래된 차라도 괜찮지 않겠냐? 물론 나도 면허는 있다. 장롱면허라는 게 문제지만. 어차피 좋은 차 가지고 다니다가 흠집내느니, 폐차직전의 차를 끌고 나가는게 더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 그거라도 괜찮아요. 내일 가지러 갈게요.” - 오냐, 그럼 내일 보자. 아부지와의 통화를 마치고 벅차오르는 심정을 가라앉히려 한숨을 내쉬었다. 기다려, 아주 조금만 기다려줘. 휴인아, 환영아, 민서야, 비원아. 내가 갈게, 다시는 도망치지 않을테니까, 기다려줘. [언니는 퇴원한다. 떡볶이랑 순대는 필요없다.] 이온이에게 멋지게 문자를 한 방 날려주고서 방금 벗어던진 병원복을 곱게 개고 있는 정시언. 병원을 나갈 생각에 싱글벙글. 아니, 곧 [관계자 외 출입금지]를 만날 생각에 이렇게 기쁜 건지도 모른다. 어제 비원이를 만나고 난 뒤, 거짓말처럼 몸이 가뿐해졌다. 기지개를 한 번 켠 뒤, 심호흡 하고서 병실 밖으로 나가는데....... “어머,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걸렸다, 간호사한테. “예? 아니, 저기, 그게..... 퇴원하려고요.” “....... 퇴원은 내일이신데요.” “예, 근데 오늘하려구요.” “내일까지 예약이 되어있으세요.” 내가 예약한 거 아니라구요, 이진한이 지 맘대로 한거지. “돈은 이미 냈으니까 상관 없잖아요, 환불 안해주셔도 괜찮아요.” 이제 진한오빠, 가진 게 돈 뿐이거든요. “아니, 그래도” 간호사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긴긴 복도를 마구 휘달리는 나. 이럴 땐 그냥 튀는 게 상책이다. 답답한 병실 밖으로 나왔을 때, 날 반긴 건 눈부신 햇살이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웃음을 닮은 그 햇살. 어제까지만 해도 세상은 내게 무서운 것 투성이였다. 한없이 잔인하고, 내게 상처만 주는 두려운 공간.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내가 애타게 보고파하는 사람들이, 애타게 나를 기다리고 있다. 급하게 택시를 잡아타고 검찰청으로 향하는 중에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햇살과 마주해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할 두 소녀들. 환희와 유인이. 나중에 내가 내 손으로 [관계자 외 출입금지]를 감옥으로 처넣는 한이 있더라도, 환희와 유인이만은 꼭 지켜줘야 했다. 그건 내 의무나 다름없다. 휴인이나 환영이, 그 두 사람과 손가락 걸고 약속한 적은 없지만 느낄 수 있다. 그건 굳이 말 안해도 당연한 일이었으며, 나로서도 그 일이 성가시거나 불편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환희도, 유인이도 앞으로 웃을 날이 더 많아야할 소녀들이다. 그 웃음을 지켜주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휴인이나 환영이가 죄값을 받아야 할 날이 온다면 그 동생들이라도 내가 지켜줘야 했다. 이온이가 평범한 여고생으로 즐겁게 지내고 있는 것처럼, 꼭... 그 아이들도, 내 온 힘을 다 바쳐서, 지켜야만 했다. “이거 시동은 걸려요?” 김반장님의 차 상태는 심각했다. 이건 말 그대로 폐차 직전의 차라고나 할까. 아니, 그 말도 감지덕지다. 이런 건 그냥 똥차라고 하는거다. “그럼, 씽씽 잘 달린다구. 이래봬도 이 차 별명이 한 때는 치타였어, 치타.” ...............치토스 였겠지.......... 색깔도 구리다. 연두색. 그것도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서 쳐다보기도 민망한 그런 자동차. 김반장님은 히죽거리며 웃고계신다. 차를 바꿀 생각에 마냥 신나신 듯 했다. “근데 시언이 너 운전은 잘하니?” 반장님의 말씀에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차를 운전하는 내 평균 속력. 시속.......... 20킬로미터. 괜시리 민망해져서 화제를 돌렸다. “아부지는 어디 가셨어요?” “아, 친구분이 찾아오셔서 식사하러 가셨어. 곧 오실텐데 기다릴래?” 김반장님의 말씀에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지금 나에게는 일분 일초가 아깝다. 이제 내가 못 참겠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놈들을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시언아!!!!!” 그 순간, 이제 소름끼치도록 듣기 싫은 목소리가 내 뒷통수에서 들려온다. 왜 내가 검찰청에만 오게되면 마주치는걸까. “아, 이검사님!!” 반장님이 반갑게 부르는 이검사의 정체는 생각해보나마나 이진한. 반장님이 부르거나 말거나 진한오빠는 굳은 표정으로 내 앞으로 다가온다. “여긴 왜 왔어?” 왜, 내가 병원에 안 처박혀있고 여기 와있으니까 꽤 놀라셨나보지? “반장님, 차 고마워요. 이번에 제가 쓰고 알아서 폐차 시킬게요.” 진한오빠와 말을 섞기 싫어 반장님 손아귀에 들어있는 차키를 홱 낚아챘다.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자마자 진한오빠가 차 앞을 막아섰다. “정시언, 너 지금 도대체 뭐하는 거야?” 진한오빠의 돌발행동 덕분에 운전석 창문을 열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이검사님, 비켜주세요. 저 지금 일하러 가야되거든요.” “너...........” “나한테 멋진 병원 1인실이나, 비싼 약이나 그런 거 안 맞더라구요. 난 좀 촌스러운 애라서요, 그냥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있으면 저절로 건강해지고 그래요. 내가 바보같이 그걸 몰랐어요. 이젠 확실히 깨달았으니까.... 내가 있어야할 곳으로 돌아가려구요.“ 내가 말을 할수록 진한오빠의 표정은 일그러졌고, 반장님은 방금 막 걸려온 전화를 받느라 우리의 대화에는 관심이 없으셨다. “약속했지, 일주일간 병원에 있으라고.” “난 약속을 어겼지만, 이검사님은 인간으로서의 예의를 어겼잖아요.” 친근하게 말을 놓고싶지도 않아서 계속 존댓말로 대꾸했다. “뭐? 무슨 말이야?” “나 지금... 간호해주러 가요.” “................. 시언아.” “내 남자친구가 짐승한테 밟혔대서, 그거 간호해주러.” 정곡을 찔렸는지 안색이 창백해지는 진한오빠. “비켜줄래요?” “...................” “그리구요, 함부로 밟지마요. 걔들 벌레 아니거든요.” 내 마지막 한마디에 진한오빠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듯 천천히 길을 터주었다. 난 출발한다. 이제 [우리 집]이라고 칭해도 거부감이 들지않는 그 곳으로. .......... 내 가족, [관계자 외 출입금지]가 기다리고 있는 그 곳으로. 익숙한 대문이 보인다. 낡을대로 낡은 대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마치 나를 기다리듯이. 눈물이 쏟아지려 했으나 꾹 참고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준다. 차문을 조심스레 열고, 땅을 밟는다. 심장이 벅차올라서 터질것만 같다. 웃자, 정시언. 웃는 모습 보여줘야지, 당당하게. 본래 정시언의 모습처럼. 간신히 내 몸을 지탱하며 한 발, 한 발 대문 안으로 들어선다. 목재 평상 위에 앉아있는 휴인이가 보인다. 정말 손에 붕대가 감겨있다. 그 뒤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건 환영이. 좀 전에 또 토했나, 힘이 없어보여. 민서는 이불을 둘둘 감은 채 평상위에 퍼질러 앉아있다. 감기에 걸렸나. 그리고 벽에 기대있는 건 비원이. 그 순간, 비원이와 내 눈이 마주쳤다. 비원이는 피식 웃더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금연 끝.” 비원이의 말에 다른 세 명의 시선이 대문쪽으로 꽂힌다. 나, 금방이라도 주저앉아버릴 것 같다. “누나.............” 휴인이의 말에 웃어보이려 했으나, 바보같이 눈물이 떨어져버렸다. 입은 웃고, 눈은 울고.... 이게 이온이같은 애들이 하면 진짜 이쁜건데, 내가 하면 완전 추한거다. 그리고, 내가 간신히 뱉어놓은 한 마디는....... “우리, 여행갈래?” 83. 유치하게, 유쾌하게 “바다.” “산.” “난 바다아님 안 가.” “난 산아님 안 갈거야.” 지금 내 눈 앞에서 벌어진 상황. 바다에 환장하는 휴인이와 산에 미친듯한 민서. 평소처럼 유치찬란하게 싸우고있다. 요즘 초딩들도 저렇게는 안 싸울텐데. 덕분에 집 안은 난장판. 땅바닥에 종이 한 장 깔아놓고 여행계획을 적으려던 나도 점점 지쳐간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집, 이 방 안. 일주일 남짓되는 시간동안 이 공간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환영이는 멍하니 휴인이와 민서의 싸움을 듣고 있었고... 신비원 그 망할놈은 아직도 밖에서 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휴인이와 민서의 싸움이 멈출때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할 듯 했으므로 나는 방 문을 벌컥 열고 비원이를 향해 소리쳤다. “개폼잡지 말고 빨랑 들어와!! 지금 다들 여행 계획 짜는데 너 혼자 참여안할테냐?” “저게 여행 계획 짜는 거냐? 싸우는 거지.” “개기지 말고 들어와, 좋은 말 할 때, 엉?” “나 담배에 굶주렸어, 몇 개비만 더 피고.” 저 놈 정말 그동안 금연 때문에 한이 사무치긴 했나보다. 아까부터 담배만 계속 피고 있다. 반 갑은 족히 넘게 핀 것 같다. 혼자 담배를 물고 있는 비원이의 모습이 처량하고 외로워보였다. 그래서 난... 나도 모르게 한 마디를 내뱉어버렸으니. “담배 값만 절약해도 돈이 얼마냐?” 그 말에 싸우고 있던 민서와 휴인이도 잠시 다툼을 멈추고 나에게 시선 집중. “니들 일주일에 한 갑씩만 펴도 벌써 만원이야.” 진지하게 내 말을 듣고 있는 놈들과 심각하게 말을 계속하는 나.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범죄를 저지른다고 했지? 그럼 그 돈도 아껴. 범죄 저지른 돈으로 너희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면.... 그때는 그 돈, 정말 더러운 돈이 되는 거야.“ 비원이는 내 말을 듣고 무언가를 깨달은 듯 했지만 괜시리 반항해보고싶었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승질을 냈다. “에이씨!! 그래도 기호 식품인데!!” “너 안 죽어.” “........” “담배끊어도 안 죽어. 너 며칠동안 금연했었잖아.” “....................” “그래도 너 살아있잖아, 비원아.” “................” “이렇게 잘 숨쉬고 있잖아.” 내 말솜씨에 내가 감탄할 지경이다. 나 원래 말 되게 버벅대는데. “그러니까, 숨 막히는 사람들 숨통 좀 트이게... 좀 더 신경써줘. 꽉 막힌 세상에서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더 좋은 곳에 돈 쓸 수 있도록 너희들이 조금 더 참아봐. 인내가 모여야 큰일을 이룰 수 있는 거야.“ 말없이 고개를 숙이는 비원이. 이럴 때 보면 다들 영락없는 열여덟 살 소년소녀. “어린 것들!! 알겠나? 다들 담배 끊을 수 있지?” 다시 밝게 웃으며 외친 내 목소리에, “굿바이, 내 사랑....” 입술을 댓발 내밀며 담배곽을 쓰레기통에 던져넣는 휴인이와, “난 원래 점점 줄이고 있었어요.” 바람직한 환영이와, “제기랄.....” 담배사기위해 꽁쳐둔 돈을 꺼내는 민서와, “내 금단증상 놀리면 그땐 너 죽어, 정시언.” 승질내는 비원이. 그래, 언제나 이래. 묵묵히 내 말을 잘 따라주는 너희들이... 눈물겹게 사랑스러워. 그리고, 그래서 아파. 착한 너희들이 세상에 상처입을까봐 내가 더 두려워. “근데 누나, 왜 말리지 않아....? 우리 범죄... 왜 그냥 두고보는거야? 이거 잘못하면 방조죄가 될 수도 있어, 우리가 꼬지르면 누나도 감옥간다.“ 내 뒷통수에 대고 장난 반, 진담 반 섞인 말을 중얼대는 휴인이. 나는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이제 그만 그들의 범죄를 인정하기로 한다. “난 내 자리로 돌아온거야.” “...............” “난 지금... 우리 아부지의 딸인 동시에, 너희들을 아끼는 한 누나야. 난 경찰의 스파이인 동시에, 너희들의 친구야. 난 너희들의 정체를 밝힐 거지만, 너희들을 걱정하고 있어. 난 너희들을 잡을 거지만, 너희들을 지켜줄거야. 범죄는 인정해. 너희들의 본래 목적이 흐트러지지만 않는다면. 난 상반된 두 가지 일을 가지고 있지만. 그 둘 다 내 모습이야. 난 내 자리로 돌아왔으니까, 두 가지 일 모두 열심히 할거야. 그러니까 난.... 스파이로서도, 누나로서도 너희들 범죄에 터치안해.“ “...................” “대신에.................” “....................”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잡히지마.” 진심이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이들을 넘겨줄 순 없다. 이제 우리에게 있어 배신의 의미는 단 한 가지였다. 옆에서 함께 해주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생각하는 유일한 배신이었다. “누나, 한 가지 틀렸는데요.” 그 순간 환영이가 나의 개폼잡는 순간을 방해하며 끼어들었으니. “너희들이라뇨. 거리감 느껴지게.” “...........으응?” “이제 누나도 [관계자 외 출입금지] 일원이라구요. 그러니까 ‘우리’라고 해야죠. 괜히 구분짓지 말아요, 머리아파. 함께 있어주는 거잖아요, 어쨌든. 그냥 이해한다고 말해줘요. 다른 말 필요없잖아요.“ 그러네... 괜히 개똥폼 잡을 필요가 없었구나. 어른이 되어갈수록, 필요한 말보다 쓸데없는 말을 더 하게 된다. “그래, 이해해. 난 너희들 이해해. 그럼 이제 나 받아주는거야? 너희들 일원으로?” 괜히 들떠서 조잘거리자. “병신, 진작부터 우리 일원이었다고 몇 번을 말해?” 민서의 퉁명스러운 말이 내 귓가를 스친다. 오늘에야 깨달았다. 이들에게 나는, 외부인에서 관계자로 변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최초가 된, 기적의 인간. 나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다. “난 여행 못 가.” “뭐라는거야, 왜!!!!!!” 이제 좀 차분히 여행계획 짜보나 했더니 이건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역시 어딜 가서 뭘 하든지 신비원이 문제다. 이들과 어색함을 풀기 위해서, 조금 더 우리만의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 함께 있기 위해, 아름답기 위해, 일주일 가량의 여행을 떠나려 했건만 한 명이라도 빠지면 소용없는 이 여행을... 못 간다니!!! 내가 일부러 내가 통장에 고이고이 숨겨뒀던 내 자비도 뽑아왔건만!!! 김반장님의 똥차도 빼앗아왔건만!!! “나 출근해야지.” “어딜? 그 가정파탄소????” “호스트빠야.” “그게 그거지, 그게 가정파탄소지, 뭐야!!!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호빠 이름이 로맨스가 뭐냐, 로맨스가!!! 누가 그런 미친 작명센스를 가진거냐!!!!“ “아, 왜 나한테 성질이야!!! 니가 잠수 타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 없었잖아!!!” “내 잠수랑 이거랑 뭔 상관인데!!!” “니가 잠수타니까 내가 너 기다리고, 애들 달랜다고 호빠 출근 못했잖아!! 나 사장한테 존나 쳐맞았다, 알고있냐!!!?“ “알게 뭐냐!!!” “뭐? 이 배은망덕한 년이!!!” “년이라니!!! 응? 년이라니!!! 누나한테 년이라니!!!!” 싸움붙은 비원이와 나. 그건 민서와 휴인이의 싸움보다 격렬했다고 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만둬, 거기!!! 이상해!!! 호스트빠가 뭐야!! 관둬!!!” “뭐야, 범죄에 터치 안한다면서!!!!!!” “좀 더 화끈한 범죄 많잖아!! 니 범죄는 치졸하고 얍삽해!!!!” “뭐라는 거야, 지금 장난하냐? 내 범죄가 제일 약하거든?” “사내새끼가 꼴랑 한다는 짓이 미성년자 금지업소에서 일하는거냐? 거기다가 화끈하게 일 제끼지도 못하고!! 업소에 매여사는 새끼. 남자가 임마, 대범함이 있어야지!!!“ “시발이형..........” “그래, 임마, 왜, 뭐!!! .......잠깐.... 야, 내가 시발이 이야기 하지말랬지!!!” 우리의 싸움은 민서와 휴인이의 싸움보다 격렬했으며... 유치했다. “뭐야? 시발이가 뭔데?” “욕하는 건가?” “쟤네 둘 이상해.” 나의 이성은 ‘시발이형’에 대해 궁금해하는 나머지 세 명의 아이들을 호기심을 목격하는 순간 틱, 하고 끊겨버렸고.... “야, 이 나쁜 놈!!! 왜 자꾸 비밀을 들먹이고!!!!” “그럼 말해줘요, 시발이형이.” “이 새끼, 그래도 자꾸 시발이라고!!!!” “남자답게 해달라구요.” “뭘, 임마!!!!!?” “지우형한테 전화해줘요.” “............엉?” “신비원 일 빼달라고, 지우형한테 정식으로 말해달라구요, 난 용기없어서 그런거 못하니까, 난 맞는 거 두려워서 그런 거 절~대 못하겠으니까 시발이형이 해줘요. 나도 여행가고싶어서 미치겠거든. 이번 여행 책임자가 시발이형이잖아요. 그러니까 해달라니까?“ 이 놈, 존댓말을 써가면서 나를 살살 긁고있다. “.....내... 내가 하라면 못할 줄 알고?” “무작정 전화해서 ‘비원이 일 못 나갑니다!!’이러고 끊기 없기?” 개썅, 예리하다... 내가 어떻게 나올지 다 파악하고 있는 무서운 놈이다. “다, 당연하지!!!!” “지우형 핸드폰번호 알려줘?” “나, 나도 알아!!!!” “휴인아, 니 여자친구 바람핀다.” 비원이의 말에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휴인이. “우리 지금도 사귀는 거 맞아, 누나?” 처량한 눈을 한 채 묻는다. 무슨 뜻이지? 아, 맞다. 휴인이가 그랬었지, 자기랑 안 사귀어도 좋으니까 돌아와달라고. 자기가 뱉어놓은 말 때문에 아까부터 계속 고민한 모양이다. 어쩐지, 애정표현이 확연히 줄어들은 것 같더라니. 민서가 조금 신경쓰이긴 했으나 그래도 난 대답한다. 더 이상 엇갈리지 않기 위해. “나.... 믿지, 남자친구?” 84. 병원놀이 “뭐야, 누나가 지우형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아!!!!” “아, 어쩌다 알게 된거야!!!!” “누나 바람피지? 내가 싫어?” “이 어린놈이 뭐라는거야!!!?” “내가 어려서 싫어? 지우형은 나이많다 이거지??” “얘 왜 이래!!!!” “시발이형은 뭐야? 그 사람은 누군데? 응? 응?” 휴인이에게 [우리는 여전히 사귀고 있는 사이란다]라는 걸 각인시켜주자마자... 놈은 미치광이 날뛰듯 질투를 해대기 시작했다. 어이쿠... 저렇게 질투하고 싶은 거 그동안 어떻게 참았대? 휴인이에게 시달리는 나를 보며 비원이는 만족스런 웃음을 띄고 있었다. 가만 보면 저 놈이 제일 사악하다. 그동안 신비원이 가장 신비스럽고 어른스럽다고 생각한 나 자신을 저주하리라. 놈의 본모습은 얍삽하고 영악하며 추접스러웠다. “휴인아.” “응?” “여행가고 싶지?” “응.” “그러니까 누나 지우씨하고 전화 한 통만 하자, 누나가 허락만 받고 끊을게.” “싫어, 신비원 그냥 버려두고 가자,” 저 우정따위 내팽개치는 휴인이의 곧은 절개. 순간 굳어버리는 비원이의 표정을 목격하고 휴인이를 마구 칭찬해주고 싶었으나 간신히 그러한 마음을 접고 계속 휴인이를 달래주었다. “안돼, 비원이 없으면 사람들이 우릴 우습게 볼거야. 쟤가 제일 인상 드럽잖아. 우린 다들 너무 착하게 생겨서 어쩔 수 없어, 쟨 그냥 위협용이야. 나도 두고 가고 싶지만 우리가 손해안보려면 어쩔 수 없이 데려가야돼.“ 화를 참는 듯 붉어지는 비원이의 표정. 내 비록 말은 저렇게 했어도 [관계자 외 출입금지]나 [해커] 사이에서 가장 잘생긴 놈은 바로 신비원이었다. “지우형 잘생겼잖아. 불안한데......” “니가 더 잘생겼어.” “그건 당연한거야.” ...........정색했다. 휴인이놈, 저 뻔뻔한 말을 정색하고서 대답했어!!! 나는 어이없는 마음을 억누르고 핸드폰을 집어들어 지우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호스트바 로맨스의 마담 지우씨. 딱 한 번 본 사인데 오늘 또 폐를 끼치게 생겼군요. 끈적끈적한 재즈노래가 컬러링으로 울려퍼진다. 그리고 곧 들려오는 목소리는..... - 정시언씨? 부드러운 지우씨의 음성. 그때 번호를 교환하길 잘했구나. 이렇게라도 도움이 되네. - 무슨 일이세요? 말을 꺼내려고 보니... 아이들의 시선이 다 나를 향하고 있는 것이... 상당히 불편하고 민망했다. 나는 자리를 옮기기 위해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났고... “안돼!! 누나!! 싫어!! 가지마!!” 휴인이는 세 살짜리 아이가 화장실 가는 엄마를 붙잡듯 내 바지를 잡고 매달렸다. 아니, 이 놈이 나랑 며칠 떨어져있더니 어리광이 늘었나.... 그 때 내 눈에 들어온 건 휴인이 손에 감겨있는 붕대.... 아플텐데, 너로서는 필사적으로 참고있는거겠지? 다시는.... 나로 인해 다치지 않게 할게, 휴인아. 모자란 여자친구지만, 그거 하나만은 꼭 약속할게. “금방 올게.” 붕대감은 휴인이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주고는 핸드폰을 귀에 대며 밖으로 나갔다. 고맙게도 내 손길에 내 뜻을 알아준 듯한 휴인이는 나를 곧 순순히 풀어주었다. “저기, 지우씨.” - 오랜만이예요, 잘 지냈어요? “예, 그냥저냥... 지우씨는요?” - 하하, 전에 그 복부인들이 시언씨 다시 데려오라고 난리치는 것만 아니면 무난하게 잘 지내고 있어요. .....그 복부인들 아직도 나를 찾는건가... 나는 남자몸으로 태어났으면 더 사랑받았을지도 모른다. -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예요? 설마 비원이한테 무슨 일 있어요? “아니요, 잘 있어요.” - 며칠 무단 결근해서.... 사장한테 많이 맞았어요. 다쳤을 거예요. “상처... 없던데요.” - 보이는 데를 어떻게 때려요, 얼굴로 먹고 사는 앤데요. “............. 그.. 럼요?” - 파이프로 등을 내려쳤어요. 내가 말려도 역부족이라... 병신. 병신. 왜 너희들은 다 그 모양이냐. 다치고 힘들고 아파도 친구들이나 나한테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게 너무 안쓰럽고, 안쓰러워서 화나고, 화나서 짜증나. “지우씨.....” - 네? “내가요, 애들을 지키기로 했어요.” - 네.....? “그러려면요, 여행을 가야 되거든요. 한 번뿐인 기회라서, 나한테 되게 소중해요. 놈들 기억에도 소중한 여행으로 만들 자신 있거든요.“ - .............. “그래서 비원이가, 호스트바에 일주일간 못 나갈거예요, 내 탓 인 거 알아요. 그동안 비원이가 출근못한것도 내 탓이구요, 앞으로 출근 못할건데 그것도 내 탓이거든요. 사장한테 대신 맞으라면 대신 맞을게요. 근데... 지우씨가 막아주면 안돼요? 사장도 막아주고... 비원이 짤리는 것도 막아주면... 그러면 안돼요?“ 정말 간절하게 마음을 다해 이야기한 나의 소망. - 웃게 만들어 주실 거예요? “.............” - 비원이 그동안... 많이 힘들어했어요. 제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그런 비원이가 여행 후에 웃으면서 돌아올 수 있다면... 그것만 약속해준다면 사장은 어떻게든 내가 막아볼게요. 지우씨는 정말 멋진 사람이다. 그는 언제나 내가 닮고 싶은 역할을 몸소 보여준다. “약속할게요.” - 알았어요. 여행, 잘 다녀오세요. “여행다녀오면, 한 번 갈게요, 그 복부인들 다시 오면, 나 그 방에 다시 넣어줘요.” 내 말에 작게 웃는 지우씨. 고마워요, 그 더러운 곳에서 비원이 지켜줘서 정말 고마워요. 나 말고라도, 이 애들을 걱정해줄 사람이 이 세상에 하나쯤은 있다는 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 건지 모르죠? “허락받았다~!! 내가 누구냐, 협상의 천재 정시언.....” 온갖 오바를 떨며 방 안으로 다시 들어갔을 때는..... “푸하하, 시발이형 왔다, 시발이형!!!!” “누나, 풉... 왜.... 풉.... 미리 말 안했어요.....” “진짜 온갖 망신 다 시키고 다녀.....” 뭐냐.... 휴인이, 환영이, 민서의 이 반응은 도대체 뭘 뜻하는 거냐... 거기, 벽에 기대어 내 눈을 피하는 신비원이여.... 너 설마... 말했냐? 이 아이들에게 정시발의 전설에 대하여 말한거냐고. “야!!!! 너 말 안하기로 약속했잖아!!! 이 구라쟁이 새끼!!! 사내가 한 번 약속했으면 하늘이 두 쪽 나도 지켜야지!!!! 맹세를 그렇게 쉽게 저버리다니!!“ “난 약속한 적 없다. 너 혼자 나한테 부탁한거지.” 취소다. 내가 이제껏 신비원 놈을 걱정해주던 그 아름다운 마음 다 취소!! 저 망할놈, 내 22년 인생 속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기억을 말하다니. 그렇게 안봤는데 저거 떠벌이 수다맨보다도 입이 가벼운 놈이여... “시발이형!! 옛날에 일하던 호스트바 [섹시가이] 이야기 좀 해줘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나에게 묻는 휴인이.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띈 채. ........ 비원아.... 애들한테 [섹시가이] 이야기도 했단 말이냐... 존경스럽다, 내가 전화하러 나간 사이 웃긴 이야기만 골라서 해줬구나. “.......휴인아, 내가 웃고있을 때 그 이야기 관두는 게 좋을 거다.” “에이, 왜그래요, 시발이형.” “내가 왜 시발이형이야!!! 난 정시언이야!!!” “무서워요, 형. 왜 화내고 그래.” 휴인이는 마치 한 마리의 능구렁이처럼 계속 장난을 쳐댔다. 앞으로의 내 미래가 눈에 선하구나... 내 별명은 이제 누가 뭐래도 ‘시발이형’으로 찍혀버리겠지... “신비원!!!! 내가 오늘 널 조져버리겠다!!!!!!!!!” 결국 화를 다스리지 못한 나는 신비원을 향해 몸을 날렸고... 신비원은 앉아있던 상태에서 나를 피하기 위해 옆으로 몸을 피했다. 그 덕분에 옆에 있던 작은 탁자가 비원이의 등과 퍽 소리 나게 부딪혔고, 그와 동시에 황소의 힘을 가진 내가 놈의 품에 흉하게 엎어져버렸으니... ".........아!!.....“ 똑똑히 보고 들었다. 일순간에 찌푸려지는 비원이의 표정과, 아주 작은 신음소리. 설마... 파이프로 맞았다는 그 등이랑 부딪힌건가? 악!! 정시언 완전 바보!! 난 왜 이러냐, 기억력이 3초도 아니고!!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서는 나와는 달리 비원이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더니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아픔을 참기위해, 신음소리를 내지 않기위해 나름대로 필사적인 듯 했다. 아프면 그냥 좀 드러내지. 나 아프다, 나 다쳤다, 나 힘들다.... 그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너희들 마음 속에 담겨있는 짐이 조금은 덜어질텐데. 넷 다 바보같애, 아무리 힘들어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티를 내지 않아. 그럼 나한테도 들키지를 말던가. 나는 그런 너희들이 안쓰러워 미치겠는데. “... 괘, 괘.....괘, 괜찮냐!!!!??? 야,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나는 과도한 리액션을 보이며 비원이를 걱정해주기 시작했고... “아....... 난 들소 한 마리가 나한테 달려오는 줄 알았다.... 너 오늘 병원에서 퇴원한 거 맞냐? 되게 멀쩡해보인다.” 비원이는 농담을 해대지만.... 난 보인다, 아픔을 참는 그 놈의 표정이. “......상처 치료는 했어?” 다른 애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비원이의 귀에 대고 작게 중얼거렸다.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비원이. “.....어떻게... 알았어?” “.............” “설마 지우형이!!!!” “나중에 내 방으로 와. 구급상자 있으니까 간단한 치료는 할 수 있을 거야.” “........씨발....”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는 것이 서툰 아이들이다. 정시언, 할 수 있지? 이 상처... 감싸주고, 치료해주고, 보호해줄 수... 있지? 다른 사람에게 먼저 치부를 드러내보인 적 없는 애들이니까... 니가 먼저 알아내고 챙겨줄 수 있는거지? 심장에 다시 한 번 작은 통증이 일었다. 나중에 내가 이들에게 다신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남기게 될까봐. 놈들은 나에게 망설이지 말고 추리를 하라고 했지만 내 입장에서 아무래도 이런 상황은 껄끄럽고 고민스러웠다. “내가 고백할 게 있는데.........” 휴인이 손에 감긴 붕대, 요즘도 맞아가면서 돈을 벌고 있을 환영이, 아파서 한동안 누워있었다는 민서, 등짝에 파이프 자국을 남기고 있을 비원이. 분명하다, 이 무식한 자식들은 그저 자신의 맷집과 자연치유능력만 믿고 아무런 치료도 하지않은 채 상처가 아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덕분에 나는 말한다, 내 이미지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내가 아직도 존나 유치하거든.” “응, 알아. 그래보여.” 백민서 저 나쁜년. “그래, 그런 의미에서 병원놀이 한 판 하자.” 85. 치료 “.........에이, 야해, 시발이형.” 내 대사에 혼자 얼굴을 붉히는 휴인이. 아니, 저 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자존심이 강한 놈들이다. 그와 더불어 친구들을 생각하는 마음도 바다같은 아이들. 다들 한 방에 몰려있는 상태에서 상처를 치료해주는 건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라는 걸, 난 잘 알고 있었다. 한 명씩 불러서 상처를 치료해주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물론 다들 알고있을 것이다. 내 취미가 병원놀이가 아니라는 것 쯤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가주는 아이들에게 감사했다. “휴인이 너부터야, 따라와, 임마.” “아, 싫어, 누나!! 난 어렸을 때도 병원 제일 싫어했는데!!” “내가 며칠 병원있어보니까 편하고 좋더라. 그래서 한 번 꼭 의사놀이해보고 싶었어.” “악, 싫어!!! 누나, 난 싫어!!!!” 휴인이의 비명을 무시한 채, 놈의 뒷덜미를 잡아채는 데 성공. 얼마나 싫으면 바로 누나란 말이 튀어나오냐. 방금전까지 시발이형이라고 놀려댔으면서. 한 번 놀릴 거리가 생기면 질릴때까지 울궈먹는 앤데... “누나.... 나 병원같은 데 가본 적 없단 말이야....” “닥쳐, 너 나 만나려고 병원 왔었잖아.” “그건 문병이었고.” 그렇다. 여기서 알게 된 새로운 사실 하나. 이번에 나를 만나려고 병원에 온 것과, 유인이 면회를 다녀온 것을 제외하면 휴인이 놈은 병원이란 곳에 가본 역사가 없었다. 어렸을 때는 가난해서 그랬을테고.... 문병와서 아파도 참아야만 하는 삶을 살아왔다고 자기 입으로 말했었으니까. 지금은... 신분이 노출되는 걸 꺼리기 때문인가... 아니, 가본 적 없는 곳에 대한 거부반응이 몸에 배어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괜찮아, 진짜 병원 가는 것도 아니고, 의사도 바로 이 누나란 말이다.” “그러니까 싫은거야, 돌팔이잖아.” .......... 요즘들어 잘 개긴다, 이 새끼가. 나는 그의 말을 못 들은 척 하며 놈의 뒷덜미를 잡고 방문을 열었다. “다들 개기지말고 내가 부르면 제때제때 내 방으로 와라.” 그 말 한마디를 남기며 싫다는 휴인이를 마당에서 내 방까지 질질 끌고 오는 정시언. “에이, 누나. 가오 죽게 뒷덜미 잡는 게 어딨어.” 울상을 지으면서도 자신의 뒷목에 가 있는 내 손을 손쉽게 떼어내는 휴인이. 역시 나보다 어리다고는 해도 사내놈들의 힘은 쉽게 볼 것이 못 된다. 휴인이는 다시 내 손을 자신의 왼손으로 감싸쥔다. 다친 오른손은 등 뒤로 숨기고서. 기를 쓰고 괜찮은 척 하는 휴인이가 가여워서 한숨을 내쉬며 내 방 문을 열었다. 아직 열려있다. 하긴, 그 때 정신없이 나갔었으니까. 하지만... 내 방 안은 그대로겠지. 너희들 네 명이 언제나 지켜준 공간이니까. 주인이 없는 방 안에는 온기가 사라져있었다. 차가운 방바닥에 내 발을 들여놓았을 때, 휴인이가 붕대에 감긴 오른손으로 힘겹게 방 안의 불을 켜준다. 형광등이 몇 번 깜빡거리더니 어두컴컴했던 방 안이 환하게 밝혀졌다. “누나 없는동안 불 켤 일이 없어서 항상 어두웠어. 이제 안심이 된다.” “.............” “진짜... 누나가 돌아온 거 같아서.” 내가 없으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너희들을... 내가 어떻게해야 하는지. “후회... 하지 않아, 누나?” 진지한 표정을 한 휴인이가 내게 묻는다. 후회하지 않느냐고, 아마 그 말 속에는 앞으로도 자신들과 함께 해줄 수 있냐는 질문이 담겨있을 것이다. “손... 많이 아파?” 나는 그의 손을 걱정하는 것으로 민감한 그 질문의 답을 대신한다. “아, 이거 나 문틈에 손 끼여가지고!! 별로 안 아파!!” 거짓말.... 강한척하는 게 습관처럼 되어있어. 나는 휴인이의 말을 믿는 척 해버린다. 내가 진실을 아는 척 하면 놈의 자존심이 상할까봐, 또는... 사실을 말한 비원이랑 혹시라도 싸우게 될까봐. “붕대 풀어봐, 치료는 제대로 하지도 않고 그냥 붕대만 감은거지?” 안봐도 뻔하지, 그냥 붕대만 감으면 다 낫는 줄 알고 있을거다. “아.... 나 진짜 괜찮은데.” “빨랑!! 후딱!! 어서!!” “.................” 뭐야, 이 놈 다친 손 좀 보자는데 왜 이렇게 수줍어해...? 성격 급한 나는 놈의 손을 홱 잡아채서 무지막지한 손놀림으로 붕대를 풀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붕대를 다 풀었을 때 나타난건....... 심하게 까지고 피가 나고 있는 휴인이의 오른손이었다. “...........휴인아..........” 설마... 이렇게 많이 다친거 내가 알면 걱정할까봐.. 보여주지 않으려고 그런거야? “그러니까!! 내가 방문을 열려고 했는데 그 때 백민서가 문을 확 닫아가지고 문이 손에 끼였는데!! 누나도 알지? 우리 집 문이 무식하게 생겼잖아!! 그래서 피할 새도 없이 그냥....“ 미안해, 미안해... 나 때문에... 보잘것 없는 나 때문에 왜 니가 다쳐야 하는건지.. “누나............ 울어?” 차라리 진한오빠랑 상종하지도 말았어야 했어, 다시는 마주치지도 않아야 했어. 먼저 나를 떠난 그 사람, 나한테 미련가지지도 않게 내가 주의했어야 하는데... 왜 니가 다쳐야 하는거야? 잘못한 건 그 사람인데... 아니, 차라리 내가 다쳐야 하는데 왜 항상 상처입는 건 니가 되는거니, 휴인아. 나도 모르게 내 눈에선 눈물이 한 두 방울씩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물은 참으려고 할 때만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린다. 이 몹쓸 눈물같으니... 괜히 휴인이만 더 신경쓰이게 만들고. “아, 아니!! 눈에 뭐가 들어가서!!!” “............. 나 안 아파, 누나.” 눈치빠른 새끼... 좀 모른척 좀 해주면 덧나냐... “뭐가? 나 너땜에 우는 거 아니야!!!” “응, 근데 나 안 아파, 누나.” “야!! 상처 치료도 안하고 이렇게 무식하게 붕대만 감는 놈이 어딨냐!!! 되게 심하게 까졌구만!! 너 이거 붕대에 닿았을 때도 무지 아팠겠다.“ 놈의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에 괜히 또 눈물이 핑 돌아서 일부러 큰 목소리로 밝은 척 말을 건네는 나. “난.... 내가 다치는 게 낫다고 생각해.” 그리고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는 휴인이. “언제나 그래. 다른 사람이 다치고 아픈것보다.... 그냥 내가 힘든 게 낫겠다고. 나 언제나 그런 생각해. 나를 무시하는 건 괜찮아도, 내 주변사람 무시하면 열 받고... 나를 상처내는 건 참아도... 내 주변사람 상처내면 나도 그 사람 때리고 싶고 그래.“ “..................” “그러니까 누나, 나는 걱정안해도 돼요.” “...........나 너 걱정안해, 너 문틈에 손 끼인 거 가지고 되게 오바한다.” “알아, 그냥 그렇다구!!” 일부러 휴인이의 말을 흘려버리려고 애썼다. 주의깊게 듣다보면 눈물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서. 휴인이는 보기와는 다르게 치료를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아픈 티를 내지 않았다. 입을 열면 울게 될까봐 묵묵히 치료에만 전념하는 못난 나를 이해하는 듯, 혼자 노래를 작게 흥얼거리고만 있었다. “휴인아.” 치료를 끝내고, 휴인이 손에 붕대를 감아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응?” “이제부터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그렇게 말해도 돼.” “..............” “다 참는 짓... 그런 거 안해도 돼.” “..................” “너도 사람이잖아, 다들 그렇게 살아. 서로 힘을 주고, 도움 받으면서....” “나는 약해질 수 없어.” “...............” “지킬 게 많아, 누나. 나는 약해지면 안돼. 난 괜찮아, 언제나 그래왔으니까. 그래도 나... 누나가 있어줘서 정말 고마워. 처음으로 세상에 감사해.“ 이렇게 감동적인 말... 도대체 세상의 그 어느 누가 들을 수 있을까. “환영이 불러올게!! 누나 두 번째 환자!!!” 휴인이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씩씩한 걸음걸이로 반대편의 집을 향해 통통 튀어간다. 눈물나는 뒷모습으로, 내가 아는 것보다 더 쓸쓸한 그 뒷모습으로. “난 아픈데 없어요, 누나.” 문을 빼꼼히 열고 고개를 들이미는 환영이. “다 알아요, 휴인이 손 치료해주고 싶어서 일부러 그런거죠?” 역시나 환영이도 모르고있었다, 비원이가 호스트바 사장에서 맞았다는 사실을. 그러나 난 굳이 티내지 않으며 피식 웃어보였다. 환영이 말이 맞았다는 듯이. “일단 들어와.” 내 말에 환영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 해보이며 내 방안으로 들어섰다. “미안해, 그동안.... 혼자 못난척 하느라 방황하고 있었네. 그동안 힘들었지?” “솔직히 말해도 되요?” “.........응.” 안쓰럽게도 환영이의 얼굴은 그 새 많이 수척해져있었다. “..........누나가...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어요....” “..................” “밤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쓸데없는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이제 누나 없으면 누구한테 기대야할지 막막하기만 했어요. 언제나 애들 챙기는 건 내 몫이었는데.. 이번엔 나도 바보같이 아파버려서..“ “.................” “나 쪽팔리게 일하다가 턱 정통으로 맞고 쓰러졌잖아요, 하하하.”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엄마같은 존재, 지환영. 역시 그 놈은 다른 놈들이 널부러져 있을동안 그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혼자서라도 열심히 일을 한 듯 했다. 긴팔티셔츠로 열심히 가렸지만 나는 보였다. 환영이의 목 부근과 살짝 걷어올린 팔에 보이는 수많은 멍자국이. “토했다며.” “자주 그래요, 나 은근히 예민해서.” “지켜준다고 해놓고.... 이런 꼴이나 보이고... 미안해.” 환영이가 지켜달라고 했을 때, 난 진심으로 대답했다. 지켜주겠다고, 버리지 않겠다고. 결국에 난 약속을 한 번 저버리고 말았지만 이들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한결같은 마음으로 날 맞아주었다. “돌아와줘서... 고마워요, 누나.” “....................” “........ 남자가 돼서... 쪽팔린 말인데요....” “...................” “우리 버리지 말아요.............” 다시 한 번 심장이 찌릿, 아파온다. “이상해요, 누나 없이도 잘 살았었는데..... 범죄에 찌든 우리였는데....” “....................” “나... 이렇게 내가 변하는게.... 무서워요, 누나.....” 휴인이 앞에서는 내가 울었지만 환영이는 내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그 눈물을 닦아주면서.... 나 또한 돋아오는 소름을 간신히 진정시켜야만 했다. 나 또한 나의 변화가 미친 듯이 무서웠으므로. 앞으로의 현실을 피하고 싶었으므로. 그들을 지키고 싶었다, 진심으로. 86. 독심술 환영이는 한사코 치료해준다는 내 성의를 거부했다. 온 몸이 멍투성이라 내가 놀랄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어쩔 수 없이 그에게는 멍을 가라앉히는 약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워낙에 말 잘 듣는 환영이니까, 혼자서라도 열심히 약을 바를 거라 믿어야 했다. 괜찮아졌다고 우기길래 그냥 냅뒀는데... 그래도 소화제라도 줄 걸 그랬나. 먹은 것도 없으면서 자꾸 게워내는 거... 되게 안 좋은건데. 혼자 너무 걱정하고, 속상한 일 떠맡아서 그래. 한숨을 쉬며 혼자 애태우고 있을 때, 급히 방문이 열렸다. 이제 드디어 비원이 차례인가, 싶어 위를 올려다보았을땐... 긴머리를 휘날리며 나를 내려다보는 민서가 보였다. “아....... 민서야.... 너도 아팠다면서? 이제 좀 괜찮아? 약이라도 좀 줄까?” 그래도 그동안 아파서 쉬었다는 민서는 그나마 제일 나은 모습이었기에 나는 별 걱정 없이 그녀에게 물었다. “짜증나.” 그녀는 나에게 다짜고짜 짜증난다는 말을 내뱉었다. “...........응?” “니가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오고, 나가고 싶으면 나가는 데 아니야, 여기.” 내가 싫어서 하는 말은 아닌 듯 싶었다. 그녀의 말은 오히려 어린 아이의 투정에 가까웠다. 왜냐면... 그녀는 여행가자는 내 말에 반발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산으로 가자고 휴인이랑 싸워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가!! 난 그 일을 잊지 않고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랑 단 둘이 있게 될 기회를 잡게되자 그동안 서운했던 걸 털어놓는 듯 싶었다. “연락이라도 할 줄 알았어...........” “...........미안해.” 그래도 어쩌겠는가, 난 그녀의 비위를 맞춰줘야만 했다. 어쨌든 이번 일은 내가 잘못한거니까. “.........그렇게 보내고...... 얼마나.. 마음 쓰였는지... 알아?” 그렇다, 난 민서랑 좋은 관계를 유지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언제나 그녀와 내 사이는 문제의 연속이었으므로. 민서는 내가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일단 여자라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좋아한다는 점. 그리고... 그녀가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주동자라는 점.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 그룹의 주동자임이 분명하다고. 재벌아들 비원이랑 지나친 의견충돌을 보이는 점도 수상했고, 여기저기서 보이는 그녀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비원이와 싸울 때 한 그녀의 말은 결정적이었다. 민서는 비원이에게 말했었다. 니가 결국 여기 온 건 자기 덕이라느니... 받아줬으면 지랄하지말고 얌전히 붙어있으라느니... “또다시 떠나면.......... 가만 안둬, 정시언....” 귀여운 놈들.... 휴인이는 나를 울렸고, 환영이는 내 앞에서 울더니... 이제 민서는 나한테 협박을 해댄다. “우리... 화해할래, 민서야?” “...................” “아, 뭐 우리가 크게 싸운 적은 없지만.....” “니가 날 피했잖아.” “말은 똑바로 하자. 니가 날 피한거지.” “............” “아, 뭐 그래. 그럼 둘 다 서로 피했다 치고... 이제 그러지 말자구.” 그동안 휴인이를 생각하느라 나 또한 민서를 조금씩 피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그렇게 서로를 멀리하는 시간도 아까웠다. “나 휴인이랑 사귀지만.... 그래도.....” 이제 내 눈앞은 너로 꽉 차겠지... 다른 애들과는 달리 너는 감옥으로 보내질테니까... 내 머릿속은 앞으로 니 걱정으로만 가득찰거야. 민서는 조심스럽게 내민 내 손을 천천히 잡았다. 그녀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맞잡게 된 그녀의 손은.... 굉장히 따뜻했다. “지우형이 말한거야?” 민서가 거쳐간 내 방은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 비원이를 모시게 되었다. “지우씨 아니라도 눈치챘을걸. 너 아까 내가 달려드니까 신음소리 냈잖아.” “그래도 쪽팔리게 병원놀이가 뭐냐, 애들 눈치채면 어떡하려고.” “........의심 안하는 거 같던데.” “하긴, 니 정신세계가 좀 특이해야지.” “..........내가 니 등짝 때리는 즉시 넌 기절할텐데 맞고 싶냐?” 비원이는 굳이 나에게는 다친 상처를 숨기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어떻게 보면 나에게 가장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은 비원이었다. 내 남자친구인 휴인이도 나에게 많은 얼굴을 보여주었다. 진지한 모습 아니면 웃는 모습. 내가 아는 휴인이의 얼굴은 그게 다였다. 그러나 비원이는 달랐다. 그는 수많은 얼굴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처음의 차가운 모습과는 달랐다. 놈은 놀라울 정도로 많은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호스트바 사장... 자주 때려?” “................” 뭐, 물론 말을 아끼는 건 여전하지만. “개새끼네, 그 사장.” “넌 여자가... 말 좀 이쁘게 해라.” 그냥 호스트바 출근하지.. 이렇게 맞을거, 너도 눈치채고 있었을거면서. 환영이 일 나간다는 거 말리고... 환영이한테 애들 맡기고... 그냥 너는 출근하지 그랬어.... 그럼 다 좋잖아.... 환영이도 일 안하면 안 맞을테고... 너도 출근하면 사장한테 안 맞았을텐데. “내가 아니면.... 널 데려올 수 없을 것 같았어.” 그 순간, 들려온 비원이의 목소리. 뭐야, 너 독심술 하냐.....? 마치 내 마음을 읽은 듯이 대답했다.... “그래서 어쩔 수가 없었다... 중요한 건 널 데려오는 거였어, 널부러져 있는 애들 일으키는 건 너 뿐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일을 마냥 중단하고 있을 수는 없었어. 고아원에 있는 한 꼬마가 백혈병에 걸렸거든. 돈은 벌어야겠는데 너는 없지, 애들은 널부러져있고, 널 설득할 건 나밖에 없을 것 같아서 환영이랑 상의해서 그 놈이 일하러 나갔어. 너 좋아하는 휴인이랑 민서는 도저히 일어설 수도 없는 상태였고.“ 내 마음이 들켜버린 것 같아 뜨끔해서 괜히 헛기침을 해대고 말았다. “아, 됐어, 누가 뭐래? 상처나 치료하게 이거나 빨리...” 라고 말하며 놈의 옷을 살짝 들췄을 때........ 맙소사.... 빨개진 걸 넘어 까매졌어.... 등에 까만 줄이 여러 개 나 있다구... “.............너... 이걸.... 그냥 참고있었어?” “..........약은 바르려고 해봤는데 손이 안 닿던데.” “............안 아파?” “............한 두 번 맞냐. 원래 사내놈들은 맞으면서 크는건데.” ...........부잣집 도련님 주제에....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걸 참을 수 있어? 노예도 아니고... 호스트바 사장한테... 니가 왜 맞아야 하는거야? “..........그냥 애들한테 말하지!! 이게 뭐야!! 그냥 애들한테 치료 좀 해달라고!!!” “내가 정신적 지주잖냐. 오빠가 다치면 애들 다 울어, 임마.” 저 개똥폼 좀 집어치우지, 정말.... “..........약 발라줄게... 오늘 엎드려서 자.” “어.” “........참을 수 있겠어? 내 손 닿으면... 따끔할텐데....” “옷이 닿아도 따끔한 건 마찬가진데, 뭐.” 비원이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지우씨는 뭘 하고 있었던건지 괜히 원망이 된다. 물론 지우씨도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말렸겠지만.... 하지만.. 이건 심하잖아. 잘못 맞았으면 움직이지도 못하게 됐을거야.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손에 약을 듬뿍 발라 까맣게 변해버린 비원이의 등에 손을 가져다댔다. 순간, 그 놈의 몸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역시... 아픈 건 아픈 거구나. 차라리 참지말고, 그냥 아프다고 하지. 다들 겉멋만 들어가지고.... 아프면 아프다고 악쓰고... 힘들어서 죽을 거 같다는 말을 입에 달고살던 나는... 그동안 얼마나 편한 세상을 살아온걸까.... 내가 이 곳을 도망쳤을 때... 니들은 내가 얼마나 우스웠을까... 니들 입장에선 아무 것도 아니었을 일에... 나는 혼자 경악하고 슬퍼했어. “휴인이 놈... 바다 가본 적 없다더라.” 아파서 움찔거린게 쪽팔렸던지.. 비원이는 입을 열었다. “민서는... 산에 가본 적이 없고.” “............그게... 가능해?” “상식이 안 통하는 놈들이잖냐.... 워낙 힘들게 살아와서, 자기들 삶을 즐길 여유조차 없던 애들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그래서 싸우는거야. 너랑 같이 하는 여행이니까, 처음이지만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여행이니까.“ “................... 근데 나는....” “알아, 니가 어디 가자고 할지.” “응?” “나는 니 생각에 찬성이야.” “어떻게... 알아?” “니 단순한 생각이야 니 얼굴보면 다 드러나지.” “.................” “괜히 놈들 때문에 흔들리지 말라는 말, 해주고싶었어.” “내가 가고싶은 곳은....” “발길 닿는대로.” / “발길 닿는대로.” ............순간 숨이 멈출 정도로 놀라버렸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튀어나와버린 나와 비원이의 말 때문에. 그러나 놀란 나와는 달리 비원이는 전혀 놀라지 않은 듯 보였다. “야!!! 너 독심술 하지!!!? 말도 안돼!!! 어떻게!!!!!” “백번을 생각하고... 천번을 다잡고.... 만번을 억눌렀어.” “응? 그게 무슨....” “며칠전에 비오길래 무작정 밖에 나가봤다. 그냥 벼락 맞으려고. 나 좀 벌 받아야 될 것 같아서 무작정 나갔는데... 내 하늘은 너무 착해서... 그냥 용서하기로 했나봐. 내 하늘이 착해서... 그게 더 화나더라.“ “응? 무슨 말이야?” “씨발, 강휴인이랑 백민서만 눈 삔 줄 알았더니.” 비원이의 말에 그 공간이 멈추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지금 내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닌지... 계속 놈의 말을 되새겨본다. “야......... 신비원... 너 지금 설마!!!!” 놈의 표정을 보기 위해 내 팔을 뻗쳤다. 내 손이 놈의 얼굴을 돌리기 바로 직전, 비원이의 팔이 내 손목을 낚아챘다. “..............내 얼굴 보지마....” “...................” “지금 내 얼굴 보지마......” “.................” “나 내 하늘한테 죄짓기 싫거든. 마음 정리중이니까.. 내 얼굴 보지마.” 멍하니... 비원이의 흉한 등에 계속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정시언.... 내일... 내 하늘이 햇빛을 내려줄까?” 내일은... 우리의 여행 첫날이다. 87. 햇살 강한 날 밤새 아이들에 대한 안쓰러움과 여행에 대한 설렘으로 잠을 뒤척였다. 덕분에 잠자는 건 그냥 포기, 새벽에 일어나 평상위에 앉아있었다. 엄마, 하늘에서 나 보고 있어요? 있잖아요, 그럼 엄마는 내 마음도 다 알고 있을까? 미래도 알고 있어요? 내가 이 아이들을 지켜줄지, 배신할지도 볼 수 있겠네. 엄마도 느끼고 있을 거야. 아니, 어쩌면 나보다 먼저 알았을 지도 모르지. 휴인이, 환영이, 민서, 비원이 다 착한 거 엄마가 알고 있었죠? 그래서 나 보내준 거 아닌가? 엄마 되게 심성이 고왔으니까, 길 가다 거지나 노숙자 보면 우리 집 데려가서 밥도 먹이고 그랬으니까. 아빠는 법을 어기는 자들을 증오했고, 그래서 법 없이도 살 사람인 엄마와 결혼한 걸까. 엄마는 오히려 법을 어기는 사람에게도 관대한 사람이었는데. 처녀 시절에, 아빠 만나기 전에는 수녀님 되려고 했었다며. 주말마다 이 놈들처럼 고아원도 가고, 양로원도 가고, 소년원도 가고, 병원도 갔다며. 결혼 후에도 구치소 다니면서 사람들 교화시키려고 하길래 아부지도 걱정 많이 했다는데. 엄만 착했지만 그래도 이런 일만 생기면 불타올랐다면서요, 나처럼. 그래서요, 엄마. 나 한 번 해보려구요. 있잖아, 내가 나중에 엄마처럼 범죄자들도 이해해줄지, 아니면 아빠처럼 범죄자들 잡고 있을지... 나도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근데 나 피하지는 않으려구요. 점점 확신이 가, 엄마는 나에게 이 놈들을 보냈고, 이 놈들에게 나를 보냈어. 나... 신은 믿지않아... 신이 있다면... 분명히 이 놈들 행복하게 해줘야 하니까, 그랬어야 옳으니까... 하지만 이 아이들... 지금까지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이 많으니까. 웃을 수 있을거야. 신이 없더라도, 그래서 도와주지 않더라도... 엄마, 엄마가 도와줄 거죠? 신 대신... 엄마가 도와줄 거죠? 홀로 생각을 하는 동안 새벽의 안개가 걷혀가고 날이 밝아왔다. 아름답고도 바보처럼 착했다는 비원이의 하늘은 역시나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비원이의 하늘은 오늘, 그러니까 우리의 여행 날, 미치도록 청명하고 맑은 날씨를 선물해주었다. “아? 누나!!” 감상에 젖어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 휴인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 일어나 씻은 듯 말끔하고 새하얀 얼굴. 목에 걸린 하늘색 수건. “누나가 웬일이야? 잠꾸러기가 일찍 일어났네!!” 어린아이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우리들 중 잠이 제일 없는 휴인이놈. 오늘도 혼자 일찍 일어나 씻은 후에 다른 사람들을 깨울 생각이었던 것 같다. “잠이 안 와서.” “나도 잠 설쳤어, 나 여행가는 거 처음이라!!” “아, 손은 괜찮아?” “응응!! 붕대감아서 씻을 땐 좀 불편했는데 그래도 괜찮아!!!! 나 혼자 대충 치료하면 어딘가 좀 이상했는데 누나가 치료해주니까 상처도 더 빨리 없어지는 것 같구, 아프지도 않구 그래.“ 조잘대는 휴인이. 이 놈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느껴지는 감정이 어찌나 많은지. 엄마의 마음처럼 놈을 보면 귀여워 미치겠다가, 애틋한 연인처럼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다가, 든든한 누나처럼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주고 싶다가, 어쩔 수 없는 여자친구처럼 놈의 어깨에 확 기대고 싶다가... 나를 향해 씨익 웃어보인 휴인이는 하늘을 보고 소리쳤다. “민서가 좋아하는 날씨네!!” “.......... 민서?” “응!! 민서가 좋아해, 햇살 가득한 날씨!!” 안 어울리게시리. 그 음침한 기지배는 비오는 날이나 바람부는 날을 좋아해야 어울리거늘. “거의 누구나 좋아하지 않나, 이런 맑은 날씨.” “응, 근데 민서는 특히 더 좋아해. 특히 눈이 부실 정도로 강한 햇살.” “왜?” “..........제대로 맞이한 기억이 없댔거든.”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단 한 번, 단 하루 뿐이었대. 눈부신 햇살 속에 서 있었던 적이. 정말 자신의 본모습 그대로 하늘 아래 있었던 적이 딱 하루 뿐이었대. 그래서 언제나 그립대. 햇살만 보면 눈물날 거 같아서 눈이 시리다고.“ “딱 하루 뿐이라니....” “우리 처음만난 날.” “뭐?” “민서랑 나랑 환영이랑 비원이랑 처음 만난 날, 그 날이었대, 햇살 처음 본 날이.” “................ 지금도 보잖아.” “지금은 본모습이 아닌가 보지.” “휴인아, 누나는 지금 무슨 말 하는 건지 이해가 잘 안 가는데...” 민서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휴인이는 처음 본다. 민서가 맨날 모자를 쓰고 있어서 저런 말을 하는 건가? 그러게 기지배, 눈도 이쁘던데 뭐하러 맨날 야구모자만 쓴대? 머리도 긴 게 야구모자나 푹 눌러쓰고... 귀신도 아니면서 너무 자기 얼굴을 꽁꽁 숨기려들어... 화제를 돌리기 위해 일부러 억지웃음을 띄며 휴인이를 향해 물었다. 마침 궁금했는데 잘됐다고 생각하며. “근데...... 너희는 어떻게 처음 만났어?” “운명적으로.” 눈을 찡긋 하며 대답해주는 휴인이. “뭐야, 그게!!!” “그러니까 그런 거 물어보면 안된다구요, 반칙이잖아, 누나.” 에이, 내 딴에는 유도심문한다고 한 건데... 넘어오지 않은건가. 하긴, 넘어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은근히 예리하다니까, 휴인이놈. “누나, 밥은 줬어?” 예리한 휴인이 놈을 향해 눈을 흘기고 있을 동안, 대문 밖을 빼꼼히 내다보고 있던 휴인이가 나를 보며 큰 소리로 묻는다. “밥? 누구 밥?” “치토스 밥!!” “아, 그거 어제 오면서 기름 만땅으로 채워놨....” 어라? “야, 너 그 차 별명이 치토스인 거 어떻게 알았어!!!!!!!!!” 김형사님이 붙인 치타라는 별명을 무시하고, 내가 새로 지어준 똥차의 별명, 치토스. “그냥 딱 봐도 치토스란 말이 나오는걸?” 휴인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누나는 뭘 그런 걸 물어봐, 라고 묻는 듯한 말투로. 역시 저 놈과 내가 사귀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우리는 기묘하게 정신적으로 연결된 부분이 있을 거다. 아니, 그렇게 따지면 어제 비원이도 알고있었다. 내가 여행지로 선택한 곳이 없다는 걸, 그냥 발길닿는 대로 가고 싶어한다는 걸. 이렇게 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그 놈들과 나는 서로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친밀해졌다는 것. 서로 표정만 봐도 기분을 알고, 서로의 손만 잡아도 사랑을 느낀다는 것. 다섯 사람중에 단 한 사람만 빠져도... 이미 그건 [관계자 외 출입금지]가 아니라는 것. “오케이, 그럼 가볼까!!!” 각자의 짐과 가방을 싣고 트렁크를 쾅 닫으며 활기차게 소리치는 나. “일주일이다!! 우리 그동안 미친 듯이 신나게 노는 거야, 알았지?” 나뿐만 아니라 모두 다 들뜬 듯한 모습이었다. 휴인이는 말할 것도 없고, 침착한 환영이까지도. 비원이도 평소에는 쉽게 볼 수 없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으니까. 다만 신경쓰이는 것이 있다면, 그가 민서의 모자 중에 하나를 빌려쓰고 있었다는 것. 그의 하늘에게 미안해서일까. 저렇게 당당하고 거만하게 구는 비원인데, 도대체 나의 어떤 면을 좋아하게 된 걸까. 깔끔하고 귀공자같은 아인데.... 왜 하필 그가 나를 좋아하게 된 걸까. 분명 그의 하늘을 나와는 상반된 스타일의 여자였을텐데... 아름답고 사랑스러웠겠지, 덜렁대고 실수투성이인 정시언과는 달리. 고마워, 고마워요, 비원이의 하늘님. 비원이, 지금 잠시 흔들리고 있는 거 뿐이예요. 그냥 세상에 버려진 자신들을 챙겨주는 게 나 뿐이니까, 나에 대한 호감을 잠시 애정으로 착각하고 있는 거니까, 너무 걱정마세요. 난 보여요. 난 알 수 있거든요. 하늘을 이야기할 때 비원이의 표정은... 당신이 아니면 그 누구도 이끌어낼 수 없는 그런 표정이거든요. 나로서도 처음보는 비원이의 표정, 비원이가 가장 아름다운 표정을 지을 때는... 자신의 하늘을 이야기할 때 뿐이거든요. 그러니까, 오늘 햇살을 내려준 거 고마워요. 나 같으면 심술궂게 거친 폭풍우를 내려줬을 지도 모르는데... 당신은... 이렇게 맑은 날씨를 선물로 주네요. 그러니까 나... 되게 행복하게 즐기고 올게요, 애들...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올게요. “자, 가자!!” 마지막으로 소리치며 아직도 차 안에 안 들어가고 대문 곁에 서 있는 민서를 보았다. 평소에 애용하던 검은 모자를 비원이에게 빌려주어서인지, 그녀는 흰 색 야구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왜 그리도 눈부셨을까. “민서야, 가자니까?” 그녀 옆으로 가 어깨를 툭 치며 소리치는 나. “햇살..........” “민서야?” “날씨 죽이네.” 민서의 입꼬리에 웃음이 어렸다. 미묘하게도 비웃음과 순수한 미소가 섞인 듯한 표정. 멍하니 바라보는 나를 무시하며 민서는 치토스의 뒷문을 열고 자신의 몸을 구겨넣었다. 늘씬한 각선미를 뽐내면서. “누나, 빨리 가자!!!!!” 조수석에 앉아있던 휴인이가 떼쓰는 듯 나를 재촉한다. “어, 알았어, 간다!!” 바로 뛰어 운전석을 차지해 앉는 정시언. 조수석엔 휴인이, 뒷자리에는 나란하게 앉은 환영이, 비원이, 민서. “출발한다!!” “응, 누나, 우리 바다가는 거 맞지?” “웃기지마, 산에 가는거지?” 맙소사, 휴인이와 민서의 2차 전쟁이 일어나려는 그 찰나, “우리 그냥 아무데나 가요, 누나.” 재빠르게 끼어드는 환영이. “..... 으... 응?” “괜히 여기 가자, 저기 가자 정하지 말고... 그냥 아무데나 가요, 흘러가는대로.” 비원이 뿐만 아니라 환영이의 생각도 나와 마찬가지였다. 역시 우리에게 틀에 박힌 채 계획대로 행동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았다. 평소 좀처럼 자신의 의지를 내세우지 않는 환영이었기에 휴인이와 민서도 곧 그 의견에 동의하고 잠잠해졌다. 나로서는 다행이었다. 비원이도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띄고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이렇게 햇살좋은 날, 우리는 여행을 시작한다. “자, 이제 진짜 출발한다!!!” 88. 묶이다 “누나, 우리 지금 여행가는 거 맞긴 해?” “야, 나 슬슬 지겨워질라 그런다.” 슬슬 터져나오는 불평불만. 휴인이와 비원이의 입에서 불만이 먼저 튀어나왔다. 이것은 곧, 좀 있으면 성질 급한 민서가 무지막지하게 나에게 욕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나에게 알려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뿐인가? 민서가 한바탕 욕하고 나면 환영이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우리 지금 집에 가요.] “역시 이래서 어린 것들 데리고 나오면 연장자가 피곤한 거다!! 좀 닥쳐, 좀!!” 괜한 미안함에 내가 버럭 화를 내면...... “장난하냐, 지금 시속 20킬로로 가면서!!!!? 우리가 거북이야??” 민서가 더 큰 소리로 맞받아친다. 그렇다, 나 정시언.... 운전면허증은 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장롱면허에 불과한 것이었다. 면허증만 따놓고 실제로 운전해본 건... 어디보자, 두 번인가, 세 번인가? 그것도 이온이가 아파서 달랑 동네 병원까지만 갔었다지. 이온이는 아픈 와중에도 내가 운전하는 차는 안 타겠다고 발악을 했었다. 결국 그 나쁜 기지배는 갈 때는 내 차로 가더니만, 집에 올 때는 걸어서 왔다. 이온이의 삶에 대한 욕망은 그렇게나 경이로울 정도였다. “원래 운전이라는 게 임마, 급할수록 사고도 나고 그러는거야. 천천히, 천천히. 안전운전 최고운전, 운전벨트 생명의줄!!! 그런 구호도 모르냐!!!“ “아니, 이건 좀 심하다고 생각해, 누나. 뒤에 차들 빵빵거리는 거 안 들려?” “닥쳐, 강휴인. 나 운전하는 데 집중해야돼.” 아닌 게 아니라 지금 내 머리는 쭈뼛거릴 정도로 온 몸에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으며 얼굴에는 땀 몇 방울이 삐질거리며 내려오고 있었고,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으며, 손과 발은 달달달 떨리고 있었다. 휴인이는 그런 내 모습에 질린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려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나 답답해서 담배피고 싶어.” 비원이의 말은 나를 승질나게 하기에 충분했으며, “그냥 좀 쉬다가도 괜찮아요, 누나. 어차피 정해진 목적지도 없는데.” 환영이의 착한 말투를 듣는 것조차도 짜증이 일었다. “야, 그냥 운전 내가 해?” 그 순간, 내 귀를 파고 들어온 민서의 한 마디. “니가? 운전을? 웃기고 있네!!” 운전하며 곤두선 신경을 잠재우며 가까스로 대답해주었다. “너보단 잘할걸.” “됐어, 어린 놈들한테 운전시킬 정도로 난 막돼먹지 않았거든.” “지겨워, 정말. 이게 뭐야.” 신경질이 가득한 말투로 모자를 더 깊이 눌러쓰는 민서. “누나, 나 심심해. 우리 노래 듣자!!” 그 순간, 휴인이의 손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카오디오를 재생시켰고 그 안에서는 김반장님이 사랑하는 ‘고속도로 트로트 메들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오홀로로로로~ 오호로이히!! 아싸, 좋다!!” 생소한 트로트에 잠시 놀라던 휴인이는 곧 노래에 적응하여 한바탕 난리를 피웠고 환영이, 민서, 비원이도 그 분위기에 동화되어 가는 듯 했다. 그러나 나는!! 운전하는 나는!!! 집중이 안된단 말이다!!! “야, 꺼!!! 내가 좋은 말 할 때 노래 꺼!! 너 나중에 휴게소 들렀을 때 맞기 싫으면 지금 바로 노래 끄란 말이다!! 정신 사나워!! 운전 안돼!!!“ 나의 애절하고 시끄러운 애원에도 불구하고 심심함에 몸부림 치던 그들은 쉽사리 노래를 꺼주지 않았다. “꺼!!!! 제발 꺼!!!!!!!!! 아아악!!!!!!!!! 노래 꺼어어어어어어!!!!!!!!!” 고속도로 전체에 울릴만큼 절박했던 나의 목소리를... 그들은 무시했다. 그 순간, 내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진동이 한 번으로 끊기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제기랄, 문자가 아니라 전화다. 전화가 왔다. 이걸 받아야 되나, 말아야 되나 미친 듯이 갈등되었다. 운전하는 이 상황은 땀이 삐질삐질 날만큼 두려웠으나, 며칠만에 울리고 있는 전화를 외면할만큼 고립된 인간이 되기 싫었던 나는 기어이 왼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오른 손을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수화기를 빼들었다. 플립을 열고.... 핸드폰을 귀에 대고... 오른 손도 핸들에 마저 올려놓고 나서야... “여보세요?” 시끄럽다, 안들린다!!!! ....... 저 토로트 메들리 오기 전에 내다 버릴걸......... 이미 네 명의 소년소녀들은 난생 처음 접해보는 트로트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어버렸다. “노래 끄랬지!!!!!!!!!! 강휴인, 빨리 안끄냐!!!!!!!!!!!!!” 나는 흡사 괴물이 날뛰듯 광분하는 목소리를 내고 말았고, 그에 놀란 듯이 휴인이는 움찔하더니 노래의 볼륨을 확 낮추었다. - 시언아....... 그리고........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아...........아부.......지.....?” 무의식중에 튀어나와버린 나의 목소리에 차 안은 갑자기 침묵으로 가득찼고... - 대답하기 어려우면 듣기만 해라. 지금 그 놈들하고 다 같이 있는 거 맞지? 틀렸어요, 이미 다 들켰다구요. “네..........” - 이검사가 제안했다, 계획을 좀 더 앞당기면 어떻겠냐고. 이검사가 그러더구나, 니가 이미 주동자와 재벌아들을 찾아낸 것 같다고. 확실치 않아도 괜찮다. 일단 넷 다 잡아놓으면 그 뒤는 이검사가 알아서 한다는구나. 자기가 책임지고 다 알아내겠다면서. 진한오빠가? 하... 정말 가지가지 하는구나. 내가 이 애들하고 같이 지내는 시간.... 그조차도 용납이 안되니? 너는 나를 버리고 다른 여자하고 약혼을 한 주제에.... 왜 나한테는 이 애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시간조차 주지않아? - 시언이 너한테는 미안하지만... 그 차에 위치추적기를 달아놨었다. 아부지....... 이건요, 공평치 못해요. 페어 플레이가 아니라구요. - 지금 놈들을 잡으러 가겠다, 그 속력 유지해라. 말도 안되죠... 이건 말도 안되죠.... 아직 못해요, 세상에 대해 불신만을 가진 아이들이예요. 난 이들의 환한 미소를 더 지켜줘야 할 의무가 있어요. 지금 잡으러 오겠다는 말을 끝으로 아부지의 전화는 끊겼다. 차 안에는 비정상적이라고 생각될 만큼의 침묵이 계속되고 있었다. 아이들은 지금 내 눈치를 보고있을 것이 뻔했다. 난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 아냐, 안돼. 난 아직 잘 알지 못해. 아니야, 다들 착해. 경찰에 잡혀가게 내버려둘만큼 나쁜 아이들이 아니야. 순식간에 스쳐 흘러간 나의 생각은 확고했다. 이것이 나와 아이들의 마지막일 수는 없었다. 어쨌든 지금은 이 놈들을 지켜주어야 했다. “하나 경고할게............” 천천히 입을 열며 차의 백미러 뒤를 살폈다. 역시나 동전만한 크기의 작은 장치가 붉은 빛을 내며 붙어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그 위치추적기를 떼어내 도로 한가운데에 던졌다. 그러한 나의 행동을 보고 놈들은 긴장한 듯 더욱 더 움츠러들었다. 나는 조용한 그 분위기에서 작지만 확신에 찬 어조로 중얼댔다. “다들 꽉 잡아.” 내 말에 어리둥절해하는 듯한 아이들을 한 번 둘러보고는.......... “으악!!!!!!!!!!!!!! 누나!!!!!! 악!!!!!!! 내가 잘못했어!!!!!!!!!” “야, 내 목숨은 하나 뿐이다!!!!!!!!!!!” “정시언, 죽으려고 환장했어???” “누나, 차라리 천천히 가요!!!!!!!!!” 그리고, 일제히 터져나오는 그들의 비명소리. 시속......... 200을 넘고있다. 시속을 가리키는 바늘이 어디까지 향할지 모르겠다. 중요한 건, 이 아이들이 잡혀서는 안된다는 사실 뿐이다. 지금의 나에게는 그 사실 외에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죄송해요, 아부지... 하지만... 잡혀가게 둘 순 없어요.... 다가오지 말아요, 따라오지 마세요, 건들지 마세요......... 제발.... 우리끼리 행복할 시간이라도 주세요, 내버려둬요....... 조금이라도 웃을 수 있게. 조금이라도 함께 있을 수 있게. 우리...... 지금처럼... 그냥 그대로 사랑할 수 있게. “계곡이다!!!!” 잠시 쉬기 위해 차를 세운 곳. 휴인이는 방방 뛰며 그 곳을 계곡이라 칭했지만 아무리 잘봐준다 해도 우리가 멈춘 곳은 마을의 실개천에 불과했다. 휴인이는 어린아이처럼 바로 개천으로 뛰어갔고, 환영이는 그런 휴인이를 말리기 위해 뒤쫒아갔다. 진이 빠져버린 나와는 달리 아이들은 밝은 모습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알고있었다, 내가 자신들을 지키기위해 한 번의 난관을 통과했다는 것을. 그들이 나에게 보답할 수 있는 길은 하나 뿐이었다. 알고있는 척 하지않고 억지로라도 밝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 한 시라도 빨리 내 머릿속에서 그 사건을 들어내버리는 것이었다. “너무 마음쓰지마라.” 차 밖으로 나오자마자 비원이가 내 뒤에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 비원아........” “.................. 고맙다.” 고맙다는 말을 듣기위해 한 짓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괜시리 마음이 따뜻해졌다. 나는 그만 피식 웃어버렸고, 비원이는 기지개를 키며 휴인이와 환영이가 있는 실개천 쪽에 합류했다. 나는 그들과는 스무 발자국 정도 거리가 있는 곳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게 뭐야?” 그 순간, 밖으로 나오지 않고 차에 가만히 앉아있던 민서가 무언가를 들고 나왔다. 엥? 수갑......... 수갑이다. 김형사님도 정말!!!!!!! 아 진짜 나 미치겠네!!! 저런 걸 차에 왜 두냐고!!!! “이거... 어디보자... 이렇게 하는 건가?” 그러나 당황스러워하는 나와는 달리 민서는 처음 본 수갑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 나도 마음을 놓고 수갑을 뺏어들었다. “아니지, 잘 봐. 여기 이렇게 내 손에 채우고... 니 손에도 이렇게....” 시범을 보여주기 위해 그녀와 내 손에 직접 수갑을 채우는 나. “아....... 이렇게 하는 거구나.” “그래, 이게 절대 안 풀린다고, 이제.” 이제...... 절대... 안풀린..........뭐? 잠깐만!!!!!!!!!! 이런 젠장!!!!!!!! “민서야!!!! 열쇠!!!!!! 열쇠!!!! 열쇠 없었어? 이 수갑 열쇠!!!!!??” “..........뭐....... 이거?” 미친듯이 소리를 쳐대는 나를 향해 민서는 은색의 작은 열쇠를 쳐들어보였다. 아...... 다행이다, 열쇠도 같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내가 편히 한숨을 내쉬던....... 그 순간이었다. 민서는 바로 밑에 있는 하수구 속으로 열쇠를 휙 던져넣었다. 그렇다, 수갑을 가지고 놀던 건 우연이었으나.... 그녀가 열쇠를 던져버린 건 의도적이었다. 벙쪄버린 내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면......... 태연하게 한마디 내뱉는 그녀의 말은......... “어떡하냐, 잃어버렸다.” 그녀의 말은....... 우리가 이제 묶여버렸다는 기막힌 사실을 내게 알려주었다. 89. 하나 됨의 의미 “야, 너 미친 거 아니냐!!!!!! 이거 어쩔거야, 엉? 야, 이거 어쩔거냐고!!!!” 상황파악이 된 후.... 민서에게 미친듯이 소리치고 있는 나. 꿈이기를 바라고 바랐으나.... 내 오른손과 민서의 왼손은 수갑으로 나란히 묶여버렸으니.... 그래도 어디서 키 작다는 소리는 못 들어보았으나... 오늘은 나보다 키가 훨씬 큰 민서를 향해 바락바락 승질을 내고있다. 마치... 공룡이 불을 뿜듯이... 멀리서 지켜보던 다른 놈들의 눈에도 민서가 아주 가련하게 보였을 거다. 난 나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 그녀의 목을 잡고 잘잘잘 흔들고 있었으니까. “그걸 버리면 어떡해, 그거 아무데서나 구할 수 있는 건 줄 알아?” “................” 아무 말 없이 나를 내려다보는 민서. 내가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데도 표정의 변화조차 없다. 얼굴이 빨개지지도 않았어... 이 년은 불사조인가....? “숨 쉬기 힘들어.... 손 내려.” 한참 후에 내뱉은 그녀의 한마디. 저 개똥폼, 남자애들이랑 살다보니 이게 허세만 늘었나, 정말... “못 내린다, 이년아!!! 너 지금 나랑 장난까냐, 엉!!!??” 그리고 그 순간.... “아씨, 말 좀 들어먹어라...” 조용히 중얼거리며 자신의 왼손을 확 내려버리는 민서. 덕분에 수갑에 묶여있던 내 오른손도 휘리릭 따라 내려와버리고. “너 지금 장난치냐!!!? 넌 지금 나한테 목이 천번만번을 졸려도 할 말이 없” 그녀에게 괘씸함을 느낀 나는 나머지 왼손을 올려 한 손만으로도 그녀의 목을 졸라버리려 했으나....... “그만 좀 해, 어쩔 수 없잖아, 이미 묶인건데.” 그녀는 너무 쉽게 자유로운 자신의 오른손으로 내 왼손을 붙잡아버린다. 아니, 이 년 이거... 왜 이렇게 힘이 세, 나도 어디서 힘 약하단 소리는 못 들어봤는데. 서로의 양 손을 맞잡고 있는 이 포즈는 뭐냐.... 왈츠 추자는 것도 아니고... 여자 둘이서 이 좋은 여행날에 이게 뭔 짓이야... “나 이 열쇠 여분 없다. 우리 이거 못 풀어, 경찰서 가야돼.” 경찰에 간다는게 무슨 뜻인지... 너 알기나 해? 너 주동자잖아, 바보야...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주동자인 니가 경찰서에 니 발로 들어가야된다구. 지켜주려고 해도 왜 니가 먼저 빗나가니, 짜증나게. “왜그래, 무슨 일인데.” 그 때 무언가 심상찮음을 느낀듯한 비원이가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발견했다. 수갑으로 하나가 된 민서와 나의 손을. 물끄러미 수갑을 바라보던 비원이는 한숨을 푸욱 내쉰다. “미치겠다, 한 시도 가만있질 않아.” “야, 신비원!!! 이거 수갑... 저기, 그러니까 물론 내가 묶긴 했다만!!!! 이거 열쇠는 민서가 가지고 있었는데, 그걸 아주 그냥 고의적으로다가 하수구에 빠뜨려가지고!!! 그러니까 이건 내 잘못이 아니라!!!“ “뭐? 야, 정시언!!! 누가 고의적이라는거야? 나는 너랑 묶여있고 싶은 줄 알아? 손이 미끄러진거야, 미끄러져서 열쇠를 떨어뜨린 거고, 그게 병신같이 하수구 구멍안으로 빨려들어가서 그렇지, 내가 일부러 그랬냐고, 엉?“ “웃기지마, 상식적으로 그게 손이 미끄러워질 타이밍이었냐!!!!!???” “금단증상이야, 금단 때문에 손이 미끄러웠어, 그러게 담배끊으란 소릴 왜 해!! 담배 너나 끊지, 왜 우리한테도 끊으라고 강요를 해?“ “누가 강요했어, 내가 니네 담배안피면 더 많은 사람 도울 수 있을거라 그랬지, 언제 끊으라고 강요했냐, 엉?“ “그게 강요한거지, 그럼 권유한거냐?” “아, 이게 진짜 언니한테 까불고 있네, 너 이 수갑 어쩔거야!!!!”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니가 열쇠 버렸잖아!!!!” “버리다니, 잃어버린거야!!!!” “그럼 찾아와, 잃어버린거 찾아와!! 고의가 아니니까 나한테 존나 미안할 거 아냐? 나한테 미안한 마음이 있으면 찾아오라고!!!“ “너한테 한 개도 안 미안해, 너랑 묶인 내 몸한테 미안하지!!!” 한창 그녀와 말다툼하고 있는 그 순간... 머리에 엄청난 충격이 전해져왔다. 그렇다, 싸우고있는 민서와 나를 보다못한 비원이가 우리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가격한 것이었다. “아, 왜 때려!!!!” “그러게, 넌 툭하면 손이 올라가더라!!!? 난 너보다 나이많은 누나란 말이다!!” 다시 합심하여 비원이와 맞서는 민서와 나. “닥쳐, 이거 어쩔거야? 지금 내가 니들을 이뻐할 상황이냐? 때릴 상황이지.” 한숨을 푸욱 내쉰 비원이는.... “정시언, 핸드폰 빌려줘.” 나를 향해 한마디 내뱉는다. “핸드폰은 왜?” “해커 애들한테 전화하게, 열쇠 구해놓으라고 할게.” “.......... 걔들은 열쇠 구할 수 있대?” “일단은 해커니까, 못하는건 없다고 봐야지. 걔들 아래에서 활동하고 있는 해커나 파파라치 조직도 한 두 개가 아닌데, 그 중에 누군가는 구할 수 있겠지, 뭐.“ 비원이의 말에 힘은 얻은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민서와 묶인 내 오른손을 움직여 주머니로 가져갔다. 오늘 딱 붙는 청바지를 입은 탓에 민서의 손이 내 다리에 닿았고, 그녀의 얼굴은 급속도로 빨개져버렸다. “야, 좀 조심해!!!! 손 닿잖아!!!!” “아, 그게 왜!!!!” 승질내며 여전히 핸드폰 꺼내는 데 낑낑대고 있는 나. “기지배가 정말... 조심성 하나도 없이....” “아따, 같은 여자끼리 너무하시네. 너 자꾸 그렇게 순진한 척 하지마라, 꼴사납게.” 민서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최대한 내 다리에 손이 닿지않게 손을 피하고 있었다. “야, 좀!!! 너땜에 내 손이 니 손 따라가잖아!!!!” “빨리 꺼내!!! 무슨 핸드폰 꺼내는데 천년만년이 걸리냐!!!!!” “힘들어서 그래, 힘들어서!!!” “그러니까 살 좀 빼!!! 니 주제에 무슨 딱 붙는 청바지야!! 몸빼입어, 몸빼!!!!” 얼굴 붉어진 민서, 핸드폰 찾느라 낑낑대는 나, 중간에서 당황해하는 비원이. 결국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나는 자랑스럽게 그것을 비원이에게 건넸다. 물론 아부지한테 다시 전화가 올까봐 꺼둔 전원을 다시 켠 채로. 어이없는 표정으로 핸드폰을 받아낸 비원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숫자 몇 개를 누르고 수화기를 귀에 댄다. “해커 애들은.... 핸드폰 있나보네.” 혼잣말인듯 꺼낸 내 말에... “정보사냥꾼인데... 보고받을 정보가 물밀듯이 넘치니까. 걔네한테 핸드폰 없는 건 시력나쁜 사람한테 안경없는 거, 학교다니는 학생한테 교복 넥타이 없는 거, 휴인이한테 뿅망치 없는 거랑 똑같은 거야.“ “......... 되게 와닿는 표현이네.” 내가 민서의 표현력에 감탄하고 있을 무렵..... “어, 열음아. 나 비원인데....” 비원이는 해커의 열음이와 통화연결이 되었고.... “수갑 열쇠 좀 구해줘. 수갑 모델 넘버? 잠시만, 기다려봐.” 나는 비원이를 향해 수갑을 들이밀며 수갑의 모델넘버를 보이게 해주었고. 비원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열음이에게 모델넘버를 가르쳐주었다. “.......... 해커 애들.... 화난 거... 아니야?” 조심스럽게 민서를 향해 묻는 나. 그리고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되묻는 민서. “뭐? 왜?” “........아니, 활동중단하라고 했다며.... 해커애들 보면 너희들을 굉장히 존경하는 거 같던데..... 내가 돌아온 것도 싫을테고... 여러모로 나한테는 되게 화나있을텐데.” “............. 걱정하지마.” “............ 응?” “뒤지게 혼났어, 비원이한테.” “.............. 뭐?” “그때 너한테 버릇없이 군 거 때문에. 해커들 때문에 너 밤낮 안 가리고 울어댄거잖아. 이진한 그 개새끼가 너 끌고 병원으로 갔을 때... 비원이가 해커 애들 불러서 뒤지게 혼냈다고.“ “나.... 나 때문에? 나... 괜찮은데... 그럴 필요까지는....” “여자 울리는 꼴, 그거 비원이가 못보지.” 비원이를 슬쩍 뒤돌아보았다. 통화에 열중하느라 놈은 어느샌가 저만치 멀어져있었다. “어쨌거나 해커는 너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애들이니까... 누나한테 버릇없이 행동했다고. 좋게 말할 방법도 있었을텐데 널 울렸고. 특히나 해커의 준휘 성격이면 너한테 협박도 몇 번 했을 거 아냐?“ 족집게다.... 그렇다, 난 준휘에게 협박도 몇 번 들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를 위험하게 하면 자기가 가만 안 있겠다고. “너에 대해서나, 해커에 대해서나.... 우린 알고 있는 게 더 많아. 그러니까 걱정하지마. 니 주위에 있는 힘겨운 일들, 우린 하나씩 처리하고 있어. 너 혼자 끙끙댄다고 해결될 거 없으니까 혼자 알아서 해내겠다고 애쓰지마. 이번 일도... 솔직히 해커애들로 인해 알게된 게 아니라면.... 더 좋게 이야기 할 수 있었는데, 괜히 너한테 충격줘서 병원신세 지게 한 거 같아서 다들 미안해했어.“ “...................” “앞으로 참지마, 해커애들이 짜증나게 하면 비원이한테 말해, 단번에 해결되니까.” 해커를 무서워했었다. 내가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곁으로 돌아간다고 결심 한 날도, 마음에 걸리는 단 한 가지 문제가 바로 해커였다. 해커놈들과 나는 서로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 애들을 스파이인 나를 싫어했다. 자신들의 우상에게 해를 입히는 사람이니까. 그러나 [관계자 외 출입금지]는 알고있었다. 해커가 나에게 무언의 압력을 언제나 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내 편을 들어주었다. 자신들에게 맹목적으로 충성을 다하는 해커를 혼내면서까지, 자신들을 감옥으로 밀어넣으려는 정시언을 위하고 지켜준 것이다. “너 감동했지?” 씩 웃으며 내게 말을 건네는 민서. 아무 말도 없이 땅만을 바라보고 서 있는 내 모습을 보며 놀리듯 말한다. “돼, 됐어!!! 내가 그딴거에 감동을 왜 받냐!!!!” “에에~ 감동받았구만.” “놀고있네!!! 니네들이나 나한테 버릇없이 굴지마, 제발!!! 너랑 비원이랑 휴인이에 비하면 해커애들은 양반이거든?? 사돈 남말하고 있네, 진짜!!! 내가 니들때매 운 거지, 해커때매 운 거냐? 특히 또!! 너랑 비원이는 임마, 나한테 야야 거리질 않나, 욕을 해대질 않나!!!“ 감동받은 사실을 숨기기 위해 버럭버럭 성질을 내고 있지만... 고마워, 고마워.... 말로만 너희들을 지켜준다고 떠들어댄 나와는 달리... 너희들은 정말로 나를 지켜주고 있었어. 말 그대로, 너희들의 목숨까지 걸고서. “그러니까....” 민서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 “참지 마, 기억해둬. 앞으로 너한테 화낼 수 있는 사람은 우리 뿐이야.” “...............야, 잠깐만. 그 말 재수없어, 그건 도대체 무슨 말도 안되는 자신감이냐. 난 니들이 나한테 화내는것도 마음에 안 들..” “그 말 뜻은....” 민서는 햇살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다시 나에게로 눈을 돌린다. 모자로 얼굴을 가렸으나 그녀의 눈은 나와 당당하게 마주치고 있음을, 난 알고있다. “앞으로 너를 모욕하는 건, [관계자 외 출입금지]를 모욕하는 거와 같다는 거야.” 90. 입술과 입술이 맞닿을 때 민서의 말을 듣자마자 나도 하늘을 향해 눈을 돌렸다. 칭찬같은 그런 말들은... 언제나 내 심장을 쿵쾅쿵쾅 뛰게 만들어. 나를 가만히 쉬게 내버려두지 않아. 얼굴이 화끈거리고, 온 몸에 열이 나고, 심장은 더 크게 울리고... 너희들에게 받게되는 감동은... 언제나 내 몸 전체를 울렁거리게 해. “누나, 계곡에서 이거 주웠다!! 이쁘지? 하트모양 돌!! 누나 줄게!!!” 계곡이 아니라 마을의 실개천이라니까..... 때마침 실개천에서 놀다온 휴인이와 환영이가 민서와 나에게로 다가왔다. 휴인이의 손에는 하얀 하트모양의 조약돌이 들려져있었다. 조약돌을 내 오른손에 올려주려던 휴인이는.... 휴인이는..... “이게 뭐야!!!!!!!!!!!!!!!” 민서와 내 손에 오붓하게 채워진 수갑 발견. “열쇠!!!! 열쇠!!!! 열쇠!!!!!!!!!!!!!!!!!” 나보다 더 오도방정을 떠는 내 어린 남자친구. “없어.” 민서가 잃어버렸다고 하면 이 개념없는 자식들 둘이 또 싸우게 될 것 같아... 그냥 열쇠가 없다고만 말해버렸다. “뭐야, 그럼 어떡해?” “.......비원이가 전화하고 있어, 해커애들한테 열쇠 구해놓으라고 한다는데.” “그럼 여행!!! 여행기간동안 둘이서 이러고 있겠다고????” 휴인이의 말을 들으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즐기려고 온 여행, 시달리다 갈 것 같은 느낌이 팍팍 밀려왔다. 그래도 뭐, 이왕 묶인 거 한탄한다고 수갑이 풀릴 리는 없지않은가. “어쩔 수 없지, 뭐.” “잠은 어떻게 잘건데!!!!!” “잠은 원래 민서랑 나랑 둘이 자야지, 당연히. 남자애들이랑 부대껴 잘 순 없잖아.”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내 말에 경악하는 휴인이. “잔다고? 같이 잔다고? 지금 누나 제정신이야?” “...... 너 왜 그래, 다섯명이 다 같이 잘 순 없잖아!! 민서랑 나랑 둘이 자야지!!” “와, 나 미치겠다!!! 말도 안돼, 누나!!!!!” “.......... 환영아, 얘 왜 이러니?” 말도 안되는 트집을 잡는 휴인이를 보며 환영이에게 되물었지만... 환영이의 표정도 심상치않았다. 그 뿐인가, 민서의 얼굴은 또 다시 벌겋게 변해있었다. “누나, 나도 같이 자자, 그게 더 안전해, 응?” 휴인이의 말도 안되는 투정은 또 다시 시작되었다. “됐어, 그만해. 말도 안되는 소리 그만하시구요.” “화장실은 어떡할건데!!!!!” “같이 가야지, 어차피 여잔데, 뭐.” “어떻게 그런말을 할 수 있어? 지금 민서랑 화장실을 같이 들어가겠다고?” “아, 그럼 어떡하라고!!!!” “샤워는!!!!!!??” “같이 해야지.” “아, 누나 정말!!!!!!!!!!!!!”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않는다. 지금 휴인이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건지, 환영이가 왜 헛기침을 반복하는건지, 민서의 얼굴이 왜 점점 빨갛게 익어가는건지. “니들 정말 왜 그래, 중요한 건 운전이나 요리하는거지, 샤워나 잠이나 화장실이 아니라니까.“ “누나 지금 장난해? 운전은 누나가 왼손으로 하면 되고, 요리는 환영이가 하면 돼. 중요한 건 샤워나 잠이나 화장실이야.“ “왜?” “................. 그러니까... 그게....” 할 말을 못하고 있는 듯... 굉장히 답답해보이는 휴인이. “아우, 씨발!!!!!! 백민서 이 수갑 니가 채웠지!!!!?” 그리고, 번개같이 민서의 멱살을 잡아채는 휴인이놈. “야, 니들 왜 이래!!!!!” 묶여있는 손 덕분에 휴인이의 공격을 방어하지 못하고 잡혀있는 민서. “야, 놔놔, 니들 정말 여기와서까지 싸울래?” 내가 말려봤자... 씨도 안 먹힌다. “그만해, 이미 수갑 채워진거야, 어쩔 수 없잖아.” 다행히 힘 센 환영이가 나서주었고, 그는 손쉽게 민서의 멱살을 잡은 휴인이 손을 풀어주었다. “아, 짜증나!!!!” 휴인이는 허공에 대고 주먹질을 하며 신경질을 있는대로 내고있다. 아니, 도대체 왜 저러는거야. 환영이는 힘으로라도 수갑을 풀어보려는 듯 꼼꼼하게 수갑을 상피고 있는 중. 그런다고 자동으로 잠기는 수갑이 풀어질리는 만무한데.... “이거 진짜 어떡하지....?” 환영이가 중얼거리는 순간.... 난 똑똑히 들었다, 민서가 작게 웅얼거리는 소리, 혼잣말같은 그 소리. “씨발.... 거기까진 생각을 못했어... 병신....” 뭐야, 이 년? 봐 봐, 고의적으로 한 거 맞으면서!!! 꼬시다, 이 년아. 결벽증에 시달리는 기지밴데 나랑 같이 샤워하고, 화장실가고... 내가 낱낱이 보아주겠다, 그렇게 니가 아끼는 니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백민서.....” 그 순간... 뒤돌아서서 화를 삭히던 휴인이가 진지한 목소리로 한마디 내뱉는다. “나 너 한 대만 때려도 되지?” 그렇게 무시무시한 소리를 중얼거린 놈. 아니, 민서가 동네북도 아니고!!! 휴인이나, 비원이나!!! 왜 다들 여자인 민서를 못 때려서 안달인거야!! 순간, 내 눈앞에 이 놈들의 모습이 슬로우모션처럼 보여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비원이는 그동안 손바닥으로 민서의 뺨을 때렸으나... 휴인이는 아니다.... 저건 주먹이다!! 지금 날아오는 건 주먹이다!! 민서가 날 좋아하는 건 알지만, 그 때문에 휴인이도 신경 쓰이겠지만, 그래도 민서는 여자잖아. 난 여자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좀 안심해도 될텐데. 왜 그렇게 민서를 견제하는 거야? 어제 비원이가 나에게 고백 비스무리한 말을 지껄인걸 알게되면... 휴인이는 비원이에게도 똑같이 행동할까? 어쨌든 신성한 이 여행에서 폭력은 용납할 수 없다, 는 생각이 내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결론은 하나, 이 내 몸뚱아리 희생해서 폭력사태를 막는 것 뿐이었다. 환영이도 다른 곳을 보며 한숨을 내쉬는지라 휴인이의 주먹을 막을 순 없어보였다. 내가 눈을 질끈 감고 휴인이의 주먹을 대신 받아내려는 그 순간!! 수갑에 채워진 민서의 왼손이 내 오른손을 부드럽게 감싸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빛의 속도로 나를 옆으로 홱 밀쳐내었고, 내가 그 힘에 튕겨나가는 즉시 자신의 오른 손으로 휴인이의 주먹을 받아내었다. 그러니까 상황은..... 휴인이의 주먹을 대신 받아내려던 나는 민서의 힘 덕분에 옆으로 비껴나갔고, 휴인이의 주먹은 민서의 오른 손 안에 얌전히 박혀버렸다... 고나 할까? 그리고 결정적인 건.... 내 수갑에 묶여진 채로 꽉 잡고있는 민서와 나의 손이었다. “............. 치사해, 한 손 묶여있는 나한테 이러기야?” “..........백민서 너........” “이 새끼 진심으로 때렸구만... 손이 얼얼해.” 민서는 휴인이의 주먹을 내던지며 투덜거렸다. 그나저나 대단해... 여자인데도 불구하고, 휴인이의 주먹을 막았다. 정말 항상 느끼는 거지만 민서는 여자치고 힘이 더럽게 세다. 남자놈들과의 싸움도 거부감없이 받아들인다. “싸움은 수갑 풀리고 나서 해도 안 늦어.” “너 누나한테 손끝 하나라도 대봐, 가만 안 둬.” “건드릴 거나 있어야지.” 뭐? 백민서 너 지금 뭐라 그랬냐? 내가 이래봬도!!!! 이래봬도!!!! ............ 볼 거 없구나.... 되게 씁쓸하다... “목말라, 마실 거 사올게.” 휴인이를 잠시 노려보더니 이내 뒤로 돌아 어딘가로 걸어가는 민서. 휴인이도 따라오려하지만... 환영이가 휴인이의 어깨를 잡으며 제지한다. 그리고 나는.... 발악 중. “야, 잠깐!!! 지금 설마 슈퍼를 가겠다는 거냐? 슈퍼 되게 멀어!!! 저 아래쪽에 있었잖아!!! 우씨, 살라면 아까 전에 사지!!! 왜 지금 사고 지랄이야!! 그냥 물 처먹어!!! 환영이가 물 싸왔잖아!!! 야!!!!“ 그러나, 내 손을 꽉 붙잡은 채로 시골길을 계속 걸어내려가는 민서. 우씨, 나중에 이 오르막길 또 올라오려면 힘 좀 들겠는데.... “야.... 야.....!!!” 민서는 내 말을 씹기로 결심했는지 아무 대답도 없다. “야, 휴인이 때문에 삐졌냐? 걔가 어려서 앞뒤생각 안하잖냐. 그냥 내가 걱정돼서.” “.................” 결국 나도 그녀의 목소리 듣는 건 포기. 시골길을 감상하며 무작정 그녀의 손에 이끌려 내려가는 중. 정신없이 운전을 했기 때문인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 여기는... 도대체 어디쯤일까? 우리는 지금 어디로 온 것일까? 나머지 아이들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길고 긴 길을 걸어 눈 앞에 슈퍼 보일 그 무렵이었다. 아무 말도 없이 걷기만 했던 민서가 휙 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계산 착오였어.” “응?” “그래, 고의로 한 거 맞아.” 그녀는 뜻밖에도 자신이 한 잘못을 순순히 인정했다. “어쩔 수 없잖아, 좋아하면 계속 같이 있고 싶은거. 누구나 당연한 거 아냐?” “근데 너 아까 왜 비원이 앞에선 아니라고 했냐?” 내 말에 대답은 않고... 그저 나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고만 있는 민서. “나도 내가 짜증나 죽겠어.” “......... 어?” “제어가 안돼, 나조차도 미치겠어.” “민서야, 지금 대체.” 그래, 그 순간이었다.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쬐던 그 순간, 민서는 수갑으로 묶인 오른손을 자신의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겼고, 덕분에 내가 그녀의 앞으로 당겨져 다가가면..... 그녀의 입술이, 내 입에 닿는다. 놀란 내가 뒷걸음질 치지만... 이미 내 두 손은 그녀에게 잡혀있다. 다행히도, 민서는 키스까지 하지는 않았다. 그저 그녀와 나의 입술이 닿았을 뿐이지만... 내 심장은 벌렁벌렁... 왜이래? 고작 여자일뿐이야, 그냥 이온이라고 생각해. 이온이가 너무 귀엽고, 너무 좋아서 그냥 이쁜 여동생한테 입맞춤 해준 거라고. 같은 여잔데... 근데 나 왜 진정이 안되는거야? 왜.... 휴인이랑 키스했을때처럼 심장이 쿵쾅대는거야? 민서는 기습뽀뽀를 끝낸 후 모자를 더욱 깊이 눌러썼다. 그리고 한숨을 한 번 가볍게 내쉬고는... 주머니에서 반짝이는 은색의 무언가를 꺼낸다. 에? 저거... 설마.... 열..... 열쇠? 내가 미처 다 놀라기도 전에 그녀는 열쇠로 수갑을 손쉽게 풀어버리고... “야!!!!! 너 뭐야!!! 너 열쇠 있었어?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빠른 속도로 물어보면........ “아까 하수구에 버린 건 열쇠크기의 작은 돌이었어. 열쇠는 안 버렸지. 빠르게 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내가 소매치기 짓 괜히 한 줄 알아?“ “야, 너 나 놀리려고!!!!!!” “같이 있고싶었어, 그 뿐이야.” 그 말을 내뱉고는 뒤돌아서서 아무렇지도 않게 슈퍼로 향하는 민서. 그 뒤에 남겨진 나는.....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아까 전, 민서가 그랬던 것처럼 빨개진 얼굴을 가라앉히려 애쓰면서. 91. 그리운 그 곳 음료수를 잔뜩 사들고 오르막길을 오르는 민서. 헉헉대며 그 뒤를 힙겹게 오르는 나. 그래도 다행이다. 휴인이가 나에게 [누나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라고 물어보면 [응, 저... 저기!! 오르막길을 올라왔더니!! 나 운동부족이라!!]라고 천연덕스럽게 대답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도 여행와서 민서와 안 싸우고 스스럼없이 잘 지낸다 싶었더니... 이젠 서로 쑥스러워져서 큰일이다. 바람에 자연스럽게 휘날리는 그녀의 긴 머리. 잘 뻗은 몸매와 큰 키. 여잔데... 민서는 여잔데.... 나 왜 이러지, 정말. 남들이 모두 탐낼만큼 잘난 휴인이를 남자친구로 두고 있으면서도 심장이 왜 떨리냐구, 왜!!! 이러다 나중에 환희 출소하면 휴인이 뺏길라. 긴장타라, 정시언... 이러다 새파란 젊은 것한테 남자친구 빼앗긴다... 물론 휴인이보다 민서가 더 좋다는 건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건 바로 휴인이니까. 하지만 혼란스럽다, 분명히 심장이 떨렸으니까. 민서와 입술이 닿았을 때, 심장이 떨려왔다. 마치 휴인이와 처음 키스했을 때처럼. 휴인이와 다른 점을 굳이 뽑자면... 휴인이와의 키스는 기분이 마냥 좋았고.... 민서와의 뽀뽀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좋지도 않았다는 점 정도? 민서와의 뽀뽀는 그저 혼란스러운 마음 뿐이었다. 갈 때와 마찬가지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민서와 나는 단 한 마디의 말도 나누지 않았다. “어? 뭐야!! 수갑은?” 그리고 드디어 나머지 아이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 역시나 내가 예상했던 대로 휴인이의 호들갑이 우리를 반겼다. 비원이와 환영이도 풀려있는 수갑을 보며 의아한 눈치였다. “슈퍼에서 바늘 팔길래 대충 쑤셔봤더니 풀리더라.”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한 건... 바로 내가 아닌 민서. “오~ 백민서!! 의외로 기특한 구석이 있는데?” 싱글벙글 휴인이. “뭐야, 괜히 해커애들한테 전화해서 열쇠 구하라고 했잖아.” “그래도 다행이네요, 누나 손목 안 다쳤어요? 드라마 같은 거 보면 빨갛게 붓던데. 민서야, 넌 괜찮아? 어디 봐봐.“ “됐어, 난 괜찮아. 정시언이나 치료해주던지, 말던지.” 저 앙칼진 년, 걱정해준 환영이 무안해지게시리... 서둘러 내 손목을 살펴보았다. 맙소사. 조금 따갑다 싶더니만... 민서가 이리끌고, 저리 당겨서 손목 주변이 벌겋게 까져있었다. 아무튼간에 이 놈들이랑 있으면 다치고, 까이고, 베이고... 몸이 성할 날이 없다. “암튼간에 백민서. 내 여자 다치게나 하고. 일주일간 수갑 못 풀었음 어쩔 뻔 했어? 그래도 수갑 하루만에 풀게 됐으니까 내가 봐 준다.“ 장난처럼 민서를 잠시 노려보더니 금방 피식 웃어보이는 휴인이. 그리고는 자신에 손에 매여진 붕대를 다시 풀기 시작한다. “휴인아, 너 상처 아직 안 나았잖아!!!” "응, 알아요.“ “근데 왜 풀어, 상처 덧나!!” “누나 손에 피나.” “나 이거 괜찮은데.” “응, 나도 괜찮아.” 역시나 휴인이의 고집은 보통이 아니다. 아예 말이 안 통하는 상태. 나는 잠자코 가만히 서 있었고, 휴인이는 내 손목에 붕대를 감아준다. 자기 손이 더 보기 흉한 걸 알고나 있는건지. 너희들 틈에 있으면 항상 내가 보호받고 있는 것 같아. 오히려 너희들을 지켜줘야하는 건 바보같은 정시언인데. 너희들하고 같이 있으면 난 언제나 어린아이가 되어버리고 말아. 4살이나 많은 나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키도, 마음도... 나보다는 훨씬 큰 너희들 앞에서 난 어떻게 해야하는건지. “하루 해 저물어간다. 민박할 곳이나 찾자.” 비원이의 말에 분주하게 움직이는 우리들. 마침 노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왠지 이 풍경이 익숙하게 느껴진다. 빛을 받아 일렁이는 물결, 고작 마을의 실개천 하나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오늘에서야 알게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아름다워질 수 있을까? 남들이 보기에 우린 아무것도 아닐거야. 아니,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지... 오히려 더러울거야, 쓰레기같고, 벌레같은, 인간 말종. 범죄나 저지르는,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그런 존재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너희들은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우니까... 그러니까.... 우리, 괜찮겠지? “방은 몇 개 필요하슈?” 여행지가 아니라 민박집은 찾고 찾아도 없는 상황. 결국 우리가 들어간 곳은 허름한 모텔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머리가 반쯤 까진 대머리 아저씨가 카운터에서 머리를 빼꼼 내밀고 우리에게 묻는다. 그리고 나는 누가 먼저 대답할세라 크게 대답한다. “하나요!!! 하나 주세요!! 그냥 큰 방 하나!!!” 그렇다, 원래는 방을 두 개 구해서 민서랑 나랑 하나, 나머지 남자들 하나. 이렇게 사용할 생각이었으나... 오늘 민서에게 기습뽀뽀를 당한 뒤 생각을 바꾸었다. 민서랑 둘이 있다가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아까와는 달라진 내 대답에 모두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고, 민박집 아저씨 또한 의심스런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저씨 옆에서 티비를 보다말고 얼굴을 불쑥 내민 뽀글파마 아줌마가 내게 묻는다. “남자, 여자 다 같이 있는데... 방 하나?” “아........ 아줌마... 그, 그게... 그러니까....” “신혼부부라서요!!!!!” 내가 더듬더듬 변명을 하려는 찰나,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용감무쌍하게 소리치는 휴인이. 맙소사, 졸지에 우리는 결혼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나는 순식간에 유부녀로 둔갑한거다. 앳된 서방을 가진 유부녀로. “...........나머지 사람들은?” “들러리요, 들러리!!!!!” 그리고 졸지에 나머지 세 명은 우리 결혼의 들러리로 전락했다. 아줌마는 뻔한 대답에 흥미없다는 듯 다시 고개를 집어넣었고, 아저씨도 무심한 얼굴로 우리에게 열쇠를 내밀었다. “저기요, 아저씨.” 그리고...... “왜?” “여기가 어딘가요?” 제일 중요한 건.... 위치확인. 발길 닿는대로, 가 모토인 우리 여행에서 우리가 현재 있는 장소를 확인할 길은 이런 방식 뿐이었다. “........자네들 간첩인가?” 우리를 의심하는 아저씨. “충청도 아녀, 충남!!!!” 충남? 맙소사!!!!! 어쩐지 여기가 좀 눈에 익는다 했다!!!!! 내가 정신이 없긴 없었구나, 여기를 몰라보다니. 아까 마을의 실개천, 그래, 본 적이 있어. 발길 닿는대로 온다고 해놓고 역시 도착한 곳은 어딘가 익숙한 곳이었구나. 엄마, 엄마의 고향이야, 여기. 고아였던 엄마가 자란 곳. 엄마가 있었던 고아원도... 아직 남아있을까? 놀란 내 표정을 나는지, 모르는지 짐을 옮기기 시작한 네 명의 아이들. “역시 민서 위험한 거 누나도 알았구나!!!” 내게 귓속말을 건네는 휴인이. “휴인아....” “걱정마, 잘 때 내가 짐 쌓아서 엄청나게 큰 칸막이 세워줄게!! 아무도 누나 못 건드리게!!!!!“ 눈을 찡긋 해보이며 짐을 옮기는 휴인이. 방은 2층 끝 방, 제일 넓은 곳. 심장이 쿵쾅거린다. 좀 크고 나서 바쁘다고 못 찾아왔던 엄마 산소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아까 마을의 실개천은 아빠와 함께 엄마 산소를 찾아올 때 차 너머로 몇 번 본 적 있는 풍경이었다. 엄마는 이온이를 낳다 돌아가셨고, 그 때문에 이온이는 엄마의 죽음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이온이는 엄마 산소에 온 적이 없었고, 아빠 혼자만 제삿날에 엄마 산소에 다녀왔다. 이온이 머리가 크기 전에는 나도 산소에 따라갔지만... 이온이가 크고 나서는 나도 찾아오지 않았다. 산소에 간 아빠대신.... 나는 그 날, 이온이의 생일을 챙겨줘야 했으니까. 엄마 생각에 왠지 울컥거린다. 엄마, 미안. 내가 여기를 몰라봐서 정말 미안해요. 여행오기전에 엄마 생각했는데... 정말 엄마가 날 여기로 인도한걸까? 이 애들... 어떤 사람들인지 보고싶었어요? 그 순간, 내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아, 문자 메시지인가? 핸드폰 그냥 꺼둘걸. 아까 해커애들한테 전화하느라 잠깐 켜놨는데 다시 끄는 걸 깜빡했다. 핸드폰 플립을 열어 문자를 확인했다. [위치추적기 던지고 어디로 간거야? 내가 찾아내고 만다.] ..........진한 오빠다. 하지만.... 오빠도 모르잖아. 엄마 고향이 충남이라는 거, 나랑 아부지밖에 모르는 거니까. 아부지도... 내가 이 놈들을 데리고 충남으로 왔다고는 생각하지 못할거야. 서둘러 문자를 삭제해버리고 핸드폰 전원을 다시 꺼버린 후, 짐을 들고 옮기는 아이들 뒤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제일 먼저 방 앞에 도착한 환영이가 열쇠로 방문을 열자. 휑뎅그레한 온돌방이 우리를 반긴다. “우리...........” 천천히 입을 여는 나. “일주일간.... 여기 머물래?” 망설이며 건넨 내 질문에.... “잘됐네, 피곤해죽겠는데.” “다행이다, 니가 운전하는 차 타기 힘들었는데.” “누나 좋을대로 해요. 숨막히는 서울이 아닌 것만 해도 난 좋으니까.” 민서, 비원이, 환영이의 반가운 대답. 그리고 내 손을 감싸주는 휴인이의 따뜻한 온기. 언제나 이들은 나에게 [왜?]냐고 묻지않는다. 나는 항상 이들에게 [왜?], [어째서?], [그런데?]라고 묻지만.... 이 애들은 언제나 말없이 나를 감싸안아준다. 난 성인이지만, 이 놈들보다 많이 어리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오늘은, 나 먼저 꺼내본다. 더 가까워지기 위해, 한 마디 힘겹게 건네본다. “있잖아, 내일.....” 눈물이 날 것 같아. 가장 오고 싶었던 곳이지만, 이온이 때문에 오지 못했던 곳이거든. 너희들 덕분에 나, 간신히 이 곳에 올 수 있었어. 옆에 있어줘서, 곁에 있어줘서, 날 지켜줘서. 정말 고마워. “내일.... 우리 엄마 보러 갈래?” 92. 행복하고 싶다면 “장모님!!! 인사드릴게요, 휴인이입니다!!!!” 철푸덕 큰절을 올리는 휴인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상황판단이 안되는 나는 그저 머리만 긁적일 뿐. 아침이 되자마자 대충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 밥을 먹고, 슈퍼에 들러 엄마에게 줄 음식을 몇 가지 마련한 후 바로 달려온 엄마 산소. 어제 잡은 모텔에서 차로 10분 거리밖에 안되는 이 곳. 아버지가 언제나 관리를 철저히 하셔서 그런지 잡초가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다. 산소에 들리자마자 큰절을 올리는 휴인이와 달리 환영이는 간단하게 제사상을 차린 후에 무덤 주변의 잡초를 뽑고있었다.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묵묵히 할 수 있는 일을 해주는 아이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이게 몇 년만이지? 이온이 다섯 살 되던 해부터 안왔으니까... 13년정도 됐나봐, 엄마. 그동안 잘 있었어요? 못난 딸 때문에 속상해 죽겠지? 나도 내가 미운데. 날이 갈수록 성장하는 이온이랑은 달리 난 왜 점점 어린아이가 되어버리는지 모르겠어. 하는 것도 없고, 잘하는 것도 없고, 사는 게 재미없을 때.... 그 때 이 애들이 내 곁에 다가왔는데 그게 날 더 혼란스럽게 해요. 오랜만에 엄마를 볼 생각에 잠을 설쳐서 그런지 눈이 부어버렸다. 하긴 잠을 잘 수도 없었다. 휴인이는 안전보장용 칸막이를 만들어준답시고 밤새 부시럭 부시럭 거렸으니까. 놈은 온갖 짐을 다 꺼내서 높디 높은 장벽을 만들어버렸다. 그러니까 우리방의 칸막이는 두 개였다. 민서가 자는 공간이 하나 있고 그 옆엔 높디 높은 칸막이, 그 옆엔 휴인이, 환영이, 비원이가 자는 공간, 또 높다란 칸막이 하나 있고 그 옆엔 내가 자는 공간. 민서와 나는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날 정도였다. 양쪽 끝에서 잤으니.... 칸막이를 두 개나 거치는 험난함을 헤치고 민서를 만날 생각은 없었다. 휴인이가 얼마나 민서를 견제하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사건이었다. 어제 휴인이를 향해 민서가 소리치던 게 아직도 생각난다. [누가 정시언 건드린대? 야야, 쟤 내 앞에 갖다놔봐, 내가 손이라도 까딱하나!!] .............새빨간 그짓말.... 그래놓고 어젠 나한테 기습뽀뽀까지 했으면서. 내가 눈을 비비자 휴인이는 내가 운다고 착각한 듯 했다. 그는 분위기를 띄우려는 듯 산소 앞에다 대고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사위사랑은 장모님이라는데!!!! 씨암탉 잡아서 주실거라고 생각했는데 안타깝네요!!” 저......... 푼수 새끼.......... “누나는 제가 잘 지킬게요, 그러니까 걱정마세요.” 조잘조잘 재잘재잘... 엄마.... 오늘 심심하진 않겠네요. “있잖아요, 우리 아부지도 하늘에 계시거든요. 두 분이 친구 하실래요? 우리 아부지 되게 잘생기셨는데.“ 저 개놈새끼 뭐라는거야, 저거.... 뜬금없이 자신의 아부지 자랑을 시작하는 휴인이를 보며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살아계실 때 언제나 아프셨거든요... 하늘에 있으면 건강하실까, 나 언제나 그게 궁금했는데... 장모님이 한 번 봐주실래요? 우리 아부지.... 정말 건강하신지.... 근육이 굳어서 말도 못하는 분이었어요. 근데.... 어때요? 거기선... 말도 잘해요? 대화도 통하구요? 우리 아부지 되게 말 잘했대요, 요즘 인기있는 스타일!! 유머러스한 남자!!“ 아팠을 과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는 휴인이. 어린시절 휴인이의 친구였던 환영이를 제외한 민서나 비원이는 휴인이의 과거 이야기를 처음 듣는 듯 했다. 옛이야기를 조곤조곤 하고 있는 휴인이를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으니까. “궁금하네.... 울 아부지.....” 휴인이가 눈물젖은 목소리로 중얼대면.... 잡초를 다 뽑은 환영이가 한 손 가득 움켜쥔 잡초를 멀리 던지며 소리친다. “나도 부탁 한 번 해볼까?” 휴인이의 약한 모습을 못보는 사람. 그건 환영이다. 언제나 휴인이가 약해질 때 나서주는 사람은 환영이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모두 티격태격하면서도 아름다운 우정을 자랑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절친한 친구 사이를 하나 꼽으라면 그건 두 말 할 것 없이 휴인이와 환영이였다. “우리 아부지도 하늘 갔어요, 시언누나 어머님!!!!” 무덤 앞에 앉아있는 휴인이 옆에 나란히 앉는 환영이. “어.... 알콜중독으로 가셨는데.... 거기선 술 안 마시게 감시 좀 잘해주세요. 그리고.... 고맙다구요.... 엄마는 날 버렸는데.... 아부지는... 나 안 버렸거든요. 그냥... 그게 고맙다고.... 술마시고 맨날 때리고 욕했어도... 난 마음 속으로 언제나 고마워했었다고... 그렇게 전해주실래요?“ 마음이 아프다. 환영이의 속마음은 언제나 내 마음을 멍들게 한다. “그리고.... 미안하다고도 전해주세요. 오빠된 주제에 동생 못 지켰거든요. 아마 우리 아부지가 알면 나 개패듯 팰텐데.... 하늘 가서 맞을테니까... 그러니까.... 지금 생에서는 행복하게 해달라고... 그렇게 부탁도 좀 해주시면 안될까요....?“ 지금 생에서는.... 행복하게 해달라고..... 내가 빌고싶은 말이다. 그게 바로 내 소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간절히 염원하고 있는... 내 소원. 행복하게 해주세요, 행복하게 해주세요. 언제나 힘든 삶을 살아온 이 아이들.... 앞으로는 행복할 수 있게. “유인이도, 환희도.... 못 지켜줘서 내가 되게 미안하다고... 전해주세요.” 휴인이는 무표정을 지키고만 있었다. 유인이 이야기가 나오자 급격히 우울해진 듯 했다. 그리고, 그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인듯, 한숨을 내쉰 비원이가 입을 열었다. 소주 병을 따서 우리 엄마의 무덤에 뿌려주고는....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도 처음 듣는.... 비원이의 과거 이야기. 아니, 나만 처음 듣는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았다. 모두 놀란 표정이었으니까. “우리 엄마도 만나면 안부 좀 전해줘요. 내..... 아....버지.....한테도.” 감정이 북받치는지.... 아버지란 단어를 더듬으며 발음하는 비원이. 비원이는 부모님을 잃은게 얼마 되지 않겠지.... 재벌 아들이니까. 되게 슬플텐데... 참으면서 말하는구나. “우리 엄마... 솔직히 말해서..... 첩이었거든요.” 맙소사!!! 이건 나도 몰랐던 사실이다!!!! 비원이가 첩의 아들이었단 말인가!!!! 그럼 돌아가신 그 회장 사모님은.... 새어머니??? “내가 해준 게 없어서,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되게 미안했다고. 다음 세상에도 내 어머니 해달라고... 그렇게 전해주세요. 다음엔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호강시켜줄테니까...“ 비원이... 내가 알고있던 것보다 더 슬픈 사연이 있는 놈이었구나. “그리고 아버지한테는요......” 나 뿐만 아니라 휴인이, 환영이, 민서 모두 놀라버렸다. 비원이의 과거 이야기에.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원이는 우리 엄마에게 이야기 하느라 바빴다. “내가 지키고 있다고.... 내 모든 걸 다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이젠 내게 너무나 소중해졌다고.... 당신이 나한테 맡긴 게 아니라.... 당신이 나한테 선물을 준 거라고..... 그렇게 전해주세요.“ 점점 수수께끼처럼 흘러가는 비원이의 이야기. “..........그 소중한 선물이... 뭔데?” 민서가 궁금증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지만.... “니 하늘.... 말하는 거야?” 내가 민서의 질문을 거들며 물었지만.... “아니, 그런 거 있어. 내 하늘보다 더 소중히 지켜야 될 만한 거.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하나뿐인.... 내 핏줄....“ 뭐야... 저렇게 말하는 거 보면.... 나는 아닌 거 같은데? 물론 비원이 저놈이 날 좋아한다고 고백하기는 했으나.... 대체 저렇게까지 온화한 표정으로 말하는 대상은.... 누굴까? “핏줄? 뭐야, 너 숨겨놓은 자식있냐?” 인상을 찡그리며 묻는 민서. 피식 웃으며 그런 민서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는 비원이. 민서는 헝클어진 머리가 신경쓰이는 듯 다시 한 번 모자를 고쳐쓴다. “흠..... 뭐, 이젠 내 차롄가? 나도... 엄마아빠 두 분 다 안 계신데.....” 주동자, 민서의 차례. “정시언의 어머니!!! 우리 부모님한테 전해주세요!!!! 억울하게 돌아가신 거, 내가 다 보답해준다고!!! 나 믿으라고!! 굳세게 살아가고 있으니까!!! 내 걱정은.... 안해도 된다고.“ 씩씩하게 시작했으나... 조금씩 무너져가는 민서의 목소리. 민서의 부모님도... 휴인이나 환영이처럼.... 가난 때문에 억울하게 돌아가셨을까. “그리고, 아버지한텐 특별히... 이 말도 좀 전해주실래요....?” 조용해진 우리들. 울먹임을 숨기려 억지로 웃는 민서. “나.... 햇살을 만났다고. 드디어.... 햇살이랑 마주했다구요.” 햇살............? “단 하루 뿐이었지만... 잊을 수가 없었다고... 그렇게 전해주세요. 난 언제나.... 나 자신이 아닌 것처럼 살아가지만.... 지금은 행복하다고. 그 때랑은 다르게.... 내 모든 걸 던졌으니까... 후회도 없고 행복하다고. 그렇게 전해주세요.“ 물끄러미 민서를 바라보는 비원이와.... 한숨을 쉬어대는 휴인이, 입술을 깨무는 환영이, 모자를 푹 눌러쓰는 민서. 역시.... 마무리 담당은 나겠지? “엄마!!! 내가 되게 좋아하는 애들 데리고 왔어요.”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와서 박힌다. “엄마가.... 지켜줄래요? 우리... 되게 힘든데.... 그리고 앞으로 더 힘들어질 거 같은데... 엄마가.... 우리 좀 지켜줄래요?“ 우리.... 마지막에 웃을 수 있게 좀 해줄래요....? “보고싶어서 미칠 거 같아..... 엄마.....” 오늘은 모두가 솔직해진 날이었다. 우린 모두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슬픔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가 되어 눈물 흘렸고, 서로의 아픔을 위로했고, 행복을 빌었다. 서로 다시는 버림받지않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소박한 행복을. “형이 국가대표 선수라니까. 너 월드컵 꼭 봐봐, 내가 나오는지, 안나오는지!!!” 축구를 하면서 뻥치는 휴인이. “나 좀 어지러운데.... 너도 비행기 태워달라고? 알았어, 자, 다들 일단 줄 서, 줄!!” 달려드는 아이들 때문에 정신없는 환영이. “바보야, 공기놀이는 5단이 제일 중요한 거야!!! 꺾기!! 알겠어?” 조약돌로 공기하느라 바쁜 민서. “니가 말로만 듣던 정의의 사도냐? 난 그 무엇도 무섭지 않다, 덤벼라....” 아이들과의 칼싸움에서 악당역을 맡고 무성의하게 연기중인 비원이. 벤치에 앉아 네 사람의 행동을 다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나의 엄마가 어린시절 있었던 고아원. 아직까지 운영되고 있는 이 고아원을 보며 일주일간 여기서 자원봉사를 하기로 했다. 지금 여기서 자라고 있는 아이들도.... 나중에 우리 엄마처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될까? dlekdud “언니!!! 그래서 그 다음에 어떻게 됐어요?” 내 손을 흔들며 보채는 아이들. 아, 맞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애들 뭐하고 있나 보는데 정신이 팔려서... “아, 미안해, 언니가 잠깐 딴 생각 하느라!!! 그래서 신데렐라는.....” 나무그늘에서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는 정시언. 있잖아.... 나 이런 생각을 했어... 우리... 어디론가 멀리 가서..... 그냥 이렇게 살면 안될까... 하고...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않고..... 그냥 우리끼리만.... 이렇게 살면... 안될까...? 애타게 행복을 바라기만 했던 우리에게... 진짜로 이런 행복이 다가와주면... 안되는 걸까? 93. 지옥을 거쳐 천국으로 “누나.... 안 자?”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오늘은 여행의 마지막날이다. 매일매일 엄마 무덤가에 가고, 고아원 가서 아이들과 놀아주고의 연속이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말 즐거웠는데... 일주일은 벌써 끝나있었다. 모텔밖으로 잠시 나와 바람쐬고 있는 나에게 휴인이가 다가왔다. “자는 줄 알았는데....” “응, 자다 깼는데 누나가 없길래.” 눈을 비비는 휴인이. 도시 한복판이 아닌 작은 변두리의 시골 마을이라서일까, 모텔자체는 허름하고 시설도 좋지 않았지만 바깥 풍경은 꽤 봐줄만했다. 일주일간 머물면서 친해진 아저씨, 아줌마도 좋은 분이셔서 즐거웠다. 물론 한가지 문제가 있긴 했다. 그 분들은 아직도 휴인이와 내가 부부인 줄 아신다. “내일이면.... 가야되네, 서울로......” “응, 미안해... 내 억지 때문에 괜히 이런 데 머물러 있었네, 심심했지?” “아니, 즐거웠어.” 환하게 웃는 휴인이. “장모님도 매일 만나고... 장모님이 진짜 우리 아부지한테 내가 한 말 전해줄거 같아. 비록 나 혼자 떠든 거 뿐이지만... 마음도 후련해지고....누나 어머니랑 친해진 거 같아서 나 정말 좋았어. 그리고 나 애기들이랑 노는 것도 되게 좋아해!!! 내가 축구선수라고 속였더니 진짜 믿는 거 있지, 월드컵때 찾아본대.“ 너무 아름다운 내 남자친구. “종종 오자, 누나. 고아원에 있는 애들이... 원래 그래... 정에 많이 굶주려서... 한 번 오고 안 오는 사람들한테 상처받고.... 그러거든.“ 휴인이의 속깊은 생각에 나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몰랐던 내 이야기.... 누나 어머니한테 하면서... 나 많은 생각 했어.” “.............” “.........유인이를.... 만나고 싶어, 누나.”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휴인이를 바라보았다. 동생만 보면 괴로워한다는 휴인이, 그래서 일부러 유인이를 피했다는 휴인이. 그런 놈이..... 스스로 먼저 말했다, 유인이를 보고 싶다고. “........하나뿐인 내 동생인걸.... 피하고 싶었지만 보고싶기도 했어. 무서워만 한다고 해결되는 건 없는 거 같아서... 만나보려고.“ 아무말 없이 휴인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나. 다행이다. 유인이가 정말 휴인이 보고싶어하던데... 정말 잘됐어. “난 니가 정말 자랑스러워.. 이뻐죽겠어, 휴인아.”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내 손을... 살며시 붙잡는 휴인이. 진지한 그의 표정. “자랑스럽단 말.... 하지마....” “..........." "........점점.... 내가 창피해질거야... 나도 내가 부끄러워, 누나.“ “휴인아............” “가기 싫어... 서울에... 진짜 가기싫어....” “................ 휴인아.....” “난 어쩔 수 없이... 또 범죄를 저지를거야. 이건 그만둘 수 없어, 누나. 한 번 시작한 일이라... 관둘 수가 없는거야. 누나가 어떻게 생각한다해도... 세상 속에서.... 환영이, 민서, 비원이, 나.... 다 범죄자야.“ “.................” “끌어들여서 미안해.... 누나를 놓칠순 없었는데.... 옆에 있어주길 바랐는데.. 우리는 변하지 않아서.... 정말 미안해. 나도 내가 더러운데... 누나는 오죽할까.“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 휴인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런 소리..... 하지마.....” 내가 볼 때.... 너희는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아이들인데. “무서워.... 세상이..... 무서워, 누나.... 내가... 우리가... 천국을 만들 수 있을까?” 휴인이보다 내 눈물이 먼저 떨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먼저 눈물을 보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먼저 휴인이를 안아버렸다. 내 눈물도 보이지 않고, 휴인이를 위로해줄 수도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니가 무슨 짓을 저질러도... 난 너희들 다 자랑스러워 할 수 있어... 난 너희들의 본모습을 아니까, 그러니까.... 우리 같이 한 시간, 거짓 아니니까.“ 내 어깨가 뜨거워진다. 휴인이의 눈물이... 닿는다. 휴인이가 우는 모습은.... 처음이다.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온다. 천국을 만들기 위한 아이들의 범죄를 난 막을 수 없다. 천국을 만들고 난 후에 죄값을 치르겠다는 이 아이들을... 난 어떡해야 할까? “아.... 나 쪽팔려!!!!” 내가 안겨있던 휴인이는 곧 마음을 가다듬고 눈을 쓱쓱 비비기 시작했고 그 때를 맞춰 모텔에서 나머지 삼인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둘이서 심야의 데이트냐?” “여행 마지막이라 나도 잠 안왔는데, 좀 다같이 데리고 나오지 그랬어요, 누나.” “칸막이 때문에 뭐가 보여야 말이지. 나만 구석에 처박아놓고.” 순서대로 비원이, 환영이, 민서의 한마디. 휴인이는 우는 걸 안 들킨게 다행이었는지 오바하며 중얼거렸다. “아, 진짜 니들 귀찮아 죽겠다, 정말!!!!!” 결국 우리는 마지막 밤을 기념하기 위해 넷 다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여기서 뭐하는 거여!!!!!!” 그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깜짝 놀란 우리들. 우리들 뒤에는... 백발이 성성한... 흰 옷 입은 할아버지 한 분이 서 계셨다. 깜짝이야... 서.... 설마... 귀.... 귀신은 아니겠지? “하.....할아버지....는.....누, 누구...세요?” 용기를 내 내가 물었지만... 할아버지는 그저 우리를 노려보실 뿐.... “남자 다섯에 여자 하나구만!!” “네? 남자 셋에.... 여자 둘인데요....” 라고 할아버지의 틀린 단어를 정정해드렸으나... 여전히 나를 노려보시는 할아버지. “어리석기도..... 도대체 나중에 얼마나 울고싶어서 저러는지.....” 할아버지의 말에 도무지 영문을 몰라 서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우리들. 설마 이 노친네.... 치매? 노망나셨나? “할아버지. 밤 늦었는데 댁이 어디세요? 데려다드릴.....” 휴인이가 말을 건네자.... “넌 나중에 죄값을 얼마나 치르려고 이 짓거리를 하는 거야?” 휴인이를 향해 호통을 치신다. 그리고 바로 환영이를 돌아보며 소리치시기를.... “마음이 여려서 무엇 하나 가만두지를 못하는구만!! 너 자신만 죽어날 거다!!” 이해가 되지않는 상황이 점점 늘어간다. “그리고 너!!!” 이제 민서를 가리키시는 할아버지. “꼴사납게 변장을 해대기는.... 강한 척 하지마, 제일 무너지기 쉬운 게 너야.” 이 근처에 정신병원이 있는 게 분명하다. 경찰에 신고를 해야하나, 라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나와 달리 아이들은 굉장히 진지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사이 할아버지는 비원이를 향해 충고하고 계셨다. “험한 일에 뛰어들었구만.... 이 중에 제일 불쌍해, 아무도 널 알아주지 않아.” 더 이상 할아버지를 가만 놔둘수는 없다는 생각에 내가 나섰지만.... “제일 중요한 건 너야, 너!!!!” 할아버지는 다시 나를 비난의 대상으로 삼아버리셨다. “네?” “지켜준다는 약속을 말지, 왜 돌아와서 왜 울게 만들어, 결국엔 너도 울게될거다!!” “.........할아버지....?” “니 마음이 제일 아플거다, 그러게 섣부른 약속은 하는 게 아니야.” “...............아니, 저기요....” “지금 내 말 명심해둬야 나중에 충격이 덜할거다. 알아둬, 남자 다섯에 여자 하나다.” “할아버지!!! 지금 여기 남자 셋에 여자 둘이라니까요.” “하나는 니 아들이다.” 정말 성질이 나려는 그 찰나!!!!! “아이고, 아부지. 왜 또 새벽에 나와서 사람들한테 시비걸고 이러신대유~” 멀리서 내복차림으로 달려나오신 한 아저씨. 말도 안되는 말을 내뱉는 할아버지의 아들이신 듯 하다. “아이쿠, 죄송혀유... 저희 아부지가 옛날엔 정정하셨는디... 지금 노망이 드셔가.. 정신이 오락가락 하셔유.... 치매가 쉽게 고쳐지는 게 아니더라구유....“ 역시.... 치매 때문에 고생하시는 분이셨다. “이놈아!!! 누가 노망났다는 거여!!! 나는 신내림을 받은 거다!!!” 저 할아버지... 끝까지 헛소리시네.... “아이구, 예예, 아부지. 그러니께 이제 그만 집에 가유....” 할아버지를 모시고 집에 가려는 아저씨. 할아버지가 아들의 성화에 못 이겨 돌아섰을 때.... “할아버지......” 휴인이가 갑자기 할아버지를 불러세웠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무서운 눈을 한 채 우리를 돌아보았다. “...........죄값을... 치러도 좋습니다... 하지만... 천국은.... 만들 수 있을까요?” 휴인이까지 할아버지의 노망에 장단을 맞춰주는 신기한 현상이 벌어졌다. 나는 휴인이를 때리며 빨리 모텔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환영이, 민서, 비원이도 할아버지의 한마디를 기다리는 듯 했다. 순간 할아버지의 날카롭던 눈이 순식간에 온화해졌다. 마치... 산타클로스처럼... 그리고.... “지옥을 거치면.... 너희들 다 행복해질거다. 천국으로 갈 수 있을게야.” “아주머니!!!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자주 놀러오고 그려~ 정들었는데 이거 섭섭해서 어쩌나.”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날 아침. 그동안 친해진 아저씨와 아줌마에게 작별인사중. 아저씨는 못내 섭섭하신지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담배를 빼물고 계셨다. 어제 이상한 할아버지를 만나 잠을 설친 것만 빼면 정말 즐겁고 유쾌한 여행이었다. 아이들도 이상한 할아버지와 헤어지고 난 후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웃고, 즐기고, 떠들고. “아저씨... 보고싶을 거예요.” 아저씨 등 뒤에 찰싹 달라붙어 애교떠는 휴인이나... 모텔 열쇠를 반납하기전에 한참을 만지작대는 민서나... 이 여행을 잊지않으려는 듯 주변을 둘러보는 비원이도. 평소와 다름없는 아이들의 태도. “이거 가져가, 내가 담은 김친데, 내가 이래봬도 이 주변에선 음식솜씨 좋다구.” 그 때, 아줌마가 나를 향해 김치를 내미셨고. 나는 반갑게 김치통을 받아들었다. 아싸, 나 김치 열라 좋아하는데, 그동안 김치 사먹기만 해서 직접 담근거 열라 그리웠는데. “정말 감사합......” 그 순간, 김치의 역한 냄새가 스물스물 올라왔고... “우욱.” 내 헛구역질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리고.......... “아이구, 아가씨!!! 이거, 임신 아닌가?” 아줌마의 한마디에.... 며칠 늦춰진 생리날짜가 생각났다. 정해진 날에 맞춰 칼같이 생리하는 나였는데... 이번엔 날짜가 늦어져서 이상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진한........ 오빠......” ...........오빠다. 진한 오빠의 아이다. “우욱.....” 또 다시 시작된 헛구역질. “누나!!!!!!” 내 곁으로 모이는 아이들. 첫 번째 지옥이....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94. 불안 “누나...........” 놀란 표정의 휴인이와, 손을 떨기 시작하는 환영이와, 내 얼굴을 확인하는 민서와, 인상을 찌푸린 채 내 곁으로 다가오는 비원이. “우욱...........” 나는 참을 수 없는 구역질에 입을 막으며 모텔 밖으로 뛰쳐나왔고, 휴인이는 황급히 내 뒤를 따라나와 풀밭에 대고 토악질을 하는 내 등을 두드려준다. “괜찮은거야? 누나!!!” “괜...찮아... 나.. 많이 먹어서 토하는 우욱....” 김치의 역겨운 냄새가 계속 코 끝에서 머무는 듯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바보, 정시언.... 생리가 늦춰진 걸 왜 더 빨리 눈치채지 못했지? 진한오빠랑 밤을 같이 보낸 그 때 취해서 미처 신경을 못 썼던거야. 이제 어떡하지? 나... 정말 어떡해야 되는거야? 아니야, 아닐거야. 그냥 신경을 너무 많이 써서 그래. 정말 말도 안돼.... 이건 정말 말도 안돼.... “정시언!!!!” 결국 비원이까지 내 이름을 부르며 모텔밖으로 뛰쳐나왔다. 그 뒤를 이어 민서와 환영이까지. “너 설마..... 진짜......” 망설이듯 꺼낸 민서의 한마디. 아이들은 내가 진한오빠와 함께 한 그 날을 알고있다. 숨겨선 안된다. 나는 이들에게 진실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아직은 나도 확실하게 모르는 상태니까... 그러니까... “야!! 다들 표정 왜 그래!! 우하하, 자식들, 쫄았냐? 나 어제 많이 먹었잖아. 어쩐지 어제부터 소화가 안되더라!!!“ 헛구역질을 참으며 간신히 말을 꺼낸다. “많이 먹어서, 소화 안되서 그런거면 먹은 거 다 게워내야지. 너 헛구역질만 해대잖아. 입에서 나오는 건 니가 뱉어내는 침 뿐이고.“ 예리한 비원이놈의 말에 할 말이 사라졌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임기응변의 달인이었다. “니가 아직 나를 잘 모르는구나!! 나는 토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아까워!! 힘들게 먹은거 왜 토하냐!! 우하하하!! 나는 토하려고 해도 무의식이 그걸 막는다니까.“ 당황한 내 상태를 숨기며 변명을 해댔다. 거짓말이 아니다. 나도 잘 모르는거니까, 그러니까... 안 그래도 나에 대해 신경쓰는 이 아이들을 미리 걱정시킬 필요는 없으니까. “아, 난 또 뭐라고. 그래, 어쩐지 많이 먹더라. 진짜 돼지년.” 민서는 내 말을 믿는 분위기고.... “괜찮겠어요? 하루 더 쉬고 내일 갈래요, 누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환영이도 걱정이 풀린 모양. 그러나 내 헛구역질에 의문을 제기한 비원이는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저러지 좀 말지. 니 하늘이 보잖아. 내가 걱정되도... 그렇게 바로 뛰쳐나오지는 말지. 다들 정신없는 상황이라 눈치 못 챈 모양이지만... 신비원... 너, 민서보다 먼저 뛰쳐나왔어. 휴인이 뒤를 이어 곧바로 튀어나왔다구, 내가 걱정되서. “안 괜찮아보여, 누나.” 내 이상한 상태를 짐작한 건 비원이 뿐만이 아니었다. 내 눈만 보고도 모든 진실을 파악하는 능력을 가진 휴인이는 또 선한 얼굴을 한 채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짓말 하지말고, 진실을 전해봐.] 라고 말하는 듯한 그 눈망울로. 언제나 내 입에서 진실을 토해내게 만드는 그 얼굴로. 그러나 나는 휴인이의 얼굴앞에서 무너지려 하는 내 불안을 헛구역질과 함께 꿀꺽 삼켜버린다. “나 진짜 괜찮은데!! 아줌마, 아저씨한테 인사드리고 빨리가자!!! 도착해서 쉬어야지. 너희들 내일부터는 또 일하러 가야되잖아.“ 씩씩하게 말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걸어보였다. 불안하다. 내 뱃 속에 있을지도 모르는 새로운 생명이... 미친듯이 불안하다. “다들 잘자라!! 나도 계속 운전했더니 되게 피곤하다!! 빨리 잘래!!” 연두색 똥차, 치토스를 마당 앞에 세우자마자 빠르게 인사말을 내뱉으며 내 방으로 쏙 들어와버렸다. 휴인이를 비롯한 아이들은 아직도 내 몸상태가 걱정되는 듯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머뭇거렸지만, 나는 그러한 놈들의 행동을 철저하게 무시해버렸다. 씩씩한 걸음걸이로 내 방에 들어왔지만, 방 안에 한 발을 내딛고 문을 닫아버리자마자 문에 등을 기대고 스르르 주저앉아버렸다. 무섭다, 이건 실제상황이다. 난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니까. 내 걱정은 현실이 될 수도 있으니까. 진한오빠가 이 집에 경찰을 깔아두지 않은 건 천만다행이다. 이 상태에서 경찰이 잠복근무까지 하고 있었으면 나... 정말 어떡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을 거야. 머릿속이 마비되는 것 같아. 아무것도 모르겠다. 풀린 다리와 불안한 마음을 다잡고 다잡아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몸을 돌려 방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아이들의 방에 불이 켜져있었다. 치토스의 트렁크에서 짐을 꺼내 정리하는 환영이의 그림자가 몇 번 왔다갔다를 반복했다. 잠시 후, 물건을 다 정리한 듯 부엌에서 부시럭대던 환영이가 방으로 들어가고, 곧 놈들의 방에서 불이 꺼졌다. 이제 다들 잠에 빠져들 것이다. 여행으로 몸과 마음이 다 지친 상태에다가 내일은 다들 일하러 가야하니까 쉽게 깨진 않을테고,.. 어쩌면 이게 나한테 주어진 기회일지도 모른다. 이 후진 동네에서... 약국은 꽤 먼 곳에 있지만... 아이들한테 들킬 순 없으니까. 내가 개인적인 행동을 하면 무조건 의심할 애들이니까 지금 임신 테스트기를 사러 가는 수밖에. 걱정이다, 김치의 냄새만 맡아도 헛구역질이 목끝까지 치밀어 오르는데.. 앞으로 밥은 제대로 먹을 수 있을까.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닌데... 정말 임신이면 어떡하지? 그 동안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나 정말 어떻게 해야해? 한숨을 몰아쉬며 풀린 다리에 힘을 주며 일어섰다. 얇은 자켓을 하나 걸치며 방문을 조심스레 열였다. 끼이익, 오래된 방문이 열리는 소리. 이미 밤은 깊었다. 하늘의 달에 눈이 머물렀다. 어제 밤에도... 저 달을 보면서 애들과 밤새 떠들었지... 설마, 어제 그 할아버지 말이 진실일까? 지금... 내가 가진 아이가... 내 아들이라는 말이야? 아니야, 그 할아버지는 치매셨잖아. 노망나신 거라구. 우리가 남자 다섯에 여자 하나라고 했잖아, 말도 안되는거지. 그렇다면 민서는 뭐야? 아무리 키가 크고 성격이 남자같다고 해도, 동성인 나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 애는 엄연한 여성이다. 한참 달을 바라보다가 한 걸음 내딛었다. 밤의 어둑한 공간과 침묵이 가득쌓인 이 시간. 괜시리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지금은 너희들이 단순히 자고 있는 것 뿐이지만.... 내일 아침이면 다시 너희들을 북적거리면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겠지만... 너희들이 없어지면, 이 곳을 떠나게 되면... 여긴 얼마나 조용할까? 빛나는 너희들의 생명력이 여기서 사라진다는 상상만 해도 눈물이 나, 마음이 아파. 내 미약한 힘으로... 도대체 너희들을 언제까지, 어느 정도까지 지켜줄 수 있을지... 나 사실은 많이 고민되고 두려워. 서로를 믿게 되는 이 감정이... 미친듯이 무서워. 또 다시 약해지는 생각을 다잡으려 애쓰며 고개를 몇 번 내저었다. 손을 조용히 움직여 최대한 소리내지 않게 대문을 열어젖혔다. 임신 테스트기 사러가는 거, 처음은 아니지만 이렇게 떨린 적은 없었다. 예전에 사용하던 임신 테스트기는 임신 검사용이 아니었다. 그저 임신 테스트기는 어떻게 생겼나, 어떻게 검사를 하는 걸까, 결과는 믿을만할까, 그런 정도의 내 호기심 충족 용도로 사용한 것이었으니까. 생리가 미뤄진 것도, 김치의 신 냄새에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한 게 처음이기에 신경이 곤두세워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무의식중에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럴것이라고, 나는 애써 생각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때문에 너무 많은 신경을 썼으니까, 이건 단지 스트레스성 생리 불순에 불과해. 구역질도 마찬가지야. 여행에서 돌아오기 싫어서, 엄마의 고향에서 빠져나오기 싫어서. 그냥 내 몸이 서울에 오기를 거부한 거야. 그래, 그럴거야. 아니.......... 그래야만 해. 대문을 다시 조용히 닫고서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정신차리자, 정시언. 이럴때일수록 정신 똑바로 차리고 힘내야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몇 걸음 걸었을 때, “.........어디 가세요?”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으악!!!!!! 이라는 소리를 내버렸으니.... 뒷집 담벼락에 기대 담배를 피고 있던 검은 물체는 급히 내 입을 막아버렸다. “조용히!! 시끄럽게 하면 준휘나 산이 깰 거예요. 잠귀가 얼마나 밝은 놈들인데. 준휘는 누나에 대한 감정 아직 안 좋고, 산이는 누나 보면 어색해할거예요. 아직 안 마주치는 게 좋아요.“ 아....... 그러고보니 열음이었구나. 놀란 마음을 쓸어내리며 내 입을 틀어막은 열음이의 손을 살며시 떼어냈다. 우리집을 뒤돌아보았으나 [관계자 외 출입금지] 놈들도 다행히 깨지 않은 것 같았다. “수갑은.... 풀어졌나봐요. 열쇠 구해놨는데.” 열음이는 피식 웃으며 내 손목을 보고 중얼거렸다. 아, 그러고보니... 열쇠 정말 구한거야? 도대체 해커는 못하는게 뭐지? 새삼스레 해커의 능력이 다시 느껴져 온 몸이 오싹해졌다. 아무리 해커의 리더격인 열음이라지만, 뒤끝없는 열음이라지만.... 이렇게 마주치게 되니 어색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땐 미안했어요, 사과할게요. 죄송해요, 누나.” 그런 내 느낌을 알아챘는지 열음이는 정중하게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열음아.....” “많이 혼났어요. 많이 반성했구요.” “....너희들.....잘못한 거... 없어. 니들은... 지킨 것 뿐이야, [관계자 외 출입금지]를.” “여자 울리는 거, 그게 세상 최악의 잘못이래요, 형들이.” 매력적으로 웃어보인다. 이온아, 니가 반한 이 놈... 정말 괜찮긴 하구나. 내가 열음이라면... 재수없는 정시언에게 이렇게 웃어줄 수 있었을까? “새벽인데... 안 자고 뭐해?” “형들 일에는 손 떼서 편하게 지내볼까 싶었더니.. 세상이 우릴 가만 둬야 말이죠. 움직이고 있어요. 회사들은 경쟁사 정보 빼내달라고 우기고, 조폭들은 상대 패거리 전력 알아달라고 의뢰하고, 민서누나 소매치기 일이나, 환영이형 폭력의뢰는 계속 알아봐야죠.“ 열음이와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에게 중요한 건... 우정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아직 밤바람은 차갑다. 찬 공기를 느끼며 열음이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밖에 중요한 건, 가족. 환영이형이나 휴인이형의 여동생들.” “...............” “그 다음으로 중요한 건 해커라고 생각했어요. 형들 인생에서 우리만큼 중요한 건 없을 거라고 생각했죠. 형들에게 중요한 목표는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돕는 것이고, 형들에게 중요한 사람은 [관계자 외 출입금지] 그 네 명과, 여동생들과, 우리 뿐일거라고.“ “..................” “누나가 나타날 줄은 몰랐죠. 중요한 인물이 될 거라고도 생각 못했구요.” “열음아....” “지켜달라는 부탁 염치없겠죠. 잘해주라는 말은 진부하구요.” “..................” “알아주세요. 형들에게 있어서 누나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거.” 괜시리 또 다시 눈물이 나버렸다. 추워서일 거라고 난 애써 생각한다. 감동적이어서가 아니라, 너무 추워서 살짝 맺혀버린 눈물이라고. 95. 악몽은 현실이 되고 “해커에게는... 형들이 전부예요.”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살짝 깨물었을때, 열음이의 물기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우리는, 누나를 믿을 수 없어요.” “열음아.........” “형들의 안전이 보장되기 전까지는... 누나는 우리에게 위험인물이거든요.” 알고있다. 해커를 탓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된 인연을 탓하는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나에게 머리를 숙인건 열음이었다. “누나가 좋은 사람인건 알고있어요. 하지만... 믿지못해서... 미안해요. 아직 준휘도, 산이도....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도... 미칠 정도로 불안해요. 누나 정체를 먼저 알아차린 게 우리들이니까, 우린 다 알고있으니까. 형들이 위험해지면 우리 탓이라고 자기 자신을 원망하게 될 게 뻔하니까.“ 열음이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다. “죄송해요, 믿지못해서..... 우리한테는 형들이 전부라서... 어쩔 수가 없어요.”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무엇이, 해커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광적일 정도의 충성이었다. 열음이의 말뜻을 잘 알고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말을 잘 따르는 아이들이다. 위험해진다해도 해커는 활동을 재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활동을 중단하겠다는 것은 나를 믿어주겠다는 뜻이 아니다. 해커는 나의 안전까지는 보장해주지 않을 것이다. 나의 잘못으로 [관계자 외 출입금지]가 잡혀간다면... 해커는 무서울 정도로 날 몰아붙일지도 모른다. 협박을 할 수도 있고, 잡아다가 때릴 수도 있고, 납치를 하거나 고문을 할 수도... 이들은 해커활동을 잠시 멈추라는 명령을 시행하고 있을 뿐,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겠다고 약속을 한 건 아니니까. 당장부터도 고민이다. 침착한 열음이는 나에게 깍듯이 대해주고, 산이도 예의바르지만... 준휘는 나를 보자마자 욕을 퍼부을지도 모르니까. “괜찮아.... 고개들어, 열음아.” “..............” “나도.... 염치없이 나를 믿어달란 부탁못해. 어쨌든 처음부터 거짓말 한 건 나야. 잘못있는 거, 인정해. 너희들은 내가 거짓말하고 있는 것도 다 알고 있었을테니까 당연히 믿기 힘들겠지. 믿지않아도 되니까 [관계자 외 출입금지]나 잘 챙겨줘. 외로운 애들이잖아. 내가 걔들한테 못하더라도, 너희들은 걔들한테 잘해줘.“ 내가... 그 애들을 배신할 수도 있으니까. 지금으로선 언제나 함께하고 싶고, 지켜주고 싶지만.. 앞일은 모르는거니까. 나 대신 너희들이 언제나 그 애들을 지켜준다면... 나 마음 놓을 수 있을거야. 열음이는 그 때서야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런건 걱정마세요.” 확신에 찬 열음이의 목소리. 그 애의 초록색 눈이 어둠 속에서 빛난다. 밤이라서 다행이야. 아침이었다면 열음이의 맑은 눈은 나를 그대로 비추고 있었겠지. 더럽고 이기적인 정시언이란 여자를 그 맑은 초록색 눈이 바라보고 있었을 거야. 그 눈에서 내 모습을 보면.... 나, 나 자신을 경멸하게 될 지도 몰라. “그나저나... 누난 어디가요, 이 새벽에?” 어색한 분위기가 풀어지자마자... 열음이는 바로 호기심어린 질문을 던졌다. “응? 아... 나, 잠 안와서, 산책.” “.........혼자 나다니면 위험한데, 같이 돌아다녀 줄게요.” “아니!!!! 아니야!!! 나 좀 혼자있고 싶다!!!” 친절을 베푸는 열음이를 향해 격하게 흥분하는 정시언. 열음이는 무안했는지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 동네에 깡패 좀 많은데.” “아하하하, 근데 옆에 누가 있으면 계속 말을 하게 되고, 그러면 잠이 더 안와서. 그냥 나 혼자 걸을게. 걷다보면 피곤해서 잠 올거야, 아하하하.“ 실없이 웃고있자니... 변명하는 게 티날만도 한데 열음이는 속아주는 눈치다. “그래요, 그럼. 그래도 이 동네에서 깡패 만나면 박준휘 이름 대세요.” “응? 준휘이름? 왜?” “걔가 관리하는 조직이 여러개니까. 내가 해커쪽, 산이가 파파라치쪽, 준휘가 조직쪽. 아직 고등학생으로 구성된 조직이긴 해도, 이 근방에선 유명해요. 본인은 정보통들 모아놓은 거라고 우기는데, 쉽게 말해 깡패거든요. 준휘이름 알고있으면 다들 누나 쉽게 건드리지는 못할 거예요.“ 역시 무서운 놈들이다. 열 일곱 살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관계자 외 출입금지]도 간 큰 범죄자 집단이고, 쉽게 볼 수 없는 인물들이지만 해커는 그 애들보다 더하다. 해커는 그야말로 천재들의 집단이니까. 그나저나 준휘가 조직 쪽이라니, 이거 불안한데? 나중에 내가 잘못하면 깡패들 모아다가 나 패는 거 아니겠지? 만약 내가 애들을 배신하면.... 아, 아니지. 정시언... 괜히 섣불리 이런 생각하지마. 배신하지 않으면 된다. 애들을 믿고있잖아. 지켜준다고 했으니까 난 잘할 수 있어. 혼자 마음속으로 여러번 그 말을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다짐하고 다짐해도 마음이 약해진다. “그럼 먼저 실례할게요.” 열음이는 다시 매력적인 웃음을 한 번 날리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열음이와 헤어지자마자 다시 온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다. 해커를 만나면 언제나 혼란스러워진다. 해커라는 대단한 집단이 있는 한, [관계자 외 출입금지]는 범죄와 문제의 한가운데에 서있을 것만 같아서 그래서 차마 내가 손을 내밀어 구해주기도 전에 사라질 것만 같아서... 참고 참았는데도 절망적인 심정을 막을 길이 없었다. 여러 가지 감정들이 나를 옮아매고 있었다. 해결해야 할 일도, 알아야 할 일도 산더미처럼 쌓였다. 좀 쉬었다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해커네 집 담벼락에 기대섰다. 꺼놨던 핸드폰을 꺼내 고민하다가 전원 버튼을 누르자... 곧 그동안 왔던 전화나 문자들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부지한테 전화가 다섯 통, 진한오빠한테 전화가 열세통. 아부지가 보낸 문자는 [어떻게 된 거냐? 아직 시간이 필요한거냐?] 진한오빠가 보낸 문자는 [돌아온거야? 이야기 좀 하자, 문자보자마자 연락해.] 여행간 우리는 찾다가 지치셨나보지. 할 수만 있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가고 싶었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우리가 갈 수 있는 곳 어디로든.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 담벼락에 기대어있던 몸을 다시 움직였다. 그리고 발을 움직인다. 약국을 향해. 이상이 느껴지는 내 몸, 이 변화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 정말 내가 한 생명을 품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누나!!! 오늘 환영이가 일하는 첫날이라고 푸짐하게 밥 차려놨어!! 밥 먹자!!” 어김없이 해가 떴고, 하루가 시작되었다. 절망적인 내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대답없는 내가 걱정됐는지 휴인이는 막무가내로 내 방문을 열어제꼈다. “누나!! 아직도 자?” “............” “.........누나?” 감고있던 눈을 번쩍 뜨자, 휴인이와 내 눈이 닿을 듯 말 듯, 가깝게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뭐야, 기절한 줄 알고 걱정했네. 빨리 일어나.” “휴인아.” “응?” “누나 그냥 조금 더 잘게.” “....어디... 아파?” “아니, 어제 운전을 많이 했더니 피곤해서. 조금 더 자야될 거 같아. 밥은 나중에 나 혼자 알아서 잘 챙겨먹을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들 조심히 일 다녀와.“ 믿어줄까? 밥에 환장하던 정시언이 아침을 굶고 잠을 잔다면, 믿어줄까? 내 우려와는 달리 휴인이는 곧장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푹 자. 다행이네, 오늘은 안 그래도 누나 얼굴 보기 힘들었는데.”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 휴인이 얼굴을 바라보았다. 휴인이는 급히 내게서 등을 돌리고 섰다. “나 오늘.... 일하러 가, 누나.” 돌덩이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 온 몸이 띵해지는 기분. 휴인이가 ‘일’이라고 특별히 칭한다는 것은, 항상하러가는 막노동은 아닐 것이다. 그의 본업은 범죄다. 그러므로 휴인이가 일하러간다는 것은, 범죄를 저지르러 간다는 것. 그의 범죄 종목은 강도 또는 도둑질. 굳이 따지자면 네 명의 범죄중에 가장 위험하고 범죄의 죄질도 높은 일이다. “휴인아....” “말리지 않을 거라고 했지? 내가 범죄 저질러도, 막지 않을 거라고.” 니가 그렇게 먼저 선수쳐버리면... 내가 할 말이 없어지잖아. “집에서 푹 쉬고 있어, 누나. 나 일 빨리 마치고 올게.” “..............” “돕고있는 고아원에 있는 한 꼬맹이가 병에 걸렸어. 수술 날짜가 잡혔대. 급해죽겠는데 시간도 없고, 돈도 없어서 이럴 수밖에 없네. 되도록 안하고 싶었는데.... 내가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다, 누나.“ 애써 밝게 중얼댄 휴인이는 곧바로 내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바람에 의해 내 방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머리맡에서 들려왔다. 휴인이를 잡으러 갈까, 생각하다가 곧 단념하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몸이 무거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지랄맞게도. 쓰레기통에 시선이 박혔다. 어제 약국에서 산 임신테스트기는 쓰레기통에 처박힌지 오래였다. 선명하게 두 줄이 나버린, 임신 테스트기는 나에게 임신이라는 잔인한 현실을 선물했고, 나는 밤새 한 숨도 잘 수 없었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어버렸다.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임신을 했다. 이미 다른 여자와 약혼을 한 전남자친구의 아이를 가졌다. 뿐만 아니라, 나의 새로운 남자친구는 오늘 범죄를 저지를 계획을 세우고 있고, 나는 검찰의 스파이와 범죄자의 동조자로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김치냄새만 맡아도 구역질... 아니, 입덧을 하는 내가 아이들에게 임신 사실을 들키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 휴인이와는 헤어져야겠지, 환영이는 걱정할텐데, 민서는 붙같이 화낼테고, 비원이는 나에게 실망한 채 경멸하는 듯한 눈으로 날 바라볼까? 너희들 곁에서 떨어져 나가도... 너희들을 지켜줄수 있을까? 아부지한테는 뭐라고 말해야하지? 진한오빠한테는? 그냥 나 혼자 낙태를 해버려야 하나? 아니, 그래도 한 생명인걸. 내 아이잖아. 없앨 수는 없어. 아니.... 아니.... 진한오빠의 아이잖아. 내가 키울 수 없어.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어....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왔다. 쉴새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 한 줄기가 베개에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머리맡에 있는 핸드폰을 집어들어 단축번호 0번을 길게 눌렀다. 신호음이 들린다. 살짝 느껴지는 두통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을때, 통화가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96. 불행 “그동안 도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진한오빠는 우리가 만나기로 한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향해 추궁을 해댔다. “금방 왔네.”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너희 아버지도 계속 걱정하셨어.” “나는 주문했어. 오빠 마실 거 시켜.” “시언아!!!!!” “연락했으니까 된 거 아냐?” 테이블 위에 놓여진 휴지를 집어들어 조각조각 잘라놓으면서 중얼거렸다. 누군가 내 앞에서 이런 짓하면 정신 사납다면서 화냈었는데. 이제 내가 이런짓을 하고 앉아있다니. 웃기다. “그래, 연락 안할줄 알았는데... 하긴 했네. 건강해보여서 다행이다.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일 있었어? 이제 걔들 잡아들이자, 너 이런 일 그만해. 오빠가 네 명 잡아다가 고문을 해서라도 주동자랑 재벌아들 찾아낼테니까....“ 피식, 웃어버렸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와버렸다. 고문이라.... 누구를? 휴인이를? 환영이를? 민서를? 비원이를? 무슨 자격으로? “........재벌 아들은.... 고문하면 안되는거 아닌가, 귀한 몸이잖아.” 비꼬듯이 말을 꺼냈지만 진한오빠는 내가 진심으로 그 말을 꺼낸 걸로 착각했는지 기분이 좋아보였다. 드디어 내가 아이들을 잡아들일 마음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살려서 돌려보내기만 하면 돼.” “...........뭐?”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비원이 부모의 사망과 회사의 비리조사를 맡고있는게 진한오빠라고 했었나... 오빠는 재벌 아들을 찾아 회사에 돌려보내고, 주동자를 우리아부지한테 보내 감옥에서 썩히면 그만이겠지. 이미 열여덟살, 주민등록증까지 있는 아이들이야. 소년원이 아니라 감옥 직행이겠지. 나머지 두 명은 관찰조사 정도로 끝낼까? “자, 그럼 니가 알아낸거 있으면 말해봐. 몰라도 되지만 대충 주동자라던가...” “할 말이 있어서 온 거야.” “몰라도 괜찮아, 니가 결심한 김에 그냥 오늘 저녁에 바로... 김형사님한테 연락해서.” “임신을 했어.” 오후 2시. 작게 말했는데도 한적한 카페 안을 가득 메운 건 내 목소리였다. 진한오빠는 김형사님께 전화를 하기위해 핸드폰을 꺼내다가 멈춰버린 상태였다. “정시언..... 뭐라고?” 내게 다시 찬찬히 묻는 진한오빠. “임신을 했다고. 오빠 아이야.” “너랑 나랑 무슨 짓을 했다고!!” “그 날, 오빠가 술 취한 날.... 우리 둘 다 지우고 싶은 기억이지만 없었던 일은 아니지.” 진한오빠는 심히 놀란듯 손에 쥐던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놓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물을 들이키는 손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말할까 말까 망설였어. 그래도 말은 해야한다고 생각했” “병원 가봤어?” 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진한오빠는 빠르게 내게 물었다. 나는 여전히 휴지를 잘게 찢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럼 어떻게 알아?” “임신 테스트기.” “정확한 거 아니잖아.” “90% 이상은 정확해.” 오빠는 잠시 말이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오빠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내게 중얼거렸다. “너 어디서 개수작이야?” 순간, 머리가 핑 하고 돌았다. 잠깐, 나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거지? 휴지를 잘게 찢던 손을 멈추고 진한오빠를 바라보았다. 진한오빠의 눈은 이미 나를 찢어죽일듯 노려보고 있었다. “뭐라고?” “웃기지마, 그게 내 앤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하....” “너 그 꼬맹이랑 잤냐?” 너무 황당해서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할수만 있다면 진한오빠를 후려치고 싶었지만 그 순간의 나는 그럴만한 힘이 존재하지 않았다. “..........나... 휴인이랑은 그런 더러운 짓 안해.” “.......... 웃기지마, 너 지금 그 새끼들 잡기 싫어서 개수작 부리는 거지?” 내가 무슨 해답을 얻기 위해 진한오빠를 만난건지 혼란이 몰려왔다. 나에게 있어서 진한오빠는 더 이상 믿음직한 남자친구로 남아있지 않았다. 무책임한 전남자친구, 재수없는 전남자친구, 짐승같은 전남자친구. 그 뿐이다. “나 혼자 저지른 짓 아니야. 오빠랑 내가 저지른 짓이지. 더러운 짓 한 건 우리 둘인데 그 애들 욕할 건 없다고 생각해. 그 애들까지 그런식으로 매도하지마.“ “내 아이일 리가 없어.” “그럼 나 혼자 임신했어?” “왜 하필 그 날이야!!! 그동안 이런 적 한 번도 없었잖아!!” “아무데나 씨뿌린건 니 잘못이야!! 약혼까지 했으면서 나 한 번 안은 건 니 잘못이라구! 물론 내 잘못도 있지만 책임회피는 하지마, 나 그렇게 더러운 년 아니야!! 이건 니 애야, 나도 소름기칠 정도로 싫은데 니 애라구!! 나도 내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촥, 하는 소리와 함께 진한오빠가 내 머리위로 물을 퍼부어버린 후였으니까. 온 몸에 차가운 기운이 퍼져왔고 나는 믿을 수 없는 상황을 느끼며 멍하니 테이블 위만을 바라보았다. 내가 찢어놓은 휴지조각들이 수북히 쌓여있어. 이거 꿈은 아닐텐데, 실제상황 맞는데. 근데 누가 누구한테 물을 퍼부은거지? 나, 누구한테 물벼락을 맞은거야? “입 다물어. 아무도 알면 안돼.” 진한오빠의 목소리에서 독기가 뿜어져나온다. “낳을 생각 아니지? 지워. 돈은 얼마든 줄테니까.” 이런 말을 들으니까 꼭 돈 뜯어내려고 전남자친구를 협박하는 여자로 전락하는 느낌이다. 아이가 생긴 건 분명 우리 둘의 잘못인데... 왜 나만 이렇게 비찬해야하지? 머리에서 뚝뚝 흘러내리는 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깔끔한 정장을 입은 진한오빠, 흠 하나 없는 남자로 보이려는 저 노력. “나도 니 애 낳을 생각 없어.” “............” “근데.... 애한텐 미안하게 생각해야 되는 거 아니니? 니 애야, 이거 니 애라구. 낳으라는 말 바라지도 않았어. 나도 니 애 임신한 거 싫어, 지긋지긋해. 근데... 너 이러면 안되는 거잖아. 애는 잘못한 거 없잖아... 너랑 내가 잘못한 거잖아, 근데 그 책임 이 애가 지는 거잖아!!! 지우라는 말 대신!!!! 미안하다는 말 하는게 순서 아니냐구!!! 나한테 물 퍼붓는 대신!!! 상의 먼저 하는 게 예의 아니냐구!!! 니 잘못 하나도 없는 것처럼!!!! 나 더러운 년 취급 하는 거!!!!! 니 잘못 괜히 애들한테 덮어씌우면서 니 애 아니라고 우기는거!!! 그게 사람으로서 할 행동이냐구!!!!“ 목까지 울컥, 감정이 치밀어올랐다. 울면 지는 거라고, 천번 만번을 생각했지만 결국은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반반의 감정이 미친듯이 교차했다. 내 아이지만.... 진한오빠의 아이다. 모순덩어리... 미쳐버릴 것 같아. 지켜주고 싶어, 미안해 미치겠어... 하지만... 낳고싶지는 않아. 진한오빠는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일어서서 몇 발자국 그 자리를 서성거리다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시언아... 제발 내 입장 좀 생각해주라, 어? 나 곧 결혼해.” 그 어떤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눈물 쏟아내는 데만 급급했으니까. “나, 더 이상 일 생기는 거 싫다. 감당이 안된다구. 이런 일 생기면 곤란해. 그 정도는 너도 알고있을 거 아냐. 그냥 지우면 되는거야. 이런 일 많이들 해. 아무 일 아냐. 넌 그냥 마취 한 번 하고 눈 감고 있으면 끝나는 거야.“ 나쁜 새끼... 정말 나쁜 새끼.... 그런 말 듣고싶은게 아니야... 미안하다는 그 한마디도 해주지 않아... 내가 아니라 아이에게... 미안해야 하는 게 정상이잖아, 그래야 인간이잖아. “내가 포기할게. 그 애들 잡으려고 신경쓰는 거, 그만할게. 그 애들 잡는 거... 늦출 수 있을때까지 늦춰보도록 내가 신경쓸테니까.. 그러니까 너 임신한 사실은 비밀로 해주면 안되겠냐? 너 임신한 건... 제발 그냥 너만 알고 니 선에서 해결해라, 응?“ 그 애들을 거래조건으로 삼지마... 이런 더러운 일하고는 관련 없는 애들이야. 이제 안되겠다 싶은가보지? 물 퍼붓는 정도의 일로 안되니까.. 이제 애원하니? 머리가 아파, 사고가 정지되어버린 것 같아. “니 아버지도 아시면 안돼. 주린이가 알면 그것도 끝장나는거야. 제발 시언아, 내가 부탁할게. 그냥 너랑 나만 알고 있자, 여기서 끝내자. 내일 시간돼? 당장 지우러 가. 내가 병원까지 데려다 줄게,“ 이 남자의 아이를 더 이상 내 뱃 속에 둘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 아이도 되지만... 이런 사람을 아빠로 두면, 이 아이도 불행해지지 않을까. 생명을 줄 수 없다면... 차라리 빠른 죽음을 주는 편이 좋지 않을까. 미안해, 미안해, 아기야... 정말 미안해. 이런 엄마라서.... 저런 아빠를 만나서... 정말 미안해. 세상 구경 시켜주지도 못해서... 정말 미안해. 니 잘못은 하나도 없는데... 책임은 너 혼자만 지게 돼서.. 정말 미안해. 결국 나는 진한오빠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내일, 내 아이를 지우기 위해 병원에 갈 약속을 덜컥 잡아버린 것이다. “병신새끼!!! 내가 진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한참을 멍하니 서서 생각했어. 넌 아니겠지, 넌 아니겠지!!! 바라고 또 바랐어!!! 근데 넌!!!“ 간신히 마음을 정리하고, 부은 눈을 가라앉히고 집의 녹슨 대문을 열어제꼈을 때는 이미 해가 기울고 달이 뜬 후였다. 들어가자마자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집안 전체를 울렸다. 급히 문을 열고 들어서자 민서가 환영이에게 소리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민서는 마치 짐승이 발악하듯 환영이를 몰아붙이고 있었고, 환영이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평상위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만 있는 건 비원이. 휴인이는.... 아직까지 오지 않은 것 같았다. “뭐야... 무슨 일이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내 몸을 지탱하며 물었다. “너도 알고있었지? 너도 환영이 따라간 적 있었잖아, 넌 알고있었지?” 민서는 대상을 바꿔 나에게 소리쳤다. “뭐?” “씨발!!! 오늘 돌아다니다가 이 새끼 일하는 거 내가 봐버렸다구!!! 애가 병신처럼 맞고만 있었어!!! 개패듯 죽어라 맞고만 있었다구!! 그 지경이었으면 말을 했어야지!! 정시언 니가 우리한테 말했어야지!!!“ “민서야, 그만해. 나 괜찮다고 몇 번을 말해.” “괜찮아? 괜찮다고? 넌 그게 괜찮아? 병신아, 그게 괜찮을 일이야?” “민서야....” “넌 언제나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대, 병신같은 새끼, 미친새끼.” 드디어 들켰나보다. 언제나 조마조마했었는데 결국은 들켜버렸구만. 물론 환영이가 무슨 일을 하고있는지는 다들 알고있었겠지만 말로 들을때와 직접 보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는 법이다. “그만해라, 그 일.” 결국은 지켜보고 있던 비원이까지 한 마디. “신비원, 너까지 왜 그래!!” “안 그래도 한 번 말하려고 했었어. 너 언젠가부터 집에서도 반팔 안 입잖아.” “...............” “너 샤워하기전에 옷 벗은거 한 번 봤다. 다들 걱정할까봐 아무 말 안하고 그냥 기회봐서 너한테 말하려고 했는데... 그냥 지금 말할게. 니 등 멍 투성이 된 거 알아. 싸움 잘하는 놈이라 괜찮겠지, 하고 넘겼는데 그 상처 본 순간 가만있으면 안 될 거 같은 생각 들더라.“ “정말 다들 왜그래, 나 진짜 괜찮은데.” 환영이를 편들어야 할지, 민서와 비원이의 의견에 손을 들어주어야 할지 고민하다가 일단 민서라도 진정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대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고, 철푸덕 소리를 내며 무언가가 쓰러지듯 대문안으로 들어와 쓰러졌다. 순식간에 느낀 불안함으로 모두가 고개를 돌렸을 때, 피투성이가 된 휴인이가 보였다. 불행은, 한꺼번에 오는 법이었다. 97. 이래도 “강휴인!!!!!!!!!!!!” 제일 먼저 뛰쳐나간 건 환영이었다. 그 뒤를 이어 비원이가 달려나갔고, 민서와 나는 놀란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덜덜 떨리는 발을 간신히 한걸음씩 내딛고 있었다. “.........아....으....” 휴인이는 신음소리를 내며 자신을 부축하려는 환영이에게 몸을 기댔다. 그리고 그가 비원이에게 건넨 자루뭉치에는 구겨진 돈 뭉치가 한 가득. “무슨일이야, 너 어떻게 된거야!!!!!” 환영이의 다급한 고함소리. “나... 되게 멋있지 않냐, 결국..... 임무는 완수.” “강휴인!!! 너 피가!!!!!” “돈 잘 챙겨... 피같은... 돈이다.... 과다출혈과 맞바꾼 돈다발.....” 이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이 걱정할까봐 웃어보이는 휴인이. 저 바보같은 성격은 정말 평생 변하질 않는걸까. 휴인이는 일어설 기운도 없는지 휘청거렸다. 환영이 혼자서 그를 받쳐주기엔 역부족인 듯 싶었다. 휴인이는 주저앉아 평상에 등을 기대버렸고, 비원이는 그의 몸을 살폈다. “......너.... 찔렸냐?” “신비원.... 나 죽진 않겠지?” “어쩌다가!!!!!” “위험한 부분은 피했어. 그냥 피가 너무 많이 나서 걱정이긴 한데... 나 괜찮을거야.” “병원가!!! 병원가서!!!!!!” 휴인이를 부축해주던 환영이의 손에도 금세 피가 한가득 묻어버렸다. 비원이가 놀랄 정도면...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 보지 못할 것 같아. 보기 싫어, 볼 수 없어. 왜 이런 일들이 연속으로 일어나는거지? 짜증나 죽겠어. “하하하하, 환영아, 신비원 하는 말... 들었냐? 병원가잔다. 아, 웃겨.” “강휴인!!!!!!!!!!!” “병원가서 뭐라그럴까? 돈 훔치다가 그 보석가게 주인한테 들켰습니다... 거기가 돈을 몇 배나 비싸게 팔아먹는 악명높은 보석가게라 그런지... 아, 주인아저씨가.... 돈에 환장을 했더라구요.... 경보장치 잘 피해서.... 잘 들어갔는데... 그 아저씨.. 돈 지키려고... 집에도 안 들어가고 가게에서 잠을 자고 있더라구요.... 옆에 있던 칼을 집어서... 나한테 휘두르는데... 근데..... 그걸 미처 못 피해서.... 돈더미랑 나랑 불과 한 뼘 차이에 있었는데... 피하면 돈을 못 가져오는 거고... 돈을 가져오면 칼에 찔리는 거고... 강휴인은 거기서 그냥 돈 가져오는 걸 택했네요.... 나.... 의사 선생님한테... 그렇게 말하면 되냐..... 응?“ “...........이 미친새끼... 야, 너 죽으려고 환장했어???” 비원이의 큰 고함소리. 놀랄만큼 큰 소리에도 그냥 하하 웃어보이는 휴인이. “칼에 찔려도 죽을 부위 아니잖아, 팔은... 그치? 피 많이 나는 건... 그냥... 깊이 찔려서라고... 그냥 그 정도로 생각하자. 나 오늘... 얼마나 초조했는지 아냐.....? 나 애들 아픈 건 못 보겠더라, 비원아... 살려야지 싶더라.. 무조건... 살려야지.... 살려야지......“ “니 목숨 중요한 걸 알아야지!!! 강휴인, 너 정말!! 어떻게하려고 이 정도로!!!” “손가락 바늘로 찔려도... 피는 많이 난다... 원래 사람 몸이 그래.” 환영이가 소리쳐도 능구렁이 담넘듯이 말을 돌려버린다. 아직 굳어있는 민서의 곁을 지나 휴인이 옆으로 다가갔다.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눈을 떴을 때.... 흰 옷을 입고간 휴인이의 옷이.... 온통 빨간색으로 변해버린 걸 볼 수 있었다. 손이 떨린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아. “......휴인.....아..... 너.......” “미안, 누나.... 안 그래도 나 신비원이랑 지환영한테 엄청 혼날 거 같은데.. 누나는 좀 참아주면 안되나....?“ “..........너.........” “아니다, 그냥 혼날테니까 울지만 마, 응?” “...............너.........” “해커 아는 애들 중에 이런 거 전문으로 하는 야매 의사있어, 걱정마, 누나. 총 맞은데나 칼 찔린데만 전문으로 고치는 조폭담당 의사. 걱정마, 지금 부르면 오실거야. 정식 병원은 못가지만......“ 기를 쓰고 말을 더듬으려 하지 않는 게 보인다. 아까는 아파서 말을 못 이어놓고.... 넌 도대체 언제까지 날 그렇게 생각할거니. 제발 너 자신을 최고로 생각해봐. “지혈부터 해야지, 바보야.” 입고있던 겉옷을 벗어 휴인이의 팔을 꽉 묶어주고 있을 때.... 휴인이의 반대쪽 손이 내 팔을 꽉 붙잡았다. “......오늘... 많이 울었어? 울만큼... 운거야?” “............뭐....?” 꼭 뭔가를 아는 듯이 물어보지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에게만은 알리고 싶지 않아. “평소같으면... 나를 먼저 생각했을 거야... 칼에 찔리면... 안돼지... 근데 그 순간....병걸린 그 애... 얼굴이 생각나버렸거든.... 그래서....“ “........무슨... 말이야....?” “........ 누나도.... 애기 낳으면.... 그렇게 이쁜 애 낳을까... 생각하니까.. 어쩔수가 없더라.... 그냥 몸이 굳어버리는 것 같아서.... 병 걸린 아이가.... 누나가 낳을 아기에... 겹쳐보이는 것 같아서... 그래서...“ 온 몸이 축 늘어져버리는 것 같았다. 알고있다... 휴인이가..... 내 임신 사실을... 알고있어.... 휴인이의 말에 비원이와 민서가 깜짝 놀란듯 나를 쳐다보았다. “너...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환영이가 휴인이에게 다시 묻는다. 자신이 잘못 들었다는 듯. “오늘 아침에 누나 깨우러 누나 방에 들어갔다가.... 쓰레기통을 봤지. 임신테스트기가 있대요.... 해커애들한테 물어봤다... 두 줄이면 임신 맞다네요....“ “휴인아..............” “...... 오늘... 이진한 만났어? 뭐래?” 갑자기 치솟아 흐르는 눈물. “임신... 축하한다고 말해야되나, 누나?” 내 눈물을 못 본 척, 농담하듯 피식 웃으며 중얼거리는 휴인이. “지울거야.... 내일 지우러 가기로 했어.........” 억지로 짜내듯 중얼거린 내 말에 웃고있던 휴인이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누나!!! 지금.... 무슨 말을.... 아니죠? 다 거짓말이죠? 휴인이 말도 다 거짓말....” 놀란 환영이의 눈이 동그랗게 변해버렸다. 그는 말을 더듬으며 나를 향해 물었다. 민서는 내 곁으로 다가와 털썩 주저앉아버리고.... 비원이는 그제껏 본 적 없는 허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진지한... 아니, 무서운 표정으로 휴인이가 내게 묻는다. “........이진한이... 뭐래?” “...........아니야, 오빠 때문이 아니고..... 휴인아, 나는....” “나 봐, 누나.” 낮게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 “내 눈 좀 보세요, 누나.” 눈물 때문에 자꾸 니 모습이 흐려져. “키울 수 없잖아, 그냥 지울거야. 애한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어. 너한테도 미안해, 휴인아. 너한테 다시는 상처주고 싶지 않았어, 이런 일이 생길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나는 정말....“ 그 때, 내 손을 확 잡아당겨 나를 자신과 마주보게 만드는 휴인이. “내 아이야.” .....................뭐? “지금 누나 뱃 속에 있는 아기. 내 아기야.” 그게 도대체.... 무슨... 말...... “이래도.... 이래도 지울래, 누나?” 그 말 한 마디에 그 동안의 서러움이 터져나와버렸다. 나는 결국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그런 내 옆에 있어주었다. 그리고 울고있는 내 정신에 똑똑히 들어와 박히는 건... 휴인이의 작은 목소리였다. “혼자 키울 자신 없으면.... 우리가 키울테니까... 집에다 비밀로 하고, 이진한한테도 신경쓰지 말라고 화내버리면 되잖아. 누나가 신경쓸 일 없게... 우리가 다 알아서 하면 되잖아. 우리 되게 못 미더운 놈들이지만, 누나.... 누나 아이잖아. 사실 지우기 싫잖아....“ 말도 안돼... 그런 말 하지마...... “지우는 건..... 아니야. 누나도 싫잖아. 그러니까 누나... 그냥 낳으면 안되나?” 웃기지마....... 난 아직 스물 두 살일 뿐이야. “...........내 아기야.” 바보........... 바보 강휴인.... 차라리 날 때려... 더럽다고 욕해..... 꺼지라고 소리쳐. “...........누나.... 이래도 지울래?” 니가 그러면.... 포기할 수 없잖아. 내 아기.... 포기할 수가 없어져버리잖아. “내가.... 아빠 1호!!” 휴인이가 소리치자마자.... 나는 넘치는 눈물을 흘리며 그를 바라보았고, “.............그럼 내가 아빠 2호.”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면 비원이가 나를 바라보고있다. 경멸하는 눈으로 날 볼거라 생각했지만 비원이의 표정에는 장난끼가 가득했다. “궁금하네, 어떤 놈 나올지.” 비원이가 말을 내뱉자마자..... “나도 지우는 건 반대예요, 누나.” 환영이의 한마디. “내가 아빠 3호 할게요.” 내 마음을 나보다 잘 알아주는 건... 너희 뿐이야. “씨발.... ” 그리고 내 옆에서 주저앉아버린 민서는.... “어쩔 수 없네, 그럼 난 엄마 2호.” 다들 어쩜... 이렇게 하나같이 다 병신같니.... 너희들.... 왜 항상 이렇게 바보같이 구는 거야? 희생하고 지켜주는 게 너희들 역할이야? 왜 날 항상 보호받게 만들어?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난 그저 눈물만 뱉어낼 수밖에 없었다. “누나가 키울 수 없으면... 우리가 키울게.” “.................” “아빠 1호가 놀아주고, 아빠 2호가 기저귀 갈아주고, 아빠 3호가 목욕시키고, 엄마 2호가 밥 먹이고, 그러면 되겠네. 애기가 조금 크면.... 아빠 1호가 학교 데려다 주고, 아빠 2호가 도시락 싸주고, 아빠 3호가 운동 시켜주고, 엄마 2호가 공부 가르쳐주고.... 그러면 되겠네.“ 미쳤어... 니들 다 미쳤어..... “다른 아이보다.... 더 사랑받고 자랄 수 있게 할 수 있는데, 누나.....” “...................” “이래도.... 지울래?” 아무 말 못하고 피로 얼룩진 휴인이의 품에 안겨버렸다. 나머지 한 팔로 부드럽게 나를 감싸안는 휴인이의 온기가 느껴진다. 사랑해.... 사랑해..... 심장이 터져버릴만큼 사랑하고, 내 눈물이 바다를 이룰만큼 감사하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는 나의 모든 것을 알고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98. 그 한 마디 “아악.... 아, 좀 살살해요..... 진짜 아파.... 아!! 형, 진짜 쫌!!” 휴인이가 신음소리를 내뱉으면.... “아, 거 새끼 확 바늘 꽂아버릴라. 조용히 안해? 집중 좀 하자.” 바로 휴인이의 등짝을 찰싹 때리는 소리와 함께 흘러나오는 잔인한 용어들. 지혈이 되지 않는 휴인이의 팔 때문에 서둘러 해커에게 연락을 했고, 해커놈들은 급히 자신들이 잘 알고있다는 돌팔이 의사를 불러주었다. 조폭 전문 담당 의사. 조폭보다 더 무서워 보이는 의사. [관계자 외 출입금지]놈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는 걸로 보아서....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던 듯 하다. 다치고, 치료받고, 다시 범죄를 저지르고, 또 다치고... 이 아이들은.... 이 지겨운 일을 얼마나 반복을 한 걸까. 휴인이가 치료받는 동안 같이 있어주고 싶었으나 휴인이는 태교중에 피를 보면 안 좋다는 이유를 대며 내가 방안에 들어가는 걸 거부했다. 덕분에 지금 나와 평상 위에 앉아있는 건 민서와 비원이. 휴인이와 조폭 의사와 함께 방 안에 들어가있는 건 환영이. “마당 앞에도 피가 흥건해요.” 그리고 이어서 들리는 목소리는 나를 움찔거리게 한다. 준휘의 목소리. 그는 아까전부터 티나지 않게 나를 노려보느라 바빴다. 나를 노려보는게 들키면 그 즉시 비원이나 민서한테 뒤지게 욕을 들어먹을테니까. 준휘 입장에선 다시 돌아온 내가 못마땅해 미칠 지경이겠지. “청소해야지. 전에 동네사람들이 피보고 놀라서 경찰에 신고할뻔했던 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소름이 돋는다. 머리털이 곤두설 뻔했지, 걱정돼서.“ 애써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듯 말을 내뱉는 비원이. 원래 분위기따위 신경안쓰는 놈인데, 이렇게까지 행동하는 걸 보면... 너도 어지간히 많이 놀란 모양이야. “........이런 일.... 자주 있어?” 준휘의 눈치를 보던 내가 겨우 한마디 꺼내면 비원이가 대답해준다. “흔하진 않아.” “........... 특별하지도 않다는 얘기네.” “경보장치 울리는 바람에 공기총 맞은 적도 있었으니까.” 위험해. 너희들이 하는 일.... 너무 위험해. 말리고 싶지도 않고, 말리지 않기로 결심했지만... 너희들이 위험해지는 건 싫어. 내 걱정이 위선이라고 생각했는지 준휘가 다시 나를 노려본다. 그 시선이 느껴지지만 신경쓰지 않기로 한다. 지금 난 많은 것에 신경을 곤두세울 여력이 없으니까. “휴인이형이 흘린 피, 청소는 니가 좀 맡아줄래?” 준휘와 시선이 마주치지 않게 살며시 눈을 감아버린 날 도와준 건, 열음이의 진지한 목소리. “......... 이열음, 왜 하필 내가....” “큰 소리 내지말자, 그럴 상황 아니잖아.” 열음이의 부탁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돌아서는 준휘. 불편한 상황을 도와준 열음이에게 새삼 고마워진다. 물론 도와준 이유는 잘 모른다. 내가 안쓰러워 보여서일 수도 있고, 준휘의 눈흘김이 비원이한테 들킬까봐 조마조마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휴인이가 걱정돼서 준휘가 불평불만을 내뱉는 게 싫었을 수도.... “..........몸조리 잘하세요. 휴인이형이나, 시언누나나. 휴인이형 치료는 별 일 없을거예요. 피는 많이 흘렸지만 며칠 쉬면 괜찮겠죠. 정우형한테 치료비는 줄 필요 없어요, 전에 정보주고 보수 안 받은거 있으니까. 준휘도와서 청소하러 가볼게요. 또 도울 일 있으면 부르세요.” 그 때, 열음이는 무심한 척 하며 몇 마디 내뱉는다. 숨길 수 없다. 휴인이가 임신테스트기가 두 줄이면 임신이냐고 물어본 대상이 해커였으니까. 아니, 그들은 태교중에 피보면 안된다고 휴인이가 말하는 소리도 들었을테니까. 물론 해커가 나의 임신사실에 대해 아는 것이 편해지지만.... 어차피 알려야 할 사실이었지만.... 아직도 인정하기 싫은 건 마찬가지. 비원이는 열음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열음이는 평소의 그 무표정으로 돌아와 걱정스러운 표정의 산이를 끌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해커가 나가버린 자리는 금세 침묵으로 가득차고.... 그 순간,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방문이 활짝 열린다. “아, 진짜 개새끼들, 허구헌 날 다치기나 하고, 칼 맞으려면 좀 잘 맞든가. 왜 하필 그게 제대로 확 꽂혀버려가지고 피나 질질 흘리고 지랄이야. 저 새끼 오늘 피 모자라서 어지러울 거야. 몇 번 쓰러질지도 몰라. 그냥 물 먹이고 몇 번 밟아서 재워. 다 나을 때까지 눕혀두고. 상처 꿰매놨는데 실 푸는 거 환영이가 할 수 있지? 나 다시 오기 귀찮으니까 대충 풀어.“ 그리고 나오는 건 돌팔이 조폭 의사. 역시나 하는 말은 범상치 않았다. 나는 휴인이가 걱정되어 바로 방 문 앞까지 쪼르르 달려갔고 그 의사는 나를 보자마자 의미있는 표정으로 씩 웃어보인다. “지우가 말하던 여자가 이 사람이구만.” 엥? 지우? 설마 호스트바의 지우씨? “아, 아직 말 안했었나, 정우형이랑 지우형이랑 형제야. 정우형이 형이고, 지우형이 동생.” 놀란 내 표정을 읽었는지 비원이가 상황설명을 해준다. 말도 안돼!!!! 그 곱상한 지우씨랑 이 돌팔이 야매 조폭의사가 형제라니!!! “저 새끼 자주 골골대서 일찍 죽을지도 모르는데, 어때요, 아가씨? 강휴인 저 새끼 버리고 그냥 우리 지우랑 사귀는 게....“ “아, 형!! 진짜 왜 그래, 나 차이는 꼴 보고 싶어?” 그 남자의 능글맞은 말투에 휴인이는 바락바락 대들고.... “아, 거 새끼. 농담 한 번 한 거 가지고 승질내기는...” 조폭의사는 휴인이가 광분하는 게 귀여웠는지 한 번 피식 웃어보인다. “지우 칭찬이 대단합디다.” “..........예?” “이 범죄자 집단 어르고 달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 힘 내쇼. 진심으로 좋은 말 해줘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질 않나, 맨날 다쳐서 들어오지, 말 죽어라 안 듣지, 나쁜 짓이나 하고 댕기지. 솔직히 말하면 그냥 문제아 군단이니까. 말 안들으면 그냥 패버려요.“ 이 사람도.... 지우씨와 비슷하다. 말은 저렇게 해도.... 깊은 애정이 담겨있어. 나, 이런 사람들과 마주하면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 너희들을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고, 보호받고 있는데... 나는 왜 너희들을 감싸주지도 못하고 지켜주지도 못하는 걸까. 현실과 이상 사이가 너무 멀어서 미칠 것 같아. 지우씨.... 알고 있나요? 난...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좋은 여자가 아니예요. “지우형이 내 여자 너무 좋아해. 전해줘요, 정우형. 나 절대 안 뺏길거라고. 이거 경고니까, 더 이상 가까이 지내면 안된다고 해줘.“ 휴인이가 다시 중얼거리면.... 정우씨는 붕대로 칭칭감긴 휴인이의 팔을 쓰윽 건드린다. 휴인이는 견딜 수 없는 아픔에 바닥에 드러누워 한 마리의 물고기마냥 파닥거리기 시작했고, 정우씨는 대수롭지 않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는... “그럼 난 간다.” 라는 한 마디를 남기며... 바람처럼 사라져간다. 정말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너무나도 태평한 그런 모습으로. 왠지 그런 모습이 부러워졌다. 진지하고 심각한 모습보다 한 번 씨익 웃어줄 수 있는 그런 여유가 부러웠다. 내가 이 아이들에게 존재하는 이유는 뭘까. 내가 줄 수 있는 건... 과연 뭐지? 나는 내 한 몸조차 책임지지 못하는 힘없는 여자일 뿐인걸. 사랑, 그 뿐일까. 보잘 것 없는 내 사랑 하나만으로도... 괜찮겠니? 정말... 괜찮겠니, 얘들아? “누나.....” 그 때, 어두운 내 표정을 눈치챘는지 휴인이가 장난끼어린 표정으로 날 부른다. “응? 왜?” “오늘 같이 자자.” 나/휴인이/민서/비원이/환영이. 휴인이의 앙탈에 마지못해 저 순서대로 방 안에 나란히 누워버린 우리들. “역시 아플 땐 혼자 자면 안돼.” “근데 휴인아, 너 하나도 안 아파보여.” “응, 그래도 나 피 많이 흘려서 어지러워, 누나.” “그럼 말 좀 그만해.” 내 말에 삐진 듯 잠시 잠잠해진 휴인이. 그리고 우리 싸움에 어이가 없는 듯 아까부터 잠자코 있는 민서, 비원이, 환영이. 그 순간을 틈타, 나는 정말 하고싶었던 말을 내뱉는다. 어둠이 가득한 그 공간이, 오히려 내 진심을 말하는 데 더 도움을 주었다. “있잖아. 아까 정말 고마웠어.” 아무 말 들리지 않지만, 모두 내 말을 잘 들어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 “하지만 역시, 병원에 가야할 것 같아. 현실성 없는 이야기잖아. 그냥 지울게. 너희들은 아직 어리고, 이런 일은 성급히 결정하는 게 아냐, 충동적으로 정했다가.... 나중에 후회하게 될 거야. 난 괜찮으니까....“ 아까부터 쭉 생각해왔던 말을 입 밖으로 꺼낸다. “난 딸이면 좋겠어. 나 머리 땋을 줄 알거든.” 그러나........ 그런 내 말을 무시하고 불쑥 되도않는 말을 꺼낸 건 휴인이. “난 아들. 레슬링 한 판 하게.” “나도 아들. 딸이면 큰일나지. 우리한테 뭘 배우겠냐.” “그래도 난 딸 괜찮을 거 같은데, 이쁘게 키우면 되지.” 그리고 차례대로 비원이, 민서, 환영이. 약속이나 한 듯이 내 말을 깡그리 무시해버리는 아이들. “야.... 니들 내 말 듣고는 있냐....?” 다시 한 번 꺼낸 내 말. “근데, 애기가 커서 우리 범죄 저지르는 거 알게 되면 어떡하냐.” 내 말을 다시 한 번 무시하고 꺼낸 휴인이의 한마디에, 이젠 나도 동작정지. “아빠 1호는 강도에, 아빠 2호는 호스트바 에이스에, 아빠 3호는 폭력대행에, 엄마 2호는 소매치기.... 그건 좀 아닌데.“ 그들이 자기 입으로 범죄에 대해 평가하는 건 처음인 것 같다. “다른 일 알아봐야 되나.” “아무래도. 애가 보고 배우면 안되니까.” “누나가 출산하기 전까지, 그만 둬야겠구나, 이 짓거리.” 이번에도 차례대로 비원이, 민서, 환영이. “아빠엄마 되는 거 되게 힘들구나. 떳떳하게 안 살면 애 얼굴도 못 보겠네.” 휴인이가 다시 한 마디 내뱉을 때도, 난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범죄를 그만둔다는 말을 했다. 내 뱃 속의 아이로 인해, [관계자 외 출입금지]가 범죄를 중단할 수도 있다. 어느 날 굴러들어온 스파이 여자와, 자신들을 잡으려는 한 검사의 아이에게 이렇게 무한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줄 수 있을까. 누가 이 아이들을 더럽다고 욕할 수 있을까. 눈치없는 눈물이 또 한 줄기 흘러내렸다. “엄마 1호!!” 그 때, 휴인이가 나를 불렀으나, 목이 메어버린 나는 대답하지 못했고, “뭐야, 벌써 자?”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휴인이는 장난스럽게 중얼거리더니 이내 진지한 목소리로 한마디 꺼낸다. “있잖아, 평생을 후회해도 좋아. 그로인해 누나가 행복하다면, 아이가 웃는다면.” 누나가 행복하다면.... 아이가 웃는다면.... 평생을 후회해도...좋아..... 밤새 나를 숨죽여 울게 만들었던.... 그 한마디. 99. 구원 아침, 눈을 떴을 때는 시계가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관계자 외 출입금지] 놈들은 깰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웬일이지, 다들 잠이 없는 편인데. 하긴, 피곤할 만도 하다. 여행 다녀오고 나서 다들 일하러 돌아다녔으니. 거기다 휴인이가 칼에 찔려 피를 심하게 쏟으며 다쳤고, 나는 임신했고, 환영이의 비참한 직업도 민서에게 들켜버렸다. 늦잠자는 거 보니까 비원이는 밤 근무겠지. 휴인이나 환영이나 민서는 독자적으로 일하는 놈들이니까 굳이 안 깨워도 될테고. 두통이 느껴지는 머리를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머리가 어질거리며 현기증이 느껴졌다. 나 되게 건강한 사람인데 왜 이러지. 이런 게 다 임신 후유증인가. 도대체... 얼마나 내 속을 썩일 녀석이 나오려는지. 왜 하필 이런 때에, 이런 식으로 나에게 와준거니. 미안해, 널 사랑하겠다고 맹세해준 사람들이 있지만... 난 아직 자신이 없어. 평범한 인생을 살게 해주지 못할바엔, 진심으로 널 행복하게 못해줄 바엔.... 니가 아직 아픔을 느끼지 못할 때, 아주 작을 때... 그 때.... 터져나오려는 눈물을 멈추면서 내 옆에 누운 휴인이를 바라보았다. 웃통을 벗고 잠이 든 휴인이의 상체 구석구석이 모두 붕대로 감겨져있다. 팔 쪽에 감긴 붕대에 선명하게 붉은 피가 배어나와 있다. 많이 아프겠지, 아픈 티 안 내려고 하는 게 더 힘들었을텐데. 정신적인 아픔이 너무 커서... 육체적인 아픔을 아예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넌 그 정도로 안쓰러운 사람이야, 강휴인. 이렇게 밝은 아침이 되었는데도... 너희들 방은 이렇게 어두웠구나. 내 방은 햇살이 환하게 내려앉는데, 너희들 방은 왜 이런걸까. 하늘이 너희들을 편히 살게 도와주지 않나봐. 나쁘다, 많이. 지금 휴인이를 잡겠다고 검찰이나, 경찰이나 다들 혈안이 되어있을텐데, 드디어 이 놈이 움직여 버리고 말았으니까, 수사는 더욱 진행될텐데... 아버지나 진한오빠가 가만히 있어주려고 할까.... 왜 하필 제일 큰 범죄를 맡은 게 휴인이일까, 조용히 활동하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왜 휴인이만 눈에 띄는 범죄를 저지르는 걸까. 머릿속이 복잡하다. 아버지와 약속한 한 달이 다 되어간다. 나는 도대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미칠것만 같다. 그 때 마침, 진동으로 해둔 내 핸드폰이 요란스레 드드득 거리기 시작했고, 나는 아이들이 깰까봐 서둘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마당으로 나갔다. “여보세요?” - 집 앞이야. 나와. 목소리를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진한오빠다. 급하긴 급했구나, 아침부터 이렇게 달려오다니, 정말 대단하네. 어제 [관계자 외 출입금지]와 주고받은 수많은 말들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친다. 그 애들이 지켜주겠다고 했는데, 사랑해주겠다고 했는데, 돌봐주겠다고 했는데.... 사실 말야, 나 진한오빠 아이 낳고 싶지않아. 하지만..... 이건 내 아이니까, 오빠 아이 말고, 내 아이도 되니까... 보고싶었어, 한 번이라도. 느끼고 싶고, 만지고 싶고, 사랑해주고 싶었어. 휴인이가, 환영이가, 민서가, 비원이가 키워주겠다고 말했지만... 나 염치없이 애들한테 그런 거 맡길 수 없어. 내가 내 손으로 그 애들 감옥에 처넣을 지도 몰라. 그런데 그런 내가, 언제 배신하게 될지 모르는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역시 무모해. 아직 애들이라, 너무 무모해. 근데.... 그 무모함이 나를 미치게 만들어.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어. “지금 나갈게, 기다려.” 선택은 어렵지 않았다. 지워야만 했다. 낳아놓고 나 몰라라, 하는 무책임한 부모가 될 순 없었다. 낳아야 한다면 [관계자 외 출입금지]에게 맡기지 않고 내 손으로 키워야 했고, 나는 아직 아이를 키울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재빨리 내 방으로 들어가 간단한 세수를 하고, 겉옷을 대충 걸쳐입은 채, 캡모자를 눌러썼다. 민서나 비원이가 모자 자주 쓰는 이유, 잘 알겠네. 하늘과 마주할 수가 없다, 죄책감에 두렵고 무서워서. 햇살이 나를 내려다보는 게.... 너무나도 미안해서. 눈 감고 있으면.... 모든 게 끝난다고 했어, 침착하자, 시언아. 더 흘릴 눈물도 없잖아. 난 아파할 자격도 없어,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려봐야해. 심호흡을 한 후, 마당밖으로 나갔다. 진한오빠의 삐까번쩍한 외제차가 얌전히 집 앞에 주차되어 있었다. 오빠는 여기까지 온 것 자체가 부끄럽고 짜증스러운 듯 인상을 찌푸렸고, 나는 캡모자를 더욱 더 눌러쓰며 차문을 열고 조수석에 앉았다. “.........잠은 잘 잤어?” 마지못해 묻는 진한오빠. “잘 자고, 못 자고... 그게 중요해?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닌 것 같은데.” “병원 알아놨어, 실력있는 곳이래. 예약도 해놨으니까 가자마자 바로 수술 할 수 있어. 너무 걱정하지마, 그냥 마취하고... 푹 자고 일어나는 거라고 생각해.” “........ 나 자신을 걱정하는 게 아니야.” “어쩔 수 없어. 괜히 낳아서 불행하게 하는 것보단 나아.” 차라리 정말 휴인이의 아이였다면... 그랬다면... 난 어떤 선택을 내렸을까?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거야. 휴인이도, 환영이도, 비원이도. 이진한, 너같이 잔인한 아빠는 아닐거야. 민서도 나처럼 이기적인 엄마와는 차원이 달라... 행복도 못주고 이렇게 아이를 보낼 수 밖에 없는 내가, 이진한 너같은 새끼한테서 이 아이를 구해줄 수 없는 내가.... 증오스러워서... 원망스러워서.... 당장이라도 죽어버리고 싶어. 눈물이 떨어지는 바람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 어떤 행동에도 아랑곳하지않고 진한오빠는 무조건 차를 몰고만 있었다. 지금 그에게는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병원에 가는 것, 오로지 그것만이 중요했다. “제기랄, 내가 어쩌다 이런 곳까지....” 엘리베이터를 타는 내내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진한오빠. 미끈한 건물의 5층에 위치한 산부인과로 가는 길은, 내가 세상에서 걸어온 그 어떤 길보다도 험난했고 눈물겨웠다. 띵- 하는 절망적인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안되겠어, 오빠. 나 못할 거 같아.” 참고 참아왔던 내가 겨우 한 마디를 뱉어내면... “정시언, 너 정말 깔끔하지 못하게 이럴거야? 빨리 내려.” “우리 아기잖아. 나 오빠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오빠 아기잖아. 이거 내 아기잖아... 오빠, 이건 아닌 거 같아. 아무래도 이건 아니야.“ “.......그럼 너 혼자 키울거야? 애 아빠가 누군지 밝히지 않고 평생!!! 너 혼자 이 아기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하고, 희생하고!! 그렇게 살 수 있어?“ “................” “나 결혼해, 날짜 잡혔어. 지금 이렇게 혼란스러운 일 생겨서 좋을 거 없어!! 니가 애 낳아봤자 난 걔가 이뻐 보이지도 않을거고, 사랑하지도 않을 거야. 아니, 아예 내 눈 앞에 나타나는 것 조차 소름 끼칠지도 몰라.“ “............아기 들어.... 뱃 속이지만 들을 수 있어.... 조용히 해.” “어차피 지울건데, 듣든 안 듣든.... 그게 중요해?” 악마. 악마로 보였다. 그 순간의 진한오빠는 내게 저승사자보다 더 무서운 존재였다. “나 못 가.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난 이미 한 아기의 엄마야. 못 가겠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 않고 그대로 다시 닫힘 버튼을 누르려 할 때, 이미 엘리베이터 밖에 나와있는 진한오빠가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버티려는 나와는 달리, 진한오빠는 성큼성큼 나를 끌고 병원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헛구역질 때문에 밥 한 끼 못 먹고, 신경이 곤두서 잠도 자지 못한 나는 힘없이 오빠에게 이끌려 산부인과 안으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놔!!!! 이거 놔!!!! 니 맘대로 결정하지마!!! 놔!!!!” 내 미친듯한 발악도.... “오빠... 조금만 더.... 이건 아니야, 다른 방법 있을거야, 진한오빠!!” 간절했던 애원도..... 그 어떤 것도 진한오빠의 앞에서는 무기력했다. 진한오빠는 기어이 날 산부인과 안으로 끌고들어가 소파위에 패대기 쳤고, 난 간호사들의 흥미어린 시선을 그대로 받아내야 했다. 끊임없이 새어나오는 눈물과 함께 비참한 심정이 내 목까지 차올랐다. “계산 먼저 하죠.” 진한오빠는 지갑을 꺼내 카운터 위에 수표를 던지듯이 떨어뜨렸고.... “..........아이... 지우실 거죠?” 한 간호사가 나에게 다가와 조심스레 물어보면..... 쉴 새없이 떨려오는 내 몸과, 목소리와..... 심장. 눈물을 그치기 위해 나 자신을 진정시키려 숨을 한 번 들이켰을 때였다. 갑자기 산부인과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나타났다. 나를 이 지옥에서 구원해줄...... ............ 네 명의 천사들이. “뭐야, 이거.....” 진한오빠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버리고.... 내가 아무 말도 못한 채 멍하니 눈물만 흘리고 있으면..... “......간호사 누나.... 아까.... 뭐라 그랬어요?” 5층의 계단까지 숨도 안 쉬도 달려와준 듯한 휴인이가 헐떡이며 묻는다. 바보들... 난 너희들 자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안심했는데... 뭐야,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아니, 저기... 그게, 오늘... 지우신다고.....” 갑자기 세 명의 소년과 한 명의 소녀가 병원 안으로 들이닥치자 놀란 듯한 간호사는 더듬거리며 휴인이에게 중얼거렸고.... “누가 뭘 지워요.” 어이없다는 듯 픽 웃으며 간호사 곁으로, 내 앞으로 다가오는 휴인이. “이 여자 내 여자고.” 내 손목을 휙 낚아채며 진한오빠를 바라보는 그 놈. “이 아기 내 아기다.” 멍한 표정의 진한오빠. 안돼, 왜 거짓말 해.... 너 왜 거짓말 해.... 강휴인, 너 정말 미쳤어.... “근데 내 아기를... 왜 니가 지워.” 무서운 표정으로 진한오빠를 향해 묻는 휴인이. “나 농담할 시간 없다, 꼬마야.” 진한오빠는 한숨을 내쉬며 지갑을 다시 닫아 양복의 속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내가 누나랑 잤다면?” “뭐?” “이 아기 진짜 내 아기라면?” 한 발도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 휴인이와, 그 반응에 적잖이 놀란듯한 진한오빠. “정시언... 이 꼬마 하는 말이 진짜야?” 진한오빠의 말에 내가 아니라고 반박하기도 전에.... “태어나면 유전자검사라도 해보시던가.” 너무나도 태연하게 거짓말을 해대는 휴인이. “내 여자랑 내 아기한테 함부로 해대는 거, 정말 불쾌해. 여기에서 니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 아무 것도 없어. 넌 검사고, 난 범죄자지만..... 넌 우리보다 더 더러워, 깨끗한 척 하지마.“ 진한오빠는 도무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고. “가자.” 휴인이는 나를 소파에서 무작정 일으켰다. “앞으로 계속 말하게 하지마!! 누나 한 번만 더 지우려고 했다간 진짜 혼나!!” 정말 화난 듯한 휴인이가 버럭 소리를 내지르면.... “때리기도 싫어, 내 주먹 더러워질 거 같애.” 진한오빠를 노려보던 환영이가 한 마디 내뱉고. “내가 소매치기를 하거든요, 검사 아저씨.” 카운터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선 민서는 진한오빠가 내놓은 수표를 집어든다. 그리고는 쫙-!! 수표를 반쪽으로 깔끔하게 찢어버리고는... “근데 지금 이 돈은.... 내가 버는 돈보다 더 더러워.”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바닥에 남은 수표 조각을 떨어뜨리는 그녀. “우리도 건드리면... 폭발할 줄 알거든.” 큰 키로 진한오빠를 내려다보던 비원이도 한 마디 거든다. “우리가 왜 [관계자 외 출입금지]인 줄 알아?” “너 이 새끼들 진짜......” “관계자 외의 사람이 계속 깔짝대면.....” “..................” “그 땐 죽어.” 비원이의 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휴인이의 발걸음이 다시 떼어졌다. 진한오빠를 산부인과에 남겨둔 채, [관계자 외 출입금지]는 나를 그 공간에서 구원해주었다. 100. 아름다운 꿈 내 손목을 세게 움켜쥐고 산부인과 밖으로 나오는 휴인이를 선두로 해서, 휴인이 뒤에서 끌려가고 있는 내 옆에 나란히 서 주는 환영이와, 내 뒤를 바짝 붙어 따라오고 있는 비원이와 민서. 알고 있다. 지금 이 애들은 나를 경호하듯 감싸서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 나에게 화난 감정도 있을 터, 휴인이의 발걸음은 내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빠른 상태였다. “휴인아...............” “분명히 말했었지.” “.............” “이제 누나 혼자만의 아이가 아니라고.” 성큼성큼 걷기만 하다가 드디어 뒤를 돌아 나와 마주서는 휴인이. “아빠 1호, 2호, 3호. 엄마 2호까지 네 사람이 있어. 엄마 1호 혼자 결정할 일 아니야. 그리고... 아무 상관도 없는 그런 남자가 누나를 그렇게 끌고가서 지우라고 할만큼... 그렇게 가치없고 버려도 되는 쓰레기같은 아기 아니야. 적어도 나한테는 그래.“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휴인이의 눈조차 제대로 바라볼 수 없어서 난 고개를 숙여버렸다. “이제 나한테도 소중해진 아이야. 누나가 불쌍해서, 싫은데도 좋은 척 하는 거 아니야. 어른들의 생각 우리한테 강요하려고 하지마. 어쩔 수 없이 키우려고 하는 거 아니야. 우리한텐 누나 뱃 속의 아기, 이진한 애 아니야. 정말 우리 아기야. 우리가 함께 한 시간 속에서, 우리가 한 사랑으로 태어난 아기.“ ............ 상식이 안 통하는 아이들이란 거, 그 정도로 순수한 아이들이란 거. 내가 또 잊고 있었구나. 미안해, 누나는 이미 더러운 세상에 물들어버려서... 너희들의 아름다운 생각을 다시 침범해버리고 말아. “사랑 못 받고 자랄 거라고 생각해? 행복하지 못한 인생, 그냥 빨리 끝내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이 세상 빛도 보지 못하고, 그냥 빨리 지워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휴인아, 나는.........” “나, 세상이 좋은 적 없었어. 무섭고 두려웠어. 엄마는 집 나가고, 아빠는 병 걸리고. 재미도 없었고, 좆같앴어. 왜 나만 이래야 하는지, 짜증나고 화가 나고.... 동생은 짐승한테 당해서 울부짖을 때도... 난 도와줄 수도 없었고... 그 애가 정신병원에 끌려갈때도... 난 그걸 그냥 가만히 보고 있어야만 했어.“ 휴인이가 동생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정말 진심이라는 의미. “근데, 살다보니까... 누나가 오더라.” “휴인아........” “나도.... 행복해질 수 있더라. 행복해지더라.” 신이 있다면, 제발 좀 대답해줄래요? 내가 어떻게 해야하나요. 이 아이들 앞에서... 나... 정말 어떻게 해야 옳은건가요. 더러운 내가... 이 아름다운 아이들 곁에 계속 머물러 있어도 괜찮은 건가요. “누나 아기도 그럴 수 있겠지, 자라면서 다른 아이들이랑 다르단 거 느끼겠지. 거의 다 쓰러져가는 집 한 채에서 살아갈거고, 모유는 커녕 분유만 먹고 자라겠지. 서로 사랑하면서 잘 살아가는 다른 친구들 엄마 아빠 부러워하겠지. 소꿉놀이도 못할걸, 우리 아기 머릿속에 인식된 부부는 사랑이 아닌 우정의 감정이니까. 다른 애들 엄마아빠는 한 명 씩인데, 자기 엄마는 둘에 아빠는 셋이니까. 그나마 있는 엄마 1호는 자기 얼굴 자주 보러 오지도 않겠지.“ “....................” “더 크면 더 괴로워지겠지. 다른 사람들이 수근대는 말이 아이 귀에 들려올거야. 총각 아빠 셋에 처녀 엄마가 하나 있다고, 아이 친엄마는 같이 살지도 않는다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올라갈수록 학부모 면담할 때 되면 나, 환영이, 민서, 비원이. 다 같이 가던가, 시간 되는 사람이 한 명씩 돌아서 가던가 하겠지. 급식 퍼주러 가서 아이 친구들의 질문에 대답해줘야 할거야. 애들이 묻겠지. [누가 진짜 아빠예요? 얘는 왜 아빠가 여러명이예요? 주워왔어요?]“ “................. 휴인아, 그만....” “그런 상황 오면 어떡할거냐고 묻고싶지? 미안해, 누나. 나 그거 아직 생각 못했어. 정말 그런 상황 오면 정말 아무 대답 못하고 굳어있을 수도 있어. 왜냐면 우리 아직 어리거든. 어떻게 대처할 지 모르거든. 그 질문한 꼬마애 머리 한 대 쥐어박을 수도 있어, 그러다 싸움나고 나는 다시 문제아 어른으로 찍혀버리겠지. 나 다 알아.“ “..................” “하지만 그러면서도 왜 키울거냐고, 아이가 불쌍하지 않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 그만해....” “아니.” “..............” “그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네.” 단호한 휴인이의 눈빛. 목소리에도 떨림이 없다. 그의 모습은 당당했다. 그래서 눈부셨다. 내가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볼 수 없을만큼이나. “다른 아이들보다 더 사랑받았는데... 거짓으로 한 사랑이 아닌데... 왜 불행할까. 손찌검 하지도 않을 거고, 소리치지도 않을 거고, 욕하지도 않을 거고. 애를 위해서는 그 어떤 일도 부끄러워 하지 않고 뭐든지 할 자신 있는데... 항상 웃어주고, 다정하게 대해주고, 가끔 삐뚤어지면 혼도 내줄 수 있는데... 근데 그 애가 왜 불행해질까?“ “.......... 휴인아, 누나는 지금.....” 듣고싶지 않았다. 즐거운 미래든, 불행한 미래든, 나에겐 그 무엇도 눈물나는 것들 뿐이었으니까. “낳기만 한다고 다 부모가 아니잖아. 낳은 부모가 애 키우라는 법은 없잖아, 누나.” “..................” “.........불행해진다해도.... 우리가 정말 잘못해서 애가 잘못 자란다고 해도..... 그래도 누나, 살다보면..... 웃을 날이 오지 않을까?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 휴인아...........” “나도 그랬으니까. 나도 그러니까.... 그 애도... 나처럼....” 휴인이는 결국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고개를 숙이는 휴인이의 얼굴을 나는 그저 울면서 바라보아야만 했다. “눈물도 아까워, 울지말아요.” 그리고 분위기를 정리해주는 건, 평소와는 다른 말투의 환영이. 평소 침착하고 부드러운 말투를 쓰는 환영이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단호하고 엄격한 말투였다. 더 이상 나를 쓰러지지 않게 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처럼. “뭐가 두려운 거예요?” “..............” “적어도 우린, 도망치진 않았어요.” 폭력의뢰를 받은 후, 아이들을 때려눕힐 때의 환영이 표정이 이럴까? 소름끼칠 정도로 무섭지만, 눈빛은 소스라칠 정도로 슬퍼보인다. 평소의 환영이와는 너무나 달라보이는 모습. 나에게 실망한 듯한 환영이의 말이 무조건 옳다. 그 애들에 비하면, 난 얼마나 비겁한 사람인지. “우리가 그렇게 못 미더워도 정도가 있지... 얼마나 못 믿은거야, 도대체.” 환영이가 폭발할까 무서웠는지, 그 때 바로 나서준 민서. “평생 엄마로 살아갈 수 있어. 한 아이의 엄마로, 여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구. 햇빛을 보지 못해도 좋으니까.... 가면 쓰고 살아도 좋으니까... 지금은 모르지만... 너, 아마도 언젠간, 내 말 깨달을 수 있겠지. 그게 나한테 얼마나 큰 결심을 필요로 하는 일인지.“ 수수께끼같은 말만 늘어놓는 민서지만, 왠지 진심이 느껴진다. 그리고, 마지막을 장식할 비원이의 말은............ 무서운 환영이의 말에 간신히 멈춘 내 눈물샘을 다시 터뜨려 버렸으니.... “궁금하댔지, 어떤 놈인지.” “..................” “18년 살면서 수학문제 하나 궁금해본 적 없었고, 내 인생 왜 이런지 질문한 적 없었고, 세상은 왜 이렇게 좆같을까 물어본 적도 없었고, 더러운 놈들이 왜 이리 많은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근데, 그렇게 살아오던 나한테 궁금한 게 딱 하나 생겼거든. 어떤 놈인지, 어떤 앤지, 어떤 얼굴로, 어떤 웃음을 짓고, 어떤 성격에, 어떤 환경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갈지.“ “............ 바보들..........” “그리고 내가 어떻게 키워야 정말 잘 키웠단 소리 들을지.” “야, 신비원......” “그 답은 너밖에 못 풀어, 정시언.” “....................” “살면서 궁금한 거 하나 없었던 새끼가, 진짜 미칠 정도로 궁금한 게 하나 생겼는데... 그 정돈 가르쳐줘도 되는 거 아니냐. 너 누나 노릇 하고싶어했잖아. 한 번 해봐, 내가 모르는 거, 가르쳐줘봐. 이까짓 것도 모르냐고, 나한테 알려줘봐.“ 정말 사람 울리는 데는.... 다들 재주 있다니까.... 사실 너희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지옥같은 병원에서, 악마같은 이진한에게서, 아이를 지울 거냐고 묻는 간호사에게서... 나를 데리고 무작정 나와준 너희가 얼마나 고마운지. 너희들로 인해... 내가 살고, 내 아이가 살았어. 작지만 분명하게 쿵쿵, 울리고 있는 심장을 가진 내 아이가 살았어. “누나 지금 되게 힘들지?” 눈물을 그치기 위해 노력하는 나에게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휴인이가 말을 건다. “여자친구가 힘들어하는데 남자친구 혼자 멀쩡할 순 없지.” “.......... 응?” “유인이 만나러 가자.” 웃으려고 노력하지만, 굳어지고 있는 휴인이의 표정. “원래 오늘 다같이 면회하러 가려고 생각중이었는데, 누나가 이런 식으로 다른 일 먼저 터뜨려버릴 줄은 몰랐잖아. 심장이 내려앉는 거 같아서 정말 놀랐다구. 유인이 얼굴 본다고 해도 이번처럼 놀라지는 않을 자신있어.“ 내 손을 다시 잡아끄는 휴인이. 환영이의 표정도 원래대로 돌아왔고, 무심한 민서의 몸짓도, 나른한 듯한 비원이의 태도도 다 그대로 돌아왔다. 거짓말처럼, 편해졌다. 엄마의 자궁안에 들어있는 것처럼. 이제 아무것도 나를 해치지 못할 것이라는 안도감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온 몸에 힘이 쭉 빠져버린 나를 끌고 정류장으로 간 아이들과 함께 버스에 올랐다. 버스 맨 뒤의 다섯 자리에 나란히 앉아 유인이를 만나서 떠나는 길. 다섯 자리의 한가운데에 앉아, 오른쪽에 있는 휴인이에게 고개를 기대고 나는 깜빡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앞으로 우리가 그려갈, 당연히 이루져야만 할, 그런 행복한 꿈을. “니가 좋아하는 애가 쟤야?” “응, 비켜봐, 아빠. 잘 안 보여.” “머리 긴 애? 머리띠 한 애 맞지?” “아냐, 머리 땋은 애야.” “에에? 야, 못생겼어, 말도 안돼!!” “아냐, 이쁘단 말이야!!!” 내 꿈 속의 아기는.... 아들이었어. 있잖아, 거짓말처럼 휴인이를 닮아있었어. 꿈 속 첫 장면부터 휴인이랑 티격태격 싸우고 있었지. 담벼락에 숨어서, 학교정문 너머의 좋아하는 여자애를 바라보면서. “아빠, 저 애 피아노 친대.” “야, 아빠 생각엔 머리띠 한 애가 더 나을 거 같애, 아니면 저기 모자쓴 애라도!!” “그래서 말인데, 아빠.” “.......응?” “나 피아노 학원 보내줘!!” “........... 너 2주 전에 미술학원 다니기 시작했잖아, 너 미술에 소질있는 거 같다면서.” “아, 소질은 소질이고!! 아빠!! 사랑은 사랑이고!!!” “........ 정말 내가 객관적으로 봤을 때 넌 음악엔 소질없어, 아들.” “사랑 때문에 하는 거라니까, 사랑!!!!” “...........너 때문에 아빠 등의 파스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간다, 알고있냐?” 그 다음에 이어진 장면은, 환영이가 아이의 도시락 싸주는 장면이었는데... “아빠, 아빠!! 빨리 도시락 줘, 나 늦는단 말야!! 오늘 소풍인데!!!!” “아, 기다려봐, 지금 소세지에 문어모양 내는 거 안 보여?” “그러게 누가 늦게 일어나래?” “아빠 어제 일했다고, 일!!! 그래도 밤늦게 너 김밥 싸줄 재료 다 사들고 온 거 봤잖냐!!” “그럼 뭐해, 아빠가 김밥 싼 거 되게 못생겼어. 옆구리 다 터졌잖아.” “처음에 싼 것만 옆구리 터졌어, 그건 강휴인, 아니지, 1호 아빠가 다 먹었잖아.” “아빠!! 지금 당근으로 꽃무늬 만들고 있을 시간 없거든!!?” “임마, 기다려, 유부초밥 아직 안 쌌어!!!!!” 그 뿐인가? “엄마, 나 이거 모르는데.” “쉽잖아, 바보.” “양이 열 마리 있었는데, 3마리가 안 돌아오면... 음... 음....” “어제 사과 열 개 사놨었지, 아빠 2호가.” “응.” “근데.... 1호 아빠가 세 개 처먹었지?” “응.” “몇 개 남았어?” “일곱 개.” “빙고.” 만족스럽게 서로 하이파이브를 하는 민서랑 아들에 이어... “너 아빠가 한 말 까먹었어?” “아니.” “내가 정확하게 5일전에 뭐랬냐.” “... 친구랑 싸우지 말라고....” “근데.... 오늘 친구 얼굴을 주먹으로 때려서 코피나게 했다고...?” “아빠, 그게!! 그러니까 걔가 먼저 내 지우개를!!!” “이번 달에 아빠가 니네 학교 찾아가서 사고 뒤처리하는게 3번째다, 응? 니가 지금 중학생도 아니고, 고등학생도 아니고 초등학생인데!!“ “..............” “됐어, 긴 말 필요없고, 너 진짜 어떻게 혼나야 정신 차릴래, 엉?” “좋아, 아빠. 결심했어.” “..............” “맞을게.” “............너 내가 몸으로 때울 생각 하지 말랬지.” “...........쳇.” “1호 아빠만 닮아가지고 잔머리만 늘어서!! 반성문 써와, 다섯 장이야.” “아빠!! 나 그냥 맞으면 안돼?” “안돼. 너 저번처럼 종이 한 장 당 한 글자씩 ‘죄송합니다’ 써오기만 해봐. 그 땐....” “그 땐?” “..........너 지금 다니는 피아노 학원 못 다니게 할 거야.” 잘못한 아이를 혼내는 비원이의 모습까지. 나, 있잖아. 그런 꿈을 꿨어. 행복하지만 눈물나는, 그런 꿈. 바로가기 Daum 카페 음악샵 내 블로그 내 메일 내 쪽지 인터넷소설닷컴 cafe.daum.net/youllsosul 훈장(공개) | 회원수 947,215 카페정보내 정보 가입 112 방문 18528 새글 252 카페지기 [주인]유리 개설일 2002.01.22 프로필 수줍은미소☆ 수정 쪽지 0통 메일 50통 내 글 반응 내가 쓴 글 작성중이던 글이 있습니다. 휴대폰 카페 카페 초대 회원 보기 소모임 바로가기 -------------- [소모임 만들기] 카페 ON (미사용중)채팅 카페 탈퇴 퍼옴- 퍼옴완결방 책임운영자 : 영계 (stylehyejin@hanmail.net) 최신목록 목록 윗글 아랫글 [[　　로맨스]] [청몽채화] 관계자 외 출입금지 101 - 119(完) 글쓴이: [퍼옴·반휘] 조회수 : 24695 08.08.01 13:38 http://cafe.daum.net/youllsosul/KRDt/10640 ▷▶▷▶▷▶▷▶▷▶▷▶▷▶▷▶▷▶▷▶▷▶▷▶▷▶▷▶▷▶▷▶▷▶ 작가 : 청몽채화 감상주실곳 : khyem87@hanmail.net 작가 카페 : http://cafe.daum.net/chaehwa (┗BlueDream┓채화) 작가 버디 : 하얀다섯 ▷▶▷▶▷▶▷▶▷▶▷▶▷▶▷▶▷▶▷▶▷▶▷▶▷▶▷▶▷▶▷▶▷▶ ┗BlueDream┓채화 http://cafe.daum.net/chaehwa 많이 가입해 주세요 ^^♡ ▷▶▷▶▷▶▷▶▷▶▷▶▷▶▷▶▷▶▷▶▷▶▷▶▷▶▷▶▷▶▷▶▷▶ 101. 결론짓기 “어머, 왜 지금에야 오셨어요?” 정신병원 안에 들어서자마자 환영이를 향해 소리치는 간호사 언니. 저 언니, 전에 여기 왔을 때도 한 번 본 기억이 난다. 병원 안에 [관계자 외 출입금지] 놈들과 내가 들어서자마자 간호사 언니들의 표정이 일제히 우리에게로 집중되었고, 뿐만 아니라 볼도 발그레하게 물들고 있었다. 역시 여자들이란, 누나들이란, 어린 남자들의 뽀얀 얼굴에 마음이 설레는 법. “다 같이 여기 온 적은.... 없었어?” 휴인이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민서에게 물어보면... 민서는 침착함을 지키며 고개를 한 번 살짝 움직이며 중얼거린다. “그 동안 환영이만 왔었지, 우리가 같이 살게 된 시점부터 휴인이도 여기 온 적 없어. 그러니까 당연히 비원이랑 나도 휴인이 동생은 처음 보는 거지. 환영이 동생도 물론 얼굴은 못봤지만, 그 애는 우리 존재는 알고있을거야. 하지만 휴인이 동생은 우리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알 수 있을리 없잖아. 온전한 상태도 아닌데 말해줘봐야 혼란스러웠을 거고.“ 민서에 말에 수긍이 갔다.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휴인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땅바닥만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는 휴인이가 보인다. 얼마나 오랜만일까, 동생을 보게 되는 것이. 아무 말없이 휴인이의 손을 잡았다. 많이 긴장했는지 그의 손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왜요, 유인이한테 무슨 일 있었어요?” 왜 지금에서야 왔냐는 간호사의 핀잔에 환영이가 걱정된 듯 재빨리 물었다. 걱정하는 환영이와 달리 휴인이는 간호사의 말조차 들리지 않는 듯 했다. 그저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으니까. “아마 보면 깜짝 놀랄 거예요. 그 때 저 여자분이랑 다녀가신 후로, 유인이 많이 변했어요.” 간호사가 나를 향해 눈을 찡긋하며 웃어보였다. 그 때문에 아이들이 급히 나를 쳐다보았고, “뭐야, 정시언 너 휴인이 동생 때렸지?” 비원이는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지껄였다. 앞장서서 길을 인도하는 간호사 언니 뒤를 따라가면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유인이를 만난 후로, 유인이가 변했다고? 대체 어떻게 변했다는 거지? 설마 더 나쁜 방향으로 변한 건 아니겠지? 유인이 상태가 더 나빠지면, 나 휴인이 얼굴을 볼 염치도 없어지는데. “저기...........” 참을 수가 없어서 간호사 언니에게 유인이 상태에 대해 물어보려고 입을 떼면.... “괜찮아, 내 동생이야. 괜찮을 거야, 누나.” 휴인이가 드디어 고개를 들고 나를 향해 웃어준다. 사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휴인이는 나보다 더 심란한 눈치였다. 유인이 상태가 더 나빠졌다는 말을 듣고싶지 않은 것 같았다. 차라리 눈으로 먼저 확인하면 모를까, 병원 관계자를 통해 동생의 상태를 접하긴 싫은 모양이다. “들어가보세요.” 간호사는 유인이 방의 문을 활짝 열어주며 밝게 소리쳤다. 그리고, 그 방 안으로 들어간 우리 다섯 사람의 눈에 보인 건..... “........ 오빠....!!” 더 이상 눈물을 흘리고 있지 않은 유인이였다. 유인이는 갑자기 쳐들어온 낯선 군단에 조금 겁먹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오랜만에 보는 자신의 친오빠에 바로 반응해보였다. 익숙한 환영이와, 얼마전에 보게 된 나도 곧 기억해내는 듯 했다. 덕분에 우리가 끌고온, 유인이로서는 처음 보게 된 민서나 비원이도 위험한 인물이라고 판단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유인아.......... 너........” 환영이가 울고있지 않은 유인이랄 보고 놀라워한다. “괜찮은거야?” “환영오빠.....” “알아봐? 나 알아보겠어?” “전부터.... 알아보고는 있었어요.” 여전히 말의 억양은 일정했고, 목소리도 작은 상태였지만 유인이는 확실히 변해있었다. “눈물이... 끊임없이 나서... 오빠가 말 걸어도... 대답 못한 거 뿐이예요. 나, 대인기피증 많이 나아졌대요. 우울증만 더 나으면 그 땐 나가도 된다고, 의사선생님이 그렇게 말해줬어요.“ 또박또박 말을 잇는 유인이를 환영이가 기쁜 얼굴로 바라보고 있지만, 그에 반해 휴인이는 여전히 시선을 옆으로 피하고 있다. 동생만 보면 무너져 내릴 듯이, 너무나 위태롭게. 나는 그런 휴인이를 옆에서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고, 이 상황에선 떨거지일 수 밖에 없는 민서와 비원이는 그저 맨 뒤에 조용히 서 있을 뿐. “환희 언니, 잘 있어요?” 유인이는 조금 망설이다 말고 환희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직 유인이에게는 아픈 기억일 테고, 환영이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상처겠지만 유인이에게 제일 중요한 문제는 자신 때문에 소년원에 들어간 환희일 것이다. “응, 잘 있어. 걱정마.” 유인이는 경황이 없이 정신병원으로 끌려들어온 바람에 환희가 소년원에 가게 된 것도 잘 모르는 상태일 것이다. 유인이에게 괜한 마음의 짐을 지워주기 싫었는지 환영이는 환희가 잘 있다고 둘러댔다. 다행스럽게도 유인이는 그 이상 더 많은 것을 묻지 않았다. 똑똑한 아이니까, 이미 알아채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 때 언니가 한 말, 나.... 많이 생각했어요.” 그리고, 드디어 나를 향해 말을 거는 유인이. “아직도 무서워요. 사람도 무섭고, 거리도 무섭고, 돈도 무섭고, 세상도 무섭고. 근데 나... 아직 포기는 못하겠어요. 아침에는 자신감있게 행동하다가도, 밤엔 무너져버리지만.... 그래서 나 아직 다 나았다고 확실히는 말 못하지만요.“ “......... 아니야, 많이 나아진거야. 정말 대견해. 그리고 축하하고.” 힘들고 지친 몸이지만 억지로라도 웃으려고 애쓰며 유인이를 향해 말했다. 차마 지금 병원에 있는 그녀를 향해 말할 순 없었지만, 마음 속으로 끝없이 중얼댔다. 나보다.... 유인이 니가 훨씬 더 노력하는 인생을 살고있는거야, 라고. “데리고 나가준다고 했죠.” 유인이의 말에 적잖이 당황해버렸다. 나는 유인이와 약속했다. 유인이의 병이 나아지는 날, 그녀의 손을 잡고 이 지긋지긋한 병원을 나가주겠다고. 그러나 지금은 여러모로 상황이 복잡했다. 아직 유인이의 퇴원을 담당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근데요, 언니.” “으응?”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나.... 내 발로 나가고 싶어요.” 눈부시게 웃으며 나에게 중얼거리는 유인이. 저 눈부신 웃음, 똑같다. 휴인이랑 똑같아. 둘이 닮지는 않았지만 저 눈부신 웃음만은 소름끼칠정도로 똑같았다. “언니 손에 이끌려서, 밖으로 나가서, 내가 보고싶은 풍경 보는 거, 그것도 좋겠지만. 그래도 나, 내 의지로 바깥 세상이랑 만나고 싶어요.“ “......... 유인아........” “그러니까 나한테 조금만 더 시간을 줘요.” 유인이는 이미 자신의 손을 잡고 밖으로 달려나갔어야 했을 게으른 정시언을 탓하지 않았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착한 마음씨를 자랑하는 유인이는, 오늘 자신의 의지를 그 누구보다 강력하게 내세우며 내 제안을 거절했다. 누군가에게 이끌려 나가기보다는 자신의 발로 당당히 세상에 나오겠다고. 데리고 나가려고 하기보다는, 조금만 더 시간을 주고 기다려 달라고, 한참동안 나에게 머무르던 유인이의 시선이 내 옆으로 옮겨갔다. 이제 드디어, 휴인이와 유인이가 만나야 할 시간. 마음 속으로 미친듯이 떨고있을 휴인이가 걱정된다. 알고있다, 휴인이와 환영이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자신들의 동생일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던 철부지 소년들이 세상과 맞설 생각을 한 것은 동생들 때문이니까. 놈들은 자신들의 행복을 버리면서까지, 동생들이 편히 살 수 있는 나라를 원했다. 천국을 만들겠다고까지 다짐한 그 결심은, 웬만한 목적이 없고서는 힘들었다. 민서와 비원이가 이 일을 시작하게 된 이유까지는 짐작하기 힘들지만, 휴인이와 환영이의 목적은 불보듯 뻔했다. 동생들을 위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 꿈인 거 같애.” 유인이는 망설이듯 말을 꺼냈다. 조금 울음기가 배어있는 말투였다. “밤마다 꿈 꿨거든, 오빠가 나오는 꿈. 근데 맨날 화를 내서. 그래서 걱정했어. 오빠가 아직까지 나한테 화난 건가, 싶어서... 그래서 안 오는 걸까봐. 그래도 보니까 좋다. 오빠 나한테 화나 있다고 하더라도, 보니까 안심이 돼.“ 오히려 누나처럼 휴인이를 달래주는 유인이. 그러나 휴인이는 아직도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할 뿐이다. 그런 휴인이의 모습이 안쓰러운지 한숨을 뱉어내는 민서와,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려버리는 비원이, 유인이와 휴인이 사이를 번갈아보며 잠자코 기다려주는 환영이. 나는 휴인이의 손을 잡고 그를 유인이 쪽으로 살짝 떠밀었다. 그러나 아무 미동도 없는 휴인이는 가만히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모든 일의 시작이....... 나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유인이는, 그 동안 정신병원에 있으면서 한 생각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나만 아니었으면... 우린 가난하지만, 그래도 평범한 생활은 할 수 있었을 거라고. 모든 일의 발단은 나 때문이라고, 그래서 그 동안 나 자신에 대해 저주만 했어. 왜 태어난걸까, 나한테도 삶의 의미란 게 있을까, 나만 없었어도.... 그랬어도... 오빠랑, 환영오빠랑, 환희언니까지.... 다 행복할 수 있었을 거라고...“ “유인아!!!” 그 동안의 생각을 뱉어내는 유인이와, 그 생각을 나무라는 듯 주의를 주는 환영이. “오빠.... 아직도.... 내가 싫어?” 그 때였다. 휴인이가 유인이에게로 달려가 그녀를 안아버린 것은. 병원 침대에 앉아있는 유인이와, 큰 키로 든든하게 동생을 안아주고 있는 휴인이. 동생의 얼굴을 자신의 품에 안고 휴인이는 복잡한 감정을 느끼는 듯 했다. 뭐야, 걱정할 필요 없었잖아. 강휴인 너도.... 니 동생 보고 싶어 했던 거, 다 느껴져. “미안해.......” 그 동안 기를 쓰고 강한 척 했던 휴인이는 오늘 어린 소년의 모습을 다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지금껏 내가 본 휴인이의 모습 중 가장 아름다운 것 같다. 지금, 그 남매의 모습을 보고있는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걸 보면. 너무 눈부셔서... 아예 쳐다보지도 못하겠다. “미안해, 유인아....” 휴인이는 끊임없이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 오빠가.... 미안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휴인이의 모습. 그리고 그런 오빠를 꽉 안아주고 있는 유인이. 도대체 휴인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있을까. 밥먹듯이 범죄를 저지른 저 손으로, 동생을 안아주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 앞으로 내 아이를 키우겠다고 한 저 손으로, 내가 힘들때마다 누구보다도 강하게 날 끌어안아준 저 손으로, 친구들과 티격태격, 잡아주고 끌어주고 밀어내고를 반복하던 저 손으로. 천천히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아이들을 한 눈에 담으며 든 생각은 지켜주고 싶다는 거였다. 내가 이 아이들에게 보호받는 것처럼, 나도 이들을 지켜야겠다고, 더 이상 이렇게 살아가도록 놔둘 수도 없었고, 해결책도 없는 채로 이들을 막을 수도 없었다. 나는 임신했고, 아이들은 자신의 범죄에 대해 점점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유인이의 병은 다 나아가고, 환희의 출소날도 가까워온다. 천천히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이제 모든 것을 정리할 때가 다가왔다는 것을 느꼈다. 과연 아버지는 나의 생각을 어디까지 이해해주실 수 있을까? 그리고 난 아버지에게 어디까지 진실을 말할 수 있을까? 내 미약한 힘으로 언제까지, 어떻게, 이 아이들을 지켜줄 수 있을까? 나는 이미 주동자와 재벌아들을 찾아낸 상태다. 더 이상 시간을 끄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었다. 눈부신 휴인이의 모습을 보면서, 웃고있는 환영이를 보면서, 모자를 더욱 눌러쓰는 민서를 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벽에 기대는 휴인이를 보면서. 주먹을 꽉 쥐어보였다. 이제 스파이 일을 마무리하고 결론을 내야 한다. 아이들도, 나도 한계에 부딪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곧, 아버지를 만나야만 했다. 102. 행복을 위한 준비 유인이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병원을 나왔을 때,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아부지에게 전화가 왔다.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이들 앞에서 아부지의 전화를 받을 수 있는 내 상황. 스파이면서, 스파이가 아니게 되어버린 정시언.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일원이면서, 관계자 외 출입금지가 아니게 되어버린 정시언. 이제 더 이상 이런 이중생활을 계속할 수는 없다. 모든 일을 마무리지을 때가 왔다. “네, 아부지.” 핸드폰 플립을 열고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댔다. 휴인이와 환영이, 민서, 비원이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로 꽂힌다. - 지금 어디냐. 오랜만에 듣는 아부지의 목소리는 의외로 차가웠다. “안 그래도 만나뵈려고 했어요, 지금 시간 되세요?” 난 아이들을 돕고 싶었다. 내 온 힘을 다해, 진심으로. 나를 구원해준 이 아이들을 이제는 내가 구원해줄 차례였다. 이제껏 세상에게 당하고 상처만 받은 아이들인데, 그 정도의 행복도 주지 못할까. 경찰에 넘겨서는 안 된다. 감옥에 넣어서도 안 된다. 필요하다면 아부지와 싸움을 해서라도 이 자식들을 지켜야만 했다. 더 이상의 아픔을 내가 감당하는 것이 옳다. 이들이 받아야할 벌은 감옥에 갇히는 게 아니라, 행복해지는 것이니까. - 집에 와라. 아버지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뚝 끊어버리셨다. 아직은 낮시간인데, 왜 검찰청에 안 계시고 집에 계시는 걸까. 찝찝한 기분을 애써 숨기며 핸드폰 플립을 다시 덮으며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누나.......” 걱정스런 표정의 휴인이. 다들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눈치다. “........ 다들 나 믿지?” 잠시 고민하다 씩씩하게 건넨 내 물음에 피식 웃어버리는 휴인이와, 고개를 끄덕이는 환영이와, 내 눈을 바라보는 민서와, 오른손을 들어오케이 표시를 해보이는 비원이. “좋아!!” 이 조직을 이끄는 큰 누님처럼 다시 씩씩하게 외치는 나. “다들!!! 용서받을 준비 됐니?”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얼굴을 살짝 찌푸리는 놈들. 나는 그들을 향해 지금껏 계속되던 내 생각의 결론을 찬찬히 풀어놓는다.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잡히지 말라고 했었지? 그 말은 아직도 유효해. 내 생각은 끝났어. 난 너희들을 지킬거야. 구해줄테니까 내 손만 잡아. 대신 조건이 있어. 더 이상 범죄에 빠져 허우적거리면 안돼.“ 놀란 듯 내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는 그들. “너희들이 죄지은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잡혀가게 둘 수 없어. 나쁜 마음으로 한 짓이 아니니까, 너희들의 천국을 위해서니까, ............내가 아는 너희들은.... 너무 착하니까.“ ......마치 천사처럼....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맑게 빛나니까. “난 너희들 대신 용서를 빌러갈게. 아버지한테 다녀올거야. 너희들 대신해서 잘 말하고 올게. 너희들을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날, 웃으면서 너희들한테 올테니까... 당분간은 누나 빼고 너희들끼리 있어줘.“ “누나...........” “반드시 다시 올게.” 내 생애,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실행한 일이 또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난 지금 그 어떤 것도 고민되지 않았고, 그 어느 것도 의심하지 않았다. “너희들은....... 용서받을 준비랑 행복해질 준비만 하고 있어.” 그래, 그거면 충분해. “불가능해...............” 내 이야기를 계속 듣던 민서가 중얼거린다. “응, 실패할지도 몰라. 나 이렇게 자신있게 말하지만, 우리 아버지. 법에 엄격한 분이니까.” “..........정시언....” “그러면, 우리 떠나자.” 무모하지만, 난 그 어떤 때보다도 자신있었다. “세상이 너희를 용서안해주면, 같이 떠나자. 숨어서라도 같이 살자.” 엄마, 다들 우리에게 등을 돌려도... 엄마만은 날 도와주겠죠? 이 곳을 떠나게 되더라도, 우리가 엄마 곁에 가게 되면, 엄마는 우릴 반겨줄거죠? “.........누난 미쳤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건네는 휴인이. 언제나 그렇다. 자기네들은 언제나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리는 주제에, 내가 자신들을 위해 무언가를 버릴라치면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아버린다. 나는 언제나 부끄럽고 미안한데, 그들의 미소를 보는 게 너무나 눈부신데. “..............돌아올거지.....?” 그 뒤를 이은 비원이의 말. 나는 과도한 액션으로 고개를 마구 끄덕여보인다. “아버지 설득하는데 시간이 많이 필요할거야. 일주일은 잡아야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줄이고, 줄이고, 줄여서 3일만에 허락 받아내볼게. 3일이 지나도 내가 안 돌아오면, 너희들이 나 구하러 와.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집에 꼭 붙어있을테니까, 꼭 나 구하러 와야돼. 정의의 사도처럼!!! 내가 싫다고 버팅겨도 억지로 나 데리고 나가줘. 내가 3일안에 아버지를 설득 못하면, 그 땐 우리 멀리 떠나자.“ 이제 더 이상 울기 싫어서 입술을 깨물고 더 환하게 웃어보이려 애썼다. 울음 반, 눈물 반, 그 때의 내 얼굴은 엄청나게 흉측했을 거다. “이제 하루라도 안보면 돌겠는데......” 그 때, 나를 안아주는 휴인이. 이 품에 안길 때마다 시간이 멈추기를 얼마나 많이 바랐었는지.... “사랑해, 정시언.” 처음으로 휴인이는 내 이름을 불렀다. 누나라는 호칭이 아닌, 내 이름을. 가만히 축 늘어져있던 내 팔을 들어올려 휴인이를 감싸안았다. 고개를 돌리고 있는 민서가 안쓰러웠지만, 가만있을 수 없어 나도 내 입술을 움직인다. “사랑해, 강휴인.” “기다릴게.” “응, 금방 갈게.” 휴인이는 평소처럼 어리광을 부리며 나를 붙잡으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남자답게 나를 보내주려 하고 있었다. “있잖아, 금방 다시 볼 건데 울고불고 하면 웃기잖아. 그러니까 우리 서로 돌아보지도 말고, 인사하지도 말고 그냥 갈 길 가자. 그냥 그렇게 생각해. 너희는 급한 일이 있어서 바로 집에 가고, 누나는 집에 있는 세제가 떨어져서 그거 사러 잠깐 슈퍼에 간다고. 하나 둘 셋 하면 바로 돌아서서 갈 길 가는거다!! 알았지?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을 외치는 동시에 나는 휴인이의 품에서 빠져나와 뒤로 돌아섰다. 바보같이 돌아서자마자 눈물이 터져나왔다. 그래도 다행이다, 놈들에게 들키지 않았으니까. “슈퍼갔다가 금방 와요. 저녁 준비 해놓을테니까.” 환영이의 말과.... “그럼 가자.” 민서의 말이 뒤에서 들려온다. 나는 정말 뒤돌아보지 않고 곧장 앞으로 걸어갔다. 아마 [관계자 외 출입금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눈물을 닦으며 내 앞에 펼쳐진 길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지금, 아부지를 만나기 위해 집으로 향하고 있다. 낯설다. 진짜 우리집이 이제는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진다. 불과 한달 전, 아니, 한 달도 채 안됐는데, 그 사이 이렇게나 낯설어지다니. 세상에서 제일 편한 곳이었는데. 녹슨 파란 대문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그 낡은 대문이 그리워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급하게 오느라 집 열쇠가 없었던 나는 몇 번 심호흡을 한 뒤 초인종을 눌렀다. 아부지가 곧 문을 활짝 열어주실 거라 생각하며. “누구세요?” 그러나 현관문 너머로 들린 건 내 동생 이온이의 음성이었고, 곧이어 문이 활짝 열리면...... “악!!!!!!” 무슨 유령을 본 듯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서는 내 동생 이온이. 나, 하늘에 맹세하고 저렇게 놀란 이온이를 보는 게 한 5년만인것 같다. “뭐야, 너 집에 왜 있어?” “개교기념일인데. 뭐야, 너 여기 왜 와?” 다섯 살이나 많은 언니에게 ‘너’라는 호칭으로 맞먹고 있는 이온이는 여전히 싸가지가 없었다. “아부지 계시지?” “지금 여기 왜 계셔, 일 하러 아침에 나가셨지.” “이상하다, 집으로 오라고 했는데.” “일 다 끝난거야? 이제 그 애들 다 소탕했어? 너 이제 집으로 오겠네? 짐 언제 옮겨? 아직 한 달 좀 안됐는데 일 빨리 끝났구나.“ 티는 안 내려고 하지만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한 이온이. 내가 돌아온다는 게 그렇게 좋을까. 강한 척 하지만 속은 여리니까 저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온이만 보면 내가 약해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생각을 바꿀 수는 없었다. “.........나 아부지 빨리 만나야 되는데. 나 검찰청 가볼게.” 일분일초가 아까워서 신발도 벗지 않고 돌아선 그 순간. 어느샌가 내 뒤에 서 계신 아부지와 김형사님. “어? 아빠 왔네? 뭐야, 갑자기 두 사람 다.....” 이온이가 중얼거리고.... “........ 아, 아부지. 집에 안 계시길래 검찰청에 계신 줄 알았어요, 저 드릴 말씀이.” 내가 입을 연 그 순간. 검사일로 잔뼈가 굵은 아버지의 투박한 손바닥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짜악-!!!!!!!!!!!!, 하는 무시무시한 마찰음과 함께. 덕분에 나는 크게 휘청거렸고, 놀란 이온이는 잽싸게 나를 부축하며 아부지께 소리친다. “뭐야, 아빠 미쳤어?????? 왜 언니를 때리구 그래!!!!!!” 22년의 인생을 살면서, 아부지께 맞아본 건... 처음인 것 같다. 얼얼한 뺨을 차마 만질 생각도 못하고 현관에 주저앉은 채 아부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왜 이래, 갑자기!!!!!!” 울먹이는 이온이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아득하게 들린다. 아부지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고, 김형사님의 표정도 침통함 그 자체였다. 그리고, 한참 후 아부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문자 그대로 절망적이었다. “...... 너.... 임신했다면서.” 이잔한.... 이진한밖에 없다.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알릴 사람은 이진한밖에 없다. 미친놈, 휴인이 거짓말을 진짜라고 착각했구나. 자기 아이가 아니라 휴인이 아이라고 정말 착각한거야. 내가 휴인이의 아이를 낳으면 어떡하나 싶어서 아버지에게 고자질한 거야. “정말이냐..........?” 아부지의 목소리가 심각하게 떨려왔다. 이온이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김형사님이 눈을 감는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아버지를 올려다본다. 그리고 말한다. “...........네, 임신했는데요.” “................ 누구.... 누구 애냐............” “.......... 휴인, 강휴인의 아이요.” 나는 결국 말도 안되는 연극에 동참해버리고 만다, 이진한의 아이라고 진실을 말해버리기에는 치가 떨려서, 아이가 불쌍해서. .............휴인이를 사랑해서. 103. 감금 파랗게 안색이 질리던 아부지는..... 곧 있는대로 분노를 내뿜었다. “너 정말!!!!!!!!!!!!!!!!!!!!!!” 다시 나를 내리치려는 듯 손을 치켜드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막는 김형사님과, 내가 맞지 못하게 내 앞을 막아서는 이온이. “언니, 아빠 말 사실이야? 진짜야? 언니, 거짓말이지? 아니잖아!!! 아니라고 말해!!! 언니 농담 잘하잖아!!!! 빨리, 거짓말이라고 해!!!!! 언니 진짜야? 아니지, 응???? 정시언!!! 대답해!!!!! 빨리!!!! 언니!!!!!!“ 이온이가 운다. 불쌍한 내 동생이 울고 있다. 물론 난 모든 진실을 알고있지만, 거짓을 진실로 믿어버리기로 한다. 내 뱃 속의 아이는 휴인이의 아이다. 이진한, 똑똑히 봐 둬. 니가 믿는 게 진실로 변해가는 이 과정을. 내가 얼마나 휴인이를 사랑하고 있는가를. 네 까짓 게 우리를 방해한다고 해서, 우리가 정말 떨어질 수 있는가를. 넌 지금 화가 나있겠지. 니 아이가 아니라 휴인이 아이라는 게 자존심 상해 미칠 지경이겠지. 니 아이라면 단지 지워버리면 그만이겠지만......... 휴인이의 아이라면 넌 뼛속까지 고통스러울거야. 넌 아직 날 포기 못했으니까. 그리고 내 뱃속의 아이가 휴인이의 아이라고 내가 철저하게 진실로 믿어버린다면... 내가 나를 그렇게만 속일 수 있다면....... 난 내 목숨이라도 바쳐서 이 아이를 지킬거야. “시언아!!! 지금 검사님이 흥분하셔서!!! 잠시만 방에 들어가 있어, 응? 이온아, 너도 정신차리고 언니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검사님은 내가 말릴테니까!!!“ 급박하게 소리치는 김형사님을 보며, 나는 침착함으로 중무장한 채 물었다. “누가 그래요, 내 임신 사실. 이검사 아저씨가 그래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시언아!!!!” “중요해요, 난.” “그래, 이검사가 오늘 아침 [관계자 외 출입금지] 놈들 조사하다가 알아냈다고...” 오늘 아침, 산부인과에서 [관계자 외 출입금지]에게 당했던 수모가 쪽팔리긴 했나봐. 이렇게 하찮은 복수로 되갚는 걸 보면. “이왕 이렇게 된 거.... 괜히 설명 안하게 돼서 좋네요.” 어차피 잘됐다. 난 하려고 마음먹었던 말을 편하게 내뱉어버린다. “내 아이의 아빠예요.” “...............” “그 애들을 구해주세요.” 오히려 눈물은 단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난 내 자신이 놀랄 정도로 차분했다. “나, 낳을 거예요. 내가 죽어도 낳을 거니까, 그 애들을 구해주세요.” “정시언!!!!!!!!!!!!!!!!!!” 천둥같은 아부지의 고함소리에도..... “죄요? 저질렀죠. 많이도 저질렀죠. 한 명은 매일 도둑질이나 하러 다니고, 한 명은 매일 폭력 대행으로 날을 지새우고, 한 명은 소매치기나 하고 있고, 다른 한 명은 미성년자 출입 금지 장소인 호스트바에서 일해요. 나쁜 놈들이죠. 나도 만나기 전까진 그랬어요. 구제불능인 놈들이라고. 나 그렇게 생각했어요. 벌 받아 마땅하다고, 감옥에 다 처넣고 싶다고.“ “..................... 너........” “근데요, 왜 다른 사실은 안 알려줬어요?” 이상해, 안 울려고 마음 먹었는데... 너희들 얼굴을 생각하니까 바로 눈물이 나. “도둑질 하던 놈이..... 매일 하는 막노동으로 파스 냄새를 풍기고 있다는 거. 그것도 말해주지 그랬어요. 내가 동정못하게, 그런 것도 미리 말해주지. 그 애 동생이 성폭행으로 정신병원 간 건 왜 말 안해줬어요. 내가 세상에서 본 사람중에 제일 빛나게 웃는데... 내가 어떻게 모르는 척해요. 폭력 대행 하는 놈이.... 길거리에서 사람들한테 맞아가면서 돈 버는 건요? 온 몸이 멍자국으로 가득 차있는데... 그걸 치료해주는 사람이 없어요. 사람 때린 후에는 자기가 더 아파해요, 웃을 수가 없다고 괴로워해요. 자기보다 더 못된 놈들 때려놓고는 밤마다 죄책감에 미치려고 해요. 눈물도 많고 정도 많은 놈이라는 거... 그건 왜 나한테 안 가르쳐줬어요? 소매치기 하는 여자애.... 눈도 맑고 사랑에 굶주린 애라는 건, 왜 숨겼어요? 악질이라면서요. 악질 소매치기라면서요!!!! 착하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 지갑에 손대는 애 아니라구요!!! 이 애가 지갑 빼앗는 사람들!!! 다 범죄자라구요!!! 아부지가 수갑 채워서 잡아가야 하는 범죄자들만 골라서 소매치기 하는 앤데, 상은 못 줄 망정 왜 잡으려고 해요? 호스트바에서 일하는 비원이, 아픈 상처 있는 건 왜 말 안해줬어요. 어릴때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된 사람도 못 만나고, 제대로 된 사랑도 못해 본 앤데!!! 이 애들을 탓할 일이 아닌데!!!!! 다른 범죄자도 수두룩한데... 왜 하필 이 애들인데요..... 세상을 바꾸겠다는데... 너무 힘들다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말려요..... 약한 다른 사람들을 위했다는데... 내가 어떡해요. 왜 나한테 말을 안해줬어요, 왜요...........“ 악을 쓰며 소리친 내 말에 진정을 하고 나를 때리려는 동작을 멈추신 아버지. 아버지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여전히 차가운 말투로 대답하셨다. “니가 속은거야. 넌 속은 거다. 그 놈들을 악랄해.” “세상이 그 애들을 그렇게 만든 거예요!!!!!!!!!!!! 함부로 단정 짓고 계신 거라구요!!!” “애초에 널 보낸 게 잘못이었다.” “다 계략이었다면서요.” 이제 한 발자국도 물러설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나보고 주동자나 재벌 아들을 찾으라는 거, 그거 거짓말이었다면서요. 그냥 나를 그 애들의 약점으로 삼으려고 했다면서요.“ 언젠가 진한오빠에게 충격적으로 들었던 사실을 내뱉는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아버지나 김형사님이 충격받을 걸 뻔히 알면서도. “아버지도 날 이용하셨으면서, 이러시면 안되죠.” “너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알았으면 어때요. 중요한 건 그게 사실이라는 거잖아요.” “아니다, 우리는!!!!!!!!!!” 아부지는 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을 몰아쉬셨다. 그 틈을 타 김형사님이 상황을 정리하려는 듯 우리 사이로 끼어들었다. “시언아, 우리 냉정하게 생각을 해 보자. 지금 넌 감정이 너무 앞서있어.” “..............” “이검사가, 니가 너무 걱정이 돼서, 옛날부터 [관계자 외 출입금지]놈들을 조사했대. 그 놈들 가식적이고 영악해서, 널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범죄자 놈들은 뼛 속까지 범죄자인거야. 이검사나, 정검사님이나, 나나.... 몇 년을 범죄자만 상대해 온 사람들이잖니, 우린 너보다 그들을 잘 알아. 우리라고 열 여덟살 먹은 애기들을 잡고 싶은 게 아니잖니. 다만 그 주동자가 재벌 아들을 끌어들여서, 재벌 회사는 큰 타격을 입고 있어. 우린 그걸 구하고, 주동자를 다시 교화시키고 싶을 뿐이야. 아직 열 여덟이야, 충분히 교화될 수 있는 나이잖니, 응?“ 왜 곁에서 그 애들을 직접 본 나를 안 믿고, 진한오빠를 믿는 거냐구요. “말해봐, 시언아. 재벌아들이 누구야?” 난 그 애들을 갈라놓을 수 없어요..... “지켜줘요, 김형사님............” “시언아............” “내 아이를 지켜준다고 약속해주세요..........” 나만의 아이가 아니예요, 그 애들의 아이라구요........ “난 싫어..... 언닌 지금 미쳤어!!! 생각 좀 다시해봐!!! 범죄자의 아이야!!! 언니는 지금 그 애들한테 세뇌당한거야!!! 악마같은 새끼들한테 당한거야!! 단단히 미쳤어, 난 인정못해!!! 지워야돼, 낳는다는 생각 자체가 이상한거야!! 언니 당한 거잖아, 솔직히 말해봐, 낳고싶어서 낳는다는 거 아니잖아!!!!!“ 여전히 내 앞에서 악을 쓰는 이온이. 한숨쉬는 아버지와, 악을 쓰는 이온이와, 나를 달래는 김형사님. 나는 오늘 진한오빠에게 이끌려 산부인과를 다녀왔고, 정신병원을 다녀왔으며, 미친듯이 울었고, 아버지에게 맞았고, 미친듯이 소리쳤다. 급격하게 에너지가 떨어지고 있었고, 내 몸은 탈진상태에 이르렀다. 아이를 지켜달라는 내 말에 김형사님은 알게 모르게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그 행동은 반쯤 정신을 빼놓고 있던 나의 방어벽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재벌 아들이.......... 누구니?” “..............원... 비원이요...........” 결국 난 재벌 아들이 누군지 밝히고 말았다. “그래, 그럼 주동자는!!!!!!?” 김형사님은 안달이 난 상태로 내게 다시 물었지만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재벌 아들은 밝혀져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비원이는 예전처럼 다시 훌륭한 교육을 받을 것이고, 함께 고생을 해 온 휴인이, 환영이, 민서를 잊지 않고 도와줄 것이므로. 같이 공부하고, 같이 배우고, 같이 일하고, 같이 성장한다면... 네 명 모두의 앞길에는 행복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언아, 주동자는?” 김형사님은 재촉하듯 나에게 물었다. 그러나 난 대답하지 않았다. 내 손으로 민서를 감옥에 처넣을 수는 없었으니까. “됐네, 김형사. 아이들을 다 잡기만 하면 이검사가 알아서 하기로 했어.” “...........이 검사가요?” “재벌 아들이 누군지 안 걸로 됐어, 이검사도 재벌 아들로 신비원을 생각한 모양인데.” “그럼 신비원이 재벌 후계자인 건 확실하군요.” “서로 이름을 바꿨던 게 정말인 모양이지. 재벌 아들 이름은 백민서라던데, 지금 백민서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건 여자애니까.“ 눈이 감긴다. 급격하게 온 몸에 힘이 빠진다. 의식이 희미해진다. “......... 검사님, 그럼 주동자는........” “됐어.” “예?” “나머지 세 명은 다 감옥으로 보낸다.” “세 명 다요?” “시언이가 저 모양인데, 용서 못하지.” 뭐.... 뭐라구요? 안돼, 민서를 지키기 위해 주동자를 말하지 않은건데, 다들 감옥에 넣겠다니. 휴인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이고, 환영이는 그 누구보다 착한 아이고, 민서도 언제나 나를 도와주는 아인데, 휴인이랑 환영이는 지켜줘야 할 여동생도 있다구요.... “내일 저녁 8시에 출동한다. 바로 습격하지.” “....... 시언이는요?” “지금 잠시 탈진한 것 같은데, 깨어나면 바로 그 애들한테 가려고 하겠지. 잠시 방에 가둬놓아야겠어. 상황이 정리되면 산부인과도 데려가야지......“ 점차 아버지와 김형사님의 목소리가 흐려진다. 이온이의 울음소리는 이미 귓가에서 멀어진지 오래다. 내가 정신을 완전히 놓아버린 것은, 내가 방에 옮겨진 직후, 방문이 잠기는 소리가 덜컥, 의미심장하게 들려오던 그 순간이었다. 104. 체포 옛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싸우기도 했던, 내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시간들. 지끈지끈 아파오는 머리를 짚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한 달간 익숙하게 봐오던 회색 천장이 아니다.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에 등에 느껴지지도 않는다. 흰색으로 깔끔하게 칠해진 천장, 부드러운 침대 시트. 더 편한데도 낯선 기분. 맞다, 여긴 우리집이지!!!!!! 온 몸이 쑤시는 것도 잊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일어나자마자 어제의 기억이 순식간에 모두 되살아나버렸다. 깜짝 놀라 방 안에 있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몇 시지? 맙소사, 벌써 8시반이야, 밖은 깜깜하다. 지금은 밤이라는 소리다. 내가 우리 집에 도착한 건 낮이었으니까 지금 두 가지 설을 세울 수 있다. 문제는 내가 기절해서 쓰러진 시간이 얼만큼이냐, 이것이다. 쓰러진 후 몇 시간만에 바로 일어난 거라면 지금 [관계자 외 출입금지]는 안전할 것이고, 아니면......... 아니면.... 내가 하루 꼬박 쓰러져 있었던 거라면......... 그럼 아이들은..... 설마 경찰에 이미 잡힌 건 아니겠지??? 핸드폰은 이미 압수된 모양인듯 주위에 없었다. 내 방에는 전화기도 없다. 컴퓨터도 거실에 있다. 내가 알 수 있는 모든 정보는 차단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내 방의 창문이 복도와 연결된 것도 아니다. 우리집은 12층인데 여기서 뛰어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성치도 않은 몸으로 방문으로 걸어가 미친듯이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누구 없어??? 이온아!!!!!!! 언니야, 이리 좀 와봐!!! 할 말 있어, 문 좀 열어!!!!!” 다행히 소리치자마자 이온이가 내 방문 앞으로 다가오는 듯 했다. 발자국 소리와 함께 이온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뭐야. 언니 지금 깨어났어??” “나 얼만큼 쓰러져 있었어, 응???” “미련 가지지마, 언니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끝났어!!!” “정이온, 나 지금 장난치는 거 아니야!!!!!” 난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마지막까지 비축했던 힘을 끌어모으고, 끌어모으면서. “이제 그만 잊어, 언니는 스파이였어, 이제 제자리로 돌아온거야!!!!” “정이온!!!!!” “수술만 하면 돼,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내 친구도 했어!! 지금 되게 잘 지내.” “이온아!!!!!!!!!!!!!” “아부지가 절대 문 열어주지 말랬어.” 냉정한 모습의 이온이는 온데간데 없었다. 이온이는 어린애처럼 보채고 있었다. 그 애에게 언니란 존재는 자신의 전부였다. “설마 오늘이야?” “..............” “이온아, 아부지가 오늘 간댔어, 그 애들한테? 나 하루동안 내내 쓰러져있었어?” “................... 미련 버리라고 했잖아.” 맙소사, 말도 안된다. 이건 정말 말도 안돼. “문 열어.....” “언니!!!” “문열어, 정이온!!!!!!!!! 문 열어!!!!!!!!!!! 열어!!!!!!!!!!!!!!!!” 잠긴 문은 내가 온 몸으로 부딪혀도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이렇게 내 자신이 나약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그 애들의 고통을 없애주지 못한다면, 그 고통을 나누는 거라도 같이 해줘야 할텐데. 내가 그냥 이렇게 멍하니 있으면 안되는건데. “제발 이온아....... 문 좀 열어줘...... 나 그 애들 그렇게 보내면 안돼...... 제발...” “이러지마, 언니.... 우리 그냥 예전처럼 잘 살면 돼.... 갑자기 왜 그래, 정말....” “이온아..... 이제 나 그 애들 뿐이야.... 그러니까 문 좀 열어줘....” “그런 소리 하지마, 좀!!!!!!!!!” “.......... 너 지금 문 안 열면........ 나 창문에서 뛰어내려.” “언니!!!!!!!!!!!!!!” “........모든 책임 내가 질게. 문 열어줘.” 진지한 그 협박은 이온이에게 먹히는 것 같았다. 이온이에게는 미안했다. 내가 자살하겠다는 건 이온이에게 큰 충격을 줬을 테니까. 아마도 내가 이온이에게 칼을 들이대는 것보다 더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온이는 잠시 고민하는 듯 했다. 그러나 곧 찰칵, 하는 소리와 문이 열렸고, 내 앞에는 눈물범벅이 된 이온이가 나를 원망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해.... 미안해, 이온아.........”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리는 이온이를 뒤로 하고, 난 현관문밖으로 뛰쳐나간다. 시간이 없다. 더 이상 낭비할 시간이 없어. 택시를 잡는 시간도 아까워 미친듯이 뛸 수 밖에 없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나는 쉴 새없이 다리를 움직였다. 부탁이야, 제발 도망가.... 제발 도망가!!!! 차라리 너희들이 정말 야비한 놈들이었으면 좋겠다. 정시언 말 믿을바엔 병신이 되겠다, 이렇게 지껄이고.... 내가 없는 새에 그냥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그냥 너희들끼리만 떠나도 아무 원망 안한테니까... 그럴테니까... 제발 도망가. 탈진해서 쓰러져있었던 나의 어디에서 그런 힘이 샘솟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40분 정도 미친듯이 뛰어 드디어 놈들의 집.... 아니, 우리들의 집에 도착했다. 녹슨 파란 대문을 보자마자 심장이 미친듯이 두근거렸다. 경찰차가 없다. 이미 다 잡혀가버린걸까. 눈에 띄게 떨리는 손을 뻗어 끼익, 대문을 열었다. 맙소사, 난장판이 된 평상 위, 방 안에 그대로 켜진 불. [관계자 외 출입금지]가 숨 돌릴 틈도 없이, 마구잡이로 들이닥쳐서 잡아가버린거야. 그 애들은 나만 기다리고 있었을텐데. 내 탓이야, 내가 배신해버린거야. 이제 난 너희들 얼굴도 다신 볼 수 없어. 뱃 속의 아기도 지워버리고 말겠지. 내 의지따위는 전혀 반영하지 않은채. 눈물이 쏟아져내리고 다리의 힘이 풀린다. 신음소리가 터져나오려는 입을 틀어막았을 때 눈물이 차올라 앞이 흐려진다. 평상 위에 놓여진 휴인이의 뿅망치가 보인다. 그 뿅망치를 향해 손을 내밀었을 때........ “누나!!!!!!!!!!!!!!!!” 부엌에서 나오는건........... ..........................................휴인이??? 뭐지, 내가 지금 환상을 보고 있는건가, 이건 지금 꿈인가? 라고 생각했을 때. “돌아올 줄 알았지, 내가!!! 하루만에 왔네, 진짜 빠르다!!” “................ 휴.... 인....아?” “응, 휴인이 여기 있어요.” “...................” “뭐야, 왜 또 바보같이 울고있어. 무슨 일 있었어?” “........아무 일.... 없었어? 아무도 안왔어?” “누나 말고 올 사람이 어딨어.” “..................” “보고싶었어, 누나.” 하하, 웃어주는 휴인이. 뿅망치를 집어들어 내 손에 직접 쥐어준다. “다, 다른 애들은!!!!?” 아버지는 분명 8시에 아이들을 잡겠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9시 10분. 내가 잘못 들은걸까? “지환영!!! 백민서!!!! 누나왔다!!!!!” 내가 다른 아이들을 찾자마자 부엌을 향해 소리지르는 휴인이. “누나!!! 왔어요?” “뭐야, 하루 못봤다고 고 새 울고있냐?” “환영이 혼자 부엌일 하니까 민서랑 나랑 도와줬다!! 우리 착하지, 누나?” 환영이도, 민서도..... 건강한 모습 그대로다. ........비원이.... 설마 재벌 아들인 비원이만 데려간 건 아닐까? “비원이!!!! 비원이는 어딨어?” “응? 소화 안된다고 저녁먹고 바로 산책 나갔는데.” 휴인이의 말을 듣자마자 들고있던 뿅망치도 뿌리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내 눈으로 아이들을 모두 확인하기 전에는 안심할 수 없다. 힘을 잃고 쓰러지려는 다리를 간신히 지탱하며 그들의 집을 한바퀴 돌았을 때, 뒷 담벼락에 멍하니 서 있는 비원이를 발견했다. “.........비원아!!!!” “..............정시언.....!!!!” 나를 보고 놀란 듯한 비원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쓰러지면 비원이나 다른 놈들이 걱정할 게 뻔했기에 나는 비원이 옆에 나란히 서서 담벼락에 기댔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성공한거야?” 비원이가 웃으며 묻는다. 처음 만났을 때, 나에게 화내고 소리치던, 차가운 표정으로 꺼지라고 말하던 비원이가 언제부터 나에게 이런 따뜻한 웃음을 보여주기 시작했을까? 갑자기 안심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인거야. 아버지는 아직까지 구체적인 계획이 없을지도 몰라. 그 때 내가 너무 예민해서 없는 말을 상상해서 지어낸 거겠지. “할 말이 있어, 비원아.” 그래도 안심할 수는 없었다. 아이들을 모두 모아놓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라고 일러줘야 한다. 아니, 필요하다면 지금 도망쳐야 한다. “나도 할 말 있어.” 그러나 급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원이는 여전히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망설였어. 기회가 없어서.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 “있잖아, 포기가 안되더라. 내 하늘한테 기도했거든, 제발 내 마음 좀 돌려놓으라고.” “.................” “근데 도저히 안되서.... 나 얼마전부터는 그냥 내 하늘한테 말했어. 미안해, 미안해.... 용서해줘, 나 포기가 안되나봐, 한번만 나 좀 봐줘. 다음 세상엔 당신만 사랑할테니까.... 내가 이렇게 빌테니까... 봐달라고.“ “...................” “............ 내 멋대로 좋아해버려서...... 미안하다.” “비원아........” 숨이 턱 막혀버리는 기분이다. 지금 이런 말을 들을 상황이 아니다. “그래도 걱정마. 나는 백민서처럼 강휴인이 이미 가진 거 뺏으려고는 안해.” “.................” “다만 하나 부탁하고 싶은 건.” “...................” “언제나 이렇게 곁에 있어줘, 너로 인해 우리가 다들 웃을 수 있” 그 순간, 비원이의 눈 앞에 빨간 불빛이 일렁였고, 그는 눈이 부신 듯 얼굴을 찡그렸다. 굳어버린 내가 뒤를 돌아보면............ 어느 새 수많은 경찰차에 포위된 아이들의 집과.......... 총으로 중무장한 수많은 경찰, 형사, 검사들................... “너희들은 포위됐다. 반항할 생각말고 순순히 나와라.” 우리 아버지의 음성이 스피커를 통해 들리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버린 표정의 비원이가 천천히 나를 바라본다. “...........이게....... 니 선택이냐......” 가슴아픈 그 한마디와 함께. 105. 마지막 인사 “이게........... 니 선택이냐.........” 비원이는 다시 한 번 그 말을 반복했다. 나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이건 내가 원한 것도, 바란 것도, 상상하던 일도 아니다. 내가 잘못 들은거라 생각했다. 8시에 오겠다던 아버지가 9시까지 안 나타났으며 분명히 착각일거라고. 지금 서둘러 진실을 말해주고 아이들을 대피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누가봐도 이건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다. 내가 비원이라도 마찬가지의 생각을 했을 것이다. 정시언이 경찰을 끌고 왔을 거라고, 처음부터 이들을 배신 한 것이라고. 용서를 빌고, 행복해질 준비를 하라고 했던 말은 모두 거짓이며, 애초에 정시언이 사라진 이유는 경찰을 몰고 오기 위해서라고.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비원아............” 계속 아니라는 말만 반복하는 나와..... 씁쓸한 미소를 짓는 비원이. “............ 어제 니가 간 뒤에...... 다들 모여서 이야기했다. 이제 범죄는 중단하자고. 휴인이도, 환영이도, 민서도.... 이제 제대로 된 아르바이트 찾아보기로 했고, 나도 오늘 아침에 지우형 만나서 호스트 일 그만두겠다고 말했는데.....“ “.............. 아니야, 비원아............” “........ 넌 우리를..............” 경찰차의 불빛은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화려했다. 그 불빛이 비원이와 나 사이를 눈부시게 비추고 있어서 나는 그를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넌 우리를............. 진심으로 생각하긴 한 거냐.......” 비원이의 질문을 듣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너희들이 날 의심하면 할 말은 없지만, 하지만.... 나 너무 슬퍼져. 심장이 아파서 미칠 것만 같아. 지금 이 상황에서 그 어떤 행동도 못하고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건.... 나야.... “비원아.................”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비원이의 눈이 빨갛게 충혈된다. 경찰차의 불빛 때문이 아니다. 그는 울고있었다. “우리한테 먼저 웃어준 사람이 없었으니까.... 넌 진심일 거라고.” “...................” “우리가 밀어내도 니가 먼저 다가와줬으니까......” “................비원아.........” “정에 약한 놈들이라고 했었지.... 난 얼마든지 상처줘도 되는데 그 놈들은 안된다고.” 나는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상황이야 어찌됐든 [관계자 외 출입금지]를 위험으로 몰아넣은 건 나다. “왜 하필 너야...............” 비원이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그의 목소리가 뭉개진다. “왜 하필 너야, 왜 하필 정시언 너야!!!!!!!!!!!!!!!!!!!!!” 수많은 경찰들 앞이란 걸 아는지, 모르는지 비원이는 집이 떠나갈 듯 소리치고. 나는 묵묵히 그 고함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숙였다. 비원이와 마찬가지로 내 눈에서 눈물이 마구 쏟아지고 있었으니까. “왜 하필 우리가 믿은 너야..... 너만 아니면 되는데.... 왜 하필 너야!!!!!!” 엄마..........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예요? 좀 더 지켜줄 수 있었잖아요..... 좀 더 도와줄 수 있었잖아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배신당해도 너만 아니면 되는데!!!!!!!!!!!!!! 왜 하필 너야!!!!” 더 이상 서있을 수가 없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눈물을 참을 수 없는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소리까지 내며 통곡해버린다. 그리고 그 때, 김형사 아저씨가 비원이를 향해 다가온다. 위협용 총까지 소지하고서. “니 이름이 뭐지?” 김형사 아저씨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는 비원이. “묵비권 행사냐? 대담한 짓을 하셨더구만. 니 이름 뭐냐구.” “.................” “설마 이름까지 바꿨을 줄은 몰랐지..,,,” “.......................” “대답안해? 니 진짜 이름이 뭐야!!!!!!!!!!!!!!!” 김형사 아저씨는 평소 범죄자를 다루는 거친 목소리로 비원이를 위협했고 비원이는 피식 웃어버린다. “너 이 자식, 지금 이 상황이 웃겨!!!!!!!!?” “.....................어디까지 알고 있는데?” “.............. 너 지금 와서 숨기려고 해도 이미 다 까발려졌어, 이 자식아!!!!” “.................. 하..........” “재벌 아들이면 재벌 아들답게!!!! 공부나 열심히 해서 사업이나 물려받을 것이지,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문제아 말에 홀랑 넘어가서!!!!“ “.......................” “다른 놈들은 다 체포지만 너는 특별대우다. 오늘 하루만 경찰서에 있다가 내일부터는 너희 회사 본사로 보내질거야. 얌전히 지내다 유학이나 가면 된다. 여기있는 생활은 모두 다 잊고, 새롭게 지내면 되는 거야.“ 김형사 아저씨의 말에 비원이는 초점잃은 눈으로 하하 웃어보인다. “백민서..............” “그래, 니 이름 백민서!!!” “...................그래요, 이름 바꿨죠. 내가 백민서죠.” “..................” “신비원이 아니라......... 백민서.............” 실성한 것처럼 계속 웃어대는 비원이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는 김형사 아저씨. “...........다른 애들은요.” “니가 상관할 바 아니다.” 비원이가 묻자 냉정하게 대답하는 김형사 아저씨. 그런 아저씨를 향해 울면서도 겨우 질문을 다시 던지는 나. “................다른.... 애들.... 어떻게 됐는데요?” “........시언이 넌 집에 가만히 있지, 또 어떻게 나온거야.” “............아저씨... 다른 애들은요..........” “............지금 다들 한창 체포되는 중이지. 다른 사람들이 집 안으로 들어갔어.” 아저씨는 내 얼굴을 보기 힘든지 비원이를 이끌고 경찰차로 가려 발을 옮겼다. 비원이는 잠시 끌려가는 듯 하더니 멈칫하고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백민서라고...............” “..................” “하나만 알려줄게.” “..................” “우리는 너에게......... 거짓말은 하지 않았어.”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린 듯한 그의 표정. 그리고 이제 다 체념한 듯한 비원이가 김형사 아저씨의 뒤를 따르려 할 때.... 담벼락 위로 무언가가 휘리릭 올라서는 느낌이 들었다. 나와 비원이, 김형사 아저씨가 놀라 위를 쳐다보면........ 도망을 치려는 듯 담벼락 위에 올라간 휴인이가 보인다. “너 이 새끼!!!! 내려와, 이미 포위됐어!!!!!” 반대편 담장에서 누군가가 소리치지만 이미 나와 눈이 마주친 휴인이는 나만을 바라본다. “환영이가 잡혔어.... 집 안에 있는데 경찰들이 막 들이닥쳤거든. 누나가 갑자기 왜 뛰쳐나갔는데 걱정하고 있었는데.... 민서랑 내가 따라가보겠다고 안심시켰거든, 너는 설거지나 하고 있으라고. 그래서 설거지 중이었다. 설거지 다한 뒤에는 내일 환희 면회간다고. 오랜만에 도시락 싸갈 거라고 기뻐했었는데.... 이미 환영이 손에 수갑이 채워졌어. 도시락도 못 싸게.... 그냥 바로 수갑 채워버리네.” 나에게 중얼대는 휴인이. “민서는..... 한 대 얻어맞았어. 손도 뒤로 꺾였고. 누나 찾으러 뛰어나가려고 하는데 경찰 아저씨들이 들이닥쳤거든. 대문 바로 앞에 서 있던 바람에 도망치지도 못했어. 잡힌 상태에서 그거 뿌리치려고 했는데... 범죄자 전문으로 잡는 아저씨들은 못 당하나 봐.” “...................... 휴인아..........” “비원이가 걱정됐는데..... 누나랑 같이 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싶었는데....” “...........” “.............근데 이미 잡혀가고 있네.......” “...................” “그럼 지금까지 도망치던 나도 저항해봤자 소용 없는거네.” 제발....... 그런 말 웃으면서 하지마.......... “우리......... 끝난거지......? 그지, 비원아?” 휴인이가 비원이를 향해 물어보면....... 비원이는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가 만드려던 천국.......... 그거 꿈인가?” 휴인이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 그러나 그는 끝까지 울지는 않는다. 비원이도 울고 있는데, 휴인이는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참고 있었다. “비원아........ 우리 끝난 거야?” 휴인이가 그 말을 건넸을 무렵, 이미 체포된 환영이와 민서가 경찰들에게 무지막지하게 끌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끝났어. 내려와, 병신아.” 그 모습을 보던 비원이는 휴인이를 향해 중얼거린다. 퉁명스럽지만, 애정이 듬뿍 담긴 그런 말투로. 그 때, 우리 바로 앞에 있던 경찰차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누군가가 내린다. ............진한 오빠였다. “어제 보고 또 보네. 반갑다, 꼬맹아?” “.............. 아저씨가 우리 잡으러 왔어요?” 여전히 웃으며 말하는 휴인이를 향해 비열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이진한. “아니, 난 그냥 도우러 왔지. 빚지고 못사는 성격이라.” 그리고, 진한오빠는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든다. “묘기는 그만 보여주고, 담벼락에서 이제 그만 내려와라, 꼬맹아.” 말없이 나만 바라보는 휴인이. “발포하기 전에, 손 들어.” 한숨을 내쉬며 허탈은 웃음을 짓더니.... 천천히 두 손을 드는 휴인이. “담벼락에서 내려와.” 두 손을 든 채로, 담벼락에서 뛰어내리다가 중심을 못 잡아 휘청대는 휴인이. 나는 그가 다칠까봐 급히 부축해주었다. “행복해질 준비.... 다 됐는데.” 휴인이는 나를 향해 작게 속삭인다. “........... 미안해, 휴인아...........” “........용서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범죄는 범죄니까.” “......................” “이검사 아저씨 나한테 되게 삐졌나봐. 복수하고 싶어서 저러는 거 맞지? 누나 행복하게 해주라고 말하고 싶은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 괜히 내가 나섰다가 누나가 더 곤란해질 거 같아서 나 참는 거야.“ 내게만 들릴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휴인이. “휴인아...............” 나는 그를 보낼 수 없다. 절대 보낼 수 없어..... 잡지도 못하고 바보같이 울고만 있는 내가 너무 무기력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런 나를 향해 마지막으로 햇살처럼 웃어보인 휴인이가 건넨 한 마디는.... 나를 다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게 만들어버렸다. “..........굿바이, 누나.” 106. 애원, 폭로, 진실 내 몸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다. 순식간에 눈 앞에서... 바로 내 눈 앞에서.... 휴인이와, 환영이와, 민서와, 비원이가 사라져간다. 나만 믿으라고 큰소리치던 정시언을 믿은 죄로, 이렇게 아무 반항도 못해보고... 무지막지한 경찰들에 휘둘리고 이끌려가는 네 명의 아이들. 온 몸이 떨려오고 정신이 혼미해지지만 나, 내 의식을 붙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지금의 내게는, 쓰러지는 것 또한 사치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해버린 상황. 내가 무슨 염치로, 이 아이들 앞에서 쓰러질 수 있지? 화가 나. 나는 왜 너희들을 지켜주지도 못하고 이렇게 보내야 하는거야? 너희가 뭘 잘못했어? 난 왜 지켜주겠다고 큰소리친거지?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말지. 천하에서 제일 나쁜년이야, 정시언은. 너희는 왜 나를 믿은 거야? 병신들, [관계자 외 출입금지]잖아. 너희들 사이에 왜 나를 끼워넣었어? 너희들이 이렇게 망가질 거 알면서, 내가 믿을 만한 인물이 못 되는 거 알면서, 왜 이렇게 나를 미치게 하는 거야? “가지....마......”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짜낸다. 그 목소리에 휴인이와 그의 손에 수갑을 채우던 진한오빠가 나를 돌아보고... “가....지...마......” 다시 한 번 내뱉은 내 신음소리에... 김형사님과 비원이도 나를 바라보고.... “가지마!!!!!!!!!!!!!!!!!!!!!!!!!” 내 고함소리에 민서와, 환영이와, 그들을 끌고가던 경찰들의 시선도 나를 향한다. “제발................. 제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눈물이 흘러나온 게, 얼마만이었더라? 엄마, 엄마 죽은 이후로 처음인 것 같은데... 앞으로 내 인생에서... 이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릴 수 있을까? “제발............. 데려가지 말아요.............” 김형사님을 향해 애타는 목소리로 빌어본다. 그 때의 난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간절하고 심각했다. 김형사님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나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약해지시는 듯 했다. “내가 빌게요, 내가 다 뒤집어쓸게요. 그 애들 잘못 없어요. 그 애들 착해요. 김형사님, 차라리 날 잡아가면 안돼요? 그 애들 없으면 나 죽어요. 나 좀 살려주세요, 김형사 아저씨....“ “.........시언아......” “나 초등학교때 길가에 쓰레기 막 버렸어요. 침도 뱉어봤구요, 욕도 잘했어요. 나 중학교때 같은 반 여자애 때려서 입원시킨 적도 있었어요. 그 때 그 사건, 김형사님이 무마시켜줬잖아요. 나 선생님한테도 대들었구요, 학교에서 패싸움에 휘말려서 경찰서도 몇 번 갔었잖아요. 폭력단체 우두머리라고 친구들 부모님이 나만 몰아세우기도 했었어요. 그거 다 사실이예요. 사실 맞아요. 내가 다 주동한 거였어요. 나 고등학교때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다 했어요. 진짜예요.“ “........ 집에 가, 시언아.” “그러니까 날 잡아가면 안돼요? 그 애들보다 내 잘못이 더 많은데.... 그 애들 말고 날 잡아가면 안돼요? 제발... 걔들 그냥 안 데려가면 안돼요?“ “...........빌지마.....” 그 때,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 나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씨발, 빌지마, 정시언!!!!!!!!!!!!!!!!!!” .......민서.... 민서다... 경찰에게 잡혀 양 손이 뒤로 묶인 채, 나를 향해 소리치고 있다. “니가 왜 빌어, 니가 뭘 잘못했다고 빌어!!! 일어나, 주저앉아 있지 말고!!!! 우리가 잘못했고, 그래서 우리가 잡혀가는 거야!!! 널 믿은 것도, 너랑 같이 있었던 것도!! 니 탓 아니야!!! 다 우리가 결정한거고, 우리가 선택한 거였어!!!“ “.................. 민서야......” “일어나, 병신아!!!!!!!!!!!!!!!!!!!!!!” 날카로운 민서의 음성이 내 귀를 파고든다. 그 애는 울부짖듯이 소리쳤다. 끝까지 나를 신경써주는 그 애들이 눈물겹다. “누나는 우릴 지켜줬어요.” 환영이의 잔잔한 목소리. “마지막은 이렇게 되었지만, 누나는 죄책감에 시달리겠지만.... 난 마지막은 신경쓰지 않아요... 시작과 중간엔 언제나 누나가 함께 있어줬으니까. 나, 걱정되는 것도 많고 신경쓸 일도 많고, 후회하는 일도 많지만.... 억울하지 않아요. 우리가 범죄를 저지른 건 사실이니까... 이리 뛰고, 저리 뛰어도... 결국엔 잡히네... 누나 말대로... 우린 아직 어린 놈들일 뿐이어서... 그래서 미안해요. 누나가 우릴 지켜주려고 했는데, 우린 누나를 못 지켜줘서... 미안해요.“ 난 너희를 지켜주지 못했어, 이건 배신한 것보다 더 나빠.... 믿으라고 해놓고, 아무 일도 해내지 못했어. 제발 그렇게 감싸주지마, 말은 그렇게 해도 환영이 니 눈은 이미 상처받았는걸... 차라리 비원이처럼 경멸하는 눈으로 날 보는 게, 그게 더 좋아. 그래야 내 아픔에 덜해. 그렇게 착하게 굴지마, 지환영......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미안해.....” 눈물 때문에 말을 잇기도 힘들었지만, 꺽꺽거리면서도 미안하단 말을 쉴새없이 내뱉었다. 그런 내 모습에 모두 다 순간 동작정지, 그대로 굳어버린 채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넌.... 널 완전히 사랑하게도, 미워하게도 만들지 않아....” 그리고 아까부터 피가 날 듯 세게 입술을 깨물고 있었던 비원이가 드디어 말을 내뱉는다. “사랑할만 싶으면 실망시키고... 실망할 만하면 사랑하게 만들어.” 휴인이와 민서 앞에서... 비원이가 대놓고 말해버렸다. 나를 사랑한다고. “그래서.... 난 니가 너무 싫어.” 비원이는 언제나처럼 솔직하게 굴었다. “왜 내가 사랑하는 년들은 다 이 모양이냐.” “.........................” “내 하늘은.... 멋대로 떠났고, 멋대로 죽었어. 미친듯이 미웠고, 미친듯이 증오했다. 마찬가지지, 너도. 왜 넌.... 혼자 멋진 척하고, 혼자 바보인 척 하고... 욕해도 듣고 있고 ,짜증내도 듣고있고.... 언제나 날 나쁜놈으로 만들지.“ “................ 비원아.........” “나이는 많은 것들이.... 속마음은 역겨울 정도로 여린 년들이!!!!!! 왜 강한 척을 하냐고!!!!! 결국 세상에 무너져 내릴 건 너희들이면서!!!! 왜!!!!!!!! 처음부터 왜 다가와서 왜 울게 만드냐고, 왜!!!!!!!!!!!!“ “..................” “난 얼마든지 상처줘도 괜찮은데... 이 새끼들만은 지켜달라고.... 내가 말했잖아.” 비원이는 말 그대로 증오와 사랑의 감정을 마음껏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배신당한 것 같은 감정에 화내는 건 아니었다. 그는 나를 걱정했고, 자신들의 친구들을 걱정했다. 놈들을 보내고 상처받을 나를 위해, 결국은 세상에 굴복해버린 나를 위해, 현실과 이상의 차이에 미친 듯 울었을 나를 위해, 처음부터 스파이로서만 접근해 놈들에게 정을 붙이지 않았어야 했을 나를 위해, 왜 다가왔냐고, 왜 상처를 줬냐고.... 나를 탓하면서 걱정하고 있었다. 상처를 받는 사람 중에서 자기 자신은 쏙 빼놓고서, 휴인이를 배신한 나를, 환영이를 배신한 나를, 민서를 배신한 나를,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를 배신한 나를..... 증오하고 있었다. 비원이를 배신한 나는.... 언제나처럼 너그럽게 용서해줄거면서.... “뭐가 이렇게 소란스러워!!!!!!” 그 때, 그 혼란을 틈타 우리의 영역에 침입한 건, 바로 나의 아버지. “정시언!!!! 넌 또 어떻게 여기에!!!!” 내가 여기 와 있다는 걸 지금 아신 듯, 놀란 표정을 지어보이신다. “이온이더러 잘 지키고 있으라고 말했는데 어떻게 나온거야!!!! 차 하나 내줄테니 어서 집에 들어가. 이제 여기는 니가 있을 곳이 아니야, 니 임무는 다 끝난거다. 어서 일어나!!!!“ 억지로 나를 일으키려 하는 아버지를 향해..... “어린 놈이 철이 없으시다고 하겠죠.” 휴인이가 드디어 입을 연다. 다행이다, 휴인이에게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 굿바이가 된다면, 그건 너무 슬프니까. “진정한 사랑 따위 없다고. 누나 가지고 놀지 말지 말라고. 범죄자는 닥치라고.” “........... 넌.....” “범죄자도 인간이네요. 저희, 죄는 저질렀는데... 많이도 저질렀는데... 사랑은 하네요. 저희도 지긋지긋해서, 징글맞은 세상이라서, 더럽고 치사해서.... 그래서 피하고 싶어서 도망치고 쫒기고 뛰어와봤는데.... 그래도 인간이라고 저희가 사랑을 하고, 숨도 쉬고, 그렇게 사네요.“ “..............넌 뭐야.....?” “어떻게 생각하실지 잘 알고 있습니다. 태어나선 안 될 놈들이라 생각하시겠죠. 세상에.... 태어나서 안 될 사람이란 없는 거 같은데... 적어도 제 생각은 그런데... 검사아저씨들은 그런 생각 안하시겠죠. 우리가 죽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시겠죠. 이해합니다, 저도 한 때는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 이 새끼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 근데.... 살다보니까 그게 아니네요, 아직도 많이 산 건 아니지만... 고작 18년동안 살아온 것 뿐이지만, 아직도 잘 모르지만.... 그래도 살아서 기쁘다고 느꼈고, 제대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다들 뭐하는거야!!! 이 자식들 다 잡아넣어!!!!” 아버지가 화나서 소리치시지만, 휴인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 아버지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저를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어 준 사람이.... 누나와... 누나 뱃 속의 아기입니다.” ...........휴인아.............. “그러니까.... 제발.... 제발..... 아기만은..... 아기만은 살려주십시오......” 정말 니 아기도 아니면서.... 그러지 말란 말이야..... 세상은 너희가 이렇게 아름다운 걸 알아주려고도 하지 않는데.... 왜 너희는 계속 이렇게 눈부시기만 하는 거야? 살 방법이 없었던 건 너희들 탓이 아니잖아... 언제나 힘들고 외로웠던 너희들 인생에.... 내가 끼어들고.... 함께 있어주고... 보듬어주려고 했던 게....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이었을까? 얘들아, 우리가...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지른거야? 지금 이런 식으로 벌 받을 만큼.... 우리가 못된 짓을 한 거니? “아무 잘못 없는 누나고.... 아무 잘못 없는 아기니까.... 제발.... 제발......” “너 같은 놈의 핏줄을 태어나게 만들 순 없다. 내 딸 인생을 망칠 순 없어.” 그러나, 그 순간... 자신의 딸만을 생각하는 우리 아버지의 그 발언은... 너무나 이기적이고 또한, 잔인했다. 휴인이가 고개를 들어 우리 아버지를 바라보았을 때, 그의 눈은 눈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표정을 본 순간, 나는 울컥해서 소리치고 말았다. “그만해요!!!! 지금 이게 누구 앤데!!!!!! 휴인이 아이 아니라구요!!!!!” “누나!!!!!!!” “난 휴인이랑 같이 잔 적도, 이상한 짓을 한 적도 없어요!!!!!” “........... 누나, 그만해!!!!!!!!!!!!!” “이거 진한오빠 아이라구요!!!!!!!!!!” 말해버렸다. 진한오빠의 아이라고 말해도 아버지는 이 나의 아기가 더러운 핏줄을 타고났다고 잔인하게 말할 수 있을까? “...........뭐?” 아버지가 내게 다시 묻는다. “진한오빠가 아이 지우려고 할까봐, 휴인이가 일부러 자기 아이라고 거짓말 해준거예요. 내가 아기 지우기 싫어하는 거 아니까, 자기가 대신 덮어쓴거라구요.....“ 사색이 되는 진한오빠. 놀라는 김형사님과, 심각한 표정의 아버지. “아, 아닙니다!! 그런 말도 안되는!!!” 급히 변명을 하려는 진한오빠. 그는 당황스러워 하며 나를 향해 소리쳤다. "정시언!!! 너 도대체 왜 이래!!! 그게 무슨!!“ “.......오빠 좋아해서, 오빠 결혼 망치려고 이런 말 꺼내는거 아니야. 나 이제 오빠한테 아무 느낌없고 아무 감정없고 아무 상관없어. 근데.... 나 이 애만은 지켜야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거 뿐이야. 이 애 살리기 위해서라면 나... 무슨 짓이든지 해.“ 이제 내 뱃 속의 아이는 나에게 [관계자 외 출입금지] 대신이니까.... “웃기지마!!! 그 날은 실수였어!!! 그 때 일은!!!!” ........이진한은, 너무 당황스러워 횡설수설함으로써, 그 날의 진실을 인정해버리는 말을 내뱉었고, 아버지는 어이없는 듯 하늘을 바라보시더니 상황을 정리할 말을 내뱉으셨다. “김형사, 이 놈들 다 잡아넣어. 그리고 이검사, 자네는 나 좀 보지.” 그게 내 기억의 마지막이다.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경찰에게 잡혀가는 장면도, 아버지와 진한오빠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도..... 나는 알지 못한다.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 순간, 또 다시 기억을 잃고 쓰러져버렸다. 107. 예상 밖의 손님 뒷모습이 보여. 너희들의 뒷모습. 다들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어. 왜 자꾸 나랑 멀어지는 거야? 멈춰봐, 너무 빨리 가지마. ......손에 수갑이 채워져 있잖아, 아플거야, 기다려, 내가 풀어줄테니까. “.......휴....인아.... 휴인아.....” 날 봐, 너희들 왜 다들 앞만 보면서 걸어가고 있는거야? 너희들 뒤에 내가 있어, 나 좀 돌아보란 말이야!!!! “강휴인!!!!!!!!!!!!!!!!” 휴인이 이름을 부르며 벌떡 일어났다. 식은 땀을 닦으며 한숨을 내쉬고 주변을 둘러본다. 익숙한 환경.... 아, 전에 내가 입원한 적이 있던 그 병원이구나. 나, 또 기절해버린건가? 미쳤어, 정시언. 그렇게 건강하던 내가 정말 별일이네. 하루가 멀다하고 쓰러져 버리니까.... 드라마 보면서 청순가련한 여주인공이 쓰러지는 거 보고 부러워하던 적도 있었는데 이젠 자꾸 쓰러지기만 하는 내 자신이 원망스럽다. 아까 그건.... 뭐지? 꿈인가?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생각했다. 내 기억이 도대체 어디에서 끊긴건지. 난 결국, 그 아이들이 잡혀가는 마지막 뒷모습조차 보지 못했다. 끊임없이 머리를 굴린 탓인지 머리가 아프다. 그 때, 병실문이 달칵 열리며 이온이가 들어왔다. “언니!!!!!” “..............이온아.........” “맙소사, 언제 일어난거야?” “.........방금..........” “어제 쓰러졌어, 기억나?” 다행히 시간이 많이 흘러간 것 같지는 않았다.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 손등에 꽂혀있는 링겔이 거슬린다. “이온아.........” “이야기 들었어, 이검사 아저씨 아기라며....” “............” “이검사 아저씨 딱 걸린거지, 뭐. 어제 아부지한테 걸려서 꼼짝없이 진실 다 불었어. 1년 정도 사귀고 있었다면서? 언니 너무해, 왜 나한텐 말도 안하고.... 하... 그래, 어쩌겠어. 이미 지난 일 계속 말해봤자. 어쨌든.... 언니 아기, 지워야지. 더더욱 지워야해. 이검사 아저씨 약혼했잖아. 결혼날짜도 잡혀있대. 난 언니가 인생 망치는 꼴 절대 못 봐.“ 진한오빠의 이야기를 건네는 이온이의 눈은 원망과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아버지도 이러셨을까, 진한오빠에게 어떤 말을 건네고, 어떤 시선을 보내셨을까. “..... 그.... 애들은?” “.......... 관계자 외 출입금지?” “.................” “....... 잡혀갔어. 신비원만 지금 특별수용조치, 호텔방에 얌전히 모셔두고 있대. 제일그룹에서 사람이 하나 나와서 곧 유학절차 밟기로 했다는데. 짧으면 3일, 길면 일주일 안에 영국으로 유학가게 되나봐. 나머지 3명은 구치소에 있어. 재판해서 법적판결 나오기 전까지는 거기 둘 거래.“ 눈을 감아버렸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머리가 아프다. 천천히 배 위에 내 손을 가져다 대본다. 아직... 거기 있는 거지? 잘 살아있는 거지? 잘해준 것도 없고, 혹사만 시켰는데.... 아직 잘 살아 있어줘서 정말 고마워. 끈질기게 살아서 숨쉬어줘, 아가야.... 아직 잘해주겠다고 약속 못하겠어, 그 애들을 잃은 엄마는 지금,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니가 힘들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참고 견뎌줘, 죽지만 말고... 살아서만 나와줘. 부탁이야. “수술..... 할거지, 언니? 아빠도 정확한 언급을 안해서 나도 미치겠다구. 언니도 아빠 성격 알잖아, 언니를 내놓은 자식으로 생각하기 전에 빨리 결정해. 언니가 그동안 하도 속썩이고 난리쳐서 아빠도 말을 잃었다니까. 언니가 지우겠다고 하면 당연히 돈도 대 주실 거고, 용서도 해주실 거야.“ 날 설득해서 빨리 결론을 얻어내고 싶은지 이온이의 말이 빨라졌다. “아니, 이온아.” “......... 언니.......” “난 이 아기 낳아.” “......... 언니, 지금 그게 무슨!!!!” 이온이가 나에게 소리치려 할 때, 때마침 내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아버지일까, 생각하며 핸드폰 액정화면을 보았지만, 모르는 번호가 떠 있다. 설마 아이들일까? 구치소에서 전화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여보세요?” 허겁지겁 폴더를 열고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들려온 목소리는.... 거칠고도 소름끼치는 음색.... - 씨발, 니 병실 어디야!!!!!!!!!!!!!!!! 마치 짐승이 포효하듯이, 울부짖는 그 목소리. - 정시언!!!!!!!!!!! 니 병실 어디야!!!!!!!!!!!!!!!!!!!!!! ................... 준휘의 목소리였다. “이온아, 이 병실 몇 호실이니?” 수화기에서 살짝 귀를 떼고 이온이에게 물었다. 이온이는 어이없어하면서도 병실 번호를 알려주었고, 나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에 귀를 가져다댄다. “........... 너 준휘 맞지?......” - 니가 무슨 짓을 한 줄 알아? “........ 준휘야.....” - 넌 악마야..... 니 병실 어디야!!!!!!!!!!!!!! “.......307호실이.......” 내가 차마 말을 끝맺기도 전에 전화는 툭 끊겼다. 많이 흥분한 것 같았다. 준휘가 이렇게 흥분하는 걸 보는 것도 처음인 듯 싶다. 하지만 난 그 애를 막을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다. 이렇게 해커를 상대하는 것도 내가 꼭 해야할 일 중에 하나였으므로. 악마라고 했나. 그래, 별 다를 것도 없겠지. 너희들이 보기엔, 그리고 내 자신이 보기엔... 난 악마, 아니 그보다 더 못한 사람일테니까..... “뭐야, 무슨 전환데?” 이온이는 걱정이 된 듯 심각하게 물었다. “......... 준휘라고 했지? 설마 박준휘 말하는 거야? 해커?” 역시 파파라치인 이온이의 폭넓은 정보수집능력은 우습게 볼 게 아니구나. 열음이랑 산이만 알고 준휘는 모를 줄 알았는데. 준휘란 이름만 듣고도 바로 알아내다니, 아니, 어쩌면 당연한건가. 내게 묻는 이온이에게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 문이 벌컥 열리며 준휘가 모습을 드러냈다. “넌 오늘 내 손에 죽는거야......” 라는 말을 내뱉으며 내 앞에 나타난 준휘는... 손에 칼을 쥔 채였다. 놀랍지도 않았다. 해커의 충성심을 익히 알고있는 나는, 당연히 밟아야 할 절차라고 생각했으니까. “..........뭐야, 너!!!! 이게 무슨 행패야!!!!???” 그러나 그런 일들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우리에 대해 모르고 있는 이온이는 다짜고짜 준휘에게 소리쳐대기 시작했다. 나를 보호하려고 그 여리여리한 몸으로 날 막아선 채로. “비켜, 너한테 볼 일 있는 거 아니야.......” “됐어, 빨리 꺼져!!! 의사선생님이랑 간호사 언니 부를거야!!!! 아니, 여기 우리 아부지가 깔아놓은 경찰도 몇 명있어!!!! 너도 그 놈들처럼 수갑에 손 채우고 구치소 끌려가고 싶지 않으면 잠자코...“ “......... 난 지금 눈에 보이는 거 없는 놈이야, 너도 찌르고, 정시언도 찌르고, 나도 자살하면 그만이다.... 그러니까 비켜.........“ 준휘의 아찔한 협박에 이온이가 잠시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비켜줘, 이온아.” “.........언니...........” “괜찮아.... 저 애는.....” 난 알고있어. “저 애는 절대 날 죽일 수 없어.”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놈이야. 나를 미친듯이 미워해도... 내가 [관계자 외 출입금지]와 관련이 있는 한... 그는 절대 나를 죽일 수 없어. “나가줄래, 이온아?” “.............. 난 저 놈 못 믿어!!!” “날 믿어. 무슨 일 있으면 소리 지를게.” 침착한 내 목소리에 이온이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듯 했다. 냉정한 나와는 달리 준휘는 나의 말에 더 흥분을 했는지 몸을 부들부들 떨고있었다. “너.... 우리 언니한테 무슨 일 생기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이온이는 경고에 가까운 투로 협박을 하고 나갔지만, 준휘의 귀에는 이온이의 목소리 따위 들리지도 않는 듯 했다.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어.” 내 말은 듣는건지, 마는건지, 준휘는 이온이가 나가자마자 거칠게 병실 문을 잠가버렸다. “너 어제 무슨 짓을 한거야.....” “.............. 솔직히 말하면 어제 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해커는 어제 집에 없었어. 잠시 해킹방지 프로그램을 의뢰받아서 외출중이었을 때.... 그 때 니가 일을 벌인거야.... 우리가 돌아왔을 때는!!! 형들은 이미 잡혀갔고, 뒤처리 하는 경찰들이 집안에 깔려있었어!! 너 때문이야, 니가 한 짓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처음부터 잡아갈 생각이었으면 형들이 널 믿게는 만들지 말았어야지!!!!!!!!! 왜 이딴 식으로 형들 진심까지 무너뜨려, 니가 뭔데!!! 니가 뭔데 그래!!! 휴인이형은 진심이었어, 너랑 사귀기까지 했잖아!!!!!!!! 악마야... 넌 악마야, 씨발!!!! 진심도 아니면서 형들을 가지고 놀았어!!!!“ 익히 예상은 했지만... 저런 말, 상당히 마음 아프다. 내 진심까지 농락당하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임에 분명했지만, 난 준휘에게는 그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지금 [관계자 외 출입금지]보다 더 절망적인 기분에 사로잡힌 건 바로 해커일 테니까. “우리가 활동 중지만 안했어도..... 그랬어도... 형들은 지금쯤 도망쳐서 잘 지냈을거야. 어디든 숨겨서... 어떻게든 잘 살게.... 내가 그렇게 만들었을거야... 너 따위 여자, 손쉽게 해치우고!!! 너 따위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게!! 내가 그렇게 만들 수 있었어!!! 다 너 때문이야!!!!!!“ 준휘는 소리치며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역시나 그는 나를 죽일 수 없었다. 그가 쥔 칼은, 내가 기대어있는 베개 바로 옆을 스쳐, 침대에 꽂혀버렸다. “비원이형을........ 살려내........” 칼을 한바탕 휘두르고 난 뒤의 준휘 목소리는, 처음보다 많이 안정되어 있었다. 아직 분노에 미쳐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흥분보다는 냉정에 가까웠다. “니가 말하는 비원이형은.... 누구인거니?” 이제 더 이상 놀랄 일도 없겠지, 라고 생각하며 무표정을 유지한 채 물었다. 내가 흥분해버리면 준휘와 나 둘 다 위험해지는 건 시간문제다. “이름을 바꿨잖아, 그 애들..... 니가 말하는 비원이는 누구야?” 침착하게 준휘를 향해 묻자, 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하하 웃어보였다. “씨발, 역시 너 끝내주는구나?” “.....나 농담 하는 거 아니야, 너랑 말장난할 시간도 없어. 빨리 이야기 끝내고 나가줬으면 해. 나도 생각 정리하고 싶고, 안정도 취하고 싶어. 나도... 그 애들 생각......“ ........눈물이 터져나오려고 했다. 휴인아, 난 어떡해야 하지? 너희들 생각을 해야해? 아니면 너희들 생각을 접고 아기에게만 집중할까? 나 아무것도 모르겠어. 제발... 언제나처럼 날 구원해줘..... “끝내준다, 정시언. 니가 천재였으면 이렇게까지 더러운 기분은 아니었겠지. 병신같은 년한테 당했네. 그럼 나는 벌레같은 새끼잖아.“ “............. 준휘야....” “잘 들어, 병신아.” “....................” “형들은 이름을 바꾸지 않았어.” 108. 남김없이 순간, 머리가 띵했다. 잠깐만,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거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그 애들이...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고? 그럼 다들 본명을 사용했다는 소린데... 그럼... 재벌 아들인 백민서는..... 말도 안돼, 민서는 여자잖아. 이름을 바꿨다고밖에는 생각되지 않아.... “........지금 너 너무 흥분한 거 같아, 준휘야. 헛소리 하지말고....” “헛소리는 니가 하고 있어.” “..............” “경찰의 스파이라는 년이, 고작 그 사실 하나 못 알아내서 쩔쩔 매잖아.” “................. 너.....” “민서형은 남자야.” 머리가.... 하얗게... 아니, 까맣게.... 아니, 아니.... 모르겠다.... 내가 알던 모든 진실들이 내 머릿속에서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그런 내 충격은 아랑곳 하지 않고, 준휘는 말을 이어나갔다.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생각했지. 남자 셋에 여자 하나. 그게 바로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참나, 웃기지 말라 그래. 민서형은 여장을 한 거야, 재벌 아들이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알아듣겠어, 니가 얼마나 바보같은 추리를 했는지? 넌 병신같은 머리로 개같은 추리를 한 뒤에 형들을 지옥으로 보냈어. [관계자 외 출입금지]는 남자 네 명이야.“ 머릿속에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이해하기 힘들었던 민서의 행동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정말 나는 병신이다.... 왜 그걸 빨리 알아채지 못한거지? 민서가.......... 민서가 남자였어... 여자가 아니라 남자..... 남자였어... “주동자는 누구로 찝었냐? 씨발, 존나 재밌어서 웃음도 안나오네.” “............. 주동자가 누구야?” “왜, 이젠 모르겠어서 나한테 물어보려고?” 준휘가 나를 비꼬든 말든 나는 그의 옷자락을 세게 붙들었다. “말해줘.....” 그러나 그런 내 손을 뿌리치는 준휘. “그럼 비원이형 살려내.” “주동자가 비원이야?” “씨발, 넌 진짜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병실안에 있는 물컵들을 내던지는 준휘. 덕분에 물통에 들어있던 물이 튀고, 유리잔들은 산산조각 난다. 순식간에 마비된 사고탓에 그 무엇도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눈을 감아버렸다. - 뭐야, 언니!!!! 괜찮아? 다쳤어? 그 놈이 무슨 짓 한 거야? 사람 불러와? 밖에서 병실 문을 두드리며 고함치는 이온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니야, 나 괜찮아, 이온아!!! 걱정하지마!!!” 이온이를 향해 소리쳐주고는,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고, 준휘를 바라보았다. “.........말해줄래.....? 주동자가 누군지....?” “당했어... 형들이나 우리나.... 바보한테 당한거야....” “준휘야.....” “주동자는 휴인이형이야.” ................세상에.......... 맙소사........... 그렇게 천진난만하게 웃는 휴인이가, 세상을 무서워하던 휴인이가.... 밝고 눈부셔서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게 만들던..... 나의 휴인이가..... 범죄를 주동하고 이 모든 일을 이끌던........ 주동자였다고? “거....... 짓말.........” “난 거짓말할 시간조차 없어. 진실을 말해줬으니까.... 비원이형이나 살려내. 지금 내가 원하는 건 그것 뿐이야.“ “지금 비원이를 걱정할 때가 아니야, 비원이는 호텔에 잘 있어!!! 나머지 세 명이 다들 감옥에 처박혀있게 생겼는데 넌 지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준휘의 손이 내 멱살을 잡아 들어올리고 있었으니까. “..........잘 듣고... 내말 명심... 또 명심해라, 정시언. 바보같은 니 년한테 충고하고 알려주는 거... 이번 기회밖에 없어... 알아들어?“ “........................” “재벌아들은 백민서, 주동자는 강휴인이야. 민서형은 100% 남자고. 그동안은 여장을 한 것 뿐이야. 왜 여장까지 했냐고 묻고싶겠지. 지금 니가 걱정하는 것처럼 주동자는 그렇게 위험하지 않아. 기껏해야 같은 한국 하늘 아래 살고, 의식주도 감옥에서 해결해주지. 우리같은 놈들한테 그것도 감지덕지야. 오죽하면 내 친구는 소년원에서 풀려나면 또 다시 일부러 범죄를 저질러서 그 안에 또 들어가. 그 안이 편하거든. 밥 걱정도, 집 걱정, 가족 걱정도 할 필요없지. 거기서는 기본적인 의식주를 다 챙겨주거든. 형들도 별 다를 거 없어.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살아온 사람들인데, 감옥에서 이것저것 다 챙겨주면 오히려 고마워할거다.“ “............ 그게.... 무... 슨....” 멱살을 잡히는 바람에 숨쉬는 것도, 말하는 것도 쉽지 않다. “휴인이형은 각오했어. 감옥에 들어가는 걸. 하지만 니 예상과는 다르게... 우리들이 걱정하는 건 주동자의 감옥행이 아니라 재벌아들의 저승행이야.“ ..........저승....행......? “재벌아들의 부모는 사고로 죽었다고, 넌 그렇게 알고있겠지? 아니야. 그건 살해였어. 그들이 탄 개인 비행기 조종사가 매수된 사람이었으니까. 물론 이건 극비사항이야. 세간에도 그냥 사고사로 알려졌었지. 회사의 주주들이 짠거야, 제일그룹을 갈라먹기 위해서. 탐이 났겠지, 세계적으로 뻗어나가려고 발돋움 하는 기업이니까. 방해가 된 거야. 사장과 그의 아들의 존재가. 그래서 사장을 죽이고, 그 아들도 죽일 계획을 세웠지. 하지만 그 아들, 민서형은 어떻게든 살아났고, 지금도 멀쩡히 숨쉬고 살아있어. 제일그룹 새끼들은 지금 그게 마음에 안 드는 거야. 뭐? 후계자로 모실려고 유학을 보내? 웃기지마, 그 놈들은 지금 뒤에 살인청부업자들을 줄줄히 대기시켜놓고 있어. 재벌아들을 죽이기 위해서!!! 고용한 킬러들 수가 몇 명인지!!! 니가 알기나 해?“ .........맙소사........... 이건 정말 말도 안돼........... “니 바보같은 추리때문에!!!! 민서형이 아니라 비원이형이 잡혀갔어!!!! 비원이형이 재벌 아들로 찍혀버렸다고!!!! 민서형 대신!! 비원이형이 죽게 생겼어!! 민서형 역할을 맡겠다고 한 건 비원이형이 자초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이건 개죽음이잖아.... 살려내, 살려내, 정시언!!!!!!!!!!!!“ 나의 목을 조르는 준휘.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숨이차... 힘들어... 그만... 제발 그만...... “괴로워? 형들은 이것보다 몇 배나 더 괴로웠어!!!! 차라리 죽는 게 나을만큼!! 지옥같은 하루하루를 천국만 생각하면서 버텨왔어!!!! 근데 넌 뭐야!!! 왜 갑자기 니가 끼어들어서 형들을 망쳐놔!!!!!!“ 목이 졸리면서도.... 준휘의 말에 눈물이 나버렸다. 나는 결국, [관계자 외 출입금지]를 하나도 이해하지 않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누군가 문을 부서져라 두들겼다. 아까 이온이가 문을 두드릴때와는 힘의 차원이 다른 것 같았다. “문 열어.”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는, 준휘 또한 한번에 압도해버리는 침착함의 주인공은... “박준휘, 문 열어.” 열음이... 열음이다. “............씨발............” 준휘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내 목을 놔주었고, 병실 문을 열었다. 열음이는 한 눈에 병실의 상황을 모두 파악한 듯 했다. 열음이 뒤에 서 있는 이온이가 내 상태를 살피기 위해 고개를 빼꼼 내밀었을 때, 열음이는 재빨리 병실 안으로 들어와 도로 문을 닫았다. 덕분에 화가 난 듯한 이온이는 다시 문을 두드렸지만,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세 사람은 그런 것 따위 신경쓸 틈이 없었다. 열음이는 침착하게 침대에 박힌 칼과, 빨갛게 변해버린 내 목에 시선을 멈췄다. 그리고는.... 준휘의 앞으로 다가가서..... 크게 반원을 그리며 그의 뺨을 촥, 하고......... 때려버린다. 열음이에게 맞은 준휘는 반항하지 않았다. 그저 힘없이 돌아간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깨물었을 뿐. “.............어디까지 말한거야....” 아무 억양도 들어가지 않은 열음이의 물음. “.......... 전부 다.” 준휘의 말에.... 다시 한 번 그의 뺨을 때리는 열음이. 날카로운 마찰음, 제발 그만해... 이런 장면을 보고싶은 게 아니야. “사실....이야?” 나는 결국 열음이에게 진실을 확인하려 한다. “사실이야, 준휘가 한 말? 그게 정말이야....?” 내가 비원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거야? “형들로부터의 전언입니다. 언젠가 형들이 잡히게 되면 누나에게 꼭 전해주라고 했어요.” “....................” 열음이는 내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자기가 할 말만을 내뱉었다. “우리에게 배신은, 가면을 쓰는 게 아니라 함께 있어주지 않는 것이고, 속이는 게 아니라 믿지 않는 거라고. 누나는, 할 수 있는 일을 다했고, 그러니까 배신한 게 아니라고. 죄책감 따위 가지지 말고, 앞으로 행복하라고. 행복해지지 않으면, 그것 또한 배신이라고.“ ............정말... 구제불능으로 바보야, 너희들은.......... “형들이 잡혀간 그 시점부터, 해커와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계약은 깨집니다.” ............뭐?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절대 진실을 말하지 않을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누나에게 저 말을 전해줄 것..... 그게 마지막 계약의 내용이었는데, 진실을 말해버린 건, 정말 미안하게 됐어요. 누나에게나, 형들에게나... 고개를 못 들 정도로.“ “........... 무슨 말이야, 계약을 했다니?” “해커는 비원이형을 지키기 위해 뭉친거나 다름없어요. 비원이형을 위해서... 우린 [관계자 외 출입금지]에게 힘을 빌려준 겁니다. 비원이형을 제외한 다른 형들은... 솔직히 저희에게 아무 의미 없어요.“ 해커는....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냉정한 아이들이었다. 그들에게 휴인이, 환영이, 민서는.... 아무 상관 없는 형들일 뿐이었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오직 비원이형 뿐입니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하든... 비원이형만 살 수 있다면 우리는 뭐든지 다 버릴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열음아...........” “비원이형의 목숨과, 해커 세 명의 목숨을 바꾸라면, 우린 당연히 그렇게 할 겁니다. 하지만 다른 형들은 아니죠. 어떻게 되든, 저희가 알 바 아니니까요.“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열음아, 너는!!!” “진실을 알려주지 않는 것이 저희의 임무였지만, 이미 까발려진 사실, 어쩔 수 없죠. 누나의 역할이 뭔지 알겠어요? 진실을 바로 잡는 거예요. 재벌 아들이 누군지 밝혀진 마당에, 비원이형을 인질로 계속 쓰려는 건 아니죠? 경찰들에게 밝혀요. 진짜 재벌 아들은 백민서, 주동자는 강휴인이라고.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비원이형을 나오게 만들라는 거예요.“ 냉정해....... 너희들.... 너무 냉정해.......... “믿을 수 없어.... 거짓말이야... 너희들 지금 나한테 거짓말 하는거야.....” 고개를 저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또 언제 쓰러지게 될 지 모르지만, 유산 될 위험이 다가올지도 모르지만, 난 절대로 가만히 앉아서 그 애들을 상처받게 만들 수 없어. 난 [관계자 외 출입금지]만을 믿을 거야, 해커따위 믿지않아!!! 병실문을 열고 복도를 달렸다. “언니!!!!!!!! 어디 가!!!!!!!!! 언니!!!!!!!!!” 이온이의 고함소리는 무시하고, 나는 달린다. 병원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런 사실은 내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 무조건 달려야 한다. 그리고, 민서를 만나야 한다. 그리고.... 그녀가... 아니, 그가.... 아니, 그녀가..... 아니, 아니.... 그 애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확인해야만 한다. 모든 걸 남김없이 알아버린 지금, 내게 중요한 건, 확인 뿐이었다. 109. 두 가지 소원 이온이는 비원이를 제외한 나머지 [관계자 외 출입금지]가 현재 구치소에 가 있다고 했다. 열 여덟 살이지만 이미 넷 다 주민등록증이 있는 상황. 다들 성인으로 취급된다. 재판을 거친 후 그들은... 소년원이 아닌, 진짜 감옥으로 보내지는 것이다. 검찰과 경찰이 힘을 합해 잡은 소년 범죄자들이다. 힘겹게 잡은 그들을 쉽게 감시하지는 않을 터, 아버지나 김형사님은 이들을 곁에 두고 지켜볼 것이다. 그들에게 직접 범죄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야 하니까 놈들이 있는 곳은 검찰청 내의 구치소가 분명하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미친듯이 뛴다. 아버지와 마주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텐데, 어떡하지? 민서야, 비원아... 내가 도대체 너희들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정말 난 바보야. 제발 거짓말이라고 말해줄래? 내가 걱정해야 할 건 재벌아들의 목숨이 아니라, 감옥에 들어갈 아이들의 안전이라고. 그렇게 나 좀 안심시켜주면 안 될가? 결국 내가 문제였어. 잘못된 판단으로 내 손으로 너희들을 죽음의 소굴로 보낸 거야. 비원이를 구해낸다고 해도, 민서를 다시 돌려보내면 달라질 게 없잖아. 둘 중에 하나는 무조건 위험해지는 거잖아. 해커가 지키는 건, [관계자 외 출입금지]가 아니라, 그 안에 속해있는 비원이였어. 왜? 왜 역할까지 바꿔가면서 범죄를 저지른 거야? 누구보다 위험한 짓을, 누구보다 순수한 너희가 왜? 뭘 위해서 서로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거야? 병신, 정말 하나같이 다.... 병신들. “시언아!!!” 검찰청 도달 전까지,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되는 상황. 내 뒤에서 날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급히 고개를 돌리자,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김형사님이 보인다. “.........아저씨..........” “너 정말......” 김형사님이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다 알 수 있다. 이미 끝난 일인데 왜 그러느냐고, 몇 번 쓰러졌는지 알긴 하느냐고, 이 일에 끌어들여서 망가진 걸 보는 게 너무 안타깝다고, 이 일을 괜히 시킨 것 같다고, 이제 제발 정신 차리라고. 알고 있다, 심부름처럼 시작한 이 일이 내 인생 전체를 바꿔놓고 있다는 걸. “한바탕 난리였어, 어제 너희 아버지가 이검사를.... 휴..... 이검사 약혼녀도 너희 아버지 연락받고 오늘 새벽에 여기 찾아왔었어. 모든 사실 다 알게됐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대체 앞으로 어떻게 될런지.. 나도 정말 모르겠.....“ 김형사 아저씨가 지금 내게 해주는 말도 물론 충격적이지만... 더 충격적인 사실, 그러니까 민서가 남자라는 사실을 들은 내게 그따위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민서.... 민서요.....” “시언아, 이제 제발 그만” “단지 보고싶어서 이러는 거 아니라구요!! 급해요!! 민서!! 민서 어딨어요, 백민서!!” “백민서는 지금 호텔에.....” 아니예요.... 검찰도, 경찰도, 스파이인 나도 다 바보야. 다 눈치 못챈 거예요. 호텔에 있는 그 앤 비원이라구요. 비원이가 잡히던 당시 나한테 하던 말, 그 말이 진짜였어요. 그 애들은 나한테 거짓말 한 적이 없어요. 자기들 입으로 먼저 민서라고 한 적도 없었고, 서로 이름을 바꾸지도 않았어요. “.......그 민서 말고, 여자애요, 만나게 해주세요.” 내 남자친구 휴인이가 아닌, 위험한 재벌 아들 비원이가 아닌, 여자 아이 민서를 만나게 해달라는 부탁은 김형사님에게도 의외의 부탁인 듯 싶었다. 김형사님은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이내 결심하고 고개를 끄덕여주셨다. “좋아. 대신 이게 마지막이야. 너희 아버지께는 비밀로 하자.” “방송국이나 신문사에서 취재해도 되냐는 요청이 물밀듯이 몰려들었어. 그동안 쉬쉬하며 다들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네 명 모두 얼굴 때문인지, 나이 때문인지 나름대로의 인지도는 있었으니까. 이제 드디어 잡혔으니까 방송국에서도 특집 프로그램 하나 만들고 싶은 모양인데. 일단은 다 거절했어, 보안도 철저히 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나 쉽게 들어오지도 못해. 강휴인이랑 지환영은 건너편에 같이 있어. 조사하기 전에 말 맞출까봐 각방에 집어넣었지만. 지금은 지환영 조사중이야. 여자애는 일단 여기서 혼자 지내게 하고 있어. 여자애 조사는 내일이고.“ 구치소라기보다, 작은 방이라고 하는 편이 더 옳을 것 같다. “저, 민서랑 단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은데.....” 무리라고 생각했지만 염치따위는 버린 지 오래. 나는 더 이상 예의 차릴 것도 없었다. “좋아, 대신 문 앞에서 감시할테니까 일찍 나와. 방음은 될 테니까 걱정 말고.” 그러나 김형사님은 의외로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내가 그만큼이나 안쓰러워 보였던 걸까. 김형사님은 열쇠로 달칵, 문을 열어주었고 나는 한숨을 몰아내쉰 후에, 문고리를 돌리고 안으로 들어간다. 눈 앞에 보인 건 아무 것도 없는 휑한 방 한 칸 구석, 그리고 벽에 기대 앉아있는 민서. 여전히 모자를 푹 눌러쓴 채다. 저 예쁜 얼굴이, 아름다운 몸매가, 중성적인 목소리가, 탐스러운 머릿결이... 모두... 가짜였던 거야? 앉은 채 졸고있는 건지,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건지.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지 않았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왔기 때문에 검찰의 관계자라고 생각하고 적대시 하는 걸지도. 내가, 정시언이 왔다고는 상상도 못하겠지? 내 예상대로, 민서는 나를 쳐다보기는 커녕, 두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이. “난 할 말 없어, 나가.” 사람들이 민서를 꽤 귀찮게 한 모양이다, 바로 저런 말이 튀어나오는 걸 보면. 지금 누구보다 냉정해야 하는데, 나 벌써 눈물이 글썽글썽. 미안해, 빨리 알아채지 못해서, 이렇게 더 힘들게 해서... 정말 미안해. “......... 백민서......” 반갑게 부르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익숙한 목소리에 반응하듯 민서는 급히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나를 보고는, 잠시 놀란 듯 하더니.... 다시 피식 웃어보인다. “....... 하.....” “................” “..... 나 지환영이랑 경찰차 타고 오면서 내기했는데, 니가 찾아오나, 안오나.” “.....................” “아싸, 나 돈 벌었다, 내가 온다에 돈 걸었거든, 2만원.” “...........................” “강휴인이랑 지환영도 보고 왔냐? 아니면 설마 지금 나를 맨 처음 보려고 온 거?” 아까는 힘들어서 죽겠다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려놓고.... 내 얼굴 보자마자 밝은 척, 좋은 척, 웃긴 척... 너 정말 왜 이러니. “........... 갑자기 쓰러지길래... 끌려오면서도 걱정 많이 했다.” “.................” “많이 운 거.... 아니지?” 한 걸음, 한 걸음.... 민서의 곁으로 다가간다. “..... 너...... 남자야?” 내 질문에 순간 움찔, 하는 그녀... 아니, 그.... 아니.... 민서. 민서의 바로 앞까지 다가간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에 쥔다. 눈을 딱 감고, 그 머리카락을 세게 잡아당긴 그 순간. 무언가 확 빠지는 느낌과 함께 눈을 떠보면... 맙소사..... 내 손에 들려있는 가발은.... 해커의 말이 사실이라는 기막힌 진실을 내게 알려주었다. “.............백민서.... 너 정말....” 진실을 확인하자마자 민서의 바로 앞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짧은 머리의 민서는, 그 누구보다도 남자같은 매력을 그대로 뿜어내고 있었다. “........씨발.....” 심장이 내려앉을 것 같은 나와는 달리, 민서는 태연하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 진짜 정시언, 존나 둔하긴 하지.” “................... 너....” “지금 알았냐? 나 같음 보자마자 알겠다, 나처럼 멋진 새끼가 흔한 줄 아냐.” “...............” “거리감 느끼는 거 아니지? 나 오히려 일반적인 사람인 거 증명된 거다? 그 때 커밍아웃한 거 취소!! 내가 여자일 땐 커밍아웃 했지만, 이제 제대로 남자로 돌아온 거니까.“ ...... 넌 왜.... 나 같은 애를 좋아한 거야? 여자의 모습이면, 그냥 그 모습에 충실했어야지. 오해를 불러일으키면서까지 나를 사랑한다고 밝혀야 했어? “생각할 시간 줄까? 나 되게 멋있지? 강휴인 버리고 나한테 올래?” 앞뒤 가릴 것 없이, 난 민서를 안아버렸다. 그녀가 갑자기 좋아졌다거나, 이성적으로 느껴졌다거나 하는 이유가 아니었다. 안쓰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지켜주지 못한 게... 마음에 사무치도록 아팠다. “.......미안....해....” 놀라서 굳어있는 민서를 안은 채... 난 혼자 중얼거리듯 말을 내뱉었다. “지켜줄게... 지금이라도 지켜줄게... 나쁜 사람만 있는 곳에 너 절대 안 보내. 그 사람들 속에서... 니 목숨 쉽게 내주는 일, 나 절대 못 해.“ “.......다... 알게 된거야?” “...............” “내가.... 재벌 아들인 것도.... 알게 된 거야?” “..................” “........ 해커구나...... 그래, 걔들이겠지... 언젠가 일 칠 줄 알았어.... 그래, 걔들 입장에선 애가 탔겠지... 비원이가 나 대신 잡혀갔을테니까.“ 눈물이 차올랐다. “도대체 왜 그랬어? 왜 그렇게까지!!!!” “왜 그랬는지는 니 남자친구한테 물어봐. 그 새끼가 주동자인 것도 들었을 거 아냐. 난..... 글쎄,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어.“ 재벌 아드님인 주제에....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죽기 싫어서... 도망쳐 나왔을 뿐이야. 그래도 나 겁쟁이는 아니다.... 내 역할 신비원한테 떠맡긴 거 아니야, 나 혼자 죽고, 나 혼자 끝내면 되는 줄 알았는데, 신비원 새끼가 존나 때리더라, 강휴인 새끼는 존나 욕해대고. 살아가래, 어떻게든 살아가래. 왜 꼭 살아나가야 하는 게 난 지는 모르겠어. 삶에 대한 욕심이 없는 건 아닌데.... 나 대신 신비원이 죽는 건 바라지 않아.“ “...................” “나 안 지켜줘도 되니까.... 두 가지 약속만 지켜줄래?” “..........민서야.....” “하나는, 지환영이랑 신비원은 풀어주기. 셋 다 감옥보내서 뭐해, 세금 낭비야. 강휴인만 보내, 그 새낀 정신 차려야 돼. 니가... 휴인이까지 빼내는 건 힘들거 아니까, 그 새끼까진 부탁 안할게. 이미 너도 알게 된 사실이잖아, 더 이상 숨기는 건 무의미해. 내가 자수할테니까 비원이랑 내 역할도 바꿔주고.“ “....................” “그리고 나머지 하나!! 이거 진짜 중요하다. 내가 니 애기 이름 지었거든.” 눈물을 들키기 싫은 마음에 계속 민서를 안고만 있다. “정시언, 백민서, 강휴인. 이렇게 세 명 성만 따서, 정백강!! 어떠냐!!?” 바보, 뭐야, 그 투박한 이름은.... “내 이름이 강휴인 이름보다 앞에 쓰여야 돼, 나 그건 양보 못한다.” “...................” “꼭 낳아야 돼. 할 수만 있다면.... 내가 아빠 4호 할 텐데.... 아쉽긴 하네.” “그런 말 하지마, 살 수 있는 방법 있어!! 내가 너 안 보내면 돼!! 비원이도 살리고, 너도 살리고, 우리 같이 도망이라도 가서... 그래서!!!“ “고마워, 누나.” 그 순간.... 가만히 내게 안겨있던 민서가 자신의 힘으로 나를 꽉 끌어안았고, 나는 말을 멈춰야만 했다. 민서가 남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민서가 나에게 ‘누나’라는 말을 썼다.... “그동안 다른 놈들이 널 ‘누나’라고 부르면 그게 왜 그렇게 부러웠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천천히 나를 자신의 품에서 떼내더니.... 내 얼굴을 끌어당겨 내 입에다 키스한다. .... 살짝 입술이 닿는 뽀뽀가 아닌, 키스였다. 난 막을 수 없었다. 너무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그 순간의 민서를 뿌리칠 힘도 없었다. 아니, 그를 억지로 밀어내서 그에게 상처주고 싶지 않았다. 키스를 곧 끝낸 민서는 고개를 숙이며.... 억지로 웃고선, 한 마디 건넸다. “고마워, 작별인사 해줘서.” 내가 말릴 새도 없이, 그는 벌떡 일어서서 문고리를 잡아 돌린다. 놀란 김형사 아저씨의 고함소리가 들리고, “나 비밀 있거든요, 이제 제대로 불 마음 생겼는데, 내일 하려던 조사, 오늘 하죠?” ......... 그 바보는.... 스스로 죽음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110. 제안 검찰청 밖으로 나서자마자 참았던 눈물을 토해낸다. 흐느낌보다는 통곡에 가까운 울음이었다. 내가 얼마나 힘없는 인간인지 비참할 정도로 실감할 수 있는 이 순간. 지금까지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뻔뻔하게 그 아이들을 지켜주겠다고 떠들었을까. 어디까지가 다행이고, 어디까지가 불행이지? 내가 어떻게 해야 옳은 거야? 휴인아, 환영아, 민서야, 비원아.... 내 힘으로... 너희들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긴 했을까? 몇 번을 쓰러지고, 몇 번을 까무러쳐도... 머릿속에는 그 생각뿐이야.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고 내 자신을 아무리 합리화 시켜도... 그래도... 난 어떻게 해서라도 너희들을 지킬 수 있어야했어. 너희들을 사랑한다고 떠든 이상, 수단 방법 모두 가리지 않고.. 지켜야만 했어. 미안해, 너무 힘이 없어서... 지켜주지 못해서.. 가만히 보고있을 수밖에 없어서... 정말 너무 미안해. 검찰청 계단 앞에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눈물을 쏟아내고 있을 때였다. 휴, 하고 가볍게 내쉬는 한 여자의 한숨소리와 함께 내 뒤로 걸어오는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이러지 말자, 정시언. 사람들 다 보이는 길바닥에서 울지 말고 일단 정신 차린 뒤에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자, 라고 생각한 내가 손바닥으로 아무렇게나 눈물을 닦고 얼굴을 문지르고 있자, 뒤에서 불쑥 손수건을 건네는 그 누군가. 희고 긴 손가락과, 고급스러워 보이는 레이스 손수건. 퉁퉁 부은 눈으로 위를 올려다본 순간, 내 눈에 비친 건.... 진한오빠의 약혼녀, 선주린이었다. “방금 전 연락했었는데... 전화 안 받더라구요. 핸드폰 안 가지고 나왔나봐요?” 맙소사, 선주린도 모든 사실을 다 알고있을텐데...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어쨌든 선주린 입장에서는... 자기 남편이 될 사람과 불륜을 저지른 나쁜 기지배가 바로 나일 테니까. 그냥 나쁘기만 하면 다행이게, 애까지 임신해서 이 지랄인걸.... 아부지도 너무하셔, 그냥 나 미혼모 되게 놔두지.... 이진한이랑 다시 잘해볼 생각도 없고, 아이 지울 생각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냥 나 좀 내버려두지... 선주린한테까지 상처주지 말지.... 내가 선주린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착한 여잔데... 진실 다 까발릴 필요는 없잖아, 이진한은 개새끼지만, 이 여자는 착하니까, 그러니까... 상처주지 말지. “시언씨 찾다가 찾다가 연락이 안돼서... 난 지금 진한씨 만나고 나오는 길이예요. 이렇게 우연히 만난 것도 인연인 것 같은데... 나랑 얘기 좀 할래요?“ 내 심장이 부서져버릴만큼 아파왔지만, 슬픔에 내 자신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지만 난 선주린의 제안을 거부하지 못했다. 이 여자의 심정도 나 못지 않겠지, 하는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으니까. 아픔없이 자라왔을 것 같은 이 여자가 겪은 어이없는 이 사건에 대해서... 동정심마저 느껴진다. 병신, 지금 누가 누구한테 동정심을 느끼는 거지? 나는 눈물을 닦은 후, 순순히 선주린의 뒤를 따랐다. 약혼자가 전에 사귀던 애인을 비참하게 버리고 자신과 약혼을 했다. 약혼한 이유? 모든 조건에서 자신이 훨씬 월등하니까! 과연 약혼자가 자신에게 느낀 애정도까지 우월했을까? 그건 장담할 수 없다. 왜냐면 약혼을 하고, 자신과 행복을 나누던 와중에도... 약혼자는 전여자친구와 만나서 하룻밤을 보냈고, 아이까지 임신했으니까. 이런 기막힌 일을 당한 와중에도 선주린은 냉정을 잃지 않은 것 같았다. 오히려 무표정한 얼굴선이 미치도록 청순해보였다. 자신이 디자인한 원피스를 입고, 목걸이로 멋을 낸 스타일도, 예전 그대로였다. “내가 살게요. 나는 커피 마실건데, 시언씨도 커피할래요?” 우아한 분위기의 카페, 창가자리에 마주앉아서 선주린은 나에게 다정하게 묻는다. 진지하게 묻고싶어. 정말 바보인 거예요? 생각이 없어요? 아님... 지금 참고 있어요? 차라리 때려요, 나 이진한 사랑하지 않지만, 내가 잘못한 건 알고있는데. 선주린은 내 침묵을 긍정의 뜻으로 해석한 듯 했다. “좋아요, 그럼 시언씨도 커피... 아, 아니다. 임신...했는데... 그러면 커피 안 좋아요.” 거 봐, 임신이란 말을 하면서 멈칫했어. 미치겠잖아. 당신도 지금 짜증나고 화나고 성질나서 죽겠잖아. “우유 시킬게요. 따뜻한걸로.” 아무말없는 내가 답답했는지, 아니면 무슨 말이라도 해야 살 것 같은지... 선주린은 혼자 알아서 주문을 했다. “여기 분위기 괜찮죠? 내가 자주 오는 곳이예요. 케이크도 맛있는데 먹어볼래요? 의자도 푹신하고 꽤 괜찮“ “하고싶은 말 해요, 난 상관없어요.” 괜찮은 척 하는 선주린의 모습을 참을 수가 없어서 그녀의 말을 잘라버렸다. 이렇게 적대적인 감정을 표출하다니, 그럴 자격도 없으면서. 나 되게 웃긴다. 지금 머리끄댕이 안 잡히는 것만 해도 감사하게 여겨야지. 하지만 이럴수록, 선주린이 나에게 친절하면 친절할수록... 나는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버린다. 비참해서 미칠 것만 같다. 내 말에 선주린은 억지로 옅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할 말이 너무 많아서요, 그래서 꺼낼 엄두가 안 나요. 다른 이야기부터 천천히 꺼내려고 했는데... 시언씨는 그냥 본론부터 듣고 싶은가봐요.“ “병원에 있다 나온 거라서 피곤해요. 빨리 들어가고 싶어요.” “충격... 많이 받았죠?” 충격? 내가 왜? 충격이라면 당신이 받아야지. “아직 상황파악 안 됐어요? 댁 약혼자가 나랑 바람폈어요, 그래서 나 임신했다구요. 충격이라면 그 쪽이 받아야지, 왜 내가 받아요? 지금 누구 놀려요?“ 괜시리 화풀이하고 있어. 나 정말 못됐다. “나도 민서랑은 조금 알고지냈죠.” 그러나 선주린은 화내지 않았다. 아니, 화내기는커녕.... 나를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있었다. 나를 감싸주는 듯한 따뜻한 눈길 받아본 게... 얼마만인지 기억이 아득해진다. “어떻....게요....?” 구제불능인 정시언은... 민서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경계를 풀어버리고 만다. “자주 사업설명회같은 거 하죠, 그 쪽도 워낙에 대기업이니까... 아버지들끼리는 암묵적인 라이벌이었던 것 같지만... 애들끼리는 그런 거 모르잖아요. 나도 그 땐 어렸으니까, 그냥 파티려니, 하고 자주 따라갔어요. 그 때 만났죠. 제일그룹의 유일한 후계자, 백민서.“ “...............” “그 땐 굉장히 많이 살쪘었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눈빛만은 강렬했죠. 눈빛이 굉장히 반항적이었어요.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말도 한 번 못 붙여봤죠, 나보다 어린데도 무서웠거든요. [관계자 외 출입금지]... 말로만 들어봤는데.... 다들 어린데도 키도 크고 호리호리하다는 말 들었을 때... 민서는 그 안에 없을 거라고 나 혼자 확신했었어요. 사칭이겠구나, 싶었죠. 아까 말했듯이, 민서는 그 때 굉장히 살쪘었으니까.“ 웃을 타이밍이 아닌데도 선주린의 말에 풋 웃어버렸다. 저건 처음 듣는 이야기다, 내가 몰랐던 민서의 이야기. 그 자식, 어릴 때 비만아였다는 말이지? 내가 미친듯이 놀려주마.... 아, 앞으로는 만날 수도 없을테니까... 그것도 불가능하겠구나. “글쎄, 내가 왜 그렇게 민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제일그룹 회장님을 자주 뵈서 그런가, 인상이 좋으셨거든요. 우리 아버지도 걱정이셨죠, 회장부부는 돌아가셨고.... 그 하나뿐인 아들은 행방불명이었으니까... 라이벌끼리의 호감이랄까, 뭐 그런거죠. 사실 그 애들이 빨리 잡히길 바랐어요. 진한씨 일거리가 줄어들길 바라서 그런건 아니예요, 검사가 항상 바쁘거나 위험한 거야 당연한 일이니까..... 하지만 민서를 사칭하는 건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죠. 어린 놈들이 해도 너무 하다 싶어서 빨리 잡혀서 벌 받았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근데 김형사님 말 들어보니까... 진짜 있다더군요, 제일그룹 백민서가. 아득했어요, 그 꼬마가... 반항적이고 고독해보이던 그 꼬마가.... 얼마나 힘들고 세상에 분노했으면 그렇게까지 할까... 괜히 내가 아프더라구요.“ “...........” “지금 그 애들을 잃은 시언씨 심정 이해한다고 하면... 나 너무 이기적인가요?” .....이진한.... 인정할게. 니가 나에 대한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여자 정말 멋있어. 너 이 여자 놓치면 후회하게 될 거야. 이 여자 놓치고 날 임신시킨 거, 정말 최고의 죄악이야. “시언씨보다 더 어렸을 때예요, 내가 스무살, 유학간 지 얼마 안됐을 때였죠.” 선주린은 과거 이야기를 회상하는 듯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그저 내 앞의 흰 우유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내 모든 걸 줘도 아깝지 않을 한 남자를 만났어요. 이탈리아 남자였죠. 내가 유학간 곳이 밀라노였으니까. 난 디자인을 배우는 학생이었고, 그 남자는 모델이었어요. 정말 사랑했죠, 동거까지 했으니까.“ 이진한을 놓아달라는 눈물의 애원이나, 이진한을 저주하는 욕이 튀어나올 줄 알았지만 선주린은 내 예상을 빗나가는 이야기들만 늘어놓고 있었다. 자신의 옛사랑 이야기, 진한오빠가 첫사랑이었을 것 같은 이 여자가... 외국인 남자와의 사랑을.... 아니, 그것도 동거까지 했던 비밀같은 과거 이야기를.... “동거를 했는데... 임신이야 어려울까.... 스무살 때 임신을 했었죠.” 맙소사. 어두운 과거따위 없을 것 같은 선주린이.... 과거하나 없는 청순한 여배우 저리가라 하는 매력을 지닌 선주린이... 언론에서도 부족할 것 하나 없는 디자이너로 꼽고있는 선주린이..... “기쁨 반, 두려움 반이었어요. 아버지에게 말해야 하는 건 두려웠지만.... 그래도 곧 결혼할 거니까 문제없을 거라 생각했죠. 근데 그게 내 착각이었어요. 내 임신 사실을 알자마자, 그 남자... 너무도 당당하게 말했죠, 결혼할 마음이 없다, 하지만 애 낳는 건 니 선택이다. 한 여자한테 얽매이는 건 바라지 않는다고... 문화적 차이가 느껴졌지만.... 그냥 그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 다음날 그 남자가 집을 나가버렸더라구요. 알고보니 진짜 여자친구가 있었어요, 같은 모델 일을 하는... 그 여자가 모델학교에 가 있는 동안 나랑 바람핀 것 뿐이었죠. 아니, 바람도 아닐 거예요. 뭐랄까, 처음보는 동양 여자애가 신기했고... 그저 엔조이 상대로 여긴거죠.“ 놀란 척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심장은 미친듯이 두근거린다. “덕분에 스무 살 유학은 실패였죠. 한국에서 아이를 지울 용기는 없었어요. 낙태가 불법인 이탈리아에서, 결국 의사를 찾아냈어요. 속된 말로 야매라고 하죠.“ 선주린은 목이 매이는 듯 잠시 말을 멈췄다. “.......... 수술이.... 잘못됐어요.” “..............” “출혈에... 통증에... 정신이 없었죠. 쓰러지고 또 쓰러지고.....” “................”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어요.” 귀가 멍멍해진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거지? 나는 지금, 나도 모르게 울고있는 선주린을 향해 휴지를 건네고 있다. 선주린을 휴지를 받아들고 억지로 나를 향해 웃어보였다. “바보같죠, 정말?” 그녀의 말에 고개를 젓는다. 아주 단호하게. 이해해요, 나 당신을 이해해요. 상황은 다르지만... 나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사랑따위 하지 않고 일만 하면서 살아왔죠. 첫 번째 유학을 실패한 뒤에... 제대로 두 번째 유학도 다녀왔죠. 거기서 그 모델을 다시 만났어요. 내 패션쇼에 참가하려고 오디션을 보러 왔더라구요, 여자친구랑 같이. 내가 디자이너가 될 거라고는 예상 못했나봐요, 깜짝 놀라더라구요. 당연하죠. 스무살 때 내가 쓰던 이름은 줄리아였고, 디자이너로서의 내 이름은 로렌이었으니까. 브랜드 이름은 ‘이안’이었구요.“ 알고있다. 외국에서도 엄청난 매출을 올리고 있는 그녀의 브랜드, 이안. “임신을 할 수 없는 몸이었지만, 그래도 다시 그를 보고 웃어줬어요.” “패션쇼에서는요?” “떨어뜨렸죠, 당연히.” 그렇게 옛날 이야기를 하며 같이 깔깔 웃어버리는 우리 두 여자. 속은 둘 다 울고있을텐데, 그냥 웃어버린다. 너무 아파서, 즐겁기라도 해보려고. “한국에 와서 진한씨를 만나고.... 사랑을 하고, 약혼을 했죠. 하지만 나, 시언씨를 보자마자 알았어요. 처음본 게 공사장 식당에서였죠. 나한테 물을 퍼부을 때.... 그 때 그 눈빛이... 나랑 비슷해보여서. 내가 그 모델에게 배신당하고 낙태를 했을때의 눈빛이랑 비슷해보여서... 금방 알았어요. 그래도 포기를 못했죠. 진한씨는... 내가 임신을 못하는 걸 알아요. 그걸 알고도 결혼해주니.... 난 어떤 희생이라도 치르고. 그와 결혼해야만 했어요.“ 이해한다. 이제야 이해된다. 나를 보고도 그저 웃어야만 했던 그녀의 입장이. “진한씨를.... 사랑하나요, 시언씨?” 그녀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젓는다. 지금 내 눈에도 진심이 담겨있으리라. “나,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한 꼬맹이를 사랑하게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진한오빠한테는 아무 관심도, 느낌도, 애정도 남아있지 않아요. 지금 진한오빠의 아이를 품고 있으면서도, 나 그 애 포기 못해요. 지금 굉장히 무섭고 두려운데....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겠는데.... 그 애들을 위해서라도 이 애는 낳고 싶은데... 나 정말 모르겠어요.“ 나는 숨겨왔던 내 진심을 선주린에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리고 선주린은........... 내 인생을 바꿀 한마디를 꺼내놓는다. “그 아이를..... 나에게 주세요, 시언씨.” 111. 구세주 [진한씨의 허락은 내가 받아낼 수 있어요. 아니, 진한씨와 결혼하지 못하게 된다해도 나 시언씨의 아이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게요. 내가 결혼하려고 했던 건.... 아이를 입양하기 위해서였어요. 디자이너로서 성공하고픈 내 꿈은 이뤘으니까... 이제 하나 남은 꿈, 가정을.... 아니, 아이를 얻고 싶었어요. 혼자서는 입양이 안되더라구요, 그래서 가족을 이루려고 했는데.... 시언씨의 아이.... 내가 키울게요, 잘할 수 있어요. 시언씨가 언제든 보러와도 상관없어요, 아니, 시언씨가 그 애의 엄마라고 직접 밝혀도 상관없어요. 그냥 내가... 내 손으로 아이를 키울 수 있게만 해줘요. 입양할 생각도 했던 난데... 진한씨의 아이라면 난 더 바랄 것 없어요. 시언씨도 미혼모로서 지내기 힘들잖아요, 우리나라에서는 힘들잖아요. 지금은 그 아이들도 감옥으로, 외국으로 가버려서 시언씨를 지켜주지 못해요. 내가 지켜줄게요, 그러니까.... 아이만.... 아이만 주세요. 낳고는 싶은데 키울 수 없는 게 시언씨의 심정 아닌가요? 그러니까 낳기만 하세요, 내가 키울게요.] 선주린의 간절한 애원이 아직도 내 귀에 맴돈다. 선주린과 헤어져 병원에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기대어 고민에 빠져버렸다.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는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온이는 그저 불평에 불평을 더하여 궁시렁 대는 중. “진짜 그 새끼 재수없어, 지가 뭔데 칼을 휘둘러? 언니 진짜 찔린 거 아니지? 박준휘라고? 성격 파탄자같아, 정말. 침대 시트 찢어졌다고 간호사가 지랄하잖아. 내가 찢었냐고, 왜 나한테 그러는데!! 그 성격 파탄자 앞에서는 설설 기어가더만. 더 짜증나는 건 이열음 앞에서는 얼굴이 벌개지는거 있지, 그 간호사?“ 골치아픈 건 집어치우기로 했는지... 내가 어디 다녀왔는지, 무얼하고 왔는지는 더 이상 묻지 않는 이온이. [제안이.... 하나 있어요.] 선주린 앞에서.... 나는 경직된 표정으로 한마디를 건냈다. 선주린은 뭐든지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난 말했다. [그 애들을.... 살려주세요.] 이온이가 틀어놓은 티비에서는.... 아이를 빼앗긴 친모가 미친듯이 울부짖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친부에게 끌려간 아이는.... 자신을 노려보는 계모를 보며 벌벌 떨고 있다. 선주린은 아마 저런 나쁜 계모는 아닐 거야, 오히려 나보다 더 좋을걸. 미혼모가 될 나와는 달리. 선주린은 이진한을 용서하고 가정을 이룰거야. 앞으로 먹고 살 일이 걱정인 나와는 달리, 선주린은 이미 수백억을 거느린 재벌이야. 성질도 더럽고 나쁜 나와는 달리, 선주린은 착하고 온화하고 천사같아. 하는 것마다 실수 투성이인 나와는 달리, 선주린은 살림도 잘하는 천상 여자야.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이를 옆에 두고 그들을 생각할 나와는 달리, 선주린은 모든 것을 다 제쳐두고 아이만을 생각할거야. 휴인아.... 내가 너희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 뭔지, 난 생각하고 또 생각해. [민서가, 위협을 받고 있어요.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여자애가 민서예요. 잡힐까봐 그동안 여장하고 있었던 거래요. 재벌아들의 존재를 숨겨야 했대요. 회사를 망친 그 작자들이.... 민서 부모님에 이어 민서까지 노리고 있대요. 외국으로 유학 보낸다고 해놓고서... 외국에 킬러들을 대기시켜 놓고있나봐요. 주동자인 휴인이 말고 환영이랑 비원이도 잡혀갔어요. 그 애들도 감옥에 넣는대요. 세 명은 감옥에 갇힐거고, 민서는 죽을 거예요.] 조용한 카페에서, 난 흐느끼며 울고 또 울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선주린의 표정은 심각하고도 진지했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민서가 유학가기 전에 그에게 경호원을 붙이겠어요. 킬러들의 숫자가 몇인지 모르겠지만 제일그룹 주주들의 숫자가 한 둘이 아니니, 재산 갈라먹기 바쁠테고, 그러다보면 재벌아들의 제거라는 목표에는 신경을 못쓰기 쉽죠. 그들이 고용한 킬러라고 해봤자... 10명 안팎이겠죠. 민서가 모르게. 그를 지키는 보디가드 50명을 붙이겠어요.] 제일그룹이 무너진 후, 한국을 좌지우지하는 대기업은 선주린의 아버지 회사뿐. 그리고 선주린은 그 기업을 물려받을 유일한 여성 후계자였다. 디자이너라는 자신의 직업만으로도 이미 수백억을 벌어들였으면서도. 그녀의 통큰 계획은..... 나를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부족하면, 더 보충하도록 할게요. 그리고... 주동자는 무리겠지만 그를 제외한 나머지 두 명은 감옥에서 나올 수 있도록, 신경쓸게요. 그것도 나한테 맡겨줘요. 대한민국에서, 돈으로 안 되는 게 어딨겠어요. 알겠어요, 시언씨? 아이를 위해서라면 나, 무슨 짓이든 해요. 시언씨와 ‘관계자 외 출입금지’가 없으면.... 아이도 없었을 거예요.] 절망 속에 빠져있던 나와 다르게 선주린은 정확하게 판단하고 신중하게 해결했다. 난 무기력하게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선주린은 그것에 대항할 힘이 있었어. 내가 아이를 선주린에게 맡기면, 휴인이의 반응은 어떨까. 잘했다고 할까, 아니면.... 누나 왜 그랬냐면서 화를 낼까. 근데 휴인아, 내 혼자 힘으로는.... 이 아이를 낳기조차 어려워. [대신 부탁이 있어요, 시언씨.] 난... 하루하루가 지옥이야. [아기를 해치려는 존재가 너무 많아요. 진한씨도 그렇고, 시언씨의 가족도. 진한씨는 아이가 자신의 약점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볼 때마다 시언씨가 생각날 거고, 원치 않던 아이라는 경계심만 생기겠죠. 차라리 내가 준비가 되고, 진한씨가 준비가 됐을 때, 그 때 입양을 하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시언씨 뱃속에 있는 아기를 지우려고만 하는 거겠죠. 시언씨 가족도 마찬가지예요. 시언씨의 장래를 생각하는 마음에 그런 거겠지만, 시언씨의 미래를 위해 어떻게든 아이를 지우려고 할 거예요.] ..............나 안간힘을 다해 너희들을 지키려고 하고 있어. 전혀 앞이 보이지 않던 암흑에, 나를....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선주린이란 빛이 나타났어. 나, 그 빛을 잡아야 해. [시언씨, 아이를 낳을 때까지.... 나와 함께 지내요.] 이 방법이 아니면, 난 너희들을... 그리고 내 아이를... 영원히 잃을 지도 몰라. 키우는 게 문제가 아니라, 아예 못 낳을 지도 몰라. [아이를 낳기 위한 준비, 병원 예약, 건강 검진, 모두 내가 책임집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걱정도 하지 말아요. 모두 내가 알아서 할게요. 대신, 안전을 위해서 아이를 낳기 전에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와 만나선 안돼요. 가족들과, 진한씨와도.... 나를 제외한 그 누구와도 접촉하면 안 돼요. 그것만 약속해준다면, 내가 무엇이든 해주겠어요.] 휴인아, 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어디에 있고, 뭘 하고 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난 고민중인데, 넌 지금 뭘하고 있지? 민서가 진실을 말했어, 넌 지금 그걸 알고나 있을까? [시언씨, 오늘 충분히 생각한 뒤에... 나에게 연락을 주세요.] 휴인아, 나는..... 겁쟁이가 되기 싫었어. 물러서기도, 물러설수도 없어. 지금 여기서 나는 뭐든 결정을 내려야만 해. 너희들이 나에게 바라는 것,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 난 움직여야 해. 더 이상 울고, 절망하고, 쓰러질 시간이 없어. 고민의 여지도 없는거야, 사실은. 나 아직 겁나서 망설이고 있는 것 뿐이야. 근데 휴인아, 나 이제 더 이상 망설일 시간도 없어. 답은 이미 정해져 있어. 너희들을 지킬게. 준휘를 향해 분노를 내뿜다가 어느새 지쳐 자고있는 이온이의 얼굴이 보인다. 기지배, 내 동생이지만 언제봐도 이쁘다니까. 이온이의 얼굴을 한 번 쓰다듬어 주고나서 복도로 나갔다. 손에 쥔 핸드폰을 한 번 바라보고..... 폴더를 열고.... 오늘 새로 저장한 번호를 누른다. 통화음을 들으며 초조함에 손톱을 뜯고 있으면.... - 여보세요? 선주린.... 아니, 주린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를 대신해.... 아니, [관계자 외 출입금지]에게도 구세주가 되어줄........ 새로운 구원자의 목소리가. “언니..... 나 지금 병원이예요.” - .............. “데리러 와줄 수.... 있어요?” - 시언씨............ “나를.... 우리를........ ” - .............. “구원해줄 수 있어요?” 휴인아, 난 결정했어. 이 선택이 잘못되었다 해도, 니가 그렇게 말해도, 난 후회하지 않아. 너희들을 살리기 위해, 나에겐 이 방법밖에 존재하지 않았어. 이 선택으로 인해 한동안 너희들을 못 본다고 해도, 난 견뎌낼 수 있어. 너희들을 위해서니까, 난 견딜 수 있어. 너도 그렇지? 환영이도, 민서도, 비원이도 그럴 거야. 우린 다시 만나기 위해서, 잠시 한 발자국씩 물러서는 것 뿐이야. 그러니까 걱정하지도 말고, 오해하지도 말고... 나를 믿어. 그동안 한번도 믿음직한 누나가 된 적은 없었지만, 또 속는 셈 치고 그냥 한 번만 믿어봐. 언제나처럼 너희들은 또 나한테 웃어줄테니까, 그러니까 이번에도 한번만 믿어봐. 지켜줄게. 내가 지켜줄게. 나 아니면 못해. [관계자 외 출입금지] 나를 믿어. 내가 지켜줄게. “몰래 사진 찍어오라고 부탁했어. 볼래?” 주린언니의 말에 쏜살같이 언니의 옆으로 다가가는 나. 하긴, 말이 쏜살같이지. 벌써 임신 7개월차를 자랑하고 있는 내 걸음걸이는 오리마냥 뒤뚱뒤뚱. 언니가 웃으며 마우스를 든 손을 움직이고, 나는 모니터 화면을 주의깊게 바라본다. “먼저, 환영이 사진.” 주린언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컴퓨터 모니터 화면에 가득차는 환영이의 사진. 환영이 이 놈은, 주린언니에 의해 풀려나자마자 생계에 뛰어들었다. 왜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벌까 생각해보지 않아도 이유는 뻔하다. 유인이, 환희에 이어 지금은 감옥에 들어간 휴인이의 뒷바라지까지 하고 있기 때문.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예전에 하고 있는 일과 똑같다. 본인은 스트리트 파이터라고 우기는 일, 길에서 맞아주는 일. 주린언니가 파파라치나 탐정한테 부탁해서 놈들 사진을 찍어오는 날이면... 언제나 환영이 사진은 얻어 터지고 있는 사진뿐이다. 덕분에 항상 내 마음은 무거워진다. “다음은, 비원이 사진.” 맞고있는 환영이 사진을 몇 장 보고나면, 그 다음엔 비원이 차례. 이 놈은 보란듯이 다시 범죄를 시작했다. 아직도 호스트바 에이스로 활동 중. 비원이 사진은 모두 호스트바에 들어가거나, 호스트바에서 나오는 사진 뿐. 그의 표정은 예전보다 더욱 험악하고 냉정하다. 예전, 우리가 함께 했던 그 집엔, 이제 환영이와 비원이 둘만이 살고있다. 환영이와 비원이의 사진을 다 보고나면, 이젠 그나마 나를 웃게 만드는 사진이 나온다. 바로 영국에 가 있는 민서의 사진. 주린언니와 내가 한 약속 덕택에, 민서는 아직까지 영국에서 잘만 살고있다. 민서는 모르겠지, 자기가 어떻게 이렇게 오래 잘 살아가고 있는지. 주린언니가 고용한 50명의 보디가드가 자신을 지켜주고 있다고는 생각도 못할거야. 이렇게 파파라치 사진이 찍히는 것도 상상 못하겠지. 영국 거리를 걸어다니며 커피 마시는 사진, 벤치에 앉아 담배피는 사진, 미니스커트 입은 외국여자를 바라보는 사진.... 응? 뭐야, 이거!! 이 새끼, 나 좋아한다 그래놓고 지금 그건 다 거짓말이었던 거냐? 지금 이 음흉한 눈길은 뭐냐, 오호라, 그래 지금 너도 사내라 이거냐? 머리에 피도 안 마른게 지금 여자나 밝히고!! “풋, 내가 예전에 민서를 잘못봤나봐, 은근히 푼수라니까.” 사진을 같이 보던 주린언니가 웃는다. 그렇다. 언니의 옛기억에서 고독하고 반항적이었던 비만아 백민서는 지워진지 오래. 지금 언니의 머릿속에 입력된 백민서는 겉모습만 멀쩡한 푼수에다 병신. "보디가드들이 일은 확실하게 하고있나봐, 파파라치도 이 사진찍다가 걸렸다지 뭐야. 보디가드 중에 한 명이 이 파파라치를 낚아채고 정체가 뭐냐고 물어봤대.“ 언니의 설명을 듣고있던 나도 미소를 짓는다. 사진 곳곳에 퍼져있는 보디가드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민서가 보호받고 있는 걸. 하지만 그걸 모르는 민서 넌 죽음의 공포에 위협받고 있겠지. 이 사진이 찍히는 순간에도,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라올지 몰라 겁먹고 있을 거야. .....민서는 겉으로는 풍족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공포에 타 들어가고.... 환영이와 비원이는 둘이 같이 있지만, 힘겨운 생활을 하루하루 지속해나가느라 힘들거고... “휴인이 사진은 구할 수가 없어.... 제일 보고싶을 텐데.” 그리고....... 감옥, 그것도 독방에 갇힌 휴인이는.... 육체적으로나, 심적으로나... 다 힘들겠지. 다른 아이들이 어떻게 됐는지도 모를테니, 니가 제일 힘들 거야. 널 못본 지 벌써 7개월이 됐어, 휴인아. 너희들 다 이 못난 누나 생각을 하고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걱정은 하지마. 나 주린언니랑 잘 지내고 있고, 뱃속의 아이도 건강하대. 의사선생님이 그러시더라, 아기 옷은 파란색을 준비하라고. 남자아이란 뜻이겠지? 나 이 아이에게, 너희들의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 너는 버림받은 게 아니라, 더 사랑받고 자라는 거라고, 말해줄 수 있을까? 앞으로 주린언니가 키우게 될 이 아이에게 민서가 지어준 ‘정백강’이라는 이름을 지어줄 순 없겠지만 나, 태어난 아이를 보고 ‘백강아’라고 한 번은 불러볼 수 있을까? 아니, 아니.... 아이가 태어나면, 나 이제 너희들에게로 달려갈 수 있을까? 112. 이안 “다녀올게, 아마 일찍 올 거야.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현관문에서 주린언니를 배웅하는 나와 나를 향해 다정하게 묻는 언니. 주린언니가 남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나는 진한오빠와 휴인이를 모두 버리고 주린언니를 택했을 지도 모른다. 아니, 아니- 그래도 역시 휴인일까. 눈부신 미소 한 번에 난 금세 휴인이 쪽으로 돌아서버리겠지. 반짝반짝 빛나는 그런 사람.... 흔치 않으니까. “.......산딸기... 산딸기 사다줘, 언니.” 산딸기... 내가 아플 때 휴인이가 사다준 과일이다. 효심깊은 아들이 한겨울에 산딸기를 구해오자 아픈 어머니의 병이 씻은듯이 나았다는 전래동화를 접한 휴인이는 그 이야기에 감동을 받아 나에게 산딸기를 사다줬었지.... 나 원래 산딸기 싫어하는데 갑자기 먹고 싶어진다. 임신하면 평소 멀리하던 게 먹고 싶어진다는데... 그 탓일까, 아니면 단순히.. 휴인이가 보고싶어서? “산딸기? 알았어, 사다줄게.” 잠시 놀란듯 하더니 이내 활짝 웃어보이는 주린언니. 순간, 갑자기 찾아온 어지럼증에 주린언니의 얼굴이 흔들렸다. 덕분에 난 휘청거렸고, 주린언니가 급히 날 받쳐주었다. “뭐야, 아파? 괜찮은 거야?” “아, 나 괜찮아, 언니.... 그냥 잠시 어지러운 거 뿐이.....” 그 때, 배에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설마 벌써? 아니야, 말도 안돼. 아직 7개월이야, 아직 7개월밖에 안됐단 말이야...... 주린언니의 옷을 움켜쥐었다. 참을 수 없는 진통이 나를 찾아오고 있었다. “병원...... 언니, 병원에.... 빨리.... 병원에.....” “어떡해.... 기, 기다려, 시언아. 빨리 차 빼올게. 잠시만 기다려!!” 언니가 급히 밖으로 뛰쳐나가고, 난 통증을 이기지 못해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휴인아, 왜 이럴 때 생각나는 게 니 얼굴 뿐인걸까. 날 지켜줘, 내가 이겨낼 수 있게 도와줘, 휴인아..... 어떤 정신을 어떻게 병원에 온건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나는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지는 진통에 쓰러질 지경이었고, 곧 분만실로 실려 들어갔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마다 그들의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 눈 앞에 너희들이 있는 거 같아....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데 왜 잡히지가 않는 거야? 제발, 나를 도와줘....... 이미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의사들과 간호사들의 외침도 더 이상 귀에 들리지 않는다. 내 손이야, 내 손으로 너희들을 그 곳으로 보낸 거야. 날 용서할 수 있어? 보고 싶어 미치겠어. 너희들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고통스러움이 극에 달해 비명이 나오려 한다. 그러나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흔히 다른 산모들의 외침처럼 외마디 비명이나 ‘엄마’라는 소리가 아닌- ‘휴인아’였다. 지금 니가 내 옆에서 내 손을 잡아주고 있다면, 나 지금 눈물을 흘리지 않을까? 우리가 뭘 잘못했지? 뭘 잘못했길래 너는 차가운 독방에 있는 거야? 왜 내 옆에서, 나를 향해 웃어주지 못하는 거지? 뭐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지금 이 순간, 내가 아이를 낳고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주린 언니 하나 뿐. 아이의 아빠인 진한오빠도, 아부지도, 이온이도, 관계자 외 출입금지도, 해커도... 모두 이 아기가 태어나는 줄 모르고 있겠지. 난.... 끝까지 지켜냈고, 지금 이 아이를 세상으로 내보내고 있어. 잘 봐, 다들 똑똑히 봐 줘요.... 내가 이 아이를 위해 못할 짓은 없다는 걸 보여주지... 밤마다 침대를 적실만큼 울었어, 휴인이가 보고싶고, 민서가 걱정돼서. 하지만 그 애들에게도 소중한 이 아기를 지키기위해 나... 견디고 또 견뎠어... 엄마... 하늘에서 보고있어요? 나 잘하고 있는 거야? 엄마라면 지금의 이런 나한테 무슨 말을 해줄 거 같아요? 나도 모르게 내 눈에서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아픔 때문은 아니었다. 이 순간이 후회스럽고 원망스러워서도 아니었다. 어디서부터 꼬이게 된 인생인지, 저주하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태어나기도 전에 엄마의 품에 안기지 못하는 아기에서 미안해서, 제대로 태어나게 해주지도 못하고 7개월만에 이렇게 세상에 내보내는 게 미안해서, 원래는 아이의 탄생을 제일 처음 봐야 할 [관계자 외 출입금지]에게 미안해서, 그래서... 눈물이 났다. 그 때, 내 귀에 선명히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아기의 울음소리였다. 순간, 모든 게 다 끝났다는 느낌과 함께 나는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가까스로 잡고 있었던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 미안.... 미안해, 아기야. 처음 널 보고, 널 안아줄 수 없는 엄마라서 정말 미안해. 뱃 속에 있었을 때, 너무 힘들게 해서 미안해. 니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도대체 그 누가 알 수 있을까? 이름 한 번 제대로 불러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정시언... 나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지? 아기.... 맞아, 내 아이가 태어났어. 머릿속에 아이의 생각이 퍼뜩 떠오르자마자 더 이상 지체할 것 없이 눈을 떴다. 게슴츠레하게 떠진 눈의 초점이 맞지않아 여러번 눈을 깜빡거려야 했다. 내가 누워있던 침대에 손을 짚고 윗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몸이 마음을 듣지 않았다. 그 때 마침 방문을 열고 주린언니가 들어왔다. “시언아!! 언제 깼어?” “언니....” “누워있어, 벌써부터 움직이면 몸에 안 좋아.” “....... 아기.... 아기는.........” “작게 태어나긴 했지만 몸에 이상은 없대. 칠삭둥이라서 바로 데려가는 건 무리고. 한 달 정도는 병원 인큐베이터 안에 있어야 할 것 같대. 잘생긴 왕자님이야.“ 나보다 더 기쁜듯이... 활짝 웃고있는 주린언니. “.......보고왔어?” “.... 응, 지금 보고 오는 길이야. 시언이 너도 보러갈래? 부축해줄까?” “...... 난.... 안 볼 거야.... 그 애기 안 볼 거야, 난.” “시언아..........” 주린언니가 놀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난 참아야했다. 아이를 내 두 눈으로 보고, 내 두 손으로 만지게 되면, 난 그 아이를 절대 주린언니에게 보낼 수 없을 테니까. 가족도, [관계자 외 출입금지]도 모두 잊고... 아이와 나 둘이서만 멀리 도망치고 싶어질 테니까.... 그 어떤 사람도 아이와 나를 건드릴 수 없을 그 어딘가로 가고 싶어질테니까... “괜찮으면 됐어, 그럼 된 거야, 난.....” “.......... 시언아......” “진한오빠 불러줘, 언니. 우리 아버지도.” "............" "이제 그 아기.... 언니랑 진한오빠 아이야. 이제 내가 할 일 다 한거야... 내가 낳았으니까... 언니가 잘 키워줘. 마지막 부탁이야. 정말 염치없고 힘들 거 아는데.... 언니 평생을 바칠 일이라는 거 아는데... 그래도 부탁이야, 내 아기.... 아니, 이제 언니 아기... 잘 키워줘.“ 울먹이며 말을 잇는 내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내게로 다가와 날 안아주는 주린언니. “아이의 이름을 정했어.” “..............” “안..... 이안. 내 브랜드 이름이지. 내 모든걸 걸고 지켜온 브랜드야. ..... 이제, 내 일생을 걸고 만든 브랜드보다, 이 아이가 나에게 더욱 소중해. 시언이 넌 나한테,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을 준 거야. 내 모든 걸 걸고 그 아이를 지킬게.“ 정백강이라는 투박한 이름보다... 세련되고 멋진 이름, 이 안. 하지만... 왜 나는 백강이란 이름을 불러주지 못한게 이렇게 슬픈걸까... 왜-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이렇게 아파오는 걸까. “시언아!!!!” 병원 전체가 울릴만큼 큰 소리로 병실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아부지. 내가 없어진 7개월동안, 아부지의 얼굴은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걱정많이 하셨겠지, 내가 실종된 줄로만 알고계셨을 거다. 아니, 가출했다고 생각 하셨을까? 아부지가 들어온 후, 그 뒤를 이어 급히 병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바로 진한오빠. 주린언니는 아부지나 진한오빠가 나한테 해를 끼칠까 두려웠는지 단호한 표정으로 내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지금껏 제가 꾸민 일이예요. 시언씨는 아무 잘못 없어요. 내가... 시언씨의 아이를 키우고 싶다고 했어요. 그 때문에 모든 뒷바라지를 했구요. 아이에게 위험이 될 일을 피하고 싶어서... 그 동안 제 집에서 생활하게 했어요.“ 침착하게 말을 잇는 주린언니. “........ 기어이....” 절망적인 말투로 한마디를 내뱉는 진한오빠. “그럼 주린씨, 내가 그동안 집에 가겠다고 해도 만나주지 않았던 게!!” “진한씨가 아이를 거부한다면, 난 진한씨와 결혼할 수 없어요.” “.............” “누가 뭐래도 진한씨의 아이예요.” 진한오빠는 어이없다는 듯 주린언니를 바라보더니, 잠시 내게 시선을 보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릴 뿐. “정말 미안하다, 시언아.” 진한오빠의 눈에도 내가 안쓰러워 보이긴 했던 모양이다. 오빠에게서 미안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 동안의 원망이나 죄책감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사과를 들어서가 아니라, 그 원망조차 너무나 보잘 것 없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진한오빠는 주린언니와 둘이 할 말이 있다는 듯, 언니의 손목을 잡고 병실 밖으로 나가버린다. 그래도 난 알고있어. 진한오빠는 주린언니의 의지와 고집을 결코 이기지 못한다. 주린언니는 아이를 포기할 수 없을 것이고, 진한오빠는 주린언니를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병실에 남은 건 아부지와 나, 단 둘 뿐. “미안해요, 아부지....” “............” 무표정한 얼굴로, 아니, 조금은 슬픈 얼굴로 내 얼굴을 바라보는 아부지. “내가...... 아니, 난요..... 낳을 수밖에 없었어요.” 간신히 멈춘 눈물이... 아부지의 얼굴을 보자마자 다시 흘러나왔다. 정의롭고 투박한 아부지 성격에 지금 나를 패버리실 지도 모른다. 아예 족보에서 빼버리겠다고 진지하게 상담을 요청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단 한마디의 말 없이 나를 안아주시는 아부지. 덕분에 눈물이 마구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아부지......” 무서웠어요, 7개월동안.... 하루하루가 암흑 같아서... 내가 잘해낼 수 있을까, 복잡한 생각이 너무나 많아져서... 나.... 내가 원하는 걸 이뤘는데, 그런데요, 아부지.... 이제... 뭘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 정말 하나도 모르겠어요.... 그 애들.... 그 애들을 찾아주세요..... 보고싶어서.... 너무 보고싶어서... 심장이 멎을 것 같으니까... 제발.... 휴인이를, 환영이를, 민서를, 비원이를..... 보여주세요..... 113. 최후의 계획 (작가시점) “죽이려면.... 빨리 죽이던가.....” 손에 쥔 커피잔을 쓰레기통으로 휙 던져넣으며 무심한 투로 중얼대는 민서. 강제로 회사간부들의 손에 이끌려 유학오게 된지 6개월째로 접어들었다. 혼자서 수업을 거부한 기간도 6개월. 제대로 수업을 다 들은 날은 6개월동안 총 15일 정도에 불과했다.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다거나, 말을 못 알아듣는다거나 하는 하찮은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민서는 어릴 때부터의 교육으로 영어도 완벽히 할 수 있는 상태고, 경영학에 대한 지식도 이미 머릿속에 다 입력되어 있었으므로. 그는 그저 모든 일에 흥미를 잃었을 뿐이다. 아무리 엄한 기숙학교라도 민서의 방황은 눈 감아줘야만 했다. 제일그룹 주주들은 유학이란 명목으로 민서를 영국에 붙잡아둬야만 했으니까. 그랬기에 주주들은 민서의 퇴학을 막기위해 학교 측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 있었다. 물론 민서를 죽이는 게 가장 편한 일이겠지만 주주들이 고용한 킬러는 모두 다 속수무책. 저격이라도 할라치면 순식간에 건장한 사내 스무 명 정도가 민서의 앞을 가로막았고, 바로 앞에서 처리하려고 마음먹으면 검은 정장의 사내들이 킬러들의 팔을 비틀어 총을 빼앗곤 했다. 회사의 주주들은 그저 민서를 영국에 더 오래 잡아두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주주들과 민서는 모를 것이다. 민서의 주위를 24시간 맴도는 보디가드들을 주린이 고용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경호를 부탁한 사람이 시언이라는 사실도. 민서는 눈치가 빠른 편이지만 유학온 뒤에는 모든 일에 무심한 상태였다. 덕분에 자신 주변을 맴도는 경호원들이 있다는 것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공원벤치에 나른하게 앉아있는 민서 앞으로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영국 여성이 지나갔다. 큰 키에 날씬한 몸매를 자랑이라도 하듯이. 민서는 그 여자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고개를 뒤로 젖혀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시언도 저런 거 입혀놓으면 이쁘려나.....” 상상해본다, 시언이 미니스커트 입은 모습을. “씨발, 괜히 생각했네, 그 몸매에 미니 입히면....”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까만색 교복 위에 걸쳐진 넥타이가 휘날렸다. 민서는 걸리적거리는 넥타이를 쭉 풀며 한 마디 덧붙인다. “그 몸매에 미니 입히면 개나 소나 다 쳐다볼테니까 안되지-” 시언의 얼굴을 생각하며 한번 씩 웃는 민서. 민서가 한국을 떠난 건 시언이 임신 1개월째였을 때다. 그러니까... 지금은 임신 7개월째로 접어들었을 터이다. 잘 지내는 건지, 아기는 지켜낸 건지, 행복한 건지.... 멀리서 사진기를 들고 있는 파파라치와 그를 말리는 듯한 한 시민의 모습이 보였다. 아까 미니스커트 입은 여자 찍으려다 들킨 파파라치인가, 라고 생각하며 민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죽이려면 더 일찍 자신을 죽였을 터. 주주들이 고용한 킬러는 만만한 상대들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난 지금도 민서는 살아있었다. 그것은 킬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닐까. 6개월동안 심한 정신적 고통에 미칠 것만 같았다. 잘 때마다 가위에 눌렸고, 기숙사 방에서 일주일간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적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피를 말려 죽이겠다는 건가, 라고 생각하며 회사주주들을 증오하고 저주했다. 그러나, 죽겠다는 각오로 매일 범위를 넓혀 돌아다녀 보아도 총알은 커녕 비비탄도 날아오지 않았다. 계획한 것을 실행으로 옮기려면 바로 지금이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처음에는 꿈으로만 꿨던 사실이지만 이제는 점점 현실성있게 느껴지는 그의 계획- 민서는 손에 땀이 차는 것을 느끼며 주머니에 든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복잡한 절차 끝에- 국제전화 연결. - 왜 날마다 전화질이야? 전화를 하자마자 들리는 음성은... 비원의 목소리. “전화해줘도 지랄이야, 통화 좀 맘껏 하자. 핸드폰 요금 내가 내는 것도 아닌데 좀 많이 써야 덜 억울하지. 이거 회사 주주들이 돈 대신 내준단말야. 일단은 그 쪽 인간들이 내 보호자니까.“ - 도청하는 거 아니냐? “그래서 보안시스템 걸어놨어.” - 안 죽고 잘 살아있네, 그래도.... 비원은 말 끝을 흐렸다. 무심한 척 말해도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한 가득 담겨있었다. “나도 남자야, 신비원.” - 알아, 그래서 너 여장했을 때 징그러웠어. “걱정마, 난 여기서 안 죽어.” - ........... “니 목숨 담보로 내가 살아있을 바엔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는데 죽지도 않네. 그래서 잘 지내고 있어. 걱정하지마.“ - 안 죽을 거 같았어. 그래서 내가 대신 가려고 했던 거야. 구질구질하게 안 살고 좀 호화롭게 살아보려고. 미쳤냐? 니가 뭐라고 내가 내 목숨을 내던지냐? 사실 너 위해주는 척하면서 나 혼자 잘 살아보려고 역할 바꾸자 그런거야. 진지한 척 하며 진심인 듯 말하지만 민서는 알고있다. 민서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 일부러 장난을 걸어주는 비원의 본심을. “환영이는?” - 일 나갔어. 이제 강휴인까지 책임져야 되니까. 그 새끼한테 드는 돈이 장난이 아니야. 생활필수품 넣어주려니까 우리 등골이 빠진다. “너는 저녁 근무야?” - 어, 자고 있었어. “미안해.... 나 지금 빈털터리라....너랑 환영이 도와줄 수가 없네....” - 니가 언젠 부자였냐. 바라지도 않아. “.............” - 진짜 환영이랑은 통화 안해봐도 되겠어? 그 새끼 온종일 니 걱정 뿐이야. 니가 비밀로 하래서 입 다물고 있지만... 경찰에서 풀려난 이후로 지환영 우울증 걸리기 바로 직전이란 말야. “내가 여기서 잘 살아있는 거, 많은 사람들이 알면 골치아파. 일단은 너만 알고 있어. 지환영 새끼, 맘 여려서 내가 살아있는 거 알아도 계속 걱정만 해댈거야.“ 무섭고 공포스러운 순간에, 언젠가부터 민서는 비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함께 있을 땐 그렇게 많이 싸워댔는데, 돌이켜보니 민서가 기댈 수 있는 공간은 오직 비원의 품 뿐이었다. “강휴인은 잘 있어?” 휴인이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민서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하나뿐인 리더. 지금쯤 자신의 죄값을 외로움으로 치르고 있을 강휴인. 천국을 만드는 데 실패하고, 지금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져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지. 햇살보다 눈부신 미소를 지닌 그가 과연 거기서 잘 견뎌낼 수 있을지. - 환영이만 겨우 만나. 내가 가도 잘 안 만나주더라. 6개월동안 나도 세 번 봤나. 환영이가 매주 가니까 너무 걱정마. 갈 때마다 그 새끼도 니 걱정한대. 잡혀가서 뒤진 건 아닌지 초조해한다더라. 애처럼 보여도 우리 넷 중에서 제일 의지강하고 참을성 있는 새끼야. 더러운 꼴, 비참한 꼴.... 뭐든 다 당해본 새끼고. 어떤 상황이든지 잘 이겨낼거야. “독방이잖아, 그 미친새끼.... 혼자 얼마나!!” - 너도 혼자잖아. “.............” - 강휴인 걱정 그만하고, 너나 잘해. 언제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걸까. 민서는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쉰다. “정시언.... 은?” 망설이고 망설이다 꺼낸 한 마디. 예상대로 비원도 반대편에서 움찔거리는 게 느껴진다. 지금껏 시언의 이야기는 그들 사이에서도 금기시 되어왔으니까. - 우리가 잡혀간 뒤로는... 아무 소식도 없어. 시언을 마지막을 본 사람은 민서 뿐이다. 민서는 자신이 남자락 밝힌 이가 시언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경찰 관계자에 의해 우연히 밝혀졌고, 시언도 그 사실을 아버지를 통해 접했을 거라고만 비원에게 전해줬을 뿐. 민서가 이름지어준 아기, 백강이는... 잘 있는걸까. “집에.... 갇혀있는걸까?” - 아니, 알 수가 없어. “해커한테 추적해보라고 해 봐.” - 모든 정보가 의도적으로 차단되어있어.... 검찰이 한 짓이 아닌거 같아. “...........위험한 거... 아니야?” - 그건 아닐거야. 집에서도 실종신고를 했는데, 실종신고도 최종단계까지 가서는 접수가 안되는 모양이야. “.... 실종신고까지 갔다고? 집에서? 그럼 심각한 거잖아!!! 납치된 건 아니겠지? 이진한이나!!!!“ - 해커 통해서 알아보고 있어. 니가 날뛸까봐 지금껏 일부러 숨긴거야. 걱정하지마, 해커놈들이 이름을 숨긴 채로 정기적으로 메일을 보내면 수신확인은 항상 되어있으니까. 자기 의지로 숨어있는 거 같아. 제대로 돌아가는 일이 단 하나도 없었다. 민서는 지금에야 말로 계획을 실행해야 할 때라고 느꼈다. “정시언이 메일은 확인한다고 했지.... 메일 주소 나한테 알려줘.” - 너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쓸데없는 짓 하지말고 그냥 얌전히... “정시언도 [관계자 외 출입금지] 일원이야. 니가 해커통해서 정시언 찾는 이유도 그거잖아. 신경 안쓰는 척 해도 결국 뒤로는 미친듯이 찾고있잖아. 내 말 틀려?“ -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일 벌이지마..... “해커를 나에게 붙여줘. 선주린의 연락처도 필요해.” - 백민서.... 민서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확신에 차 있었다. “잘들어, 신비원. 난 한국으로 간다.” - 백민서!!!! “약속할게. 나 절대.... 낯선땅에서는 죽지 않아.” -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인거야, 어쩔 작정으로!!! “준비가 되는대로 한국으로 갈 거야. 정시언도 내가 찾아낸다. 휴인이도 만나야 하고, 환영이도 한국에 가서 직접 봐야겠어.“ - ............ “니 명령이면 당분간 해커를 내 쪽으로 돌려줄 수 있을 거야. 선주린도... 예전을 기억한다면 나한테 도움을 줄 거야. 한국에 들어가기 전부터, 한국을 들어간 후에도.... 그들의 도움이 필요해.“ - ................ “ [관계자 외 출입금지]..... 맞지?” - .......... 백민서.... “빌어먹을 세상 바꾸자고, 천국을 만들자고 했었지.” - ............ “나 빈털터리지만, 약을 구했어.” - ..... 야, 너 설마!!! “ 우리, 한국에서.” - .................미친놈....... "죽자." 114. 비밀번호 “돌아오는 길에 과자 안 사오면 죽여버린다.” “언니 또 내 도시락에 이상한 거 넣었지?” “너 왜 말 돌리냐?” “어제 내 도시락에 생라면 뿌셔서 넣어놓고 지금 그런 말이 나오니?” “맛있지 않았냐?” 내 말에 어이가 없는 듯, 한심한 표정을 짓고는 휙 뒤돌아서서는 현관문을 쾅 닫고 나가버리는 이온이. 아이고, 저 가시나 앙칼진 성격은 아예 변할 생각이 없구만. 생라면 맛있어서 내가 일부러 이쁘게 부셔가지고 도시락에 넣어줬구만 왜 지금 그거가지고 화를 내는거지? 아, 스프를 안 뿌려줘서 그런가? ....그래, 정시언 바보. 빨간 라면 스프를 안 뿌려주면 생라면 먹는 맛이 안나지... 다행히 오늘 이온이 도시락에는 건빵을 넣었다. 간간히 별사탕도 넣어줬으니까 그렇게 화내지는 않을 거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아기를.... 아니, 안이를.... 아니, 백강이를 낳은 바로 다음날, 아부지와의 합의 하에 바로 퇴원수속을 밟았다. 주린언니는 내 몸을 걱정하며 산후조리까지 완벽히 책임져준다고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주린언니는 분명 좋은 사람이지만, 계속 이런 인연으로 얽혀봤자 서로에게 좋은 점은 단 하나도 없으니까. 하지만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린언니는 나에게 하루가 멀다하고 전화를 해댔다. 물론, 언니도 눈치가 있으니 아기에 대한 이야기는 철저히 금기시 하고 있었지만 간간히 언니 옆에서 들려오는 아기 울음소리는 날 미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기 때문인지 주린언니와 진한오빠는 초스피드로 결혼식을 올렸다. 유명인사들이 그러하듯 비공개 결혼으로 가족들만 모아놓고 아주 조촐하게. 눈에 선하다. 진한오빠는 아직 아기를 완전히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겠지. 하지만 진한오빠의 핏줄이니까, 주린언니가 아기를 받아들였으니까... 언젠가는 그 아이를 사랑해주리라고, 나 그렇게 믿어도 되겠지? 아버지와 이온이도 내가 낳은 아이에 대해서, 그 동안의 내 행동에 관해서 침묵을 지켜주었다. 아니, 오히려 나보다 더 그 일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했다. 살던 대로 살자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꿈처럼 그냥 그렇게 흘려보내자고... 가족들의 그러한 기분도 이해할 수 있었다. 덕분에 난 그 장단을 맞춰주기 위해서 날마다 이온이의 도시락을 싸주고, 토익학원을 다니며, 아부지와 이온이를 위해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평범하지만 재미없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지만 불안한 그런 하루하루를. 휴인이나 환영이, 비원이를 찾아가볼 생각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무서웠다. 내가 도대체 어떤 표정으로, 무슨 화젯거리를 들고 그들 앞에 나서야 할까. 미안하다고 해도 내가 날 용서하지 못할텐데. 그들이 웃어줘도 난 바로 울어버릴텐데. 내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은 단 하나,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들에게나 나에게나 상처뿐이었던 혼란스러운 예전 일을 돌이키지 않는 것. 내가 놈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그렇게 사소한, 그러나 너무 힘든... 그 단 한가지 일 뿐이었다. 서로 애타게 바라고, 너무나 사랑한다고 해도... 안 되는 건 안되는 거였다. 우린 다른 세계를 살아왔고, 다른 길을 걸어왔고, 다른 미래가 있기에 서로의 존재를 잊고 각자의 삶에 충실해야만 했다. 그동안 함께 있고 싶어 발버둥쳤지만.... 나는 이미 지쳐버렸다. 사실 딱 한 번, 환영이가 일하고 있는 장소로 몰래 찾아간 적이 있었다. 여전히 그 아이를 둘러싼 수많은 인파가 원을 그리고 둥글게 모여있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공기를 가르며 주먹을 내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덕분에 난, 환영이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눈을 감고 집으로 달려오고 말았다. 맞고있는 환영이의 모습을 보면 난 금방이라도 그의 앞을 막아설 것 같았다. 다시 마음 고생을 할 용기도, 놀란 환영이의 표정을 보고 그를 감싸줄 용기도.. 지금의 나에게는 그 어떤 용기도 남아있지 않았다. 다시 자려고 누워봤지만 잠도 오지 않았고, 티비를 틀어봐도 재미있지 않았다. 가족들 앞에선 억지로라도 밥을 먹지만 혼자 있으면 입맛이 없어져 점심을 먹지 않은 것도 벌써 며칠째. 한참을 빈둥거리다가 한숨을 쉬며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에 접속했다. 내가 임신해 있던 중에 주린언니는 파파라치를 고용해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사진을 자주 찍어주었고, 지금도 계속 사진을 찍어 보내주겠다고 제의했지만 난 그것조차 거절했다. 그들은 날 잊고, 나는 그들을 잊는 것.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니까. 아이를 낳은 뒤, 아무 미련없이 그들에게 뛰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조차 너무 큰 바람이었다. 난 그놈들을 지키지 못했고, 내 아기를 지키지 못했고, 사랑도 지키지 못한 채 세상에 굴복해버렸다. 이제 맞서 대항해볼 힘보다, 살아지는대로 살아가는 게 더 편해보였다. 휴인이가 이 말 들으면.... [누나, 너무 게을러] 라면서 한심한 표정을 지을까? 아무 생각없이 손가락이 가는대로 내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눌렀다. 메일이 하나 와있었다. 또 스팸메일이겠지, 생각하며 메일을 클릭했다. 요즘 들어 광고글자 하나도 적히지 않은 메일이 자주 오고있었다. 신종 스팸메일이 늘어가는건가, 정말 귀찮아죽겠다....라고 생각할 무렵... 눈에 띈 메일의 제목은..... 백.....민...서? 백민서? 내게 온 메일의 제목이 백민서? 뭐야, 도대체 누가 보낸거지? 흡사 미친사람처럼 급하게 메일을 열어보았다. 그리고.... 거기 적힌 메일의 본 내용은........... [오늘 날씨 좋다. 늘 누나 생각 뿐이야, 잘 지내? 오늘도 학교 수업 때문에 눈코뜰 새 없어. 후, 바쁘지만 나 여기 생활이 적성에 맞는 거 같아. 두 명이나 있어, 벌써 날 좋아하는 여자애들이. 나도 그 중에 한 명이 맘에 들어. 시연이라는 앤데, 누나랑 이름이 비슷하지? 인간이라는 게 참 간사해. 천사라고 생각했어, 누나도, 나도, 휴인이도, 환영이랑 비원이도. 국제적으로 영국에서 놀다보니, 그게 아니더라. 우린 그동안 미친거였어. 그러니까 제발 누나도 정신차려. 우리 이제 제대로 살자. 공공의 이익을 위한다고? 아니, 우린 단지 세상에 잠시 반항한거야. 항상 생각해. 예전의 우리는 철부지였어. 잠시 미쳤던 거야. 이제 서로 잊자.] ...........메일을 읽고 난 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거... 민서가 보낸 메일이 맞긴 한 거야? .... 내가 아는 민서는.... 그 누구보다도 [관계자 외 출입금지]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애였는데.... 그 누구보다도 자부심이 넘치는 애였는데.... 어째서.... 왜 이렇게 변한거야? 애써 나도 잊자고 결심했으면서도, 민서의 메일 하나에 서러움이 밀려왔다. 억지로 믿어왔던 내 생각들이 한꺼번에 무너져내렸다. 나는 아니더라도, 휴인이를, 환영이를, 비원이를 걱정하며 살아갈거라 생각했다. 민서는 원래 잔정이 넘치는 아이니까, 강한 척 해도 사실은 걱정많은 놈이니까. 그래서 우리의 옛 추억을 미쳤다는 단어로 정의내리는 민서의 말이 슬펐다. 아냐, 정시언... 생각을 정리하자... 민서도 지친거야, 나처럼... 그래, 그렇게 세상에 시달렸는데 지칠만도 하지. 제대로, 메일을 제대로 다시 한 번 읽고 답장을 보내주자. 그래, 이렇게 메일을 보내준 게 어디야.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도 날 잊지않고 그 변화를 이렇게 알려주는 거잖아. 그걸로만도 고마워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민서가 이 메일을 다른 애들에게만은 보내지 않았기를 바랐다. 특히 환영이는... 이런 내용의 메일을 보면 하루종일 마음 아파 할테니까. 휴인이는 쓴 웃음으로 웃어넘길까. 비원이는.... 벽에다대고 주먹질을 한두번 할지도 모르지. ......... 하지만 민서의 이런 변화를 니가 뭐라고 할 순 없어. ............ 왜냐면.... 나도.... 마찬가지잖아. 나도 이제 그 애들을 버리려 하잖아. 여러 가지 생각이 미친듯이 충돌했다. 나도 과연 민서와 똑같이 [관계자 외 출입금지]를 버리려 하는 걸까? 아니, 아니다. 난 너무 사랑해서.... 배신해놓고도 다시 다가서는 게 미안해서... 복잡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눈물을 닦고, 다시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메일을 읽어내려가는데.... 읽어내려... 가는데.... 잠깐.... 이거.... 설마........!! 메일의 첫 자만 따서 세로로 읽어보면..... 오늘오후, 두시 인천국제공항? 설마 이거.... 민서 나름대로 암호를 써넣은 메일인거야? 국제공항이라고? 그럼 한국에.... 민서가 한국에 들어온다는 건가? 그래, 대놓고 한국에 온다고 하면 회사간부들에게 들키는 건 시간문제니까. 그래서 이런 내용으로 그들을 교란시키고, 나에게 암호를 전달한 거야? 맙소사, 이제야 알겠다. 민서는 나를 믿은 것이다. 나라면 민서를 전적으로 믿을 것을 예상했기에. 정시언은 민서가 변하지 않을 거라고, [관계자 외 출입금지]를 버리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민서의 메일이 거짓인 것을 알고 암호를 찾아내는 데 골몰했을 테니까. 그런데.... 그런데 나는.... 미안해, 민서야. 나 메일을 받자마자 니 마음이 변했다고 생각했어. 널 의심한거야. 함께 있었을 때 보여준 너의 모든 행동이 거짓일거라고, 그동안 다 진심이 아니었다고 생각했어. 안심을 했기 때문인지 아까보다 더 많은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민서는 나를 믿고 메일을 보내고 있었는데.... 나는 그를 믿지못하고 놈에게 서러워하고, 슬퍼하고, 미워하고 있었다니. 진짜 나라는 인간의 마음 속엔 믿음이나 신뢰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는걸까? 정말 변한 건 나였는데.... 그동안 너희들을 외면하고, 회피하고, 잊으려고 애썼던 건 다름아닌 나였는데... 나조차 그런 행동을 일삼으면서 바뀐 니 마음을 증오하고 있었어. 나 처음부터 끝까지... 나이는 제일 많으면서 왜 제일 어린 행동만 하고 있을까? 너희들이 날 우습게 볼만해. 난 왜 이렇게 바보같이 굴기만 할까? 한참을 울다가 모니터 화면을 보았을 때, 제일 처음 내 눈에 띈 건 내 아이디였다. hihymsbw............. 차례대로 휴인, 환영, 민서, 비원이의 이니셜을 조합해 만든 아이디. [관계자 외 출입금지]와 헤어진 뒤에 만든 새로운 아이디였다. 민서는 내 메일 주소를 어떻게 안 걸까.... 또 해커를 통해서 알아냈을까? 내가 암호를 풀어줄거라 믿은 민서니까, 내 아이디에 담긴 자신들의 이니셜도 찾아냈을까? 급히 시계를 바라본다. 조금 늦을지도 모르겠지만, 서두른다면 가능하다. 내가 암호를 풀어줄거라 믿은 민서니까, 끝까지 날 기다려줄 것이다. 방금전까지 잊을 거라 다짐하던 스스로의 약속이 순식간에 무의미해졌다. 하지만 민서의 메일을 받고 난 결심했다. 난 이들을 버릴 수 없음을. 그래, 내 아이디의 비밀번호는 tkfkdgo, ‘사랑해’였다. 115. 재회 정신없이 옷을 챙겨입고,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지 벌써 30분째. 시계는 어느새 3시를 가리키고 있다. 주변을 미친듯이 둘러보아도 민서는 보이지 않았다. 민서는 시간을 어기지도, 나를 기다리지 않고 그냥 가버리지도 않을텐데. 점점 믿지도 못할 메일을 받고 공항까지 한걸음에 달려온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백민서란 제목 하나만으로, 그가 민서일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와 나의 관계를 알고있는 누군가가 장난으로 나를 놀려본 거야. 안 그래도 검찰들 사이에서는 우스갯소리와 농담으로 우리 이야기를 자주 들먹인다지. 김형사님과 우리아버지는 언제나 언짢아하시지만... 나도 검찰청에 갔다가 젊은 검사들이 이야기하는 걸 몇 번 들었는걸. [김검사님 딸 이야기 들었어? 완전 병신됐더라, 범죄자한테 농락당해. 거기다 이검사 애까지 가졌다며? 그 얼굴 한 번 보고싶다, 나도 가지고 놀게. 그 꼬맹이들 가지고 장난치면 눈깔을 뒤집고 달려든다는데? 관계자 외 출입금지나, 그 여자나.... 다들 미쳤나봐. 자기네가 드라마나 영화라도 찍는 양 울고불고.... 아주 지랄.] 그래, 내 속에 너희들이 너무 크게 자리하고 있는 거, 나도 인정해. 나 사실... 검찰청 앞에서 그 이야기를 고스란히 다 듣고있으면서도... 아무런 항변도 하지 못했어. 예전의 정시언이라면 당장에 그 사람 멱살부터 잡아챘겠지. 근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 인간을 죽일듯이 패봤자.... 시간을 돌릴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너희들이 내 앞에 돌아오는 게 아니잖아. 우리를 모르니까....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니까... 그렇게 지껄이게 내버려뒀어. 젊은 검사들이 날 놀라려고 한번 꾸며본 일인가봐. 거기 속은 내가 병신이지. 지금 어디선가 나를 훔쳐보면서 깔깔대고 웃고있을까? 입국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환영하는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저 환영인파들은.... 입국하는 사람들의 가족, 애인, 또는... 친구일까? 행복하고 아름다워보인다. 만나자마자 손을 마주잡고... 웃고, 이야기하고. 나도 저럴 수 있기를 바랐는데.... 멍하니 그들의 행복을 지켜보다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뒤돌아섰다. 공항을 나서기위해 한발자국 내딛었을 때..... “어이!!!!!!!!!!!!!”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낚아챘다. 그리고, 나를 확 껴안는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진다. “아........ 저기........” 민서일 거란 기대감은 버린지 오래, 괜히 쓸데없는 희망을 가지기 싫었다. 의아함을 지니고 그 남자의 손을 떼내며 뒤를 돌아보자.... 슬픈 눈에서 눈물한방울을 툭 뱉어내면서도... 억지로 웃고있는... 한 아이가......... 그래, 민서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 민.....서야.......” “미안해.........”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무방비 상태에 갑자기 당한 민서와의 재회에 결국은 내 눈에서도 눈물이 투두둑 흩어졌다. “어떻게.... 어떻게 왔어....? 너... 진짜 민서 맞아?” “몰래 빠져나왔어.” “.................” “보고싶었다.........” 민서를 여자로 보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제는 듬직한 남자구나. 니가 와서 나를 먼저 안아줄만큼. “용케 암호 풀었네. 그래... 너라면 분명히 알고 올 줄 알았어....” 아니야, 바보야.... 암호를 알고 풀게 된 건 우연이야. 난 너를 의심했어. 니가 우리를 다 잊을 줄 알고 야속했단 말이야. “비원이는.... 니가 실종된 줄 알고 있어.” 비원이도 나를 찾았다는 소린가? 난 도대체... 이놈들에게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던 걸까? “아이를......... 낳았어..........” 울먹이면서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내 말을 들은 민서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가 싶더니 그는 금세 하하 웃어보였다. “뭐야, 바로 말하지 그랬어, 난 니 배 홀쭉해서 지웠는줄 알고 조금 실망했잖아.” “.......... 아들....이야.....” “...............” “........미안해.... 백강이라고... 한번도 불러주지 못했어....” 눈물이 끊이지 않았다. 내 눈물을 멈춰보고 싶었는지, 민서는 말을 돌렸다. “..............칠삭둥이네. 그 놈 그거 속 많이 썩였다, 그치?” “...........진한...오빠랑.... 주린...언니가... 키우기로 했어, 난.... 난 한번도... 그 애 얼굴을..... 내 아기 얼굴을.......“ 그러나 굳이 이야기를 다 전하고, 터지려는 내 눈물을 알아채기라도 한듯이... 아무말없이 날 자기 품으로 끌어당겨 안아주는 민서. "낳아준걸로 됐어, 누난 우리한테 선물을 준 거야.“ 누나, 라고 했다. 민서에게 듣는 누나 소리는, 왜 내 마음을 이렇게나 설레이게 할까. “그 놈, 큰 인물이 될 거야. 우리 아들이잖아.” 민서의 품이... 이렇게도 넓었던가.... 울고있던 나를... 단 한 번에 이렇게 진정시켜줄만큼....? “비원이랑은 계속 연락을 하고 있었어.” “................” “환영이는 아직 아무것도 몰라. 내가 비원이랑 연락하던 것도, 한국에 온 것도.” “.....................” “강휴인 새끼는... 아직도 감옥 안에서 혼자 썩고있겠지.... 제기랄....” 감옥 안에 혼자 있을 휴인이를 생각하며 눈을 감은 순간.... “누나 마음은...... 아직도 변함없냐.....?” “.................” “곧 죽어도.... 휴인이냐....?” 살며시 떨리는 민서의 목소리. 나는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민서의 얼굴을 바라보려 했으나... 나를 안고있는 민서의 얼굴을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나 이제 가진 거 아무것도 없어. 동정심 생기지? 그냥... 나한테 올 마음 없냐?” “............ 지금 와서 왜 그래....” 민서가 좋지만, 지금 민서와 만난 이 순간이 너무나 행복하지만... 내 사랑은.... 휴인이 뿐이었다.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민서의 품에서 빠져나와 중얼대는 내 말에.... “그러게!!! 나 왜 이러냐!!!” 검은 정장을 입은 뽀대나는 민서가 손으로 눈을 가리며 대답한다. 지금, 울고있을까? 입가를 보면 나보다 더 환히 웃고있는데... 너희들은 언제나 그랬지. 눈은 울고, 입은 웃고... 억지로 상처안받은 척, 강한 척하며 살아왔던... 누구보다도 외로운 사람들이었지. “누나..........” “..... 응?” “살면........ 계속 살면... 희망이 있을까?” “.................” “휴인이 감옥에서 몇 년 썩을지 모른다. 아니, 감옥에서 나와도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누나랑 행복할 수 있을 거 같아? 내 생각엔 그 새끼 제 발로 누나 떠난다. 환영이, 그 새끼 계속 길거리에서 사람들한테 맞아가며 돈 벌까? 언제까지? 그 놈 몸에 있는 멍자국에.... 아물 새가 없는데... 그 놈 맞는 걸 보면서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가득한데.... 비원이, 계속 호스트바에서 몸 팔까? 인간만도 못한 취급 받으면서... 사람들 욕구충족해줄 인형처럼... 표정도 없고, 감정도 없이.... 그렇게 어두운 곳에 처박혀 있어야 할까? 나.... 언제까지나 목숨의 위협을 받으면서... 제 명에 살 수 있을까? 지금 한국에 온 것도.... 나로서는 죽을 각오로... 모든 걸 다 버리고 온 건데. 언제 다시 들킬지, 언제 나를 향해 총알이 날아올지... 나 모르겠어. 누난... 우리를 잊고, 아기도 잊고....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다시 웃으면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휴인이 생각안하고, 환영이 걱정안하고, 나랑 비원이랑 안 싸우면서.. 그렇게 우리를 잊고 지낼 수 있을까?“ “.................. 민서야....” “우리가...... 더 이상 이 세상에 반항할 힘이 있을까?“ 민서의 목소리는.... 그 어떤때보다도 슬펐지만, 단호했다. “............ 민서야.........” “....... 우리 이제 아무 것도 없잖아... 외롭게 죽을 일밖에 없잖아.....” “...................” “.........누나........ 나 믿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니면.... 우리가 아니면.... 도대체 누가 민서를 믿어줄 수 있을까? 예상하고 있었다. 공항으로 달려오면서부터 아니, 민서가 보낸 메일의 암호를 풀어낸 후부터. 민서가 꺼낼.... 그 무서운 최후의 방법에 대해. “함께할 방법.... 그것 뿐일까?” 우리를 함께 있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방법은, 그것 뿐이었으니까. 처음을 함께 하지 못했다면..... 마지막이라도 함께 해야했으니까. “아무한테도 강요는 안할거다.” “..........난 무섭지 않아.” 민서의 눈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하지만 민서의 표정은 그 무엇보다도 쓸쓸했다. 깨지기 쉬운 유리인형처럼.... “난...... 무서워, 누나.... 솔직히 무섭다, 난..... 무서워, 누나.....” 내 품에 안겨오는 민서. 내 어깨 위로 따뜻한 민서의 눈물자국이 새겨진다. 떨리는 손으로 민서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혼자 모든 걸 결정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민서의 결심은 우리를 향한 믿음과, 죽음을 뛰어넘을 각오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민서는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고 이 곳으로 와주었다. 나를 위해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친구들과, 죽을 고비를 눈 앞에 둔 자신을 위해서. 이 아이 앞에서 나는 약한 척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어린아이처럼 무너져 우는 민서를 다독여주는 누나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뿐. 세상이 무섭다는 아이들을... 이제 그만 구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나도, 그들의 세상에 합류해야 하지 않을까. 알고있다. 처음부터 알고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잃은 민서가 목숨걸고 구했을 그것. 죽음의 독약, 그의 주머니에 담겨있는 작은 다섯 개의 병들을. 116. 복수 녹슨 파란대문을 열며, 오랜만에 보는 그 대문을 보며 감격에 젖을 새도 없이 민서는 그 문을 열어 제끼며 우리의 정겨운 옛 집에 들어섰다. 낯익은 평상을 보며 벅찬 마음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부엌에서 나오는 환영이를 보며, 난 다시 한 번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오랜만에 보는, 사진이 아닌 실물의 환영이는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환영이는 대문에서 인기척을 느꼈는지 천천히 민서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잠시 시간이 멈춰버린듯, 우리 세 사람은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하........” 제일 처음 입을 연 사람은 바로 환영이. “.............. 꺼져....” 그리고, 환영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을 빗나가는, 잔인한 말이었다. 그러나 민서는 환영이의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야, 지환영.... 너 너무한 거 아니냐?” “내 눈앞에서 없어져.....” “난 너 보고싶었는데.” “백민서!!!!!!!!!!!!” 우리 곁을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가려던 환영이는 민서의 뻔뻔한 한 마디에 몸을 돌려 민서를 향해 소리쳤다. “드라마 보면, 이런 장면에선 안아주거나... 뭐 그러지 않냐?” “이 개새끼!!!!!!!!!!” 환영이는 눈 깜짝 할 새에 민서를 향해 달려들었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민서의 멱살이 환영이에 의해 잡혀있는 상태였고, 금세라도 민서를 때릴 듯 환영이의 주먹이 하늘높이 들려있었다.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미친듯이 내가 고민하고 있는 새에.... “왜 너 혼자 결정했어.............” 쥐어짜는 듯한 환영이의 슬픈 목소리에 내 귀에 꽂혀 들어왔다. “검사들한테!!! 맞고 욕듣고 차이고 별 지랄을 다 떨면서도!!! 니들만은 멀쩡하길 바랐어. 그래서 조사받는 와중에도 입 꾹 다물고... 그래, 이렇게 될 거 알았으니까... 내가 조금만 참자, 참으면 되겠지, 나중에 잘 될 거라고 날 위안하고, 또 위안하고... 너만 지키면 될 거라고, 재벌 아들이 누군지만 모르게 하면 될 거라고... 비밀만 유지하면 된다고 생각했어, 비원이는 어떻게든 해줄 거라고!!! 근데 넌!!! 너는!!!! 왜 니 마음대로..... 왜 니 마음대로 진실을 다 까발려!!! 죽고 싶어 환장했어? 왜 니 발로 거길 기어들어가, 왜!!!!!! 산다고 했잖아, 어떻게든 살자고!!! 우리 처음에 그렇게 약속했잖아!!!!“ 환영이가 화내는 이유는, 민서가 마지막에 밝힌 비밀 때문인 듯 싶었다. 환영이가 보기에, 민서는 아무 계획없이 무작정 진실을 밝히고 자진하여 죽음의 길로 들어선 것처럼 보였을 것이고, 그것 때문에 환영이는 걱정이 태산같았을 터. 배신감에 시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 같았다. 다만, 친구를 너무 위해서 생기는 저런 류의 배신감은.... 환영이만이 표출할 수 있는 감정일 것이다. “나도 지겨워서.... 보호받는 거 지겨워서.” “백민서!!!!!!!!!!!!!!” “마음 졸이면서 사는 거, 되게 무서운 거라서... 그 짐 니네한테 떠넘기기 싫었어.” “.................” “그러니까 이제 그 주먹 좀 내려주라, 나 무서워. 니 주먹이 제일 세잖아. 이러기냐? 나 이래봬도 한때 니 여자친구였잖아.“ 억지로 농담을 하며 하하하하 웃는 민서. 그런 민서를 바라보던 환영이는..... “병신..........” 이라는 말과 함께 민서를 안아버린다. 환영이로서는... 모든 긴장이 다 풀어져버리는 느낌이겠지. 비원이와 함께 살면서... 항상 휴인이 면회를 가면서... 마음 한구석엔 민서에 대한 걱정을 언제나 하고 살아갔는데... 민서가 어느 날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났으니까. “오랜만에 봤는데 욕지거리냐, 누가 너한테 그렇게 가르쳤냐!!” 민서는 안긴 채로 소리쳤고, “그래, 나 막 살았다, 개새끼야....” 환영이는 대답한다. “이제 막 사는 거 그만하자......” 그리고 환영이는, 이야기를 본론으로 끌고 들어간다. “니 눈두덩이 시퍼렇게 멍든 거 봐라....” “..............” “몇 시간 뛰냐? 너 혼자 힘들어 죽겠지.....?” 민서의 말에 환영이는 민서의 품에서 빠져나와 민서와 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환영이. 민서와 연락을 주고받았기에 민서의 계획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있는 비원이와는 달리 환영이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상황들이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나는.... 망설이고 있다가, 곧 손을 뻗어 환영이의 터진 입가로 가져갔다. “누나...........” “미안해, 지금에야 나타나서.....” “......... 지금........” “...........많이.... 아프지.....?” 정말 그동안 얼마나 고생한걸까, 성한 사람 몰골이 아니다. 그리고, 그 때. “백민서!!!!!!!!!!!!!!!! 정시언!!!!!!!!!!!!!!!” 대문이 요란하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 비원이가 왔다. “강요는 안할게.” 고요한 침묵. 겁먹은 표정의 환영이와 담담하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비원이. 비원이는 아까 우리의 이름을 소리쳐 부른 것 외에, 그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아직도 나에게 화가 나 있는걸까? “....... 니들한테는 이런 거 주기도 싫다. 지금 누나랑 나는 휴인이한테 가볼거야. 그냥 우리 셋만 이런 거 해도 되니까!!“ “..............” “열심히 사는 니들한텐 미안, 내가 잘못 생각했다. 환영이 같은 경우에는 환희도 있는데.....“ 무력감에 젖은 얼굴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민서. 나도 어쩔 수 없이 뒤따라 일어섰다. 그 순간..... “이번에도 셋만 빠져나가려고?” “...............” “지랄맞은 세상에서... 비원이랑 나만 빼놓고 니들만 또 도망친다고?” 환영이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급히 고개를 돌려 환영이를 바라보았다. “누나도 그러는 거 아니예요. 우리가 왜 누나 소식을 모르고 있어야 돼요? 누나는 괜히 미안하다고 숨어있던 거겠지만... 우리는 누나가 연락 안한거에 더 화가 나 있었어요. 실종신고는 받아들여지지도 않고, 누나 가족들도 누나 소식을 모르고... 해커애들이 누나 정보 찾아도 감감무소식.... 애는 낳은건지, 건강한 건지, 잘사는건지... 내가 얼마나 걱정한 지 알아요?“ 역시나 엄마같은 존재, 지환영. “미안해.... 나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는데.....” 나는 정말 진심을 가득 담아 말을 건넸다. 그리고 그런 내 말을 받은 건.... “개나 소나... 미안할 짓은 왜 그렇게 많이 하는 건데?” 역시 아직 나에게 화가나 있는 듯한.... 냉정한 목소리의 비원이였다. “강휴인도 미안하대. 백민서도 미안하대고. 정시언 너도 미안하대. 뭐가 그렇게 미안하냐. 미안한 거 알긴 알아? 나랑 환영이한테.. 미안하긴 해?“ 나는 그저 젖은 눈으로 비원이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 밖의 다른 행동을 하기에... 나는 정말 미안한 게 너무 많았으니까. “고개들어, 정시언.” 기죽은 내 모습을 보기 싫었는지, 비원이를 나를 향해 말했고.... 나는 처음으로 순순히 비원이의 말에 따랐다. “언제나 결정은 너희들이 먼저 하지. 우리가 따를 수밖에 없잖아.” “...............” “함께 하자. 그러면 용서해줄게.” 나를 향해 손을 내미는 비원이. 나는 결국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리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환희 다음달에 출소해. 나 오빠 노릇 다했어.” 환영이 또한.... 그 어느때보다 확신에 차 있는 말투로 우리에게 말한다. 그 때, 민서가 울고있는 내 어깨를 뒤에서 잡아채며 부드럽게 중얼거렸다. “이제부터 울지마.” “미안해.... 지켰어야 하는데.... 내가... 너희들을....” “우리도 누나 못 지킨 건 마찬가지야. 또 그 소리 하면 나 진짜 화낼거야.” 민서가 무서운 표정으로 나를 향해 말하면..... “아쉽다, 우리 아기는 봐야 하는데.....” 분위기를 풀어주려는 듯 환영이가 화제를 돌린다. 나도 아직 보지 못한 나의.... 아니, 우리들의 아기. 언젠가 휴인이가 말한 것처럼.... 우리 아기는 다른 아기들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랄 것이다. 보지는 못하더라도, 곁에 있지는 않더라도.... 그 누구보다 자신을 위하고 아껴줄 다섯명의 부모가 더 존재하고 있으니까. “그럼 우리... 오늘 마지막으로 보는 건가?” 민서의 계획은 바로 내일이다. 잠시 후 휴인이를 만나고, 내일은 계획을 실행에 옮길 것이다. 비원이의 마지막이란 말에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 했다. 그래, 우리의 마지막 계획은.... 너무나도 많은 것을 포기하는 일이었다.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온전히 우리만을 생각해야 했다. “아, 씨발... 진짜 쪽팔리게... 신비원 너 그런 말 왜 해!!!” 비원이의 말에 민서는 눈물이 나는지 계속 투덜거렸다. “내일 4시 44분. 볼만하겠다. 강휴인은 감옥, 지환영은 이 집 평상 위, 백민서는 제일그룹 앞, 정시언은 자기네 집 방 안. 나는 호스트바 안.“ “............마지막 복수야. 우리가 세상에게 주는.” 민서의 마지막 말에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이번에는 과연, 우리가 승리할 수 있을까? “우리,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웃으면서 헤어지자.” 눈물을 참고.... 참고... 또 참으면서 말했지만 내 목소리도 살짝 떨리고 있었다. “나 이제 안 돌아보고 갈 거다. 민서야, 우리 빨리 가자.” 민서의 팔을 잡아끌며 대문으로 발을 옮겼다. 환영이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온다. “걱정하지 말아요. 나 행복해요, 누나.” 그 뒤를 이어... 비원이의 한마디도. “나중에 하늘에서 보자.” 117. 안녕을 고하다 입술에 비릿한 피맛이 감돌았다. 환영이와 비원이의 말을 들은 후,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은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민서의 손은 아직도 굳게 내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언제나 뒤에 있어줄테니까, 걱정말라는 듯이.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다시는 전화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사람의 전화번호를 누른다. 1분여가 지나도 전화를 받지 않는 그를 생각하며 회의중인가, 라고 생각할 무렵.. - 여보세요? 진한오빠의 목소리가 들린다. “진한오빠, 나야.” 민서는 무표정에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 내가 왜 진한오빠에게 전화를 했는지, 알고있는 탓이리라. 우리는 이제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서로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상태였다. - 시언아.....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오빠의 도움이 필요해.” - ............. “나 지금 휴인이 만나러 가.” - 정시언!!! “오빠가 날 조금이라도 불쌍하게 생각한다면, 나에게 조금이라도 미안하다면.... 이 부탁만은 들어줘. 마지막이야, 앞으로 더 이상의 부탁은 안 할게.“ - 뭐야...... “조용히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은데 교도관 옆에서 휴인이 만나고 싶지 않아. 유리창이나 철창 사이에 두고 질질 짜면서 그 애 만나고 싶지도 않고. 1시간 안으로 이야기 끝낼테니까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공간에서 그 애 만나고 싶어. 오빠는 검사니까, 휴인이 잡아넣는데 일조한 사람이니까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교도소에 전화넣어줘. 나를 오빠의 비서든, 뭐든.... 어떻게라도 위장해서 조용한 공간에서, 아무도 없이 휴인이 좀 만날 수 있게 해줘.“ - 그거면 돼? 그게 다야? 이미 결혼까지 한 마당, 나를 이렇게 망쳐놓은 후다. 진한오빠는 더 이상 내게 달라붙을 염치마저 없는 듯 했다. 오히려 나에 대한 미안함으로, 무언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었을 터. 내가 피하는 바람에 나를 도와줄 어떠한 방법도 존재하지 않았겠지만 지금 내가 먼저 이렇게 연락을 한 이상, 오빠는 나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 알았어. 지금 바로 연락해둘게. “고마워.” 사무적인 말투로 곧 전화를 끊으려는 내게.... - 안이.... 잘 크고 있어. 앞으로도... 잘 키울게, 시언아. 미안해. 내 아이의 일을 진한오빠로부터 전해듣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져나오려 했다. “행복해, 진한오빠.” 덕분에 나도 마지막으로, 옅은 미소와 함께 진한오빠와의 통화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진한오빠와의 통화를 끝낸 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안아.... 내 아들, 이안. 아기 생각에 끝끝내 참고있었던 눈물이 터져나왔다. 그 때, 내 뒤에 있던 민서가 커다란 손바닥으로 내 눈앞을 가려주며, 한마디 내뱉는다. “우리... 눈물 아끼자.” 민서와 함께 곧장 휴인이를 찾아갔다. 비원이의 면회도 거절한 적이 있는 휴인이라 걱정을 많이 했다. 우리까지 만나주지 않으면....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리니까. 그러나 다행히 휴인이는 우리의 면회를 받아들여주었다. 모두 다 민서 덕분인 듯 했다. 나 혼자만 왔으면 휴인이는 나를 만나주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도 싫고, 계속 만나면 우리 모두 불행해질 거라는 이유를 들어가면서. 어쩌면.... 그 누구보다 서로가 서로를 잊길 바라는 마음이 컸던 건... 다름아닌 휴인이었을 것이다. 주동자라는 입장에서, 그는 모든 죄를 자신이 다 가져가기를 원했으니까. 그런 휴인이에게, 갑자기 찾아온 민서의 존재는 너무나도 놀라웠을 터. 죽지않고 살아돌아온것만 해도 놀라운데, 면회를 오다니... 휴인이로서는 거절할 수 없는 면회임이 분명했다. 진한오빠의 연락을 미리 받은 교도관은 우리에게 지나치게 예의바른 태도를 보여주었다. 진한오빠는 나를 도대체 뭐라고 소개한걸까. 덕분에 우리는 자그마한 방 안에서,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휴인이를 만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민서와 내가 한 마디의 말도 없이 긴장을 감추고 있을 때, 방문이 달칵 열리며 교도관을 옆에 낀 휴인이가 나타났다. 짧게 자른 머리, 새파란 죄수복, 손에 끼여진 수갑. 난 왜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가슴이 먹먹해진걸까. 그 애를 그 곳으로 몰아넣은 건.... 그 누구의 탓도 아닌 바로 내 탓인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아 쿵쾅거리며 뛰는 내 심장을 진정시키고 있을 때, 휴인이를 데리고 온 교도관이 내 얼굴을 한 번 바라보더니 휙 나가버린다. 휴인이는 민서를 처음보고 눈물흘린 나와, 분노했던 환영이와, 놀라워했던 비원이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민서를 보고도 그냥 피식 웃어버린 것이다. 내 앞에서는 마냥 아이같던 휴인이였는데.... 주동자로서의 휴인이는 저런 모습이었겠구나. 나에게 보여준 모습이 너의 본모습이라는 건 의심하지 않는데.... 지금 니 점잖은 모습 보면.... 얼마나 힘들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들어버려. 휴인이 손의 수갑을 보며 그를 대신해 방 안에 있는 의자를 대신 빼주려 했으나 휴인이는 한 쪽 발을 이용해 의자를 질질 끌어다 자기 앞에 놓고 앉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거지됐네?” 차갑지만 장난끼 섞인 말투. 그렇게 말하면서도... 지금 그 애의 속은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잡혀간 이후로.... 연락 하나 없던 나와 민서가 동시에 이렇게 나타나버렸으니.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놓고 앉았을 뿐인데... 언제 이렇게 멀어진걸까, 우리. “범죄자보단 나아.” 민서는 휴인이의 말에 적당히 동조해주며 그의 말을 받았다. “회사 넘어갔다며.” “너 정시언이랑 안 사귀냐? 계속 튕기면 내가 뺏어간다.” “예쁘지도 않은 거, 다 가져가라.” “개새끼, 말 존나 이쁘게 한다, 더 미워지게.” 그들이 농담을 계속 주고받는 동안에도, 난 휴인이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휴인이는 자신이 죄수인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다. 모든 죄를 다 덮어쓰려는 그의 각오가 내 마음에 아플 정도로 깊이 새겨졌다. “죽은 거 아니면... 환영이한테 연락이라도 하지 그랬냐....” “정시언 아기 낳았대.” 미묘하게 계속 어긋나는 그들의 대화. 서로 다른 화제를 가지고서도 그들은 어떻게든 계속 소통을 해나가는 것 같았다. 내가 아기를 낳았다는 말에 고개를 숙인 휴인이는 피식, 웃는 것 같았다. “미안... 지켜주지 못해서.” 아주 작은 그의 목소리에 내가 반응해서... 휴인이의 얼굴로 손을 가져가면... 휴인이는 의자를 뒤로 빼며 내 손길을 피해버린다. “.... 휴인아.....” “나 찾아오지마. 좋을 거 없어. 모른 척 예전처럼 평범하게 살아. 나 원래 이런 새끼야. 더럽고 못되고 나쁜 새끼. 환영이도, 민서도, 비원이도.. 다 나 때문에 이런 꼴 된 거야. 내가 이 새끼들 범죄자로 만들었어. 약속 못 지킨 건 미안한데... 정말 지키고 싶었던 약속인 건 맞는데... 근데, 누나.... 이제 되돌릴 수 없어, 그러니까... 다음부턴 면회도 오지 마.“ 돌이킬 수 없다, 소름끼치도록 잔인한 말이었다. 그래, 돌이킬 수 없다면... 마지막이라도 함께 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계획. “그래, 걱정마.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면회일거야.” 휴인이는... 내 대답에 약간 놀란 듯 하더니... 다시 슬픈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게... 왜 마음에도 없는 소리만 계속 하는 걸까. “둘 다... 잘 있는 거 봤으니까 됐어. 나 피곤한데 들어가볼게. 안녕.”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휴인이를 향해.... “이거 받아가.” “나 누나 뒷모습은 보기 싫다. 마지막은 내가 끝낼게. 비참해지기 싫으니까.” “마지막은 같이 할 거야.” 내 말에 뒤를 돌아보는 휴인이. 그리고 휴인이는.... 내 손에 들린 작은 약병에 시선을 멈춘다. 이 약병이 바로, 아무도 없는 곳에서 휴인이를 만나야만 했던 이유다. 교도관이 있는 곳에서 우리의 계획을 이야기해서는 안 되고, 유리창이 가로막힌 곳에서 이 약병을 건네줄 수는 없으니까. 투명한 이 작은 약병은... 도대체 내일 우리를 어떻게 만들고 있을까. “설마.........” 휴인이의 놀란 눈동자를 향해... 민서가 단호하게 말을 한다. “내일 오후 4시 44분. 각자 자신의 장소에서.” “미쳤어?????????” 휴인이는, 예전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흥분한 채 말을 이었다. 아까의 차분하고 냉소적인 모습과는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다들 동의했다. 환영이도, 비원이도.” “백민서!!!!!!!!!!!!” “누나도 함께.” 민서의 말에, 다시 한 번 아파오는 내 마음과, 나를 바라보는 휴인이의 상처받은 눈길. “됐어... 개소리 그만해..... 누나, 아니 정시언!!!! 너는 아니야, 너는 이러면 안돼!! 왜... 누나가 왜!!! 니가 왜!!!!! 니가 왜!!!!!!“ 어떤 말도 잇지못하고 소리치는 휴인이를 향해.... “나도 끼워주기로 했잖아.” “...............” “난 무섭지 않아, 휴인아.” “...............” “관계자 외 출입금지... 맞지?” “...................” “이제 아무도 우리 곁으로 다가오지 못해. 그 누구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을 거야.” 내 말에... 거짓말처럼, 휴인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망설이면서..... 휴인이의 얼굴을 향해 다시 손을 내밀었다. 다행히도 이번에 휴인이는 내 손을 피하지 않았다. 휴인이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을 때.... 그가 조용히 한 마디 내뱉었다. “내가 지은 죄야.... 다들 이럴 필요는 없어......” 강한 척... 하지말지, 이렇게 쉽게 무너져내릴 거면서.... 너희들... 이제 제발, 힘들면 힘들다고 말할 줄 알았으면 좋겠는데.... “왜.... 나 하나 때문에.... 왜.... 왜 이래야 해....?” “너 때문.... 아니야, 휴인아.....” “이미 망가졌는데... 포기라도 하지... 이미 끝났는데!! 제발 우리 좀 버리지... 누나.... 누나는... 왜.... 왜......“ 그렇게 말하지마. 너희들은 나에게 버림받을때조차도 나를 지켜줬어. 너희들은 나에게 버림받으면서도 나를 버리지 않았어. 내가 너희를 놓아도... 너희들은 나를 놓지 않았어. 이제 내 차례야, 함께하는 것만큼은... 어렵지 않아, 그러니까 안심해. 휴인이는 점점 내 어깨를 향해 자신의 얼굴을 기댔다. 공항에서 날 처음 본 민서도, 나에게 한 행동이다. 너무도 다른 생을 살아온 이 두 아이에게.... 왜 그 누구도 어깨를 내주지 않았을까. 조금 더 멋진 사람이면 좋았을텐데... 보잘것없는 정시언이라도 괜찮은걸까. “미안해.......” 휴인이의 말에.... “사랑해, 누나........” 나조차도 눈물이 나버렸다. 휴인이와 내 입술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맞닿았고... 민서는 모른 척 고개를 돌려주었다. 많이... 아픈 장면이었을텐데도 불구하고. 이제, 나 함께하려 한다. 내 모든 것을 버리고. 세상에 버림받은 관계자 외 출입금지. 강휴인, 지환영, 백민서, 신비원과 함께, 바로 이 곳에 안녕을 고하고. 118. 당부 (작가시점) 검은 정장차림의 사내가 교도소 안으로 들어섰다. 선주린에게서 받은 소개장을 내밀자마자 교도관이 쓴소리를 내뱉었다. “나, 참. 강휴인은 특별대우인가. 끌려오자마자 난리네. 철통감시하라던 게 언젠데 이제 와서 다들 강휴인을 특별 면회해달라고 지랄이야.“ 사내는 말없이 교도관을 쏘아보았고, 교도관은 그의 눈빛에 밀린 듯 자리를 피했다. 사내는 특별면회실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왜 다들, 그에게는 무겁고 어려운 짐만을 지워주는 걸까. “오랜만이다.” 그 때, 언제 들어왔는지 강휴인이 사내의 모습을 보며 웃고 서 있었다. 교도관은 이미 사내의 기에 눌릴대로 눌린 모양, 강휴인을 방 안까지 데려다주기는커녕, 문 밖에서 그를 방 안으로 밀어넣은 것 같았다. “잘.... 지냈어요, 형?” 검은정장의 사내, 이열음. 그는 괜시리 미안해진 마음을 숨기지 않은 채 휴인에게 말을 건넨다. “바쁠텐데 일부러 오라고 해서 미안, 내가 밖으로 나가진 못하니까.” 휴인이 눈을 찡긋 하며 중얼거린다. 어제 시언과 민서가 다녀갔다는 말은 전해들었지만 놀랄만큼 밝은 모습이다. 열음은 내심 시언의 파워에 또 다시 놀라버렸다. 정시언이란 여자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를 얼마나 바꿔놓을 수 있는 여자일까. “준휘를.... 통제할 수가 없었어요. 형도 알다시피 비원이형한테 광적인 충성심을 보이는 게 바로 박준휘니까. 미안해요, 진실도 다 말해버렸고, 그래서 형만 이렇게 감옥에서....“ “그것 때문에 부른 거 아닌데.” 열음의 투명한 녹색 눈에 웃고있는 휴인의 미소가 그대로 비춰졌다. “민서는 살아있어. 실종됐다던 시언누나도 돌아왔고. 다 잘된건데 뭐.” “................” “박준휘 충성심 지독한 건 내가 알지. 해커 셋 다 비원이한테 목매는 거 안다. 너희들 셋 다 보통 똑똑한 게 아닌데 비원이한테 그러는 거 보면 이유가 있겠지. 비원이 내가 봐도 멋있는 놈이니까. 나 너희들 원망안해. 내가 주동자였던건 사실이야. 사실 밝힌게... 잘못했다고 말할 일인가?“ 열음은 생각한다, 비원이 없었다면, 해커의 충성심은 휴인을 향했으리라고. 도대체 [관계자 외 출입금지]는... 어떻게 된 인간들이 이렇게 다 멋있기만 할까. 세상은 범죄의 오합지졸, 구제불능이라는 말로 [관계자 외 출입금지]를 정의내리지만 열음에게 [관계자 외 출입금지]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멋진 이들의 모임이었다. “..........죄송해요, 형.” “그런 말 듣고 싶은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휴인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열음은 고개를 숙여버렸다. 끝까지 비원만을 생각했고, 그게 삶의 목표이자 이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휴인의 얼굴을 마주대하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는 없었다. “......... 비원이가.... 해커를 민서쪽으로 돌려놨다면서.” “.... 말이 해커지, 산이나 준휘는 몰라요. 나랑 선주린이 알아서 해야죠.” “너만 불러서 말했구나. 하긴, 준휘가 알면 펄펄 날뛰겠지. 비원이가 죽는다는데. 그럼 오늘 벌어질 우리 계획... 알고있는 건 너랑 선주린 뿐이구나.“ “............” “왜... 안 말리냐.... 비원이도 이 계획에 동참하는 거 알면서.” 진지해진 휴인이의 말을 들으며.... 열음은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세게 깨물며 슬픈 눈빛으로 휴인을 바라본다. “말리면..... 듣긴 할 거예요?” “...............” “내가 하는 말.... 들어주긴 할 거예요, 휴인이형?” “.....................” “형도 주동자니까 알고있잖아요!!! 혼자 모든 걸 다 안다는게!!! 그게 얼마나 무서운건지!! 모든 걸 다 혼자 감당하고!! 모든 걸 다 혼자 처리하고!!! 그게.... 사람 얼마나 미치게 하는지....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형도 다 알잖아요!!!!“ 언제나 조용하고, 얌전하고, 침착하기만 했던 열음이가 흥분한 채 소리쳤다. 휴인은 그런 열음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우리가 믿을 게 너 뿐이어서, 그래서 그래.” “꼭 이럴 필요는 없잖아요..... 다시 생각해볼 수 있잖아요.....” 민서의 계획을 이제껏 침묵으로만 들어왔던 열음이 처음으로 그 계획에 이의를 제기했다. 휴인이 부드럽게 달래지 않았더라면.... 열음은 그 계획을 실행으로 옮길때까지도 [관계자 외 출입금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을 원망하고, 증오하고, 슬퍼했을 것이다. “열음아....” “..............” “우린 이제.... 다들 지쳤어. 지칠만큼 지치고, 힘들만큼 힘들었는데.... 이상하게.... 서로가 서로만은 포기를 못하겠더라. 죽어도 못 놓겠더라.“ “..................” “이해해줄 수.... 있어?” 휴인의 말에.... 열음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열음의 우상이었다. 이해못할 리가 없었다. 아니, 이해해야만 했다. 열음 또한 감히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세상을 뒤집어놓던 형들이었다. 삶의 목표이자, 이유인.... 열음의 전부인 사람들이었다. 보낼 수 없고, 결코 포기할 수 없어도... 놓아줘야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하늘을 훨훨 나는 새처럼, 그들의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줘야만 하는 역할을 가진 사람이 바로 열음이었다. 열음이 없다면, 그들의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된다. “천국은.... 버리는 거예요?” “하하, 운 좋으면 다시 만들 수 있겠지.” 진지한 열음의 말을, 휴인은 웃음으로 넘겨버렸다. “형들을.... 동경했어요.” “우리 동경할 만큼 멋진 사람들 아니야. 그런 생각 하지마.” “................” “처음.... 민서가 이 계획을 가지고 달려들었을 땐, 미친놈이구나 싶다가.. 나중엔 그냥 대단해보였어. 그래도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냈을까, 싶었지. 역시 과감하고 거리낄 것 없는 놈이구나. 재벌이란 놈은 다르구나. 똑똑한 수재로서 교육받은 놈이니까 어련하겠느냐만은.“ “..............” “근데 열음아.” “...................네, 형.” “민서가 수재라면.... 너는... 아니, 해커는... 타고난 천재야.” “................” “나랑.... 아니, 나뿐이 아니지. [관계자 외 출입금지]는 너희들이 부러웠어. 언제나 위급할 때 우리를 도와주는 마술사 같았지. 무언가를 필요로 할 때 너희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필요한 걸 구해줬고, 뭔가를 알고 싶을 때 너희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정보를 제공해줬어. 너희들이 없었다면... [관계자 외 출입금지]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야.“ “...................” “그 빛나는 능력을..... 이런 더러운 범죄에 써서... 정말 미안하다. 너희들도 하고 싶지 않았을텐데.... 비원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 명령에만 따르고, 내 말에만 행동하게 만들어서 정말 미안.“ “.................” “너도 알겠지만, 이미 한참 전에 내 명령은 모두 해제. 알지?”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있는 휴인의 미소에 열음은 눈이 부셨다. 너무 눈이 부셔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정말 미안한데, 나 하나만 더 부탁해도 될까?” 열음이 가까스로 눈물을 참고있을 때, 휴인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정작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생각하니까, 걸리는 게 많아서.” “.............” “내 동생, 유인이 알지?” “.......알아요.” “너무 착해서 탈인 애야. 세상 물정도 모르고, 모든 게 너무 아름다워보여서... 정작 자기가 입는 상처와 슬픔은 고스란히 자기 감당으로 내버려두는 애. 지금도 정신병원에서... 진정한 세상과 마주하기 위해 애쓰고 있을 거야. 한 마디로 하자면.... 뭐, 자기 오빠랑은 딴 판인 애지.“ 열음은 하고싶은 말을 애써 참았다. 열음이 보기에 휴인은 그의 동생과 너무나도 비슷한 모습이었다. “..........내 동생을 부탁해.....” “............. 형..........” “아, 너무 확대해석하진 말고!! 사귀라거나, 지켜주라는 건 아니고... 그냥 정신병원에서 나오면 잘 지내나, 괜찮나, 울진 않나, 가끔씩만 살펴줘. 내가 염치없이 너한테 그 이상은 바라면 안되지. 뭐, 지금도 충분히 염치없긴 한데.... 그래도 안면몰수하고 그건 부탁할게.“ “............ 걱정마세요.” “............... 니가 있어서... 정말 고마웠다.” 열음의 심장이 아릿하게 아파왔다. 이제 그는, 자신의 우상들을 모두 보내야만 했다. 더욱 미치겠는 사실은, 그들의 최후를 알면서도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열음의 우상들은... 그에게 너무 큰 아픔을 주고만 있었다. “가볼게요.” 열음은 눈물이 날 것만 같아 서둘러 의자에서 일어섰다. 제기랄.... 그는 휴인에게는 들리지 않게 작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화가 났다. 대상없는 분노에 그는 참을 수가 없었다. 열음이 이미 일어섰는데도 불구하고 휴인은 그대로 앉아있었다. 그들의 만남은 이게 마지막인데, 끝까지 뭘 그렇게 배려하려고 야단인지. 휴인은 필사적으로 열음에게 수갑을 찬 자신의 손을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 이 방에 들어설 때부터 휴인은 자신의 손을 숨기려 했었다. “말해줄 게 있어요, 형.” “......... 응, 말해.” “.......... 형들이 마지막까지 돈을 모아서 지원했던 고아원의 백혈병 꼬마. 그 꼬마 수술 잘 받았대요. 성공적으로 돼서, 지금은 퇴원하는 날짜도 잡혔대요.“ “............다행이네.” 열음은.... 눈물을 참고... 참고... 참으려 애썼다. “........형들은..... 헛되이 산 거.... 아니예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천국 만든거라구요.” “............... 그래.” “적어도 그 꼬마한테는... 천국을 선물해준거예요.” 오늘 휴인을 마지막으로, 열음은 그의 우상들과 이별을 맞이해야 했다. 도대체 열음은, 혼자 얼마나 아파하고, 얼마나 울고, 얼마나 외로워해야 할까. “검은 정장 좋다, 이열음.” “.................” “왠지 마지막 만남에 어울리는 색 같아서.” “지금 장례식 아니잖아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너무 큰 짐 지워줘서 미안하다. 다음 생엔, 우리가 해커위해 희생할게. 고마워.” 열음은 그 말을 듣자마자, 방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버렸다. 마지막 만남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야만 했던 이유는...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어서였다. 열음은 눈물을 닦지도 않고 달렸다. 그의 슬픔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마지막을 준비해주는 일이었다. 누가 뭐라해도, 열음의 인생은 [관계자 외 출입금지]를 위해 돌아가고 있었다. [뉴스 속보입니다. 5명의 사람들이 독약을 마시고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오늘 오후 4시 44분, 이들은 서로 합의 하에 똑같은 약을 마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들 중 4명은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 불리던 청소년 범죄자 집단이며, 나머지 한 명은 이들을 조사하던 검찰 측의 관계자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스물 두 살 정양은 자신의 집에서, 열여덟살 동갑내기인 강군, 신군, 지군, 백군은 각각 교도소, 유흥업소, 집, 길거리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신고를 접수한 뒤 출동한 경찰들은....] “지환희!!! 편지다.” 무표정하게 앉아있는 환희에게 소년원의 간수가 편지 한 통을 건넸다. 환희는 깡마른 손가락으로 구겨진 편지를 꺼내 펼쳐들었다. 편지지 가득 단정한 글씨체가 빼곡히 들어차있었다. 아무 무늬없는 편지지와 대조적으로 깔끔하고 예쁜 글씨체였다. 환희는 단번에, 그 글씨체가 자신의 오빠인 환영의 글씨체라는 것을 알아챘다. [안녕, 환희야. 오빠야.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날 용서해.] ............. 바보....... [이번엔 나 자신만을 생각했어.] ............... 병신........ [널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나 이제 곧 출소날인데...... [거긴 무서울거야. 난, 내 동생 이해해.] 아니야, 가끔 이 곳에도 빛이 새어들어. [넌 나보다 강하니까.] 이번엔 정말 미친 짓 한 거야. [넌.... 잘못한 거 없어.] 난 죄인이야. [빌어먹을 세상에 널 남겨둬서 미안해.] 아니야, 오빠...... [니가 날 싫어해서 다행이다. 울지마.] ............내가 오빨 왜 싫어해...... [미안해, 미안해.] 뉴스에서 봤어. 오빤 죽기 직전에도 돈을 벌기위해 맞고있었대. [너만 생각하면 내가 약해져.] 온 몸이 멍투성이였대. [너에게 해준 게 없어.] 오빠가 남긴 돈과 유품이 모두 나에게 왔어. [이번 여행에는 너도 끼워줄 수 없어.] ...............보고 싶어........ [관계자 외 출입금지거든.] ..................... [사랑해, 환희야.] 사랑해, 오빠. 119. 눈부신 천국 (작가시점) - 3년 후 “각각 50만원씩은 가능하겠지?” “이왕 하는 김에 통 크게 놀지? 난 150도 가능해.” “하하, 정이온 통 큰 거 내가 알지. 그래도 무리하진 말자.” 옛날, [관계자 외 출입금지]와 정시언이 한 달간의 시간을 같이 보낸 곳. 그들이 떠나고서 한동안 비어있던 그 자리에, 어느 샌부턴가, 여섯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여전히 시끌벅적하게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병신들, 합법적으로 돈 버는 방법이 한 두개야? 왜 지들끼리 폼 잡다가 뒤지고 지랄이야.” 욕설을 내뱉는 이온이와, “우리 오빠들이나, 너희 언니나.... 다들 바보같긴 했지.” 동의하며 매력적으로 웃어보이는 환희와.... “그래도 난 항상 보고싶어요. 언제나 옆에 있는 것 같아.” 울먹이는 유인이. 아, 그리고 또...... 그런 유인이를 말없이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여 울 공간을 만들어주는 열음이와. “나 오늘 진짜 일 열심히 했다구.....” “그래, 수고했다니까.” 투정의 보답으로 환희의 한 마디가 힘이 된 듯 씨익 웃는 준휘와.... “그만 펴, 몸에 안 좋아.” 이온이 손에 들린 담배를 빼앗아버리는 산이. 지환희, 정이온, 강유인. 그리고 해커. 아직 사라지지 않은, 제 2의 관계자 외 출입금지. 기존의 [관계자 외 출입금지]와 다른 점은, 범죄절대금지!! 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제 2의 관계자 외 출입금지가 결정된 지 올해로 3년째. “아, 메일왔는데? 주린이 누나가 보낸 거야.” 엎드려 노트북을 조작하던 준휘가 중얼대면, 그들은 순식간에 모니터 앞으로 모여든다. “아, 안이 사진이다!!!” 시언이와 [관계자 외 출입금지]가 낳은 아이. 진한이와 주린이가 키우는 아이. “근데 참 신기하지.” 안이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환희가 한마디 내뱉는다. “클수록... 휴인오빠를 닮아가.” “그래서 배신감 든다니까. 피 한방울 안섞인 휴인오빠는 닮으면서 왜 우리언닌 안 닮았냐구. 그냥 얼굴만 딱 보면 휴인오빠랑 민서오빠 둘이서 남자끼리 애 낳은 거 같잖아. 앞모습 보면 휴인오빠 같은데 옆모습은 민서오빠.“ 웃으며 대꾸하는 이온이. 모두 안이의 이야기로 바쁠 때 열음이는 슬쩍 컴퓨터 앞으로 다가가 메일을 작성한다. 안이의 사진을 첨부한 메일을 어딘가로 전송한 뒤, 수신메일기록을 태연히 삭제하는 그. 그리고, 2년전보다 더 성큼 자란 키를 자랑하듯 일어선다. “어디가? 밖에 추워.” 이온이의 말에.... “통화하고 올게.” “뭐?” “마지막 통화.” 열음이의 미소에, 이온이는 잠시 심장이 아려오는 것을 느낀다. “빨리와, 오빠.” 이온이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공인 닭살커플 열음이는 유인이의 이마에 키스를 한 후 밖으로 나가버린다. 티격태격 알콩달콩 사랑을 키워나가는 환희와 준휘커플은 둘만의 세계에 푹 빠진 채 이야기에 여념이 없다. 차마 유인이가 들을세라 욕설은 삼간 채 마당으로 나가는 이온이와, 그를 따르는 산이. 열음이를 향한 이온이의 사랑도, 이온이를 향한 산이의 사랑도 3년째 단 한 번도 끊기지 않고 지고지순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담배 그만 피랬지.” 아니나 다를까, 산이는 또 담배를 물고있는 이온이 옆으로 다가가 담배를 빼앗는다. “썅.... 왜 난 안되는거야.” 평소같으면 담배를 내놓으라고 난리를 칠 이온이가 오늘은 담배를 빼앗기고도 슬픈 표정을 지우지 않고 욕을 내뱉는다. 산이는 한 발자국의 간격을 두고 이온이에게 다가서지 못한 채 그녀의 얼굴만을 바라본다. “이온아....” “나도 병신이지. 3년간 미쳤다고 임자있는 새끼를.” 산이는 그저 묵묵부답. “열음이는.... 그래, 처음엔 휴인이형 부탁이었지만 지금은 진심이야. 난 그 새끼 눈보면 알거든. 유인이 착한 애니까... 점점 빠져들어서....“ “그딴 건 나도 알아.” 이온이의 차가운 대답에 다시 침묵이 이어지다가... “넌 안 지겹니? 난 지겨워죽겠는데... 넌 어쩌면 3년간 그렇게 한결같애?” 드디어........... “........좋으니까. 난 그냥 니가 좋아.” “병신.” 오늘........ “뭐해, 김산?” “... 으..... 응?” “빨리 내 옆에 와서 서. 니 어깨에 기대게.” “아..... 아, 응!!!!” 별똥별이 길게 꼬리를 그리며 지나가던 그 날에, 3년간의 짝사랑도 종료. 이온이의 뒤에 한 걸음 물러서 있던 한 발자국의 간격이 좁혀지면서 정이온, 김산 커플 탄생. 얼떨결에 한 쌍의 커플탄생을 목격하게 된 열음이는 피식 웃으며 마지막 통화를 위해 더욱 깊숙하고 외진 곳으로 몸을 피한다. 인적 하나 없는 공터에 가서야 그는 한참 주변을 확인한 후 핸드폰을 꺼내든다. 해커의 리더, 제 2의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책임자, 휴인이가 인정한 능력자, 유인이의 사랑, 비원이를 동경하던 소년,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마지막을 접한 단 한 사람.... 바로, 이열음. “여보세요.” 여러번의 신호음 끝에.... “형, 저 열음이예요.” 그의 입꼬리 끝에 번지는 미소. “아아- 안이 사진, 보냈다고? 고맙다.” 열음이의 전화를 받고있는 사람은, 그의 동경을 한 몸에 받고있는 비원이. “응? 아, 지금 시장 다녀오는 길이야. 가위바위보 했는데 졌거든.” 양손에 가득 담긴 짐을 추스르며 핸드폰을 뺨과 어깨 사이에 끼우는 비원. 주린이의 돈과, 열음이의 실력과,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깜찍한 사기극. 그들은, 살아있었다. 민서의 계획은 처음부터 죽음이 아닌 탈출이었고, 자살을 위장한 부활을 꿈꾸었다. 민서가 구한 독약은 ‘줄리엣의 독약’이라 불리는 고가의 약품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이 먹은 독약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의 그 약은, 하루동안 사람의 숨과 혈기를 멈추게 해주는 약으로, 24시간이 지난 후에는 잠을 잔 듯 다시 깨어나게 해주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워낙 고가의 약품이라 영국 현지에서도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민서는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으로 몰래 만들어놓은 개인계좌의 돈을 탈탈 털어 빈털터리가 되면서까지 그 약을 손에 집어넣은 것이다. 그들의 자살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 죽음을 조사할 검찰과 의료진을 매수할 돈이 필요했고, 주린은 아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선뜻 그들을 돕겠다고 나섰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사망사건을 맡은 자들은 모두 주린이 재력으로 사들인 검찰이었고, 그 사망을 진실로 포장해서 언론에 퍼뜨린 것은 열음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다섯 사람의 기록을 삭제하고, 프랑스에 다섯사람의 새로운 거처를 마련한 것 모두 주린과 열음의 힘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 주린이 누나가 안이 사진은 해마다 보내줄 수 있대요. 원하는 것 모두 해줄 수 있다고 했어요. 안이는 하늘이 주신 선물이고, 관계자 외 출입금지를 만난 건 행운이라고. 자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연락 안 끊어도 된대요. 열음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비원은 가벼운 한숨을 내쉰다. “아니, 이제 우리도 우리만의 인생에 걸기로 했어.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왔고, 지금에 만족한다. 그냥 우리 다섯... 아니, 여섯명만 뭉쳐있으면 충분해. 유인이한테는 니가, 환희한테는 준휘가, 이온이한텐 산이가 있고... 안이한테는 선주린이랑 이진한이 있잖아.“ - 형....... “니 기억에서도, 선주린 기억에서도... 이제 그만 우리를 지워줘. 해커짓으로 다른 나라 정보망에 침투해서 우리 정보 빼내는 짓 그만하고. 돈 보내지도 마. 우리 힘으로 알아서 하고 있어. 휴인이놈이 예술에 재능있는 거 여기와서야 알았잖아. 그 놈이 조각한 작품 하루에도 여러개씩 팔려. 환영이가 운영하는 음식점도 매출이 점점 올라서 이번에 가게도 확장할거고, 나도 거기 서빙 열심히 잘하고 있고... 민서는 뭐, 말 안해도 알지? 그 경영실력 어디 가겠냐? 프리랜서로 각 회사 돌아가며 돕고는 있지만, 요즘 제일그룹 다 허물어져 가는 거, 민서 탓이잖냐.“ - 돈은 그렇다치고... 다른 것도 다... 괜찮아요? “행복해. 그러니까, 너랑 나도 이제 그만 여기서 안녕하자. 3년간 고마웠다. 선주린한테도 안이 사진 마지막으로 보내준 거 고맙다고 전해.“ - 난........ “우냐?” - 존경해요, 형을.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너한텐 다 고맙고 미안하다. 미래를 부탁해, 제 2의 관계자 외 출입금지, 잘해봐. 수화기 너머에서 끝내 눈물흘린 열음과 달리 마지막까지 웃으며 전화를 끊어버리는 비원. 길게 끌어왔던 인연의 끈도 오늘로 끊어버리고 이제 드디어 관계자 외 출입금지. 비원은 깔끔한 아파트의 한 집 앞에 서 발로 문을 걷어차기 시작했고, 곧 민서가 작은 머리통을 빼꼼 내밀어 그를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성질 드러운 새끼. 안 그래도 부실한 문짝 다 부서지겠다. 너 아직까지도 가위바위보 진 거 승질나서 분풀이 하는 거지?“ 괜히 기분이 좋아진 비원은 민서를 보며 시비를 걸어본다. “백민서.” “왜?” 비원이 든 짐을 받아옮기며 묻는 민서. “형이라고 불러봐라.” “미친놈, 뭐래.” 어차피 바라지도 않던 희망, 씁쓸하게 웃는 비원을 향해.... “형.” 불러주는 민서. “나 이런 호칭 처음해보는데, 좋긴 하네. 듬직한게.” 귀엽게 웃고는 부엌으로 들어가는 민서. 부엌에는 앞치마 차림의 환영이 서서 소리친다. “재료도 있고!! 이제 밥 준비 해볼까?” 민서의 한마디에 기분이 좋아진 비원은 활짝 웃고는 거실의 컴퓨터 앞으로 직행. “안이 사진 보냈대.” 그의 한마디에 부엌에서 다다다다 달려오는 민서와 환영. “그 꼬맹이 크는 거 보면 기분이 좋아져.” “당연하지, 내 아들인데.” “여전히 아들 타령이야?” “내가 정시언은 강휴인한테 양보했는데 애들은 아니지. 정시언보다 천만배는 사랑스럽잖냐.” “아, 정시언이랑 강휴인도 불러와.” “아냐, 가만둬, 어제 둘이 사랑을 속삭이다 늦게 잤나봐. 아직 꿈나라야.” “누나.........” 잠이 덜깬 목소리로 시언을 부르는 휴인. 웃으며 더욱 그의 품에 파고드는 시언. 새하얀 침대 시트 위, 프랑스의 부드러운 햇살에 눈을 뜬 그들. “사랑해.” 3년간 하루도 빼먹지 않고 주고받는 말, 사랑의 고백. “나, 그 때 꿈을 꿨어, 3년전.... 우리 계획이 실행되기 전날.” 시언이 웃으며 말을 건네면... “싫어, 나 그 때 죄수복 입고있었잖아, 그거 잊어버려, 누나!!!” “넌 안 나왔고, 비원이가 나한테 한 말 있었어, 하늘에서 보자고.” “뭐야, 그 새끼 우리가 진짜 죽는 걸로 착각한 거 아냐? 그런 말 왜해?” “그래서 나중에 프랑스 와서 물어봤었어. 그런 말 왜 했냐고.” “뭐래?” “하늘에서 보자는 게... 비행기에서 보자는 소리였대.” “뭐야, 신비원 새끼 골때려.” 아직도 처음 사랑을 시작한 커플처럼 키득키득 웃는 그들. “누나, 나 행복해. 처음으로 세상에 감사해.” 그러다, 휴인이가 진지하게 말하고... “나도.” “누난.... 후회하지 않아? 3년전, 모든 것을 버리고 여기 온 거.” “단 일 분 일 초도... 후회한 적 없었어.” “고마워, 누나.” 이어지는 두 사람의 키스. “휴인아, 나 얼만큼 사랑해?” 시언의 질문에... 3년전의 어떤 날을 기억해낸 휴인. “내 삶만큼.” 그 날을 기억하는 시언 또한 똑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니 삶이... 얼만큼의 가치가 있는데?” “나를 살게 하고, 나를 죽게 하고, 나를 변하게 하는....” “..............” “절대적인 가치.” “야, 둘 다 빨리 일어나서 안이 사진 봐라!!!!” 휴인와 시언을 더 자게 놔두라는 환영의 당부에도 불구, 안이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흥분한 팔불출 아빠 민서가 소리치고, 환영이는 한참 미소를 짓다가 밥을 한다며 부엌으로 들어간다. 그 때, 칭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소파에서 힘겹게 내려오는 한 여자아이. 올해로 두 살. 강휴인과 정시언의 딸. 아니, 관계자 외 출입금지가 모두 함께 자신들의 손으로 키운 모두의 딸. 한국 이름은 천국, 프랑스 이름은 천국이라는 뜻의 파라디. 크고 맑은 눈망울도, 눈부신 미소도 휴인이를 쏙 빼닮은 딸. 한참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가 걸어오자 민서가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아이와 눈을 맞춘다. “우리 딸!! 일어났어? 낮잠 잘 잤어?” 딸이 귀여워 어쩔 줄 모르는 민서가 소리치면... 아무 말 없이 눈을 비비는 딸. “기다려!! 아빠가 우유 가져올게!!” 민서도 부엌으로 뛰어가고, 컴퓨터 앞의 비원이는 자기 앞으로 아장아장 걸어온 아이를 안아들고 밝은 미소를 지어보인다. “압빠.... 아빠....” 간단한 말을 하기 시작한 딸. “딸!! 이 사진 봐. 니 오빠야.” “.....오빠....?” 딸이 한창 모니터 앞의 안이 사진을 만지작 거릴 때... 비원은 말한다. “우리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 “세상을 바꾸고.....” 최고를 이룬 사람들. “천국을 만났지.......” 안녕. [번외편] 120. 안, 파라디 1 (작가시점) “내가 여행간다고 했잖아.” 175의 늘씬한 키, 웨이브를 넣은 길고 윤기나는 머리카락, 흰 피부, 커다란 눈, 높은 콧대와, 굳게 다물어진 빨갛고 도톰한 입술.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인상을 살짝 쓴 그녀가 수화기에 대고 소리친다. 그녀의 말을 맞받아치듯이, 수화기 속의 목소리가 대꾸한다. - 그 여행이 해외여행인 줄은 몰랐지, 너 친구들하고 마르세유 간다며!!! “한국이 더 끌려서.” - 너 그걸 말이라고 하냐!!! “엄마, 끊어. 나 구경 좀 하게.” - 저, 저기!! 친구들하고 같이 있는 건 맞지, 응? “아니, 친구들은 마르세유 가고 한국에 온 건 나 혼잔데.” - 넌 도대체 왜 아빠들만 그렇게 쏙 빼닮은 거냐!!!! “그럼 아빠를 닮지, 옆집 아저씨를 닮나?” 그렇다. 지금 엄마와 싸우고 있는 이 소녀는 시언와 휴인의 딸 파라디. 그러니까, 수화기 속에서 그녀를 향해 화내는 사람도, 우리의 시언이. 올해로 열일곱살을 맞은 파라디는 아빠들의 지극한 사랑과 엄마의 정성으로 예쁘고 아름답게 성장했다. 외국인이라 학교에 다녀도 적응을 못하고 따돌림을 당하면 어떡하나, 하는 부모들의 걱정을 물리치고 파라디는 프랑스 안에서도 남자친구들의 구애로 팔불출 아빠 민서를 걱정하게 만들었고, 동성친구들 사이에서도 치솟는 인기로 엄마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예쁘기만 하면 다행이련만, 모두가 오냐오냐 키운 이 딸은, 자만심과 싸가지의 결정체로 자라나서 학창시절의 이모.... 그러니까 정이온 못지않은 성격으로 성장했다. 이 간 큰 딸은 지금, 집이 있는 프랑스 파리를 떠나 잠시 마르세유로 여행을 간다고 뻥을 치고.... 한국으로 덜컥 날아와버린 것이다. - 바, 바꿔줘!! 나 바꿔줘, 누나!!!! 한숨을 쉬는 파라디. 드디어 시작됐다. 아빠들의 극성이. - 딸!! 보고싶어!! 돌아와!! 나 요즘 니 조각한단 말야!! 니 얼굴이 필요해, 딸!! 딸을 부르며 소리치는 휴인아빠와.... - 괜찮은 거야? 다친 데 없지? 아빠가 걱정돼서... 밥은 먹었어? 잔소리 시작하는 환영아빠와.... - 딸!!!! 지금 돌아오면 아빠가 갖고싶은 거 다 사줄게, 옷? 신발? 귀걸이? 가방? 아예 울부짖는 민서아빠와.... - 딸아, 너 안 오면..... 우리 3일안에 다 피말라 죽는다.... 결코 농담같지 않은 협박을 하는 비원아빠. 파라디는 짜증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그대로 핸드폰을 닫아버렸고, 한 술 더 떠 전화가 더 오지 못하도록 전원을 꺼버린다. 금발로 염색이 된 머리위에 걸쳐둔 선글라스를 쓰며, 인천공항 밖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 파라디. 말로만 듣던, 엄마와 아빠의 나라, 한국.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며 미소를 짓는다. 친아빠를 무척 닮은 그녀의 미소가, 미친듯이 눈부셨다. “엄마, 나 지금 나간다!!!!” 오늘도 아침밥은 물건너가고, 일어나자마자 세수만 하고 현관문으로 달려가는 아들. 주린은 그런 안을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심각한 잠꾸러기 이안. 그는 교복을 입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교복을 입고 잠드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조금만 일찍 일어나지, 머리가 까치집이야. 손질 안하고 가도 되겠어?” “괜찮아, 난 잘생겨서 오히려 이런 빈틈을 보여줘야 애들이 열광해.” “샌드위치 싸놨어. 가는 길에 먹어.” “아냐, 됐어. 나 버스타고 갈 거야.” “...... 차 대기하고 있는데.....” “나 차타고 학교 가는 거 부담스러워, 엄마.” 안이를 보는 주린의 눈빛은 언제나 부드럽고 따뜻하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주린은 여전히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고, 그녀의 브랜드도 세월이 갈수록 더욱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선주린의 하나뿐인 아들 이안은 자신과 같은 이름의 옷 브랜드 이름만큼이나 유명했다. 그는 브랜드 이안을 가장 잘 나타내는 모델 이안이었으니까. 귀여운 얼굴, 큰 키, 선주린으로 인해 키워진 패션감각, 모든 것을 소화하는 옷빨은 현재 열아홉살인 그가 열 다섯 살부터 모델일을 시작하게 된 이유였다. “나 오늘 조금 늦을 거야. 촬영 없으니까 괜찮지?” “알아, 이모 만나고 올 거지?” “아... 엄마 울까봐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왜 울어, 얘도 참....” “내가 다 알아, 엄마가 날 독차지하고 싶어서 안달난 거.” 안은 싱그러운 미소를 짓는다.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은 중학생이 되고나서부터였다. 굳이 알게 될 필요 없었던 그 사실을 밝히게 된 것은 안의 이모인 정이온을 비롯한 [제 2의 관계자 외 출입금지] 전원이 그를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물론, 시언과 [관계자 외 출입금지]가 살아있다는 사실은 비밀이었다. 그것은 죽을때까지 주린과 열음만이 지니고 있어야만 하는 진실이니까. “아빠는 싫어할 거야. 그러니까 아빠한텐 말하지 마.” “알고 있어.” “다녀올게.” “안아....” 주린의 부름에 큰 집의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던 안이 돌아본다. “잘 자라줘서... 난 너한테 너무 고마워, 안아.” “엄마가 잘 키워서 그래.” “모든 사실 듣고도 방황 안해줘서 고마워.” “왜이래, 나 방황 중이야, 나 사춘기잖어. 나 그렇게 착한 놈 아닌데. 나 고3이면서도 공부도 안하고 여자애들이랑 막 놀러다녀. 그리고 엊그제 친구들이랑 술 먹느라 늦게 들어온거야. 그리고 일주일 전에 나 학주한테 맞은 거 아냐, 옆학교 애들이랑 싸움했어. 그래서 메이크업 담당 누나랑 한 판 했다니까. 입가에 상처 났거든. 아빠한텐 이르지마?“ 괜히 주린의 마음을 안정시키려 과장되게 말하며 씨익 웃는 안. 안이 말을 끝내기 무섭게, 주린의 눈에 그렁그렁 맺히는 눈물. 그녀는 아들의 뺨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한마디 내뱉는다. “하늘이 나한테 준 선물이야, 안이 너는.....” “그런 말 하지마, 엄마.” “안아.......” “엄만, 날 버리지 않은 유일한 부모야.” “............" "난 내가 복잡한 사정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아. 난 그저 남들보다 더 사랑받고 자란 것 뿐이야.“ 기어이 눈물을 쏟는 주린. 안은 웃으며 그녀를 한 번 안아주고는 씩씩하게 소리친다. “아들 학교 다녀올게요!!” 주린의 앞에서는 농담도 하고 바보같은 행동도 자주 저지르는 안이지만 사실 학교나 촬영현장에서 보이는 그의 모습은 정반대였다. 그는 스무살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범상치 않은 카리스마를 보이곤 했다. 나른하고 우아해보이는 모습 덕분에 인근지역 여자아이들 사이에서는 우상이 되어있었다. 잘 정돈된 넓은 정원을 지나면서 안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자신을 키우고 있는 친아빠인 진한과, 자신에게 헌신적인 주린 말고도 친엄마와, 자신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도와준 남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남다른 출생의 비밀에도 그저 웃어넘길 수 있었던 것은 주린이 항상 옆에 있기 때문이었다. 안이가 사소한 감기로 아프기라도 하면 예정되어있던 패션쇼 스케줄을 취소하고 아들의 병간호에 매달리는 주린이었다. 그 크나큰 사랑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기에 안은 방황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단지 그의 속에서 타오르는 답답함에 탈출구가 필요했고, 그랬기에 모델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 뿐이었다. 하지만 탈출구로 시작한 모델활동이 예상외로 호평을 받으며 폭발적 인기를 가져왔다. 학생이라는 이유로 연예계의 러브콜은 정중하게 사양하고 있지만 모델활동은 전보다 더욱 왕성해져서 이제 학생으로서의 본분보다 모델 이안으로서의 생활을 지속하는 날들이 더 많아졌다. 아빠인 진한은 아들의 그런 모델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아빠의 쓸쓸한 눈은 언제나 안의 마음을 저리게 했다. 과연 젊은 시절,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어른들에겐 어떤 사정이 있었을까. 안은 지금 열아홉살이다. 이모에게 들었던 [제 1의 관계자 외 출입금지]는 그 때 열여덟살에 불과했다. 안보다 어린 나이였던 그들이, 친엄마를 돕고 안을 태어나게 만들었다. 그들은, 안을 정말 미친듯이 사랑하고 있었을까. “미안, 아저씨. 오늘은 그냥 걸어갈게요!” 대문을 열고, 대기하던 기사아저씨에게 소리친 안은 버스정류장으로 뛰기 시작했다. 헝클어진 머리를 계속 매만지며 뛰던 안은 문득 자신이 늦었단 사실을 자각했다. 어차피 뛰어도 지각, 안 뛰어도 지각이다. 뛰어도 맞는 거고, 안 뛰어도 맞는 거다. 굳이 뛰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낀 안은 그냥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머리는 까치집에, 안에 자신이 출연한 잡지 한 권이 든 가방을 한 쪽 어깨에 걸친 채 슬리퍼만을 신고있는데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스타일리쉬한 모습이었다. 믿을 수 없게도 그의 모습은 비원과 흡사했다. 그의 친구들은 언제나 그런 안의 모습을 보고 역시 모델이란 다르다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곤 했다. 그 때 안의 핸드폰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리기 시작했다. 친구인가, 생각하며 핸드폰을 꺼내 액정화면을 확인하자... 맙소사, 매니저였다. “여보세요.” - 너 지금 어디야? “오늘 촬영 없잖아. 나 학교가. 이번 주 들어서 처음 가는 거야.” -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내가 어제 이야기했지!! 어쩐지 졸려서 정신 못 차리더라. 내가 잠결에 건성으로 대답하지 말라 그랬지!! 다음주 촬영 이번주로 미뤄진댔잖아!! 매니저가 하는 말을 듣고보니 그런 듯도 싶었다. 다른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고 건성으로 대답하는 버릇이 문제였다. “촬영 없다고 하니까 엄마도 아무 말 없던데.” - 너 정신 안 차리지? 오늘 촬영은 핸드폰 광고 지면이다. 옷이 아니고!!! “아... 그랬나...” - 지금 데리러 갈게, 어디야? “아니야. 나 지금 버스 정류장 다 왔어. 버스 타고 갈게, 어디로 가면 돼?” 매니저가 광고현장을 설명해주는 말을 듣고 있자니 점차 또 지루해졌다. 이미 알고있는 장소인데도 불구하고, 매니저는 안이 못 미더운지 위치를 한 번 설명하고, 또 두 번 설명하고, 자세하게 세 번 더 설명하고... 안은 버스정류장에 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고, 그의 눈에 지금 막 택시에서 내리는 한 소녀가 보였다. 아니, 소녀는 맞는 것 같은데, 인상을 보면 더 성숙해보였다. 교복차림도 아니었고, 염색한 머리에 걸쳐진 선글라스도- 어디선가 꼭 본 듯한 인상에 안은 모델일을 하던 기억을 되살렸다. 패션쇼에서 봤던가? 아니면 광고 현장? 소녀의 큰 키라던가, 잘빠진 몸매라던가, 한 눈에 확 튀는 미모라던가. 모델인 것은 확실해보였다. “아저씨, 여기 서울 맞아? 나 여기 지리 잘 모른다고 인천에 내려준 거 아니지?” 택시기사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소녀. 존댓말이라고는 모르는 소녀인 듯 했다. 안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 야, 이안!!! 너 내 말 들었어? 너 지금 바로 와야돼!! 스태프들 다 기다려!! 매니저의 고함소리에 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어, 어, 지금 가.” 눈길은 소녀에게 고정한 채 얼빠진 목소리로 가까스로 대답한다. 통화를 마친 안은 핸드폰의 밧데리를 확 빼버렸다.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뭐라 단정지을 수 없는 강한 예감이 그를 휘감았다. 그는 마음 속으로 매니저 형에게 용서를 빌었다. 핸드폰 지면 광고는, 날려버릴 각오가 되어있었다. 안이 매니저와의 통화를 끝냈을 무렵, 소녀도 택시를 떠나보내고 있었다. 안은 성큼성큼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저기요.” 심각한 표정의 안과 달리 소녀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뭐야, 너 누구야?” ..... 이렇게 건방진 여자애라면 안이 기억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안은 누군가에게 대책없이 말을 걸고 있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단지 예뻐서만은 아니다. 예쁜 여자애들이라면 모델계에 깔리고 널렸으니까. 다른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그도 잘 알 수 없었다. “그 쪽... 나 알죠? 우리 어디선가 만났던 거 같은데.” “내가 널 어떻게 알아. 너 프랑스 살아?” “........... 프랑스?” 이탈리아 패션쇼에 참가한 적은 없지만 프랑스까지는 가보지 못했다. 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모델... 아니예요?” “아니야.” “..... 이름이... 뭐예요?” “.......... 파라디.” 이름을 묻자 소녀도 안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한국 땅에서, 한 소년과 소녀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121. 안, 파라디 2 (작가시점) 아무리 기억해도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안은 파라디란 모델과 만난 적도, 마주친 적도, 같은 무대에 선 적도 없었다. “... 죄송합니다. 사람을 착각했나 봅니다.” 머리를 쓸어넘기며 대답하는 안을 향해..... “너 이 옷 어디서 산 거야?” 쏘아붙이듯 묻는 그녀. “이거.... 교복인데요.” “맙소사, 여긴 진짜 교복이란 게 있어? 나 이런 거 처음봐. 이 옷 이쁘다!!” 외국물 먹은 여자애라는 건 얼굴을 보자마자 깨달았지만, 교복을 보고 신기해하질 않나, 보자마자 반말을 찍찍 써대질 않나. 안의 인내심도 결국 한계에 달했기에, 그는 그녀를 보며 한마디 건넸다. “야, 너 몇 살이야.” “십육. 아, 한국 나이로는 십칠이겠다.” ........ 열일곱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십칠이라니. “근데 왜 반말하냐.” “반말이 뭔데?” “....... 왜 말 낮추냐고.” “말을 낮추는 게 뭔데? 그걸 어떻게 낮춰?” 말이 안 통하는 소녀였다. 안은 그냥 반말로 맞서기로 작정했다. “말도 잘 못하는 게 한국엔 왜 오냐.” “이 옷 어디서 사?” 싸움이라면, 그게 몸싸움이 됐든, 말싸움이 됐든 지지않는 안이었다. 그러나 이 소녀 앞에서는 모든 게 역부족인 듯 싶었다. “너 내 말 씹냐.” “말을 어떻게 씹어? 한국말이 이상한 게 많은거야, 니가 이상한 말을 쓰는거야?” “한국 온 적 없어?” “처음이야.” “..... 입양아냐?” “엄마도 한국인, 아빠들도 한국인. 너 내가 한국말 잘 못한다고 무시하지마. 넌 프랑스어 한 마디도 못할 거 아냐?“ “아빠들?” “나 이 옷 사고 싶어. 살 수 있는데가 어디야? 가르쳐줄래?” 졸지에 말 걸었다가, 프랑스에 사는 한국소녀에게 잡히게 된 안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데리고 교복을 파는 곳을 향해 앞장 설 수밖에 없었다. 대충 눈에 띄는 교복점에 데리고 가자 소녀의 눈에서 반짝 빛이 나기 시작했다. “맙소사, 교복이 왜 이렇게 많아?” “내가 다니는 학교 것만 있는 게 아니잖아.” “한국은 진짜 다들 교복만 입나봐.” “프랑스랑 비교하지마. 프랑스에도 교복입는 학교 있긴 있을거야, 니가 모르는 거겠지.” 안의 비꼬는 말이 들리는 건지, 아닌건지... 파라디는 교복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 넥타이 이쁘다. 맙소사, 이 옷 색깔 봐.” “너 왜 남자들 교복을 봐, 여자 교복 살 거잖아, 넌 이 쪽이야.” “여자랑 남자랑 교복이 달라?” “너 지금 나랑 농담하냐.” “와, 치마다!!” 교복에 홀린 듯 미친듯이 구경을 해대는 파라디를 보며 안은 한숨을 쉬었다. 뭐 이런 여자애가 다 있을까. 입양된 애도 아니고, 한국인 엄마아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처음 온 걸까. 그리고, 여자들에게 관심없는 자신이 왜 이 여자애에게 말을 걸었을까. 단순히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이유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같이 커피 모델을 한 적 있는 같은 학교 여자애와는 인사도 한 적 없으니까. 아니, 자세하게 말하면 운동장에서 마주친 그 여자애가 인사했는데도 안이 먼저 무시했다. 광고현장에서 스태프에게 건방지던 여자애가 안에게는 먼저 착한 척 인사하는 게 짜증났기 때문에. 물론 그 인사를 무시하는 바람에, 학교에선 ‘개싸가지 이안’ 이라고 불렸었다. “기다려, 입어보고 올게.” 파라디는 마치 명령하듯 중얼거렸다. 안은 이 상황을 박차고 나가지 못하는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파라디가 고른 교복은 결국 안이 다니는 학교의 교복이었다. 검은 치마와 하얀 블라우스가 조화된 교복. 그렇다, 안이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교복이 바뀌었다. 주린이 그 고등학교의 교복 디자인을 새로 해주겠다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안을 위한 교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부쩍 길어진 다리탓에 교복을 하나 더 살까, 생각하며 교복을 살펴보던 그 때. “나 어때?” 탈의실에서 파라디가 나왔다. 교복입은 그녀를 보자, 눈이 부셨다. 아니, 눈이 부신 이유가 교복 때문인지... 그녀의 미소 때문인지 모르겠다. 광고현장이나 팬들에게서 미소가 눈부시다는 말을 자주 듣는 안이지만, 자신이 눈부신 미소를 직접 접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자신의 웃음은 파라디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남자교복이 안을 위해 제작된 것이라면, 여자교복은 파라디를 위해 제작된 것 같았다. 세상에서 비싸고 멋지고 특이한 옷은 다 입어본 모델 이안이, 교복을 입은 여학생에게 황홀함을 느끼고 있다니. “됐네, 여러 가지 입어보지 말고 그냥 그거 사라. 기다리기 귀찮아.” 안은 놀란 감정을 숨기기 위해 짜증스런 말투를 만들어내며 중얼거렸다. 안이 그러거나, 말거나. 파라디는 거울을 보고는 자신의 모습에 꽤나 만족한 눈치였다. 그녀는 교복의 값을 지불했고, 점원에게 그 교복을 입고 가겠다고 설명했다. 물론, 반말로. 그리고 그들이 가게를 나가려던 순간. “저기... 모델 이안 아니예요?” 점원 한 명이 안의 앞으로 쪼르르 달려오며 물었고, 파라디는 약간 인상을 찌푸리며 점원과 안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니예요, 닮았단 소리 가끔 들어요. 이안은 무지 바쁠걸요.” 싸인이라면 귀찮아서 경기를 일으키는 안은 거짓말로 둘러댄다. “하긴... 근데 너무 닮으셨네요.” “제가 걔랑 같은 학굔데요, 걔는 실물보다 못해요. 그리고 저처럼 슬리퍼도 안 신구요, 걸어다니지도 않아요. 건방진 게 맨날 밴타고 학교 왔다 갔다...“ 안의 말을 주의깊게 경청하는 점원을 보며 그는 속으로 웃었다. “그럼 가자.” 안은 한참을 떠들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있는 파라디의 손을 끌고 가게 밖으로 나섰다. “한국에 너 닮은 모델 있어?” 뭐 씹은 표정을 하고있는 파라디. “어, 왜?” “한국 모델 수준 알만해.” 뭘 아는건지, 모르는건지... 세계에서도 각광받기 시작하는 안의 모델수준 타령을 하는 파라디. “우리 아빠들은 교복도 못 입어봤다는데....” “너 아까부터 왜 계속 아빠‘들’이래?” “한국사람들이 왜 맨날 한민족, 한민족 하는지 알겠어.” “너 또 내 말 씹냐.” “다들 얼굴색도 똑같고, 머리색도 똑같애. 뭐지, 같다고 생각하는거? 동.. 동...” “동질감.” “그래, 동질감 느낄만 해.” “근데 넌 염색했잖아.” “그러니까, 나 다시 검은색으로 염색할래, 우리 미용실 가자.” “야, 너 가이드가 필요하면 여행사에 문의해야지, 왜 애꿎은 나를....” “애꿎은 게 뭐야?” 깜빡했다, 말이 안 통하는 여자애라는 사실을. “나, 한국 관광하러 온 거 아니야.” “그럼?” “구경하러 왔어.” “다른 게 뭐냐.” “경복궁이나 남산이나 박물관 보려고 온 거 아니야. 난 생활을 느끼고 싶었어.” “..............” “교복사고, 미용실 가고, 길거리에서 쇼핑하고.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하는 거. 우리 엄마랑 아빠들이 예전에 그렇게 생활했던 것처럼.“ 안은 한숨을 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겹게도 눈이 아릴만큼 새파랗다. 날씨 핑계대며 학교도 땡땡이치고, 광고도 때려쳤다고 말한다면 변명이 될까. 새파란 하늘과, 눈부신 미소를 지닌 여자애와 함께 다니는 게 죄가 되진 않겠지. “가자, 잘하는 미용실 알아.” 머리도 했고, 쇼핑도 했고, 밥도 먹었다. 이제 날이 제법 어둑해지고 있었다. 안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현재 일곱시다. 여덟시에 [제 2의 관계자 외 출입금지]인 이모, 삼촌들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 급한 김에 파라디도 데리고 약속장소인 한 공원의 분수앞에 앉아있었다. 친구 하나 데리고 온다고 기분 나빠할 이모나 삼촌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즐거워하며 놀릴 망정. “고마워. 덕분에 즐거웠어.” 파라디가 고맙다는 말도 할 줄 알다니. 안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파라디는 역시 까만색의 머리가 더 어울렸다. 검은 색의 교복 치마와 머리 색깔이 조화롭게 느껴졌다. “재밌었어. 너 때문에 그립기만 하던 내 나라가 더 좋아졌어.” “...... 프랑스는.... 언제 가?” “조금 있다 가야돼. 8시에 택시타고 공항에 갈 거야.” “말하지, 데려다줄 걸 그랬네.” “한국 애들은 오늘 너랑 내가 했던 것처럼 이런 식으로 데이트 하겠지?” “웃기지마, 난 너 여자로 안 보여.” “나도 너 남자로 안 보여.” “그럼 그런 말 하지마.” “솔직히 말해봐, 너 아까 나한테 말 건 거, 내가 이뻐서 그런 거지? 괜히 어딘가에서 본 척 하면서 다가오는 거, 한국남자들의 수법이랬어, 엄마가.“ “공주병하고는....” 신기한 일이었다. 까칠한 안이나, 싸가지 없는 파라디나... 누군가와 단기간에 친해지는 일은 굉장히 드물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하루만에 몇 년을 만난 친구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서로가 이성으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저... 오랜만에 만난.... 친구 또는... 가족... 같은 예감이랄까. “꼭.... 오늘 가야돼?” 안은 그런 말을 꺼내는 것이 부끄러운 듯 시선을 반대쪽으로 돌린 채 물었다. 파라디는 그런 안이 귀여웠는지 피식 웃어보였다. “응, 꼭 가야돼. 안 그러면 우리 아빠들 울어.” “................” “아까는 왜 아빠‘들’이냐고 물어보더니, 왜 지금은 안 물어봐?” “대답안하는 거면, 좋은 건 아닐 거 같아서.” “...........” “왜, 그런 거 아냐? 엄마가 재혼하셨다거나....” “아니, 우리 엄만 아빠밖에 몰라. 아빤 더더욱 엄마밖에 모르고. 뭐라더라... 일..단심?” “일편단심.” “그래, 그거.” “근데 왜 아빠들이야?” “모르겠어, 그냥 태어났을때부터 지금까지... 나한테 아빠는 네 명이었어.” 네 명이라, 안은 갑자기 [관계자 외 출입금지]가 생각났다. 친엄마와 [관계자 외 출입금지]는 이미 죽고 없었지만... 괜히 파라디가 부러워졌다. “엄마랑, 친아빠랑, 다른 아빠들이 너무 친해서 그런거 아닐까. 다섯명이 되게 친해. 예전부터 친했대. 한 명이 없어지면 나머지 네 명이 못살만큼. 그래서 다섯명이 함께있기 위해 모든 걸 버렸대. 이 한국을 버린 거지. 자신들의 나라를 버리고, 서로를 택한 거야. 그리고 날 낳은 거고.“ “....... 그래서 넌 이번에 한국을 처음 온 거야?” “응, 엄마랑 아빠들은 한국에 오고싶지 않대. 오고싶은데 올 수 없는 걸 수도 있고.” “혼란스러웠겠다, 어렸을 때는.” 안은 자신의 출생비밀을 알았을 때 기억이 떠올랐다. 파라디 또한, 방식은 다르지만 어떤 식으로든 혼란스럽지 않았을까. “별로. 잘 살고 있다가 중간에 몰랐던 아빠가 확 나타난 것도 아니고... 그냥 태어났을 때부터 그랬으니까 난 아무렇지도 않았어. 당연한 거였거든. 물론 어렸을 땐 친구들 아빠가 한 명씩인걸 보고 왜 그러냐고 물어보기도 했지만 솔직히 이혼 때문에 아빠나 엄마가 두 명씩인 애들도 많았고... 프랑스 사람들이 남의 엄마나 아빠에 관심가지는 것도 아니고...“ 가로등이 켜지며 분수대가 작동되어 물이 튀어올랐다. 안은 벤치에 등을 기대고 솟아오르는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안은 계속 이야기를 듣고싶어하는 눈치였기에, 파라디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친아빠는 조각을 해. 제일 장난스럽고, 내가 봐도 웃는 게 빛나. 젊었을 땐 되게 귀여웠을 거야. 내가 어렸을 땐 항상 손 잡고 산책했지. 맨날 아이스크림 사줘놓고 자기가 다 뺏어먹었어. 그러다 항상 내가 울고. 집에 도착하면 엄마가 아빠 막 혼내고. 봐, 이 선글라스도 친아빠가 사줬어. 놀아주는 건 최고였지. 제일 웃기기도 했고. 잘 안아주고, 잘 웃어주고.“ 부러웠다. 안의 아버지 진한은 겉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친아빠가 1호 아빠라고 치면, 2호 아빠는 음식점 주인이야. 주방장이지. 음식맛이 끝내줘. 너도 맛보면 아마 뒤로 넘어갈걸? 프랑스 놀러오면 꼭 찾아와. 2호 아빠는 다정하고 자상하고 따뜻해. 화내는 걸 본 적이 없거든. 내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언제나 2호 아빠한테 말하지. 화 안내고 조용히 넘어가거든. 아빠가 큰소리나고 싸움하는 걸 워낙 싫어해서. 그래도 조심해야돼. 진짜 화나면 제일 무서워지거든. 1호아빠가 언제 한 번 가출했는데 돌아오자마자 막 두드려패는 거 보고 내가 깜짝 놀랐다니까. 그래도 나한텐 잘해줘, 워낙 딸을 좋아해서. 잔소리가 좀 심하긴 하지만.“ 진한에게 혼나본 적이 있었던가, 안은 생각했다. “3호 아빠는.... 스토커지.” “스토커?” “학교에 진짜 킹카였던 남자애가 나한테 데이트 신청을 했어. 파티에 같이 가자고. 모르겠어, 날 정말 좋아했던 건지, 아니면 동양 여자애라 흥미가 있었던 건지. 어느 쪽이든 난 상관 없었지. 난 걔한테 아예 관심 없었거든. 그래도 심심해서 파티에 따라갔지. 근데 3호 아빠가 미행을 한 거야. 알아주는 프리랜서 비즈니스 사업간데, 최면이 있지, 그걸 따라오다니.“ “최면이 아니라 체면이겠지.” “돈을 잘 버니까 맨날 비싼 물건들로 날 꼬시려고 하지. 안 그래도 난 아빠 좋아하는데. 맨날 친아빠를 경계하거든. 내가 친아빠랑 한 번 놀러가면, 3호 아빠랑은 두 번 놀러가야돼. 안 그러면 삐지고 화내고 장난 아니야. 내가 오늘 안가면 3호 아빠는 울걸? 실종신고 낼 수도 있어.“ 지겨워하는 척 해도 파라디의 얼굴은 맑게 빛나고 있었다. “4호 아빠는 잘생겼어. 늙지 않는 것 같아. 말도 잘 안하는데 가끔 되게 웃겨. 2호 아빠 음식점에서 서빙을 하는데 프랑스 아줌마들이 껌뻑 죽는다니까. 이상하게 아줌마들한테 그렇게 인기가 많더라구. 카리스마도 끝내주고. 잘생기고 키도 제일 크고, 카리스마도 있어서 부모님이 학교 오는 날이면 맨날 4호 아빠만 불렀어.“ “........ 그래서 4호 아빠가 갔어?” “아니, 아빠 네 명이랑 엄마랑 다 같이 오더라구, 항상.” “엄마는.... 어떤 분이야?” 안은 기분이 이상했다. 파라디의 엄마에 대해 물어보면서,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유쾌해. 아빠들을 다 이길 수 있는 파워우먼. 나랑도 제일 잘 통하지. 엄마랑 딸은 세상에서 제일 친한 친구 사이거든.“ 주린도, 안이가 딸이길 바란 적이 있었을까. “난, 내가 복잡한 사정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아. 난 그저 남들보다 더 사랑받고 자란 것 뿐이야.“ 파라디의 말에 안은 행동을 멈추었다. 그 말은... 오늘 아침 주린에게 건넨 자신의 말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리고, 안은 자신도 모르게 한 마디 꺼냈다. “너, 내 동생할래?” 왜 갑자기 그런 말이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여자아이들과는 인사조차 나누기 싫어하는 안이 그런 말을 꺼내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더 믿을 수 없는 일은.... “좋아.” 라고 간단히 수긍해버린 파라디의 반응이었다. 자기가 누나하겠다고 우기지는 못할망정, 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럼 오빠라고 불러.” “그건 싫어.” “싸가지.” “너... 모델 맞지?” 안은 파라디의 갑작스런 물음에 당황한 나머지 얼굴을 붉혔다. “아니야. 그냥 우리학교에 나 닮은 모델이...” “아까 미용실에서 어떤 언니가 머리해주면서 물어봤어. 니가 여자 데려오는 거 첨이래. 여자친구냐고 물어봤어. 그러면서 모델이니까 스캔들 나면 어쩔 거냐고.“ “너 설마 내 여자친구라고 대답한 건 아니지?” “꿈 깨라. 그냥 아는 동생이라고 했네요.” “...............” “안심하는 거 봐. 스캔들 걱정하는 거 보니까 모델 맞네, 뭐.” 분수는 아름다운 조명과 함께 높낮이를 조절하며 춤추고 있었다. 파라디는 기지개를 켜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봐야해. 프랑스로 돌아갈거야. 여기서 안녕하자.” “혼자 갈 수 있겠어?” “원래 혼자 돌아다닐 예정이었는데, 뭐. 니가 나한테 반하는 바람에 데리고 다녔지만. 택시타면 돼. 그리고 너 만날 사람도 있다며.“ 밤인데도 불구하고 파라디의 미소에 눈이 부셨다. 안은 제어할 수 없는 자신의 감정에 한숨을 쉬고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두꺼운 잡지였다.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건 흰 셔츠를 걸치고 있는 안이었다. “어제 나온 따끈따끈한 잡지야. 선물로 줄게. 특집으로 30페이지나 나왔다.” “............” “브랜드 이안, 알지? 프랑스에도 있을 거야.” “......... 너 그 옷 광고해? 나 그 브랜드 되게 좋아하는데, 우리 엄마랑 아빠들도.” “나 브랜드 이안 전속모델이야.” “..........이름이 뭐야?” “이안.” 브랜드 이안 전속모델 이안이라. 파라디는 피식 웃으며 잡지를 소중히 품에 껴안았다. “그럼 안녕.” 오빠-동생 사이로 지내자고 약속을 하고서도 그들은 서로의 연락처를 묻지 않았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다신 만나고 싶은 마음이 있는것도, 없는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들이 오늘 이렇게 이끌리게 된 것처럼, 운명이라면 다시 만날 것을 믿었을 뿐. “안아!!!!!!!!!!!!” 멀리서 안이를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도도한 표정을 소유하고 있는 이온이었다. 그 옆에는 이모부 김산이 서있고. 유인이모와 열음삼촌 커플도, 환희이모와 준휘삼촌 커플도 그대로. “안녕, 난 갈게.” 파라디는 안이와의 악수를 마지막으로 눈부신 미소를 남기며 뒤돌아섰다. 안은 멍하니 교복을 입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고, 그 사이에 [제 2의 관계자 외 출입금지]는 안이의 옆으로 다가왔다. “뭐야? 조카, 누구야? 같은 학교인가봐? 여자친구?” 이온이 야릇한 웃음을 지으며 묻는다. “아니, 여동생.” 안은 웃으며 중얼거렸다. 흔치않은 그의 웃음에 모두가 놀란듯했다. “....이름이... 뭔데?” 열음이 안에게 묻자, 안은 답답한 교복 넥타이를 풀며 기분좋게 대답한다. “파라디.” 파라디... 프랑스어로 천국. 열음은 뭔가 알 것만 같은 느낌에 그 소녀의 모습이 사라질때까지 계속 바라보았다. 저 멀리 있는 소녀에게, 아름다운 빛이 나고 있었다. 그 옛날, 모두를 눈부시게 했던 미소의 휴인처럼. 그 옛날, 모두를 사랑하게 만들었던 시언처럼.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