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자 글쓴날 2005-05-30 23:57:01 고친날 2005-06-08 18:55:31 읽은수 28308 [ 9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서장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톡 천장으로부터 새어나온 물방울이 검은 머리카락 위에 떨어졌다. 먼지가 가득하고 피로 범벅이 된 머리카락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린 물방울은 혼탁해질 대로 혼탁해진 상태로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또옥 석실의 내부를 반쯤 차지하고 있던 깊은 물웅덩이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갑과 사슬에 의해 벽에 매여 있던 사내의 허리부근까지 차있던 웅덩이의 수면에 미미한 파동이 일었다. 그그긍 사내가 매여 있던 벽의 정 반대편에 있던 석문이 열리며 미약한 빛이 흘러 들어와 그의 모습을 비췄다. 엉망으로 흐트러져있는 긴 흑발사이로 드러난 마른 팔목과 오그라든 피부는 아무리 봐도 건장한 성인 사내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이 석실의 어둠 속에서 결박돼있던 오랜 시간의 상징이자, 눈에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사슬이었다. “클클, 아직도 죽지 않았느냐?” 석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한 명의 노인이었다. 약간 굽은 허리에 작은 체구, 주름이 가득한데다가 온통 흉터 투성인 안면에 더불어 껄끄러운 음성을 지니고 있는 노인은 벽에 매달린 사내를 보며 실실거리다가 한 순간 무섭게 두 눈을 부릅뜨며 한 손으로 허공을 후려갈겼다. 퍼엉!! 촤아악! 노인이 후려갈긴 것은 분명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이었지만, 정작 반응을 보인 것은 석실에 한가득 고여 있던 물이었다. 물웅덩이의 한 중앙에서 갑자기 폭발하듯 튀어나온 물은 석벽을 비롯한 사내의 몸을 흠뻑 적셨다. “내공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장님 놈이, 대체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있는 거지?” 찰랑. 노인의 걸음이 천천히 앞으로 옮겨지다가 마침내 물웅덩이 위에 다다랐다. 노인이 깃털보다 가볍지 않은 이상은 물에 빠져드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놀랍게도 그는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수면을 평지처럼 걸어 사내의 앞으로 다가갔다. “설마 네놈이...진정 불사강시(不死?尸)란 말이냐?” 노인의 손이 사내의 가슴에 천천히 맞닿았다. 비쩍 말라 갈빗대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 가슴 안에는 뜨거운 심장이 들어있어야 하지만, 사내의 체온은 그야말로 시체와 같이 싸늘했다. 웬만해서는 눈치체기 힘들 정도로 미약하기만 한 박동만이 그가 아직까지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럴 리가 없지...나조차 아직 만들어내지 못한 불사강시가 존재할 리가 없어!” 퍼엉!! 철컹! 사내의 가슴에 닿아있던 노인의 손에서 진기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며 그의 몸과 사슬이 크게 들썩거렸다. 일반인이라면 내장이 조각조각 끊겨 칠공으로 피를 토하며 즉사할 정도였지만, 기이하게도 사내는 크게 몸을 들썩거리고 오공에서 잠시 동안 피를 쏟아내다가 멈출 뿐 계속해서 생명을 유지해가고 있었다. “어떻게 이 독수(毒水) 속에서 아무 것도 먹지 않고 1년을 버틸 수 있는 거냐?” 노인의 손이 사내의 턱을 들어 올렸다. 백지장처럼 창백한 안색에 비쩍 말라 광대뼈가 툭 튀어 나와 있는 안면이 더해져 그야말로 시체와 같은 얼굴이었다. “그래...아무리 불사지체(不死之體)라도 진정한 불사강시라고는 할 수 없어. 장님인데다가 금강불괴도 아니라면, 불사지체가 있어도 제대로 된 고수만 못하지. 암, 그렇고 말고. 클클클” 자신이 한 말을 스스로 부정한 노인이 괴팍한 흉소를 흘리며 한 손가락을 치켜들자, 손가락 주변으로 아지랑이 같은 적록색 기운이 울렁거리다가 한 순간 푸르스름한 빛을 번뜩이며 유형화되었다. 주르륵... “어디, 이번에도 네놈이 살아남을 수 있는지 실험해볼까?” 강기가 맺힌 손가락으로 사내의 가슴을 가르고 파고든 노인은 상처를 통해 흘러나오는 붉은 선혈을 보며 광기를 번뜩였다. 1년간 거의 십중팔구 죽을 것을 확신하고 벌인 실험에서도 불사신처럼 수차례나 살아남은 사내의 생명력은 기어코 노인의 인내심을 무너지게 만들었다. “클클, 네가 과연 이 사사혈독(死邪血毒)에도 네가 버틸 수 있을까?” 상처에서 조금씩 흘러나오는 선혈이 점점 더욱 선명하게 변하는 것을 보며 노인은 괴팍한 흉소를 흘렸다. 사사혈독(死邪血毒)은 사천당문(四川唐門)의 무형지독(無形之毒), 독림(毒林)의 흑봉지독(黑蜂之毒)과 함께 천하삼대극독(天下三大劇毒)중 하나다. 특히 천하사대마공(天下四大魔功) 중 하나인 사사혈독공(死邪血毒功)에 의해 펼쳐지는 사사혈독강기(死邪血毒剛氣)는 사사혈독이 극한에 가깝다 할 정도로 농축되어 있기에, 설사 백독불침의 고수라 하더라도 살짝 스치기만 하면 그 즉시 녹아내려 한줌 독수가 돼버리는 무시무시한 독공이다. “이대로 가면 네놈은 전신의 피가 모두 사사혈독이 돼서 네놈의 피에 네놈의 몸이 녹아내릴 거다. 클클, 아무리 불사지체라고 하더라도 이제는 살아남을 수 없지” 갈수록 검게 물들던 피가 이제는 완전히 선홍빛을 잃어버림과 함께 사내의 몸이 미미하게 꿈틀거리며 심장박동이 약해져 가는 것을 느낀 노인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이 불사신 같던 괴물 녀석도 그의 사사혈독에는 버틸 수 없었다. 그의 독이야말로 죽은 이를 살리고 산 이를 죽일 수 있는 천하제일독이니까. “네놈이라면 재료로써는 최상급이니, 분명 좋은 강시가 될 수 있겠지. 클클클” 노인조차 불사강시인지 아닌지 판단 내리지 못하고 결국 독살을 결정한 사내의 특이한 신체라면, 그의 평생 염원이던 불사강시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몰랐다. 진정한 불사강시가 완성된다면 노인의 혈문(血門)이 진정한 천하제일문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네 영혼과 육신은 영원토록 혈문을 위해 살아가게 될 거다. 클클클클!” 마침내 사내의 심장이 멈춘 것을 확인한 노인은 수갑과 사슬을 풀고 사내를 어깨에 짊어지며 몸을 돌렸다. 다른 조잡한 강시도 아닌 불사강시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최대한 빨리 보존액에 담그고 심령금제와 제강을 시작해야 했다. 그그긍 한 손으로 석문을 잡은 노인은 주의 깊게 석문의 기관장치를 조작했다. 현철로 이루어진 두터운 철문에 의해 입구가 봉쇄되고 석실이 통째로 폭발하는 기관이 있는 만큼 노인으로써도 상당한 신경을 기울여야 했다. 이런 기관장치를 준비할 만큼 노인은 사내를 중요하게 여겼다. 어쩌면 불사강시이거나, 아니더라도 그의 필생 염원인 불사강시와 통하는 열쇠를 손에 쥐고 있는 만큼 사내가 탈출할 수 없도록 철저하게 대비한 것이다. “이젠 이 귀찮은 기관도 폐쇄해야...” 석문을 완전히 열고 석실 밖을 향해 한 걸음을 옮기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노인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무언가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싶은 순간, 목덜미가 화끈거리며 뜨거운 선혈이 붉은 용암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퍼엉!! 한 손으로 다급히 혈도를 짚어 목덜미를 지혈하며 사내를 붙들고 있던 손으로 진기를 방출한 노인은 그 충격에 의해 단번에 2장거리의 앞까지 날려진 그가 두 발로 착지해 비틀거리다가 한쪽 무릎을 꿇는 것을 보며 두 눈을 부릅떴다. 분명 죽었던 놈이 멀쩡히 움직여 착지했을 뿐만 아니라, 칼날처럼 예리하게 서있는 손톱에 방울방울 맺혀있는 붉은 핏방울이 노인을 암습한 것이 바로 그였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네, 네놈이...?” 경악한 노인의 몸이 굳어져있는 틈을 타 사내는 다리에 힘을 모아 단번에 앞으로 튀어나왔다. 노인은 반사적으로 사사혈독강기를 일으켜 한줄기 지강(指?)을 쏘아냈지만, 그는 적록색의 가는 선에 의해 어깨가 꿰뚫어지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톱으로 노인의 목을 찔러 들어왔다. “네놈이 감히...!” 동귀어진까지 각오한 듯한 사내의 공격에 노인은 호신강기를 극한까지 일으키며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 사사혈독공에 10성의 성취를 이뤄 검기라도 어렵지 않게 막아낼 수 있는 호신강기였지만, 이미 저 손톱에 동맥이 끊길 뻔했던 노인으로써는 자연히 경계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내가 자신을 뒤쫓는 대신 반쯤 열려있던 석문을 손으로 후려치며 뒤로 몸을 빼는 것을 선택하자, 노인은 경악하며 다시 앞으로 튀어나와야만 했다. “안돼-!!” 쿠궁!! 노인은 신법을 펼쳐 앞으로 튀어나왔을 때, 석문은 이미 빠르게 닫히며 현철로 이루어진 철문을 내리고 있었다. 그가 사내를 잡아두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던 기관장치가 오히려 자신을 가둔 웃지 못 할 상황에 노인은 망연자실해졌지만, 그럼에도 그의 두 손은 본능적으로 진기를 끌어 모으고 있었다. “크아아--!!” 적록색 아지랑이가 무서운 기세로 노인의 두 손에 몰려들며 마치 귀신의 손과 같은 형태로 유형화되었다. 12성의 사사귀혈수(死邪鬼血手)를 사용하기 위해 급격히 진기를 끌어올린 탓에 내상을 입었지만, 그로써는 당장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다. 콰광!! 치이익...! 두터운 석문이 일격에 깨져나가며 그 뒤쪽에 있던 현철로 만들어진 두터운 철문이 대번에 우그러들었다. 그에 더불어 우그러진 철문이 사사혈독에 의해 녹아 들어가는 것은 사사혈독공이 왜 천하사대마공 중 하나인지를 증명하고 있었지만, 철문을 이루고 있는 현철은 호락호락하게 깨지지 않았다. 쾅! 콰앙!! 연달아 휘둘러진 사사귀혈수는 순식간에 철문을 깨부수기 시작했다. 한번씩 철문을 두들길 때마다 갈수록 깊어지는 내상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손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진기를 끌어 모았다. 불사지체인 사내의 탈출을 막기 위해 준비해준 기관인 만큼, 이 안에 남아있다가는 노인 본인이라도 살아남을 수 없었기에 철문을 때려 부수는데 필사적이었던 것이다. 콰과광!! “돼, 됐다!” 마침내 자신이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크기의 구멍이 뚫리자, 노인은 석실이 폭발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던 만큼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구멍 너머로 몸을 날렸다. 그런데 마악 노인의 가슴 부분이 구멍을 빠져 나오려는 찰나, 우그러진 철문의 한기를 타고 날카롭게 그의 목을 파고드는 하나의 손이 있었다. “커억...!?” 손이 목으로 파고들고 나서야 일어난 호신강기와 사사혈시공(死邪血尸功)라는 기공(奇功) 덕분에 즉사를 면한 노인은 철문 아래에 숨어 있다가 은밀하게 손을 뻗어 자신을 암습한 사내를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떻게?’ 절정고수가 귀식대법을 펼치더라도 3장 이내에서라면 단번에 눈치 챌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노인이었지만, 사내 분명히 두 눈에 보이는 지금도 그의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그제 서야 노인은 깨달았다. 자신은 1년 동안 사내를 실험대상물로 삼아 갖가지 실험을 하기만 했을 뿐, 이 사내의 신체 외에 다른 것에 대해서는 뭔가 알기는커녕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1년 동안이나 죽는 것보다 지독한 실험을 받으면서도 시체보다 더 시체처럼 미약한 반응을 보여 불사강시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더했던 놈은, 사실 자신의 경계심이 느슨해져 기회가 생기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어차피 장님에 벙어리라는 생각에 저 안에 얼마나 많은 벽력탄이 매장되어있는지 까지 말해준 적 있거늘, 아무리 불사지체라 하더라도 도망치기는커녕 자신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철문 바로 밑에 은신해있던 사내의 독기는 노인으로 하여금 공포심마저 들도록 만들고 있었다. ‘지, 지독한 놈...!’ 목의 상처를 통해 생기가 급격히 빠져나감을 느낀 노인이 고통에 의해 비틀린 표정을 지은 순간, 마침내 석실에 매장되어 있던 벽력탄이 일제히 화염을 토해냈다. 쿠과광--! ==================== 무적사신 시작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5-30 23:58:38 고친날 2005-05-31 00:02:53 읽은수 24956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사신출두(死神出頭).(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사신, 지하석부를 나와 귀곡에 자리를 잡으니 호악에 사신의 그림자가 내린다.- 투둑. “......” 이마에 떨어진 돌 부스러기에 정신을 차린 사내는 곧바로 주변의 기척에 정신을 집중했다. 허공을 통해 흐릿하게 느껴지는 것은 처참하게 무너진 공간. 다행스럽게도 철문이 받침대가 돼준 덕분에 완전히 무너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언제 연쇄붕괴 될지 몰랐다. 우두둑. 몸을 움직이자 비틀어져있던 철문이 살짝 기울어지며, 사내의 위에 있던 무언가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미지근하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주르륵 흘러나와 비릿한 냄새를 퍼트렸다. 그대로 붕괴하는 건 아닌지 정신을 더욱 집중해 살피던 사내는 더 이상 특별한 변동이 없을 것을 느끼고 계속해서 조금씩 떨어지고 있는 액체에 손을 가져다댔다. ‘독혈이군’ 당장 굶어죽지는 않는다고 해도 허기와 갈증은 힘을 떨어트렸기에, 액체를 살짝 맛본 사내는 주저 없이 그것을 한 모금 받아 마셨다. 독에 내성을 지닌 고수라고 해도 단 한 방울만으로 중독 시켜버릴 수 있는 극독 중 극독이었지만, 사내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 ‘피만으로는 부족하다’ 독혈이 흘러나오는 곳을 손으로 천천히 훑은 사내는 순간 손을 날카롭게 세워 살을 뜯어내, 그것을 천천히 씹어 먹었다. 잔악하기 그지없는 사파의 마두들이라도 혀를 내두를 만한 일이었지만, 사내는 피범벅이 된 입가에도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손을 세워 살덩이를 파헤쳤다. ‘힘이 필요하다.’ 주변에 있던 독기를 흡수해 연명하긴 했지만, 1년간의 감금은 그렇지 않아도 약해져있던 육신에서 모든 힘을 앗아갔다. 남은 힘이라고는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으면서까지 유지시켜온 ‘비술’과 손톱을 강인하게 하는 약간의 것뿐. 물론 그 둘이 있었기에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지만, 잃어버린 힘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힘이다. 체내에 흐르는 피는 거의 독혈이 되어 충분한 독기를 담고 있지만, 지금으로써는 그 막대한 독기를 통제해 사용할 수 있는 힘이 남아있지 않다. 그렇기에 필요한 것, 심장을 능숙하게 뼈 사이의 근육을 헤집고 끄집어낸 사내는 그것을 그대로 씹어 삼켰다. 씹어 삼킨 심장으로부터 물씬 치솟아 오르는 것은 농도 짙은 사기(邪氣). 죽은 뒤에 꺼낸 것이기는 하지만, 생전 심장의 주인이 지니고 있던 힘이 워낙 강대했던 덕분에 사내는 상당한 양의 기운을 얻을 수 있었다. 몸 상태가 상태였던 만큼 곧바로 사용하는 것은 무리였지만, 이것으로 당장 움직이는 데는 큰 지장이 없을 듯싶었다. ‘우선 이동해야겠군.’ 몸을 일으킨 사내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비쩍 마른 육신은 걷기는커녕 손 하나 까닥하기도 힘들 듯 보였지만, 그는 느리되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똑바로 통로의 중앙을 걷고 있었다. ‘여기부터 라면 붕괴에서 안전하다’ 마치 눈이 보이는 듯 하나의 석문을 자연스럽게 열고 들어간 사내는 석문을 닫은 뒤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는 해도, 그는 주변의 모든 것을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지금은 상태가 나쁘기 때문에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흐릿하게 느껴질 뿐이지만, 정신을 집중하면 좀더 또렷하게 넓은 공간이 느껴진다. ‘안전하게 힘을 회복할 수 있는 곳은 어디지?’ 미미한 공기의 흐름이 지하의 모습을 흐릿하게 알려줬다.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는 통로와, 그러한 통로 끝과 중간에 간간이 배치되어있는 몇 개의 석실로 가득 찬 지하. 간간히 느껴지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가장 가까운 석실 정도는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었다. ‘우선은 신체의 회복이 중요하다.’ 빠르고 냉철하게 판단을 내린 사내는 석실의 한쪽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피를 촉매로 전신으로 퍼져나간 사사혈독은 사내의 몸을 녹여버리기 위해 요동쳤지만, 그의 끈질긴 생명력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사기(邪氣)를 흡수하고 난 뒤 독기(毒氣)를 제어한다.’ 사기를 완전히 흡수하는데 하루에서 이틀, 독기를 제어하는데 한두 시진 정도면 될 것이다. 노인이 생전에 한 말 대로라면 이 지하는 오직 그밖에 없고 다른 누군가가 들어오기도 힘든 안전한 곳이고, 짙은 음기(陰氣)까지 흐르고 있으니 힘을 회복하기에는 상당히 적합한 환경이다. 다른 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뒤로 밀어놓은 그는 우선 휴식을 취하며 회복에 전념했다. 전신에 흩어져 꿈틀거리고 있는 사기(邪氣)를 심장으로 끌어 모아 순환시키자, 혼탁한 사기(邪氣)가 조금씩 정순한 마기(魔氣)와 음습한 귀기(鬼氣)로 나눠졌다. 몸의 상태가 상태인지라 기운의 순환과 정조가 이루어지는 속도는 지극히 느렸지만 그는 조금도 조급해하지 않고 차분히 정제된 기운을 흡수했다. 귀기(鬼氣)는 ‘비술’에 따라 쇠약해진 생기를 자극해 상한 육신을 가공한 속도로 회복시켰고, 마기(魔氣)는 회복된 신체에 스며들어 급소뿐만 아니라 모든 외피와 근골을 강철과 같이 단단하게 다졌다. 노인의 심장에서 얻은 막대한 양의 사기는 그렇게 사내의 피와 살이 되었다. 완전히 예전 상태를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거동하는데 문제가 없을 정도로 회복되었기에 사사혈독(死邪血毒)의 독기(毒氣)를 제어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랫동안의 휴식을 마친 그는 곧바로 자신의 신체를 점검했다. 귀기(鬼氣)로 생기를 자극해 무리한 회복을 한 탓인지 원래부터 창백한 피부와 호리호리한 체격이 더욱 투명할 정도로 희고 가늘게 변했다. 막 죽은 시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모습이지만, 바로 며칠 전의 목내이나 다름없던 모습에 비하면 무척이나 양호한 편이다. 어차피 보이는 것에 그리 크게 신경 쓰지도 않는 그에게 있어, 외양은 거동에 불편함이 없을 정도면 충분하다. 문제는 바로 힘. 만약 지금의 상태에서 노인과 같은 강자를 다시 한 번 만난다면, 상대는커녕 피신도 힘들다. ‘그걸 찾아야한다’ 얼마 남지 않은 기운을 끌어 올리며 정신을 집중하자 익숙한 파동이 느껴진다. 정확하진 않더라도 근처에 있는 석실은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에 그 파동이 근원지가 어디인지 알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천장에 간간이 야명주가 박혀있는 음습한 지하통로를 지나 한 석문 앞에 도착한 그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앞에 있던 석문을 열었다. 그그긍 낡은 탁자와 의자, 작은 침상, 구석에 있는 커다란 항아리와 비스듬히 세워진 목관(木棺), 그리고 수많은 책이 빼곡하게 꽂혀있는 책장만이 있는 쓸쓸한 방으로 발을 들여놓은 그는 곧바로 걸음을 옮겨 목관에 손을 댔다. ‘독인가.’ 손을 대자마자 피부를 타고 퍼져오기 시작한 독을 느낀 그는 담담하게 독기를 흡수해버렸다. 천하삼대극독 중 하나인 사사혈독조차 흡수해버린, 만독불침을 넘어 독중지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그를 해하기에는 독의 수준이 너무 낮았다. 끼이익... 목관이 껄끄러운 소리와 함께 열리자, 관 안에서부터 사이한 기운이 물씬 풍겨 나오며 조금 특이한 형태의 흑의장포와 하나의 묵봉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한없이 짙은 칠흑색만큼이나 무언가 불길한 기운을 풍기고 있는 흑의장포와 묵봉을 주저 없이 꺼낸 그는 익숙하게 장포를 걸친 뒤 묵봉을 한 손에 쥐었다. 포대자루를 연상시킬 정도로 단순한 형태에다가 헐렁헐렁하고 바닥까지 길게 내려진 흑의장포는 움직이기에 거추장스러워 보였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움직임에 거의 제약을 주지 않는데다가 짙은 불길함이 그가 지닌 특이한 분위기와 묘하게 어울렸다. 그의 손에 쥐어진 대략 7척 정도 길이의 묵봉 또한 사이한 기운을 뿜어냈는데, 그것은 사내를 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쇠약해진 그의 기운을 보강해주고 있었다. ‘그대로군’ 흑의장포와 묵봉이 1년 전 그대로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확인한 사내는 나름대로 만족했다. 이 도구들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큰 힘이 필요하지만, 최소한의 기능만으로도 지금으로써는 매우 큰 힘이 되었다. 쓸데없는 기력을 소비를 막기 위해 의자에 앉은 그는 앞으로 할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무력이 필요하다’ 노인의 심장으로부터 얻은 기운의 양을 생각해 볼 때, 그만한 강자들을 몇 명만 더 암습한다면 빠른 시일 내에 힘을 모을 수도 있다. 그러나 노인에 대한 암습이 성공했던 것이 십중팔구는 천운이었던 것을 생각해 볼 때, 그 정도 강자는 모든 힘을 완전히 되찾을 때까지 상대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단계를 밟아 힘을 회복 한다’ 노인과 같은 강자가 흔하지는 않을 터, 힘이 없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힘을 모으며 조금씩 사냥대상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 안전하다. 이 경우의 문제는 너무 많은 사냥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수십, 수백 명의 일반인을 죽여도 노인에게 얻은 기운을 얻을 수 있을지 불확실할 정도다. 그 정도로 많은 살상을 할 경우 발각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설사 시체가 넘치는 전장에서라도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죽어나가면 절로 시선이 모여드니, 시간을 두고 조금씩 힘을 모아야 한다. ‘전장, 또는 무덤을 찾아보는 게 좋겠군’ 죽음이 있는 곳에서라면 충분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가능하면 전장이 좋지만, 한 번에 상당한 귀기(鬼氣)를 모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오래된 무덤 또한 나쁘지 않다. 앞으로 할 일을 결론내린 그는 몇몇 지하 석실을 돌아다니며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대충 꾸렸다. 만약의 경우 은신처로 사용하기 위해 지하석부의 기관을 사용해 입구를 은폐한 뒤, 그는 세상을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5-31 00:00:01 고친날 2005-05-31 00:00:01 읽은수 21904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사신출두(死神出頭).(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망할 산적 놈들 같으니. 이 길을 자기들이 만든 것도 아니면서 통행세는 더럽게 많이도 처먹네.” “이 친구야, 그래도 무사히 넘어온 게 다행이라고. 여긴 심심할 때쯤 되면 실종자가 나오는 곳이라는 거 몰라?” “젠장, 일이 급하지만 않았어도 여기로 오지는 않았을 텐데.” “누군 넘고 싶어서 호악산(虎嶽山)을 넘겠는가? 다 방법이 없으니 그러는 거지. 자자, 푸념은 이만 하고 길이나 서두르세.” 외딴 산길을 지나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두 행인이 누가 들을 세라 대화를 끊고 걸음을 서둘렀다. 두 행인이 감각권에서 사라질 때까지 나무의 그늘에 의지해 몸을 감추고 있던 사내는 지금까지 행인들을 쫓아왔던 길을 천천히 되돌아갔다. 지하석부가 산 속 깊숙한 곳에 있었던 데다가 지리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기에 그가 산중에 난 이 길을 찾아낸 것은 열흘 전쯤에서였다. 길을 발견한 그는 무작정 한쪽을 택해 따라가는 대신 간간히 길을 지나가는 행인들을 은밀하게 뒤쫓으며 그들의 대화를 통해 정보를 수집했다. 노인에게 들은 미미한 정보로는 활동이 힘든 만큼 좀더 폭넓고 일반적인 정보를 습득할 필요가 있었다. 두 행인의 대화에서 얻은 정보를 조용히 정리하며 대략 한 시진 동안 길을 거슬러 올라가던 그는 순간 몸을 멈췄다. 은은하고 아릿하지만, 너무나도 확실하게 느껴지는 비릿한 감각이 있었다. ‘피, 죽음의 냄새...’ 그늘 속에 더욱 깊게 몸을 묻으며 조금 더 길가를 따라가자 예민한 청각에 누군가의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흐흐, 제법 짭짤한데.” “그거 봐, 내가 돈 냄새가 난다고 했잖아.” “이번 달 술값도 벌었구먼.” 아직 피가 식지도 않은 시체와 한 자루의 커다란 칼을 옆에 둔 채 묵직한 은전을 보며 희희낙락하는 몇 명의 산적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오는 대로 다 잡아 뺏으면 더 짭짤할 텐데 말이야.” “그러면 제 놈들이 이렇게 오겠냐? 시간이 좀 더 걸려도 돌아가든지 떼거지로 뭉쳐 오겠지.” “그 총관인가 뭔가 하는 기분 나쁜 놈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거냐?” “따라하긴 누가 따라했다는 거야!” “자자, 그만 하고 뒷정리나 하자고. 이러다가 누구한테 들키면 일나는 거 모두 알지?” 사내의 예상대로, 호악산의 실종자는 산적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적당한 통행세로 행인을 모아 정기적인 수입을 얻고 간간히 모든 짐을 통째로 털어버리고 살인멸구 함으로써 부수입을 얻는 것이다. 행인들도 그러한 사실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는 있지만, 확인된 실종자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애써 현실을 외면하며 산을 올랐다. ‘지능적이군.’ 호악산이라는 지형과 행인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해 세력을 모으는 방법은 확실히 지능적이다. 생각하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지만, 그것을 생각을 정확하게 계획하고 실행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가 앞으로 호악산에서 생활함에 있어 좀 더 주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이 산적들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정리를 마치고 있었다. “시체는 누가 치울래?” “그냥 가까운데 구멍 파고 묻는 게 편한데 말이야.” “말도 안돼는 소리 작작하고 아무나 가서 버려. 신성한 작업장에서 썩는 냄새라도 나면 되겠어?” “큭큭큭, 맞아맞아.” 마지막으로 남은 시체를 두고 킬킬거리던 산적 중 한 명이 시체를 질질 끌고 어디론가 가기 시작하자, 그는 그 산적의 뒤를 쫓았다. 산적들 중에 지능적인 자가 있어 시체 처리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면, 뜻밖의 부수입을 얻을 수도 있을 거 같았다. 성인의 시체 하나를 끌면서 험난한 산길을 거침없이 오르던 산적이 마침내 발걸음을 멈춘 곳은 한 절벽 앞이었다. “젠장, 여긴 언제 봐도 으스스 하단 말이야.” 지금까지 끌고 온 시체를 끙차 들어올린 산적은 과연 바닥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깊은 절벽 밑을 향해 그대로 시체를 내던졌다. “그래도 일단 장례는 챙겨줬으니, 혹시 귀신이 되더라도 양가에게 찾아가고 나한테는 오지 말라고!” 천장단애 밑으로 떨어지는 시체를 향해 뻔뻔하게 외친 산적이 몸을 돌려 되돌아간 잠시 후,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늘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내는 천장단애의 앞에 서서 조용히 정신을 집중했다. ‘대량의 귀기(鬼氣). 운이 좋군.’ 수많은 행인들이 아무도 알지 못하게 살해된 뒤 천장단애에 던져져 제대로 죽지조차 못했기 때문일까? 절벽 밑에서 풍겨지는 귀기는 그야말로 음산한 정도를 넘어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절벽 위에서 느껴지는 것만 해도 이 정도이니, 만약 범인이 절벽 아래로 내려간다면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웬만한 묘지보다 몇 배는 좋은 환경이군.’ 묘지란 사자의 영혼을 보다 편히 저승으로 보내주기 위해 터가 좋은 곳에 만들어진다. 그래서 웬만큼 강한 귀기라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줄어들기 마련이다. 반면 이 절벽은 사자 하나하나가 짙은 한을 가지고 살해돼 많은 귀기를 뿜어내는데다가, 음기가 모이는 지형이라 귀기가 흩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더욱 쌓이는 최악의 사지(死地)였다. ‘저 귀기를 모두 흡수한다면...’ 힘이 부족한 그에게 있어 막대한 귀기는 분명 무시 못 할 정도의 매력이다. 특히 이 귀기에는 원념에 의한 사이한 기운이 많이 섞여있어 마기까지 어느 정도는 모을 수 있다. ‘상급의 망자를 부리는 것도 가능하다’ 상급 망자를 부릴 정도의 힘을 얻으면, 분명 그 뒤로 힘을 회복하는 일이 더욱 수월해질 것이다. 그러나 사내는 과욕을 부리지 않았다. 한꺼번에 대량의 귀기를 취하면 다시 귀기가 모여드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적당히 양을 조절해 흡수한다면 빠르게 복구된다. 당장 떠날 거라면 상관없지만, 이곳에서 좀 더 머물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는 좀 더 장기적으로 이득을 취하는 편이 좋다. ‘우선 밑을 확인해두는 게 좋겠군’ 절벽 아래를 직접 확인해보기로 결정을 내린 그는 묵봉을 등에 맸다. 일반적인 인체와는 괘를 달리하는 신체를 지닌 그는 발끝과 손가락을 바위벽에 박음으로써 그리 어렵지 않게 절벽을 타고 내려갈 수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적지 않은 시간을 들인 끝에야 그가 도착한 곳은 그야말로 목불인견의 참혹한 광경이었다. 짙은 어둠과 뿌연 안개사이로 힐끗 보이는, 산처럼 쌓인 시커멓게 변색된 해골과 썩어 문드러진 시체나 구덩이가 파여진 곳에 한가득 고여 웅덩이를 이루고 있는 칠흑색 독수(毒水)는 아무리 비위 좋은 이라도 속이 끓을 정도였다. 치이이익... 바로 전 산적에 의해 던져졌던 시체가 독수의 한가운데에서 녹아내리는 것을 잠시 살피던 그는 내심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독(屍毒)이 이곳의 음기에 의해 독수가 되고 그 독수에 이끌려 온 독물들이 빠져죽어 더욱 지독한 맹독이 됐다. 의외의 소득이군.’ 독 또한 그가 사용하던 힘 중 하나였다. 당장은 혈액 속에 잠들어있는 사사혈독을 통제할 힘조차 부족한 처지지만, 이 독지의 독기까지 모두 흡수한다면 일순간에 수천 명을 즉사시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몇 년 정도 머무르며 힘을 회복하기에는 더할 나위없는 환경이군.’ 굳이 전장이나 묘지를 찾아다닐 수고를 덜었다는 점에서 사내는 만족했다. 사실상 이 독지는 그를 감금했던 노인이 가까운 곳에서 쉽고 빠르게 독을 채집할 수 있도록 손을 봐둔 곳이다. 이 독지가 그의 원수라 할 수 있는 사내에게 이용된 것을 노인이 안다면 아마 저승에서도 분통을 참지 못하리라. 시력을 철저히 차단하는 어둠과 안개 속에서도 두 눈을 감은 채 감각을 이용해 주변을 살피던 그의 고개가 문뜩 한 곳을 향했다. 아무리 지독한 독물이라도 살아남기 힘들 이곳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 기운은...’ 그는 천천히 묵봉을 들어 올렸다. 안개에 섞여있던 귀기(鬼氣)가 묵봉에 쫓기듯 사방으로 물러나자, 움직이는 것들의 기운이 더욱 확실하게 느껴졌다. ‘망자(亡者)의 기운.’ 망자는 이미 죽어 생전의 죄업에 따라 세상을 떠돌며 고통 받는 자, 그렇기에 삶을 갈구하고 산자를 증오한다.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기에 설사 생전의 기억과 의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결국은 기억도 의식도 흩어져 모든 것을 잊는 것이다. 쿵. 쿵. 작지 않은 소리를 내며 접근해오는 망자에게 그는 감각을 집중했다. 독향과 함께 시체 썩는 비린내를 물씬 풍겨내는 망자는 두 팔을 앞으로 내뻗은 채 뻣뻣한 다리를 동시에 튕김으로써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5-31 00:01:37 고친날 2005-05-31 00:01:37 읽은수 20531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사신출두(死神出頭).(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하찮은 수준은 아니군.’ 느껴지는 귀기로 망자의 수준을 짐작해본 그는 묵봉을 비스듬히 들어올리며 만일을 대비했다. 마침내 안개 사이로 드러난 망자의 모습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산적들에게 당한 듯 머리가 좌우로 쪼개져 뇌가 훤히 드러난 가운데, 절벽에서 떨어져 늑골이 모조리 으스러지고 독에 의해 녹다 만 피부는 거의 반죽처럼 늘어 붙어있었다. 아무리 망자라고는 해도 움직이는 게 정말 기적과 같은 상태였지만, 아까 전 감각을 집중했을 때부터 외양은 물론이고 내부의 상태까지 파악해뒀던 그는 별 동요 없이 침묵을 지켰다. 쿵. 쿵. 산자에게 무한한 증오를 보이며 달려들어야 할 망자는 그를 그대로 지나쳐 다시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사내에게는 이 또한 당연했다. 그가 입고 있는 흑의장포는 모든 기척과 기운을 차단해 일점의 생기도 흘려보내기 않는다. 이성도 없는 저급한 망자 따위는 그를 위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곳에 거처를 마련하면 좋겠군.’ 일반인이라면 아마 하루도 못가고 말라죽을 곳이지만, 그에게는 오히려 매우 적합한 환경이었다. 잠시 주변을 돌아다닌 끝에 그럭저럭 거주할 수 있을만한 작은 동굴을 찾아낸 사내는 바위를 두부 베듯 베어버리는 손가락을 이용해 동굴의 입구에 몇 개의 문자를 새겼다. 마치 상고시대의 갑골문자처럼 문자라기보다는 문양에 가까운 듯한 문자들은 서로 어울러져 하나의 그림과도 같은 문장을 이루었다. 그것은 미약하게나마 망자의 접근을 막아주는 주문으로, 정 들어오고자 한다면 막을 수 없지만 그냥 이곳을 떠도는 망자라면 동굴 안에 들어오지 않도록 해줄 것이다. 그렇게 약간의 조치를 취한 그는 동굴 안쪽에 들어가 묵봉을 똑바로 박아 넣었다. 퍽! 묵봉은 마치 창이라도 되는 것처럼 단번에 바닥에 박혀 들어갔다. 마기에 의해 강화된 육신에서 나오는 괴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확히 수직으로 박힌 묵봉을 양 손으로 쥔 그는 그것을 매개로 삼아 주변의 귀기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주변에 흐르다가 묵봉으로 흘러들어온 귀기는 묵봉을 순환하는 동안 순식간에 증폭되어 사내의 몸으로 흘러들어왔다. 너무나 막대한 귀기는 사내의 몸을 집어삼켜 죽음으로 이끌려는 듯 요동쳤지만, 그는 그대로 귀기를 심장으로 이끌어 순환시키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심장은 탁한 것을 정순하게 만드는 힘을 지닌 생명의 근원. 그렇기에 심장을 통한다면 단시간에 급속도로 막대한 기운을 흡수하는 것도 가능하다. 단, 그만큼의 위험부담은 필요하다. 한번에 많은 기운을 받아들일수록 일말의 잡념이나 감정적 동요만으로도 기운의 정밀한 제어가 어렵게 된다. 만약 제어에 실패하면 순환이 틀어져 심장 내부에서 폭발해버리게 되는데, 그럴 경우 아무리 경천동지할 능력을 지니고 있더라도 심장이 으스러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일말의 동요도 없이 심장에서 대량의 귀기를 순환시켜 정제한 뒤 머리로 끌어 올렸다. 머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과 영혼의 근원이 되는 곳, 그렇기에 정신력과 영력에 따라서는 무한에 가까운 기운도 받아들이는 것도 가능하다. 마치 바다에 강물이 흘러들어 종적을 감추듯 아무런 기운도 흘러나가지 않지만, 의지에 따라 영문(靈門)을 개방하면 폭포수나 폭우처럼 한꺼번에 귀기를 끌어낼 수도 있다. 적당한 양의 귀기를 축적한 그는 흡수를 멈췄다. 며칠 안에 이 귀곡(鬼谷)이 자체적으로 귀기를 복구할 수 있는 양은 이 정도다. 이 정도를 넘으면 회복에 필요한 기간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많은 양은 아니군.’ 묵봉으로 어느 정도 증폭한 귀기를 흡수했음에도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대략 하루 이틀 주기로 오랫동안 흡기와 축기를 반복한다면 충분한 양을 모을 수 있다. ‘일단 이 정도라면...’ 축적한 귀기가 적은 양이라고는 해도 이곳은 귀기와 원령이 넘쳐나는 사지(死地). 쓸데없는 기의 소모가 적은 곳이다. ‘시도는 해봐야겠군.’ 그는 바닥에 하나의 향초와 회색소낭 꺼내놓았다. 향초는 지하석부에서 챙겨온 물품 중 하나고, 회색 주머니의 내용물은 이 귀곡을 돌아다니다가 얻은 것으로 지금으로써는 상당히 유용한 도구다. 노인의 지하석부에서 나왔던 것인 만큼 일반적인 향초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는 성분을 만들어진 향초는, 불이 붙자 기이한 향과 함께 뿌연 회색의 연기로 방안을 가득 채웠다. 화륵! 회색 주머니에서 꺼낸 백회색 가루를 사용해 향초를 중심으로 복잡한 문양을 그린 뒤, 약간의 가루를 촛불에 뿌리자 연기가 더욱 진해지며 주변의 귀기(鬼氣)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의식을 치를 기본적인 준비를 마친 그는 축적해뒀던 귀기를 이끌어내며 기이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사내의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이루어진 것은 분명 언어라고 부르기 힘든 것이었다. 음 하나 하나가 마치 지옥의 저주나 원혼의 한을 담고 있는 듯한 이것을 어찌 언어라고 할 수 있을까? 그의 사이한 주문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허공을 가득 채우고 있던 연기가 그에 반응하며 서서히 향초를 중심으로 뭉쳐들기 시작됐다. 짙게 뭉쳐든 연기는 조금씩 꿈틀거리다가 향초의 불빛에 비춰 음영을 만들어냈는데, 그 음영은 사람의 얼굴과 놀랄 정도로 유사해 오싹함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연기의 꿈틀거림이 거세질수록 향초가 더욱 크게 타오르며 가루로 이루어진 문양이 섬뜩할 정도로 희게 번뜩였고, 그의 손에 쥐어져있던 묵봉을 통해 증폭되어진 귀기는 연기에 묻어있던 혼령의 귀기와 뒤섞이다가 마침내 연기를 흡수해 하나의 반투명한 형상을 이루었다. 그것은 분명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기는 해도 워낙 희뿌옇기에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는데, 흐리한 형상 중에서도 유독 서늘하게 빛나는 푸른 두 개의 안광은 너무나도 공허하여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만 싶었다. ‘성공이군’ 일단 성공에 만족한 그는 팔을 가볍게 휘저어 그 망령을 흑의장포의 소매 안으로 빨아들였다. 영체에 한해서라면 그야말로 무한하게 집어넣고 다닐 수 있는 것이 흑의장포가 지닌 효능 중 하나다. ‘하루에 하나 정도가 고작인가’ 주변의 귀기를 끌어 모으고 뼛가루까지 촉매로 사용해 아슬아슬하게 성공했다. 이미 한번 흡수한 만큼의 귀기는 어디에나 있는 음기(陰氣)로 다시 보충할 수 있지만, 겨우 힘없는 망령 하나를 만드는데 전력을 다해야했다. 이대로라면 제대로 된 전력을 모으기는 힘들다. ‘역시 회복에 중점을 두는 게 좋겠군.’ 지금으로써는 하급망령이라도 쓸만한 전력이지만, 어느 정도 힘만 모이면 웬만큼 많은 수가 있지 않는 이상 전력으로 사용할 수 없다. 이 귀곡(鬼谷)이라면 다른 누군가의 침입을 그다지 염려해도 되지 않는 천연의 은거지이니, 복속은 여유를 두고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회복이라...’ 하루 이틀 주기로 귀곡의 귀기를 축적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렇다면, 남는 시간은 그대로 여유시간이 된다. ‘귀곡의 망자들을 이용한다면?’ 망자에게 응축되어있는 귀기를 뽑아내 흡수한다면 그 또한 적은 양은 아닐 테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산자가 스스로 생기를 키워 부상이나 질병을 치유하듯 망자 또한 자체적으로 귀기를 키워 오랜 세월을 거칠수록 더욱 강하게 거듭난다. 사람이 많은 시장이 활기차거나 시체와 혼령이 많은 묘지가 음산한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즉, 망자가 줄어들수록 귀곡의 귀기의 전체적인 양과 복구율도 줄어든다. 장기적으로 볼 때는 역시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촉매수집이 좋겠군.’ 귀곡이나 산에서라면 촉매로 사용할 수 있는 물품을 몇 가지 더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힘의 소모를 줄이고 주술의 위력을 증폭시켜주는 다양한 촉매는 지금 힘이 부족한 그에게 있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면 사냥도 필요하겠군’ 짐승의 신체 일부가 촉매로 사용되는 경우는 상당히 많다. 또한, 생기를 가지고 있는 것은 꼭 인간만이 아니다. 짐승들도 적게나마 생기를 지니고 있으니, 촉매를 모으는 동시에 기운을 축적하는 일거양득을 노릴 수도 있다. 게다가, 그 사냥이 꼭 짐승들에게 한정되라는 법은 없다. 실종이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곳. 그 실종이 십중팔구 죽음인 것을 누구나 알고 있음에도 호악채의 무력 때문에 모두 그 사실을 외면하는 곳. 그렇기에 매우 드물게나마 진짜 실종자가 나오더라도 호악채의 짓으로 여겨지는 곳이 바로 이 호악산이다. ‘실종자가 조금 늘어도 상관없다.’ 전보다 실종자가 더 늘어난 것을 깨닫게 되더라도 상관없다. 그것은 어차피 호악채의 짓으로 여겨질 것이니까. 이제 그에게 있어 실종자가 좀더 주의해서 다뤄야만 하는 특별한 사냥감에 불과해진 순간부터, 호악산에는 음산한 사신(死神)의 그림자가 서서히 뿌리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5-31 06:53:06 고친날 2005-06-07 22:24:54 읽은수 19490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2.금룡표국(金龍驃局).(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사신, 인연의 고리를 맺으니......- 중년무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손목에 차여져 있는 금빛 고리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깊은 고민에 잠겼다. “흐음...” 광활하기 그지없는 넓이에 비해 치안상태가 굳지 않은 중원이기에 무인들로 이루어진 호송단체의 존재는 필수적인데, 개인적인 전서에서부터 귀한 물품이나 사람까지 적절한 가격에 따라 호송해주는 호송단체를 바로 표국(驃局)이라 한다. 무림보다는 상계에 가까운 표국이지만, 그렇다고 그 무력이 약한 것은 아니다. 산적들로 이루어져있는 녹림맹(綠林盟)에 대항하기 위해 표국들로 결성된 창천맹(蒼天盟)은 무림의 강대세력 중 하나로 당당히 인정받고 있다. 녹림맹을 이루는 주축이 녹림칠십이채(綠林七十二寨)이듯 창천맹을 이루는 주축은 창천육십사국(蒼天六十四局)이고, 녹림칠십이채 중에서도 가장 강대한 산채를 녹림십팔채(綠林十八寨)라고 한다면 창천육십사국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표국을 창천십육국(蒼天十六局)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몇년 전 살각의 십대살수 중 한 명인 살천객(殺千客)의 마지막 살행을 막아낸 이후 전문적으로 사람을 호송하는 보표(保驃)에 관해서라면 제일로 꼽히는 곳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금룡표국(金龍驃局)이다. 금룡표국의 국주는 무명(武名)은 그리 높지 않지만 대신 국주로써의 능력이 뛰어나고 인덕이 높아 실력 있는 고수들을 끌어 모았는데, 그중 가장 뛰어난 무위를 지닌 이들이 살천객을 막아낸 다섯 명의 대표두다. 국주는 표국의 위명을 드높인 그들에게 금룡이 새겨진 다섯 개의 금팔찌를 선물했고, 그 후 다섯 대표두는 금룡표두(金龍驃頭)라 불리며 금룡표국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안 좋군. 안 좋아.” 금룡환(金龍環)을 쓰다듬고 있던 중년무사, 금룡표두 중 한 명인 쌍룡철권(雙龍鐵拳) 기진환(寄進煥)은 결국 입에서 쓴 소리를 뱉어냈다. 사람을 호위하는 보표라면 응당 호위대상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보표의 가장 큰 적은 산적도, 살수도 아닌 바로 호위대상이다. 안전을 위한 보표의 충고와 조언을 무시하고 스스로를 위험 속으로 몰아넣는 호위대상이라면, 금룡표두가 아니라 절대쌍존(絶對雙尊)이라도 안전을 책임질 수 없는 법이다. “그리도 안 좋습니까?” “좋다고는 할 수 없소.” 온유하고 청아한 물음에 간단히 대답해준 그는 물음을 던진 상대를 힐끗 돌아보았다. 얼굴 앞으로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머리를 제외하고는 옷깃하나 구겨지지 않은 단정한 모습 때문에 무공이라고는 전혀 알지 못하는 백면서생처럼 보이고, 실제로도 그러한 청년이 바로 이번 호위대상이다. 이번 호위대상은 꽤 괜찮은 편이다. 어느 세가의 공자들처럼 거만하여 보표를 귀찮은 뒷일을 처리할 때 부려먹는 종놈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명성 높은 무인처럼 자존심이 높아 보표를 두더라도 마치 쓸데없는 장식품처럼 여기지도 않는다. 부유한 배불뚝이 거상처럼 보표 알기를 돈만 주면 뭐든지 하는 개새끼 알 듯 하지 않는다. 보표를 존중할 줄 아는 이런 호위대상을 만나는 것은 10년이 넘게 보표로 활동해온 그에게 있어서도 매우 드문 일이다. 때문에 그는 청년의 물음에 흔쾌히 대답했다. “우선 호악산에 있는 호악채(虎嶽寨)는 악명이 흉흉한데다 녹림칠십이채에 속해있지 않으니 창록협약(蒼綠協約)대로 통행세만 받고 보내주지 않을 수도 있소.” 창록협약이란 녹림맹과 창천맹 사이에서 맺어진 협약이다. 녹림맹은 적절한 통행세를 받는 한 창천맹의 표행을 방해하지 않으며, 혹시 분쟁이 일어나더라도 쟁자수는 죽이지 않고 표물만 빼앗는다. 또한 빼앗은 표물은 표국에서 적절한 예물을 줄 경우 그대로 표국에 돌려준다. 서로의 공존을 위해 맺어진 이 창록협약은 산적과 표사 사이에서 거의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녹림칠십이채와 창천육십사국에서는 협약을 함부로 어기지 못하도록 자체적으로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창록협약이 반드시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녹림칠십이채에 속하지 않은 산채는 과한 통행세를 물리거나 쟁자수까지 모조리 죽여 살인멸구하고 표물을 삼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창천육십사국에 속하지 않은 표국 역시 산적들이 만만하다 싶으면 통행세를 적게 내거나 아예 안내는 것은 물론이고, 관과의 연줄을 이용해 산적들을 토벌해버리기도 한다. “또한 호악채는 근래에 급격히 성장해 산채의 규모만큼은 녹림칠십이채와 비교해도 크게 손색이 없고, 호악채의 채주인 대도산왕(大刀山王) 철방(撤坊)은 그리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외문기공을 극성으로 익혀 도검불침(刀劍不侵)의 경지에 오른 일류고수라서 나로서도 상대하기가 쉽지 않소. 만약 호악채에서 마음먹고 나서면 험난한 호악산을 벗어나기가 무척 힘들어질 것이오.” 기진환의 친절한 설명에는 지금이라도 돌아가기에는 늦지 않았으니 다시 한번 잘 생각해보라는 의미가 가득 들어있다. 하지만 보기 드물게 보표를 존중하고 그 조언과 충고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호위대상에게도 단점은 있었다. “그렇군요. 아무래도 주의를 단단히 해둬야겠습니다.” “...그것뿐이오?” “특별히 준비할 거라도 있습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라...혹시 돌아가야 한다는 등의 생각은 들지 않소?” “어째서 말입니까?”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는 청년의 반응에 기진환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껏 설명해줬더니만 그게 말짱 헛고생이 됐다. 이 호위대상의 문제는 가끔씩 너무 둔해진다는 점이다. 호위대상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자연스럽게 돌려 충고하는 버릇이 이럴 때는 오히려 독인 셈이다. “그러니까, 좀 더 안전하고 편안한 행로를 선택하는 건 어떻소?” “아무래도 그건 어렵겠습니다.” 딱 자르는 듯한 호위대상의 대답에 그들의 뒤를 따르던 한표두와 박표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청년이 호위대상으로써 지닌 가장 큰 단점은 바로 시간을 너무 아낀다는 점이다. 대표두인 기진환만큼은 아니더라도 표행으로 뼈가 굳은 한표두와 박표두조차 지칠 정도의 강행군을 무려 열흘 동안 이어왔다. 덕분에 무공도 익히지 않은 청년은 심신양면에 있어 모두 탈진에 가까울 정도로 지쳤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며칠이라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두 다리를 직접 올라야 하는 험난한 호악산을 행로로 선택한 청년의 고집이 이제 와서 꺾일 리가 없다. “빠른 것도 나쁘진 않지만 그래도 일단 살아 도착하는 게 우선 아니겠소? 시체가 돼서 며칠 빨리 도착해서 무슨 소용이오?” “그러니 무사하면서도 빨리 도착하기 위해 금룡표국에 호위를 청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청년의 말에 기진환은 할 말을 잃었다. 표국이 하는 일은, 확실히 안전하고도 신속하게 목적지까지 호송해주는 것이다. 이 표행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모르되, 한번 받아들인 이상 신용을 위해서라도 무사하고도 신속하게 호위대상을 목적지까지 호위해야만 한다. “휴우...그대도 은근히 골치 아픈 호위대상이라는 거 알고 있소?” “그렇다면 죄송합니다.” 결국 백기를 든 것은 기진환었다. 사실 그로서도 호악채가 사생결단을 낼 각오를 하지 않는 이상 금룡표국의 표행을 방해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나친 강행군으로 호위대상의 몸이 크게 상할까봐 호악채를 들먹여 설득해봤다가 본전도 못 찾은 것이다. “됐소. 그렇게 길을 서두른다면 뭔가 급한 사정이 있겠지. 어째든 호악산에서는 요즘 들어 실종사건이 늘어나고 있으니, 주의를 늦추지 마시오. 아차 하는 사이에 우리도 실종자가 될 수 있으니까.” “충고에 감사드립니다.” 백기를 들기는 했어도 엄중한 경고를 잊지 않은 기진환은 자신이 한 말처럼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산채가 있는 산에서 실종사고가 일어나는 거야 어디 호악산에서만 일어나는 일이겠느냐 만은, 얼마 전에 들은 바에 따르면 확실히 그 사태가 심각했다. 예전에는 그래도 한 달에 서너 명이었던 실종자의 숫자가 요즘 들어 점차 늘어나더니, 근 한달 사이에 벌써 스무 명이 넘게 실종되었다고 한다. 열흘에 한 명 꼴이던 예전에 비해 거의 하루 이틀에 한 명 꼴로 실종이 되니, 일단 호악산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한 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그렇게 실종자가 많은데 관에서는 아직도 손을 쓰지 않고 있습니까?” “원래 호악산은 워낙 산세가 험해 길이 나기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곳이오. 관군이 지금까지 손놓고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지만, 호악채는 이 험한 산세를 이용해 관군의 토벌을 여러 차례 막아내며 덩치를 불려왔기 때문에 이제는 관에서도 토벌을 거의 포기하고 있는 실정이오.” “하지만 실종자가 계속 늘어나면 방치할 수 없을 테니...결국 무림문파에 도움을 요청하겠군요” “그렇소. 정파든 사파든 관에 연줄을 만들어 둬서 나쁠 것 없으니 아마 거부하지는 않을 테고, 아무리 철방이 버티고 있는 호악채라고 해도 일류고수 몇 명만 관에 손을 빌려주면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이오.” 청년과 대화를 나누며 험한 산길을 오르던 기진환의 눈에 문뜩 이채가 스치며 그의 손이 살짝 손을 흔들었다. 기진환의 신호를 받은 한표두와 박표두는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호위대상인 청년과의 거리를 좁혔다. 노련한 보표인 그들이 채 다섯 발자국을 옮기기도 전에 청년을 중심으로 품(品)자형을 이루고 걸음을 멈추자, 산중에는 갑자기 고요한 정적이 찾아들었다. 걸음소리나 대화소리는 물론이고 새나 벌레의 소리까지 사라진 무거운 정적은 그들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5-31 06:54:39 고친날 2005-05-31 06:54:39 읽은수 17278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2.금룡표국(金龍驃局).(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산중호걸들깨선 어찌 숨어서 객을 맞이하는가?” 사사삭 기진환의 진중한 외침에 정적이 흔들렸다. 곳곳에서 시작된 수풀에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점차 가까워짐을 느낀 그는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미리 기척을 느껴 포위되기 전에 걸음을 멈추긴 했지만, 들리는 소리로 볼 때 예상보다 숫자가 많다. 최소로 잡아도 수십 명, 어쩌면 백여 명에 가까울지 모른다. “본인은 금룡표국의 금룡표두인 기모라는 사람이오!” 수풀 사이로 느껴지던 움직임이 멈칫해졌다. 아무리 녹림칠십이채에 속하지 않았다고 해도, 창천십육국 중 하나인 금룡표국의 상징 금룡표두는 그냥 흘려 넘길 수 있을 정도로 가볍지 않다. 금룡표국의 위명에 힘입어 기세를 잡은 그의 눈이 빠르게 수풀 사이를 훑을 때, 우거진 수풀 사이에서 한 명의 커다란 장한이 수십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하하핫! 쌍룡철권(雙龍鐵拳)으로 이름 높은 기진환(寄進煥) 대표두라면 제대로 접객을 해야지!” 6척이 넘는 신장에 근육질 장한의 안변에 비스듬히 난 칼자국과, 그의 어깨에 비스듬히 걸쳐져 있는 커다란 대도(大刀)를 본 기진환은 묵직한 신음을 흘렸다. 그와 함께 나온 산적들의 숫자도 적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중에 이 장한이 끼여 있는 것은 정말 좋지 않았다. “대도산왕(大刀山王) 철방(撤坊) 채주가 산행에 나오셨을 줄은 몰랐소.” “원래 귀한 손님을 맞을 때는 주인이 직접 나서는 게 예가 아니겠나?” 호위대상을 향해 이를 훤히 드러내고 웃는 철방을 보며 기진환은 심려를 더했다. 귀한 손님이라고 하면 이미 이 표행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뜻.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규모의 정예인원으로 이뤄졌던 표행의 정보를 다른 누구도 아닌 녹림도가 알고 있다는 것은 분명 뭔가 문제가 있다. “주인이 예를 아신다면 객의 성의를 받아주실 거라고 믿소.” 창록협약에 따라 적절한 통행세를 낼 터이니 고이 보내달라는 말이다. 창천육십사국 중 하나인 금룡표국과 척을 져서 좋을 것 없으니, 웬만해서는 이쯤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안 되지, 안 돼. 모처럼 귀한 손님이 왔으니, 며칠 동안 접대를 해야 하는 게 주인의 도리고 말고.” 말이 접대라는 것이지,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한다는 건 납치해 잡아두겠다는 거나 다름 없다. 철방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뒤쪽의 수풀에서 불쑥 튀어나온 산적들에 의해 앞뒤가 포위된 것을 깨달은 기진환은 내심 한탄을 금치 못했다. 일류고수인 그에게 들키지 않도록 배후의 산적들을 한참 거리에 배치했다가 시간차를 두고 나오게 하여 포위진을 짠 것이다. 정말 이 표행을 대비해 철저히 준비해두지 않았다면, 설사 녹림십팔채라도 이렇게 확실하게 포위진을 짜지는 못했을 것이다. “진정 금룡표국과 척을 지려하오?” “금룡표국뿐이겠나, 창천맹은 물론이고 아마 녹림맹에서도 규제가 들어오겠지.” “그렇다면 대체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이오?” “상관없다. 이 일만 끝나면 어차피 호악채는 사라질 테니까 말이야.” 비릿한 미소와 함께 철방이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자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쌍룡권(雙龍拳)의 기수식을 취했다. 철방의 도법은 그리 높은 수준이 아니지만, 그가 익힌 동피철혈기공(銅皮鐵血氣功)은 흔한 철포삼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외문기공이다. 5성의 성취만 이루어도 도검불침(刀劍不侵)이 되어 몸에 칼날이 박히지 않고, 10극성의 경지에 이르면 육신갑(肉身甲)을 이뤄 조문이라는 약점이 사라지며, 만약 12대성하게 되면 혈맥까지 철과 같이 단단해지는 기공(氣功)의 경지에 올라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조차 통하지 않는다고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철방의 성취는 10성에 머물러 있어 내가중수법이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통나무마냥 가만히 맞아줄 리가 없으니 아직 기의 수발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지 못한 기진환으로서는 승패를 장담할 수 없다. 하물며 지금 그의 뒤에는 호위대상인 청년이 있으니, 수십에 달하는 호악채의 산적들에 의해 포위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십중팔구 그가 패배하게 될 것이다. “제가 길을 뚫겠습니다!” “어허, 어딜!” 고함을 외친 한표두가 검을 내세워 앞으로 뛰쳐나가고, 청년과 박표두가 그 뒤를 따르자 철방은 커다란 대도를 휘둘러 그의 허리를 베어왔다. 하지만 기진환이라고 그러한 철방의 행동을 가만히 방관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네 상대는 나다!” 보법을 이용해 순식간에 철방과의 거리를 좁힌 기진환은 쌍룡비차(雙龍飛差)의 초식으로 그의 손목을 쳐 대도의 방향을 비틀며 다른 한 주먹으로 명치를 후려갈겼다. 퍼엉! 쿵쿵! 마치 북치는 듯한 소리에 연이어 커다란 땅울림 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진환의 일권에 명치를 맞은 철방이 깊은 족적과 함께 뒤로 물러나며 생긴 소리였다. 두터운 석판이라도 일격에 박살낸다는 명성에 걸맞는 권력(拳力)이었지만, 그 권력을 그대로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철방은 그다지 큰 타격을 받지 않은 듯싶었다. 그러나 당초부터 타격을 염두에 둔 공격은 아니었기에, 그는 별다른 동요 없이 재빨리 몸을 날려 호위진에 합류했다. “이런 씨부랄...어서 막아! 못 막으면 다 죽는다!” 외문기공을 주로 익힌 만큼 보법과 신법에 있어서는 그리 성취가 높지 않은 철방이 기진환을 뒤쫓으며 다급히 고함을 지르자, 포위진을 이루고 있던 산적들은 서로 시선을 교차한 뒤 선두로 길을 뚫던 한표두를 향해 일제히 도를 휘둘렀다. “핫!” 해공비파(海空飛波)의 초식으로 검을 물결처럼 흔들어 휘둘러져오는 도를 떨친 그는 그대로 산적들을 헤치고 나아가려했지만, 아래쪽에서 교묘하게 튀어나온 도를 미처 막아내지 못하고 피하려다가 그만 뒤로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앞으로 나아가던 도중 선두를 맡고 있던 한표두가 갑자기 뒤로 물러서자 청년을 보호하던 삼재진은 크게 흔들리고 말았고, 산적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비수 등의 암기를 우수수 날렸다. “조심!” 채재재쟁! 박표두와 기진환은 각자 장검과 소맷자락을 이용해 청년에게 날아들던 암기들을 튕겨냈지만, 한표두는 미처 모든 암기를 막아내지 못하고 어깨에 하나의 비수를 허용하고야 말았다. “크윽...합격술을 익혔구나!” “합격술이라고?” 기진환은 한표두의 어깨에 꽂힌 비수보다 그의 말에 더 놀랐다. 무림방파도 아닌 산적들이 합격술이라니? 녹림도 중 합격술을 제대로 펼칠 줄 아는 이는 고수 중에서도 극히 드물고, 대다수의 녹림도는 그저 숫자로 몰아붙이는 것이 고작이다. 무엇보다도 합격술을 제대로 펼치려면 오랫동안 전문적인 훈련을 받아야만 한다. 녹림의 일반적인 성향을 볼 때, 호악채가 오래 전부터 이 표행을 노리기라도 하지 않은 이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대체 이 일의 배후가 누구기에...!?” “닥치고 뒈져라!” 그들이 주춤거리는 사이 뒤를 쫓아온 철방은 기진환을 향해 그대로 대도를 내리 그었다. 내공은 없다고 해도 동피철혈기공을 대성해 신력을 발휘하는 철방의 대도는 아무리 고수라도 경시할 수 없는 위력이 담겨있었다. 까앙-! “서두르게!” 쌍룡요수(雙龍搖首)의 초식으로 대도를 비껴낸 기진환이 철방의 안면에 일권을 먹이며 내뱉은 재촉의 말에 한표두와 박표두는 산적들 사이로 길을 뚫어보고자 애썼지만, 합격술을 익힌 산적들로부터 청년을 보호하면서 길을 뚫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리하게 포위망을 뚫으려고 하면 할수록 한표두와 박표두의 몸에는 혈흔이 늘어났고, 특히 비수가 박힌 한표두의 어깨에서는 혈도를 막아 지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급격한 움직임을 보일 때마다 피가 뭉클뭉클 쏟아져 나왔다. 기진환의 상황 또한 나쁘면 나빴지 결코 좋지는 못했다. 내가중수법을 쓸 여유가 없어 급한 대로 진기를 담은 권력을 쏟아내고는 있었지만, 이미 육신갑(肉身甲)을 이룬 철방을 상대로는 그야말로 시간벌이밖에 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뒤쪽을 포위하고 있던 산적들까지 포위망을 유지한 채 거리를 좁혀오자 기진환은 초조함으로 인해 가슴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한편, 이 다급한 와중에도 초조함을 느끼기는커녕 보표들보다 침착하게 상황을 살피고 있던 청년은 내심 한탄을 토해냈다. ‘이토록 치밀하게 준비된 것을 보니 과연 그들의 세력이 크구나. 웬만해서는 자리를 비우지 않는 금룡표두가 한 명만 남아있을 때부터 이 행로에 흉행이 있을 것임을 예측했지만, 이런 외딴곳까지 손을 써놨을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는데.’ 원래 그가 보표로 염두에 둔 것은 금룡표두 셋이었지만, 때마침 금룡표두 중 넷이 표행을 나가거나 자리를 비워 결국 모자란 금룡표두 둘을 일반 표두로 대체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금룡표두가 때마침 네 명이나 자리를 비운 것이 우연이 아니라면, 이 일을 꾸민 배후세력의 영향력은 그가 알고 있던 것보다 최소 갑절은 더될 것이다. ‘일단 더 이상의 암수는 준비되지 않았나보구나.’ 이미 충분히 기다려보긴 했어도 혹시나 싶어 주변을 살피던 그는 문뜩 시선이 스쳤던 한 나무의 그림자가 유독 짙은 듯한 느낌에 그곳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다른 나무들과 하나도 다를 것 없는 나무의 모습과, 슬슬 한계가 가까워지고 있는 보표들의 상황에 그는 결국 미리 준비해둔 비장의 패를 꺼내 들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5-31 06:56:04 고친날 2005-05-31 06:56:04 읽은수 16684 [ 6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2.금룡표국(金龍驃局).(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모두 여기에 집중해주십시오.” “무슨 소리요?!”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에 맞지 않는 뜬금없는 말에 철방으로부터 약간의 거리를 벌리고 그를 돌아본 기진환의 시선이 문뜩 그의 손에 들려져 있는 것에 멈췄다. 그것은 단지 짙은 검은색 바탕에 벽력(霹靂)이라는 문자가 금빛으로 번뜩이고 있는 작은 구슬에 불과했지만, 그것을 본 기진환의 머리 속에서는 무림에서도 유명한 기물 중 하나가 잔잔한 호수의 수면에 비치는 섬광처럼 스쳐지나갔다. “벽력탄(霹靂彈)!!” “뭣?!” “벽력탄이라고?!” 기진환의 청천벽력과도 같은 외침을 들은 모든 이들은 하고 있던 행동을 멈추고 경악을 드러냈다. 벽력탄은 단 하나만 해도 기진이병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가격을 지니고 있기에 함부로 사용할 수 없지만, 반경 10장 이내를 초토화시키는 위력은 아무리 무림고수라도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박살날 수 있다. 아무리 일자무식해도 벽력탄이 뭐하는 물건인지 정도는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산적들이 새파랗게 질려 뒤로 물러서자, 철방은 사납게 욕지거리를 뱉었다. “이 병신들! 저 새끼들한테 붙어야 벽력탄을 못 쓰지!” “헉!” 뒤늦게야 실수를 깨달은 그들이 다시 앞으로 달려들려 했을 때, 두 표두는 이미 그들과 충분한 거리를 벌린 채 청년을 호위하고 있었다. “이걸로 통행세를 대신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온 말이야 햇살처럼 온유하기 그지없는 음성에 비단처럼 고운 말인데, 그 안에 담긴 뜻은 안 비키면 그대로 날려버리겠다는 칼날과 같은 협박이다. ‘빌어먹을, 이런 얘기는 없었잖아!’ 철방은 내심 이를 갈았다. 육신갑이 아니라 기공을 이루더라도 벽력탄에는 견디지 못한다. 호신강기(護身剛氣)에 준한다는 강기일식(?氣一息)의 경지라도 살아남을 확률이 반반이니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젠장, 그냥 확 덤비게 해버려?’ 잠시 무모한 계획을 떠올렸던 그는 곧바로 그 계획을 폐기해야 했다. 저거 한 방이면 길을 막고 있는 부하들이 통째로 날아가니, 경신의 공부가 낮은 그로서는 저들이 도망치면 잡을 수 없다. 혹시 벽력탄이 그를 향해 날아들기라도 하면 그건 더 끔찍하다. 어차피 죽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는데다가, 기진환이 앞장서서 길을 뚫으면 부하들은 복수 따위는 알지도 못한다는 듯 그대로 도망칠 것이다. “통행세를 직접 받으시겠습니까?” “헛!” 벽력탄을 들고 있던 손이 자신에게 향하자 철방은 기겁했다. 벽력탄을 던지더라도 자신에게 던지겠다는 소리 아닌가? 저들을 놓쳐서는 안됐지만, 지금 당장 목숨이 오락가락할 처지에 뒷일을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젠장, 그냥 가라.”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래도 통행세는 받으셔야지요.” “얘들아, 어서 길 내드려라!” 보내준다고 하기 보다는 거의 축객령에 가까운 철방의 외침에 산적들은 기다렸다는 듯 좌우로 우르르 물러났다. 세 보표는 청년을 호위하며 산적들의 포위망을 빠져나간 뒤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박표두가 청년으로부터 벽력탄을 받아들어 산적들을 견제하는 사이 기진환은 청년을 등에 업고 땅을 박찼다. 철방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신법에 능한 기진환은 한 사람을 업고도 급격히 산적들과의 거리를 벌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시야에서 깨끗하게 사라지자 철방은 안면을 와락 구겼다. “젠장, 조금만 붙잡아두면 됐는데...!” 미리 준비해둔 비책이 느닷없이 등장한 벽력탄에 의해 비틀어진 것에 이를 갈던 그는 부상입지 않은 부하들을 골라냈다. “어차피 멀리가지는 못할 테니 쫓아는 가더라도, 절대 싸우지는 마라. 시체만 수거해오면 우리 일은 끝이다.”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린 그는 비릿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운 좋게 도망치긴 했지만, 이미 비책이 이미 먹혀들어간 이상 그들은 결코 살아서 호악산을 벗어날 수 없었다. 호악채의 포위를 벗어난 뒤로부터 대략 이 각(刻) 동안 전력으로 신법을 펼쳐 길을 내달려온 기진환은 적당한 거리를 벌렸다는 생각이 들자 청년을 내려놓고 한표두를 돌아보았다. “상처는 좀 어떤가?” “저는 괜찮습니다.” 책임감이 강한 한표두는 얼마든지 더 달릴 수 있다는 듯 굳게 대답했지만, 그의 상의 한쪽을 가득 물들이고 있는 선혈은 결코 적은 양이 아니었다. “추적을 막기 위해서라도 지혈을 하는 게 우선이네. 박표두, 잠시 호위를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기진환이 한표두의 상처에 금창약을 바르고 헝겊으로 동여매는 등의 간단한 조치를 취하는 사이, 박표두는 청년에게 손에 들고 있던 벽력탄을 돌려주었다. “놀랐습니다. 설마 벽력탄 같은 걸 가지고 계셨을 줄은...” “하하, 별 거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벽력탄 하나만 하더라도 웬만한 거부는 구입할 엄두도 못 낼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걸로 압니다만.” “그야 진짜 벽력탄이라면 그렇겠지요.” “예? 그렇다면 설마...?” “생각하시는 데로입니다.” 박표두의 얼굴에 기묘한 감정이 떠올랐다. 철석같이 진짜라고 믿고 있던 벽력탄이 위조였다는 것에 대한 황당함이랄지, 그것을 사용해 태연히 철방을 협박함으로써 상황을 반전시켜버린 것에 대한 감탄이랄지... 정확히 뭐라 구분 짓기 힘든 표정으로 청년을 바라보던 그는 결국 감탄 쪽으로 결론을 내리고 웃음을 떠올렸다. “과연 천지문(天智門)의 제자다운...” 투둑. 갑자기 서늘한 무언가가 코에서부터 흘러내려오자 박표두는 하던 말을 멈추고 그것을 손가락 끝으로 찍어보았다. ‘검다?’ 코에서 나온 것이라면 피일 터이고, 그렇다면 응당 붉은색이어야 할 터인데 손가락은 분명 검은색으로 물들어있다. 이 말도 안 되는 현상에 두 눈을 크게 떴던 그는 한 순간 벼락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며 고함을 질렀다. “독(毒)!!” 독혈을 흘리기 시작한 것은 박표두만이 아니었다. 비수에 의해 큰 부상을 입었던 한표두는 코뿐만 아니라 입에서도 독혈을 울컥 쏟아냈고, 기진환 역시 철방의 대도에 가볍게 베인 상처에서 검은 피가 나오고 있었다. “이런 비열한...” 기진환은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만 같았다. 설마 독까지 사용할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더군다나 범상한 독 같지도 않으니, 이미 심각한 중독현상까지 나타난 이상 지금 당장 운기조식을 시작한다고 해도 독을 배출해낼 수 있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 그나마 청년만큼은 셋의 엄중한 호위 덕분에 중독을 피할 수 있었지만, 무공이라고는 전혀 알지 못하는 그 혼자서 호악산의 지형을 모두 꿰고 있을 산적들의 추적을 뿌리칠 수 있을 확률은 채 1할도 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가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겠소. 어서 피하시오.” 효용이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 급한 대로 해독단을 삼킨 기진환은 죽음을 각오하고 적은 가능성에나마 매달려보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진중한 음성에도 불구하고 청년은 꼼짝도 하지 않고 한 가지 물음을 던졌다. “호악채의 산적들은 아까 그곳에 있던 이들이 전부입니까?” “그건...” 기진환은 대답을 채 하지도 못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호악채에 있는 산적들의 수는 대략 이백에서 삼백에 달한다. 아까 전 상대한 산적들이 백여 명에 가까우니, 그들의 치밀한 준비를 생각할 때 나머지 인원은 십중팔구 중요한 길목에 배치되어 있을 것이다. “시간은 제가 어떻게든 벌어보겠습니다.” “대체 어떻게...아!” 힘으로는 산적은커녕 어린애도 상대할 수 없는 청년이 뭘 믿고 그러는가 싶어 의뭉스러워하던 기진환은 곧 탄성을 터트렸다. 지나치게 낮은 무력 때문에 지금까지 잊고 있던 호위대상의 신상 대한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그렇군, 그렇다면 부탁하겠소.” “최소한 반나절 정도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기진환은 위급한 상황에서도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온유함을 지키고 있는 청년의 음성에서 믿음을 얻었다. 그가 두 표두와 함께 길가에서 벗어나 적당한 곳에 자리 잡은 뒤 가부좌를 틀고 독을 몰아내기 위해 운기조식을 시작하자, 청년은 주변에서 몇 개의 돌멩이와 나뭇가지를 모아 그것을 사방에 배치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5-31 06:57:15 고친날 2005-05-31 06:57:15 읽은수 16971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2.금룡표국(金龍驃局).(4)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돌멩이와 나뭇가지들로 이루어진 진의 배치가 끝나자, 기이하게도 주변의 풍경이 울렁거리다가 그들의 모습을 집어삼켜버렸다. 이제 외부에서는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한숨은 돌릴 수 있겠구나.” 허영오행진(虛影五行陣)이 제대로 펼쳐진 것을 확인한 청년은 일단 마음을 놓았다. 허영오행진은 내부의 모습에서부터 소리나 진동까지 완벽히 차단하는 것은 물론이고, 누가 발을 들여놓더라도 자신도 모르게 진의 바깥쪽으로 돌아가게 해버리는 효능이 있다. 아무리 고수라도 웬만큼 기감(氣感)이 발달하지 않은 이상은 허영오행진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천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구나.’ 말이야 천운이라 했지만, 세 보표가 과연 독을 몰아낼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그의 운명이 결정된다. 마냥 손놓고 있을 수 만은 없어 진을 점검하며 산적들이 언제 나타날까 싶어 주위를 살피던 청년은 문뜩 기이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 위화감은...?’ 분명 한 번 느껴본 적 있는 듯한 느낌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무엇인지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고 마치 아지랑이와 같이 불투명하고 흐릿한 위화감만이 머리 속을 맴돈다. ‘아지랑이...? 아, 그 그림자!’ 벽력탄을 꺼내들기 전 느꼈던 유독 짙은 그림자를 떠올린 그의 시선이 진의 안쪽에 있는 한 나무를 향했다. 특별히 눈에 띄는 특징은 없다. 그러나 유독 그림자가 짙은 듯한 느낌의 나무가 바로 위화감의 근원지고, 그 짙은 그림자가 바로 위화감을 느끼게 하는 근본이다. 처음 한 번은 급한 상황 때문에 그냥 넘겼지만, 같은 위화감을 두 번이나 느낀 이상 그것을 또 다시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특별히 이상한 건 없는 거 같은데...’ 나무로 다가간 청년은 그림자가 짙은 부분을 손으로 천천히 훑었다. 특별할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나무의 까칠까칠한 감촉은 마치 청년의 신경과민을 조소하는 듯싶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그림자’를 느끼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어느 한 순간, 그는 자신의 손이 나무가 아닌 흑의장포에 대어져 있음을 깨닫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흑의장포와 이어져 머리를 덮고 있는 두건. 그리고 그 두건에 의해 생겨나 안면을 가리고 있는 칠흑과도 같은 그림자가 마치 그의 눈에 파고들 듯 확실하게 각인됐다. ‘짙은 그림자’가 갑자기 ‘흑의장포의 괴인’으로 변해버린 상황은 분명 기겁할만한 일이었지만, 그는 기겁하는 대신 흑의장포에서 손을 때고 허리를 숙였다. “무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그림자가 괴인이었다면 갑자기 몸에 손을 대고 만지작거린 샘이니 무례임은 확실하지만, 청년의 사과는 왠지 정작 중요한 핵심을 살짝 벗어난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 청년의 상리에 벗어난 반응 때문인지, 아니면 본래 성정이 그러한지는 알 수 없었지만 흑의괴인은 모습이 드러났음에도 특별한 행동을 보이지 않고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그런데 그 침묵을 불쾌감의 표현으로 해석해버린 청년은 품에서 하나의 옥패를 꺼내 정중하게 흑의괴인에게 내민 뒤 더욱 깊이 허리를 숙였다. “저는 천지문(天智門)의 제자인 천무(擅無)라 합니다. 지금은 사정이 여의치 않으나, 훗날 이 옥패를 가지고 본문에 찾아오시면 무례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치르겠습니다.” 천무의 진심이 통했음일까? 미동도 하지 않고 있던 흑의괴인은 천천히 손을 움직여 옥패를 받아들었다. 흑의괴인이 옥패를 잠시 내려보다가 소매 안에 넣고 나서야 허리를 편 천무는 누구나 호감을 느낄 온유한 음성으로 물음을 던졌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느 방면의 고인이신지 알 수 있겠습니까?” “......” 이제야 핵심으로 돌아온 천무의 물음에 그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한 발을 옮겼다. 단지 한걸음을 옮겼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흑의장포의 내부로부터 넘쳐나듯 흘러나온 서늘한 기운에 천무는 살짝 몸을 떨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천무를 스쳐지나간 흑의괴인은 세 보표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독을 몰아내기 위해 전신이 땀으로 젖을 정도로 운기조식에 한참 몰두해 있던 세 보표는 미처 그의 접근을 느끼지 못했다. 만약 그가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모두 피를 토하며 주화입마에 빠져들 상황이다. 하지만 천무는 그를 제지하지 않았고, 괴인도 천무를 신경 쓰지 않고 셋의 머리 위에서 가볍게 소매를 한 번 휘둘렀다. 그때 그의 소매 안에서 희뿌연 무엇인가가 흘러나와 셋의 백회혈로 파고들어간 것을 얼핏 본 천무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을 때, 기진환을 비롯한 그들의 신체에서는 갑자기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운기조식을 통해 기로 독과 밀고 당기며 격렬한 자리싸움을 하고 있던 기진환은 백회혈로부터 갑자기 서늘한 이종(異種)의 기운이 스며들어오자 당혹을 금치 못했다. 독을 밀어내기도 힘든 상황인지라 이종의 기운을 막을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기진환이 계속해서 독기에 집중해야 할지, 아니면 진기를 나눠 이종의 기운을 막아야 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 이종의 기운은 마침내 진기와 독이 백중세를 이루고 있던 기맥에 도달했다. 만약 독기에 이종의 기운까지 더해진다면 기진환으로써는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헌데, 그 뒤에 일어난 일은 매우 뜻밖의 것이었다. 기진환의 진기를 지나친 이종의 기운은 마치 굶주린 맹수처럼 독을 헤집고 다니며 독기를 집어삼키듯 흡수했다. 기진환의 진기는 독기가 줄어드는 것과 함께 독성까지 감퇴해가는 독을 상대로 점차 우세를 점했고, 이종의 기운이 독기를 절반정도 빨아들였을 때쯤에는 독을 한 곳으로 몰아낼 수 있었다. “쿨럭!” 치이익! 작은 핏덩이에 응집되어있던 독은 기진환의 토혈(吐血)에 의해 밖으로 쏟아져 나와 땅을 검게 물들였다. 그보다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리긴 했지만 박표두와 한표두도 토혈을 통해 독을 배출해냈고, 그들이 독을 몰아내느라 소모한 진기를 회복하는 사이 흑의괴인은 다시 한번 소매를 휘둘러 셋의 백회혈로부터 희뿌연 안개와도 같은 기운을 회수했다. “고인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거무죽죽하던 셋의 안면에 화색이 도는 것으로 위기를 넘긴 것을 깨달은 천무는 감사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그 감사를 받아야 할 흑의괴인은 그대로 몸을 돌려 허영오행진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은공, 과한 청일지도 모르나 은공의 존성대명(尊姓大名)을 들을 수 없겠습니까?” 흑의괴인의 걸음이 잠시 멈춰졌다. 은혜를 갚겠다는 의미가 깊이 들어있는 온유한 음성이었지만, 천무는 흑의괴인이 사사로운 보답 따위를 받으려고 걸음을 멈춘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이름은...” 약간은 어색한 감의 한어(漢語)였지만, 그는 한어의 어색함을 느끼지 못했다. 감정이라는 것이 철저히 결핍된 정도를 넘어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는 듯싶을 정도로 무심한 음성이 가져다주는 괴리감에 비하면 그것은 어색함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파타시.” 한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이루어져있는 듯한 기묘한 어감의 이름을 말하며 그는 허영오행진에 걸음을 내디뎠다. 진입에 비해 진출은 쉬운 편이라지만, 그래도 파해법을 알지 못한다면 안에서만 빙빙 돌게 되는 허영오행진을 그는 일반적인 보행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나갔다. “성은, 없다.” 파타시는 나지막한 음성과 함께 공기 중에 스며들 듯 사라져버렸지만, 천무는 그가 사라진 허공에 한참동안이나 시선을 때지 못했다. 그는 오늘 수집한 자료를 정리해 만든 정보로 호악산의 상황을 분석해보았다. ‘호악채의 이용가치가 떨어졌다.’ 힘을 늘리기 위해 행인들을 과하게 납치한 덕분이다. 이미 그들의 육신은 귀곡(鬼谷)에 널려있고 그들의 생기는 그의 힘이 되어 되돌릴 수 없으니, 토벌대가 들이닥치는 것은 기정사실일 것이다. 호악채가 토벌당하면 더 이상 호악산에서 사냥하는 것이 힘들어진다. 만약 토벌의 여파가 귀곡까지 미치면 아예 호악산을 떠나야 한다. 그러나 귀곡을 떠나는 것은 너무나 큰 손해다. 힘을 모으는 간간히 납치한 행인 중 몇 명을 제물로 삼아 의식을 치른 덕분에 귀곡의 귀기는 예전에 비해 갑절로 늘어났다. 얼마 전부터는 귀곡의 영향이 점차 넓어지기 시작했으니, 약간만 손을 보면 빠른 시일 내에 호악산을 귀산(鬼山)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귀산과 같이 흉흉한 소문이 나도는 곳에 토벌군이 오는 경우는 없다. 누군가가 실종이 되더라도 귀신이 잡아갔다고 생각하니, 이 호악산 전체가 그의 지배를 받는 그의 영역이 되는 것이다. -상관없어. 이 일만 끝나면 어차피 호악채는 사라질 테니까 말이야.- ‘아직 방법은 있다.’ 철방이 금룡표국과 싸우기 전에 했던 말을 되새긴 그는 묵봉으로 땅에 굴러다니던 둥근 물체를 찍어 터트리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올렸다. ‘오늘 밤, 호악채는 내 방식으로 사라진다.’ 천무 일행을 뒤쫓던 산적들의 처참한 시신들이 널려있는 땅 위에서, 사신(死神)은 석양으로 서서히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느끼며 밤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1 00:19:30 고친날 2005-06-01 00:19:30 읽은수 16654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3.호악혈사(虎嶽血史).(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사신이 일보를 내딛으니 밝은 보름달 아래 호악이 피에 잠기도다- "젠장,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이 고생이야?" "뭘 잘못하기는, 두목 잘못 둔 게 잘못이지." 횃불을 들고 이인일조로 호악산을 돌아다니고 있던 두 장한은 철방에게 한가득 불만을 드러냈다. 의를 숭상 한다 어쩐다 해도 그건 그냥 말뿐이지, 실제로는 힘만 있으면 장땡인 것이 녹림의 세계다. 전 녹림도를 통솔하는 녹림맹주(綠林盟主)이자, 현존하는 무림최고수인 사신오왕(四神五王) 중 도왕(刀王)에 속하는 녹림도왕(綠林刀王) 막패후(幕敗厚)는 모든 녹림도의 우상으로써 존경받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예외일 뿐이다. "이미 샅샅이 뒤져봤는데도 전혀 보이지 않는 걸 어떻게 찾으라는 거야?" "그래도 중독 된 몸으로 도망치진 못했을 테니까 어딘가에 숨어있겠지." 철방은 금룡표국의 일행이 아직까지 호악산을 벗어나지 못했을 거라고 확신하고 부하들을 풀어 사방을 샅샅이 뒤지게 하고 있었다. 금룡표국의 세 보표는 철저하게 계획을 짜서 상대하지 않으면 일개 산적들이 상대할 수 없는 고수이지만, 극독에 중독 되어 이미 죽어나빠지거나 거동도 힘들 정도의 상태에 있다면 아무리 고수라도 그들에게 목이 베일 수밖에 없다. "아, 그러고 보니 안 찾아본 곳이 없는 건 아닌가?" "안 찾아본 곳이라니? 그런 데가 어디 있어?" "어디긴...귀곡(鬼谷)이지." "뭐? 거길 가보자고? 낮도 아니고 이 밤중에?" 귀곡이라는 말을 들은 산적은 무척이나 꺼림칙한 반응을 보였다. 말을 꺼낸 산적도 심정적으로는 그와 같은 듯,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혹시 모르잖아. 어차피 밤새도록 돌아다녀야 할 텐데, 그럴 거라면 거기도 둘러보는 게 확실하고..." "뒈지고 싶어서 환장했으면 뭔들 못하겠냐? 귀곡 아래로 가서 살아 돌아온 놈이 있는 줄 알아?" "알아, 안다고. 요즘에는 그 근처에 갔다가 종종 실종된 놈들도 있고 말이지." "너도 실종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라. 난 안 갈 테니까." 동료산적의 냉담한 말에 그는 결국 귀곡을 둘러보려던 생각을 지워버렸다. 원래는 귀곡 아래쪽에만 깔려있다던 안개가 얼마 전부터 점점 올라오더니, 요즘에는 귀곡 주변으로까지 퍼지고 있다. 이성적으로야 겨우 안개 따위지만, 심정적으로는 도대체 뭐가 튀어나올지 모를 음산한 안개니 누구라도 거길 절대 들어가고 싶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 둘은 다시 입을 다물고 탐색을 계속해갔다. 호악산에 대해서라면 훤히 알고 있던 만큼 어두운 밤중에도 길을 잃고 헤매는 경우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사방에 어둠이 짙게 깔린 산중에서 숨어있을 이들을 찾는 것은 무척이나 힘들고 피곤한 일이라서 잡담을 나누기도 힘들 정도로 피로가 쌓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쿵. "응?" "왜 그래?" 뭔가 작은 울림소리를 듣고 주변을 한차례 둘러봤던 산적은 의아한 표정의 동료에게 되물음으로 답했다. "아니, 방금 저기서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 "소리라니?" "그러니까 뭔가 무거운 소리가..." 쿵! 좀더 확실한 울림소리를 들은 둘은 잠시 서로를 마주보다가 도를 뽑아들었다. 이 구역을 돌아다니는 것은, 그들뿐이어야 한다. "놈들인가?" "짐승일 수도 있지." "그럼 포식 좀 하겠구만." 설마 숨어있어야 할 녀석들이 이렇게 큰 소리를 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그들은 짐승 쪽에 비중을 두며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다가갔다. 비록 조금씩 이동하고 있기는 해도, 그만큼 지속적으로 들려왔기에 놓칠 염려는 없었다. "멧돼지라도 되려나?" "어쩌면 곰일지도 모르지." 멧돼지든 곰이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맹수로 구분하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산적질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특히 호악채에서 훈련한 합격술을 사용한다면, 곰이 아니라 호랑이가 나와도 베어버릴 자신 있었다. "저기 있다." "뭐야? 놈들인가?" 횃불의 불빛에 힐끗 비춰진 인영에 둘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이라면 분명 그 금룡표국의 놈들일 텐데, 이건 완전 예상외다. 쥐가 뒷걸음질치는 소의 발에 알아서 기어들어오는 셈이 아닌가? "신호를 보낼까?" "그럴 필요 있을까? 어차피 빌빌대고 있을 텐데." 두 산적의 눈에 순간 탐욕이 어렸다. 이번 일이 끝나면 10년간 이 짓을 해서 버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이 들어온다. 만약 놈들을 직접 잡는 공을 세우면 한평생을 놀고먹고 보낼 정도의 돈을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살짝 시선을 교환해 서로의 뜻이 일치함을 확인한 그들은 횃불을 땅에 꽂아놓고 천천히 인영을 향해 접근했다. 횃불의 불빛이 있으니 그들의 움직임이야 발각돼도 진작 발각됐을 테지만, 굵직한 나무 뒤로 뒷모습을 반쯤 드러낸 인영은 무슨 영문인지 도망치지 않고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그러한 인영의 반응은 누가 봐도 수상했지만, 탐욕에 눈이 먼 그들은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리고 나무의 좌우 양옆에서 인영을 덮쳤다. "잡았다!" "뒈져라!" 각자 목과 복부를 베어 들어오는 두 개의 도는 쉽사리 피하거나 막을 수 있을 정도로 만만치 않았지만, 인영은 피하거나 막기는커녕 마치 생사를 포기한 것처럼 두 손 놓고 몸으로 도를 받을 뿐이었다. 퍼억! "됐다!" 두 산적은 희희낙락했다. 어째 손에 느껴지는 감이 조금 이상하기는 해도, 목에 칼이 깊숙하게 박힌 놈이 살아날 수야 없는 법이니 이제 이 놈의 목만 잘라다가 바치면 큰 공을 세우게 된다. 그런데 그때, 두 산적의 눈이 기이한 광경이 비춰졌다. 딱딱한 장작이라도 되는 것처럼 경직된 채 축 늘어져있던 두 팔이 뻣뻣하게 양쪽으로 들어올려지는, 분명 꿈이나 착각일 것이 분명한 광경이다. 우두둑! 두 눈을 부릅뜨고 있던 산적들은, 그의 두 손이 자신들의 목을 쥐고 부러트릴 때까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부러진 목을 한차례 흔들어 죽은 것을 확인한 그는 하나의 시신을 나무에 기대어놓고 그 두툼한 목에 이빨을 박아 넣었다. 쫘아악 온기를 잃고 조금씩 식어가고 있던 피는 강렬한 흡입력에 의해 급격히 그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많은 피를 빨아들이면 빨아들일수록 그의 얼굴에서는 화색이 돌았고, 시신은 바짝 마르며 점차 딱딱하게 굳어졌다. 시신의 모든 피가 빨려나가 장작개비처럼 되자, 그는 시신을 땅에 던져버리고 다른 시신의 피를 빨아먹었다. 마침내 두 번째 시신의 피까지 모두 빨아낸 그는 뱃속으로부터 무언가가 들끓어 오르는 듯한 느낌에 새하얗게 뒤집혀진 눈을 번뜩였다. 뱃속에서 마치 불타오르듯 화끈거리던 피는 심장을 거쳐 차갑게 식으며 전신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비록 그 온기는 잃어버렸지만, 피에 담겨진 활력과 생명력은 고스란히 그의 몸에 흡수되었다. 피와 함께 전신에 힘이 가득 차오르는 것을 만끽한 그는 서서히 흥분을 가라앉혔다. 좀더 이 기쁨과 쾌감을 누리고 싶지만, 그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그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는 '주인'의 명령은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의 말살. 명령을 이행하기 전까지 휴식 따위는 허락되지 않는다. 쿵. 뻣뻣한 두 다리를 튕겨 앞으로 뛰어오른 그는 두 팔을 앞으로 내민 채 숨을 한 것 들이켰다. 후각을 통해 전해지는 것은 먼 곳에서 아릿하게 느껴지는 인간의 냄새. 그가 사냥해야할 인간들의 위치다. 그는 수십의 인파 속에서도 절세가인의 향기를 정확히 찾아내는 사내처럼 인간들을 찾아내 방향을 잡고, 토끼를 사냥하기 위해 접근하는 늑대처럼 그들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을 아홉 번째 희생양을 만들기 위해서. 주인의 명을 받은 것은 그 혼자만이 아니다. 그의 동류만 하더라도 그를 포함해서 모두 여섯. 그들 여섯은 아래쪽에 모여 있던 수십의 인간들을 몰살시킨 뒤부터 따로 흩어져 사냥을 하고 있다. 다른 다섯도 아마 그가 한 만큼 사냥을 했을 것이다. 이제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다. 단지 한 가지 느끼는 점은 인간들의 향기가, 사냥감의 숫자가 많이 줄어들었다는 것.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기기 전에 당장 인간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그것은 안 된다. 그가 할 일이 아니다. 그곳은 바로 주인의 사냥터. 주인의 명령을 모두 이행하고 나서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주인이 또 다른 명령을 내려줘야만 사냥을 할 수 있는 곳이다. 흘러넘치는 살기와 피에 대한 욕구를 삼킨 그는 한 나무 뒤에 멈춰서 비스듬히 몸을 기댔다. 여덟 번째 사냥감들처럼, 아홉 번째 사냥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1 00:20:51 고친날 2005-06-01 00:20:51 읽은수 15924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3.호악혈사(虎嶽血史).(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잘하고 있군.' 호악채는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금룡표국의 일행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을 뿐, 안전의 위협을 받고 있는 듯한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명령에 따라 최대한 은밀하고 확실하게 사냥을 하고 있다는 증거다. 귀곡을 떠돌던 망자(亡者) 중 그나마 가장 나은 상태의 망자들을 골라 제압한 뒤, 그들의 귀기를 흡수하고 대신 그의 귀기를 집어넣어 만든 것이 그 여섯이다. 그의 귀기로써 움직이는데다가 심령금제까지 더해져 완전히 그의 종이 된 여섯은 망자 중에서도 흡혈귀(吸血鬼) 뱀파이어(vampire)와 유사하다. 짐승수준의 지능이나 경직되어 자유롭지 못한 육신의 상태를 볼 때 최하급 흡혈귀와 시귀(屍鬼) 좀비(zombie) 중간쯤으로 구분할 수 있겠지만, 흡혈귀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면 많은 피를 흡혈하면 흡혈할수록 강해질 것이다. 가장먼저 호악산의 밑자락에서 포위망을 유지하고 있던 산적들부터 몰살시킨 뒤, 중요 길목에 여섯 망자를 풀어 놓았다. 산자의 숨결을 느끼는 후각은 개보다도 예민하고, 산자를 속이는 지혜는 여우보다 교활하며, 산자를 죽이는 힘은 대호를 능가하니, 누군가 그들 여섯을 피해 호악산을 벗어날 확률은 불가능에 가깝다. '거의 끝났군.' 후각에 파고드는 피비린내와 영혼을 울리는 죽음의 냄새로 망자들이 할 일을 거의 다 끝내나고 있다고 판단한 그는 슬슬 준비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고 한 팔을 허공에 펼쳤다. 사르르르륵.... 흑의장포의 소매가 마치 살아 움직이듯 흔들리며 희뿌연 안개 덩어리들을 토해냈다. 귀곡에 들어섰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정기적으로 종속시켜온 망령, 고스트(ghost)다. 망령 중에서는 최하급이라 하지만, 영체로 이루어져 일반적인 물리공격이 통하지 않고 흑의장포를 통해 대량으로 품고 다닐 수 있다는 유용성 때문에 선택한 고스트의 수는 대략 오십여. 물리적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저급영체지만, 아무리 저급영체라도 나름대로 사용이 가능하다. 세 표두의 몸에 집어넣어 독기를 흡수하게 했던 것도 그 사용법 중 하나에 불과하다. "교대시간이 얼마 남았지?" "글쎄, 반시진 정도 남았을걸." "오늘 따라 이상하게 으스스한데 술이라도 조금 걸치고 갈까?" "그거 좋지." 때마침 그가 은신해있던 외딴 나무 밑으로 두 명의 산적이 지나가자, 그는 희뿌연 덩어리의 형태를 하고 있는 고스트 여섯을 그 산적들에게 내려 보냈다. 허공 속에 묻혀 완전히 투명하게 변한 고스트는 각자 두 산적의 양팔과 양다리, 그리고 머리에 접촉했다. "응...? 갑자기 몸이 무거워지는데." "하암...왜 이렇게 졸리지?"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고스트에 의해 둘러 쌓인 두 산적은 갑자기 무척이나 피곤한 기색을 보였다. 고스트가 지닌 능력인 기력흡수의 영향이다. 고스트는 저급영체인 만큼 체력이나 기력, 정신력 등밖에 흡수할 수 없기에 하루만 휴식을 취하면 회복이 가능하다. 그러나 고스트를 떨쳐내지 못하면 계속 기력흡수를 당해 탈진으로 죽거나, 고스트의 또 다른 능력에 당하게 된다. 바로 이 산적들처럼. "어...으..." 한 고스트가 코를 통해 머릿속으로 스며들어가자, 두 산적은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비틀거리다가 한 순간 눈을 허옇게 까뒤집고 몸을 축 늘어트렸다. 빙의(憑依)에 걸린 것이다. 고스트에 빙의당한 인간은 통증을 느끼지 않으며 잠재능력을 이끌어내 괴력을 발휘하기에 살아있는 좀비나 다름없다. 빙의에 걸린 두 산적을 으슥한 나무 밑에 대기하게 한 그는 밤의 어둠에 녹아들어 호악채의 내부를 돌아다녔다. 대다수의 산적은 한참동안 금룡표국 일행을 찾아 돌아다니느라 지칠 데로 지친 몸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기에, 고스트를 빙의시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몇 마리를 제외한 모든 고스트를 산채에 있는 산적들에게 빙의시킨 그는 한 건물의 지붕위에 올라섰다. '도착했군.' 감각을 통해 망자들이 하나둘씩 산채 주변에 도착해 숨죽이고 있는 것을 알아낸 그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비록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허공에서 가득 느껴지는 서늘하고 정순한 음기는 시야를 대신해 하늘에 보름달이 떠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때가 됐군.' 마침내 모든 망자들이 모이자, 사내는 손에 쥔 묵봉을 허공에서 크게 휘둘렀다. 휘우웅-! 바람이 세차게 갈라지는 파공성과 함께 무형의 기운이 죽음의 소리를 품고 허공을 통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산자는 말할 수도, 느낄 수 없는 죽음의 소리를 들은 망자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쿵! 쿵! 호악채의 주변에 숨어있던 여섯 구의 망자는 그의 명령에 따라 육중한 땅울림소리와 함께 산채의 측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상당수의 인간에게서 피를 취한 덕분에 전신에 힘이 넘치는 듯, 망자들은 튼튼한 통나무로 만들어진 목책을 마치 썩은 나무담장처럼 때려 부수며 자신들의 등장을 알렸다. "뭐, 뭐야?" "이게 무슨 소리야?!" 휴식을 취하다가 느닷없는 굉음에 놀라 달려 나온 산적들은 완전히 박살난 목책과 여섯 구의 망자를 돌아보며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그 여섯 명이 목책을 때려 부수고 쳐들어온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들은 사나운 표정으로 도를 뽑아들었다. "감히 어떤 놈들이 겁도 없이 호악채에 발을 들여놓은 거냐?!" 간부 정도 되는 듯한 한 산적이 앞으로 나서며 우렁찬 고함을 내질렀지만, 하얗게 뒤집혀진 눈을 번뜩이며 코를 킁킁거려 인간의 냄새를 맡는데 정신을 쏟아 붙고 있던 여섯 망자는 그 간부의 말을 듣지 못했다. "이런 염병할 놈들이 감히 우릴 깔봐? 모두 죽여라!!" "와아아아!!" 목책을 부수고 들어온 망자들의 괴력에 은근히 위축돼있던 산적들은 간부가 대부(大斧)를 휘두르며 앞으로 뛰쳐나가자 기세가 올라 간부의 뒤를 따라 망자들에게 달려들었다. 저 간부의 목적이 군중심리를 이용해 산적들의 사기를 올리고 용맹스럽게 만들고자 했던 거라면 그것은 성공한 셈이다. 군중심리란 기름과 같아서 한번 불이 붙으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군중심리가 꼭 좋은 쪽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고, 그는 군중심리를 이용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한손에 들려져있던 묵봉이 비스듬히 기울여져 가장 앞쪽에서 달리고 있는 간부를 겨눴다. 대략 100 미터. 활 같은 장병기가 아니면 도저히 닿을만한 거리가 아니지만, 그가 사용하는 것은 병기 따위가 아니다. 묵봉의 끝에서 희뿌연 빛이 번뜩였다 싶은 순간, 망자를 노려보며 전력으로 질주하고 있던 간부의 바로 앞에 반투명한 두 개의 손이 솟아나 그의 다리를 잡아챘다. "컥?!" 콰득! 전력으로 질주하면 그만큼 작은 충격에도 균형을 잃기 쉽다. 돌부리에 체이기만 해도 나뒹구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갑자기 나타난 손에 발을 잡혔으니 간부가 곧바로 앞으로 자빠져 코가 깨진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내, 내 코..." "...부채주님..." 군중심리를 이끌던 부채주가 갑자기 나자빠지자 산적들의 사기는 순간적으로 꺼지듯 사라져버렸다. 그냥 아무나 한명이 어쩌다 실수로 넘어진 건 그냥 무시할 수 있지만, 무리를 이끌던 대장은 아무리 작은 실수를 해도 무리 전체에 일파만파로 영향을 주는 법이다. 하물며 이런 웃지도 못 할 광경을 보고 누가 기세를 올릴 수 있을까. 그러나 그들은 이 어이없는 사고 때문에 망자들이 눈을 번뜩이며 움직이기 시작한 것을 미처 보지 못했고, 그 대가는 결코 작지 않았다. 쿵! 쿵! "젠장, 이 새끼들이...!" 뭔가 이상한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어 올린 부채주는 마치 자신을 놀리기라도 하듯 양팔을 앞으로 뻣뻣하게 내밀고 두 발로 쿵쿵 뛰어온 망자들을 보고 신경질적으로 도끼를 휘둘렀다. 퍽! "어떠냐, 이 뒈질 놈들아!" 조금 전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단번에 한 놈의 목에 대부를 박아 넣고 호기롭게 고함을 질렀던 그는 순간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나름대로 한 수 재간을 배워 통나무라도 단번에 절단 낼 수 있는 그의 대부가 겨우 손가락 한 마디를 파고들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그 정도만 해도 목으로 피를 분수처럼 쏟아내며 죽어 나자빠지기에는 충분하지만, 어째 그의 앞에 있는 놈은 죽기는커녕 꿈에서라도 보기 두려운 흉악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1 06:48:08 고친날 2005-06-01 06:48:08 읽은수 15227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3.호악혈사(虎嶽血史).(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잘못 걸렸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부채주는 뒤로 급히 물러나려 했지만, 상대가 두 팔을 쭉 뻗어 양어깨를 붙잡자 마치 족쇄가 채여지기라도 한 것처럼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었다. "이 아구창을 날려버릴 잡것들이...! 당장 못 놔?!" 어느새 사방을 둘러싼 망자에게 팔과 다리까지 붙들려 허공에 붕 뜨게 된 그는 욕지거리를 지껄이며 발악을 했지만, 망자들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입을 쩌억 벌리며 자신들의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푸욱! "컥, 커억...!" 어둠으로 가득 찬 하늘을 향해있던 그의 동공이 급격히 축소됐다. 목의 좌우에 하나씩, 양팔에 하나씩, 양다리에 하나씩 하여 모두 여섯 개나 되는 이빨이 그의 몸을 파고들어 산채로 피를 빨아내고 있었다. 생기가 빨려나가고 대신 사기가 가득 차오르는 끔찍한 느낌에 부채주는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며 생애의 마지막 단말마를 지르려고 했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처참하게 도살되는 짐승의 격한 숨소리뿐이었다. 여섯이나 되는 망자에게 흡혈을 당했기 때문일까? 부채주의 동공은 어느 순간부터 탁 풀려 공허하게 하늘을 비쳤고, 그의 몸은 순식간에 모든 피가 빠져나가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빨아내려는 듯 살을 으드득 씹던 망자들은 그의 몸에 더 이상 피가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자 이빨을 빼내고 여섯 쌍의 손으로 그의 사지를 잡아 당겼다. 쫘아악!! 콰드득! 마치 잘 익은 오리구이에서 다리를 뜯어내는 것과 같이, 그러나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처참하고 잔혹하게 사지육신이 갈가리 찢겨나가 사방에 흩어졌다. 으스러진 뼈와 뭉개진 살점이 한가득 모습을 드러내는 가운데, 오직 붉은 피만이 단 한 방울도 보이지 않는 그 기괴한 광경은 오히려 시산혈해보다 더욱 잔혹하고 두렵게 느껴지고 있었다. "으으..." "부, 부채주가..." 그 광경을 망연자실하게 지켜본 산적들의 사기는 이제 더 이상 떨어져 내릴 수 없을 정도로 바닥을 기었다. 대장이 가벼운 실수를 한 것과 죽은 것은 차원이 틀리다. 만약 생전 대장에 대한 존경심이나 충성심이 넘쳐났다면 군중심리에 분노가 심어질 수도 있지만, 호악채의 부채주는 그렇게 인덕이 높지 않았던 데다가 그 죽음이 너무나도 처참해서 분노보다는 다른 것을 자극했다. 채주 말고는 상대할 수 없던 부채주가 겨우 도끼질 한 번 해보고 죽었고, 상대는 목에 도끼가 박혀도 죽지 않고 사람피를 빨아먹고 사지를 뜯어내는 괴물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의 군중시리에 암암리 큰 충격과 흔들림을 주었고, 한 산적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함을 토해냄과 함께 그들은 자신들이 느끼고 있던 감정의 정체를 확연하게 깨달았다. "가...가...강시( 尸)다!!" "허억!!" "가, 강시!" 그제 서야 상대가 바로 죽어도 죽지 않는 괴물 강시라는 것을 알게 된 산적들은 공포를 자각했고, 군중심리에 의해 도저히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난 공포는 그들 모두를 집어 삼켜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 사이 산적들을 향해 몸을 돌린 강시들은 뒤집힌 눈을 꿈틀거리며 새로운 먹이를 잡기 위해 몸을 튕겼다. 쿵!! "나, 난 죽기 싫어!!" 여섯 구의 강시가 동시에 앞으로 뛰어오는 것에 죽음의 공포를 느낀 한 산적이 등을 돌린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공포에 질릴 대로 질려있던 산적들은 강시를 상대하기보다 도망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강시라고 하는군.' 그는 지하석부에서 노인의 혼잣말을 들으며 이곳의 언어를 독학한 만큼 일반적인 명칭이나 문자에 대해서는 모르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때문에 산적들의 비명을 듣고 나서야 자신이 종속시킨 여섯 망자가 강시( 尸)라는 것을 알게 된 그는 그 명칭을 기억해두었다. 말에는 힘이 있고, 이름에는 존재가 있는 법. 망자를 다스림에 있어서도 그 제대로 된 명칭을 알고 모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강시라는 명칭을 암기하면서도 그는 망자들에 대한 통제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네 강시에게는 산적들을 쫓아 죽이도록 하고, 두 망자에게는 각자 목책의 입구와 부서진 곳을 지키게 했다. 이로써 강시를 쓰러트리지 않는 이상 호악채를 벗어날 수 없어졌고, 네 구의 강시면 호악채를 쓸어버리기에 충분하다. 또한, 그가 준비한 것은 강시만이 아니었다. "으아악!!" "너...네가 어째서...?" 그가 미리 대기시켜 두었던 빙의당한 산적들은 산채 곳곳에서 튀어나와 도망치고 있던 산적들을 베었다. 하나같이 눈이 허옇게 뒤집혀진 그들의 모습은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지만, 밤의 어둠과 강시의 공포에 눈이 가려져있던 산적들은 그러한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이 배신자 새끼!" 그러던 한 순간, 빙의당한 산적의 도에 허리를 베인 한 산적이 비명과도 같은 처절한 외침과 함께 상대의 목을 베어버리는 것으로 허둥거리던 산적들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배신...? 배신이라고?!" "네놈들이 한솥밥을 먹던 우리를 배반해?" "강시를 불러온 것도 네놈들 짓이구나!" 배신이라는 것으로 이 모든 상황을 단정해버린 산적들의 눈이 빙의당한 산적들과는 다른 의미로 뒤집혀졌다. 강시에 의한 지독한 공포와 흥분이 급변한 상황에 더해져 그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했고, 흐려진 정신은 공포의 대상인 강시에게는 미처 쏟아내지 못했던 분노와 파괴욕구를 배신자들에게 쏟아내도록 만들었다. 촤악! "죽여라! 배신자를 죽여라!!" 산적들의 도가 무차별적으로 서로를 향했다. 공포를 잊어버리기 위해 광기로 물든 그들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제외한 모든 동료를 배신자로 규정하고 서로를 향해 도를 휘둘렀고, 정작 상대해야할 강시들에 대해서는 공포와 함께 까맣게 잊어버렸다. 공포를 피하기 위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강시라는 존재의 인식을 거부해버린 것인데, 어떤 산적의 경우 심지어 강시에게 목을 물리면서도 동료를 향해 도를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거의 끝나 가는가.' 산채에 남아있던 인원은 거의 백여 명. 그 중 절반가량은 고스트에 의해 빙의되었고, 남은 절반도 서로간의 상잔과 강시들에 의해 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동안 그가 산적들에게 입은 피해는 고작 빙의당한 십여 명의 산적이 쓰러진 것뿐인데, 그마저도 쓰러진 산적들로부터 빠져나온 고스트가 다른 산적들에게 빙의됨으로써 전혀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한 최상의 결과다. 자신의 피해는 최소한으로 하고, 적의 피해는 최대한으로 한 결과. 그뿐만이 아니다. 저들이 지금 서로를 죽이고 죽어가며 뿜어내는 분노와 광기는 만월의 달빛의 음기에 뒤섞여 호악산에 퍼져나가고 있다. 뒤틀린 감정이 섞여 한없이 증폭된 음기는 땅속에 뿌리내려 대지를 말라죽이고 하늘로 치솟아 일광을 가린다. 아마 채 열흘이 지나지 않아 호악산의 모든 나무는 말라 죽고, 금수는 병들며, 하늘에는 짙은 구름과 안개가 가득하게 될 것이다. 죽은 대지로부터는 끝없이 음기가 솟아나며 차단된 하늘로부터는 일점의 양기도 들어오지 않으니, 대낮에도 망자들이 대지를 떠돌고 밤이 되면 죽은 자가 망자로 화하는 완전한 귀산(鬼山)이 되리라. "이런 개새끼들을 봤나? 모두 멈추지 못해!!!" 광기로 물든 산적들의 정신을 뒤흔드는 우렁찬 고함에 그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잘 달련된 근육질의 거한, 호악채의 채주인 대도산왕 철방이 시뻘겋게 물든 얼굴로 산적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좋지 않군.' 부채주가 산적들의 사기를 올렸다가 죽음으로써 공포를 극대화시켰듯, 지도자란 수하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게다가 철방은 무식하게 생기긴 했어도 강한 양기와 정력을 타고나 사기(邪氣)에 흔들리지 않고 음기(陰氣)를 몰아내며, 양기(陽氣)를 이끌어내어 사람들을 따르게 하는 힘이 있어 만만치 않은 상대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철방의 고함 한 번에 광기에 물든 산적들과 빙의당한 산적들이 모두 주춤해 하자, 그는 짧은 주문으로 주변의 음기를 활성화시켰다. 철방의 호령에 담긴 양기에 위축되었던 고스트들은 음기가 활성화되자 그의 명령에 따라 계속해서 산적들을 공격을 이어갔고, 그에 휘말린 산적들이 다시 광기에 빠져든 틈을 타 두 구의 강시가 철방에게 달려들었다. "이 미친새끼들은 또 뭐야?" 중요한 일을 보느라 시끄러운 소란소리가 비명소리가 되어서야 밖으로 빠져나왔다가 수하들이 서로 칼질을 해대는 것을 보고 다짜고짜 고함을 내질렀던 철방은 안면을 종잇장처럼 일그러트렸다. 잠시 멈칫했던 수하들이 자신을 깨끗하게 무시하고 서로를 향해 미친 듯이 칼질을 해대는 것이나, 눈깔이 뒤집힌 미친놈 둘이 맨손으로 자신에게 달려드는 것 모두 그의 심기를 들끓게 하고 있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1 11:46:14 고친날 2005-06-01 11:46:14 읽은수 15015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3.호악혈사(虎嶽血史).(4)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부우웅! 콰직! 철방의 손에서 휘둘러진 대도(大刀)에 한 강시의 어깨가 쪼개졌다. 고목 같은 피육을 지니고 있기에 도끼도 제대로 박히지 않는 강시지만, 비록 대공은 없어도 동피철혈기공(銅皮鐵血氣功)을 극성으로 익혀 수백 근의 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철방의 대도는 맨몸으로 받을 수 있을만한 것이 아니다. 물론 강시도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끼고 옆으로 몸을 튕겼기에 머리가 박살나는 참사는 피했지만, 대도는 그 커다란 크기에 걸맞지 않게 허공에서 방향을 꺾어 강시의 어깨를 찍은 것이다. 비록 철방이 익힌 것이 삼류무공으로 분류되는 칠성도법(七星刀法)이고 그 성취가 5성에 불과하다고는 하지만, 같은 삼류무공이라도 한낱 삼류무사가 사용하는 것과 철방 같은 일류고수가 사용하는 것에는 여러모로 큰 차이가 있다. “내가 왜 대도산왕(大刀山王)이라고 불리는지 알려주마!!” 호탕하게 고함을 내지른 철방이 칠성참혼(七星斬魂)의 초식을 펼치자 무시무시한 파공성이 터져 나왔다. 그야말로 바위라도 깨부술 것만 같은 맹격이었다. 그러나 이미 죽었으되 죽지 않았기에 공포를 모르는 망자에 속한 강시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앞으로 몸을 튕겨 철방의 몸을 후려갈겼다. 퍼엉! 한 강시의 목이 반쯤 동강남과 함께 철방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그 맹격조차 목뼈에 막혀 목이 반쪽 나는 정도에서 그친 강시나, 곰조차 배가 터져나갔을 강시의 괴력에도 멀쩡한 철방 모두 그야말로 괴물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았다. “쓰벌, 뼛속까지 저리네.” 욕지거리와 함께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상대가 쓰러지기를 기다리는 여유를 부리던 철방은 목이 반쪽 났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쓰러질 기색을 보이지 않는 강시의 모습에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너? 왜 안 죽어?” 물론, 대답할 의무가 없던 두 강시는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갔다. 후려치는 방법이 안 통한다는 점을 학습한 듯 그들의 공격은 눈과 귀 등의 급소가 있는 머리를 향해 집중됐고, 칠성회두(七星廻斗)의 초식으로 강시들의 공격을 떨친 철방은 그제 서야 무언가를 깨달은 듯 미간을 좁혔다. “네놈들...강시였구나! 죽지 못해 환장한 놈들이 왜 우리 산채에 들어와?!” 상대가 죽지 않는 강시라는 점에 공포를 느끼기 보다는 산 놈도 아니고 뒈진 놈과도 싸워야 하는 게 무척이나 기분 더럽다는 듯한 심기를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낸 철방은 분개하며 더욱 사납게 도를 휘둘렀다. ‘역시 쉽지 않군.’ 낮에 전투가 있을 때 이미 본적은 있지만, 철방의 육신은 예상보다 더욱 단단했다. 커다란 거목이라도 일격에 분지를 수 있을 강시의 괴력을 맨몸으로 받아내고도 경미한 부상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는 힘들다고 판단한 그는 철방을 향해 고스트 핸드(ghost hand)를 시전 했다. 예의 부채주 때와 마찬가지로 땅에서 솟아난 반투명한 두 개의 손은 철방의 두 다리를 붙잡았지만, 철방의 무식한 힘과 넘쳐나는 양기는 그 즉시 두 귀령수(鬼靈手)를 흩어내 버렸다. ‘그 정도인가.’ 이미 예상한 일이다. 단지 철방의 양기에 네크로맨시(necromancy)가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시험해봤을 뿐. ‘좀더 상급의 술이 필요하겠군.’ 소매에서 한 마리의 고스트를 꺼내든 그는 시간을 벌기 위해 두 구의 강시를 더 붙여 총 네 구의 강시로 하여금 철방을 공격하게 만들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 뒈진 놈들이 이젠 떼거리로 덤벼?!” 강시가 넷으로 불어나자 철방은 방어에 사용하고 있던 2할의 힘마저 모조리 공격으로 전환시켰다. 육신갑(肉身甲)을 이뤄 내가중수법이나 검기에라도 맞지 않는 한 절대 깨질리 없는 육신이 있기에 가능한 무식한 공격이다. 그렇게 철방이 날뛰는 사이 그는 무심한 음성으로 주문을 이어나갔다. 하늘이 무너지더라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듯한 음성과 저주받아 사이하고 요악스럽기 그지없는 죽음의 언어로 이루어진 주술(呪術)은 그의 귀기와 주변에 넘쳐흐르던 원념이 담긴 음기를 사용해 눈에는 보이지 않는 원령(寃靈)을 불러냈다. 그의 주변을 맴돌던 원령은 주술이 끌어 모아둔 기운을 집어삼킨 뒤 철방을 향해 곧바로 날아들었다. 철방의 몸에서 넘쳐흐르는 양기에 잠시 주춤하기는 했지만, 곧 주술로 받은 음기로 양기를 상쇄시키고 완전히 그의 몸에 스며들어갔다. 서걱! “으하하, 어떠냐, 이놈들!” 때마침 한 강시의 목을 절단 내버리고 의기양양해하던 철방은 한순간 몸이 오싹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그저 기분 탓일 거라고 넘겨버리고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갔다. “하압! 칠성참혼(七星斬魂)!” 한 강시가 옆쪽에서 손을 휘둘러오는 것을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도외시한 그는 호기가 치솟은 김에 초식명까지 외치며 도를 내리그었다. 퍼엉! “컥?!” 마악 강시의 머리를 박살내려던 순간, 옆구리가 부서지는 듯한 충격을 받은 철방은 본능적으로 몸을 굴려 충격을 해소시키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일류고수답게 본능단위로 단련된 그의 몸은 벌써 다음 공격에 대비해 자세를 잡았지만, 그의 정신은 온통 혼란에 빠져있었다. 다행히 뼈나 내장까지 상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의 옆구리는 지금 시퍼렇게 멍들어있었다. 육신갑을 이룬 뒤 이만한 충격을 받아본 것은 맹세코 지금이 처음인 그였다. 쿵! 그가 혼란에 빠진 사이, 처음으로 타격이 먹혀들었다는 것을 깨달은 세 구의 강시는 공격에 더욱 기세를 붙였다. 이미 타격을 받은 철방은 감히 강시들의 공격을 경시하지 못하고 방어에 8할의 힘을 쏟아 부었지만, 그가 지금까지 강시들을 상대할 수 있던 것은 어디까지나 육신갑에 이른 외문기공 덕분이지 도법의 성취가 높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퍼벙! 강시들의 손톱은 마치 칼날처럼 그의 피육을 찢어놓았고, 그들의 손은 철퇴가 되어 뼛속까지 충격이 진동케 했다. “이, 이런 염병할...” 전신이 멍투성이에 피투성이가 된 철방은 이를 악물었다. 십수년이 넘는 수련을 통해 완성한 그의 육신갑은 깨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강시들의 공격에 의한 충격이 갑자기 육신갑을 뚫고 전해져오는 것을 그는 이해하지 못했고, 용납하지도 못했다. “으아아아아아아!!!!” 도를 크게 휘둘러 강시들을 떨친 철방이 분노에 가득 찬 고함을 터트리는 순간, 그의 몸에서 원령이 튕겨지듯 빠져나왔다. 감정이 치솟아 오름과 함께 갑자기 증대된 양기에 밀려나온 원령은 공허한 눈으로 허공을 두리번거리다가 이번엔 주술사(呪術師)인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죽었으되 죽지 않은 망자나 망령을 다루는 사령술(死靈術)에 비해 완전히 죽어 명계에 속한 귀신을 부리는 주술(呪術)은 위험부담이 크다. 만약 주술이 실패할 경우, 그 저주(詛呪)가 역류해 갑절로 주술사를 덮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원령을 향해 무심하게 한 손에 잡아두었던 고스트를 앞으로 내밀며 짧은 주문을 외웠다. 주문에 따라 인도된 원령은 주술사를 대신해 그가 내놓은 고스트에게 스며들어갔고, 자신의 영체가 다른 영체에 의해 공격당한 셈이 된 고스트는 격렬하게 요동치며 원령을 몰아내고자 했다. 허나 귀기(鬼氣)에 근본을 둔 망령(亡靈) 중에서도 최하급에 속한 고스트는 영기(靈氣)에 근본을 둔 원령을 떨쳐낼 수 없었고, 그 결과 영적인 비명과 함께 영체가 깨져나가 혼백이 산산이 흩어졌다. ‘조금 이르군.’ 고스트의 마지막 단말마를 흘려 넘긴 그는 다시 분전하기 시작하는 철방을 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경상이라고 하기는 힘들어도 중상이라고까지 할 정도는 아닌 상태다. 조금만 더 있으면 더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강시들로 하여금 철방에게서 물러나 산적들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다시 타격이 통하지 않게 된 철방을 상대로 고전하고 있던 강시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곧바로 뒤로 몸을 튕겼다. 서로간의 상잔으로 이제 얼마 남지 않았던 산적들은 세 강시의 공격에 의해 순식간에 전멸해 버렸고, 그들은 고스트에 빙의되어있던 산적들마저 모조리 학살한 뒤에야 몸을 멈추고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이...빌어먹을!!” 강시들이 물러난 틈을 타 겨우 한숨을 돌리고 떨어진 체력을 회복하려던 철방은 그 짧은 사이 전멸해버린 부하들을 보며 망연자실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바로 몇 시진 전까지만 하더라도 녹림칠십이채에 못지않은 규모를 자랑하던 호악채가 느닷없이 나타난 강시들에 의해 이 꼴이 되었다는 사실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 죽여 버리겠다!!” 별로 아끼진 않았지만, 그래도 우두머리로써 통솔해오던 수하들의 몰살에 들끓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철방은 강시들의 목을 모두 베어 복수를 하기 위해 앞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철방는 채 삼보를 내딛기도 전에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대도를 땅에 떨어트려야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2 00:27:05 고친날 2005-06-02 00:27:05 읽은수 14513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3.호악혈사(虎嶽血史).(5)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뭐야...이건?” 경련을 일으키는 손을 붙잡은 철방은 다섯 개의 손톱 끝이 모두 푸른색으로 물들어있는 것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독(毒)?” 그의 시선이 자신의 상처를 훑었다. 어느새 붉은색을 잃고 기괴한 녹색이 뒤섞인 선혈은 그의 추측이 분명한 사실임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내가...중독이라고?” 그제야 그의 머리 속에 한 가지 잊고 있던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강시는 시독(屍毒)을 지니고 있기에 상대함에 있어 항상 주의해야한다는 것을 듣기는 했지만, 동피철혈기공을 극성까지 익혀 육신갑뿐만 아니라 백독불침(百毒不侵)의 내성까지 이룬 자신에게는 해당사항이 아니라고 가볍게 흘려 넘겼던 것이 실수였다. “이런 육시랄...” 철방은 산 채로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며 무너져 내렸다. 호악산의 주인으로 군림하던 그에게 있어서는 정말이지 허망한 최후가 아닐 수 없었다. ‘일단은 끝났군.’ 그는 백여 명에 가까운 산적의 시체가 사방에 널려있는 처참한 땅 위에 유령처럼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뛰어내렸다. 허공을 떠돌던 고스트들과 세 구의 강시에게 혹시라도 남아있을지 모를 생존자에 대한 멸살을 명령한 뒤, 이미 심장이 멈춘 채 전신이 굳어진 철방에게 걸음을 옮겼다. ‘능력에 비해 흡수할 수 있는 기운은 그리 많지 않다.’ 기운이 전신의 피륙과 근맥에 스며들어 완전히 일체화돼있기에 지금 당장 심장을 뽑아내 삼켜도 기운의 일부밖에는 흡수할 수 없다. 생육을 씹어 먹고 피를 빨아먹는다면 모르겠지만, 죽어서도 쇳덩이처럼 단단한 육신은 강시들이라도 쉽대 손대지 못할 것이다. ‘망자로 만들어 종속시키는 편이 좋겠군.’ 이 정도면 구하기 힘든 좋은 재료다. 식인귀(食人鬼) 오우거(Ogre)와 비교하면 근력과 본능적인 감각이 좀 떨어지지만, 피륙의 단단한 만큼은 오히려 더 높은 수준이다. 하급의 망령인 고스트와 중급의 망자인 강시들을 적당히 모았던 만큼, 힘만 충분히 준비되면 상급의 망자도 하나쯤 종속시킬 생각을 가지고 있던 그에게 있어서는 뜻밖의 행운이다. ‘한두 달 정도는 이대로 보존해두어야겠군.’ 아직은 상급 망자를 만들어 종속시킬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호악산이 귀산으로 변하면 빠른 시일 내에 힘을 모을 수 있다. 시체와 영혼을 보존하는 기초적인 사령마법을 사용한 그는 문뜩 무언가를 느끼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과연, 과연. 웬 강시나 나타나 설치나 싶었는데 그대가 배후였구려.” 철방이 뛰쳐나왔던 문에서 여유가 넘치는 음성과 함께 섭선을 흔들며 모습을 드러낸 중년의 문사(文士)의 모습에 그는 자연스럽게 묵봉으로 땅을 찍어 고스트와 강시들을 소집하며 몸을 일으켰다. 비록 눈으로 보지는 못해도, 영혼까지 꿰뚫어보는 그의 감각이 알려주고 있었다. 이 중년문사가 짊어진 원한의 무게가 얼마나 짙은지, 지금까지 그의 손에 명을 마감한 이들이 얼마나 절망스럽고 비참하게 죽어갔는지. 그리고...그가 얼마나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는 강자인지. “도검불침(刀劍不侵)이 아닌 걸 보니 연성도 제대로 되지 않은 강시인 듯싶은데...어느 방면에 속해계시오? 도술(道術) 제일의 모산파(茅山派)? 사술(邪術) 제일의 배교(拜敎)? 강시(?尸) 제일의 혈문(血門)? 본인의 견식이 적어 주술삼방(呪術三幇)밖에 떠오르는 데가 없으니 혹시라도 기분이 상하셨다면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기 바라오.” 중년문사의 말을 듣던 그는 혈문이라는 곳을 노인에게 자주 들어본 적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지만, 그 기억은 곧바로 묻혀버렸다. 지금은 다른 잡념 따위를 떠올릴 상황이 아니다. 수십 마리의 고스트가 투명한 형상으로 허공을 날아와 그의 주변을 겹겹이 감싸고, 도주자를 막기 위한 강시까지 포함하여 총 다섯 구의 강시가 그와 중년문사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하지만 그가 모든 망령과 망자를 불러들였음에도 중년문자는 조금도 여유를 잃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아, 증인문제라면 내 이미 정리해두었으니 걱정 마시구려. 본의는 아니겠지만 어째든 본인을 대신해 일을 처리해준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오.” 상당히 우호적인 말이지만, 그 안에 담겨진 의미는 결코 좋다고 넘겨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손을 쓰지 않았더라도 중년문사가 호악채를 쓸어버렸을 거라는 뜻이니까. ‘판단착오인가.’ 어차피 호악채가 몰살될 운명인 것을 알았다면, 그리고 이곳에 이런 와룡(臥龍)이 웅크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면 굳이 나서 위험을 자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보부족이군.’ 그는 자신의 한 가지 실수를 깨달았다. 귀곡에서 힘을 모으는 것에만 집착한 나머지 정보를 너무 등한시했다. 최소한 호악산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만큼은 고스트를 이용해 샅샅이 알아둬야 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벌어진 일은 뒤바꿀 수 없으니, 우선은 이 상황에 대처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럼 좀 늦었지만 소개를 하겠소. 본인은 천뇌문사(千腦文士) 장일산(將日産). 지금은 비록 이 작은 산채에 몸담고 총관직을 맡고 있지만, 실제로는 조금 더 큰 주인을 두고 그분을 위해 일하고 있는 천뇌문(千腦門)의 문주 되는 사람이오.” 장일산이 자신의 성명을 밝혔음에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은 장일산이 적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는 상황. 굳이 이름을 밝혀 혹시나 모를 후환을 남길 필요는 없다. 그가 대답하기만을 기다리며 느긋하게 부채질을 하던 장일산은 잠시 후에야 그가 대답할 생각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볍게 탄성을 흘렸다. “과연, 안면까지 가린 상황에 굳이 성명을 밝히지 않으시겠다는 거요? 세속적인 관습보다 합리적인 판단을 우선하시니, 과연 이 장모의 마음에 드십니다.” 침묵을 지키는 그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장일산은 불쾌감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호감을 느끼는 듯싶었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라면 만나본 적 있다. 대체로 정선하기보다는 사악하고, 상식적이기보다는 괴이하며, 무능하기보다는 유능한 이들이 장일산과 같은 특이한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그 뒤에 따르는 반응은 거의 일정한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대가 만든 강시가 그렇게 뛰어나보이진 않지만, 강시라는 것이 원래 많은 시간과 재료가 필요한 법이니 그 사정을 이해하오. 때문에 그대의 능력을 높이 봐 권하는 바이니, 혹 본모의 주인을 함께 모셔볼 생각은 없으시오?” 사이한 술수로 강시를 부려 호악채를 몰살시킨 직후다. 그런데도 이렇게 태연히 함께할 것을 권유한다면 장일산이 걷는 길 또한 바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장일산이 정도를 걷든 사도를 걷든 상관없다. 그가 걷는 길은 오직 홀로 걷는 길, 다른 그 누구도 동행할 수 없는 길이니까. “흠...없으신 모양이구려. 뭐, 대략 짐작은 하고 있었소만.” 침묵을 지키는 그의 태도에 중년문사는 애당초 기대도 거의 하지 않았다는 듯 가볍게 혀를 차며 눈을 가늘게 떴다.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이번 호악채의 일에 본인이 관련된 것은 절대적으로 지켜야할 비밀이외다. 오늘 그대가 한 일을 보아하니 굳이 오늘의 일을 떠들고 다닐 성품은 아닌 듯싶지만, 주인께서는 철저한 것을 좋아하시기에 이 장모가 그대에게 무례를 범해야겠소.” 죽음, 파멸, 파괴, 선혈로 물든 영혼의 기운이 한 줄기 살기(殺氣)를 타고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진다. 이곳에서 본 가장 강한 강자가 지하석부의 노인이었다면, 장일산은 가장 상대하기 힘든 강자다. 장일산은 노인처럼 그를 생포해 실험한다는 등의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확실하게 숨통을 끊을 뿐. 쿵! 살기를 느낌과 동시에 그는 명령을 내려 다섯 구의 강시와 수십 마리의 고스트로 하여금 장일산을 공격하도록 만들며 그림자속에 스며들었다. 아직은 장일산을 상대할 힘이 없다. 지금으로써 최선의 선택은 고스트와 강시를 모조리 희생시키더라도 이곳을 벗어나는 것. 단 한 순간이면 된다. 육신이 나약해진 상태에서조차 노인조차 눈치 채지 못했던 은신(隱身)을 펼치면, 장일산이라도 그를 찾아낼 수 없다. “뒷일을 기약하며 물러난다는 것도 마음에 들긴 하지만...그대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소이다.” 우우웅-! 그의 생각을 꿰뚫어본 듯, 나지막한 음성을 흘린 장일산의 손에 들려져있던 섭선이 크게 펼쳐지며 푸르른 기운에 의해 덮여졌다. 눈에 보일 정도로 뚜렷하게 유형화된 그 기운에서 위험을 느낀 그는 은신하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급격히 끌어올린 귀기로 본 아머(bone armor)와 본 실드(bone shield)를 펼쳤다. 빠드득! 허공에서 갑자기 생겨난 뼈조각들은 서로 얽히고설키며 흑의장포 안쪽에 얇으면서도 정교한 골갑(骨甲)과 앞쪽의 허공에 원형의 골순(骨盾)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골갑과 골순이 만들어진 찰나, 장일산의 손에서 섭선이 크게 휘둘러지며 초승달 모양의 거대한 푸른 기운이 쏘아져 나왔다. 서걱-! 다섯 구의 강시가 단 일격에 허리가 동강나고, 수십의 고스트가 단지 그 여파만으로 산산이 터져나갔다. 압도적인 파괴력을 지닌 초승달이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처음과 비교해 조금도 줄지 않은 기세 그대로 허공을 가르며 날아들어 골순을 가른 뒤, 그의 품안으로 깊숙이 파고든 뒤에야 움직임을 멈추며 극도로 응집되어있던 푸른 기운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콰과광!!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2 07:03:36 고친날 2005-06-02 07:03:36 읽은수 14790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3.호악혈사(虎嶽血史).(6)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푸른 기운의 폭발에 휘말린 흑의장포가 터질 듯 부풀어 오르고 골갑이 으스러짐과 함께 그의 몸이 뒤로 튕겨져 한 건물의 벽에 틀어박혔다. '위험하다.' 묵봉으로 푸른 기운을 막아 터트리고, 흑의장포가 폭발의 충격을 대부분 흡수해주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받은 충격은 적지 않다. 만약 마기에 의해 강화된 육신이 아니었다면 전신이 으스러졌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위기를 넘긴 것에 안도할 때가 아니다. 상대가 지닌 힘은 지하석부의 노인과 비교해도 큰 손색이 없을 정도. 특히 방금 전과 같은 공격은 단 한 번만 허용하더라도 치명적이다. '기회가 필요하다.' 손을 움켜쥐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 상처에서 방울방울 흘러나온 피는 조금씩 그의 손 안에 고이며 움켜쥔 손바닥을 시커멓게 물들였다. "놀랍군, 놀라워. 뼈를 자유롭게 만들어내어 다루거나, 내 선풍강기(扇風剛氣)을 막아낼 정도로 대단한 주술이 있다니." 장일산은 몹시 흥미로운 표정으로 벽에 틀어박혀있는 흑의괴인을 바라보았다. 강기(剛氣)란 진기가 극한으로 응집되어 천하에서 가르지 못하는 것이 없고 부수지 못하는 것도 없는 막강한 힘. 비록 그의 경지가 아직 화경에 이르지 못해 특수한 기공(奇功)을 사용해 기를 강제적으로 응집시켜 만들어냈다고는 해도, 그 위력은 검기 따위와는 천차만별이다. 그런 강기를 맞이하고도 몸이 절단나기는커녕 흑의장포조차 상하지 않았다. 내공을 사용한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으니 분명 주술로 막아낸 것일 터. 비록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한 듯싶지만, 강기를 정면으로 맞고 살아있다는 것만 해도 웬만한 고수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요사스러운 섭혼술이나 잡스러운 환술, 사이한 강시술만이 주로 알려져 있어 무림에서 천시 받는 주술로 무공의 정점인 강기를 막아냈으니, 이 흑의괴인은 그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박학다식한 높은 경지의 주술사(呪術師)일 것이다. "그 능력은 안타까우나 이미 그대와 척을 진 것을 돌이킬 수는 없으니, 더 이상 헛된 저항으로 고통을 늘리지 말고 편히 가도록 하시게." 섭선을 일자로 접은 장일산이 가볍게 손목을 튕기자 전과는 달리 일자형의 강기가 흑의괴인을 향해 똑바로 쏘아져 나갔다. 그러나 흑의괴인의 대응 또한 전과 같지는 않았다.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듯 단번에 벽에서 몸을 뽑아낸 흑의괴인은 일점의 소리나 기척을 흘리지 않으면서도 빠르기 그지없는 유령과 같은 움직임으로 장일산과의 거리를 좁혀 들어왔다. '호오, 거리를 좁혀?' 움직임을 볼 때 무공에 전혀 문외한은 아닌 듯싶지만, 특별한 신법이라고 하기에는 미묘한 점이 조금 보이는 것이 주술에 비해 무공의 수준은 그리 높지 않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기를 어렵지 않게 사용하는 초절정고수(超絶頂高手)인 자신에게 접근해온다는 것은 뭔가 속셈이 있다는 뜻. '재밌군. 재밌어.' 장일산은 입 꼬리를 올렸다. 머리를 사용함에 있어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셋 중 하나라는 점에 가장 큰 자부심을 느끼지만, 무공에 대한 자부심 역시 낮은 것은 아니다. 사신오왕(四神五王)의 경지를 따르진 못하고, 무림삼괴(武林三怪)와 절기를 겨룰 수는 없어도 팔정협칠사마(八正俠七邪魔) 정도라면 이기지는 못해도 지지 않을 자신은 있다. 천안도괴(天眼道怪)와 비교할 수준은 안 되겠지만, 그래도 천하에 보기 드문 제대로 된 주술사가 대체 어떤 재주를 보여줄지 호기심을 가질 자격은 충분히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럴 수야 없지.' 흑의괴인이 과연 어떤 수를 쓰더라도 상대할 자신이 있지만, 만인 사이의 모든 계략을 꾸미되 절대 휘말려서는 안 되는 천뇌문의 장문으로써 굳이 위험을 자초하는 것은 금기 중 금기이다. 장일산이 접었던 섭선을 다시 활짝 펼치며 마치 부채질을 하듯 흔들자 흑의괴인을 향해 무형의 경력이 쏟아져나갔다. 작고 자연스러운 동작이지만, 그 동작에서 나온 경력에는 장일산의 8성 내력이 담겨져 있다. 흑의괴인도 강대한 힘이 담겨진 무형의 경력을 느낀 듯싶었지만, 그는 대체 무엇을 믿는지 조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계속해서 거리를 좁히다가 경력과 충돌하기 직전에야 몸을 멈추며 한 손에서 무언가를 쏟아냈다. 파바밧! 그것은 다름 아니라 무려 수십 개가 넘는 뼛조각이었다. 마치 맹수의 어금니와 같은 수십 개의 날카로운 뼛조각들은 허공을 사납게 가로질러왔지만, 정작 그 뼛조각들의 목표가 된 장일산은 별다른 긴장감을 느끼지 못했다. '실망이로군.' 주술에 대해 깊이 아는 바가 없는 그로써도 이것이 그리 높은 수준의 주술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단번에 눈치 챌 수 있었다. 아까 전에 보았던 골순만 하더라도 강기에 너무나도 간단히 절단나지 않았던가? 뼛조각이 수십이라고 해도 진기가 담긴 수준의 암기는 하나도 느껴지질 않으니, 저 중 단 하나도 그의 호신강기(護身剛氣)를 뚫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일단 섭선을 가볍게 휘둘러 뼛조각을 모두 튕겨낸 장일산은 흑의괴인의 모습을 확인하고 가볍게 혀를 찼다. "쯧쯧, 그러니 내 편히 가라고 하지 않았소?" 넓게 퍼져오던 경력이 집중되는 바로 그 순간을 절묘하게 노렸기에 흑의괴인의 손에서 쏟아져 나온 것들은 경력에 휘말리지 않고 모두 무사히 장일산을 향해 날아들었지만, 그 대신 공격을 위해 방어를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은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내가중수법과 격공의 묘리를 담고 쏟아진 경력은 흑의장포를 고스란히 통과해 흑의괴인의 내부를 완전히 박살내버렸다. 뼈란 뼈는 모조리 박살나고, 오장육부가 가닥가닥 끊긴 흑의괴인의 상태는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이 오히려 놀라울 정도지만, 오장육부가 가닥가닥 끊기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결국 죽음의 운명에 저항이라도 하려는 듯 힘겹게 뛰고 있던 심장이 멈춰지자, 부르르 경련을 일으키던 그의 몸이 덜컥 멈추며 묵봉을 쥐고 있던 손이 땅에 떨어졌다. "결국 강기를 막아낸 것은 그냥 운이었던 모양이군. 이것도 다 하늘의 뜻일 터이니, 부디 본인을 원망하지 마시게나." 그의 죽음을 확인한 장일산은 괜한 기대를 했다는 듯 고개를 내저은 그는 가벼운 명복을 빌어준 뒤 산채의 입구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헌데 그가 마악 섭선을 부치며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그의 눈동자에 기이한 것이 비춰졌다. "허어?" 눈을 크게 뜨고 섭선을 뚫어져라 바라본 장일산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천학선(天鶴扇)이 언제 이렇게 상했을꼬?" 천잠사(天蠶絲)로 만든 천학선은 어떠한 기진이보에도 뒤지지 않는 보물로, 무엇보다 천뇌문의 문주를 상징하는 신물이라는 점에서 장일산에게 큰 의미가 있다. 그런 천학선이 아주 조금이나마 분명하게 상했으니, 신경을 쓰지 않을 레야 않을 수가 없다. '설마...아까 그 뼛조각?' 섭선을 사용해 뼛조각을 막았던 것을 기억해낸 장일산은 튕겨냈던 뼛조각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력을 이용해 튕겨냈기 때문에 모조리 가루가 되었을 테지만, 그리 많은 내력을 쓰지는 않았으니 파편 정도라면 몇 개 정도는 남아있을 것이다. 주변을 여러 번 둘러본 끝에 그 파편을 찾아낸 그는 뼛조각이 박힌 산적의 시체가 흐물흐물하게 녹아들고 있는 것을 보고 눈에 이체를 띄었다. "지독한 극독이었군. 이게 비수였는가?" 순식간에 시체가 녹아드는 모습을 보며 흑의괴인의 필사적인 공격을 납득하던 그는 문뜩 녹아내리고 있는 시체가 기이할 정도로 진득한 핏빛을 띄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굳혔다. "이건...사사혈독(死邪血毒)? 혈문(血門)의 문도였단 말인가?" 사사혈독이라 함은 천하삼대극독(天下三大劇毒) 중에서 제일독공(第一毒功)으로 불리는 극독 중 극독인 바, 결코 경시할 수 없다. 천하삼대극독의 독성은 호신강기 알기를 종잇장처럼 여기고 만독불침을 까다로운 먹잇감처럼 여길 정도니, 만약 섭선을 사용해 뼛조각을 막아내지 않았다면 중독을 피하기 힘들었으리라. 사사혈독의 가장 무서운 점은 피가 촉매라는 점에 있다. 특히 뜨거운 생피일수록 사사혈독은 무섭도록 빠르게 증식되어가며, 종래에는 전신의 혈액이 모두 사사혈독으로 화해 죽음을 면치 못한다. 특히, 사사혈독공(死邪血毒功)으로 펼쳐지는 사사혈독강기(死邪血毒剛氣)는 스치기만 해도 농밀한 사사혈독에 의해 중독 되기에 천하사대마공(天下四大魔功) 중에서도 가장 악독하고 잔혹한 마공으로 알려져 있다. "으음...설마 사사혈괴(死邪血怪)의 제자였단 말인가? 이 일로 그와 척을 지지 않아야 할 터인데." 무림삼괴(武林三怪) 중 한 명이 적으로 돌아선다면 그것은 정말 곤란한 일이다. 사사혈괴의 무공이 비록 초절정(超絶頂)의 경지에 머물러있다고는 해도, 그를 삼괴 중 일인으로 만들어준 강시술( 尸術)은 여러모로 골치 아프다. 천하에 그 누가 있어 천안도괴(天眼道怪)와 신통력을 겨루고, 무영투괴(無影偸怪)의 손길을 피하며, 사사혈괴(死邪血怪)의 강시술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공만으로 치자면 팔정협칠사마(八正俠七邪魔)보다 한수 아래인 무림삼괴가 그들을 넘어 거의 사신오왕(四神五王)과 동급에 가깝게 불리는 것에는 그들의 삼대절기가 그만큼 뛰어나기 때문이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3 00:07:14 고친날 2005-06-03 00:07:14 읽은수 15051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4.사신불사(死神不死).(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사신은 불사하여 죽어도 죽지 않고 다시 일어난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땅에 쓰러져있는 흑의괴인의 시체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내저은 장일산은 선풍기공(扇風奇功)의 흔적이 남지 않도록 신경 썼던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겼다. '그래, 은거에 가깝게 살고 있는 혈괴를 끄집어낼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이용할 수 있다.' 호악채에 자신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음을 확인한 그는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며 나지막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째든 겨우 산적들만 믿고 천지문(天智門)의 제자를 놓친 것은 내 잘못이 크구나. 내 흔적을 드러내는 일이 있더라도 좀 더 확실히 일을 처리해야 했을 터인데...삼재지문(三才智門) 중 제갈(諸葛)의 지략(智略)이 대지(大地)에 통달하고 천뇌(千腦)의 계략(計略)이 만인(萬人)을 통솔해도 천지(天智)의 지혜(智慧)는 천하(天下)를 통분하거늘, 이제 나 홀로 천지(天地)를 상대하게 됐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꼬?" 장일산의 짙은 한탄소리가 호악채 안을 맴돌다가 사라졌을 때는 그 또한 이미 그곳에서 모습을 감춘 뒤였다. 유일한 생존자가 떠나버린 호악채는 음산한 기운이 점차 쌓여 안개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하룻밤에 쌓여진 수많은 피와 시체, 그리고 짙은 원한이 음기를 끌어 모은 것이다. 이대로라면 사내가 예상한 대로 채 열흘이 지나기도 전에 호악산 전체가 귀산으로 화할 테지만, 정작 이러한 현상을 유도한 그 역시 호악산에 쌓인 시체 중 하나가 되었으니 참으로 운명이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헌데 그때, 짙은 정적이 내려앉아있던 호악채에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스르르륵... 음기와 귀기가 뭉쳐 이루어진 안개가 조금씩 어딘가를 향해 움직였다. 바람한점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방의 안개가 한 점을 향해 모여드는 기괴한 광경은 은은한 공포감을 느끼게 했지만, 지금 호악채에는 그런 공포감을 느낄 수 있는 이마저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안개가 모여드는 그 중심에는 한 자루의 묵봉이 있었다. 우웅-!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음에도 묵봉이 스스로 몸을 떨 듯 진동하자, 그 주변에 뭉쳐져 있던 안개가 조금씩 묵봉을 향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씩 빨려 들어가던 안개는 가속이 붙더니 종래에는 안개로 이루어진 소용돌이까지 만들어졌다. 음기와 귀기를 한가득 빨아들인 묵봉은 그것을 한가득 증폭시켜 자신을 쥐고 있던 손으로 흘려보냈다. 이미 혈액의 순환이 멈춰 차갑게 식어가고 있던 육신에 파고든 귀기는 무언가에 인도되듯 그의 혈맥을 따라 머리로 향해 올라간 뒤 곧바로 정중심을 향해 파고들었다. 쿵. 갑작스러운 귀기의 침입에 충격을 받은 영문(靈門)이 활짝 개방되어 자신이 담고 있던 귀기를 방출하자, 그 귀기는 외부로부터 들어온 귀기를 이끌고 혈맥을 따라 그의 신체를 순환해갔다. 혈맥을 타고 순환하는 귀기가 차츰 줄어드는 것에 반비례하여 부러졌던 뼈가 깨끗하게 이어지고 가닥가닥 끊겨진 장기가 이어지는 모습은 그야말로 하나의 이적과도 같았지만, 그렇게 회복된 신체에서는 산자라면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할 생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전신의 모든 골격과 내장을 복구시킨 귀기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바로 심장이었다. 완전 망가지다시피 한 신체를 복구시키며 이미 많은 양이 줄어들었지만, 귀기는 소진되는 속도에 가속이 붙는 것에도 상관하지 않고 심장 안에서 고리를 그리며 더욱 빠르게 순환해갔다. 두근. 한 순간, 침묵을 고수하고 있던 심장이 다시 움직임을 시작했다. 귀기의 고리에 사기(死氣)가 빨려나가고 거의 꺼져 들어가던 생기(生氣)가 자극받은 심장의 박동은 조금씩 그 크기를 더하며 생기를 키워갔다. 마침내 심장이 정삭적인 박동을 되찾자 귀기는 심장을 빠져나가 머리의 영문으로 다시 스며들었다. 그 귀기 중에는 묵봉으로부터 흘러들어온 귀기도 일부 섞여있었지만, 신체와 심장을 수차례나 순환하며 자연스럽게 융합된 귀기에서 이질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꿈틀. 조금씩 손가락을 꿈틀거리며 감각을 살피던 그는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듯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신체를 움직여 쓰러져있던 몸을 일으켰다. '이걸로 두 번째인가.'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일년 동안 감금생활을 하며 한 번, 지금 이 호악채에서 한 번을 모두 합해 무려 두 번. 이렇게 겨우 일년하고 몇 개월만에 두 번이나 죽음을 겪은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비록 서(書)에 적힌 비술금법(秘術禁法) 중 불사(不死)의 비술(秘術)을 사용해 다시 부활하기는 했지만, 불사의 비술은 함부로 남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귀기를 이용해 생기를 자극함으로써 흡혈귀(吸血鬼) 뱀파이어나(vampire)와 같은 망자의 생명력을 이끌어내는 것은 확실히 대단한 효과를 가지고 있지만, 그만큼의 위험부담을 져야한다. 인간으로서의 생명을 유지하며 망자(亡者)의 생명력을 끌어낸 대가는 크다. 기운이 신체의 손상에 비해 부족하면 다시 살아나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리고, 지나치게 공급되면 과잉된 기운에 의해 산채로 망자(亡者)가 되어버린다. 또한 불사의 비술에 의해 생명력을 이끌어내더라도 그것은 그 순간뿐, 비술의 사용을 멈추면 오히려 전과 비교해 최소 절반으로 생기와 생명력이 떨어지게 된다. '한계가 얼마 남지 않았군.' 사방에서 끌어 모은 귀기와 칼날과 같은 제어로 비술을 성공시키기는 했지만, 그렇지 않아도 힘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불사의 비술을 지나치게 자주 사용한 후유증이 신체 곳곳에서 느껴진다. 특히 지하석부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려 1년 동안 영력을 깎아 수명까지 줄어드는 것을 감수하며 아슬아슬하게 비술을 유지해온 것이 결정적이다. 불가항력적이었다고는 하나 불사의 비술을 남용한 덕분에 전신의 생기가 극도로 쇠약해졌다. 이 상태라면 육체적 능력은 절반도 발휘할 수 없고, 사기를 비축하고 다루는 것에도 영향이 적지 않다. 이제 더 이상은 불사의 비술을 사용할 수 없다. 만약 다시 한번 불사의 비술을 사용한다면 본연의 생기가 완전히 사라져 죽거나 망자가 되리라. '요양에 들어가야 한다.' 줄어든 생기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순수한 회복력에만 의지해야하는데, 그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귀기(鬼氣)나 마기(魔氣)는 그 자체가 음한 성질을 지녀 양기를 지닌 생기(生氣)와 상성이 그리 좋지 않기에, 귀기를 운용하여 망자를 부리는 것만 하더라도 생기가 억눌려 회복력이 떨어지게 된다. '최소한 일년.' 보약이나 영약 등을 통해 생기의 회복을 돕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일년 동안은 거의 힘을 사용하지 않고 요양을 취해야 한다. 그것도 이제 귀산이 될 호악산이 아니라 정순한 자연지기가 넘치는 영지(靈地)에서 요양을 취했을 때의 경우. 그는 아직 이곳을 자연스럽게 떠돌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을 쌓지 못했다. 힘을 가능한 사용하지 않으며 어디엔가 있을지 모를 영산을 찾아다니는 여정은 너무 불확실하고 위험하다. '호신을 위한 최소한의 무력은 필요하다.' 당장 그에게 있어 귀기를 사용하지 않고도 사용할 수 있는 힘은 바로 독(毒)이다. 비록 장일산에게는 통하지 않았지만, 그의 피에 녹아들어있는 사사혈독의 독성이라면 호신에 사용하기에 충분하다. 문제는 지금으로써는 그 독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오직 피뿐이라는 점이다. 약간의 실험결과, 그는 사사혈독이 오직 그 독성을 견딜 수 있는 생물의 생혈(生血)로만 보존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만약 일반적인 용기에 담으면 성질이 변화돼 단순한 피가 되기에, 사용할 때마다 스스로 피를 내야한다. 사사혈독이 단 한 방울만으로도 인체의 모든 피를 똑같은 사사혈독으로 바꿔버릴 수 있는 특이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출혈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한다면 스스로 목을 조르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렇게 독이 지극히 위험하고 공격적인 성향을 지닌 힘이라면, 안정적이고 방어적인 성향의 능력은 초감각(超感覺)과 은신술(隱身術)이다. 그의 초감각과 은신술은 귀기나 마기와 무관하면서도 가장 위력적인 능력이기도 하다. 정밀도나 감각권을 모두 따져도 시각에 의존할 필요성을 조금도 느끼지 못하게 해주는 초감각과 한 번 숨으면 결코 드러나지 않는 은신술만으로도 그는 특급자객(特級刺客) 중에서도 제일로 손꼽힐 수 있었다. 만약 정확한 정보와 충분한 시간만 있다면, 아무리 장일산 수준의 강자라도 몇 번이나 암살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초감각과 은신술이라도 방금 전과 같은 정면대결에서는 그 효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능력으로는 장일산보다 위였던 노인은 암살했음에도 그에게는 결국 죽음을 맞이한 것이 그 증거다. 그의 주된 힘은 역시 생사를 넘나들며 육신에서부터 영혼까지 깊숙이 새겨져있는 사령술(死靈術)이지만, 기운을 사용하지 않고 실전에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의 사령술을 펼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때,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종속시킨 망자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또는 정기적으로 조금씩이나마 귀기를 운용해 지배력을 유지해야한다. 사령술을 사용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 지속적인 귀기의 운용이 요양에 지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서(書)로부터 얻은 사령술에 대한 방대한 지식 중에는 귀기를 운용하지 않으면서도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는 약간의 편법 또한 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3 07:30:57 고친날 2005-06-03 07:30:57 읽은수 14313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4.사신불사(死神不死).(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비록 여러 가지 문제로 다수의 망자에게 사용할 수는 없지만, 재료만 충분하다면 상급의 망자에게라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재료도 부족할뿐더러, 종속된 상급의 망자도 없다. '없으면 만들면 되는 일.' 그의 감각이 호악채를 훑다가 철방의 시신에 집중됐다. 장일산과의 전투 중 철방의 시체가 훼손되는 불미스러운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상급 망자를 만들 재료는 확보된 셈이다. 문제는 편법을 사용할 재료. 비록 호악산에서 직접 채집할 수는 없는 재료지만, 호악채라면 그 재료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우선 철방이 나왔던 건물에서부터 시작해 호악채 내의 모든 건물을 샅샅이 탐색해갔다. 중간 중간 강시에 의해 피가 빨려지거나 날카롭다 못해 말끔하게 목이 잘려나간 여인의 시체를 발견하긴 했지만, 상급 망자의 재료인 철방을 이미 확보한 만큼 그들의 시체에는 조금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대략 반시진의 탐색 끝에 그가 재료를 찾아낸 곳은 철방의 방으로 짐작되는 장소였다. 그곳에서 초감각으로 침상 바닥에 빈 공간을 감지하고 찾아낸 비밀금고에는 상당한 황금과 보석, 그리고 고급의 장식품 등이 들어있었다. 그 중에서도 그가 찾아낸 재료는 바로 보석,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보석인 자수정(紫水晶)이었다. 필요한 재료를 찾아낸 그는 철방의 시체를 끌고 호악채를 벗어나 귀곡으로 향했다. 원래대로라면 들어 옮겨야했지만, 생기가 약해진 몸으로 철방과 같은 거구의 시체를 들어 옮기는 것은 무리였다. 때문에 시체를 끌고 온 흔적을 깨끗이 정리하는 번거로운 작업까지 마친 뒤에야 보석을 제대로 살필 수 있었다. '아슬아슬한 정도군.' 자수정의 질과 크기, 보기(寶氣)로 보석이 담을 수 있는 귀기를 추정해본 그는 자수정을 사용하기로 결정 내렸다. 강도는 그리 높지 않은 것이 단점이지만, 자수정에 담은 귀기가 그 강도를 대신해 자수정을 보호할 것이다. '기운이 더 필요하다.' 비록 호악채에서 불사의 비술을 사용하며 흡수한 귀기가 모두 소진되지 않고 약간 흡수되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상급 망자를 만들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가능한 흡수해두는 편이 좋겠군.' 호악산은 이미 귀산화가 진행되고 있으니 귀곡의 귀기를 모두 흡수한다고 해도 하마 몇 달만 지나면 자연스럽게 회복될 것이다. 어차피 일 년 이상 호악산을 떠나있어야 하는 그에게는 귀산화가 열흘에서 십 개월로 늘어나더라도 상관없는 일이다. 잠시간의 생각으로 해야할 일을 세세하게 구상하고 계획한 그는 가장 먼저 귀곡 곳곳에 있는 독을 수집했다. 비록 같은 귀곡 안에 있는 독들이지만, 그 독성까지 같은 것은 아니다. 생물독에서부터 광물독, 시독(屍毒) 등으로만 이루어진 독만 해도 여럿이다. 양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고 독성의 종류에 따라 구분하면 귀곡 있는 독은 모두 24종. 신체를 마비시키는 가벼운 것에서부터 두고두고 몸이 썩어들게 되는 독이나 단 한 방울만으로 황소를 몇 마리는 죽일 수 있는 독까지 하나같이 다양한 독성을 지닌 독들이다. 살상을 위한 것이라면 사사혈독으로도 충분하지만, 귀곡의 독들은 보존과 사용에 문제가 없고 독이 다양할수록 다양한 상황에 쉽게 대처할 수 있다. 그는 며칠에 거쳐 24종의 독을 모두 갈무리하며 귀곡의 귀기를 차근차근 흡수해갔다. 전과 같이 하루면 복구될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귀곡의 귀기를 바닥까지 빨아내기로 결심했던 만큼 단 한 번에 흡수하는 귀기만 하더라도 참으로 막대한 양이었다. 결국 귀곡의 모든 귀기가 바닥났을 때, 영문에 보관된 귀기는 전에 비해 무려 두 배로 늘어나 있었다. 그렇게 충분한 귀기가 모이자, 그는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고 곧바로 철방을 상급 망자로 만들기 위한 준비를 했다. 향초, 골분, 올빼미 눈알, 거미의 다리, 박쥐의 이빨, 늑대의 발톱, 곰의 힘줄, 호랑이의 등뼈, 토끼 귀와 발, 매의 깃털, 여우의 꼬리. 지네의 각질, 뱀의 가죽 등 수많은 촉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한 촉매들의 나열에 이어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표면이 무언가 알 수 없는 문양으로 빽빽하게 뒤덮인 섬뜩한 핏빛의 자수정이었다. 며칠동안 표면에 주술의 문양을 세기고 귀기를 담는 주술적 가공을 마친 자수정은 이제 범인은 손만 대도 저주를 받게 되는 귀물(鬼物)이 되었다. 자수정만이 아니다. 예전에 수십의 고스트를 이용해 모아둔 다른 촉매들 역시 주술적 가공을 거친 만큼 하나하나가 모두 촉매로써의 가치가 높은 것들이다. 이렇게 촉매를 아낌없이 사용하는 것은 어차피 사용할 일이 거의 없어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철방을 사용해 만들려는 망자가 지닌 특성에 있다. 화륵! 망령을 어렵지 않게 종속시키게 된 이후 거의 사용되지 않았던 향초가 오랜만에 촛불과 함께 향과 연기를 흘렸다. 치이익! 골분을 뿌려 촛불과 연기를 더욱 키운 그는 영문을 열어 귀기를 이끌어낸 뒤, 사이한 주문을 이용해 귀기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끌었다. 묵봉을 통해 증폭된 귀기는 철방의 심장 위에 반듯하게 놓여져 있던 자수정으로 흘러들었다. 갑작스럽게 막대한 양의 귀기가 주입된 보석은 그 기운을 감당치 못하고 깨져나갈 듯 부르르 진동했지만, 주문에 의해 절묘하게 조절된 귀기는 보석이 견뎌낼 수 있는 한계를 아슬아슬하게 맞추며 그대로 철방의 심장으로 흘러들어갔다. 막대한 양으로 심장을 가득 메운 귀기는 곧 영역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동피철혈기공으로 단련된 그의 몸은 죽어서까지 쉽사리 귀기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지만, 그의 주문은 그러한 육신의 저항을 뒤흔들어 귀기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철방의 육신에 스며들도록 만들었다. 혈맥, 내장, 근골, 피륙에 이르기까지 그의 전신은 음습한 귀기에 의해 가득 채워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문에 이끌려 계속 밀려들어온 귀기는 더 이상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철방의 체내에서 휘몰아쳤다. 체내에 가득 찬 귀기의 거센 움직임에 의해 그렇지 않아도 창백하던 철방의 피부가 조금씩 푸른색으로 질려가기 시작했다. 가장 하급의 망자인 시귀(屍鬼) 좀비(zombie)라도 체내에 쌓이는 귀기에 따라 그 질과 종류가 달라지는데, 만약 쌓여진 귀기가 전신을 가득 메우는 포화상태에 이르면 하급이 아닌 중급의 망자가 된다. 대표적인 예로는 청시귀(靑屍鬼) 블루 좀비(blue zombie), 적시귀(赤屍鬼) 레드 좀비(red zombie), 독시귀(毒屍鬼) 포이즌 좀비(poison zombie)가 있다. 청시귀는 귀기가 피륙에 쌓여 몸이 바위처럼 단단해지고, 적시귀는 귀기가 혈액을 순환시켜 느린 움직임을 빠르게 하며, 독시귀는 귀기가 독기를 증가시켜 더욱 강한 독성을 지니게 된다. 그 상태에서 계속해서 귀기가 쌓이면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귀기는 체내에서 농밀하게 응축된다. 한번 응축을 시작한 시귀는 계속해서 귀기를 갈구하여 시체를 뜯어 먹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상급의 망자인 식시귀(食屍鬼) 구울(ghoul)이다. 바위 같은 피륙과 민첩한 몸놀림, 그리고 지독한 마비독을 모두 지니며 시체를 뜯어먹으며 귀기를 흡수할수록 계속해서 강해지는 식시귀의 능력은 상급 망자로 구분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철방이 마악 청시귀로 변하려는 조짐이 보이자마자 피륙으로 흘러들던 귀기가 갑자기 끊겨졌다. 그는 철방을 청시귀나 식시귀 따위로 만들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피륙뿐만 아니라 전신 모두로 귀기가 흐르는 것을 차단하고, 오직 심장에만 귀기를 응축시켰다. 귀기가 응축되면 응축될수록 심장의 부담은 커져갔고, 심장과 묵봉 사이에서 귀기를 전달하는 촉매 역할을 하던 자수정역시 지나친 귀기의 주입으로 인해 스스로 사이한 혈광을 뿜어내며 진동을 일으켰다. 심장에서 응축되던 귀기는 결국 그 한계에 이르며 역류를 일으켰다. 초과된 귀기는 심장에서 도로 거슬러 올라가 자수정으로 돌아갔고, 자수정은 역류한 귀기를 그대로 묵봉에서 흘러나온 귀기에 실어 다시 심장으로 돌려보냈다. 그러한 악순환의 연속으로 인해 보석과 심장 사이에 오가는 귀기의 양은 눈 덩이처럼 불어났고, 과도한 귀기의 주입으로 파괴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보석과 심장은 악순환의 속도에 점차 가속을 붙였다. 고밀도로 응축된 상태 자체로 심장과 보석 사이를 고속으로 순환하게 된 귀기는 계속해서 불어나다가 마침내 심장과 보석을 잇는 고리를 만들어냈고, 그 고리는 점점 확장되다가 보석과 심장까지 통째로 삼켜버리며 둘을 하나로 묶어버렸다. 순간, 자수정이 뿜어내던 혈광이 절정에 이르며 놀랍게도 마치 늪에 빠져들 듯 조금씩 철방의 가슴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천천히 철방에 몸속으로 스며들어간 자수정은 심장의 내부로 들어가고 나서야 자리를 잡았고, 무한히 순환하던 귀기의 고리는 자수정과 심장이 그렇게 합쳐지자 둘을 중심으로 구형으로 순환하며 안정을 이뤄냈다. 귀기가 안정을 이룸과 함께 철방의 가슴에 구멍이라도 뚫리기라도 한 듯 은은한 혈광이 흘러나오자, 그는 준비해둔 촉매들을 천천히 집어 들어 주문과 함께 그것을 혈광 속에 빠트렸다. 보석과 마찬가지로 가슴에 스며들어간 올빼미의 눈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거미의 다리는 무엇에도 미끄러지지 않는 발을, 박쥐의 이빨은 다른 것의 기운을 빨아들이는 힘을, 늑대의 발톱은 무엇이든 날카롭게 베어낼 수 있는 손톱을, 곰의 힘줄은 천근바위도 들어올릴 수 있을 거력을, 호랑이의 등뼈는 야성적이고 빠른 몸놀림을, 토끼의 귀는 십리 밖의 소리도 듣는 청력을, 토끼의 다리는 백리를 내달리는 주력을, 매의 깃털은 바람처럼 가벼운 몸을, 여우의 꼬리는 간사하고 요요한 지혜를, 지네의 각질은 외부의 충격을 흡수하는 특수한 외피를, 뱀의 가죽은 하나하나가 예리한 비수와 같은 수많은 비늘을 철방에게 하나둘씩 부여했다. 철방은 그렇게 촉매를 흡수해 자신의 능력으로 만드는 망자, 돌연변이시귀(突然變異屍鬼) 뮤턴트 좀비(mutant zombie)로써 거듭나고 있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3 11:00:52 고친날 2005-06-03 11:00:52 읽은수 14130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4.사신불사(死神不死).(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마침내 모든 촉매를 흡수한 혈광이 조금씩 사라지자, 그는 주문을 외우는 속도에 박차를 가하다가 한 순간 묵봉으로 바닥을 내려쳤다. 쿵! 겨우 묵봉을 내리친 것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철방의 시체는 그대로 뻣뻣하게 튕겨져 몸을 바로 세웠다. 무릎을 굽히지 않고 누운 자세 그대로 일어나는 모습은 마치 고수의 운신법과도 같았지만, 철방의 모습에는 그 이상의 음산함과 공포가 스며들어있었다. “눈을 떠라.” 산자의 본능적인 공포를 이끌어내는 망자의 귀기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무심한 음성이 흘러나온 순간, 닫혀있던 철방의 두 눈이 부릅떠지며 사이한 혈광으로 한가득 물든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게 복종하라.” 철방의 몸이 부르르 진동했다. 그가 뿜어낸 귀기는 철방을 복종시키기 위해 철방의 귀기를 억눌렀고, 철방은 귀기를 가득 움직이며 그에게 대항했다. 그러나 귀곡의 모든 귀기를 흡수한 그에게는 철방을 상급의 망자로 만들고도 그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귀기가 있었다. 결국 철방은 그의 귀기를 막아내지 못했고, 철방의 몸에 파고든 그의 귀기는 그의 정신과 영혼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성명을 말하라.” “...철방(撤坊)...” “내가 누구지.” “...대형(大兄)...이십니다...” “내게 충성하는가.” “...죽음이라도...따르겠습니다...” 철방의 입이 열리며 흘러나온 어눌한 대답에 그는 만족했다. 돌연변이시귀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바로 생전의 지식과 지능, 능력을 거의 그대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만약 사용하는 재료가 수준에 못 미친다면 차라리 식시귀만도 못한 결과가 나올 수 있지만, 철방은 생전에도 단신으로 식시귀를 상대할 수 있는 고수였다. 거기에 망자로써의 지치지 않는 체력과 괴력, 그리고 촉매들의 힘까지 더해졌으니 살아생전보다 최소한 두 배는 강해졌을 터. 설사 장일산 수준의 강자가 다시 나타나더라도 그가 몸을 피할 시간 정도는 벌어줄 수 있다. 물론 철방이 그를 위해 목숨 바쳐 희생할 것은 의심할 필요 없다. 생전과 거의 다름없다고는 해도 이미 귀기에 제압당한 철방은 그를 절대적으로 충성을 바치며 따라야할 존재인 대형으로써 각인했고, 물음에 답한 대로 그가 죽으라고 해도 그대로 따를 것이다. “영지(靈地)로 알려진 곳을 말해라.” 철방을 굳이 돌연변이시귀로 만든 것에는 그 전투력도 전투력이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망자임에도 특수한 주술적 처리로써 일광 아래서도 돌아다닐 수 있다는 점과 지식과 정보를 전해 듣기 수월하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 당장 필요한 정보를 철방에게 요구했고, 철방은 그의 물음에 주저 없이 답했다. “...숭산, 항산, 형산, 태산, 화산의 오악...무당산, 아미산...곤륜산, 장백산......” 그는 철방이 하나하나 부르는 영지의 이름을 기억해두었다. 누가 산적 아니랄까봐 산으로 시작해 산으로 끝나는 대답이지만, 그래도 한 산채의 채주를 맡고 있던 철방의 지식은 그에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일단 영지로 알려진 곳을 알아낸 것만 해도, 무작정 영지를 찾아다니는 것 보다는 이미 널리 알려진 곳을 찾아가는 쪽이 더 수월하고 시간이 단축된다. 또한, 철방이 지닌 지식은 단지 지형지리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가장 강한 무력을 지닌 강자들을 말해라.” 이미 노인과 장일산에 의해 두 번이나 곤욕을 치른 그에게 강자들에 대한 정보는 필수적이다. 그들과 같이 강기(剛氣) 오러(aura)를 사용할 수 있는 강자들이 숫하게 널려있지 않는 이상, 널리 알려진 강자들을 미리 알고 주의한다면 곤욕을 피할 확률이 높아진다. 철방은 이번에도 그의 물음에 충실하게 대답해주었는데, 이번 대답은 그의 정신 깊숙한 곳에 아주 숙지돼있는 듯 지금까지의 어눌함이 거의 느껴지지 음성이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절대쌍존(絶對雙尊)의 무위는 경천동지 하여 대적할 자가 없으나 삼황오제(三皇五帝)의 무공은 산을 부수고 바다를 가르니, 천하십대고수(天下十大高手)의 지고무상 함은 하늘과 같이 높다.” 쌍존삼황오제는 이미 은거한 전대의 고수들이다. 모두 화경의 고수라고는 해도 하나같이 나이가 백이 넘어 아직까지 살아있는지도 불분명하지만, 그들 중 한 명만 은거를 깨더라도 곧바로 천하에 군림할 힘과 자격을 갖추고 있다. “...사신(四神)이 정파무림을 이끌고 오왕(五王)이 사파무림을 지배하여 천하를 움직여도 무림삼괴(武林三怪)의 괴팍함은 움직이지 못하니, 무림십이성좌(武林十二聖座)의 명성을 모르는 무인이 어디 있겠는가?” 사신오왕은 현재 무림에서 활동하는 화경의 고수들로써, 각자 정파와 사파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또한 정사중도를 걷는 무림삼괴는 비록 무위는 화경에 이르지 못했지만, 각자의 절기에 있어서는 천하제일로 꼽히며 한 번 싸우고자 마음먹으면 사신오왕이라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다. “...팔정협칠사마(八正俠七邪魔)는 하나의 벽 너머로 하늘을 두고, 구룡팔봉(九龍八鳳)은 드높은 산을 광활한 들판으로 여기니, 우내삼십이기(宇內三十二器)의 칭호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도다.” 팔정협과 칠사마는 화경의 벽을 눈앞에 둔 초절정 고수들로, 비록 사신오왕에 미치지는 못해도 한 지역의 패자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힘과 세력을 지니고 있다. 구룡팔봉은 아직 천하를 논할 힘과 세력은 없지만, 그들의 재능과 잠재력만큼은 당대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하십대고수, 무림십이성좌, 우내삼십이기의 명성이 이처럼 천하를 진동시키니, 이들 강호오십사무성(江湖五十四武星)이야 말로 강호무림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라.” ‘강호오십사무성.’ 이곳에서 가장 강한 힘, 또는 잠재력을 지닌 자들. 그의 힘이 소진되지 않고 정상의 상태였다 해도 상대하기 쉽지 않은 강자들일 테지만, 이들이 지닌 무력이 뚜렷하게 어느 정도인지는 측정할 수 없다. 무력을 측정하는데 있어서 가장 쉬운 방법이라면 비교고, 그래서 그는 자신이 아는 강자들을 되새기며 재차 물었다. “장일산도 그 중에 속해있나?” “...천뇌문사 장일산은 천뇌문의 문주...천하에서 가장 뛰어난...머리를 지닌 셋 중 한 명이지만...무위는 팔정협칠사마 보다...반수 정도 아래입니다.” 오러를 만들어내는 강자조차 강호오십사무성에 끼지 못했다는 것은 예상보다 그들의 수준의 높다는 뜻. 그가 아는 이들 중 장일산보다 강자는 지하석부의 노인뿐이었지만, 노인은 자신의 이름을 밝힌 적이 없다. “그가 호악채에 있었던 이유는?” “...중소산채이던 호악채를 암암리에 키워...일회용으로 사용함으로써...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목적을 이룬 뒤...제거하기 위해...” 조금 의외였지만, 철방은 생긴 것 답지 않게 눈치가 빨랐다. 그가 호악채를 공격했을 때에도 필사적으로 호악채의 이용가치를 높여 장일산의 살수를 피하려던 중이기에 대응이 늦었던 것이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장일산의 목적은 금룡표국의 일행을 없애는 것이었을 텐데, 그 목적을 뒤튼 것이 바로 자신이다. 장일산 같은 강자가 자신의 흔적을 숨기기 위해 산채를 통해 손을 썼다면, 그 대상이 평범한 범인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청룡표국의 표두들에게 호위를 받던 이의 말이 스쳐지나갔다. -저는 천지문(天智門)의 제자인 천무(擅無)라 합니다. 지금은 사정이 여의치 않으나, 훗날 이 옥패를 가지고 본문에 찾아오시면 무례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치르겠습니다.- “천지문이라는 게 뭐지?” “...천지문은...천하삼십육세(天下三十六勢)의 삼재지문(三才智門) 중 하나로...정사중간인 문파입니다...” 천하삼십육세(天下三十六勢). 삼맹(三盟), 삼문(三門), 삼방(三幇), 삼성(三城), 삼가(三家), 삼림(三林), 삼각(三閣), 삼궁(三宮), 삼회(三會), 삼전(三殿), 삼곡(三谷), 삼비(三秘)의 삼십육 세력을 일컫는 말이다. 그 중 삼재지문은 무력이나 세력이 특별히 뛰어난 곳은 아니지만, 천하의 그 어떤 고수나 문파도 삼재지문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천하삼대지자가...항상 삼재지문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천하삼대지자는 당대에 있어 가장 머리가 좋은 세 명을 일컬음이다. 자신들의 지혜를 필요한 곳에 빌려줌으로써 여러 강대세력의 배경과 힘을 등에 업게 된 천하삼대지자의 문파를 건드린다는 것은, 무림의 온갖 강대세력들을 모조리 적으로 돌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현자의 탑 같은 것이군.’ 삼재지문에 대해 대략적인 판단을 내린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일년 동안 요양에 들어가야 하지만, 그 요양은 귀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제약이 없다. 그렇다면, 그 일년이라는 시간을 헛되이 흘려보내기 보다는 좀 더 유용하게 사용하는 방향이 좋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현자의 탑의 경우 아무 곳에나 세워지지 않는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지식을 쌓음으로써 지혜를 높일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대륙에서 손꼽히는 현자들이 직접 찾아 골라낸 장소에 세워진다. 그러한 장소가 정순한 자연의 기운이 모여 영기가 풍부한 영지임은 당연하다. 영기가 풍부한 장소. 충분한 여유시간. 부족한 지식. 천하에서 손꼽히는 지자. 보답을 약속하는 증표. 머릿속을 맴돌던 여러 가지 생각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진 순간, 그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4 00:15:05 고친날 2005-06-04 00:15:05 읽은수 13980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5.보물지란(寶物之亂).(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사신의 무심은 천지와 같으니 보물이 난을 일으켜도 결코 깨지지 않는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이 객잔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허리를 굽혀 반기던 점소이 아방(我方)은 그의 허리에 차여진 검을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무림인이다!' 허름한데다가 먼지투성이의 복장을 하고 있지만, 검을 차고 있는데다가 은연중에 접근하기 힘든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무림인 중에서도 고수임이 분명했다. 무림인을 기분 나쁘게 해서 좋은 일은 없었던 만큼 아방은 최대한 빠르고 친절하게 자리를 안내한 뒤 슬쩍 물었다. "주문은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만두." "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겨우 만두를 시키는 걸 보면 고수답지 않게 돈이 얼마 없는 모양이다. 하기야, 비싼 것만 가득 시켜먹고 줄행랑쳐버리기를 밥 먹듯 하는 고수도 있다는데 그것에 비하면 그래도 양심적이지 않은가? 마침 때가 아니라 손님도 적었던 만큼 오래 걸리지 않게 만두를 내온 아방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주인어른을 보고 내심 혀를 찼다. '아무리 손님이 적어도 저렇게 졸다니, 역시 이 객잔은 내가 없으면 망할 거라니까.' 무림인이 만두를 먹는 속도는 꽤나 느렸다. 푸짐한 체구의 중년상인이 호위무사 넷과 함께 와서 정말 푸짐하게 산해진미를 시키고 후덕하게 선심을 베풀고, 사내로써 절로 눈이 쏠리던 아름다운 두 궁장미녀가 창가에 앉아 고급 차와 함께 담화를 나누고, 커다란 활을 맨 세 사냥꾼이 통구이를 뜯고, 적의장포를 입은 노인이 술을 몇 병이나 비울 때까지도 그는 만주를 느릿느릿하게 씹어 먹었다. '그러고 보니 어째 손님이 갑자기 많아졌네.' 점심이라기엔 늦고 저녁이라기엔 이르다. 먼 곳을 여행하다면서 꼭 시간에 맞춰 식사를 하겠느냐 만은, 이런 시간에 탁자가 여럿 차는 걸 보자니 뭐가 떨떠름하다. "점소이, 이보게 점소이." "아, 어서 오십시오!" 딴 생각을 하느라 새로 들어온 손님을 보지 못했던 아방은 뒤늦게나마 허리를 깍듯이 숙이며 자리를 안내했다. 이번에 들어온 손님은 모두 다섯 명이었는데, 백의를 입은 한 노인과 한 쌍의 중년남녀, 두 아이들로 이루어진 걸 보니 한 가족 같았다. 백의노인은 자리에 앉으며 객잔의 손님들을 살짝 돌아보았는데, 왠지 모르게 흠칫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누구한테 죄짓고 쫓기나?' "으음...간단한 교자와 채심볶음, 당초배골로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애써 놀란 기색을 감추며 손님들로부터 눈을 땐 백의노인의 주문을 받으며 아방은 순간 불길함을 느꼈다. 때도 아닌데 가득 모여든 손님에, 그들을 경계하는 노인까지 겹쳐지니 아무래도 뭔가 일어나도 일어날 것 같았다. 자고로 무림에서 풍파가 일면 객잔에도 그 영향이 미치지 않던가? 아방의 불길한 예감이 아예 확신이 된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끼이익...! '허억!' 유독 시끄러운 마찰음과 함께 객잔의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들을 본 아방은 심장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험상궂은 얼굴에 등에 커다란 대도(大刀)를 메고 있는 거한과, 피풍의에 가까운 기이한 흑의장포로 전신을 가리고 있는 음울한 사내의 모습은 누가 봐도 잔인한 산적과 악명 높은 사파고수였다. '지, 진정하자. 산적이라면 관아 때문에라도 살인은 안 할 테고, 아무리 사파라도 고수정도가 되면 아무 이유도 없이 무공도 없는 양민을 헤치지는 않겠지.' "어서 오십시오." 노련한 점소이답게 긴장을 가라앉힌 아방은 가능한 평소와 같은 음성으로 그들을 반겼다. 그 대처가 나쁘지 않았던 듯, 그들은 별다른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아방이 권유하는 자리에 앉았다. "뭘로 하시겠습니까?" "...내놔라!" "켁?" 산적 같은 거한의 외침에 아방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내놓으라니? 뭘? 돈? 목숨? 설마 이게 말로만 듣던 객잔털이범? 너무나 느닷없는 말이 우렁차게 터져 나온 덕분에 객잔 내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자연적으로 그들에게 쏠렸다. "가장...잘 하는 걸로 내놔라!" "예...아, 예에! 저희 객잔에서 가장 맛좋은 음식으로 말씀드리면..." "대형을 오래...기다리게 하지 마라!" "그, 금방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잔말할 것 없이 당장 내오라는 뜻의 말에 아방은 후다닥 물러나 숙수에게 가장 잘하는 요리부터 먼저 해줄 것을 부탁했다. 순서대로 따지자면 일가족의 요리가 먼저였지만, 산적 놈 등에 있던 커다란 대도를 본 그들이라면 약간의 아량을 베풀어줄 수 있을 터였다. '그나저나 형님이라...' 그 흉악한 산적 놈이 뭐 얻을게 있다고 형님이라고 부르겠는가? 역시 흑의장포의 사내는 고강한 무공을 지닌 사파의 고수임이 틀림없다. 그냥 무림인도 아니고 고수씩이나 되는 이들이 둘씩이나 모이니, 이건 분명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징조가 분명하다. '그런데도 저 주인이라는 양반은 잠이나 퍼 자고 있으니...저러고도 객잔 주인을 해먹다니, 역시 세상을 편하게 살려면 돈이 있어야해.' "이보게, 점소이." "아, 네? 무슨 일이십니까?" 훗날 돈을 모아 자신도 객잔을 차리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키우느라 하마터면 백의노인의 말을 놓칠 뻔했던 아방은 가까스로 그 음성의 끝자락을 듣고 그에게 다가갔다. "내, 돈은 낼 터이니 주문했던 것들을 무르고 대신 건량과 만두를 하루치 정도 싸주게나." "예, 알겠습니다." 산적에게 겁이라도 먹은 듯, 몹시 불안한 얼굴을 한 백의노인에게 아방은 동질감을 느꼈다. 힘없는 양민 중에 무림인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특히 백의노인처럼 일가족이 다 같이 있는 상황이라면, 길 끝에서 칼을 찬 사람만 봐도 다른 길로 돌아간다고 해도 주의가 과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숙수에게 일가족의 주문이 바뀐 것을 알려준 아방은 때마침 요리가 끝난 음식을 조심스럽게 옮겨 산적과 흑의사내의 탁자에 올려놓았다. "맛있게 드십시오." 숙수가 내놓은 요리는 최고급 오리구이였다. 특별히 진귀하다고 할만한 요리는 아니지만, 평소 숙수가 가장 자랑하던 요리였다. 문제가 있다면 겨우 이거 하나로 저 커다란 산적 놈 배나 제대로 채울 수 있을지 의심된다는 점이다. 어떤 요리를 몇 개, 몇 인분씩 정확히 주문하질 않았으니 가장 자신 있는 최고급 오리구이 하나만 딸랑 내놓은 것이다. "....대형, 어서 드십시오." 보나마다 저 산적 놈이 냉큼 달려들어 뜯어먹을 거라고 생각하던 아방으로써는 정말 의외였지만, 그는 정말이지 정중하기 그지없게 흑의사내에게 먹을 것을 권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흑의사내가 천천히 오리구이를 뜯어먹기 시작했음에도 그는 같이 오리구이를 먹기는커녕 주변을 둘러보며 두 눈을 부라렸는데, 눈동자에서 은은한 혈광이 번뜩이는 것이 보통 고수가 아닌 듯싶었다. 잠시 동안 눈치 채지 않도록 힐끔힐끔 그들을 살피던 아방은 곧 주방에서 숙수가 싸준 만두와 건량 보따리를 들고 나와 백의노인에게 주었다. "주문하신 음식들은 아직 요리를 하지 않았으니, 건량과 만두 값으로 백문만 주시면 됩니다." "여기 있네. 남는 것으로는 술이나 한 잔 드시게나." 백의노인이 제대로 세지도 않고 약간의 은자 부스러기를 내놓자 아방은 희희낙락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주인이 자고 있으니 눈치 볼 사람도 없겠다, 이 정도 부수입이면 며칠 동안 술값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보따리를 한 손에 든 백의노인은 중년부부에게 눈짓을 했고, 그들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교자는 안 먹고 가요?" "아무래도 지금은 안 되겠구나. 다음 마을에서는 꼭 사줄 테니 이만 가자꾸나." 오랜 여행으로 식사를 변변찮게 한 듯싶은 여아는 교자를 안 먹는 다는 소리에 울상을 지었지만, 중년부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여아를 잘 달래주며 백의노인과 함께 객잔을 나서려했다. 그런데 그때, 그들을 붙잡는 누군가의 음성이 있었다. "헛! 헛! 아이들이 너무 지친 것 같은데, 여정이 좀 급하더라도 좀 쉬어가는 게 어떻겠소?" 음성의 주인은 바로 산해진미를 느긋하게 먹고 있던 중년상인이었다. 아방은 그러한 그의 말에 정말 생긴 것처럼 후덕하다는 생각을 떠올렸지만, 백의노인은 그러한 중년상인의 후덕함에 오히려 불길함을 느끼는 듯싶었다. "노부의 일가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시오?" "헛! 헛! 헛! 오늘 처음만난 분께 무슨 볼일이 있겠소이까? 이 금광보(金光寶)는 그저 평소 존경해오던 청옥노사(靑玉老師) 강비연(江批撚) 선배께 인사를 드리고 싶을 뿐이외다." "금판무상(金板武商) 금광보(金光寶)?!"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4 00:15:32 고친날 2005-06-04 00:15:32 읽은수 13326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5.보물지란(寶物之亂).(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백의노인이 경악성을 내지르며 일가족을 보호하려는 듯 뒤로 물리자 아방은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금판무상 금광보나 청옥노사 강비연이나 모두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다. '허걱? 금황성(金凰城)의 금판무상과 교림(敎林)의 청옥노사?' 객잔만큼 정보가 빨리 퍼지는 곳도 없는 만큼, 오랜 점소이 경력으로 무림의 풍문에 대해서는 제법 들은바가 있던 아방은 입을 따악 벌렸다. 금황성(金凰城)은 수호삼성(守護三城) 중 하나고, 교림(敎林)은 부동삼림(不動三林) 중 하나로 둘 다 천하삼십육세에 속한 강대방파다. 그런데 금판무상과 청옥노사라고 하면 금황성과 교림에서도 그 명성이 높은 절정고수(絶頂高手)지 않던가? "헛! 헛! 노선배께서 금모를 알아주시니 이것 참 영광이외다." "으음...금판무상의 황금주판은 황금과 무력이 같이 필요한 일만 셈을 한다고 들었는데, 이번엔 무슨 셈을 하고자 이곳에 방문하셨소?" "헛! 헛! 헛! 귀한 상품이 있으면 그걸 찾아가 싸게 사들이는 것이 상인이 할 일이 아니겠소?" '역시로구나!' 내심 묵직한 침음성을 흘린 강비연의 눈이 금광보와 그의 호위무사 네 명을 빠르게 훑었다. 금광보가 제법 이름 있는 절정고수라고 하지만, 한 배분의 차이가 있는 만큼 개인적인 무위로 치면 그가 반수 정도 높다. 문제는 그의 호위무사들인데, 하나같이 눈에 정광이 흐르는 것이 고수의 반열에 든 이들이 틀림없다. 그의 아들인 강지양(江智攘)도 일류고수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무위를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네 명의 고수에게 대적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만약 상품을 지닌 이가 팔지 않겠다고 하면 어쩔 것이오?" "헛! 헛!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그저 헛걸음을 하는 수밖에." '뭔가 있다!' 예상치 못한 답변에 강비연의 얼굴에 짙은 긴장이 서렸다. 금판무상의 황금주판이 지금까지 한 번 셈을 해서 구하지 못한 물품은 거의 없으니, 본인이 직접 여기까지 왔다면 뭔가 준비를 해도 단단히 해뒀을 것이다. 강비연의 예상은, 안타깝게도 정확히 들어맞고야 말았다. "호호호, 금대인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정말 다행이군요." "부자 어르신과 척을 지고 싶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는 청색궁장과 홍색궁장을 입은 두 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미녀라고는 하지만, 그 아름다운 꽃잎 뒤에 숨어있는 것은 날카로운 독가시였다. "그대들은 누구요?" "소녀는 자일미(慈佚美)라고 합니다." "소녀는 자일화(慈佚花)라고 하지요." "으으음...!" 두 미녀의 대답을 들은 강비연이 더더욱 얼굴을 굳히는 것을 본 아방은 슬금슬금 객잔의 구석으로 몸을 피하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자일미, 자일화...유명한 자매 고수가 누가 있더라? 그 중에서도 청옥노사를 위협할 정도라면...뜨악! 수정궁(水晶宮)의 청홍미화(靑紅美花)!! 수정궁(水晶宮) 또한 불침삼궁(不侵三宮) 중 하나고, 청홍미화는 비록 겉보기에는 아름다운 20대 후반의 미녀지만, 실제로는 주안술(駐顔術)로 노화를 막고 있는 절정고수(絶頂高手)들이다. 천하삼십육세 중 세 개의 세력에 몸담고 있는 네 명의 절정고수가 이 객잔에 모여 있다니, 아방으로써는 지금 이게 꿈인지 아닌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헌데, 아방의 놀람은 조금 이른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 커다란 철궁(鐵弓)을 떡하니 매고계신 분들도 이만 인사를 드리는 게 어떨까요?" 자일미가 요사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한 말에 통구이를 뜯고 있던 세 사냥꾼은 서로 시선을 교차하다가 벌떡 몸을 일으켜 강비연에게 정중히 인사와 함께 자신들을 소개했다. "삼궁삼절(三弓三絶) 중 후배 강궁통절(强弓通絶) 제인상(第絪想)이 늦게나마 강 선배님께 인사드립니다." "후배 쾌궁연절(快弓連絶) 장연호(暲演虎)가 강 선배님께 인사드립니다." "후배 곡궁환절(曲弓幻絶) 상첨진(祥僉溱)이 강 선배님께 인사드립니다." "그렇다면 자네들은...?" "예, 교림(敎林)의 연락을 받고 철궁곡(鐵弓谷)에서 선배님을 돕기 위해 나왔습니다만, 상황이 심상치 않아 바로 인사드리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사죄라니, 내 어찌 자네들에게 사죄를 받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와줘서 정말 고맙네." 삼궁삼절을 본 강비연의 얼굴에는 희색이 돌고 있었다. 철궁곡이라 하면 기병삼곡(奇兵三谷) 중 하나로, 정사중간의 금황성이나 수정궁과는 달리 교림과 마찬가지로 정파무림의 한 축을 맡고 있는 당당한 정파다. 특히 교림과 철궁곡은 예전부터 친분이 두터웠으니, 거리가 먼 교림에서 도움을 청해오자 기꺼이 나서준 것이다. 삼궁삼절은 각자가 일류고수(一流高手)로 셋이 함께 있으면 절정고수와 버금가는 무위를 보인다. 비록 객잔과 같이 좁은 공간에서 궁사(弓師)인 그들이 제 실력을 발휘하기는 힘들겠지만, 희망이 거의 없다시피 한 것보다는 매우 높은 쪽이 더 나았다. "본인들은 철궁곡을 대표해 강 선배를 돕겠소!" 제인상이 당당하게 앞으로 나서며 외치자 청홍미화 자매는 약간 주춤하는 기색을 보였다. 아무리 그녀들의 합격술이 일절이라도 강비연에 비하면 반수 정도 아래고, 삼궁삼절은 객잔 내에서도 그녀들 중 한 명 정도는 상대할 능력이 있다. 살짝 금광보를 보니, 그는 아직까지 느긋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정말 간섭할 생각이 없는 듯싶었다. "어머, 설마 정도의 이름 높은 협객 분들이 힘없는 아녀자를 핍박하지는 않으시겠죠?"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요." 청홍미화가 눈웃음치며 한 말에 제인상은 미간을 찌푸렸다. 절정고수가 힘없는 아녀자? 그럼 무림고수는 칼싸움 하는 애들일 테고, 최소한 화경에는 들어야 무림고수라 불릴 것이다. 수정궁이 정사중간이라 하나, 청홍미화는 워낙 제멋대로의 행동 때문에 거의 사파인이나 다름없는 여인들이다. 정파의 협객으로써 마땅히 그동안 해온 악행에 대한 처벌을 내려야겠지만, 이렇게 뻔뻔하게 아녀자임을 들고 나오는데다가 그들의 목적이 강비연 일가의 호위인 만큼 섣불리 손을 쓰기가 힘들다. '일단은 두고 봐야겠군.' 탐탁치 않기는 하지만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생각해 애써 그녀들로부터 시선을 땐 그는 남아있는 손님들을 바라보았다. "이 제모는 우연이라는 것을 믿지 않소. 나설 분들은 지금 나서주시는 것이 어떻소?" 이미 손님들 중 무림고수가 수두룩하게 나왔으니, 이 객잔의 음식 맛이 특별히 좋기라도 하지 않은 이상 이 시간에 객잔에 있는 다른 이들에게도 의심이 가는 것이 당연하다. 거한과 흑의사내는 물론이고 겨우 만두를 가지고 줄기차게 시간을 때우는 무인이나, 홀로 술잔을 비우고 있는 적의노인 모두 수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저 만두만 먹고 갈 것이니 신경 쓸 것 없소." 무인의 귀찮다는 듯한 음성은 신경 쓸 필요 없는 일에 괜히 휘말리기 싫다는 뜻이 명백하게 드러나 있었다. 천하는 넓고도 좁으니 때 마침 지나가던 무인 한 명이 이 객잔에 들렸다고 해서 추궁할 수는 없는 노릇. 거기에 본인이 저토록 상관하지 않겠다는 뜻을 드러내고 있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요?" 적의노인은 둘째치더라도 거한과 흑의사내를 보는 그의 눈에는 확신이 담겨져 있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저 거한은 녹림맹에서 나온 고수임이 확실하고, 흑의사내도 같은 녹림도이거나 최소한 사파계열의 문파가 틀림없을 거라는 확신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제인상의 예상을 그대로 깨버리고 있었다. "어디서 눈알을 부라려, 이...아가리 깨버릴 새끼야!! 대형께서 식사하시는 걸...방해하지마라. 그 혀를 뽑아...내기 전에." 비록 거한의 외침은 중간중간 어눌한 부분이 있었지만, 거한의 두 눈에서 스산하게 번뜩이는 혈광은 그가 한 말이 절대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었다. 더구나 흑의사내는 아예 귀머거리에 벙어리처럼 객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오리구이를 천천히 뜯어먹고 있으니, 제인상으로서는 무안해도 정말 이만저만 무안한 게 아니었다. "노야께서도 마찬가지시오?" 아무리 무안하다고는 해도, 그는 명문정파의 당당한 협객답게 여전히 당당하고 정중하게 적의노인에게 물었다. 두 번의 우연은 있을지 몰라도, 세 번의 우연까지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제인상의 생각이었다. "본좌는...어린 후배에게 추궁당할 이유가 없다."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껄끄러운 음성을 들은 그의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본좌라고 하면 분명 그 신분으로나 무위로나 결코 낮다는 말은 하지 못할 선배고수일 텐데, 그렇다면 정말로 우연이 세 번이나 겹쳤다는 말인가? "단, 거기 강(江)가가 지닌...용봉무서(龍鳳武書)에는 관심이 있다." 삼궁삼절과 강씨 일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이 적의노인이 객잔에 온 것만큼은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느꼈던 것이다. 이 일에 상관 않겠다고 밝혔던 무인은 미간을 꿈틀거렸고, 거한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걸로 보아 그들은 정말 우연히 이 객전에 들린 것 같았지만, 문제는 이 적의노인이었다. "노야께서는 어느 방면의 고인이시오?" "본좌의 존성대명은 방조삼(榜璪森)이니, 잊지 말고 잘 기억해두어라." 순간, 제인상의 얼굴이 경직됐다. 그뿐만이 아니라 객잔 내에 있던 이들 중 단 네 명만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그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4 00:16:03 고친날 2005-06-04 00:16:03 읽은수 13116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5.보물지란(寶物之亂).(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적혈귀조(赤血鬼爪) 방 선배란 말씀이시오?" "내가 너희들에게 거짓을 말해 무엇 하겠느냐?" 진정 예상치 못한 거물의 등장에 그들은 침음성을 금치 못했다. 적혈귀조(赤血鬼爪)는 혈응전(血鷹殿)의 장로로, 사신오왕(四神五王) 중 혈응조왕(血鷹爪王)의 사제(師弟)되는 강자. 비록 팔정협칠사마(八正俠七邪魔)에 들지는 못했어도 능히 그에 버금가는 무위를 지닌 초절정고수(超絶頂高手)다. 강비연과 삼궁삼절은 자신들이 합공을 하더라도 백초지적이 되지 못할 강자인 방조삼을 보며 이 난관을 어찌해야 할지 모를 상황에 처했고, 청홍미화도 사파의 선배격인 노마(老魔)를 보고 감히 경거망동 하지 못했다. 그런데, 정작 방조삼의 밝혀진 정체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이는 따로 있었다. 탁! "귀하가 진정 적혈귀조 선배라면, 이 검을 아시오?" 이미 간섭을 않겠다고 밝혔던 무인이 싸늘한 음성과 함께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탁자위에 올려놓자 방조삼은 미간을 모으며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눈에 기광을 띄었다. "낭아검(狼牙劍)!" "알고계시다면 본인의 사부님에 대해서도 기억하고 계실 거라고 믿소." "호오, 그렇다면 너는 낭아검주(狼牙劍主)의 제자더냐?" "그렇소. 본인이 바로 십년 전 귀하의 적혈귀조(赤血鬼爪)에 명을 달리하신 사부님의 직전제자인 단리악(段里顎)이오." '검룡(劍龍) 단리악(段里顎)!' 아방은 이제 완전 눈이 돌아가 있었다. 교림, 금황성, 수정궁, 철궁곡, 혈응전에 이어 이번엔 낭인맹(浪人盟)? 그것도 구룡팔봉(九龍八鳳) 중에서도 수위에 뽑힌다는 검룡(劍龍)? '우리 객잔에서 언제 무림대회라도 열리게 돼있던가?' 천하삼십육세 중 무려 여섯 곳에 속한 이들이 객잔 내에 있다는 사실에 잠시 정신이 오락가락 거렸던 그는 곧 고개를 내저었다. 대체 뭔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고 아직까지 계산대에 머리를 처박고 드르렁 드르렁 자고 있는 주인어른의 모습을 보고 이런 작은 객잔에서 그런 큰 일이 벌어질 리가 없다는 현실을 뼈저리게 절감한 것이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것이냐? 나는 낭아검주와 겨룸에 있어 암수나 계략도 쓴 적이 없다. 또한 돈에 팔린 목숨에 은원은 남기지 않는 것이 낭인맹(浪人盟)의 철칙일 텐데?" 방조삼의 냉소에 단리악은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낭인은 돈에 자신의 검과 목숨을 파는 자들. 누군가의 청부를 접수해 그 일을 하고 있다면 스스로 하나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낭인이 주는 선의는 모두 청부자의 은혜요, 낭인이 주는 해악은 모두 청부자의 원한이니 단 한 점의 은원도 남기지 않는 것이 낭인의 철칙인 것이다. 더구나 방조삼의 말대로 그의 사부와 그와의 겨룸에는 조금도 비겁함이 없었다. 비록 혈응전이 사파에 가깝다고는 해도, 음모나 계략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오직 정당한 무력만을 사용하는 점 때문에 정사중간으로 불리고 있으니 혈응전의 장로인 방조삼이 암수 따위를 사용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니 돈에 팔려 싸우다가 적혈귀조에 목숨을 잃은 그의 사부에 대한 원한은 그 누구에게도 따질 수 없는 셈이다. "귀하에 대한 원한은 십년 전 혈응전에 도움이 되는 청부는 받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으로 잊은 지 오래요." "푸하핫! 우리 혈응전이 너 같은 애송이의 도움을 필요로 할 성 싶더냐? 무인은 입이 아닌 힘으로 말하는 법. 네가 진정 무인이라면 사부의 원한을 묻지 말고 검을 뽑아라. 네가 아니라 무적권황(無敵拳皇)이 원한을 갚겠다고 찾아오더라도 나는 피하지 않는다!" 방조삼의 대소(大笑)에 단목악은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단순한 허세가 아니라 무림고수로써의 기세가 그대로 담겨있는 외침임을 느꼈던 것이다. 과연 모든 것을 힘으로 말한다는 혈응전의 장로다운 자부심이다. 아마 그는 정말로 무적권황이 찾아와 일권에 가슴이 뭉개져 즉사하더라도 무인으로써 화경의 고수와 겨루다 목숨을 잃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리라. '사부님도 원한은 남지 않으셨겠구나.' 단목악은 십년동안 버리지 못했던 일말의 잡념을 떨쳐버렸다. 집에서 편안히 죽느니 황야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겠다던 생전 사부의 말을 생각해 볼 때, 이런 진정한 무인과 겨루다 죽었으니 아마 저승에서라도 기뻐할 것이다. "낭인으로써 어찌 낭인의 법도를 어기겠소이까." "그렇다면 너는 네 사부의 원한을 잊겠다는 뜻이냐?" "애초부터 있지도 않은 원한이었소이다. 단, 이 일에 낭인으로써 나설 생각은 있소." "과연 그 사부에 그 제자로구나." 얼마든지 나서보라는 듯 방관하는 태도의 방조삼으로부터 시선을 땐 단목악은 강비연을 향해 나지막한 음성을 던졌다. "선금으로 은자 열 냥, 후금으로 한달에 은자 열 냥씩 해서 가족을 호위해드릴 수 있소. 청부하시겠소?" "하겠네!" 두말도 필요 없는 승낙이었다. 하기야, 낭인 중에서도 절정고수로 이름 높은 검룡을 겨우 은자 스무 냥에 고용할 수 있다면 굳이 지금과 같은 상황이 아니더라도 횡재나 다름없다. '검룡에 삼궁삼절까지 있으니 아무리 적혈귀조라도 최소한 오백초 정도는 버틸 수 있다. 문제는 자홍미화로구나. 약삭빠른 요녀들로 소문난 자홍미화가 어부지리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으니, 적혈귀조를 어떻게 막아내더라도 가족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 그걸 피하기 위해서라면 결국 다른 조력자들이 필요한데...' 무심코 객잔의 한쪽을 돌아봤던 강비연은 푸근하게 웃는 얼굴로 자신을 마주보고 있는 금광보를 보고 이를 악물었다. 천하사방에 있는 고수들이 정확히 이 시간 이 장소에 나타나도록 조정한 범인이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금광보! 용봉무서의 사본을 내놓을 터이니 우리 일가를 지켜주시오." "헛! 헛! 헛! 현명한 선택이시외다." 결국 황금주판으로 셈한 것을 정확히 건져낸 금광보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고, 그를 보며 무인들은 일제히 미간을 찌푸렸다. 적혈귀조와 청홍미화에게 용봉무서의 정보를 흘려 강씨 일가를 위협케 하고 적혈귀조를 핑계로 검룡을 불러 부족한 전력을 보충케 함으로써, 자신은 조금의 손해도 보지 않고 반드시 거래를 할 수밖에 없도록 교묘하게 그물을 친 장본인이 그임을 모두가 깨달았던 것이다. "흥! 아무리 부자어르신이라도 저희를 이렇게 이용한 대가는 반드시 치르도록 해드리죠."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을 실감하게 되실 겁니다." 자신들이 이용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 청홍미화는 대놓고 적의를 드러냈지만, 금광보는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정사중간의 수정궁에서도 청홍미화는 너무 나대는 바람에 이미 궁주의 눈 밖에 난 이들이다. 그러한 그녀들이 탐욕에 눈이 멀어 그에게 이용당했다고 해도 수정궁에서는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적혈귀조 방조삼이 화를 낸다면 또 모르겠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의외롭게도 그는 그다지 화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 도둑고양이들로부터 내 물건을 지켜주겠다니 참으로 고마운 돼지로구나." '과연...!' 방조삼의 말을 듣고 나서야 그들은 그가 화내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용봉무서를 손에 넣을 자신이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고, 그는 그만한 자신감을 가질 자격이 충분했다 "헛! 헛! 별말씀을 다 하시외다." 돼지라는 모욕을 듣고도 노하기는커녕 오히려 크게 웃어재끼는 금광보를 보며 다른 이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과연 금판무상(金板武商). 무인이 아니라 무를 아는 상인이기에 취할 수 있는 뻔뻔한 태도다. "이미 극의 내용도 다 밝혀졌는데, 이만 마지막 배우도 불러내는 게 어떻소?" 금광보를 노려보던 제인상이 슬쩍 어딘가를 돌아보며 한 말에 무인들은 거한과 흑의사내에게 경계의 눈빛을 띄웠다. 아마 저들이 금광보가 짠 극의 마지막 배우일 거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헌데, 그러한 그들의 시선에 금광보는 난감한 기색을 한가득 드러나고 있었다. "헛, 저들은 본인도 모르는 이들이외다." "지금 우리보고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요?" 이미 톡톡하게 이용당한 자일미가 날카롭게 찌르는 말에 금광보는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변명하듯 답했다. "헛! 헛! 본인이 삼재지문의 제자가 아닌 이상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소?" 난감하기 그지없는 듯한 모습을 보자면 정말 계획 밖의 이들인 듯만 싶지만, 철면피의 수준이 사기꾼 수준인 그의 말을 쉽게 믿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미심쩍은 심정을 감추지 얼굴로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던 제인상은 결국 의심을 감추지 못하고 그들을 향해 다가가 정중히 포권했다. "본인은 이미 밝혔다시피 철궁곡의 삼궁삼절 중 강궁통절 제인상이라 하오. 초면에 실례하오만, 사정이 이러하니 두 대인께서 존성대명을 밝혀주시면 감사하겠소." 비록 일말의 의심이 담긴 추궁이라고 하나 제인상의 태도는 정중하기 그지없었고, 허례허식이 아닌 진심이 담겨있었다. 더구나 정파의 협객 된 입장에서 최대한 존중이 담긴 요청이었으니 이 정도면 아무리 녹림도나 사파의 고수라도 성명 정도는 밝혀줄 듯싶었지만, 그것은 크나큰 착각이었다. 부우웅--! "허엇!!" 거한이 갑자기 등에 있던 대도를 뽑아들어 휘두르는 바람에 머리가 쪼개질 뻔했던 제인상은 가까스로 대도를 피해내고 급급히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고, 그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경 질색한 쾌궁연절 장연호와 곡궁환절 상첨진는 곧바로 철궁에 화살을 재며 노성을 터트렸다. "이게 무슨 짓이냐?!" 비열한 기습으로 의형제를 잃을 뻔한 그들로써는 무척이나 당연한 반응이었지만, 그들의 노성에 대한 거한의 회답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대형의 식사를...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4 00:16:41 고친날 2005-06-04 00:16:41 읽은수 13742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5.보물지란(寶物之亂).(4)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겨우 그런 이유 때문에 사람의 머리통을 날려버리려 했다니, 아무리 잔혹무도 한 사파라도 정말 어처구니가 없지 않은가? 장연호와 상첨진이 기가 막혀 활을 쏘지도 못하고, 다른 이들이 황당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거한은 눈에서 짙은 혈광을 번뜩이며 도를 치켜들었다. "혀를...뽑아주마!!" 콰지직! 객잔의 좁은 공간에도 상관치 않고 마구잡이로 대도를 휘둘러 탁자와 의자를 통째로 절단내버리는 거한의 행태에 제인상은 철궁도 뽑아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몸을 피해 다녀야 했고, 뒤늦게 서야 정신을 차린 장연호와 상첨진은 서로 시선을 교환한 뒤 손에서 화살을 놓았다. 피빙! 두 대의 화살이 날아든 곳은 각자 거한의 한쪽 어깨와 한쪽 발. 경고의 의미로 살짝 스쳐지나가게 했다고는 하지만, 궁으로써 천하에 우뚝 선 철궁곡의 화살은 그야말로 섬전과 같았다. 하지만, 그들의 경고는 제대로 빛을 볼 수 없었다. 까강! "어찌 이런...?" "철포삼?!" 내력을 담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철판도 능히 관통할 힘이 실려 있던 화살이 맨살에 그대로 튕겨나가는 것을 본 그들이 주춤할 때, 거한의 안광은 더더욱 진득한 핏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이 새끼들...다 죽인다아---!" 쿠웅!! 거한이 분노하며 내딛은 일보에 바닥이 푹 꺼지며 객잔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마치 내가고수의 진각과 같은 엄청난 충격이지만, 진정 놀라운 사실은 그 일보에서 조금의 진기도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체 어떤 신력을 타고났기에 내력도 사용하지 않고 이만한 충격을 일으킨단 말인가? "죽어라!!!" "큭!" 대기를 쪼개며 날아드는 대도를 피하기 위해 철판교의 신법으로 몸을 뉘였던 제인상은 그 커다란 대도가 허공에서 갑자기 꺾어져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탁. 거한의 대도가 마악 진기로 몸을 튕겨내려던 제인상의 머리 위에서 멈춰졌다. 그토록 강하고 빠르게 휘둘러지던 대도가 마치 종이칼처럼 너무나도 간단하게 멈춰진 것에 중인들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지만, 정작 그 놀라운 일을 해보인 거한은 이 정도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도를 거두고 묵봉으로 바닥을 내려친 흑의사내를 돌아볼 뿐이었다. "이 정도에서...봐줘도 괜찮겠습니까?" 묵묵히 끄덕여지는 고개. 거한이 대도를 거두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네놈...대형께서 봐주셔서 딱 이번...한 번만 용서해주는...줄 알아라." 운이 좋았다는 듯한 투의 말과 함께 뒤돌아서 성금성금 걸어간 거한이 의자에 턱하니 앉는 것을 보며 제인상은 대체 뭐라고 해야 할지를 모르고 얼굴만 시뻘겋게 붉혔다. 기습적인 공격에 의해 병기도 제대로 뽑아보지 못하고 이리저리 몰리기만 한 것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거한은 이미 아까 전에 다시는 식사를 방해하지 말라는 식의 경고를 한 적이 있다. 자신이 저 산적놈과 같이 잔악무도한 사파인이라면 모를까, 당당한 명문정파의 협객인 이상 자신이 수치를 당했다고 그걸 그대로 갚아줄 수야 없다. 그것이 바로 정파를 진정 정파답게 만들어주는 협의지도니까. "크흠...아무래도 이분들은 정말 상관없는 외인들인 듯싶습니다." "헛! 헛! 그러니까 내 진작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나." 한바탕 곤욕을 치른 자신을 향해 후덕하게 웃어 보이는 금광보의 모습에 일순간 살심이 돋는 제인상이었지만, 무림에 이름 높은 협객답게 그는 금세 흥분을 가라앉히고 등에서 뽑아들었다. "용봉무서(龍鳳武書)가 뭐지?" 누군가의 입에서 갑자기 흘러나온 한 줄기 음성에 중인들의 모든 시선이 한 곳을 향해 집중됐다. 그들 모두가 이곳에 모여들게 한 원인인 용봉무서가 언급됐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음성의 기이한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과연 인간의 음성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감정이 배제된 절대적인 무심의 음성. 아마 바위가 입이 달려 말을 하더라도 더 감정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그 음성은, 생물 본연의 무언가를 자극하고 있었다. "거기...점소이!" "예...예?" "대형께서...물으시잖아!" "예에?!" 흑의사내의 기이한 음성에 정신을 팔고 있던 아방은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에 입을 쩌억 벌렸다. 아니, 그게 자기한테 묻는 거였다는 말인가? 하찮은 점소이가 알면 얼마나 안다고 자신에게 그런 걸 물어본다는 말인가? 아방으로써는 정말 환장할 일이었지만, 삽시간에 명성 높은 협객인 제인상을 몰아붙이는 무위를 보여준 거한의 부리부리한 눈은 지금 당장 대답을 내놓지 않으면 기필코 자신의 대갈통을 깨부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요, 용봉무서는, 용봉무서는..." 점소이 경력 10년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며 온갖 풍문이 떠올랐다 사라져갔다. 용봉이라고 하면 구룡팔봉? 아니다. 이 정도 고수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용봉이라면...! "아! 용봉쌍성(龍鳳雙星)의 풍룡검법(風龍劍法)과 운봉검법(雲鳳劍法)!" 무심코 고함을 내질렀다가 혹시 틀린 게 아닌가 싶어 찔끔했던 아방은 그를 불쌍히 여긴 강비연이 살짝 고개를 끄덕여준 것을 보고 만면에 희색을 띄었다. "용봉...쌍성?" "예! 까마득한 300년 전 화경에 오른 절대고수 부부의 연을 나눴던 두 분입니다요. 그분들은 풍룡검법과 운봉검법이라는 절세의 검법을 익히고 계셨는데, 말년에 두 분의 검법을 합쳐 하나의 무공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그 무공의 너무나도 경천동지할 위력이 악인에게 이용될 것을 우려하시어 그 무공을 다시 둘로 나눴으니, 그것이 바로 그것이 바로 풍운검록(風雲劍錄)과 용봉무서(龍鳳武書)입니다." "풍운...검록!!" 아방의 설명에 거한은 크게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이 광대한 중원무림에서 천하제일의 자리를 다투는 절대쌍존(絶對雙尊) 중 풍운검존(風雲劍尊)이 기연으로써 얻었다는 비급 중 비급 풍운검록에 또 다른 짝이 있었다니! 아방으로써도 그저 선배 점소이에게 스쳐지나가듯 듣기만 했을 뿐, 무림에 전해져오는 대다수의 풍문이 그렇듯이 헛소문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전설의 용봉무서가 진짜 있다는 사실에 내심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용봉...무서...!" 거한의 눈에 혈광이 번뜩이는 것을 본 중인들은 긴장을 금치 못했다. 지금까지는 뭘 몰라서 참견하지 않았다고 해도, 용봉무서와 같은 절대비급이 눈앞에 있는데도 탐욕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림인이 아니었다. 그런데, 거한의 곧 이어진 행동은 그러한 그들의 긴장감을 형편없이 뭉개버렸다. "대형...그러니까, 용봉무서와 풍운검록은..." 용봉무서는 물론이고 풍운검록조차 모르는 듯한 흑의사내에게 세세하게 설명을 해가는 거한의 모습에 중인들은 대체 자신들이 왜 긴장을 했는지 일말의 후회마저 느껴야 했다. "그런...겁니다. 만약 원하신다면...당장이라도 빼앗아...바치겠습니다." 기나긴 설명을 끝낸 거한이 끝에 살짝 덧붙인 말에 중인들은 다시 긴장을 되찾았다. 이번에야 말로 저 거한이 용봉무서 쟁탈전에 끼어들 것이라는 게 그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단, 흑의사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객잔 밖을 향하며 무심하게 음성을 흘리기 전까지 말이다. "그딴 것, 필요 없다." "알겠...습니다." 흑의사내의 필요 없다는 말 몇 마디에 거한은 눈의 혈광을 그대로 잠재웠고, 아방에게 은자 부스러기를 대충 던져준 뒤 그의 뒤를 따라 객잔을 벗어났다. 너무나 상리에 벗어난 둘의 행동에 그들이 사라진 뒤에도 중인들은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머릿속에 별의별 생각을 다 떠올리고 있었다. 천하의 용봉무서를 '그딴 것'? '필요 없다'? 더구나 겨우 그 말을 들었다고 용봉무서를 무슨 삼류비급처럼 그대로 무시해버려? 혹시 강비연이 지닌 용봉무서가 가짜는 아닐까? 아니면 저들은 이미 용봉무서에 버금가거나 그 이상 가는 비급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중인들이 마치 천뇌문(千腦門)의 계략이나 제갈문(諸葛門)의 진법에 당하기라도 한 것만 같은 혼란에서 벗어난 것은 그로부터 잠시 후였다. "헛! 헛! 역시 천하에는 별의별 기인이사가 다 있소이다." "본좌가 적지 않은 세월동안 무림을 종횡했지만, 무림삼괴 이후 저런 놈들은 처음이다." 금광보와 방조삼이 각각 그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사이 정신을 차린 그들은 각자 서로를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금판무상의 황금주판이 일절이라 들었는데, 그 솜씨를 한 번 견식해보겠습니다." "호호호, 저희들에게는 과연 얼마의 값이 매겨질지 구금하군요." "헛! 헛! 헛! 정 그리 원하신다면 응해드리는 것이 상인의 도리가 아니겠소?" 청홍미화가 소매에서 긴 비단자락을 스르륵 끄집어내자, 네 명의 호위무사가 진을 이루는 가운데 금광보 또한 황금으로 이루어진 주판을 꺼내들었다. 방조삼은 손을 오그려 반갑자가 넘도록 명성을 떨쳐온 적혈귀조(赤血鬼爪)를 준비했고, 단리악은 사부에게 물려받은 낭아검을, 삼궁삼절은 각자의 궁에 튼튼한 철전을, 강비연은 진기를 끌어올려 두꺼운 옥석을 일격에 격파하는 그의 성명절기 청옥수(靑玉手)를 손에 일으켰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5 00:23:24 고친날 2005-06-05 00:23:24 읽은수 13463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6.생사가판(生死可判).(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사신은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을 가르니 일수에 만인을 죽이고 만인을 살린다.- '쓸데없는 일에 휘말릴 필요는 없다.' 그는 길을 걸으며 무심하게 생각했다. 그는 무인이 아니다. 무서 따위는 일말의 가치도 없다. 상대적 가치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저토록 많은 강자들이 노리고 있는 물건을 건드리는 것은 그다지 현명치 않다. "이제...한달 정도...남았습니다." 뒤에서 따라오던 철방이 말을 건넸다. 한달. 보행으로는 역시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말을 탄다면 시간이 단축되겠지만, 철방은 기마술을 모르는데다가 이미 망자(亡者)가 되어 말들이 무서워하기에 배울 레야 배울 수도 없다. 또한 마차의 경우 지금까지의 경우지에서는 거의 십리도 가지 못해 바퀴가 빠져나갈 것만 같은 헌 것들밖에 남아있는 것들이 없어 구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해골마(骸骨馬) 스켈레톤 스티드(skeleton steed)나 유령마(幽靈馬) 팬텀 스티드(phantom steed), 해골마차(骸骨馬車) 스켈레톤 케리지(skeleton carriage), 유령마차(幽靈馬車) 팬텀 케리지(phantom carriage) 등이라면 철방도 탈 수 있겠지만, 그건 세간의 이목에 너무 눈에 뜨이는데다가 지금으로써는 가능한 귀기의 사용을 자제해야한다. '약간의 불편함은 감수해야겠군.' 이미 객잔에서 확인했다시피, 철방의 무력은 이미 일류고수의 수준을 뛰어넘었다. 제인상이 아무리 철궁을 사용하는 궁사였다고 해도, 일류고수를 그렇게 쉽게 몰아붙이는 것은 예전의 철방이라면 절대 불가능하다. 이 정도 무력을 지닌 호위병의 호위를 받는 것에 비한다면, 이동속도가 조금 느려지는 것 정도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략 반 시진 동안 길을 걸으며 어떻게 하면 이동속도를 높일지 있을지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한 순간 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귀에 들리는 것은 격렬한 굉음이고, 코로 맡아지는 것은 은은한 혈향이며, 초감각에 느껴지는 것은 생사가 오고가는 치열한 전투이다. 일반인은 물론이고 웬만한 고수라도 그 무엇하나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먼 거리에서 일어나는 일이었지만, 이미 평범과 비범을 불문한 인간적 한계를 초월한 그의 초감각은 그 전투를 분명하게 감지하고 있었다. "조용히, 따라와라." "예...대형." 그가 짤막한 명령과 함께 마치 유령과 같이 앞으로 스르륵 미끄러져나가자, 철방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감지하지 못하면서도 그 명령에 철저하게 따랐다. 허리를 깊이 숙인 채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호랑이나 같이 은밀하면서도 매와 같이 가볍고 토끼와 같이 민첩한 움직임을 보이는 철방이 망자 중에서도 가장 둔한 시귀의 일종이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치조차 못할 터이다. 대략 일각 정도 은밀하면서도 민첩하게 이동한 끝에 그가 찾아낸 것은, 다름 아니라 반 시진 전 객잔에서 봤던 무인들이었다. 철방에게 목이 날아갈 뻔했던 궁수를 비롯한 푸짐한 체구의 중년인과 그의 네 호위무사가 두 명의 여인을 상대로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 외에 다른 무인들은 느껴지지 않았다. 우선 그는 어느새 저들이 앞질러올 수 있을는지, 그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 감각으로 사방을 면밀하게 훑었다. '추격전을 벌였군.' 두 마리의 말을 잃고 관도 한쪽에 처박혀있는 사두마차(四頭馬車)와 길가를 서성거리고 있는 몇 마리의 말만으로도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사두마차 안에 있는 것은 모두 세 명. 한 여인과 두 아이다. 아마 마차로 저들을 먼저 피신시켰는데, 청홍미화라는 두 여인이 추격해와 마차를 막은 것이리라. 이미 객잔에서 걸음을 돌렸을 때부터 이 일에 대해 신경을 끊었으니, 어째든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저렇게 서로 싸우는데 열중하고 있다면 대놓고 길을 지나가도 방해하는 자도 없을 것이다. '일단은 두고 보는 게 좋겠군.' 그러나 그는 관조를 선택했다. 굳이 나설 필요는 없지만, 굳이 피할 필요 또한 없다. 이미 호악채에서 정보부족으로 인한 곤욕을 겪어봤던 만큼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얻어두는 것이 좋다는 판단이다. 그와 철방이 한쪽에서 은밀하게 지켜보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무인들은 계속해서 공방을 교환해갔다. 파라락-! 두 개의 긴 청단(靑緞)과 홍단(紅緞)이 서로 교차하며 허공에 수를 놓는 모습은 선녀가 비단자락을 흔들며 춤을 추는 것만 같았지만, 그 청단과 홍단에 담겨진 것은 거목조차 일격에 분질러버리는 거력과 오싹하기 그지없는 살기였다. 네 명의 호위무사가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러봤지만, 청단과 홍단은 조금도 베어지지 않고 빙빙 돌며 소용돌이를 그리다가 한 순간 해일과 같이 갑자기 사방으로 크게 부풀어져 그들을 튕겨냈다. "헛! 헛! 과연 청홍쌍무(靑紅雙舞)! 백금(百金)이 아깝지 않소." 호위무사들이 튕겨져 나오는 가운데 오히려 앞으로 뛰어든 금광보는 자신의 독문병기인 황금주판에 내력을 주입해 그것으로 청단을 주르륵 훑었다. 마치 칼날과 같은 예리함을 지니고 있던 주판알은 청단을 보호하고 있던 진기를 해소시키기는 했지만, 천잠사(天蠶絲)로 짜여진 청단을 갈라내지는 못했다. 물론 이미 수차례나 청단 홍단을 긁어본 금광보가 뻔히 안 통할 공격을 한 것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치이이이잉-! 주판에 파고든 진기가 주판알을 고속으로 회전시키자, 청단과 황금주판 사이에 무시무시한 불똥이 튀며 청단이 갈라져 나갔다. 황주금판신공(黃珠金板神功)이라는 독특한 독문무공을 익힌 금광보이기에 펼칠 수 있는 기이한 공격이었다. "흥! 어딜 감히!" 청단과 같이 소용돌이를 그리고 있던 홍단의 끝이 갑자기 흔들린다 싶은 순간, 홍단은 마치 한 마리의 이무기처럼 금광보를 향해 날카롭게 쏘아졌다. 계속 청단을 찢으면서 막을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공격은 결단코 아니었지만, 금광보는 뭘 믿는지 그러한 홍단을 깨끗하게 무시하고 청단을 찢는데 열중할 뿐이었다. 푸욱-! "그렇게 놔두지는 않겠소!" "제인상! 네가 감히...! 하나의 철전(鐵箭)에 의해 꿰뚫려진 홍단이 휘청거리자 자일화는 노성을 터트렸지만, 홍단이 닿지 않는 먼 곳에서 철궁을 들고 있는 제인상을 당장 어찌할 수는 없었다. 철궁곡(鐵弓谷)의 비전으로 만들어지는 철궁(鐵弓)은 일반적인 목전(木箭)을 쓰더라도 백여 장이 넘고, 특수한 철전(鐵箭)를 사용하면 백오십 장을 넘는다. 게다가 철궁곡의 고수는 진기를 궁술(弓術)에 사용하는데 뛰어나니, 활을 쏘기 전에 미리 거리를 좁혀두지 않으면 아무리 뛰어난 고수라도 횡액을 면치 못한다. 그 중에서도 제인상은 강궁통절(强弓通絶)로 불리며 삼궁삼절 중 가장 강하고 빠른 화살을 가장 멀리 쏠 수 있는 고수였던 만큼 저 먼 거리에서도 충분히 견제가 가능했던 것이다. 홍단이 휘청거리는 사이 재빨리 모여든 네 명의 호위무사가 전륜검진(轉輪劍陣)을 펼쳐 연달아 홍단을 할퀴어대자 자일화는 다급히 홍단은 눈을 사납게 치켜떴다. "이 버러지 같은 것들!!" 진기에 의해 갑자기 허공으로 튕겨 올려진 홍단은 한 명의 호위무사를 휘어 감고 그대로 몸을 조였다. 우두둑!! "크아악-!" "흥!" 홍단에 감겨 발버둥치던 호위무사는 무시무시한 압력에 두 팔과 몸의 뼈가 모조리 으스러지고 내장이 터져 즉사하고 말았고, 자일화는 호위무사의 시체를 땅에 내던지며 차갑게 냉소했다. 천잠사로 짜여진 청단과 홍단을 이용해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하는 그녀들의 청홍쌍무는 수많은 고수를 격파해온 무림일절. 일개 호위무사 따위가 견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악독한...! 더 이상 본인의 손속에 자비를 바라지 마시오!" "헛! 호위무사 한 명에게 지급하는 급료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 하는 짓이오?" 호위무사의 죽음에 각자 다른 의미로 자극된 제인상과 금광보는 공격에 박차를 가했다. 제인상은 목전을 연사해 홍단을 청단의 소용돌이 안으로 물러나게 한 뒤 하나의 철전을 재고 내력을 끌어올렸고, 금광보는 청단을 이리저리 찢다가 뒤로 갑자기 물러나며 황금주판에 진기를 담았다. "어딜!" "네놈들 마음대로는 안 된다!" 제인상과 금광보가 12성의 진기를 끌어올리는 것을 눈치 챈 청홍미화 또한 가만히 당하지는 않았다. 자일화는 홍단을 제인상을 향해 길게 뻗어내며 칼날과 같이 예리한 무형의 경력을 쏘아냈고, 자일미는 청단을 허공에서 비비 꼬아 만든 채찍에 10성의 내력을 담아 금광보를 향해 내려쳤다. 챙챙챙!! "큭!" 금광보의 호위무사답게 청단채찍을 막기 위해 몸을 날렸던 세 명은 자일미의 10성 내력을 당하지 못하고 반으로 부러진 검과 함께 뒤로 튕겨졌다. 조금도 기세가 줄지 않고 내려쳐오는 청단채찍에도 진기를 끌어 올리느라 피할 수 없었던 금광보는 살 속에 파묻힌 눈을 가늘게 뜨며 발끝으로 땅에 있던 돌멩이 하나를 차올렸다. 물론 12성의 내력을 황금주판에 담고 있던 와중이라 돌멩이에 담긴 진기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그것으로 자일미의 청단채찍을 막는다는 것은 무모해도 이만저만 무모한 짓이 아니다. 그러나 금광보가 노린 것은 청단채찍이 아니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5 00:23:52 고친날 2005-06-05 00:23:52 읽은수 12847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6.생사가판(生死可判).(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욱...?!" 청단채찍에 의해 뒤로 튕겨졌던 한 호위무사는 갑자기 등에 전해진 충격에 신음을 토하다가 두 눈을 부릅떴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의해 뒤로 날려지던 몸이 다시 청단채찍의 앞으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퍼억!! 호위무사의 머리통이 수박처럼 산산이 깨져나가고, 그 육신이 좌우로 완전히 양단되어 혈우가 쏟아져 내리는 가운데 붉게 물든 철단채찍이 금광보로부터 삼척정도 거리의 맨땅을 후려갈겼다. "이런...!" 금광보의 너무나도 은밀한 행동 때문에 호위무사가 스스로 허공에서 몸을 틀어 채찍의 앞을 가로막은 것으로 오인한 자일미는 대경하며 다급히 채찍을 옆으로 휘둘러 금광보를 공격했다. 호위무사의 희생으로 이미 진기를 12성까지 모두 끌어올린 그는 그대로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채찍을 피해버렸고, 그의 두툼한 손에 들려진 황금주판이 그야말로 찬란한 황금빛 기운에 둘러싸인 것을 본 자일미는 안면을 일그러트렸다. 위기를 느낀 그녀가 청단을 회수해 겹겹이 겹치며 진기를 담아 방패를 만들어낸 순간, 허공에 떠있던 금광보는 주판을 청홍미화를 향하며 한 손으로 강하게 후려쳤다. 파바바바바밧--! 주판으로부터 주판알만한 수십 개의 황금빛 강기(剛氣)가 쏟아져 나와 허공을 메우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그 위력은 넋 놓고 구경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촤아악!! 겹겹으로 겹쳐진 청단의 진기가 일차적으로 관통당한 덕분에 위력이 줄어든 강기를 홍단이 가까스로 받아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청단은 너덜너덜하게 변해버렸고, 홍단 역시 곳곳이 터져 전의 아름다운 모습을 잃어버렸다. 금광보는 강기를 사용하기 위해 내력을 과다하게 끌어다 쓴 덕분인지 이마에서 땀을 한가득 뽑아내고 있었지만, 얼굴이 납처럼 질려버린 청홍미화에 비하자면 오히려 무척이나 양호한 편이었다. 청홍미화의 청홍쌍무는 부드러운 비단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뛰어난 무공이지만, 지나치게 면적이 넓은 비단을 사용하기 때문에 진기를 12성까지 끌어올리더라도 강기를 사용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지니고 있다. 같은 절정고수라도 좀더 상승의 무공을 사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이토록 크기에, 오히려 고수일수록 상승비급에 대한 탐욕을 버리기 힘들다. "헛! 헛! 아무래도 오늘은 이 금모의 운이 좋았던 모양이오." 둘 다 얕지 않은 내상을 입은 대다가, 자일화의 경우 어깨에 철편까지 박혀 있었던 만큼 청홍미화는 금광보의 말을 부정하기 힘들었다. 제인상은 12성 내력을 철편에 담는 대신, 홍단의 경력을 피하고 빈틈을 노려 8성의 내력을 담아 날린 것이다. 만약 그 철편만 아니었다면 자일화는 내상을 입지 않고 오히려 지친 그들을 몰아칠 수도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녀들의 완벽한 패배였다. "청산이 있는 한 땔나무는 걱정은 없으니, 이 일은 훗날 갚도록 하지요." "내 오늘 일은 결코 잊지 않겠다!" 형세의 불리함을 느낀 청홍미화는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그들의 시야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두 명의 호위무사를 잃은 대가로 싸다면 싸고 비싸다면 비싼 승리였다. "헛! 헛! 헛! 어째든 이겼으니 다행이오." "금대인의 도움에 감사드리오."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며 느긋하게 다가온 금광보에게 제인상은 정중히 감사를 표했다. 금광보가 이 모든 일을 계획하고, 용봉무서의 사본을 받는 것을 대가로 조력을 준 것임을 알면서도 감사의 예를 잊지 않는 그의 행동이야말로 진정 협객에 걸 맞는 모습이다. "헛! 헛! 그런데 역시 손해가 컸소이다." "두 호위무사 분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금광보가 말하는 손해가 철저하게 이해타산 적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지만, 협객 된 입장에서 차마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그것을 두 호위무사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 쪽으로 돌렸다. "헛! 헛! 아무래도 이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정말 바쁘게 일해야겠소. 그러니 제대협께서 좀 도와주시구려." "도움이라하심은...?" 의아한 표정으로 금광보를 마주보던 제인상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아직까지 철궁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이미 오장육부가 으스러진 그로써는 한 점의 진기도 끌어올릴 수 없었다. "커..억!" 비린내 나는 선혈과 내장조각을 토해내는 제인상의 몸에서 손을 땐 금광보는 그가 땅에 쓰러진 채 경련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고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 "헛! 도움에 감사드리외다." 내가중수법을 이용해 방심하고 있던 제인상을 그대로 즉사시켜버린 그는 태연하게 시체를 향해 감사를 표한 뒤 남아있는 두 명의 호위무사에게 간단히 명령을 내렸다. "강씨 일가를 모셔라." 느긋하면서도 지독하리만치 냉정한 그의 명령에 따라 두 호위무사는 곧 관도 한쪽에 처박혀 있던 사두마차에 다가갔다. 무학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데 있어서는 당연 으뜸으로 꼽히는 교림(敎林)의 절정고수인 강비연의 일가였던 만큼, 그들도 약간의 내공과 호신술 정도는 익히고 있었다. 하지만 수호삼성 중 금황성의 고수 두 명을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기에, 두 호위무사는 사두마차에서 곧바로 한 중년부인과 두 아이를 제압해 금광보 앞에 대령했다. "헛! 헛! 몸은 좀 어떠시오?" 중년부인은 금광보의 너무나도 느긋한 음성에 몸이 떨리는 것을 감추지 못했다. 강비연의 자부(子婦)인 채여상(彩輿祥)은 상황이 위급해지면 아이들만이라도 도주시키기 위해 문틈으로 밖을 계속 살피다가 금광보에 의해 제인상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대경한 나머지 도주할 생각도 못한 채 호위무사에게 제압당했다. 금광보의 느긋한 음성을 듣고 나서야 뒤늦게나마 경악이 걷히고 대신 배신감이 찾아온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철저한 신용이야말로 금황성(金凰城)의 제일가는 보배라 알고 있었거늘, 이제 보니 그 보배는 쓰레기에 불과했군요." "헛! 헛! 헛! 그렇게 확대해석하실 필요는 없소이다. 이건 어디까지 본인이 개인적으로 치른 일이니 말이외다." 예상했던 대답에 채여상을 입술을 깨물었다. 용봉무서가 천하에 더할 나위 없이 귀한 비급이라지만, 다른 세력이라면 몰라도 금황성이 스스로의 신용까지 깨가며 이런 일을 벌일 이유가 없다. 수호삼성(守護三城)은 그야말로 수호를 위한 세력. 정의성(正義城)이 정파를 수호하고, 철혈성(鐵血城)이 사파를 수호한다면 금황성은 상인(商人)을 수호한다. 그러한 수호삼성이 절대적으로 지키는 철칙이 있으니, 정의성의 협의지도는 한 점의 더러움도 허용치 않고, 철혈성의 강자지존은 한 치의 굽음도 용서치 않으며, 금황성의 상인지도는 일말의 거짓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수호삼성이 각자 정파, 사파, 상인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이유로써 지금까지 그 철칙이 깨어진 경우는 단 한 번도 없다. 때문에 금황성의 고수인 금광보가 한 계약을 철석같이 믿었는데, 그 믿음이 화를 부르고야 만 것이다.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헛! 헛! 그야 물론이오. 제대협을 죽인 것도 청홍미화의 짓이고, 강선배의 일가를 해하고 용봉무서를 뺏어 달아난 것도 그녀들의 짓인데 본인에게 무슨 일이 있겠소이까?" 그야말로 치가 떨린다. 멀쩡한 사람을 앞에 두고 자신들을 해치고, 그 누명을 다른 이에게 뒤집어씌우겠다고 태연히 말하는 금광보의 모습은 그녀에게 있어서는 마귀나 다름없이 보였다. "헛! 헛! 헛! 있을 곳이야 어차피 뻔하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 용봉무서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면 가능한 편안히 보내드리외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짐승에게는 할 말이 없다!" 채여상은 노성을 참지 않았다. 어차피 살인멸구를 작심한 금광보를 도와주느니, 차라리 이대로 혀를 깨물고 죽는 것이 나았다. 그 역시 순순한 협조 따위는 애초부터 기대하지도 않았던 듯, 웃는 얼굴을 그대로 유지하며 그녀가 품에 않고 있던 두 아이의 어깨를 손으로 가볍게 쳤다. "꺄악!" "쿨럭!!" 채여상은 잠시 이해하지 못했다. 아이들의 입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붉은 것은 무엇이며,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까스로 자신이 던졌던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냈을 때, 그녀의 입에서 죽음의 비명과도 같은 처절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 "상비야! 상홍아!!" 그녀의 아들인 강상비(江常備)와 딸인 강상홍(江常虹)은 허공을 격하고 날아든 경력에 내장에 크나큰 충격을 받고 입에서 피를 흘려내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머리가 텅텅 비는 듯한 충격 속에서도 모성애(母性愛)의 본능으로 허겁지겁 내상약을 꺼내 먹이기는 했지만, 의술에 무지한 그녀가 보기에도 두 아이의 속은 정상이 아니었다. 내장이 이토록 크게 상했으니, 지금 당장 천하삼대신의(天下三大神醫)라도 오지 않는 이상 살아날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했다. "헛! 헛! 어떻소? "이...이 악독한!!" "헛! 헛! 헛! 이 금모가 잘 조절했으니 그래도 한 시진 동안은 숨을 쉴 수 있을 것이오. 그런데, 아직까지 말씀해주실 생각이 없소?" 안면은 웃고 있는 것에 반해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을 한 금광보의 음성에 채여상은 피눈물을 쏟아내는 심정으로 용봉무서가 마차바닥의 비밀공간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비록 그 뒤에 죽음이라는 운명이 정해져있다고 하더라도, 두 아이의 어미로서 자식들이 저 인면수심의 마귀에게 더욱 큰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5 00:24:17 고친날 2005-06-05 00:24:17 읽은수 12711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6.생사가판(生死可判).(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호위무사들이 채여상이 말한 곳에서 하나의 서책을 찾아오자 그 내용을 확인한 금광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큰 손해를 보면서까지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헛! 헛! 편안히 보내드린 뒤, 사체는 마차와 함께 태우게." 금광보의 명령에 따라 호위무사들이 검을 들고 다가서는 것을 느낀 채여상은 두 아이들을 껴안은 팔에 힘을 주며 눈을 내려감았다. '부디 당신만이라도 무사히 남아 이 원한을 갚아주시길...' 이십년도 넘는 세월을 함께해온 남편을 생각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그녀를 향해 하나의 검이 내려쳐지기 직전,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한줄기 음성이 있었다. "그만." 이미 한 번 들어본 적 있는, 그러나 아무리 들어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을 것만 같은 음성에 그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모았다. 반 시진쯤 전에 객잔에서 나갔던 바로 그 흑의사내가 하나의 그늘 아래 조용히 서서 그들을 마주보고 있었다. "헛! 헛! 귀하께서는 이 금모의 행사를 어디까지 보셨소이까?" "모두." 금광모의 안면이 순간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치밀한 계획까지 짜가며 성공시킨 음모인데, 범인도 아닌 사파의 고수로 추정되는 이에게 그것을 발각 당했으니 자칫 잘못했다가는 대사를 그르칠 꼴이다. 그 순간, 푹 꺾여져있던 채여상의 고개가 번쩍 쳐들려지며 그녀의 입에서 처절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대협! 부디 이 일을 교림에 알려...!" "헛!"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여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날카로운 고함에 놀라 급히 아혈과 마혈을 점한 금광보는 내심 식은땀을 흘리며 흑의사내를 주시했다. 강자지존을 숭배하는 정통의 사파인 중에는 가끔 아녀자나 아이에 대해서는 협객보다 더욱 협객다운 이도 있다. 흑의사내도 그런 이에 속하여 채여상의 청대로 이 일을 교림에 알린다면 그로써는 횡액을 면하기가 힘드니, 심상치 않은 기색을 보이면 말을 써서든 힘을 써서든 어떻게든 붙잡아야 했다. "헛! 헛! 대협! 혹 이 용봉무서가 필요치는 않으시오?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내용이니, 사본이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게 또한 비급이 아니겠소." 풍운검록과 버금가는 절정의 비급을 미끼로 삼았으니, 무인이라면 마음이 동하지 않을 리가 없다. 특히 강자지존을 추구하는 사파인이라면 더더욱. 다행스럽게도,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내게 남을 배려해야 할 이유 따윈 없다." "헛! 헛! 헛! 현명한 선택이시외다." 흑의사내의 무심한 말에 금광보는 안도하며 짙은 미소를 지었고, 채여상은 원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사마외도란 그런 것이다. 대의니 뭐니 하는 것보다는 철저하게 자신만을 위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타인의 손해로 자신의 이득을 보는 상인지도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헛! 헛! 그럼 이 일을 정리한 뒤 함께 가십시다. 모처에 가는대로 사본을 만들어 드리리다." "필요 없다." 금광보의 얼굴에 짙은 당혹감이 떠올랐다. 또 저 말이다. 객잔에서 했을 때는 무인들과의 싸움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납득이라도 할 수 있지만, 지금은 용봉무서를 날로 먹을 수 있는 기회다. 그런데도 또 필요 없다는 말인가? "헛..! 그럼 금전으로 드리길 바라시오? 이 금모, 자랑은 아니지만 재산이라면 금황선 내에서도 백손가락 안에 꼽히는 거부니 원하는 금액을 말씀만 하시오." "필요 없다." 비급도, 금전도 필요 없다고 한다. 정말이지 골치 아프다. 이 일을 알리면 교림에게 빚을 지울 수 있음에도 굳이 모른 척한다는 것은 뭔가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일 텐데, 금광보가 제공할 수 있는 가장 큰 대가 두 가지가 필요 없다며 무시당해버린 것이다. '대체 뭘 원한단 말인가?' 비대한 살에 묻힌 가는 눈이 바쁘게 돌아가다가 한 순간 딱 멈춰졌다. 무공도, 돈도 바라지 않는 무인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그야 당연히 여색이 아닌가! 그는 일단 채여상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비록 나이는 40대에 접어들었다고 하지만, 무리를 하지 않고 곱게 산데다가 약간이나마 내공을 배운 덕분에 30대로 보더라도 무리가 없는 그녀다. 더구나 명가의 출신답게 현숙하고 고고한 기품이 베어있으니, 보기 드문 미녀라고 부족함이 없다. "헛! 헛! 채부인을 원하신다면 좀 곤란하긴 하지만, 이 금모가 어떻게든 손을 써보리다." 피를 토하며 고통에 떠는 아이들을 끌어안고 있던 채여상의 안색이 순식간에 백지장처럼 변했다. 두 아이에게 손을 써놓고 이제는 그 어미까지 팔아넘기려고 하다니, 이것이 진정 인간이 할 일이란 말인가? 당장이라도 혀를 깨물어 자결하고 싶었지만, 이미 아혈과 마혈이 점혈 당한 그녀에게는 자결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필요 없다." 비통한 심정이던 채여상과 안도하던 금광보의 얼굴이 정 반대로 변했다. 금전, 무력, 거기에 여색까지 필요 없단다. 대체 뭘 어쩌란 말인가? 금광보가 마음속으로 외친 고함을 들었음일까? 흑의사내는 천천히 묵봉을 들어 길가에 틀어박혀있는 사두마차를 가리키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저 마차를 내놔라." "...헛, 헛...저 마차를...말이오?" 굳이 입을 열지 않고 고개만을 미미하게 끄덕여 확인을 표한 흑의사내를 보며 금광보는 혼란에 혼란을 거듭했다. 겨우 저 사두마차 한 대가 절세비급이나 막대한 거금, 절색의 미녀보다 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단 말인가? 대체 저 사두마차가 뭐기에? 그의 짙은 의심이 담긴 눈초리가 흑의사내와 마차 사이를 헤매다가 순간 채여상을 향했다. 마차의 주인인 강씨 일가라면 그래도 뭔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녀의 넋이 나간 눈에는 오히려 그 자신보다 더욱 짙은 의문만이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이해할 수 없군, 이해할 수 없어.' 무림삼괴를 무림사괴로 바꿔야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던 금광보는 문뜩 그를 이대로 보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애초부터 곱게 놔둘 생각도 없었지만, 저 괴이한 행태를 보자니 지금당장 마차를 타고 교림으로 가 이 일을 모조리 소문내더라도 이상할 것 없을 듯만 싶다. "헛! 헛! 마차 따위가 어찌 대수겠소? 내 얼마든지 내드리리다." [기회를 틈타 기습해라.] 두 호위무사가 흠칫 몸을 떨고는 반 토막 난 검의 손잡이를 쥐자 금광보는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를 지었다. 두 호위무사의 기습이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마 둘 다 일격에 흑의사내에 의해 명이 끊길 것이다. 그 일격으로 흑의사내의 무공을 파악하고, 금광보 자신이 공격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으면 충분하다. 그러기 위해 있는 호위무사가 아닌가? "헛! 헛! 그럼 어서 마차를 가지시오." 금광보의 권유에 흑의사내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차는 그의 뒤쪽에 있었기에, 흑의사내가 마차로 가고자 한다면 호위무사의 곁을 지나가야만 한다. 특별히 경계심을 가지고 있다면 빙 돌아 마차로 갔을 텐데, 흑의사내의 걸음은 정확히 마차와 그들 사이를 향했다. 두 호위무사는 반 토막 난 검의 길이를 생각해 흑의사내가 가까이 접근하기를 기다렸고, 금광보는 두 호위무사가 흑의사내를 기습하기만을 기다리며 암암리에 내력을 끌어 모았다. '삼보. 이보. 일보...' 거리를 재던 두 호위무사는 미처 준비해둔 발검술을 펼치지 못했다. 흑의괴인이 검의 거리로부터 정확히 일보 밖에서 걸음을 멈췄기 때문이다. "헛! 헛! 왜 그러시오?" 호위무사들 못지않게 당황한 심정을 상인 특유의 노련함으로 감춘 금광보는 시치미를 뚝 때고 진정 의아한 듯 물었다. "마차의 대가는 치른다." "헛! 헛! 헛! 그 대가는 오늘의 비밀이면 충분..." "세 개의 목숨으로." 파박!! 금광보는 채여상을 붙잡고 진기를 사용해 뒤로 몸을 날렸다. 단 한 순간이지만, 약간의 음산함만을 제외하고는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던 흑의사내로부터 무시무시한 위험이 감지됐다. 그러나 금광보와 같은 절정고수가 아니었던 두 호위무사는 금광보처럼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고, 그 대가는 참혹했다. 콰드득! 그들의 주변에 있던 한 그루의 커다란 나무에서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연달아 쏟아져 나온 순간, 하나의 거대한 그림자가 나무로부터 높이 튀어나와 두 호위무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받아라---아!!!" 우렁찬 고함과 함께 햇빛을 받아 번뜩이는 대도(大刀)를 본 두 호위무사는 다급히 보법을 펼쳐 신속하게 몸을 피했다. 공중에서 펼칠 수 있는 움직임에는 한계가 있기에 그들의 회피는 충분한 효과를 발휘할 듯싶었지만, 나무에서 뛰어든 거한은 놀랍게도 허공에서 대도를 휘둘러 균형을 비틀음으로써 떨어지는 방향을 바꿔버렸다. 하필이면 거한의 변경된 낙하지점이 되어버린 호위무사는 더 이상 보법을 펼쳐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반 토막 난 검에나마 모든 진기를 밀어 넣으며 방어초식인 천검금룡(千劍擒龍)을 펼쳤다. 고수의 무위에 걸맞게 반 토막의 검은 수많은 잔영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며 막대한 근력에 모든 체중까지 더해낸 거한의 도는, 검영과 함께 호위무사를 통째로 그어버렸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5 00:24:55 고친날 2005-06-05 00:24:55 읽은수 13138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6.생사가판(生死可判).(4)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쿠웅--! 챙강!! 거한이 땅에 발을 디디며 지진과 같은 진동이 터져 나오자, 반 토막의 검이 그대로 박살나 산산이 흩어지며 정수리에서부터 사타구니까지 일자로 쪼개진 호위무사의 몸이 좌우로 무너져 내렸다. "이, 이런 괴물이..." 마지막 남은 호위무사는 감히 거한을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아무리 검이 반 토막 났어도 고수급의 무위를 지닌 동료를 단번에 토막 내버린 괴물을 대체 어떻게 상대하란 말인가? 일단 물러서려던 그는 순간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머리에서는 계속 몸을 움직이고자 하는데, 기이하게도 다리가 돌덩이처럼 굳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단지 다리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손을 비롯한 팔과 어깨는 물론이고, 머리와 혀, 심지어 눈동자마저 굳어져버렸다. 당황한 호위무사는 몸을 움직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진기를 움직여 봤지만, 진기가 흐르면 흐를수록 몸의 경직은 더더욱 굳어질 뿐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본인은 호의를 베풀었거늘 이렇게 배반하다니!" 역 기습에 의해 한 오히려 한 명의 호위무사가 죽고, 다른 한 명도 제압당해버리자 금광보는 의도적인 노성을 내질렀다. 이럴 때는 기습할 것을 상대가 먼저 알았다고 하더라도 자기는 안 그랬다고 철저하게 우기는 것이 요령이다. 그러나, 흑의사내의 대답은 금광보로써는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돼지 따위의 호의를 받아본 적은 없다." 모욕을 가볍게 받아넘기는 것 정도는 이미 옛날에 터득한 만큼, 그 어떠한 모욕을 받더라도 부동심을 지킬 자신이 있던 금광보다. 그런 그로써도 진정 이런 모욕은 처음이었다. 조금의 감정도 섞이지 않고 단지 명백한 사실을 말하는 듯한 음성은, 금광보 자신조차 진정 자신이 돼지였는가 하는 의심마저 들게 할 정도로 확고부동했다. "허, 헛! 그럼 마차를 달라고 한 것은 그럼 무엇이오?" 금광보가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묻자 흑의사내는 대답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는 듯 침묵을 지켰고, 그는 잠시 뒤에야 그 답을 깨달았다. 저 마차는 애초부터 그의 것이 아니라 강씨 일가의 소유다. 그러니 흑의사내의 말은 그가 아니라 강씨 일가에게 한 것이다. "나를 속였구나!!" 자신이 어처구니없게 속아버린 것을 깨달은 금광보는 전의 의도적인 노성이 아닌 진짜 노성을 토해냈다. 차라리 무공에서 패배한다면 웃어넘길 수 있지만, 거짓말에 당한 것은 그에게 있어 크나큰 수치였다. 흑의사내는 그의 노성을 깨끗하게 무시하며 거한에게 무심히 명령을 내렸다. "죽여라." "알겠...습니다, 대형!" 흑의사내의 명령을 받은 거한이 쿵쿵거리며 다가오는 것을 본 금광보의 몸이 흠칫 떨렸다. 객잔에서 제인상을 몰아붙이던 실력이나 호위무사를 일격에 쪼개버린 실력을 볼 때 거한은 적어도 일류고수다. 멀쩡한 상태라면 가지고 놀 수 있는 수준의 상대지만, 자홍미화를 물리치기 위해 진기를 12성까지 끌어올려 강기를 사용한 직후인 만큼 이제는 8성의 내력을 사용하는 것이 한계다. 더구나 저 거한의 뒤에는 흑의사내까지 있으니, 무력으로 싸우는 것은 승산이 없다. "멈추시오! 만약 더 다가오면 채부인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소." 채여상의 목을 틀어쥔 금광보의 위협에 거한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되물었다. "그...래서?" "다가오면 죽이겠다는 소리요." "그런...데?" "채, 채부인을 살리고 싶다면 이만 물러나라는 거요!"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금광보를 바라보던 거한은 아무래도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뒤에 있던 흑의사내를 향해 물음을 던졌다. "대형, 저...계집을 살려야 합니까?" 당연히 흑의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저 무식한 거한 놈을 말릴 줄 알았던 금광보는 자신의 예상과 딴판으로 살짝 가로저어지는 고개를 보며 입을 쩌억 벌렸다. "지, 진정 채부인을 죽일 셈이오?" 강씨 일가를 위해 이 일에 나섰으면 채부인이 죽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금광보의 생각이자 확신이고 희망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강씨일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마차의 대가는 세 개의 목숨. 나머지는 내 알바가 아니다." 그의 무심한 대답을 들은 거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음험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금광보로써는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저런 놈들에 의해 자신의 계획을 무너트린 하늘을 원망하고 싶을 정도였다. 저놈들은 마차의 대가를 빌미로 자신을 죽이고 용봉무서를 뺏어가려는 극악무도한 사파의 마두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용봉무서를 품에 안고 죽는다면 그 원통함이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채부인, 세 개의 목숨 중 하나를 그대의 목숨으로 채우시오. 아이들은 이미 늦었지만 그대는 남편을 생각해서라도 살아야 할 것 아니오?" 금광보가 마지막에 마지막으로 낸 방법은 도박이었다. 무림삼괴 못지않은 놈들의 행태를 볼 때, 채여상이 그를 죽이는 대신 자신을 살려달라고 하면 인질이 통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금광보는 자식을 잃은 어미의 한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었다. "대협! 저는 죽어도 좋으니 이 악랄한 놈만은 반드시, 반드시 죽여주십시오!" 아혈을 풀자마자 채여상이 토해낸 독기어린 고함에 기겁한 금광보는 다시 급히 아혈을 점했지만, 이미 그녀의 말은 다 흘러나온 뒤였다. 마지막 도박마저 시작도 하기 전에 박살이 나버린 것이다. "크흐흐...내 그 소원은...확실히 들어주지." "이이...좋다, 이놈! 덤벼라!!" 인질로써의 가치가 전무해져 쓸데없는 짐 덩이가 돼버린 채여상을 땅에 내던진 금광보는 황금주판을 들고 거한을 노려보았다. 일단 이놈에게 중상을 입혀 쓰러트리면 흑의사내도 거한의 상세를 살펴야 할 테니, 그 기회를 틈타 충분히 도주할 수 있다. 물론 이놈이라고 만만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제인상을 상대할 때나 호위무사를 일도양단 할 때나 내력을 사용하는 기미는 없었다. 또한 객잔에서 화살을 맨몸으로 튕겨낸 것을 볼 때, 기껏해야 내공도 익히지 못하고 타고난 신력에 외공만을 익힌 놈이다. 적수삼전(赤手三殿) 중 금강전(金剛殿)의 외공이라면 모를까, 그 외의 외공이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육신갑(肉身甲)만 이뤄도 대성했다고 떵떵거리는 수준이 아닌가? "받아라!!" 부웅! 거한이 땅을 박차고 달려들며 대도를 휘두르자 금광보는 황금주판으로 도를 옆으로 비껴내며 다른 한 손을 거한의 배를 향해 내뻗었다. 이미 검기상인(劍氣傷人)의 경지에 오른 그의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은 아주 잠시의 접촉만으로 능히 상대의 내장과 혈맥을 으스러트릴 수 있었다. 그러한 금광보의 의도를 눈치 챈 듯, 거한의 대응은 재빨랐다. 비껴진 도에서 손을 놓아버리고 그 대신 손으로 금광보의 머리통을 후려친 것이다. 특별히 초식이라고 할 것도 없는 막무가내의 공격이었지만, 거한의 괴력이 심상치 않은 것을 눈여겨보고 있던 금광보는 감히 경시치 못하고 황금주판으로 그 손을 막았다. 카가강! 진기가 주입된 황금주판에서 마치 칼날이 긁히는 듯한 괴성이 흘러나오자 금광보는 급히 몸을 빼고 황금주판과 거한의 손을 번갈아 살폈다. 거한의 손에서 어느새 길고 날카롭게 뻗어 나온 손톱 끝이 황금빛으로 누렇게 물들어 있었고, 그의 독문병기인 황금주판은 몇 개의 주판알이 심하게 긁혀 당장이라도 떨어져 나갈 듯 너덜너덜해졌다. "크하하! 내 철랑조(鐵狼爪)가...어떠냐!" '기공(奇功)인가? 아니, 기병(奇兵)인가?' 거한의 철랑조가 묘조(猫爪)와 비슷한 기병인지 혈응전(血鷹殿)에나 전해진다는 손톱을 늘렸다 줄였다 하는 기공인지 잠시 헷갈려하던 금광보는 곧 잡념을 떨쳤다. 기공이든 기병이든, 일단 중요한 것은 저 늑대의 발톱과 같은 손톱을 휘둘러오는 거한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까다로운 상대라는 사실이다. 손을 휘두르는 동작이 마치 호랑이와 같은 것이 호권(虎拳) 비슷한 무공이라도 익힌 듯싶은데, 만약 저 철랑조에 할퀴어진다면 아무리 진기로 보호되는 몸이라도 통째로 뜯겨나가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래봤자 이 놈은 외가고수일 뿐이다!' 내가중수법을 포기하고 급격히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린 금광보는 황금주판을 뒤흔들어 무형의 날카로운 경력을 쏟아냈다. 거한은 무형의 경력을 눈치 챈 듯 두 팔로 급소를 가리며 급히 몸을 웅크렸지만, 두터운 바위조차 관통해버리는 검기상인 수준의 경력 앞에서 그런 것이 소용 있을 리가 없었다. 파바밧! "헛! 헛! 곰 같은 놈의 최후로고!" 거한의 옷 곳곳이 터져 나오며 핏줄기가 치솟는 것을 본 금광보는 겨우 여유를 되찾고 힐끔 흑의사내를 살폈다. 이제 흑의사내의 반응에 따라 몸을 피하면 된다. 헌데, 분명 경력에 의해 내장이 모조리 관통 당했을 거한의 몸이 서서히 펴지며 험상궂은 얼굴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놀랬잖...아, 이 새끼야!!"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5 16:29:51 고친날 2005-06-05 16:29:51 읽은수 12879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6.생사가판(生死可判).(5)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그 경력을 맨몸으로 받고도 하는 말이 고작 놀랬다고? 이건 결단코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다. 두 눈을 부릅뜨고 거한을 주시하던 금광보는 곧 거한의 상세가 그리 깊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핏줄기가 치솟은 것은 경력의 충격이 남아있던 한 순간 뿐, 울퉁불퉁한 근육 사이로 묻힌 상처에서는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는다. '기공(氣功)?!' 도검불침(刀劍不侵)의 철포삼(鐵布衫), 조문무체(照門無體)의 육신갑(肉身甲)이라면 기공(氣功)은 외기순환(外氣循環)의 경지다. 인체란 특별히 내공심법을 익히지 않아도 미미하게나마 몸 밖의 외기(外氣)를 받아들이는 것과 쏟아내는 것을 함께하여 끊임없이 기운을 순환시킨다. 만약 기공의 경지에 이르러 전신의 기맥(氣脈)이 더욱 넓고 탄탄해지면 그 자연스러운 순환으로 흐르는 기운이 양이 급속히 증가하는데, 그것은 내가고수의 내공처럼 몸을 보호하고 신체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과 같은 효과를 지닌다. 그것도 내공과 같이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숨쉬듯 자연스럽게 유지되는 것으로, 만약 기공(氣功)의 경지에 이른 자가 내공심법을 익혀 내공을 쌓고자 한다면 외기의 순환이 내기의 순환을 도와 무려 몇 배의 효과를 볼 수 있다. 어째든 그렇게 외기순환(外氣循環)을 이루면 항상 진기로 몸을 보호하는 것과 같아 검기(劍氣)에도 신체가 쉽게 상하지 않고, 전신 혈맥과 내장까지 강철과 같이 튼튼해져 내가중수법이 통하지 않는 완전한 철인이 된다. 그러니 기공을 이룬 외공고수는 실력에서 절정고수와 준하고, 어떤 면에서는 그마저도 능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뒈져라--!" 부웅-! 거한이 기공의 고수였다는 사실에 경악했던 금광보는 본능적으로 보법을 밟아 철랑조를 피하며 그와의 거리를 쭉쭉 벌렸다. 저런 조법을 사용하는 기공의 고수라면 근접전을 펼치기보다 거리를 두고 경력으로 공격하는 게 최선이다. 그러나 거한은 급히 물러나는 그를 굳이 뒤쫓지 않았다. "내 사린비(蛇鱗匕)도...받아봐라!" 파앗! 그저 팔을 내뻗었을 뿐인데도 소매로부터 하나의 빛줄기처럼 쏟아져 나온 은빛 비수를 가까스로 피해낸 금광보는 갈수록 첩첩산중임을 느꼈다. 기공의 경지에 강맹한 조법에 모자라, 이제는 일류급의 비도술이다. 경력을 사용하겠답시고 진기를 끌어 모으다가는 비수를 피할 수 없다. 나아가기고 힘들고 물러서기도 힘든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하고 보니, 내력이 정상이었다고 해도 과연 이 괴물 같은 외가고수를 이길 수 있었을지 감히 자신이 서지 않는다. '일격필살의 공격이 필요하건만...!' 강기라면 필히 기공조차 뚫어버릴 수 있겠지만, 내력이 받쳐주지 않으니 결국은 최대한 집중한 경력을 연달아 날려 사혈을 노려보는 수밖에 없다. "오냐, 이놈. 누가 먼저 죽을지 한 번 해보자!!" "좋...지!!" 이를 빠득 간 그는 황금주판을 촤르륵 흔들며 연달아 경력을 쏟아냈고, 거한은 히죽 웃으며 철랑조를 휘둘러 경력을 찢고 분쇄하며 앞을 향해 조금씩 전진해갔다. 금광보의 내공이 먼저 떨어지든지, 아니면 철방의 급소가 먼저 파괴될지의 소모전이 시작되자 그는 당분간 결판이 나지 않을 싸움에서 고개를 돌려 세 명의 강씨 일가를 무심하게 살폈다. 두 아이는 내장과 혈맥이 일부 파열되어 죽어가며 고통에 몸부림치고, 채여상은 점혈 된 가운데도 두 눈을 부릅뜨고 금광보와 철방과의 혈전을 지켜보고 있다. 어차피 그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 그가 굳이 이 일에 나선 것은 금광보가 저들의 시체를 마차와 함께 불태우려 했기 때문이다. 금광보와 거래해 침묵을 지키는 것 보다는 채여상과 거래해 금광보를 죽이는 쪽이 후환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제 금광보만 죽이면 거래는 끝나고, 마차의 정당한 소유권을 얻는다. 그로써 그가 더 이상 이 일에 상관할 이유는 없어진다. '아직 이용가치가 남아있다.' 채여상을 살피던 그는 생각을 조금 수정했다. 분노, 슬픔, 증오 등의 음적인 감정이 몰아치는 가운데도 그에 물들지 않고 아직 순결함을 유지하고 있는 그녀의 영혼은, 분명 이용가지가 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녀에게 다가간 그는 기의 흐름이 변질된 혈도를 묵봉 끝으로 깊이 눌렀다. 묵봉 자체가 지닌 힘이 기의 흐름에 충격을 주자, 변질된 흐름이 바르게 되며 혈도가 풀렸다. "말 할 수 있나." "네...네, 대협." 혈도가 풀린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금광보만을 노려보던 채연상은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그것을 자각하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악적을 물리치는데 도움을 주신 것, 진정 감사합니다." 그녀의 말에서 느껴지는 것은 짙은 한(恨). 더럽혀지거나 비틀려지지 않은 순수한 한은 오히려 묻으면 묻는 대로, 풀면 푸는 대로 영적인 성장을 가져다주고, 만약 한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영적인 정체로 이어져 성장은커녕 퇴보하기까지 한다. 지금 채여상의 영혼은 한으로 가득해서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성장할 수도, 망가질 수도 있는 상태다. "아이들을 살려주지." 그녀의 두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크나큰 놀람의 경악. 믿을 수 없는 불신. 아이들에 대한 애정. 도저히 버릴 수 없는 희망이 그녀의 눈동자에서 교차하는 가운데, 그는 무심하게 음성을 이었다. "대신, 너의 10년 치 수명을 받겠다." 터무니없다. 너무나 터무니없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욱 희망이 커진다. "드...드리겠습니다. 10년이 20년이라도 드릴 테니, 부디 저희 아이들을 살려주십시오!" 그는 자신의 앞에 무릎 꿇은 채연상을, 정확히는 그녀의 영혼을 보았다. 음적인 감정에 감싸여있던 영혼이 희망으로 인해 음적인 감정을 떨치고, 한을 씻어내고 있다. 비록 한의 승화보다는 못하지만, 한을 지니고 있음에도 맑게 빛나는 영혼은 수고할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계약은, 성립됐다." 나지막한 음성을 흘린 그는 몸을 돌려 중독으로 인해 몸이 굳어진 호위무사에게 다가갔다. 호위무사에게 쓴 독은 해독제를 쓰지 않으면 이대로 심장까지 굳어져 죽음에 이르지만, 양을 맞췄기 때문에 몇 각 정도의 여유가 있다. 그는 소매에서 꺼낸 푸른 청옥(靑玉)을 손에 쥐었다. 철방을 만들 때 사용한 자수정에 비하면 부족한 점이 많지만, 그래도 주술적 가공을 거쳐 적게나마 스스로 귀기를 비축할 수 있는 귀물이다. 청옥의 귀기를 일깨운 그는 자신의 귀기를 사용하지 않고 그 귀기를 묵봉을 통해 증폭시키며 주문을 외웠다. 서늘한 청옥의 귀기는 지팡이를 통해 호위무사의 머리를 통해 빨려 들어갔고, 그 안에서 주문의 인도에 따라 호위무사의 영혼을 자극했다. '금...광보, 금광보...! 내 가족을, 내 가족을 볼모로 잡고 있는 악독한 놈...!' 호위무사의 영혼 깊이 숨겨져 있던 증오와 분노가 일어났다. 한이 더럽혀진 탁한 영혼의 가치는 낮다. 그러나 증오와 분노를 위해서라면 그 자신마저 파멸시키는 것이 바로 더럽혀지고 비틀려진 한이다. 귀기는 그 증오와 분노를 증폭시켰다. 호위무사의 증폭된 원념은 그의 주문과 합쳐져 세상을 떠돌던 원령을 이끌어냈다. 호위무사의 지독한 원념과 청옥의 써늘한 음기를 머금은 원령은 금광보를 향해 날아가 그의 몸에 스며들었다. "헛..이, 이 무슨!" 갑자기 오싹한 한기가 몸을 파고드는 것과 함께 전신이 차갑게 식고 움직임이 느려지자 금광보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도 모르게 음한지공에라도 당했단 말인가? 빠른 보법으로 철방을 피하며 경력을 쏟아내고 있던 금광보의 움직임이 느려지자 철방과의 거리는 빠르게 줄어들었고, 그렇지 않아도 막대한 내공의 소모에 땀을 비 오듯 쏟아내던 금광보는 한기를 몰아내기 위해 전신에 진기를 순환시켰다. 호위무사의 독한 원념을 머금었던 만큼 원령 또한 순순히 밀려나지 않고 그의 몸을 차고 느리게 만들던 청옥의 음기를 전력으로 운용해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으하하하하!!" 결국 금광보를 따라잡은 철방은 금광보의 경력에 의해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상태로도 일대광소를 터트리며 철랑조를 휘둘러댔다. 몸놀림이 둔해진 금광보는 야생의 맹수와도 같이 변칙적이고 사나운 철랑조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해 비대하던 살덩이의 곳곳이 뜯겨졌다. "크으윽...!" 생살이 뜯겨나가는 고통에 이를 악문 금광보는 결국 무리해서까지 내력을 10성까지 끌어올렸다. 내력을 강제적으로 끌어올린 충격으로 얕지 않은 내상을 입기는 했지만, 내상 걱정하다가는 저 철랑조에 그대로 머리가 뜯겨나갈 판이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5 16:31:01 고친날 2005-06-05 16:31:01 읽은수 12867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6.생사가판(生死可判).(6)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10성의 공력은 내상을 각오할 만큼의 가치가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체내를 맴돌던 음한지기가 진기의 순환을 견디지 못해 배출됐고, 극도로 집중된 진기가 황금주판의 주판알을 날카롭게 회전시키며 철방의 철랑조를 튕겨냈다. "이놈이...!" 철랑조가 튕겨나가며 빈틈이 드러나자 철방은 급히 몸을 뒤로 물리려고 했지만, 금광보는 미끄러지듯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황금주판을 그대로 가슴에 밀어 넣었다. 촤아아아악!! 경력이 실린 주판알은 그대로 철방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냈다. 이대로 심장까지 경력이 파고들면 아무리 기공의 고수라도 죽음을 면치 못한다. 부웅! 사납게 올려쳐진 무릎을 팔꿈치로 쳐내고 무식하게 내려쳐진 박치기를 가까스로 피한 금광보는 뒤로 훌쩍 몸을 날렸다. 심장까지 찢어내지는 못했지만 가슴이 거의 고깃덩어리가 되어 뼈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 중상을 입혔다. 설사 죽지 않더라도 거동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자, 반응을 보여라. 어서!' 흑의사내를 힐끔힐끔 살피며 이번에야말로 그가 움직이기는 것을 기다리던 금광보는 한 순간 거한의 양팔에서 우수수 쏟아져 나온 여섯 자루의 비수에 기겁하며 그것을 막아냈다. "아직...이다!" 두 눈에서 붉은 혈광을 번뜩인 거한의 다리가 한껏 웅크렸다가 펴지며, 그의 몸이 포탄처럼 금광보를 향해 쏘아져왔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너무나도 빠른 속도에 금광보는 전처럼 완벽하게 몸을 빼지 못하고 대신 10성의 진기가 집중된 황금주판을 앞으로 내뻗었다. 카가강-! 주판알이 고속으로 회전하며 검기와도 같이 날카로운 경력을 뿜어내는 황금주판과 사이한 사술로 만들어져 명검과 같이 단단하고 예리한 철랑조는 서로 충돌하며 사방으로 불똥을 튕겨댔다. 불똥이 멈췄을 때, 황금주판은 몇 개의 주판알이 박살나고 철랑조에는 가는 금이 생겼다. 이 둘의 상태를 볼 때는 무승부에 가깝다. 그러나 금광보의 일그러진 얼굴과, 음산한 미소를 짓고 있는 철방의 얼굴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명확히 드러났다. "커억!" 무리하게 10성의 내력을 끌어 사용하던 도중, 허리에 박힌 비수에 의해 기맥이 상해 진기가 역류해버린 금광보는 입에서 한가득 선혈을 토해냈다. 막대한 진기가 역류해 충돌을 일으킨 바람에 심각한 내상을 입은 것이다. 당장 운기요상을 하지 않는다면 이대로 폭주하는 진기에 의해 죽거나, 적어도 심각한 주화입마에 빠지게 된다. "크..흐흐...머리통을 뽀개...주마." 허공 높이 쳐들려지는 철방의 주먹은 절망, 그 자체였다. 아무리 진기로 몸을 보호하더라도 호신강기(護身剛氣)가 아닌 이상 저 주먹을 맞고 온전하기는 힘들다. 하물며 역류에 의해 일점의 진기도 사용할 수 없는 지금과 같은 상태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명백한 즉사다. "생포해라." 내려쳐지던 주먹이 멈칫하며 철방의 안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제인상에 이어 두 번째다. 본능적으로 산자를 증오하는 망자에 있어서 마악 죽이려던 산자를 살려줘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기분 더러운 일인데, 그게 벌써 두 번째인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대형의 명인 것을. 이미 죽어 겁나는 것이 없기에 천하제일고수의 말이라도 코웃음 칠 수 있는 그지만, 대형의 말 만큼은 그에게 있어 절대적인 법이요, 진리다. 철방이 불안감을 버리지 못하면서도 눈에 띄게 안도하는 기새인 금광보의 혈도를 점혈 해 질질 끌고 오자 그는 손을 미미하게 까딱여 호위무사의 옆에 내려놓도록 지시했다. 마지막 남은 호위무사의 상태 또한 금광보 못지않게 심각했다. 딱딱하게 굳는 몸 위로는 새하얀 서리가 내려붙고, 손과 발 등에서부터 일어난 동상이 굳은 몸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금광보가 원령을 진기로 물리치자 저주가 역류해 갑절의 위력으로 호위무사를 덮쳤던 것이다. 타인의 원한을 자극해 목표를 저주토록 하는 주술은 저주술(詛呪術) 중에서도 가장 사악한 것에 속한다. 저주술의 반작용이나 인과적인 업보까지 모조리 그 타인에게 떠넘기기 때문이다. 물론 그로서는 호위무사가 얼어 죽든 억울하게 업보를 뒤집어쓰든 알바 아니지만, 금광보에게 그것은 매우 중요했다. '절정의 음공(陰功)에 당했구나! 그렇다면 아까 그 음한지기도 이자의 수작이란 말인가?' 그를 음공의 고수로 판단한 금광보의 눈이 바쁘게 돌아갔다. 대체 이 음공의 고수가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판단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것은 쓸데없는 헛수고에 불과했다. 그 이유인 즉, 그는 이미 금광보와 호위무사로부터 받을 것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푸욱! 박쥐의 뼛가루와 피를 뭉쳐만든 단환을 삼킨 그는 묵봉을 땅에 박아놓고 주문과 함께 귀기를 끌어올렸다. 몸을 위해 가능한 사용하지 않고자 했던 사령마법이지만, 요양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영문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막대한 귀기는 묵봉에서 증폭된 뒤 주문에 의해 가공되어 잠시 동안이나마 그의 두 손에 특수한 힘을 부여했다. 사아아... 묵봉을 쥐고 있던 흑의사내의 손에서 아지랑이 같은 무형의 기운이 일렁거리는 것을 지켜보던 금광보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무형의 아지랑이에 점차 어두운 그림자가 스며들며, 그 주변으로 싸늘한 한기가 퍼져 나왔다. 단순히 차다고 치부하기는 힘든, 마치 죽음 그 자체와도 같은 불길함이 금광보의 본능을 자극했다. 불길함을 느낀 것은 죽어가는 아이들을 끌어안고 흑의사내가 대체 언제 아이들을 치료해줄지 초조한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채여상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흑의사내가 묵봉으로부터 두 손을 때자 자신도 모르게 아이들을 끌어안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것은 산자로써 당연히 지닐 수밖에 없는 것,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자극하고 있었다. "아...안돼...!" 죽음의 공포를 느낀 금광보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그는 그 말을 들어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의 두 손이 조금의 지체도 없이 호위무사의 목과 금광보의 입을 틀어쥔 순간, 금광보의 턱이 떠억 벌어지며 그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부릅떠졌다. 무형의 아지랑이가 손을 통해 입으로 파고들어가자 후덕하고 푸짐한 인상을 만들어주던 금광보의 통통한 볼 살이 급격히 줄어들며 광대뼈가 드러났다. 그러한 현상은 점차 그의 전신으로 퍼져나갔고, 결국에는 피를 비롯한 모든 체액까지 빨려나가고 뼈와 거죽만 남아 마치 말라비틀어진 고목과 같이 변했다. '탁하긴 하지만, 양은 충분하군.' 금광보와 호위무사로부터 뱀파이어릭 터치(Vampireric Touch)로 생기를 빨아들이며 그 질과 양을 분석하던 그는 마침내 단 한 방울의 생기도 남지 않은 두 개의 시체를 그대로 놓아버렸다. 시체란 원래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니지만, 그의 손에서 풀려난 두 시체는 자신들만은 예외라고 주장하듯 솜 인형과 같이 조용히 무너져 내렸다. 그 모습을 본 철방은 두 눈을 왕방울 만하게 떴고, 채여상은 심장이 멈추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흐...흡성대법(吸星大法)...!' 무인은 아니지만 무림에 대한 견문을 적게나마 가지고 있던 그녀는 저 저주받을 마공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천하사대마공(天下四大魔功) 중 하나로 타인의 내공을 흡수하는 공능을 지니고 있지만, 이종진기의 충돌로 인해 주화입마를 입고 심마(心魔)에 빠져 광마(狂魔)가 돼버리는 마공(魔功) 흡성대법(吸星大法)! 주술삼방(呪術三幇) 중 배교(拜敎)의 호교무공(護敎武功)으로 전해져오다가 100년 전의 호교법사이던 흡혈광마(吸血狂魔) 강비호(疆悲號)의 주화입마로 인해 배교 전력의 3할과 함께 영영 실전되었다는 전설상의 무공이 그녀의 눈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넋이 나간 채 흑의사내를 바라보던 채여상은 그가 몸을 놀려 자신과 두 아이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겨오자 흠칫 몸을 떨었지만, 그녀에게 선택의 여지란 없었다. 십년의 수명을 바친다 해도, 그 상대가 사파의 잔혹하기 그지없는 마두라고 해도 상관없다. 아이들만 살릴 수 있으면 상대가 마두가 아니라 마귀라도, 수명이 아니라 영혼이라도 바칠 수 있다. "내려라." 도저히 인간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무심한 음성에 채여상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떨리는 손으로 두 아이를 땅에 내려놓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천천히 다가온 그가 동시에 두 아이의 머리를 잡자 금광보와 호위무사의 모습을 떠올리고 비명을 내지를 뻔했지만, 그의 뒤에 있던 철방이 조용히 하라는 듯한 손짓을 보내준 덕분에 가까스로 입을 틀어막을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두 아이들의 몸이 말라비틀어지는 상상조차 두려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두 아이의 머리를 잡은 채로 가만히 침묵을 유지했고, 그녀는 초조한 심정으로 두 아이를 지켜보았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5 16:34:40 고친날 2005-06-05 16:34:40 읽은수 13882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6.생사가판(生死可判).(7)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불사(不死)의 비술(秘術)을 타인에게 사용하는 데에는 갑절의 어려움이 따른다. 부상의 정도와 남은 생기의 양, 비술에 대한 적응력 등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기 때문에 재생(再生)의 비술(秘術)을 사용하는 것이 한계다. 우선 귀기를 조금씩 나눠 흘려보낸다. 죽음 자를 되살리기에는 모자란 양이지만, 느리게나마 내장을 재생시키기에는 충분하다. 찢어지고 터진 내장과 혈맥이 아물고 이어지며 쓸데없이 흘러나간 피가 귀기에 흡수된다. 내상이 거의 치유되자 귀기를 거두고 대신 두 인간으로부터 빨아들인 생기를 밀어 넣는다. 음적인 귀기의 작용과 급격한 재생으로 인해 뒤흔들리며 약해지고 있던 본연의 생기를 대신하고, 그 본연의 생기는 밀려나 갈 곳을 잃고 그의 손을 통해 그에게 들어온다. 그렇게 생기의 순환을 거쳐 금광보와 호위무사의 탁하되 많은 양의 진기는 두 아이의 몸에 스며들고, 두 아이의 적지만 맑고 활력 있는 생기는 그의 생기에 흡수된다. 재생의 비술에 이어 귀기의 반작용을 이용해 생기를 움직였기에 그렇지 않아도 약하던 그의 생기는 더욱 약해졌다. 그러나 아직 성장가능성이 충분한 아이들의 활기는 생기의 순수한 회복력을 더욱 높여준다. '장기적으로는 이득이군.' 당장은 생기가 줄었어도 회복에 필요한 요양기간이 몇 달은 단축됐으니, 단기적으로는 손해지만 장기적으로는 충분한 이득을 본 셈이다. 맑은 생기를 잃고 양은 많되 탁한 생기를 받아들인 아이들의 성장이 불균형해지더라도, 그가 알 바 아니다. 계약의 조건은 어디까지나 '살리는' 것이니까. "아, 아이들은...?" 그가 두 아이로부터 손을 때고 몸을 일으키자 채여상은 참지 못하고 바로 아이들의 안부를 물었다. 무슨 치료를 한 건지, 치료를 시작이나 한 것인지 알지도 못 한 채 초조하게 지켜보고만 있던 그녀로써는 도저히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계약은 이행됐다." 여전히 무심하기 그지없는, 그러나 청천벽력의 뇌성보다 크고 대라신선의 온성보다 따듯하게 들리는 음성에 채여상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서둘러 아이들을 살펴보았다. 의식을 잃고 있는 아이들이었지만, 어미인 그녀는 고른 숨소리와 안색만으로도 두 아이가 더 이상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가...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은공! 정말 감사합니다." 무릎을 꿇은 채 연신 감사의 말을 하는 채여상의 영혼은 이제 환하게 빛을 발했다. 감정의 편린과 한을 완전히 씻어냄으로써 영적으로 한 단계 성장한 영혼을 향해, 그는 천천히 한 손을 내뻗었다. "계약의 대가를 받겠다." "드려야지요, 당연히 드려야지요." 순식간에 두 개의 생명을 빼앗고, 두 개의 생명을 되살린 그의 손을 그녀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아이들이 살아나게 된 이상, 설사 금광보와 같이 뼈와 거죽만 남게 되더라도 그녀에게 후회는 없었다. 채여상의 머리를 손으로 쥔 그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사령술을 사용할 때의 사이하고 요사스러운 주문이 아니다. 감히 인간이 알아서도, 다뤄서도 안 되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미지를 간직하고 영혼을 울리는 주문. 서(書)의 비술금법(秘術禁法) 중 운명을 부수고 영혼을 가르는 영혼(靈魂)의 금법(禁法) 그 금법의 주문이 시전 되자 그의 영문(靈門)으로부터 영기(靈氣)가 흘러나와 채여상의 미간에 있는 영문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녀의 영혼을 마치 뱀과 같이 감아 돌던 영기의 줄기는 한 순간 영혼에 박혀 들어가 그녀의 영력(靈力)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단순히 육체적인 통증을 벗어나 영혼 그 자체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채여상은 비명을 쏟아내고 싶었지만, 이미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게 된 그녀는 미약한 신음마저 흘릴 수 없었다. 모든 영혼은 전전생에는 산적이었고, 전생에 농부였던 이가 현세에서는 소가, 그 환생해서는 상인이 되는 등의 윤회(輪廻)를 통해 무한한 순환을 한다. 그 영혼의 순환을 겪으며 영혼에 축적되는 바로 가장 근원적이고 순수한 영혼의 힘이 바로 영력이다. 생전 게으르게 살던 이가 죽을 때까지 하나의 작은 잔만한 영력을 쌓는다면, 평생 노력하며 살던 이는 삶에 충실했던 만큼 커다란 그릇만한, 또는 물통만한 식으로 더 많은 영력을 쌓을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생전 이뤄낸 영적인 성장이나 깨달음에 따라 커다란 연못에서 호수, 심지어 바다에 이르는 막대한 양의 영력이 쌓이기도 한다. 영력은 환생하더라도 남아 잠재력이나 수명 등에 영향을 미치며, 축적된 영력이 많을수록 더욱 고등한 종족으로 태어날 수 있다. 만약 그 영력을 완전히 일깨우게 되면 신, 또는 그에 가까운 영적 존재로 각성하여 불멸자(不滅者)의 반열에 드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기에 신(神)은 신앙(信仰)을 통해 신자(信者)들의 영력을 자신의 권능에 속한 신성력(神聖力)으로 가공함으로써 자신의 신성(神性)을 높이고, 악마(惡魔)는 계약(契約)을 통해 계약자(契約者)의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계약자의 영혼으로부터 영력을 받아 자신의 마성(魔性)을 높이는 것이다. 영혼의 금법은 바로 악마들이 계약이라는 명목 아래 영력을 강제로 뜯어내기 위해 사용하는 역천(逆天)의 법(法). 계약자의 영혼이 얼마나 망가지든지, 그로인해 업보(業報)가 쌓이든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목적만을 추구하는 악마만이 사용할 수 있는 금법 중 금법이다. 그는 그 영혼(靈魂)의 금법(禁法)을 익혔고, 지금 그것을 사용해 채여상의 영력을 받아내고 있었다. '이 정도군.' 영력을 가늠해 정확히 10년 치의 수명을 받아냄으로써 지하석부에서의 손실을 채운 그는 그녀의 이마에서 손을 땠다. "...하악!!" 숨마저도 멈춘 채 굳어 있던 채여상은 스스로의 몸을 끌어안으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마치 영혼의 일부가 그대로 떨어져나간 듯한 상실감과 고통. 단지 10년의 수명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손을 더듬어 두 아이를 끌어안고서야 어느 정도 충격에서 벗어난 채여상은 스스로 마음을 다스렸다. '단지 수명이 10년 줄어든 것뿐, 아이들의 목숨에 비하면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영력을 강제적으로 흡수당해 뒤흔들리던 영혼이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영혼의 고통보다, 10년의 수명보다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는 모성애가 다른 모든 것을 견뎌내고 영혼의 뿌리 깊은 기둥이 돼준 덕이다. "대가를 받았으니, 이로써 계약은 완수됐다." 무심한 음성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든 그녀는 두건을 눌러쓴 흑의사내를 보고 다시 한번 고개를 조아렸다. "은공의 은혜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는 죽어서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계약이었을 뿐이다." 계약은 계약일 뿐. 이미 계약이 끝난 그로써는 지금 당장 금광보가 다시 살아나 채여상과 두 아이를 죽이려고 들어도 신경 쓸 필요 없다. 더 이상 이곳에서 얻을 것이 있을지 깊이 생각해본 그는 곧 판단을 내리고 철방에게 나지막이 명령했다. "철방. 마차를 준비해라." "알겠습니다...대형!" 전신이 피투성이로 물들고 가슴이 훤히 파여진 상태로 마차를 향해 쿵쿵 다가가는 철방의 모습에 채여상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갈비뼈가 훤히 드러나는 중상이다. 아무리 무림고수라도 인간인 이상 저 정도 상처를 입으면 생명이 위태롭기 마련인데 운기요상은커녕 금창약조차 바르지 않는 것은 상리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정작 심각한 부상을 입은 본인이 저렇게 펄펄 움직여 사두마차에서 두 마리 말의 시체를 빼내고 주변에 있던 다른 말 두 마리를 채워 넣는 모습을 보자니, 뭐라고 걱정의 말을 해주기조차 민망스러울 정도다. '특수한 기공을 익힌 분인 것 같구나. 강호무림에는 기인이사가 해변의 모래알처럼 많다더니...' 두 아이들의 편안한 숨소리를 듣고 있던 그녀는 문뜩 흑의사내가 금광보의 품에서 용봉무서를 꺼내드는 것을 보고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흡성대법을 익혀 언제 어떻게 광마로 변할지 알 수 없는 그가 용봉무서까지 익히게 된다면 천하는 피로 물들 테지만, 이미 저 보물 때문에 아이들을 잃을 뻔했던 그녀로서는 훗날의 걱정보다 당장의 안도가 앞섰다. 헌데 그때, 그녀의 눈앞에 하나의 서책이 툭하고 떨어져 내렸다. 그것이 용봉무서라는 것쯤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가져가라." "은공? 어째서 은공께서 가지시지 않으시고...?" 그는 대답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설사 풍운검존(風雲劍尊)이라도 손을 때기 힘들 용봉무서를 무슨 귀찮은 종이쪼가리마냥 던져 놓은 채, 철방이 대기시켜 둔 마차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모습은 여러 가지 의미로 충격 자체였다. 철방이 마차 문을 열고, 그가 마차 안에 한 걸음을 내딛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이 미처 묻지 못했던 질문이 있음을 깨달았다. "은공! 존성대명을 알려주실 수는 없을 런지요?" 그녀의 물음에 그는 몸을 멈췄다. 예전, 호악산에서 마주했던 천무가 연상되는 물음. "내 이름은 파타시(破墮弑)." 깨트리고(破), 부서트리고(墮), 죽인다(弑). 그의 존재 자체나 다름없는 이름이기에,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문자를 부여했다. "성은, 없다." 그가 마차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자, 철방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관도 저편으로 마차를 몰아갔다. 그의 이름을 조용히 되새기는 채여상을 뒤로한 채... ============================================ 특별히 요청까지 하셔서 과하게 손좀 써봅니다. 아, 그리고 더 많은 연재량에 관해서 말씀드리자면...그쪽을 다 보셔도 그렇게 속편하지는 못하실 겁니다. 지금 그쪽 독자분들께는 염장질을 지르고 있어서 말입니다. 염장질을 겪을 각오가 되셨다면, 찾아가셔도 좋습니다. *팬아트 이벤트를 준비중입니다. 솜씨 좋은 독자분들은 미리미리 준비해두시길.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6 00:09:19 고친날 2005-06-06 00:09:19 읽은수 13366 [ 6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7.신사난측(神事難測).(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사신의 일은 난측이 심하여 미리 헤아릴 수 없으나, 그 걸음에는 항상 죽음이 따른다.-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이다. 이미 네 번의 식수와 두 번의 식량을 빼앗겼다. 몸을 움직일 힘은 남아있지 않지만, 이대로는 수분결핍이 일어난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모두가 잠들었을 때,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 목을 물어뜯고 피를 마시는 것. 그러나 일시적인 대책일 뿐이다. 힘이 있다면 그 행위가 불러일으킨 공포로 다른 이들을 지배할 수 있지만, 힘이 없는 지금으로써는 반대로 죽임을 당하게 된다. 단 며칠의 생명연장을 하기위해 그토록 발버둥쳐야 하는가? 더 이상 갈증을, 고통을 느끼는 것 보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낫다. 죽음은 그 무엇보다 평안한 안식이니까. 벌어진 입술을 통해 무언가가 흘러들어온다. 더 없이 서늘한 것, 물이다. 생각도 하기 전에 몸이 반응해서 물을 삼킨다. 아주 적은 양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마치 생명수처럼 나의 몸에 흡수되어 죽어가던 생기를 되살린다. “조금씩...입 안...적신...삼켜.” 흐릿하게 들려오는 음성. 조금씩, 입 안을 적시고 삼키라는 소린가? 그렇다. 갑자기 많은 물을 마시는 것은 오히려 좋지 않다. 이성으로 몸을 통제한다. 또 다시 흘러들어온 물을 입 안에서 천천히 굴린 뒤, 바짝 마른 목 안으로 넘겨 보낸다. 근육에 힘이 돌아온다. 청각이, 감각이 되살아나며 곁에 누군가가 있는 것이 느껴진다. “정신이 좀 들어?” 작은 체구에 아직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앳된 음성. 이 음성의 주인이 나에게 물을 준 것인가? “목...적...은...?” 갈라터진 음성. 말을 할 때마다 목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지만 물어야 한다. 한 모금의 물로 서로를 죽일 수도 있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알지도 못하는 내게 물을 준 목적을 알아야 한다. “목적이 필요해? 그럼 살아남기 위한 거라고 해줄게.” 살아남기 위해? 알 수 없다. 생존을 위해 가장 중요한 생명수를 나눠주는 것이 어째서 살아남기 위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주변을 둘러보는 듯한 기척이 느껴진다. 그러나 들리는 소리는 모두 고요한 숨소리 뿐. 지금은 한밤중이었나? 그렇다면 낮에 배급된 물을 보관해뒀다가 먹였다는 뜻.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충동적인 가벼운 행동이 아니다. 무언가 계획성이 느껴진다. “지금도 물과 식량이 부족하긴 하지만, 정말 위급해지면 그나마도 끊겨져. 그 뒤는 알지?” 그렇다. 이미 물과 식량에 대한 쟁탈이 시작됐고, 나는 그 쟁탈에서 패했다. 식수와 식량의 공급이 끊기면, 이제는 마지막 남은 식수인 피와 마지막 남은 식량인 인육을 놓고 다투게 될 것이다. 그러한 쟁탈전이 벌어지면, 나는 살아남지 못한다. 이 상대 또한 그렇다. 나를 아군으로 삼으려는가? 나쁘지 않지만, 좋지도 않다. 이미 파벌이 만들어지고 있다. 약자는 파벌에 들지 못하고, 가장 먼저 식량이 된다. “거래하지 않을래?” 거래? 해야 하는가? 이득이 된다면 한다. 그러나 손해가 된다면, 할 생각이 없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죽음의 안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같이 살아남기 위한 거래야.” 같이 살아남는다. 양쪽에게 모두 합리적이다. 그러나 대가 없는 거래란 없다. “대...가는...?” “간단해. 내가 계획을 짜서 널 살려줄 테니까, 네가 행동을 해서 날 살려줘.” 계획과 행동. 실패할 경우 주로 손해를 입는 것은 행동 쪽이지만, 내게는 계획이 없다. 그렇게 서로의 목숨을 구제한다면, 손해보다는 이득이 크다. “...하...겠...다.” “좋아. 계약은, 성립됐어.” 확실하진 않지만, 말끝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웃음기. 이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다면 그것은 강자다. 강자와의 대등한 거래는, 분명 유용하다. “그런데, 괜찮다면 네 이름을 들을 수 없을까?” 꼭 알고 싶지는 않지만, 웬만하면 알고 싶다는 듯한 말투. 거래상대의 이름을 알아두고 싶은 것인가? 내 이름은... “대형, 여기...가 산하리(山河里)입니다.” 마부석에서 들려온 우렁찬 음성에 그는 하루에 한번씩 취하는 한두 시진의 수면에서 깨어났다. ‘꿈이었군.’ 시력이 없기에 더욱 손에 잡힐 것만 같이 생생한 꿈. 그러나 절대 손에 잡히지 않는 꿈이다. “천지문은 이제 며칠 안 남았...습니다. 여기서 식...사를 하고 가시지요.” “좋다.” 나지막한 음성으로 철방의 의견을 받아들인 그는 묵봉을 쓰다듬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계약이 성립됐을 때, 그곳에는 많은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계약을 이행하고 완수할 때, 그곳에서 살아남은 것은 오직 단 두 명의 소년뿐이다. ‘그때부터로군.’ 그가 계략, 지혜, 지략이 지닌 힘을, 그것들로 짜여진 계획이 지닌 위력을 알게 된 것은 그때부터다. 강한 무력이 열 명을 죽일 수 있다면, 뛰어난 지혜와 면밀한 계획은 천 명, 만 명을 죽이고 다스릴 수 있다. 무력과 지혜는 함께 할 때 그 효과가 배가되며, 지혜가 제대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충분한 지식이 필요하다. ‘지금으로써는 양쪽 모두 반쪽에 불과하다.’ 무력은 힘을 갖추지 못했고, 지혜는 지식을 갖추지 못했다. 이러한 반쪽의 상태로 과연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그렇기에 하루라도 빨리 힘과 지식을 갖추어 무력과 지혜를 완전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니까. “야, 거지새끼! 객잔 어디 있어?” 한편 마차를 이리저리 몰며 객잔을 찾던 철방은 결국 찾다 못해 길가에서 구걸을 하고 있던 걸인에게 사납게 물었다. 전직 산적두목답게 인상만 하더라도 절정고수 뺨치는 그였기에 당연히 곧바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걸인소년의 대답은 그의 심기에 무척이나 거슬리는 것이었다. “아무리 세상인심이 각박해도 맨입으로 그런 걸 물으면 안 되시죠.” 잠시 멀뚱멀뚱 거지새끼를 바라보던 철방은 곧 그 의미를 깨닫고 눈에 혈광을 번뜩였다. 산적질 하며 사람 숱하게 죽인 그에게 있어, 거지새끼에게 구리문 한 푼이라도 주는 것보다는 이놈을 당장 쳐 죽이고 다른 놈에게 물어보는 쪽이 훨씬 합리적인 일이다. 팔뚝에 힘을 줘서 피부로부터 하나의 사린비(蛇鱗匕)를 솟아나게 한 그는 거지새끼를 향해 천천히 손을 향했다. 이제 근육을 적절히 사용하면 사린비가 소매를 통해 쏘아져나간다. 뱀의 비늘과도 같이 날카롭고, 바람처럼 빠른 이 비수는 결코 일개 거지새끼가 피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철방이 마악 근육에 힘을 주려는 순간, 거지새끼가 갑자기 고개를 조아렸다. “아, 물론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대인과 같은 훌륭한 분들은 예외죠.” 잠시 저 새끼를 그냥 죽일지 말지 고민하던 철방은 대답을 들은 뒤 죽이기로 결정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잔소리 말고...객잔 위치나 불어라!” “예, 예. 에...이 마을에 있는 객잔은 하나뿐이었죠.” “하나뿐...이었다고?” 묘한 어조고, 묘한 불길함이다. 그 불길함은 정확히 맞아 들어갔다. “예. 한 달 전에 불나서 망했죠.” “이런...썩을!!” 철방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어차피 철방 자신은 먹을 필요가 없고, 그의 대형은 그다지 식을 탐하지 않는 편이니 노숙할 때처럼 건량에 토끼구이 정도만 있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형에게 이곳에서의 식사를 권했는데, 그래놓고 ‘객잔이 없으니 건량에 토끼구이로 때우셔야겠습니다.’라는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저기...식사나 묵으실 곳이 필요하신 거죠?” 허공을 떠돌던 철방의 시선이 홱 돌아갔다. 슬쩍슬쩍 눈치를 보고 있는 거지새끼가 시야에 아주 확 파고든다. ‘그러고 보니 저 거지새끼를 죽이는 걸 깜빡할 뻔했는데...작심했던 일도 해치우고, 머리끝까지 치솟은 화도 풀자. 이게 일석이조라는 거 아니겠어?’ 철방의 두 눈에 다시 붉은 혈광이 번뜩였다 싶은 순간, 거지새끼가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제, 제가 아주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을 아는데, 한 번 가보시죠?” 거지새끼가 도망치는가 싶어 사린비를 날리려던 철방은 행동을 멈추고 왕방울만한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6 00:09:58 고친날 2005-06-06 00:09:58 읽은수 12451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7.신사난측(神事難測).(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어째 이 거지새끼는 살심을 품을 때마다 재깍재깍 행동하네. 내가 살기를 너무 심하게 흘렸나? 뭐, 살기가 있는 대로 눈에 드러나니 눈치 있는 놈이면 이렇게 알아서 길수도 있겠지.’ 피를 보지 못해 좀 아쉽기는 하지만, 어째든 가장 중요한 건 대형이다. 대형께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실 수만 있다면 거지새끼 하나 살려주는 아량쯤이야 얼마든지 베풀어도 괜찮지 않겠는가? “안내해...라!” “예, 소인이 당장 안내해드리죠.” 거지새끼가 앞쪽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디디자 철방의 미간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걷는 자세가 무진장 불안정하다. 아니, 저건 불안전한 정도가 아니라 다리 한쪽이 완전 휘어져 않은가? 아마 부러진 다리를 잘못 이은 모양인데, 저 속도로 안내를 했다가는 한시진이 지나도 목적지에 도착 못할 거 같다. “거지새끼...타라.” “예? 타라뇨?” “여기 옆에 타라고...이 새끼야.” “저, 전 절름발인데요?” 거지소년은 철방의 말에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중원에서 장애인이나 불구자는 무척이나 천대받는다. 가까이 하기만 해도 불구가 옮는다는 미신으로 가까이하기는커녕 말도 나누지 않을 정도다. 하물며 자리를 같이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썅! 그러니까 타라는 거 아냐!! 대형을 더 기다리시게 할 셈이냐!” “아, 아뇨. 그럴 리가 없죠.” 참다못한 철방이 고함과 함께 두 눈이 다시 번뜩이자 거지소년은 후다닥 마부석에 올라탔다. 소년이 느끼기로, 철방의 살기는 십중십할 진짜배기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철방의 등에 매여져 있는 큼지막한 대도에 몸이 반쪽가리가 될 참이니, 행동이 절로 잽싸질 수밖에 없다. “너...거짓말이면, 잡아먹어 버린다.” “소, 소인이 어찌 대인 같은 분께 거짓을 아뢰겠습니까요.” 새파랗게 질린 거지새끼의 말에 제법 진심이 묻어나는 듯하자 철방은 그럭저럭 만족했다. 대형께 맛있는 식사를 대접해드릴 수 있으면 그것으로 대만족이고, 그렇지 못하면 대형께는 죄송하지만 대신 이 거지새끼를 ‘잡아먹을’ 수 있으니 나름대로 소만족이 된다. “저...그런데 대인. 제가 절름발이신거는 신경 안 쓰이세요?” “왜? 전...염병이냐?” 절름발이가 되는 전염병이면 그대로 이 거지새끼를 다져버려야 한다. 이미 죽은 철방 자신이야 별 상관없겠지만, 혹시라도 대형이 전염돼 절름발이라도 되는 건 절대 안 된다. “그, 그럴 리가요. 까마득한 어릴 때 다리가 부러졌는데, 고아라 치료를 제대로 못받아서 절름발이가 됐죠.” “그럼...상관없지 뭐.” 절름발이인 개새끼나 아닌 개새끼나 개새끼는 다 개새끼인 건 마찬가지라 같은 개새끼 맛이 난다. 육질의 차이는 조금 있을지 몰라도 일단 삶아버리면 다 같은 개새끼에 개고기 아닌가? 정 눈에 거슬리면 이 거지새끼도 다리 한쪽부터 뜯어내서 내다버리고 잡아먹으면 되는 것이다. ‘사람은 겉보기로는 모른다더니...’ 그러한 철방의 속내를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한 거지소년은 정말 의외라고 생각하며 철방에게 어디로 가야할지 안내해주었다. “그러니까 이쪽으로 가서...예, 그쪽이요.” 거지새끼의 안내에 따라 마차를 몰아가던 철방은 갈수록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어째 갈수록 마을에서 벗어나는 듯한 느낌이 든 것이다. ‘아무렴 어떠냐. 이놈이 뭘 꾸미고 있으면 그대로 다 깨부수고 잡아먹으면 되지.’ 웬만한 놈들은 수십이 아니라 수백이 달려들어도 상대할 자신이 있는 철방이고, 실제로 그가 시귀로 다시 태어나며 얻은 힘은 결코 적지 않다. 충격과 암경을 흡수해버리는 오공갑피(蜈蚣甲皮)와 그 안쪽을 덮고 있는 강철보다 단단한 사린비(蛇鱗匕)로 인해 상승한 내구력, 무형의 경력조차 볼 수 있는 치효안(?梟眼)과 천장에도 거꾸로 달라붙을 수 있는 지주족장(蜘蛛足掌), 공격을 받을 때 그 기운을 미미하게나마 흡수해 체력을 회복할 수 있는 편복기공(??氣功), 검기와 맞먹는 예리함과 강함을 철랑조(鐵狼爪), 막강한 거력을 발휘할 수 있는 웅력근(熊力筋), 야수와 같은 감각과 움직임을 가능케 하는 맹호공(猛虎功), 십리 밖의 소리도 들을 수 있는 십리묘이(十里卯耳), 백리를 내달릴 수 있는 백리묘각(百里卯脚), 몸을 깃털처럼 가볍게 할 수 있는 응우공(鷹羽功), 상대의 초식을 빠르게 분석해낼 수 있는 호미지(狐尾智)...! 이 십이기력(十二奇力)으로 인해 그의 힘은 능히 기공(氣功)을 이룬 외가고수와 겨룰 수 있을 정도의 수준에 이르렀다. 그뿐이던가? 한번 죽음을 겪고, 상이하되 강력한 귀기가 체내에서 순환하게 된 덕분인지 동피철혈기공(銅皮鐵血氣功)의 경지가 11오성(悟成)의 경지에 이르렀다. 만약 12대성(大成)을 이뤄 기공(氣功)의 경지에 이르면 초절정 고수와도 자웅을 겨뤄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 그가 자신감을 가질 자격은 충분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의 다 왔어요.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자신의 손에 제압됐던 금판무상 금광보를 상기하며 흐뭇한 표정을 짓던 철방은 문뜩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키며 안내를 하던 거지새끼의 말이 갑자기 끊겼기 때문이다. “야, 안내...제대로 못해?” 제법 사나운 음성이지만, 거지새끼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마부석에서 훌쩍 뛰어내려 나자빠졌다가 허겁지겁 일어나 어딘가로 절뚝거리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저 새끼가 미쳤나...?’ 대체 왜 저러나 싶어서 거지새끼가 달려가고 있는 곳을 본 철방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한 명을 몇 명이 둘러싸고 구타하고 있는 것 자체는 그러려니 넘어갈 수 있다. 문제는 맞는 놈이나 때리는 놈이나 모두 거지새끼라는 점이다. “내 친구 때리지 마, 이 자식들아!!” 고함을 지르며 달려든 절름발이는 잠시 한 놈을 붙잡고 늘어지는가 싶더니 금방 나자빠져 이미 맞고 있던 놈과 함께 짓밟혔다. 저래서 힘없고 배경 없으면 서러운 것이다. ‘그놈들, 발질 한번 시원시원 하네. 크면 꽤나 야비한 하오배나 잔인한 산적이 되겠는데?’ 흑도무림의 창창한 앞날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철방은 문뜩 자신이 이렇고 있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시라도 빨리 대형께 맛있는 식사를 대접해야 하는데, 저 거지새끼가 맞느라 안내를 못하면 그게 그만큼 늦어지는 것이다. “어이...거지새끼들! 그 절름발이는 나...랑 예약이 있으니 이만...끝내라.” 우렁찬 고함에 뒤를 돌아본 거지들은 철방의 거대한 덩치와 대도를 보고 주춤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것도 잠시, 서로 힐끔 시선을 나눈 그들 중에서도 제법 체구가 장대한 놈이 앞으로 나서 입을 열었다. “형씨, 이건 우리끼리의 일이니 예약은 좀 뒤로 미루쇼.” 거지의 곱지 않은 말에 철방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사지 멀쩡하고도 밥 빌어먹는 것밖에 못하는 거지새끼들이, 주제도 모른 채 쪽수만 믿고 껄렁거리는 것이 무척이나 그의 심기를 거슬린다. 철방의 두 눈에 스산한 혈광이 맺히자 절름발이 새끼는 기겁하고 같이 맞던 놈과 함께 몸을 웅크렸다. 저 정도 눈치가 있다면 정말 맛있는 식사를 대접할 테니, 일단 절름발이랑 그 친구 놈은 손대지 않는다. 이제 남은 것은, 대형의 허락을 받는 것뿐. “대형...대형의 식사를 지체하...려는 놈들이 있는데, 손을 써도...괜찮겠습니까?” “허락한다.” 정말이지 무심하기 그지없는, 그러나 철방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인 음성에 그는 서서히 마부석에서 몸을 내렸다. 6척을 넘어 거의 7척에 가까운 철방의 덩치를 본 거지들 사이에 불안감이 감돌았다. 마부석에 앉아있을 때는 몰랐는데, 내린 모습을 보니 그 체격이 상상 이상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물러날 수도 없는 노릇인 만큼, 그들은 몽둥이나 주먹을 쥐고 철방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등에 매여진 대도를 뽑아들던 철방의 미간이 다시 한번 꿈틀거렸다. 그냥 마구 두들겨 밟을 때는 몰랐는데, 자세를 보아하니 그냥 막 주먹질이나 배운 것 같지가 않다. “네놈들...어디서 무술이라도 훔쳐...배웠냐?” “흥! 우리는 걸개방(乞?幇)의 방도다. 이제 와서 후회해도 늦었다!” 철방의 미간이 다시 한번 꿈틀거렸다. 걸개방인지 뭔지는 몰라도, 거지들에게 몇 수 재간을 가르쳐주는 대신 수입의 일부를 거둬들이는 작은 사파일 것이다. “거지가 무술은...배워서 어디다가 쓰려고?” “잔말 마라!” 굳이 언급하기 싫다는 듯한 거지들의 태도만으로도 뻔하다. 당연히 무력을 동반하는 구걸, 즉 강도질을 하는 거 아니겠는가? 삼류무공쪼가리나 익힌 주제에, 강도질까지 하는 주제에, 사지육신이 멀쩡한 주제에 무릎 꿇고 구걸해 동정까지 받는 이런 새끼들이 싫다. 싫어도 정말 싫다. 철방은 녹림의 호걸로써 이 사파후배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주기로 결심했다. 사파의 도는 누구에게도 무릎 꿇지 않는 강자지존의 패왕지로! 힘이 있는 자는 모든 것을 갖고, 힘이 없는 자는 모든 것을 잃는 그 약육강식의 진정한 법칙을 온몸으로 느끼리라, 깨달으리라! 대도산왕(大刀山王)에서 불사패왕(不死敗王)으로 거듭난 철방, 그의 대도가 패왕의 길을 따라 거지들을 향해 휘둘러졌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6 00:10:24 고친날 2005-06-06 00:10:24 읽은수 13255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7.신사난측(神事難測).(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부우웅---! 거지들이 무관에서 배운 걸개봉법(乞?棒法)의 우후죽림(雨後竹林)의 초식에 따라 죽봉을 서로 겹친다. 걸개봉은 웬만한 칼날조차 쉽게 파고들지 못하여, 타격과 수비에 있어서는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죽봉. 만약 여럿이 겹쳐진다면 능히 천근의 거력을 감당해낸다. 그래서? 단지 그것뿐이냐? 천근을 막는다면 만근으로, 만근을 막는다면 십만의 힘으로 내려치면 된다!! 대도를 휘두르던 전신의 근육이 꿈틀거리며 웅력근(熊力筋)에서 수천 근의 힘이 일어난다. 맹호공(猛虎功)의 야성적인 감각은 그 힘을 본능적으로 이끌어 최대한 증폭시키고, 그 수만 근의 힘을 단 한 자루의 대도(大刀)에 모두 담아낸다. 콰지직!! 죽봉이 겹겹이 겹쳐져 만들어진 죽림이 일도에 무너져 내린다. 왼쪽에 있던 두 놈은 그 충격에 의해 그대로 옆으로 튕겨나고, 오른쪽에 있던 두 놈은 뒤로 튕겨나다가 가슴에 대도의 끝이 살짝 스친다. 그러나 그 대도에 담겨져 있던 거력은, 대도를 뒤따르던 사나운 바람의 칼날은 그들을 그대로 강타한다. 촤좌좍!! “아악!!” 칼바람에 의해 쩌어억 벌어진 두 거지의 가슴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허공에 피안개를 만들고, 두 거지의 몸은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거인에 의해 던져지듯 허공을 날아간다. 남은 것은 네 놈. 그 중 한 놈이 도를 휘두른 틈을 노리겠답시고 땅을 박차며 주먹을 앞세워 달려든다. ‘병신새끼.’ 대도를 그대로 뒤로 돌아가게 하며, 그 관성에 몸을 실어 허리를 비튼다. 아직도 대도에 남아있던 거력이 거꾸로 돌아온다. 손목, 팔꿈치, 어깨를 지나 허리에 비축되다가 하반신을 향해 맹렬하게 흘러들어간다. 거력이 허벅지, 무릎, 종아리를 타고 발목까지 내려온다. 한쪽 발은 그 힘을 땅에 박아 넣어 몸을 지탱하고, 다른 발은 그 힘을 땅에 쏟아 부어 폭발하듯 솟구친다. 발이 솟구친 반동으로 완전히 뒤로 돌아가는 몸. 그리고 웅크려지며 힘을 집중하는 다리. 힘의 집중이 절정에 이른 순간,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활시휘가 튕겨지듯 펴지며 다리 끝의 발이 마치 화살처럼 쏘아져 나가 불끈 움켜쥔 주먹을 가격한다. 빠각!! 주먹은 그대로 가루가 됐다. 아니, 아직 이다. 아직 힘이 남았다. 그대로 계속해서 뻗어나간 발이 병신 놈의 턱주가리를 빠갠다. 주먹과 턱의 통증을 견디지 못해 눈을 까뒤집고 뒤로 나자빠진 병신새끼는 진짜 병신이 됐다. 이제 남은 것은 셋. “이익!! 좌충우돌(左衝右突)!” 두 바보 놈이 부러진 죽봉을 들고 달려든다. 한 놈은 왼쪽, 한 놈은 오른쪽. 사이좋게 나란히 달려드는 걸 보니 사이좋게 날려줘야겠구나 싶어 대도를 손에서 놓는다. 손에서 무기가 사라지자 얼씨구나 해서 좌우에서 죽봉을 휘둘러대는 바보들. 오냐, 어디 기분 좋게 휘둘러봐라. 양옆구리로 두 죽봉이 동시에 와 닿는다. 좌우에서 동시에 타격을 하면 타격력은 배가 되는 법. 제법 합격을 연습한 놈들이다. 그러나 육신갑(肉身甲)만 해도 죽봉이 아니라 철퇴나 도검조차 통하지 않는다. 하물며 육신갑과 합쳐진 오공갑피(蜈蚣甲皮)에 진기도 실리지 않은 죽봉은 조금도 통하지 않는다. 탄탄하면서도 탄력 있게 죽봉의 충격을 흡수한 오공갑피는 그 충격에 웅력근의 힘까지 실어 도로 튕겨낸다. 그대로도 아니고 갑절의 갑절로 되돌아온 반탄력의해 두 죽봉이 그대로 분질러져나가자, 두 바보는 경악한 채 그대로 굳어버린다. 사이좋게 달려들어, 사이좋게 죽봉이 부러지고, 사이좋게 같은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사이좋게 동시에 양쪽주먹에 맞아, 사이좋게 코가 분질러지고, 사이좋게 뒤로 나자빠진다. 정말 우라지게 사이좋은 놈들이다. 마지막 남은 놈이 주춤거리다가 등을 돌리고 도망친다. 덤벼도 상대가 안 되는 걸 이제라도 깨달은 걸 보니 머리가 좀 있기는 한 거 같은데, 대처법을 보자니 아무래도 반쪽아리 대갈통 같다. 피부에서 뱀의 비늘과 같은 얇은 비수를 솟아나게 하고, 손을 뻗으며 근육을 조절한다. 웅력근을 활과 시위처럼 사용하기에 조절에 따라서는 철편 못지않은 사거리와 위력을 낼 수도 있는 사린비가 쏘아져나간다. 푸욱! “으악!!” 종아리에 사린비가 꽂히자 그대로 나자빠진다. 혹시 악착같이 달아날 듯싶으면 한 개 더 날려주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끈기가 없는 놈이다. 사방을 둘러보니 가슴이 갈라진 놈 둘, 안면이 뭉개진 놈 둘, 턱이랑 주먹이 깨진 놈이 하나, 종아리에 비수 맞은 놈 하나. 총 여섯 명의 거지가 어느새 부상자로 전업해 바닥을 나뒹군다. “자, 그럼 내가 사파의 선배고수로써 조언을 해주마. 우선 너희 얼간이 둘. 방어만 하면 끝이냐? 실패하면 잽싸게 뒤로 튀고 성공하면 잽싸게 반격할 준비를 해야지. 다음부터는 이걸 꼭 명심해둬라.” 가슴이 갈라진 두 놈은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을만한 조언을 듣고 이를 악문다. 그래, 이 선배님이 너무 고마워서 말도 제대로 안 나오지? 벌써부터 그러지 마라. 아직 선물이 남았거든. 대도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가 순간적으로 두 번 내리긋자 어깨로부터 피가 한가득 뿜어져 나온다. 뚝 떨어진 두 팔이 아직까지 꿈틀거리는 걸 보자니 인간의 생명력이 끈질기다는 게 실감난다. “크아악!!!” “이건 내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해라. 이제 네놈들 구걸하기가 갑절은 쉬워질 거다.”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두 개의 오른팔을 집어 들어 챙긴다. 먹을 걸 버리면 벌 받지. 산적질 할 때도 먹을 걸 버린 적은 없는데 말이야. 비명을 내지르는 두 외팔이로부터 시선을 때니 코뼈가 뭉개진 두 놈이 보인다. 이 놈들한테도 조언을 해줘야지. “너희 바보 둘. 상대가 방어도 안 하고 넋 놓고 있으면 그게 기회인지 함정인지를 구분해야하지 않겠냐? 그리고 초식 같은 걸 외치면서 달려들 때는 조절을 잘 해야지. 천지쌍격(天地雙擊)을 쓸 때는 좌충우돌(左衝右突)로, 좌충우돌을 할 때는 천지쌍격으로 외쳐야 상대가 상하를 막을지 좌우를 막을지 헷갈려 하다가 한 방 맞지 않겠냐?” “그, 그렇..알겠...제발...” “제발 선물을 달라고? 그야 당연하지.” “으아...!!” 친절하게 씨익 미소를 지어주며 사이좋은 두 얼간이의 눈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가 눈깔을 쥐고 빼내자, 눈알이 신경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채로 뽑혀 나온다. 왼쪽, 오른쪽으로 하나씩 해줬으니 앞으로도 사이좋게 지내봐라. 진정 의리 있는 친구는 만나기도, 만들기도 힘든 게 바로 강호무림이니 무림인에게 좋은 친구는 능히 천만금과 버금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눈알을 두 팔과 함께 챙겨놓고 주변을 돌아보니 턱과 주먹이 빠개져 기절한 놈이 한 눈에 들어온다. 가만히 보니 이미 완전한 병신이다. 발로 후려칠 때 힘 조절을 별로 하지 않아서 그런지, 턱이랑 주먹이 완전 으스러졌다. 앞으로 한평생 쌈질하기는 무리일 테니, 굳이 선물까지 줄 필요는 없을 듯싶다. “누가 저 병신 새끼한테 전해줘라. 칼 들었다고 칼질만 하는 건 협객, 도객, 그리고 얼간이만 하는 짓이니까 잘 알아두라고.” “으, 으으...대인...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부디 한 번만 용서를...” 마지막으로 자신의 차례가 남았음을 직감한 비수 맞은 놈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다. 사린비가 꽂힌 채 무릎 꿇다니, 근성은 없어도 생존본능은 꽤 뛰어난 놈 같다. 그런데 턱을 긁적이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새끼가 이제 보니 아까 건방지게 굴었던 그 거지새끼다. 아무래도 이놈에게는 흉악무도해서 은혜는 잊어도 원한은 잊지 않는 악당은 많아도 무슨 짓이든 용서할 수 있는 성인은 그다지 없다는 걸 몸으로 알려줘야 할 거 같다. “그래서야 쓰나, 네가 바로 날 열 받게 한 놈인데. 그래도 일단 조언은 해주마. 도망쳐서 몸보신 하겠다는 건 좋은데 말이다, 대신 네놈은 앞으로 동료 만들기 힘들 거다. 제 몸보신 때문에 가장 먼저 튀는 놈은 두목이든 동료든 부하든 그대로 끝나는 거야.” “대, 대인...그런...” 아, 이왕이면 변명을 듣기 싫어하는 인간도 많다는 것도 추가해서. 촤아악--! 몸을 덜덜 떨며 어떻게든 자비를 구해보고자 하던 놈이 무언가가 잘려나가는 소리에 두 눈을 부릅뜨고 아래를 내려다본다. 무릎 꿇고 있던 놈의 양다리가, 대도에 의해 허벅지쯤에서 절단 나있다. 예리함으로 잘랐다기보다는 힘으로 끊었으니, 그 통증은 장난이 아니지. 지금이야 충격으로 통증을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상황을 인식하면 그 고통이 한꺼번에 찾아든다. “크억...크어억!!” 바로 이렇게. 놈의 절단 난 두 다리까지 챙긴 뒤 몸을 돌린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저놈들 중 반은 죽겠지만, 죽으나 사나 다 제 놈들 팔자인 거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7 00:00:52 고친날 2005-06-07 00:00:52 읽은수 11716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7.신사난측(神事難測).(4)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거지새끼. 어서...타라." "예? 예, 당연히 그래야죠!" 갑작스러운 참극에 입을 따악 벌리고 넋이 나가 있던 절름발이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킨다. 그런데 어째 혼자가 아니라 친구 놈이랑 같이 마부석에 올라탄다. 저 거지새끼, 설마 이 마차를 역마차 같은 걸로 착각하고 있는 건가? "그 거지...새끼는 왜 타냐?" "마,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려면 이 친구도 꼭 같이 가야 하거든요." 미간이 절로 찌푸려진다. 일단 붕대로 얼굴을 감고 있는 것이, 이 놈도 절름발이 거지새끼와 마찬가지로 정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그게 아니라 그렇지 않아도 좁은 자리가 더 좁아진다는 점이지만, 꼭 같이 가야 한다면 어쩔 수 없지. 대형의 식사에 지장이 생기면 안 되니까. 살짝 고개를 끄덕여 타는 것을 허락하자 절름발이 녀석이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며 마차를 끌기 시작한다. 녀석, 그렇게 좋아할 거 없다. 요리가 맛없으면 네 친구 녀석도 같이 잡아먹어 버릴 테니까. 일단 입가심부터 해둘까 싶어 아까 전 챙겨온 눈깔 두 개를 입 안에 털어놓았다. "......!" 절름발이와 붕대 녀석이 두 눈을 부릅뜨는 게 훤히 보이지만, 그런 소소한 것에 신경 쓰지 않고 눈깔을 으적으적 씹어 삼킨 뒤 두 얼간이의 팔 중에 하나를 집어 들고 살점을 찌이익 뜯어먹었다. 거지새끼들 주제에 강도질로 배불리 먹고 무술로 근육을 다져서 그런지, 육질이 제법 괜찮다. 이럴 줄 알았으면 팔다리를 몇 짝씩 더 때왔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뱃속으로 들어간 인육은 찌꺼기조차 남지 않고 모든 기운이 흡수된다. 아직 남아있던 생기(生氣)나, 점차 생겨나고 있던 사기(死氣)가 체내에서 쪽쪽 빨려 귀기(鬼氣)가 됨으로써 철방의 힘을 늘린다. 이대로 계속해서 인육을 먹어대면, 그만큼 강해져 동피철혈기공(銅皮鐵血氣功)의 12대성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초절정고수를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수백을 가뿐히 넘어가는 인육을 먹어치워야 할 테니, 그런 귀찮음을 감수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동피철혈기공의 수련에 신경 쓰는 게 낫다. 팔 하나를 뼈 쪼가리까지 먹어치우고 다리 한 짝을 들어 올렸을 때, 절름발이는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시, 식성이 독...특하시네요." "왜? 너도...먹고 싶냐?" 절름발이 녀석에게 살코기 한 점을 뜯어주자, 녀석은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서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하기야, 식인종이 아닌 이상 인육을 먹을 수 있는 인간은 드문 법이다. 그는 내밀었던 살코기를 다시 입안에 집어넣고 씹기 시작했다. 절름발이의 얼굴은 이제 당장이라도 구토를 할 것처럼 푸르뎅뎅하게 돼버렸다. "그런데...대, 대인의 대형께서도 그런 식습관을 가지고 계신가요?" "당...연히 아니지." 절름발이와 붕대가 눈에 띄게 안도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아무리 맛있는 천하일품의 요리가 있어도, 그게 과연 인육을 먹는 괴물에게도 천하일품으로 여겨질 수 있을지는 천하제일숙수라도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대형께...서는 특별히 먹는데 맛을...가리시지 않는다." 안도는 이제 희색으로 변한다. 까다로운 미식가를 만족시키는 것과, 특별히 맛을 가리지 않는 이를 만족시키는 것 중 어느 쪽이 얼마나 더 쉬운지는 너무나도 명백한 일이다. "그렇다고...설렁설렁한 음식을 내놓을 생각은 꿈에서...라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내가 직접...맛을 확인해 볼 테니까." 둘의 눈빛에는 이제 하늘에 뜬 태양이 떨어지고, 땅이 무너진 듯한 깊은 절망이 감돌고 있다. 철방의 말은 그의 대형과 함께 그의 혀도 만족시켜야 한다는 뜻인데, 정상적인 입맛과 식인괴물의 입맛을 동시에 맞출 수 있는 숙수가 있다면 그는 아마 불로장생의 묘약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을 대접할 숙수는 불로장생의 약을 만들지 못했고, 그 사실이 바로 그들을 더더욱 깊은 절망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만약 일이 그렇게 된다면...너희들은 대형이 아닌...내게 식사를 대접해...야 함을 명심해두는...게 좋을 거다." 빠득, 빠드득! 철방이 다리 한쪽을 뼈째로 씹어 먹으며 나지막하게 한 말의 의미가 너무나도 분명하고 확실하게 전해진 가운데, 마차는 마침내 하나의 커다란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남금객잔(嵐金客棧)이라는 간판을 보자면, 분명 객잔이고 객잔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 간판이 나무판으로 엉성하게 만들어 걸어놓은 것이고, 대체언제 지어진 것인지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모습을 보자면 이게 객잔이라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는다. "...저기...여기인데요..." 마차를 멈추고 더듬더듬 말을 한 절름발이는 철방이 객잔을 주시하며 침묵을 지키자 다급히 말을 이어갔다. "에...겉보기에는 이래도, 전에 불탄 객잔의 숙수가 여기 있으니까 식사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하실 수 있거든요." 자칫 잘못했다가는 요리를 내보이고 말 것도 없이 그대로 그 자신이 요리재료가 될 판인지라 절름발이의 설득은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철방이 서서히 고개를 돌리자, 절름발이는 입도 뻥끗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어버렸다. 그의 두 눈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때보다 진득한 핏빛의 혈광으로 사납게 번뜩이며 절름발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이...!!" 끼이익... 마악 우렁찬 고함을 쏟아내려던 순간, 마차에서 흘러나온 마찰음에 철방은 흠칫 입을 다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를 따라 반사적으로 마차에서 나온 이를 본 절름발이와 붕대는 침을 꼴깍 삼켰다. 기이한 형태의 흑의장포와 머리에 깊이 눌러쓴 검은 두건, 무엇보다 그 주변에 맴돌고 있는 음험한 분위기는 본능적으로 인간의 공포를 자극하고 있었다. 저벅. 저벅. 마차에서 내려선 흑의사내가 아무 말 없이 객잔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절름발이는 철방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어...대인의 대형께서는 굳이 외형에 신경 안 쓰시는 것 같은데 말이죠." "그래...서!" "아, 아뇨, 그냥 그렇다는 거죠." 절름발이를 향해 눈을 부라리던 철방은 이를 빠득 갈며 마부석에서 내려섰다. 이미 대형께서 내리셨는데, '여긴 너무 허름하기 그냥 다른 곳으로 가시죠?'라고 해야 한단 말인가? 철방으로써는 결국 아무리 낡은 건물이라도 그래도 일단은 객잔 건물이니, 건량과 토끼구이나 씹는 것보다는 확실히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만약 식사가...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날 가지고 논 걸...아주 후회하게 될 거다. 아주!" "며, 명심합죠." 일점의 가감도 없이 말 그대로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한 사나운 기세로 절름발이 녀석을 덜덜 떨게 만든 철방은 쿵쿵 걸음을 옮겨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먼지가 풀풀 날리고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객잔 내부는 겉보기보다는 양호했다. 탁자도 만들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멀쩡한 것이 두 개 놓여있고, 대형은 그 중 한 탁자에 앉아 한 곳을 비스듬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호...오?" 철방의 입에서 묘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대형이 올려다보고 있는 객잔의 벽에는 수많은 목패가 걸려 있었는데, 그 목패에는 각종 음식의 이름이 하나하나 새겨져 있었다. 목패의 수는 그야말로 빼곡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 너무 많아서 뭐가 뭔지 오락가락 하지만 대접할 수 있는 요리의 숫자가 저 정도라면 확실히 아주 맹탕은 아닌 듯싶다. "흠...좋아. 점...소이!" "예, 갑니다요, 대인." 기분 좋게 점소이를 불렀던 철방은 어째 점소이의 음성이 낯익다고 생각했다. 점소이가 절뚝절뚝 걸어 나왔을 때는 세상에 참 절름발이가 많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소이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는, 절름발이 녀석과 생긴 게 무척이나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대신 두 눈을 부라렸다. "너, 이...새끼...!!" "저희 남금객잔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철방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대로 주먹을 휘둘러 꼴통을 박살내버려야 하는데, 절름발이 녀석의 태도가 워낙 당당하고 진짜 점소이 보다 더 정중하니 이게 정말 아까 그 거지새끼가 맞는지 아니면 그냥 많이 닮은 점소이인지 헷갈릴 정도다. "저희 남금객잔(嵐金客棧)은 손님들의 편안함을 위한 접대를 자랑으로 삼고 있으며, 숙수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황실숙수로부터 직접 전수받은 요리 실력을 지닌 초일류숙수로 언제나 최고의 요리만을 대접합니다." "황실숙...수의 제자라...전직 황실숙수면 몰라...도, 그 정도로 최고의 요...리를 할 실력이...있는 거냐?" "물론입니다. 황제폐하도 드실 수 없는 최고의 요리도 대접해드릴 수 있죠." 못미더운 기색을 드러낸 그대로 드러낸 철방은 절름발이가 씨익 웃으며 하는 호언장담에 슬쩍 대형을 살폈다. 요리판을 보고 있기는 하지만, 특별히 무언가를 고를 생각은 없는 듯싶은 눈치다. "그 숙수란...놈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요리를...내와라!"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절름발이가 꾸벅 인사를 한 뒤 절뚝거리며 주방을 향해 가자, 그 뒷모습을 보며 턱을 쓰다듬는다. 과연 저놈이 가져올 음식이 요리가 될지, 아니면 저놈 자신이 될지는 두고 볼일이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7 00:01:25 고친날 2005-06-07 00:01:25 읽은수 11382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7.신사난측(神事難測).(5)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름발이는 무사히 살아남았다. 그에게 음식물이란 활동할 수 있는 양분을 섭취할 수 있는 대상. 맛보다는 영양분의 균형과 흡수가 더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남금봉황구이(嵐金 鳳)는 영양적인 면에서 꽤나 뛰어났고, 그것은 그를 만족시켰다. "흠...맛이 꽤...괜찮군." 말이 꽤 괜찮다는 거지, 실제로는 맛을 보기 위해 시킨 두 번째 남금봉황구이를 뼈까지 으적으적 씹어 먹은 철방이다. 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절름발이는 슬쩍 눈치는 보는 듯싶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더 드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몇 마리 정도는 더 대령할 수 있는데요." "대형께서...이미 식사를 마치...셨으니, 더는 필요 없다." "에...그럼 술은 어떠신지? 비록 재고가 얼마 없기는 하지만, 아주 끝내주는 죽엽청이 있는데요." "음...술, 술...이라..." 철방은 잠시 턱의 수염을 긁적였다. 생전에야 실컷 마셨지만, 사후에는 입에 대보기는커녕 생각도 못해봤다. 마시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철방의 모든 생각은 대형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철방 자신이 지닌 돈도 대형을 위해 사용해야할 돈. 그런데 그 돈을 술을 퍼마시는데 쓰는 것은 안 될 일이다. 그렇게 철방이 아쉬운 마음을 접으며 마악 고개를 내저으려던 찰나, 한줄기 무심한 음성이 그와 절름발이의 귀를 파고들었다. "내놔라." "예? 아, 예. 몇 병이나 드릴까요?" 도저히 인간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무심한 음성에 잠시 넋이 나갔던 절름발이는 곧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그 혼자뿐이라면 한 병으로 충분했겠지만, 철방의 거대한 덩치를 보자면 한 병이 아니라 한 통이 있어도 부족할 듯이 보였다. "있는 거...몽땅 내...와라!" "몽땅이요?" "그래...몽땅!" 대형의 주량이 결코 약하지 않을 거라는 명분은 철방의 눈을 뒤집히게 만들었다. 안 남으면 안 남는 대로 마시면 되는 거고, 남으면 남는 대로 마시면 된다. 술을 많이 내오면 많이 내올수록 좋은 것이다. 절름발이도 제법 희색이 만연해져서 열심히 술병을 날랐다. 재고가 얼마 없다는 말 그대로 겨우 이십여 병뿐이었지만, 오랫동안 술을 접하지 못한 철방으로서는 그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대형...한 잔 받으십시오." 아무리 술에 환장했어도 대형을 앞에 두고 먼저 술을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었던 만큼, 철방은 그의 잔에 조심스레 술을 따랐다. 술이 가득 찬 잔을 입가에 댄 그는 주향을 깊이 들이켜 본 뒤 죽엽청을 한 모금 입안에 머금었다. '괜찮군.' 낯선 감이 많이 드는 맛.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술이다. 이 세상에서 그가 유일하게 맛다운 맛을 느낄 수 있는 음식물. 입 안에서 잠시 동안 굴리던 술을 삼키자 목이 후끈 달아오른다. 시체와 같이 서늘하던 육신이 온기를 되찾는다. 여운을 느끼던 그가 다시 술을 한 모금 머금을 때, 철방은 술잔만으로는 감칠맛이 난다는 듯 아예 술병을 통째로 든 채 벌컥벌컥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술 못 먹어 죽은 귀신이 들렸나...' 술을 모두 나르고 곁에서 둘을 멀뚱멀뚱 지켜보던 절름발이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거한은 술을 마시는 건지 아니면 물을 마시는 건지 모르게 술병을 통째로 들고 술을 입안에 마구 부어대고 있다. 나름대로 주당이라는 작자들은 제법 봐왔지만, 술을 저렇게 마구잡이로 먹는 인간은 처음이다. 흑의사내 쪽은 그래도 제대로 술을 음미하는 듯 간간히 향을 맡고 입안에 충분히 머금어 맛을 만끽하는 거 같은데, 어째 술을 비우는 속도가 거한 못지않다. '술을 좀 더 준비해뒀어야 하는데.' 아쉬운 마음이 들기는 하지만, 저 이십여 병의 죽엽청을 마련한 것만 해도 그야말로 뼈 빠지는 고생 덕분이다. 그래도 일단 저 손님들이 돈만 제대로 지불하면 전보다 몇 병 더 들여놓고, 요리재료도 좀 더 넉넉하게 마련할 수 있다. '설마 돈을 때먹기야 하겠어.' 시시껄렁한 하오배의 무리라면 몰라도, 제대로 된 무림인은 명예를 목숨처럼 여긴다고 들었다. 강호무림 중에서도 손꼽히는 괴짜 중 괴짜라는 무영투괴(無影偸怪)는 사기와 도둑질을 무공과 예술과 명예의 경지로 승화시켰다고 하지만, 그건 황궁과 여러 강대문파의 보고를 탈탈 털고 삼황오제를 사기쳐먹은 대도(大盜)나 가능한 일이다. '혹시라도 그러면 쫄딱 망하는 거지 뭐.' 다시 요리재료 모으고 술을 모으느라 죽을 고생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던 절름발이는 둘을 살피는 것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기분이 가장 좋아 보일 때를 노려야해.' 인간은 기분이 좋을 때, 특히 술에 만취해서 그래질 때 손이 커진다. 아무리 무림인이라도 술을 저렇게 벌컥벌컥 들이켜면 조금은 취할 테니, 그때를 노려 넌지시 값이 얼만지만 알려주면 되는 것이다. 둘을 주시하다 보니 문뜩 주방 쪽에서 서성이는 붕대가 보였다. 아마 녀석도 인육을 먹는 식인귀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 것이다. '걱정 마라, 남국(嵐局)아. 이 금호(金浩), 반드시 돈을 받아 이 남금객잔을 부흥시킬 테니까.' 절름발이 금호와 붕대 남국은 원래 전에 불탄 객점의 점소이와 숙수였다. 그 화재로 인해 주인일가를 비롯한 객잔의 식구가 모두 죽었고, 어린 나이에 이미 청출어람의 실력을 발휘하던 남국은 얼굴에 화상을 입어 평생 얼굴을 들지 못하는 처지가 됐다. 겨우 살아남기는 했지만, 불구자인 그들이 일자리를 다시 찾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더구나 화재가 난 객잔에서 단 둘만 살아남았기 때문에, 불길하다느니 뭐니 하는 소문도 많아 구걸조차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귀신들렸다고 해서 버려진 헌 객잔건물에 자리 잡고, 남금객잔이라는 이름까지 붙여 객잔 일을 시작해봤지만 워낙 외진 곳에 있는데다가 소문도 흉흉하여 하루 벌고 하루 사는 구걸이 계속 이어졌다. 더구나 걸개방이라는 놈들이 자릿세를 내지 않으면 몸으로라도 때우라며 시도 때도 없이 두들겨대니 몸이 성할 날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주린 배를 움켜쥐며 전소한 객잔의 잔해를 뒤적이고, 구걸해 모은 돈으로 겨우겨우 조리기구와 술 등을 마련한 것이다. '남금객잔의 첫 손님이다. 남금객잔 부흥의 발받침이야.' "대인, 때도 늦었는데 묵고 가시렵니까?" "음...음...글쎄다..." 마악 하나의 술병을 통째로 비우고 다른 술병을 집어 들던 철방은 슬쩍 밖을 내다보았다. 슬슬 어둑어둑해지고 있는 것이, 이대로 바로 출발했다가는 그리 오래 가지도 못해 노숙해야할 판이다. 철방 자신이야 노숙을 하든지 관속에서 쳐 자든지 상관없지만, 대형의 편이를 위해서는 역시 이곳에서 묵는 것이 나을 듯싶다. "대형, 오늘...은 이곳에서 묵으...시겠습니까?" 술잔을 입에 대고 있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술잔을 기울이자, 철방은 전낭을 뒤적여 은자덩어리 하나를 떡하고 내려놓았다. "가장 좋은 방 하나...하고, 내일 아침식사도...맛있는 걸로 준비해라. 남는 돈으로는 술이나...적당히 사와라." "예...예, 대인.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은자덩어리를 본 금호는 입을 쩌억 벌렸다가 가까스로 흥분을 진정시키고 고개를 조아린 뒤 은자를 챙겨 자리에서 물러났다. 겉으로는 애써 진정했지만, 결국 터질 듯 두근거리는 심장을 완전히 내리누르지 못한 금호는 다짜고짜 주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은 뒤 두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부처님! 원시천존님! 황제폐하 만세! 만만세!" 주방 안에서 서성이던 남국은 친우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대체 무슨 일이냐는 듯 의뭉스러운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조금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서야 그러한 친우의 시선을 눈치 챈 금호는 입 꼬리를 씨익 말아 올리며 손에 쥐고 있던 은자덩어리를 보여주었다. "봐, 은자야. 은자라고." 붕대 사이의 틈으로 두 눈이 크게 벌어지며 놀람과 기쁨을 드러냈다. 은자 한 냥이면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다. 그런데 첫손님부터 이렇게 큰 돈을 벌어들였으니, 남금객잔의 밝은 앞날이 보이는 듯싶었다. "아무래도 저 두 분 대인께서는 하늘에서 우릴 불쌍히 여겨 보내주신 게 틀림없어. 아까 전에 걸개방의 그 개새끼들이 모조리 박살난 것만 해도 얼마나 통쾌했는데!" 남국도 동감이라는 듯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불구자이기 때문에 걸개가 되어 온갖 멸시와 천대를 다 받은 둘의 한은 이미 쌓일 대로 쌓여, 몇 놈이 죽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다. "자, 그럼 난 객실을 준비할 테니까 넌 술하고 내일 아침에 할 요리재료를 사와. 걸개방 놈들이랑 마주치지 않게 조심하고." 손칼로 적당히 자른 은자를 받아든 남국은 붕대 아래로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어보인 뒤 밖으로 나갔고, 금호 역시 오늘의 행운을 만끽하며 객실을 정리하기 위해 위층을 향해 절뚝절뚝 걸음을 옮겼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7 00:01:54 고친날 2005-06-07 00:01:54 읽은수 12120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7.신사난측(神事難測).(6)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그럼...편히 주무십시오, 대형." 그는 철방의 인사를 들으며 객실 안으로 들어섰다. 굳이 수면을 필요치 않는 철방은 그대로 문 앞을 버티고 서서 날밤을 샌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하루 내내 쉬지 않고 호위를 할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그 어떤 보표보다도 뛰어난 철방의 장점이다. 낡은 객잔에 있는 것 치고는 제법 깨끗하고 정리가 잘 돼있는 객실에 들어선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천장의 구석을 향했다. '지박령이군.' 가장 음기가 성한 곳에 몸을 숨긴 채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던 지박령은 그의 고개가 자신을 향하자 음한 곳으로부터 서서히 기어 나왔다. 생명을 지닌 것이 죽으면 혼백이 육신을 빠져나오는데, 생전의 염이나 정, 한이 너무 깊으면 명계로 들어가지 않고 유령으로 지상을 떠돈다. 대다수는 힘이라고는 전무하다고 할 정도로 미약하지만, 오랫동안 유령으로 떠돌며 음기(陰氣)를 흡수하면 스스로의 영력(靈力)을 조금씩이나마 자각하고 영기(靈氣)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저주술(詛呪術)은 이러한 유령의 특징을 사용하는 것으로, 음기를 제공하는 대신 유령의 영력을 빌려 특정 상대의 영혼에 저주를 내린다. 이 지박령은 적지 않은 음기를 모은 듯, 객잔 전체에 음산한 한기를 뿌리고 있다. 만약 범인이 이 객잔에서 하룻밤 묵는다면, 악몽과 가위에 시달려 정기(精氣)를 빼앗겨 쇠약해지는 것을 면하기 힘들 것이다. 지박령이 섣불리 접근해오지 않고 실내를 맴돈다. 본능적으로 그가 쉽지 않은 상대임을 느끼면서도, 영역에 대한 집착 때문에 물러나지 못하는 것일 터. 그가 소매에서 하나의 작은 수정조각을 꺼내든 뒤 나지막하게 주문을 외우자, 지박령은 주춤하는 기색을 보이다가 스르륵 다가와 수정조각 안에 빨려 들어갔다. 상당량의 영기가 쌓이지 않은 유령이라면, 단순한 주문과 주술적 의식만으로도 부릴 수 있다. 비록 잡스럽기는 해도, 약간이나마 영기를 지닌 유령이 담긴 보석이라면 주술에 사용할 촉매로써의 가치가 충분하다. '역시나인가.' 수정조각을 다시 소매 안에 갈무리한 그는 아래층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뒷정리를 하고 있는 절름발이 금호의 기척에 감각을 집중했다. 점소이라면 이 객잔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묵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리를 제외하면 조금도 불편함이 없는 움직임은, 지박령의 영향을 받지 않았음을 뜻한다. '승화된 한(恨)을 지니고 있다.' 세상에 대한 한을 영혼 속 깊은 곳에 묻어두고, 마치 기름이 부어진 장작처럼 영혼을 뜨겁게 불태운다. 스스로를 파괴하는 불꽃이 아니다. 스스로를 뜨겁게 달궈 영혼을 정화시킴으로써 더욱 밝아지고, 더욱 강해지고자 하는 불꽃이다. 밑에 깔려있는 장작은 영력(靈力). 잠재되어있던 영혼의 힘의 일부가 바탕이 되고, 한이 기름과 불씨가 되어 영력을 몇 배로 일깨운다. 그 중에서도 붕대와 절름발이, 이 둘은 영력이 일깨워졌음에도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막대한 잠재력이 있어도, 힘이 없기에 힘을 키울지도 모르는 약자의 운명이 그들의 한을, 영력을 더욱 깊고 뜨겁게 승화시킨다. '손을 써야하는가.' 그 둘의 영력을 모두 취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막대한 힘이 된다. 생기의 회복력 또한 상상치 못할 정도로 상승해 한두 달 안에 요양을 끝낼 수도 있다. 그러나 저토록 승화된 한을 지닌 영혼은 그 결집력이 매우 높아 영혼의 금법을 사용해 강제적으로 영력을 흡수하면 영혼과 함께 한까지 깨져나간다. 영혼을 통째로 흡수해버리는 방법도 있지만, 그럴 경우 악마와 같은 고위의 영적존재가 아닌 이상 영적인 정순함을 유지하기 힘들다. '가치는 있지만, 이용은 힘들다.' 천천히 침상에 걸터앉은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용가치도 없는 상대를 굳이 손대봤자,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상대에게 이용가치를 부여하면 된다. 오직 영력을 흡수하는 것만이 모든 이용가치는 아니니까. 남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 대해서라면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다. 묵봉을 옆에 비스듬히 기울여놓고 침대에 몸을 누인 그는 문 밖에 있는 철방에게 감각을 집중했다. '귀기의 흐름은 정상적이군.' 심장 안에 든 보석을 중심으로 체내를 순환하고 있는 귀기를 생생하게 느낀 그는 감각을 거두며 아까 전의 일을 상기했다. 급격한 감정의 동요에 영혼(靈魂)이 동조하고, 그로써 영기(靈氣)가 귀기(鬼氣)에 섞여들어 뚜렷한 영적 상태가 회복됐다. 비록 일시적인 현상이지만, 그 순간 철방의 의식은 살아생전과 거의 다를 바가 없다. '심령금제(心靈禁制)가 풀릴 가능성도 있는가.' 돌연변이시귀는 원래 생전의 기억과 의식이 많이 남는다. 더구나 철방의 경우 주기적으로, 또는 지속적으로 귀기를 흘려보내 심령금제를 강화하고 제어하는 대신 편법이 사용됐다. 그의 귀기가 담긴 자수정(紫水晶)을 핵(核)으로 삼아 조금씩이나마 지속적으로 그의 귀기가 흘러들지만, 만약 전과 같은 사태에 의해 그의 자수정에 담긴 귀기가 흐트러지거나 변질, 또는 흡수라도 되어버리면 심령금제의 지속을 확신할 수 없다. '이미 단두기사(斷頭騎士) 듀라한(dullahan)에 근접한 전투력을 지니고 있으니, 발전에 따라서는 사령기사(死靈騎士) 데스 나이트(death knight)의 수준까지 오를 수 있다.' 고위급 중에서도 최상의 반열에 들 정도로 강대한 힘을 지닌 망자, 사령기사(死靈騎士). 그가 이곳에서 봐온 이들 중 가장 강한 강자들은 모두 셋이다. 지하석부의 노인, 호악채의 천뇌문사(千腦文士) 장일산(將日産), 객잔에서의 적혈귀조(赤血鬼爪) 방조삼(榜璪森). 철방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그들은 팔정협칠사마(八正俠七邪魔)와 비견된다는 초절정고수(超絶頂高手). 기인이사가 모래알처럼 많은 강호무림에서도 보기 드문 강자들이다. 그러나 사령기사라면 능히 그런 초절정고수와 겨룰만한 능력이 있다. '힘을 회복하면 제압이나 통제가 가능하지만, 그때까지 힘을 회복하지 못하면 통제할 수 없다.' 사령기사는 확실하게 생전의 의지를 유지하고 있는 망자. 압도적이라고 할 정도의 지배력을 지니지 못한 이상, 계약을 통한 충성은 받을 수 있어도 심령금제는 불가능하다. 만약 철방이 사령기사의 수준에 올라 통제를 벗어난 뒤 그를 적대시하게 된다면, 생명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 '요양이 끝나면 상태를 봐서 폐기처분한다.' 그는 무심히 결정을 내렸다. 그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자신의 힘뿐. 그것을 제외한 어떠한 것도 신용하지 않는다. 확실하게 통제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믿을 수 없다. 만약 믿음을 잃은 상대를 가까이 한다면, 언젠가는 배신의 칼날에 등을 찔리게 된다. 사령기사 수준의 망자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냉철한 판단력을 잃고 힘의 유혹에 빠지면 그 뒤에 찾아오는 것은 오로지 파멸뿐이다. 마차에서 이미 충분한 수면을 취했던 만큼, 잠들지 않고 오랫동안 철방의 처리에 대해 생각하던 그는 문뜩 무언가를 느끼고 감각의 영역을 넓혔다. 느껴진다. 사방에서 조금씩 다가와 객잔을 둘러싸고 있는 이들의 기척이. 그들의 영혼으로부터 은은히 흘러나오고 있는 긴장과 흥분, 살기 등의 감정이. '그들이로군.' 그가 침상에서 내려서는 것에 때맞춰 철방이 문을 조용히 열고 객실 안으로 들어왔다. "스무 놈이...객잔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십리묘이(十里卯耳)의 청각을 통해 접근하는 이들을 파악한 철방의 보고를 들으며 벽에 기대놓은 묵봉을 쥐자, 착 달라붙는 듯한 감촉과 함께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어떻...게 할까요?" 대도를 치켜들고 눈에서 혈광을 번뜩이며 스산한 살기를 흘린다. 감히 대형의 휴식을 방해하는 자에 대한 철방의 분노. 단 한 마디면 된다. 분노한 철방은 단 한 마디의 명령만으로도 곧바로 객잔 밖으로 뛰쳐나가 저들을 모조리 주살할 것이다. "기다려라." "...예." 마차에서와 같은 명령이 떨어질 것을 예상했던 철방은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조용히 대도를 거뒀다. 아무리 분노하고 화가 났다고 해도, 철방에게 대형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그 명령을 어긴다는 것은 꿈에서라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철방을 조용히 시킨 그는 감각을 집중했다. 아래층에서는 절름발이 점소이가 탁자에 턱을 기대고 꾸벅꾸벅 졸고 있다. 아까 전 밖으로 나간 붕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일 터. 객잔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이들의 손에는 각자 가죽주머니가 하나씩 들려있다. 그 주머니 안에 든 내용물은, 냄새만으로도 파악할 수 있다. '잘됐군.' 그가 준비해둔 안배가 생각했던 대로 흘러가고 있다. 그 안배의 끝에 있는 것은 그가 원하는 목적의 성취. 안배가 절정에 다다를 그때를 위해, 그는 침묵을 지키며 묵봉의 한쪽 끝을 천천히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그 손이 멈춘 순간, 그들의 본격적인 움직임이 시작됐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7 16:15:54 고친날 2005-06-07 16:15:54 읽은수 11707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8.사신강림(死神降臨).(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사신이 지상에 강림하니, 검은 하늘 공포로 가득하고 붉은 대지 죽음으로 뒤덮인다.- '따듯하다...' 서늘하던 밤공기가 어느 순간부터 점차 훈훈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낀 절름발이 금호는 잠결에도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다. '남국이 녀석이 장작불을 때웠나? 장작이 아까운데...아냐, 첫 손님들도 묵고 계시니 장작 정도야 얼마든지 때워드려야지.' 품속에 들어있는 은자에 흐뭇한 심정이 된 금호는 장작불 정도는 대범하게 넘어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훈훈한 공기가 뜨듯하게 되고, 그러다가 뜨끈뜨끈하다 못해 화끈화끈한 단계에 이르자 자신의 결정에 심각한 회의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 녀석, 장작을 너무 많이 쓰는 거 아냐? 아무리 첫 손님이라도 이건 심하잖아. 장작 값으로 돈을 다 날릴 생각도 아닐 테고...' 결국 장작의 덧없는 소비를 견디지 못하고 졸음에서 깨어난 금호는 눈을 비비며 탁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기껏 벌어놨더니만 이게 무슨 짓이야. 사방에 불을 다 때놓고." 사방에서 넘실거리고 있는 불길에 대체 장작 값이 얼마나 나가려나 계산해보던 금호는 문뜩 괴이한 점을 깨달았다. '뭐야, 왜 사방이 불타고 있어?' 졸음으로 인해 둔해진 금호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갔다. 자신이 잠든 곳은 분명 객잔인데, 사방이 불타고 있다면 그것은...! "허억!! 부, 불!" 한 순간 두 눈을 부릅뜨고 졸음을 벗어 던진 금호는 미친 듯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사방의 벽이 모조리 불타 들어가고 있고, 천장에까지 불씨가 옮겨가고 있다. 불을 끄기는커녕 이곳을 벗어나는 일조차 힘들 것 같다. "왜, 왜 또 불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전에 있던 객잔이 불탄 것이 바로 한달 전의 일 아니던가? 그래서 방화에 대해 얼마나 신경을 썼는데, 불씨 하나 하나에도 과민할 정도로 신경을 기울였는데 느닷없이 불이라니! "젠장, 젠장! 불이야!! 불이야!!" 불타 떨어지는 목패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쏟아낸 금호는 손님들을 깨우기 위해 있는 힘껏 소리질렀다. 워낙 외진 곳에 있는 남금객잔인지라 마을 사람들이 도와주길 기대할 수도 없다. 단지 자력만으로 이곳에서 탈출해야 한다. 몇 차례 더 고함을 지른 금호는 무림고수들이라면 쉽게 빠져 나올 수 있을 거라고 결론짓고 서둘러 구석에 놓여져 있던 물통을 집어들었다. 촤악-! 화재를 대비해 물통에 가득 차있던 물을 뒤집어쓴 금호는 이를 악물고 불길에 휩싸여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전의 그날 자신은 운 좋게 객잔 밖에 있었던 덕분에 화난을 피할 수 있었지만, 불타는 객잔에서 빠져 나온 것은 오직 남국 한 명뿐이다. 그나마도 얼굴이 온통 화상으로 망가지는 화상을 입고서. 겨우 물만 뒤집어쓰고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기를 기대하기는 힘들지만, 당장 빠져나가지 않으면 타죽을 판에 선택의 여지란 없다. 소매로 입을 막고 숨을 크게 들이쉰 금호는 그대로 숨을 가둔 채 불타는 문을 향해 절뚝거리며 뛰어들었다. 콰직! 생사의 위기에서 온 몸의 체중을 실어 밀어붙인 덕분인지 문짝이 금방 떨어져나간다. 그러나 문 주변에 가득한 화염의 열기에 몸에 부은 물은 순식간에 말라버리고, 그런 옷자락에 불똥이 사납게 튀어 오른다. 화륵! "으아아!!" 객잔을 빠져 나와 몇 걸음을 옮기기 무섭게 등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낀 금호는 곧바로 땅에 몸을 굴렸다. 제대로 먹지 못해 허약한 몸은 단지 몸을 굴리는 것만으로 온통 멍들었지만, 금호는 등에 붙은 불이 모두 꺼질 때까지 구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한참을 구르고 나서야 등의 열기가 사라진 것을 느낀 금호는 벌떡 몸을 일으켜 허겁지겁 주변을 살펴보았다. 혼자서는 객잔의 불을 끌 수 없으니 도움을 청해야 한다. 불행 중 다행으로 주변에 몇 명의 사람이 있는 것을 본 금호는 그들에게 달려갔다. "도와주세요! 불이, 불이...!" "저 새끼 진짜 질기네. 어지간하면 그냥 안에서 타죽지." 마악 도움을 청하려던 찰나 귀를 파고든 음성에 금호는 몸을 굳혔다. 이게 방금 불 속을 겨우 빠져 나온 사람에게 할 말이란 말인가? 아니, 그 이전에 왜 하필이면 여기 있는 게 저들이란 말인가? 죽봉을 들고 있는 걸개방의 무리를 확인한 금호가 주춤거리며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날 때, 그들은 무척이나 짜증나는 표정을 지으며 서로 대화를 나눴다. "이 새끼도 잡아가야 하나?" "당주께서 죽으면 어쩔 수 없지만, 살아있으면 잡아오라고 하셨으니 잡아가야지." "더럽게 귀찮게 시리...그냥 도로 처넣으면 안되나?" "그러다 걸리면 끝장이라고. 정 귀찮으면 내가 잡아갈게."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그들의 대화를 듣던 금호는 무언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걸개로써 살아오며 자연스럽게 생긴 본능적인 예감이 그에게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뒤에 있는 것은 불길에 휩싸인 객잔이고, 앞에 있는 건 걸개방의 무리들이다.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본능의 경고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 "기껏 기름칠까지 해서 불질러줬으면 타죽어 주는 게 예의 아니겠냐, 이 병신새끼야." 혼란에 빠져있던 금호는 한 걸개가 다가오며 한 말에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기름칠? 불질러? 어디에? 뭐를? 객잔에 기름칠을 해서...불질렀다고?' 시작은 혼란, 중간은 경악, 끝에 남은 것은 바로 분노였다. "이...이 개자식들!!" 금호는 두 주먹을 움켜쥐고 걸개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무술이라고는 배워본 적도 없는 절름발이의 주먹은 걸개에게 스치지도 못했다. 오히려 걸개가 내지른 죽봉에 의해 나가떨어진 금호는 처절한 고함을 토해냈다. "왜, 대체 왜?!" "허, 이놈 좀 보게. 네가 감히 외부인을 끌어들여 걸개방의 식구를 해치고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했냐?" 뒤통수를 크게 맞은 듯한 충격이 들었다. 걸개들을 파죽지세로 날려버린 철방을 안내하고, 싸움에 말려들게 하고, 묵게 했다. 이 중 하나만 하더라도 걸개들에게는 객잔을 불태우고도 남을 충분한 이유가 됐을 것이다. "그리고, 너 같은 병신새끼 소굴은 빨리 없어지는 게 세상을 위해서라도 이롭지 않겠냐?" 걸개가 이죽대며 한 말이 결정타였다. 저들에게 애초부터 이유 같은 것은 필요 없었다. 그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러니까 불태운 것뿐이다. 손님을 안내하지 않았어도, 말려들게 하지 않았어도, 묵게 하지 않았어도 언젠가는 심심풀이로라도 불태웠을 것이다. 이것은 단지 그 계기가 된 것뿐. 금호는 멍하니 불타는 객잔을 바라보았다. '남국의 남에, 금호의 금을 해서 남금객잔이야. 근사하지? 언젠가 남금객잔에 천하제일객잔이 되면 우리 이름도 만천하에 떨쳐지는 거라고.' 친우와 함께 열심히 객잔을 보수하고 간판을 달며 반은 농담으로, 그러나 반은 진담으로 언젠가는 천하제일객잔이 될 거라고 호언장담했던 남금객잔이 불타오르고 있다. 그와 친우가 함께 키워온 천하제일객잔의 꿈이, 그렇게 잿더미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 새끼 맛이 갔나봐?" "끌고 가기 쉬워서 잘됐지 뭐." "하, 맞는 말이네." 두 걸개가 시시덕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 걸개에 의해 끌려가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불타오르는 남금객잔의 간판에서 눈을 때지 않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것만이 금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이었다. 금호가 걸개에게 끌려 사라지자 남은 걸개들은 다시 객잔을 향해 시선을 모았다. "그나저나 고수란 새끼는 언제 나오는 거야?" "안 나오다가 알아서 타죽으면 우리야 좋지 뭐." 이미 동료 여섯이 처참하게 박살나고 그들 중 세 명이 죽은 전적이 있지만, 걸개들의 걱정은 그리 크지 않았다. 당시 여섯 동료 중 둘은 죽봉이 없었다고 하니, 필시 방심하다가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당했을 터이다. 지금 이곳에 있는 걸개들은 모두 그 여섯보다 한 수 위의 실력이 있고, 진법을 펼칠 준비 또한 완벽하다. 진법만 제대로 펼쳐지면, 고수가 아니라 일류고수가 나선다 해도 때려잡을 수 있다. 그때, 한 걸개의 눈에 문뜩 불길에 휩싸인 문 안쪽에서 무언가가 어른거리는 것이 비춰졌다. "온다!" 동료의 외침에 걸개들은 더욱 긴장감을 높이며 죽봉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문을 주시하던 그들의 긴장이 최고조에 이른 순간, 객잔의 2층의 벽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7 16:16:17 고친날 2005-06-07 16:16:17 읽은수 11235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8.사신강림(死神降臨).(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퍼어엉! "위?!"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으로부터의 공격에 걸개들은 당황을 금치 못하면서도 반사적으로 죽봉을 휘둘러 불이 붙은 벽의 파편을 튕겨냈다. 그때, 갑자기 객잔의 문으로부터 불길을 뚫고 한 명의 거한이 튀어나와 그 자신만큼이나 커다란 대도를 휘둘렀다. 촤아악! "컥...!!" 위쪽에 신경 쓰느라 앞쪽에 대한 방비가 소홀해졌던 한 걸개의 허리가 무지막지한 거력에 의해 양단 됐다. 절단된 부위에서 허연 내장이 쏟아져 나오는 시체를 차버린 철방을 대도를 있는 힘껏 앞을 향해 내던진 뒤 양팔을 사방으로 휘둘렀다. 파바바밧! "크윽! 비수다!!" "모두 조심...!" 철방의 양 소매를 너덜너덜하게 찢으며 튀어나온 사린비는 걸개들의 무자비하게 살을 가르고 틀어박혔다. 재수 없는 한 걸개는 목에 사린비가 틀어박혀 그대로 나자빠졌지만, 철방이 던진 대도에 그대로 몸이 꿰어진 걸개에 비하면 무척이나 양호한 죽음이다. "어서 진을 펼쳐라!!" 눈 깜짝할 사이에 세 명의 동료를 잃자 한 걸개가 다급히 고함을 질러 동료들을 진정시키려 했다. 헌데 그때, 그 걸개의 머리 위로 무언가 희고 긴 것이 내려 박혔다. 콰드드득!! 두개골을 박살내고 그 안의 뇌를 휘저으며 내려간 뼈의 창은 목과 가슴을 관통해 내장을 모조리 찢어버린 뒤 사타구니에서 빠져 나와 땅에 깊이 틀어박혔다. 칠공에서는 피가 한가득 흘러내리고, 두 눈알은 반쯤 튀어나온 데다가 혀를 길게 빼문 걸개의 모습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더구나 정수리 위로는 섬뜩할 정도로 희고, 사타구니 아래로는 구역질 날 정도로 붉은 색으로 물든 골창에 꼬치처럼 관통돼 허수아비와 같이 땅에 세워져있는 모습은 그들에게 오싹한 공포를 느끼게 했다. "크하하! 모두 뒈...져라!!!" 두 눈에서 시뻘건 혈광을 뿜어내며 시체에 꽂힌 대도를 손에 쥔 철방이 그대로 손을 움직이자,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어마어마한 괴력에 의해 시체를 그대로 쪼개며 빠져 나온 대도는 공포에 질려있던 한 걸개에게 내려쳐졌다. "진을 펼쳐! 이대론 다 죽어!!" 바닥에 몸을 굴려 가까스로 철방의 대도를 피해낸 걸개는 죽봉으로 철방의 손목을 후려치며 필사적으로 고함을 질렀다. 오공갑피의 반탄력으로 걸개의 죽봉을 튕겨낸 철방은 대도의 칼자루로 걸개의 안면을 후려갈겼다. 콰직! 코가 부러지는 정도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안면에 통째로 함몰되고 눈알이 튀어나왔다. 두말할 필요 없이 완벽한 즉사다. 그 걸개가 죽기 전에 한 유언 덕분인지, 남은 걸개들은 정신을 차리고 철방을 중심으로 팔방걸개진을 펼쳤다. 원래 있던 스무 명 중 한 명은 금호를 끌고 가고, 네 명은 죽어 열 다섯 명만이 남았지만 팔방걸개진은 여덟 명만 있어도 펼칠 수 있는 진이었기에 거의 제대로 펼쳐진 셈이다. "경천동지(驚天動地)!" 한 걸개의 구령에 맞춰 네 개의 죽봉이 아래에서 위로, 나머지 네 개의 죽봉이 위에서 아래로 휘둘러지며 철방의 몸을 노렸다. 철방은 절세의 보검이나 검기 정도가 아니라면 상처하나 나지 않는 육신을 믿고 맨몸으로 죽봉을 모조리 받아내며 한 걸개를 향해 대도를 휘둘렀다. 타다다닥! 부우웅! 죽봉이 모조리 튕겨 나오고, 대도가 헛되이 허공을 갈랐다. 그 결과는 무승부. 걸개들의 죽봉은 철방을 오공갑피를 파괴하지 못했지만, 철방의 대도 또한 죽봉을 손에서 놓고 뒤로 물러나 대기하던 동료와 교대한 걸개를 베지 못했다. "팔방풍우(八方風雨)!" 철방을 철포삼의 고수로 판단한 걸개들은 사방에서 죽봉을 찔러댔다. 그야말로 팔방에서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만 같아 아무리 조문을 잘 숨겨도 일격을 허용할 수밖에 없을 듯만 싶었다. 허나 철방은 애초부터 조문이라고는 존재하지도 않는 육신갑의 외가고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헛된 공격은 팔방걸개진에 그만큼의 빈틈을 만들어냈다. "하아앗!!!" 대도로 커다란 원을 그려 귀찮은 죽봉을 떨쳐낸 철방은 손톱에서 철랑조를 뽑아내며 앞을 향해 튀어나갔다. 뒤에서 견제를 하고 있던 몇 명의 걸개가 죽봉을 뻗어왔지만, 철랑조는 죽봉을 그대로 쪼개며 두 걸개의 목에 틀어박혔다. "끄르륵...!" 콰득, 콰드득! 철방이 입에서 피거품을 토해내는 두 걸개의 목뼈를 틀어쥐고 단번에 뽑아내자, 그 무시무시한 힘에 살벌한 소리와 함께 척추가 목뼈에 딸려 뽑혀 나왔다. 그것을 본 걸개들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지만, 철방은 그들과는 정 반대로 살기로 가득 찬 미소를 지었다. "대형을 해치려한 놈...들은 가만두지 않는다." 허공을 가르며 거칠게 휘둘러진 두 개의 척추가 한 걸개의 팔과 목에 감겨들었다. 방금 전까지도 동료의 일부이던 척추에 의해 신체가 감겨진 걸개는 기겁하며 죽봉으로 척추를 후려쳤지만, 철방의 체내에 흐르는 귀기에 반응해 잠시나마 사이한 힘을 지니게 된 척추는 마치 철편이라도 되는 양 도통 부서져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능지처참...해주마!" 척추에 묶여있던 걸개의 두 눈이 부릅떠지고, 다른 걸개의 죽봉이 다급히 철방의 몸과 척추를 후려쳤다. 그러나 철방은 그들의 방해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척추를 손에 휘어 감으며 양 팔을 좌우로 넓게 펼쳤다. "컥, 크어억...!!" 콰득...콰직! 촤아악!!! 뼈가 탈골되고 살이 뜯어지는 잔혹한 소리와 함께 머리가 통째로 뜯겨져 나왔다. 그냥 자른 것도 아니고, 맨손으로 척추를 당겨 사람의 머리를 뜯어내 버리는 철방의 힘은 그야말로 공포요, 절망이었다. "이, 인간이 아니야..." 아무리 무림고수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는 하지만, 능력여부를 떠나 저 잔학성은 이미 인간의 범위에 속해있지 않다. 걸개들의 마음속에 음습한 공포가 자리잡았다. 협객이라면 죽을 것이 뻔하다고 해도 협의지도를 위해 불 속에라도 뛰어들 수 있고, 사마외도라면 강함에 대한 갈망으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라도 칼을 휘두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힘으로 약자를 내리누르기 위해 무공을 배운 것이지, 자신들의 목숨을 위협할 정도의 강자와 싸우다 죽기 위해 배운 것이 아니다. 무인이 아니라 그저 무공을 배운 하오배의 무리에 불과한 그들에게 있어, 더 이상 이 인간 같지도 않은 괴물에게 달려드는 것은 미친 짓에 불과하다.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일제히 몸을 돌려 철방으로부터 달아나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괴물이라도, 이렇게 사방으로 달아나면 최소한 몇 명은 살아 남을 수 있을 거라는 얄팍한 생각. 그 어리석음의 대가는 결코 작지 않았다. "크윽...눈, 내 눈이!!" "다리가...다리가 갑자기 안 움직여!" 사방을 향해 도주하던 걸개들은 어느 순간부터 혼란에 빠져들었다. 어떤 걸개는 갑자기 시야가 새까맣게 변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어떤 걸개는 발이 바윗덩어리처럼 바닥에 달라붙어 자신의 다리를 땅에서 때어내려고 애썼다. 그 외에 갑자기 체력이 물이 새듯 빠져나가 털썩 쓰러져버린 걸개나 계속 달리며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걸개, 또는 전신에 하얀 서리가 내린 채 기는지 걷는지 구분이 모호한 달리기로 계속 도주하려는 걸개도 있었다. 그들은 보지 못했지만, 그들에게는 스산한 기운을 품고있는 원령들이 달라붙어 사악한 저주를 내리고 있었다. 결국 저주에 의해 제대로 도망치지도 못한 걸개들을 사린비로 처리한 철방은 대도를 거두고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처리...끝났습니다. 대형." 철방의 인사를 받으며 걸개들의 사체로부터 원령을 거두어들인 그는 금호가 끌려간 마을의 중심부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하늘에 저편에서 가득 느껴지고 있는 것은 분노, 광기, 악의, 증오 등의 온갖 음한 감정들의 기운. 정심하지 않은 범인이라면 단지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휘말려 오염돼버리는 무자비한 소용돌이. 기다리던 것이 찾아왔음을, 기다리던 때가 됐음을 느낀 그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다. 그가 마을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주문을 읊조리자, 철방은 더욱 큰 싸움을 느끼고 주먹을 우두둑 움켜쥐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의 뒤에 남겨진 십여 구가 넘는 사체는, 조금씩 몸을 꿈틀거리며 자신의 안에 들어있는 무언가를 서서히 끄집어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7 16:16:44 고친날 2005-06-07 16:16:44 읽은수 11688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8.사신강림(死神降臨).(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한편, 금호를 질질 끌고 가던 걸개는 무슨 이유인지 밤중에도 가득 모여 있는 마을주민들의 인파를 뚫고 들어갔다. 그러나 금호의 머리 속에는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일생일대의 꿈과 희망으로 여겨온 남금객잔이 불타버린 이상, 모든 것이 허망하게만 느껴졌다. 그때, 걸개가 갑자기 금호를 땅에 내던졌다. 힘없이 끌려만 가던 금호는 그대로 땅에 머리를 찧고 몇 바퀴 구른 뒤에야 주변을 멍하니 돌아보았다. 왠지 모를 사나운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는 주민들, 비웃음 가득 담긴 눈을 한 걸개들, 피투성이가 된 채 땅에 쓰러져 있는 남국. 주민과 걸개들까지만 해도 그저 혼란스러워하던 금호는 마지막 남국을 보자 두 눈을 부릅뜨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남국아!!" 금호가 절뚝거리며 남국에게 다가가자 그 뒤에 있던 걸개가 죽봉을 들어 올렸지만, 걸개들의 중심에 느긋하게 버티고 있던 한 걸개가 손을 내젓자 죽봉을 다시 내려놓았다. 웅크려있던 남국의 몸을 끌어안은 금호는 더듬더듬 목을 짚었다. 너무 급하기 짚는 바람에 처음에는 맥을 찾지 못했지만, 가까스로 제대로 된 맥을 짚고 아직 살아있음을 확인한 금호는 죽었던 부모가 살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크게 안도했다. "남국아, 남국아!" "으..으..." "괜찮아? 괜찮냐고!" 혹시 상처가 도질까 싶어 조심스럽게 남국을 깨운 금호는 서둘러 상태를 물었다. 고아에 거지로 살아오면서 죽는 인간을 숱하게 봐온 만큼, 다쳤을 때 바로바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죽을 확률이 높다는 것은 경험으로 한다. 그러기 위해 일단 어딜 얼마나 다쳤는지 확인해야 한다. 만약 내장이라도 상했다가는 치료고 뭐고 할 것도 없이 그대로 끝장이다. "으으..." 신음소리를 흘리던 남국이 떨리는 팔을 들어 자신의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자, 그것을 확인한 금호는 망연자실해버렸다. 남국이 자신에게 준 것은, 피투성이로 물들어있는 은자 조각이었던 것이다. "이 바보자식! 누가 이런 은 쪼가리에 목숨걸래!" 버럭 고함을 지르긴 했지만, 그 심정은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어찌 모르겠는가? 남금객잔의 꿈을 같이 키워온 친우의 심정은 그 자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는 않을 터인데. "음...친구들끼리 우정이 꽤나 좋군." 누군가의 음성에 움찔 고개를 들어올린 금호는 이를 악물었다. 갈대같이 비쩍 마른 몸이긴 하지만, 7척의 장신과 날카로운 눈매가 상당한 압박감을 느끼게 하는 걸개. 오래 전에 스치듯 보긴 했지만, 기억이 확실하다면 분명 걸개방의 당주라는 개자식이다. "이 개새끼! 겨우 은자 반쪽 때문에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음. 말이 험하다." 퍼억! 당주가 손가락 하나를 까딱이자 옆에 있던 한 걸개가 죽봉을 휘둘러 금호의 등을 후려갈겼다. 그야말로 등이 분질러지는 듯한 통증에 눈앞이 깜깜해지는 듯 했지만, 이를 악물어 흘러나오려는 신음조차 막은 금호는 독기어린 눈으로 당주를 노려보았다. "음.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다." 퍼벅! 손가락이 두 번 까딱이고, 두 개의 죽봉이 등을 후려쳤다. 약한 몸을 지닌 금호로써는 정말 뼈가 부러져도 당연할 정도의 타격. 그러나 금호의 눈빛은 조금도 수그러들 줄 몰랐다. "음. 독기 하나는 쓸만하군." 이 정도면 적당하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손가락 까딱이는 것을 멈춘 당주는 주변에 있는 주민들을 살핀 뒤 슬쩍 말을 덧붙였다. "흐음...그 정도 독기가 있으니까 예전에 있던 객잔을 모두 불태울 수 있었겠지." "뭐?" 순간 금호의 안면에 어처구니없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정말 끔찍한 사고였다. 불구자도 아무런 차별 없이 거두어 일하게 해주었던 주인내외를 비롯해 객잔에 묵고 있던 손님들까지 모조리 불타죽은 사고. 다른 이들이 다 죽은 와중에 단 둘만 살아남았다고 얼마나 멸시와 천대를 받았던가. 그런데 객잔을 불태우다니? 누가? "흠! 네놈 둘이 작당하고 객잔에서 돈을 훔친 뒤 불을 질러 증거를 인멸한 것은 이미 낱낱이 밝혀졌다." "무슨 헛소리야, 이 개자식아! 그렇게 이 은자가 탐나냐?!" 당주가 겨우 은자를 갈취하기 위해 억울한 누명을 씌우려 하자 금호는 자신의 은자와 남국의 은자를 모조리 당주에게 던져버렸다. 아무리 돈이 귀하다고 해도, 금호 자신과 남국의 목숨에 비하면 푼돈에 불과하다.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다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는 언젠가 찾아올 테니까. 그런데, 당주는 금호가 던진 은자를 그대로 손등으로 튕겨내버리며 노성을 내질렀다. "흐음! 네놈이 감히 훔친 돈으로 나를 매수하려고 하는 거냐?" "훔친 돈? 매수?" 금호의 머릿속이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은자를 쳐내다니, 돈이 목적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럼 대체 왜 자신들에게 이런 누명을 씌우는 것인가? "흠! 아무래도 반성의 기미가 없구나. 여봐라." "예, 당주님." "음. 저놈을 매우 쳐라. 죽이진 말고." "예!" 당주의 명령을 받은 걸개들은 죽봉을 휘둘러 마구잡이로 금호를 패기 시작했다. 금호는 이미 몸이 크게 상한 남국을 감싸느라 막거나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개처럼 두들겨 맞으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한테 누명을 씌워서 대체 뭘 얻겠다는 거지?' 그들은 그야말로 하찮은 불구자에 불과하다. 가치라고는 거의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바로 그들이 지닌 가치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불구자이며, 힘없는 약자라는 것. 아무리 억울하다 하소연해도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고, 누명을 벗을 수 없다는 희생양이 바로 그들의 가치라면? "음, 그만." 죽봉을 거두게 한 당주는 전신이 멍으로 물든 금호를 보고 흡족해했다. 일부러 크게 상하지 않도록 했으니, 이 일을 마무리 짓기에는 저 정도 상태가 딱 좋다. "흐음, 네놈들의 죄가 하늘에 닿고, 악독한 심성은 수라마귀와 같으니 살려둔다 해도 이 세상에 해가 되면 해가 되지 득은 안 될 것은 분명하다." 일부러 모두 들으라는 듯 큰 음성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린 당주는 주변에 있던 주민들을 쓱 둘러보았다. "내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여러분?"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주민들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금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무력을 지닌 걸개방이 이러저러하다고 했으니 그냥 그렇다고 여기는 것이다. 어차피 금호나 남국 같은 불구자 걸개 따위가 정말 범인이든, 누명을 뒤집어썼든 걸개방에게 대항하면서까지 그들을 변호해줄 이유는 없으니까. "음! 그럼 이 천인공노할 놈들을 가만 둬서야 쓰겠소?" "당연히 안 되지요." "저런 놈들은 당장 쳐죽여야지!" 주민들 가운데서 몇 명의 대답과 함께 작은 돌멩이가 날아들어 금호의 머리를 치자, 내심 반신반의하며 웅성거리던 주민들은 서서히 마음을 고쳐먹었다. 하기야, 그 마음 좋던 주인내외의 객잔에 불을 질렀다면 정상적인 놈들일 리가 없다. 저렇게 몸이 삐뚤어지듯 마음도 삐뚤어진 놈들이니 거둬준 은혜도 모르고 객잔에 불을 지른 게 아니겠는가? "저런 몹쓸 놈들. 내가 저놈들 어릴 때부터 저럴 줄 알았어." "저 붕대자식은 내가 보기만 하면 마주 노려봤다니까." "천벌을 받을 놈들 같으니!" 웅성거리던 소리가 점차 고함으로 바뀌며 사방에서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손톱 만한 작은 것에서부터 주먹만한 것까지 수많은 돌멩이가 금호와 남국의 멍든 육신을 치고, 살을 찢으며 피를 흘리게 했다. 그러나 금호에게 육신의 고통보다 더한 것은 마음의 고통이었다. 어릴 때부터 평생을 자라온 마을이거늘, 몸은 바르지 않더라도 마음만은 언제나 똑바르게 행동해왔음을 자신했거늘 주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고아이기 때문에? 거지이기 때문에? 불구이기 때문에?' 한스러웠다. 진정 한스러웠다. 고아로 태어나고 싶어서 고아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거지로 살고 싶어서 거지로 산 것이 아니다. 불구가 되고 싶어서 불구가 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고아인 것이, 거지인 것이, 불구인 것이 죄란 말인가? '단지, 힘이 없기 때문에?' 그저 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이토록 천대받고, 멸시받아야 하는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누명을 씌운 걸개들이, 그저 자신들보다 약하다는 이유로 가학적인 욕구를 쏟아내는 주민들이, 무엇보다 친우하나 지켜줄 힘이 없는 그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8 00:14:04 고친날 2005-06-08 00:14:04 읽은수 11203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8.사신강림(死神降臨).(4)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힘만, 우리에게 힘만 있었어도...' 찢어진 이마에서 흘러나온 피가 금호의 눈물과 섞여 피눈물이 된다. 남국의 얼굴을 감고 있는 피로 물든 분대에도 짜디짠 눈물이 스며든다. 한스럽고 한스러웠지만, 그래도 친우와 꿈에 의지해 꿋꿋하게 살아온 그들의 삶은 그 끝조차 한스러웠다. 그런데 그때, 한줄기 무심한 음성이 그들의 귀로 파고들었다. "힘을 원하는가?" 수많은 주민들의 고함으로 인해 시끄러운 와중에도 칼날과 같이 정확히 파고든 음성에 금호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주민들이 주춤주춤 좌우로 물러나 만들어진 길 저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흑의장포의 사내가 보였다. 단지 음성만으로, 존재감만으로 모든 주민을 침묵시키고 마을에 정적을 가져온 그가 금호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겨왔다. "힘을 원한다면, 주겠다." 금호의 눈에 힘이 들어간다. 남국의 몸이 떨린다. 거짓인지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힘을 원하느냐는 말. 힘을 주겠다는 말. "대신, 나를 따라라." 금호와 남국의 시선이 교차했다. 선택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힘을...주세요!" 약함이 죄라면 약해지지 않으리라. 더 이상 한을 쌓기만 하지는 않으리라. 강함이 정의라면 강해지리라. 한을 쌓느니 풀어버리리라. 설령, 그 길이 지옥으로 향한다 하여도 더 이상 약자로 남지는 않으리라. "계약은, 성립됐다." 무심하게 계약의 성립을 확인한 그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미리 준비해뒀던 주문을 외우며 묵봉을 땅에 내리찍었다. 촤아아악!! 주변에서 갑자기 새하얀 무언가가 솟아나 주변을 뒤덮자 금호는 흠칫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알처럼 주변을 감쌀 뿐, 금호와 남국에게 특별한 해를 끼치지는 않았다. 한 가지 꺼림칙한 점이 있다면 그것이 다름 아닌 뼈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이었지만, 그게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흑의사내가 손을 써 만든 것임을 직감한 둘에게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흠, 배교의 술사시오?" 가만히 돌아가는 판을 지켜보고 있던 당주는 상당히 신경 써 입을 열었다. 분위기부터가 그랬지만, 저런 기괴한 주술을 사용하는 이를 건드려서 좋을 것 없다. "음...걸개방의 일에 참견하지 말아주시면 좋겠소만." 모르는 이는 모르지만, 걸개방은 최근 들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문파다. 정파라면 몰라도 사파인 배교라면 이득이 걸린 이상 굳이 충돌을 원하진 않을 것이다. 헌데 어째서인지 흑의사내는 계속해서 침묵을 지켰다. 침묵은 무언의 긍정이라는 말도 있지만, 저건 아무리 생각해도 긍정이 아니다. 당주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몇몇 걸개들이 흑의사내와 거리를 좁혔다. 술사에게 시간을 주면 그만큼 골치 아파지는 것도 없으니, 일이 틀어질 듯싶으면 바로 쳐야한다. "흠...뭐, 정 간섭하겠다면 나로써도 어쩔 수 없소." 일단 제압을 하든 죽이든 하고 대화를 나눠야겠다고 판단한 그가 손가락이 까딱이자, 걸개들이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음?' 그의 손이 까딱이자, 걸개들의 입이 벌어졌다. '음...기강이 엉망이군.' 결국 참다못한 그가 육성을 내려던 찰나, 식은땀을 흘리던 걸개들이 일제히 손을 들어 그의 뒤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뒤, 뒤...!" "흠?"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본 당주는, 자신의 머리 바로 위에 멈춰있는 거대한 대도를 확인하고 그대로 굳어버리고야 말았다. "계속 손장난 쳐보지...그러냐?" 그에게 시선이 쏠린 틈을 타 지주족장으로 귀신과 같이 접근해온 철방이 말과 함께 스산한 핏빛 안광을 흘렸다. 신력을 타고난 그가 쓰기 위해 특별히 무겁게 만든 대도인 만큼, 이대로 힘을 빼기만 해도 그 무게만으로 머리를 쪼갤 수 있다. "자...모두 대형 주변에서 비켜라. 아니면 이...새끼 목 따지는 거 보든가." "크흠! 모두 물러서라!!" 진심의 정도를 넘어 '웬만하면 그냥 비키지 마라'는 기색이 팍팍 묻어나는 철방의 말에 당주는 다급히 걸개들을 물렸다. 철방은 굳이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대형께서 일단 제압만 하라고 해서 살려두고 있지만, 감히 대형께 무례를 범한 이 거지새끼는 반드시 죽여야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놈들, 숫자 많다고 은근슬...쩍 도망쳤...다가는 뒤끝이 안...좋을 거다." 그렇지 않아도 뭔가 심상치 기색을 느끼고 슬금슬금 물러나려던 주민들이 찔끔해하며 발을 멈추자, 철방은 그럭저럭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대형...제압 끝냈습니다." 철방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던 당주에게 다가갔다. 그렇지 않아도 배교의 술사가 대체 왜 이렇게 자신을 핍박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당주는 그의 접근을 기꺼이 반기며 입을 열었다. "음...이보시오. 내가 혹시 뭔가를 잘못했다면 사과하오. 혹시 뭔가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지 말씀해보시오." "누명을 씌운 이유는?" 당주는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지나갔다. 배교의 술사와 두 거지새끼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듣긴 했지만, 그게 설마 이런 추궁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 '대체 저 두 꼬맹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당주의 머리 속에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보니 자신의 뒤에 있는 거한은 아까 전 걸개들을 주살했다는 바로 그 작자가 아닌가? 이들이 한패라면 아까 전에 보낸 스무 명의 걸개들은 거한과 흑의사내를 같이 공격했을 터. 무림고수와 배교의 술사를 같이 공격했으니 전멸했을 것은 뻔하고, 더불어 걸개방에 대한 반감까지 샀을 것이다. "대형께서...묻고 계시지 않느냐!" 철방이 노성과 함께 대도를 더욱 가까이 밀착시키자 당주는 다른 생각을 뒤로 미루고 서둘러 입을 열어 답변했다. "음...누명이라니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구려. 저 두 놈은 천벌을 받아 마땅한 놈들이오! 아마 저 두 악도들이 대인께 무언가 거짓을 아뢴 것 같소만..." "손가락을 분질러라." "예...대형."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던 당주의 눈이 커졌다 싶은 순간, 철방의 솥뚜껑만한 손이 바짝 마른 그의 손가락 몇 개를 통째로 움켜쥐었다. 우두둑! "크아악!!" 네 개의 손가락이 통째로 바스러져버린 당주는 그대로 기절할 듯 입에 게거품을 물었지만, 뭉개진 손가락을 쥔 채 주먹을 우두둑거리는 철방 덕분에 기절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누명을 씌운 이유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무심한 음성으로 다시 한 번 똑같은 물음을 던진 흑의사내의 모습에 당주는 공포에 질려버렸다. 이 사내는 자신이 대답을 할 때까지 전신의 뼈를 모조리 분지를만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크흑...마, 말하겠소. 말하겠으니 그만 두시오." "손가락을 분질러라." "예." 당주의 두 눈이 부릅떠지고, 철방의 손이 아직 손가락이 멀쩡한 손을 움켜쥐고 힘을 가했다. "크억, 크어억!" 대답을 하겠다고 응했음에도 불구하고 양손의 손가락 중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모든 손가락이 분질러진 당주의 귀에 다시 한 차례 무심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누명을 씌운 이유는?" "그, 그건...헉, 허억...민심, 민심을..장악하려고..." 더 이상 머리를 굴리고 말 것도 없이 턱을 덜덜 떨며 답을 한 당주는 흑의사내가 더 이상 명령을 내리지 않자 죽었다 살아난 듯 안도했지만, 그 안도는 너무 일렀다. "팔을 분질러라." "뭣...?! 으아악!!!!" 이번에도 단지 악력만을 이용해 뼈를 분지르는 정도를 넘어 아주 으깨버린 철방은 손으로 당주의 뺨을 찰싹찰싹 때려 정신이 들게 했다. "누명을 씌운 이유는?" "크, 크...으윽...주민들이 저...둘을 죽이면, 흐으, 흐으...그 뒤처리를 빌미로...주민들을 장악해 걸개방의 터전을...후우....확실하게 하기 위해....그랬소." 공포와 고통에 질려 대답을 하면서도 당주는 이 다음에 흑의사내가 무슨 말을 할지 느끼고 있었다. "다리를 분질러라." "크억...!" 다리가 분질러지는 통증에 신음과도 같은 비명을 토해내며 당주는 몸을 떨었다. 이 사내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에게나 사용되는 계략이나 심리 따위는 아무것도 소용없는 괴물. "누명을 씌운 이유는?" "컥, 커억...춘풍객잔에 불을 지른...것이, 큭...우리 걸개방의 짓이라는...것을 감추기 위해...그랬소. 허억, 허억...더는 없소...정말, 정말이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8 00:14:25 고친날 2005-06-09 05:49:00 읽은수 11198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8.사신강림(死神降臨).(5)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당주가 절규하듯 쏟아낸 진실을 들은 금호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그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오직 단 한 가지뿐. '저런 죽일 놈.' 철천지원수도 저런 철천지원수가 없다. 객잔을 불태우고, 그것도 모자라 누명까지 씌워? 금호의 입장에 있어서는 저 당주라는 놈도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탈을 쓴 금수나 마귀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아니, 저놈만이 아니다.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임에도 모른 척 하는 걸개들이나, 당주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주민들도 마찬가지다. 방금 전까지 무고한 사람에게 매질한 것은, 돌을 던진 것은 누구였던가? 그런데도 죄책감이나 동정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눈. 자신들은 단지 속은 것뿐이고, 마찬가지로 피해자이니 죄진 것 하나 없다는 듯한 모습. 단지 약자의 생존방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역겹다. 그 자신에게 있어서는 저들 또한 강자이고, 언제나 강자의 횡포를 부려왔음에도 이제 와서 약자에 불과한 듯 뻔뻔스러운 저들이 너무나도 역겹다. "그런가." "그, 그렇소. 그게 진실이오." 마침내 다른 말이 나온 것에 눈물까지 흘리며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는 당주로부터 철방이 대도를 치우자, 그는 그대로 무너지듯 주저앉아 숨을 헐떡거렸다. '좋군.' 금호와 남국의 한이 더욱 깊고도 한스럽게 쌓이고 있음을 느낀 그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묵봉을 휘둘렀다. 칠흑과 같은 묵봉이 밤의 어둠에 묻히는 와중에 기이할 정도로 눈에 확연히 비춰 들어온 은빛 섬광이 하나의 반원을 그렸다 싶은 순간, 당주의 목에 가는 선이 생겨났다. 툭. 촤아악! 당주의 비쩍 마른 머리가 땅에 떨어져 내리며 주저앉은 몸으로부터 붉은 핏줄기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모습은, 묘한 마력으로 주변에 있던 다른 이들의 시선을 속박했다. 눈을 돌리고 싶어도 눈을 돌리지 못한 채 피가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목이 떨어져나간 당주의 머리가 눈을 껌뻑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던 주민들의 시선이 마치 누군가에게 홀리듯 바로 그 옆으로 향했다. 바람 한 점 불고 있지 않음에도 마치 귀신의 옷자락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흑의장포. 시체보다 더욱 시체같이 창백하기 그지없는 손. 기다란 검은 몸체 끝에, 피 한 방울도 묻지 않고 달빛을 반사하는 길게 휘어진 은빛 칼날. '저것'은 아무도 본적 없는 것이다. '저것'은 누구도 듣지 못한 것이다. '저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다. '저것'은 언젠가 봐야 하는 것이다. 보지 못했다. 듣지 못했다. 그러나 본능은 알고 있다. 언젠가는 반드시 봐야만 하는 것. 그러나 산자는 볼 수 없으며, 그렇기에 그 누구도 진정한 실체를 알지 못하는 것. 그것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고,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죽음' 자체이자 그 대변자. 모든 산자는 죽음으로 인도하는 자. 지상에 강림(降臨)한 사신(死神)이었다. 사신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신의 손에 들려진 거대한 낫이 춤을 췄다.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은빛의 낫은 어둠을 가르며 빛줄기를 남겼고, 은하수처럼 허공을 흐르던 빛줄기는 땅에 떨어져서야 담고 있던 달빛을 잃고 붉은 선혈로 돌아왔다. 하나, 둘, 셋...십여 명 가량의 걸개들 중 절반 이상이 사신의 춤에 목숨을 잃을 때까지도 그들은 그저 망연히 지켜볼 뿐이었다. 사신의 낫이 일곱 번째 걸개의 목을 자르고, 하나의 거대한 대도가 여덟 번째 걸개의 머리를 그대로 박살낼 때서야 그들은 사신이 뿌리는 죽음과도 같이 절대적인 마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마력에서 벗어난 그들에게 찾아온 것은, 차라리 마력에 빠져있을 때가 더 나았을 정도로 끔찍한 공포. 사방에 가득한 피비린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머리, 마치 춤을 추듯 계속해서 목을 베고 있는 사신과 거대한 대도를 휘두르는 흉악한 악귀.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지옥 그 자체였다. "꺄아악!!" "흐헉!" 주민들은 몸을 돌려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한다. 살아있는 자로써 마땅히 지니고 있는 생존본능이 그들의 몸을 움직이게 만든다. 죽음을 피하기 위한 몸부림. 그러나 그 끝에 있는 것은 언제나 죽음일 뿐. 퍼억!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온 죽봉이 포목점을 하고 있는 방씨의 머리를 깨트려 허연 뇌가 드러나게 했고, 성실한 농부이던 황씨의 몸을 꿰뚫었다. 주민들의 몸이 멈추며, 그들의 눈에 경악과 공포가 떠올랐다. 그 죽봉을 쥐고 있는 것은 군데군데 피와 살점이 남아있는 해골. 두개골이 깨지고 뼈에 금이 가 얼마나 험하게 죽었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이십여 구의 해골이 그들을 포위하고 있다. 사신을 따르는 저승사자일까? 아니면 지옥에서 떠돌던 악귀일까? 확실한 것이 있다면, 오직 그들에게 죽음을 가져다줄 존재라는 사실뿐. "으으으..." 도피처를 잃은 주민들은 밖으로 가지도 못하고 안으로 가지도 못한 채 서로 뭉쳐들었다. 조금이라도 더 안쪽으로 들어가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밀치고, 밀쳐진다. 차라리 숫자로 밀어붙인다면 일부는 해골들의 포위를 벗어날 수 있을 테지만, 약자인 그들은 이미 공포에 질릴 대로 질려 일말의 용기도 내지 못한다. 걸개들을 모두 처리한 그가 허공에 팔을 휘두르자, 소매로부터 우수수 쏟아져 나온 열 개의 수정조각이 걸개들의 사체에 틀어박혔다. 하나하나마다 원령들이 봉인되고 귀기가 담겨진 수정조각은 꿈틀거리며 사체에 파고들고, 그의 주문에 따라 귀기를 움직여 필요한 조각을 끌어 모은다. 촤좌좍! 필요한 모든 것을 얻어낸 망자는 사체를 뚫고 나와 머리부분의 칼날을 찰칵거리며 그를 향해 기어왔다. 날카로운 뼈의 칼날 다섯 개가 머리부분에 손처럼 위치하고, 척추를 비롯한 마디마디의 작은 뼈들이 뒤로 주르륵 이어져 뱀과 같이 몸을 이룬다. 분홍빛의 얇은 근육이 뼈와 뼈 사이를 이어주며, 작은 수정조각이 몸과 머리의 중심에 핵(核)으로 자리 잡고 있는 기괴한 망자. 열 마리의 사뢰괴(死儡怪) 네크로크리쳐(necro creature)는 주변을 맴돌다가 그의 염(念)을 받고 사방으로 일제히 기어나갔다. "흐이익!" "오, 오지마!!" 새파랗게 질린 채 물러나는 주민들을 헤치고 해골에게 다가간 사뢰괴가 그 발치에서 똬리를 튼다.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뱀과 같은 사뢰괴의 모습이, 금호에게는 이제 그 누구도 이곳을 살아서 빠져나갈 수 없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처럼 보였다. "나, 나리, 저, 저, 저는 부양해야할 노모와 자식이 있습니다. 부디, 부디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제...제게도 노부와 어린 여식이 있습니다!" "저, 저도 저 없이는 못사는 처자식이...!" 자식은커녕 노모도 없는 홀아비 곽씨의 말을 시작으로 주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비를 빌기 시작했다. 자비를 사는 것이야말로 약자인 그들이 강자로부터 자신들을 지킬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이다. 정파의 협객이라면 아무리 악당이라도 개과천선의 기회를 주고, 사파의 마두라도 비굴한 약자들을 비웃으며 자신의 자존심을 세운다. 그러나 그들의 앞에 있는 것은 협객도, 마두도 아니다. 모든 것에게 공평한 죽음을 내리는 죽음의 대리자, 사신(死神)일뿐. 서걱. 사신의 낫이 다시 은빛 섬광을 그려내며 몇 개의 목이 떨어져 내렸다. 가장 앞에서 자비를 구하던 주민들은, 사신에게 가장 먼저 죽음의 자비를 받았다. "으아아아!!" 비굴한 애원조차 동하지 않음을 깨달은 주민들은 사신을 피해 어떻게든 도망치려했지만, 해골병사(骸骨兵士) 스켈레톤 솔저(skeleton soldier)와 사뢰괴의 포위망은 너무나도 견고했다. 하급의 망자인 해골귀(骸骨鬼) 스켈레톤(skeleton)에 비해 더욱 튼튼하고, 빠르며, 복구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병기술(兵器術)까지 사용하는 중급의 망자 해골병사의 죽봉이 날카롭게 찌르고 휘둘러질 때마다 주민들의 머리가 터져나가고 몸이 꿰뚫린다. 똬리를 틀고 있다가 튀어나가 화살처럼 단번에 몸을 파고든 사뢰괴가 체내에서 칼날을 찰칵거릴 때마다 뼈와 내장이 잘라지고, 몸을 꿈틀거릴 때마다 오장육부가 뒤집어져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한다. 또한 거대한 덩치의 흉신악살은 거대한 대도를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몇 명의 주민을 한꺼번에 베어버린다. 그러나 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가장 피하고 하고 싶어 하는 것은 바로 그. 죽음을 수확하듯 한 번 낫을 휘두를 때마다 하나의 목을 거두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 사신. 해골병사나 사뢰귀, 그리고 흉신악살 중 누구 하나 그보다 느린 이 없지만, 스스로 살아서 춤을 추듯 움직이는 사신의 낫 아래에서 목이 떨어진 사체가 모든 사체 중 과반수를 차지한다. 그 진정한 사신의 공포 아래, 주민들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해가고 있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8 00:14:52 고친날 2005-06-08 00:14:52 읽은수 11189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8.사신강림(死神降臨).(6)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우리 가족은 안 된다!!" "여보!!" 한 중년 사내가 주먹만한 돌멩이를 집어 들고 달려들다가 목이 잘려나가자, 중년부인은 처절한 절규를 토해내고 흐느꼈다. "대인, 제발 이 아이만이라도..." 말도 제대로 트이지 않은 듯한 여아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던 여인의 머리가 떨어져 내렸다. "엄마...엄마...흐아앙-!" 철없는 여아도 제 어미의 죽음을 느낀 듯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의 낫이 허공을 가로지르고 난 뒤, 더 이상 여아의 울음소리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저벅. 무심히 걸음을 내딛은 그는 감각으로 주변을 천천히 훑었다. 마을의 중심부에 모여 있던 산하리의 주민들 중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은 몇 명뿐. 벌벌 떨며 시체사이에 묻혀있던 이가 대도에 의해 몸이 쪼개지고, 정신이 나간 듯 머리를 부여잡고 무언가를 중얼거리던 이의 머리가 죽봉에 의해 깨져나갔다. 마지막으로 한 노인이 무언가 저주를 퍼붓다가 입 안에 들어온 사뢰괴에 의해 두개골 안쪽이 난도질 되어 쓰러진 것으로 이곳에 모여 있던 주민들은 모두 몰살됐다. 걸개방의 무리가 무력까지 동원하며 소집을 해놓았기 때문에, 산하리의 주민 중 아직까지 살아있는 이들은 그야말로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 정도면 되겠군.' 허공에 한쪽 소매를 펼치자, 열 마리의 사뢰괴가 그의 몸을 타고 소매로 기어들어와 다시 수정조각으로 변했다. 철방을 만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주술적 처리를 마친 수정조각인 만큼, 이런 하급의 망자들은 굳이 귀기를 운용하지 않고도 통제가 가능하다. 그렇게 사뢰괴를 회수한 그는 금호와 남국을 보호하기 위해 펼쳐둔 골옥(骨獄) 본 프리즌(bone prison)을 거두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화살이라도 튕겨낼 수 있도록 면밀하게 만든 골옥이지만, 안에서의 시야는 충분히 확보됐었기에 외부를 볼 수 있던 금호와 남국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금호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린 것이 당장 쓰러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싶고, 남국의 눈동자를 초점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끊임없이 흔들렸다. 이제야 겨우 십대 중반인 그들에게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이들이 무차별적으로 살육되는 잔혹한 학살극을 두 눈 똑똑히 본은 것은 결코 작은 충격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금호와 남국이 결코 눈 돌리지 않고 그 학살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지켜봤음을 알고 있었다. "후회하는가?" 무심한 그의 물음을 들은 금호의 눈이 꾸욱 내려감겼다. 비록 원망하기는 했지만, 마을사람들이 악인이 아님은 안다. 자신들이 멸시받고 천대받은 것은,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약해서임을 안다. 그들도 그저 힘없는 약자에 불과했기에, 약자로써 살아가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도 안다. 그렇기에, 소년은 천천히 눈을 뜬 뒤 조금의 동요도 없이 차분한 음성으로 답했다. "힘을 얻을 수 있다면, 후회 따윈 하지 없어요." 떨리던 눈동자를 가라앉힌 남국 또한 마찬가지라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이 힘없는 약자인 그들을 버렸을 때 이미 세상을 버렸다. 세상을 짓밟고 당당히 살아가기 위해서 강자가 돼야한다면, 그들은 흉신악살이 되더라도 강자가 될 것이다. '한과 집념이 담긴 좋은 눈이다.'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원석에 불과한 둘을 보며 그는 만족했다. 저러한 눈빛과 영혼을 지닌 인간은, 먼저 배신받기 전까지는 믿고 따르는 자를 결코 배반하지 않는다. 또한, 지금까지 한없이 쌓여오기만 했던 한이 힘에 대한 갈망으로 분출되고 있으니 무력을 얻는데 있어서는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할 것이다. "내가 배신하지 않는 한, 끝까지 나를 따를 것을 맹세해라." "먼저 배신 받지 않는 한, 우리 둘은 끝까지 그대를 따를 것을 맹세합니다." 굳은 의지가 서려있는 음성과, 눈빛과, 영혼. 그가 믿는 것은 오직 스스로의 힘뿐이기에, 저들의 맹세가 어떠한 담보보다 확실한 담보라고 느낀 자신의 감각을 믿었다. "계약의 대가, 받았다." 이로써 저 두 소년은 그를 따르며, 결코 배신하지 않는 도구가 됐다. 그는 둘을 이용할 수 있게 됐고, 그들의 힘을 얻었다. 이제 남은 것은, 저들에게 이용가치를 부여하는 것뿐. "철방." "예, 대...형." 그의 뒤에서 피가 뚝뚝 떨어져 내리는 대도를 시체의 옷자락으로 대충 닦고 있던 철방은 여전히 명령만 있으면 뭐든 따르겠다는 충성스러운 태도로 답했다. "이제부터 이 둘을 내 제자로 대우해라." "알...겠습니다." 조금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철방은 선선히 그 사실을 받아들었다. 그에게 대형의 말은 절대적이었으니까. 오히려 놀란 것은 금호와 남국이었다. 힘을 주겠다고 했지만, 그 말이 설마 제자로 받아들이는 뜻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걸개방을 단번에 무너트리고 수많은 마을주민들을 학살한 그의 힘은 분명 무공이 아니며, 올바른 힘은 더더욱 아니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 힘은 그들을 충분한 강자로 만들어줄 수 있다는 사실뿐!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그들에게는 충분했다. "제자 금호와 남국, 사부님께 구배지례를 올립니다!" 무릎을 꿇고 아홉 번 절을 올리는 둘의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 그는 알지 못했다. 단지 이것이 이곳에서 제자를 받아들이는 풍습 중 하나라는 것을 짐작했고, 그들의 의지가 더욱 굳건해졌음을 확인했을 뿐이다. "계약을 이행하겠다." 그는 어느새 은빛 칼날이 사라진 묵봉을 바로 세워 대지에 꽂고 나지막하게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사이한 힘을 지닌 주문은 이미 이용가치가 떨어진 해골병사들을 무너트리고 뽑아낸 귀기와, 공포 속에서 처참하게 죽어간 주민들의 한과 음기와 섞여 만들어진 귀기를 서서히 묵봉으로 인도했다. 귀곡만큼 많고 지속적이지는 않지만,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양의 귀기는 묵봉에 스며들어 증폭된 뒤 차곡차곡 축적됐다. 수많은 이들의 죽음에서 나온 귀기를 바닥까지 긁어내고 나서야 흡수를 멈춘 그는 묵봉을 수평으로 들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잡아라." 묵봉을 중심으로 희뿌옇고 음산한 기운이 모여드는 것을 넋 놓고 보고 있던 금호와 남국은 그의 무심한 음성에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뿐, 이미 힘을 얻기 위해 사신에게 영혼까지 판 그들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묵봉의 좌우를 동시에 손으로 잡았다. '차갑다.' 묵봉이 얼음장과 같이 차다는 생각을 떠올렸을 때, 묵봉으로부터 무언가 음산한 기운이 흘러나와 그들의 손을 타고 몸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단지 몸이 서늘한 정도를 넘어 영혼까지 얼어붙는 듯한 느낌에 금호와 남국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렸지만, 그들은 결코 묵봉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이 고통이 그대로 자신들의 힘이 될 것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짙은 원한을 품고 스며든 귀기는 그들의 영혼을 얼어붙게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그들의 영혼에 부딪쳤다. 그러나 십 년이 넘는 세월동안 끝없이 한을 쌓아온 그들의 영혼은 스스로 영기를 일으켜 귀기의 공격을 막아냈다. 귀기가 한 번 부딪칠 때마다 영혼이 쪼개질 듯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럴수록 영기는 더욱 크고 강하게 일어나며 귀기를 집어삼켰다. 죽음에서 파생된 사이한 귀기와, 가장 근원된 순수한 힘 영기. 숫자는 많되 그저 분노와 증오만으로 가득 찬 한과, 십 년이 넘게 쌓이면서도 승화를 통해 맑음을 정제되어온 한. 두 기운과 한의 차는 너무나도 컸고, 그만큼 결과 또한 명백했다. 스르륵... 주변에 새하얀 안개를 불러 모으며 요동치던 귀기가 점차 원한을 잃고 그들에게 흡수되어갔다. 결국, 그들의 한과 집념이 승리한 것이다. '성공이군.' 십중팔구 성공을 확신한 것은 아니다. 걸개방과의 마찰을 통해 한을 한 차례 더 승화시키는 것을 유도함으로써 확률을 십중칠팔까지 올리긴 했지만, 둘 중 한 명 정도는 귀기를 견뎌내지 못하고 망자가 됐을 확률이 반반이다. 그럼에도 둘 다 성공 했다면, 그만큼 둘의 한이 깊고 집념이 강하다는 뜻일 터.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다. 털썩. 모든 귀기를 흡수해 기진맥진한 금호와 남국이 그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그는 입을 열어 무심한 음성을 흘렸다. "계약은 완수됐다." 이 한 번으로 두 소년이 받아들인 귀기는 각자가 능히 중급 망자를 다스릴 수 있을 정도. 비록 그 귀기를 제대로 사용하기 위한 사령술(死靈術)과 사령마법(死靈魔法), 저주술(詛呪術)을 배워야 하겠지만, 약간의 편법을 사용한다면 며칠 이내로 쓸만한 무력을 지니게 되는 것도 가능하다. 가르치는 것에 따라 이들은 더욱 강해질 것이고, 그만큼 훌륭한 도구와 힘이 되리라.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8 00:15:17 고친날 2005-06-08 00:15:17 읽은수 12344 [ 11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8.사신강림(死神降臨).(7)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마차는?" "마차는 홀라당 타버렸....고 말들...은 도망쳤습니다." 두 소년을 어깨에 짊어진 철방이 무척이나 송구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답하자 그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름까지 뿌려 객잔이 홀라당 타버린 화재다. 그 와중에 기적처럼 마차가 남아있기를 바라는 것은 과욕이다. "천지문까지 남은 거리는?" "천지문은...산속에 있어, 마차도 깊이 들어가기 힘들었으니...대략 나흘에서 엿새 정도 걸릴 겁니다." '나흘에서 엿새인가.' 그리 긴 시간은 아니다. 하지만 마을에서 벌인 일이 있는 만큼, 가능한 빨리 안전한 은신처를 마련하는 것이 좋다. 천하삼십육세 중 하나에 속한 천지문이라면 누구도 섣불리 넘보지 못할 은신처가 될 터. 이미 귀기를 사용했으니 조금 더 쓴다고 해서 문제될 것도 없다. 그는 품에서 뼛가루를 꺼내 허공에 흩뿌리고 나지막하게 주문을 외웠다. 주문의 사이한 주문에 반응한 뼛가루는 그의 귀기를 받아들여 거칠게 허공을 휘몰아치다가 서서히 두개의 형상을 이루어냈다. [푸르릉!] 반투명한 몸에 불타오르는 듯한 푸른 갈기를 지닌 칠흑빛의 유령마(幽靈馬) 팬텀 스티드(phantom steed)의 코에서 새하얀 김이 뿜어져 나오며 허공중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비록 말의 형상을 하고는 있지만, 유령수(幽靈獸) 팬텀 비스트(phantom beast)에 속한 팬텀 스티드는 뼛속까지 얼리는 냉기와 공포를 다스리는 정신계 능력을 지닌 상급의 망자다. 그 전투력도 결코 얕볼 수 없지만, 무엇보다 쉬지 않고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기에 일부의 경우를 제외하면 세상에서 손꼽히는 속도로 이동이 가능하다. "타라." "아...예." 기마술을 모르는 철방은 그의 명령에 곤란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래도 명령에 따라 착실하게 유령마 위에 올라탔다. 유령마는 단순한 말이 아니었던 만큼 어색한 철방의 승마에도 가만히 자리를 지켰고, 덕분에 철방은 내심 조마조마하던 심정을 상당부분 풀어낼 수 있었다. 커다란 체구의 철방이 타자 남는 자리가 없어진 만큼 금호를 받아들고 다른 유령마의 등에 오른 그는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가자." [푸르릉-!] 그의 명령을 받은 유령마는 허공을 박차고 하늘을 향해 달려 올랐다. 그 속도는 땅을 달리는 그 어떠한 명마와도 비교할 수 없고, 창공을 나는 새들도 뒤쳐질 정도로 빨랐다. 처음에는 기마술에 익숙하지 않은 철방이 몇 차례 아슬아슬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반시진이 지나지 않아 대략적인 요령을 익힌 뒤부터는 오히려 그가 앞장서서 방향을 안내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않지만, 이 정도 속도라면...하루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정확한 위치는?" "끌 없는 절벽에서...푸른 하늘을 담고 있는 죽림(竹林)을 찾으면...된다고 들었습니다." 모호하다면 모호하지만,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것이 천지문의 위치다. 창천봉(蒼天峯)에 있는 무한애(無限崖)와 천죽림(天竹林)은 예로부터 이름이 높은 명관이자, 하늘의 기운이 모여든다고 알려진 영지(靈地)니까. 험한 산이 아닌 하늘을 통해 질주했기 때문에, 그들은 채 반나절도 지나기 전에 푸른 죽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곳이군." "...예." 과연 천죽림이라는 지명에 걸맞게, 하늘을 향해 쭉쭉 벋어있는 푸른 죽림은 산 밑에서라면 몰라도 무한애와 같이 높은 곳이나 하늘 위에서 보면 그냥 지나칠 레야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하지만 시각을 초월한 초감각을 지니고 있는 그는 일반적인 것과는 다른 무언가를 천죽림에서 느꼈다. '결계(結界)인가.' 유령마를 타고 죽림 주변을 하늘을 한바퀴 돌아본 그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죽림을 중심으로 기이하게 비틀어져 있는 듯하면서도, 순리를 벗어나지 않음으로써 그 정교함을 더하고 있는 기의 흐름. '이곳의 진법(陣法)이라는 거군.' 철방에게 대충 설명을 듣기는 했지만, 산적두목에게 진법에 대한 고등지식을 들을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그러나 호악산에서 천지문의 제자 천무가 펼쳤던 허영오행진(虛影五行陣)을 통해 진법에 대한 대략적인 파악은 할 수 있었다. 마법진이 특수한 핵(核)의 힘을 중심으로 펼쳐진다면, 이곳의 진법은 이미 존재하는 기운의 흐름을 비틀거나 조절하는데 중점을 둔다. 철문으로 길을 막는 것과 미로를 통해 출입을 막는 것과 비슷한 차이다. 특수한 힘이나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도 정교한 기운의 조절을 통해 그것을 증폭시키고, 특수한 현상을 이끌어내는 면을 볼 때 마법진보다 더 깊이 있는 학문이다. 하지만 미세한 기의 흐름까지 느낄 수 있는 초감각을 지닌 그에게 있어, 아무리 복잡한 미로라도 단 하나의 정확한 길만 있다면 조금 튼튼한 나무문으로 막아둔 길보다 더 쉽게 통과할 수 있다. 아직 의식을 되찾지 못한 두 소년을 한 유령마의 등위에 올리고 나머지 한 마리의 유령마로부터 귀기를 회수한 그는 죽림으로 난 길 앞에 잠시 멈춰 섰다. '예상보다 상당하군.' 하늘의 기운까지 비틀어져있었던 것으로 만만치 않을 것임은 예상했지만, 막상 입구에서 본 진의 흐름은 예상을 한참 넘어서고 있었다. 이 영지(靈地)의 모든 기운이 실타래처럼 진에 얽혀있어, 마치 모조리 철벽으로 지어진 미로와 같다. 더구나 태양의 양기와 매한애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영향을 받아 시시각각 변하니, 그 복잡함은 천 갈레 만 갈레로 나눠진 입체적인 미로조차 비교가 안 된다. 처음 몇 갈레에서 발을 잘못 들여놓으면 그냥 길을 읽고 헤매다가 다시 밖으로 나오는 정도에서 그치지만, 어줍지도 않은 지식으로 설치거나 힘으로 뚫고자 한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다. "천죽림의...천변만화대천진(千變萬化戴天陣)은 제갈문(諸葛門)조차 뚫지...못하는 걸로 유명해서, 이곳에서 용무를 말하고 응답...이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합니다." 제갈문(諸葛門). 삼재지문(三才智門) 중 진법(陣法)이 가장 뛰어나다는 문파. 그런 문파조차 뚫지 못했다면 아마 이곳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만큼 대단한 진임은 분명하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따라와라." 그가 무심한 음성과 함께 유령마를 이끌고 죽림 안으로 걸음을 내딛기 시작하자, 철방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도 조심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 대형이 목숨이 위험할 정도의 무모한 짓을 벌이고 있으니 막지는 못하더라도 한 번 더 생각해볼 것 정도는 권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권해봤자 어차피 생각을 바꿀 대형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저벅. 저벅. 그는 자신이 움직일 때마다 미묘하게 변하는 기운의 흐름을 느끼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갔다. 그의 걸음은 마치 내디뎌지지도 않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주변의 기운을 흘렸고,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땅을 짚은 묵봉은 비틀어진 기운을 다시 풀어내 길을 열었다. 마법진에 대한 지식과 초감각을 이용해 그는 잠시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진법을 파해했고, 그러한 대형을 보며 철방은 감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헌데 대략 이각 정도 죽림을 헤치고 갔을 무렵, 파죽지세로 나아가던 그의 걸음이 우뚝 멈춰졌다. 그 너무나 갑작스러운 정거에 철방은 하마터면 발을 헛디딜 뻔했지만, 무인다운 반사 신경으로 균형을 되찾고 긴장감어린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무형의 경력조차 볼 수 있는 그의 치효안( 梟眼)도 죽림에서 무언가 특별히 달라진 것은 찾아내지는 못했다. "대형...무슨 일...입니까?" 철방의 물음에도 그는 답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답할만한 여유가 없었다. 지금 그의 감각에 느껴지는 기운의 흐름에 비하면, 지금까지 파해한 것은 단지 껍데기에 불과했다. '방심했나.' 호악산에서 본 허영오행진을 잣대로 모든 진법을 판단한 것이 가장 큰 실수다. 이제까지의 진이 단지 외부의 기운을 끌어와 비트는 것에 불과했다면, 이 앞에 놓여져 있는 진은 땅의 기운과 죽림의 기운, 그리고 하늘의 기운을 하나로 묶어 거대한 방벽도 같이 만들어놓았다. 전체가 하나처럼 묶여있는 이것을 푸는 것은, 차라리 이것을 통째로 무너트리는 것과 다름없는 막대한 힘이 필요하다. '진법으로 하늘과 땅과 숲 자체를 핵으로 삼아 펼친 결계(結界) 같군.' 이것은 인간의 힘과 지식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태곳적부터 존재해온 대자연이 스스로 만들어낸 울타리를 약간 다듬어 길을 내고, 그 길을 숨기기 위해 지금까지의 외진(外陣)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 길을 제대로 찾아가기 위해서는 죽림에 펼쳐진 외진 전체를 모두 꿰뚫고 있어야 하지만, 사시사철의 시시각각마다 변화하는 이 복잡한 진을 모조리 숙지하려면 아무리 그라도 일 년 동안 진의 흐름을 관찰해야만 한다. 더구나 이 진법은 내외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아, 그의 감각이 내진을 감지했을 때 몸은 이미 내진(內陣)에 반쯤 걸쳐져 있었다. 내진의 영향을 받는 영역에 들어온 이상, 물러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나기도 힘든 상황에 그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고, 철방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파악하고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유령마와 그 위에 의식을 잃고 실려 있는 두 소년만이 아무런 걱정 없이 있는 가운데 시간은 물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게 몇 시진이라는 시간이 덧없이 흘렀을 무렵,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이 감지한 그는 몸을 천천히 돌렸다. 진법에 의해 감각이 차단된 철방은 단지 그의 움직임에 반응해 대도의 손잡이를 쥐고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지만, 상대방은 그들을 정확히 확인한 듯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다시 접근해오기 시작했다. 다른 누구도 없는 단신이고, 특별히 강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상대는 이 복잡한 진법을 자유롭게 지나 그에게 접근해오고 있었다. '이 느낌은...' 그는 기억을 되새겼다. 언젠가 느껴본 적 있고, 특별히 강하지 않음에도 이렇게 뚜렷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기척이라면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혹시, 절 기다리고 계셨던 겁니까?" '천무(擅無).' 호악산에서 그에게 옥패를 주었던 천지문의 제자, 천무(擅無)는 내진과 외진의 경계에 서있는 그들을 보며 의아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우연이라면 지나치게 절묘한 우연이고, 계획이라면 지나치게 뻔한 계획이다. 그래서 그나 천무나 모두 시간을 흘리며 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야했다. 그때, 천무의 시선이 문뜩 철방에게 고정되었다. 자신의 얼굴에 뭐가 묻었나 싶어 얼굴을 더듬거리던 철방은 문뜩 입가를 더듬다가 무언가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고 아차 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거 저번에는...미안했소. 설명을 하자면 뭐랄까...큰 일이 생겨서 부하들이고 뭐고 쫄딱 말아...먹고, 생명의 위협을 받던...도중 대형께 구원을 받고...개과천선하게 됐소." 미리 준비해뒀던 변명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철방은 막상 변명을 하고 나니 분위기가 더욱 복잡 미묘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기야, 호악산에서 천무의 목숨을 노렸던 철방이 도움을 주었던 그와 함께 마치 기다렸다는 듯 떡 하고 버티고 서있으니 이건 짜고 기다렸다고 해도 납득이 가지 않을 레야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치자면 예전에 호악산을 지나갔던 천무가 정확히 그들이 곤경에 처해있을 때 정확하게 등장했으니, 이 또한 우연이라고 하기보다는 지나치게 절묘하다. "보표들은 어디 있지?" "아, 그분들께서는 숲의 바깥쪽에서 그만 돌아가셨습니다. 죽림의 안쪽에서라면 웬만한 위험 정도는 상관없으니까 말입니다." 알만하다. 이 진법은 힘의 강약보다는 철저한 이해와 분석으로 지나다니고 통제할 수 있다. 설사 초절정고수라고 해도 외진에서조차 헤맬 터. 이곳은 바로 천지문의 '영역'인 셈이다.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군." "운이 좋아 일을 빠르게 끝낼 수 있었습니다." 마치 심문하는 듯한 그의 물음에도 천무는 조금도 기분 상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선선히 대답했다. 그는 잠시 호악산의 일이 있었던 때로부터 시간을 계산해보았다. 그다지 크게 지체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지만, 처음에 말이나 마차를 타지 않고 보행으로 이동한 시간이 너무 길고 느렸다. 계속 말을 타고 이동했다면, 그 정도 차이는 그야말로 금세 채워질 수 있는 작은 것에 불과하다. 의심스럽던 부분을 어느 정도 해소한 그는 결단을 내렸다. 이미 이렇게까지 발을 들인 이상, 선택의 여지란 없다. "천지문에 도움을 청할 것이 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들어드리겠습니다." 말과 함께 예전에 천무에게 받은 옥패를 내밀자, 그는 마땅히 그러하겠다는 듯 온유한 음성으로 답했다. "이곳에 머물며 지식을 배우고 싶다." 그의 무심한 말에 철방은 머리를 긁적였다. 말이 지식을 배우겠다는 거지, 지혜를 받침으로 삼는 천지문에 이 말을 한다는 것은 무림문파에게 무공 내놓으라는 소리나 다름없다. 더구나 이처럼 수상한 상황이니, 못 들어주겠다고 잡아 때도 할 말 없는 것이다. 그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현자의 탑은 배우고자 하는 이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지식의 악용을 막기 위해 현자로부터 진정한 진리를 배울 수 있는 것은 재능과 인품을 타고난 소수의 천재뿐이다. 그런 면에서 천무가 할 대답은 부정적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에도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은, 그의 예감이 긍정에 비중을 주었기 때문이다. 만약 예감이 빗나갔다면, 지식의 전수를 포기하고 머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한다. "그것을 원하십니까?" "그렇다." 상당히 충격적인 요구를 들었음에도 조금의 미동도 없이 요구를 확인한 천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9 05:44:40 고친날 2005-06-09 05:44:40 읽은수 11266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9.천재지문(天才智門).(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사신, 천외천에 머무니 천하에 남은 것은 오직 사신의 그림자뿐이다.- 제갈문(諸葛門)은 대지에서 펼쳐지는 전술(戰術), 전략(戰略), 진법(陣法)에 통달했다 하여 지재지문(地才智門)으로 칭해진다. 그 중에서도 24대 제갈문주인 신수현성(神手賢聖) 제갈정운(諸葛征運)은 의술(醫術)에 있어서도 능해 사사혈괴, 은자림주 은염노선(銀髥老仙)과 함께 천하삼대신의로 제갈문의 명성을 한층 더 떨치는 이였다. “흐음...됐소. 이 정도면 이제 문제없겠구려.” “정말입니까?” 아들 강상비와 딸 강상홍의 상태를 들은 채여상이 희색을 띄우자 그는 온화한 표정으로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정심단(正心團)의 약효가 추궁과혈(推宮過穴)을 통해 전신으로 퍼져 이종(異種)의 탁기를 정화하고 있소. 이제 탁혈을 토해내기만 하면 앞으로 성장에 지장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두 아이 모두 일갑자 가량의 진기가 잠력으로 남게 될 것이오.” “제갈문주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잠력에 관한 말은 완전 뒷전으로 흘려듣고 고개를 숙이는 채여상의 모습에 허허 웃어 보인 제갈정운은 몇 가지 주의사항과 처방을 알려준 뒤 방을 나섰다. “손자와 손녀의 쾌유를 축하드리외다, 강노사.” “허허, 이 모든 것이 제갈문주께서 정심단을 베풀어주신 덕분이 아니겠소.” “정심단은 그저 조금 좋은 약재에 불과하오. 강노사께서 진기의 손실을 감수하고 추궁과혈을 펼치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외다.” “그야 제가 마땅히 해야 할일이지요.” 청옥노사 강비연은 제갈정운에 대한 감사를 아끼지 않았다.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손자와 손녀의 정확한 상태도 모르고 쩔쩔매고만 있었을 것이다. 협공까지 해가며 겨우 적혈귀조를 물러나게 하고 먼저 보낸 마차를 뒤쫓으니, 청홍미화는 없고 강궁통절 제인상과 금판무상 금광보를 비롯한 그의 네 호위무사만이 시체가 되어 늘어져있는 게 아니던가? 그래서 처음에는 청홍미화가 그들을 모두 물리치고 봉황무서를 탈취해 달아난 줄 알았는데, 채여상으로부터 들은 진실은 놀라운 것이었다. 금황성의 금광보가 배신을 하고, 두 아이가 거의 죽을 뻔했다고 하니 하마터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됐을 것이다. 문제는 두 아이의 상태였다. 거의 죽었다 기적적으로 살아났다는 말대로 한참동안 의식을 못 차릴뿐더러, 신체의 상태 또한 정상이 아니라 이런저런 명의를 불러보다가 결국 제갈정운에게 도움을 받기까지 이르렀다. “비록 흉행이 있긴 했지만, 그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일갑자의 잠력을 지니게 되었으니 이 또한 천운이라면 천운이겠지요.” “허어, 일갑자의 잠력이라.” “십년 쯤 뒤에는 구룡팔봉의 수위에 오르게 될 아이들이지요.” “허허, 과찬이시외다.” 겸손하게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제갈정운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절정고수인 그조차 일갑자의 내력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런 일갑자의 진기를 잠력으로나마 지니게 됐으니, 넉넉잡고 십년 동안 수련에 정진해 그 잠력을 모두 일깨우면 그 나이 또래에 있어서는 수위의 내공을 지니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이것이야말로 기연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데...저 이종의 진기는 역시 금황성의 독문심법인 금산은호심법(金山銀浩心法)의 진기 같더구려.” “으음, 그렇다면 역시 흡성대법(吸星大法)이 사용되었다는 뜻이외까?” “확신은 못하겠으나 그럴 가능성이 높이다.” “허어, 어찌 그런...” 강비연의 안면에 복잡한 감정의 편린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객잔을 나갔던 흑의괴인과 거한이 금광보를 물리치고, 아이들을 치료해주었다는 소리는 들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채여상은 치료과정에 대한 것 등 여러 가지를 말하지 않고 숨겼는데, 피와 거죽만이 남은 두 사체와 선천지기가 약해진 대신 막대한 이종의 진기가 몸을 채우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자니 두 아이가 금광보를 상대로 흡성대법이라도 펼친 듯한 상황이 아니던가? “흡성대법이라면 배교에서도 실전된 지 오래인 마공이거늘, 그것이 이렇게 다시 나타날 줄이야...” “정작 놀라운 점은 따로 있소. 확실치는 않지만, 두 아이들의 몸에 활생천명대법(活生天命大法)이 펼쳐진 것만 같소.” “활생천명대법이라니요?” 그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흡성대법이 타인의 진기를 흡수해 자신의 내공을 불리나 결국 이종진기의 충돌로 주화입마에 빠져 마인이 된다면, 활생천명대법은 진기를 이용해 자신이나 타인의 심각한 부상을 치유할 수 있는 궁극의 운기요상법(運氣療傷法)이다. 그러나 흡성대법은 100년 전 배교의 호교법사이던 흡혈광마(吸血狂魔) 강비호(疆悲號)의 주화입마를 끝으로 실전됐고, 활생천명대법 역시 70년 전의 기인이던 법정대사(法定大師)가 한 아이를 살리기 위해 모든 진원진기를 소진하고 입적함으로써 실전되었다. “믿기 힘들기는 하지만, 내가중수법에 당해 치명적인 내상을 입은 아이들을 단지 운기요상만으로 치유했다면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소이다.” “그러나 어찌 흡성대법과 활생천명대법이 같이 펼쳐질 수 있겠소이까?” 천하에서 절대 상종할 수 없는 두 가지 무학을 꼽자면 그것이 바로 활생천명대법과 흡성대법이다. 활생천명대법을 펼칠 수 있는 것은 오직 정종의 심법으로 쌓은 정심한 진기뿐이다. 그러나 진기의 혼탁함으로 치자면 천하에서 손꼽히는 무공이야 바로 흡성대법이 아니던가? “모를 일이지요. 흡성대법이 진기를 정순하게 할 수 있도록 개량되었든지, 아니면 활생천명대법이 탁한 진기도 사용할 수 있게 개령되었는지...어쩌면 둘 모두일수도 있고 말이외다.” “허어, 어찌 그런...” 단점이 개량되지 않았을 때만 해도 천하에서 손꼽히던 무학이다. 그런데 만약 단점까지 개량되었다고 하면, 아마 천하에 둘도 없는 신공마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체 어떻게 실전된 두 무학을 지니게 됐는지는 모르나, 이 일은 가능한 퍼지지 않아야 할 것이외다.” “으음...배교를 걱정하시는 것이오?” “그렇소. 흡성대법의 실전 이후 배교는 대법의 복구를 위해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아왔소. 만약 흡성대법이, 그것도 개량된 흡성대법이 다시 나타났다고 하면 그들이 대체 어떻게 나설지 두려울 뿐이오.” 강비연은 내심 동감했다. 흡성대법만이 아니다. 언제나 죽음을 각오해야하는 강호무림에서 생사의 위기를 넘길 수 있는 활생천명대법이 지니는 위치 또한 결코 낮지 않다. 그런데 그 두 무학을 한 사람이 지니고 있으니, 이것이 알려지면 강호무림에 한바탕 혈풍이 불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러운 때에 더 큰 혼란이 찾아오는 것은 가능한 피해야 할 것이외다.” “당연히 그래야겠지요.” 무림의 명숙인 그들은 현재 무림에 흐르고 있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몇 달 전에는 그 기운이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했다. “그 일의 흉수는 아직도 잡히지 않고 있소이까?” “추종술에 일각연이 있는 고수를 보내봤지만, 그들 중 누구도 흉수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소.” 두 노인의 안색이 어둡게 변했다. 몇 달 전 산하리(山河里)라는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혈사는 차마 두 눈을 뜨고 볼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노약자는 물론이고 여인, 아이를 가릴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마을 주민 대다수가 학살됐다. 참으로 천인공노할 이 사태에 정파의 협객들은 모두 분노하며 흉수를 징벌하고자 했지만, 문제는 아직까지 그 누구도 흉수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살을 발라내 뼈만이 남은 시체나 죽봉에 의해 머리가 터지고 몸이 뚫린 시체가 있는가 하면, 무언가 기병에 의해 당한 듯 뼈와 내장이 조각조각 나있는 시체나 몸이 통째로 절단난 시체도 있었다. 아마 열 명에서 서른 명 사이고 대략 서너 가지 종류의 병기가 사용됐다는 조심스러운 추정만이 있을 뿐, 정확한 것에 대해서는 무엇 하나 파악된 점 없었다. 무엇보다 그 학살을 일으킨 뒤 어딘가로 이동한 흔적이 남아있어야 할 터인데,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그 많은 흉수가 몽땅 사라진 것이다. “유일한 증인이라고 하는 이는 정신이 나갔으니...쯧쯧.” 제갈정운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혀를 찼다. 학살이 일어나는 것을 먼 곳에서나마 본 증인이 있긴 있었는데, 워낙 어두운 밤이었던지라 정작 중요한 흉수에 대한 것은 무엇 하나 정확히 보지 못한 듯싶었다. 게다가 너무나 잔혹한 학살에 정신이 나갔는지, 사신이니 저승사자니 하는 알 수 없는 말만을 정신없이 늘어놓기만 할뿐 도통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 사건 역시 그 일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으음...아무래도 그런 것 같소.” 이 잔혹한 손속이나 깨끗한 흔적을 볼 때, 그들로서는 이 정체불명의 흉수를 한 방향으로 추정해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일이 일어난 시기가 참으로 공교로웠다. “천지문의 제자가 정의성에 직접 찾아와 해준 경고기는 했지만, 그렇게 경고를 해주기가 무섭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과연 천기를 읽는다는 천지문(天智門)이라는 생각이 드외다.” 천지문이 어째서 삼재지문(三才智門) 중 천하의 대세와 천기를 읽는 통찰력에 있어 제일이라 불리는지 그 이유를 실감한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로써 정파의 세력은 사마련(邪魔聯)의 준동이 멀지 않음을 느끼고 단단히 대비를 하게 될 것이외다.” “이 혈겁에 휩쓸린 희생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또한 전화위복이라면 전화위복이 되겠지요.” 한 가지 오해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묻어둔 채, 두 노인의 심려는 계속해서 깊이를 더해가고 있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9 05:45:44 고친날 2005-06-09 05:45:44 읽은수 11009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9.천재지문(天才智門).(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금호는 살짝 왼쪽에 있는 남국과 시선을 교환했다. 이미 이심전심이 경지에 이른지 오래인 두 죽마고우 순식간에 서로의 생각을 확인하고 전후로 몸을 날렸다. 촤르륵-! 앞으로 몸을 날린 남국의 양 소매에서 사뢰괴가 칼날로 이루어진 머리를 앞세워 튀어나오자, 철방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두 사뢰괴의 칼날을 후려쳤다. 그러나 두 사뢰괴는 무려 1장에 달하는 몸을 교묘하게 비틀어 철방의 주먹을 피하며 그의 팔에 휘감겨들고자 했다. “이거 원...귀찮게 시리.” 철방이 칼날을 찰칵거리며 자신의 몸에 감겨들려는 사뢰괴의 목을 잡아 내던지는 사이, 남국의 한 손에는 뼈의 칼이, 다른 팔에는 뼈의 방패가, 몸에는 뼈의 갑옷이 생겨났다. “한방만 먹여!” 주문으로 무장을 갖춰준 금호의 응원을 들으며 민첩한 몸놀림으로 철방에게 다가간 남국은 뼈의 칼을 날카롭게 휘둘렀지만, 철방은 간단히 뼈의 칼을 피하며 혀를 찼다. “칠성도법(七星刀法)은...뒀다 죽 끓여먹을래?” 조언을 던지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골도(骨刀) 본 블레이드(bone blade)가 갑자기 방향을 꺾어 심장을 찔러 들어오자, 철방은 손등으로 도의 옆면을 쳐내며 일권을 앞으로 내뻗었다. 콰직! 왼팔을 덮고 있는 골갑(骨甲) 위에 두 치 간격으로 떠있던 골순(骨盾)이 산산이 깨져나가는 틈을 타 아슬아슬하게 몸을 빼낸 남국은 철방을 경계하며 한 손으로 복잡한 수인(手印)을 맺어 골순을 다시 만들어냈다. “칠성보법(七星步法)...은 그래도 나보다...낫구나.” 최소한 팔뼈 정도는 아작 나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일 권을 뻗었던 철방은 씨익 웃으며 주먹에 묻은 뼛조각을 털었고, 그런 철방을 보며 금호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저 괴물, 아주 사람을 잡으려고 작정을 했어...” “...금호야...입 좀 뭉개주랴?” “예? 제가 뭐라고 했나요, 형님?” 혼잣말을 십리묘이로 똑똑히 들었음에도 뻔뻔하게 딱 잡아때는 금호의 태도에 미간을 찌푸렸던 철방은 이리저리 몸을 흔들다가 갈지(之)자를 그리며 다가오는 남국을 무영각(無影脚)으로 물러나게 했다. 동피철혈기공을 수련하느라 초식에는 조금 소홀히 하긴 했지만, 시중에 나도는 기본적인 삼류무공인 칠성도(七星刀), 육합권(六合拳), 무영각(無影脚)에서 5성의 성취를 이룬 그는 굳이 외공이 없더라도 어린 소년이 잔재주로 상대할 수 있을 만큼 약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국은 보법의 우위를 이용해 이리저리 그의 권각을 피해냈고, 철방은 슬슬 짜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저 녀석은 또 뭘 준비하는 거야?’ 금호가 완성을 앞둔 수인을 유지시킨 채 주술을 펼칠 틈만 노리고 있다는 것을 호미지로 파악한 덕분에, 남국을 상대하며 금호까지 신경 쓰고 있던 철방으로써는 짜증이 쌓이지 않을 레야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원래 호탕하게 치고 부수고 죽이는 체질라, 이렇게 찔끔찔끔 힘을 아끼며 적당히 애들 대련상대를 해주는 건 적성에 안 맞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대형의 제자씩이나 되는 놈들을 쳐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에라 모르겠다.’ 철방이 주먹을 불끈 쥐고 십이기력 중 응우공(鷹羽功)을 끌어올리자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그래, 보법이 다 뭐냐? 이거 하나만 있으면 장땡인데. “으악! 튀어!!” 그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오르자 화경에 접어든 눈치로 상황을 파악한 금호는 급히 경호성을 발했다. 친우의 경고에 남국은 이것저것 생각할 것도 없이 전력으로 보법을 밟으며 뒤로 몸을 뺐지만, 그때 철방의 주먹은 이미 앞으로 쏘아져 나오고 있었다. 콰드득!! 뼈가 부서지고 으깨져서 아주 가루가 돼버렸다. 다행히 골순과 골갑에 해당되는 이야기였지만, 만약 남호가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어 권력을 흘리지 않았으면 그의 갈비뼈도 합창에 끼여들었을 것이다. “미쳤어요, 형님?!” “시끄러...! 이거 맞는...다고 안 죽어!” “안 죽긴 뭐가 안 죽어요! 맞으면 아주 뼈란 뼈는 모조리 부러지고 살이랑 내장은 짓눌러져서 살아있는 인간 반죽이 되겠는데. 설마 우릴 이대로 반죽해서 잡아먹을 생각이에요? 그런 거죠?” “그...아니라니까 그러네!” 금호의 화려한 언변에 철방은 조금 밀리는 기색을 보였지만, 남국은 어째 철방의 주먹보다 친우의 말이 더 무섭고 소름끼친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거짓말인 거 다 알아요. 사부님께 일러버릴 거예요!” “아...정말 아니라니까!” 대형의 이야기가 나오자 철방은 금호를 설득하는데 더 힘을 기울여야 했다. 저놈이 그런 말을 고해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 대형 앞에서 어찌 안면을 들 수 있겠는가! 철방이 그렇게 설득에 힘을 더할 때, 남국은 문뜩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는 금호가 계속 수인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렇게 완성을 앞둔 수인을 유지하는 것에는 적지 않은 심력이 소모될 텐데, 겨우 말싸움을 하며 그것을 유지한다면 그 의미는 오직 한가지뿐이었다. 휘잉! “뭐...야, 이건?” 남국이 갑자기 골도를 휘둘러오자 반사적으로 그것을 피한 철방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소년을 내려다봤다. 중요한 대화중에 대체 뭔 짓거리냐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남국은 말 대신 행동으로 대답하는 소년이었다. 촤르륵-! “어...라?” 아까 전 내던져졌던 두 사뢰괴가 기다렸다는 듯 다리를 타고 올라오자 철방은 다리를 움직여 그것들을 떨구려했지만,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는 미처 금호의 입가에 걸린 회심의 미소를 보지 못했다. 파앗-! “어...라라?” 금호가 완성한 수인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기다란 뼈의 창은 바람과 같은 속도로 철방을 향해 날아들었고, 그는 사뢰괴를 다리에 매단 채 철판교의 신법으로 급히 몸을 뒤로 꺾어 골창(骨槍) 본 스피어(bone spear)를 피했다. 그런데 골창이 마악 그의 몸 위를 지나갈 때, 그 중 일부가 뚝 떨어져 철방의 목을 향해 내려꽂히는 것이 아닌가? “얼...라리오?” 결국 몸을 바로 세우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쿠웅 쓰러져버린 철방은 자신의 목을 칭칭 감아들고 얼굴 앞에서 칼날을 찰칵거리는 사뢰괴를 보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남국이 그러한 철방의 목에 골도를 대 확실하게 제압을 마치자, 금호는 희희낙락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거 봐, 드디어 한 방 먹였다고!” “너...무슨 꼼수를...” “이번엔 어떤 주술을 가르쳐 주실까? 혹시 사뢰괴를 한 마리 더 주시지 않을까?” “야, 야...!” “아냐, 이왕이면 부적이 좋겠다. 형님처럼 힘 하난 무식하게 세지는 부적 만드는 방법을 부탁드려볼까?” “이...이 새끼가!!!” 자신의 말을 깨끗이 무시하고 자신이 할 말만 다 해버리는 금호의 작태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은 철방은 목을 휘어 감고 있는 사뢰괴를 집어 뜯어 던지고 골도를 분지른 뒤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디...제대로 해볼까? 엉?” 대충대충 할 때야 노련한 이류무사 정도의 실력만을 발휘했지만, 십이기력까지 쓰며 제대로 실력발휘를 하면 절정고수인 금광보조차 아작 낸 전적이 있는 철방이다. 그런데 아무리 봐주면서 했다고 해도 이런 꼬맹이들에게 나자빠지고 무시를 당했으니, 그 불같은 성질에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와와왁! 튀어!!” “이 얍쌉한 새끼...너 거기 안서!” 금호가 냅다 등에 매달리자 남국은 엉겁결에 친우를 업고 철방을 피해 달아나기 시작했고, 그는 그야말로 성난 황소처럼 땅을 쿵쿵 울리며 둘을 뒤쫓아 다녔다. “달려, 달려!” “너...잡히면 죽는다!!” “저 죽으면 사부님께서 심려가 크실 거예요!” ‘물론 지금까지 투자한 걸 써먹지도 못한 게 아까워서 심려하실 테고, 사체조차 두고두고 보관해놨다가 되살려서 아주 유용하게 써먹으시겠지만.’ 눈치 하나는 화경에 든 금호는 자신의 사부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임을 아주 확실하게 알고 있다. 하지만 사부는 자신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한 그들을 배신하지 않고 계속 힘을 줄 것이고, 그가 먼저 배신하지 않는 한 그들도 사부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사부를 신뢰하는 데에는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철방도 그러한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미 저 두 꼬맹이를 대형의 제자로 인정한 이상 죽일 수야 없는 노릇이다. “젠...장할!!” 결국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철방은 성질이 나는 김에 옆에 있던 벽을 주먹으로 후려갈겼지만, 너무 열 받은 나머지 힘 조절을 깜빡해버리는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콰아아아앙!!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9 05:46:36 고친날 2005-06-09 05:46:36 읽은수 10830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9.천재지문(天才智門).(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변명은 그걸로 끝인가.” “...예.” 대형의 무심한 음성을 들으며 철방은 고개를 푹 숙였다. 와르르 무너져 내린 벽을 보자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다. “고쳐라.” “...알겠습...니다.” 철방이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도구를 찾아 사라지자, 그는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천무를 향했다. “미안하군.” 내용상으로는 전혀 하자가 없는 말인데, 어째 미안하다는 기색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무심한 음성을 더하니 이건 거의 비아냥거림처럼 들린다. “이 정도 일을 가지고 굳이 사과까지 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런가.” “예. 단지 앞으로는 죽림에서 수련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온유한 음성으로 사부의 무심한 음성을 받아넘기는 천무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금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화경에 이른 눈치로도 저 인간들의 내심만큼은 뭐 하나 제대로 보이는 게 없으니, 절로 혀가 내둘러진다. “골창(骨槍)을 습득했나.” “아, 네. 아주 완벽하게 익혔죠!” 너무나 무심한 음성인지라 하마터면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르고 흘려들을 뻔했던 금호는 가까스로 그 말꼬리를 잡고 답했다. “철방을 쓰러트린 것도 맞나.” “헤헤, 물론 맞고말고요.” 금호가 실실 웃으며 한 대답을 들은 그는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성장속도가 예상보다 빠르군.’ 골창이라면 인간 몇 명 정도는 그대로 관통하고도 벽에 깊숙이 틀어박힐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을 지닌 중급의 사령마법(死靈魔法). 그걸 단 몇 달만에 습득했다면 진정 세기의 천재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이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첫째, 수많은 이들을 죽여 단번에 중급 사령술사 수준의 귀기(鬼氣)를 모았기에 기운을 축적하는데 필요한 장구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둘째, 승화된 한과 힘에 대한 집념을 지니고 있어 주술을 배우는데 있어 최적의 영적, 정신적 상태에 필사적인 노력까지 가미되었다. 셋째, 가장 실용적인 주술만을 골라 핵심적으로 가르쳐주었기에 실용성이 떨어지는 주문을 배우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넷째, 음기나 귀기는 아닐지라도 하늘의 기운이 가득한 천지문에서 지낸 덕분에 수련과 학습의 속도에 가속이 붙었다. 물론 이렇게 급격한 성장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그리 좋지 않다. 좀더 고위의 사령술을 익히기 위해서는 기초가 중요한 법이니까. 그러나 지금으로써는 단기적인 무력 또한 중요한 만큼, 일단은 지니고 있는 귀기를 적절히 사용할 수 있는 중급 사령술과 사령마법 몇 개를 확실히 습득시킨 뒤 다시 기초부터 다지는 것이 최선이다. ‘몇 달 정도면 중급 사령술의 기초는 마치겠군.’ 금호에 대한 생각을 마친 그는 이번엔 금호 옆에 있는 남국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남국은 벙어리고, 그것은 주술을 사용하는데 있어 매우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 단점이다. 주술의 삼대요소인 주문, 수인, 촉매 중 실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주문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뜻이니까. 숙수를 했던 만큼 손의 감각이 발달해 수인의 민첩함과 정교함은 뛰어나지만, 모자란 주문을 수인만으로 대체해야하기에 일반적인 경우에 비해 속도도, 위력도 뒤떨어진다. 그래도 일단 주술에 대한 이해력만큼은 금호에 비해서도 그리 뒤떨어지지 않고, 이미 종속시킨 망자를 다루는 사령술은 수인만으로도 충분하다. 무엇보다 절름발이인 금호와는 비교도 할 수없이 몸놀림이 뛰어나는 점을 활용하고자 그는 남국에게 부적의 제작법을 주로 알려주었다. 철방에게 십이기력을 부여한 것이 바로 부적을 응용한 주술이다. 물론 그가 시술하고 상급의 망자인 철방의 귀기로 유지되는 십이기력 수준의 부적을 풋내기에 불과한 남국이 만들 수 있을 리 없지만, 남국과 금호는 머리를 맞대고 며칠간 끙끙거린 끝에 나름대로 쓸만한 부적을 만들어냈다. 고양이 같이 민첩하게 움직이게 해주는 묘행부(猫行符), 참새와 같이 뛰어난 시력을 주는 작안부(雀眼符), 도마뱀 꼬리와 같은 회복력을 주는 석척부(??符). 부적은 귀기의 운용이 필요할 뿐, 주문은 물론이고 수인조차 필요 없기에 남국에게 가장 적합하다. 또한 남국은 철방에게 삼류무공이나마 정성껏 배워 부적의 효력을 극대화시키고 있는데, 부적의 힘이 도와주기 때문인지 무공의 습득이 매우 빠른 편이다. 칠성보법을 5성, 칠성도법을 3성, 육합권법을 2성, 무영각법을 2성까지 익혀 이제 부적의 힘을 빌리지 않고라도 웬만한 삼류무사를 상대할 수 있고, 부적과 술법까지 사용한다면 이류무사와도 능히 겨룰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다. ‘좀더 수준 높은 무공을 구해봐야겠군.’ 물론 어디까지나 기회가 닿는 경우일 뿐, 전의 용봉무서와 같이 이용가치도 낮으면서 파리들만 한가득 끌어들이는 귀찮은 무공이라면 준다고 해도 가질 생각 없다. “한 시진 뒤에 찾아와라.” “예!”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다리던 금호와 남국은 희색이 만연한 얼굴로 대답한 뒤 수련일정에 따라 죽림으로 물러났다. 그들의 사부는 주술을 가르치며 일정한 기한을 두고 몇 가지 과제를 곁들이는데, 그것을 이룰 때마다 항상 무언가 대가를 준다. 금호가 정해진 기한보다 빨리 골갑을 습득했을 때는 골창의 주술을 배웠고, 단 하루 차이로 세 개의 부적을 만들었을 때는 세 마리의 사뢰괴를 받았다. 대부분의 과제는 너무 빡빡한 기한과 높은 난이도 때문에 놓쳐버렸지만, 그럴수록 금호와 남국은 더더욱 의욕을 불태우며 수련에 정진했다. 그 정진의 결과로 마침내 세 번째 과제를 해결하게 됐으니, 그들이 희희낙락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의욕을 조금 더 높여주는 것이 좋겠군.’ 어차피 자신의 무력이 될 두 소년인 만큼 그는 술법을 전수하는데 여러모로 많은 신경을 기울였다. 수준에 비해 지나치게 강한 주술을 가르쳤다가는 무리해서 수련하느라 발전이 느려지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고, 수준에 비해 낮은 주술만을 알려주면 의욕이 떨어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노력하는 그들에게 과제라는 적당한 당근을 내줌으로써 발전속도를 조절하게 만든 것이다. ‘독성부여(毒性附與) 인챈트 포이즌(enchant poison)과 근력에 관련된 부적, 한골귀(寒骨鬼) 콜드 스켈레톤(cold skeleton)의 사령술 정도면 되겠군.’ 독성부여는 그저 약간의 독성을 부여하는 하급의 사령마법이지만, 다른 공격마법과 병행해서 쓰면 스치기만 해도 중독의 효과를 볼 수 있다. 근력에 관련된 부적이라도 저들의 수준이라면 하급의 부적이 한계겠지만, 그 정도만 돼도 현재 남국에게 부족한 힘을 보충해줄 수 있다. 한골귀는 뼈에 음기를 담아 만든 해골귀로 하급의 망자에 불과하지만, 살짝 긁히기만 해도 피가 식고 몸이 둔해지는 한독(寒毒)을 지니고 있다. 쉽게 익힐 수 있으면서도 유용한 주술로 대가를 정한 그는 그만 상념에서 빠져 나왔다. “학습을 계속 하시겠습니까?” 상념에서 벗어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물어온 천무에게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한 그는 천무와 함께 서고로 도로 걸음을 옮겼다. 천지문의 서고는 컸고, 그만큼 많은 서책이 있었다. 천무로부터 철방에게 듣지 못한 여러 가지 상식을 배운 뒤부터, 그는 주로 서고에서 학습을 했다. 천무가 추천해준 목록에서 적당한 서책을 하나 골라 읽고,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은 천무로부터 설명을 들었다. 모르는 것을 아는 이에게 묻는 것은 합리적인 일이기에 그는 모르는 것을 묻는데 있어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고, 천무 또한 조금도 질려하지 않고 언제나 상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이미 죽음과 영혼을 다룸에 있어 현자 이상의 방대한 지식을 지니고 있던 데다가, 마찬가지로 현자 수준의 지식을 지닌 천무의 도움을 받은 덕분에 그는 이곳의 지식을 빠르게 습득했다. 사회나 문화 등은 그에게 큰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지만, 무극에서 시작해 태극, 음양, 삼재, 사상, 오행, 육효, 칠성, 팔괘, 구궁, 무극으로 돌아오는 지금까지와 다른 관점에서의 사상은 그의 마법적 지식과 이해력을 대폭 늘려주었다. 마법이란 원래 세상을 이루는 가장 근원적인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 그 중 사령마법은 죽음과 영혼의 진리를 탐구하는데 특화된 학문이지만, 원래의 정통마법에서 파생된 만큼 근원적 진리에 대한 이해력에 따라 영향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혈도나 단전 등 인체 자체를 소우주적으로 보는 개념을 비롯해 무공에서 사용하는 내공에 대한 이해까지 지금까지 겪어본 적 없이 전혀 색다른 다양한 지식이 그에게 흡수되어갔다. 덕분에 근 몇 달 사이, 그의 마법학은 반 단계 진보하고 한 단계 확대됐다. 마법학이라는 관점으로만 본다면 그는 이전보다 최소한 반절 가량은 더 강해진 셈이다. 그리고, 이곳의 서책 중에는 마법학뿐만 아니라 사령술의 진보를 이뤄줄 수 있는 지식도 있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09 05:47:18 고친날 2005-06-09 05:47:18 읽은수 11510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9.천재지문(天才智門).(4)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신빙성이 적기는 하지만, 액귀, 역귀, 강시 등의 귀괴에 대한 설화는 꽤 여러 곳에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강시라면 모산파, 혈문, 배교에서 확실하게 사용하고 있는 귀괴지요.” 강시. 호악산에서 종속시켰으나 천뇌문사 장일산에 의해 모두 파괴되었던 망자. 그렇게 종속시키는 게 가능하다면 이곳의 망자들에 대해서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강시란 뭐지?” “강시(?尸)는 쓰러질 강에, 시체 시의 이름처럼 ‘넘어진 사체’와 ‘바로 선 사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밤에는 음기의 활발한 작용을 받아 정상인과 다름없는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낮이 되면 양기에 의해 음기가 수축돼 마른 몸집을 하게 된다고 전해지요. 생전에 상관없이 대단한 괴력을 지니고 있지만, 곧게 선 사체이기 때문에 부드러운 동작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천무가 한 서책을 꺼내 펼치자, 두 팔을 앞으로 쭉 내뻗은 채 뻣뻣하게 서있는 사람의 그림이 드러났다. 시각을 대체할 수 있을 정도의 초감각으로 그림을 느낀 그는 예전 종속시켰던 강시와 그림을 비교해보았다. ‘미완성의 상태였나.’ 당시의 강시들은 죽었을 때 입은 손상이 뚜렷하게 남아있었다. 정상인과 다름없는 모습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점을 볼 때, 제대로 된 강시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강시에는 이와 같은 유시(游尸) 외에도 불화골(不化骨)이나 건예자(乾霓子), 비강(飛?), 후(?)라는 것도 있지만, 유시 외의 강시에 대해서는 자료가 불분명합니다.” 불화골은 뼈의 일부가 검은 구슬처럼 변화된 것이고, 건예자는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가 생매장되어 생긴 강시다. 또한 강시가 오랜 시간 동안 힘을 모으면 하늘을 나는 능력을 지닌 비강이나, 개와 같은 형태에 신통력을 지니고 있는 후가 된다. ‘상당하군.’ 그저 설화에 불과한지도 모르지만, 정말 한 계통의 망자가 단순한 자연발생으로 이만큼 다양하게 발전됐다면 정말 놀라운 일이다. “강시를 만드는 주술로 가장 기본적인 것은 도시송시술(跳屍送尸術)로 사체를 운반하기 위해 사용합니다. 이 도시송시술이 주술삼방을 포함한 모든 강시술의 시초라고 할 수 있지요.” 주술삼방. 도술의 모산파, 강시술의 혈문, 사술의 배교. 무림에서 주술을 사용한다는 세 개의 방파. 이곳의 주술체계가 어떻게 되는지 알아두면 좋겠지만, 천무로서도 주술은 무공보다 그 전수가 비밀리에 이루어지기에 주술삼방의 이들을 직접 만나보지 않는 이상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고 답했다. 단지 도술을 사용한다는 모산파와 사술을 쓴다는 배교 모두 강시술을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을 볼 때, 도술과 사술이 극단적으로 상극되지는 않는다는 추정만이 가능할 뿐이다. “모산파는 도시송시술 자체를 발전시켜 주술로 비강의 일종인 천강시(天?尸)를 만드는 천시활시술(天屍活尸術)과 후의 일종인 백모후(白毛?)를 만드는 백후변시술(白?變尸術)을 만들어냈습니다. 천강시는 아무런 제약 없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백모후는 안개를 부르고 냉기를 토해내기에 어지간한 고수가 아니고서는 손도 대지 못하는 무서운 강시지요. 그리고 배교에서는 특별한 약물제강을 통해 강시를 강화시킨 철강시(鐵?尸)와 혈강시(血?尸), 독강시(毒?尸)를 만들어냈습니다. 철강시는 마치 외문기공을 익힌 것과 같은 단단하고, 혈강시는 몸의 뻣뻣함이 거의 없어 무림고수와 같이 민첩합니다. 또한 독강시의 경우는 전신이 극독으로 돼있어 스치기만 해도 중독을 면하기 힘들다더군요.” ‘각자 양쪽으로 발전했군.’ 강시가 시귀와 흡혈귀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그는 어렵지 않게 알아냈고, 모산파와 배교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모산파는 주술적 능력 강한 흡혈귀적인 특성을 보강하는 쪽으로, 배교는 물질적인 능력이 강한 시귀적인 특성을 보강하는 쪽으로 발전했을 터. “그리고 예전, 사사혈독공을 익혀 모산파에서 파문당한 도사가 배교의 강시술을 훔쳐 만들어낸 것이 바로 활강시(活?尸)와 사사혈독강시(死邪血毒?尸)입니다. 활강시는 사체가 살아생전 지니고 있던 기억과 능력뿐만 아니라 약간의 신통력마저 사용할 수 있고, 사사혈독강시는 철강시, 혈강시, 독강시의 특성을 모두 지니고 있습니다. 두 강시 모두 강시술의 정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무서운 강시지요.” 극에 이르면 모두가 하나로 통한다고 하던가? 천무가 설명해준 활강시와 사사혈독강시 또한 사령술과 유사한 점이 많다. 예를 들어 돌연변이시귀(突然變異屍鬼)인 철방만 하더라도 활강시(活?尸)와 여러모로 비교할 수 있다. 신통력이라는 것은 흡혈귀의 혈인권능(血印權能)에 가까운 것 같지만, 철방에게는 그 대신 각종 부적술로 강화된 육신이 있다. 사사혈독강시 또한 예외는 아니다. 철강시, 혈강시, 독강시는 철식시귀(鐵食屍鬼) 아이언 구울(iron ghoul), 혈식시귀(血食屍鬼) 블러디 구울(bloody ghoul), 독식시귀(毒食屍鬼) 포이즌 구울(poison ghoul)과 유사하다. 그렇다면, 사사혈독강시는 그 세 구울의 상위에 존재하며 사령기사(死靈騎士)와 비견되는 힘을 지닌 암흑식시귀(暗黑食屍鬼) 다크 구울(dark ghoul)과 비슷한 힘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강시술에는 두 가지 갈레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까지 설명한 것처럼 강시를 만들어내는 제강술(製?術)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의 신체를 강시와 같이 만드는 강시공(?尸功)이지요.” “스스로 강시가 된다는 뜻인가?” 고대로부터 강대한 힘이나 권세를 지닌 이들은 불사를 염원했고, 그 염원의 결정체로 스스로 망자가 되는 여러 가지 비술이 생겨났다. 겨우 하급 망자가 되어 영생을 누리고자 하는 이들은 없었기에 그 비술은 사령마법과 사령술, 저주술의 정화를 모아 최강의 반열에 드는 망자들을 만들어냈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사령술에서 사령마법(死靈魔法)을 창시해낸 가장 위대한 사령마법사(死靈魔法師)이자 불사마법사(不死魔法師) 리치(lich)가 되는 비술을 만들어 스스로 최초의 불사마법사가 된 아크 리치(arch lich), 미라 머미(mummy)를 비롯한 각종의 망자를 창조해낸 최고의 불사연구사(不死硏究士)이자 불사의 서(不死之書)의 집필자인 네크로 파라오(necro pharaoh)가 있다. 그 외에도 스스로 망자가 된 이들은 여럿이 있지만, 스스로가 만든 죽음의 비술로 진정한 불멸자의 반열에 든 존재는 오직 이 둘뿐이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활강시와 유사하긴 하지만, 멀쩡히 살아있는 상태에서 단지 신체만 강시처럼 강하게 하는 기공(奇功)이지요.” “구체적인 효과는?” “몸이 외문기공을 익히듯 단단해지고, 어지간한 부상에는 죽지 않게 된다는 것 정도입니다.” 예상외의 대답을 들은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산채로 망자의 신체를 지니게 된다면, 그것은 서(書)의 비술(秘術)과 유사한 기공일 가능성이 높다. 낮은 확률이긴 하지만, 어쩌면 강시공을 연구함으로써 비술이 지니고 있는 단점을 보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강시공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 “죄송하지만, 저희 천지문의 서고에 무공비급은 없습니다.” 하기야, 삼류무공조차 없어 철방이 아는 삼류무공만 가르치는 판에 강시공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그러나 비술을 보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그냥 포기할 수도 없다. “강시공을 구할 수 있나?” “강시공은 매우 드문 무공입니다. 그나마도 일반적인 외문기공과 별다를 것 없는 강시공이 대부분이지요. 제대로 된 강시공이라면 모산파의 일기환원공(一氣還元功), 혈문의 사사혈시공(死邪血尸功), 배교의 불사귀신공(不死鬼身功) 정도가 고작입니다. 일기환원공은 죽을 때 한 점의 진기를 남겨놨다가 생기로 돌려 잠시 되살아날 수 있는 기공이지만, 12대성을 이룬다고 해도 그 기한이 한달을 넘기 못하기에 모산파에서도 이것을 익힌 도사는 거의 없습니다. 사사혈시공은 10극성을 이르면 목이 잘리거나 심장이 부서지지 않는 한 죽지 않고, 12대성을 이르면 불사지체를 이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론상으로만 존재하여 역대 그 어떤 문주로 8성 이상의 성취를 이루지 못했다는 미완의 무학이지요. 불사귀신공은 12대성을 이루면 뇌가 무사한 이상 목이 잘리더라도 결코 죽지 않는다고 하지만, 대성을 이루기 전까지는 별다른 효과가 없기에 이 또한 익히는 이가 드뭅니다.” 신경을 기울여 천무의 설명을 들은 그는 강시공을 연구해 봐야할 필요성이 더욱 높아짐을 느꼈다. 만약 세 개의 강시공을 모두 모아 연구한다면, 비술을 보완하는 정도를 넘어 미완인 최후의 비술을 완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구할 수 없다면, 훔쳐내거나, 무력을 사용해 빼앗는 방법을 사용하면 된다. 다만, 한 가지 강시공에 대해서는 굳이 그런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지하석부를 다시 찾아가봐야겠군.’ 천지문에서 지식을 배우던 도중 그는 지하석부의 노인이 바로 무림삼괴 중 사사혈괴(死邪血怪)이고, 지하석부가 혈문의 숨겨진 근거지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언어에 대한 미숙함으로 미처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되긴 했지만, 지하석부를 뒤질 때 이미 쓸모 있는 것은 모두 챙겼던 만큼 지금까지는 굳이 찾아가볼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의 그는 이곳의 문자를 알지 못했고, 그렇다면 그가 무심히 지나쳤던 서책 중에 비급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주술삼방의 강시공까지는 안되겠지만, 그래도 일반적인 강시공이라면 아주 구할 수 없지는 않습니다.” 생각을 정리하던 그는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일단 기본원리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일반 강시공을 봐둘 필요가 있다. “혹시, 만물각(萬物閣)이라고 들어 보셨는지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10 00:03:04 고친날 2005-06-10 00:03:04 읽은수 11050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0.비급구매(秘 購買).(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사신, 비급을 구매하기 위해 만물각을 찾아 나서다.- 구매삼각(購買三閣)은 각자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을 사고파는 독특한 문파로, 그 중에서도 만물각(萬物閣)은 무공비급, 극독영약, 기진이보 등 무림에 관련된 기물들을 다루는 걸로 유명하다. 심지어 초절정 무공조차 거래된 적 있으니, 웬만한 기물 정도는 쉽게 구할 수 있다는 곳이 만물각이다. 그러나 만물각은 거래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으니, 그 첫째가 기물을 감당할 능력이고, 둘째가 명성이며, 셋째가 기물을 거래하는 이유다. 악인과는 결코 거래를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만물각은 정파로 분류되지만, 정정 당하게 강자지존의 패왕지로를 걷는다면 사파인과 거래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그런데...힘이나 이유는 둘째 치더라도, 아무래도 사부님이 명성을 지니고 계실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요." "대형의 명성이...뭐가 어쨌다고?" "형님도 대도산왕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계신데, 사부님은 별호조차 없잖아요." "그야...무림에 나서본 적이 없어서 그러...시지. 나서시기만 하면 지금이라도 당장...!" "엄청난 대마두로 이름을 날리시겠죠." 철방이 두 눈을 부라리자 금호는 잽싸게 천무의 뒤로 몸을 숨겼지만, 분명 일리 있는 말이다. 그가 사용하는 것은 분명한 사술(邪術). 아무리 좋은 방향으로 사용하더라도 명성을 얻기 힘들거늘, 좋게 사용할 생각조차 없으니 알려져 봤자 악명뿐일 것이다. "명성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천지문의 제자인 천무의 확언. 이것이 있기에 그는 굳이 요양을 멈추고 외유를 나온 것이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열흘 안에 왕복 가능한 거리에 만물각의 지점이 있고, 강시공 이외에도 여러모로 유용한 물품을 구입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나저나...만물각의 지점이 이런...곳에도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아주 촌마을이라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특별히 번화했다고 하기도 힘든 광정리(光井里)를 힐끔 살핀 철방의 혼잣말에 천무는 온유한 음성으로 답했다. "빛나지 않는 보물이라면 금고에 숨기기보다 마당에 장식해두는 것이 오히려 도난을 피할 수 있는 방책이기도 하지요." 금호와 남국이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철방은 할 말을 잃고 그저 눈알만 데구르르 굴렸다. 조용히 걸음을 옮기던 그는 문뜩 말문을 열었다. "많은 도움을 주는군." "은혜는 열 배로 갚아도 항상 부족한 법입니다." "그뿐인가?" 답변과 함께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천무의 모습에 살짝 감탄을 흘리던 두 소년과 철방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른다. 그러나 저 미소와 답변은, 단순한 성인군자의 것이 아니다. "특별히 이유를 대라 하시면...은공과는 절대 척을 져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것뿐인가?" "예. 절대로 척을 지고 싶지 않은 상대라면, 차라리 확실하게 친분을 쌓아 두는 것이 좋을 듯 싶더군요." '적, 아니면 동지인가.' 모든 이들을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판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어중간한 상태로 두는 것보다는 차라리 확실하게 적으로 구분 짓는 게 더 나은, 그와 같이 위험한 이들에게 사용하는 방법일 터. 그리고 만약 반드시 그래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면, 천무는 설사 상대가 철천지원수라고 하더라도 동지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자, 이곳입니다." 천무가 걸음을 멈추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셋은 얼떨떨한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아무리 둘러봐도, 그들의 주변에 있는 것은 당장이라도 뚝 떨어져 내릴 듯한 간판에 금가만물상(金家萬物相)이라 쓰여져 있는 자그맣고 허름한 건물이 다였다. "저...천형. 설마 여기가 그 만물각의 지점이라는 건...하하, 아니겠죠?" "맞습니다." 그들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천하삼십육세 중 하나인 만물각의 지점이 이런 만물상이라니? 그야말로 듣고도 못 믿을 말이다. 겉모습에 현혹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임을 아는 그는 다른 셋과 달리 무심히 금가만물상 안으로 걸음을 들였다. 딸랑딸랑. "음...? 으음, 어서 오시구려." 문에 달린 방울소리에 마악 잠에서 깬 듯, 입가의 침을 소맷자락으로 슥슥 닦는 중년사내는 이 허름한 만물상에 너무나 잘 어울리게 평범하고 허름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는 중년사내를 평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예전 철방에게 목숨을 잃은 금광보 수준의 절정고수가 평범하다면, 무림고수라는 이들은 아마 불멸자 정도 될 것이다. "오랜만입니다, 금대인." "천공자 아닌가? 이거 참 오랜만이네." 뒤따라 들어온 천무와 금대인은 이미 안면이 있는 듯 친숙하게 말을 나눴다. 한쪽은 천지문의 제자요, 한쪽은 만물각에 속한 절정고수니 이 정도 친분이야 특별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래, 오늘은 웬일로 그것도 다른 손님들까지 모시고 왔는가?" "제 은공 되시는 분이 이곳에 볼일이 있으십니다." "허어, 천공자의 은공? 그럼 푸대접할 수야 없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금대인은 바닥 한구석에 쌓여있는 책들을 휙휙 내던지고 그 밑에 깔려있던 둥근 손잡이를 손에 쥐었다. 쿠구궁-! 대체 뭐로 만들어졌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 육중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나타나자, 그는 자연스러운 손짓으로 그들을 불렀다. "이리로 내려오시구려." 천무가 이미 익숙하다는 듯 앞장서고, 그가 무심히 계단을 내려가는 가운데 철방과 금호, 남국은 아직까지 떨떠름한 기색을 떨치지 못한 채 그 뒤를 따랐다. 금가만물상의 지하는 대략 일다경 동안 내려가서야 계단이 끝났을 정도로 무척이나 깊었다. 그 계단 끝에 있는 방에 도착했을 때, 금호는 심각한 괴리감을 피하지 못했다. 한쪽에 놓여져 있는 것은 유서 깊어 보이는 도자기요, 반대쪽에 놓여진 것은 들은 적도 없을 정도로 큼지막한 옥 덩어리다. 또한 바닥에 깔려있는 것은 귀한 양단이고, 벽에 걸려있는 것은 하나같이 날이 번쩍번쩍한 명검 명도에 가구들조차 하나같이 최고급품이니 이게 과연 아까 그 만물상의 지하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남국과 철방은 눈썰미를 갖추지 못했고, 천무에게는 익숙한 광경이었던 데다가 그는 무심하기만 했으니 결국 그러한 의심은 금호 혼자만의 것으로 묻어둬야 했다. "자, 자, 손님들 서있게 할 수야 없으니 어서 앉으시구려." 금대인이 탁자에 있던 의자 중 하나에 떡 하니 앉아 자리를 권하자, 천무로부터 시작해, 금호, 남국, 그, 철방의 순서대로 차례차례 의자에 몸을 걸쳤다. 마치 미리 준비해놓기라도 한 듯, 탁자 가운데 놓여져 있던 찻주전자를 들어 차를 따른 금대인은 찻잔을 모두에게 돌린 뒤 주전자와 남는 잔을 치우고 그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보통 이럴 때는 마주 앉는 사람이 볼일이 있는 법이니, 그대가 천공자의 은공이겠구려." 그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금대인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이 사람은 만물각의 지점장을 맡고 있는 금모라 하오. 그냥 금대인이라고 부르시면 되외다." 일단 자신을 소개한 금대인은 어째 사방이 조용하다 싶어 그들을 돌아보았다. 두 소년은 눈치만 보고있고, 거한은 멀뚱멀뚱 자신을 마주보는데 정작 중요한 그는 조용히 침묵만 지키는 것이 아무래도 대답해줄 생각이 없나보다. 하는 일이 일인만큼 괴팍한 인간들도 꽤나 만나봤던 금대인은 대답을 듣는 것을 포기하고 차로 입술을 축인 뒤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 그럼 용건부터 들어보십시다. 뭘 원하시오?" "무공. 강시공. 영약." 스스로도 꽤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한 편이라 생각하던 금대인이지만, 그의 대답을 듣자니 왠지 자신의 말에는 군살이 더덕더덕 붙어있는 느낌이 들었다. 차를 홀짝거리며 잠시 고민한 끝에 금대인은 그 군살이 다름아니라 말에 덧붙어있어야 마땅한 감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놈이 과연 인간인지, 아니면 인간의 탈을 쓴 강시인지 헷갈리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 절차대로 묻기는 해야한다. "어디에 쓸 거요?" "무공은 제자에게, 강시공과 영약은 내가." 참 간단명료하다. 덕분에 할 말은 없어지고, 괜히 목만 말라서 차로 목을 축인 그는 가까스로 좀더 자세히 물었다. "왜 그것들이 필요한 거요?" "습득. 연구. 회복." '이 놈은 강시다. 강시가 틀림없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인간인 이상 이따위 대답을 늘어놓을 수는 없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이라도 내쫓아버리고 싶지만, 천공자의 은공을 그렇게 대우할 수야 없는 노릇이니 열불 나는 속을 차로 식혀야 했다. "죽여라." 너무나 무심한 음성에, 너무나 갑작스러운 말이라 금대인은 알아듣지 못했다. 금호도, 남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단 두 사람만큼은 그 말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10 00:04:12 고친날 2005-06-10 00:04:12 읽은수 10655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0.비급구매(秘 購買).(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부우웅--! 갈증을 느끼고 마악 찻잔을 들어올리려던 남국은, 거대한 대도가 일도붕산의 기세로 내려쳐지다가 아슬아슬하게 의자만을 쪼게고 모습을 보며 홀로 멍하니 있었다. "정신 차려!" 친우의 경호성을 듣고 나서야 번쩍 정신이 든 남국은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살인명령을 받은 철방이 대도를 휘두르고, 금대인이 정말 아슬아슬한 차이로 그것을 피해내는 와중에도 그는 무심함을, 천무는 평정심을 유지했다. 화경의 눈치로 곧바로 친우를 일으켜 세운 금호는 가장 안전한 위치, 즉 그의 옆에 바짝 붙으며 자그맣게 혀를 찼다. '하여튼 형님도...충직한 건지, 무식한 건지.' 철방에게 있어서 그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죽이라고 하면 죽이는 거고, 죽으라고 하면 죽는 거니 이토록 느닷없는 살인명령에도 아무런 의문을 느끼지 않고 칼질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정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금대인에게 있어서 이건 그야말로 마른하늘의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뭐, 뭐, 대체 뭔 짓이요!" 권법의 기수식을 잡은 금대인은 벌렁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켰다. 절정고수씩이나 되서는 하마터면 의자에 앉은 채로 그대로 반쪽이 날 뻔했으니, 놀라지 않으면 인간도 아니다. 그러나 철방은 설명에 별로 자신이 없는 사내였고, 그래서 말 대신 행동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뒈...져라!!" 철방의 두 눈에서 혈광이 번뜩이며 대도가 번쩍 치켜 들려지자, 금대인은 철방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일권을 날렸다. 흔한 삼류무공인 칠성도법의 초식이라면 눈감고 파해할 수도 있고, 이렇게 허술한 놈이라면 적당히 제압하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니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명치에 일 권을 먹이고 보니 되려 자신의 손이 얼얼하다. '외공!' 백회혈을 노리고 떨어져 내리는 대도의 손잡이를 권력으로 똑바로 받아친 금대방은 팔이 뻐근해짐을 느끼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문제는 철방도 겨우 한 걸음만 물러났다는 것이다. 내공도 느껴지지 않는데 그와 동수를 이루다니, 그렇다면 이놈이 기공의 고수였다는 말인가? "잠깐! 말로 하세, 말로!" "시끄...럽다!" 기공의 고수는 까다롭다. 신병이기나 강기로 외공 자체를 깨부수거나, 아니면 누가 먼저 지치는지 지구전으로 끝까지 가보거나, 현철로 만든 굵직굵직한 쇠사슬 따위로 꽁꽁 묶는 식의 방법으로 상대해야 하니까. 그래서 일단 보법으로 피하며 대화로 풀어보려고 하는데, 어째 이 무식한 놈은 말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칼질만 해대니 곤란해도 이만저만 곤란한 게 아니다. '그래, 금적금왕(擒賊擒王)이다!' 아지랑이와 같은 기운이 주먹으로부터 흘러나왔다 싶은 순간, 두 개의 주먹이 흐릿한 잔영 만을 남긴 채 허공을 가로질렀다. 퍼버벙! 쿵! 쿵! 허공을 격하고 연달아 날아온 무형의 권경에 철방이 뒤로 주르륵 물러나자, 금대인은 재빨리 탁자 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도적을 사로잡을 때는 우두머리부터 잡아야 하고, 말이 안 통하면 통하는 상대와 이야기를 하면 되는 것이다. 그도 철방처럼 일 점의 내공조차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은 영 꺼림칙하지만, 싸우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어떻게든 설득할 틈만 마련하면 되는 것이다. 철방과 접전을 벌이느라 뒤로 물러나 있었다고는 해도 그래봤자 겨우 몇 걸음. 금대인과 같은 절정고수에게 숨 한번 쉴 시간에 탁자를 돌아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죽여라." 쾌속한 움직임으로 그에게 다가가던 금대인은 저놈이 이미 했던 명령은 왜 또다시 내리나 싶어했지만, 그것은 철방에게 내린 명령이 아니었다. 촤르륵-! "헛?!" 얼굴에 붕대를 감은 소년이 갑자기 자신의 앞을 가로막으며 소매로부터 두 개의 기이한 기병(奇兵)을 토해내자, 금대인은 주먹에 약간의 진기를 담아 그것을 쳐내려고 했다. 그런데 두 기병은 마치 스스로 살아있는 듯 주먹을 피해 팔에 감겨 들려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놀란 금대인은 진기를 돌려 기병의 칼날로부터 팔을 보호하며 그것을 냅다 잡아당겼다. 기병을 다루는 절묘한 수법에 비해 소년은 너무나도 순순히 기병을 손에서 놓았다. 그가 이에 의아해하려던 찰나, 갑자기 소년의 상반신에 뼈로 얽혀진 골갑이, 우수에 골도가, 좌완에 골순이 생겨났다. "주술사(呪術師)!" 그는 오늘이 아주 옴 붙은 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필이면 주술사란 말인가? 차라리 초절정고수와 겨루면 겨뤘지, 기기묘묘한 주술사와 겨루는 것은 꺼려지는 일이다. 그 순간, 금대인은 자신의 손에 들린 기병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고 흠칫하며 그것을 내던졌다. 머리부터 꼬리 끝까지 뼈로 이루어져진 채 바닥에서 마치 뱀처럼 움직이는 그것을 보니, 기병이 아니라 완전 마물이다. 겨우 제자라는 소년조차 기괴한 주술을 쓰고 이런 마물을 부리고, 수하쯤으로 보이는 거한은 기공의 고수이니 사부라는 작자는 대체 얼마나 무시무시할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항복하겠소!!" 금대인이 두 팔을 번쩍 들어올리고 무저항의 의지를 드러내자, 마악 골도를 치켜들던 남국은 주춤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단지 명령에 죽고 명령에 죽이는 한 사내는 그대로 금대인의 목을 향해 자신의 대도를 휘둘렀다. "그만." 철방의 대도가 뒷목으로부터 겨우 반치 앞에 우뚝 멈추자, 금대인은 거의 죽었다 살아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일단 살아나긴 살아났어도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것이, 수명이 한 10년은 줄어든 듯싶다 "이 금모에게 대체 무엇을 원하시는 거요? 금대인의 물음에 남국과 금호 역시 힐끔 그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이유로 대화를 하던 상대를 갑자기 죽이려고 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독차를 내놓은 이유." 그의 무심한 말을 머리에 받아들이기 위해 잠시의 시간을 쓴 뒤, 꽤나 떨떠름한 금대인의 표정으로 진위여부를 판단한 둘은 기가 막힌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음, 음...그것 때문에 그러셨던 거구려?" 무심히 끄덕이는 고개. 남국은 자신이 마악 찻잔을 들어 올렸던 것을 기억해내고 살짝 몸을 떨었다. 만약 그의 살인명령이 조금만 늦었다면, 남국은 아무 것도 모르고 그대로 독차를 마셨을 것이다. "입도 대지 않고 어떻게 아셨소?" "향(鄕)." "허, 이제 보니 다도에 일가견 있는 분이셨구려." 그의 초감각을 알 리가 없는 금대인은 무취에 가까워 웬만한 독인이라도 마셔보기 전까지는 독을 차향(茶香)의 미세한 변화로 알아낸 것으로 착각했다. 그는 금대인의 착각을 굳이 지적해주는 대신, 다시 한번 물음을 던졌다. "독차를 내놓은 이유는?" 금호와 남국의 몸이 살짝 떨렸다. 그의 질문을 받았던 걸개방의 당주가 어떻게 됐었는지 기억났기 때문이다. 그 자신에게는 매우 다행스럽게도, 금대인은 선선히 대답을 토해냈다. "만물각의 조건 때문이오. 보물을 구입하려는 이라면 그걸 지킬 수 있어야 하는데, 이 험난한 무림은 힘만으로 헤쳐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처음부터 독차를 사용해 간단히 시험해보는 것이 절차요." "아니, 독차로 사람을 시험해요?" 금호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묻자 금대인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절차인 걸 어쩌겠느냐? 가벼운 산공과 마비의 효과가 있는 독이라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단다." "그 시험, 지금까지 통과한 사람이 있긴 있어요?" "물론. 그 정도의 경계심도 없이 귀한 보물을 사겠다고 온 사람은 드물다. 대다수는 아예 손도 대지 않지만, 그대로 꿀떡꿀떡 마셔버리는 독인이나, 진기로 간단히 독을 몰아내는 고수도 있지. 하지만 마시기도 전에 독이 들었음을 알고 이렇게 칼질을 해오는 건 나도 처음 겪는 일이다." 금대방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말에 그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물각의 첫 번째 조건이 바로 기물을 감당할 능력이니, 이런 시험이 있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자, 그러면...이 칼 좀 이제 치워주지 않으시겠소?" 아직까지 자신의 목뒤에 대어져있는 대도를 가리키며 부탁하자, 그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여 철방으로 하여금 대도를 치우고 앉게 했다. 그에 맞춰 주술을 풀고 자리에 도로 앉던 금호는 문뜩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유유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천무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천형은 이게 독차인 걸 알고 있었죠?"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10 00:04:30 고친날 2005-06-10 00:04:30 읽은수 10718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0.비급구매(秘 購買).(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철방과 남국의 시선이 천무에게 향했다. 그러고 보니 천무는 평소 몹시 즐기던 차에 손도 대지 않았다. 애초부터 금대인과 안면이 있다는 점과 그 평정심을 볼 때, 아무래도 의심을 떨치기 힘들다. "물론 알고 있었습니다." "아니, 알면서도 안 알려줬다는 거예요?" 태연한 긍정에 철방은 미간을 찌푸렸고, 금호는 당장 따져들었다. 그런 금호를 제지한 것은 금대인의 설명이었다. "원래 만물각의 규칙이 그러하니 너무 화내지 말거라. 만약 천공자께서 이 비밀시험에 대해 말하셨다면, 아예 기관 장치를 사용해 시험을 치렀어야 한다. 그리고 기관에는 눈이 없지." "그, 그래요?" 비밀을 지킨 것이 천무 나름대로의 배려였음을 알게 돼 머쓱한 표정을 짓는 금호에게 천무는 살짝 말을 덧붙였다. "무엇보다, 이런 시험 정도야 가볍게 통과하실 거라고 믿었으니까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한 말에 금호는 고개를 푹 꺾었고, 철방은 괜히 헛기침을 했다. 그나마 가만히 있던 남국만이 시선을 똑바로 할 수 있었다. 독차를 치우고 다시 안정적인 분위기를 만든 금대인은 가만히 그들을 돌아보다가 입을 열었다. "무력이나 심계로 볼 때, 보물을 지킬 능력은 충분히 있는 것 같구려. 이유는...그래, 강해지기 위해서라든지 뭐든지 대충 넘어가겠소. 그런데, 이 금모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대와 같은 주술사의 명성을 듣지 못한 거 같소이다만?" 이미 예상했던 날카로운 지적에 그들의 시선이 절로 천무를 향해 쏠렸다. 명성에 관해서는 이미 천무가 호언장담을 한 적 있으니, 그에게 맡긴다는 의사를 암묵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금대인 또한 그것을 눈치 채고 고개를 돌리자, 천무는 코끝까지 내려온 머리카락 아래로 온유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비록 아직까지 알려지진 않았지만, 천지문(天智門)의 제자인 저를 위기에서 구해주셨으니 이 사실이 알려지면 더욱 높은 명성을 지니게 되실 겁니다." "음...틀린 말은 아니군."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에 그들은 회색이 만연해졌다. 이대로 잘만 되면 목적을 무사성취 할 수 있다. 헌데, 금대인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앞으로의 일 아닌가? 아무리 천공자의 말이라도 그런 훗날의 가정으로 명성을 대신할 수는 없네." '쳇, 까다롭기는.' 기껏 무공비급을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자꾸 가로막히자 금호는 내심 금대인에게 투덜거렸지만, 겉으로는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괜히 기분을 상하게 해 상황을 더욱 나쁘게 만들 이유가 없을뿐더러, 천하삼대지문 중 하나인 천지문의 제자인 천무라면 분명 저 금대인을 격파해버릴 수 있을 거라는 묘한 확신 때문이기도 했다. "그것 참 이상하군요. 지금 이 두 분께서 지니고 계신 명성만 해도 결코 작지는 않을 터인데 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금대인뿐만 아니라 그와 천무를 제외한 모든 이들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렸다. 철방이라면 그래도 산적질로 조금 이름을 날리긴 했지만 그나마도 흉명이고, 그는 아예 무림에 나서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대체 가지고 있는 명성이 어디 있단 말인가? 혹시나 싶어 둘을 돌아본 금대인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검은 두건과 가장 어리둥절해하는 철방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아는 한 천무는 괜한 헛소리를 할만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저들의 반응을 보자니, 역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아무래도 요즘 금대인의 귀가 어두우신 듯싶군요." 요즘이라는 말은 최근에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는 뜻이고, 귀가 어둡다는 표현까지 썼다면 그 명성이 결코 낮지 않음이라. 그의 머릿속에 최근 등장한 신진고수들의 이름이 스쳐지나갔지만, 만물각 중에서도 유독 손님이 적은 지점에서 게으름을 피우느라 중요한 정보만 대강대강 알아둔 덕분인지 짐작이 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머릿속에 복잡해지는 듯싶었다. "흐음, 자네 말이 맞네. 이 금모가 요즘 귀가 어두워져서 그러니 자네가 가진 그 하늘의 지혜를 풀어놔보게나." 금대인이 선선히 백기를 들자 천무는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고, 무심한 그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입을 열어 천천히 물음을 던졌다. "천하에 있어 기공의 경지를 이룬 외가고수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기공의 외가고수라...그래, 그 숫자가 지극히 적지." 일반적인 절정고수의 숫자만 해도 모든 무림인의 숫자에 비하자면 지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하물며 높은 성취를 이루기 힘든 외문기공을 기공의 경지까지 익힌 절정의 외가고수는 더더욱 적기 마련이다. 사신오왕(四神五王) 중 천하에서 유일하게 금강불괴지체(金剛不壞之體)를 이룬 금강철신(金剛鐵神)을 필두로 외문기공에 있어 천하제일로 불리는 금강전(金剛殿). 그러한 금강전이라 할지라도 기공의 고수는 오직 십팔철인(十八鐵人)뿐이고, 그 외에 기공을 이룬 고수라고 해봐야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은공이 입고계신 흑의를 보시지요. 제가 알기로 저런 흑의는 무척 드뭅니다." 철방으로부터 그에게 시선을 옮긴 금대인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장포인지 피풍의인지, 마치 마대자루를 통째로 뒤집어 쓴 것만 같은 저런 옷은 아마 만물각을 샅샅이 뒤지더라도 없을 것이다. "최근에 등장한 기공의 고수와 기이한 흑의라...응?"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되새기던 금대인은 문뜩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내고 두 눈을 번쩍 떴다. 너무 유명한 나머지, 설마 성명조차 밝히지 않은 이들이 그 주인일 거라고는 짐작조차 못했던 하나의 명성이 딱 들어맞은 것이다. "설마 그대들이 파타시와 철방되시오?" "어...라?" 금대인이 자신과 대형의 성명을 꼭 찍어내자 철방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고, 금호와 남국은 그 반응을 통해서야 사부의 성명이 바로 파타시였음을 알게 됐다. "호오, 이거 귀인을 몰라 뵈었구려. 생사판관(生死判官) 파대협과 불사패왕(不死覇王) 철대협이셨을 줄은 미처 몰랐소이다." 무슨 소리가 싶어 금대인을 바라보던 금호와 남국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대협이라니? 무공이 고강하고, 여러 협행을 펼친 이들에게나 붙는 칭호라는 그 대협 말인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부나, 협객과는 엄청난 거리가 있는 전직을 지닌 철방이 대협이라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 하늘이 땅 밑에 있다는 것만큼이나 어처구니없는 소리였다. "생사판관...? 불사패왕...? 대협...?" 떨떠름한 걸로 치자면 두 소년 못지 않은 철방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자신의 말을 되새기자 잠시 어리둥절해 하던 금대인은 곧 상황을 파악하고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모르고 계셨던 거 같구려. 이런 별호는 원래 남들이 붙여주는 것이니 만큼, 널리 알려진 한참 뒤에야 본인이 알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소이다." 청옥노사 강비연이 용봉무서를 손에 넣고 교림에 몸을 의탁한 것은 한동안 강호무림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다. 교림에서 용봉무서를 풍운회의 풍운검존에게 맡기겠다는 뜻을 밝힌 이후에는 절대쌍존의 위명에 눌려 잠잠해졌지만, 용봉무서와 함께 퍼져나간 소문만큼은 여전했다. 금황성의 배신자 금광보를 꺾고 강씨일가를 구해낸 불사패왕 철방. 기공의 절정에 달해 금강전의 십팔철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는 그의 외문기공은 이미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다. 실질적으로 금광보의 목숨을 끊고, 생사지경을 헤매던 강씨일가의 두 아이를 기적적으로 되살려낸 생사판관 파타시. 삶과 죽음을 가른다는 그의 무공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의술은 천하삼대신의를 천하사대신의로 바꾸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한다. 물론 천하에 금광보를 꺾고 죽일 수 있는 고수는 여럿이 있다. 그런 면에 있어 철방이나 파타시의 무력은 제법 대단하다고 할 정도일 뿐, 이처럼 단시간에 온 천하에 널리 퍼질 정도는 아니다. 그들의 명성이 이토록 급격히 퍼질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아니라 용봉무서가 얽혀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금광보를 물리치고 두 아이의 목숨을 구해준 뒤, 용봉무서에 손끝하나 대지 않고 그대로 강씨일가에게 돌려줬다. 웬만한 정심을 지닌 협객이라 하더라도 용봉무서 정도의 초절정 무공이라면 그 욕심을 떨치기 힘들 터인데, 그것을 한 번 훑어보지도 않고 그대로 내준 것은 정사를 불문한 모든 무인들을 감탄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생사판관이 용봉무서에 대해 했던 말이 퍼져나가며 그들의 소문은 더욱 뜨겁게 불타올랐다. -그딴 것, 필요 없다.- 이 어찌 광오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설사 화경의 고수라고 할지라도 용봉무서를 그토록 취급하지는 못할 터이다. 또한 교림에서는 생사판관을 은인으로 삼을 뜻을 밝혔고, 금황성은 배신자 금광보를 잡아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하며 금자 천냥을 내놓았다. 거기에 수정궁과 철궁곡까지 청홍미화의 누명을 막아준 것과 강궁통절의 원한을 갚아준 것에 대해 빚을 졌음을 널리 알렸으니, 일순간에 천하삼십육세 중 네 곳과 연줄이 생긴 그에게 강호의 시선이 쏠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10 00:04:49 고친날 2005-06-10 00:04:49 읽은수 10733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0.비급구매(秘 購買).(4)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흠...그런 이유로 두 분께서는 현재 구룡팔봉이나 팔정협칠사마 못지 않은 명성을 지니고 계시오. 일부에서는 삼괴사신오왕과 비교하는 소리도 있을 정도 외다." 금대인의 기나긴 설명을 들은 금호와 남국은 아예 넋이 나가버렸다. 그 명성을 들으면 과연 동일인물이 맞을까 싶지만, 용봉무서를 그딴 것으로 취급할 인간은 천하무림을 다 뒤져도 한 사람 뿐이니 맞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의 넋을 빼놓은 것은 바로 천냥의 금자. 한평생 펑펑 놀고먹는데 써도 남을 정도의 막대한 거금이었다. 과연 돈이 썩어난다는 금황성에서 내놓을만한 금액이랄까? "이제 명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천무의 말에 금대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천관까지의 물품을 공개하겠소." 만물각의 거래단계는 모두 동(東), 서(西), 남(南), 북(北), 천(天), 지(地), 인(人)의 일곱 관으로 나눠진다. 삼류무공이 있는 동관에서부터 오직 만물각주만 들어갈 수 있다는 인관까지 있으며, 천관이라 하면 절정무공이나 그에 준하는 기물이 배치되어 팔정협칠사마나 그에 준 하는 초절정고수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금대인으로서는 그의 주술이 지닌 힘과 무림의 드높은 명성을 생각해 최대한 배려한 판단이었다. "단, 만물각의 기물은 그 값이 결코 싸지 않다는 것은 명심하시구려." 만물각의 조건을 꽤 높은 단계까지 통과했다는 사실에 희희낙락해 하던 금호와 남국은 뒤이은 말에 흠칫 했지만, 곧 금황성에서 내놓은 금자 천냥을 생각해내고 안도했다. 놀랍게도, 천관의 위치는 바로 지하 5층이었다. 그들이 있던 방의 바로 옆의 화관을 비롯해 각 층마다 하나의 관이 있었던 것이다. "인관까지 치면, 모두 지하 7층까지 있겠네요." "인관은 천하에 오직 하나뿐이며, 그 위치는 오직 만물각주밖에 알지 못합니다. 대다수의 만물각은 단지 지하 4층까지만 있을 뿐이지요." "그럼 여긴 몇 층까지 있는데요?" "그야 지점장께서 아시겠지요." 지하 5층에 도착한 금대인은 현철로 만들어진 게 아닌가 싶은 커다란 문에 열쇠를 꽂아놓고 몇 가지 기관장치를 조작했다. 그르릉...! "이곳이 천관으로, 이 안에 있는 것이라면 마음껏 고르실 수 있소." 천관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하기야, 절정비급이나 그에 준 하는 기물들이 쌓이고 쌓여있을 리는 만무했다. "비급의 경우 다른 지점에도 필사본이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두시구려." 가볍게 말을 덧붙인 금대인이 뭐든 골라보라는 듯 문 앞에 방관적인 태도를 취하자, 그는 우선 벽 한쪽에 있는 책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진가팔괘보법], [오행태극장], [귀일신법], [혈홍지], [환마각], [환영추명조] 등...갖가지 무공비급이 꽂혀 있었지만, 그가 찾는 것은 일반적인 무공 따위가 아니었다. "강시공은 하나밖에 없지만, 주술서도 하나 있군요." 마치 그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천무가 두 개의 서책을 책장에서 꺼냈다. 사이한 기운을 이용해 두 손을 단련하는 [흑사수(黑死手)]라는 비급과 혼령을 불러내 그 힘을 사용하는 [현천강신술(玄天降神術)]이라는 주술서였다. "그 외에는 이 정도 무공이 적당할 듯 싶습니다." [반탄기공(反彈氣功)], [칠뢰도(七雷刀)], [육천권(六天拳)], [귀영각(鬼影脚)]이 차례차례 뽑혀져 나오자 철방의 얼굴에 씨익 웃음이 맺혔다. 반탄기공은 10극성만 이뤄도 기공을 이루고 경지에 따라 타격을 몇 배로 튕겨낼 수 있는 절정의 외문기공이니, 단지 읽고 연구하는 것만 해도 그의 외공성취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칠뢰도, 육천권, 귀영각은 각자 칠성도, 육합권, 무영각에서 파생된 낭인무공이다. 삼류무공을 익힌 낭인이 평생의 수련 끝에 일류무공을 만들고, 그 제자가 일류무공을 다시 절정무공으로 만드는 과정을 거쳐 대대로 발전한 것이기에 낭인무공치고는 무척이나 완성도가 높다. 무엇보다 삼류무공에 그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미 칠성도법을 익히고 있다면 좀더 쉽게 칠뢰도법을 습득할 수 있다. 철방과 남국의 경우 칠성도, 육합권, 무영각에 적게나마 성취를 이루었으니 몇 달만 충실히 수련하면 적지 않은 진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신경 써줘서...고맙수다." "이 정도 가지고 고마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흑사수와 현천강신술을 대략 훑어본 그는 무심히 천관의 한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여러 가지 자기병과 목갑, 옥갑 등등이 나란히 정렬되어 있고, 그 위에 붙은 종이에는 내용물이 적혀있었다. 귀원단, 회광단, 금은초, 화련신단, 보천환 등 하나같이 최소 반갑자 이상 내공을 증진시켜줄 수 있는 갖가지 진귀한 영약들이 바로 내용물의 정체였다. 초감각을 통해 영약들이 지니고 있는 기운을 천천히 훑어본 그는 그 중 하나의 자기병을 들어올렸다. 지나치게 양기가 강하면 몸에 잠재된 마기와 충돌할 수 있고, 음기가 강하면 회복되던 생기가 오히려 억눌릴 수 있으니 음양의 균형이 알맞은 영약으로 고른 것이었다. "종령석유(鐘靈石乳)를 고르셨군요. 더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그는 무심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천지문에 장기적으로 머물며 요양하는 것만 하더라도 웬만한 영약 못지 않은 효능이 있고, 요양을 마치고 호악산으로 돌아가게 되면 귀기 또한 충분히 모을 수 있으니 굳이 과욕을 부려 이것저것 챙길 이유는 없다. 금호와 남국은 아쉬운 심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지금 현재 지니고 있는 귀기조차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에게 영약 따위가 있어봐야 독에 불과했다. 여섯 권의 비급과 종령석유를 본 금대인은 잠시 무언가를 셈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사령수와 현천강신술은 각자 200냥, 반탄기공, 칠뢰도, 육천권, 귀영각은 각자 100냥, 종령석유가 500냥이오. 모두 합쳐 금자 1300냥인데...좀 부족하진 않으시겠소?" "흐엑!! 뭐, 뭐가 그렇게 비싸요?!" 그야말로 눈 돌아가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금호는 경악성을 내질렀지만, 금대인은 어디까지나 당당했다. "무공비급과 영약은 땅파서 나오느냐? 그나마 필사본이 있어 가격이 많이 줄은 거니, 너무 과하다 생각하지 마시구려." 예산의 300냥이나 초과된 금액에 남국은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사부가 그 자신에게 필요한 비급과 영약을 포기할 리가 없으니, 결국 네 권의 비급 중 단 하나만 남게 되는 것이다. 비록 철방이 열 우물 파기보다는 한 우물 파는 것이 빨리 고수가 될 수 있는 법이라고는 했지만, 권각술도 어느 정도 성취를 이뤄둬야 변칙적이고 다양한 상황에 대응할 수 있다는 말도 한 적 있으므로 남국으로써는 무공 하나하나가 아까웠다. 게다가 만약 반탄기공 하나만 딸랑 남게 되기라도 했다간, 이대로 계속해서 삼류무공에만 매달려야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소매에서 하나의 핏빛 구슬을 꺼내 내밀었다. "음? 이것은 무엇이오?" 맑기 그지없으면서도 왠지 오싹한 느낌을 주는 선홍빛 구슬을 받아들고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금대인으로서도 이 구슬이 대체 무슨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는 잘 알 수 없었다. "주안석." "주안석?" 금대인은 이게 대체 뭔 소린가 싶어 그를 바라보았다. 주안석이라면 늙지 않는 돌이라는 소린가? 노화를 억제해주는 기보가 있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그가 아는 한 그런 기보는 만물각에도 없다. "주안술과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다면 몇 백 냥 정도는 능이 나갈 듯 싶구려." 실제로는 영약으로 내공을 쌓고 주안술을 익히는 것이 더 낫겠지만, 세상에는 돈 버는 재주는 있어도 무공 배우는 재주는 없는 부자가 수두룩하다. 더구나 영약이 한 번 먹으면 끝인 것에 비해, 주안석이라면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더라도 상관없이 몇백 년을 두고두고 써먹을 수 있으니 500냥은 거뜬할 것 같았다. "불로장생의 돌이다." "그러니 주안석 아니오?" "다시 젊어지고, 200년 이상 살 수 있지." 금대인의 얼굴에 순간 당혹감이 스쳐지나갔다. 다시 젊어지고, 200년 이상 살 수 있다니? 노화를 억제하는 정도를 넘어 다시 젊어지게 할 수 있는 것은 주안술 중에서도 상급에 속하는 것들이나 가능하다. 그나마도 그저 겉껍데기 일뿐, 알맹이는 계속 늙어 가는 것이다. 천하에서 손꼽히는 최상급 주안술이라면 수명조차 늘려 100세 이상 장수할 수 있다고 하지만, 200세를 넘기는 것은 최상급 주안술 정도가 아니라 화경에 들어 반로환동을 거친 고수들도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그것을 겨우 구슬 하나로 이룰 수 있다니, 진정 믿기 힘든 일이다. "확실하오?" 그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젊어지고, 200년 이상 살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문제가 있다면, 원래의 이름은 주안석이 아닌 혈정석(血精石)이고 저주받은 마석(魔石)이라는 것. 호악산에서 거주할 때 지나가던 행인들을 잡아서 순수한 피의 정화만을 모아 만든 이 혈정석은 소유자의 생명력을 충만하게 해주는 힘이 있다. 물론 주기적으로 인간의 생혈을 먹이지 않으면 피를 먹기 위해 주인을 죽여버리는 저주를 지니고 있지만, 누가 죽든지 그가 알 바 아니다. 그저 또 하나의 혈정석이 남아있으니, 영약을 얻기 위해서라면 하나 정도는 처리해도 상관없을 뿐이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10 00:05:07 고친날 2005-06-10 00:05:07 읽은수 10787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0.비급구매(秘 購買).(5)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음...좋소, 정말이라면 대략 금자 1500냥의 가치가 있소." 쩌억-! 금호와 남국의 턱 빠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지만, 금대인이 제시한 가격은 나름대로 적절했다. 권력가들에게 뇌물로 바치기 위해서라면 1500냥이 아니라 1만냥이라도 내고 남을 이들이 천하에 수두룩하다. 게다가 희소성까지 있으니, 경매라도 붙이면 그 가격은 아예 끝도 없이 치솟을 것이다. "200냥을 거슬러 받으시겠소? 아니면 200냥 어치의 기물을 더 챙기시겠소?"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그에게 돈이란 그다지 큰 쓸모가 없다. 그렇다고 특별히 더 이상 고를 기물이 있는 것도 아니다. 무얼 받으나 무용지물인 셈이다. "대...형. 이 녀석이 쓸 칼 하나...정도 있는 게 좋지...않겠습니까?" 철방이 내놓은 의외의 제안에 남국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고, 그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골도는 시전자의 수준에 따라 보도와 같은 위력을 낼 수도 있지만, 금호의 수준으로는 일반적인 칼 정도가 고작이다. 하물며 남국의 주술은 금호보다 떨어지니, 주술에 숙달되기 전까지는 보도로 전투력을 충당하는 것도 좋다. "200냥 이하의...칼 좀 보여...주시오." 남국의 실질적인 무공사부라 할 수 있는 철방의 요청에 금대인은 적당한 가격의 도를 몇 개 알려주었고, 철방은 그 중에서도 남국이 쓸만한 도를 골라냈다. "...백룡도(白龍刀), 혈염도(血染刀), 월영도(月影刀)...이 중에..골라봐라." 백룡도는 큼지막하면서도 새하얀 날을 번뜩이는 대도, 혈염도는 날의 일부가 톱날과 같이 되어있는 핏빛의 장도, 월영도는 얇은 날을 가진 중도였다. 칠성도법은 원래 삼류무공인 만큼 기본에 충실해 다양한 도에 적용할 수 있기에 장단대소를 가리지 않고 골라준 것이다. "이야...야, 횡재다, 횡재, 빨리 골라!" 잠시 머뭇거리다가 평소 사용하던 골도와 비슷한 월영도에 손을 가져가던 남국은 문뜩 손을 멈추고 금호를 돌아보았다. "어? 왜? 조금 시간을 두고 고르려고?" 친우가 대체 어떤 보도를 가지게 될지 기대어린 눈으로 쳐다보던 금호는 난데없는 시선에 의아해했다. 붕대 밑으로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 남국은 갑자기 손을 엉뚱한 곳으로 옮겨 두 개의 단도를 집었다. "그...풍뢰쌍도(風雷雙刀)는...칠성도...법이라도 소화해내기 힘들다." 엉뚱한 선택을 하는 남국에게 철방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언을 해주었지만, 남국은 이걸로 됐다는 듯 살짝 고개를 가로 저으며 풍뢰쌍도 중 풍도를 금호에게 내밀었다. "나? 나 주려고?" 남국이 고개를 끄덕이자 금호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지나갔다. 절름발이라서 무공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자신에게 난데없이 칼이라니? 금호도 처음에는 무공을 익혀보려 했지만, 단 하루만에 포기했다. 무술을 펼침에 있어 가장 중요시되는 하체와 중심을 도저히 어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매우 뛰어난 고수를 사부로 둔다면 어떻게든 중심을 잡고 수련할 수 있는 법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철방은 외가고수이긴 해도 내가무공이나 초식에 관해서는 겨우 삼류를 면할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자신에게 있어 보도는 돼지 목의 진주목걸이나 나름 없는 것이다. "나한텐 필요 없어. 네가 필요한 걸 써야지." 금호는 계속 사양하려 했지만, 남국이 막무가내로 풍도를 떠넘기자 그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형님, 남국 좀 말려주세요." 난감함에 쩔쩔매던 금호는 철방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그는 그저 잠시 턱을 긁적이다가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어차피...왼손으로는 방패를 쓰니, 위급할 때 사용하기에...나쁘지 않다." 나름대로 일리 있는 말에 쩔쩔매던 금호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가 흠칫하며 금세 천무에게 돌아갔다. "이건 제 개인적인 선물입니다." "예? 엑?" 아예 [비류구도(飛流九刀)]라는 비급까지 내주는 천무에게 금호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오히려 온유한 음성으로 금호를 설득했다. "비류구도는 하체의 부담이 적은 단도술입니다. 높은 경지까지는 무리더라도 호신술 정도는 배워두는 것이 스스로를 위해서나, 남소협을 위해서나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친우를 위해서라는 말에 결국 설득되어버린 금호는 비급을 받아들고 뺨을 긁적였다. "...고마워요, 천형. 에...남국 네 녀석도...좀 쓸데없는 짓이긴 했어도 고맙다." 울렁거리는 마음과 쑥스러움을 숨기고자 가능한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금호를 보며 그들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 한 줄기 무심한 음성이 흘러나와 그들의 분위기를 파삭 깨버렸다. "다 됐나." "아...예!" 결국 풍도 100냥, 뢰도 100냥을 합쳐 200냥을 채우고 천무가 비류구도의 대금을 따로 지급함으로서 모든 거래를 마친 그들은 계단을 거쳐 1층으로 다시 올라왔다.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 것인데, 그 주안석이 만약 가짜라면 앞날이 편치 않을 것이외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제가 보증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천무의 보증에 금대인은 고개를 끄덕인 것으로 가볍게 인사를 마친 그들은 금가만물상을 나와 왔던 길로 도로 걸음을 옮겼다. "형님, 절정무공은 어느 정도 익혀야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룰 수 있나요?" "글...쎄다. 영약 밥먹듯 처먹고, 절대쌍존을 사부로 두고,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으면...십 년 안에 대성을 이룰 수...있을지도 모르지." "...좀 더 현실적으로 알려주시면 안돼요?" "절정고수면...내공이 최고 반갑자는 되니 10극성을 이루는데...최소 30년이다. 5숙성을...이루는 데만 해도 최소 10년의 내공이...필요하지. 사부 없이 비급으로...익히자면, 상승의 무리를 스스로 터득해나가야...하니 몇 배는 어렵고, 몸으로 체득...하는 것만 해도 범상한 재능으로는 십 수년이...걸린다 결론적으로...말하자면, 최소 20년은 정진해야...5성을 이룰 수 있을 거다." 금호의 안색이 대놓고 어두워졌다. 20년 정진에 5성을 이룬다면, 10성을 이루기 위해서는 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너무...조급해하지 마라. 천하의 구룡팔봉도 걸어다닐 때부터 수련을 시작해 10대 후반 들어서야 일류고수로 이름을 날리고, 20대 후반이 되야 절정에 오른다. 하루만에 만리장성을 쌓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어눌하던 말투 대신 무게감 있는 철방의 말에 금호는 기이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과 거기에 스며들어 있는 진중한 모습은, 마치 처음 만났을 때의 그를 보는 듯 싶었다. "게다가, 너희들에게 힘을 주실 분은 따로 계시지 않으냐?" 철방이 그 큼지막한 얼굴에 미소를 한가득 떠올리자 금호와 남국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들의 사부는 무인이 아니니, 그들도 무인이 될 필요가 없다. 사이한 사술이라 하더라도, 그가 그들에게 주는 것은 명백한 '힘'이니까. "꺄아...읍!!" "시끄러, 이년아!" 그들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한 곳을 향해 모여들었다. 으슥한 골목, 그 안쪽에서 터져 나온 비명소리가 바로 원인이다.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느끼고 달려가려던 금호와 남국은 순간 주춤하며 자신을 돌아봤다. '필요한가? 불필요한가?' 저 골목길에서 대체 누가, 무슨 일을 당하든 그가 알 바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에 간섭해서 득이 될지, 아니면 해가 될지의 이해득실뿐. 잠시 생각하던 그가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앞장서 골목으로 향하자 둘의 얼굴에 당혹이 어렸다. 그가 굳이 귀찮은 시시비비에 휘말리는 것은 싫어한다는 것 정도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려드는 것을 막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앞장서서 나아가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는 둘이었다. 철방이야 대형이 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상관없다는 태도로, 천무는 언제나 같이 평온함을 유지하며 그의 뒤를 따랐기에 결국 가장 먼저 움직였던 둘은 가장 뒤늦게 골목에 들어섰다. 그리고 금호는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토해냈다. "걸개방(乞 幇)!" 마악 한 여인을 붙잡고 옷을 반쯤 벗기던 다섯 명의 걸개들은 느닷없는 고함에 뒤를 돌아보자, 금호는 이를 갈았다. 허리의 매듭은 걸개방의 상징이다. 걸개방에 대한 원한이 산처럼 쌓여있는 금호와 남국으로서는 몰라볼 레야 몰라볼 수가 없는 것이다. "뭐야, 이 새끼들아!" "이 새끼들?" 한 걸개가 신경질적인 고함과 함께 죽봉을 들어올리자 철방의 미간이 꿈틀거리며 두 눈이 붉게 번뜩였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에 안 드는 거지새끼들이, 지금 감히 그의 대형까지 싸그리 포함해 '새끼들'이라고 칭한 것이다. 철방의 손이 서서히 등에 맨 대도를 향했다. 남국의 왼손이 품에 있던 뢰도의 손잡이를 쥐었고, 금호의 손은 은밀하게 수인을 맺으며 주문을 준비했다. 그런데 그때, 하나의 묵봉이 수평으로 놓여지며 그들을 제지했다. "대형, 절대 폐가 되지 않게 잘 처리하겠습니다." 부디 허락만 내려달라는 듯한 철방의 말에도 그는 무심히 고개를 여인에게 향했다. 절세 미녀까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아름다운편인 20대 초반의 미녀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외모를 보고있지 않았다. 그가 느끼는 것은 그녀의 영혼, 그녀의 기운, 그녀의 생명...즉, 그녀의 이용가치. "묻겠다." 묵봉을 서서히 움직여 여인을 가리킨 그의 무심한 음성에 천무를 제외한 모든 이들의 얼굴에 당혹과 의문이 떠올랐다. 대체 뭘 묻겠다는 뜻일까? 혹시 어디 가문의 누구라든지, 구해줄 경우 보상을 줄 수 있는지 등을 묻겠다는 것인가? 그들의 의문에 대한 해답은, 마치 철퇴로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튀어나온 뇌를 잘근잘근 짓밟아 끈적끈적하고 질퍽질퍽한 곤죽으로 만들어버리는 듯한 충격과 함께 찾아왔다. "너는 순결한 처녀인가?"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10 00:05:30 고친날 2005-06-10 00:05:55 읽은수 11991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0.비급구매(秘 購買).(6)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자고로, 남녀는 유별하니 서로간에 몰라야 할 일도, 알면서 모르는 척 해야 하는 일도, 궁금해도 물어서는 안 되는 질문도 있는 법이다. 그러나 지금 그가 한 질문은, 그러한 금기를 철저히 깨다 못해 아주 처참하게 으스러트려 버리고 있었다. 오죽하면 그녀를 범하려던 걸개들마저 턱을 떠억 벌리고, 철방은 분노했던 것조차 모조리 잊은 어벙한 표정을 짓고, 천무까지 언제나 온유한 미소를 띄고 있던 입술을 살짝 떨었겠는가? 두 소년의 경우는 아예 뜨악한 표정으로 자신들이 대체 무슨 소리를 들었나 싶은 표정으로 사부를 올려다보았고, 질문의 대상이 된 여인은 걸개들에게 당하고 있을 때보다 더더욱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만을 뻐끔거릴 뿐이었다. 그러한 다른 이들의 반응에도 무심히 그녀의 답변을 기다리던 그는 아무래도 그녀에게 대답할 의사가 없다고 판단되자 무심히 몸을 돌렸다. 너무나 기가 막히고 원통하고 억울했지만, 그래도 그가 이대로 가버리면 걸개들에 의해 더욱 처참한 일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그녀는 다급히 외쳤다. "예, 예! 처...처녀...입니다." 비록 뒤쪽에 가서는 모기목소리와 같이 줄어든 음성이었지만, 그의 충격적인 물음으로 인해 고요한 정적이 깔려있던 골목이었기에 마치 청천벽력과 같이 들리는 대답이기도 했다. 그녀의 얼굴은 귀 끝과 목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두 소년과 철방은 물론이고 걸개들까지 그녀를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보게 됐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덕분에 그가 다시 앞으로 몸을 돌렸다는 아주 미약한 위안거리뿐이었다. 초감각을 통해 반쯤 확인했던 사항에 대해 확답까지 들은 그는 무심히 입을 열었다. "구해주지."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하게 변한 반면 그제 서야 자신들의 상황을 떠올린 걸개들의 안면이 찡그려졌다. "대신, 너의 피를 받겠다." 푸르다가 붉었다가 밝았다가 이제는 새하얗게 변한 그녀의 안색은 어찌 보면 우스꽝스러울 정도였지만, 다른 이들 역시 그녀 못지 않게 놀라 있었기에 그녀의 안색을 살피지 못했다. "피...라 하시면...?" "목숨은 보장하지." 목숨은 보장한다는데, 어째 그게 '목숨 이외에는 보장하지 않는다.'라는 말보다 더 무섭고 불길하게 들린다. 잠시간 갈등하긴 했지만, 그녀에게는 애초부터 선택의 여지라는 것이 없었다. "피를 드릴게요. 그러니 제발 구해주세요!" 걸개들에게 아주 확실하게 심한 일을 당하고 목숨까지 위협받느니, 차라리 그에게 불확실한 일을 당하고 목숨만이라도 보장받는 것이 낫다. 그것이 그녀의 판단이자, 결정이었다. "계약은, 성립됐다." 무심한 음성과 함께 그가 한 걸음을 내딛자 걸개들은 모두 주춤하며 죽봉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본능적인 위기감과, 무언가 알 수 없는 공포가 그들의 정신을 침식해오고 있었다. '어쩐다...' 철방과 금호, 남국은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나서지 말아야 한다고 느꼈다. 명령을 내리지 않고 그들 앞으로 나선 것은 스스로 처리하겠다는 뜻. 그가 그런 결정을 내렸다면 그들은 그저 그 뜻에 따를 수밖에 없다. 그들이 언제라도 앞으로 나설 준비하는 가운데, 그는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마치 앞에 있는 걸개들을 돌멩이처럼 여기는 듯한 태도였지만, 걸개들은 왠지 그게 당연하다는 듯한 느낌을 벗을 수 없었다. "제...젠장. 죽어라!!" 따악! 한 걸개가 달려들며 죽봉을 휘두르자, 그는 묵봉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군더더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깨끗한 동작에 철방이 살짝 감탄을 흐릴 때, 묵봉은 죽봉을 살짝 옆으로 밀어내며 걸개의 안면을 찔러 들어갔다. "이 정도쯤이야...!" 촤악! 가볍게 묵봉을 피하며 반대로 죽봉을 찔러 넣으려던 걸개의 태양혈에서 얇고 날카로운 은빛의 날이 튀어나왔다. 그 은빛 날은 걸개의 뇌와 두개골을 그대로 관통한 채 묵봉으로까지 이어져 있었고, 그가 대낫이 된 묵봉을 살짝 잡아당기자 은빛 날은 걸개의 두 눈알을 반으로 쪼개며 밖으로 빠져 나왔다. 털썩! 걸개의 얼굴에 생겨난 얇은 선에서 붉은 선혈이 하얀 뇌수와 뒤섞여 흘러나왔다 싶은 순간, 그의 몸이 힘없이 무너져 내림과 함께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던 두개골의 상단부가 떨어져 나오며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괴한 색으로 물든 뇌가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히, 히이익...!" 동료가 처참하게 목숨을 잃자 공포에 질린 걸개들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상대가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사파의 고수인 걸 알았으니 도망쳐야 하는데, 그들의 다리는 마치 나무토막이라도 되는 양 도무지 움직이질 않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공포에 질리다 못한 한 걸개가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달려들자, 그는 낫을 휘둘러 죽봉을 잘라낸 뒤 걸개를 향해 한 손을 내뻗었다. 촤라라라락-! "컥! 케엑...!" 그의 소매에서 폭발하듯 쏟아져 나온 사뢰괴가 걸개의 입으로, 눈으로, 배로 파고 들어갔다. 칼날에 의해 내부가 모조리 갈가리 찢겨버린 걸개가 그대로 무릎을 꿇고 주저앉자, 세 마리의 사뢰괴는 머리, 턱, 등에서 튀어나와 칼날을 찰칵거렸다. 마치 벌레의 몸 안에서 알을 깨고 튀어나오는 기생충을 연상시키는 그 모습에 남은 세 걸개는 아예 넋이 빠졌다. 도망칠 생각도, 달려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동료의 시체를 바라보는 그들을 향해 세 마리의 사뢰괴가 화살처럼 쏘아져갔다. 동료와 같은 꼴로 죽는 것만큼은 절대 싫었던 세 걸개는 필사적으로 죽봉을 휘둘러 사뢰괴를 막았다. 그들이 전력을 다해 휘두른 죽봉은 간간이 사뢰괴의 칼날을 깨트리거나 몸을 분질렀지만, 핵인 수정의 파편이 상하지 않은 사뢰괴는 금세 칼날과 몸을 복구하고 셋의 죽봉을 절단 내버렸다. 죽봉과 함께 저항능력도 잃어버린 셋의 몸을 빙빙 말아든 세 사뢰괴는 심장에 머리를 틀어박고 마음껏 생기를 빨아들였고, 눈이 까뒤집힌 걸개들의 안색이 점점 새하얗게 질려 갈수록 세 사뢰괴는 각자 독특한 변화를 일으켰다. 산하리의 주민들 때 가장 많은 생기를 흡수해 귀기를 쌓았던 사뢰괴들이 적게나마 내공을 지니고 있는 걸개들의 생기를 취함으로써 한 단계 강화된 것이다. 한 사뢰괴는 희던 뼈가 핏빛으로 물들었다. 혈사괴(血死怪) 블러디 네크로크리쳐(bloody necro creature). 더욱 빠르고 속도와 날카로운 칼날, 순식간에 피를 빨아들이는 능력을 지닌다. 한 사뢰괴는 몸과 칼날이 갑절로 크게 부풀어올랐다. 대사괴(大死怪) 그레이트 네크로크리쳐(great necro creature). 더욱 강한 힘과 단단한 몸체, 뼈와 근육을 뽑아 흡수하는 능력을 지닌다. 한 사뢰괴는 몸의 길이가 배로 늘어나고 수정조각이 반으로 나눠져 꼬리부분에 생겨난 또 하나의 머리로 이동했다. 쌍사괴(雙死怪) 더블 네크로크리쳐(double necro creature). 두 개의 머리와 두 배의 길이, 두 배의 복구력을 지녀 두 핵을 동시에 파괴하지 않는 이상 죽지 않는다. 하급의 망자에서 중급의 망자로 강화된 세 사뢰괴를 소매로 거두어들인 그는 마치 방금 전의 처참한 살육과는 아무상관도 없다는 듯 무심히 입을 열었다. "시체를 처분해라." "예, 예? 예, 예." 단지 다섯 명이 죽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산하리에서 벌어졌던 대살육 못지 않게 처참해 보이는 광경에 넋이 나가있던 금호는, 한참을 더듬거리다가 겨우겨우 시체를 빠르게 부식시키는 주술을 시전하고 기진맥진해버렸다. 마치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년의 시간이 흘러지나가듯 시체가 부식되는 모습을 그녀는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이건 꿈일까? 꿈이겠지?' 걸개들에게 잡혀 옷이 벗겨질 때만 해도 악몽과 같이 끔찍하게나마 현실감은 있었는데, 지금은 이 광경은 비현실적이다 보니 꿈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더구나 그녀 자신이 저 흑의괴인에게 피를 주기로 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것은 기필코 꿈이어야만 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끌고와라." "아...예." 그가 몸을 돌리며 내린 무심한 명령에 철방은 다짜고짜 그녀를 들어올려 옆구리에 꼈고, 그녀가 그제 서야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려고 하자 귀찮아진 듯 손으로 뒷목을 가볍게 내려쳤다. "꺄악...!" 비명을 지르던 그녀의 몸이 마치 시체처럼 축 늘어지자 혹시나 싶어 목을 살짝 살펴본 철방은 힘 조절이 잘 됐다는 사실에 내심 안도하며 서둘러 대형을 뒤쫓았다. =================== 진심과 감상이 듬북 담긴 리플 많이 부탁드립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11 06:24:06 고친날 2005-06-11 06:24:06 읽은수 11167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1.사신계약(死神契約).(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사신, 계약을 이루다.- [하단전(下丹田)이 기운의 축적지라면 중단전(中丹田)은 기운의 개방지요, 상단전(上丹田)은 기운의 생성지로 세 단전 중 으뜸이 된다. 일반적인 무학은 하단전에 쌓고, 중단전으로 모으며, 상단전을 여는 단계로 무학의 경지가 오르나 흑사수(黑死手)는 시작부터 하단전(下丹田)이 아닌 상단전(上丹田)을 이용한다. 이것은 주술사(呪術師)들이 주술을 수련하거나 도사들이 도를 닦는데 주로 쓰이는 방법으로 무학으로 사용하기 쉽지 않으나, 노부(老父)는 강시공으로 흑사수를 만들었다. 상단전에서 생겨나는 기운은 의념(疑念)과 영기(靈氣)로, 상단전이 열리면 의념으로 천리를 내다보고 영기로 혼령을 다스리는 신통력을 얻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의념의 힘은 선천적으로 타고 나는 것이기에 평생 도를 닦는 도사나 주술사조차 얻기 힘드니, 흑사수에 사용되는 힘은 이 영기(靈氣)와 영기에서 파생된 기운이다. 영기는 가장 순수한 영혼의 힘인 만큼 영적인 작용은 강하나, 신체적이나 물리적인 작용은 약하기에 영기보다는 영기에서 파생된 기운이 더욱 많이 사용된다. 흑사수는 그 중에서도 사기(死氣)를 손에 머물게 했다가 상대에게 침투시켜 생기(生氣)를 갉아먹게 만드는 공부로, 12대성을 이루면 강기일식( 氣一息)이나 호신강기(護身剛氣)조차 뚫고 사기를 침투시킬 수 있다. 노부가 흑사수를 만들음에 있어 가장 고심했던 문제는, 바로 사기가 노부 자신의 생기조차 갉아먹게 된다는 점이다. 생기와 사기를 서로 물과 기름과 같으니 적아를 구분하지 않고 서로 충돌을 일으킨 것이다. 그로 인해 내상마저 입게 된 노부는 깊은 상념 끝에 생기와 사기가 물과 기름과 같다면,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듯 따로 분리해 사용할 수 있을 거라는 점에서 착안해 마침내 이 문제점을 해결할 묘안을 찾아냈다. 생과 사가 함께 머무는 기(氣)인 영기(靈氣)로 기맥(氣脈)을 보호하여, 기맥 내부로는 사기가 흐르면서도 기맥 외부로는 생기가 충만하게 만들 수 있는 이 생사비결(生死秘訣)이야말로 노부가 만든 흑사수의 총화라고 할 수 있다.] 탁. 흑사수의 비급을 덮은 그는 생사비결을 되짚으며 생각에 잠겼다. '기맥(氣脈)인가.' 그에게 있어 기맥이란 귀기가 조금 더 잘 통하는 부위에 불과할 뿐이다. 귀기는 음한 기운에 속하나 생기와 상극은 아니기에 기맥을 통하지 않더라도 큰 문제는 없기 때문이다. 많은 양을 운용해야 한다면 몸 전체를 채우다 못해 외부로까지 방출시키고, 급히 운용해야 한다면 피가 흐르는 혈맥으로 유통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다. 기맥이라는 정확한 개념조차 이곳에나 존재하는 것이니, 기맥을 이용하여 귀기를 운용하는 법이 있었을 리가 만무하다. 그러나 흑사수(黑死手)에는 영기로 철저하게 기맥을 보호하는 생사비결(生死秘訣)이 담겨있고, 현천강신술(玄天降神術)에는 귀기를 좀 더 효율적이고 확실하게 기맥으로 운용할 수 있는 운기법이 들어있다. 이 방법을 사용한다면, 귀기에 의해 생기가 억눌리는 부작용을 제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호법을 서라." "예...대형." 모닥불을 지피고 있던 철방은 그의 명에 따라 대도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금호와 남국, 천무는 이미 잠들어 있었고, 여인은 아직까지 기절해 있었기에 철방의 조용한 움직임을 느낀 것은 오직 그 뿐이었다. 철방에게 호법을 맡긴 그는 앉은 채 묵봉을 무릎 위에 놓고 서서히 상단전의 영문(靈門)을 개방했다. 우선은 귀기를 억제하고 영기(靈氣)를 이끌어 올렸다. 현천강신술에 나온 기맥에 영기를 흘려 넣고, 생사비결(生死秘訣)에 따라 주의 깊게 기맥을 감쌌다. 기에 대해 민감한 만큼 정밀한 제어력을 지니고 있는 그로서도 생사비결을 이루는 것은 쉽지 않았다. 때로는 중간중간 영기가 끊기고, 때로는 영기가 기맥을 완전히 채워 흐름을 막았다. 대략 반 시진이 지나고 나서야 기맥을 정확하게 영기로 감쌀 수 있게 된 그는 억눌렸던 귀기를 조금씩 풀어냈다. 아주 미약하게, 마치 손끝에서 떨어져 내리는 핏방울과 같이 흘러나온 귀기는 영기에 둘러 쌓인 기맥을 서서히 순환하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한 번의 순환이 반복될 때마다 그는 조금씩 귀기를 더했고, 가는 물줄기와 같던 귀기의 흐름은 이제 시냇물과 같이 불어났다. 그가 계속해서 귀기를 순환시키며 한 손으로 간단한 수인을 맺으며 짧은 주문을 외우자, 그의 한 손에 뼈의 칼이 생겨나 날카로운 칼날을 번뜩였다. '성공인가.' 생기는, 귀기의 운용과 사용에도 전혀 억눌리지 않고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 생기를 위축시키지 않고도 귀기와 사령술을 사용한 것이다. 그는 기맥에 더욱 많은 귀기를 흘려보냈다. 손으로는 더 복잡한 수인을 맺고, 입으로는 더욱 긴 주문이 외워 골도를 기다란 뼈의 창으로 변화시켰다. 파드득! 마악 창날이 완성되어가던 창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 미숙자나 하는 주술의 실패다. 원인은 바로 귀기의 부족. 그 스스로 중도에 귀기를 차단한 것이다. '중급의 술은 무리로군.' 정도 이상의 귀기를 넣으려면 그만큼 많은 영기로 기맥을 감싸야한다. 그러나 그의 기맥은 단련되어있지 않다. 무리하게 기운을 운용한다면, 기맥이 그대로 터져 나가거나 귀기가 기맥 밖으로 유출돼 생기에 손상을 입는다. '기맥의 강화가 필요하다.' 그는 품에서 하나의 병을 꺼내들었다. 종령석유(鐘靈石乳). 원래는 생기의 회복을 돕기 위해 구입한 영약이지만, 대신 기맥을 강화시키는데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기맥에서 귀기를 빼낸 그는 주저 없이 종령석유를 모두 삼켰다. 종령석유는 목안으로 넘어가자마자 곧바로 흡수되어 정순한 기운을 전신에 차 오르게 했고, 그는 그 모든 기운을 기맥 안에 밀어 넣었다. 특별히 단련이 되어있지 않던 기맥이 갑작스럽게 주입된 막대한 기운을 버텨내지 못하고 터질 듯 부풀어오르자, 그는 영기로 기맥에 가해지는 부담을 최대한 줄이며 서서히 기운을 순환시키기 시작했다. 보호를 위해 기맥을 감싸는 영기조차 일정한 정도를 넘어서면 오히려 기맥에 부담을 가중시키기에, 그는 기맥이 찢어질 듯한 통증을 그대로 견뎌내며 기운을 순환시켜야만 했다. '서둘러서는 안 된다.' 마치 고문을 받는 등한 통증에도 불구하고 그는 안색에 일말의 변화도 없이 기맥을 보호하고 있는 영기를 조금씩 줄여가며 그 대신 영약의 기운을 기맥에 흡수시켰다. 순환이 거듭될수록 많은 영약의 기운이 흡수됐고, 그만큼 기맥은 더욱 넓고 탄탄하게 변해 어느 순간부터는 영기의 보호가 없어도 기운의 순환을 버텨낼 수 있게 됐다. 일순간에 반 갑자의 내공을 쌓을 수 있는 영약을 단지 기맥을 강화시키는데 사용하는 것은 무림인들이 본다면 입에 거품을 물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입에 피 거품을 물든 바지에 오줌을 지리든 그가 알 바는 아니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좀 더 많은 귀기를 버텨낼 수 있는 기맥이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종령석유가 아니라 만년교룡의 내단이나 백 명의 인명이라도 거리낌없이 사용할 수 있다. '이 정도면 되겠군.'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모든 기운을 조금의 남김도 없이 흡수한 그는 다시 한번 주술을 시전 해보았다. 촤르륵-! 허공에서 갑자기 생겨난 뼈가 길게 늘어나더니 매끄러운 몸과 날카로운 칼날을 지닌 창으로 화했다. 골창(骨槍) 본 스피어(bone spear). 화살보다도 빠르고 멀게 날릴 수 있고, 만약 찔리기라도 하면 안에 담긴 귀기에 의해 생기가 억눌려 회복력이 떨어진다. 거기에 가벼운 독성부여의 주술까지 곁들이면 그 살상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사령마법이다. '중급까지는 문제없다.' 그는 더욱 많은 더욱 많은 귀기를 운용하며 묵봉에 밀어 넣었다. 묵봉을 쥐고 있는 손은 수시로 손가락을 바꾸며 수인을 맺었고, 그의 입에서는 나지막하면서도 사이하고 요사스러운 주문이 주르륵 이어져 흘러나왔다. 우둑, 우두둑! 골창을 이루고 있던 뼈가 자연스럽게 분해됐다가 재결합되며 두 눈에서 스산한 녹광이 흘러나오는 두개골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두개골에 쩌저적 금이 가며 녹광이 더욱 크게 번뜩이자 그는 손을 휘저어 주술을 귀기로 환원시켰다. '반반 정도로군.' 상급 술을 시전 하기는 했지만, 제어에는 실패했다. 기맥이 아직 영약의 기운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탓이리라. 생사비결(生死秘訣)에는 기맥을 단련할 수 있는 운기법도 있으니, 천지문에서 머무는 동안 그 운기법에 따라 영기를 순환시키면 영약의 기운을 완전히 융해시키고 기맥을 더욱 단련할 수 있을 것이다. '비술(秘術)에 사용할 수는 없다.' 불사의 비술은 귀기로 생기를 자극하는 것이 핵심요체다. 그러나 흑사수는 아예 생기와 사기를 철저하게 차단하는 요결이니, 비술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일단 요양을 하며 어느 정도 힘을 쑬 수 있게 된 것은 분명히 큰 도움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구름 한 점 없이 별들이 모두 훤히 드러나 보이는 밤하늘에 충만한 음기가 느껴졌다. 본래는 두 제자들을 위해 준비한 것을, 이제는 자신을 위해 사용할 시간이 됐다. '악마(惡魔)를 불러내기에 좋은 밤이군.' 검은 하늘에 떠있는 것은 새하얀 만월 아래, 그의 묵봉은 서서히 대지를 훑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11 06:24:30 고친날 2005-06-11 06:24:30 읽은수 10819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1.사신계약(死神契約).(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두 겹을 이루는 반경 1장 정도의 커다란 원의 중심에 역오망성(逆五網星)이 그려지고, 그 도형에 기이한 문자가 빼곡하게 채웠다. 단지 도형과 문자를 그려놓은 것에 불과했지만, 그것은 마치 진법과 같이 사이하고 음산한 기운을 풍겨내고 있었다. "데려와라." "...예." 철방이 여인을 마치 짐짝처럼 들고 오자 그녀를 마법진(魔法陣)의 중앙에 내려놓게 한 그는 묵봉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묵봉의 끝에서 날카로운 낫이 솟아 나오고, 사신의 낫은 짙은 어둠과 은은한 달빛을 가르며 그녀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또륵... 하나의 핏방울이 그녀의 목을 타고 흘러내리다가 땅에 떨어져 내렸다. 아슬아슬하게 피부를 뚫고 들어갔던 낫을 들어올린 그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주르륵... 한 방울 두 방울씩 흘러내리던 선혈이 마치 부름을 받듯 뭉클뭉클 솟아나 땅으로 흘러들었고, 마법진은 피를 머금을수록 붉게 물들어가다가 어느 순간부터 은은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치워라." 철방이 그녀를 조심스럽게 치운 뒤 만약을 대비해 등뒤에 버티고 서자, 그는 다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같은 주문은 아니었다. 그것은 전보다 더욱 무겁고, 사이하고, 요사스럽고, 스산하고, 사악한 주문이었다. 그 주문이 절정에 달한 순간, 마법진으로부터 핏빛 광채가 폭발하듯 터져 나와 혈광의 기둥을 이루었다. 우우웅--! 마법진과 함께 혈광의 기둥이 진동하며 그 중앙에 기이한 비틀림이 일어났다. 그것은 곧 마치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검은 틈이 되어 핏빛 광채를 흡수했고, 마법진의 빛이 줄어들수록 틈은 점차 벌려져갔다. 그렇게 벌어진 틈이 결국 커다란 원형을 이룬 순간, 그 어둠의 원으로부터 하나의 기이한 존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화르륵-! 불타오르는 갈기를 지닌 두 마리의 말과, 황금빛 바퀴가 뜨겁게 불타오르는 화염의 전차에 의해 주변의 공기가 후끈 달아오르며 어둡던 밤이 환하게 밝혀졌다. 그 전차 위에 타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미치도록 아름다운 존재였다. 얼음과 같이 투명하고 백옥과 같이 새하얀 피부, 물 흐르듯 미려한 윤곽선을 지니고 있는 오관, 달빛과 별빛과 햇빛을 모아 만든 듯한 두발, 피처럼 붉으면서도 꽃잎 입술, 보석과 같이 아름다우면서도 호수처럼 맑고 깊은 눈동자는 마치 모든 미의 정점과 같이 보였다. 반라에 가깝게 옷을 입고 있어 판판한 가슴이 훤히 드러나 보였지만, 존재가 남성임을 증명해주는 가슴을 보면서도 철방은 그 절대적인 미 앞에서 멍하니 벌려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산 제물을 바치지 않고 감히 피와 영력의 일부만으로 나를 불러낸 무뢰한 자가 누구지?" 은쟁반에 옥구슬 굴리는 소리마저도 개소리처럼 들릴 정도로 아름답고 매혹적인 음성에 철방은 아예 넋을 잃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무심한 음성은 그 존재가 만들어낸 마력적인 분위기를 그대로 깨트려버렸다. "나다, 베리알(Belial)." 마치 세상이 멸망한다고 해도 절대 변함이 없을 듯한 무심한 음성을 듣고 정신을 차린 철방은 화급히 고개를 내저으며 두 눈을 부릅떴다. 계집도 아닌 사내놈에게 넋이 나가다니, 마치 사이하기 그지없는 섭혼술에 홀리기라도 한 듯 싶었다. 그러나 상대의 아름다움은 너무나도 마력적이었기에, 철방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도 다시 정신이 나갈까 싶어 애써 그의 얼굴을 외면해야 했다. 그 존재, 베리알은 그 무심한 음성에 마치 자존심이 상하기라도 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그를 내려다보다가 한 순간 눈에 이채를 띄었다. "파타시? 너였나?" "그렇다." "호오...그래, 남성이면서도 남색(男色)을 주관하는 내게 그렇게 무심할 수 있는 건 오직 너뿐이겠지." 납득이 간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인 베리알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화염의 마차가 감쪽같이 사라지며 그의 몸이 가볍게 마법진 위에 내려섰다. 마법진의 중앙에 선 채 그를 마주본 베리알은 살짝 의아한 기색을 띄웠는데, 그 모습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적인 아름다움에 홀리지 않기 위해 철방은 이를 으스러져라 악 물어야만 했다. "그나저나 놀랍군. 고룡(古龍) 에인션트 드래곤(ancient dragon) 카라트레드와 겨루다 끝장났다고 들었는데?" "살아있다." 뻔히 아는 사실을 답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머리를 한번 쓸어 넘겨 철방을 아주 환장하도록 만든 베리알은 살짝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여긴 동(東) 이스트(east)로군. 어떻게 여기에 온 거지?" "내게 답할 의무는 없다." "아아, 정말 그 성의 없는 대답은 여전하군."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던 베리알은 한 순간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전 중원에 내려 쫴져야 할 달빛이 모조리 한 곳에서 터져 나오는 듯한 극한의 아름다움에 철방은 숨이 막히는 듯 컥컥거리다가 아주 눈을 꽈악 감아버렸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베리알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그래...그럼 날 이런 약식으로 불러낸 이유를 들어볼까? 만약 네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지옥으로 끌고 가 가장 천한 악마들에게 범하고 잡아먹게 만들었을 거다." 아름답고 매혹적이지만, 그만큼 위험한 독가시가 담긴 말에 철방은 소름이 돋는 듯 싶었다. 대체 어떤 놈이기에 이렇게 생겨먹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도 명명백백하게 느껴졌다. "마력(魔力)이 필요하다." "마력이라니, 무슨 소리지?" 베리알의 물음에도 그는 더 이상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다물고 침묵을 고수했고, 그 점에 재차 의아함을 느낀 베리알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악마로서 지닌 권능을 이용해 그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감지가 끝난 순간, 베리알은 폭소를 터트렸다. "푸하하하하핫! 뭐야, 무슨 꼴이냐! 그 찌꺼기 같은 힘은? 그 강대하던 사명력과 마력은 모두 어디에 팔아치웠지?" 폭소와 함께 질문을 던졌던 베리알은 그가 대답할 기색을 보이지 않자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는데, 그 모습 또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너무나도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 그래. 이제야 알겠군. 카라트레드와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대신 힘이 전소돼버린 건가?" 그는 여전히 침묵했고, 그것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베리알은 유쾌해 못 견디겠다는 듯 계속 말을 쏟아냈다. "이 어찌된 건가? 수많은 마법사(魔法師) 메이지(mage)와 기사(騎士) 나이트(knight)를 암살했던 서(西) 제일의 자객(刺客) 어쌔신(assassin)이여?" 그가 대답하지 않자, 베리알의 얼굴은 점차 기이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단신으로 불사의 군대를 일으켜 나라를 멸망시키고 수십만 명을 죽임으로써 새로운 전설을 만들어낸 서 제일의 사령술사(死靈術師) 네크로맨서(necromancer)가 고작 상급의 사령술사로 전락했단 말인가?" 침묵은 계속 이어졌고, 베리알의 얼굴은 결국 슬픔으로 가득 찼다. "지옥의 악마들과 계약을 맺어 서 제일의 흑마술사(黑魔術師) 다크 메이지(dark mage)의 지위까지 얻음으로써 오만의 드래곤조차 오만치 못하게 했던 사신(死神) 그림 리퍼(grim reaper)가 이처럼 되다니, 진정 슬픈 일이로다." 베리알의 눈가가 젖어들며 달의 보석같이 빛나는 눈물마저 맺히는 모습에 철방은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 눈물을 닦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베리알의 기나긴 말에 대한 그의 대답은, 철방의 충동을 그대로 얼어붙게 만들었다. "잡담은 다 끝났나?" 한 점의 동요도, 감정도 없는 그 무심한 음성에 철방은 어벙하게 대형의 뒤통수를 바라보았고, 베리알은 순식간에 눈물을 거뒀다. "하여튼 네놈은 정말 재수 없는 놈이다. 악마의 유혹도, 마력도, 속임수도 통하지 않는 악마보다 더 악마 같은 인간이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이라는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잘 모르겠군." 그야말로 눈 싹 씻고 영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중얼거리는 베리알을 보며 철방은 입을 뻐끔거렸다. 방금 전에 눈물을 흘렸던 게 다 연기란 말인가? 속은 것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질 지경이지만, 철방이 가장 열 받는 점은 다름아니라 베리알이 다시 한번 연기를 하더라도 도저히 넘어가지 않을 자신이 없다는 점이다. "잡담이 끝났다면, 요구에 응하라." 그의 무심한 음성을 들은 베리알은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워, 남녀를 불문한 모든 이들을 반하게 할 수 있는 미소였다. 허나 다음 순간, 그 화사한 미소는 얼음장보다 차가운 냉소가 되었다. "내가 왜?"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11 06:24:51 고친날 2005-06-11 06:24:51 읽은수 10884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1.사신계약(死神契約).(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아무런 감정도 담겨져 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못지 않게 냉정하기 그지없는 음성을 흘린 베리알은 허공에 살짝 몸을 띄운 뒤 다리를 꼬고 앉았다. "산 제물을 바치고 정성껏 의식을 치러도 들어줄까 말까한데, 이런 약식으로 불러내고도 내가 네 요구를 들어줄 이유가 있을까?" 철방은 훤히 드러난 각선미로 절로 돌아가는 자신의 눈을 아예 뽑아버리고 싶어졌지만, 천하의 그 어떠한 미녀보다 매끄럽고 미려한 각선미의 유혹은 너무나도 마력적이었다. "내게 빚이 있으니까." "빚? 무슨 빚 말이지?" "마법사 여섯, 기사 여섯, 신관 여섯, 동남 육십, 동녀 육십, 처녀 육십, 남자 육백, 여자 육백, 노인 육백을 제물로 바쳤을 때, 나중에 받기로 한 대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을 보이던 베리알은 잠시 후 마치 그를 놀리듯 손가락을 튕겼다. 딱! "아아, 그거 말이겠지? 도시를 멸망시킨 뒤 망자(亡者) 언데드(undead)로 만들 필요가 없을 때, 도시 하나를 통째로 제물로 받쳐 수많은 악마들과 계약한 수법. 솔직히 말하자면 꽤나 기분이 나빴다. 마치 먹다 남긴 찌꺼기를 받아먹는 듯해서 말이야." "계약은 성립됐을 텐데." "그래. 나.중.에. 대가를 주기로 했으니 한 천년만년 뒤에 주면 되겠지?"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절반의 진실과 절반의 은닉의 악마식 계약술. 평소에는 그것을 사용해 이득을 취했지만, 따지자면 지옥의 악마인 베리알이야말로 악마식 계약술의 원조인 셈이다. "그때는 힘이 있었으니 일부러 그런 애매 모호한 기간을 정하고도 대가를 받아낼 자신이 있었겠지만, 지금의 너는 약하다." 피식 웃음을 지은 베리알은 허공에 앉은 채 그에게 서서히 다가왔다. "계약이란 강자를 위한 것. 지금의 너에게 과거 강대한 악마들과 맺었던 계약은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 몸을 바로 세워 그의 바로 앞까지 접근한 베리알은 몹시 즐거운 표정으로 그에게 얼굴을 바짝 붙였다. "차라리 너의 몸을 판다면 내 기쁜 마음으로 사주지. 과거 노예(奴隸) 슬레이브(slave)였던 네게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닐 텐데 말이야." 타오를 듯 매혹적이고, 얼어붙을 듯 마력적인 유혹에 숨을 들이키면서도 철방은 대도의 손잡이를 불끈 쥐었다. 대형을 우롱하는 놈은 상대가 인간이든 아니든, 천하제일의 미녀이든 천하최악의 추남이든 상관없이 모조리 베어버리는 것이 바로 그의 정의요, 의지다. 스윽...! 하나의 은빛 섬광이 아무런 소리도 없이 허공을 가르며, 베리알의 몸이 순식간에 마법진의 중앙으로 다시 물러났다. 사신의 낫을 피해 뒤로 물러난 베리알은 불쾌한 기색을 굳이 숨기지 않고 미간을 찌푸린 채 보석과 같은 눈동자로 그를 노려보았다. "과거의 네가 지닌 힘조차 나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거늘, 힘은 없어졌어도 그 드래곤 못지 않은 오만함은 여전하군. 내가 언제까지 너를 맹약자(盟約者)로서 대우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두 눈을 날카롭게 뜬 베리알의 전신에서 어둠과 뒤섞인 마력이 서서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둠(暗)보다 더욱 짙은 어둠(暗), 진정한 암흑(暗黑)에서 태어난 악마의 강대한 힘을 느낀 대지가, 공기가, 대자연이 비명을 토해내며 몸부림쳤다. "나를 약식으로 소환했을 때부터 너는 이미 맹약(盟約)을 비틀었다. 계약의 상위에 놓인 맹약을 어긴 이상, 내가 지금 당장 너를 지옥으로 끌고 가 내 성노(性奴)로 삼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모르나?" 철방은 침을 삼켰다. 미치도록 아름답지만, 동시에 미치도록 두렵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악(惡), 진정한 마(魔)! 너무나도 압도적인 힘 차이는 철방의 투기를 자극했다. 강자에게 도전하여 상대를 꺾는 자가 모든 것을 갖는 것, 강자지존의 패왕지로가 그의 영혼에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하아아압--!!" 대형을 스치고 앞으로 뛰쳐나간 철방은 태산압정의 초식으로 똑바로 대도를 내리그었다. 진정 태산이라도 눌러버릴 듯한 무시무시한 기세요, 위력이다. 그러나 베리알은 한 손가락을 들어올려 단지 손톱 끝만으로 대도를 가볍게 받아냈다. 방어를 예상했던 철방은 곧바로 대도를 손에서 놓아버리고 철랑조를 일으켜 세워 베리알의 가슴을 긁었지만, 그의 몸은 철랑조가 베리알에게 닿기도 전에 뒤로 폭발하듯 튕겨져 나가고 있었다. 퍼엉-! 쿠당탕! "겨우 이런 쓰레기가 네 호위인가? 사령기사조차 우습게 여기며 악령기사(惡靈騎士) 데스 템플러(death templar)를 이끌고 다니던 네가 갈수록 비참히 보이는구나."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철방은 베리알의 말에 치솟아 오르는 분노와 자책감을 감추지 못했다. 대형을 호위하기는커녕, 오히려 대형의 이름에 먹칠을 했다는 것은 철방으로서는 정말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서서히 손을 움직여 검은 두건의 끝자락을 잡았다. 혈문에서 다시 입게 된 후, 평상시는 물론이고 잘 때조차 단 한 번도 벗지 않았던 두건이 서서히 뒤로 벗겨지며, 흑단과도 같은 장발이 폭포처럼 뒤로 쏟아져 내렸다. 대형의 두건 모습을 처음 본 철방은 잠시 상황마저 잊고 그를 바라보았지만, 뒤쪽에서 보이는 것은 오직 그의 머리카락뿐이었다. 반면, 그를 정면으로 마주한 베리알은 어두운 달빛 아래 은은히 드러난 그의 얼굴을 보고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몸을 바치겠다는 뜻인가?" 베리알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철방이 당장 고함을 쏟아내며 다시 앞으로 달려들려던 순간, 그의 한 손이 눈가를 짚었다. 세상이 요동쳤다. 밤의 어둠은 마치 불꽃을 피하는 짐승처럼 그의 주변으로부터 물러났고, 은은한 달빛은 공포에 떨며 그를 비껴나갔다. 어둠이 물러나고, 빛도 비껴나간 기이한 공간. 어둡지도, 밝지도 않고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공간의 중심에서 그는 무심히 입을 열었다. "나를 눈뜨게 하지 마라, 베리알." 지금까지 언제나 여유가 있던 베리알은 긴장으로 얼굴을 굳히며 그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그가 한 말의 의미는, 그의 눈가에 놓여진 손의 의미를 결코 가볍지 않았다. "지금의 네게 눈을 뜰 힘이나 남아 있나?" "나의 영혼은, 아직 죽지 않았다." 베리알은 입술을 깨물었다. 힘을 잃었다고 해도 그 영력은, 영기만큼은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쯤은 느낄 수 있다. 서 제일의 자객? 사령술사? 흑마술사? 그 모든 것도 그가 지닌 서(書)에 비하면, 그의 눈(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 사신(死神) 파타시는, 필요하다면 무한에 가까운 윤회를 통해 쌓아온 자신의 영혼을 깎아 사용하는 것 정도는 우습게 여기는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이다. "...좋아, 좋아, 대가를 치르지." 결국 백기를 든 베리알이 자신의 마력을 거두자, 그 또한 눈가에서 손을 치우고 검은 두건을 다시 뒤집어썼다. 어둠이 다시 깔리고, 달빛이 바로 내려 쬐자 철방은 안도감을 느꼈지만, 동시에 대형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진한 아쉬움 또한 느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마력을 원하지? 지금같이 약해진 상태로는 내 마력의 1%도 받아내기 힘들 거 같은데?" "네 마력이 담긴 물품을 주면 된다." 그의 대답에 베리알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듣자 하니 그 물품의 마력을 빨아먹겠다는 소린데, 그러면 괜한 보물 하나 날리는 셈이다. 마력이야 예전 제물로 받은 것이 워낙 많으니 웬만큼은 줘도 상관없지만, 보물 하나를 날로 삼켜버리겠다는 심보가 악마보다 더 고약하다. '흐음, 그래. 그게 좋겠군.' 무언가를 떠올린 베리알은 손가락을 튕겨 하나의 반지를 자신의 손에 나타나게 했다. "링 오브 베리알(ring of Belial)이다. 나의 권능이 들어 주변의 음적인 감정과 기운을 흡수해 마력으로 전환시키는 힘이 있지." 베리알이 말과 함께 링 오브 베리알을 내밀었음에도 그는 그것에 섣불리 손대지 않았다. 가장 순수한 마기(魔氣)의 정화라 할 수 있는 마력(魔力)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오직 악마뿐이다. 그가 사용하는 식심(食心)의 금법(禁法)으로도 마기를 정제할 수 있을 망정 마력을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적게나마 마력을 생산해내는 링 오브 베리알은, 베리알이 이처럼 내키지 않는 계약의 대가로 내어줄 만큼 하찮은 보물이 아니다. 악마와의 계약에서 가장 주의해야 하는 점 중 하나는 지나친 대가로, 그러한 것에는 언제나 음흉한 속임수와 모략이 숨어있는 법이다. "특별히 속임수 같은 것을 쓸 생각은 없으니 걱정 마라. 나는 단지 네놈을 조금 곤란하게 만들어보고 싶을 뿐이니까."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악마는 조금 곤란한 범위에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 지옥에 흩뿌려놓는 것도 포함시킬 수 있다. "정 원한다면, 나 베리알은 링 오브 베리알로 인해 네가 죽거나, 크게 해 입거나, 큰 손해를 보는 것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님을 사탄(Satan)께 맹세하겠다." 이러한 악마의 계약술을 상대하는 최선의 법은 바로 계약 자체의 거부다. 그러나 지금 그는 힘이 필요하고, 링 오브 베리알은 힘과 마력을 모으는데 있어서는 최고의 보물이다. 죽지 않고, 크게 해 입지 않고, 큰 손해 보지 않는 다면 웬만한 대가 정도는 치를 가치가 충분하다. "계약의 대가, 받았다." "잘 생각했다." 그가 반지를 받아들자 유쾌한 미소를 지어 보인 베리알은 그 마력적인 아름다움을 흩뿌리며 마법진의 중앙으로 물러났다. "네 몸이라면 언제든 최상급으로 받아줄 테니,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지 날 불러라." "계약은 완수됐다. 이제 지옥으로 꺼져라." 그의 무심한 말에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은 베리알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링 오브 베리알을 바라보았다. "나중에 다시 보지. 검은 맹약의 서(黑盟約之書)의 주인인 검은 맹약자(黑盟約者) 파타시여."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11 06:25:06 고친날 2005-06-11 06:25:06 읽은수 10895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1.사신계약(死神契約).(4)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우우웅-! 베리알이 도로 들어가자, 공간의 틈이 서서히 다물어지며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오던 혈광도 서서히 사라졌다. "지워라." 그때까지도 혼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철방은 그의 무심한 명령에 정신을 차리고 여기저기 열심히 밟아가며 마법진을 지웠다. 붉고 푸른 두 개의 선이 서로 비비꼬인 형태의 단순하면서도 감각적이고 예술적인 반지를 손에 끼고 감각을 집중하자, 지옥의 악마 베리알의 권능이 든 보물답게 막대한 마력이 내부에서 느껴졌다. 바위처럼 단단히 뭉쳐있는 것은 반지 자체에 스며든 권능의 마력이고, 그 권능을 흙더미처럼 둘러싸고 있는 마력이 정제 후 비축된 마력일 것이다. 그는 비축된 마력을 삽으로 땅을 파내듯 차근차근 묵봉을 거쳐 기맥으로 빨아들이고, 전신 곳곳의 혈도에 흩어 잠재시켰다. 대략 절반 정도의 마기를 잠재시킨 그는 흡수를 멈추고 이제 거의 꺼져가는 모닥불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마법진을 펼치기 전에 약간의 술을 써두었기 때문에 그 난리법석에도 세상 모르고 쿨쿨 잠들어있는 금호와 남국에게 다가간 그는 묵봉을 무심히 두 번 내려찍었다. 딱! 딱! "아우욱...!" 깊은 잠에 빠져 있다가 이마를 부여잡고 일어나 눈앞에 오락가락거리는 별을 세던 금호와 남국은 문뜩 앞에 있는 그를 발견하고 허겁지겁 몸을 일으켜 세웠다. "무, 무슨 일이세요, 사부?" 아직까지 초롱초롱한 별빛과 은은한 달빛이 가득한 한밤중이고, 잠을 깨우는 방법이 무식하리 만치 단순하긴 했지만 그들은 감히 그것을 따질 수 없었다. 죽고싶어 환장하지 않은 이상 어찌 사부에게 뭔가를 따질 수 있겠는가? "잡아라." 무심한 말과 함께 수평으로 내밀어진 묵봉을 무심코 잡을 뻔했던 금호는 한 순간 흠칫 하며 손을 멈췄다. 그의 말과 행동이, 처음 만났을 때 막대한 귀기를 주기 전에 한 것과 똑같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저, 저...사부님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아직 가지고 있는 귀기도 소화하기 버겁다고 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금호의 말을 듣고 나서야 그 사실을 눈치챈 남국이 몸을 움찔 떨며 묵봉에서 손을 땠다. 비록 그로써 힘을 얻기는 했지만, 그때 느낀 영혼의 고통은 다시 생각하기만 해도 치가 떨린다. 더 큰 힘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통도 감수해낼 수 있지만, 그는 이미 예전에 수련 없이 더 많은 귀기를 흡수했다가는 귀기가 폭주해 죽거나 망자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잡아라." 조금의 변함도 없이 무심한 음성에 금호와 남국은 서로 잠시 시선을 교환 뒤 머뭇거리며 묵봉을 잡았다. '뜨...겁다?' 귀기를 받았을 때와는 정반대의 느낌에 그들이 의아함을 떠올리는 순간, 묵봉으로부터 일어난 지옥의 염화와도 같은 기운이 그들의 몸 속으로 파고들었다. 마치 내장이 폭발하고 살이 녹아 내리며 뼛속까지 불타오르는 듯한 열기에 둘의 몸은 미친 듯이 부들거렸다. 이 기운은 귀기와 달랐다. 귀기가 영혼의 고통을 주었다면, 이 기운은 육신의 세포 하나하나에 철저하게 파고들며 육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극한의 통증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예전에 받아들인 귀기의 절반도 안 되는 양이었기에 고통은 짧았지만, 그 짧은 시간만 해도 웬만한 범인이라면 그대로 미쳐버릴 정도였다. 그들의 몸으로 파고든 마력(魔力)이 전신 곳곳에 그대로 스며든 것을 확인한 그가 갑자기 묵봉을 사신의 낫으로 바꿔 휘두르자, 아직까지 남아있는 고통의 여운에 숨을 헐떡이고 있던 남국과 금호는 기겁하며 뒤로 몸을 물렸다. "어?" 죽고 싶지 않다는 생존적 본능으로 몸을 빼냈던 금호는 이유를 따져 물을지 이대로 등 돌려 도망칠지를 판단하다가 문뜩 한가지 기이한 사실을 깨달았다. 고통으로 인해 진이 빠진 상태임에도, 평소보다 훨씬 민첩한 몸놀림으로 그의 낫을 피해낸 것이다. "마력(魔力)은 귀기(鬼氣)보다 물리적 간섭력이 크기에 많은 마력이 스며들수록 뛰어난 신체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의 무심한 음성에 금호는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아니, 겨우 그거 설명해주려고 제자에게 낫질을 했단 말인가? 물론 그들이 미처 피하지 못할 경우 바로 낫을 치울 수 있기에 한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참으로 무식할 정도로 살벌한 교육방법임은 명백했다. "흑마술(黑魔術)을 사용하면 마력의 양에 따라 악마의 힘을 빌릴 수도 있다. 언변과 사기에 능한 악마와의 계약은 위험하므로 저급한 마수(魔獸)를 부리는 흑마술을 알려주겠다." 한밤중에 자다가 깨서 곧바로 시작된 흑마술 강의였지만, 금호와 남국은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다면 한밤중이 아니라 식사중이나 전투중이라도 착실하게 배우겠다는 태도로 흑마술을 학습했다. 흑마술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들은 자신의 영혼을 바치거나, 혈육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을 제물로 바치거나, 악마의 강림을 돕는 일을 서슴없이 벌이게 된다. 악마는 제물에서 얻은 힘으로 자신의 마력(魔力)을 높이고, 인간의 영혼을 마족(魔族)으로 만들어 자신의 휘하에 둠으로써 마성(魔性)을 높임과 함께 자신들의 군대를 만든다. 결국 흑마술은 자신의 창시자이자 전파자인 악마황제(惡魔皇帝) 사탄의 의도대로 지옥을 부강하게 하는 효과를 낳는 것이다. 이처럼 사이한 의도로 만들어져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만큼, 주술에 대한 초보자라도 쉽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흑마술의 특성이다. 덕분에 이미 사령술을 배우고 있던 금호와 남국이 초급의 흑마술을 습득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둘로 하여금 마법진 그리는 법을 연습하게 한 그는 아직까지 잠들어있는 천무에게 다가가 묵봉을 살짝 들어 올렸다. 푹! 묵봉이 헛되이 땅을 찍는 가운데, 천무는 살짝 고개를 비튼 채 입을 열어 온유한 음성으로 물었다. "잠든 사람을 깨울 때는 우선 말을 사용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유념하지." 그가 묵봉을 치우자 천무는 몸을 일으켰다. 잠들어 있다가 묵봉의 기척을 느끼고 갑자기 일어났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기색이었고, 천무는 굳이 그러한 자신의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언제부터 아셨는지요?" "처음부터." 그의 초감각은 곤충의 미세한 움직임이나 멀리 떨어져있는 타인의 심장박동조차 정확히 느낄 수 있다. 천무가 비록 눈을 감고 있었을 망정,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잠들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몰래 엿본 점, 사과 드립니다." "이유는?" 그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천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조금 난감한 기색으로 답했다.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이는 법이지요." "그렇군." 머리에 든 것이 많은 이들은 호기심이 많고, 호기심이 많은 이들은 머리에 든 것이 많다. 천지문의 제자인 천무 앞에서 여인과 계약을 했으니, 과연 여인의 피를 어떻게 사용할지 궁금해한 것도 당연하다. '호기심은 사람도 죽이는 법이지.' 그는 이미 생기의 회복보다 기맥의 단련에 집중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미 상당량의 생기를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기맥으로 모든 힘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면 굳이 제약을 받지 않고도 자연적으로 생기를 회복할 수 있다. 즉, 더 이상 천지문에 머물 이유도, 천무를 굳이 살려둘 이유도 없는 셈이다. "산하리라는 마을을 알고 계십니까?" 마악 묵봉을 움직이려던 손을 멈췄다. 온유한 음성, 그러나 그 안에 담겨져 있는 묘한 무게감은 결코 가볍지 않다. 감히 하찮은 유도심문 따위에 담겨질 무게가 아니다. "어떻게 알았지?" "전부터 심증은 있었고, 오늘로써 확신했습니다." '방심했는가.' 주술, 계약, 병기. 너무 많은 것을 보여줬다. 천무 정도 되는 이라면 자신이 죽을 경우 그에 대한 심증과 추측이 세어나가도록 모종의 조치를 취해뒀을 것이다. 아직 힘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관군이나 무림인들의 추적이라도 받게된다면, 그것은 곤란하다. "안심하십시오. 현재로써는 이 심증을 다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확신한 지금도 밝힐 생각도 없으니까요." 거짓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밝힐 생각이 없다면, 그 이유는? "대신, 저와 거래하시지 않겠습니까?"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11 06:25:49 고친날 2005-06-11 06:25:49 읽은수 12219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1.사신계약(死神契約).(5)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그는 결정을 내려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대로 천무를 죽이고 힘을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은신할지, 아니면 거래에 응할지. 판단을 위해서는 거래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우선 알아야 한다. "원하는 것은?" "제가 원하는 것은, 은공의 도움입니다." "무슨 도움이지?" 그가 무심한 음성으로 정확한 설명을 요구하자, 천무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우선 저를 보호해주시고, 제가 하는 일을 도와주시면 됩니다." 천지문(天知門)이 정사중도의 문파로 불리는 것에는 꽤나 독특한 이유가 있다. 삼재지문 중 가장 뛰어난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는 말처럼, 천하의 대세를 판단하는데 능한 천지문은 정사의 균형이 어떻게 변할지도 미리 판단해낸다. 그럴 경우 보통은 무게추가 기울어지는 쪽에 힘을 더해 이득을 보는 것이 상리지만, 천지문은 오히려 그 반대로 무게추가 적은 곳에 힘을 더한다. 정파가 득세를 하고 있다면 사파에, 사파가 득세를 하고 있다면 정파에 힘을 실어주는 천지문에 의해 강호무림은 미묘하게 정사의 균형을 유지해왔다. 시시때때로 정사를 오고가는 천지문의 기행에 정사의 여러 세력은 정파와 사파 중 한쪽을 선택할 것을 여러 차례 권유해 보았다. 그러나 천지문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정사중도였다. '길이 너무 길어지면 모두 깨끗이 관리하지 못하고, 길이 너무 많아지면 중간에 길을 잃게 되니 천하가 혼란스러워지오. 본 천지문은 정파가 정파답고, 사파가 사파다운 강호무림을 위해서라도 언제까지나 정사중도를 걷겠소이다.' 무인의 가장 큰 적은 자기 자신의 나태함과 교만함이라는 것은 은근히 지적하고, 그러한 자신을 갈고 닦기 위해서라도 정사의 균형이 필요함을 논하는 천지문주 앞에서는 제갈문주나 천뇌문주조차 고개를 내저으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도움을 받을 때는 구원의 사자요, 장애물이 될 때는 천장단애나 다름없는 천지문에 대한 무림의 시선이 절로 복잡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때문에, 그들은 천지문을 대할 때 특이한 방법을 사용해야만 했다. "정파가 득세할 때는 정파의 견제와 사파의 우호를, 사파가 득세할 때는 사파의 견제와 정파의 우호를 받습니다. 그야말로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는 셈이지요." "그래서 보호가 필요한가." "그도 그렇습니다만, 지금은 유독 상황이 심각한 시기입니다." 온유한 음성으로 긍정을 표한 천무는 이제부터가 본론이라는 듯 자세를 되잡은 뒤 다시 설명을 이어나갔다. "강호무림은 암암리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천지문의 통찰에 따르면,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사파의 대대적인 준동으로 인해 아마 100년이래 가장 큰 정사대전(正邪大戰)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가 무심히 침묵을 지키자, 천무는 똑바로 그를 마주보았다. 앞으로 살짝 흘러 내려온 머리카락으로 인해 가려져 있긴 했지만, 그의 감각은 천무의 눈과 그 안에 담겨진 심연과도 같은 깊이를 확실하게 느꼈다. "현재 정파로써는 암암리에 준비해온 사파를 상대하기 버겁습니다. 저희 천지문이 정파에 지혜를 더한다 해도, 천뇌문의 일천마뇌(一天魔腦) 또한 한 명 한 명이 계략을 사용함에 능하니 힘의 차이를 채우기 힘들지요." 천뇌문사 장일산은 호악채를 조종해 천무를 잡아죽이려 했다.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천무는 호악산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탁드립니다. 정사의 균형을 맞추는 것을 도와주십시오." 정사의 균형. 참으로 복잡한 요구다. 그는 현재 정파의 대협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질적인 성향을 따져보면 흔히 말하는 사파의 마두다. 남들에게 어떻게 알려지든 어떻게 불리든 상관하지 않지만, 지급의 입장에서 정사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움직이는 것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나 다름없다. 이런 복잡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면, 차라리 힘을 회복할 때까지 은신하는 것이 낫다. 정도 이상의 무력을 지니게 된다면 정사를 떠나 누구라도 쉽사리 그를 건드리지는 못하게 될 테니까. "대신, 충분한 대가를 치르겠습니다." 천무의 목을 베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고 있던 그는 대가라는 말에 잠시 판단을 유보했다. 그럴 가능성은 드물지만, 만약 복잡한 요구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대가가 주어진다면 판단을 달리해볼 수도 있다. 그리고 천무가 제시한 대가는, 그로서도 미처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저를 드리지요." "너를 말인가." "예. 은공께서 정사의 균형을 맞춰만 주신다면, 천지문의 후계자인 저를 드리겠습니다." 천지문의 후계자.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차후 천하삼대지자 중 한 명이 될 자이자, 천하삽십육세 중 한 곳의 문주가 될 자이니까. 그는 정사균형의 요구와 천무의 가치를 깊이 있게 비교해보았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요구기는 하지만, 천지문의 후계자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해볼만한 가치는 있다. 복잡한 요구를 들어줄 이유도, 산하리에서의 비밀이 유출될 일도 없고, 천무의 지혜도 손에 넣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이대로 천무를 죽여 철방과 같은 돌연변이시귀 등으로 만들어 지배하는 것이다. "한가지 말씀드리자면, 저에게는 절친한 의형이 한 분 계십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달라진다면 즉시 눈치챌 수 있는 분이시지요." "그런가." "그렇습니다. 의형께서는 이미 그 무위가 초절정의 경지에 이르셨으니, 은공께도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초절정고수. 좋지 않다. 정말 그 정도 되는 고수가 자세히 살핀다면, 아무리 산자와 유사한 망자로 만들어도 정체를 숨기기 힘들다. 또한 그에게는 아직 그 정도 수준의 고수를 상대할 힘이 부족하다. 만약 누군가 천무에게 손댄 것을 눈치챈 의형이 분노하게 된다면, 무척이나 곤란하다. 천무의 말에 의해 선택의 폭이 점점 좁아들고 있는 것을 느끼던 그는 문뜩 한가지 진실을 깨달았다. 인형에 하나둘씩 실을 매달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하는 천무의 수법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처음부터였군." "그렇습니다." 그의 느닷없는 말에도, 천무는 그게 무슨 뜻인지 당연히 알고 있다는 듯 온유한 음성으로 답했다. "이유는?" "이미 말씀드렸다 시피...은공과는 절대 척을 져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느낌? 아니다. 느낌 따위가 아니다. 천지문의 후계자로써 지닌 통찰력이 알려줬을 터. 이만한 통찰력이라면, 차후 천하삼대지자를 논하기 이전에 현재의 천하십대지자 안에 능히 들 수 있을 것이다. "은혜는 열 배로 갚아도 항상 부족하다 했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원한은 어떻게 갚는가." 그의 무심한 물음에 천무는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온유하기 그지없는 미소로, 온유하기 그지없는 음성으로 답했다. "원한 또한 백 배로 갚아도 항상 부족한 법이지요." '과연.' 절대 척을 지고 싶지 않은 위험한 상대라면, 확실히 친분을 쌓아둔다고 했던 천무의 말이 그의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그렇게 분류할 때, 천무 또한 척을 지면 위험하고, 확실하게 적아를 구분하지 않고 어중간하게 둘 경우 더욱 위험한 자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가.' 판단을 내린 그는 무심히 입을 열었다. "내 능력이 닿는 한 너를 지키고, 정사의 균형을 맞추겠다." 악마의 계약술 따위가 통할 상대가 아니다. 필요한 것은 공정한 계약. "대신, 나를 따라라." 정당한 조건과, 그에 따른 대가. "천지문의 제자 천무, 마땅히 은공을 따르겠습니다." 고개는 숙이지 않았다. 은혜를 입었지만, 어디까지나 대등한 입장에서 따르겠다는 뜻. 지금으로서는 그것으로 족하다. 천무의 지혜와 통찰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는 전보다 더욱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사용된 것은 단지 언어일 뿐, 증서 따위는 없다. 언어에 담긴 것은 계약자의 의지요, 각인 된 곳은 계약자의 영혼이다. 주술도, 비술도, 금법도 아니다. 스스로 맺고, 스스로 매듭지어야 하는 것. 이것을 어기는 자, 스스로의 의지를 내버리리라. 이것을 어기는 자, 스스로의 영혼을 배반하리라. 담보는 바로 자기 자신의 의지. 자기 자신의 영혼. 그는 의지가 일어났다. 그의 영혼이 의지를 받아들였다. "계약은, 성립됐다." 계약(契約)은...이.루.어.졌.다. ======================================== 사신의 정체를 밝히고[딱 절반만] 제갈공명을 얻는 장입니다. 사신의 지혜는 확실히 책략가에 비하면 좀 떨어지기에 책략가의 도움이 충분히 필요합니다.[만능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로서 사신이 무림에 간섭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다음 장은 피튀기는 혈전이 이어지니, 많은 기대 바랍니다. --------------------------------------- 진심과 감상이 듬북 담긴 리플 많이많이 부탁드립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12 00:08:14 고친날 2005-06-12 00:08:14 읽은수 11650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2.살각혈전(殺閣血戰).(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사신이 살각과 혈전을 치르니, 피와 죽음이 난무한다.- "그러니까 환영귀(幻影鬼)로 정신을 흔들어버리고, 네 흑영귀(黑影鬼)로 등 뒤를 콱 찔러버리는 거야." 금호가 막대기로 땅에 이런저런 것을 설명하자, 남국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거기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앞에서 시선을 끈다라...그러면 효과는 더 좋겠지만, 잘못 했다간 눈먼 칼에 맞지 않을까? 사뢰괴 정도만 쓰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그래, 주술도 적당히 곁들이고...이 정도면 웬만한 고수라도 직방이라고, 직방." 서로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나누는 둘의 이야기를 슬쩍 엿들으며 철방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저 새끼들은 잠도 안 자나...' 대형으로부터 마력을 받은 지 이틀 전, 마력 다루는 법을 익힌다고 다시 자지 않은 것은 그냥 그렇다고 넘어가자. 갑자기 몸이 민첩해지고 근력이 늘어났으니, 어린 나이에 그걸 어떻게 사용할지 기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어제, 대형이 환영귀와 흑영귀라는 것을 주자 또 그것에 환장해서 이틀 밤을 꼬박 샌 것이다. 그러고도 모자라 오늘밤까지 눈 한번 붙일 기미를 안 보이니, 저 새끼들도 인간이 맞긴 맞는지 의심까지 간다. '혹시 모르지, 대형께서 어느새 쓱싹하고 뚝딱뚝딱 해서 다시 재활용 하셨을 지도.' 모처럼 수면을 취하고 있는 대형을 힐끔 바라본 철방은 문뜩 모닥불 옆쪽에 누워있는 여인을 보고 혀를 찼다. '저 계집애는 지가 무슨 공주라도 되나...거 피 좀 뽑았다고 대체 며칠째 나자빠져있는 거야?' 사실 그 의식 때 그녀는 피와 함께 생기와 영기까지 일부 손상을 입었고, 때문에 손상된 생기와 영기를 회복하기 위해 육신이 반쯤 가사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게다가 생기나 영기를 제외한 순수한 출혈 양만 보더라도 빈혈에 걸리기에 딱 좋을 만큼이지만, 그러한 사실을 눈곱만큼도 모르는 철방으로서는 피 조금 흘렸다고 연 이틀째 의식을 못 차리고 있는 그녀가 곱게 보일 리가 없다. '일단 생명에 지장은 없어야 한다고 하니 영 골치 아프군. 평소 같았으면 저런 계집은 그냥 콱 한 번 눌러버리고 죽이던지 내다 팔던지 했을 텐데...' 쩝 하고 입맛을 다시던 철방은 문뜩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콱 누르려면 일단 그게 서야 하는데, 자기가 지금 그게 서던가 안 서던가? '보자, 그러니까 그게...' 죽은 뒤부터 지금까지는 특별히 의식하지 않았던, 그러나 몹시 중요하기 그지없는 문제에 대해 철방은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한편, 이리저리 의견을 나누던 금호와 남국은 이제 대강 이론정리를 마치고 실습을 준비했다. "자아, 그럼 꺼내볼까." 금호와 남국의 손이 다섯 동물의 피를 주술로 굳혀 만든 오혈환(五血環)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 오혈환은 어제 그들의 사부에게 친히 받은 것으로, 다섯 마리의 망령을 넣고 다닐 수 있는 주술도구다. 매우 유용한 주술도구인 오혈환이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망령에 비하면 정말 별 것 아니다. 스르륵... 두 오혈환에서 푸르스름한 귀기가 일렁이더니 붉고 검은 두 개의 그림자가 빠져 나왔다. 붉은 그림자는 금호의 앞에서 마치 환영이라도 되는 것처럼 흐릿하게 일렁거렸고, 검은 그림자는 모닥불로 인해 생긴 남국의 그림자로 스며들었다. 환영귀(幻影鬼) 팬텀(phantom)과 흑영귀(黑影鬼) 쉐도우(shadow). 바로 어젯밤 그가 그들에게 나눠준 중급의 망령이다. 환각을 걸고 정신을 조종하는 등의 능력을 지닌 환영귀와 그림자로 숨어들어 단번에 상대의 숨통을 끊어버릴 수 있는 흑영귀의 능력은 두 소년을 몹시 흥분시켰다. 마치 장난감을 선물 받은 아이들 같다고 할까? 물론 그 장난감이 사람 몇 명 정도는 순식간에 죽여버릴 수 있는 괴물이고, 그들을 흥분시키는 것이 그러한 힘 자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걸 누구한테 시험한다...?" 일단 두 망령을 꺼낸 둘은 곧바로 난관에 빠졌다. 평상시라면 철방에게 대련을 부탁할 테지만, 대체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심각하다 못해 무서울 정도의 표정을 짓고 있는 지금의 그에게는 감히 말을 걸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에...하는 수 없지. 저 나무라도 베어보자." 남국이 좋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금호는 저 멀리 떨어져있는 나무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환영귀로 하여금 환각을 걸도록 했다. 환영귀의 눈이 있을법한 부분에서 붉은 광채가 일렁인다 싶은 순간, 금호가 지정한 나무의 한 부분이 기이하게 일그러지다가 한 사람의 형상을 이뤘다. 금호의 생각대로 만들어진 환각인지라 그 형상은 다름아니라 예전 산하리에 있던 걸개방의 당주의 모습이었고, 그래서 남국은 기꺼운 마음으로 흑영귀로 하여금 당주의 환상을 베어버리도록 명령 내릴 수 있었다. 남국의 명령을 받은 흑영귀가 남국의 그림자에서 스르륵 떨어져나가 어둠 속으로 스며들자, 금호는 사뢰괴 한 마리로 하여금 흑영귀를 뒤따라가게 하며 간단한 주문을 외워 한 손에 십여 개의 날카로운 뼛조각을 만들어냈다. "자, 그러니까 우선 사뢰괴로 시선을 교란시키고..." 흑영귀가 당주 가까이 다가갔을 때, 사뢰괴가 성난 뱀처럼 요란하게 움직여 당주의 시선을 끌었다. 당주가 흠칫하는 기색을 보이자 금호는 이때다 싶어 뼛조각을 쏟아냈고, 넓게 퍼져 오는 뼛조각에 당주는 급히 죽봉을 휘둘러 그 공격을 막아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당주의 바로 뒤에서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은밀하게 솟아나 칼날과 같은 날카로운 손톱으로 당주의 심장을 꿰뚫었다. 털썩. 흑영귀의 손톱이 심장을 쥐고 빠져나감과 함께 부르르 떨리던 당주의 몸이 썩은 통나무처럼 힘없이 쓰러지자, 금호는 나지막한 감탄을 토해냈다. "이거...끝내준다. 이젠 형님 도움도 필요 없겠는데?" 남국도 확실한 동감이라는 듯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토록 현실 같은 환각이라면, 적당한 수준의 대련상대를 만들어 실전보다 더욱 생생한 대련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흑영귀와 사뢰괴를 부르며 환영귀로 하여금 환각을 거두게 한 금호는 당주의 모습이 흐릿해 지는 것을 보며 슬쩍 미소짓다가 순간 얼굴을 굳혔다. 분명 당주의 환각은 사라졌는데, 그 자리에 피범벅이 된 시체 한 구가 놓여져 있었던 것이다. '젠장, 아무도 없었는데...' 환영귀가 나무가 아닌 나무 앞에 있던 사람을 대상으로 환상을 덧씌웠다는 사실을 깨달은 금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언젠가는 손에 피 묻히는 정도를 넘어 아예 피로 목욕을 하는 날이 올 거라는 것쯤은 각오하고 있었지만, 첫 살인이 하필이면 이처럼 어처구니없게 벌어질 것이라고는 꿈에서조차 상상치 못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듯, 남국이 흠칫 몸을 떨자 손으로 잡아 진정시켜준 금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비록 본의 아닌 사고였다고는 해도 자신의 첫 살인인 만큼, 시체를 똑바로 봐야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하나의 큼지막한 손이 금호의 어깨를 잡았다. "간...만에, 꽤 쓸만한 일을 했구나." 철방의 말에 사나운 표정으로 '형님 야참 마련해준 것 말인가요?!'라고 고함을 내지를 뻔했던 금호는 움찔 하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두 눈은, 한밤의 어둠 속에서도 너무나도 똑똑히 보일 정도로 밝은 핏빛 안광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대형께...가있어라." 평소와는 달리 진중하기 그지없는 음성에 사부를 돌아본 금호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있는 그와 천무를 확인하고 얼굴을 굳혔다. 이건 단지 그들이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고 생겨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철방이라면 마침 잘 됐다며 시체를 뜯어먹을 테고, 사부라면 무심히 그 시체를 사령술 교습재료로 사용할 것이다. '그럼 이 팽팽한 긴장감의 원인은 대체 뭐지?' 남국과 함께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나며 머리를 굴리던 금호는 순간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아무리 한밤중이었다지만, 마력으로 인해 더욱 발달된 시력으로도 보지 못했다. 설마 숨어있기라도 했던 걸까? 그렇다면 숨어있어야 했던 이유가 뭘까? 어떻게 그렇게 완벽하게 숨어있을 수 있었을까? 마치, 은신술(隱身術)이라도 사용한 것처럼. '그렇다면...!' 그제 서야 상황을 눈치챈 금호는 남국에게 은밀히 수신호를 보냈다. 첫 살인의 충격에 빠져있긴 했어도, 눈빛만으로 서로 뜻이 통하는 친우의 수신호를 놓치지 않은 남국 또한 눈을 크게 떴다가 긴장을 곤두세웠다. 이제 그들 모두에게 긴장감 흐르는 가운데, 천무는 온유하지만 나지막한 음성으로 정적의 호수에 파문을 일으켰다. "살각(殺閣)이로군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12 00:09:19 고친날 2005-06-12 00:09:19 읽은수 11668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2.살각혈전(殺閣血戰).(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구매삼각 중 만물각이 진귀하고 기이한 만물을 판매한다면, 살각이 파는 것은 다름 아니라 목숨이다. 마땅한 대가만 지불한다면 화경의 고수에 대한 청부조차 받아들인다는 살각의 목표가 되어 아직까지 살아남은 이는 아무도 없다. 그들의 은신술과 암살술만 해도 가히 전율적이며, 암살무공 역시 사신오왕 중 무정살왕(無情殺王)을 배출해냈을 정도로 뛰어나다. "화, 확실한 거예요, 천형?" "천지문의 제자에게 손댈 수 있는 자객은 살각 밖에 없습니다." 증거는 없지만 너무나도 확실한 심증에 금호는 등으로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천하제일의 자객집단인 살각이 지금 바로 코앞에 와있다니, 마치 저승의 문턱에 발을 들여놓은 것만 같다. "음..." 치효안과 십리묘이를 최고 한계까지 끌어올린 철방은 대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무형의 경력조차 똑똑히 볼 수 있는 치효안과 십리 안이라면 개미 기어가는 소리도 들을 수 있는 십리묘이지만, 지금 철방은 마치 눈을 천으로 가리고 귀를 솜으로 틀어막은 것만 같았다. '썩을.' 과연 살각의 자객들. 모든 게 흐릿하게만 느껴지는 것이, 뭔가 있긴 있는데 어디에 있는지는 도통 알 수가 없다. 금호와 남국이 아까 전에 한 놈을 잡은 건 우연과 우연이 겹쳐 만들어낸 기적일 것이다. '우연과 우연? 그거다!' "야, 그거...그거 해!" "예?" 철방의 느닷없는 고함에 금호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의 손가락이 자객의 시체를 가리키자 철방이 원하는 바를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환영귀! 숨어있는 놈들한테 모두 번쩍거리는 환상을 씌워버려!" 인간의 정신에 기생하여 환각을 다루는 망령인 만큼 은밀히 숨어있는 이들의 정신을 감지하고 있던 환영귀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 은은한 귀기를 뿜어내 다시 한번 주변에 있던 인간들에게 빛나는 환상을 덧씌웠다. 파바밧! 수풀 사이, 나무 위, 땅 밑, 바위틈에서 갑자기 번쩍번쩍 빛나는 황금복면을 쓴 자객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암기를 쏟아냈다. 동료 한 명이 어이없이 당한 것에 긴장하고 있다가 갑자기 얼굴 주변에 환해지자, 은신이 들통났음을 깨닫고 바로 기습에 들어간 것이다. "이...쥐새끼들이 감히 누구한테!" 독이 발라져있을 것이 거의 확실한 암기공격에 철방은 대도를 휘둘러 몸과 대도로 암기를 막아냈다. 철방이 그렇게 앞을 막아설 때, 뒤로 몸을 돌린 그는 무심히 양쪽 소매를 떨쳐 사뢰괴를 쏟아냈다. 채쟁! 채재쟁!! 네 마리의 사뢰괴는 마치 먹이를 집어삼키는 뱀과 같이 날렵한 움직임으로 뒤쪽에서 날아오던 암기들을 칼날로 튕겨냈다. 일부 암기는 틈을 뚫고 안으로 파고들었지만, 미리 단단히 대비하고 있던 금호와 남국의 사뢰괴는 그마저 모조리 잡아챘다. 그 틈을 유령과 같은 기이한 신법으로 그들에게 바짝 접근한 일곱 명의 자객은 일제히 자신들의 검을 내질렀다. "간...지럽지도 않다!" 맨 몸으로 세 개의 검을 받아낸 철방이 대도를 휘두르자, 세 명의 자객은 뒤로 물러나는 대신 그대로 안으로 파고들어 대도를 피하며 철방 뒤에 있던 천무를 향해 암기를 내던졌다. "웃차!" 남국에게 골갑, 골순, 골도를 만들어준 금호가 천무와 여인 앞에서 성인 몸통만큼 커다란 골순을 만들어낸 덕분에, 천무를 향해 날아오던 세 개의 암기는 골순에 막혀 그대로 튕겨나갔다. 목숨을 건 공격이 수포로 돌아가자 세 자객은 다음 기회를 노리기 위해 급히 몸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때 그들은 너무 깊숙이 파고 들어와 있었다. "내가...그냥 관상용...돌덩이로 보였냐? 엉?" 대도를 서슴없이 포기하고 손톱에서 철랑조를 뽑아낸 철방은 한 손으로 자객의 머리를 잡아채고, 다른 손은 두 자객을 향해 사납게 휘둘렀다. 챙강! 가히 명검과 같은 강도와 예리함을 지닌 철랑조는 두 자객의 검을 그대로 분질러버렸다. 그것은 단지 볼일을 방해받지 않기 위한 견제에 불과했다. 웅력근의 힘을 한계까지 끌어올린 철방이 자객의 머리를 잡고 있던 손을 움켜쥐자, 그의 큼지막한 손에 잡혀있던 자객은 그야말로 '쥐어짜져'버렸다. 빠각! 두개골이 마치 수박처럼 깨지며 그 틈으로 터진 눈알과 뇌가 튀어나와 즉사한 동료의 모습은 자객들의 부동심 마저 흔들어버릴 정도로 처참했다. 남국이 그 미미한 동요를 놓치지 않고 방패를 앞세워 그들에게 달려들자, 한 자객은 암기를 뿌리고 한 자객은 살짝 옆으로 물러나며 날카로운 비수를 내지른다. 독으로 인해 스치기만 해도 위험한 공격에, 왼팔의 방패로 암기를 막고 골도를 휘둘러 비수를 막는다. 골도와 비수가 떨어지기 직전, 소매에서 튀어나온 한 마리의 사뢰괴가 자객의 팔을 통째로 감아 올라가 목에 틀어박힌다. 푸욱! 사뢰괴가 목을 통해 머리로 파고들어 뇌가 곤죽이 되는 와중에도 비명 한 번 내지르지 않고 그대로 명이 끊긴다. 잘 훈련받은 살각의 자객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마지막 단말마를 내지를 틈조차 없었던 걸까. 남은 자객이 양손에 비수를 쥐고 거리를 벌린다. 혼자서 둘을 상대하기는 무리라고 생각했다면, 틀렸다. 둘이 아닌 셋이다. 촤악!! 칼날과 같은 날카로운 손톱에 의해 자객의 목이 떨어져 내리자,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머리를 잃고도 계속해서 뒤로 물러서려다가 무너져 내리는 시체에서 심장을 뽑아 탐욕스럽게 집어삼킨다. 심장을 삼키고 부르르 몸을 떤 뒤에야 다시 그림자로 화해 땅으로 스며드는 흑영귀로부터 시선을 때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린다. 게걸스럽게 살을 뜯으며 생기를 흡수하는 사뢰괴에 의해 거의 난도질당한 꼴이 된 사체와, 목이 잘리고 심장이 뜯겨나간 사체의 모습이 두 눈 똑똑히 박혀든다. 골도를 쥐고 있는 손이 부르르 떨린다. 골순이 차여진 왼팔이 힘없이 늘어진다. 몸에 껴입고 있는 골갑이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진다. 이런 게 살인의 무게인가...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강해지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맹세했던 것이 까마득하다. 짜악! "정신차려!!" 볼에서 불이 나고 눈앞이 번쩍이며 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자마자 보이는 것은 친우의 얼굴. 죽마고우인 자신으로써도 처음보는 냉정한 표정. 그러나 질끈 깨물려진 입술과 부들부들 떨리는 어깨는 너무나 뜨겁게만 보인다. 약자의 한에 눈물 흘리던 산하리에서의 모습이 겹쳐진다. 이것 때문이다. 다시는 약자의 한을 가지지 않기 위해, 친우에게 약자의 한을 느끼게 하지 않기 위해 했던 맹세가 똑똑히 기억난다. "녀석들...겨우 한두 명 죽...였다고 떨기는. 이 형님을 좀...본받아라." 철방이 손에 묻은 뇌수를 혀로 쓱쓱 훑으며 한 말에 둘의 안색이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색으로 물들었다. 무지막지한 살인귀에다가, 식인귀이기까지 한 철방을 본받으려면 아마 말 그대로 죽었다 깨어나더라도 불가능에 가까우리라는 것이 두 소년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뭐야, 내 말에...문제 있냐?" "아, 아뇨. 그럴 리가 있나요." 안면을 슬쩍 찡그리자 그렇지 않아도 피와 뇌수 범벅으로 악귀 같던 얼굴이 아예 수라처럼 변해버렸다. 만약 꿈에 나오면 그대로 가위에 눌려 끙끙댈까 무서워 둘이 잽싸게 고개를 숙이자, 그것을 공경의 표시로 알아들은 철방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금과옥조와 같은 조언을 해...줄 테니, 잘...들어라." 조언이라는 말에 둘의 안색이 절로 창백해졌다. 그 조언 때문에 팔 병신 되고, 눈깔 병신 되고, 턱이랑 주먹 병신 되고, 다리 병신 된 걸개들의 모습이 순식간에 눈앞에 스쳐지나간 금호는 급히 조언을 사양하려고 했지만, 철방은 미처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살인은...죄다." 금호의 입이 따악 벌려지고, 남국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게 진정 철방이 한 말이 맞단 말인가? 사람 죽이기를 밥먹듯 하고 잔인하며 악랄한 것으로 치자면 사파의 마두 중에서도 능히 수위권에 안에 들 그가 할만한 말은 결코 아니었다. "사기를 치는 것도...도둑질을 하는 것도...탐욕을 부리는 것도...살생을 하는 것도...거짓말을 하는 것도...남을 해하는 것도...약한 것도...힘과 권리를 남용하는 것도...힘과 권리에 따른 의무를 행하지 않는 것도...모두 죄다." 어눌한 말투가 사라진, 여느 때보다 심각한 철방의 분위기는 둘로 하여금 절로 마른침을 삼키게 했다. "인간은...살아가면서 누구나 죄를 짓는 다는 거다. 삼척동자가 거짓을 말하면 장난이고 장사꾼이 거짓을 말하면 사기라고 하지만, 이 모든 기준은 세상의 것의 불과하다. 모든 인간은 그 세상의 기준을 얼마나 받아들일지를 선택하고, 자신이 선택한 기준에 따라 죄를 짓고 사는 거다. 그렇다고 죄를 마음대로 짓거나 하라는 건 아니다." 철방의 두 손이 어깨를 짚어왔지만, 그들은 그것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의 말에 깊이 빠져들어 있었다. "정 여의치 않을 때만 아니라면, 스스로를 용서치 못하거나 평생 후회할 죄만은 저지르지 마라. 이걸로 내 조언은 끝이다." 어깨에서 손을 때고 뒤로 물러나는 그를 향해, 금호는 자신도 모르게 물음을 던졌다. "형님은...후회하지 않으세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저 묵묵히 시체의 옷자락에 손을 쓱쓱 닿는 철방의 모습을 그저 조용히 지켜보던 남국은 문뜩 두 팔을 내려다보았다. 살인이 죄라는 것을 너무나도 확실히 인식했다. 스스로를 쉽게 용서할 생각도 없고, 이 살인을 평생토록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도 없다. 그러나 이제 그의 손은 떨리지 않았고, 친우의 어깨 또한 뜨겁게 보이지 않았다. 대도를 주워 등에 매는 철방에게, 소년은 깊이 허리를 숙여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남국을 따라 허리를 숙이려던 금호는 뭔가 상당히 비릿한 냄새가 자신의 코를 날카롭게 찔러 들어오고 있음을 자각하고 고개를 돌렸다. "으악! 옷이 이게 뭐야?!" 철방이 손으로 어깨를 짚었을 때, 피와 뇌수가 고스란히 묻은 어깨를 보며 비명을 토해낸 소년은 그를 향해 버력 고함을 질렀다. "이제 보니까 그냥 우리 옷에 손 닦으려고 그런 말 한 거죠?!" "왜...불만 있어?" 철방이 두 눈을 부라리자 어쩔 수 없이 끄응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인 금호가 내심 투덜거리는 것을 보며, 남국은 살짝 웃음을 떠올렸다. ====================== 비축분도 거의 바닥입니다. 진심과 감상이 듬북 담긴 리플로 응원해주시길.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12 08:05:52 고친날 2005-08-16 23:55:38 읽은수 12000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2.살각혈전(殺閣血戰).(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철방과 두 소년이 앞의 세 자객을 맡은 것에 비해, 그는 단신으로 뒤의 두 자객과 양 옆쪽의 두 자객을 상대해야 했다. 촤르륵-! 네 마리의 사뢰괴가 각자 한 명의 자객을 노리고 쏘아져 나갔지만, 이미 그것이 암기를 막아내는 것을 본 자객들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정확히 사뢰괴의 머리에 검을 내질렀다. 두 마리의 사뢰괴는 단지 칼날이 깨지는데서 그쳤지만, 두 마리의 사뢰괴는 핵인 수정조각이 깨짐과 함께 그대로 부서져버렸다. 과연 철저히 급소를 노리는 살각의 자객답게 무섭도록 정확한 살검(殺劍). 그러나 그는 두 사뢰괴의 파괴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주문을 외워 주술을 시전했다. 콰드드드득! 갑자기 땅이 파해 쳐지며 그곳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골벽(骨壁) 본 월(bone wall)은 높이 솟아올라 뒤쪽에서 달려들던 두 자객의 앞을 막았다. 이제 당장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좌우의 둘. 짧은 주문과 함께 수인을 맺은 두 손이 수평을 이루고 있는 묵봉을 미끄러지듯 좌우로 훑자, 묵봉의 양끝에서 각각 네 개씩 총 여덟 개의 골시(骨矢) 본 애로우(bone arrow)가 쏟아져 나갔다. 두 자객은 몇 개의 골시를 검으로 쳐내고, 몇 개는 피하며 그대로 달려들었다. 그때, 무언가가 그들의 발치에서 갑자기 솟구쳐 몸을 휘감아들었다. 푸욱! 소매 대신 발치의 옷자락을 통해 은밀히 땅속으로 파고들었던 혈사괴(血死怪)와 대사괴(大死怪)는 두 자객의 몸에 머리를 틀어박고 각자 피와 뼈를 뽑아 자신의 몸에 흡수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자객을 처리한 그는 유령보다 더욱 유령 같은 움직임으로 골벽을 차고 올라갔다. 마악 골벽 위로 뛰어오르던 두 자객은 벽 위에 올라선 그를 보자마자 곧바로 검을 내질렀지만, 초감각을 이용해 뛰어오르기 전부터 두 자객의 행동을 느끼고 있던 그는 그들이 채 검을 내지르기도 전에 대낫을 휘둘러 검을 비껴냄과 동시에 한 자객의 목을 수확했다. 남은 자객은 땅에 내려서자마자 암기를 던지고 다시 뛰어오르려고 했지만, 착지와 동시에 그의 두 용천혈(湧泉穴)을 정확히 파고 들어온 쌍사괴(雙死怪)의 칼날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쌍사괴의 기다란 몸통이 마지막 자객의 목을 휘감아 분질러버리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그는 골벽을 해제시키고 다시 땅에 내려섰다. 설명은 길었지만, 흑영귀가 자객의 목을 딴 것은 그가 땅에 내려선 직후였다. 쓸데없는 움직임을 철저하게 배제한 만큼, 빠르고 효과적으로 처리를 끝마친 것이다. "예상보다 빠르군요." 갑작스러운 자객들의 기습을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한 평온한 태도와 온유한 음성에, 그는 두 사뢰괴(死儡怪)와 세 사괴(死怪)를 불러들이며 무심히 천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호악산의 일은 실제로 가벼운 경고 정도였습니다. 제가 그 경고를 무시하고 사파의 준동을 정의성에 고했으니, 아마 몇 달 전부터 살각이 움직였을 테지요." "이게 모두는 아닐텐데." 비록 금호에 의해 참으로 어처구니없이 은신술이 들통나 자객 본연의 능력은 발휘하지 못했지만, 그 무공 수위만 해도 웬만한 고수를 상대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객이 여덟이다. 결코 적은 전력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살각에서 천지문의 후계자를 암살하기 위해 보낸 자객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다. "이들은 단지 실력을 파악하기 위해 버리는 돌에 불과합니다. 아마 좀더 수준 높은 자객들이 준비돼있을 겁니다." "예상되는 수준은?" "절정의 무위를 지닌 십대자객(十大刺客)이 나설 가능성이 큽니다. 운이 나쁘면 초절정의 천지쌍살(天地雙殺)이 나설 것이고, 최악의 경우 무정살왕(無情殺王)이 직접 움직일 수도 있지요." 화경의 고수이자 현시대 최고의 자객인 무정살왕. 그가 살행에 나선다면 같은 사신오왕은 물론이고 삼황오제나 절대쌍존조차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 만약 무정살왕이 천무를 노리고 움직였다면, 그는 이미 죽은목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군." 천무의 대답을 들으며 나누며 자연스럽게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던 그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사신의 낫으로 땅을 내려그었다. 쫘아악-! 간발의 차로 땅속에서 빠져 나와 은형포(隱形布)가 찢어지는 정도에서 낫을 피해낸 자객을 향해 손가락을 튕겨 새하얀 단환을 날리며 짧은 주문을 외웠다. 퍼엉! 단환이 갑자기 터지며 새하얀 독분이 안개처럼 퍼지자 자객은 호흡을 멈추고 급히 뒤로 물러나 중독을 피했지만, 그로 인해 행동이 느려지는 것 자체가 그가 원하던 바였다. 낫의 끝에서 스산한 빛이 번뜩였다 싶은 순간, 푸르스름한 녹광으로 이루어진 산성시(酸性矢) 에시드 애로우(acid arrow)가 자객을 향해 우수수 쏘아져갔다. 치이익!! 산성시를 막은 검은 순식간에 부식됐고, 스치기만 해도 옷이 순식간에 삭아들었다. 특히 미처 피하지 못하고 맞은 한쪽 종아리의 경우, 순식간에 살이 지글지글 끓으며 녹아내려 뼈까지 훤히 드러나고 있었다. 심각한 중상으로 움직임이 둔해진 자객이 그의 낫을 피하지 못하고 목이 떨어져 나가자, 잠시 어안 벙벙한 표정으로 그것을 지켜보던 금호가 혼잣말을 더듬거렸다. "어...? 이럴 리가 없는데...환영귀의 환상에 걸렸으면 은신술이...풀려야 하는데?" "일정 수준 이상의 상대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의 무심한 대답을 들은 그들은 다시 긴장을 곤두세웠다. 그렇다면, 그가 방금 해치운 놈처럼 아직까지 숨어있는 자객이 더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감각을 집중해 주변을 훑어본 그는 당장은 주변에 자객이 없음을 확인하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이동해야 한다." "천지문으로는 안됩니다." 천무의 말에 그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천변만화대천진(千變萬化戴天陣)으로 보호되는 천지문은 철옹성에 가깝지만, 그만큼 많은 자객과 치밀한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피신처로 삼을만한 곳은?" "몇 군데 있기는 하지만, 가까이 있는 곳 중 살각의 눈과 손을 피할 수 있을 정도의 피신처는 없습니다." 아무리 천지문이 삼재지문 중 하나라고는 하지만 살각 또한 구매삼각 중 하나. 그들을 쉽게 뿌리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 지역 토박이인 금호와 남국에게도 같은 질문을 해봤지만, 둘이 아는 비밀장소라고는 고작해야 산하리 주변에 있는 작은 동굴 따위가 전부였다. 또 한번 고개를 돌린 그는 잠시 동안 철방을 향해 고개를 고정시켰다가 살짝 고개를 가로 저으며 고개를 되돌렸다. "의형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나." "만약을 대비해 연락을 해뒀지만...워낙 자유분방한 분이시라 당장 찾아 뵙는 것은 무립니다." 천무가 여전히 평온한 음성으로 답하는 가운데, 철방은 잠시 어벙한 표정으로 대형을 바라보았다. 분명 자신에게도 물을 것이라 예상하고 대답까지 준비해 놓았는데, 어째서인지 갑자기 그대로 고개를 돌려버린 것이다. 대형이 하는 일에 감히 토를 달 수야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래도 대형을 돕겠다는 일념 하나로 철방은 슬쩍 말을 걸어보았다. "저...대형." 일단 말을 걸었으니, 고개라도 다시 돌려줄 거라 예상했던 철방은 곧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법은 어떻지." "살각 또한 진법에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오래 버틸 수 없지요." 지금은 바쁘니 철방의 말을 들어줄 여유가 없다는 듯, 그와 천무는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계속해서 서로 의견을 나눴다. "대..." "방책은 없나?"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만..." "...대형!!" 둘의 고개가 철방에게 돌아갔고, 금호와 남국까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제 서야 흥분한 나머지 너무 소리를 높였다는 것을 깨달은 철방은 그냥 입다물고 있을 걸 하는 후회를 애써 억누르며 당당하게 말했다. "저에...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한 번 말해보라는 듯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에 자신을 얻은 철방은 더욱 힘있게 답했다. "제가 이 근방...에 있는 산채를 조금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산...채에 쿡 박혀있...으면 됩니다!" 조금 긴 정적 후, 그는 무심히 입을 열었다. "철방, 네가 할 일이 있다." "뭐든...지 시켜만 주...십시오!" 대형의 말에 지옥 불에라도 뛰어들겠다는 듯 답하고 난 잠시 뒤, 전직 산적두목은 흔적처리를 위해 갑절의 갑절로 불어난 후회의 감정과 함께 자객들의 시체를 질겅질겅 씹어 삼켜야 했다. =============================== 일요일 팬아트 연참 이벤트를 진행중입니다. 많은 참가 바랍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12 12:41:57 고친날 2005-08-14 14:14:52 읽은수 31757 [ 0 K ] 제목 [팬아트 연참 이벤트 gogogo~!]-종결-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자, 여러분. 마침내 주술의 제단이 완성됐습니다. 팬아트 한 개를 제물로 바치면, 글 한 편을 대가로 주는 강력한 주술의 제단입니다. 제단에 올라오는 팬아트는 모든 시간을 가리지 않고 제단의 마력에 의해 바로바로 글로 바뀌게 됩니다. 수많은 글을 얻고자 하시는 분들은 주술의 제단에 제물을 바치십시오. *제단 제작에 천문학적 비용이 든 관계로, 제단에 팬아트가 바쳐지지 않으면 결코, 절대 연참이 올라오지 않습니다.* -일요일에서 전시간대로 수정했습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13 00:06:09 고친날 2005-06-13 00:06:09 읽은수 11339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2.살각혈전(殺閣血戰).(4)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쓸데없는 방해꾼이 사라지자, 천무는 끊겼던 대화를 다시 이었다. "방책은 은공께 있습니다." "설명해라." 아직 이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는 그가 피신처로 삼을만한 장소는 얼마 없다. 사사혈괴의 지하석부는 온갖 기관장치가 배치되어있는 요새고, 호악산은 귀기가 들끓어 온갖 혼령들이 들끓으며 그의 힘이 극대화되는 귀산이다. 그러나 지하석부와 호악산 모두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그곳으로 가는 도중 살각에 의해 결판이 날 가능성이 더욱 크다. "교림(喬林)과 금황성(金凰城), 철궁곡(鐵弓谷), 수정궁(水晶宮). 이 네 곳이라면 가능합니다." "그렇군." 천하삽십육세 중 용봉무서로 인해 연이 맺어진 네 개의 세력. 이 네 곳이라면 살각을 피할 피신처로 더할 나위 없이 적당하다. 어차피 그 계약의 대가는 다 받았지만, 자기들이 알아서 빚을 졌다고 하는데 굳이 그것을 피할 이유는 없다. "가깝기로는 금황성의 지부가 가장 가깝고, 은밀하기로는 수정궁이 가장 은밀하지만 그들로서는 은공을 보호하는 것을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길 겁니다. 약간의 빚 때문에 살각을 상대하는 것은 정사중도라는 위치에서 벗어날 위험이 크기 때문이지요." "교림과 철궁곡은?" "교림과 철궁곡은 정파입니다. 협의지로를 걷는 그들이라면 굳이 빚이 없더라도 피신처를 마련해줄 테지요." "더 가까운 정파는 없나." 빚을 지지 않아도 피신처로 삼을 수 있다면 가능한 가까운 정파에 가는 것이 더 안전할 테지만, 천무는 고개를 내저어 부정을 드러냈다. "단순한 정파는 안됩니다. 오직 교림이나 철궁곡, 하다 못해 금황성이나 수정궁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이유는?" "살각이 사파이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협의지로를 걷는 정파라도 아무관계 없는 상대를 살각으로부터 보호해준다면, 그것은 살각의 살행을 방해하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전면전이 될 가능성이 7할이 넘고, 자칫 잘못했다가는 정사대전을 앞당길 시발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반면 이미 은공께 빚을 졌다고 알려진 세력이 은공께 도움을 드릴 때 살각에서 나선다면, 살각이 선전포고를 하게 되는 셈이니 섣불리 은공께 손대지는 못할 것입니다." "어차피 해야할 선전포고였을 텐데." 천무는 사파는 이미 암암리에 정사대전을 준비해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굳이 선전포고를 굳이 꺼려할 이유가 없다. "아직은 아닙니다. 물자나 병기의 보유량을 비롯해 여러 가지를 고려해볼 때, 그들이 정사대전을 일으킬 때까지는 아직 몇 년의 시간이 남아있습니다. 살각으로서는 단독으로 선전포고를 해 다른 사파의 눈총을 받느니, 무정살왕이 나서는 한이 있더라도 증거 하나 남지 않는 완전한 살행을 펼치겠지요. 증거가 없다면 아무리 천하삼십육세의 정파라도 살각을 추궁할 수야 없을 테니 말입니다." 어차피 무정살왕이 직접 나선다면 그 어디라도 안전하지 못할 터이니, 그 정도면 피신처로 삼기에 충분하다. "어느 쪽을 생각하고 있나." "가깝기로는 철궁곡(鐵弓谷)이 더 가깝습니다." 잠시의 생각 뒤 결정을 내린 그는 소매에서 몇 개의 뼛조각을 꺼내 땅에 던져놓고 주문을 외웠다. 그의 묵봉으로부터 흘러나온 귀기는 음산하고 사이한 주문에 따라 뼛조각에 스며들어갔고, 많은 양의 귀기를 받아들인 뼛조각은 마치 증식되듯 뚜두둑 불어났다. 그리고 뼛조각의 증식이 끝났을 때, 전신이 해골로 이루어진 세 마리의 말은 텅 빈 동공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타라." 먼저 한 마리의 말 위에 올라탄 그의 무심한 명령에 금호와 남국은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봤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사부, 저희는 승마술을 모르는데요." "상관없다." 해골마(骸骨馬) 스켈레톤 스티드(skeleton steed) 또한 중급의 망자. 기수가 아무리 초보라 하더라도 그가 통제하는 한 기수를 내던져버리는 일은 없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사부의 성격이나 급하기 그지없는 상황으로 볼 때, 분명 죽을 고생을 할 것이라고 확신한 금호는 승마술을 아는 천무를 찾아 주변을 둘러보다가 한 순간 어벙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따악 벌렸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계십니까?" "처, 천형이 왜 거기에 타시는 건데요?" 어느새 사부의 뒤에 떡 하니 앉아있는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따지듯 묻자, 천무는 온유한 음성으로 무척이나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제가 암살대상이니, 가장 안전한 장소에 있어야지요." 생각해보면 그도 그렇다. 금호나 남국이 천무와 같이 탔다가는 천무를 노리는 자객들의 집중공격에 시달리게 될 테니까. "그러면 형님이랑 같이 타셔도..." 절정고수의 무위를 지닌 철방을 떠올리고 반박을 하려던 금호가 말꼬리를 흐리자, 천무는 조용히 답했다. "제게는 도적을 피하려고 호랑이 등에 탈 용기가 없습니다." 철방 유령마를 타본 이후부터 자신이 말타기에 관한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났다고 믿고 있지만, 예전에 천지문에 있는 말 한 마리를 가지고 승마술을 자랑하려다가 말 한 마리와 사람 몇 명을 거의 반 죽여놓은 것은 천지문의 누구나 알고 있는 비사였다. 할 말이 없어진 두 소년이 결국 끙끙거리며 같이 한 해골마 위에 올라탈 때, 모든 처리를 마치고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다가온 철방이 그 모습을 모고 미간을 찌푸렸다. "승마술도 모르는 녀...석들이 왜 같이 타? 한 명...은 내 뒤에 타라." 철방의 말을 들은 남국이 급히 숨을 들이키다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자, 가까스로 남국을 잡아 낙마를 막은 금호는 창백해진 안색을 애써 숨기며 철방의 도움을 사양했다. "저, 저희는 괜찮거든요. 형님께서는 저 소저를 데리고 타셔야죠." "거...참. 귀찮게 시리." 금호의 일리 있는 말에 철방이 안면을 팍 찡그리면서도 기절한 여인을 짐짝처럼 뒤에 싣고 해골마 위에 올라타자, 금호와 남국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토해냈다. '너무 지체했군.' 뼈로 만들어진 고삐를 쥐고 해골마를 달리게 한 그는 스산한 기운이 마치 밧줄과 같이 조여들어 오는 것을 느끼고 주술을 준비했다. "낙오돼도 도움은 없다." 말의 목뼈에 거의 달라붙다시피 하고 있던 금호는 그의 무심한 음성에 침을 꿀꺽 삼켰다. 설사 철방과 그들이 모두 낙오된다고 해도, 그는 계약자인 천무와 여인만 무사하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기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명확히 확인하게 된 둘은 바짝 경계심을 조였다. 있는 것이라고는 말 그대로 뼈밖에 없는 만큼, 몸이 가벼운 해골마는 험난한 살길을 마치 바람처럼 빠르게 달려갔다. 설사 천하에서 가장 빠른 손과 발을 지녔다는 무영투괴(無影偸怪)라도 따라잡기 힘들 것만 같은 속도였지만, 그는 한시도 방심하지 않고 감각을 유지시켰다. 그리고 그 감각에 무언가 옅은 위화감이 느껴진 순간,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묵봉을 앞으로 내뻗었다. 파바밧--! 묵봉으로부터 쏟아져나간 뼈화살은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많은 것들을 뚫고 찢어냈다. 나무껍질, 나뭇가지, 땅, 그리고...밧줄, 야행복, 피륙을. 지둔술을 이용해 길 바로 밑에 은신해있던 자객은 미처 피해내지도 못하고 어깨에 하나의 화살이 틀어박혔고, 그 조금 뒤쪽에 있는 나무 위에서 그물을 준비하고있던 자객은 나뭇가지가 부러지자 급히 몸을 피하느라 제때를 포착하지 못했다. 기습을 준비하던 자객들을 오히려 기습한 덕분에 그들은 무사히 암습을 피하고 의외의 성과마저 거둘 수 있었다. 우둑! 우두둑! 비록 뼈밖에 없는 해골마라고는 하지만, 그 뼈 자체의 무게에 등에 태운 둘 사람의 무게까지 더해진다면 아주 가볍다고 하기는 무척이나 어렵다. 그 해골마가 화살이 꽂힌 땅 위를 그대로 지나간 덕분에 지둔술로 은신해있던 자객은 어깨와 무릎이 박살나고, 내장이 터져 나간 뒤, 마지막으로 목이 부러져 칠공으로 피를 꾸역꾸역 토해내고 두 눈알이 반쯤 튀어나온 처참한 모습으로 땅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생매장되어 죽었으니 묘자리를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애초부터 기마가 아닌 인간을 습격하기 위해 지둔술로 은신해있던 자객으로서는 참으로 억울하기 그지없는 죽음일 터였다. 그 뒤로도 몇 차례 자객들의 함정과 암습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의 주술에 힘입어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었다. 시각을 제외한다면 화경의 고수들조차 능가하는 초감각이 자객들의 은신을 귀신같이 잡아내지 않았다면 결코 불가능했을 터였다. 또한, 거기에는 해골마의 도움도 컸다. 일행이 말없이 그냥 걸어서 산을 올랐다는 확실한 정보를 가지고 준비해둔 함정이 오히려 자객들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결국 그들은 살각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것은 단지 앞으로 이어질 기나긴 추적전의 시작에 불과했다. ============================= 이벤트 전시간으로 수정되었으니 많이많이 참여해주시고.. 추천과 감상도 많이많이 부탁드립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14 00:07:46 고친날 2005-06-15 05:45:16 읽은수 11096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2.살각혈전(殺閣血戰).(5)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산을 벗어난 그들에게는 가히 지옥과 같은 나날이 이어졌다. 용변 등을 위한 아주 잠시를 제외하고는 해골마 위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쉬지 않고 이동을 계속했지만, 살각의 자객들은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암습을 가해왔다. 처음에는 평범한 범인들로 변장하고 우연인척 길을 막으려고 했지만, 초감각으로 정체를 꿰뚫어본 그가 오는 족족 목을 쳐버리자 아무리 살각의 자객들이라도 더 이상 그 방법을 써오지는 않았다. 그 대신 곳곳에 은신해 있다가 갑자기 기습해오는 것은 기본이요, 철질려(鐵 藜)를 뿌려두거나 땅에 밧줄과 그물을 깔아두는 것에서부터 독을 뿌려두고 땅에 구멍을 파고 창을 꽂아두는 등 그야말로 땅 절반에 함정 절반의 길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일정 수준 이상의 자객들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천무는 그것을 시간벌이를 위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아마 살각의 주력은 포위망에 속해 있다가 그들을 놓치자 죽을힘을 다해 뒤쫓아오고 있을 테지만, 해골마가 체력의 한계가 없듯 인간의 한계 또한 없다고 믿는 듯한 그의 무지막지한 강행군을 따라잡지 못하자 온갖 수단을 사용해 속도를 늦추려는 것이다. 지금 나서고 있는 것은 원래 전 중원의 분타에 퍼져 정보수집이나 정예자객을 보조하는 일을 하던 하급자객들로, 전서구를 통해 미리 연락을 받고 나선 것이다. 비록 하급이라고는 하지만, 청부업을 통해 살각이 벌어들이는 막대한 규모의 자금으로 키워진 만큼 그 숫자는 그야말로 질리도록 많아 계속해서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헤엑, 헤엑...그, 그...헤엑, 아직...헤엑..." 금호와 남국의 몰골은 그야말로 말도 못할 정도였다. 며칠 동안이나 해골마 위에서 선잠을 자며 버텨온 덕분에 수면부족으로 눈가에 기미가 가득하고, 체력은 바닥날 대로 바닥났으며, 정신력은 한계에 다다랐다. 그나마도 귀기를 머금은 해골마의 뼈가 달릴 때의 충격을 자체적으로 흡수해서 이 정도지, 만약 일반 말을 타고 이만큼 달렸다면 기마나 기수나 진작에 송장을 치웠을 것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천무의 음성은 두 소년과는 아주 딴판으로 평온했지만, 그 밑에는 짙은 피곤함이 깔려있었다. 단정하던 의복은 한껏 구겨지고 먼지에 더럽혀진 것이, 이제 겉모습에서는 예전의 고아하던 서생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녀...석들. 그러니...까, 체력단련 좀...해두란 말이다. 나는 이렇게...멀쩡하지 않으냐." '그거야 형님은 시귀니까 그렇죠!' 누가 무한의 체력을 지닌 시귀 아니랄까봐 아직까지도 해골마 못지 않게 펄펄 기운을 내고 있는 철방의 말에 금호는 뭐라고 쏘아주고 싶었지만, 그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말 한마디를 할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오늘이 고비인가." 죽을 듯한 강행군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변함없이 무심한 음성은 금호와 남국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사부 또한 철방과 마찬가지로 시귀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게 만들 정도였다. 더구나 그의 흑의는 그 생김세 만큼이나 특이하여 전혀 구겨지거나 더렵혀지지 않았기에 흑의 안이라면 몰라도 겉모습만 보자면 그가 가장 멀쩡했다. "예. 살각 또한 말을 바꿔 타고 경공을 사용하며 전력으로 추적해왔을 겁니다. 따라잡지 못했다고 해도 따로 지원된 자객들이 앞을 막고 있겠지요." 천무가 몸은 반 시체가 된 상태에서도 상상을 초월하는 정신력으로 상황을 분석해 내놓은 대답에 그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속도를 줄였다. "반 시진 동안 휴식한다." 하루동안 말에서 내리는 시간을 모두 합쳐도 채 한 시진이 안 됐던 지금까지의 여정을 생각할 때, 가히 파격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휴식시간에 금호와 남국은 이것저것 젤 것도 없이 곧바로 해골마에서 굴러 떨어지다시피 내려 땅에 나자빠졌다. "헤엑...헤엑..." 두 소년이 시체처럼 땅에 늘어져 숨을 헐떡거릴 때, 천무는 길가에 있는 작은 바위 위에 앉아 심호흡을 하며 맑은 정신을 유지하려 노력했고 철방은 아직까지 가사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인의 상태를 대충 살폈다. 그는 휴식을 취하는 대신 귀기와 마력의 회복에 집중했다. 마력이 잠재되어있는 곳은 하단전. 육신에서 바로 작용하면 생기를 해하기에 단전에서 일으켜 기맥으로 순환시켜 육신을 강화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어떤 기맥에 어떻게 마력을 유통시키느냐에 따라 효과가 달라지기에 그는 사기(死氣)를 손에 모으면서도 진기(眞氣)의 운용에 지장이 없는 흑사수의 운기법을 응용해 사기 대신 귀기를, 진기 대신 마력을 사용함으로써 만의 하나라도 귀기와 마력이 충돌하거나 섞여 혼탁해지는 것을 방지했다. 완벽하게 익히지 않고 단지 그 일부만 대충 응용했을 뿐이나, 절정무공인 흑사수의 운기법인 만큼 적은 양의 마력으로도 보다 뛰어난 육체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단점이 있다면 그만큼 지구력이 떨어진다는 것. 마력이 육신에서 직접 작용하면 항상 육신을 강화시켜둔다 해도 그다지 소모되지 않지만, 운기법을 사용하면 효과가 큰 만큼 소모도 크다. 그러나 빠른 소모만큼이나 빠른 회복 또한 가능한 것이 운기법의 장점이다. 음기를 끌어 모아 심장 내부에서 순환시켜 정제한 뒤, 운기법에 따라 기맥으로 흘려보내자 일광 아래의 눈과 같이 순식간에 녹아들며 마력과 귀기를 보충했다. 심장을 통해 빠르게 흡수해도 그것을 마력과 귀기로 전환하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던 이전에 비하면 큰 발전이다. '거의 회복됐군.' 살각의 자객들을 상대하기 위해 귀기와 마력의 소모와 보충을 반복하며 수 차례나 운기법을 사용한 덕분인지, 종령석유(鐘靈石乳)의 기운이 완전히 기맥에 흡수됐다. 해골마를 만드느라 촉매를 거의 다 사용한 관계로 유령마를 만들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상급의 사령술을 사용하는 것은 가능해졌다. 또한 인간은 죽을 때 가장 강렬한 감정을 내뿜는 법. 링 오브 베리알은 자객들이 죽을 때 쏟아낸 음적인 감정을 흡수하고, 그것을 주변에서 모은 음기와 합쳐 정순한 마력으로 전환시켰다. 아직 상급까지는 부족하지만, 중급의 흑마술을 사용하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는 양의 마력이다. '미리 준비해두는 게 좋겠군.' 상당히 강력한 혼령이 내부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석영조각을 꺼내들었다. 호악채에서 얻은 보석은 이미 모두 사용했지만, 천지문에 머물 때 싸구려보석을 다수 구입해두었기에 당장 촉매가 부족하지는 않다. 그가 뼛가루로 마법진을 그리고 그 중앙에 석영조각을 내려놓는 것을 본 이들은, 그가 뭔가 일을 벌이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철방은 그의 등뒤에서 버텨 섰고, 두 소년은 무엇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두 눈을 부릅떴다. 천무 역시 예외는 아니라 흥미로운 기색을 보이며 그의 행동을 주시했다. 묵봉을 석영조각 위에 수직으로 세우며 영문을 개방하자, 그곳으로부터 흘러나온 귀기가 넘실거리는 강물처럼 기맥을 가득 메우며 묵봉으로 스며든다. 칠흑과 같은 검은 지팡이는 무한의 암흑과 같이 귀기를 끝없이 받아 들여 증폭시키고, 증폭된 귀기는 그의 주문에 담긴 힘에 이끌려 석영조각의 내부에 응축된다. 쩌저적! 응축된 귀기를 견디지 못한 석영조각에 금이 가는 와중에도 뼛가루로 이루어진 마법진은 푸르스름하게 귀광을 흘리며 귀기의 응축을 돕고, 응축된 귀기는 점점 더 굳건해지며 안쪽에 있던 혼령을 철저하게 감금한다. 파강! 마침내 석영조각이 깨져나가 검은 가루가 휘몰아치고, 그 안에서 공포에 질린 혼령이 튀어나온다. 그러나 혼령은 벗어나지 못한다. 휘몰아치는 검은 파편과 가루가, 그 안에 담겨진 귀기가 음울한 검은빛으로 빛나며 혼령을 조여든다. 미친 듯 발버둥치며 벗어나고자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조여드는 귀기의 사슬에 의해 결국 포박 당한 혼령의 몸을 하나의 검은 묵봉이 파고든다. 우웅-! 묵봉의 진동과 함께 폭발하듯 터져 나온 귀기에 의해 급격히 늘어난 귀기의 사슬이 혼령의 전신을 덮는다. 빈틈하나 없는 완전한 속박. 더 이상 혼령은 보이지 않고, 겉에 드러난 것은 오직 칠흑의 사슬뿐. 귀기의 사슬이 혼령에게 녹아 들어간다. 마치 백지에 먹물이 스며들 듯, 붉은 석양빛을 어둠이 집어삼키듯 혼령을 검게 물들인다. 마침내 칠흑의 사슬이 모두 스며들자, 그 자리에 남은 것은 1장에 가까운 신장과 긴 팔다리를 지닌 거대한 칠흑의 그림자뿐. 혼령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영혼을 잃고 마음을 잊고 단지 하나의 그림자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그림자의 망자. 자기 자신조차 잃어버리는 형벌을 받은 지옥의 죄인. 스스로의 그림자에 봉인되어버린 영혼. 흑영귀(黑影鬼) 쉐도우(shadow) 위의 암영귀(暗影鬼) 다크 쉐도우(dark shadow), 그 암영귀 보다 위에 존재하는 대영귀(大影鬼) 그레이트 쉐도우(great shadow)는 그렇게 그에 의해 봉인됐다. 한 영혼을 어쩌면 수백, 수천, 어쩌면 수만 연도 넘는 시간동안 봉인시켜버렸음에도 그는 조금도 동요치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당연히 천하를 다스리도록 태어난 지배자처럼 자연스럽게, 그리고 모든 생사를 주관하기에 모든 생사에 신경 쓰지 않는 사신처럼 무심히 한 손을 내뻗었을 뿐. "오라." 이미 영혼을, 마음을, 자신을 잃은 대영귀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의 지배를 받아들였다. 진정 무심한 방관자이기에 진정 오만한 지배자인 죽음의 신의 발치에 엎드려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그림자에 스며들었다. 이미 흑영귀를 만들 때 한 번 본적 있는 광경이었지만, 그래도 그 광경에서 받은 느낌은 더욱 강해지면 강해졌지 결코 약해지지는 않았다. 두 소년은 무언가 등줄기를 서늘하게 스쳐 지나가는 느낌에 몸을 떨었다. 청년은 범해서는 안 될 금기를 본 듯한 느낌에 두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고, 거한은 그 무엇이라도 상관없다는 듯 묵직한 표정으로 여전히 굳건하게 그의 뒤를 지켰다. 대영귀를 복종시킨 사신이 다시 한번의 운기를 통해 귀기를 복구시킬 때까지, 그들은 다른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출발한다." 그의 무심한 음성을 들은 뒤에야 사신의 마력에서 벗어난 그들은, 마치 죽음의 말을 타고 저승을 향해 달려가는 사자(死者)들과 같이 철궁곡을 향해 해골마를 몰아갔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15 00:07:26 고친날 2005-06-24 12:27:25 읽은수 11281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2.살각혈전(殺閣血戰).(6)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촤아악!! 크게 휘둘러진 사신의 낫이 한 자객의 목을 베며 절단면에서 피가 화산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온 순간, 그의 소매에서 한 마리의 사뢰괴가 화살처럼 쏘아져나가 암기를 던지던 자객의 목에 틀어박혔다. 땅 밑에서 날카롭게 솟아나는 창. 그것을 무시하고 빠르게 주문을 외우며 소맷자락으로 암기를 막아낸다. 콰직! 해골마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커다란 손톱이 창을 부러트리고 땅을 파헤치며 자객의 몸을 둘로 쪼갤 때, 주술을 완성해 낫으로부터 짙은 녹광으로 이루어진 독시(毒矢) 포이즌 애로우(poison arrow)를 쏟아낸다. 독성을 지닌 화살이 쏟아지자, 자객들은 피하는 대신 오히려 앞으로 튀어나오며 검을 내지른다. 독시에 적중 당한 부분이 순식간에 변색되는 와중에도 그의 뒤에 있는 천무를 향해 뻗어오는 검에는 조금의 미동도 없다. "주의해라." 허리를 잡고 있는 천무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고삐를 당기자, 해골마가 그대로 뛰어올라 자객의 머리 위를 넘어간다. 가벼운 만큼 마치 날아오르는 듯싶을 정도로 높고 긴 활공이 끝나고, 그 도중 말발굽에 차여 어깨가 으깨진 자객의 목에 뼈로 이루어진 기다란 창이 박혀든다. "젠장!" 세차게 비틀며 휘둘러진 골창에 의해 목이 찌지직 찢겨나간 시체가 말발굽에 밟힘과 동시에 좌우에서 화살이 쏟아져 내리자, 금호가 그들 주변의 허공을 떠다니던 골순을 급히 움직여 화살을 튕겨낸다. 수인을 맺은 왼손을 내뻗으며 골시를 쏘아내 반격하고 골창을 다시 앞으로 향해 정면을 가로막던 자객의 가슴을 꿰뚫는다. 한 자객이 골창을 피해 바로 앞까지 접근하자, 해골마의 목과 머리에 휘감겨있던 사뢰괴가 순식간에 머리를 뻗어 자객의 살을 가리고 혈관을 뜯어낸다. 길가의 수풀에서 갑자기 몸을 일으킨 자객이 던진 사슬낫이 골순의 사이를 지나 남국의 목에 감겼다 싶은 순간, 환영귀가 만들어낸 그들의 환상이 흐릿하게 사라지며 자객의 심장에 흑영귀의 손톱이 틀어박힌다. "이...빌어먹을 새끼들! 좀 비켜...라!!" 기절한 여인을 품에 끌어안아 보호하고 있는 철방의 머리 위로 그물이 떨어져 내리자, 갑자기 아래에서 솟구친 커다란 대도가 커다란 반월을 그리며 그물을 양단 한다. 그물을 자르는 도중 손등에서 쏘아져 나간 사린비가 자객의 복부에 틀어박힐 때, 한 자객이 경공으로 해골마를 따라잡으며 다리를 향해 검을 내지른다. 카앙! 해골마의 꼬리처럼 매달려있던 쌍사괴의 한 머리가 검을 중간에서 잡아채는 사이 다른 한 머리가 자객의 얼굴에 틀어박혔다가 빠져 나온다. 칼날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두 눈알이 몇 번의 찰칵거림에 의해 조각조각으로 나눠진다. 가히 혈로(血路)를 뚫는다는 말 그대로, 세 마리의 해골마가 지나간 길 뒤에는 온통 피가 뿌려지고 시체가 늘어졌다. 그러나 그들의 상태 또한 정상이지만은 않았다. 몇 개의 암기에 의해 가벼운 상처를 입은 금호와 남국은 천무가 준 해독단을 복용했음에도 조금이나마 중독의 기미를 보였고, 세 해골마도 수많은 자객들의 암습을 받아내느라 뼈가 너덜너덜하게 변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체력과 정신력이었다. 반 시진 동안 휴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그 동안 이어온 강행군으로 인한 피로는 겨우 그 정도로 회복될 수 있을 정도로 가볍지 않았다. 인간 같지도 않은 그는 아직까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앞장서 혈로를 뚫고 있었지만, 너무 급성장 한 만큼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기초가 부족한 두 소년의 움직임은 점차 느려져갔다. 빈틈을 전문적으로 노리는 자객들은 그 작은 틈을 놓치지 않고 그와 천무에 대한 공격마저 포기한 채 남국과 금호를 향해 암습을 집중했다. 한 자객이 죽어가면서까지 자신의 몸에 박힌 골창을 잡고 늘어지자, 남국은 골창을 포기하고 뢰검를 뽑아들며 골도를 만들어냈다. 중거리에서 자객들을 저지하던 골창을 포기한 대가는 컸다. 아무리 골도와 뢰검을 휘둘러도 자객들은 갈수록 많이 해골마에 달려들었고, 금호가 조종하던 골순은 하나둘씩 깨져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한 자객의 검이 사뢰괴와 함께 해골마의 두개골을 쪼갠 순간, 해골마는 그대로 우루루 무너져 내리며 두 소년을 떨어트렸다. "큭...! 으윽...!" 간발의 차로 골순을 아래쪽에 깔아 충격을 완화시킨 금호는 급히 몸을 일으키며 남국을 돌아보았다. 묘행부의 효험 덕분인지 천만 다행스럽게도 남국은 무사했지만, 해골마의 돌파력이 사라진 이상 사방에 가득한 자객들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금호의 눈이 급히 주변을 훑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저 앞쪽에서 달려가고 있는 사부. -낙오돼도 도움은 없다.- 캉! 골순을 내밀어 가까스로 자객의 검을 막아낸 소년은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돌렸다. 그는 절대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시선이 절로 찾는 것은 뒤에서 달려오던 철방. 그가 잠시만 해골마를 멈춰주면, 그 해골마에 타면 어떻게든 자객들의 포위를 벗어날 수 있다. 남국이 미친 듯이 휘두르는 골도와 뢰도의 틈을 뚫고 들어온 몇 개의 검이 골갑과 골순을 점차 깨부쉈다. 흑영귀가 간간이 솟아나 심장을 꿰뚫고 환영귀가 여러 가지 환각을 걸어대도 그들은 조금도 손을 늦추지 않고 계속해서 검을 내질렀다. 자신의 키보다 더 크고 넓어 마치 벽과 같은 골순을 들어 남국의 뒤를 막아주며, 금호는 철방이 한시라도 빨리 도와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한 순간, 금호의 앞을 무언가 거대한 것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골순에 검이 부딪쳐오는 소리가 줄어드는 것을 느끼고 살짝 시선을 돌린 금호의 눈에 마침내 철방과 해골마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형님! 어서...!" 마악 도움을 청하려던 금호는 피가 얼어붙는 듯한 느낌에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어째서 뒷모습일까? 어째서 점점 더 작아지고 있는 걸까? 어째서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는 걸까? 실수로 지나쳐버린 걸까? 그렇다면 왜 다시 돌아오지 않는 걸까? 힐끗 뒤를 돌아본 철방의 어두운 눈을 본 금호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사부가 지키는 것에 그들이 속해있지 않듯, 철방 또한 그들보다는 여인의 안전을 우선시 해야한다. 이미 한 손으로 대도를 휘두르며, 다른 한 손으로 여인을 안은 채 고삐를 쥐고있는 철방에게는 더 이상 여유가 없다. 잠시나마 팔을 내밀어줄 수도, 해골마를 멈춰 그들을 도와줄 수도 없다. 그들은, 버림받은 것이다. 가슴속에 뜨거운 무언가가 불타올랐다. 머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차라리 힘을 주는 대신 보호해달라고 해야 했을까? 그랬다면 천무나 여인처럼 보호받을 수 있었을까? 금호는 피식 실소했다. 그럴 리가 없다. 자신들의 이용가치는 제자를 빙자한 도구에 불과했을 뿐이다. 도구를 보호해주는 주인은 없다. 특히 그 주인이 사부와 같은 인간이라면. 배신감이 아주 안 드는 것은 아니지만, 필요가 없어질 때 버려진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차라리 이런 불가항력에 가까운 상황에서 어쩔 수 없다는 듯 버려지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서로 맞대고 있는 등으로 전해져오던 친우의 떨림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이미 일심동체와 다름없기에, 시선조차 교환하지 않고도 서로의 뜻과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배신이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희생이라는 식으로 자기합리화 해버리는 것이 속편하지 않겠는가? 이곳에서 죽더라도 후회는 없다. 구차하게 돌멩이에 맞아죽는 것보다는, 작게나마 얻은 힘을 모두 사용해 당당하게 맞서다 죽는 게 그래도 멋지니까. 어차피 죽으면 다 똑같은데도, 지극히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이며 감정적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죽을 때까지 자기합리화를 하며 멋을 찾는 것은 오직 인간이나 할 수 있을 일이겠지. 수많은 칼에 찔려 환상처럼 흩어져버리는 환영귀와 햇빛 닿은 그림자처럼 흐릿하게 사라지는 흑영귀의 모습이 보인다. 아무리 중급 망령이라도 진기가 담긴 칼침을 저렇게 많이 맞으면 어쩔 수 없겠지. 반쯤 부서진 골순을 아예 박살내며 들어온 검이 어깨 부근의 골갑을 가르며 오른쪽 어깨가 가벼워졌다. 피부가, 살이, 근육이, 혈관이, 뼈가 잘린 오른팔이 땅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다리병신에 팔 병신까지 됐으니, 형님 계산에 따르면 구걸 수입이 두 배로 늘겠다 싶은 엉뚱한 생각을 하는 사이 서늘한 무언가가 골갑을 뚫고 어깨와 옆구리의 뒤쪽에 박혀 들어왔다. 친우의 몸을 관통해 들어온 검에 자신까지 같이 찔렸으니, 이대로 죽으면 형님 식으로 정말 우라지게 사이좋게 죽는 셈이다. 그런데 이것까지 꼭 형님 식을 써야하나? 흐릿한 시야에 자객들이 물러나는 게 느껴진다. 거의 다 찔러놓고 왜 이제 와서야 물러나나? 진작에 물러나든지, 아주 끝장을 보고 물러나든지 할 것이지. 아아, 그래. 알겠다. 미끼로 쓰려고? 불쌍하다. 자객들이 너무너무 불쌍하다. 토끼를 가지고 사신을 낚으려고 하다니, 그래서야 어떻게 사신을 잡으려고. 오히려 목이 베이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의식이 점점 흐릿해져간다. 왼손에 무언가가 잡힌다. 거칠지만 따듯한 손. 세상에서 가장 익숙한 손. 국아! 아냐...? 비록 고아에, 거지에...불구자로 살긴 했지만...너 같은...친우를 둔...것만큼은...황제도...부럽지...않은...최고...의......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16 06:09:09 고친날 2005-06-16 06:18:48 읽은수 10547 [ 4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3.생사위급(生死危急)-예고편-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 =구원= 쿠웅--! 철방이 힘있게 한 발을 땅에 내려찍자, 마치 천만근의 철퇴에 내려 찍힌 듯 땅이 움푹 파이며 부르르 떨렸다. "이 녀석들을 건드리려면, 어떤 놈들이든 나를 먼저 쓰러트려야 할거다!" 우렁찬 고함과 함께 철방의 전신으로부터 하늘조차 부숴 버릴 듯한 패도적인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 =분노= 그가 대형을 따르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심령금제? 그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깨고자 노력했다면, 진작에 깨버릴 수 있는 금제 따위에 묶여 대형을 따른 것이 아니다. 버려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천뇌문사 장일산에게 협조한 이유가 무엇인가? 힘, 힘. 힘!! 세상을 지배하는 힘 때문이 아니던가! 비록 대형에 의해 목숨을 잃기는 했지만, 그리고 망자라는 저주받은 존재로 다시 태어나긴 했지만, 그 대가로 그는 힘을 얻었다. 그렇기에 맹세했다. 그를 대형으로 모시고 영원히 충성하겠다고! 그런데, 그렇게 얻은 자신의 힘이 고작 이 정도였다는 말인가!!! ---------------------------------------- =계약= "힘을 원하는가?" 벼락이 떨어졌는가? 아니면 지진이 일어났는가? 몸이 벼락맞은 듯 뻣뻣이 굳었다. 지진이 난 듯 몸이 부르르르 떨렸다. "힘을 원한다면, 주겠다." ---------------------------------------- =혈전= 콰지직! 대영귀(大影鬼)의 두 손이 마치 합장을 하듯 맞물려지며 그 사이로 두부처럼 으스러진 알 수 없는 조각들과 끈적끈적한 핏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 =위기= 콰앙!! 세 번째 비수의 폭발에 사신의 낫이 부르르 흔들리며 두건의 그림자 사이로 핏물이 울컥 쏟아졌다. 그의 몸은 골옥으로 더욱 깊이 박혀들었고, 골옥에는 쩌저적 커다란 금이 생겨났다. 우웅. 우웅. 보석이 떨린다. 죽은 자의 심장이 떨린다. 차가운 귀화가 담긴 두 눈이 푸르스름하게 빛나며 그 모습이 더더욱 똑똑히 박혀든다. 귀 끝이 뾰족하게 서며 그 소리가 더더욱 확실하게 들려온다. 어금니가 날카롭게 솟아나며 주변의 독기를 서서히 빨아들인다. ---------------------------------------- =진화= 늦었다. 늦었나? 늦을까? 동공이 급격히 수축되며 뇌가 폭발하듯 활동한다. 세상의 모든 것이 멈춰지는 듯한 가운데 느릿느릿하게 그를 향해 날아가는 비수의 모습이 두 눈 똑똑히 박혀든다. 빠를까? 빠른가? 빠르다! 모든 근육의 힘이 단 1푼도 남지 않고 모조리 다리에 쏟아 부어진다. 터질 것만 같은 다리, 그러나 버틸 수 있다. 버티기 위해 '진화'된 이 다리라면 버틸 수 있다. ---------------------------------------- =명령= "죽여라." 비록 몸은 전투불능에 가깝게 망가졌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음의 위기를 넘겼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무심한 방관자로 남아있기에 여전히 오만한 지배자인 그의 명령에 철방은 걱정을 잊었다. 후회를 잊었다. 서서히 몸을 돌린 그의 눈에 남아있는 것은, 오직 차갑게 불타오르는 귀화(鬼火)와 광폭한 살기뿐이었다. ---------------------------------------- =대성= 동피철혈기공(銅皮鐵血氣功)의 12대성과 반탄기공(反彈氣功)의 10극성에 이르렀다. 전신의 기맥이 열림으로써 외부에서 들어온 음기가 끊임없이 흘러 외기순환(外氣循環)을 이루며 기공(氣功)의 완성이 확실하게 느껴진다. ---------------------------------------- =파영= 그의 그림자에서 솟아난 대영귀가 마지막 힘을 짜내 암기들을 모조리 휩쓸어버리자,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앞으로 튀어나온 두 십대자객의 검과 사슬낫이 대영귀의 몸을 갈가리 찢었다. ---------------------------------------- =조력= "감히 본인의 아우를 해할 셈이냐?!" 오직 손에 들려있는 곰방대를 제외하고는 복장과 음성은 물론이고 체격까지 천살과 똑같아진 그의 모습에 천살을 비롯한 자객들은 극도의 경악으로 인해 안색이 싹 변해버렸다. "환술(幻術)! 설마 귀하는...!" ======================================== 좋은 소식 하나와 나쁜 소식 하나가 있습니다. 좋은 소식은 무적사신이 파피루스와 출판계약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나쁜 소식은 출판사정상 이제 3일에 1번씩만 연재를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대략 3일의 배수일, 즉 3, 6, 9, 12, 15, 18, 21, 24, 27, 30일의 날짜에 맞춰 한편씩 올리겠습니다. 야비하다고 하셔도 좋고, 돈에 눈이 멀었다고 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필자도 땅파서 먹고사는 건 아닙니다. 일단은 평생 글쓰며 살기로 맹세한 필자로서, 가능한 물질적인 면도 신경 써야 하는 처지를 부디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곳곳에 추천 및 소문을 내주신다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성은 없다. 이름도 없다. 존재하지 않는 그림자-무영자- ======================================== 이 예고편은 셜이움님의 팬아트로 드리는 보너스입니다. 팬아트 이벤트는 한동안 계속 이어질 예정입니다. http://www.drwk.com/pimangboard/read.php?code=image&uid=1909&page=1&search_type=&search_value= 많은 소문과 추천 부탁드립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18 00:05:56 고친날 2005-06-18 00:15:57 읽은수 11036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3.생사위급(生死危急).(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사신, 삶과 죽음의 고비에 이르다.- "야...야, 정신...좀 차려라." ...형님, 빨리도 좇아오셨네요. 어차피 한 번 죽은 시귀시기는 해도 이왕이면 좀 늦게 오시지 그랬어요. 아, 그런데 형님이랑 같이 있으면 지옥인가? 나름대로는 착하게 살려고 했는데...역시 사람 죽인 죄가 크긴 큰가보다. "응급조...치는 취했으니,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어느 정도는...버틸 수 있을 거다." "그거...어째 아직 안...죽었다는 말처럼...들리는데요." "아직...안 죽었다. 이 녀석아!" "...정말이요?" "그래...! 뭐, 곧...죽을 지도 모르겠지만." 긴가민가하며 쑤시는 통증을 애써 억누르며 주변을 둘러보니, 옆에서 남국이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다. 녀석, 자기도 어깨랑 옆구리에 구멍이 뻥 뚫려서 위험한 주제에 걱정은...이라는 생각도 잠시,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자객들을 보자니 정신이 번쩍 든다. "어, 어떻게 된 거예요?" "어떻...게 되긴. 이 형님께서...친히 너희를 구하...러 와주신 거 아니겠냐." 뭔가 엄청 떨떠름하다. 아니, 그럼 아까 그냥 지나간 건 뭐고? 왜 이제 와서 뒷북치는 거지? "쩝...그 계집애를...대형께 맡기고 오...느라 좀 늦었다." "사부께서 그걸 허락해 주셨어요?" 금호가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확신하면서도 일단 물어보니, 철방이 큼지막한 만면에 미소를 씨익 머금었다. "대형께서는...너희를 대형의 제자로 대우하라 하셨다...내 어찌 대형의 제자를 버리고 갈까?" 바보다. 철방은. 그가 당연히 그런 것을 허락할 리 없는데, 무사히 빠져나갈 가능성도 거의 없고, 설사 그들이 무사히 살아간다고 해도 철방을 그대로 폐기처분 해버릴지도 모르는데. 그걸 몰라도 바보고, 알고 왔어도 바보다. 그런데도 뭔가 울컥 치솟아 오를 것만 같다. 버림받는 게 당연했던 상황에서, 그들을 구하러 와준 바보가 너무나 든든하게 느껴진다. 금호가 확실하게 정신을 차리자 철방은 몸을 일으켰다. 자객들은 단지 해골마를 박살냈을 뿐, 그마저 미끼로 삼으려는 듯 접근하지 않았다. 그들을 둘러보던 철방의 눈이 붉게 번뜩이며 짙은 살기가 흘러나왔다. 비록 어떨 때는 얄밉고 어떨 때는 귀찮은 녀석들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름대로 미운 정 고운 정 모두 든 두 소년이 반 시체가 된 모습은 철방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쿠웅--! 철방이 힘있게 한 발을 땅에 내려찍자, 마치 천만근의 철퇴에 내려 찍힌 듯 땅이 움푹 파이며 부르르 떨렸다. "이 녀석들을 건드리려면, 어떤 놈들이든 나를 먼저 쓰러트려야 할거다!" 우렁찬 고함과 함께 철방의 전신으로부터 하늘조차 부숴 버릴 듯한 패도적인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상대가 미끼로 삼을 토끼가 아니라 산중지왕(山中之王)인 맹호(猛虎)임을 느낀 자객들은 잠시 후 포위를 넓혔다. 넓어진 포위망 사이로 하나같이 사슬낫을 든 몇 명의 자객이 앞으로 나서자, 철방은 혈광이 넘실거리는 두 눈을 부라렸다. "그딴 걸로...나를 상대하겠다는 거냐!" 등에서 대도를 뽑아든 철방이 땅을 박차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맹호공(猛虎功)을 최대한 끌어올린 그의 움직임은 대호보다 더욱 사나웠고, 백리묘각(百里卯脚)과 응우공(鷹羽功)에 의한 속도는 바람보다 빨랐다. 촤라랑! 측면에 있던 자객이 사슬낫을 던져 대도에 휘어 감고 사슬을 잡아당기자, 웅력근(熊力筋)을 사용해 떨치는 대신 선선히 대도를 손에서 놓는다. 스스로 당긴 사슬과 그에 딸려온 대도를 피하는 자객 놈의 이마에 정확하게 사린비(蛇鱗匕)를 쏘아 박을 때, 정면에 있던 자객이 사슬을 몇 겹으로 감아 좌우로 펼치자 얼굴에 절로 비릿한 냉소가 떠오른다. 막겠다고? 그래, 어디 한 번 막아봐라! 촤아아악! 태산도 무너트리는 웅력근의 괴력을 칼날보다 예리한 철랑조(鐵狼爪)에 담아 전력을 다해 휘두르자, 몇 겹의 사슬 중 절반 정도가 단번에 끊겨짐과 함께 안면의 절반이 통째로 뜯겨진다. 코와 한쪽 눈알, 입술이 엉망으로 뒤섞인 살덩이를 입안에 쑤셔 넣고 으적으적 씹는다. 입 안에서 눈알이 터지고 코뼈가 으스러지고 입술이 뭉개지며 진득한 핏물이 입가로 흘러내린다. 이것이 자객의 맛. 살인을 업으로 삼고 사는 죄인의 맛. 맹호에게 사냥 당한 사냥꾼의 맛. 편복기공( 氣功)에 의해 비정상적일 정도 빠르게 흡수된 인육의 기운이 전신에 충만히 퍼지며 뜨거운 열기가 가슴에서 치솟아 오른다. "크하하하하핫!!" 미친 듯한 앙천대소(仰天大笑)를 터트리던 도중 십리묘이(十里卯耳)에 미세하게나마 바람가르는 소리가 들려오자, 몸을 돌려 뒤에서 날아든 사슬낫을 지주족장(蜘蛛足掌)을 사용해 손바닥으로 잡아채고 끌어당겼다. 자객이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땅을 박차며 앞으로 튀어나오는 모습을 치효안( 梟眼)으로 똑똑히 보니, 여우보다 간교한 호미지(狐尾智)가 튀어나온 방향이 미묘하게 비틀어져있음을 단번에 눈치채고 알려준다. 살짝 걸음을 옮겨 방향을 제대로 맞춘 뒤, 불끈 움켜쥔 주먹을 자객의 머리를 향해 내뻗는다. 주먹이 자객의 머리에 닿은 순간, 오공갑피(蜈蚣甲皮)가 마치 조여들 듯 응축되며 힘과 충격을 흡수한다. 오공갑피의 응축이 급격히 풀리자, 흡수됐던 힘과 충격이 갑절이 되어 마치 폭발하듯 일순간에 쏟아져 나온다. 퍼어억--!! 자객의 머리통이 통째로 사라졌다.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뿌연 피 안개와 거의 가루가 되다시피 한 살 조각들 뿐. 이것이 웅력근의 막대한 괴력을 오공갑피로 증폭시켜 맹호공에 따라 휘두른 결과다. 이것이 바로 대형에게 받은 힘이다! 길을 막는 자 모조리 무릎 꿇리리라. 잡아죽이리라, 모조리 먹어치우리라. 그것이 바로 강자지존의 패왕지로! 쿠웅! 무겁게 한 걸음을 내딛으며 눈으로는 다음 사냥감을 찾는다. 물러나지 않겠다면, 모조리 쳐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길을 뚫고 대형께 돌아가야 한다. 그때, 갑자기 마치 보이지 않는 거미줄과 같은 무언가가 피부에 하나둘씩 달라붙어 몸을 옭아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철방은 급히 철랑조를 휘두르려 했으나, 그의 손은 채 휘둘러지기도 전에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얇은 실에 의해 제지되고야 말았다. "천잠사(天蠶絲)!" 철방은 얼굴을 흉하게 일그러트리며 웅력근을 울퉁불퉁 부풀어오르게 했지만, 천잠사는 힘을 주면 줄수록 더욱 조여들며 살 속을 파고들었다. "이이......!" 사슬낫을 든 자객들이 미끼였다는 것을 깨달은 철방이 이를 악물고 몸을 움직이자, 천잠사를 잡고 있던 자객들의 몸이 조금씩 끌려갔다. 그러나 아무리 웅력근을 지닌 철방이라도 힘만을 사용해 이토록 많은 천잠사를 끊거나, 천근추를 펼치고 있는 자객들을 떨쳐버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진기가 담겨 능히 검기와 비견되는 예리함을 지닌 천잠사는 마침내 철방의 외피를 조금씩 베어들며 붉은 피를 방울방울 뽑아냈지만, 그럼에도 그는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으로서 더욱 강한 힘을 얻은 망자(亡者)기에. 죽고싶어도 죽지 못하는 존재기에. 그가 대형을 따르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심령금제? 그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깨고자 노력했다면, 진작에 깨버릴 수 있는 금제 따위에 묶여 대형을 따른 것이 아니다. 버려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천뇌문사 장일산에게 협조한 이유가 무엇인가? 힘, 힘. 힘!! 세상을 지배하는 힘 때문이 아니던가! 비록 대형에 의해 목숨을 잃기는 했지만, 그리고 망자라는 저주받은 존재로 다시 태어나긴 했지만, 그 대가로 그는 힘을 얻었다. 그렇기에 맹세했다. 그를 대형으로 모시고 영원히 충성하겠다고! 그런데, 그렇게 얻은 자신의 힘이 고작 이 정도였다는 말인가!!! "으아아아아!!!!" 마치 맹수의 울부짖음과 같이 쩌렁쩌렁한 고함을 내지른 철방은 두 눈을 이글이글 불태우며 더욱 세차게 몸을 움직였다. 팔이 잘려도 좋다. 다리가 잘려도 좋다. 그는 이미 죽은 자. 단 한 놈이라도 녀석들을 더 데리고 갈 수 있다면,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다. 전신이 점점 피투성이가 되어가면서도, 마치 상처 입은 산왕(山王)처럼 절대 포기하지 않고 더욱 살기와 투지를 불태우는 철방의 모습은 처절했지만, 동시에 그만큼 전율적이었다. 금호와 남국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철방 또한 그들과 동류라는 것을. 힘을 추구하기 위해 영혼조차 팔아버린 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결국 맹호(猛虎)는 밧줄을 벗어나지 못했다. 갈수록 힘을 더해 가는 천잠사에 균형을 잃은 철방이 무너지듯 한쪽 무릎을 꿇자, 그들의 희망 또한 같이 무너져 내렸다. 비록 철방의 눈만큼은 아직까지 타오르고 있었지만, 그가 천잠사를 떨치고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가능성은 전무했다. ================================= 연참 이벤트에 많이많이 참여해보시길. 리플. 추천. 광고. 감상 듬북 부탁드립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19 21:15:52 고친날 2005-06-19 21:15:52 읽은수 10655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3.생사위급(生死危急).(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헌데 그때, 갑자기 두 눈이 부릅뜬 철방의 고개가 포위망의 한쪽을 향해 부러지듯 급격히 돌아갔다. 그의 모습에서 무언가를 느낀 금호와 남국이 시선을 돌리자, 자객들의 포위망에 갑자기 파문이 일더니 그들의 시선이 향하던 곳에서 하나의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촤아악!! 1장에 달하는 크기를 지닌 거대한 그림자는 자신의 기다란 팔을 휘둘러 주변에 있던 자객들을 단번에 휩쓸어버렸다. 그렇게 그림자가 만들어낸 길을 통해 죽음의 말을 타고 나타난 사신(死神)이 자신들의 앞에 멈춰 서자, 금호는 마치 오색실을 꼬아놓은 듯 미묘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한 순간 자신들을 구하러 온 게 아닐까 싶은 생각에 환희를 느꼈지만, 곧 절대 그럴 리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실망했다. 그럼에도 마음만큼은 편안해졌다. 비록 이미 한 번 버려지기는 했지만, 사나이란 자고로 그런 자잘한 일에 쪼잔하게 신경 쓰지 않는 법이다. 무엇보다 적군이 된다면 끔찍한 악몽이라도 아군이 되면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한 사신의 모습은, 꺼져 가던 그들의 희망을 다시 불타오르게 하고 있었다. "버리고 갔던 건 적당히 잊고, 절대 짐이 안 되게 잘 처신하고, 수련도 더 열심히 하고, 말도 더 잘 들을 테니까...지나가시는 길이면 덤으로 저희도 좀 주워가세요, 사부." 남국에게도 들릴까 말까한 자그마한 중얼거림이었지만, 금호의 두 눈에는 사신의 고개가 미미하게나마 끄덕여지는 것이 너무나도 확실하게 비춰졌다. 사신의 그림자에서 내던져졌던 토끼는 다시 자신의 발로 사신의 그림자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다시 배반당하더라도, 다시 버려지더라도 상관없다. 그로서 사신의 가호를 얻을 수 있다면, 사신의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아무리 어리석은 선택일 망정 후회하지 않는다. 금호를 향하던 사신의 고개가 서서히 돌아갔다. 그 고개가 향한 것은 상처 입은 맹호(猛虎). 포박 당한 산왕(山王). 그러나 여전히 불타오르는 눈을 지니고 있는 강호(强虎)를 향해, 그는 무심히 물었다. "힘을 원하는가?" 벼락이 떨어졌는가? 아니면 지진이 일어났는가? 몸이 벼락맞은 듯 뻣뻣이 굳었다. 지진이 난 듯 몸이 부르르르 떨렸다. "힘을 원한다면, 주겠다." 오직 힘만을 추구해왔다. 그러기 위해 의를 버렸다. 살인강도를 서슴지 않았다. 더렵혀진 손에 남은 것은 목표에 비해 너무나도 간소한 힘. 본래의 목적을 잃은 채, 하루하루를 향락에 빠져 사는 썩어빠진 정신. 그러한 자신을 다시 태어나게 해주었던 이가, 다시 한 번 그에게 기회를 주고 있었다. "대신, 나를 따라라." 주저할 필요 따윈 없었다. 곧바로 나머지 하나의 무릎을 꿇고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인 채, 진심을, 의지를, 영혼을 담아 외쳤다. "소제 철방!! 이미 오래 전 오직 대형에게만 무릎꿇으며, 설사 지옥 끝까지라도 대형을 따를 것을 천지신명께 맹세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포박 당한 맹호의 울부짖음이 아니었다. 모든 짐승을 누르고 산의 정상에 우뚝 선 맹호가, 날개를 얻어 하늘로 오르기 위해 쏟아내는 포효였다. "계약은, 성립됐다." 맹호에게 죽음의 날개를 달아줄 것을 약속하는 사신의 음성이 떨어져 내림과 함께, 포위망을 정비한 자객들이 움직임이기 시작했다. 촤르륵-! 몇 개의 사슬낫이 해골마의 다리를 향해 날아오고 수십 개의 암기가 그의 뒤에 있는 천무를 노리고 쏟아지자, 그는 한 팔에 들고 있던 여인을 두 소년에게 던지며 해골마를 스스로 해제시켜버렸다. 해골마가 사라지자 그와 천무의 몸은 당연히 아래를 향해 떨어져 내렸지만, 때맞춰 땅에서 솟아난 대영귀(大影鬼)는 두 손으로 그들을 잡으며 몸으로 그들을 보호했다. 암기의 세례가 멈춘 틈을 타 천무까지 두 소년을 향해 던져버린 그는 곧바로 준비해둔 주술을 시전 했다. 촤아악! 땅에서 솟아난 골옥(骨獄) 본 프리즌(bone prison)이 네 명을 통째로 삼켜버리는 사이, 그는 철방을 향해 마치 유령과 같이 미끄러져 갔다. 더 이상 미끼가 필요 없어진 자객들은 사정없이 암기를 쏟아냈지만, 두텁고도 정밀하게 만들어진 겹겹의 골옥은 바늘만큼 가는 암기조차 막아냈다. 암기가 통하지 않자 자객들의 행동은 셋으로 나눠졌다. 일부 자객들은 계속 포위망과 포박을 유지했고, 일부 자객들은 골옥을 향해 달려들었으며, 또 일부의 자객들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사신의 낫이 자객의 검에 얽혀들었다 싶은 순간, 그의 그림자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솟아나 커다란 두 주먹을 내려찍었다. 쿠웅! 대영귀의 주먹이 헛되이 땅을 내려찍을 때, 순식간에 검을 놓고 물러난 자객들은 대신 비수를 뽑아들어 대영귀의 팔을 베었다. 비수가 허무하게 그림자를 가르고 지나가자, 그 뒤를 찾아오는 것은 서로 교차하며 휘둘러지는 거대한 두 팔. 입으로 파고든 손에 의해 잠시 몸이 들썩거리던 두 자객의 입 상단부가 허공으로 솟구친다. 몸과 함께 남은 자객들의 턱은 잠시 껄떡거리다가 땅에 쓰러지며 그대로 으스러진다. 대영귀가 자객들을 저지하는 사이 주술을 완성한 그의 손에서 녹색의 구름이 생성돼 앞을 향해 밀려들자, 자객들은 감히 그 독무(毒霧)를 경시치 못하고 분분히 물러섰다. 그 틈을 타 천잠사에 의해 포박되어있는 철방에게 다가간 그는 소매에서 혈사괴, 대사괴, 쌍사괴의 핵인 세 수정조각을 꺼내들어 철방의 왼쪽 가슴에 대고 빠르게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일부 자객들은 독무 밖에서 틈틈이 암기를 던졌지만, 그를 든든히 호위하고 있던 대영귀는 단 하나의 암기도 그에게 닿는 것을 허용치 않았다. 무심한 음성으로 급격히 영창된 음산하고 사이한 주문이 철방의 귀기를 조절해 왼쪽 가슴에 혈광을 드러나게 만들자, 그곳에 닿아있던 세 개의 수정조각은 마치 살아있는 듯 요동치다가 혈광 안으로 스며들어갔다. 주문을 통해 세 개의 수정조각을 철방의 핵(核)인 자수정을 중심으로 배치한 그는 그것들을 매개로 삼아 강대한 귀기를 주입시켰다. 이전의 탁한 영혼을 지니고 있던 철방이라면 결코 견뎌낼 수 없는 양의 귀기. 그러나 미칠 듯한 분노에 의해 한이 승화를 이룸으로써, 광폭한 화염에 뜨겁게 불타오름으로써 영혼이 선명한 핏빛으로 달아오른 지금의 철방이라면 이 귀기를 받아들일 수 있다. 막대한 귀기의 주입에 의해 갈수록 거세게 요동치던 세 수정조각은 결국 그것을 견뎌내기 위해 중심에 있던 자수정에 박혀 들어갔다. 우웅-! 세 개의 수정조각과 그 안에 담겨있던 자수정이 진동하며 철방의 전신에 흐르던 귀기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으드득...!" 악물려진 철방의 이빨 사이에서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것은 영혼에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고통. 이미 귀기로써 존재하는 망자인 철방이기에 오히려 더욱 심할 수밖에 없는 고통. 그러나 철방은 결코 신음을 토해내지 않고 그 고통을 그대로 감수해냈다. 그의 심장을 터트릴 듯 거칠게 요동치던 귀기는 그 자신보다 더욱 광폭하게 쏟아져 나온 영기에 의해 휩쓸렸다. 영기는 저항도, 반항도 못할 정도로 무지막지한 기세로 휘몰아친 뒤 귀기와의 충돌로 엉망이 된 채 다시 영혼으로 스며들어갔지만, 한 번 영기에 의해 억눌려진 귀기는 더 이상 요동치지 못하고 잠잠히 그의 심장 안을 맴돌았다. "계약은, 완수됐다." 의식을 마치고 철방의 심장에서 손을 땐 그는 무심한 말과 함께 그대로 몸을 돌렸다. 철방을 묶고 있는 천잠사를 끊어주지도, 정확히 무슨 힘을 줬는지도 알려주지 않은 무지막지한 처사였다. 그러나 자신의 심장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강대한 기운을 똑똑히 느끼고 있던 철방은, 단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눈을 내려감은 채 귀기를 제어하기 시작했다. 독무 밖으로 걸음을 내딛음과 동시에 세 명의 자객이 일제히 검을 찔러 들어오자, 그는 굳이 상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다시 독무 안으로 물러섰다. 아직 독무의 독성을 파악하지 못한 자객들은 섣불리 그를 뒤쫓지 못하고 몸을 멈춘 순간, 그들의 뒤에서 솟아난 거대한 그림자가 한 손에 하나씩의 머리를 쥐고 두 머리를 부딪쳤다. 콰지직! 대영귀의 두 손이 마치 합장을 하듯 맞물려지며 그 사이로 두부처럼 으스러진 알 수 없는 조각들과 끈적끈적한 핏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남은 한 명의 자객은 급히 몸을 돌려 대영귀를 공격하려 했지만, 갑자기 독무 속에서 튀어나온 사신의 낫에 의해 목이 떨어져나간 자객의 몸은 그대로 핑그르르 돌다가 땅에 풀썩 쓰러졌다. 세 자객을 처리한 뒤 독무에서 빠져 나온 그는 흑영귀와 함께 자객들의 벽을 파죽지세로 뚫으며 골옥을 향해 돌아왔다. 골옥의 주변에 미리 뿌려진 독에 의해 몇 명의 동료를 잃은 뒤, 조금 거리를 두고 사슬낫이나 화살, 암기 등을 사용해 조금씩 골옥을 부숴 가고 있던 자객들은 다시 접근해온 그에게 공격을 집중했다. 흑의장포 안쪽에는 뼈로 이루어진 얇은 골갑(骨甲)을, 바깥쪽에는 귀기로 이루어진 반투명한 귀갑(鬼甲)을 두른 그는 온갖 암기를 무시한 채 접근해오는 자객들만을 상대했고, 주술이나 검기가 아니면 아예 모든 공격을 투과시켜버리는 대영귀는 양 때 속의 늑대처럼 자객들 사이를 휘젓고 다녔다. =============================== 왜 돌아왔는감? 천무:"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 사정이 뭔데? 천무:"그 사정이란..." 사정이란? 천무:"다음 편을 보시면 압니다." ......[이런 악마보다 나쁜 놈.] -------------------------------- 셜이움님의 팬아트로 한편 올립니다. 팬아트 연참 이벤트에 많은 참여 바랍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20 06:20:27 고친날 2005-06-20 06:20:27 읽은수 10558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3.생사위급(生死危急).(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앞쪽의 자객이 찔러온 검을 귀갑으로 비스듬히 받아내며 목을 벤 뒤, 등을 노리고 다가온 자객의 턱에 거꾸로 휘두른 낫을 박아 넣던 그의 감각에 문뜩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드디어 왔는가.' 골옥으로 물러난 그는 대영귀를 그림자로 불러들이며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귀기의 대부분을 철방에게 주입해주고 마력을 운기하며 자객들과 한 바탕 격전을 벌인 덕분에, 귀기와 마기 모두 얼마 남지 않았다. 일반 자객들을 상대한다면 어느 정도 더 버틸 수 있지만, 그들이 온 이상 더 이상의 버티기는 무리다. 그가 물러난 잠시 뒤에야 그들이 온 것을 알아챈 자객들이 더 이상 그들에게 달려들지 않고 길을 열자, 세 명의 복면인이 그 길을 따라 천천히 그의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들이 다른 자객들과 유독 다른 점은, 가운데에 있는 복면인의 이마에는 천(天)자가, 좌우에 있는 복면인의 이마에는 검(劍)자와 귀(鬼)자가 수놓아져 있다는 것이다. "참 잘도 도망치더군." "쫓아온 건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말했던 천살(天殺)은 한평생 처음 보는 지독한 청부대상의 무심한 답변에 이를 빠득 갈았다. 기이한 사술로 해골마를 만들어내 포위망을 뚫더니만, 은신해있는 놈이든 변장해있는 놈이든 단번에 알아채고 죽여버리니 자객의 암습이라는 것 자체가 통하지가 않는다. 더구나 숱한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혹독한 훈련을 받은 정예자객들이 모조리 나가떨어지고 오직 천살(天殺) 자신과 십대고수인 살검객(殺劍客), 살귀객(殺鬼客) 이렇게 셋 만이 겨우 따라잡을 정도의 강행군을 펼쳤으니, 자객인 그가 보기에도 이놈은 인간이 아니라 괴물 중에서도 상괴물이다. "쥐새끼처럼 등 돌려 도망치더니 겨우 여기까지밖에 도망치지 못했나?" "개새끼처럼 잘 쫓아왔군." 격장지계를 펼치려다가 하마터면 자신의 복장이 뒤집어질 뻔한 천살은 가까스로 냉정을 회복했다. 흥분했다가 겨우 쫓아온 놈들을 자칫 놓치기라도 하면 그간의 고생이 모두 헛수고가 된다. 아까 전에도 채 접근해오기도 전에 자신들의 은신을 눈치채고 갑자기 말을 되돌리는 바람에 얼마나 기겁했던가? 마음 같아서는 오랫동안 고문하며 최대한 잔인하게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렸다가는 그만큼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도 컸다. "처리한다." 천살이 싸늘한 음성과 함께 비수를 손에 쥐자, 살검객과 살귀객은 각자 검과 사슬낫을 꺼내들었다. 기괴한 사술을 사용하는 놈이니 주저 없이 합공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최대한 버텨야한다.' 그는 골옥에 등을 기대며 사신의 낫으로 땅을 짚는 순간, 하나의 비수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드는 것으로 그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콰광! 푸르스름한 강기( 氣)가 맺혀있는 비수를 사신의 낫으로 살짝 쳐내자, 강기가 폭발하며 강렬한 충격파가 영갑을 깨부수며 그의 몸을 뒤흔든다. 잠시 멈칫한 그의 목을 향해 날아드는 시퍼런 사슬낫을 그림자에서 솟아난 대영귀가 쳐내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휘둘러진 살검객의 검이 대영귀의 몸에 틀어박힌다. [쿠오오--!!] 검에서 일렁거리는 무형의 검기에 의해 큰 타격을 입은 대영귀가 짐승과 같은 포효를 내지를 때, 천살의 손에서 어느새 두 번째 비수가 쏘아져 나오며 튕겨져 나갔던 사슬낫이 다시 날아든다. 콰과광! 다시 한 번 비수를 막아낸 그는 충격파에 의해 내장이 진탕되며 골옥에 박혀들고, 사슬낫은 마치 튕겨나간 것에 대한 복수를 하듯 대영귀의 가슴을 날카롭게 베어낸다. 그 사이 대영귀의 몸에서 검을 뽑아낸 살검객의 손이 살짝 흔들렸다 싶은 순간, 빛살과 같은 쾌검이 아슬아슬하게 몸을 비튼 그의 어깨를 관통한다. 단 하나도 상대하기 힘든 수준의 고수 셋의 연수합격은 너무나도 압도적이었고, 단 십 초식이 지나기도 전에 그의 목이 떨어질 것은 너무나도 자명해 보였다. 그때, 귀기를 완전히 제어하자마자 본능적으로 그의 위기를 느끼고 두 눈을 부릅뜬 이가 있었다. 콰앙!! 세 번째 비수의 폭발에 사신의 낫이 부르르 흔들리며 두건의 그림자 사이로 핏물이 울컥 쏟아졌다. 그의 몸은 골옥으로 더욱 깊이 박혀들었고, 골옥에는 쩌저적 커다란 금이 생겨났다. 우웅. 우웅. 보석이 떨린다. 죽은 자의 심장이 떨린다. 차가운 귀화가 담긴 두 눈이 푸르스름하게 빛나며 그 모습이 더더욱 똑똑히 박혀든다. 귀 끝이 뾰족하게 서며 그 소리가 더더욱 확실하게 들려온다. 어금니가 날카롭게 솟아나며 주변의 독기를 서서히 빨아들인다. 촤악! 앞을 가로막는 그림자의 손을 그대로 잘라버린 검은 그의 가슴을 베어 길고 깊은 검상을 남겼다. 은밀히 휘둘러진 사슬낫이 그림자의 다리에 감겨들었다가 다리를 통째로 절단 해냈다. 허공에서 비틀거리던 그림자가 극심한 타격을 견디지 못하고 땅으로 스며들었다. 근육이 철사와 같이 검게 물들며 바짝 조여드는 만큼 탄탄해진다. 외피에 붉은 광채가 스쳐지나가며 천잠사가 서서히 밀려나간다. 피부의 털이 하얗게 번뜩이며 천잠사를 바깥쪽으로 미끄러트린다. 콰아앙-! 네 번째 비수에 사신의 낫이 급격히 돌아가며 그의 팔이 기이한 각도로 꺾였고, 전보다 더욱 많은 핏물이 쏟아져 나와 흑의장포를 적셨다. 그의 몸은 이제 골옥을 파고들다 못해 거의 관통할 지경이 됐고, 골옥의 금이 더욱 커지며 일부분이 떨어져 나왔다. 다리와 발목의 뼈가 우두둑 변형되며 근육에 뼈에 맞춰 다시 달라붙는다. 척추가 모조리 한번씩 탈골됐다가 다시 붙으며 등의 근육이 맹수의 얼굴과도 같은 모습을 그린다. 전신의 뼛속이 모조리 비고 그 안을 사이한 기운이 가득 채우며 깃털보다 가볍게 만든다. 퍼억! 검이 그의 다리를 삼분지 일 정도 깊이로 베고 지나가자, 허공을 가르며 날아든 사슬낫이 그대로 가슴을 가격해 갈빗대를 으스러트렸다. 그 충격이 그대로 전해진 골옥은 결국 와르르 무너져 내렸고, 그제 서야 그의 처참한 모습을 보게된 금호와 남국은 만면에 경악을 떠올렸다. 두뇌가 꿈틀거리며 귀기를 더욱 활발하게 받아들인다. 피부 아래 점점이 스며들어있던 비늘이 더욱 단단하고 날카롭게 변하며 하나로 이어진다. 손끝에 솟아있던 손톱이 가득 부풀어올라 손가락에서부터 손등까지의 피부를 찢고 튀어나와 여덟 개의 핏빛 발톱을 이룬다. "이제 끝이다." 서늘한 음성과 함께 천살의 손에 들려져있던 비수에 푸르스름한 강기가 맺히는 순간, 내적으로 기이한 변형을 일으킨 발이 땅을 박찼다. 쿠웅-! 단지 추진력을 얻기 위한 박차기에 땅이 움푹 파이며 한 마리의 거대한 맹수가 서서히 흩어지고 있던 짙은 독구름 속에서 튀어나온 직후, 천살의 손에서 비수가 떠났다. 늦었다. 늦었나? 늦을까? 동공이 급격히 수축되며 뇌가 폭발하듯 활동한다. 세상의 모든 것이 멈춰지는 듯한 가운데 느릿느릿하게 그를 향해 날아가는 비수의 모습이 두 눈 똑똑히 박혀든다. 빠를까? 빠른가? 빠르다! 모든 근육의 힘이 단 1푼도 남지 않고 모조리 다리에 쏟아 부어진다. 터질 것만 같은 다리, 그러나 버틸 수 있다. 버티기 위해 '진화'된 이 다리라면 버틸 수 있다. 파앙-! 다시 한 번 땅을 박참과 함께 단 한 명의 시간만이 정상으로 돌아온다. 조금 빨리 걸어가는 듯한 느린 속도지만, 굼벵이 기어가는 듯한 비수를 따라잡아 쥐기에는 충분하다. 목표를 이루지 못해 부르르 진동하는 비수를 천살에게 다시 되돌리는 것과 동시에, 느리게 돌아가던 세상이 다시 똑바로 흘러간다. "허억!" 쿠과광!! 본능적으로 허리와 고개를 비튼 천살의 머리를 스쳐지나가며 귀를 그대로 잘라낸 비수가 포위망을 이루고 있던 자객 세 명을 관통하고도 모조라 한 나무에 박혀든 뒤에야 폭발해 나무를 산산조각 내는 가운데, 철방은 그의 처참한 몰골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내장이 완전 뒤집히고 어깨가 관통됐다. 가슴에는 대각선의 검상이 뚜렷하고 한쪽 팔이 부러져 덜렁거린다. 정강이뼈가 절반 가까이 잘리고 갈빗대는 몇 개나 분질러졌는지 알 수도 없다. 살아있는 시체인 자신보다 더욱 시체 같은 대형의 모습은 철방의 가슴에 뜨거운 불을 지폈다. 천살과 살검객, 살귀객에 대한 분노가, 살각에 대한 분노가 그의 심장에 위치한 보석에서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늦진 않았군." 처참한 몸 상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심하기 그지없는 그의 음성에 철방은 당장이라도 외치고 싶었다. 늦었다고, 너무나 늦었다고! 그러나 곧 이어진 그의 말은 철방으로 하여금 무의미한 외침 보다 더욱 나은 방법을 제시해주었다. "죽여라." 비록 몸은 전투불능에 가깝게 망가졌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음의 위기를 넘겼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무심한 방관자로 남아있기에 여전히 오만한 지배자인 그의 명령에 철방은 걱정을 잊었다. 후회를 잊었다. 서서히 몸을 돌린 그의 눈에 남아있는 것은, 오직 차갑게 불타오르는 귀화와 광폭한 살기뿐이었다. ====================================== 블맆님의 그림으로 한 편 업합니다.[중요한 건 정성]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20 12:52:21 고친날 2005-08-14 00:39:51 읽은수 10486 [ 12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3.생사위급(生死危急).(4)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어디서 이런 괴물이...' 점혈로 귀를 지혈한 천살은 철방의 넘실거리는 살기를 받으며 전신의 피가 서늘하게 식어버리는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 나타났는지, 어떻게 그의 비수를 되던져버린 것인지 보지 못했다. 설사 사신오왕이나 무영투괴라고 해도 이렇게 완벽하게 그의 눈을 속이지는 못할 터인데, 철방은 그것을 해냈다. 자객으로서의 본능이 이자는 위험하다는 것을 경고한다. 양손에 비수를 쥐고 강기를 끌어올린다. 검을 칼집에 꽂아 넣은 채 손에 힘을 뺀다. 사슬낫을 빙글빙글 돌리며 몇 개의 뚜렷한 잔영을 만들어낸다. 철방의 만리신각(萬里神脚)이 땅을 박찬 순간, 하나의 비수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하나의 검이 섬광처럼 뻗어 나와 가슴에 박혀들었다. 수십 개로 불어난 사슬낫이 사방에서 휘둘러져왔다. 비수가 어깨를 꿰뚫어도 상관하지 않는다. 오공신갑(蜈蚣神甲)을 부풀려 외피 안쪽의 용린갑(龍鱗甲)에 가로막힌 검을 튕겨내고, 천리안(千里眼)과 천리이(千里耳)로 수많은 사슬낫 중 진짜를 정확히 찾아 지주백모(蜘蛛白毛)가 일어난 손으로 잡아챈다. 살귀객이 사슬낫을 놓고 다른 사슬낫을 꺼내든다. 빼앗은 사슬낫을 크게 휘둘러 살검객을 물리치고 천살에게 내던져 피하게 만든다. 두 번째 비수가 날아든다. 여덟 개의 혈랑조(血狼爪)를 교차해 앞을 막자, 그 위로 비수의 강기가 폭발한다. 콰광!! 혈랑조가 부러질 듯 떨리며 뼛속까지 저릿저릿한 타격이 느껴진다. 약간 금이 가긴 했어도 부러지지 않는다. 강기를 견뎌낸다. 그러나 부족하다. 더 많은 힘이 필요하다. [인체에는 소우주가 담겨져 있으니 몸을 단련함은 소우주를 더 크게 담음이오, 소우주의 힘을 담음이다. 소우주는 무한하니 그 어떠한 외기에도 파괴되지 않으며...] 두뇌가 백호지(白狐智)에 의해 활발하게 움직이며 동피철혈기공과 반탄기공의 구결이 스쳐지나간다. 십이신력(十二神力)에 충만한 귀기의 순환에 전신의 기맥이 확장되며 자연스럽게 신체의 내외를 드나들던 음기가 장마철의 강물처럼 급격히 불어난다. 음기의 물결에 닿은 상처가 서서히 아물어들고 금이 갔던 혈랑조가 다시 매끈하게 붙는다. 전신에 충만한 음기의 흐름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동피철혈기공(銅皮鐵血氣功)의 12대성과 반탄기공(反彈氣功)의 10극성에 이르렀다. 전신의 기맥이 열림으로써 외부에서 들어온 음기가 끊임없이 흘러 외기순환(外氣循環)을 이루며 기공(氣功)의 완성이 확실하게 느껴진다. 허무공(虛無功)에 의해 더욱 가벼워진 몸이 쾌검을 피하고 비호공(飛虎功)을 끌어올려 맹수보다 더욱 맹수와 같은 움직임으로 살검객의 어깨를 붙잡아 웅왕근(熊王筋)의 막대한 신력으로 으스러트린다. 손으로부터 발동된 흡혈신공(吸血神功)에 의해 급속히 피가 빨려짐과 동시에 중독(中毒)된 살검객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진다. 팔을 노리고 또 한 자루의 비수가, 등을 향해 하나의 사슬낫이 날아들자, 어깨에서 손을 때로 혈랑조를 마주 휘두른다. 콰앙! 다시금 터져 나온 폭음. 그러나 이번엔 금조차 가지 않는다. 진동 또한 혈랑조에서 머물다사 허공으로 분산되어간다. 무형의 경력이 맺혀있던 사슬낫은 음기가 충만한 오공신갑을 뚫지 못하고 헛되이 지주백모 위로 미끄러진다. "강기일식( 氣一息)!!" 살귀객의 경악성이 터져 나온다. 검기 수준의 경력이 그대로 미끄러지니 강기일식으로 착각한 것인가? 비록 오공신갑에 기공의 음기를 실은 것에 불과하지만, 호신강기와 버금간다는 초절정의 외공경지 강기일식과 같은 위력임은 분명하다. 강해진 힘이, 강해진 능력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진다. 한 팔을 내뻗으며 손을 뒤로 꺾자 안쪽 손목에서 무언가가 촤르르륵 튀어나와 살귀객을 향해 쏘아져간다. 은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면서도 붉은 혈광이 은은히 번뜩이는 칼날의 채찍에 살귀객의 사슬낫이 얽혀든다 싶었을 때, 수많은 용린비(龍鱗匕)가 이어져있는 용린편(龍鱗鞭)의 끝에서 쏘아져나간 하나의 용린비가 살귀객의 허리를 꿰뚫는다. "놈들부터 죽여라!!!" 철방의 앞을 가로막은 천살의 다급한 음성에 자객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기일식의 외가고수에게는 검기라 할지라도 상처하나 낼 수 없고, 오직 강기밖에 통하지 않기에 초절정고수인 천살만이 상대할 수 있다. 때문에 살검객과 살귀객은 철방을 상대하는 것을 포기하고 수하들과 함께 그를 비롯해 천무와 두 소년, 여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비록 부상을 입은 상태이기는 하지만, 이미 전투력을 상실한 그와 일행을 참살하기에는 충분한 능력을 지닌 십대자객이었다. "이놈들이 감히...!!" 철방은 두 눈에 푸르른 귀화를 불태우며 그들을 붙잡으려 했지만, 천살은 그것을 용납치 않고 세 개의 비수를 쏟아냈다. 콰과광! 평범하게 날아온 하나의 비수와 허공에서 갑자기 각도가 비틀어져 날아든 비수는 혈랑조에 의해 강기가 흩어지며 폭발을 일으켰지만, 느릿느릿하게 쏘아졌다가 갑자기 섬광과 같이 날아든 비수는 정확히 철방의 복부에 박혀들었다. 체내에서 강기가 흩어지며 그 충격에 복부로부터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오자, 천살을 무시하고 대형을 구하려 했다가는 강기에 난도질돼버린다는 것을 깨달은 철방은 이를 악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대형을 구하러가야 하는데, 구하러 갈 수가 없다. 다시 한번 아까 전과 같은 기적이 일어나면 좋겠지만, 백호지로 연달아 뇌를 자극하면 그대로 터져 곤죽이 돼버리기에 그럴 수 없다. "크으으...뒈져버려라!!!" 결국 최대한 빨리 장해물을 처리하고 대형을 구하기로 결심한 철방은 광폭한 기세로 천살에게 달려들었지만, 유령과 같은 신법으로 철방을 피하며 최대한 시간을 끄는데 전념하는 천살을 처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오는군.' 그가 재차 찾아온 절대절명의 위기에도 여전히 무심한 태도로 관통된 어깨의 저릿한 통증을 무시하며 사신의 낫을 거꾸로 움켜쥐자, 어깨로부터 흘러내린 핏물이 팔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며 은빛의 날을 붉게 물들였다. 앞장서서 달려들던 몇 명의 자객이 주변에 뿌려둔 독에 의해 쓰러졌지만, 그럼에도 자객들은 멈추지 않고 계속 그들을 향해 달려들며 암기를 쏟아냈다. 그의 그림자에서 솟아난 대영귀가 마지막 힘을 짜내 암기들을 모조리 휩쓸어버리자,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앞으로 튀어나온 두 십대자객의 검과 사슬낫이 대영귀의 몸을 갈가리 찢었다. 파바바바밧!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대영귀가 산산이 흩어져 버린 순간, 그의 손에 쥐어져있던 사신의 낫이 반원을 그리며 남은 귀기를 바닥까지 긁어 담아낸 수많은 뼛조각이 쏟아져나갔다. 살검객과 살귀객은 모두 피하기 힘들 정도로 많기는 해도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은 뼛조각을 대충 비켜내며 그의 목을 노렸다. 그만 죽으면, 이제 핵심목표인 천무를 보호해줄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도 남지 않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검과 사슬낫을 그의 몸에 박아 넣기도 전에 무너져내려야 했다. 몸을 보호하고 있던 진기를 녹이고 들어온 뼛조각이 혈관에 살짝 박히며 전신의 피가 비명을 내질렀다. 뼛조각으로부터 스며들어온 피의 악마는 그들의 피를 먹이로 삼아 꾸역꾸역 몸을 불리고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전신의 피가 모조리 피의 악마에게 잠식되는데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였고, 먹이감이 사라진 피의 악마는 거세게 요동치며 그들의 혈관을 녹이기 시작했다. 땅에 쓰러진 채 전신의 혈관이 녹아드는 통증에 부들부들 몸을 떠는 살검객의 등 뒤로 하나의 손이 박혀 들어왔다. 살을 가르고 뼈를 가르며 독으로 물든 살검객의 심장을 끄집어낸 그는 그것을 천천히 씹어 삼킨 뒤, 살귀객의 심장까지 뜯어내 먹었다. 십대자객 중 두 명의 심장이 순식간에 씹어 삼켜지는 것을 본 자객들은 돌처럼 굳어버렸다. 천살은 경악을 숨기지 못하고 두 눈을 부릅떴고, 철방은 마귀와도 같이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대형의 양식이 된 것을 영광으로 여겨라, 크하하하핫!!" "이, 이...죽여버리겠다!!!" 살각의 핵심고수 두 명이 너무나 어처구니없이 당한 것에 노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천살은 철방이 미처 제지할 틈도 없이 그와 천무를 향해 다섯 개의 비수를 내던졌다. 비록 강기를 담지는 못했지만, 하나같이 무형의 경력이 맺혀있기에 충분한 살상력을 지닌 비수들이었다. 철방은 다급히 용린편을 내뻗고 용린비를 쏘아내 가까스로 천살의 비수 세 개를 튕겨냈지만, 두 개의 비수는 놓쳐버리고야 말았다. "대형!!" 철방의 경악성이 터져 나왔지만, 무공을 모르는 천무나 이미 심각한 부상을 입은 데다가 식심(食心)의 금법(禁法)을 사용해 두 심장에서 얻은 막대한 기운을 정제 중이던 그로서는 비수를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카강! 어디선가 1척 길이의 단죽(短竹)이 날아와 두 비수를 튕겨내고는 빙그르르 회전하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이 갑작스러운 이변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쏠리는 가운데, 한 노인이 허공으로부터 날아와 곰방대를 잡아채고 땅에 내려선 뒤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늙은 허리 부러지게 달려온 덕분에 겨우 안 늦었네 그려." 과연 방금 전 그 신기에 가까운 운신을 보여준 이와 동일인물이 맞는 지, 허리를 토닥토닥 두드린 허름한 외양의 노인은 슬쩍 일행을 바라보았다. "아우, 설마 이 형님이 늦은 건 아니겠지?" "천만에 말씀입니다." "껄껄, 그럼 그렇지. 내가 늦을 리가 있나. 하지만 다음부터는 좀 느긋하게 좀 불러라. 아무리 나라도 중원을 횡단하다시피 달려오니 허리가 빠지겠구나." "바삐 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천무와 노인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로 그가 그들을 도와줄 조력자라는 것을 느낀 두 소년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고, 그 반대로 얼굴을 일그러트린 천살은 노성을 내질렀다. "감히 살각의 행사를 방해할 셈이냐?!" "허어, 이놈 보게나." 천살의 노성에 미간을 살짝 찌푸린 노인이 곰방대를 입에 물자, 곰방대에서 짙은 연기가 한 차례 솟아났다. 그 연기가 흩어졌을 때, 그 자리에는 어느새 천(天)자가 새겨진 복면인이 천살을 마주 노려보고 있었다. "감히 본인의 아우를 해할 셈이냐?!" 오직 손에 들려있는 곰방대를 제외하고는 복장과 음성은 물론이고 체격까지 천살과 똑같게 변한 그의 모습에 천살을 비롯한 자객들은 극도의 경악으로 인해 안색이 싹 변해버렸다. "환술(幻術)! 설마 귀하는...!" "투괴(偸怪)! 맞다, 이놈아!" 투괴라는 말까지만 해도 천살의 모습을 하고 있던 노인이 순식간에 본래 모습으로 돌아와 말을 끝맺었다 싶을 때, 그 자리에는 있는 것은 주름하나 없이 팽팽한 안면과 윤기 나는 흑발을 지닌 젊은 청년이었다. 그제 서야 그의 정체를 알게 된 금호와 남국의 입이 따악 벌어졌다. 천하삼십육세의 보고를 털고 그것을 다른 천하삼십육세에 팔아 자신들도 모르게 서로의 절기를 교환하게 해버린 도둑놈! 하나의 보물을 삼황오제에게 팔아먹은 뒤, 바로 다음날 훔쳐버리는 것을 여덟 번 반복해 삼황오제를 모조리 엿먹여버린 사기꾼! 사신오왕과 경공을 겨뤄 모조리 승리한 경공가! 십보(十步)만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백 번의 역용을 펼쳐 팔정협칠사마조차 얼빠지게 만들어버린, 그 누구도 진면목을 보지 못했다는 환술사! 무림삼괴 중에서도 가장 괴짜이자 괴인이라 불리는 무영투괴(無影偸怪)가 부귀한 미공자의 모습으로 곰방대 대신 하나의 섭선을 부치며 그들 앞에 버티고 서있었다. "귀, 귀하가 어찌 본각의 행사에 나서는 것이오?" 비록 같은 초절정의 경지라 하나, 살각의 각주인 무정살왕(無情殺王)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무림십이성좌(武林十二聖座) 중 한 명을 경시할 수는 없었기에 천살은 말을 높였다. 그것을 매우 당연하게 받아들인 명문세가의 미공자는 근엄한 표정으로 외쳤다. "살각은 어찌 본 공자의 의제를 해하려 하는가?" 그제 서야 천무와 투괴 사이에서 오간 대화를 기억해낸 천살은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천지문의 후계자와 무영투괴가 의형제였을지 그 누가 알았겠는가? 이거야말로 천하의 모든 정보를 판다는 천이각(天耳閣)이라도 들으면 놀라 자빠질 일이다. 문제는 지금 그가 처한 상황이다. 십대자객 중 둘을 비롯한 수많은 자객들을 희생해가며 겨우 목표를 궁지로 밀어 붙였더니만, 마치 기다렸다는 듯 무영투괴가 나타나다니! 마음 같아서야 이거고 저거고 가릴 것도 없이 모조리 죽여버리고 싶지만, 흑의괴인의 앞을 가로막고있는 강기일식의 고수와 무영투괴를 동시에 상대했다가는 남은 자객들이 모조리 전멸하더라도 청부대상을 죽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본 공자의 의제를 해하려했으니, 그대들은 이제 곧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무영투괴의 자신감 넘치는 음성에 천살은 흠칫 몸을 떨었다. 아무리 무영투괴라도 이 많은 자객들을 상대로 저렇게 자신감을 드러낸다면, 무언가가 있다. '설마, 철궁곡이?' 무영투괴가 왔다면 하루 이틀 거리에 있는 철궁곡의 궁사들도 곧 올지 모른다. 미리 은신하고 있다가 암습하면 모를까, 눈에 훤히 드러난 상태에서 철궁곡을 상대하는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다. 어쩌면 단지 허세일지도 모르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득보다 실이 큰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오늘 일은...각주께 반드시 아뢰겠소!" "안부나 잘 전하게." 천살이 결국 이를 악물며 자객들과 함께 물러나자, 그를 비롯한 금호와 남국의 상태가 결코 가볍지 않았던 만큼 철방과 무영투괴는 굳이 그들을 뒤쫓지 않았다. 잠시 동안 섭선을 부치며 자객들이 물러나는 모습을 지쳐보던 무영투괴는 마침내 그들이 모두 사라지자 다시 곰방대를 든 노인의 모습으로 돌아오며 가볍게 혀를 찼다. "쯧쯧...살각도 한물 갔군. 대체 어떤 멍청이가 도둑놈 말을 믿나." 그 도둑놈이 해서는 안 될 말을 태연하게 중얼거리는 무영투괴를 보고 과연 괴짜 중 괴짜답다는 생각을 떠올린 금호는 순간 팔의 절단부가 화끈거리며 긴장감으로 붙잡고 있던 의식이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친우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비틀거리는 모습, 천형이 친우를 부축해주는 모습, 어깨를 잡아주는 큼지막한 손, 핏빛 구슬을 든 사부의 손이 온통 뒤섞여 보이는 가운데 금호는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 철방이 어째서 자신을 죽였다 살린 파타시를 대형으로 모시며 충성하느냐...하면 그 성격으로 칠 수 있습니다. 힘을 준다면 악마와도 계약하겠다는 것지 철방의 성격이고, 그렇기에 파멸할 줄 알면서도 천뇌문주와 거래를 하기도 했지요. 뭐, 더 따지고 드신다면...소설 특유의 사기성이라고 밖에는 해드릴 말씀이 없군요. ------------------------------------- 셜이움님의 그림으로 한편 올립니다. *이번 이벤트는 이번주 일요일 자정을 기점으로 폭파됩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20 14:20:47 고친날 2005-06-20 14:20:47 읽은수 10866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4.사신귀산(死神歸山).(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금호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넓은 천장이었다. '참 무진장 많이도 기절하네.' 가장 먼저 떠오른 실없는 생각을 지워버린 금호는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사부를 뒤쫓던 도중 낙오된 것. 팔이 잘리고 죽었구나 싶었을 때 철방이 돌아오고 사부가 나타난 것. 자객들이 물러난 뒤, 정신을 잃은 것이 하나둘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럼, 철궁곡이겠구나.' 대충 결론을 내린 금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특별히 아픈 곳도 없는 것이, 일단은 살아난 듯 싶었다. '그나저나 팔병신까지 됐으니 어쩐다.' 그렇지 않아도 절름발이인지라 무공에는 손도 대지 못하고 주술에만 파고들던 처지의 금호에게 한 팔의 영향은 적지 않았다. 주술의 삼대요소의 중요도가 주문, 수인, 촉매 순서이긴 하지만, 한 손으로 펼치는 수인과 두 손으로 펼치는 수인은 그 차이가 매우 크다. 그야말로 목발을 짚고 산길을 달려야 하는 셈인 것이다. '뭐, 어쩌겠어. 그만큼 죽도록 노력해야지.' 금호는 오른손으로 이마를 쓸며 선천적으로 성대가 상해 말을 할 수 없는 남국을 떠올렸다. 주문 자체를 외울 수 없음에도 꿋꿋하게 주술을 습득해온 친구에 비하면 그의 상태를 별 것 아닐지도 몰랐다. "좋아, 지금부터 당장 수련이다." 왼손으로 침상을 짚고 몸을 일으킨 금호는 침상에 걸터앉아 수인을 연습했다. 자연스럽게 손이 교차하고 손가락이 얽혀들었다 나눠짐을 반복하며 수인을 맺는 것이, 양손이 있을 때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뭐야, 별로 어렵지도..." 피식 실소를 흘렸던 금호의 얼굴이 한 순간 기이하게 변했다. '어라? 어느 팔을 잘렸더라?' 왼팔에 있는 것은 왼손이요, 오른팔에 있는 것은 오른손이다. 뭔가 상당한 혼동이 오는 가운데 금호는 겨우겨우 기억을 더듬어 오른팔의 위쪽을 더듬어봤지만, 잘려있기는커녕 상처하나 없는 피부는 금호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왼팔까지 짚어봤지만, 좌우 어느 쪽도 이상은 없었다. "이상하다...이럴 리가 없는데." 침상에서 내려선 금호는 턱을 괴고 방 안을 왔다갔다하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혹시 머리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아무리 되짚어봐도 기억이 끊기거나 뒤틀어진 부분은 찾을 수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투덜거리듯 방 한가운데 놓여진 탁자를 살짝 찼던 금호의 눈이 순간 자신의 발에 고정됐다. "어라?" 다시 한 번 탁자를 차보고 바닥에 발을 탕탕 굴러봤다. 무릎을 굽혔다 피며 제자리에서 콩콩 뛰어보고, 방안을 빙글빙글 달려보기도 했다. 조금 익숙하지 않았지만, 두 다리가 분명 반듯하게 펴져 있었다. "뭐야, 이거...꿈인가?" 분명 잘라졌던 팔이 다시 붙고 불구였던 다리가 정상이 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꿈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 상황에 금호는 제자리에서 망연자실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닫혀있던 문이 열리며 한 소녀가 죽 그릇을 들고 들어오다가 금호와 두 눈이 딱 마주쳤다. '우와...끝내주게 예쁘다.' 백설과 같이 뽀얀 피부에 흑진주와 같이 맑게 반짝이는 눈동자, 미려한 곡선을 그리는 눈썹과 뚜렷한 오관을 지닌 소녀는 청순함이 돋보이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잠시 멍하니 금호를 마주보던 소녀는 곧 환한 미소를 지었는데, 더욱 밝아진 소녀의 얼굴에 금호는 재차 감탄해야만 했다. '조금만 더 크면 남자 꽤나 울리겠는데?' 안으로 걸어 들어온 소녀는 탁자 위에 죽 그릇을 내려놓은 뒤 갑자기 금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소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금호는 놀라며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소녀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소년의 몸을 굳어버리게 만들었다. 너무나 익숙한 온기에, 너무나 익숙한 감촉. 그리고 절대 잊을 수 없는 저 눈빛은 한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남...국아?"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하는 친우를 보며 금호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화상으로 인해 얼굴을 붕대로 가리고 다니긴 했지만, 금호의 기억에 따르면 화상을 입기 전에도 남국의 인상은 꽤나 평범했다. 기생오라비 수준을 넘어 소녀로 착각할 정도의 외모가 결단코 아니었던 것이다. "너, 너 어떻게 된 거야?" 금호가 어안이 벙벙해져서 묻자, 남국은 가볍게 웃으며 차분히 그 뒤에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었다. 비록 말은 아니었지만, 손동작과 눈빛만 하더라도 금호가 그 설명을 알아듣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사부님이 치료해주셨다고? 상처도, 불구도, 화상도 모조리?" 남국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금호가 의식을 잃은 뒤, 사부는 기이한 주술로 그들을 치료해준 뒤 스스로의 몸까지 회복시켰다. 주술을 넘어 마치 기적과 같은 그 능력은 그들의 사부가 어째서 생사판관(生死判官)이라 불리는지 확실하게 알려주는 듯 싶었다. 사부가 무심히 해준 말에 따르면, 귀기가 생기를 자극해 생명력을 이끌어내며 마력까지 같이 활발하게 활동해버린 것이 얼굴이 변한 이유였다. 워낙 순수한 마력이기에 그만큼 원래 주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는 하는데, 그게 정확히 무슨 소리인지는 몰라도 참으로 어처구니없게 된 상황임은 명백했다. "이거 참...뭐, 그래도 덕분에 살았고 화상도 나았으니까 일단은 다행으로 생각하자. 잘...생기기보다는 예뻐졌지만, 그래도 전보다 낫잖아?"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해주는 친우를 보며 남국은 상당히 복잡하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차마 그것을 표현하지는 못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때, 남국이 들어오며 닫아놨던 문이 다시 열리며 한 청년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정신이 드셨습니까?" "아, 천...응?" 한 자루의 섭선을 손에 들고 다가오는 천무에게 무심코 인사를 하려던 금호는 갑자기 남국이 소매를 잡아당기자 의아한 표정으로 소년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남국의 손짓을 통해 무언가를 알아들은 금호는 입을 따악 벌리고 천무를 다시 돌아보았다. "...노야?" "극소수만이 아는 비밀이지요." 온유한 미소를 짓는 천무를 보며 금호는 뜨악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이 천무의 실체가 바로 무영투괴라니? 이미 천살이나 명문세가의 공자로 변하는 것을 본적은 있지만, 평소의 모습과 전혀 다름없는 지금의 천무가 그의 둔갑이라니 아무리 친우의 말이라도 믿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천무의 손에 들려져있던 섭선이 한 순간 곰방대로 변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자, 믿기 힘들어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왜, 왜 그런 모습을 하고 계신 거예요?" "그야 제가 암살이라도 당하면 곤란하니 말입니다." 금호는 완벽하게 천무 다운 행동, 태도, 음성, 말버릇이 담긴 대답을 듣고 내심 혀를 내둘렀다. 몇 개월간이나 알고 지낸 금호로서도 도무지 구별이 가지 않는다. 섣불리 천무를 암살하러 들어온 자객은 오히려 이 천무의 탈을 쓴 무영투괴에 의해 꼼짝없이 잡히게 될 것이 십중팔구 확실했다. "그럼 진짜 천형은요?" "은공과 철대협, 이 두 분과 함께 날아갔습니다." "예?" 웬 엉뚱한 소린가 싶어 어벙한 표정을 지었던 소년은 친우의 끄덕여지는 고개에 아예 할 말을 잃었다. '정말 날아갔나 보네.' 어쩌겠는가, 날아갔다면 날아간 것이겠지. 사부라면 날아가는 것 정도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어디로 날아가셨는데요?" "호악산이라더군요." 호악산이라면 철방이 왕년에 제법 놀았다고 늘 자랑하던 곳이자, 이제는 귀산이 돼서 언젠가 한 번 들를 거라고 사부가 지나가듯 말한 적 있는 장소였다. 문제는 천무까지 데리고 간 그곳에 어째서 그들을 데리고 가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은공께서는 이곳에서 기다리며 주술과 무공을 수련하라 하시더군요." 그가 품속에서 꺼내든 서책을 본 금호의 눈에 살짝 놀람이 드러났다. [칠뢰도(七雷刀)], [육천권(六天拳)], [귀영각(鬼影脚)], [비류구도(飛流九刀)]은 만물각에서 구입한 것이니 만큼 놀랍지 않았지만, [사령술서(死靈術書)]라는 서책은 진정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급부터 상급까지의 다양한 주술이 한자로 빼곡하게 적혀있는 주술서(呪術書)였는데, 아무리 봐도 하루 이틀만에 대강 써낼 수 있을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 무심하기 그지없는 사부가 오래 전부터 이것을 써왔다는 것은 믿기 힘들었지만, 그 이면에는 어느새 묘한 납득이 자리잡고 있었다. -힘을 원한다면, 주겠다.- 비록 도구이고 언제나 버릴 수 있는 패일 망정, 사부는 계약의 조건만큼은 확실히 지키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다시 사신의 그림자로 돌아왔고, 다시 버려지더라도 사신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제가 가능한 도움을 드릴 테니, 모르는 게 있다면 얼마든지 물어보십시오." 비록 천무의 탈을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초절정고수이자 천하제일의 환술사인 무영투괴라면 무공으로나 주술로나 매우 큰 조력자가 돼줄 터였다.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노...아니, 천형!"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금호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만면에 미소를 띄우자, 그는 잠시 소년을 마주보다가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그 얼굴로는 남들 앞에서 함부로 웃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 얼굴이라뇨?" 의아한 표정의 금호에게 그는 아무 말 없이 섭선을 동경(銅鏡)으로 변화시켜 내밀었고, 남국은 살짝 고개를 돌려 친우를 외면했다. 잠시 후, 철궁곡의 한 객실에서 터져나온 누군가의 뜨악한 경악성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내, 내 얼굴이 이게 뭐야아아--?!" 마력의 영향을 받은 것은, 남국 혼자만이 아니었다. ================================ 어떻게 변했으려나? 금호:"다, 다, 당신! 당신이 그래놓고도 그런 말이 나와?!" 따지려면 베리알에게 따지든지, 사부에게 따지든지. 금호:"당장 돌려놔! 당장!!" 응? 다시 팔 자르고 다리 분질러 달라고? 금호:"...이 악마..."[털썩] -------------------------------- 전 장이 너무 무거웠던 관계로 이번 장은 조금 가볍게 나갑니다. -------------------------------- hagall님의 그림으로 한편 올립니다. 많은 리플과 감상 바랍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20 19:46:46 고친날 2005-06-20 19:46:46 읽은수 10100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4.사신귀산(死神歸山).(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또 한 명이 죽었다. 그러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이제 이곳에서 죽음이란 일상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약자는 죽고 강자만이 살아난다. 철저한 약육강식의 논리가 이곳을 지배한다. 만약 훈련과정을 거치며 감각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하지 않았다면 약자를 벗어나기 힘들었을 터이다. "한 명이 줄었네." 슬프거나 걱정스럽다기보다는 담담한 음성. 지금까지 죽은 숫자를 계산하는 소리다. "생존율 32%라...아직 부족해. 20%이하까지는 떨어져야하는데." 생존율 32%. 이제 살아남은 이는 서른 두 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20%까지는 아직 적지 않은 수가 남아있다. "오늘은 나가지 마. 보복이 있을 가능성이 높거든." 보복이라면 어제 죽인 한 명에 대한 것. 서른 두 명의 생존자 중 약 30%가 모여있는 파벌의 공격이라면 쉽게 여길 수 없다. "일단 계획은 짜뒀으니까, 계획대로 행동하면 돼." 특별히 자만하는 것이 아닌, 분명한 자신감이다. 그 자신감을 인정한다. 단지 8명을 처리했을 때, 단지 계획만으로 세 파벌을 충돌시켜 31명을 몰살시킨 그 계획을 인정한다. "그럼 오늘도 공부나 좀 해둘까?" 그가 책장으로 가서 책을 훑는다.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공부는 이제 책장의 책을 모두 독파한지 오래다. 권유에 의해 책에 나와있는 것뿐만이 아니라 여라 국가와 몇몇 이종족의 다양한 언어와 문자를 비롯해 여러 가지 지식을 습득했다. 그것을 가르쳐준 것도 그. 그의 지식은 노예가 되기 전에 현자지망생(賢者志望生)이었으리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방대하다. "아, 그러고 보니 재미있는 게 있는데. 한 번 볼래?" 특별히 보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으니 고개를 끄덕인다. 상당히 안쪽까지 들어간 그가 상당히 많은 것들 들고 와 탁자 위에 내려놓는다. "우연히 찾아낸 거야. 상당히 오랫동안 방치돼 있었던 거 같은데, 아무래도 조금 특이한 면이 있는 거 같아." 그가 물품 중 하나를 들어올린다. 넓고 큰 천. 아마도 로브(robe)의 일종인 듯 싶은 옷이다. 이미 대략이나마 정돈을 해둔 듯 먼지가 묵은 냄새가 느껴지지는 않는다. 대신 무언가 정확히 할 수 없는 기묘한 느낌이 전해져온다. "일단 한 번 입어봐." 어쌔신(assassin)에게 어울리는 복장은 아니지만, 기묘한 느낌과 그의 권유에 로브를 걸친다. 마치 몸이 깊은 물 속에 잠겨드는 듯한 느낌과 함께 전신의 감각이 더욱 민감하게 확장된다. 이것은, 분명 평범한 로브가 아니다. "여기 이것도 있어." 그가 내미는 스테프(staff)를 받아든다. 마치 스테프가 스스로 손에 달라붙는 듯한 느낌과 함께 그 한쪽 끝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튀어나온다. 튀어나온 것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져있는 길면서도 얇은 낫. 사이더(scythe)다. "흐음...검은 로브에 검은 사이더까지 들고 있으니 제법 그림이 되는데? 데스 사이더(death scythe)와 다크니스 로브(darkness robe) 정도로 명명해볼까?" 가볍게 지은 것 같지만, 이 물품들이 지니고 있는 기묘한 느낌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마치 원래부터 그런 이름을 지니고 만들어진 느낌. "아, 그리고 이 책은 나도 못 읽겠던데...너는 어때?" 그가 읽지 못하는 것을 읽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 책에서 더욱 짙게 느껴지는 무언가에 서서히 탁자에 놓여진 책에 손을 가져다댄다. 손끝에 느껴지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재질의 표지, 그 위로 미미하게 느껴지는 기이한 문자. "검은..." 손이 표지를 서서히 훑음과 함께 입이 저절로 열리며 말을 흘린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다. 이런 문자를 배운 적은 없지만, 지식 이전의 본질적인 무언가가 그것을 알려주고 있다. "...맹약의..." 손이 점점 책으로 빠져드는 듯한 기이한 감각. 마치 사슬에서 풀려난 맹수나, 빛으로부터 해방된 어둠과 같이 책으로부터 뭉클뭉클 솟아나는 기이한 기운. "...서." 칠흑과도 같은 어둠이 덮쳐왔다. "괜찮으십니까?" 그는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바로 옆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천무의 질문을 받았다. 의도를 파악할 수 없는 물음이다. "무엇이 말이지?" "그야 은공의 몸 상태를 묻는 것이지요." "이상은 없다." 무심히 답한 그는 감각으로 주변을 살폈다. 철방이 흥얼거리며 멧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구워버리고 있는 걸 보면, 대략 묘시쯤일 것이다. '너무 오래 잤군.' 대략 세 시진에 가깝게 수면을 취했다. 평소에 비해 한두 시진이나 더 잔 셈인데, 아마도 꿈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살짝 고개를 저어 꿈을 떨쳐버린 그에게 철방은 히죽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잘 주무셨습니까!" 우렁차다 못해 주변의 나무가 부르르 흔들리는 듯한 인사에 그는 무심히 입을 열었다. "시끄럽다." "...죄송합니다." 딱히 질책한다고 하기보다는 단지 시끄럽다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지만, 찔끔한 철방은 알아서 소리를 죽였다. "유령마는." 철궁곡에서 받은 말 세 마리를 철방이 도살해 만든 유령마(幽靈馬) 팬텀 스티드(phantom steed)가 느껴지지 않았다. "저쪽에 잘 있습니다. 사냥한 토끼를 던져줬으니 아마 팔팔 날겁니다." 철방은 고함으로 받은 질책 아닌 질책을 만회해보기 위해 자신 있게 답하자, 그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여 철방을 실망시킨 뒤 천무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이미 익숙해진 천무가 알아서 벽곡단을 내미는 것을 본 철방의 두 눈에 크게 뜨여졌다. "대형, 제가 음식을 준비해놨습니다." 전직 숙수인 남국을 제자로 받아들인 뒤부터 모든 식사는 남국이 해왔지만, 철방은 그래도 혹시나 대형을 모시는데 부족함이 없게 하기 위해 남국에게 직접 요리를 배워뒀다. 비록 통구이 하나뿐이기는 해도, 그 맛만큼은 남국도 나쁘지 않다고 인정할 정도였기에 나름대로 자신감을 가지고 음식을 준비한 것이다. 철방의 말을 들은 그는 멧돼지통구이를 향해 잠시 고개를 향했다가, 아무 말 없이 벽곡단을 삼키고는 유령마가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말이 없더라도 누구나 뜻을 알아들을 수 있는 그의 태도에 철방은 어벙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맛좋고 푸짐한 통구이인데, 대체 어째서 통구이 대신 벽곡단을 먹는 것인지 철방으로서는 도무지 이해되지가 않았다. 마찬가지로 벽곡단으로 식사를 대신한 천무는 그의 뒤를 따라 철방의 곁을 스쳐지나가며 넌지시 그 이유를 알려주었다. "아무리 맛있는 요리라도 계속 먹으면, 보통은 질리기 마련이지요. 특히 기름진 통구이 같은 요리라면 말입니다." "그, 그런...!" 그제 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철방은 입을 뻐끔거렸다. 생각해 보니 어제 아침은 참새구이고, 점심은 토끼구이고, 저녁은 노루구이다. 비호공(飛虎功)으로 인해 맹수 이상의 야성적인 감각과 움직임을 지닌 철방에게 사냥은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것을 모조리 통구이 해버린 것이 문제였다. "그래도, 맛은...벽곡단 보다는 맛있는데..." 애써 변명하듯 뭐라고 말을 해봤지만, 이미 천무는 그를 따라 저쪽으로 간 뒤였기에 철방의 말은 혼잣말로 묻혀졌다. 황량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허망하게 주변을 둘러보던 철방은 문뜩 아무도 손대는 이 없이 홀로 남겨진 멧돼지구이가 누군가의 신세와 겹쳐지는 것을 느꼈다. "썅..."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자기 혼자서라도 모조리 먹어 치우겠다고 결심한 철방은 신경질적으로 멧돼지구이를 통째로 짊어지고 그와 천무를 쫓아가 유령마의 등에 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철방의 무게에 멧돼지의 무게까지 더해지자 유령마조차 비틀거리는 기색을 보였지만, 철방은 그러한 비틀거림을 무시하며 통구이를 뼈 채로 으적으적 씹어먹었다. 그를 선두로 유령마가 허공을 박차며 달려들 때에도 철방은 식사를 멈추지 않았고, 덕분에 철방의 유령마는 계속 비틀거리며 겨우겨우 다른 유령마의 꽁무니를 뒤쫓아가야 했다. 마침내 철방의 두 손에 뼛조각 하나 남지 않게 됐을 때쯤, 그들은 뿌연 안개가 짙게 깔린 하나의 산 위에 도착했다. 금방이라면 금방이고, 오랜만이라면 오랜만인 호악산(虎嶽山)으로의 귀산(歸山)이었다. ================================ 먹을 복 하난 터졌네. 철방:"...좀 닥쳐라. 응?" 왜? 맛있다며? 철방:"...뒈져버려라!!" 자, 잠깐. 그 용린편(龍鱗鞭)은 치우고...[촤좌좍!] -------------------------------- 단노님의 그림으로 한편 올립니다. -변경-이번 이벤트는 이번주 화요일 자정에 폭파됩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20 19:47:26 고친날 2005-06-20 19:47:26 읽은수 10711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4.사신귀산(死神歸山).(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거 참...몇 달만에 아주 싹 변했네." 배를 쓰다듬으며 유령마에서 내린 철방은 명색이 호악채주였던 만큼 당장이라도 유령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호악채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호악채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어 놓은 것이 바로 대형인 것을...그나마 관이나 누군가 나서 치워놓은 듯, 시체가 없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그래도 은신처로 삼기에는 좋을 듯 싶군요." 짙은 안개로 둘러 쌓인 호악산을 천천히 둘러본 천무는 긍정적인 입장을 표했다. 호악한은 흉폭한 산적들이 날뛰다가 결국 희생당한 행인들의 귀신에 의해 하루아침에 산적들이 몰살당한 뒤 귀산이 되어버렸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아무리 살각이라도 철궁곡에 있는 그의 역용을 알아채고 호악산에 있는 천무를 찾아내지는 못할 것이다. "두 녀석을 데려왔어야 하는데..." "금소협과 남소협은 형님께서 잘 봐주실 테니 걱정 마십시오." 청소와 밥짓기 등등을 떠올렸던 철방은 천무의 말에 뜨끔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금호와 남국을 굳이 남겨두고 온 이유는 무학 때문이다. 주술에 있어 그는 충분히 뛰어난 사부지만, 무공에 있어서 만큼은 전혀 아니었다. 때문에 절정무공을 제대로 가르쳐줄 수 있는 그의 곁에 둘을 두고 온 것이다. "뭐, 대형의 수련에 방해가 되면 안되긴 안되지." 그들이 굳이 호악산을 택해 찾아온 것은 그의 영향이 컸다. 거의 전력을 사용했음에도 살각에 의해 한 차례 생사고비를 넘겼던 그는 더 많은 힘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런 면에서 귀기가 충만한 호악산과 무림삼괴 중 사사혈괴의 은신처인 지하석부는 최적의 수련지였다. 때문에 천무가 그를 위장으로 내세우는 계획을 얘기하자마자 호악산을 거론해, 결국 이곳을 찾아온 것이다. '충분하군.' 조용히 감각을 집중해 사방에 가득한 귀기를 측정하던 그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호악산 전체가 귀산으로 화한 덕분에, 총체적인 귀기의 양은 그의 예상 이상으로 불어났다. 귀기의 자체적인 복구력은 더더욱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을 테니, 중급망자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귀기를 흡수하더라도 몇 시진만에 복구될 것이다. "호법을 서라." "예, 대형." 그의 무심한 명령에 철방은 등에 맨 대도를 꺼내들고 그의 등뒤에 자리잡았다. 병기 자체의 효능은 이제 용린비가 더욱 뛰어나게 됐지만, 절정무공인 칠뢰도법(七雷刀法)을 단시간 내에 7숙성의 경지까지 습득해 도법만 쳐도 일류고수의 경지에 달한 철방은 계속 대도를 챙겨 다녔다. 계약을 통해 영력(靈力)이 일깨워지고 백호지(白狐智)로 오성이 발달해 기공을 이룸과 함께 무학에 대한 이해력까지 절정고수의 수준에 이른데다가, 야수 이상으로 발달한 비호공(飛虎功)의 감각으로 몸으로 익히는 것에 관해서는 천부적인 능력을 지니게 된 덕분에 가능한 놀라운 성취였다. 천무가 세 유령마의 고삐를 잡아 이끌며 조금 거리를 두고 물러나자, 그는 묵봉을 땅에 수직으로 세우고 그것을 매개로 삼아 주변의 귀기를 끌어 모았다. 묵봉을 통해 증폭돼 들어온 귀기는 그의 심장을 순환하며 빠르게 정제됐다. 기맥이 활발하게 활동하며 귀기의 순환을 도왔기에 정제속도와 흡수속도 역시 전보다 월등하게 상승해 있었다. 첫날인 만큼 적정한 정도의 귀기를 흡수한 그는 묵봉을 손에서 때고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부족하진 않군.' 비록 아직 기맥의 단련이 부족해 고위의 술은 사용하기 힘들지만, 살검객과 살귀객의 심장을 산채로 뽑아내 식심의 금법을 사용한 덕분에 축적된 귀기의 양만 치자면 고위급 사령술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마력 또한 이제는 상급의 흑마술을 펼치기에 충분한 수준에 달했다. 링 오브 베리알을 통해 귀기를 조금씩 마력으로 전환하면 차곡차곡 마력을 쌓을 수도 있다. 금호와 남국을 통해 베리알이 말했던 '조금 곤란하게 만든다'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되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별 상관없는 일이다. 부작용에 비해 효용성이 더 크니, 그대로 사용할 뿐이다. 어차피 안면 드러낼 일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그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준비를 해두는 게 좋겠군.' 고위급 망자와 대등한 힘을 지닌 철방과, 상급망령으로서 강기 정도의 타격으로 봉인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는 이상 끝없이 복구되는 특성을 지닌 대영귀가 지닌 무력은 결코 적지 않다. 그러나 한 손으로는 열 손을 막을 수 없듯, 만약 천지쌍살이 다시 한번 십대자객과 수하들을 이끌고 찾아온다면 이 둘만으로 천무까지 보호하는 것은 힘들다. 때문에 그는 지하석부를 찾아가는 것까지 미루며 방대한 양의 귀기를 사용해 망자를 늘리는데 집중했다. 살각과의 전투가 끝난 뒤, 자객들의 시체로부터 채집한 촉매들을 세 유령마의 등짐에 묵직하게 실어온 만큼 촉매가 부족한 일은 없었다. 그가 망자의 숫자를 늘릴 때, 천무와 철방도 나름대로 한몫을 거들었다. 호악산의 터줏대감이던 철방은 호악산의 지형을 세세히 알려줬고, 그에게 각 망자들의 특징을 들은 천무는 지형과 특징에 맞춰 망자들을 배치를 도왔다. 또한 천무는 철방으로 하여금 호악산 곳곳 큼지막한 바위를 여기저기 박아놓게 하여 팔각미로진(八角迷路陣)을 펼쳤다. 천무는 산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만큼 그 효과는 대단치 않다고 말했지만, 한순간의 실수로 본의 아니게 이틀동안이나 실종돼야 했던 철방은 호악채로 돌아오자마자 천무를 향해 '이 사기꾼!!'이라고 외친 뒤 그대로 나자빠져버렸다. 그냥 조금만 발을 내딛는다면 단지 길을 잃고 외각만을 맴돌게 되고, 오기를 부려 조금 더 들어오면 마치 귀신놀음과 같은 기이한 환각들이 나타난다. 여기까지는 무고한 희생자를 줄이기 위한 조치지만, 만약 끝끝내 산을 내려가지 않은 상태에서 만 하루가 지난다면 팔각미로진 곳곳에 배치되어있는 망자들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된다. 호악산을 가히 일만대군이라도 막아낼 수 있을 정도의 요새로 탈바꿈시킨 뒤에야 그들은 대충이나마 만족하며 작업에서 손을 땠다. 그렇게 적지 않은 시간을 흘려보낸 뒤에야 그는 지하석부로 찾아갔다. 망자를 거의 찍어내다시피 할 때는 미처 틈을 내지 못했지만, 정작 가기로 결정하고 유령마로 이동하자 단 하루도 걸리지 않아 도착할 수 있었다. "흐음...사사혈괴(死邪血怪)의 은신처가 이런 곳이 줄은 몰랐는데." "아마 혈문 대대로 내려오는 장소겠지요." 사사혈괴가 정사중립의 무림삼괴 중 하나가 된 이유는 정파고 사파고 사리지 않고 간섭해대는 무영투괴(無影偸怪)와 무림 따윈 알게 뭐냐하며 산천을 떠도는 천안도괴(天眼道怪)에 비하면 참으로 살벌하다. 좀 특이하다 싶으면 아군이든 적군이든 가리지 않고 모조리 잡아 연구재료로 사용해버리기에 정파에서도, 사파에서도 결단코 받아들이지 않으니 절로 정사중립이 된 것이다. 그러니 이토록 은밀한 지하석부를 은신처로 삼았으리라. 초감각을 통해 파악한 기관장치를 조작해 지하석부의 문을 연 그는 곧바로 걸음을 옮기지 않고 잠시 제자리를 지켰다. '이상하군.' 비록 몇 개월만에 찾아왔다고는 하지만, 그의 민감한 감각은 지하석부 자체의 기운이 미묘하게 변해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경계해라." "예!" 그의 말에 철방이 지금 당장이라도 사방에서 살각의 살수들이 튀어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두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살필 때, 무력이 없는 천무는 그 대신 철방과 그 사이에 서서 안전을 도모했다. "쯧...천공자, 그렇게 서면 형님을 호위하는데 방해된다는 생각은 안 드시나?" "은공께서 그렇게 과한 호위를 받으실 정도로 나약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한 번 쏘아주려다가 되려 당한 철방은 끄응 하는 신음과 함께 입을 다물었다. 천지문의 제자를 상대로 말싸움하는 미친 짓을 할 수야 없는 노릇이니까. 단단히 준비를 마치고 지하석부 안으로 들어선 그는 석실을 하나하나 돌아다니며 숨겨진 비급이나 비밀통로 같은 것이 있는지를 살폈다. 기관진식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지식이 있는 천무의 도움을 받아 비교적 빠른 속도로 석실을 돌던 도중, 그들은 한쪽 끝이 반쯤 무너진 통로에 이르렀다. 바로 그곳이다. 일년 간 그가 붙잡혀있었던 곳, 그리고 암수를 사용해 사사혈괴를 처리한 장소. 무너진 통로에도 별다른 감회를 느끼지 못하고 다른 석실로 이동하기 위해 무심히 걸음을 옮기려던 그는 문뜩 무언가를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을 따라 고개를 숙인 천무와 철방은 야광주의 흐릿한 빛 때문에 지금까지는 미처 몰랐던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건..." 마치 누군가 치열하게 기어가기라도 한 듯, 바닥에는 몸을 질질 끈 흔적과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것도 다름 아니라 바짝 마른 피로. 그리고 바닥의 정 가운데를 깊고도 사납게 파고든 손톱자국은, 흐릿하게나마 두 개의 문자를 이루고 있었다. [復...讐...] 천리안(千里眼)을 일으키며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핏자국이 통로 저 끝까지 이어진 것을 확인한 철방이 마른침을 삼키는 가운데, 천무는 여전히 평온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혈괴는 죽지 않은 듯 싶군요." 핏자국을 거꾸로 따라 붕괴된 통로 안쪽으로 들어가, 사사혈괴가 죽었던 자리에 이른 그는 핏자국이 시작된 곳에서 무언가를 확인한 뒤 다시 걸음을 돌려 핏자국을 따라가며 무심히 말했다. "그는 죽었다." "혈괴는 사사혈시공(死邪血尸功)을 익혔습니다만, 그래도 자신하십니까?" 천무는 대성하면 불사지체를 이룰 수 있다는 사사혈시공을 들었지만, 그는 사사혈괴의 죽음을 확신했다. 목이 반쯤 잘리고 심장이 뜯겨나간 데다가, 통째로 으스러진 하반신이 붕괴된 통로 안에 남은 상태로 움직인다면 그것은 이미 산 자가 아니니까. ================================ 어째 으스스하네. ???:[툭툭] 응? 넌 뭐...으아아아악-------!! -------------------------------- 레지온님의 그림으로 한편 올립니다. 데스나이트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음으로 포함되지 않습니다. -변경-이번 이벤트는 이번주 화요일 자정에 폭파됩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21 06:17:37 고친날 2005-06-21 06:17:37 읽은수 11541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4.사신귀산(死神歸山).(4)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혈문 제일의 보물이라는 초혼령(招魂鈴)도, 초절정고수와 대등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사혈독강시(死邪血毒 尸)도, 사사혈독공(死邪血毒功)과 사사혈시공(死邪血尸功)의 비급도 없습니다." "이런 썩을...차라리 거지소굴을 털어도 이거 보단 더 나오겠네." 핏자국을 따라간 끝에 석부 가장 깊은 곳에 있던 비밀석실을 찾아냈지만, 그 안에는 이미 먼지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지하석부에서 얻은 것이라고는 단 하나, 사사혈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확실치 않다는 정보뿐이다. "사사혈괴의 상태를 어떻게 보지." 깊은 생각에 잠겨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는 무심히 물음을 던지자, 천무는 미리 생각해뒀던 바를 차근차근 풀어냈다. "첫 번째 추측은 사사혈시공에 12대성을 이뤄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지만, 사사혈시공은 이론으로조차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완의 무학입니다. 그것이 사사혈괴의 대에서 완성됐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지요." 무학이든 주술이든 하루 이틀만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아무나 대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만약 혈문이 수대에 걸쳐 천하의 이목을 속이며 사사혈시공을 완성했다고 해도, 세간에 알려진 사사혈괴의 능력은 그런 초절정 강시공의 대성을 이루기에 부족함이 많다. "두 번째 추측은 누군가 혈괴의 시체와 함께 비급과 강시를 빼돌렸다는 것이지만, 은공 외에 이 지하석부를 알고 있는 이는 거의 없는 데다 여러모로 살펴본 바로는 내부의 그 상태를 단지 꾸민 것이라고는 보기 힘듭니다." 천무의 지식과 그의 감각, 철방의 야성적인 능력까지 모조리 사용해 지하석부를 조사했음에도 그곳에 남은 것이라고는 사사혈괴의 흔적뿐이다. 설사 무영투괴라도 그처럼 완벽하게 흔적을 지우고 지하석부를 통째로 털어 가기는 힘들리라. "세 번째 추측은 바로 활강시(活 屍)로, 지금으로써는 가장 유력한 추측입니다. 활강시를 어떻게 만드는지 아는 것은 오직 당대의 혈문주뿐이니, 죽은 뒤 다시 활강시로 부활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천무의 의견을 들은 그는 세 번째 추측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사령술에도 죽은 뒤 다시 망자로 부활하도록 해두는 주술이 존재하니, 강시술에 있어 천하제일이라는 혈문에 그와 유사한 것이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어쩌면 사사혈시공(死邪血尸功)이 바로 그 주술 역할을 해주는 무공일 수도 있다. "혈괴는 정파와 사파 모두 융화되지 않기로 이름높았던 만큼, 다른 곳에 도움을 청하거나 하지는 않을 겁니다. 게다가 몸 상태가 그렇다면 함부로 밖을 돌아다니지 못할 테니, 이 근방에서 언젠가 은공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복수의 칼을 갈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지요." 천무의 말대로 라면 지하석부에 갔을 때 이미 그의 종적이 드러났을 테니, 지금이라도 당장 사사혈괴가 호악채로 쳐들어올 수 있다. 사사혈괴가 혼자 온다면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지만, 문제는 그가 단신으로 쳐들어오겠느냐 하는 점이다. 혈문에서 누대에 걸쳐 만들어온 사사혈독강시가 대체 모두 합쳐 몇 구나 되는지, 그 숫자를 정확히 아는 이들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러나 만약 모든 사사혈독강시가 동원될 경우, 그 전력이 천하삼십육세 중 그 어디에도 뒤지지 않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염병할! 완전 호랑이를 피하려다 늑대 굴에 들어온 셈이군." 좋은 소식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상황에 철방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활강시나 사사혈독강시와 한 번 붙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대형을 충심으로 모시는 철방으로서는 그야말로 속 터질 일이었다. "최선의 방책은 지금 당장 호악산을 떠나는 것입니다." 천무는 천지문의 제자답게 곧바로 최선책을 내놓았다. 하늘을 나는 유령마의 속도는 가히 경이적이라, 만약 유령마를 타고 이동한다면 그 누구라도 따라잡을 수 없다. 철방은 천무의 방책에 내심 동의했다. 만들어놓은 망자들이 아깝긴 하지만, 그렇다고 늑대굴에 계속 남아있을 수야 없는 노릇이니까. "알아둔 귀산이 있나?" "배교가 위치해있는 북망산(北邙山) 정도라면 이곳과 비교할 수 있을 듯 싶군요." 당당한 사파로 자리잡고있는 배교의 본산으로 간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니, 갈만한 귀산이 없다는 소리다. 웬만큼 이름난 귀산이라면 모산파의 도사들이 나서 몇 년이 걸리더라도 정화시키니, 남아나는 귀산이 없는 것도 당연하다. 그 동안 호악산에도 몇 명의 도사가 찾아왔겠지만, 너무나 막대한 귀기에 부족함을 느끼고 훗일을 기약하며 물러났을 것이다. "그건 예정이 아닐텐데." "계획에는 언제나 변수가 있는 법이지요." 그는 잠시 천무에게 고개를 고정시킨 채 침묵을 지켰다. 세상에 완벽한 계획이란 없고, 사사혈괴의 부활 아닌 부활은 그로서도 짐작치 못했던 완벽한 변수다. 하지만 그가 파악한 천무라면, 그리고 그의 계획대로라면 여기서 나와야할 대책은 단순한 피신 따위가 아니다. "차선책은?"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호악산에 해둔 준비로 사사혈괴를 상대하는 것이지요. 정면으로 상대할 수야 없겠지만, 팔각미로진을 조금 손보면 혈문의 문주인 혈괴라도 쉽게 파해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만약 파해될 경우, 망자들을 방패로 삼아 유령마를 타고 피신하시면 됩니다. 사사혈독강시는 오직 술사가 근처에 있어야만 움직일 수 있으니 호악산 전체에 깔아두지는 못할 테지요. 그 빈틈을 노려 간간이 호악산에 들어와 귀기를 흡수하시면, 기간이 조금 늦춰지더라도 힘의 회복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럼 언제까지 피해 다녀야 하는 건가? 그건 별로 마음에 안 드는데 말이야." "충분한 힘을 회복할 때까지입니다. 어차피 사사혈괴를 쓰러트릴 정도의 힘을 얻지 못하신다면, 돌아갈 생각도 없지 않으십니까?" "음..." 어째 최선책보다 더 좋은 차선책에 철방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최선책과 차선책을 뒤바꿔 말했으니 그런 것이다. 최선책이 차선책보다 최선임에도 그것을 뒤바꾼 이유는, 그 대책이 무엇을 위한 최선인가 하는 점일 터. "계획보다는 계약인가." "은공을 따르는 한, 은공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평온한 음성이었지만, 그 안에 '그러니 제가 따르는 한, 은공께서도 정사의 균형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주시길 바랍니다.'라는 말이 숨겨져 있었다. 어차피 계약은 반드시 이행하는 그에게는 상관없는 말이다. 단지 천무가 자신의 계획보다 계약을 우선한다는 것이 중요할 뿐. "진을 보완해라." "알겠습니다." 그는 차선책을 선택했다. 언제까지 도망 다니기만 할 수는 없으니, 이왕 상대할 거라면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춰둔 호악산이 유리하다. 무엇보다 혈괴가 가지고 있을 것이 거의 확실한 사사혈시공(死邪血尸功)은 조금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입수해 연구해볼 가치가 있다. "철방, 망자들의 경계를 강화시켜라." "예!"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가 싶어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대던 철방은 간단명료한 대형의 명령을 듣고 나서야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강대한 힘을 지닌 망자는 자신보다 나약한 망자를 지배하는 것이 가능하다. 게다가 비록 장일산의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나 호악채의 채주로서 수백 명의 산적들을 거느리고 훈련시켰던 만큼, 철방은 망자들을 통솔하는데도 뛰어난 통솔력을 발휘했다. 그가 장군으로서 망자를 총체적으로 지휘한다면, 천무는 군사로서 그를 보조하고 철방은 백인장으로서 앞장서서 망자들을 이끄는 셈이다. "그럼 당장 경계시키고 오겠...무,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골치 아픈 분위기를 벗어나고자 벌떡 몸을 일으켰던 철방을 한 손을 들어 제지한 그는 무심히 입을 열었다. "호악채의 식솔은 모두 몇 명이었지?" "뭐...산행에 나가는 녀석들만 치면 250명 정도였고, 이런저런 잔식구가 모두 합쳐 300여 명 정도 됐습니다." 강시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가 어떻게 되는지 직접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강시가 지닌 흡혈귀적 특성을 생각한다면, 그 뒤 어떻게 됐을지 추정이 가능하다. '강시가 됐을 가능성은 8할 이상.' 그러나 호악산에 망자를 배치하고 진법을 설치하는 와중에도 강시는 단 한 구도 발견치 못했다. 심지어 귀곡조차 강시는 물론이고 시체조차 모두 치워져있었다. 지금까지는 관이나 어딘가의 무림문파가 나서 강시를 처리하고 시체를 처리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지하석부와 호악산과의 거리를 생각해 보면 또 다른 결론을 얻을 수 있다. "300여 구의 강시에도 대비해라." "예? 아니, 그럼 설마...!"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던 철방은 순식간에 얼굴을 굳혔다. 사사혈독강시만 해도 벅찬데, 거기에 무려 300여 구의 강시까지 더해진다면 전력의 차이가 기하급수적으로 줄 것은 철방조차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천무의 반응은 철방과는 전혀 달랐다. "계획에는 큰 변경이 없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300여 구의 강시가 더해졌는데도 계획이 변하지 않았다면, 그것조차 미리 포함해 계획을 짰다는 뜻이다. '과연 그런가.' 그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여 천무와 철방을 나가게 했다. 이제 사사혈괴를 쓰러트릴 때까지, 편하게 쉴 수 있는 날은 없을 것이다. 무려 5년간 이어지는 죽은 자들의 전쟁(戰爭)은 그렇게 시작을 고하고 있었다. ========================= 가끔 생각하는 건데 말이야. 천무:"무엇을 말입니까?" 너희 대화가 너무 어려운 게 아닐까? 천무:"설마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겨우 이 정도쯤이야 독자분들께서는 쉽게 이해하시겠지요." ......[우선 내가 이해 못한단 말이다!] ------------------------- 매니앜님의 그림으로 한편 올립니다. 뱀파이어틱한 부분이 꽤나 마음에 드는 군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21 23:09:11 고친날 2005-06-21 23:09:11 읽은수 10785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5.세월유수(歲月流水).(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사신의 시간은 물과 같이 흐르니...- 철궁곡이 자리잡은 계곡은 경공의 고수라도 오르내리기가 불가능에 가까운 험한 비탈로 둘러 쌓여있는데다가, 단 하나밖에 없는 입구에 세워진 입궁문(入弓門)은 마치 성벽과 같아 가히 일당십 이상의 전력을 발휘할 수 있다. 거기에 그 내부에는 거리를 둔 상황일수록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궁사들이 즐비하니, 철궁곡이 철옹성으로 불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참으로 길고도 긴 세월이었구나..." 그는 철벽(鐵壁)이라고 통하는 철궁곡의 입궁문을 보며 나지막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단 5년이라는 시간이 이토록 길 줄이야." 그 짧고도 긴 시간 동안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30대에 접어든 검룡(劍龍), 혈룡(血龍), 도룡(刀龍), 천봉(天鳳), 흑봉(黑鳳)이 구룡팔봉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궁룡(弓龍), 철룡(鐵龍), 풍룡(風龍), 암봉(暗鳳), 운봉(雲鳳)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작은 일에 불과하다. 팔정협칠사마(八正俠七邪魔) 중 구룡회주(九龍會主) 구절신창(九折神槍) 황갈상이 화경에 올라 사신오왕(四神五王)이 오신오왕(五神五王)으로 늘고 팔정협칠사마(八正俠七邪魔)가 칠정협칠사마(七正俠七邪魔)로 준 것은 조금 큰 일이다. 가장 큰 일은, 바로 정파와 사파 사이의 마찰이 점차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보면 삼궁(三宮) 중 대륙의 모든 강줄기를 수호한다는 용왕궁(龍王宮)과 해상의 왕이라는 대해용가(大海龍家)의 세력싸움. 독과 암기의 가문이라는 사천당가(四川唐家)와 독의 성지라는 독림(毒林)과의 신경전. 표국동맹 창천맹(蒼天盟)과 산채동맹 녹림맹(綠林盟)의 자잘한 접전. 무엇보다 철궁곡(鐵弓谷)과 살각(殺閣)과의 암투(暗鬪)가 있다. 철궁곡이 생사판관(生死判官)의 청을 받아 살각의 청부대상이 된 천지문의 제자를 보호함으로써 시작된 암투는 암투라고 말하기도 힘들 정도로 대대적으로 알려졌다. 살각의 자객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입궁문을 넘으려 하면, 철궁곡은 철저한 조사와 감시로 자객을 잡아낸다. 대다수는 입궁문에서 막히지만, 드물게나마 조사를 통과하거나 감시를 넘은 자객들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야 목숨을 잃는다. 오 년이라는 기간동안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며 쌓인 피해는 마치 가랑비에 옷 젖듯 심각한 수준에 달해있었다. 십대자객이 침투한 적 있음에도 천지문의 제자가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은 기적에 가까웠고, 철궁곡이 자객들의 시체로 살각을 추궁하며 다른 정파의 협조를 받지 않는 것은 많은 무림동도의 공통된 의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돌아온 이상, 이제 철궁곡의 위험은 끝이다!" 두 눈을 날카롭게 뜬 그가 당당하게 외치는 순간, 하나의 주먹이 청년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퍼억! "켁!" "뭔 잡설이 그렇게 길어? 적당히 하고 좀 들어가자." 끙끙거리며 뒤통수를 손으로 싸맨 청년은 자신보다 머리통 하나만큼 더 큰 거한에게 원망의 눈초리를 보냈다. '장형, 그런 흉기를 막 휘둘러대니까 장형이 생물병기로 불리는 거 아닙니까?!' 바락바락 소리지르며 따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보는 눈이 많은 관계로 체면을 생각해 차마 실행으로 옮기지 못한 청년은 슬쩍 주변을 돌아보았다. 허름한 옷차림의 무사는 그냥 담담한 얼굴로 넘기는 듯 싶은 반면, 두 아름다운 미녀는 가벼우면서도 분명한 웃음기를 띄고 있었다. '이게 웬 망신이람.' 시커먼 사내놈이라면 몰라도 하얀 미녀들 앞에서 추태를 보인 청년은 헛기침으로 애써 자신의 허물을 덮어버리며 앞으로 나섰다. 입궁문을 지키던 두 문지기는 웬 청년이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주절거리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가 앞으로 다가오자 정중히 물음을 던졌다. "어디서 오신 소협이시오?" 문지기의 물음을 들은 순간, 청년의 얼굴에는 황당함이 스쳐지나갔다. 거한은 그러한 청년을 보고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고, 무사는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두 미녀가 터트린 웃음소리에 얼굴이 확확 달아오른 청년은 등에 매고 있던 철궁을 앞으로 내밀며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나...궁룡(弓龍)되는 사람이다." "궁룡? 궁룡이면...소곡주님?!" "헛!!" 청년의 말과 철궁에 뚜렷하게 새겨져있는 강지후(襁祗侯)라는 이름으로 그가 5년 전 교림(喬林)으로 수학을 떠났던 소곡주라는 것을 깨달은 문지기들은 크게 놀라했지만, 명성 높은 철궁곡의 무사답게 곧 감정을 수습해 허리 숙여 인사한 뒤 설마 싶은 표정으로 강지후의 일행을 살폈다. "그렇다면 이분들은 설마...?" "험, 이 건장하신 형님께서는 철룡(鐵龍)이시고, 이 협객께서는 바로 낭아검객(狼牙劍客)되신다." 금강전(金剛殿)의 소전주인 철룡 장방도(欌房禱)와 전대의 검룡(劍龍)이던 단리악(段里顎)의 소개를 들은 두 무사의 얼굴에 감탄이 스치고 지나갔다. 장방도는 20대 후반의 나이로 기공(氣功)을 이룬 절정의 외가고수고 단리악은 겨우 30대 중반의 나이에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검객이니, 무공을 배우는 무인으로서 그 뛰어난 재능과 성취에 감탄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러나 강지후는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아직 소개하지 않은 두 미녀야말로 진정 놀라야 할 상대였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 두 아리따운 소저가 바로 그 이름높은 음봉(音鳳)과 암봉(暗鳳)인 분들이지." 등에 하나의 거문고를 매고있는 오관이 뚜렷하고 입술이 도톰한 미녀가 만음곡(萬音谷)의 소곡주인 음봉(音鳳) 언상해(諺詳解)이고, 남자 못지 않게 훤칠한 키게 활력이 넘기는 매력을 지닌 미녀가 사천당가(四川唐家)의 금지옥엽이라는 암봉 당자소(唐姿笑)라는 말에 절로 시선을 옮기는 두 무사를 보며 강지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비록 그냥 동행한 것뿐이라고는 하지만, 일행에 무림제일의 신붓감으로 불리는 팔봉이 둘이나 있으니 절로 뿌듯해지는 강지후였다. 그런데 어째 묘한 것은 두 무사의 반응이었다. 실망이랄지, 절망이랄지, 어째 온통 어두운 감정으로 점철된 기기묘묘한 표정은 아무리 봐도 사내남아가 팔봉을 보고 지을만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조금 뒤늦게 서야 그것을 눈치챈 강지후는 이 인간들 고자 아닌가 싶은 의심을 떠올렸다. 언제나 놀람과 감탄 등등의 시선만을 받아왔던 언상해와 당자소도 이 색다른 반응에 묘한 심정이 되어 두 무사를 마주봤다. "아, 본곡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잠시 후에야 자신들의 추태를 깨달은 두 무사는 애써 평정을 회복했지만, 이미 똑똑히 본 모습이 기억에서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딱히 따져 물을만한 내용도 아닌지라, 그들은 그저 의문을 마음속에 묻어놓은 채 한 무사의 뒤를 따라가 살각의 자객들을 골라내기 위한 절차를 밟았다. 살각과 철궁곡의 암투는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상황이었기에 그들은 별다른 불만 없이 절차를 거쳤다. "아버지는 여전히 정정하시겠지?" "몸은 정정하시지만...최근 들어 심려가 크십니다." "으음, 역시 그 살곡 놈들 때문이겠군." "예. 게다가...아니, 아닙니다." 강지후의 말에 대답하다가 갑자기 말을 얼버무린 무사는 일행을 철궁곡의 깊숙한 안쪽으로 안내했다. 철궁곡은 중요한 건물일수록 계곡 안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연무장조차 혹시나 있을지 모를 무공의 유출을 막기 위해 바깥쪽에 있는 연무장일수록 하급의 무사들이 사용하고 안쪽에 있는 연무장일수록 고수들만이 사용할 수 있게 돼있었다. 무려 5년만의 귀향인 만큼 길을 걸으면서도 쉴 새 없이 주변을 살피던 강지후는 문뜩 저 멀리 있는 연무장에서 도를 휘두르고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하고 눈에 이채를 띄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저 연무장은 분명 당주 정도는 돼야 사용이 가능하지만, 당주의 숫자가 그다지 많지 않은데다가 대다수는 자기만의 수련공간을 따로 마련해두고 있기에 거의 사용되지 않는 곳이다. 그런데 그런 연무장을 누군가 홀로 사용하고 있으니 왠지 호기심이 동했다. "지금 저기 있는 사람은 누구야?" "예? 아, 저분은..." 소곡주의 물음에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이 누군가를 확인한 무사는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그 사람을 몰라서가 아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문제였다. "소곡주님, 일단 곡주님부터 우선 뵙는 것이..." 무사가 왠지 꺼리는 보이자 호기심이 더욱 커진 강지후가 성금성금 연무장을 향해 걸음을 옮기자, 무사와 강지후를 돌아보던 장방도는 어깨를 으쓱거리고 다른 일행과 함께 강지후의 뒤를 따랐다. 모든 손님이 연무장으로 가자 결국 어쩔 수 없이 그들과 함께 연무장을 향해된 무사는 제발 소곡주와 그 일행이 아무런 마찰도 없이 무사히 연무장을 넘어갈 수 있기를 내심으로 빌고 또 빌었다. 연무장에 가까이 다가가 그 인형을 똑바로 보게 된 순간, 강지후를 비롯한 일행은 쇳덩어리로 대갈통을 후려 맞고 무릎에 안면이 찍힌 뒤 목이 졸리는 듯한 충격에 넋을 잃었다. 허공을 번개처럼 가로지르고 있는 도법 때문이 아니었다. 그 도법이 상승의 무공임은 분명했지만, 천하삼십육세의 후기지수인 그들이 그토록 충격 받을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 도법을 펼치고 있는 사람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너무나 맑으면서도 깊디깊은 호수 같은 눈과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는 얼굴선, 마치 조각품과 같이 완벽하게 균형이 잡힌 오관에 대리석과 같이 새하얀 피부, 거기에 늘씬하게 빠진 체격과 마치 정성껏 기른 난초를 연상시키는 청순한 분위기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미인의 모습은 남녀를 불문하고 시선을 때지 못할 극한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있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21 23:19:56 고친날 2005-06-21 23:19:56 읽은수 11229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5.세월유수(歲月流水).(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선녀다." 어벙한 표정의 장방도가 토해낸 말에 그들의 고개가 일제히 끄덕여졌다. 맞다. 선녀임이 분명하다. 선녀가 아니라면 어찌 저와 같은 천상의 미를 지닐 수 있겠는가? 거기에 쾌속 하면서도 은은한 여유를 두며 허공에 도법을 펼치는 모습이 더해지자, 마치 선녀가 천상의 춤을 추고 있는 듯한 착각이 일어날 정도였다. 때문에 그 도법이 멈춰졌을 때, 그들은 마치 춤이 도중에 멈춘 것 같은 일말의 아쉬움마저 느껴야 했다. 그제 서야 그 선녀의 맑은 눈동자가 자신들에게 고정된 것을 깨달은 그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타인의 무공수련을 엿봐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인 금기를 무시해버렸다는 것보다는, 자신들이 바로 선녀의 춤을 방해한 방해자라는 것에 의한 당혹감이었다. 마치 흐르는 시냇물이나 불어드는 바람처럼 맑고도 청명한 눈동자가 일말의 의문을 담고 자신들을 똑바로 마주보자 다시 한 번 넋이 빠질 뻔했던 그들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천하에 이름 높은 구룡팔봉인 만큼, 그녀는 단번에 그들의 소개를 알아들었다. 그들의 일생을 통틀어 구룡팔봉의 명성이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이었다. 잠시 그들을 둘러보던 그녀는 가장 먼저 강지후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이곳이 철궁곡인 만큼 5년만에 귀향한 소곡주에게 먼저 인사하는 것이 당연했음에도 강지후는 천상을 날아다니는 듯한 기쁨을 느끼며 입을 쫘악 찢었다. "저, 저도 만나 뵙게 되어 진정 반갑습니다." 장방도의 살기 어린 시선에 겨우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장방도를 비롯한 일행이 원하는 것이 무언인지를 깨닫고 조심스레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소저 깨서는 방명이 어찌 되십니까?" '이런...!' 뒤에서 서성거리던 무사의 안면이 왕창 일그러질 때, 그녀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끼며 곤혹스러운 기색이 그대로 드러났다. "소저, 제가 무슨 실례라도...?" "소곡주님, 곡주님께서 기다리십니다!" "걱정 말라고. 아버지는 아직 내가 온 것도 모르실 테니까." '그게 아니라니까!' 강지후를 구원해보고자 최선을 다했던 무사는 그러한 자신의 노력이 발로 내쳐지자 속으로만 끄응 앓으며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철궁곡에 소저 같은 미인이 숨어있을 줄은 몰랐어요. 나름대로는 어디에 가더라도 빠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소저를 보니까 제가 너무 자만한 거 같네요. 그래도 소저가 천하제일미일 거라고 저 자신을 위로하고 싶으니, 천하제일미의 이름을 좀 들을 수 있을까요?" 강지후를 대신해 당자소가 장부 못지 않게 화끈한 성격으로 직접 말을 흘리자 일행은 뜨거운 시선을 선녀에게 모았다. 그에 더더욱 곤혹스러운 기색이 된 그녀가 결국 한숨을 쉬고 무사에게 눈짓을 주자, 그는 얼른 나서서 그녀가 이름을 밝혔다. "이분의 성명은 남국이라 하는데..." "남국, 남국이라. 거 참 좋은 이름이구려!" "호호, 장공자 말이 맞아요." 나설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던 장방도는 그녀의 이름을 듣기가 무섭게 우렁찬 음성으로 감탄을 터트렸다. 자신 역시 빠지고 싶지는 않았던 언상해 또한 웃음으로 그에 동조했다. 덕분에 말이 끊겨버린 무사는 더욱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어떻게든 오해를 풀려고 했지만, 끊임없이 말을 걸며 이것저것을 묻는 이룡이봉은 정말이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나마 단리악이 담담한 태도를 지킨 것이 다행이랄까? 그렇게 일다경의 시간이 흘렀을 때, 결국 오해를 푸는 것을 포기하고 초조히 주변을 살피던 무사의 눈에 문뜩 연무장 끝 쪽에서 한 사람이 걸어오는 것이 비춰졌다. '망했다!!' "피하십시오!!" 연무장에 마악 들어선 그가 이쪽을 보고 걸음을 멈추자 무사는 다짜고짜 경호성을 날리며 땅으로 몸을 굴렸다. 명성 높은 철궁곡의 무사가 취할만한 행동은 아니지만, 이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다면 당연히 취해야할 행동이었다. 파바바바바밧--! 어디선가 날아든 비도 중 하나가 무사가 서있던 땅에 박힘과 동시에 다섯 일행에게도 각자 하나씩의 비도가 날아들었다. 그 속도의 속도는 그야말로 섬전과 같았지만, 하나같이 무림에 이름 높은 후기지수인 그들은 스치지도 않고 간단히 비도를 피해내며 진기를 일으켰다. "살각의 자객 놈이로구나!" 비도가 날아온 방향을 본 장방도는 자신들을 향해 달려드는 붉은 복면인을 보고 이것저것 잴 것도 없이 곧바로 마주 달려들었다. 장방도와 복면인과의 거리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 거리가 이장으로 좁혀진 순간, 복면인의 손으로부터 하나의 비도가 쏘아져 나왔다. 기공의 고수인 장방도는 굳이 비도를 피하지 않으며 금강철권(金剛鐵拳)을 펼쳤다. 외공의 위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금강철권은 금강전 특유의 외가권법으로, 제대로 걸리면 같은 기공의 고수라도 아주 박살을 낼 수 있는 위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맞을 때의 경우였다. 복면인이 갑자기 배가된 속력으로 주먹을 피해내고 뛰어올라 장방도의 머리를 넘어가자, 그의 주먹은 빈 허공만을 헛되이 가로지를 뿐이었다. 반면 명검과 같이 날카로운 비도에 의해 팔뚝에 약간의 상처를 입은 장방도는 단지 갑자기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현기증에 더 이상 운신할 수가 없었다. "도...독!!" 장방도가 가까스로 토해낸 경호성을 들은 일행은 더 이상 가리지 않고 협공을 가했다. 아무리 협객이라도, 독까지 사용하는 자객을 상대로 일대일대결을 할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띠링-띠링-띠리리리리리링-! 언상해가 거문고를 꺼내들고 현 위로 섬섬옥수를 놀리자, 기병삼곡 중에서도 가장 특이하다는 만음곡(萬音谷)의 음공(音功)이 펼쳐지며 아름다운 금음과 함께 진기가 담긴 음파가 화살처럼 쏘아졌다. 펑! 퍼벙!! 복면인이 바람 같은 절묘한 움직임으로 음공을 피해내자 목표를 놓친 진기는 쓸데없이 연무장에 내려 박혀 폭발을 일으켰다. 번개처럼 쏘아진 하나의 철시(鐵矢)가 아슬아슬하게 붉은 복면을 스쳐지나가고 다섯 개의 혈리표(血裡 )가 다섯 자루의 비도에 맞아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본 일행의 눈이 빛났다. 제압을 위해 5성의 공력만 사용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가볍게 상대하는 것을 보니 최소한 일류고수, 어쩌면 이름높은 십대자객 중 한 명인 절정고수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복면인으로서도 단리악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자 더 이상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단지 손잡이에 한 손을 올려놓고 있을 뿐인 단리악이었지만, 초절정고수인 그가 검을 뽑아들면 아무리 바람 같은 복면인이라도 더 이상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마침내 단리악이 검을 뽑아들려던 순간, 복면인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이번엔 또 웬 변태새끼들이 이렇게 끈질겨? 작작 좀 해!" '벼, 변태?' 한 평생 결코 들을 리 없으리라 생각했던 욕을 다른 누구도 아닌 자객에게 듣게 된 일행이 상황마저 잊고 기가 막힌 표정을 지을 때, 그들 사이를 하나의 인형이 가로막았다. 이 갑작스러운 방해에 그들이 주춤해하며 싸움을 멈추자, 남국은 복면인에게 빠르게 무언가 손짓을 보냈다. "당신이 소곡주시라고요?" 의외라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복면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준 강지후는 꽤나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살각과 암투를 벌이는 철궁곡 내에서 복면을 쓰고 나타나니 당연히 자객인 줄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뭔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당신이야말로 누구요?"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해준 것은 안도의 한숨을 푸욱 내쉬고 있던 무사였다. "나, 남국 소협과 금호 소협은 생사판관(生死判官) 대협의 제자분들입니다." "생사판관의 제자?" 일행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생사판관과 불사패왕은 5년 전 살검객과 살귀객을 죽이고 천살이 이끄는 살각의 추적대를 뿌리침으로서 그 명성을 더욱 드높였지만, 생사판관에게 제자가 있다는 것은 처음 듣는 소리였다. 하물며 이처럼 아름다운 제자와 구룡팔봉 못지 않게 뛰어난 제자가 있다는 소리는 더더욱 그랬다. "그럼 오해였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오. 저희들이야말로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그보다 장형부터 해독을 부탁드립니다." 금호의 정중한 사과를 일행을 대표해 깨끗하게 받아들인 강지후는 아직까지 비틀거리고 있는 장방도를 가리 켰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품에서 한 장의 누런 부적을 꺼내 가볍게 수인을 맺자, 장방도의 몸에서 희끗희끗한 무언가가 빠져 나온다 싶더니 부적에 푸르스름한 빛이 번뜩이다가 사라졌다. "호오...그거 주술인가요?" "예." 생사판관이 주술을 사용한다는 풍문을 확인한 당자소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을 때, 잠시 끄응 거리다가 정신을 차리고 쿵쿵 땅을 울리며 다가온 장방도가 미간을 한가득 찌푸리며 물었다. "그보다, 왜 갑자기 공격한 건지 이유나 좀 들읍시다. 우리가 변태라는 오명을 들어야 하는 이유도." "일단 이 연무장이 곡주께서 정하신 출입금지 구역이라는 것과..." 출입금지, 그렇다면 침입자로 규정하고 공격할 수도 있다. 무인 중에는 자신의 무공이 남에게 보여지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이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 변태라는 오명까지 해명할 수는 없었고, 때문에 금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흐렷던 말꼬리를 제대로 이어야 했다. "...제 친구가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말을 듣는데 걸린 시간은 아주 찰나에 불과했지만, 그들이 자신의 앞에 있는 경국지색의 미인이 미녀가 아닌 미남이라는 것을 이해하는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이해가 끝났을 때, 그들은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과 대동소이한 반응을 내보였다. "말도 안돼--!!!" ====================================== 자아, 시간은 물처럼 흐르고...가벼운 분위기도 슬슬 끝나갑니다. 다음 16, 17장에서는 사령군단, 거대괴수, 시산혈해 등등...아주 끝내주게 될 겁니다. 알리님의 그림으로 한편 올립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22 20:01:53 고친날 2005-06-22 20:01:53 읽은수 11905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5.세월유수(歲月流水).(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말 된다." 특별히 주안술을 익히지 않았지만, 반로환동의 경지에 이르러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삼십대 후반의 중년인으로 보이는 철궁곡주 염화궁신(炎火弓神) 강보황(襁褓隍)은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 답해주었다. 그리고 강지후는 당연히 반박했다. "그 얼굴로 남자라니요! 소자는 절대, 결단코, 무조건 믿을 수 없습니다!" 교림에서도 보지 못했던 천하제일미가 미녀가 아닌 미남이라는 것을 도저히 납득하지 못하는 자식놈의 심정이 이해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강보황은 이미 수십 번이나 더 들은 말에 자식놈에게만 다른 대답을 해줄 생각이라고는 토끼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래, 그러면 너도 날이면 날마다 두 소협 뒤를 쫓아다녀 보거라. 자식놈이니까 특히 다리몽둥이를 양쪽모두 분질러주마." 쩌저적 얼어붙은 자식놈을 보며 강보황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현재 철궁곡의 대외적인 가장 큰 적이 살각이라면, 대내적인 가장 큰 적은 바로 생사판관의 두 제자다. '절대 못 믿습니다!'라는 투지를 불태우던 무사들만 해도 벌써 수십이다. 그것도 하급무사들은 물론이고 일부 상급무사들마저 포함해서. 그 중 4할은 강보황 자신에 의해 다리몽둥이가 부러져 최소 한 달은 끙끙 앓았고, 3할은 금호의 저주에 걸려 최소 두 달은 시름시름 앓았으며, 2할은 술독에 처박혀 폐인이 돼서 최소 석 달은 꺼이꺼이 앓았다. 남은 1할은 끝끝내 믿지 않고 아예 청혼까지 했다가 반년을 반 죽어지냈으니, 철궁곡이 사실은 변태소굴이 아닌가 의심하는 금호에게 제대로 된 변명도 하지 못하고 연무장 및 몇몇 장소에 일반 무사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격리 조치해준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그리 뛰어난 후기지수에게 이게 무슨 망신인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명성 높은 생사판관의 제자답게 꽤나 바르고 싹싹한 심성을 지니고 있는데다가, 20대 초반의 나이로 일류고수의 경지에 올랐으니 재능 또한 구룡팔봉보다 더 하면 더하지 결코 못하지 않다. '단지, 봉황 뺨치게 생긴 용이라서 문제지.' 그때, 부자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언상해가 문뜩 강보황의 말에 묘한 점이 있음을 눈치채고 물음을 던졌다. "그런데 두 소협면, 설마 금소협의 뒤도 따라다닌 뜻인가요?" "그렇다네. 오죽하면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겠는가?"" 일행의 얼굴에 기가 막힌 표정이 떠올랐다. 그 복면이 바로 그런 이유로 뒤집어쓰고 다니는 거였단 말인가? 생사판관이 얼굴을 보고 제자를 받아들인 건지, 아니면 수정궁과 같이 미용을 위한 특수한 주안술을 익힌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봉의 미모를 보고 제자들이 정신을 차렸으면 하는 기대가 적지 않았네만..." 차마 확실히 말하지는 못하고 말꼬리를 흐리는 강보황이었지만, 그 뒷말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덤으로 문지기들이 보였던 기기묘묘한 이유까지도. 어릴 때부터 영약을 먹고 무공을 수련해 외모를 가꿔왔던 천하의 암봉과 음봉의 자존심이 왕창 구겨지고 있었지만, 이미 남국을 봤을 때 박살나고 그의 성별을 알았을 때 아주 가루가 돼버린 자존심은 이제 구겨질 여지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자...그럼 이제 자네들이 이곳에 온 이유를 말해주지 않겠나?" "그야 소자가 친분 있는 친구들을 특별히 초청한 것 아니겠습니까?" 강지후의 대답을 무시한 강보환은 단리악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교림에서 무림에 대한 갖가지 지식을 배우고 심성을 가다듬던 애송이들과, 5년 전 용봉무서의 사건 때 한 손을 거들어줌으로써 교림의 식객으로 머물던 무림고수 중 누가 일행의 대표인지는 너무나 뻔한 일이다. "만학노사(萬學老師)께서 보내시는 서신입니다." 단리악이 정중히 건넨 서신을 받아든 강보황은 밀봉을 뜯고 그 내용을 찬찬히 훑었다. 교림의 림주인 만학노사는 삼재지문의 천하삼대지자는 아니더라도 능히 천하십대지자에 들 수 있는 현자. 그러한 그가 보낸 서신인 만큼 손님들을 앞두고라도 곧바로 훑어볼 가치는 충분했다. "흐음..." 서신을 모두 훑어본 뒤, 그것을 잘 접어 탁자 위에 내려놓은 강보황은 육중한 돌덩이가 얹힌 듯한 침중한 눈으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자네들도 이곳이 사지(死地)인지 알고 찾아온 것인가?" "살각의 무서움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허어, 자네들은 무림명문의 후계자들일세. 자네들이 이곳에서 무슨 일을 당하기라도 하면 어찌되겠는가?" 지금까지는 철궁곡쪽에서 굳이 사양에 사양을 거듭해 도움을 막아왔지만, 만약 이들이 크게 다치기라도 했다가는 낭인맹을 제외하더라도 금강전과 만음곡, 사천당가가 분개하며 나서게 될 것은 보나마나 뻔한 일이다. 그러니 스스로의 신분을 자각하라는 뜻에서 한 말이었지만, 그에 답하는 구룡팔봉의 대답에는 조금도 거침이 없었다. "협은 나아감에 있어 언제나 바르니 피함이 없고, 의는 깨끗함에 있어 언제나 맑으니 구별함이 없다 하였습니다." 협은 아무리 큰 벽이 있더라도 바르게 펼쳐야 하고, 의는 스스로 타협해 변명을 만들 때부터 더렵혀지는 법이다. "권리를 가진 자는 그만큼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법이 아닌지요?" 가진 자일수록 베풀며 앞장서 의무를 행해야한다. 가진 자가 베푸는 것을 아까워하고 아끼고 의무를 등한시하면 그것은 이미 협의가 아니다. "문파가 짐이 되어 협의를 가로막는 것은 제 아버지도 바라지 않으실 겁니다." 무인이 문파를 등에 업고 행동하면 안 되지만, 문파가 무인의 길을 막아서도 안 되는 것이 진정한 무인이요, 문파이다. "소자가 철궁곡을 지키지 않으면 누가 철궁곡을 지키겠습니까?" 문파의 문주는 문파의 주인이 아닌 문파의 대표에 불과하다. 진정한 주인은 문파를 이루는 무사들이며, 문주란 문파의 일이라면 크든 작든 좋든 나쁘든 결코 피해서는 안 된다. "무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무를 추구하며 자신의 길을 걷는 무인이 죽음에 겁먹어 길을 제대로 걷지 못한다면 무인은 더 이상 무인이 아니다. 충고를 하려다 오히려 한 방 먹게 된 강보황은 쓴웃음을 지었지만, 그 내심에는 정파의 후기지수들에 대한 흐뭇함이 가득했다. 교림(喬林)은 말 그대로 가르치는 문파다. 무공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무인으로서 갖춰야할 올바른 자세와 진정한 협의지로를 가르쳐 무인을 무인답게 하고 협객을 협객답게 한다. 심지어는 사파인에게도 약자를 배려할 줄 아는 무인으로서의 패왕지로를 가르친다. 때문에 정사를 불문한 많은 문파가 후계자를 교림에서 교육시키는 절차를 거치는 것이다. "좋네. 자네들을 철궁곡의 손님으로 받아들이겠네." 천하에 이름 높은 오신오왕 중 일인에게 무인으로서 분명히 인정받은 그들은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표했다. 그로부터 잠시 동안 꽤나 화기애애해진 분위기로 대화를 나누던 도중, 장방도가 한가지 물음을 던졌다. "한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어째서 철궁곡에서는 다른 정파의 도움을 거부하는 것입니까?" "거기까지는 모르고 있는 겐가?" "약간의 짐작은 하고 있지만, 확실히 알지는 못합니다." "흐음, 그 이유는 정사대전을 촉발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네." 만약 철궁곡이 다른 정파의 세력을 끌어들인다면, 살각 역시 주저 없이 다른 사파를 끌어들일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정사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무림에서 철궁곡과 살각의 전면전은 곧바로 정사대전까지 번져나갈 위험이 크다. 하물며 오랫동안 준비해온 사파가 기회만을 노리고 칼날을 번뜩이고 있는 이상, 정파가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도 전면전은 결단코 미뤄야만 한다. "그렇다면 저희들만 온 이유는 역시...?" "대외적으로는 아들 녀석의 초청을 받아 찾아온 것이니 말이네. 무림명숙을 초청한다면 그것은 암암리에 지원을 받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교림에서 동문수학한 데다가 아직 젊은 자네들이라면 친분으로 그냥 놀러온 거라 우겨도 되는 일이지. 단리악 이 친구는 교림에서 자네들의 호위로 붙여준 무사 정도로 치부할 수 있지." 10대에 일류고수의 반열에 들거나, 20대에 절정고수의 반열에 드는 천재가 구룡팔봉이다. 비록 젊다고 해도 그 무력은 웬만한 문파의 장로와 비교해도 결코 손색이 없으니, 지원세력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적당한 셈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지원은 살각쪽에서 먼저 시작했으니 우리 철궁곡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강보황의 설명에 납득하는 기색을 보이던 일행은 뒤에 살짝 덧붙인 말에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지만, 무림에서 손꼽히는 후기지수들답게 곧 그 의미를 파악해낼 수 있었다. "설마, 다른 구룡팔봉이...?!" "독룡과 장룡이 자네들보다 며칠 전에 갑자기 교림을 나서 조사해보니, 독룡(毒龍), 장룡(掌龍), 지룡(智龍), 뇌봉(雷鳳)이 전대의 도룡(刀龍)인 파산도객(破山刀客)과 함께 살각을 향했다고 하네. 명분은 살각의 은신술을 조금 견식해보겠다는 것이지만...최근 들어 주변에 있는 다른 사파도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더군." 일행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살각이 구룡팔봉을 끌어들이고 다른 사파도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살각뿐만 아니라 아마도 무림의 거의 모든 강대사파가 이미 준비를 끝냈다는 뜻이다. "나 또한 비밀리에 주변의 정파에게 미리 준비를 청해뒀으니, 만약 전면전이 시작된다면 승자라도 극심한 타격을 피할 수 없을 걸세. 패자라면...멸문을 각오해야겠지." 그제 서야 일행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가슴으로 느끼지 못했던 사실을 진정 깨달았다. 자신들이 참여하게 되는 것은 전쟁(戰爭)이며, 그 전쟁은 이미 코앞에 다가와 있다는 잔혹한 사실을. ======================================= 요즘들어 썩어빠진 명문세가의 후기지수들이 거의 대세를 이루는 경우가 많이 눈에 띕니다. 그런 후기지수가 후계자가 되면, 10년도 안돼서 천하제일문파 말아 먹는다는게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 어제의 비연제검님의 그림으로 뒤늦게 올립니다. 비연제검님께 실례한 점 사과드립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24 00:06:49 고친날 2005-06-24 14:54:22 읽은수 12284 [ 9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5.세월유수(歲月流水).(4)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지랄 맞게 됐다고 생각하는데." 비쩍 마른 장신에 마치 잡초와 같이 잔뜩 헝클어진 두발의 청년이 나뭇가지 위에 비스듬히 몸을 뉘인 채 소금물에 푹 담가놓은 것과 같은 짜증을 털어놓자, 누군가 차가운 음성으로 그의 말을 받았다. "그럴 거 없지. 어차피 모조리 죽이면 되니까." 팔짱을 낀 채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던, 흑의를 걸친 냉막한 청년의 대답을 들은 화려한 궁장차림에 풍만한 몸매를 지닌 여인은 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조소를 머금었다. "수라전에서는 그렇게 무식한 방법밖에 안 가르쳐주나 봐?" "말조심하는 게 좋다. 뇌봉(雷鳳) 뇌단혜(雷簞慧)." 벽력뇌가(霹靂雷家) 제일의 기제로 유명한 뇌단혜는 흑의청년의 싸늘한 경고에 입을 다물기는커녕 코웃음쳤다. "흥! 너야말로 조심하는 게 좋을 걸, 장룡(掌龍) 기소막(棄逍邈)." 수라전(修羅殿)의 후계자이자 구룡팔봉 중에서도 상위권에 드는 절정고수인 기소막은 눈을 날카롭게 뜨고 뇌단혜를 노려봤다. 그의 차가운 두 눈에서는 싸늘한 한기가 흘러 넘쳤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뇌단혜의 무공수위는 그보다 분명 낮았지만, 벽력탄(霹靂彈)을 비롯한 갖가지 위험물로 전신을 무장하고 있는 그녀를 건드렸다가는 폭사(爆死)할 위험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후후후, 모두 왜 그래? 중대한 전투를 앞두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지." 그야말로 기생오라비라는 말이 딱 어울릴 듯 싶은 곱상한 외모를 지닌 청년이 둘의 사이에 끼여들어 분위기를 진정시키자, 마른 청년이 여전히 짜증 어린 음성을 토해냈다. "이번엔 또 누구한데 작업 걸려고 지랄이야, 색마공자." "후후, 말이 심하잖아? 이왕이면 풍류공자나 후상(候箱)이라고 불러 줘." 지룡(智龍) 하후상(夏候箱)이 대답과 함께 가벼운 웃는 것을 본 독림(毒林)의 독룡(毒龍) 마이사(摩痍獅)의 안면은 한가득 찡그러졌다. "풍류공자는 지랄이." "후후, 그렇게 말하면 나는 너무 섭섭한데." 계속 되는 웃음에 눈을 더욱 치켜 뜬 마이사는 결국 더욱 큰 짜증만을 쌓고 눈을 돌려야했다. 천하사대사공(天下四大邪功) 중 하나인 천뇌마공(千腦魔功)을 배워 미쳐버린 놈을 상대하느니, 차라리 무시해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이길게 뻔한 싸움이기는 해도 상대에 구룡팔봉이 껴있으면 골치 아프다. 면면을 봐도 거의 우리랑 동급이니까 정말 더럽게 속 쓰려." "그러다 죽기라도 했다가는 다른 정파가 적극적으로 나서게 될 위험이 있으니까, 그게 제일 골치 아프잖아." "후후, 그럼 생포를 하면 되잖아? 그냥 죽이기에는 아까운데..." 하후상이 묘책이라는 듯 내놓은 의견에 다른 셋은 일제히 인상을 찌푸렸다. 불리기야 지룡으로 불리지, 따지고 보면 같은 구룡팔봉이라는 게 치욕스러울 정도로 색마 중 색마인 하후상이 무슨 의도로 생포를 논하는지 그 이유는 너무나도 뻔했다. "네 장난감 때문에 우리가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다고 본다." "후후후, 그럼 다 같이 쓰면 되잖아?" "좆같은 소리 작작 좀 하라고 했다, 색마공자." "후후, 이사는 입이 너무 험하다니까." 철궁곡에 구룡팔봉이 들어왔다는 정보를 받고 의논을 통해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우려 했던 그들은 제대로 된 의논을 방해하는 하후상를 당장이라도 내쫓고 싶었지만, 중요한 의논을 하는데 있어 삼재지문 중 하나인 천뇌문의 제자를 빼놓고 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지라 그저 속만 끓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저것 뭘 그렇게 따져대는 거냐?" 굵직한 음성과 함께 호쾌한 인상의 장한이 기다란 풀잎 하나를 질겅거리며 수풀을 헤치고 나타났다. "구 오라버니도 철궁곡에 다른 구룡팔봉과 낭아검객이 왔다는 건 알고 계시죠?" 칠성회(七星會)에서 혁혁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 파산도객(破山刀客) 구호방(軀豪放)은 뇌단혜를 슬쩍 돌아보았다. "알지.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 "그러니 대책을 세워보자는 소립니다." "지랄하거라." 난데없이 튀어나온 욕에도 그들은 담담히 받아들였다. 구호방의 입이 걸죽한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냥 한 놈만 잡고 좆나게 패. 지면 뒈지고 이기면 돌려가며 좆박든 살점을 저며먹은 상관없거든? 단, 개새끼는 내가 먼저 찍었으니 손대면 눈깔사탕 하나 빼준다." 참으로 간단명료하게 결론을 내린 구호방이 풀잎을 질겅거리며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자, 남은 이들은 조용히 서로를 마주보았다. "거 더럽게 간단한데?" "좋군." "후후후, 딱히 틀린 말도 아니네." "이럴 거면 대체 왜 모였는지 몰라." 무림 제일의 후기지수인 구룡팔봉, 그들은 그렇게 의논을 끝내고 각자 따로따로 흩어졌다. 참으로 캄캄하지 그지없는 무림의 앞날이었다. 다른 이들이 흩어지는 와중에도 가만히 서 있다가 홀로 남은 하후상은 철궁곡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후후후, 그걸 사용했으니, 아무리 철궁곡이라도 이제 어쩔 수 없지." 의미심장한 말을 중얼거린 그는 피식 실소를 흘렸다. 자객의 특성상 정면대결은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살각이 전력을 쏟아 전면전을 벌일 수 있는 이유에는 하후상이 준비해온 그것 덕분이다. 그것은 부족한 전력차이를 채워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살각에게 너무나도 확실한 승리를 가져다줄 것이다. "후후, 철궁곡에 대단한 미인이 있다고 하니, 꼭 내가 먼저 찾아서 사로잡아야 할텐데 말이야." 새하얀 얼굴에 사이한 미소를 띄우며 대체 얼마나 아름다운 미인일지 생각해보던 그는 문뜩 무언가 생각난 듯 판관필로 손바닥을 가볍게 쳤다. "후후, 그러고 보니 생사판관의 제자에게 금사형의 원한도 갚아줘야겠네. 돈버는 재주밖에 없던 주제에 용봉무서에 과욕을 부리다가 자멸해버린 멍청한 돼지새끼지만, 그래도 사형제지간에 최소한의 도리는 지켜야지." 천뇌문(千腦門)의 일천마뇌(一天魔腦) 중에서도 정점에 속하는 한자리수의 구대마뇌(九大魔腦), 그 중 제오마뇌(第五魔腦)의 미소는 더더욱 짙어져가고 있었다. "괜한 일없게 붕대를 감고 다니라고 했잖아." 붕대를 사용해 하얀 얼굴을 익숙한 솜씨로 둘둘 감아주는 친우에게 '가장 큰 이유는 네 오해 때문인데'라는 손짓을 해줘야 할지 말지 잠시 고민하던 남국은 그냥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택했다. 5년 간 갖가지 일을 겪으며 신경과민 수준이 된 금호에게 그런 말을 해줘봤자 별다른 소용없을 것이 분명했다. "후우...내가 이놈의 마력(魔力) 때문에 못살아, 정말." 금호는 이 모든 일의 근원이 된 마력을 탓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지만, 만약 마력을 버리라고 하면 질겁하며 고개를 내저을 것이다. 단 5년만에 반갑자에 가까운 공력을 쌓고, 일류고수의 경지에 달할 수 있었던 것은 거의가 마력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부에 의해 치료받은 이후 더욱 늘어난 마력은 내공의 증진에 전율적인 효과를 가져다줬을 뿐만 아니라, 무공 및 술법의 습득능력까지 천재 중 천재의 수준까지 올려줬다. 천무의 탈을 쓴 무영투괴는 그릇된 힘은 그만큼 큰 부작용을 부른다고 누누이 충고했지만, 그들은 결국 마력이 주는 힘의 유혹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러나 무영투괴의 충고대로 마력에 의해 공력이 빠르게 쌓이면 쌓일수록 그 부작용은 정도를 더해갔고, 작년부터는 복면과 붕대로 얼굴을 가리지 않으면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뭐든 못할 정도에 이르렀다. "사부가 이걸 보면 뭐라고 하시려나." 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사부를 떠올렸던 금호는 곧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사부라면, 외모에 대해 불평불만이 있을 경우 얼굴을 칼로 난도질하거나 불로 지지라고 할 것이다. 마력 때문에 역용술이든 뭐든 제대로 통하는 게 없는 외모를 고치려면 그 방법밖에 없을 테니까.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자세히는 몰라도, 돌아올 때가 진작에 지났다는 것 정도는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몇 년 전부터 투괴에게 부탁해 호악산에 대해 은밀히 알아봤지만, 그 결과는 참으로 어이없었다. 호악산 주변에 있는 수많은 마을이 어느새 폐허가 되고 무덤이란 무덤은 모조리 파헤쳐졌다. 게다가 호악산으로부터 나온 안개는 이제 산을 몇 개나 삼키고도 남을 정도로 넓게 퍼졌는데, 그 안에 들어가서 살아 나온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란다. 사부가 벌인 일이라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머리를 스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의문스러운 점이 너무 많았다. 그들은 엄연히 호악산으로 피신을 간 만큼, 괜히 쓸데없는 일을 늘려서 세간의 이목을 끌만한 이유가 없음에도 이 행사는 너무 눈에 드러났다. 만약 정사의 마찰로 모산파가 여유가 없어지지 않았다면 진작 도사들을 파견해 조사했을 것이다. "언젠가는 돌아오시겠지요." 어느새 방안으로 들어선 천무에게 시선을 돌린 금호와 남국은 그의 한 손에 질질 끌려오는 복면인의 시체를 보며 한숨을 토해냈다. "이번엔 누구죠? 설마 또 십대자객인가요?" "그냥 조무래기 정도입니다. 더 이상 십대자객을 쓰기는 힘들 테지요." 자객이란 암살을 하기보다는 탈출하기가 더 힘든 법이다. 하물며 철궁곡과 같은 대문파로부터 핵심적인 보호를 받는 요인을 암살한다면 천지쌍살이라도 생존율이 4할을 넘기 힘들다. 무정살왕이 나선다면 그나마 6할 정도로 올라가겠지만, 살각으로서는 아직 천지쌍살이나 무정살왕을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기야, 암살 후 탈출하지 말고 그냥 자결하라고 보낸 세 명의 십대자객이 천무에게 손도 대지 못하고 철궁곡 내에서 그대로 증발돼버렸으니 아무리 살각이라도 섣불리 나설 수는 없다. 실제로 천무의 정체가 무림삼괴의 일인인 무영투괴의 둔갑이니, 무정살왕이 직접 나서도 암살을 완벽하게 성공하기는 힘들리라. "쓰시겠습니까?" "일단 좀 볼게요." 금호는 투괴가 내놓은 자객을 꼼꼼히 살폈다. 보아 하니 대략 생전에는 평범한 수준.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중급망자나 겨우 만들 수 있을 정도다. "난 별로. 국이 너는?" 선천적인 불구인 탓에 아직도 벙어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국이 고개를 끄덕여 답하자 금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간단한 주술적 처리를 한 뒤 자객을 도로 내주었다. "별로 쓸모 없는데요. 이왕이면 상급 재료로 가져다주세요." "...자객은 주문생산품이 아닙니다만?" 겉으로는 천무답게 부드럽게 웃으며 답하면서도, 무영투괴는 내심 혀를 찼다. 잡은 자객 중 쓸만한 자객의 시체는 둘 손에 망자로 화했는데, 그 중에는 십대자객 중 세 명조차 포함돼있다. 그 사부에 그 제자라고 해야할지...하기야, 날이면 날마다 자객들의 위협을 받으니 심성이 독해지는 것도 당연하다. 그 대상이 자신들을 노리던 자객의 시체라면 더더욱. 그러나 그 심성의 변화는 단순히 주변 환경 때문만이 아니다. 사이한 주술인 사령술과 흑마술을 익히고 음산한 귀기와 사악한 마력을 기반으로 사용하니 그것이 심성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근본이 바른데다가 사령술과 흑마술이 워낙 깊이있고, 귀기, 마력이 정순한 덕분에 그 영향이 미미하다는 것이리라. 하나 덧붙이자면 흑마술 수련만큼은 투괴 자신이 철저하게 관리했다는 것 정도? '썩을 놈. 악마(惡魔)라는 게 뭔지도 모르는 애들한테 마력(魔力)을 주고 흑마술(黑魔術)을 가르쳐?' 환술을 배우고 숱한 도둑질과 도굴을 하며 많은 지식과 지혜를 쌓은 무영투괴는 그가 서(西)의 출신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사령술과 흑마술이 지닌 위험성을 알고 있었다. 애들이 멋도 모르고 흑마술을 써대다가 중원에 악마가 강림하기라도 했다간, 정사대전은 애들의 전쟁놀이로 여겨지는 대참사가 벌어질 것이기에 철저하게 흑마술 수련을 관리한 것이다. '수백 년 전에 교류가 끊긴 서쪽에서 누군가 온 것도 어이가 없는 일이데...대체 하늘은 어쩌자고 저런 악마 같은 놈이 중원으로 오게 내버려 둔 것인고?'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27 04:28:44 고친날 2005-06-27 04:28:44 읽은수 11942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5.세월유수(歲月流水).(5)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그가 시체를 대충 처리한 뒤 다시 방으로 돌아오자, 어느새 한 명의 여인이 두 청년과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천공자께서 오셨습니까." "안녕하셨는지요, 진소저." 절색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없잖아 있지만, 단아한 분위기로 묘한 기품을 느끼게 하는 진성하(璡星河)에게 인사를 건넨 투괴는 기품 있게 자리에 앉았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이제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진성하의 대답이 그저 형식에 불과하다는 것 정도는 세 사람 모두 알 수 있었다. 살각에게 쫓기며 철방에게 짐짝처럼 끌려 다니던 진성하는 그가 떠나기 전, 주술에 의해 강제적으로 깨워져 계약을 종결한 뒤 다시 몇 년 동안 가사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무영투괴가 알아본 결과, 그녀는 생기와 영기에 적지 않은 손상을 입어 최소한 10년 이상의 수명이 줄었으며, 5년 노화가 촉진됐다. 때문에 이십대 후반의 나이에도 삼십대 초반 내지는 중반으로 보이니, 여인으로서는 참으로 큰 상처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썩을 놈이 대협이라고 불리니, 말세다, 말세야.' 여인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금호와 남국 역시 죽을 위기에서 치유 받았다고는 하는데, 어째 성장을 도와야할 정순한 선천지기는 탁해질 만큼 탁해져있고 요사스럽고 사이한 생기만이 남아있다. 성장이 더디고 갈수록 마력의 부작용이 심해지는 것에는 그러한 생기의 영향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먹을 게 없어서 자기 제자들 생기를 빼먹어? 이런 썩을 놈!' 정말 썩을 놈이다. 그리고 무서운 놈이다. 아마 필요하다면 제자가 아니라 부모형제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벨 수 있을 놈 곁에 있는 아우가 걱정될 뿐이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구룡팔봉을 만났어요." "그래? 누구를?" "네. 그러니까...궁룡, 철룡, 암봉, 음봉과 전대의 검룡까지 해서 모두 다섯이나요." "호호, 암봉과 음봉은 소문대로 아름다웠니?" "에이, 누님만 못하던데요." "얘도 농담은..." 금호가 살짝 말을 꺼내자, 진성하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며 그들 사이에 화기애애한 대화가 오갔다. 사정을 들어보니, 그녀는 어릴 때 부모를 잃은 고아로 약간이나마 부유한 편에 속하는 노부부에 의해 입양되어 키워졌다고 했다. 그런데 노부부가 세월을 버티지 못해 세상을 뜨자, 작은 포목점을 하며 홀로 살다가 걸개방의 무리에게 봉변을 당할 뻔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결국 걸개들이 아닌 그에 의해 봉변을 당하게 됐지만, 그녀는 그래도 일단 구해져서 다행이라고 담담히 웃어넘김으로서 무영투괴마저 감탄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이미 살각에 의해 그들과 한 일행으로 치부된지라 돌아가지도 못하고 계속 철궁곡에 머물며 생활하는 처지였는데, 고아출신이라는 동질감 때문인지 남국과 금호 둘과 마치 한가족처럼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다. '이대로 평화가 계속 지속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만은...'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는 천기를 떠올리자니, 절로 쏟아져 나오는 한숨이었다. "후우...이거 원, 정말 갑갑하군." "팔봉이라기에 기대했는데, 결국은 그 정도였다니." 낮에 문지기를 선 덕분에 가장먼저 구룡팔봉을 만나고 가장먼저 실망해야했던 두 무사는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쓰린 속을 술로 달랬다. 이러한 일은 철궁곡 내의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만큼 남국과 금호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나는 도통 마누라 얼굴이 여자 얼굴로 보이지가 않아. 예전에는 그렇게도 참하게 보였는데 말이야." "그래도 자네는 장가라도 들어서 다행이지, 나 같은 노총각은 쓸데없이 눈만 높아져서 이제 장가가기도 힘들다고." 철궁곡의 무사 중 두 청년의 얼굴을 보지 못한 무사는 거의 없는데, 그것은 축복이자 저주였다. 천하제일로 손꼽을 미인을 볼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은 분명 축복이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 난 뒤에는 웬만큼 잘생긴 외모나 웬만큼 못생긴 외모가 다 비슷비슷하게 보이는 미맹(美盲) 돼버린다는 것은 치명적인 저주다. 아름다움에 눈이 먼다는 묘사를 실제로 체험하게 됐으니, 참으로 웃지 못할 일이었다. "자식놈들에게는 절대 보지 못하게 했는데, 호기심 때문에 자꾸 안쪽을 기웃거려서 볼기짝을 아주 불이 나게 두들겨줬지." "쯧쯧, 애들이 무슨 죄가 있나. 죄가 있다면 다...그 두 명에게 있지." 한 무사의 말에 다른 무사는 진정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여자이기라도 한다면 이루지 못할 나무라도 바라볼 수는 있을 텐데...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얼굴로 남자라는 것 자체가 죄악이었다. 은은한 붉은빛이 도는 술을 속 시원하게 들이키던 무사는 문뜩 앞에 놓여진 술병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이 술은 무슨 술이지? 향이고 맛이고 끝내주는 게 아무리 봐도 엄청난 고급주 같은데." "글쎄...이게 어디서 났더라. 박가에게 받았던가, 송가에게 받았던가? 어째 도통 기억이 안 나네." "뭐, 나중에 고맙다고 전해나 달라고. 그런데 벌써 떨어졌나?" 빈 잔을 채우기 위해 술병을 기울였던 무사는 너무나 가벼운 무게에 아쉬워하며 술병을 기울여 안을 들여다보았다. 보아하니 안에는 아직 히끗히끗한 뭔가가 남아 있었는데, 아무래도 술에 담가놓은 무언가 같았다. 뭘로 담갔는지 알면 무슨 술인지 알 수 있을까 깊어 눈에 힘을 주며 그것을 자세히 살필 때, 문뜩 그것이 빙그르르 돌아가기 시작했다. "응?" 빙그르르 돌며 술병 입구쪽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뚫어져라 보던 무사는 한 순간 그것이 딱 멈춰 서자 두 눈을 부릅떴다. 새하얀 바탕에 핏빛의 둥근 중심을 가진 그것이, 그를 똑바로 마주보고 있었다. "이...?!" 무사가 기겁을 하며 술병을 내던지려는 순간, 핏빛 눈동자를 지닌 눈알이 붉은 액체로 화해 그의 벌려진 입으로 튀어 들어왔다. 바로 코앞에서 화살처럼 쏘아져온 액체를 미처 막아내지 못한 무사는 입 안에서 꿈틀거리는 그것을 끄집어내려고 했지만, 그때는 그것이 이미 목구멍 안으로 넘어간 뒤였다. "응? 자네 왜 그래?" 하늘에 뜬 별을 보며 술잔을 들이키다가 친구가 낮은 신음과 함께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본 무사는 혹시 무슨 지병이라도 있나 싶어 그를 살폈지만, 그는 곧 떨던 몸을 멈추고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아니아니,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서 말이야." "생각난 거라니?" 언제 술병이 비었었냐는 듯 상대의 술잔에 술을 한가득 채워준 그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어떤 잡서에서 본 내용인데, 세상에는 혈주괴(血酒怪)라는 기이한 술이 있다는군." "혈주괴?" "그래, 수많은 사람의 피와 살이 특정한 조건에서 발효해서 만들어진 술로, 그 맛이 천하의 어떤 명주에 뒤지지 않는다고 써있더라고." "헛, 제정신이면 대체 누가 그런 술을 마시겠어? 나라면 아무리 맛이 좋아도 그런 건 안 마셔."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말에 무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술을 들이키자, 그는 더욱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 혈주괴의 향기는 사람을 홀려 반드시 자신을 마시게 한다더군. 게다가 이 혈주괴는 살아있되 살아있지 않은 요괴라, 오랫동안 묵게 되면 스스로 사람과 같은 이성과 지능을 가지게 될 뿐만 아니라 사람을 조종할 수도 있다고 하지." "거 참...술맛 떨어지는 소리하는 이유가 뭐야?" 결국 무사가 참지 못하고 미간을 내려놓자, 그는 마치 그림과 같이 웃는 얼굴로 조용히 말을 끝맺었다. "그냥, 생각났을 뿐이야." "뭐...?" 그의 두 눈에서 요사스러운 광채가 번뜩였다 싶은 순간,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그를 마주보던 무사의 몸이 부르르 떨리며 손에서 술잔이 떨어져 내렸다. 딸그락. 탁자에 떨어진 술잔이 데구르르 구르다가 술병에 부딪혀 멈추자, 한줄기 나지막한 음성이 주변의 공기에 퍼져 나왔다. "자, 이제 다른 친구들을 좀 더 만나 볼까?" "그래, 술은 여럿이서 나눠 마실수록 좋은 거니까." 서로 미소를 교환한 그들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더 많은 이들을 찾기 위해서, 더 많은 사냥감을 찾기 위해서. 철궁곡을 파멸로 몰아가기 위해서... 살아있되 살아있지 않은 두 존재는 각자 하나씩의 술병을 들고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6-30 00:06:09 고친날 2005-06-30 06:39:05 읽은수 11153 [ 9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5.세월유수(歲月流水).(6)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희뿌옇고 음산한 안개 속으로 흘러나오는 노쇠한 음성은 너무나도 미약했다. "날...더 이상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해라. 그러면, 그러면 비급을 숨겨둔 장소를 알려주겠다." "허, 영감탱이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노쇠한 음성을 듣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거한이 갑자기 발을 힘껏 들어올렸다가 아래로 내려찍었다. 콰드드득! "크으윽...!" 거한의 큼지막한 발에 의해 복부에 구멍이 뻥 뚫리고 척추가 분질러진 노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미 허리 아래가 뚝 떨어지고 양팔이 어깨에서부터 잘려나가 남은 거라고는 머리와 몸통밖에 없는 노인이 배에 구멍 좀 뚫린다고 죽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큰 타격을 입었다가는 활강시(活 屍)가 아니라 전설의 불사강시(不死 屍)라도 살아남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내가 죽으면...사사혈독공 사사혈시공의 비급은 찾아낼 수 없다, 절대로!" "뒈진 영감탱이가 죽고 말고 할 게 또 어디 있어? 이걸 그냥 확...!" 거한이 등에서 큼지막한 대도를 뽑아들려던 순간, 마치 아무 것도 없이 텅 빈 허공을 연상시키는 무심한 음성이 흑의사내의 두건 안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오늘 하루동안 너를 해하지 않고 한달 동안 너를 쫓지 않겠다. 대신, 비급을 숨겨둔 위치를 말해라." 흑의사내의 말에 거한은 노인을 향해 험악하게 인상을 찡그렸지만, 더 이상 무어라 말하지는 못하고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조...좋다!" "계약은 성립됐다." 계약을 받아들인 노인은 떨리는 음성으로 그 위치를 설명했다. 흑의사내가 계약을 지킬지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이미 죽음을 앞에 둔 노인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노인에게는 무척이나 다행스럽게도, 그는 모든 설명을 들은 뒤 그대로 등을 돌렸다. "가자." "하지만 대형, 이 영감탱이를 남겨두면 다시 이번과 같은 후환이...!" 참지 못하고 불만을 드러내던 거한은 흑의사내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걸음을 옮기자 결국 끄응 신음을 흘리며 그 뒤를 따랐다. 그때, 흑의사내의 고개가 조금 떨어져 있던 청년을 향해 미미하게 끄덕여지며 청년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무래도 부상이 심각하시니...여기 금창약을 놓아두고 가겠습니다." "이따위 것은 필요 없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흥! 네놈이 끝까지 나를 우롱하는구나!"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뵙도록 하지요." 가까이 다가온 청년이 말과 함께 머리 옆에 하나의 상자를 놓아두고 물러나자 노인은 신경질적으로 외쳤지만, 청년은 온유한 음성으로 정중하게 인사를 마친 뒤 노인으로부터 물러났다. "이, 이이...이놈들이...!" 새카맣게 어린 후배에게 무시당한 셈이 된 노인은 이를 빠득빠득 갈았지만, 양팔이 잘리고 초혼령(招魂鈴)까지 빼앗긴 노인에게는 더 이상 제대로 된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심장, 심장만 있었더라도...!" 심장만 무사했다면 이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그 빌어먹을 망종 놈이 죽자마자 심장까지 파헤쳐 버리는 바람에 이런 처참한 지경에 이르고야말았다. "오냐, 두고보자! 내 반드시 네놈들의 생살을 씹어 삼키고야 말겠다!" 노인은 두 눈에 원한의 불꽃을 이글이글 불태웠다. 상자에서부터 조금씩 피어오르는 연기가 원한의 불꽃으로 인해 가려졌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한 채. 한편, 그들은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은 적당한 속도로 계속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흐릿한 안개 사이로 수많은 무언가가 그들을 뒤따라오고 있는 것이 희끗희끗 보였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그 모습을 신경 쓰지 않았다. "대형,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잘못 된 계약입니다. 저 늙은이의 강시 때문에 무려 5년 동안이나 여기에 붙잡혀 있었는데, 만약 이번에 놓치면 또 얼마나 더 시달려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안다." "아신다면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제가 당장 돌아가서 목을 치고 오겠습니다!" "필요 없다." "계약 때문입니까? 모든 책임은 제가 질 테니 걱정 마십시오!" "필요 없다." 열심히 흑의사내를 설득하던 거한은 문뜩 기이한 것을 느꼈다. '필요 없다'라는 말을 처음에는 '계약을 어길 필요 없다'는 뜻으로 생각했는데, 그것을 다시 한 번 반복해 들으니 어째 '돌아가 처리할 필요 없다'는 뜻으로 들렸다. 둘 다 엇비슷한 뜻인데도 불구하고 어째 미묘한 차이가 있는 듯한 느낌에 거한은 설득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 이런." 갑작스럽게 흘러나온 온유한 음성에 상념에서 빠져 나온 거한은 미간을 팍 찌푸리고 하나의 상자를 손에 들고있는 청년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뭐요, 천공자?" "금창약이 여기 있군요." 이게 웬 뜬금 없는 소린가 싶어 천무를 바라보던 거한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럼 아까 노인네한테 준건 뭐지? 쿠과과과광!!!! "모두 방어태세!" 갑작스러운 폭음에 거한이 반사적으로 명령을 내리자, 그들을 뒤따르고 있던 수많은 무언가가 빠르게 움직이며 주변을 완벽하게 둘러쌓다. "그 영감탱이, 이번엔 또 무슨 수작을...!" "진천뢰(震天雷)입니다." "진천...뭐?" "5년 전 형님에게 만약을 대비한 호신용으로 받아두었던 것인데, 갑자기 폭발한 걸 보니 아무래도 불량품이었던 모양입니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던 거한은 잠시 후에야 그 뜻을 깨달았다. 아까 노인의 옆에 놓아뒀던 상자에 대체 무엇이 들어있었는지를. 그리고 방금 전의 그 폭음에 어디서 어떻게 들려온 것인지를. "혈괴 노선배가 이처럼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세상을 뜨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 사고?" "물론 사고이지요.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거한이 잠시 '사고를 빙자한 살해가 아니고?'라는 말을 해야할까 말까 고민하자, 청년은 그의 판단을 도와주었다. "하기야, 사고든 살해든 계약대상이 아닌 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지요." "...아!" 그제 서야 '필요 없다'라는 말의 뜻을 확연히 깨달은 거한은 진득한 감탄이 어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래...정말 불운한 사고였어. 그렇고 말고." 청년의 무서움을 새삼스럽게 자각한 거한은 앞으로 가능한 그와 마찰을 일으키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내리며 주변에 모여들었던 것들에게 물러나도록 명령을 내린 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흑의사내의 뒤를 따르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이제 돌아가는 겁니까?" 검은 두건이 무심히 끄덕여지자 거한은 이를 훤히 드러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호악산을 떠나는 것에는 뒈져버린 노인네를 처리해 후환을 없애고 비급을 얻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다. 강시군단과 5년 동안 치열한 전쟁을 거치며 거한 자신이 더더욱 강한 힘을 얻은 것처럼, 대형 역시 대부분의 힘을 회복했다는 것. 노인네까지 끝장낸 이상, 살각이고 무정살왕이고 이제 두려울 것 하나 없다는 것이 거한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거, 두 꼬맹이 녀석은 괜찮을는지 모르겠네." "웬만한 상황이라면 크게 상할 일은 없을 겁니다. 설사 살왕이 나선다 하더라도 제 형님의 보호를 뚫기는 힘을 테지요." "그럼 웬만한 상황이 아니면 어떻게 되는 거요?" "그렇다면...안전을 보장하기 힘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청년의 대답에 거한은 의외를 느껴야만 했다. 평소에는 용한 무당처럼 척척 잘만 짚어내던 인간이 웬일로 눈이 흐리멍텅한 사이비 점쟁이 같이 밍밍한 대답을 한 것이다. "천공자도 모르는 게 있긴 있었구만." "제가 신이 아닌 이상 어찌 모든 일을 알겠습니까. 다만..." "다만?" "지금 천기를 보니 철궁곡에서 큰 환난이 닥칠 것 같습니다. 언젠가 스쳐지나갈 칠살성(七殺星)이 갑작스럽게 끼여들었으니 예상을 했지만 미처 대비하지는 못한 환난이고, 그로 인해 천살성이 붉게 물들었으니 많은 이들이 죽음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특히 칠살성의 살기를 받은 일곱 개의 별이 떨어질 테니, 무림의 큰 인물 일곱이 큰 화를 당할 테지요." 잠시 동안 멀뚱멀뚱 청년을 바라보던 거한은 곧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럼 그렇지, 용한 무당이 어디가나. 천기가 어쩌니저쩌니 나름대로 학문적이거나 논리적인 소리를 하려는 거 같기는 한데, 거한이 듣기로는 사이비 점쟁이 뺨치는 소리나 다름 아니었다. "뭐, 그러니까...철궁곡의 큰 인물 일곱이 죽는다 거요?" "철궁곡의 큰 인물 일곱이라기보다는 철궁곡에서 큰 인물 일곱입니다." "...뭔 차인 겨?" "그 일곱 중에 철궁곡의 인물이 전혀 포함되지 않을 수도, 일부만 포함되어 있을 수도, 전부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소리지요." 잠시 동안 머리를 싸매고 끙끙거린 뒤에야 그 뜻을 이해한 거한은 간단한 말을 더럽게 꼬아하는 청년을 지그시 노려보며 확 백호지(白狐知)를 써버릴까 갈등했지만, 겨우 대화하는데 백호지까지 쓰는 것도 우스울 노릇인지라 내심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별이라면 강호오십사무성(江湖五十四武星) 말이요? 보자, 거기에 강호오십사무성이 얼마나 있더라..." 생각해 보자니 많아도 무진장 많았다. 청년이 천이각(天耳閣)을 통해 얻은 정보에 따르면 철궁곡만 해도 염화궁신(炎火弓神)과 무영투괴(無影偸怪)를 비롯해 철룡(徹龍), 궁룡(弓龍), 암봉(暗鳳), 음봉(音鳳)이 있고 살각에는 무정살왕(無情殺王)을 비롯해 독룡(毒龍), 장룡(掌龍), 지룡(智龍), 뇌봉(雷鳳)이 있다. 모두 합치면 11명. 그 중 일곱이면 절반이 넘게 죽어나가는 셈이다. "꼭 강호오십사무성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 비견될 만큼 뛰어난 이들도 포함될 수 있지요." "거 참...더럽게 복잡하네." 거한과 청년이 대화를 들으며 한참 걸음을 옮겨 노인이 말한 장소에서 정교하게 숨겨져 있던 비급을 찾아낸 그는 그것을 품안에 갈무리하며 무심히 물음을 던졌다. "상황은?" "지금쯤이면 출발했던 구룡팔봉이 철궁곡과 살각에 모두 합류했을 테니 준비가 끝났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천기가 불안한 것을 볼 때, 충돌이 얼마 남지 않은 듯 싶습니다." "급하군." "예. 최대한 서둘러야 하지요." 무심히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한 흑의사내가 안개의 한쪽을 향해 손을 내뻗자, 안개가 스르륵 흩어지며 그 사이로 거대한 무언가가 육중한 소리와 함께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쿠웅! 쿠웅! "저...대형, 유령마가 아직 있는데, 꼭 이걸로 타야 하는 겁니까? 예?" 흑의사내가 그 말을 완벽하게 무시했기 때문에, 거한은 결국 묵직한 신음을 흘리며 그의 뒤를 따라 그것에 올라타야했다. 그것의 위에 올라탄 흑의사내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비록 거리는 까마득하게 멀었지만, 그는 자신을 부르는 무언가를 은은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다. 터무니없이 흐리긴 해도 붉은 비릿함과 검은 잔혹함으로 과거를 연상시키는 향기를. 불타오르는 도시에서 사람들이 뛰쳐나와 망자들에게 먹히고 악마의 제물로 바쳐졌을 때, 저주받은 망자들이 병사의 뜨거운 심장을 뜯어먹고 지옥의 악마들이 장군의 머리를 잘라낼 때 느꼈던 열기를. 두 쌍의 날개가 활짝 펼쳐지며 바람을 일으켰다. 앞으로 길게 뻗은 두 목 끝의 두 머리가 하늘을 향했다. 뒤로 이리저리 늘어져있던 꼬리가 채찍처럼 땅을 후려치고 굵직한 다리가 땅을 박차며 몸을 띄웠다. 중력과 바람, 관성등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무형의 장막이 그들을 감쌌다. 사신은 또 다른 피와 죽음, 전쟁이 기다리는 곳을 향해 천공을 꿰뚫으며 다가가고 있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7-03 00:05:28 고친날 2005-07-03 00:05:28 읽은수 11595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6.시산혈해(屍山血海).(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사신의 걸음이 닿은 곳에 죽음의 그림자 남으니, 시체의 산은 쌓이고 피의 바다는 고인다.- "하암...이거 원, 교대시간은 언제 오나?" 입궁문의 위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철궁곡의 무사는 절로 나오려는 하품을 막으려 애썼다. 벌써 몇 년째 하는 짓이니 익숙해질 법도 하련만, 밤잠이 많은 그는 파수를 설 때마다 피로의 그물을 벗어나지 못했다. "글세,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이거라도 한 잔 하겠어?" "응? 이건...?" 요즘 들어 항상 미소를 지어 인상이 좋아진 동료가 내민 술병을 받아든 무사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향기만 해도 그 고아함이 한가득 묻어나는 고급주! 이 냄새를 맡고도 눈이 뜨이지 않는다면 사내남아가 아니다. "하하하, 이거 참 고맙네. 내 두고두고 잘 먹지." 그가 웃으며 술병을 품안에 넣으려고 하자, 동료가 손을 붙잡아 그 행동을 제지하며 미소를 지었다. "한 모금만 마시라고 준 건데." "...사, 사나이가 친구한테 그렇게 쪼잔하게 굴면 사나이가, 사나이가 아니야!" "술 앞에서는 친구고 뭐고 없는 게 사나이지." 오늘따라 유독 짙은 미소를 짓는 동료를 보며 무사는 손을 부르르 떨었다. 보아하니 지금 딸랑 한 모금만 마시고 돌려달라는 소리 같은데, 그랬다가는 오히려 목만 더 타게 될 것이 뻔하다. "젠장, 관둔다! 어차피 파수 중에 술 마시면 안 된다고." "이봐, 한 모금 정도는 마셔도 괜찮아." "누구 놀리냐? 됐어 이 자식아!" 무사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조금 곤혹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인 그는 저 바깥쪽을 힐끔 내려다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지." "뭐?" 퍼억!! 동료의 느닷없는 소리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던 무사의 머리에서 커다란 파열음과 함께 하나의 눈알이 시신경에 매달린 채 밖으로 튀어나왔다. 털썩! 쓰러진 무사의 뒤통수로 곤죽이 된 뇌가 꾸물꾸물 흘러나오는 가운데, 피와 뇌수로 범벅이 된 철궁을 옷자락에 쓱쓱 닦은 또 다른 동료는 무사의 시신을 향해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술을 마셨어야 했어." 입궁문의 곳곳에서 이와 같은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어떤 무사가 술을 마시고 몸을 떨 때, 어떤 무사는 철궁이나 철시에 의해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 모든 일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기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것을 아는 것은 오직 동료들뿐이었고, 동료들은 당연한 일에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스르륵... 그로부터 잠시 후, 구름에 의해 옅은 달빛까지 가려져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일단의 인영이 조용히 이동해왔다. 미리 약조라도 돼있던 듯, 활짝 열려있는 입궁문을 통과한 그들은 각자가 맡은 임무에 따라 곳곳으로 흩어졌다. 궁술과 특수한 기공으로 단련된 날카로운 눈으로 그들의 잠행을 눈치채고 비상신호를 울려야할 무사들은 침묵을 지켰다. 자객들의 검이 그들의 동료의, 가족의 심장을 꿰뚫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미소지으며 철궁곡 안쪽을 봤다. 흐릿한 어둠 너머로 하나의 인형이 보였다. 자객이 아니라 순찰을 돌고있는 철궁곡의 무사들, 조금만 더 다가오면 십중팔구 자객들을 발견하고 비상신호를 올릴 이들이었다. 입궁문에 버티고 서있던 두 명의 무사가 손에 들고 있던 철궁의 시위에 철시를 걸고 있는 힘껏 당겼다. 빠아아...! 시위가 찢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지고 특수하게 제작된 철궁이 소리 없이 휘어진다 싶은 순간, 철판을 종잇장처럼 꿰뚫는 철시가 활을 떠나 날아간다. 퍼억! 진기가 담긴 철시에 의해 머리가 산산이 깨져나간 무사가 서서히 앞으로 쓰러진다. 가슴에 주먹만한 구멍이 뚫린 무사의 몸이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린다. 적을 막아야할 입궁문은 죽음의 문으로 화했다. 철궁곡 곳곳에 세워져있는 망루는 죽음의 탑으로 화했다. 자객을 꿰뚫어야할 철시는 동료들의 심장을 꿰뚫고 그 피로 자신을 더럽힌다. 철궁을 든 무사들의 얼굴에 남은 것은 옅은 미소. 한 잔의 술을 들이켰을 때 떠오른 그 미소는 마치 그림처럼 그들의 얼굴에 단단히 틀어박혀 지워지지 않는다. 설사 그들 자신이 죽더라도, 그들의 혈육을 죽이더라도 그들은 계속 웃으며 화살을 잰다. 자객들에게 가장 많이 암습을 당했던 만큼, 금호와 남국의 반응은 철궁곡에서 가장 재빨랐다. "모두 죽여!" 금호의 외침에 고개를 끄덕인 남국이 빠르게 수인을 맺자, 언제나 그들 주변에 스며들어 있다가 자객들이 나타나는 것을 경고해준 그림자들이 사방으로 튀어나간다. 나뭇가지 위에 은신한 채 상황을 살피던 두 자객의 머리를 대영귀(大影鬼) 그레이트 쉐도우(great shadow)의 거대한 두 손이 감쌌다 싶은 순간, 그 두 개의 머리는 마치 밀가루반죽처럼 그대로 뭉쳐지며 주르륵 알 수 없는 액체를 쏟아낸다. 지둔술로 땅을 파며 접근해오던 자객의 목에 무언가가 스쳐지나간 뒤, 그들의 머리가 조금씩 기울어지다가 목에서 툭 떨어져 내린다. 섬광 같은 속도를 지닌 암영귀(暗影鬼) 다크 쉐도우(dark shadow)가 대체 언제 스쳐지나갔는지를, 그들은 죽어서도 알지 못한다. 어둠에 몸이 숨기고 숨소리마저 철저하게 제어해 완벽한 은신술을 펼치고 있던 자객들의 가슴에서 날카로운 손톱을 지닌 그림자의 손이 튀어나온다. 그 손톱사이에 들려진 채 아직까지 두근거리고 있던 붉은 심장이 천천히 흑영귀(黑影鬼) 쉐도우(shadow)에게 삼켜진다. 그다지 높지 않은 수준의 자객 10여 명이 전멸하는데 걸린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다른 곳도 아닌 철궁곡의 심처에 이처럼 많은 자객이 침투했다면, 이것은 평소처럼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었다. "대환귀(大幻鬼), 어서 나와." 오혈환(五血環)에서 십대자객 중 한 명의 영혼으로 금호가 만들어낸 대환귀(大幻鬼) 그레이트 팬텀(great phantom)이 빠져 나왔다. 환영과 같이 흐릿하면서도, 대영귀 비슷한 크기를 지닌 붉은 안개의 거인은 묘한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네 감지범위 안에서 전투가 일어나는 곳이 있으면, 우리한테 보여줘." 대환귀의 머리 부분에서 두 줄기 붉은 광채가 일렁인다 싶은 순간, 그들 앞의 허공이 기이하게 일그러지며 어딘가의 영상을 흐릿하게 비췄다. 잠들어 있다가 자객들의 검에 심장이 관통된 무사의 몸이 부르르 떨리다가 늘어진다. 무정한 자객의 검은 무사 옆에 잠들어있던 일가족의 심장에 차례대로 검을 내지른다. 자객을 발견하고 철궁을 꺼내며 경호성을 내지르려던 무사의 목에 어디선가 날아온 철시가 박혀들며 기이하게 꺾여진다. 빠르게 달려든 자객이 무사의 목을 잘라 확인사살을 마친다. 뒤에서 휘둘러진 철궁이 무사의 머리를 깨부순다. 굵직한 팔이 무사의 목을 감아들고 비틀어 분지른다. 자객의 검이 턱을 뚫고 들어가 뇌를 관통한다. 일렁이는 검기가 몸을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깨끗하게 양단 낸다. 환영을 통해 철옹성이라 불리던 철궁곡의 무사들이 너무나도 쉽게 스러져 가는 것을 본 금호와 남국의 안색은 순식간에 백지장과 같이 창백해졌다. "배신? 말도 안돼!" "배신은 아닙니다." 반대쪽을 처리하고 온 천무, 아니 천무의 탈을 쓴 무영투괴가 두 명의 무사를 질질 끌고 와 땅에 내려놓자, 금호와 남국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배신이 아니라면...?" "혈주괴(血酒怪)라는 요괴에게 조종당한 혈주괴인(血酒怪人)입니다. 배교에서조차 길들이지 못했던 요괴 중 요괴인데...아무리 설마 이런 걸 준비했을 줄이야." 무영투괴로부터 혈주괴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들은 금호와 남국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설명대로라면 철궁곡 내에 대체 얼마나 많은 무사가 혈주괴에게 홀려 혈주괴인으로 화했는지 알 수 없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대로 가다가는 철궁곡이 십중팔구 멸문하게 될 거라는 잔혹한 사실뿐이었다. "내 진소저와 곡주를 찾아볼 테니...너희들은 심곡(深谷)으로 가거라." 5년만에 처음으로 환술을 풀고 노인의 모습으로 돌아온 무영투괴는 그 말과 검은 복면을 뒤집어쓴 자객으로 둔갑하여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던 금호는 곧 눈빛을 굳히고 나지막한 음성으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고, 남국 또한 간단한 수인을 맺으며 귀기를 방출했다. 이미 5년 전의 사부와 근접한 경지에 이른 두 제자의 방대한 귀기가 주변의 대기를 휘몰아치다가 땅에 스며들며 처소 주변의 땅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푸욱! 하나의 손이 땅을 뚫고 나왔다. 손은 손이되 살점 하나, 근육 하나 남지 않고 단지 서늘한 한기만이 맴돌고 있는 푸르스름한 뼈였다. 마른 팔뼈까지 빠져 나온 두 손이 땅을 짚자, 텅 빈 동공을 지닌 두개골이 흙을 헤집고 모습을 드러내며 목뼈로부터 주르륵 이어진 척추와 얼어붙은 흙이 허파나 내장처럼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갈비뼈가 드러났다. 허리뼈를 뒤틀어 가슴의 묵직한 흙을 털어 낸 해골은 몸을 지탱하고 있는 두 팔을 서서히 펴 하반신까지 꺼냈다. 뼈밖에 남지 않아 유독 길게 느껴지는 다리가 하나 둘씩 빠져 나오며 마침내 팔 대신 몸을 지탱하게 되자, 해골은 허리를 숙이고 땅을 파헤쳐서 하나의 푸르스름한 골도를 찾아들었다. 해골은 그것 하나만이 아니었다. 어떤 녹색 광채를 띈 해골은 화살통을 매고 손에 뼈로 만들어진 활을 들고 있었고, 뼈로 만들어진 투구와 갑옷을 착용하고 있는 어떤 해골의 손에는 유독 스산한 기운을 발하는 골도와 골검이 들려져있었다. 또한 사이한 기운이 담긴 뼈의 지팡이를 들고 있는 거무스름한 해골이나, 두 손에서 뭔가가 간간이 파지직 명멸을 반복하는 유난히 새하얀 해골도 있었다. 그러한 많은 해골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것은, 손에는 골창을 들고 전신을 두터운 골갑으로 둘러싼 채 한 해골마의 등에 올라 타있는 해골이였다. 5년에 걸친 자객들의 암습을 통해 5년에 걸쳐 쌓여진 시체. 5년에 걸친 사령술의 수련을 통해 5년에 걸쳐 모아둔 망자. 바로 이날을 대비해 모아둔 힘과 함께, 사신의 두 제자는 5년 동안 갈아온 시퍼런 칼날을 칼집에서 꺼내들고 있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7-06 08:16:06 고친날 2005-07-06 08:16:06 읽은수 4771 [ 0 K ] 제목 조부님의 상 중입니다.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조부님께서 어제 별세하셨습니다. 며칠간 연재가 부진해지오니 양애하여주시길 바랍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7-07 21:29:55 고친날 2005-07-07 21:29:55 읽은수 9740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6.시산혈해(屍山血海).(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채앵! 두텁지 않지만 그만큼 예리한 도와 푸르스름한 골도가 부딪치며 물씬 풍겨져 나온 한기가 손에 스며든다. 일종의 한독(寒毒)이 섞여, 서서히 피가 식고 움직임이 느려져 결국에는 전신에 새하얗게 서리가 내린 얼음동상으로 만들어버리는 한기(寒氣)다. 카가강! 이미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 손을 억지로 움직여 도로 가슴을 베자 갈비뼈가 부스러지며 푸르스름한 뼛가루와 함께 더욱 서늘한 한기가 물씬 뿜어져 나온다. 심장이 없고 사혈이 없는 적을 상대한다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공격하면 공격할수록 적보다 자신이 타격을 입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유일하게 통용될 것으로 보이는 급소는 푸르스름한 골도에 의해 가장 치밀하게 방어되고 있는 두개골. 정면대결로는 가능성이 낮다. 암습을 해야하지만, 마치 생명의 냄새를 맡는 듯한 적을 상대로는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 하물며 은형포와 복면이 야명주보다 더 밝게 번쩍거리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적이 골도를 휘두른다. 막아야 하지만 얼어붙은 손은 움직이지 않는다. 푸르스름한 도가 복면과 함께 얼굴을 반으로 가르자 피와 뇌가 급속히 얼어붙는다. 얼어붙은 수분이 내부에서 팽창하며 얼굴이 파삭 터지고 눈알이 튀어나온다. 한골병사(寒骨兵士) 콜드 스켈레톤 솔저(cold skeleton soldier)의 검에 한 자객이 쓰러지며 벽이 뚫리자, 그곳으로 쏘아져 들어온 무거운 철추가 한골병사의 푸르스름한 두개골에 틀어박힌다. 콰직! 철추가 틀어박힌 미간을 중심으로 마치 거미줄처럼 균열이 퍼져나간다 싶은 순간, 두개골이 얼음처럼 산산이 깨져나가며 한골병사의 몸이 무너져 내린다. 촤르륵! 사슬이 당겨지며 그 끝에 매달린 철추가 다시 허공을 날아온다. 회수하는 반동을 원심력으로 바꿔 빙글빙글 돌리며 무게를 싣는다. 아무리 한기를 풍기고 한독을 흘린다 해도 충분한 거리를 두고 있다면 상관없다. 철추 끝에 약간 묻어나는 한독 정도는 가벼운 진기의 순환만으로 해독할 수 있다. 철추의 원심력을 극대화시켜 재차 내쏘려 할 때, 앞쪽에서 날아든 무언가가 어깨에 박힌다. 철추가 땅에 처박히는 사이 녹광(綠光)을 띈 뼈화살에 담긴 독기가 퍼져 나온다. 어깨의 피륙이 녹고 뼈가 삭는다. 점차 내장이 썩어 들어가고 혈관을 피 대신 고름이 채워든다. 느리게 퍼져 나오는 독. 서서히 나타나는 효과. 그러나 마비독 만큼은 너무나도 빠르게 퍼져나가 근육을 마비시킨다. 손이 굳고 팔이 굳는다. 발이 굳고 다리가 굳는다.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이 서서히 약해져간다. 녹광을 띄는 독골궁사(毒骨弓師) 포이즌 스켈레톤 아쳐(poison skeleton archer)의 뼈만 남은 손이 새로운 화살을 찾아 화살통을 더듬는다. 그러나 끝없는 연사로 인해 텅 빈 화살통에는 단 하나의 화살도 남아있지 않다. 화살 대신 자신의 갈비뼈를 뽑아 화살통에 넣는다. 사이한 기운이 화살통 안에 몰아치며 안에 담긴 갈비뼈가 쩌저적 나눠져 화살로 화하자, 그 중 하나를 뽑아들어 힘줄로 만들어진 시위에 건다. 퍼억! 육중한 철시가 꿰뚫고 지나간 해골이 조각조각 나며 폭발하듯 사방으로 터져 나간다. 화살통이 떨어져 내리며 단 한 번도 쓰이지 못한 뼈화살이 땅에 후두둑 쏟아진다. 독골궁사의 사정거리를 한참 벗어난 곳에서 철시를 날린 혈주괴인의 얼굴에 짙은 미소를 떠오른다 싶은 순간, 허공의 어둠이 옷자락과 같이 살짝 벌어지며 그 사이로 어둠 자체로 이루어진 화살이 우수수 쏟아져 내린다. 파바바박! 혈주괴인은 빠른 몸놀림으로 두건귀(頭巾鬼) 다크 후드(dark hood)의 암흑시(暗黑矢)를 피해내지만 완전히 피해내지는 못한다. 뭉툭하게 다듬어진 암흑시는 살을 뭉개고 뼈를 분질러 전투불능까지 몰아넣는다. 한골병사와 독골궁사의 호위가 적은 뒤쪽을 노리고 달려들던 자객이 발 밑에서 솟아 오른 대영귀(大影鬼) 그레이트 쉐도우(great shadow)의 거대한 손톱에 양단 되어 사방에 피의 비를 뿌린다. 지붕 위에서 뛰어 내리려던 자객의 목에 암영귀(暗影鬼) 다크 쉐도우(dark shadow)의 손톱이 스쳐지나가며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다 싶은 순간, 어디선가 진기가 담긴 철시가 날아와 마악 한 자객의 심장을 후벼파던 흑영귀(黑影鬼) 쉐도우(shadow)를 꿰뚫어버린다. 해골마의 좌측에 서있던 거무스름한 해골에게서 휘둘러진 지팡이에서 튀어나온 원령(怨靈)이 사악한 저주를 품고 자객을 덮친다. 저주에 씌면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지만, 저주를 견뎌내면 튕겨져 되돌아온 원령이 흑골법사(黑骨法師) 커스 스켈레톤 메이지(curse skeleton mage)의 뼈에 스며들며 하나의 갈비뼈가 분질러져나간다. 흑골법사의 반대쪽에 있던 새하얀 해골이 양손을 가슴 앞에 모으면 파지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양손 사이에 뇌전이 일어난다. 앞으로 내뻗어진 백골법사(白骨法師) 라이트닝 스켈레톤 메이지(lightning skeleton mage)의 양손에서 뻗어 나온 거대한 뇌전이 스친 자객은 피부와 내장이 시커멓게 탄 숯 덩어리가 되어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쓰러진다. 두 해골마의 앞에서는 투구와 갑옷을 입은 두 해골이 흐릿한 안개와 같이 진득한 귀기가 맺힌 골검과 골도를 휘둘러 해골마와 기수를 보호한다. 기(氣)를 흡수하는 귀인(鬼刃) 고스트 블레이드(ghost blade)가 씌워진 골검과 골도는 진기가 충만한 철시와 검조차 쳐내고 분지른다. 자객들이 합격을 펼쳐도 뛰어난 일류고수와 같은 실력을 지닌 두 해골전사(骸骨戰士) 스켈레톤 워리어(skeleton warrior)는 순식간에 합격진을 파해한다. 자객의 눈으로 파고든 골검은 뇌를 가르고 옆구리를 찔러 심장을 터트린다. 정수리를 내려친 골도는 머리를 양쪽으로 쪼개고 복부를 갈라 내장이 후두둑 쏟아져 나오게 한다. 선두에서 길을 여는 것은 해골마에 타고 전신을 두터운 갑옷으로 둘러싼 해골의 창이다. 해골기사(骸骨騎士) 스켈레톤 나이트(skeleton knight)의 기다란 골창이 한 번 내뻗어질 때마다 자객의 얼굴 한 가운데 커다란 구멍이 생기고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혈주괴인의 몸이 종잇장처럼 날려진다. "미치겠네..." 골순(骨盾) 본 실드(bone shield)와 골갑(骨甲) 본 아머(bone armor)에 귀순(鬼盾) 고스트 실드(ghost shield)와 귀갑(鬼甲) 고스트 아머(ghost armor)를 씌워 앞을 막으며 망자들의 통솔에만 집중하던 금호는 머리에 불이 날 지경이었다. 마침 자객들의 시체가 생긴 김에 욕심 것 망자들을 늘리기는 했는데, 그 숫자가 너무 많다보니 통제력이 이제는 거의 한계에 달했다. 만약 통제력을 잃었다가는 생명에 대한 본능적인 증오심을 지닌 망자들이 적아를 가리지 않고 살육을 펼칠 것이다. 심곡으로 이동하며 자객과 혈주괴인들의 공격을 받은 덕분에 망자들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고, 불행이라면 불행이었다. '그런데 대체 왜 갈수록 자객이 많아지는 거지?' 자객들과 혈주괴인을 피하기 위해 가는 심곡인데, 어째 죽이고 죽여도 끊임없이 나타나 달려들고 있었다. 살각이 대체 얼마나 치밀한 준비를 했는지, 얼마나 많은 자객을 투입했는지 도무지 짐작조차 가지 않을 정도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유령마도 미리 준비해뒀을 텐데...철궁곡을 너무 믿고 전력으로 사용할 해골귀들을 준비하느라 유령마를 등한시 한 것이 실수였다. 금호가 망자들을 통제하느라 바빴다면, 남국은 칼을 휘두르느라 바빴다. 해골귀들의 호위는 꽤나 튼튼한 편이었지만, 목숨을 아끼지 않고 달려든 일부 자객들은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호위진을 뚫고 검을 휘둘러왔기에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촤악! 검은 그림자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도와 자객의 검이 부딪쳤다 싶은 순간, 순간적으로 완전한 칠흑빛으로 물든 도가 검을 그림자처럼 투과해 자객의 목을 갈랐다. 도가 투과할 때 이미 힘을 잃은 자객의 검을 골순으로 가볍게 튕겨낸 남국은 귀기를 조절해 흑영도(黑影刀) 쉐도우 블레이드(shadow blade)를 갈무리했다. 하급의 술인 골도(骨刀)가 육신을 가르는 칼이라면 중급의 술인 귀도(歸途)는 기운을 가르는 칼이고 상급의 술인 흑영도(黑影刀)는 공간을 가르는 칼인데, 이 세 개의 술을 중첩해서 사용하면 그 위력이 배가되어 어떠한 기병이보에도 뒤지지 않는다. 예전 투괴에게 선물 받은 도가 골도의 역할을 대신했지만, 이 또한 흔히 볼 수 없는 명도인지라 귀영도(鬼影刀)는 여전히 뛰어난 위력을 발휘했다. 그때, 한 명의 자객이 그들 향해 쏘아진 화살처럼 달려들었다. 다리를 붙잡으려던 흑영귀를 발로 내려쳐 터트리고 암흑시를 쏘아내던 두건귀의 검은 옷자락을 맨손으로 갈가리 찢어버리는 권각술은 결코 평범한 자객이 보일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 복면에 너무나도 분명하게 쓰여져 있는 지(地)자를 보고 자객의 정체를 눈치챈 남국이 급히 수신호를 보내자, 급한 와중에도 그 신호를 바로 눈치챈 금호는 얼굴을 굳히고 망자들을 급히 그 자객을 향해 움직였다. 부웅! 금호의 통솔에 따라 좌우에서 달려든 두 해골전사의 골도와 골검이 휘둘러졌다 싶은 순간, 골도와 골검을 너무나도 간단히 막아낸 자객의 두 손이 두 해골전사의 턱뼈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콰드득! 겉보기로는 단지 스쳤을 뿐이지만, 그 찰나의 접촉을 통해 파고 들어온 막대한 경력은 두 해골전사의 두개골을 산산이 깨부수다 못해 아예 가루로 만들었다. 상급의 망자인 해골전사가 단 일격에 떡이 돼버리는 기가 막힌 광경에 이를 악문 금호는 품에서 아홉 장의 부적을 촤라락 꺼내들었다. 상대는 천지쌍살(天地雙殺) 중 지살(地殺). 단지 툭 치는 것만으로도 내가고수를 즉사시킬 수 있는 무시무시한 내가중수법인 무흔투살공(無痕透殺功)을 익힌 그는 아무리 강자라도 상대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할 초절정고수였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7-09 00:15:32 고친날 2005-07-09 00:15:32 읽은수 10087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6.시산혈해(屍山血海).(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화르륵! 금호의 손에서 아홉 장의 부적이 불타오른다 싶은 순간, 아홉 자루의 비도가 아홉 마리의 원령(怨靈)과 아홉 개의 저주(詛呪)를 품고 지살을 향해 날아들었다. 첫 번째 저주는 눈이 멀고 환청이 들리게 한다. 두 번째 저주는 귀가 먹고 환각이 보이게 한다. 세 번째 저주는 정신을 혼란시켜 적아가 구별되지 않도록 한다. 네 번째 저주는 몸에서 기력을 빼앗아 지치게 한다. 다섯 번째 저주는 공포가 일어나 도망치게 한다. 여섯 번째 저주는 몸을 얼려 느려지게 한다. 일곱 번째 저주는 몸이 약해져 타격이 증폭되게 한다. 여덟 번째 저주는 분노를 일으켜 사방의 모든 것을 마구잡이로 공격하게 한다. 아홉 번째 저주는 정신을 잃고 혼절하게 한다. 저주(詛呪)를 시전 할 때 매개체인 부적을 찢거나 불태워 반작용 자체를 미리 차단하는 주술사(呪術師)의 저주부적술(詛呪符籍術)과, 매개체인 보석에 원령을 가둬 키움으로써 저주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사령술사(死靈術師)의 저주부적술(詛呪符籍術)을 혼합하고 거기에 비도술까지 더한 금호의 저주부적술(詛呪符籍術)은 이미 보기 드문 경지에 올라있었다. 부적을 불태워 효과를 극대화시킨 이상, 상대가 아무리 지살이라도 스치기만 해도 9할이고 막아내면 6할, 피하면 3할이다. 철궁곡의 무사들을 상대로 숱한 인체실험을 거친 만큼, 최소한 한두 가지 저주만큼은 반드시 먹힐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까가강! 지살의 손에 튕겨나간 아홉 자루의 비도는 마치 사기그릇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단지 그뿐이라면 원령의 저주가 지살을 덮쳤겠지만, 그의 손으로부터 마치 해일처럼 흘러든 무흔투살경은 비도 안에 들어있던 아홉 마리의 원령와 함께 저주마저 휩쓸어버렸다. "이런 괴물..." 묵직한 신음성을 흘린 금호는 지살을 향해 망자를 모조리 밀어 붙였다. 한골도(寒骨刀)와 독골시(毒骨矢), 암흑시(暗黑矢)가 경력이 담긴 두 손에 튕겨 나오며 한골병사와 독골궁사의 두개골이 바스러지고 두건귀가 갈가리 찢겨졌다. 뇌전을 내쏘고 저주를 뿜어내던 백골법사와 흑골법사가 해골마와 함께 후두둑 무너져 내렸다. 은밀하게 다가가던 흑영귀와 쾌속하게 손톱을 휘두르던 암영귀의 그림자가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다른 망자들이 우르르 무너져 내리는 가운데, 지살의 움직임을 막은 것은 단 세 마리의 망자였다. 생전 살창객(殺槍客)으로 칭해졌던 해골기사의 골창이 빠르면서도 기기묘묘한 궤적을 그리며 접근을 견제할 때, 살명객(殺明客)이라 불리던 대영귀는 어둠 속을 맴돌며 배후를 노리고 살혼객(殺魂客)이었던 대환귀는 갖가지 환각을 일으켰다. 십대자객으로 만들어진 세 망자의 연수합격은 위태롭게나마 지살을 잡아둘 수 있었지만, 망자가 거의 모조리 휩쓸린 덕분에 자객들은 더 이상 제지를 받지 않고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지살이 나설 때부터 복잡한 수인을 이어나가던 남국의 손이 허공에 기이한 문양을 그리자, 사악한 마기가 뭉클 뿜어져 나옴과 함께 그 앞의 공간이 쩌억 갈라지며 시커먼 안개와 같은 것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와 자객들을 덮쳤다. 위이이이이잉-! 기이한 울림소리를 내는 검은 안개에 휩쓸린 자객들은 마치 쇠몽둥이에 맞은 것처럼 뒤로 날아갔다. 진기로 몸을 보호한 자객들은 그 충격을 가까스로 견뎌냈지만, 검은 안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그대로 자객들에게 달라붙었다. 검은 안개의 실체, 그것은 다름 아니라 수백, 수천에 달하는 검은 벌레무리였다. 작기는 해도 칼날과 같이 날카로운 날개에 쇳덩어리조차 갉아먹을 수 있을 듯한 비정상적으로 큰 턱을 지닌 지옥의 벌레무리, 흑마군충(黑魔軍蟲) 다크 스윔(dark swarm)은 살을 파고들지 못하면 그 대신 눈, 코, 입, 귀로 마구잡이로 파고들었다. 흑마군충은 진기로 몸을 보호한 무사들의 눈알을 파고 들어가 눈알 대신 눈을 바글바글 채웠고, 자객의 머리가 마치 벌레집이라도 되는 양 입과 코, 귀로도 꾸역꾸역 밀려들어가 숨통을 막고는 결국 뇌까지 갉아먹었다. 허나 진기로 몸을 보호하지 못한 자객들에 비하면 그 정도는 양호한 편에 속했다. 피부를 찢고 들어간 흑마군충은 살과 근육은 물론이고 뼈까지 계속 파고 들어갔는데, 그러한 구멍이 하나둘도 아니라 전신에 빈틈하나 없이 숭숭 뚫려있는 벌집 같은 시체는 차마 두 눈을 뜨고 보지 못할 정도로 참혹했다. 그 중에는 분명 혈주괴인도 섞여있었지만, 소환물을 완벽하게 제어할 여유가 없던 남국으로서는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몇몇 무사의 얼굴을 이를 악물어 넘긴 청년의 손이 지살을 가리키자, 흑마술(黑魔術)로 소환된 흑마군충은 소환주의 지시에 따라 지살을 향해 까맣게 몰려들었다. 위이이잉-! 아무리 고수라고 하더라도, 흑마군충이 오공으로 파고 들어와 뇌를 갉아먹으면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초절정고수가 지닌 벽은 너무나도 높았다. 지살이 두 손을 앞으로 내뻗자 무형의 경력이 파도처럼 뿜어져 나와 흑마군충을 휩쓸었고, 막대한 내력을 바탕으로 그의 몸을 둘러싼 호신강기는 접근해온 모든 흑마군충을 밀어냈다. "튀어!" 더 이상 방도가 없음을 느낀 금호가 흑마군충을 단번에 쓸어버리고도 부족해 심령(心靈)에까지 타격을 가한 경력 덕분에 의식이 혼미해진 남국을 부축하고 땅을 박차자, 무영투괴로부터 한 수 가르침을 받은 경공술이 펼쳐지며 두 청년은 바람처럼 빠르게 지살로부터 멀어져갔다. '이런 젠장!' 흑마군충이 주변의 자객을 거의 모조리 휩쓸어버린 데다가, 세 망자가 결사적으로 지살의 추적을 저지해준 덕분에 가까스로 그를 피해 심곡에 도착한 금호는 내심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5년간 쌓아온 힘이 이처럼 미약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예전부터 천하에 명성을 떨쳐온 천지쌍살이 상대라면 도망칠 수 있었던 것만 해도 보통의 무림인들에게는 감탄할만한 일이지만, 힘이 부족하기에 이렇게 도망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빌어먹을!' 그렇지 않아도 엉망으로 구겨져 있던 금호의 기분은 심곡의 상황에 더더욱 무겁게 내려앉았다. 대환귀를 잃은 탓에 확실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5년간 자객들을 상대해온 그는 수많은 자객들이 은신술을 펼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곡주님은? 노야는?' 초조한 심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청년은 목 안으로부터 울컥 치솟는 비릿함을 애써 삼키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망자들이 당했으니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다. 다행히 자객들은 아직 그들을 눈치채지 못한 듯 싶으니, 공격당하기 전에 선수를 쳐야했다. 거의 바닥난 귀기에 비해 마력은 아직 충분했기에, 금호는 흑마군충의 흑마술을 준비했다. 자칫 제어에 실패했다가는 자신까지 이 지옥의 벌레무리의 밥이 될 수 있는 만큼 소환 자체만큼이나 제어에도 신경 써야했다. '좋아, 이제...' 천만 다행스럽게 무사히 주문을 끝마친 금호는 서서히 마력을 끌어올리며 수인이 맺힌 손으로 허공에 문양을 그렸다. 이제 남은 것은 흑마군충을 소환해 자객들을 쓸어버리는 일뿐이다. 그런데, 문양을 그리던 손이 갑자기 아래로 축 내리쳐졌다. '어?' 자신의 의지를 벗어난 손을 망연자실하게 내려다보던 청년의 시야가 갑자기 새하얘지며 몸이 불에 데인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금호가 그 이유를 깨달았을 때, 이미 구멍이 뻥 뚫린 청년의 몸에서는 새빨간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제길, 당했다.' 골갑과 귀갑이 거의 박살나면서까지 역할을 충실하게 다해준 덕분에 심장 대신 어깨가 관통되는 것에서 그친 금호는 통증을 애써 무시하며 벽으로 몸을 붙였다. 극심한 통증에 적지 않은 출혈이었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마악 완성 직전의 극한까지 끌어 올렸던 마력이 갑작스러운 흑마술의 중단으로 인해 역류를 일으키고 있었다. 만약 이대로 마력이 폭주하게 되면 마력에 지배당하게 되기에, 금호는 마력의 안정에 전력을 쏟아 부어야 했다. "금소협. 괜찮은가?" '이 음성은...!' 익숙한 음성에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라도 발견한 듯한 희망을 느끼며 고개를 돌린 순간, 금호는 두 눈을 부릅떠야만 했다. "진대주님...?!" 평소 약간의 친분을 쌓아두고 있던 섬전대주(閃電隊主) 진립(塵砬)을 몰라볼 리가 없었지만, 어둠의 저편에서 철궁에 다시 하나의 철시를 재고있는 그의 얼굴은 너무나도 낯설게만 보였다. 어찌 모르겠는가, 진립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오싹 소름이 돋게 하는 짙은 미소가 요괴의 잔혹한 마성을 드러내는 미소라는 것을...! 절정고수인 진립마저 혈주괴인이 된 것을 깨달은 금호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피할 수 없다. 막을 수도 없다. 절정고수인 진립의 섬전시(閃電矢)는 빛살만큼이나 빠르고 검기만큼이나 예리하다. 그렇다면 이대로 끝이란 말인가? 그때, 갑자기 한줄기 바람이 진립을 스쳐지나가며 그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노야!" "서두르자!" 등에 진성하를 업고 모습을 드러낸 무영투괴가 다짜고짜 둘의 목덜미를 잡고 몸을 날리자, 몇 개의 인형이 그의 뒤를 따랐다. 채재쟁! 은신술을 펼치고 있던 자객들의 검이 갑자기 땅속에서 튀어나오며 무영투괴를 노렸지만, 무영투괴는 그러한 검 끝을 발끝으로 살짝 후려치며 오히려 속도를 높이는 신기에 가까운 경공술을 선보이며 철문 앞에 내려섰다. 무영투괴가 품에서 꺼내든 하나의 열쇠를 철문 옆에 있는 원판의 가운데에 꽂고 원판을 이리저리 돌리자, 도저히 열리지 않을 것만 같던 거대한 철문이 육중한 소리와 함께 열리며 그 내부를 드러냈다. "어서 오너라! 어서!" 뒤쫓아오던 몇 개의 인형이 자객을 헤치고 심곡 안으로 뛰어들었다 싶은 순간, 그는 원판을 빙그르르 마구잡이로 돌린 뒤 열쇠를 뽑아들고 닫히기 시작한 철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7-12 06:19:47 고친날 2005-07-12 06:19:47 읽은수 9477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6.시산혈해(屍山血海).(4)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쿠궁! 육중한 굉음과 함께 철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청년은 문뜩 장막과 같이 짙은 어둠 너머에 있는 이들을 돌아보았다. "하아..." 조금 가물가물한 감이 없잖아 있기는 했지만, 바로 며칠 전에 소개를 받았던 만큼 그들을 기억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칼처럼 날카로운 인상의 검객이 낭아검객(狼牙劍客) 단리악, 어둠 보다 더 어두운 안색을 띄고 있는 청년이 궁룡(弓龍) 강지후, 돌처럼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장한이 철룡(鐵龍) 장방도, 거문고를 안고 있는 미녀가 음봉(音鳳) 언상해, 분노로 치를 떨고 있는 여인이 암봉(暗鳳) 당자소. 이들 다섯과 노인의 모습을 한 무영투괴(無影偸怪), 몸을 떨고 있는 여인 진성하, 붉은 복면을 쓴 금호 자신과 얼굴에 붕대를 두른 친우 남국까지 합쳐 단 9명만이 심곡(深谷)으로 들어온 이들이었다. 단리악을 비롯한 이룡이봉은 전신이 자잘한 상처 투성이었는데, 특히 단리악은 허리가 깊숙이 베여 피를 콸콸 쏟아내고 있었고 무영투괴 또한 한 손이 피와 상처로 범벅이 돼있었다. "노야,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허, 참으로...참으로 고얀 일이다. 고얀 일이야..." 그는 마치 가슴에 구멍 하나가 뻥 뚫린 것만 같은 허탈한 표정으로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따로 떨어져있는 진성하의 처소에서 그녀를 구한 무영투괴는 잠천각(潛天閣)에서 철궁곡주인 염화궁신(炎火弓神) 강보황과 단리악을 비롯한 이룡이봉과 조우한 뒤, 함께 심곡으로 이동하다가 무정살왕(無情殺王)과 천살(天殺), 십대자객(十大刺客)을 비롯한 다른 삼룡일봉의 기습을 받았다. 같은 오신오왕의 위를 차지하고 있는 염화궁신과 무정살왕이나, 거의 대등한 무력을 지닌 구룡팔봉은 서로 용호상박을 이루었다. 무림삼괴의 일좌를 차지한 무영투괴 역시 진성하를 업은 채로도 천살과 십대자객을 어떻게든 잡아둘 수 있었다. 적당히 손속을 나누고 있다가 때마침 합류해온 곽장로의 도움을 받아 그들을 떨치고 몸을 피하려 할 때, 참극이 일어났다. "...곽장로께서...혈주괴인이 되셨다고요?" "진작 눈치챘어야 하는데, 그걸 미처 눈치채지 못한 바람에..." 철석같이 믿고 있던 초절정고수의 암습은 화경의 고수조차 피해내지 못했다. 치명적인 내상을 입은 강보황이 잠력까지 격발시키며 필사적으로 뒤를 막아준 덕분에 그들은 피신할 수 있었지만, 그는 결국 그들을 뒤쫓아오지 못했다. "곽장로님 같은 초절정고수까지 혈주괴에게 홀렸단 말인가요?" "설사 암습으로 제압당했다고 해도 곽장로 정도라면 쉽게 주술에 걸리지 않을 텐데...아마 곽장로에게 스며든 혈주괴야 말로 철궁곡에 퍼진 모든 혈주괴를 조종하는, 최소 수백 년을 묵은 무시무시한 괴물일 게다." "그렇다면, 그 혈주괴를 처리하면 다른 혈주괴인도 정신을 차릴 수 있지 않을까요?" "그건 나도 모르겠구나." 갈수록 절망적인 상황에 그들의 분위기는 무겁게 침체됐다. 철옹성이라고까지 부리던 철궁곡은 혈주괴라는 요물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졌다. 소곡주인 궁룡 강지후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곡주를 잃고 장로와 당주조차 혈주괴인이 된 상황이라면 아무리 낙관론자라도 멸문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무림의 노강호답게 빨리 충격에서 벗어난 무영투괴는 회한에서 벗어나 현실적인 행동에 들어갔다. "곽장로는...비밀통로의 위치를 아는가?" 강지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끝장이다. 조종하는 인간의 기억과 능력을 뽑아 쓸 수 있는 혈주괴라면, 비밀통로의 위치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급히 피신하느라 그들 모두 내상을 입어 제대로 운신하기도 힘드니, 당장 비밀통로를 벗어나 전력을 다해 도주하더라도 한두 시진이 안돼 무정살왕에게 따라잡힐 것이다. 추적술에 능한 살각의 자객들에게는 뿔뿔이 흩어지는 식의 잔재주를 피운다 해도 그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내 몸 하나라면 어찌 보존할 수 있겠지만...이 아이들을 버리고 가면 내 어찌 다시 고개를 들고 살 수 있을꼬?' 명예 따위는 죽 쒀서 개나 주라는 것이 그의 평소 지론이었지만,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가 조금 더 살겠다고 발악하는 건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나 추했다. 차라리 염화궁신과 함께 남아 곽장로를 처리했어야 할 터인데...아니다, 혈주괴는 심령으로 서로 연결돼있으니, 그때 이미 혈주괴인들에게 비밀통로의 위치를 알렸을 것이다. 천운이 닿는다면 심곡의 문이 뚫리기 전에 저들이 물러가거나 원군이 올 수도 있겠지만, 혈주괴라는 사악한 요물까지 주저 없이 사용한 것에는 철궁곡 전원의 살인멸구와 정파에 대한 사파의 선전포고라는 의미가 섞여들어 있는 만큼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떨어지던 일곱 개의 별 중 하나는 역시 나였던고?' 쓴웃음을 머금은 무영투괴는 마음을 평온히 가라앉히고 가부좌를 틀었다. 금호와 남국은 그의 좌우에서, 단리악을 비롯한 이룡이봉은 맞은 편에서 운기요상을 시작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길은 결사항전 뿐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고, 때문에 몸 상태를 최적으로 만들어 두는데 최선을 다했다. 내외상을 다스리는데 전력하며 세 알의 벽곡단을 먹었을 무렵, 마침내 비밀통로의 출구가 뇌봉(雷鳳) 뇌단혜의 벽력탄에 벼락 맞은 고목처럼 박살나며 불청객을 받아들였다. 내곡의 비밀통로는 원래 추적을 방지하기 위해 개미집처럼 꼬여있었지만, 혈주괴인이 된 곽장로는 수월하게 다른 이들을 안내해왔다. 곡주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를 대비해 장로들까지 심곡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알고 있도록 해둔 상세한 조치가 오히려 화를 부른 셈이다. 그들이 나란히 늘어서 간단한 진형을 갖추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비밀통로의 저편으로부터 무언가가 바글바글 몰려들기 시작했다. 사사사사삭...! "독물(毒物)!" 통로의 바닥은 물론이고 벽, 천장까지 가득 채운 채 몰려드는 뱀, 지네, 거미 등의 모습은 그들을 오싹 소름 돋게 했다. 금호와 남국이 내상으로 인해 주술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뭔가 수를 써서 독물을 막으려 할 때, 앞으로 나선 당자소가 사방에 하얀 가루를 흩뿌렸다. 치이이익! 하얀 가루에 닿은 독물들의 몸은 순식간에 녹아 내렸지만, 그 와중에도 일부 독물은 녹아 내리는 몸을 이끌고 다가오다가 언상해의 음공에 의해 파바박 터져 나가며 독혈을 내뿜었다. 그렇게 한숨을 돌리며 더욱 긴장을 높인 그들에게 이번에는 새까만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워낙 어둠이 짙고 속도가 빨라 무엇인지 정확히 확인하기 힘들었지만, 진성하를 제외한 모두는 그것이 무엇인지 똑똑히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런 미친년을 다 봤나!" 대경 질색해 앞으로 뛰쳐나간 무영투괴는 절정의 금나수법으로 그것을 잡아채 기폭부를 해체했다. 벽력탄(霹靂彈)! 자칫 잘못했다가는 심곡을 통째로 붕괴시킬 수 있는 화기를 남발할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명밖에 없다. "흥! 노망든 늙은이가 누구 보고 미친년이라는 거야?" "...아그야, 내가 생각하기에도 네년 미쳤다. 어따 불똥을 싸대, 싸대긴!" "저거 한 방이면 다 몰살시킬 수 있어요." "후후후, 우리까지 몰살시키는 건 참아 줘." 어둠의 장막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이들을 확인한 그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풀잎 하나를 질겅거리고 있는 호쾌한 인상의 장한 파산도객(破山刀客) 구호방, 얼음장같이 싸늘한 인상의 흑의청년 장룡(掌龍) 기소막, 헝그러진 두발에 비쩍 마른 장신의 청년 독룡(毒龍) 마이사, 화려한 궁장 차림의 풍만한 미녀 뇌봉(雷鳳) 뇌단혜, 곱상한 외모를 지닌 공자 지룡(地龍) 하후상. 무엇보다, 그들 뒤에 있는 구뢰궁절(九雷弓絶) 곽정진(廓靜進) 장로가 그들의 시선을 늪처럼 빨아들이고 있었다. "헛, 헛. 이렇게 다시 만나니 참으로 기쁘네." 빠드득! 사람 좋은 미소를 띄고 있는 곽장로의 말에 강지후는 이를 부서져라 갈았다.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강지후의 두 눈에는 육천삼뢰(六天三雷)에 치명상을 입고 피를 통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까지 눈에 똑똑히 박혀있다. 어디 그뿐이던가? 한 식구나 다름없던 철궁곡의 곡도들이 모조리 휩쓸려버린 것도 모두 혈주괴라는 요물 때문이니, 곽장로를 조종하고 있는 혈주괴야말로 강지후의 불구대천지원수나 다름없다. "허헛. 우리간에 잔말은 필요 없을 터...이만 오시게." "오냐, 좋다 이노옴!" 노성을 내지른 무영투괴는 땅을 박차고 곽장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무리 혈주괴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다고 해도 제압 대신 살수를 펼칠 결심을 한 만큼, 그의 기세는 마치 사냥감을 날아드는 맹금을 보는 듯 싶었다. 파바바바밧! 미리 준비하고 있던 곽장로는 아홉 개의 철시를 거의 동시에 쏘아내는 신기를 선보였다. 주변의 방위를 차단하고 쏘아져오는 여섯 개의 화살은 피할 수 없고 강기를 머금고 날아오는 세 개의 화살은 막을 수 없다는 육천삼뢰(六天三雷)는 염화궁신 강보황에게도 치명상을 입힌 무시무시한 절기였다. 그러나 무영투괴는 염화궁신과 달랐다. 곽장로를 믿고 배후를 맡기다가 암습을 당하는 대신 명백히 적대시하는 상황에서 정면으로 육천삼뢰를 받은 것이 그 첫째요, 염화궁신이 천하에서 가장 빠른 화살을 쏠 수 있다면 그는 천하에서 가장 빠른 손과 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 둘째였다. 티디딩! 무무환환보(無無幻幻步)로 여섯 개의 화살을 피한 무영투괴는 무영금나수(無影擒拏手)로 잡아챈 세 개의 화살을 그대로 곽장로에게 내던졌다. 활로 쏘지 않고 손으로 던졌다고는 하지만, 곽장로는 그 끝에 푸르스름한 강기가 맺혀있는 세 개의 철시를 결코 경시치 못하고 뒤로 훌쩍 몸을 날렸다. 카가강! 세 개의 철시가 바닥에 박혀들 무렵, 단리악의 낭아검(狼牙劍)과 구호방의 칠환도(七環刀) 역시 뚜렷한 강기를 머금은 채 서로의 몸을 긁어대고 있었다. 낭인에 의해 만들어진 낭아검법(狼牙劍法)이 거칠긴 하되 늑대의 이빨처럼 날카롭게 급소를 노리는 실전검이라면, 칠성회 정통의 패도인 칠성천왕도법(七星天王刀法)은 정교하면서도 태산을 부수는 것처럼 몸을 통째로 동강내려는 무지막지한 패도다. 서로 상반되면서도 하나같이 공격적인 초식이 주를 이루는 무공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던 만큼, 둘의 몸은 순식간에 피와 상처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7-15 02:01:27 고친날 2005-07-15 02:01:27 읽은수 11452 [ 9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6.시산혈해(屍山血海).(5)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구룡팔봉의 싸움 또한 치열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불타오르는 듯한 아지랑이를 머금은 두 발의 염화시(炎火矢)가 핏빛으로 물든 수라장(修羅掌)과 뇌전에 휩싸인 벽력장(霹靂掌)에 튕겨 나가며 기의 폭발을 일으켰다. 만독통령공(萬毒通靈功)에 의해 어디선가 와글와글 몰려든 독충이 심곡 내부를 시끄럽게 울리며 날아들다 금강나한권(金剛羅漢拳)의 권풍에 밀려 흩어지고 만파금음(萬波琴音)에 휩쓸려 터져 나갔다. 팔극점혈법(八極點穴法)에 따라 현란하게 움직이는 판관필이 자오분심독(子午焚心毒)이 묻은 유령전(幽靈錢)과 부딪치며 요란한 기음을 쏟아냈다. 마치 천하의 온갖 유명한 무공을 다 모아놓은 듯한 장관이었지만, 그들 중 이 장관을 구경할 만한 여유를 가지고 있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것은 두 청년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들은 진성하의 앞을 막아선 채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었다. '으...손에서 땀나네.'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손에서 당장이라도 비도가 떨어질 듯 싶었다. 그러나 주변에 은신하고 있을 자객들은 비도를 고쳐 잡을 여유를 주지 않았다. 내상으로 인해 주력인 주술을 사용하기 힘들게 된데다가, 어깨의 부상도 완전히 낫지 않은 금호에게 남은 것은 비도 뿐이다. 만약 비도를 던질 수 없게 되면 자객들의 암수에 의해 급소를 당해 즉사할 것이 명백했다. '제발 미끄러지지 마라, 제발...' 진기까지 사용하며 비도를 손에 잡아두고 있었지만, 마치 홍수라도 난 듯 계속해서 흐르는 땀은 결국 비도를 흐트러지게 만들었다. 사악! 발 밑에서 섬광과 같이 뻗어 나온 칼날을 피해내며 비도를 자객의 머리에 틀어박았다 싶은 순간, 갑자기 목덜미가 섬뜩해지는 느낌에 몸을 핑그르르 돌리며 자세를 낮추자 벽에서 튀어나온 자객의 검이 아슬아슬하게 머리 위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푸욱! 곁에 있던 남국이 친우의 위기에 급히 도를 휘둘러 자객의 목을 자르자, 두 명의 자객이 남국의 배후를 노리고 튀어나왔다가 귀영각(鬼影脚)의 각법에 내장이 터지고 비류구도(飛流九刀)의 비도가 팔과 심장이 박혀 무너져 내렸다. "허억, 허억!" 그로부터 끝없이 튀어나오는 자객들과 싸움에 싸움을 거듭하던 금호는 점점 숨이 가빠짐을 느꼈다. 붉은 복면은 분명 잘 만들어진 최상품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쉴 사이 없이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자니 미묘하게나마 호흡에 방해를 주고 있었다. "이런 젠장!" 순식간에 네 개의 비도를 흩뿌려 자객들을 떨친 금호가 거추장스러운 복면을 벗어 던지고 다시 비도를 고쳐 쥐자, 남국 또한 갑갑한 붕대를 그대로 뜯어내며 도를 똑바로 치켜들었다. 아무리 갑갑했다고는 해도 목숨이 오가는 전투 중에 하는 일 치고는 명백한 딴 짓인 만큼, 자객들의 폭우 같은 공세를 각오한 금호는 경계심을 극도로 높였다. 헌데, 어째 자객들의 반응이 괴이쩍었다. 은신술을 풀고 튀어나오던 몇몇 자객들이 그대로 몸을 멈춘 채 몸으로 그들의 칼을 받아낸 것이다. 공격을 하고는 정작 그 자신이 놀라버린 금호는 어째 소란이 잦아든 느낌에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것이 상당히 익숙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두 눈을 사납게 치켜 떴다. "이 새끼들아! 내 얼굴이 뭐 묻었어?!" 비도를 던져 다섯 명의 자객을 한꺼번에 저승으로 보내버리며 내지른 날카로운 고함에 화들짝 정신을 차린 그들은 허겁지겁 시선을 돌렸지만, 그들의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두 개의 얼굴이 맴돌고 있었다. 금호의 얼굴은 진주가루를 발라놓은 듯한 뽀얗게 빛을 발하는 듯한 피부에 뛰어난 장인에 의해 가공된 보석을 보는 듯한 반듯하고 매끈한 오관, 별을 담아놓은 듯 은은히 빛나는 눈동자와 초승달 달 같이 미려한 곡선을 지닌 눈썹, 은은한 듯 싶으면서도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마력과 같은 염기(艶妓) 덕분에 마치 태양과 같은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 게다가 그 옆에 있는 남국은 청순함의 극에 달해 달과 같은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으니, 서로 대비를 이루며 각자의 미를 더욱 뽐내는 둘의 얼굴을 동시에 본 이들의 충격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저 얼굴로 남자라니, 그건 범죄야!' 이룡이봉이 작금의 상황마저 잊고 절규할 때, 삼룡일봉은 각자 눈에서 뜨거운 불꽃을 피우고 있었다. "후후훗! 내가 먼저 찍었습니다." "지랄한다. 먼저 잡으면 장땡이지." "강한 자가 미인을 얻는 법 아니던가?" "흥, 나보다 예쁜 년은 다 죽어야해!" 삼룡이 서로를 향해 경쟁의 불꽃을 불태웠다면, 일봉의 두 눈에 타오르는 것은 질투의 불꽃이었다. 그 불꽃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이룡이봉은 자신도 모르게 그들을 동정해버릴 뻔했다. "다 죽어버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금호는 미친 듯이 비도를 내던졌다. 격한 상황 때문에 극히 흥분된 상태에서 5년에 걸쳐 쌓여온 역린이 건드려지자 완전 폭발해버린 것이다. 공격에 거의 전력을 쏟아 붙는 만큼 곳곳에 급소가 드러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객들은 그 급소를 노리지 못하고 비도를 피하는 데만 급급했다. '그거...미인계야, 호야.' 격분으로 인해 눈썹 끝이 파르르 떨리자, 그 염기가 도를 더해 자객들을 뒤흔드는 친우의 모습에 남국은 자객을 향해 도를 휘두르면서도 내심 고개를 내저을 수 없었다. 미모 때문에 저토록 격분했는데, 그래서 오히려 미모가 더해져 자신도 모르게 미인계를 쓰는 셈이 돼버린 친우의 처지가 너무나 측은했기 때문이다. 그게 또 문제였다. 그렇지 않아도 청순한 분위기이던 얼굴에 떠오른 측은함은 마치 짙은 우수처럼 비쳐져 그 청조함을 더했고, 때문에 남국을 마주본 자객들은 칼을 휘두르던 손을 멈칫하며 남국의 도를 피하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어느새 친우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도 모르게 미인계를 쓰는 모습이, 그야말로 친구는 서로 닮는다는 말을 그대로 증명해주는 듯 싶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어째든 그들은 어지간한 섭혼술조차 능가하는 사악한 악마의 마력 덕분에 한결 편하게 자객을 상대할 수 있었다. 쿠웅! "악!" 철문에 등을 대고있던 진성하는 갑자기 우렁찬 굉음과 함께 철문이 울리자 깜짝 놀라며 몸을 땠고,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함이 스쳐지나갔다. 한철로 만들어진 두터운 철문이 저처럼 울린다면 최소한 강기를 쏟아 부어야 할 터. 이 자리에 없는 무정살왕과 천지쌍살이 전투가 시작된 것을 눈치채고 합류를 위해 철문을 때려부수기 시작한 것이 십중팔구 틀림없었다. 쿵! 쿵! 철문이 떨리면 더 이상 버티지도 못하게 될 터. 그 전에 어떻게든 승부를 봐야했기에 철문을 울리는 굉음이 커질수록 그들의 손은 빠르게 교차했다. 무영투괴를 비롯한 단리악과 이룡이봉은 공격에 박차를 가한 반면, 곽장로를 비롯한 삼룡일봉 등은 철문이 뚫리기만을 기다리며 수세에 집중했다. 가공할 충격에 의해 철문이 점차 휘어지기 시작했음에도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자 그들의 마음은 점차 조급해졌고, 그 결과 오히려 지나치게 큰 빈틈을 보이고야 말았다. 퍼억! "크윽!" 10성의 벽력장에 가슴을 정통으로 맞아 저릿저릿한 충격을 받은 장방도가 무거운 소리를 내며 다섯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을 때, 구호방의 칠환도가 허리의 부상이 한계에 다다른 단리악의 가슴을 길게 갈랐다. "쿨럭!" 보법으로 몸이 양단 되는 것은 가까스로 피했지만, 칠환도가 가슴을 베고 지나가며 쏟아낸 도강의 충격파는 단리악의 내장을 통째로 뒤흔들었다. 장방도는 외기의 순환을 통해 충격을 어느 정도 떨쳐버릴 수 있었지만, 단리악의 내상은 굳이 구호방이 끝장을 내지 않더라도 제대로 된 치료가 없다면 일각을 넘기기 힘들 정도로 심각했다. 띠리리리리링! 띠리링! 언상해는 금음의 연주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막대한 공력이 필요한 만파금음의 특성 때문에 이제는 금음에 싣는 진기까지 간간이 끊겨지고 있었지만, 그녀가 연주를 멈추면 그렇지 않아도 불리한 형세가 완전히 무너지게 됐기에 결코 연주를 끊을 수 없었다. 팅-! 흐트러진 음금소리에서 자신이 뜯고 있던 금의 현이 끊겨진 것을 깨달은 그녀는 금을 내려다보았다. 붉게 물든 금의 한 가운데를 관통해 있는 것은 하나의 싸늘한 금속. 그리고 그 기이한 빛깔을 띈 금속이 이어져 있는 것은 바로 그녀의 심장이었다. '무정검(無情劍)...' 촤아악! 그 검의 이름을 입밖에 내려던 순간, 무정검이 뽑혀져 나감과 함께 그녀의 모든 혈맥이 가닥가닥 끊기며 심장에서 붉은 생명수가 가득 뿜어졌다. "언 언니!" "무정살왕(無情殺王)!" 당자소와 강지후는 비명과 같은 절규를 터트려 언상해의 죽음과 그의 존재를 알렸지만, 그때는 이미 무정검은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춘 뒤였다. 천하제일자객 무정살왕은 처음부터 이곳에 섞여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모두 피해라, 어서!!" 승산이 없어졌음을 확인한 무영투괴는 경호성을 내질렀다. 그러나 어쩌란 말인가? 사방에는 자객이 가득하고 무정살왕은 보이지 않는 이 상황에서, 대체 어디로 어떻게 피해야 한단 말인가? "이이이...내 기공도 뚫을 수 있는지 어디 보자!!" "안 된다!" 언상해의 죽음에 분노한 장방도는 언상해의 시체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들며 사방으로 금강나한권을 휘둘렀다. 천하제일투의 위명에 걸맞게 무정살왕의 은신을 흐릿하게나마 느낀 무영투괴는 장방도를 제지하려고 했지만, 곽장로의 철시와 자객들의 암습은 무영투괴를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크...윽!" 금강나한권으로 무정살왕이 파고 들어올 틈을 막던 장방도는 하나의 싸늘한 기운이 주먹 끝에서부터 팔꿈치까지 똑바로 파고 들어오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정살왕의 무정검이 그의 팔을 통째로 꿰뚫은 것이다. 쿠웅! 필사적으로 진기를 끌어올려 반대쪽 주먹을 내뻗으려던 장방도의 거체가 결국 전신 혈맥이 가닥가닥 끊긴 채 무너져 내렸다. 끝이다. 이제 더 이상 무정살왕이 손을 쓰지 않더라도, 지금의 상황으로는 일다경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콰아아아앙-!! 바로 그때, 엎친대 덮친 격으로 그들이 등지고 있던 철문이 마침내 폭발하듯 깨져나가며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가까스로 진성하와 함께 그 여파를 피한 금호와 남국이 이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상황에 절망하려던 순간, 철문이 무너지며 일으킨 먼지의 저편에서 한줄기 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대체 왜 문을 안 열어 주는 거냐, 응? 고생고생 하다가 무려 5년만에 돌아왔는데, 이런 푸대접이냐?" 금호의 고개가 부러지듯 뒤로 돌아갔다. 남국의 입술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살짝 벌어졌고, 무영투괴의 노안에 일말의 안도감시 스쳐지나갔다. 곽장로의 미간이 가득 찡그려졌다. 무언가 기이한 분위기에 다른 이들도 손속을 멈추고 돌아가는 상황을 살필 때, 누군가의 걸음소리가 그들의 청각을 파고 들어왔다. 저벅. 저벅. 너무나도 조용하기에 오히려 너무나도 크게 들리는 걸음소리가 다가올 때마다 금호와 남국의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먼지 사이로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을 때, 그들은 결국 참지 못하고 고함을 터트렸다. =============================== 자아,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주인공 등장! 그와 함께 필자는 [한 턴-내지는 수 턴-휴식!]을 선언합니다. 컨디션이 한 번 망가지니 글쓰기 힘들더군요. 컨디션이 회복되면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7-16 20:29:32 고친날 2005-07-16 21:37:11 읽은수 3712 [ 1 K ] 제목 [감사공지]감사드립니다.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저의 미흡한 글을 재미있게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우선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덕분에 선호작 베스트 30위 안에 들고, 가뭄에 콩나듯 오늘의 베스트 10위 안에 드는 영광도 누려보는 필자입니다. 원래 목표이던 평균조회수 1만!을 달성하지 못한 것은 애달프지만 이것만 해도 어디겠습니까. 스스로의 부족함을 느끼고 집필에 더욱 용맹전진할까 합니다. 그러나 역시 컨디션이 무너져서 그런지, 글이 이모저모로 흐트러져 연재할 지경이 못되는 관계로 휴식에 들어가는 점 사죄의 말씀드립니다. 이 그림자 없는 이는 성격이 무척 덤벙댑니다. 그래서 글을 쓰다보면 오타를 남발하고 가끔가다가는 딴길로 세는 등, 스스로에게 부끄러워 콱 모니터에 머리박고 나자빠지는 일을 자주 벌입니다.[100%실사로, 다행스럽게 모니터가 깨지진 않습니다.] 때문에 이 부족한 필자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무적사신에 꾸준한 애정과 격려를 보내주시고, 그에 대한 솔직한 감상과 문제점에 대한 지적을 해주시면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사담* 이 그림자 없는 이는 사실 독자분들 놀려먹기를 매우 좋아합니다. 덕분에 절단마성에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룬 고로, 휴식 후 올리는 글도 간간히 단장토혈과 주화입마 수준의 절단마공이 간간이 펼쳐질 듯 싶습니다. 장이 끊어지시면 병원으로, 피를 토하시면 한의원으로, 주화입마를 입으시면 천하삼대신의를 찾아가시기를 미리 알려드립니다. -그림자 없는 자, 無影者드림-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7-24 06:15:24 고친날 2005-07-24 06:15:24 읽은수 10143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7.경천동지(驚天動地).(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사신, 한 손에 하늘을 놀라게 하고 한 걸음에 땅을 울리게 한다.- "사부님!!" 5년만의 기나긴 시간만에 돌아온 그는 여전히 무심한 태도로 주변을 천천히 훑었다. 어찌보면 제물을 찾기 위한 의식 같고, 어찌 보면 그저 무의미한 행동만 같았다. 그의 고개가 살짝 스쳐지나간 이들은 적아를 불문하고 자신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며 뒤로 물러났다. 그것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산 자의 본능과도 같았고, 맹수의 위험을 느끼는 초식동물의 생존감각과도 같았다. 단 한 명, 모든 이들이 물러날 때도 무정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에게 그의 고개가 향했다 싶은 순간, 한줄기 무심한 음성이 심곡 내부를 울렸다. "죽여라." 너무나도 무심하기 그지없는 음성에 오싹한 소름과 묘한 기쁨을 동시에 느낀 두 청년의 얼굴이 복잡하게 물들 때, 그의 뒤로부터 하나의 거대한 그림자가 그 덩치에 맞지 않는 바람 같은 속도로 튀어나왔다. "으하핫! 뒈져라!!" 촤르르르륵-! 거한의 손목에서 길게 튀어나온 은빛 바탕에 은은한 붉은 광채가 맴도는 칼날의 채찍이 허공을 가르고 바닥을 긋자, 아무 것도 없던 허공에서 상체와 하체가 절단된 자객들이 피와 내장을 우르르 쏟아내며 모습을 드러낸다. 끼리릭-!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두 명의 자객이 은형포를 내던지고 거한을 향해 검을 휘두른다. 그러나 그들의 검은 철갑과 같은 외피에 눈곱만큼도 파고들지 못하고 기름이라도 바른 듯한 새하얀 털에 의해 주르륵 미끄러진다. "바늘장난 하냐?" 이를 훤히 드러내며 큼지막한 미소를 지어 보인 거한의 손등에서 여덟 개의 발톱이 솟아나 급히 몸을 물리려던 두 자객의 복부를 가른다. 쫘악 갈라진 복부로 파고 들어간 두 개의 손이 내장을 쥐고 그대로 뜯어내,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는 자객들 앞에서 씹어 삼키며 사방을 피로 물들인다. "쩝쩝, 마침 출출했는데 고맙다." 입가를 피로 물들인 거한은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흉신악살! 그 자체나 다름없는 모습에 모든 이들은 심신이 위축되는 것을 피하지 못한다. 피이잉-! 화살이 쏘아진다. 여섯 개의 화살은 방위를 점하고 세 개의 화살은 생사를 점하는 육천삼뢰가 거한을 노리고 날아든다. 미간을 찌푸린 거한의 몸이 비호와 같은 맹렬한 움직임으로 발톱을 휘둘러 삼뢰시를 쳐낸다. 육천시가 몸에 부딪쳐 허무하게 미끄러져 나간다. "이 영감탱이는 또 뭐야?" 귀찮다는 듯, 또는 불쾌하다는 듯한 음성에 곽장로의 얼굴에 노기가 치솟는다. "허엇...이노옴! 내 너를 죽여 원한을 갚겠다!" 거한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여졌다. 언제 저 늙은이를 팬 적 있던가? 아니다. 한 주먹이면 바로 저 세상에 갈 영감을 위해 특별히 손 힘에 조절을 해뒀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한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걸 보니 결론은 하나뿐이다. "내가 영감 자식이나 손자를 보내버린 모양인데...세상사는 게 다 그런 거야. 이해하라고." 곽장로의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노기가 살기가 되며 철시에 그것을 담아 쏘아내려 할 때, 거한의 미간이 가득 찌푸려진다. "거 참 귀찮게 시리!" 파바바바바밧-! "헛!" 거한의 한 팔이 내뻗어지며 손등으로부터 가는 비수가 폭포수처럼 끊임없이 쏘아져 나와 곽장로를 노린다. 철궁을 휘둘러 급급히 쳐내고 보법으로 피해도 부족해 호신강기로 비수를 막아내지만, 하나 하나에 경력이 담겨 있기라도 한 듯 비수 하나가 스칠 때마다 호신강기에 은은한 충격이 전해진다. "허엇, 이놈이...!" 5년 전 겨뤄봤을 때와는 몇 갑절이나 강해지고 기이해진 거한의 무공에 당황한 곽장로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다가 결국 살을 주고 뼈를 깎기 위해 수신을 포기하고 철궁에 철시를 건다. 그때, 거한이 내뻗고 있던 팔을 거둠과 동시에 반대쪽 주먹을 앞으로 내뻗자 네 개의 발톱 중 두 개의 발톱이 거한의 손등에서 사라진다. "허...?" 경악으로 두 눈이 부릅떠진 곽장로의 몸이 비틀거릴 때, 어느새 호신강기를 뚫고 가슴에 박혀든 발톱이 요사스러운 붉은 빛으로 번뜩인다. '5년간, 5년간 칼을 갈아왔는데,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조금 늦게라도 아들이나 손자 곁에 보내줄 테니까, 잘 가라고." 콰직!! 성큼성큼 다가온 거한의 주먹이 곽장로의 안면에 틀어박힌다. 눈알이 터져 나가고 코가 가루가 되며 안면이 움푹 함몰된다. 철궁을 든 손이 움찔거리다가 힘없이 늘어지며 곽장로의 몸이 무너져 내린다. 경악, 경악. 경악! 혈주괴인이 되어 본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고는 해도, 기병삼곡 중 하나인 철궁곡의 장로이던 곽장로가 눈 깜짝할 사이에 박살나버리는 비현실적인 광경에 모두 심장이 멈출 듯 경악한다. "혀, 형씨는 대체 뭐여?" "나?" 거한이 자신을 가리키며 되묻자 구호방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식견이 적지 않지만 천하에 저런 괴물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 없다. 경력을 맨몸으로 받아내고도 상처하나 나지 않는 강기일식( 氣一息)의 외가고수 중에 저런 이가 있었다니! 구호방은 문뜩 거한의 등에 매여져있는 커다란 대도를 발견했다. 대도를 사용하는 외가고수, 그렇다면 설마...! "불사패왕(不死覇王) 철방!" "오, 잘 아네." 알아서 재깍재깍 대답해 주는 것에 히죽 웃어 보인 철방의 얼굴이, 마치 햇볕 짱짱하던 하늘이 갑자기 먹구름에 뒤덮여 소나기와 천둥번개를 쏟아내는 것만 같이 극에서 극으로 급변한다. "그런데 왜 반말이야, 이 새꺄!!" 채앵-! 흉신악살조차 냅다 엎드리고 목숨을 빌 것 같이 흉악하게 변한 그가 대도를 뽑아든다 싶은 순간, 철방의 손목의 살을 찢고 튀어나온 용린편(龍鱗鞭)이 촤르륵 대도에 감겨들어 용린도(龍鱗刀)를 이루며 그의 몸이 구호방을 향해 쏘아져간다. "뭐 이딴...!" 너무나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혹했다고 해도 파산도객 구호방의 실력은 어디 가지 않는다. 시퍼런 강기에 둘러 쌓인 칠환도가 패도적인 것으로 치자면 천하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칠성천왕도법, 그 중에서도 가장 강맹한 위력을 지닌 칠성파천(七星破天)의 초식에 따라 용린도를 마주해간다. 카앙! 칠환도에 부딪친 용린도가 날아간다. 구호방의 입에 물려져있던 풀잎이 한바퀴 돌아 원을 그린다. "이...사기꾼..." 말과 함께 피가 울컥 뿜어져 나오며 풀잎이 붉게 물들었다 싶은 순간, 가슴이 쩌어억 갈라진 구호방의 몸이 뒤로 쿠웅 넘어가며 풀잎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진다. "병신. 내가 언제 도를 겨루자고 했냐?" 용린도를 내던져 너무나도 간단히 칠환도를 막은 대신, 구호방의 가슴에 박아 넣어 가슴을 좌우로 뜯어낸 혈랑조에 묻은 피를 혀끝으로 스윽 핥는 철방을 보며 중인들은 말을 잊었다. 불사패왕 철방. 대도를 쓰는 걸로 알려진 외가고수. 그러나 그 대도를 암기 내지는 방패, 요리용 식칼, 구이용 철판, 사기치는 도구로 쓴다는 것은 미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칠성회의 정통을 이은 만큼 철저한 도객인 만큼, 도객이 도를 손에서 놓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한 수치라고 여기고 있던 구호방이었기에 그러한 철방의 속임수에 너무 간단히 휘말려든 것이리라. "뭐...뭐 저런 지랄 맞을 인간이 다 있어?!" 눈 깜짝할 사이에 두 명의 초절정 고수를 저 세상으로 보내버렸는데, 그중 하나는 암기술이고 다른 하나는 사기술이다. 특히 가족 곁으로 보내주겠다고 죽여버리는 거나, 반말을 했다고 곧바로 달려드는 것은 아무리 봐도 정파의 대협 소리를 듣는 작자가 할만한 일이 아니다. 대협은커녕 천하에서 손꼽히는 마두라도 웬만해서는 못하는 짓거리다. 정파이면서도 독과 암기를 사용하는 사천당가의 당자소조차 암기술이 이처럼 비열하게 보이긴 처음이고, 거대사파의 후계자로 갖가지 악행을 다 봐온 삼룡일봉으로서도 상대를 속이는 전술이 이토록 야비하게 느껴지기는 처음이다. "지랄 맞을? 이 배 터져 죽을 때까지 엿먹여서 달게 절은 손가락을 잘라 빨아먹어도 부족할 새끼가 어르신 앞에서 감히 육두문자를 쓰네?" 무영투괴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나이 지긋한 곽장로도 단칼에 보내버린 놈, 명백한 무림선배인 자신의 앞에서 '지랄 맞을'은 욕으로 들리지도 않을 흉설을 마구잡이로 지껄이는 놈에게 있어 대체 '어르신'의 기준이 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그것을 따질 여유조차 없었다. 특히 눈동자에 시퍼런 귀화가 불타오르는 철방과 시선이 마주친 독룡 마이사는 이미 심장이 반쯤 멈춘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너 이제 죽었다.' 잔인무도과격의 극치에 이르는 광경을 보면서도 씨익 미소를 짓고 있던 금호의 시선이 문뜩 바깥쪽을 향했다. 사부와 철방이 철문을 깨부수고 왔다면, 그 밖에 있었을 자객들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궁금했다. "...저건..." 금호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심곡의 앞을 막아서고 있는 거대한 그것은 마치 청년이 아는 몇 가지를 연상시켰지만, 그 어떤 것과도 닮지 않았다. 그럼에도 저것에 굳이 이름 붙이자면, 단 하나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 ...내가 설정했지만, 네놈도 참... 철방:"내가 뭐?" 아니, 됐다. 철방:"새끼가 누구 놀리나?!"[퍼억!!] 꾸엑! ------------------------------------- 절단마공의 후유증이 너무 클듯 싶어 스리슬쩍 한편 올립니다. 다음 편은 다음주나 다다음주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7-31 00:23:23 고친날 2005-07-31 07:13:10 읽은수 9746 [ 12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7.경천동지(驚天動地).(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티디딩! 두터운 철판도 종잇장처럼 관통해내는 철시가 마치 피를 머금은 것처럼 붉은 바탕에 짙은 밤의 어둠과도 같은 묵광이 번뜩이는 비늘에 튕겨나가자, 파충류의 것과도 같은 네 개의 눈이 번뜩이며 은신술로 몸을 숨긴 채 접근해오는 자객과 연달아 철시를 내쏘는 혈주괴인을 훑는다. "크르르..." 마치 악어와 흡사 흡사한 형태에 집이라도 통째로 집어삼킬 수 있을 듯만 싶을 만큼 커다란 입이 쩌어억 벌어지며 칼을 주르륵 박아놓은 듯한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싶은 순간, 두 기다란 목 안쪽으로부터 거대한 굉음이 쏟아져 나온다. "크롸롸롸롸롸롸롸!!!" 뇌성벽력이 내려치는 듯한 어마어마한 포효소리에 철궁곡이 무너질 듯 흔드리며 자객들의 몸이 굳어버린다. 혈주괴인들이 들고 있는 철궁이 우우웅 진동한다. 금호와 남국을 비롯한 구룡팔봉은 부르르 몸을 떨며 급히 진기를 운기해 공포를 떨친다. 휘우웅-! 두 쌍의 날개가 퍼덕거리며 강대한 바람을 일으키자, 폭풍이 몰려오기라도 한 듯 사방에 바람이 불어닥치며 굳어버린 이들의 몸을 뒤흔든다. 황궁의 기둥과 같이 굵직한 뒷다리의 근육이 꿈틀거려 몸을 지탱하고, 그보다는 조금 작지만 통나무보다는 훨씬 굵은 앞발이 위로 높이 들어올려졌다가 갑자기 땅을 내려찍는다. 쿠웅-! 막대한 거력이 실린 앞발이 포효와 바람에 움직임이 둔해진 한 자객을 짓누른다. 막대한 무게와 힘에 의해 뼈는 가루가 되고 피는 사방으로 폭발하듯 사방으로 번져 나오는 가운데, 살덩어리는 밀가루반죽처럼 넓게 퍼져 땅에 파묻힌다. 부우우우웅--! 콰과광!! 몸이 살짝 돌아가며 길게 늘어진 꼬리가 대지를 휩쓴다. 나무는 썩은 장작처럼 분질러지고 건물은 우르르 무너져 내린다. 땅에 엎드리거나 높이 뛰어올라 피한 이들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지만, 대처가 늦은 이들은 절벽에서 떨어져 바위에 부딪친 듯한 충격에 전신이 으깨져 피를 토하며 종잇장처럼 튕겨나간다. 그때, 어디선가 푸르스름한 강기에 휩싸인 비수가 날아들음과 함께 은밀하게 뒷다리에 접근한 한 자객의 손이 붉은 비늘에 닿았다. 쿠콰광!! 파드득! 철갑보다 단단한 비늘을 파고 들어온 비수가 일으킨 강기( 氣)의 폭발은 커다란 구덩이와 같은 상처를 만들어 피가 후두둑 비오듯 쏟아져 내리게 했고, 자객의 손으로부터 쏟아져 나온 무형의 경력은 내부의 살을 짓뭉개고 근육을 비틀었다. "크르르르릉...." 천지쌍살(天地雙殺)의 공격에 적게나마 타격을 받자 두 쌍의 검은 눈동자에 각각 시뻘건 핏빛과 서늘한 청광이 스쳐지나가며 두 개의 거대한 입이 다시 쩌억 벌어진다. 포효의 충격에 대비해 내공으로 귀를 보호한 그들이 다시 공격을 이어가려고 할 때, 갑자기 두 개의 입으로 공기가 급격히 빨려 들어가며 가슴부위가 서서히 부풀어올랐다. 휘오오오오-! 환하게 드러난 목구멍 안쪽에서 적광과 청광이 흘러나오는 것과 동시에 사방의 기가 요동치기 시작한 것을 느낀 천지쌍살은 본능적으로 두 머리의 사각을 향해 몸을 날렸다. 입을 다문 두 머리가 뒤로 당겨지고, 부풀어올랐던 가슴부위가 다시 내려앉음과 함께 꿈틀거리는 목으로 무언가가 거꾸로 치솟아 올라 입 안을 가득 채웠다. 마침내 두 머리가 앞으로 내뻗어지며 두 입이 열린 순간, 두 개의 찬란한 빛이 세상을 붉고 푸른 두 가지 색으로 물들였다. 치이이이이이익--! 파드드드드드득--! 불타오르는 태양을 연상시키는 붉은 광선은 모든 것을 녹여버렸다. 시뻘건 빛의 폭풍에 휩쓸린 이들은 재조차 남기지 않고 증발했고, 닿지 않은 이들조차 피와 살이 끓고 뼈가 녹아 죽음을 맞이했다. 철궁곡의 갖가지 건물이 불타오르고 대지가 녹아 시뻘건 점액이 되어 흘러내렸다. 차갑게 빛나는 달을 연상시키는 푸른 광선은 모든 것을 얼려버렸다. 새파란 냉기의 파도에 휩쓸린 이들은 그대로 얼음 동상이 되어 버렸고, 빛이 스쳐지나간 주변에는 전신에 새하얀 서리가 내려앉은 채 얼어죽은 시체가 주르륵 깔렸다. 얼어붙은 건물은 미미한 충격에도 산산이 깨져 무너져 내렸다. 순식간에 자객과 혈주괴인이 절반 가까이 쓸려진 것을 본 중인들은 입을 쩌억 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 말도 안 된다. 이런 게 이 세상에 있을 리가 없다. 이건, 설사 꿈이라고 해도 이건 결코 불가능하다! "크롸롸롸롸롸롸--!" 인간들이 뿜어내는 공포, 분노, 절망 등의 음적인 감정이 마력으로의 전환을 거쳐 흡수됐다. 더 많은 죽음으로 더 많은 공포를, 더 많은 공포로 더 많은 마력을 얻어내기 위해, 위대한 용족(龍族)으로부터 오만함과 권능(權能)을 잇고 사악한 악마(惡魔)로부터 잔혹함과 마력(魔力)을 받은 타락한 마룡(魔龍)의 일족은 사나운 포효를 내지르며 꼬리를 휘둘렀다. '아직.' 필사적으로 경공술을 펼친 덕분에 광선의 범위를 벗어난 천지쌍살이 남은 십대자객과 대주급의 혈주괴인을 주축으로 다시 헬카즈에게 달려드는 것을 본 그는 무심히 판단을 내렸다. 사사혈괴와 결판을 짓기 위해 5년간 모아둔 막대한 마력의 태반과 수많은 인간을 제물로 소모해 지상에 불러낸 만큼, 쌍두마룡(雙頭魔龍) 트윈 헤드 이블 드레이크(twin head evil drake) 헬카즈의 힘은 강대하다. 특히 적광 레이져 브레스(laser breath)와 청광 프로즌 브레스(frozen breath)를 동시에 펼칠 경우 서로간의 열 전이에 의해 몇 배에 달하는 위력을 발휘하지만, 대신 하루에 한 번밖에 펼칠 수 없다는 제약이 있다. 헬카즈의 의도는 기선을 제압하겠다는 것이겠지만, 그것으로 천지쌍살을 물리치지 못한 덕분에 두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여가며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다. '손을 써야겠군.' 영체에 관해서는 무한하게 넣어 다닐 수 있는 흑의장포, 그 안에 잠들어있던 망령들을 하나둘씩 일깨워 소맷자락으로부터 쏟아낸다. "허? 이건 대체...?" 혈주괴인이 허공에 나타난 두건을 깊이 눌러쓴 검은 옷자락을 보고 경계 띈 미소를 지을 때, 바람에 흔들리듯 하늘거리던 검은 옷자락이 펼쳐지며 칠흑과도 같은 암흑의 화살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급히 몸을 피한 혈주괴인은 철시를 쏘아냈다. 비록 진기를 담지는 못했다고 해도 능히 철판을 꿰뚫을 수 있는 위력의 철시는 두건귀의 옷자락 또한 분명히 꿰뚫었다. 그러나 그 옷자락 안에서 흘러나온 어둠에 의해 그 부분이 감쪽같이 매워졌을 때, 두건귀(頭巾鬼) 다크 후드(dark hood)의 암흑시(暗黑矢) 다크 애로우(dark arrow)는 혈주괴인의 머리를 꿰뚫어 뇌를 박살내고 가슴을 으스러트려 장기를 터트렸다. 스르륵... 십대자객을 지원하기 위해 접근해가던 자객들은 어느 순간부터 넓게 퍼져있는 새하얀 안개의 영역에 들어섰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가려 했지만, 안개의 한쪽에서 붉은 안광이 번뜩이는 순간 눈이 탁하게 풀린 자객들은 안개를 벗어나는 대신 서로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촤악! 방어라고는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은 살초의 대가는 동귀어진이었다. 한 자객의 검이 다른 자객의 턱을 관통했을 때, 다른 자객의 비수는 또 다른 자객의 심장에 박혀들었고 또 다른 자객의 도는 한 자객의 머리를 도자기처럼 깨부쉈다. 그런 식으로 서로 상잔해 널브러진 자객들의 백회혈에서 빠져 나온 희뿌연 기운은 다시 새하얀 안개의 일부가 되어 다름 사냥감을 노렸다. 여러 망령이 하나로 녹아들어 강력한 빙의능력을 지니게 된 백무귀(白霧鬼) 미스트(mist)에 빠져든 대다수는 그렇게 서로의 몸에 각자의 병기를 박고 죽음을 맞이했고, 고강한 심력으로 저항해낸 일부 또한 빙의 당한 다른 자객들에게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차가운 땅바닥에 몸을 뉘였다. 마룡의 옆을 돌아 심곡으로 침투하려 했던 일부 자객들은 한 망령을 상대해야 했다. 일류고수의 무위를 지닌 조장이 진기를 담은 검을 품고 앞장서 달려들자, 망령은 희뿌연 옷자락 사이로 뼈만 남은 반투명한 손가락을 달그락거리며 영체의 각인된 방법에 따라 음습한 귀기를 움직였다. 퍼억!! 허공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골창(骨槍) 본 스피어(bone spear)가 조장을 스쳐 조원의 머리에 박혀들었다. 보법으로 골창을 피해낸 조장이 조원의 죽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 번 땅을 박찬 순간, 망령의 옷자락으로부터 하나의 원령이 저주를 품고 튀어나와 조장의 몸에 스며들었다. 갑자기 몸이 얼어붙는 듯한 추위를 느끼며 움직임이 느려진 조장에게 스르륵 다가온 망령이 반투명한 손으로 그의 얼굴을 쥐자, 그의 생기는 급속히 빨려나가 사혼귀(死魂鬼) 레이스(wraith)의 힘이 됐다. 결국 모든 생기가 빨려나가 뼈에 가죽만 남은 듯한 모습이 된 조장은 사혼귀의 골시(骨矢) 본 애로우(bone arrow)가 박혀든 목이 분질러져 바람 빠진 오줌보처럼 힘없이 땅에 눕혀졌다. 사르르르륵.... 파앗! 진기가 담긴 철시를 쏘아내 희뿌연 망령 하나를 꿰뚫은 혈주괴인이 곧바로 뒤로 몸을 튕기자, 그 자리에 거대한 옷자락이 스쳐지나가며 사방으로 음산하고 탁한 기운을 퍼트렸다. 그 기운에 의해 몸이 둔화된 혈주괴인은 다시 한번 허공을 휩쓸어오는 거대한 옷자락을 피하기 위해 땅에 몸을 굴렸다. 곧바로 몸을 일으키며 철궁에 철시를 재던 혈주괴인은 그대로 눈을 까뒤집고 짚단인형처럼 풀썩 쓰러진 채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스르륵... 희뿌연 옷자락이 살짝 스쳤던 그의 몸에서 무언가 일렁거리다가 하나의 반투명한 망령이 튀어나왔다. 마치 이끌리듯 허공을 날아간 혈주괴인의 망령은 수많은 망령들이 다닥다닥 붙어 이루어져있는 거대한 망령 만혼귀(萬魂鬼) 스펙터(specter)에게 스며들어 그 옷자락의 일부가 되었다. 그 외에도 암영귀(暗影鬼)와 흑영귀(黑影鬼), 환영귀(幻影鬼) 등의 각종 망령이 철궁곡을 휘젓고 다니자 자객들과 혈주괴인은 난전에 난전을 거듭하며 밀릴 수밖에 없었다. 헬카즈에 의해 이미 진영이 박살난 상태에서 일반적인 물리적 타격은 아예 통하지도 않는 망령을 상대하게 된 것은 치명적이다. 특히 고위의 망령인 만혼귀의 경우, 진기를 담아 베고 또 베도 다른 망령으로 빈자리를 채우며 계속 자신의 덩치를 불려나갔다. '조금 더.' 품에서 하나의 수정을 중심으로 뼛조각과 동물의 이빨 등의 부적을 배치한 그가 무심한 음성으로 사이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묵봉으로부터 흘러나온 막대한 귀기에 부적이 부르르 진동하며 푸르스름한 귀광을 발하는 수정에 빨려 들어갔다. 귀기와 부적을 흡수한 수정이 더욱 음산한 귀광을 발하자, 그 빛을 쐰 사체들이 꿈틀거리다가 쩌저적 갈라지며 자신의 일부를 쏟아냈다. 어떤 사체는 뼈를, 어떤 사체는 근육을, 어떤 사체는 피를 뽑아내는 가운데 그 모든 것이 음산한 귀광을 따라 수정으로 뭉쳐들었다. 눈과 같이 새하얀 백골은 서로 뒤섞이다가 흔적도 없이 하나로 붙어 거대한 뼈대가 됐다. 꽃잎과 같이 분홍빛을 띈 근육은 서로 엉켜들며 굵직한 밧줄같이 화해 뼈대를 이었다. 생명을 담가놓은 듯한 새빨간 피는 근육과 뼈대를 붉은 색으로 물들이며 활력을 부여했다. 그 위로 덮여진 피륙은 귀기를 머금어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으며 갑옷 아닌 갑옷을 이루었다. 처음에는 5척 정도의 신장을 지니고 있던 그것은 수정조각을 핵으로 삼아 계속해서 크기를 불려나갔다. 신장만 해도 8척, 1장을 넘어 무려 2장까지 늘어나게 되자 두 팔의 굵기만 해도 사람 몸통보다 두터워졌고, 눈도, 코도, 귀도 없는 창백한 안면에 유일하게 자리잡고 있는 입은 마치 지옥으로 통하는 입구처럼 느껴졌다. 쿠우웅-! 거대한 신장에 걸맞게 육중한 소리를 내며 걸음을 옮긴 사괴뢰(死傀儡) 네크로 골렘(necro golem)은 부근에 있던 한 자객을 향해 자신의 거대한 손을 내뻗었다. 크기가 워낙 거대한 만큼 느리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휘둘러진 사괴뢰의 손을 미처 피해내지 못한 자객은 손바닥의 정 중앙에 검을 내질렀다. 쩌엉!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은 피륙을 파고들던 검이 마침내 강철과도 같은 뼈에 걸려 분질러짐으로써 수명을 다할 때, 사괴뢰의 거대한 손이 자객의 몸을 통째로 움켜쥐었다. 콰직! 상상치도 못할 악력(握力)에 의해 팔뼈가 으스러지고 갈비뼈가 분질러진 자객이 두 눈을 부릅뜨며 검은 복면을 피 거품으로 물들이는 가운데, 사괴뢰는 마치 동굴과이 거대한 입을 쩌억 벌리며 그 안으로 자객을 집어넣었다. 쫘악!! 콰득! 콰드득! 상반신이 사괴뢰의 입 안에 삼켜진 자객의 두 다리가 경련을 일으켰다. 거대한 턱이 움직일 때마다 생선처럼 파닥거리던 두 다리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힘없이 늘어지자, 사괴뢰는 안면을 비스듬히 들어올린 채 턱을 살짝 열었다. 온통 핏빛으로 물든 거대한 이빨의 틈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 원형을 찾지 못할 정도로 처참하게 으깨진 뼛조각과 살점들. 으드득! 하반신까지 으적으적 씹어 삼킨 사괴뢰의 근육이 꿈틀거렸다 싶은 순간, 손바닥에 박혀 들어있던 검편이 손등으로 불쑥 튀어나와 예리한 날을 번뜩이며 손바닥 가운데 하나의 작은 틈이 만들어졌다. 푸욱! 기회를 틈타 사괴뢰에게 바짝 다가든 두 자객의 검이 발목의 힘줄부분에 박혀들었다. 만약 생물이라면 아무리 거대한 거인이라도 힘을 잃고 무너질 부상이었으나, 근골의 구분을 떠나 발목 자체가 하나의 기둥과 같은 사괴뢰는 그대로 두 자객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이미 한 자객의 전례가 있었던 만큼 방심 없이 곧바로 몸을 빼낸 두 자객의 앞으로 사괴뢰의 두 손이 지나갔다 싶은 순간, 사괴뢰의 손바닥에 나있던 틈이 벌어지며 무언가 굵고 새하얀 것이 화살처럼 튀어나왔다. 촤르르르륵! 다섯 개의 칼날로 이루어진 머리와 뼈로 이루어진 몸체를 지닌 망자 사뢰괴(死儡怪)가 자객의 두개골 내부에 깊숙이 박힌 칼날을 펼친 채 몸을 팽팽하게 당겨 거대한 손바닥에 난 구멍으로 도로 빨려 들어가자, 두 자객의 몸은 자연스럽게 사괴뢰의 손에 쥐어졌다. 구멍 내부에 웅크리고있던 사뢰괴는 밖으로 튀어나올 때마다 여김 없이 몸을 피로 물들였고, 자객의 사체를 삼키는 만큼 사괴뢰의 전신에는 점차 많은 틈이 생겨나 종래에 이르러서는 움직이는 벌레집과 같은 형상을 이루었다. '됐군.' 사괴뢰를 십대자객에게 붙임으로써 충분한 조치를 취했다고 판단한 그는 심곡 안쪽을 향해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자객들과 혈주괴인들은 걱정할 필요 없으니, 이제 남은 것은 뱀의 머리를 부수는 것뿐이다. 비록 그 머리에 날카로운 독아(毒牙)가 있다고는 하지만, 상대가 독사(毒蛇)라면 그의 사냥개는 하늘을 나는 비호(飛虎)다. =========================================== 결국은 트윈 헤드 이블 드레이크-였습니다. 드레이크까지 예측한 독자분은 계셨지요. 그리고 네크로 골렘의 경우 골렘분류에 대한 인기가 높은 관계로 특별출현입니다. 밸런스를 나름대로 조정해봤지만 살각이 너무 쉽게 깨지고 있군요. 이유로는 1.브레스에 절반이 통째로 날아가고 진영이 흩어졌다. 2.망령들에게는 최소한 진기를 담은 공격이 아니면 타격이 가해지지 않는다.(진기를 자유롭게 운용하면 대략 일류고수입니다. 과거 육신갑을 이뤘던 초기의 철방이 일류고수에 속했죠.) 3.절정 이상의 고수들은 트윈 헤드 이블 드레이크와 스펙터, 네크로 골렘을 상대하느라 손이 묶여있다. 정도로 들 수 있습니다. 고치고 고쳐도 이것저것 이상한 게 많은 거 같지면 아무래도 더 이상 지연했다가는 암살당할 듯 싶어 올립니다. 다음편은 ....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04 00:13:07 고친날 2005-08-04 00:13:07 읽은수 8720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7.경천동지(驚天動地).(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콰직! 독물로 전신이 새까맣게 뒤덮인 상태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비쩍 마른 녀석의 머리를 수박처럼 박살내니 피와 뇌수가 주먹에 후두둑 튄다. "병신 같은 놈. 자기 힘이 안 통한다고 그냥 넋 놓고 있는 얼간이는 죽어도 싸다." 5년간 사사혈괴와 치러왔던 전쟁이 대갈통을 스친다. 그 영감탱이는 질겼다. 질겨도 무진장 질긴 것이 거의 엿 덩어리 수준이었다. 그 늙은이가 부리는 강시도 죽여도 안 죽는 게 바퀴벌레 수준으로 끈질겼다. 그거에 비하면 이런 애송이는 코딱지만큼도 안 질기다. 애송이가 부리는 독물들도 따끔하지도 않고 그저 귀찮기만 하다. 이런 갓난아기 같은 놈을 때려죽인 게 조금 죄책감이 생긴다. 조금. 한 개미 눈곱만큼 되려나? 아, 그런데 개미한테 눈곱이 있던가? 아무래도 생각하기 귀찮다. 빨리 다음 놈이나 쳐죽이자. "다음은 누구냐?!" "나요!" 파앙! 날카로운 눈매에 얼음장같은 안면의 녀석이 피 칠한 것처럼 벌건 손을 휘두르니 무형의 경력이 어깨를 두들긴다. 허공을 격하고 장력을 날리는 격공장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니, 이놈이 아무래도 장룡 기, 기...어째든, 그놈인가보다. 벌건 손은 수라장(修羅掌)이려나? 그런데 아그야, 나도 아무개는 아니란다. "안마 좀 더 시원하게 못하냐?" 살짝 허리를 숙이고 다리를 웅크린다. 웅력근(熊力筋)의 강력한 힘을 등과 허리를 지나 다리에 응집시킨다. 만리신각(萬里神脚)으로 땅을 박차니, 바닥을 덮고 있던 석판이 와지끈 깨져나간다. 쯧, 좀 튼튼한 것 좀 쓰지. 철궁곡도 부실공사가 심하구만. 그러니까 이렇게 살각한테 쉽게 무너지지. 퍼억! 녀석 앞에 바짝 다가서니,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듯 가슴에 정확히 일장을 후려갈긴다. 그리고는 손바닥을 착 붙인 채 진기를 쏟아 붙는 게, 12성까지 끌어내는 게 분명하다. 수라전의 소전주로 영약을 많이 처먹어서 그런지 내공이 상당하다. 게다가 외공에는 양강지력인 강기보다 음유지력인 침투경이 더 잘 통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 승부수겠지.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는 자세는 제법이다. 그런데 어쩌냐, 네 짓거리는 아무리 봐도 무모한 것을. 심장이 꿈틀거리며 체내에 흐르는 음기가 진기를 받아낸다. 응축됐던 오공갑피가 급격히 팽창하며 기운이 진기를 반탄한다. 콰드드득! "크으윽...!" 막대한 반탄지력에 의해 손은 물론이고 팔, 어깨까지 모조리 으스러져버린 녀석의 눈에 고통과 경악이 스쳐지나간다. 알아봤나? 아무리 직접 손대봤다고 해도 단번에 알아채다니, 제법이다. 촤르륵! 히죽 웃어 보이며 손목에서 용린편을 촤르륵 뽑아내 녀석의 목에 감는다. 눈꼬리를 부르르 떨며 노려보다가 눈을 꽉 감는 모습이 과연이다. 자신을 죽인 상대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담고, 죽어서라도 잊지 않겠다는 뜻. 역시 구룡팔봉의 위명이 껍데기만 있는 건 아니구나. 크면 꽤나 훌륭한 사파고수가 될 후기지수이니, 사파의 훗날을 위해서라면 마땅히 풀어줘야 할 녀석이다. 하지만 어쩌겠냐, 대형께서 죽이시라고 했으니 죽여야지. 사파의 미래는 내가 네 대신 책임져주마. "잘 가라." 촤아악! 은빛 채찍이 석양과 같이 진득한 선홍빛으로 물드니, 뜨끈뜨끈한 피가 공기를 후끈 대우며 하나의 머리가 툭하고 떨어져 내린다. "이...이잇...!" 새파랗게 질려있던 계집애가 등돌려 통로 저편으로 몸을 날린다. 그래, 힘의 부족함을 느끼면 도망치는 것도 좋지. 비겁함이고 자시고 우선 살아야 장땡인 법이야. 그래도 일단 예의라는 게 있으니 용린비 몇 개만 던져줘야겠지. 응? 그런데 저 계집은 뭘 던지고 간 거야? 검고 둥근 구슬이라. 내가 저걸 어디서 봤더라...아, 그래, 그러니까...얼라리오리오리?? "이 쌍년아, 번개똥은 왜 싸고 가?!" 저게 대체 몇 개냐? 하나, 둘, 셋...젠장, 대충 열 손가락이다. 이제 보니 저년이 바로 뇌봉이었나? 어째든 저게 터지면 안되니, 잡아야지. 백호지(白狐知)로 뇌를 자극하니 세상이 멈춘 듯 느리게 보인다. 5년 동안 하도 많이 써서 이젠 이 짓거리도 익숙해졌다. 천천히, 하지만 그 무엇보다 빠르게 움직이며 벽력탄을 잡아 채...야 하는데, 더 빠른 게 하나 있다. 영감탱이의 손이랑 발! 언제 또 여기까지 튀어왔나? 어째든 이 상태에서도 저렇게 빨리 움직이는 작자는 처음이다. 내가 전력을 다한 속도보다 빠른 거 같은데...과연 무영투괴답기는 한데, 쪼까 열 받네. 백호지를 쓸 때만큼은 인간적으로 좀 느려야 하는 거 아냐? 경쟁하듯 열심히 벽력탄을 잡아채다 보니 마지막 벽력탄을 동시에 잡는다. 영감탱이가 들고 있는 벽력탄이 더 많은 걸 보자니 속이 조금 쓰리지만, 영감탱이의 놀란 표정을 보자니 기분이 좀 풀린다. 그럼, 내가 한 번 한다면 한다고. "네놈...?" "캬하...역시 노인장이구만." 영감탱이에게 씨익 웃어주며 손에 든 벽력탄을 던졌다 받는다. 보자, 이게 그대로 터졌다면 여기가 그대로 무너졌겠지? 그러면 대형께서 다치셨을 수도 있겠지? 그럼, 아까 그년은 명백하게 대형을 해하려했고 해할 뻔했던 셈이니 가만 둘 수야 없지. "쌍년아, 이거 다시 가져가!" 손에 들고 있던 벽력탄을 통로 안쪽으로 내던지니 늙은이를 비롯한 구룡팔봉의 얼굴에 일제히 뜨악한 표정이 떠오른다. 기껏 잡아놓은 걸 왜 다시 던지냐고? 그야 당연히 준비가 됐을 테니까. 콰드드드득-! 단단한 석판을 뚫고 솟아난 두터운 골벽(骨壁) 본 월(bone wall)이 순식간에 천장까지 이르며 통로 저편을 가린다. 시험해봐서 아는데, 저 골벽은 단단하다. 단단해도 무진장 단단하다. 귀기의 조절에 따라서는 철벽 못지 않은데다가 빠른 복구도 가능하다. 쿠과과과광!! 벽력탄이 폭발하며 내뿜은 충격파에 의해 골벽이 뒤흔들리며 무언가 우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골벽이 말 그대로 벽이자 기둥이 되어준 덕분에 바깥쪽에는 그다지 충격이 오지 않았다. 무너졌으면 뭐, 두 꼬맹이 챙겨서 대형이랑 냅다 튀었어야지. 어째든 이걸로 저 쌍년은 박살났겠지. 혹시라도 시체가 나오면 아작아작 씹어 먹어주마. "자아, 그럼 다음은..." 누가 남았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던 고개가 딱 멈춘다. 서서히 고개를 숙이니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툭하고 튀어나와 가슴에 똑바로 박혀있는 하나의 검신이 보인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핏방울이 검신을 타고 흐르다가 땅에 떨어질 때서야 상황을 이해하니, 절로 미간이 찌푸려진다. 아무리 통증을 못 느낀다고 해도 감각까지 사라진 건 아닌데, 검이 가슴을 관통할 때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썩을. 살아있었으면 뒈지게 아팠겠네. 애송이들을 상대할 때까지만 해도 문제가 없었는데...벽력탄 때문이다. 바깥쪽까지 무너지면 곧바로 튀려고 경계가 분산됐다. 끄응, 칼침 맞아도 당연한가? 검을 통해 무형의 기운이 흘러들어 온다. 마치 숨겨진 비수와 같이 은밀하면서도 날카롭기 그지없는 기운. 이것이 바로 무형살기(無形殺氣)일 것이다. 무정살왕(無情殺王)의 무형살검(無形殺劍)은 천하사대마공(天下四大魔功) 중 하나. 검에 담긴 무형살기(無形殺氣)는 양강지력인 검강과 같은 파괴력을 발휘하면서도 겉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고, 피륙을 찌르는 순간 음유지력처럼 체내로 파고들어 전신의 심맥을 조각조각 끊어낸다. 거의 강기일식에 근접한 육신도 소용없다. 내부의 기맥과 혈맥을 타고 흘러 들어오는 무형살기에 음기와 귀기가 밀리며 혈맥이 점차 끊어진다. 혈맥이 끊기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그래, 인간이라면 살아남을 수 없는데 말이야...내가 인간인가? 내가 살아있나? 아니지. 그건 아니야. 얼굴에 히죽 미소가 떠오르며 심장이 꿈틀거린다. 심장 안에 들어있는 보석이 진동하며 심장 내부에 응축되어있던 기운이 풀려 나온다. 전신의 기맥을 타고 흐르며 무형살기와 충돌을 일으킨다. 폭발하는 듯한 충격. 범인은 물론이고 웬만한 고수라도 그대로 몸이 터져 버릴 것이다. 그러나 동피철혈기공(銅皮鐵血氣功)을 대성해 강철과 같이 단단해진 기맥과 혈맥은 그 충격을 견뎌낸다. 잠시간의 밀고 당기기 끝에 무형살기를 뚫은 기운이 기맥을 순환하며 이종의 기운을 몰아낸다. 혈맥을 순환하며 끊겨진 부분을 재생해 다시 하나로 잇는다. 상처를 통해, 전신의 모공을 통해 흘러나오는 것은 어둠(暗). 칠흑과 같은 짙은 어둠이 뭉클뭉클 흘러나와 몸을 둘러싼다. 이 어둠이야말로 5년간의 전쟁동안 얻어낸 성과 중 하나. 대형으로부터 받은 또 다른 힘이다. 은은한 묵광이 번뜩이는 손을 들어 무정검을 으스러져라 움켜쥔다. 손가락이 쇳덩이라 돼있더라도 고기조각 썰리듯 후두둑 썰려야 할 테지만, 어둠의 보호를 받는 손은 피륙이 가볍게 베여 약간의 핏방울이 흘러나올 뿐이다. 서서히 고개를 들어올린다. 허공에 녹아들 듯 중간에 사라져있는 검신. 그 끝에는 손잡이가 있을 테고, 손잡이가 있으면 손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위의 머리가 있을 곳으로 암흑으로 물든 시커먼 마화(魔火)가 불타오르는 마령안(魔靈眼)을 향한다. "잡.았.다!" ========================= 철방, 저 무식한 놈...네가 사파의 미래를 책임지면 내년에 정파천하가 도래한다. 리플 감상 추천 선작 팩픽 팬아트 대환영입니다아. 다음 편은 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08 00:38:21 고친날 2005-08-08 10:12:39 읽은수 8369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7.경천동지(驚天動地).(4)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콰드드드득! 땅이 갈라지며 치솟은 뼈가 서로 얽혀든다. 골옥(骨獄) 본 프리즌(bone prison)이 철방을 중심으로 대략 반경 3장 정도의 커다란 반구를 이루며 땅속 깊은 곳까지 뿌리내린다. 겹겹으로 쌓이고 쌓여 설사 검강이라도 단번에 가르지 못할 정도로 강하고 두터워진다. '잡았군.' 독사는 덫에 잡혔다. 덫을 깨고 나가려한다면 사냥개는 곧바로 독사의 목을 물어뜯을 것이다. 언제까지 숨어있을 수 있을까? 어둠을 일으킨, 십이마력(十二魔力)을 일깨운 마수(魔獸)에게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촤르르르륵-! 칠흑으로 물든 흑룡편(黑龍鞭)이 손목으로부터 빠져 나와 사방을 긁는다. 흑룡의 비늘이 할퀸 허공은 탁한 독기로 물들고 골옥은 순식간에 삭아버린다. 제한된 공간에서의 흑룡편이 지니는 위력은 막대하다. 촤악! 철방이 흑룡편을 조종하는데 정신이 분산된 사이 무정검이 빠져나간다. 마치 바람을 쥐었던 듯 무정검이 허무하게 빠져나간 손은 오공마갑(蜈蚣魔甲)과 흑룡갑(黑龍甲)이 갈라져 뼈가 드러날 정도의 깊은 검상이 남았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핏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던 상처가 조금씩 아무는 가운데 철방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어린다. "흐흐, 넌 이미 걸렸어, 새끼야." 손목으로 도로 들어가는 흑룡편에 살짝 걸려있는 것은 약간의 핏방울이 묻은 검은 천조각. 부상 자체는 심각하지 않다. 단지 스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무정살왕을 잡는 데에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내가 5년 허벌나게 싸우며 뭘 먹고 지내왔는지 알아? 강시야, 강시. 그것도 사사혈독강시(死邪血毒 尸)!" 5년 동안 사령군(死靈軍)의 가장 핵심적인 축을 맡아 강시대( 尸隊)의 주력인 사사혈독강시를 상대해온 철방이다. 처음에는 사사혈독 때문에 여러 차례 위기를 맞이했지만, 대형이 독기를 흡수해 해독해주는 것과 다시 중독 되는 것을 몇 년 동안이나 반복해 사사혈독에 대한 내성을 쌓고 파괴한 사사혈독강시를 통째로 씹어먹으며 흡혈마공(吸血魔功)의 힘으로 사사혈독(死邪血毒)을 어둠에 흡수했다. 어둠이 스며든 흑룡비에는, 당연히 사사혈독(死邪血毒) 또한 녹아 들어있다. 천하삼대극독은 화경에 달한 고수조차 죽일 수 있다는 정설 대로라면 무정살왕이라도 쉽게 독기를 몰아내지는 못할 것이다. 툭. 아무 것도 없던 허공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려 급속도로 녹아들기 시작한다. 사사혈독에 중독 된 신체지만, 전신이 아니라 손가락 하나에 불과하다. '빠르군.' 진기로 사사혈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손가락 하나에 모았다. 만약 그대로 손끝으로 독을 배출하려고 했다면 은신술이 흐트러져 철방이 단번에 목을 벨 수 있었을 텐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손가락을 잘라버리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다. '과연인가.' 성취에 따라 오욕칠정을 잃어버리게 되는 마공인 무형살검을 대성한 무정살왕. 그는 오직 사람을 죽이기 위해 존재하는 병기나 다름없다. 스스로의 몸을 조금이라도 돌볼 줄 아는 이라면 이처럼 빠른 결단은 내리지 못할 것이다. '쉽지 않군.' 이대로 라면 승률은 대략 반반. 서로간의 공격적 성향이 짙은 것을 생각할 때 거의 동귀어진으로 결말이 날 가능성이 높다. 철방이 재활용이 불가능해질 정도의 타격을 입으면 새로운 망자를 만들면 되지만, 이미 심령금제를 거의 벗어난 독립된 개체로서 계약에 충실히 따르는 철방은 아직 여러모로 유용하다. 일단 통제력을 소모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그것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준비해두는 게 좋겠군.' 그가 묵봉을 쥔 손을 비스듬히 기운 채 무심한 음성으로 사악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할 때, 철방 또한 무정살왕을 잡기 위해 수를 사용하고 있었다. "하아아아아!!" 쿠우우웅-! 크게 내딛은 일보에 땅이 지진이라도 난 듯 진동하며 움푹 파여졌다 싶은 순간, 철방의 전신에서 짙은 어둠이 검은 안개처럼 뭉클뭉클 뿜어져 나와 골옥 안을 가득 채웠다. 자체적으로도 독성을 지닌 어둠에 사사혈독이 융합되어있는 만큼, 웬만한 고수라면 단지 어둠에 스치는 것만 해도 중독을 면치 못한다. 그러나 무정살왕은 버텨냈다. 호신강기로 철저하게 독의 침입을 막고, 호흡 시에 섞여 들어오는 독기 또한 진기를 사용해 차단했다. 무정살왕의 움직임에 미미한 제약을 가할 수는 있지만, 철방 자신의 힘도 분산되는 만큼 별다른 효과는 없는 방법이다. 그러나 철방은 단지 무정살왕의 움직임을 제약하기 위해 어둠을 뿜어내는 것이 아니었다. "나, 죽은 자를 먹어 죽음을 부정하고 삶을 부정하여 얻은 대시귀(大屍鬼)의 권위(權威)로 죽음의 권능(權能)을 펼치나니!" 기이하게 번뜩이던 철방의 두 눈동자에 사이한 검은 광채가 은은히 뿜어져 나왔다. 5년 동안 수많은 강시를 먹어치워 귀기를 축적하고 영적 승화를 이룸으로서 다시 한 차례의 발전을 거듭한 그의 힘이 펼쳐졌다. 안개처럼 퍼져있던 어둠이 골옥 안에 널려있는 자객들의 시체에 스며들었다. 시체의 심장에 파고든 한 조각의 자그마한 어둠이 마치 꾹꾹 뭉쳐놓은 천이 풀려 나오듯 갑자기 막대한 양의 귀기로 화해 전신을 휘몰아치다가 농밀하게 응축됐다. 군살이 모조리 제거되고 뼈와 근육만이 남아 비쩍 마른 시체가 회색으로 물들며 바위처럼 단단하게 굳어졌다. "일어나라, 새끼들아!" 쿠웅! 철방이 우렁찬 고함과 함께 다시 한번 발을 구르자, 십여 구의 시체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불사마법사(不死魔法師) 리치(lich)와도 비견될 정도로 강대한 힘을 지닌 최고위 망자, 대시귀(大屍鬼) 그레이트 구울(great ghoul)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식시귀(食屍鬼) 구울(ghoul)은 마치 썩은 동태 같은 눈알을 데구르르 굴려 사방을 훑었다. "찾아라, 죽여라, 그리고 먹어치워라! 크하하핫!!" 대시귀의 권위를 지닌 철방의 명령에 식시귀들은 착실하게 따랐다. 일류고수의 경공 못지 않은 빠른 움직임으로 골옥 안을 빙빙 돌며 산자의 냄새를 찾았다. 조금이라도 냄새가 나는 곳을 할퀼 때마다 지독한 마비독이 맺힌 손톱 자국이 생겼고, 흉기나 다름없는 이빨이 박혀들 때마다 뼛조각과 석판이 한 웅큼씩 떨어져 나왔다. 몇몇 식시귀는 골옥을 타고 올라갔다. 길고 날카로운 손톱을 뼛조각에 박아 넣으며 마치 땅을 뛰어 다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식시귀들에 의해 골옥 내부는 샅샅이 뒤져졌다. 퍼억! 골옥의 천장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한 식시귀가 골옥을 이루는 뼛조각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다가 손톱을 휘두르려던 순간, 허공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검이 식시귀의 미간을 꿰뚫으며 해골에 피부만 붙여놓은 듯한 머리통이 수박처럼 깨져나갔다. "거기구나!!" 금호지(金狐知)로 두뇌를 적절히 자극해 잠력을 적당한 한도 내에서 최대한으로 끌어올린 채 무한이(無限耳)와 마령안(魔靈眼)을 곤두세우고 있다가 무정살왕의 위치가 골옥의 천장 바로 중앙이었음을 눈치챈 철방은 역천공(逆天功)으로 몸을 떠오르게 하고 패왕근(覇王筋)의 힘을 실은 섬광마각(閃光魔脚)으로 땅을 박차 천장으로 튀어 올랐다. 파각! 용호공(龍虎功)의 감각으로 빙글 몸을 뒤집어 검게 물든 흑랑조(黑狼爪)를 박아 넣은 골옥이 서서히 녹아들기 시작할 때, 모공에서 튀어나온 지주은사(蜘蛛隱私)가 거미줄처럼 사방에 뻗어나가 무정살왕의 퇴로를 차단했다. 지주은사 안에 남은 공간은 직경 1장이 될까말까할 정도. 이 안에서라면 아무리 뛰어난 은신술을 펼쳐도 휘두르는 대로 걸리는 수밖에 없었다. 지주은사로 몸을 고정한 철방이 흑랑조를 휘두르려던 순간, 허공의 빈 공간이 흐릿해지며 하나의 인영이 철방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져왔다. 그러나 그것도 찰나의 순간뿐, 검을 쥐고있던 인영이 검에 녹아들고 검마저도 그림자 속에 녹아들자 허공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신검합일(身劍合一)의 경지가 무형살검(無形殺劍)으로 펼쳐져 기척을 죽이고 공간을 가르며 날아드니, 이 검이야말로 절대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무정살왕의 최후절초일 것이다. "오냐, 맞짱 뜨자!!" 두 눈을 부릅뜬 철방은 흑랑조를 날카롭게 휘둘렀다. 방어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지만, 그렇기에 용호공의 기세가 더욱 확연히 스며든 무지막지하면서도 날카롭고 강맹한 공격이었다. 푸욱! 허공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무정살왕의 무정검이 철방의 왼쪽 손목을 그대로 꿰뚫고 들어와 목에 틀어박힐 때, 철방의 흑랑조 역시 무정살왕의 어깨에 틀어박히며 사사혈독을 흩뿌렸다. 쫘아악! 무정검이 더욱 깊이 파고들자 극성의 무형살기를 견뎌내지 못한 철방의 손목이 산산이 터져 나가며 왼손의 잔해가 떨어져 내렸다. 흑랑조가 무정살왕의 어깨를 옆으로 길게 찢으며 사사혈독에 의해 지글지글 녹아들었다. --------------------------------- 철방, 최종판 업그레이드. 십이기력-십이신력-십이마력 오공갑피(蜈蚣甲皮)-오공신갑(蜈蚣神甲)-오공마갑(蜈蚣魔甲) 사린비(蛇鱗匕)-용린비(龍鱗匕)-흑룡비(黑龍匕) 치효안( 梟眼)-천리안(千里眼)-마령안(魔靈眼) 지주족장(蜘蛛足掌)-지주백모(蜘蛛白毛)-지주은사(蜘蛛隱私) 편복기공( 氣功)-흡혈신공(吸血神功)-흡혈마공(吸血魔功) 철랑조(鐵狼爪)-혈랑조(血狼爪)-흑랑조(黑狼爪) 웅력근(熊力筋)-웅왕근(熊王筋)-패왕근(覇王筋) 맹호공(猛虎功)-비호공(飛虎功)-용호공(龍虎功) 십리묘이(十里卯耳)-천리이(千里耳)-무한이(無限耳) 백리묘각(百里卯脚)-만리신각(萬里神脚)-섬광마각(閃光魔脚) 응우공(鷹羽功)-허무공(虛無功)-역천공(逆天功) 호미지(狐尾智)-백호지(白狐智)-금호지(金狐知) 지금 찍어낸 식시귀 한 마리가 초반의 육신갑을 이뤘던 철방과 거의 동급임을 생각해 볼 때 참 많이 컸다. 그러나 대가리는 역시 그대로...[퍼억!] 다음편은 대략 12일에. 오타 지적, 오류 지적 수정했습니다. --------------------------------- "...저건..." 금호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두 목과 꼬리는 뱀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네 날개는 박쥐와 같으면서도 달랐다. 네 다리는 도마뱀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거대한 그것은 그렇게 청년이 아는 몇 가지를 연상시켰지만, 그 어떤 것과도 닮지 않았다. 그럼에도 저것에 굳이 이름 붙이자면, 단 하나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용(龍)?' --------------------------------- 이 정도면 연결이 좀 더 매끄러울런지?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10 19:28:12 고친날 2005-08-10 19:28:12 읽은수 8365 [ 10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7.경천동지(驚天動地).(5)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서로 무정검과 흑랑조에 전력을 쏟아 붙고 있었기에 무형살기가 철방의 목을 먼저 파고들지, 아니면 사사혈독이 무정살왕의 혈맥을 먼저 녹일지에 따라 승패가 갈리거나 양패구상을 이룰 상황이었다. "크...으!" 철방의 두 눈에 검은 광채가 스치자, 골옥 안을 돌아다니던 식시귀들이 벽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호신강기를 일으킬 여력도 없는 지금의 무정살왕이라면, 식시귀의 이빨과 손톱만으로도 능히 가르고 뜯어낼 수 있다. 그러나 식시귀들을 움직이기 위해 어둠을 한순간이나마 분산한 영향은 컸다. 무형살기는 단단한 철갑과 같던 어둠에 난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고, 철방의 목에 난 상처는 무형살기에 의해 점차 빠르게 갈라져 갔다. 그때, 그의 묵봉으로부터 뻗어나온 한줄기 서늘한 기운이 골옥을 투과해 철방과 무정살왕, 그리고 식시귀에게 스며들었다. 그 서늘한 기운을 흡수한 식시귀들은 움직임에 가속이 붙었고 갈라지던 철방의 상처가 그대로 멈춰졌다. 망자인 그들에게 그것은 마치 축복과 같았지만, 무정살왕에게 나타난 효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치이익-! 전신으로 스며들어온 사기(死氣)는 생기를 죽였다. 진기를 운용해 사기의 침범을 막으려 하자 사사혈독이 무섭게 불타오르며 혈맥으로 퍼져 나왔고, 사사혈독을 막으려고 하면 생명의 불꽃에 사기의 폭포수가 쏟아져 내렸다. 사기(死氣)를 사용하는 절명주(絶命呪) 데스 스펠(death spell)은 죽은 자에게 힘을 주고, 산 자를 죽인다. 평소의 무정살왕이라면 진기로 버텨낼 수 있었지만, 어둠이 섞인 사사혈독과 절명주를 동시에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촤아악! 골옥을 타고 올라온 식시귀들이 마침내 무정살왕의 몸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하나하나가 마치 칼날과도 같은 손톱은 그의 몸에 깊숙이 파고 들어갔고, 돌덩이조차 씹어먹을 수 있는 이빨은 살을 뜯어내고 뼈를 으스러트렸다. 그러나 다리가 뜯겨져 나갈 때도, 한 팔이 완전히 녹아 내릴 때도, 등에 너덜너덜하게 될 때도 무정살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무형살기를 유지했다. 그만큼 그의 생명의 불꽃은 빠르게 꺼져들었고, 진기는 사사혈독을 막아내지 못했으며, 몸은 점차 부서져갔다. 철방은 손이 터져 나간 왼팔을 천천히 움직였다. 팔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무형살기는 틈을 파고들려는 듯 날카롭게 요동쳐 목의 상처를 다시 갈라갔지만, 절명주로부터 받은 사기는 무형살기를 견제하는데 충분한 도움을 주었다. 우웅-! 그때, 골옥의 천장부분이 기이하게 일렁이며 그곳으로부터 검은 그림자에 뒤덮인 한줄기 섬광이 뻗어 나와 무정살왕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흑영도(黑影刀) 쉐도우 블레이드(shadow blade)에 뒤덮인 채 공간을 가르며 들어온 사신의 낫에 의해 적지 않은 타격을 받은 무정살왕의 몸이 크게 들썩인다 싶은 순간, 하나의 굵직한 팔이 무정살왕의 목에 감겨들었다. 패왕근을 끌어올릴 여력도, 흑랑조나 흑룡비를 사용할 여력도 없었지만, 외공을 통해 자연스럽게 발달된 육체 본연의 힘만큼은 어떻게든 사용할 수 있었다. '뒈져라, 새끼야!' 우드득! 팔에 마치 밧줄을 휘감아 놓은 듯한 근육이 꿈틀거렸다 싶은 순간, 무정살왕의 그의 목이 기이한 각도로 꺾여지며 기이한 뼛소리가 흘러나왔다. 무형살기가 흐트러진 무정검은 어둠에 밀려 뽑혀졌고, 사사혈독은 급속히 무정살왕의 전신혈맥을 녹여 들어갔다. 식시귀의 손톱이 무정살왕의 뼈를 잘라내고 이빨이 피륙을 물어뜯었다. 오신오왕(五神五王) 중 하나이자 천하제일자객이던 무정살왕의 비참한 최후였다. "새끼들아, 누구 밥상에 손을 대!" 퍽! 퍽! 목을 우두둑 풀고 주먹을 휘둘러 식시귀들을 내친 철방은 골옥이 해제되기 시작하자 무정살왕의 사체를 들쳐업고 땅으로 뛰어내렸다. 촤르륵! 사방으로 쏟아진 뼛조각이 귀기를 잃고 먼지로 화해 가는 가운데, 철방은 그의 앞에 정중히 무정살왕의 시체를 내려놓았다. "무정살왕, 처리 끝냈습니다!" 철방의 당당한 외침에 중인들은 머리통을 철퇴로 후려 맞는 듯한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저, 저게...무정살왕?" "...놀랍군." 식시귀에 의해 엉망으로 뜯기고 사사혈독에 의해 녹아들고 있는데다가, 그걸로도 부족해 목까지 엉망으로 분질러져있는 자객의 시체가 무정살왕이라는 사실은 모두를 놀라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게다가, 화경의 고수인 무정살왕을 죽였다면 철방 또한 화경의 고수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원래대로라면 어떻게 운이 좋아서 이기거나 뭔가 착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을 떠올릴 수도 있었겠지만, 저 바깥쪽에서 날뛰고 있는 쌍두마룡과 귀신들을 보자니 그런 의심을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불필요하게 느껴졌다. 각종 복잡한 시선이 얽혀드는 가운데, 두 명의 청년이 그들에게 거의 뛰어들 듯이 다가왔다. "사부님! 형님!" "오냐, 꼬맹이들...울라?" 5년만에 듣는 낯익은 음성에 씨익 미소를 지었던 철방의 얼굴에 괴이쩍은 표정이 떠오르며 고개가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음성은 낯익은데, 어째 얼굴은 전혀 딴판이었다. 아니, 생각해보니 음성도 조금 이상하다. 5년이나 지났으면 조금은 굵직해졌어야 하는데, 5년 전과 거의 변함이 없는 정도를 넘어 오히려 조금 더 가늘어진 듯 싶다. "꼬맹이들 맞냐?" "...형님!!" "아, 그러고 보니 그렇게 됐지." 언제 반가운 표정을 지었냐는 듯 두 눈을 사납게 치켜 뜨는 금호의 모습에 철방은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생각해보니 5년 전 마지막으로 봤을 때 얼굴이 허여멀걸 해진 기억이 났다. 5년 전의 마지막 모습과 비교해도 지금의 모습은 차이가 컸다. 그때가 덜 여문 풋과일 같은 모습이라면 지금은 익을 대로 익어 절정에 오른 모습이니, 5년 동안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철방이 둘을 몰라본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흐음, 거 많이 컸구나, 녀석들." "당연하죠. 5년 동안 나이를 물로 먹은 게 아니라고요." "얼굴도 더 계집애 같아지고." "으으...5년만에 만나서 하는 말이 고작 그거예요?!" 그렇지 않아도 신경 쓰이는 부분을 자꾸 쿡쿡 찌르는 철방의 작태에 금호는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화를 냈지만, 그러한 금호에게 철방은 히죽 웃어 보일 뿐이었다. "아니냐? 5년 전에는 크면 계집 꽤나 울리게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지금 보니 계집보다 사내놈들을 더 울렸을 거 같은데." "그...!" 정곡을 정확히 찔린 금호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일 때, 한줄기 무심한 음성이 그들 사이에 파고 들어왔다. "철방. 밖을 정리해라." "예, 대형!" 대형의 명령에 재회고 뭐고 생각할 것도 없이 땅에 떨어져있던 대도를 불끈 움켜쥔 철방이 식시귀들을 이끌고 밖으로 뛰쳐나가자, 그는 금호와 남국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금호. 남국." "네." "사령술의 습득 정도는?" "사령술서를 완전히 터득했어요." "그런가." 금호의 자신에 찬 대답에 무심히 고개를 끄덕인 그는 감각으로 그들을 정밀히 살핀 뒤 판단을 내렸다. '쓸만하군.' 아직 부족한 감이 있긴 해도 단 5년만에 상급의 사령술사의 수준에 이르렀다. 영력과 마력의 영향이 컸겠지만, 이 성장속도는 역시 범상한 수준을 넘었다. 이대로 계속 성장해 고위 사령술사가 된다면, 제법 쓸만한 도구가 되리라. "이놈아, 이 어르신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느냐?" 그가 무심히 침묵을 지키자, 무영투괴는 미간을 가득 찌푸리며 혀를 쯧쯧 차다가 그의 옆의 허공을 향해 툭 하고 말을 던졌다. "둘째야, 잘 지냈느냐?" "오랜만입니다, 형님." 빈 허공에 대고 웬 헛소린가 싶은 표정을 짓던 금호는 허공에서 느닷없는 흘러나온 온유한 음성에 뜨악해 하다가 한 순간 손바닥을 가볍게 내려쳤다. "아, 천형이 숨어있었군요?" "일단은 살각의 목표이니, 모습을 드러내면 그리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듯 싶어 은공께 부탁드렸습니다." 허공에서 붉은 거체의 대환귀(大幻鬼)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천무는 부드럽게 미소짓는 얼굴로 답해준 뒤 시선을 살짝 바깥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겠지요." 천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금호와 남국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크으윽..." 쌍두마룡의 상처에서 분수처럼 튀어나온 용혈(龍血)에 의해 지글지글 녹아드는 야행복을 찢어낸 천살(天殺)은 이를 갈았다. "크르르르...!" 이를 드러내며 후끈 달아오른 열기와 쇠도 얼어붙을 한기를 쏟아내는 쌍두마룡의 모습 또한 곱지는 않았다. 검기조차 그저 흠집을 낼 수 있을 뿐이던 비늘이 강기에 의해 누더기처럼 떨어져 나가있었고, 몸 곳곳에 거대한 맹수에게 물어 뜯기기라도 한 듯한 외상과 천만근의 바윗덩이에 뭉개진 것처럼 으깨지고 비틀린 내상이 가득했다. 직접 보기 전까지만 해도 이 세상에 절대 존재하지 않을 거라 믿었던 용(龍)에게 이만한 타격을 입힌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다섯 명의 십대자객 중 한 명은 내려쳐진 꼬리에 전신이 짓뭉개지고 한 명은 발톱에 몸이 뚫리며 즉사한데다가 대주급의 혈주괴인은 아예 전멸해버렸다. 지살(地殺) 또한 죽었다. 코와 팔, 복부의 살이 뭉텅뭉텅 썰려나가는 부상을 입으며 거인과 같은 괴물을 박살낸 뒤, 저 빌어먹을 마룡의 눈알을 하나 터트리고 그 대가로 으득으득 씹혀죽었다. 상체와 하체가 두 머리에 의해 쭈욱 뜯겨지며 그 사이로 내장이 비오듯 쏟아져 내리는 광경은 아직까지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천살 자신도 만혼귀(萬魂鬼)를 물리치느라 진원진기까지 깎아 사용한 대가로 더 이상은 운신조차 힘들었다. 끝끝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각주인 무정살왕(無情殺王)이 나오면 어떻게든 저 용을 물리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용이 가로막고 있던 심곡의 입구에서 뛰쳐나온 괴물 자식과 괴물 새끼들은, 그리고 하나의 거대한 고함은 마지막 희망마저 무너트렸다. "너네 대장쥐새끼는 내 손에 뒈졌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지만, 자신 있게 외친 괴물 자식이 번개처럼 몸을 날려 십대자객 중 한 명의 몸을 상반신과 하반신으로 나눠버리자 그의 불신은 산산이 깨져버렸다. 아무리 오랜 격전으로 의해 본래 실력의 반도 발휘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십대자객을 단번에 일도양단 해버리는 그 모습은 이미 초절정의 경지를 뛰어넘었다. 5년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상대해볼 만했던 놈은, 이제 이 용과 마찬가지로 항거불능의 무시무시한 괴물로 돌아와 무절살왕의 목을 벤 것이다. 피이잉-퍼엉!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확인한 천살이 신호탄을 터트리자, 망령들과의 전투로 괴멸 직전까지 가있던 자객들은 빠르게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살각의 퇴각을 의미하는 신호탄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5년 동안 시체의 산과 피의 바다를 만들어온 기나긴 암투의 끝을 고하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 연참 이벤트 gogogo *정리를 위해 연참은 주말에 몰아서 할 생각입니다.* *이벤트 참가시에는 제목 앞에 [이벤트]를 달아주시길 바랍니다. 1.비평&감상&추천 비평글, 감상글, 추천글 종합 2편당 1편의 글을 연참합니다. 이벤트에 해당하는 비평 감상 추천의 조건은 최소 200자 이상입니다. 올리실 장소는 아무 곳이나 상관없으나, 그 위치는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2.선작수 선작수가 100단위를 넘을 때마다 1편씩 연참입니다. 출판 이벤트 gogogo 3.팬아트(일러스트) 무적사신의 그림 이벤트입니다. 올리실 곳은 아무 곳이나 상관없으나 필자에게 꼭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여러 곳에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캐릭터, 소설 속 장면, 패러디 만화 모두 상관없습니다. 심사는 10분의 심사위원을 택해 총 100점 만점으로 채점하도록 하겠습니다. 상품은 필자의 싸인이 들어간 무적사신 1-2권입니다.(2명) 4.팬픽(패러디) 무적사신의 글 이벤트입니다. 올리실 곳은 아무 곳이나 상관없으나 필자에게 꼭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여러 곳에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외전, 패러디, 모두 상관없습니다. 심사는 10분의 심사위원을 택해 총 100점 만점으로 채점하도록 하겠습니다. 상품은 필자의 싸인이 들어간 무적사신 1-2권입니다.(2명) 5.비평&감상&추천 무적사신의 감상 이벤트입니다. 올리실 곳은 아무 곳이나 상관없으나 필자에게 꼭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여러 곳에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비평, 감상, 추천 상관없습니다. 심사는 10분의 심사위원을 택해 총 100점 만점으로 채점하도록 하겠습니다. 상품은 필자의 싸인이 들어간 무적사신 1-2권입니다.(2명) 5.증판(부정확) 무적사신이 증판 될 경우, 추가로 외전을 써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필자의 사정상 외전을 쓸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안 보시면 상당히 아쉬울 과거사를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증판을 위해 서점, 책방, 게시판에 추천 및 예약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아아아. 필자의 이메일-870097@hanmail.net ------------------------------------------ 오늘 올리는 글은 '덤'입니다. 이벤트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11 17:02:58 고친날 2005-08-11 17:02:58 읽은수 7925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8.생사판괴(生死判怪).(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사신, 그 명성이 하늘을 찌르니 무림삼괴에 부족함이 없다.- "크흐...거 참나, 어이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뭘 말하는 건가?" 턱수염이 수북한 중년인의 물음에 콧수염의 사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을 덧붙였다. "구룡팔봉이 하루아침에 육룡육봉이 돼버린 거 말이네." "하기야...살각과 철궁곡의 분쟁에 구룡팔봉이 끼여들었다가 죽은 건 아무도 예상 못한 일이지." 구룡팔봉 중 음봉(音鳳), 철룡(鐵龍), 독룡(毒龍), 장룡(掌龍), 뇌봉(雷鳳)의 죽음은 너무나 갑작스러웠고 그만큼 파란도 컸다. 살각의 승리를 확신하고 공과 경험을 쌓아주기 위해 삼룡일봉을 보냈던 사파나, 균형을 맞춤으로서 다른 조력자를 보낼 시간을 벌고자 했던 정파나 모두 이 예상치 못한 사태에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는 식으로 후계자를 잃은 만음곡(萬音谷)과 금강전(金剛殿), 독림(毒林), 수라전(修羅殿), 벽력뇌가(霹靂雷家)의 다섯 세력은 노화를 터트리며 분분히 일어났는데, 이로 인해 천하 각지에서는 온갖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제 곧 정사대전(正邪大戰)이 날 거라는 소문까지 있네." "허, 정사대전이라." 중년인은 자신의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심려를 감추지 못했다. 정사대전이 일어나면 아무런 상관없어도 피 보게 되는 것이 일반 민중이다. 평시에는 정의성과 철혈성이 각자 정파와 사파를 잘 통제하고 있기에 하층민들에게까지 무림에 의한 피해가 돌아가지 않지만, 정사대전이 벌어지면 통제고 뭐고 없다. 사파에서조차 외면 당했을 정도로 잔학한 마두나 협객의 탈을 쓴 비열한 위선자들이 곳곳에서 나와 무력으로 민중을 착취하니, 정사대전이란 여러모로 반갑지 않은 일이다. "쩝, 우리가 밀려드는 천재지변을 막을 수야 없는 노릇이고...과연 이번 정사대전이 끝나면 무림의 세력구도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 "아마 만만치 않게 바뀌겠지. 일단 살각과 철궁곡만 봐도 그렇고 말이네." 각주인 무정살왕을 비롯해 천지쌍살 중 지살, 십대자객 중 여덟을 잃음으로써 전력의 8할을 잃은 살각과, 소곡주인 궁룡과 외유 중이던 한 명의 장로만이 가까스로 살아남아 멸문을 피한 철궁곡은 무기한 봉문에 들어갔다. 부자는 망해도 삼 년을 간다고 하지만, 살각과 철궁곡은 망해도 보통 망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거대문파의 저력이 남아있다고 해도 자객과 곡도들이 거의 전멸하다시피 한데다, 때가 칼날과 같은 흉흉한 시기니 최소 수십 년 동안은 세를 가다듬는데 노력해야 예전의 휘광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살각이나 철궁곡 같이 망하는 문파도 있을 테고, 새로 치솟는 문파도 있겠지. 사람도 그렇게 될 테고." "생사판괴(生死判怪)와 불사패신(不死覇神)처럼 말인지?" "그렇겠지. 아마 그들처럼 갑자기 치솟는 이들은 별로 없겠지만..." 구룡팔봉이 육룡육봉이 된 것처럼, 삼괴오신오왕을 삼괴오신사왕으로 새롭게 꾸민 생사판괴와 불사패신은 현재 무림에서 가장 혁혁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유명인이다. 사사혈괴를 꺾고 살각을 물리쳤다는 생사판괴의 주술이나, 무정살왕을 참살했다는 불사패신의 무공이나 새로운 무림십이성좌(武林十二聖座)에 오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무림의 풍문을 부정하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생사판괴에 대한 건 별로 믿음이 가지 않지 않네." "용과 귀신을 부린다는 건 조금 과장이 있겠지만, 그래도 헛소문으로 사사혈괴와 살각을 물리쳤겠나?" "우리가 주술에 대해 뭘 아나. 그냥 그런 게 있나보다 해야지. 그래도 용만큼은 절대 못 믿겠지만." "흠, 그건 나도 동감이네." 두 사내가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던 그는 무심히 술잔을 내려놓았다. 탁. '빠르군.' 철궁곡의 일이 벌어진 것이 겨우 한 달 전. 아무리 말이 빠르다지만 일반 민중에게까지 이렇게 빨리 퍼지려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소문을 퍼트려야한다. 그의 시선이 맞은편에서 차를 한 모금 머금는 천무에게 향했다. 천이각에 잦은 접촉을 하며 천무가 무슨 정보를 얻었는지는 알 수 없고, 무슨 정보를 흘렸는지도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이 정도 속도로 소문을 퍼트릴 수 있는 단체는 오직 천이각뿐이며, 소문이 퍼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가 사사혈괴를 처리했다는 정보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뿐이었다는 사실이다. "아, 그러고 보니 새로운 구룡팔봉의 후보에 생사판괴의 두 제자도 들어갔다지?" "그래, 20대 초반의 나이인데도 일류고수라는군. 게다가 생사판괴의 제자면 술법도 익히고 있을 테니 구룡팔봉이 될만하지." 붕대를 얼굴에 감고있던 남국과 붉은 복면을 눌러 쓰고있던 금호가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린 나이에 자신들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됐으니 신경을 쓰는 것도 당연할 터. '아직 부족하군.' 탁자에 앉아있던 모두가 그 반응을 눈치챘다. 그들의 면면이 가볍지 않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급성장을 이룬 능력에 비해 경험이 부족한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그 제자들이 엄청난 미인(美人)이라더군." "미인? 어느 정도의 미인 말인가?" "다른 팔봉들은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천하제일미라는군. 그것도 두 제자 모두 말이야." "난 그 둘이 구룡(九龍)이 될 거라고 들었는데...팔봉(八鳳)을 잘못 들은건가?" "잘못 들었겠지. 천하제일미라면 당연히 팔봉 아니겠나?" "흐음, 그건 그렇군." 빠드득! "응?" 뭔가 사나운 소리에 의아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던 두 사내가 별다른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시선을 도로 돌리자, 그 또한 탁자에 깊숙이 박혀있는 젓가락으로부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리군.' 이를 악물고 있는 금호의 모습은 판단을 정정할 필요성을 느끼게 했다.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 어린애나 다름없다. 만약 외모에 관해 도발을 한다면 실전중이라도 십중팔구 먹혀들 것이다. 금호에 비해 침착한 남국은 그저 조금 얼굴을 붉혔을 뿐이지만, 대신 마음이 여리고 독심이 부족하다. 적이라고 판명되면 사정없이 살수를 쓸 정도의 독심은 가지고 있지만, 그가 바라는 것은 그 정도가 아니다. 필요에 따라서는 적이 아닌 아군이나 아무상관 없는 이에게도 살수를 쓸 수 있어야 한다. '훈련이 필요한가.' 감정을 절제하는 훈련이라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이르다. 감정은 영혼(靈魂)으로부터 나오는 것. 감정이 굳는다는 것은 영혼이 굳는다는 것이고 굳은 영혼은 더 이상 영력(靈力)의 잠재력을 끌어낼 수 없다. 그렇게 된다면 성장속도에 막대한 차질이 생길 것은 당연한 이치. 최소한 고위 사령술사의 수준이 될 때까지는 저런 감정을 놔둬야 한다. "생사판괴가 정의성(正義城)에 머물고 있다니까, 운이 좋으면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군계일학이라고 하니, 만약 정의성 밖으로 나오면 바로 알 수 있겠지." 피식 웃은 두 사내가 이런저런 대화의 방향을 다른 잡담으로 돌리자, 그는 그들의 대화에 대한 신경을 칼로 자르듯 단번에 끊었다. "퍼진 소문은 이 정도인가." "아마 그런 듯 싶습니다." 그는 무심히 술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삼키며 생각에 잠겼다. 사령술은 마치 암기와 같아 알려지지 않으면 않을수록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힘. 그런 면에서 이런 과도한 정보의 유출은 좋지 않다. '목적은?' 정보를 유출한데에는 목적이 있을 터. 그의 능력을 확실하게 알리면 알릴수록 사파에서는 경각심을 높인다. 특히 후계자를 잃어 그를 원수처럼 여기고있는 칠성회, 독림, 수라전, 벽력뇌가의 경우, 만반의 준비를 갖춰 원한을 갚으려들 것이다. '이 또한 계획인가.' 그렇다면 계획에 따라 미리 대비를 해둬야 한다. 칠성회, 독림, 수라전, 벽력뇌가와는 이미 척을 졌다. 직접적으로 손을 쓴 철방을 내줌으로써 은원을 해결하는 수를 쓸 수도 있겠지만, 철방은 무림에 나왔을 때부터 그의 수족노릇을 해왔으니 그 정도 수단으로 원한을 피하기는 힘들 것이다. '선수를 쳐야한다.' 천하삼십육세인 살각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태반의 망령을 잃기는 했지만, 쌍두마룡 헬카즈, 철방, 그 자신까지 포함해 전력을 동원한다면 각개격파의 가능성은 충분하다. '꼭 전면전을 벌일 필요는 없다.' 그의 고개가 살짝 천무를 향해 돌아갔다. 무림의 은원에 관여하게 된 것도, 살각을 상대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 천무와의 계약 때문이다. 계약의 조건은 정사의 균형을 맞추는 것. 한없이 어려운 문제였지만, 계약은 반드시 지켜야한다. 그러나 그것을 또 다른 조건인 천무의 보호와 상충시키면, 천무를 비롯한 일행과 그의 안전을 위해 어느 정도 정사의 균형을 흔들어도 된다는 내용이 된다. '적당한 수단을 써야겠군.' 자칫 정사대전이 앞당겨져지면 작지 않은 혈풍이 몰아칠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계약뿐. 세상의 모든 이가 몰살당하든 고통으로 신음하든 알 바 아니다. ====================================== 고무림 선작수 3600대 돌파의 한 편입니다. 감상 이벤트 기준을 낮추겠습니다. 감상&추천&비평 1편당 1편의 글로 올립니다. 최소 조건은 100자 이상입니다. -------------------------------------- 일명 눈 깜짝할 사이에 뚝딱 이형환위 기법. 한 장을 넘어갈 때마다 시간 및 장소의 이동이 급격히 이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 유의하여 주십시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12 14:47:43 고친날 2005-08-12 15:56:46 읽은수 7620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8.생사판괴(生死判怪).(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식사를 마치고 객잔을 나온 그는 곧바로 정의성(正義城)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외부의 동향은 충분히 살폈으니, 더 이상 밖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 "저...사부님. 오랜만에 나와서 그런데, 저잣거리에 좀 들려도 될까요?" 그의 걸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눈치챈 금호는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듯 조심스럽게 허락을 구했다. 5년간의 피신생활이 끝났음에도 바로 정의성에 틀어박혔으니 자유가 갑갑했을 법하다. 그러나 비합리적이다. 저잣거리에 나가 대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금호와 남국은 그 시간에 한번이라도 주술을 더 연습해서 힘을 키워야하는 그의 도구이다. "저잣거리면, 갖가지 촉매도 구할 수 있어요." 그가 승낙하지 않을 것임을 눈치챈 금호는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촉매가 부족하지는 않지만, 일회용 촉매의 경우 많이 있으면 많이 있을수록 수련이나 실전에나 도움이 된다. 약간은 합리적이다. 그러나 굳이 저잣거리에 가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촉매는 정의성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데다가 지금 당장 촉매를 구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급박한 것도 아니다. 비효율적인 행동이다. "에, 음..." 절정의 눈치로 아직도 근거가 부족함을 느낀 금호는 또 다른 이유를 대려다가 살짝 말꼬리를 흐렸다. 사실은 너무 갑갑해서 모처럼 나온 김에 저잣거리를 구경가보고 싶을 뿐이니, 제대로 된 이유를 찾기 힘든 것이 당연했다. "험, 저잣거리에 명주를 파는 주점(酒店)이 있다던데..." 철방이 입을 열어 슬쩍 말을 흘렸다. 그다지 가치가 없는 정보다. 술은 그가 음미하는 유일한 음식물이지만, 있는 술은 마시더라도 술을 마시기 위해 일부러 걸음을 옮길 생각은 없다. 그가 철방의 말을 깨끗이 무시하고 계속 걸음을 옮기자 절망에 차있던 금호와 남국의 시선이 천무에게 향했다. 이론으로 그를 설득할 수 있는 이라면, 역시 천무뿐일 거라는 기대와 믿음의 시선이었다. "하루 정도는 괜찮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사람과 만나며 경험을 쌓을수록 성장하고 발전하는 법이지요." 천무의 온유한 음성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리가 있는 의견이다. 경험은 사람들을 직접 상대할수록 빠르고 확실하게 쌓을 수 있는 만큼, 지금의 경험부족은 5년 동안 폐쇄된 생활을 해온 것이 주된 원인일지도 모른다. 고위 사령술사가 되기 위해서는 단순한 수련보다 정신적인, 그리고 영적인 깨달음 또한 중요하다. 금호와 남국의 영력과 노력은 언젠가 깨달음을 얻기에 충분한 수준이지만, 거기에 경험이 더해진다면 그 기간을 더욱 단축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자 금호와 남국은 소리 없는 환호성을 내질렀고, 천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옆에서 길을 안내했다. 그저 자신의 의견이 깨끗하게 무시당한 철방만이 침울한 안색으로 뒤를 따를 뿐이었다. "자아~싸요, 싸." "아가씨, 이 장식품 좀 골라봐!" "맛좋은 과일이 있어요, 맛좋은 과일!" 저잣거리는 충분히 시끌벅적했고, 그만큼 다양한 볼거리가 있었다. 금호와 남국은 대체 뭘 보고있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사방을 돌아보았고, 철방도 침울한 안색을 거두고 이리저리 흥미로운 것을 살폈다. 천무가 무엇하나 구경하지 않고 그저 여유 있게 걸음을 옮기는 듯 싶으면서도 차분하게 주변을 살피는 통찰력을 발휘했다면, 그는 수많은 것들을 초감각으로 느끼면서도 그대로 흘려보내며 똑바로 걸음을 옮겼다. "대형, 주머니를 조금 풀어도 되겠습니까?" 돈의 사용에 대한 허락을 구하는 것일 터. 금황성(金凰城)으로부터 받은 상금으로 충분하게 있고,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더 구할 수 있으니 웬만큼 퍼다 써도 상관없는 일이다. 그에게 허락을 구한 철방이 곧 히죽 얻는 얼굴로 이런저런 음식물을 한가득 사오자, 그는 하나의 술병을, 천무는 작은 과일을, 금호와 남국은 경단과 꼬치를 받아들었다. 특히 어릴 때부터 워낙 고생을 많이 해서 군것질도 거의 해본 적 없는 금호와 남국은 무척이나 기뻐했는데, 그 소박한 모습을 본 천무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역시 아직은 어린 듯 싶군요." "그렇군." "하지만 아이는 언젠가 어른이 되는 법이지요. 특히 험난한 세상에서는 더욱 빨리 말입니다." 그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정사대전이 일어나면 훈련을 거치지 않더라도 감정을 다스리고 독심을 키우게 될 것이다. 미리부터 훈련을 해둘 필요는 없다. '과연인가.' 천무의 통찰력은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훤히 꿰뚫고 있다. 만약 적이거나 아무 상관없는 이라면 이것저것 따질 바 없이 목을 쳐야겠지만, 보호해야할 계약자이자 그를 따르는 아군인 이상 제거하기보다는 이용해야한다. "지금 정사의 균형은 어느 정도지?" "드러난 힘으로는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숨겨진 힘을 가늠해보면 최소 사대육, 최대로는 삼대칠까지 올릴 수 있겠지요." "상당하군." "워낙 많은 준비를 해놨으니 말입니다. 이나마도 5년 동안 정파에서 나름대로 한 수를 준비해왔기에 겨우 맞춰진 비율이지요." 균형을 맞추면서도 목적한 바를 이뤄내기에 적당한 비율이다. 문제는 확실한 처리. 천무, 그리고 무영투괴의 통찰력이라면 그의 손속을 알아볼 것이다. 그러나 천무는 계획보다 계약을 우선하고 무영투괴는 천무의 의형이니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가 여러 가지 일 처리를 생각하고 무심히 결론을 내리는 사이, 일행은 저잣거리 곳곳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에 손을 대고 있었다. 금호는 칼날이 예리하게 선 비도를 여럿 챙겼고, 남국은 여러 가지 뼈를 세공해서 만들어 위급할 때 촉매로 사용하기에 좋은 팔찌를 구입했다. 구입을 해도 꼭 실용적인 것만을 구입하는 것이 역시 사부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은 듯 싶었다. 천무가 몇 개의 서적을, 철방이 산더미처럼 많은 술을, 그가 작은 보석이 박힌 반지를 하나 구입했을 때쯤에는 상당한 시간이 흘러있었다. "돌아간다." 이미 구경도 충분히 하고, 살 것도 대충 산 그들은 그의 무심한 말에 곧바로 걸음을 돌렸다. 밤에는 밤 나름대로의 구경거리가 있겠지만, 천무로서도 더 이상 댈 이유가 없었던 만큼 선선히 그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참 혼잡한 때였지만, 큼지막한 덩치와 흉악한 인상에다가 등에는 커다란 대도를 매고 있는 철방이 앞장서자 인산인해가 쩌억 갈라지며 스스로 길을 열었기 때문에 그들은 별다른 장해 없이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많군.' 그는 북적북적한 인파를 보며 무심히 생각에 잠겼다. 만약 이 많은 인파를 모두 망자로 만든다면 어느 정도 전력이 될지, 또는 제물로 바치면 어느 정도 수준의 마물을 부를 수 있을지를 계산해봤다. 세간의 이목이 있는 만큼 쉽사리 사용할 수 없는 방법이지만, 뒷일을 기약하기도 힘들 정도의 급박한 상황이 될 경우가 되면 수단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다. 그럴 때를 미리 대비해 전력을 계산해두는 것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중요한 일이다.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며 민간인들로 만들 수 있는 여러 가지 효율적인 망자를 떠올리던 그의 감각에 문뜩 걸려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노리고 있군.' 북적북적한 인파 속에서, 하나의 시선이 그들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관찰하던 시선은 잠시간의 갈등 후 곧 먹이를 노리는 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일행과의 거리를 좁혀왔다. '살기는 없다.' 고도로 단련된 자객들은 살기를 철저하게 죽일 수도 있지만, 천하제일자객이라는 무정살왕의 은신도 잡아냈던 그의 감각은 그것이 목표를 노리기는 하되 살기는 들어있지 않음을 분명하게 알려주었다. 또한, 그 시선은 아까 전에도 한 번 스치듯 느낀 적 있다. 보석반지를 사며 철방이 전낭에서 은자가 부족해 금자를 꺼냈을 때 번뜩였던 시선. 그렇다면 이 시선의 주인은 하찮은 소매치기일 것이다. '별일 아니군.' 별다른 위협이 없음을 확인한 그가 그 시선으로부터 신경을 끊은 잠시 후, 한 사내가 철방의 옆을 툭 하고 스쳐지나갔다. 바람 같은 손속. 비록 천하제일투 무영투괴에 비하자면 거북이의 움직임이나 다름없다고 해도 웬만큼 감각이 민감한 고수가 아니면 눈치채기 힘든 솜씨다. 그만한 자신감이 있으니 인상은 험악해도 감각은 둔해 보이는 철방의 주머니에 손을 댄 것일 터. 그러나 상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 자신감도 자만에 지나지 않는다. "이 새끼는 뭐야?" 굳이 십이마력(十二魔力)까지 끌어올리지는 않았지만, 기공(氣功)과 십이신력(十二神力)의 감각만으로도 무리 없이 사내의 행동을 감지해낸 철방은 무정살왕에게 박살난 뒤 시체를 배터지게 먹어치워 겨우겨우 회복한 왼손으로 사내의 손목을 잡아챘다. 사내의 손을 비틀어 그 손에 쥐어진 자신의 전낭을 두 눈 똑똑히 확인한 철방이 미간을 찌푸릴 때서야 상대를 너무 과소평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내는 눈알을 좌우로 굴리다가 급히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왜, 왜 이러십니까요? 소인의 전낭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 송해선님의 감상으로 한 편 올립니다. *팬픽, 팬아트 또한 연참 이벤트에 포함됩니다.* --------------------------------------- 예고-지옥에서 튀어오른 징벌의 철퇴! 누군가의 사악한 계략에 내몰리는 누구! 나무아멘수불. 부디 극락왕생하기를. 진심과 감상의 리플 가득 부탁드립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13 00:31:01 고친날 2005-08-13 00:31:01 읽은수 7573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8.생사판괴(生死判怪).(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허어?" 철방의 안면이 가득 찡그려지자, 대략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챈 금호와 남국은 고개를 내저었다. 자고로 세상에는 잔재주를 내밀어도 되는 상대가 있고 안 되는 상대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철방은, 명백한 후자에 속했다. 우드득! "끄아악!!" "이런 쌍놈의 새끼를 다 봤나." 손목이 으스러지는 소리에 기겁한 구경꾼들이 뒤로 쫘르륵 물러났다. 뼈가 가루가 되는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던 사내는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이대로는 위험하다고 판단한 듯, 떨리는 음성으로 고함을 내질렀다. "끅, 끄윽...나, 나으리...소인의 전낭을 원하시면, 그, 그냥 드릴 테니, 제발 목숨만은..." "얼씨구?" 끝까지 발뺌을 해대는 사내의 작태를 본 철방의 두 눈에 푸르른 귀화가 번뜩였고, 금호와 남국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무심히 주변을 훑었다. 구경꾼들의 눈에 서린 것은 의혹과 의심. 명백히 약자로 보이는 사내와 흉악무도한 강자로 보이는 철방 중 누구에게 동정이 가는지, 누구에게 불신이 가는지는 분명하다. 다른 곳에서라면 민중의 동정을 얻어봤자 결국은 무력이 일을 결정짓는 만큼 이런 수작은 아무런 소용도 없지만, 이곳에는 정파무림을 대표하는 정의성이 있다. 그러나 사내는 잘못 선택했다. 정의성의 이름으로 그들을 막을 수는 없다. 오히려 철방의 살심을 일으키고 두 제자의 동정심을 꺼트렸다. '귀찮게 됐군.' 그냥 무시하고 가버리는 쪽이 편하지만, 그렇게 되면 저 사내는 더욱 기세 등등해져 전낭을 뺏어간다고 통곡할 것이다. 철방이 살짝 그를 향해 시선을 향했다. 살인에 대한 허락을 구하는 눈빛. 그가 조금만 고개를 끄덕여도 사내는 저잣거리 한가운데서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목을 생각하심이 좋을 듯 싶습니다." '이목이라.' 천무의 조언에 그는 무심히 받아들였다. 염두에 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이목에도 적당히 신경 써야만 한다. 그 전에 악평을 받는 것은 좋지 않다. "적당히 처리해라." 그가 말한 '적당히'가 어느 정도인지 대충 알아들은 철방의 얼굴에 대놓고 실망이 어렸지만, 대형의 명은 절대적이었다. "적.당.히. 처리해주마. 적!당!히!" 이를 빠득 악문 철방은 사내의 반대쪽 손목을 움켜쥐었다. 철방의 악력으로 양 손목과 양 발목을 으스러트리면 아마 남은 한평생을 벌레처럼 기어다니는 신세가 될 것이다. "멈추세요!" 한줄기 고운 음성과 함께 하나의 새하얀 인영이 튀어나왔다. 옥음같은 미성과 흐르는 구름을 연상시키는 고아한 신법은 절로 시선을 끌게 만들었지만, 세상에는 언제나 예외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싫거든?" 빠드득!! "크으으...!" 철방은 방해꾼이 끼여들었음을 직감하고 잽싸게 손목을 분질렀다. 그것도 그냥 분지르는 정도를 넘어 꽈악 주물러서 근맥과 혈맥을 엉망으로 뭉개고 뒤틀어버렸으니, 재활의 가능성은 거의 전무할 것이다. 그들 앞에 내려선 백의여인은 옥과 같이 새하얀 얼굴에 당혹감을 한가득 드러냈는데, 오관이 반듯하고 눈이 맑은 것이 금호와 남국만큼은 아니더라도 절색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미녀였다. "대체 무슨 만행인가요!" "보면 몰라? 도둑놈 손목 분지른 거지." 퉁명스러운 철방의 대답에 잠시 상황이 혼란스러워진 듯, 주변을 훑어본 그녀는 구경꾼들의 시선에서 무언가 확신을 얻고 다시 입을 열었다. "도둑질을 했다면 관아로 가서 국법으로 처리해야할 터, 사사로운 처벌을 해서는 안됩니다." '좋지 않군.' 겉으로는 도둑질에 대한 처벌을 말하지만, 그 이면에 있는 것은 무고하고 힘없는 약자를 괴롭히는 게 아닌가 싶은 의심이 담겨있다. 이미 이목을 끌어버렸으니 일이 불편하게 됐다. 그때, 머리카락으로 가려진 눈가 아래로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천무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여협의 말씀은 옳으나, 철대협의 성정이 너무 올곧으시어 일벌백계(一罰百戒)를 펼치신 것이니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여인은 입을 살짝 벌리고 단아한 청년의 얼굴과 흉악한 거한의 얼굴을 돌아보았고, 구경꾼들은 일제히 뜨악해하며 절대적인 부정을 드러냈다. 성정이 너무 올곧다니, 대체 누가? 한눈에 봐도 산적두목으로 보이는 저 거한이? 다짜고짜 손목을 와지끈 분질러버리는 작자가? "으잉?" "딸꾹!" 정작 가장 큰 반응을 보인 것은 본인과 일행이었다. 거한의 안면에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멧돼지를 본듯한 표정이 떠올랐고, 두 제자는 사신의 농담이라도 들은 듯 딸꾹질을 했다. "이, 일벌백계라니...어찌, 어찌 그런..." 겨우겨우 입을 열고도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더듬거리는 그녀에게 천무는 온유한 음성으로 답했다. "설마 협의지로를 걷는 정파의 여협께서 외양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우를 범하지 않으실 거라 믿습니다." 정곡을 찌르는 말에 그녀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봐도 약자에 대한 강자의 만행인데, 단지 겉보기로 판단하면 협의지로를 더럽히는 격이니 아무리 의심이 가도 제대로 추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 아이구...선녀님, 선녀님...까, 까지 해를 입으시기 전에...어서, 어서 가십시오! 끄으윽..." 통증으로 몸부림치는 가운데도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사내의 필사적인 외침은 그녀의 마음을 다시 되돌렸다. 자신이 위급한데도 가라고 할 정도로 순박한 이를 그냥 방치하는 것은 그녀의 협의지로가 용납치 않았다. "일벌백계를 하셨으면 이만 풀어주시는 것이 어떤가요? 아무리 도둑질을 했다 하여도 두 손목이 꺾으니 충분한 죄과를 치렀다고 봅니다." 누명을 벗기지는 못하더라도 사내가 더 이상 해를 입지 않도록 구해줄 생각일 터. 이쯤에서 끝내는 것이 번거로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거한의 생각만큼은 달랐다. "누구 마음대로? 최소한 두 발목까지는 꺾어야지!" 안 그래도 적당히 손을 보느라 성질이 사나워져 있던 철방은 눈에서 시퍼런 귀화를 불태우며 사내의 발목을 후려 찼다. 콰직!! "끄아아아!!" 발목까지 분질러진 고통을 견디지 못한 사내가 결국 입에 거품을 물고 눈을 까뒤집자, 안면이 급변한 여인은 날카롭게 외치며 검을 뽑아들었다. 채앵! "더 이상 과한 손속을 쓰시는 것은 용납치 않겠습니다!" "흐흐, 용납치 않으면 어쩔 테냐? 엉?" 스산한 미소를 지은 철방이 사내의 다른 쪽 발목까지 박살내려는 자세를 취하자, 더 이상 말이 통할 상대가 아님을 깨달은 그녀는 철방을 검을 똑바로 향했다. 그때, 잠시 상황을 주시하던 천무의 입이 열렸다. "철대협, 창여협. 후견인(後見人)의 명예를 상하게 하는 일은 그만 하시지요." 둘은 흠칫 행동을 멈췄다. 철방에게는 대형이 지켜보고 있고 여인에게도 사문과 가문이 있으니, 그들의 명예가 나온 이상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다. "이쯤에서 서로 양보하심이 좋을 듯 싶지만...아무래도 그건 마음에 들지 않으실 듯 싶군요."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 철방의 귀안와 여인의 정안이 마주치며 불똥을 튀기자, 부드러운 미소를 더욱 짙게 한 천무가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비무로 그 결정을 내심이 어떻습니까?" "비무, 그거 좋지!" "무력으로 일을 결정짓는 것은 바르지 않으나, 협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철방과 여인이 해결책을 받아들이자, 그는 무심히 고개를 돌려 천무에게 향했다. '알 수 없군.' 생사판괴와 불사패신의 별호를 내밀면 조금 시끄러워 지더라도 상황 자체는 무난하게 해결할 수 있을 터. 그러나 천무는 일을 더욱 복잡하게 꼬아가고 있다. 무언가 노리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이 뭔지 뚜렷하게 알 수는 없다. 결과가 너무나도 뻔한 비무를 벌이려는 목적은 무엇일까. 계약에 의한 목적인가, 아니면 계획에 의한 목적인가. '두고 봐야할 터.' 관심을 가지지 않기에 개입하지 않는 무심한 방관자이자 아끼지 않기에 속박하지 않는 오만한 지배자인 그는 천무의 수작을 방치했다. 그렇게 무언의 허락을 받은 천무는 금호의 어깨에 조용히 손을 올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철대협께서 직접 손을 쓰시는 것은 아무래도 체면에 맞지 않으시니, 금소협이 대신 비무에 나서주시는 것이 좋을 듯 싶군요." ========================================= 꼬마미이님의 감상으로 한 편 올립니다. 6~8시 쯤에 한두 편 더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싫거든'...그래도 대답은 해주니 용하다. 그리고 천무...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거냐? 예고: 비열하기 그지 없는 인질극이 펼쳐진다. 밝혀지는 정체. 그리고 펼쳐지는 주술!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13 06:09:31 고친날 2005-08-13 06:09:31 읽은수 7388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8.생사판괴(生死判怪).(4)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예...엑?!"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아버린 셈이 된 금호는 황당함으로 입을 따악 벌렸지만, 철방과 여인은 본인의 의사도 없이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철방은 그 자신보다 대형의 체면을 생각한 동의였고, 여인으로서도 좀더 쉬운 상대가 나서는 것을 굳이 사양할 필요 없었다. "네가 이 형님을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말을 끝맺으며 씨익 웃어 보인 철방은 혼절한 사내를 질질 끌며 뒤로 물러났다. 청년은 친우를 향해 도움을 청하는 시선을 보냈지만,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남국의 어깨에 한 손을 올려놓은 채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있는 천무의 모습은 금호로 하여금 눈물을 삼키며 비도를 꺼내들게 만들었다. '인질이라니, 인질이라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냥 웃는 걸로 보였지만, 눈치 백단의 금호에게는 이 비무를 거절하거나 어영부영 넘기면 자신뿐만 아니라 친우인 남국까지 두고두고 후회할 정도로 괴로운 일을 당할 거라고 넌지시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한 사정을 알 리가 없는 여인은 비도를 들고 있는 금호를 보며 경계심을 높였다. 아무리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해도 비도술을 사용하는 듯한 붉은 복면인은 명백한 사파인으로 보였다. '혹시 독까지 발라져 있는 건 아닐까?' 비록 상대의 연배가 자신과 큰 차이 없어 보였지만, 무공에는 한 수 부족함을 느끼고 있는 그녀였기에 불안감 더욱 컸다. 금호 또한 반 강제로 하게 된 비무인 만큼 선제공격을 하기에는 꺼려지는 것이 없잖아 있어 비도를 든 채 여인이 먼저 손을 쓰기만을 기다렸다. 그들간의 대치가 점점 길어지는 것을 보며 철방의 미간이 서서히 찌푸려질 무렵, 천무가 입을 열어 온유한 음성을 흘렸다. "아무래도 무공을 겨루는데는 거리낌이 있으신 듯 싶으니...병장기를 집어넣고 주술(呪術)을 겨뤄보심이 어떻습니까?" "예?" "네?" 둘은 일제히 당혹감을 드러냈다. 느닷없이 주술대결이라니? 아니, 그럼 상대방도 주술을 할 줄 안단 말인가? 아무리 천하무림에 기인이사가 많다고 해도 주술사를 보기가 하늘에서 별 따기와 같으니 그들의 놀람은 당연했다. "설마 도봉(道鳳) 창주향(創主響) 여협께서 주술에 자신 없으신 건 아니겠지요." 중인들의 눈이 모두 크게 뜨여졌다. 백의여인이 설마 주술삼방 중 모산파(茅山派)의 속가제자로서 뛰어난 도술(道術) 실력 때문에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선녀(仙女)라고까지 불리는 후기지수인 도봉 창주향일 줄은 아무도 짐작치 못한 일이었다. 창주향 역시 머리가 복잡하게 꼬이고 있었다. 자신의 정체를 알면서도 주술대결을 제안했다는 것은 충분한 승산이 있기 때문일 텐데, 웬만한 수준 이상의 주술사를 주르륵 외우고 있는 그녀로서도 붉은 복면인이 누구인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한 순간, 그들의 뒤쪽에서 무심한 태도를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기이한 흑의장포의 사내가 그녀의 눈에 비쳐졌다. '저 사내는 설마...' 기이한 흑의장포에 묵봉을 든 사내. 그냥 스쳐지나간다면 몰라도, 주술사라는 것과 관련해 생각한다면 모를 레야 모를 수가 없다. '생사판괴(生死判怪)?' 아니, 보자니 생사판괴만이 아니다. 그녀와 다투던 거한은 오신사왕 중 하나인 불사패신일 것이고, 이 붉은 복면의 청년은 생사판괴의 두 제자 중 한 명일 것이다. 괜한 일에 끼었다는 후회도 잠시, 그녀는 붉은 복면인을 마주보며 검을 집어넣는 대신 누런 부적을 꺼내들고 예를 차렸다. 상대가 오신사왕이 아니라 삼황오제나 절대쌍존이라도 과한 처사는 과한 처사였고, 그것을 이제 와서 부정한다는 것은 협의지로를 꺾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결판을 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금호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만큼, 비도 대신 하나의 방울을 손에 쥐었다.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면서도 은은하게 핏빛을 번뜩이는 방울을 본 창주향의 두 눈이 크게 뜨여졌다. "초혼령(招魂鈴)?" "그렇습니다." 초혼령은 혈문의 신물이자 천하삼대기보 중 하나로 정신과 영혼을 제압하고 귀신을 부리며 주술의 위력을 더해주는 힘이 있으니, 그녀는 비무를 시작하기도 전에 한 수 불리함을 안게 된 셈이다. 그러나 불리함과 유리함을 따져 협의를 펼쳐서는 그것을 어찌 협의라 할 수 있을까? 마음을 가라앉힌 창주향은 빠르게 주문을 외우며 부적을 던졌다. "백조초래(百鳥招來)!" 퍼엉! 파드드드득! 부적이 터져 나간 허공에서 날개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갑자기 수많은 새가 나타났다. 그 크기는 하나같이 주먹만한 것이 그리 크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제법 날카로운 부리와 수십도 더 되는 숫자가 더해지니 결코 얕볼 수 없었다. 그러한 백조(百鳥)가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들자, 금호 역시 방울을 흔들며 미리 준비해둔 주술을 펼쳤다. 딸랑딸랑! 파바바바밧! 방울소리와 함께 초혼령으로부터 쏟아져 나온 수많은 뼛조각과 백조가 부딪치며 허공에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뼛조각에 갈가리 찢겨진 백조의 몸은 연기처럼 사라질 때, 백조의 부리는 뼛조각을 깨부숴 먼지로 흩어지게 만들었다. 결과를 봤을 때는 동수였지만, 어차피 서로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한 가벼운 주술이었던 만큼 그들은 결과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다음 수를 준비했다. '저것이 도술(道術)인가.' 창주향을 살피는데 감각을 집중하고 있던 그의 뇌리에 무심한 한줄기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사사혈괴(死邪血怪)의 강시술이 사이하고 무영투괴(無影偸怪)의 환술이 기기묘묘하다면 도술은 정선한 느낌을 주고있다. 감각에 따르면 창주향과 금호의 역량은 대동소이한 정도. 동의 도술과 서의 사령술을 비교해보기에 좋은 기회다. "뇌신강림(雷神降臨)!" 콰르릉!! 창주향의 손에서 던져진 부적이 빙그르르 돌다가 은은한 백광을 모아 험상궂은 거한의 얼굴을 만들어냈다 싶은 순간, 거한의 입이 쩌억 벌어지며 폭포수와 같은 뇌전을 줄기차게 뿜어냈다. "끄아아아악!" 뇌전에 맞은 이가 비명을 내지르다가 쓰러지자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급히 주술을 해제했다. 그녀의 뇌전이 허무하게 금호의 환영을 꿰뚫고 구경꾼을 맞췄기 때문이다. 제압을 위해 그 위력을 줄였기에 눈을 까뒤집고 나자빠진 것으로 끝나 다행이지, 자칫 잘못했으면 그 구경꾼은 진정 재수 없게도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아 죽었을 것이다. '제법이군.' 주술을 사용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는 절묘한 순간을 노려 대환귀(大幻鬼)를 은밀하게 사용해 실체를 빼돌린 한 수나, 아무리 위력을 줄일 것을 예상했다지만 주변의 무고한 이가 자신 대신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지극히 높음에도 거침없이 술수를 펼친 독심은 그로서도 약간은 인정할만했다. 종합적인 경험은 부족할지 몰라도, 나이에 비해 과도할 정도의 실전경험만큼은 살각에 의해 충분히 단련된 덕분일 터. 어찌 보면 전화위복이라고 할만하다. 딸랑딸랑! 뚜둑! 뚜두둑! 옆쪽으로 충분히 비켜선 곳에서 열심히 주문을 외우고 있던 금호가 초혼령을 울리며 사이한 기운을 풍기는 두 개의 뼛조각을 땅에 내던지자, 초혼령으로부터 흘러나온 귀기를 흡수한 뼛조각은 급속히 불어나 다섯 구의 불그스름한 해골로 화했다. 공허한 눈구멍을 창주향에게 향하고 있는 해골들의 손에는 붉은 뼈로 만들어진 길이 3미터 정도의 창이 들려져 있었는데, 해골과 창으로부터는 마치 불타오르고 있는 듯한 후끈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흐익!!" "요...요괴다!" 금호가 한달 동안 틈틈이 만들어둔, 열골창(熱骨槍)을 손에 쥔 두 구의 열골병사(熱骨兵士) 히트 스켈레톤 솔저(heat skeleton soldier)의 모습에 구경꾼들은 기겁하며 사방으로 물러섰다. 망자가 지닌 특유의 공포감은 범인이 쉽사리 견뎌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낭랑초래(狼狼招來)!" 퍼엉! 급히 열 장의 부적을 앞으로 내뻗은 창주향의 앞에 송아지 만한 열 마리의 늑대가 나타나 이를 드러내며 열골병사에게 으르렁거렸다. 수적으로는 늑대가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장창을 앞으로 내뻗고 있는 열골병사에게 먼저 달려들지는 못하고 서로 대치를 이루었다. 딸랑딸랑! 초혼령의 소리와 함께 대환귀의 환각능력이 발휘되자, 단 둘에 불과하던 열골병사들의 숫자가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스무 구까지 불어난 열골병사가 늑대들을 향해 일제히 내던진 열골창은 허공을 빽빽하게 채우며 날아들었다. 그 모두가 실체였다면 늑대들은 거의 전멸 가까운 피해를 입었겠지만, 그 중 대다수의 열골창은 명중하고도 허무하게 흩어졌기에 실제로는 단 두 개의 창만이 늑대의 몸에 틀어박혔다. [캬아앙!] 퍼엉! 목을 꿰뚫은 열골창에 의해 바닥에 몸이 박혀버린 늑대와 허리에 열골창이 틀어박힌 채 뒤로 주르륵 밀려나던 늑대가 창으로부터 퍼져 나온 화염에 뒤덮여 몸부림치다가 연기로 화해 허무하게 사라질 때, 투창이 끝남과 동시에 땅을 박차며 달려든 여덟 마리의 늑대에 의해 일곱 개의 환영이 사라지며 하나의 해골이 박살났다. 후두둑! 사나운 발톱에 대가리가 박살난 열골병사는 그대로 균형을 잃고 땅으로 무너져 내렸다. 이제 열골병사는 실체 하나에 환영 열 둘만 남은 반면, 늑대들은 아직 여덟이 그 전력을 유지하고 있으니 이것은 누가 봐도 창주향의 우세가 확실했다. 그러나 금호는 무너져 내리는 열골병사를 보면서도 조금의 동요도 없이 준비해주었던 주술을 시전하며 열골병사를 향해 초혼령을 흔들었다. 딸랑딸랑! 초혼령의 사이한 울림과 함께 몇 줄기 귀기가 열골병사의 뼛속에 파고들었다. 이미 농도짙은 귀기에 의해 가득 차있던 뼈는 과포화상태가 되어 추가로 주입된 귀기를 흡수하기 위해 부르르 진동했지만, 그 귀기는 열골병사로 하여금 그러한 틈을 주지 않고 그대로 뼛속을 휘저어갔다. 그리고 그 귀기의 흐름이 기존의 귀기을 역행하며 충돌을 일으킨 순간, 열골병사의 뼈 곳곳이 쩌저적 갈라지며 그 틈으로부터 강대한 귀기의 폭발이 일어났다. 쿠과과과과광!! 멀쩡히 서있던 열골병사뿐만 아니라 박살난 열골병사의 잔해까지 일제히 폭발하며 뿜어져 나온 화염은 늑대들의 몸을 통째로 집어삼켰고, 그 화염에 뒤섞여 사방으로 쏟아져 나온 뼛조각은 남은 늑대들의 몸통마저 벌집으로 만들어버렸다. ========================================= 열독자님의 감상으로 한 편 올립니다. 오전중에 한 편 더 올릴 예정입니다. ----------------------------------------- 일명 가미가제. 아주 잘도 작살나는구나. 예고: 사령술과 도술. 그 승부의 결과는? 그리고 그 끝에 일어나는 비극!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13 11:45:09 고친날 2005-08-13 11:45:09 읽은수 8019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8.생사판괴(生死判怪).(5)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뭐, 뭐 이런 술수가...!' 화탄도 아닌 강시를 폭발시키는 술수에 도봉 창주향이 경악을 금치 못할 때, 그는 금호를 다시 한번 인정하고 있었다. 대환귀의 환각으로 눈을 가려 상대를 끌어들이고 해골폭발(骸骨爆發) 본 익스플로션(bone explosion)으로 단번에 끝장낸다. 사령술사에게는 흔한 전법인데다가 창주향이 실력에 비해 경험이 부족한 후기지수였기에 제대로 먹혀든 술수이기는 하지만, 해골폭발은 뛰어난 효율성에도 그 난해함 때문에 사령술사에 기재하지 못하고 약 한 달쯤 전에야 전수한 주술이다. 그럼에도 그 폭발의 피해가 구경꾼들에게는 크게 미치지 않도록 정확히 조절됐다는 점을 생각할 때, 해골폭발의 주술을 단 한 달만에 거의 완벽히 습득한 재능과 응용력은 분명 그의 예상 이상이다. 어째든 그 폭발로 인해 열골병사와 늑대가 싹 쓸려버린 금호와 창주향은 잠시 대치를 이루며 서로의 목숨을 위협하지 않는 비무의 범위 내에서 어떻게 상대의 주술을 상대해야할지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그때, 한줄기 온유한 음성이 그들의 고심을 덜어주었다. "가장 자신 있는 한 수로 결정을 내도록 하지요." 상황을 적확히 짚어낸 천무의 의견에 잠시 서로를 마주보던 둘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고 주문의 영창에 들어갔다. 딸랑딸랑! 딸랑딸랑! 사이하고 요사스러운 주문의 영창이 음산한 귀기를 일으키면 그와 함께 흘러나온 초혼령의 방울소리가 귀기를 증폭시켰다. 한번의 흔들림마다 물통에 물을 쏟아내듯 차근차근 손가락의 오혈환(五血環)에 쌓여가던 귀기가 결국에는 물통을 가득 채우고도 부족해 철철 넘쳐흐르게 됐을 때, 오혈환(五血環)으로부터 흐릿한 무언가가 튀어나와 서서히 하나의 형체를 이뤘다. 촤르르르륵! 눈을 내려 감고 수인을 맺은 채 청명한 주문을 외워 가는 창주향의 품에서 빠져 나온 부적이 그녀의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다가 하나둘씩 몸에 달라붙었다. 영기에서 파생된 선기를 주축으로 삼고 대자연의 기운을 보조로 삼아 이루어진 도력(道力)이 촉매인 부적에 스며들어 자신의 불꽃을 더더욱 크게 불태웠다. 딸랑! 방울소리와 함께 망령이 마침내 형태를 완성하자, 허공에 붕 떠있는 희뿌연 옷자락이 바람에 흔들리듯 하늘거리며 그 안에 들어있는 반투명한 해골의 텅 빈 동공에서 푸르스름한 귀화가 불타올랐다. "봉황둔갑(鳳凰遁甲)!" 창주향의 몸에 붙어있던 부적이 일제히 불타오르며 그녀가 붉은 불꽃에 휩싸인다 싶은 순간, 그녀의 몸이 연기처럼 사라지며 대신 한 마리의 커다란 봉황(鳳凰)이 불꽃을 뚫고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딸랑! 파밧! 봉황을 따라 위로 하늘 높이 떠오른 사혼귀(死魂鬼) 레이스(wraith)의 반투명한 손뼈가 까딱거리며 뼈로 이루어진 화살, 골시(骨矢) 본 애로우(bone arrow)가 차례대로 쏘아졌다. 인간의 둔갑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쾌속하고 기기묘묘한 비행(飛行)으로 뼈화살을 피해낸 봉황이 형형색색(形形色色)한 날개를 힘차게 휘두르자, 두 날개로부터 뽑혀 나온 수십 개의 깃털이 마치 폭우와 같이 사혼귀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딸랑딸랑! 콰드득! 순간적으로 만들어진 골순(骨盾) 본 실드(bone shield)에 깃털이 박혀들 때, 사혼귀의 옷자락에서 나온 저주를 품은 원령과 봉황의 입으로부터 나온 한줄기 화염이 서로를 향해 날아들었다. 도력이 섞인 봉황의 화염에 사혼귀의 희뿌연 옷자락이 불타오르고 귀기가 담긴 원령의 저주에 봉황의 몸이 점차 마비될 때, 사혼귀의 귀화와 봉황의 눈이 마주쳤다. 딸랑딸랑딸랑! 사혼귀의 두 팔이 좌우로 크게 펼쳐지며 뼈만 남은 반투명한 두 손에 희뿌연 기운이 뭉쳐들어 뼈의 창을 이룰 때, 봉황의 깃털 사이사이에서 치솟은 불꽃은 전신으로 퍼져나가 봉황을 화염으로 뒤덮었다. 파아아-! 하나의 골창이 사혼귀의 손에서 떠남과 동시에 날개를 크게 펼친 봉황이 허공을 칼날과 같이 가르며 날아들었다. 날카로운 창날은 정확히 봉황의 날개를 꿰뚫었지만, 봉황의 전신을 둘러싼 화염은 그 즉히 창을 이루는 뼈와 귀기를 불태웠다. 날개의 부상에 허공에서 잠시 비틀거리던 봉황의 몸이 튕겨지듯 다시 사혼귀를 향해 쏘아진 순간, 또 하나의 골창을 든 사혼귀의 손이 앞으로 내뻗어졌다. 콰과광! 구경꾼들은 봉황의 화염이 먼저 사혼귀를 덮쳤는지, 아니면 골창이 먼저 봉황에게 박혀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단지 불에 타 산산이 흩어지는 사혼귀의 옷자락과 힘없이 떨어져 내리는 피투성이의 봉황뿐이었다. 퍼엉! "쿨럭!" 땅으로 떨어짐과 함께 둔갑이 풀려 다시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온 창주향은 한쪽 무릎을 꿇고 피를 왈칵 토해냈다. 가장 자신 있는 주술을 사용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 만큼, 그 주술이 실패한 반작용 또한 컸다. 금호 또한 심령으로 강하게 연결돼있던 사혼귀가 막대한 타격을 입은 덕분에 내상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마지막 순간 옷자락 안에 두른 골갑(骨甲) 덕분에 완전히 파괴되는 것만은 가까스로 피했기에 안색이 창백해지는 정도에서 버텨낼 수 있었다. 그나마도 붉은 복면에 의해 가려졌으니, 아무 것도 모르는 구경꾼들로서는 승패가 명확해 보였다. "도봉(道鳳)이 패했다!" "상대가 대체 누구야?" "굉장한 주술사 같은데..." 구경꾼들의 쑥덕거림을 들으며 창주향은 내려감은 눈꺼풀을 바르르 떨었다. 비록 한 수의 손해를 보기는 했지만, 실제적인 결과는 무승부에 가깝다. '술사를 직접 노려야 했는데...' 그것이 분명 정석이지만, 자칫 생사판괴의 제자에게 큰 해를 가할까 염려돼 주술 자체를 노린 것이 실수였다. 그러나 후회란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구경꾼들에 의해 이미 암암리에 결정이 난 이상 무승부라 주장하기도 힘들다. 결국 한숨을 내쉰 창주향은 패배를 인정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무승부로군요." 구경꾼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을 향해 몰렸다. 그러한 시선의 홍수 속에서도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은 천무는 온유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혈문의 문주인 사사혈괴(死邪血怪) 노선배를 쓰러트림으로서 무영투괴(無影偸怪)께서도 인정한 주술사인 생사판괴(生死判怪) 대협의 제자분과 무승부를 이루다니, 과연 천안도괴(天眼道怪) 어르신과 도봉(道鳳) 여협을 배출해낸 모산파(茅山派)의 위명에 감탄했습니다." 경악으로 물든 중인들의 시선이 주변을 훑다가 그에게 집중됐다. 삶과 죽음을 한 번의 손짓으로 결정짓는다는 생사판괴! 설마 흑의사내가 그 생사판괴이고, 붉은 복면인이 그의 제자일 거라는 사실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던 만큼 그 여파는 무척이나 컸다. "그, 그럼 저 거한은 설마..." "불사패신(不死覇神)!" 삼괴오신사왕 중 둘을 보게 된 중인들에 의해 사방이 요란해지기 시작하는 가운데, 창주향은 당혹함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왜?' 자신이 무승부를 주장했다면 몰라도, 상대측에서 무승부를 주장한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설마, 저 사람도 사내에 대한 처벌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거, 이게 왜 무승부인 거요? 그런 의문을 가지고 있던 것은 창주향만이 아니었다. 구경꾼들의 반응은 제쳐놓고라도, 야수적인 감각으로 금호가 한 수나마 이득을 봤다는 것을 확인한 철방은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은공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는 유연하면서도 확실한 대처를 펼치는 천무를 향해 고개를 고정시켰다. 흐릿하던 천무의 의도가 어렴풋하게 느껴진다. 금호와 창주향을 비교하며 굳이 사사혈괴, 무영투괴, 천안도괴, 그리고 모산파와 혈문까지 언급했다. 판정은 무승부로 내렸다지만, 생사판괴와 불사패신의 위명에 호들갑을 떨고 있는 구경꾼들은 단지 눈에 보이는 결과만을 기억할 것이다. 그가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기자, 철방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사내를 창주향에게 던져줬다. 금호가 구경꾼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암암리에 남국의 부축을 받아 그와 철방의 뒤를 따르자, 천무는 수고했다는 듯 가볍게 금호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조금 부족한 감이 있기는 하지만, 어째든 수고하셨습니다." "하하...네에, 수고요..." 자기가 등 떠밀어 피 튀기게 싸우도록 만들고는 조금 부족함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천무의 말에 금호는 힘없이 답했다. 별로 내키지 않는데다가 내상까지 입은 비무이기는 했지만, 색다른 도술을 겪어봤으니 그리 큰 손해는 아니다. 무엇보다 천무의 후환을 무사히 넘긴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다. '응?'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금호는 문뜩 안면이 한결 시원해짐을 느끼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구경꾼들이 어째 하나같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따악 벌린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반응은...설마? 설마?' "아, 이런." 금호는 떨리는 심정으로 천무를 돌아보았다. 그의 손에 들려져 있는 것은, 마치 피와도 같이 새빨간 복면. "실수로 벗겨버리고 말았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사과는 분명 사과인데, 부드럽게 웃는 얼굴에 온유한 음성으로 하니 어째 놀리는 것처럼 들렸다. 게다가, 어깨를 토닥였는데 대체 왜 복면이 실수로 벗어진단 말인가? 고의다. 명백한 고의다. '이...악마.' 천무를 향해 치를 떨던 금호가 이 일로 인해 화룡(花龍)이라는 별호가 붙게 된 것을 알고 처참하게 절망한 나머지 탁자 하나와 의자 두 개, 침상 하나를 박살내고만 것은 그로부터 얼마 뒤였다. ========================================= lee님의 감상으로 한 편 올립니다. *감명깊게 본 소설을 하나 추천하자면 아티팩트 마스터. 조금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기는 하지만 힘에 대한 대가를 참으로 계산적이고도 확실명백한 방법으로 치른다는 점이 감명깊다. 가장 큰 압권은 '성의가 부족한 우민'에 대한 질책일 듯. ----------------------------------------- 그렇다. 이 소설에서 가장 사악한 놈은 바로 천무였던 것이다! ...라고 해도 역시 가장 막강한 것은 오만무심한 사신. 예고: 무심치수 200% 악당치수 300% .......치수 400%-15금인 관계로 심의삭제를 고려중- 소환치수 500%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13 23:54:24 고친날 2005-08-13 23:54:24 읽은수 7361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9.악마소환(惡魔召喚).(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사신, 악마를 부르니 천하 혼란의 바람이 불어온다.- 그는 정의성(正義城)에서 내준 거처에서 두 개의 비급을 정리했다. 사사혈독공(死邪血毒功)과 사사혈시공(死邪血尸功). 혈문의 시작이자 끝이며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두 개의 비급이다. 사사혈독공의 핵심은 수십 개의 극독을 체내에서 진원진기로 녹여 사사혈독(死邪血毒)을 만들어내는 비결이었다. '어리석은 짓.' 진원지기는 생기를 이루고 만들어내는 근원. 그것을 깎는다는 것은 스스로의 명을 깎아먹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다른 편법은 소용없다. 자기 자신의 기운으로 만들어내야만 사사혈독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여 자유롭게 부릴 수 있다. 독에 대한 절대적인 내성을 지닌 그나 혈맥에 생혈(生血) 대신 귀기(鬼氣)가 흐르는 철방의 경우는 상당한 예외에 속한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진원을 깎아낸 만큼 다른 곳에서 생기를 보충해야한다. 다른 곳. 당연히 다른 생물의 생기다. 낮은 성취일 때는 동물의 생혈을 흡혈해 생기를 채운다. 그러나 경지가 높아지면 동물이 아닌 인간의 생혈을 흡혈해야한다. 체외로 나온 생혈은 생기가 떨어지기에 제대로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직접 흡혈해야하는데, 흡혈과 동시에 독이 역으로 흘러 들어가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사사혈독이 오직 생혈에서만 보존되는 이유는 피의 생기를 갉아먹음으로서 독성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혈맥을 녹여 생혈에서 생기가 배출될 경우, 그 생기를 한꺼번에 모두 흡수하고는 스스로를 지탱하지 못해 중화돼버린다. 사사혈독공에 5성 이상의 성취를 이루면 독살(毒殺)한 사체에서 독기를 흡수해 진원을 깎아내지 않아도 독공을 수련할 수 있지만, 10성 이상의 성취를 이루어 독기의 보조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독인(毒人)이 되기 전까지는 주기적인 살생으로 생기를 보충해야 한다. '흡혈귀와 유사하다.' 여러 가지 차이가 있겠지만, 피를 먹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그 수련과정은 확실히 망자의 귀족이라는 흡혈귀(吸血鬼) 뱀파이어(vampire)의 삶과 유사하다.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사사혈독공에서 사사혈시공(死邪血尸功)이 파생되어 나온 것은. 사사혈독공을 기반으로 하는 사사혈시공은 진원진기를 깎아 독 대신 귀기를 녹여 혈도에 잠재시킨다. 귀기는 원래 생기를 쇠하게 하지만, 진원을 녹여 만들어진 사사혈독이 혈맥을 녹이지 않듯 귀기 또한 생기를 쇠하지 않는 성질을 가진다. 이 귀기를 전신의 혈도에 잠재시켜두면, 평상시에는 혈도에 스며들어 있다가 한 번 격발 되면 부상부위에 스며들어 강철처럼 단단하게 보호함으로써 생기의 유출을 막은 뒤 다시 혈도에 잠재되는 것이 사사혈시공의 주된 원리다. '귀기 자체를 이용하는가.' 생기를 쇠하게 하지 않게 한다는 점에서는 뛰어나지만, 진원을 깎아서 귀기를 녹여내야만 하고 귀기에 보호된 부분은 점차 강시화 된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후유증이 크다. 사사혈시공에서 말하는 10성의 경지란 심장과 두뇌를 제외한 전신이 강시화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체가 목각인형과 같은 장난감이 아닌 이상 생사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는 없으니, 정도 이상의 성취를 이루면 심장과 두뇌까지 귀기가 침투해 생기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강시로 화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사혈시공은 스스로를 망자로 바꾸는 실패작인 것이다. 불사의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는 것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겠지만, 살아서 불사신체를 이룬다는 본 목적에서는 실패를 이루었기에 그 누구도 이것을 제대로 익혔다고 말하지 못했을 터. '이것이 활강시의 비밀' 천하에 이름 높은 활강시(活 屍)의 강시술은 바로 이 사사혈시공에서 파생됐을 것이다. 그 중에는 혈문의 역대 문도들 또한 포함돼있을 가능성도 높다. 12성으로 이룰 수 있다는 불사지체(不死之體)는 아마 불사마법사(不死魔法師) 리치(lich)와 유사한 망자를 뜻하는 것일 테지만, 그것은 아직 미완의 부분인데다가 설사 완성을 이루더라도 사사혈시공의 특성상 망자로 화하고도 끊임없이 진원을 깎아내다가 결국 스스로 자멸하게 된다. '예상이하. 그러나 소득은 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성과가 적지만, 그렇다고 아주 없는 것만도 아니다. 불사의 비술이 지닌 핵심은 귀기로 생기를 자극하는 것이니, 귀기가 생기를 상하게 하지 않는다는 사사혈시공의 가장 큰 장점이 무용지물이다. 소득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귀기의 조절. 혈도에 잠재되어 있던 귀기가 정확한 양만큼 소모되고 다시 혈도로 돌아오게 하는 비결을 사용한다면 귀기의 부족이나 과잉으로 불사의 비술이 실패해 죽거나 망자가 돼버리는 부작용을 피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부상의 정도에 따라 귀기의 양을 적절히 조절함으로서 생기가 쇠약해지는 부작용을 극소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영문이 아닌 혈도에서 바로 격발 시킬 수 있으므로 지금까지 비술을 펼치기 위해 필요했던 준비시간을 단축할 수도 있다. '아직은 연구가 더 필요하군' 사사혈독공과 사사혈시공의 진정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진원진기를 깎아 다른 기운을 녹여내는 것과 그 기운이 신체에 해를 주지 않는 점은 상당히 뛰어나다. 진원진기를 깎아내면 만물의 사대구성요소인 정(精), 기(氣), 신(身), 영(靈)의 균형이 깨져나가 막대한 부작용을 초래하게 되는 만큼, 이미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고 있는 귀기의 조절법에 비하면 아직 특별히 성과가 없다. 그러나 혈문이 사사혈독공을 연구해 사사혈독강시를 만들어냈듯, 조금만 더 연구한다면 여러모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비급을 덮고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문뜩 문을 향해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용건은?" 문을 열고 방안에 들어오자마자 물음을 받게 됐으니 웬만한 사람이라면 조금 당황할 만했지만, 천무는 여전히 구름이나 바람과 같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우지 않고 정중하게 답했다. "초청입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지간한 초청이라면 천무가 알아서 거절하거나 미뤘을 터. 설명이 필요하다면 가면서 들으면 된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철방이 당연스럽게 뒤를 따르는 가운데, 천무는 앞장서 안내를 하며 입을 열었다. "웬만한 배분으로는 상당히 만나기 힘든 분입니다. 그분께서 먼저 초청을 하신 것은 참으로 드문 경우지요." "그런가." 삼괴의 한 자리를 차지한 만큼, 정의성의 요직에 있는 이들이라면 이미 충분히 접해봤다. 그럼에도 천무가 이런 말을 할만한 이라면, 그가 아는 바로는 단 한 명뿐이다. '잘됐군.' 조금 위험할 수도 있지만, 그만한 상대라면 적아를 불문하고 미리 봐 둘만한 가치가 있다. 그래야만 적이 될 경우에 따른 대비를 할 수 있을 테니까. 천무가 안내한 곳은 정의성 중에서도 깊은 심처에 위치한 정자였다. 그곳에는 마악 준비된 듯한 술상이 차려져있었는데, 술상에는 이미 누군가 착석해있었다. 가슴 부분까지 길게 나있는 수염에는 근엄한 기색이 가득하고 두 눈빛이 형형 해 정광이 흐르면서도, 그 만면에 떠오른 평안한 표정이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노인은 가벼운 미소와 함께 그들을 반겼다. "어서들 오시구려." 그는 반가운 손님을 맞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노인의 맞은편에 무심히 몸을 앉혔다. 그러나 그의 고개와 감각은 조금의 미동도 없이 똑바로 노인을 향해 고정돼있었다. '강자(强者).' 힘을 반절 이상 회복한 지금의 감각으로도 그 정확한 능력이 측정되지 않는다. 그 강함을 미리 짐작하고 있기는 했지만, 직접 대면해보니 예상을 뛰어넘었다. '무정살왕보다 최소 두 배의 강함.' 같은 화경의 고수라지만 무정살왕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그가 철방과 같이 손을 쓰더라도 이 노인을 상대로도 승패를 장담하기 힘들다. '절대쌍존(絶對雙尊)은 이보다도 강하다는 것인가.' 노인이 이 정도 힘을 지니고 있다면, 동의 최강자라는 절대쌍존의 힘은 섣불리 측정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허허, 이 늙은이가 파대협의 두 제자가 단지 5년의 수학만으로 도봉(道鳳) 그 아이와 동수를 이뤘다는 소리를 듣고 너무 궁금해 대협을 청했소이다." 노인의 말에 그가 묵묵히 침묵을 지키자, 그를 대신해 천무가 온유한 음성으로 답했다. "오선배께서 이리도 칭찬해주신 것을 알면, 금소협과 남소협도 무척이나 기뻐할 겁니다." "허허, 천공자가 이 늙은이의 얼굴에 금칠을 하시는구려." "금칠이라니요, 겸손함이 과하십니다." 노인은 너털웃음을 흘렸으나, 실제로 노인을 아는 이라면 그 누구도 천무가 과언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세수가 백을 넘으며 자리에서 물러나 칩거생활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천하는 아직까지 천하십대고수라 칭해지는 쌍존삼황오제의 일인인 검황(劍皇)을 잊지 않았다. 정의검황(正義劍皇) 오도반(誤導攀)! 정파를 대표하는 정의성(正義城)의 전대성주이자 절대쌍존(絶對雙尊) 중 풍운검존(風雲劍尊)과 함께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을 논할 자격이 있는 화경의 고수가 바로 노인의 신분이었다. ================================================ 어디 다녀오는 바람에 늦어서 죄송합니다. 고무림 선작수 3700대 돌파로 한 편 올립니다. 내일도 아침일찍 연참으로 찾아뵙겠습니다. ------------------------------------------------ 사사혈독공과 사사혈시공은 과연 어떻게 쓰일 것인가? 드디어 동의 쌍존삼황오존의 십대고수 등장. 예고: 검황이 사신에게 원하는 것? 그리고 태동하는 사신의 음모...!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14 01:07:47 고친날 2005-08-14 01:07:47 읽은수 7093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9.악마소환(惡魔召喚).(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그런 뛰어난 제자를 하나도 아닌 둘이나 두다니, 진정으로 부럽구려. 노부에게도 그런 제자가 하나만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협의검(俠義劍) 장선배께서 들으면 섭섭해하시겠습니다." "껄껄, 섭섭해하면 좀 어떻겠소? 정 그렇다면 빨리 화경에 올라 이 늙은이를 면박 주라고 하구려." 아마 당금 천하에서 칠정협칠사마(七正俠七邪魔)의 일인이자 정의성주(正義城主)인 협의검(俠義劍) 장고안(莊高岸)을 이렇게 낮춰 말할 수 있는 것도 검황 오도반뿐일 것이다. 오도반과 천무 사이에서 대화가 오가는 가운데, 철방은 그의 뒤에 버티고 서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오도반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그는 그들의 대화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무심히 술잔을 기울였다. 흐지부지 흘러가는 시간을 뒤늦게 서야 자각한 듯, 오도반은 천무와의 대화를 적당히 끊고 그에게 말을 돌렸다. "파대협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냥 흘려들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이용해 대화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알 바 아니다." 예상치 못한 무심한 대답에 오도반의 눈에 떨떠름한 기색이 스쳤다. 어찌 저런 건방진 대답이 다 있는가? 게다가 반말? 반말이라니? '과연 용봉무서를 차버렸을 정도로 오만한 기인이로고.' 수양이 깊은 만큼 특별히 기분이 상하는 대신 그저 내심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것으로 끝낸 오도반은 대체 어떻게 해야 대화를 이을 수 있을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때, 한 모금의 술로 입술을 적신 그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무심히 열렸다. "금호와 남국이 먼저 왔군." "허어." 순간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흘린 오도반은 난감한 기색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초청을 하기에는 너무 치졸해 보여 상만 다시 차렸는데, 생사판괴는 이미 이 자리에 그의 두 제자가 찾아왔었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챈 것이다. 역시 일을 함에 있어서는 명명백백히 했어야 하는데, 순간의 욕심을 자제하지 못한 것이 큰 실수였다. '아직 수양이 부족하군.' 씁쓸한 심정을 한 잔의 술로 삼킨 오도반은 허심탄회하게 속을 풀어놓았다. "우선 파대협의 두 제자분을 따로 먼저 청한 것을 사과드리오." "용건은?"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여 사과를 받아들인 그가 칼로 무 자르듯 단번에 거두절미하고 용건을 묻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오도반은 다시 한 차례 수염을 쓰다듬고는 진중한 음성으로 그에 답했다.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본성에는 마땅한 후계로 삼을만한 기재가 없소. 이 늙은이가 사손들에게 직접 몇 수의 제간을 가르쳐보기도 했으나, 모두 몇 년이 지나도록 그 제간을 반도 이해하지 못했소." 정의성의 비사 아닌 비사를 밝히는 오도반의 심정은 여러모로 찹찹했다. 장고안의 직계제자만 하더라도 아홉이다. 그러나 그 아홉은 나름대로 상당한 재능을 지니고 있기는 해도, 무림에서 크게 이름 날릴 수 있는 후기지수는 단 한 명도 없다. 구룡팔봉이 대거 줄어든 지금에 와서도 그 누구하나 후보로 거론되지 못하고 있으니, 정의성과 협의지로를 지키는데 평생을 다 바쳤던 오도반으로서는 속이 타 들어가는 듯한 심정이었다. 그러던 중 소식을 들었다. 구룡팔봉의 후보로 거론되고있는 생사판괴의 두 제자 중 한 명이 도봉(道鳳) 창주향과 동수를 이루었다는 소식을. "도봉 그 아이는 청룡문주(靑龍門主) 청룡검객(靑龍劍客)의 무남독녀로, 칠정협칠사마의 일인인 철룡검객의 모든 진신절학을 물려받았소. 그러나 한 모산파의 도사에 의해 무술(武術)에 대한 재능보다 주술(呪術)에 대한 재능이 더욱 뛰어남이 확인되자, 청룡검객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모산파에 여식을 보냈소." 검에 관해서는 능히 천하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초고수인 청룡검객.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그가 자신의 여식을 다른 문파에 보내는 것을 내켜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여식의 미래를 위해 청룡검객은 과감하게 그녀를 모산파에 속가제자로 들여보냈고, 모산파 역시 그러한 청룡검객에 대한 감탄과 존중의 뜻으로 속가제자인 도봉에게 모든 가르침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내 비록 제자복이 없다고는 하나...보는 눈까지 늙은 것은 아니라오. 그런 이 늙은이가 볼 때, 금소협과 남소협은 주술뿐만 아니라 무술에 있어서도 가히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난 듯 싶소이다." 5년 전 자객들에게 입은 부상이 비술로 치유됐을 때부터 마력의 영향을 받게된 금호와 남국은 5년간 세월을 거치며 개정대법을 받아 환골탈태를 한 것 이상으로 근골이 뒤바뀌었다. 가히 천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싶은 근골을 하나도 아니라 둘이나 보게된 오도반에게 욕심이 생기지 않았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거짓말이리라. "내 자세히 살펴봤지만...그 두 소협이 익히고 있는 무공은 특별한 가르침 없이도 일류의 경지까지는 쉽게 익힐 수는 있으나, 심오한 무리는 담겨있지 않아 극성으로 익히거나 대성을 이루기는 힘들어지는 류에 속하더구려." 삼류무공인 칠성도(七星刀), 육합권(六合拳), 무영각(無影脚)을 기반으로 하는 칠뢰도(七雷刀), 육천권(六天拳), 귀영각(鬼影脚)이나 비도술인 비류구도(飛流九刀)는 낭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무공인 만큼 초식이 정밀하고 내기의 조절이 안정적인 대신 기의 운용이 단조롭다. 기를 운용하는 법을 새로 만드는 데에는 크나큰 위협이 따르는 만큼, 거대문파가 오랜 세월을 거쳐 조금씩이나마 정교하게 가다듬어온 무공과는 자연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두 소협은 보기 드물 정도로 기초에 충실한 수련해왔으니, 만약 노부가 말년에 창안한 경천십팔검(驚天十八劍)이 더해진다면 빠른 시일 내에 큰 성취를 이룰 수 있을 듯 싶구려." 검황이 말년에 창안한 무공. 그렇다면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만약 비급으로 만든다면 용봉무서나 풍운검록과도 비교하더라도 큰 손색은 없으리라. 그러나 아무리 기인이사라 하더라도 그러한 무공을 아무 상관없는 타인에게 그냥 전수해줄 리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두 소협을 노부와 공동전인으로 삼으심이 어떻소?" 철방의 왕방울만한 두 눈이 마치 튀어나오기라도 할 듯이 부릅떠졌다. 천하십대고수 중 일인인 검황, 만약 제자를 구한다고 하면 천하의 온갖 무림인들이 몰려들 거인인 그가 공동전인을 제시하다니, 참으로 경악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파대협께서 대한 무례라는 것은 알고 있소. 그러나 파대협께서는 서로 특별히 우위를 비교할 필요 없는 주술사이시니, 파대협의 주술과 이 늙은이의 무술을 같이 전수하기에 큰 문제가 없다고 보오." 오도반의 언사는 그의 명성을 생각할 때 조금 지나친 감이 있을 정도로 정중했다. 원래 성품이 온화한 것도 한 몫을 했지만, 그만큼 금호와 남국의 재능이 뛰어나고 뒤를 이을 기재에 대한 갈망이 큰 탓이리라. '그런 이유였는가.' 초청의 이유를 듣게 된 그가 무심히 술잔을 들어올리자, 그것을 고심의 의미로 파악한 검황은 설득을 계속 이어갔다. "노부의 과욕을 질책하셔도 좋으나, 이것은 두 소협의 장래를 위한 일이자 나아가서는 무림 전체를 위한 일이오. 두 소협을 진심으로 아끼신다면, 부디 노부의 청을 받아주시구려." 술을 입 안에 한 모금 머금는다. 정의성에서 차린 자린인 만큼, 은은한 향에 부드러운 맛을 가진 명주가 목 안으로 넘어가며 차가운 피를 후끈 달아오르게 한다. 탁. 텅 빈 술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오도반을 향한 그는, 침을 꿀꺽 삼키는 검황에게 무심한 한 마디의 말을 흘렸다. "거절한다." 예상치 못한 거절에 검황이 멍하니 넋을 잃을 때, 그는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철방은 속이 다 시원하다는 듯 큼지막한 미소를 머금었고 천무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평온한 태도로 그를 따랐다. 그가 마악 몸을 돌릴 쯤에야 정신을 차린 검황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를 제지했다. "파, 파대협! 다시 한번 재고해줄 수 없으시오? 무언가 내키지 않는 게 있으면 내 무엇이든 고려해보겠소." "필요 없다." 천하의 검황이 이처럼 급히 사정하는 것도, 그러한 사정을 이처럼 당당하게 뿌리치는 것도 진정 전례 없는 일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검황이 아니라 검존이 오더라도 급할 때는 빌어야하는 법이다. 협의지로를 걷는 정파의 이름 높은 고인이 사파의 마두처럼 협박을 해댈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망연자실하게 서있는 정의검황 오도반을 뒤로하고 정자를 벗어났다. '시간낭비.' 두 마리의 토끼를 쫓다가는 한 마리의 토끼도 잡지 못하는 법. 그가 둘에게 무공을 준 것은 주술을 보조하는데 사용하라는 의미였을 뿐, 그 무공을 대성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마력(魔力)의 힘을 빌어 무(武)와 술(術)에 있어 모두 빠른 성장을 보였지만, 그 성장도 이제는 한계에 도달했기에 주술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검황의 검술이라면 분명 뛰어난 무공이기는 하지만, 그에게 필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을 보조할 수 있는 사령술사(死靈術師)지 뛰어난 무공을 지닌 무사(武士)가 아니다. 이미 용봉무서조차 던져버린 전적이 있는 그가 겨우 검황의 무공 때문에 자신의 도구를 망칠 이유 따위는 전무했다. "하핫. 편히 쉬십시오, 대형." "내일 뵙도록 하겠습니다." 철방과 천무를 뒤로하고 방안으로 들어서 창 밖으로 고개를 향하자, 짙은 밤하늘에 충만하게 흐르고 있는 음기(陰氣)가 전신으로 느껴졌다. '때가 됐군.' 아직 완전한 보름이 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쓸만한 제물을 정해놓은 만큼 이 정도면 충분하다. 스르륵... 방안을 비추던 달빛이 살짝 흔들렸다 싶을 때, 그곳을 지키던 하나의 그림자는 이미 조용히 모습을 감춘 뒤였다. ======================================= 조아라 선작수 3700대 돌파로 한 편 올립니다. 오늘도 아침 일찍 연참으로 찾아뵐 예정입니다. --------------------------------------- 결국 사신에게 대다수의 무공비급은 불쏘시게 수준...기괴한 강시공이나 사악한 마공 정도나 되야 그래도 훑어볼 가치를 느끼는 듯. 예고: 사신의 낫이 어둠을 가른다. 그리고 새롭게 등장하는 사악하고도 강대한 망자들!! 그 망자들의 정체는? *연참내공이 높아질수록 평균 리플 숫자가 줄어드는 주화입마 현상이 생긴다. 결국 금기의 절단마공을 써서 주화입마를 해결해야하는가?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14 06:35:21 고친날 2005-08-14 06:35:21 읽은수 6686 [ 10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9.악마소환(惡魔召喚).(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화룡(花龍)이라..." 정의성에 들렀던 며칠 전, 저잣거리에서 주술을 겨룬 생사판괴의 제자가 어느새 구룡팔봉에 오른 것을 알게 된 도봉 창주향은 옅은 고소를 머금었다. 주술로 동수를 이뤘던 사실보다는, 사내에게 미모로 한 수 밀렸다는 것이 더욱 충격적이었다는 점에서는 그녀 역시 어쩔 수 없는 여인인 듯 싶었다. "그리고, 생사판괴(生死判怪)..." 화룡의 일행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던 흑의장포의 사내. 사사혈괴조차 능가하는 기이한 강시술을 부리는 주술사라는 소문 때문에 모산파의 도사들 사이에서도 이런저런 말이 많았지만, 화룡 금호가 사용한 주술을 생각해볼 때 그 주술의 경지는 상상 이상임이 분명했다. "어쩌면 정말 사백조님 이상 가는 주술사일지도 모르겠구나." 그녀의 사백조인 무림삼괴(武林三怪)의 일인 천안도괴(天眼道怪)는 비록 오래 전에 모산을 떠나기는 했어도 도술(道術)에 있어서는 누구나 인정하는 천하제일의 도술사다. 특히 천하에 내다보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그의 태극천리경(太極千里鏡)은 혈문의 초혼령(招魂鈴), 배교의 흡성환(吸星環)과 함께 천하삼대기보 중 하나로 꼽혔다. "그러고 보니 화룡은 초혼령을 가지고 있었지." 천하삼대기보라고 하면 도술과 사술을 가리지 않고 모든 주술사가 탐낼만한 절세의 보물이다. 그런데 그런 초혼령을 선뜻 제자에게 내주다니, 생사판괴는 상당히 욕심이 없고 마음이 넓은 호인이거나 제자를 극심히 아끼는 사부일 것이다. "상당히 냉정한 느낌이었는데...역시 사람이란 겉보기만으로는 모르는 법일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창주향은 품 안의 부적을 쓰다듬으며 당시 화룡이 사용한 주술을 곰곰이 되짚었다. 뼈를 사용한 주술. 실체나 다름없는 환술. 창을 다루던 고루강시. 갖가지 주술을 사용하던 귀신. 거의가 생소한 것이지만, 같은 강시술이라도 정명하고 현기가 넘치는 모산파의 것에 비하자면 상당히 사이하고 요사스러운 기운이 느껴지는 주술이었다. "마치 혈문의 강시술과 배교의 사술이 뒤섞여있는 듯만 싶은데..." "그런가." 화룡의 주술에 대해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던 창주향은 어디선가 들려온 무심한 음성에 흠칫해 반사적으로 검의 서늘한 손잡이와 몇 장의 부적을 손에 쥐었다. 분명 그녀 자신만 있던 객실에서 갑자기 낯선 음성이 들려왔으니 당연한 경계다. "파대협?" 그림자에 몸이 반쯤 가려져 있기는 했지만, 은은한 달빛에 비춰지고 있는 저 기이한 형태의 흑의장포나 칠흑과 같은 묵봉은 생사판괴의 것이 분명했다. 느닷없는 방문에 그녀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사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림자를 벗어난 그는 창주향에게 감각을 집중했다. 영적인 수련으로 금석과 같이 굳게 단련한 영력을 빼내 사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맑고 정순 하게 갈고 닦아진 영혼과 그것을 담고 있는 육신은, 그릇으로 사용하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다. "너의 몸, 쓰겠다." "무슨...?!" 그의 무심한 음성에서 본능적으로 무언가 위기감을 느낀 그녀는 부적을 허공으로 내던져 검으로 꿰뚫으며 급히 주문을 외웠다. "검령초혼(劍靈招魂)!" 화륵! 우우웅! 한중간이 꿰뚫어진 부적이 불타올랐다 싶은 순간, 검이 스스로 진동하며 그녀의 진기에 스스로의 힘을 더해 아지랑이와 같은 무형의 검기(劍氣)를 피어냈다. 카앙!! 미끄러지듯 그녀에게 다가선 그의 손에서 휘둘러진 대낫은 날카로운 소음을 쏟아내며 검기를 안개처럼 흩어버렸지만, 이미 주술적 처리를 마친 이곳에서는 아무 소리도 빠져나가지 않았다. '살검(殺劍)!' 잡다한 초식이나 쓸데없는 움직임을 철저하게 배제한 채 오직 급소만을 노리고 날카롭게 파고 들어오는 공격과, 그 안에 담겨진 사악하고 강대한 기운에 소름이 오싹 돋는 것을 느낀 창주향은 청룡파미(靑龍擺尾)의 초식으로 검을 뒤흔들어 사신의 낫을 떨치고 그를 향해 부적을 날렸다. "낭랑초래(狼狼招來)!" 퍼엉! 허공에서 갑자기 생겨난 세 마리의 송아지만한 늑대가 달려들자, 그는 사신의 낫을 비스듬히 그어 한 늑대의 목을 뚝 떨어트림과 동시에 두 소매를 떨쳤다. 촤르르르륵! 사이한 혈광을 번뜩이는 두 마리의 혈사괴(血死怪)는 마치 뱀과 같이 늑대의 몸을 칭칭 감아들었다. 사나운 울음소리와 함께 이빨을 드러낸 두 늑대는 혈사괴를 떨쳐내기 위해 거세게 몸부림쳤지만, 다섯 개의 칼날이 각자 미간에 박혀들어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회전하고 복부를 파고들어 등으로 튀어나온 뒤 다시 가슴에 박혀들자 그대로 형태를 잃고 연기로 흩어져버렸다. 그때, 창주향의 손에서 던져진 검이 허공을 가르며 쏘아져와 두 혈주괴의 목을 쩌억 갈라버렸다. 그러고도 기세가 줄지 않은 검이 그대로 벽에 틀어박히기 직전, 검면에 주르륵 붙어있던 몇 장의 부적이 푸르스름한 빛을 발했다. 우우웅-! 부적의 빛을 받아 한차례 검명을 토해낸 검은 허공에서 갑자기 방향을 비틀어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어지간한 노강호라도 소스라치게 놀랄 만한 한 수였지만, 초감각을 통해 이미 부적의 기운을 감지하고 있던 그는 사신의 낫을 휘둘러 검을 튕겨내며 한 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복잡한 수인과 함께 미리 준비해뒀던 주술이 펼쳐지자, 그의 손으로부터 하나의 반투명한 두개골이 불쑥 튀어나와 검을 향해 쏘아졌다. 도술이 걸린 검은 허공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것을 피하려 했지만, 두개골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이빨을 딱딱거리며 뒤를 쫓아오자 결국 급격히 방향을 돌려 두개골의 입 안을 파고들었다. 검에 의해 입에서부터 뒤통수까지가 깨끗하게 관통된 두개골이 위아래의 이빨로 검을 깨문 순간, 텅 비어있던 두 눈구멍에서 푸르스름한 귀화가 번뜩였다. 퍼어엉!! 두골령(頭骨靈) 스컬 스피릿(skull spirit)의 폭발에 부적이 갈가리 찢어지며 검이 뚝 분질러진 순간, 입술을 질끈 깨물어 비릿한 혈향을 도로 삼킨 그녀는 곧바로 창 밖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일단 피해야한다!' 대체 어찌된 영문으로 그가 그녀를 노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화룡과도 동수를 이룬 그녀가 생사판괴의 상대가 될 수 있을 리가 만무한 만큼 피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헌데 마악 창문을 넘어 가려던 순간, 갑자기 오싹한 한기가 그녀의 몸을 침범해왔다. 범상치 않은 그 한기에 반사적으로 부적을 펼쳐들려던 그녀는 한 순간 무언가를 마주하고 몸을 굳혔다. 한밤중에 사이한 빛을 발하는 요성(妖星)처럼, 창 밖에서 짙은 어둠의 한가운데 버티고 있는 그림자의 붉은 안광은 그녀의 정신을 그대로 묶어버렸다. '이건...안...돼...' 사악한 시선에 의해 마비된 정신과 육신을 풀기 위해 그녀는 상단전을 개방해 선기(仙氣)를 풀어냈다. 영기에서 파생된 만큼 맑고 정순하기 그지없는 선기는 그녀를 묶고있던 속박을 떨쳐내기 위해 빠른 순환을 거듭했다. 그러나 그녀를 계속 주시하는 시선으로부터 흘러나온 사악한 기운은 선기의 움직임을 방해하며 끊임없이 침투해왔다. 마치 태풍이나 해일과 같은 대자연의 재해를 겨우 집 한 채에 의지해 막아내려는 듯한 무모한 저항은 결국 그 집마저 뒤흔들게 만들었다. "쿨럭!" 손상된 선기를 본의 아닌 타의에 의해 상단전으로 회수한 그녀는 시커멓게 죽은피를 토해냄과 동시에 행동의 자유를 강탈당했다. 사영시(邪靈視) 이블 게이즈(evil gaze)에 의해 마비된 창주향에게 다가간 그가 무심히 그녀의 머리 위에 한 손을 올려놓고 나지막한 음성으로 주문을 외우자, 이미 심신이 제압되어있던 그녀는 백회혈을 통해 파고 들어온 기운에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서서히 무릎을 잃고 무너져 내리려던 그녀를 어둠 속에서 솟아난 대영귀(大影鬼)가 들쳐업을 때, 창 밖에서 사이하게 번뜩이고 있던 붉은 안광이 모습을 감췄다. [그.하.나.로.만.족.하.시.는.겁.니.까?] 방안으로 스르륵 스며들어온 어둠보다 더욱 짙은 그림자가 정신을 통해 흘려보낸 사악한 의지에 그는 무심히 답했다. "그릇으로 사용한다." [나.머.지.제.물.은?] "이미 조치했다." 그가 지시를 내려둔 망자들은 임무를 확실하게 처리할 것이다. 남은 것은, 이 그릇뿐이다. [가.도.록.하.겠.습.니.다.] 스르륵... 밤의 왕자를 중심으로 둥근 원을 그리며 퍼져나간 그림자는 마치 늪과 같이 대영귀와 창주향을 통째로 빨아들이고 그의 신형마저 집어삼킨 뒤 다시 달빛에 녹아들었다. 얼어붙을 듯한 한기와 사악한 사기를 제외한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는 그림자 안에서 그는 무심히 감각을 확장시켰다. 그늘 사이와 사이의 음차원을 통해 빛살만큼이나 빠르게 이동하고 있는 그림자의 움직임이 흐릿하게 느껴졌다. 잠영술(潛影術) 쉐도우 다이브(shadow dive)를 통한 이동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무시한다. 미리 손을 쓰지 않고 단지 대영귀를 붙여 그녀의 위치만 파악해둔 것은 이 잠영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령마를 타더라도 하루 이상 걸리는 거리에 있는 창주향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해도, 그 시간에 정의성에 있었던 것을 검황(劍皇)이 증명해줄 수 있는 그를 의심하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림자가 그들을 뱉어낸 것은 미리 봐두었던 인적 드문 야산의 넓은 정상. 달빛이 환하게 닿고 음기가 가장 성한 이곳이야말로 일을 치르기에 가장 적당한 장소다. '오고있는가.' 심령을 통해 망자들의 위치를 확인한 그는 흑영귀와 암영귀를 풀어 주변을 정리했다. 망령들은 그의 지시에 따라 정상을 중심으로 땅을 팠다. 반경만 해도 무려 5장에 달하는 거대한 마법진이 정밀한 통제에 의해 빠른 속도로 그려졌다. 암영귀의 손톱은 방해가 되는 수목을 깨끗하게 절단해 제거했고, 대영귀는 큼지막한 바윗덩어리를 통째로 부수고 뽑아냈다. 오랜 풍화에 의해 그렇지 않아도 완만하던 정상은 지치지 않는 체력과 인간을 초월한 힘을 지닌 망자들에 의해 완전 평탄하게 깎여나갔다. 대영귀로 하여금 바위를 실어 날라 마법진의 요소요소에 배치했다. 하나의 커다란 바위를 중심으로 다섯 개의 바위가 마법진의 역오망성에 따라 놓여지고, 그 주변으로 갖가지 바위들이 커다란 원을 이뤘다. 영원(永遠)의 순환을 의미하는 원(圓)은 기운의 순환을 도와 적은 힘으로도 빠르게 주술을 시전할 수 있게 해주며, 역오망성의 다섯 극점은 정신(情神), 육체(肉體), 영혼(靈魂), 기운(氣運)의 네 근원과 파괴(破壞)를 상징하여 사마(死魔)와 강맹하고 파괴적인 힘을 증폭시켜준다. '충분하군.' 쌍두마룡 헬카즈를 소환할 때에는 제물까지 동원하고도 전력을 다해야했기에 여력이 남지 않았지만, 지금은 충분한 여력이 있다. 지옥의 문을 연다면, 그 김에 적당히 악마를 소환해두는 것도 좋다. 대략 반 시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짙은 어둠의 저편에서 일단의 미간에 하나의 보석이 박혀있는 몇 마리의 유령마(幽靈馬) 팬텀 스티드(phantom steed)가 하늘을 가르며 날아와 그의 앞에 주르륵 멈춰 섰다. 유령마는 그 기동성은 뛰어나지만, 귀기와 통제력에 비해 전투력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어 한 번 쓰고 한 번 버리지 않고 계속적으로 유지하려면 그 부담이 크다. 그러나 살각의 추적을 받은 이후, 만약을 대비한 기동력의 필요성을 느낀 그는 유령마를 꾸준히 늘려왔다. 열 마리의 유령마라면 웬만한 고위 사령술사라도 버거울 수준의 통제력이 필요하지만, 여러 가지 주술적 처리를 거친 보석을 촉매로 사용한 덕분에 그가 받는 부담은 그리 크지 않았다. 쿠웅! 선두에 있던 유령마의 등으로부터 육중한 굉음과 함께 내려선 하나의 검은 인형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칠흑의 갑옷으로 전신을 둘러싸 마치 전신이 통째로 쇳덩어리로 돼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형이 투구 속에서 불타오르는 붉은 안광으로 똑바로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움직일 때마다 갑옷의 틈새로 검은 기운이 연기처럼 흘러나오며 주변의 빛을 집어 삼켰다. 철컹. [며어엉으으을 이이이해애앵해애앴습으읍니이이다아아.] 그의 앞까지 걸어온 인형이 한쪽 무릎을 꿇고 투구 속으로부터 뱉어낸 음습한 음성은 진정 이 세계의 것으로는 들리지 않았다. 지옥의 가장 밑바닥이나, 저승의 끝에서 흘러나오는 메아리 소리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인형의 음성일 듯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그것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살짝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대로 고개를 고정시킨 채 침묵을 지키자, 갑옷을 입은 인형 옆의 허공이 일렁이며 하나의 또 다른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명을......이행했습니다......] 그 뒤를 알 수 없는 순백색의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얇은 핏빛의 갑옷 위로 붉은 망토를 덮어 몸을 숨긴 인영이 정신을 통해 흘려보낸 의지는 기이한 울림과 함께 그에게 전해져왔다. ============================================ 流柳님의 추천으로 한 편 올립니다. --------------------------------------------- 네크로맨서의 로망 제 3호와 5호 12호 등장! 가련한 도봉의 운명은? 예고: 밝혀지는 망자들의 정체. 흐르는 피, 터져나오는 혈광.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14 06:35:44 고친날 2005-08-14 06:52:29 읽은수 6705 [ 10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9.악마소환(惡魔召喚).(4)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검은 갑옷의 사령기사(死靈騎士) 데스 나이트(death knight)와 붉은 망토의 환영기사(幻影騎士) 팬텀 나이트(phantom knight)로부터 고개를 돌린 그는 감각으로 유령마의 등을 확인했다. 유령마의 등에는 사방의 마을에서 하나둘씩 납치해둔 인간들이 차곡차곡 업혀져있었는데, 그 구성은 어린 소년이나 순수한 소녀부터 순결한 처녀와 농염한 창기, 건장한 무사와 현명한 서생까지 참으로 다양했다. '잘 처리했군.' 이 정도라면 뒤처리 또한 걱정할 필요 없다. 대체로 연고 없는 인간을 선택해, 갑자기 실종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이유로 도망치거나 여행을 간 것처럼 보이게 했을 것이다. '과연인가.' 고위의 망자가 지닌 가장 큰 힘 중 하나는 돌연변이시귀(突然變異屍鬼)와 같이 대체로 생전의 지식과 능력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 파산도객(破山刀客) 구호방(軀豪放)으로 만들어진 사령기사의 무력이나, 천지쌍살(天地雙殺) 중 지살(地殺)로 만들어진 환영기사의 유용성은 무척이나 크다. 만약 압도적인 통제력을 사용해 강제적으로 심령금제를 걸었다면 지금 능력의 반도 발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막대한 통제력을 소모해야했을 테지만, 그는 대신 계약을 통한 충성을 받아냈다. 비록 그와 그들의 관계가 원수지간이라고는 하지만, 기사도에 충실하던 서(西)의 기사들조차 나락으로 빠트린 충성의 대가는 너무나도 매혹적이다. 이 계약은 그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크면 클수록 마치 밧줄과 같이 더더욱 대상을 조여든다. 그 대가를 치른 순간부터,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족쇄가 되어 상대를 철저한 그의 노예로 만들어버린다. [사.후.에.도.생.전.의.업.보.를.벗.지.못.한.어.리.석.은.놈.들.] 생전에는 무정살왕(無情殺王)이라 불렸으나 영혼과 함께 그 원한마저 봉인 당한 대가로 최고위 망령으로서의 강대한 힘과 광활한 지식을 얻고 새로운 의지체로 다시 태어난 야영귀(夜影鬼) 나이트 쉐이드(night shade)는 두 망자를 비웃었다. 온갖 망자들 중에서도 리치(lich)나 그레이트 구울(great ghoul), 다크 나이트(dark knight), 그레이트 머미(great mummy), 뱀파이어 마스터(vampire master) 등의 가장 강대한 망자들만이 그 힘을 견줄 수 있는 밤의 왕자가 그와 맺은 계약에서 충성의 대가로 받은 것은 자유와 철궁곡에서 목숨을 잃은 수많은 영혼의 영기. 어차피 생전의 업보에 의해 망자들이 떠도는 1옥보다 더욱 깊은 지옥에 떨어졌어야할 야영귀로서는 몇 가지 제약이 붙은 자유만 해도 충분한 대가다. 더구나 그에게는 항상 피와 죽음이 따르니, 산 자의 죽음을 본능적으로 갈구하는 망자에게 있어 최적의 유희다. 사령기사와 환영기사는 어리석은 계약을 맺었다. 사사로운 원한 따위에 얽매여 그 스스로에게는 별다른 이득이 없는 대가를 받았으니, 대가를 이룬 뒤에도 그다지 얻는 것이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원한을 풀어 망자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전 수많은 업보를 쌓아온 그들에게 남은 것은 어차피 지옥행뿐. 그럴 바에야 차라리 그에게 종속된 도구로서 지상을 떠돌며 업보를 조금씩 벗어내는 편이 낫지 않은가? [그.것.이.너.희.의.한.계.겠.지.] 요악스럽고 사악한 밤의 왕자의 말에도 사령기사와 환영기사는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켰고, 그 또한 무심히 제물을 정리했다. 소환대상, 소모마력, 계약내용, 소환으로 인한 부작용 등 갖가지 일 처리가 그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악마와의 계약은 그조차 상당한 신경을 기울여야한다. 아주 작은 실수만으로도 그 자신의 영혼을 잃고 파멸할 수도, 세상을 멸망 가까운 위기로 몰아갈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악마의 계약이다. 제물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부족하다면 그만큼 마력으로 보충하면 된다. 떠나기 전 호악산에서 넘실거리던 귀기를 상당량 흡수해 그 중 절반 이상을 마력으로 전환시켰다. 또한 철궁곡에서 넘쳐흐르던 수많은 원념과 사기가 링 오브 베리알(ring of Belial)을 통해 흡수되었으니, 상당량의 마력을 제물로 바치더라도 큰 지장은 없다. "준비해라." [알.겠.습.니.다.] [며어엉으으을따아아르으읍니이이다아아.] [......주군의......뜻대로......] 사령기사, 환영기사는 유령마의 등 위에 죽은 듯 혼절해있던 이들 중 두 여인을 들어올려 마법진을 향했다. 환영기사가 정신을 통해 순결함을 확인한 처녀일 터. 두 망자가 처녀의 뒷덜미를 잡아 마법진을 향해 높이 들어올린 것을 확인한 그는 사신의 낫을 들어올리며 주문을 외웠다.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음성 때문에 더욱 사악하고 스산하게 느껴지는 주문이 이어짐에 따라 그의 몸에서 뭉클뭉클 흘러나온 사악한 마력은 그의 손에 들려진 사신의 낫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마력을 받아들인 자루가 더욱 짙은 묵광을 번뜩이고 은빛의 날이 은은하면서도 요사스러운 빛을 발한다 싶은 순간, 사신의 낫을 쥐고있던 그의 손이 느릿하게 휘둘러지며 허공에 완만하면서도 날카로운 곡선을 그렸다. 푸욱! 그녀의 허리가 부러질 듯 휘어지며 두 손과 발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킬 때, 얼음장같이 차가운 칼날에 꿰뚫어진 뜨거운 심장은 응당 멈춰야 정상임에도 불구하고 사악한 마력의 힘에 의해 마치 발작을 하듯 터질 듯 부풀어올랐다가 쥐어짜지 듯 수축되는 격한 박동을 계속 이어갔다. 촤아아악! 사신의 낫이 뽑혀나간 처녀의 심장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양수기처럼 끝도 없이 피를 뿜어냈다. 허공에 분수처럼 뿌려진 그녀의 붉은 생명수가 마력에 이끌려 마법진에 흡수되자, 그는 주저 없이 다른 처녀의 심장에도 사신의 낫을 박아 넣었다. 두 처녀의 피를 흡수한 마법진은 은은한 혈광을 발했다. 특히 중앙과 역오망성의 극점에 위치한 여섯 개의 바위는 본래의 회색을 잃고 완전한 핏빛으로 물들었는데, 그 너무나도 선명한 핏빛은 마치 단 두 여인만이 아닌 수백 명의 피를 빨아들인 듯 싶을 정도였다. '부족하군.' 수도 없이 반복해온 익숙함 덕분에 바위를 물들인 핏빛의 흐릿함과 혈광의 은은함만으로도 마법진의 완성도를 파악한 그는 환영기사를 향해 살짝 고개를 돌렸다. "남은 처녀의 수는." [......다섯입니다......] 악마의 소환에는 역시 순결한 처녀가 가장 효과적인 만큼, 준비된 제물 중에는 역시 처녀의 수가 가장 많았다. 남은 제물의 수로 몇 가지를 계산해본 그는 잠시 후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둘을 추가해라." 사령기사가 들고있던 처녀를 환영기사에게 맡기고 양손에 각자 한 명씩의 처녀를 더 들고 오자, 사신의 무심한 낫은 그녀들의 심장에도 차례대로 박혀들었다. 생기나 근육의 작용을 넘어 마력 자체로 움직이게 된 네 처녀의 심장은 그야말로 최후의 최후까지 생명수를 뽑아냈다. 결국 심장의 격렬한 박동과 손발의 경련이 멈춰졌을 때, 그녀들의 몸에는 단 한 방울의 피도 남아있지 않았다. '됐군.' 마법진이 완성된 것을 확인한 그는 네 처녀의 사체를 치웠다. 베리알 때와는 다르다. 그때는 단지 계약의 대가를 받기 위한 약식으로, 굳이 비교하자면 손만 드나들 수 있는 작은 구멍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지금의 마법진은 소환대상의 전신이 그대로 드나들 수 있는 거대한 문이자, 그 자체로 충만한 마기를 일으켜 소환대상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제물이며 계약시 일어나는 막대한 힘의 교류를 버텨낼 수 있는 통로다. 만약의 경우, 계약이 실패하거나 할 때 소환대상을 속박하여 다시 송환시킬 수 있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그와 계약 맺은 수많은 악마들 중에서도 유독 유희를 즐기고 그를 마음에 들어하던 베리알의 성품조차 철저히 계산하고 약식이더라도 적게나마 영력을 직접 제물로 사용했기에 계약이 실패할 가능성은 무척이나 낮았지만, 만약 베리알이 그를 해하고자 작심했다면 당시 약식으로 만든 마법진은 종잇장처럼 단번에 찢겨져나갔으리라. 하지만 지금 이 정도의 마법진과 지금 그가 지닌 강대한 마력이라면 어지간한 악마라면 그대로 송환시킬 수 있는 만큼 계약의 실패를 뒷처리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 정도가 좋겠군.' 그는 첫 번째 소환에서 사용할 제물을 배치했다. 현명한 서생을 정신(情神)의 위치에, 농염한 창기를 기운(氣運)의 위치에, 건장한 무사를 파괴(破壞)의 위치에, 순수한 소녀를 영혼(靈魂)의 위치에, 어린 소년을 육체(肉體)의 위치에 놓았다. 제물에 담긴 의미는 마법진의 미묘한 배열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지지만, 지금의 마법진에서 정신의 바위에 놓여진 서생은 뛰어난 지혜(知慧)를, 기운의 바위에 놓여진 창기는 많은 다산(多産)을, 파괴의 바위에 놓인 무사는 강인한 무력(武力)을, 영혼의 위치에 놓여진 소녀는 순수한 욕망(慾望)을, 육체의 바위에 놓인 소년은 빠른 성장(成長)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중앙에 창주향을 놓음으로서 그릇을 마련한 그가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자, 야영귀와 사령기사, 환영기사는 차례대로 마법진을 둘러싸며 자신들의 사이한 기운을 개방했다. 제 1옥이 다른 지옥에 비해 유독 명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는 하지만, 망자(亡者)는 기본적으로 지옥에 속한 존재. 사마의 술법을 보조하는 것에 관해서 라면 어지간한 술사는 비교도 안 되게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 묵봉을 수평으로 들어 하늘과 땅을 가른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주문들 중에서도 가장 사악한 것에 속하는 요사스러운 주문을 외우며 전신의 마력을 개방했다. 어둠보다 더욱 어둡고 피보다 더욱 비릿하며 미지보다 더욱 신비한 가장 순수한 마기(魔氣)의 정화, 마력(魔力)은 세 망자가 흘려보낸 귀기를 흡수하며 더더욱 크고 강대해지며 마법진으로 흘러 들어갔다. 마법진에서 흘러나오던 진득한 혈광(血光)은 너무나도 짙은 어둠이 담긴 마력에 휩쓸려 묵광(墨光)으로 변하며 사방을 더욱 어둡게 밝혔고, 그 모순된 공간 속에서 그는 무심히 주문을 이어 마법진을 따라 마력을 움직였다. 사악한 마력은 흑마술(黑魔術)에 의해 순차적으로 역오망성을 돌았다. 영혼의 바위로부터 번식의 욕망(慾望)을, 정신의 바위로부터 영악한 지혜(知慧)를, 기운의 바위로부터 다산의 정기(精氣)를, 육체의 바위로부터 속성의 육체(肉體)를, 파괴의 바위로부터 강대한 무력(武力)을 받아들인 마력은 그 다섯을 하나로 묶으며 마법진 안에서 요동쳤다. 우우웅! 강대한 마력의 흐름에 마법진은 당장이라도 깨져나갈 듯 부르르 진동하며 묵광의 기둥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마법진 전체를 뒤덮었던 묵광의 기둥은 마력의 흐름에 따라 점차 중앙으로 좁혀 들어가며 중앙에 있던 창주향에게 집중됐고, 그것은 마법진 내부에 흐르던 마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파득! 묵광에 휩싸인 그녀는 혈맥과 기맥, 피륙과 골수를 가리지 않고 뭉클뭉클 파고 들어오는 막대한 마력에 두 눈을 부릅뜨며 물위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몸을 튕겼다. 마치 공기가 한계 이상으로 들어찬 돼지 오줌보처럼, 몸이 터져 나갈 듯한 고통에 그녀는 입을 따악 벌리고 숨을 헐떡거리며 내부의 마력을 토해내려고 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켜 입을 통해 더욱 많은 마력이 체내로 밀려들어왔다. 부르르르르...! 파드득...! 연신 퍼덕거리던 그녀의 몸은 계속해서 밀려드는 마력에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고, 짙은 마력에 스며든 손톱은 바위를 깎아내며 깊숙한 고랑을 만들어냈다. 푸욱! 그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묵봉을 땅에 수직으로 내려 박아 하늘과 땅을 이은 순간, 허리가 부러질 듯 휘어지며 급격히 수축된 동공으로부터 퍼져 나온 어둠에 의해 새하얀 눈자위가 칠흑으로 물든 창주향의 몸이 서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 kelly님의 추천으로 한 편 올립니다. ------------------------------------------ 자아, 과연 그 조건은? 알만한 분이라면 다 아실 태고, 엉뚱한 분이라면 영원히 모를 듯. 하여튼 사신에게 있어서 사람이란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그 오만한 방관과 무심의 지배여. 예고: 이루어진 계약. 에...삐리리...[부분 심의삭제] 그리고 시작되는 음모.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14 06:36:01 고친날 2005-08-14 06:36:01 읽은수 7482 [ 9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9.악마소환(惡魔召喚).(5)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강대한 마력에 의해 허공에서 몸이 수직으로 새워진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둘러 주변을 둘러보다가 그를 향해 고개를 고정시키고 입을 열었다. "[나를 불러낸 이가 그대임인가?]" 분명 인간의 성대를 타고 흘러나왔지만,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울림이 담긴 음성에 그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아나벨라(annabella)." 제 2옥의 수많은 마물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대한 마력과 사악한 권능을 지닌 암의여왕(暗蟻女王) 다크니스 엔트 퀸(darkness ant queen)은 칠흑의 눈으로 그를 주시하며 고개를 서서히 끄덕였다. "[검은 맹약의 서의 주인인 검은 맹약자라면 나와 계약할 자격이 있음이다. 이만한 제물과 마력으로 나를 불러낸 이라면 나와 계약할 힘이 있음이다. 네가 계약을 원한다면 나는 정당한 대가에 계약을 맺을 생각이 있음이다.]" 아나벨라는 선뜻 계약의 제시를 수락했다. 지옥에서 추악한 마물들을 잡아먹고 살던 그녀로서는 제물로 바쳐진 지상의 맑은 영혼과 향긋한 육신이 충분히 마음에 들었으리라. 산체물의 영혼을 그대로 바칠 경우, 그 영혼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영기 뿐으로 영혼이 윤회를 통해 쌓아온 영력은 얻을 수 없다. 굳이 비교하자면 껍데기뿐이라고 할 수 있기에, 영혼 자체를 집어삼켜 괴롭히는 것을 즐겨하는 일부 악마를 제외한 대다수의 악마들은 영력 자체를 더욱 선호한다. 그러나 지금 이나벨라가 머무는 육신은 도봉(道鳳) 창주향(創主響)의 것.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충분히 단련된 그 육신은 상당히 품질이 좋은 것에 속한다. "네 왕국의 건설을 돕는 대신, 그 3할을 대가로 받겠다." "[3할로 충분함인가?]" "그렇다." 아나벨라의 두 눈이 묵광을 번뜩였다. 모호한 계약조건. 약자가 강자를 상대로 내걸었다가는 패가망신하기 딱 좋고, 악마를 상대로 한다면 두말할 필요도 없는 파멸이다. 그러나 그 계약을 제시한 상대가 얼마 전 브레스 웨폰(breath weapon)의 위력만큼은 제 3옥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쌍두마룡(雙頭魔龍) 트윈 헤드 이블 드레이크(twin head evil drake) 헬카즈를 소환해 계약을 맺은 강대한 흑마술사라면 이야기가 틀려진다. 아나벨라가 아무리 제 2옥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고 하지만, 그녀의 주된 권능은 무력이 아니니 헬카즈의 브레스에 맞는다면 막대한 타격을 입게된다. 하물며 현재 마법진을 둘러싸고 있는 망자 중 야영귀(夜影鬼) 나이트 쉐이드(night shade)까지 힘을 더한다면, 설사 왕국을 새워 전면전을 펼친다 하더라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 그 무력을 논함에 있어 그녀보다 나으면 나았지 결코 뒤쳐지지는 않으며, 동시에 어떠한 악마보다 간교하고 사악한 강자. 무엇보다도 검은 맹약의 서의 주인인 검은 맹약자가 계약상대라면, 이러한 계약조건은 오히려 그녀에게 불리하게 적용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와 같이 강대한 악마가 지상으로 나올 수 있는 기회는 드문데다가, 약간 불리한 계약이라도 이 정도라면 손해보다는 이득이 더 클 것이다. 무엇보다, 번식(繁殖)을 순수하게 욕망(慾望)하는 악마(惡魔)인 아나벨라에게 왕국의 건설이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계약에 응함이다.]" "계약은, 성립됐다. 휘우우우웅-! 아나벨라와 그가 계약을 선언하자, 마법진 내부를 꿈틀거리던 강대한 마력이 사방을 휘몰아치다가 아나벨라와 그의 영혼에 스며들었다. 계약 자체가 지닌 영적인 구속력에, 흑마술의 구속력까지 더해졌으니 이 계약을 어긴다면 차라리 골백번 죽느니만 못한 처참한 일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제 제물을 취하기로 함이다.]" "좋다." 그는 무심히 아나벨라의 말을 승낙했다. 제물로 바쳐진 이들이 죽어 그 영혼조차 악마에게 잡아먹힌다 하여도, 어차피 그가 알 바 아니니까. 탁. 중앙의 바위 위에 내려서 잠시 인체의 감각을 만끽한 그녀가 영혼의 바위에 놓여진 소녀를 향해 한 손을 내뻗자, 강대한 마력에 휩싸인 소녀의 몸이 허공으로 부웅 떠올라 그녀를 향해 날아왔다. 소녀의 몸의 바로 앞에 띄워놓고 한 손으로 아직 덜 여문 봉긋한 가슴을 쓰다듬어본 아나벨라는 칠흑의 눈에 만족의 기색을 띄웠다. "[인간의 육체는 역시 부드러움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바쳐진 인간의 제물에 그녀가 흡족한 미소를 띄워 올렸다 싶은 순간, 마력이 흘러 넘치는 그녀의 손톱이 서서히 소녀의 가슴을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피부를 가르고 살을 헤집으며 파고든 그녀의 손은 뼈 사이를 부드럽게 벌리며 소녀의 심정을 쥐었다. 두근. 두근. 자신의 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소녀의 심장은 조용히 박동을 이어갔다. 그녀의 손에 쥐어져 가슴 밖으로 꺼낼 때까지도,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에 의해 마치 사과라도 되는 양 부드럽게 그 일부가 깨물릴 때까지도 마치 잠을 자는 듯한 조용한 박동은 멈추지 않았다. "[좋음이다.]" 붉은 생명의 근원을 모두 씹어 삼킴과 함께 그 영기까지 취한 아나벨라는 혀로 입술을 살짝 훑어 피를 핥았다. 소녀의 심장은 그녀를 배부르게 하고 기운을 충만하게 했고, 그 영기는 영적인 만족감을 주었다. 그러나 악마로서의 무한한 욕망은 아직도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소녀의 사체를 치우고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던 아나벨라는 육체의 바위에 놓여져 있던 소년을 마력으로 끌어당겨 중앙의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인간 수컷임이여, 나의 교배상대가 된 것을 영광으로 알음이라.]" 스르륵... 그녀가 양팔을 좌우로 벌리자, 그녀의 옷이 마치 보이지 않는 시녀들에 의해 당겨지듯 벗겨지며 달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을 발하는 나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안에 든 것은 소름끼치는 지옥의 대마물이라고 하나, 그녀의 육신은 구룡팔봉의 일인이던 도봉 창주향의 것. 그녀가 평생동안 아름답게 가꿔온 나신은 칠흑의 어둠 아래서 그야말로 뇌쇄적인 아름다움을 뽐냈다. "[눈을 뜨고 나를 배알해야 마땅함이라.]" 그녀의 칠흑으로 물든 눈이 묵광을 번뜩이며 마력을 발하자, 죽은 듯이 감겨져있던 소년의 눈이 스르륵 뜨여졌다. 그러나 드러난 눈에 담겨있는 것은 소년으로서의 총기가 아니라 꼭두각시와 다름없는 흐릿함이었다. 마력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소년의 정신과 육신은, 말 그대로 육식동물을 앞에 둔 초식동물이나 다름없었다. 서서히 몸을 일으킨 소년은 아나벨라에게 무릎꿇어 예를 표하고 스스로의 옷을 벗어 내렸다. 아직 사내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기 힘든 나이의 소년이었지만, 애초부터 소년이 가진 씨앗 자체보다는 그 정기(精氣)를 염두에 두고 있던 그녀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소년의 몸을 끌어당긴 그녀의 앵두 같은 입술이 소년의 입술과 맞닿으며 두 개의 혀가 얽혀든다. 새하얀 섬섬옥수(纖纖玉手)가 소년의 몸을 쓸고 작은 손이 탐스러운 가슴을 쥔다. 가벼운 전희로 마력을 일깨우고 정기를 일으킨 그녀가 소년을 바닥에 눕히고 서로의 몸을 합치자, 한줄기 붉은 선혈이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녀는 창주향이 간직해온 순결이 깨져나가는 것에도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두 나신이 뒤엉키며 사악한 마력과 정순한 정기가 섞이자, 달빛으로 인해 서늘하게 식은 밤이 기이한 열기에 의해 뜨겁게 달궈졌다. 암의여왕(暗蟻女王)인 그녀의 마력에 담겨진 힘은 번식(繁殖)의 권능(權能). 씨앗이 없이도 스스로 번식할 수 있으며, 어떤 씨앗을 받는다면 그 종을 불문하고 자신의 권속에 씨앗의 정기를 부여할 수 있다. 일부 흑마술사(黑魔術師)와 마녀(魔女)들은 그녀의 힘을 빌어 아이를 점지해주기도 하는데, 그럴 경우 불임판정을 받은 여인조차 자식을 낳게 된다. 어찌 보면 그리 대단하지 않지만, 그 마력에 담긴 권능으로 인해 그녀의 일족이 성장해 번식하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리고 그 번식이 일정 정도를 넘어 왕국(王國)을 이루면, 웬만한 나라 하나 정도는 단번에 쓸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한 무력을 지니게 된다. 더구나 그 왕국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더 이상 번식할 경우 식량으로 삼을 인간이 부족해지기에 적당한 영역을 이룰 뿐, 만약 왕국의 절반이 무너지더라도 번식을 통해 그것을 보충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찰나에 불과하다. 막대한 번식력과 성장속도, 그것이야말로 아나벨라가 제 2옥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대한 마물로서 존재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다. '됐군.' 아나벨라가 소년에 이어 서생과 무사에게까지 씨앗을 취하는 사이, 그는 남은 제물과 함께 생각을 정리했다. 암의왕국(暗蟻王國)의 3할. 그 정도 전력에 쌍두마룡 헬카즈, 대시귀 철방, 야영귀를 비롯한 망자들을 더한다면 어지간한 천하삼십육세 중 몇 개 정도는 쉽게 쓸어버릴 수 있다. 만약 그 3할의 전력이 전멸한다면, 아나벨라가 보충해놓은 3할의 전력을 다시 끌어내면 된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동(東)을 마물의 세상으로 만들 수 있지만, 아나벨라로서도 자신의 일족이 모든 인간을 먹어치워 굶어죽는 것을 원하지 않을 테니 적당히 조절할 것이다. 비록 그 조절 과정에서 막대한 인명이 희생되기는 하겠지만, 그야 그가 알 바 아니다. '다음 소환에도 문제없겠군.' 아나벨라가 지상으로 올라오며 뚫은 구멍은 충분히 벌어진 채 아직 아물어지지 않고 있으니, 적은 마력만으로도 어지간한 악마는 소환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번 일을 꾸미는데 가장 필요한 그 악마라면 충분히 불러낼 수 있을 것이다. 환영기사의 힘도 작지는 않지만, 그가 원하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역시 악마의 힘을 빌리는 편이 더 낫다. 만약 그 계획이 성공할 경우, 거대사파의 그에 대한 집중 공격을 피하고 정사의 균형을 맞출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다수의 시체유실이나 실종은 혼란에 묻혀 흐지부지 잊혀질 것이고, 그렇게 질 좋은 식량을 제공함으로서 그는 왕국을 건설하는데 도움을 주는 셈이 된다. 천하무림뿐만이 아니라, 온 천하에 대혼란을 가져오게 될 사악한 계획은 그렇게 그의 머릿속에서 정리되어갔다. ======================================= 해피컴컴님의 추천으로 한 편 올립니다. --------------------------------------- ...아니, 무적사신의 잔인함은 원래부터가 일정 연령대 이상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원래 더 삐리리...를 예정했다가 슥슥 하고 다시 슥슥 하여 이 정도로 수정. 더 이상은 기대 말 것. 그리고 아나벨라는 이 그림자 없는 이의 독창적인 악마로, 혹여나 찾아보려고 하셨다가는 대략 낭패. 예고...가 아니다. 이번엔 예언이다. 예언: 첫번째 꿈이 끝났을 때, 그대들의 일부는 지나칠 것이나 일부는 알아채리라. 알아챈 자들은 놀람과 의문은 혼란 속에서 그 답을 찾아 헤매리라. 두번째 걸음을 옮겼을 때, 그대들의 일부는 지나칠 것이나 일부는 느끼리라. 느낀 자들은 의문과 호기심과 긴장 속에서 그 느낌의 근원을 찾으리라. 세번째 기억을 회상했을 때, 그대들의 일부는 뒤를 보고 일부는 앞을 보리라. 앞을 보는 이들은 흩어진 흔적 속에서 단서를 찾아 그 해답을 만드리라. 네번째 진실을 보았을 때, 그대들은 숨겨진 해답을 찾고 숨겨진 비밀을 알리라. 그대들은 놀라하고 의아해하고 분노하고 의심할지 언정 그 무엇도 확신치 못하리라. * 이 예언은 모두 허위니, 진실여부를 따지고 싶다면 점쟁이를 찾아가라.-끝-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14 13:14:49 고친날 2005-08-14 13:14:49 읽은수 7548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20.천망불루(天網不漏).(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사신은 성긴 그물 뚫으려 하나, 하늘의 그물은 결코 악인을 놓치지 않는다.- "어때, 진전은 좀 있어?" 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서(書)에 담겨진 방대한 지식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이곳에서의 생존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 "가능하면 숨겨두는 게 좋아. 만약의 만약을 대비해 그 누구도 모르는 비장의 한 수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지니까." 물론이다. 서의 지식에 대해 그가 알고 있는 것도 어디까지나 너무나도 깊고 방대한 서의 지식을 이해하고 흡수하기 위한 필요에 의한 것일 뿐이고, 그런 그에게조차 하나의 비수만큼은 숨겨두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떨까. 지식과 지혜를 가장 큰 무기로 삼기에 오히려 숨겨둔 비장의 수는 치밀하고 날카로울 것이다. "네게도 비장의 수가 있나?"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은 물음. 그러나 그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있지. 한 번 보겠어?" 그 비장의 수는 예상을 한참 뛰어넘었다. 지력이라면 몰라도 무력에 있어서는 분명 그를 앞서리라 생각했지만, 그의 비장의 수는 분명 서(書)와 비견하더라도 결코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강력한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의외인 점은, 그러한 비장의 수를 거리낌없이 드러낸 그의 태도. "왜 그것을 드러냈지?" "글쎄...이것만이 나의 모두는 아니야." 이것으로도 부족하다는 뜻인가. 아직까지 숨겨두고 있는 비수가 더 있다면, 그 힘을 짐작할 수 없다. "무엇보다, 너는 내 계약자(契約者)니까." "계약자(契約者)라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가?" "물론이지. 계약자(契約者)란 계약(契約)으로 이어진 관계니까." 불리해질 때 얼마든지 일방적으로 파기할 수 있는 것이 계약이다. 설사 무언가를 담보로 잡혀 반드시 지켜야한다 하더라도 계약이 끝나면 얼마든지 서로의 등을 찌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언사는, 마치 계약을 절대적으로 지켜야할 법칙으로 여기는 듯 싶다. "계약(契約)이라는 것이 그토록 절대적인가?" "계약이 절대적이냐고?" 뭔가 당연한, 또는 전혀 의외의, 그러면서도 어느 정도는 예상한 듯한 느낌이 뒤섞여있는 미묘한 음성. 턱을 쓰다듬던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연다. "계약은 너무나도 가볍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무거워." 모순.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거지. 서로가 그 계약을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기면 그 계약은 실제로 목숨을 빼앗을 정도의 무게를 지니지만, 서로가 그 계약을 종잇장만큼의 무게로 여기만 그 계약은 종잇장처럼 돼버리는 셈이랄까." 아직, 부족하다. "만약 한쪽은 계약을 중요하게 여기고, 다른 한쪽은 계약을 가볍게 여긴다면? 아마 가볍게 여긴 쪽에서 계약을 어겨 이득을 볼 수도 있을 거야." 그렇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이치다.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계약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렇게 될 경우 계약을 어긴 쪽은 그만큼의 대가를 받게되지." 과연 누구에게 무슨 대가를 받는다는 뜻인가? "수천 년 전 교류가 끊긴 동(東)에는 세상만사는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이 있지. 원인에는 반드시 결과가 따르고 행한 만큼 보답 받게 된다는 뜻이야. 계약이라는 것은 결실 맺기 위한 인연의 맺음을 뜻하니, 그것을 어긴다면 계약을 어겨 이득을 본 만큼 인과의 대가가 따라." 현실적인 근거가, 논리가 부족하다. 지극히 현실적인 그가 할만한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무게가 담겨있다. "중요한 것은 계약에 대한 믿음이지. 반드시 지키겠다는 의지, 그것이 바로 인과를 이끌어내지. 만약 다른 한쪽에서 계약을 가볍게 생각하더라도, 다른 한쪽이 그만큼 계약을 무겁게 생각하면 계약의 인과성은 성립돼. 그리고 그것이 신념(信念)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상대에게도 영적(靈的) 구속력을 가할 수 있어." 물리적인 구속력이 아닌 영적인 구속력. 과연, 그런 것인가. "만물의 시작은 영혼(靈魂). 영혼에서 마음(心)이 생기면 그것은 정신(精神)에서 생각(念)을 이루고, 생각은 기운(氣運)의 힘(力)을 일으켜 최종적으로 육체(肉體)인 몸(身)을 움직이지." 영혼에 제약이 가해지면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생각이 이뤄지지 않는다. 힘이 일어나지 않는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결국 그것이 계의, 인과의 구속력의 실체다. 그 말대로 라면, 그 영적 구속력은 이미 가해져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를 배신할 마음도, 생각도 없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인가? "슬슬 시간이 됐으니 가볼까." 그는 몸을 일으켰다. 기나길던 생존투쟁에 끝을 고하는 마지막 전투를 시작할 때가 됐다. 몇 가지 도구를 챙겨 걸음을 옮기던 그는 문뜩 고개를 돌렸다. "혹시라도 말인데, 내가 죽고 네가 살아남게 되면 내 유품을 정리해 줘. 대신, 그 반대의 경우 내가 네 유품을 정리해서 유용하게 써줄게." 유품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그러나 굳이 거부할 필요는 없었던 만큼,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잊지 마, 이것도 계약이라는 걸." 미소를 지으며 재차 강조하는 그. 이 또한 구속력을 지니고 있을 것인가?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모든 것은 그때 가서야 알 수 있는 법. 일단 승낙해도 문제는 없다. "명심하지. 파타시." 대답과 함께 흘린 그의 이름은, 고요히 울려 퍼졌다. 부웅-!! 촤아악! 사신의 낫이 허공을 가르며 하나의 천조각이 허공을 나풀거리다가 서서히 바닥에 떨어져 내릴 때, 그는 무심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가슴부분의 옷자락이 날카롭게 베어진 채 입을 따악 벌리고 있는 무영투괴. 꽤나 떨떠름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철방.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천무. 어쩐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금호와 한숨을 내쉬는 남국. "...용건은?" 그의 무심한 음성에 잠시 입을 뻐끔거리던 무영투괴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잠든 놈 깨우려다가 하마터면 그 길로 비명횡사할 뻔했다. 아마 그가 천하에서 가장 빠른 발을 가지지 않았다면, 설사 화경의 무위를 지녔어도 피 보는 것을 피하지 못했으리라. 그런데 정작 흉한 대낫을 휘둘러댄 녀석은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뻔뻔한 태도를 취하니, 아무리 무림명숙 중에서는 꽤나 소탈한 편으로 알려진 무영투괴라도 웃어넘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이, 이 썩을 노옴!! 아예 사생결단을 내자!!" "영감, 좀 진정하라고." "노야께서 참으세요. 사부님은 원래 저러시잖아요." 길길이 날뛰는 무영투괴를 철방과 두 제자가 달라붙어 진정시키는 사이, 그는 천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의형제라고 해도 의형이 죽을 뻔한 모습을 보고도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던 천무는 예의 온유한 음성으로 그의 물음에 답했다. "형님께서 이번에 오시는 길에 우연히 천안도괴(天眼道怪) 어르신을 모셔왔습니다." 천하제일의 도술사 천안도괴. 그라면 충분히 만나 볼만한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 모산파 출신의 천안도괴로부터 천하삼대강시공 중 하나인 일기환원공(一氣還元功)을 구할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그는 서서히 진정되는 기미를 보이는 무영투괴를 향해 무심히 물었다. "일의 처리는?" "이런 썩을 놈! 아직까지 반성의 기미가 없어?!" 다시 한 차례 길길이 날뛰며 버럭버럭 고함을 지르던 무영투괴는 철방의 굵직한 손과 두 청년의 제지에 겨우겨우 흥분을 가라앉히며 그에 답했다. "그래, 네놈이 흘리고 다닌 일은 다 처리해뒀다. 노부가 그 일을 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안다면 네놈이 내게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없어!" 도둑인 만큼 뒷세계의 일과 정보를 다루는데 능숙한 무영투괴는 천무의 부탁을 받아 근 한 달 동안 그와 관련된 일을 처리했다. 개인으로든 집단으로든 단시일 내에는 도저히 끝마치기 힘든 갖가지 일을 단 한 달만에 처리한 무영투괴의 실력은, 과연 무림삼괴의 칭호가 아깝지 않다. "이 썩을 놈! 노부가 둘째를 위해 언제까지만 참고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만약 네놈이 다시 한 번만 이런 일을 벌이면, 결단코 용서치 않겠다!" 그는 무영투괴의 노성을 무심히 흘려 넘기며 문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무영투괴는 정사중도를 걸어왔어도 나름대로는 의적으로 활동해온 바, 아무리 의제가 따르고있다고는 해도 그를 용서치 못함이 당연하다. '빠른 시일 내에 처리해야겠군.' 무영투괴와는 계약관계가 아니다. 그러면서도 그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있으니, 이대로 가만 둘 수는 없다. 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가 없는 천무와 철방, 금호와 남국이 차례차례 그의 뒤를 따르자,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방에 혼자 남은 무영투괴는 힘이 빠진 듯 침상에 주저앉았다. "...썩을 놈..."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진득한 후회가 흐트러졌다. 의제인 천무가 그를 따르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후회할 일은 없었을 테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되돌릴 수 없는 법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다 하였으니, 남은 일은 오직 천명(天命)을 따르는 것뿐이리라. ======================================= 싱클레어님의 서평으로 한 편 올립니다. 콕콕 잘 찔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에 맞춰 여러분께 말씀드리자면, 이 무적사신에는 존재감이 희박한 '잊혀진' 인물 및 장면 등이 상당히 있습니다.(본의든 본의 아니든) 그러나 이 번 장을 보시면 아무래도 무적사신을 처음부터 다시 한 번 훑고 다시 기억해내고 싶은 충동이 드실 지도 모르겠군요. --------------------------------------- 첫번째 꿈이 끝났습니다. 이번 편을 보고 여러분이 얼마나 고심하실지, 아니면 단번에 그 비밀을 꿰뚫어보실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예언: 첫번째 꿈이 끝났을 때, 그대들의 일부는 지나칠 것이나 일부는 알아채리라. 알아챈 자들은 놀람과 의문은 혼란 속에서 그 답을 찾아 헤매리라. 두번째 걸음을 옮겼을 때, 그대들의 일부는 지나칠 것이나 일부는 느끼리라. 느낀 자들은 의문과 호기심과 긴장 속에서 그 느낌의 근원을 찾으리라. 세번째 기억을 회상했을 때, 그대들의 일부는 뒤를 보고 일부는 앞을 보리라. 앞을 보는 이들은 흩어진 흔적 속에서 단서를 찾아 그 해답을 만드리라. 네번째 진실을 보았을 때, 그대들은 숨겨진 해답을 찾고 숨겨진 비밀을 알리라. 그대들은 놀라하고 의아해하고 분노하고 의심할지 언정 그 무엇도 확신치 못하리라.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15 01:34:09 고친날 2005-08-15 01:34:09 읽은수 6413 [ 9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20.천망불루(天網不漏).(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그는 천무의 안내를 받아 걸음을 옮기며 무심히 생각에 잠겼다. '좋지 않군.' 한달 동안 사령기사와 환영기사, 야영귀와 같은 강대한 망자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귀기를 운용하고 아나벨라를 비롯한 악마들의 소환에 마력을 지나치게 소모한 탓인지 몸의 상태는 상당히 좋지 않았다. 감각만 해도 그렇다. 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고 해도 무영투괴와 같은 강자의 접근조차 눈치채지 못한 것은 정상이 아니다. 평소에 비하면 절반 이하의 감각권. 그나마도 마치 흙탕물 속의 물이나 벽 너머의 소리를 듣는 듯한 흐릿한 감각이니, 이 상태라면 제대로 된 전투를 펼치기도 힘들다. '피로가 쌓였는가.' 꼭 비술금법까지 들지 않더라도, 사마의 주술은 강대한 힘을 지닌 만큼 후유증 또한 크다. 그것을 조금도 쉬지 않고 한계에 가깝게 사용했으니, 몸에 피로가 누적된 것도 무리는 아니다. '휴식이 필요하다.' 기맥을 통해 귀기와 마력을 운용한 덕분에 비교적 후유증이 적은 편이니, 단지 며칠 동안 귀기와 마력의 사용을 자제하며 충분한 휴식을 취하기만 하면 회복될 것이다. 저벅. 저벅. 생각을 정리하는 와중에도 계속 걸음을 옮기며 나지막한 걸음소리를 흘리던 그는 문뜩 고개를 들어올렸다. '뭔가 걸리는군.' 정확히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뭔가 걸리는 것이 있다. 단지 불길한 예감과도 같고, 또는 무언가를 잊거나 놓친 듯만 싶은 느낌. 평소라면 어렵지 않게 그 느낌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겠지만, 지금 그를 누르고 있는 피로는 단지 육체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영혼, 정신, 기운, 육체에 걸쳐 전체적으로 누적되어 범인이라면 일어나 움직이기는커녕 의식을 유지하기도 힘을 정도이니, 아무리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정신력을 지니고 있는 그라고 하더라도 정신에 일말의 흐트러짐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 그녀인가.' 돌멩이가 연달아 걸리는 수레바퀴를 힘겹게 돌리듯, 정신을 혹사시킨 그의 머릿속에 무언가 하나의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일행이되 일행이 아니며, 지금 이곳에 없는 여인. 바로 진성하(璡星河)에 대한 처분이 떠오른 것이다. 너무나도 흐릿한 존재감 때문에 그대로 흘리기는 했지만, 그녀는 일행을 너무 오래 따라다니고 있다. 그녀의 영육(靈肉)은 베리알을 불러낼 때 일부 사용됐다. 아무리 계약에 의해 뽑아낸 피와 영력이라고는 하지만, 영육의 일부가 악마에게 제물로 바쳐진 인간은 신의 가호로부터 버림받아 온갖 잡귀와 횡액이 모여들음으로 곁에 두는 것은 좋지 않다. 금호와 남국은 진성하와 친분이 쌓였지만, 그것이 더욱 문제다. 철궁곡의 그 난전에서까지 그녀를 보호한 행동은 합리적이지 않다. 앞으로도 진성하라는 짐을 지키기 위해 둘의 전투력이 분산될 가능성이 크다. 더 이상 이용가치도 없는 그런 짐을 곁에 둘 필요는, 전무(全無)하다. '돌아가면 곧바로 처리해야겠군.' 천무에게 처리를 맡기기로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 생각을 끝맺었다. 뭔가 조금 더 남아있지만, 무리한 고민은 그렇지 않아도 극심한 피로를 더욱 무겁게 할뿐이다. 이제 곧 천안도괴를 마주해야하는 상황에, 더 이상 피로가 쌓이는 것은 좋지 않다. "이쪽입니다." 끼이익. 천무가 앞장서서 다가가자, 상당한 고수로 느껴지는 두 문지기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문을 열었다. 보통 문이 아니라 금속으로 만들어진 철문에 정의성에서도 상당한 심처에 속하는 위치. 상당히 대단한 배분을 지닌 빈객이 찾아왔을 때만 열린다는 정의성의 중앙 응접실(應接室)이다. 초절정고수조차 쉽게 발을 들이지 못하는 곳이기에 이 안에 들어서는 것을 평생의 목표로 삼는 무인까지 있을 정도라고 하지만, 정의성을 찾아왔을 때 이미 이곳에 들어선 적 있던 그는 별다른 감흥도 없이 무심히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이 기운은?' 응접실의 밀폐성 때문에 그 안에 들어서고 나서야 안에 있는 사람이 천안도괴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을 감지한 그는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응접실 내에 있는 사람은 모두 다섯 명. 가장 상석에는 긴 수염의 노인을 중심으로 그 좌측에는 차가운 인상의 중년인과 평안한 인상의 노인이, 우측에는 꾀죄죄한 노도사와 녹포노인이 커다란 원탁에 앉아있었다. 문제는 그들의 기운. 아무리 감각이 둔해졌다고는 하지만 어지간한 초절정고수는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거늘, 그들 중 세 명이나 되는 이들이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강자라는 것은 뭔가 심상치 않았다. "밤새 평안히 주무셨소?" 긴 수염의 노인, 정의검황(正義劍皇) 오도반(誤導攀)의 환대에 무심히 고개를 끄덕인 그는 비어있는 자리, 즉 검황의 맞은편에 앉았다. 철방이 당연하다는 듯 그의 뒤에 버티고 서자, 천무는 그 좌측에, 금호와 남국은 우측에 몸을 세웠다. 오직 그만이 착석하고 다른 이들은 모두 그 뒤에 시립한 것을 보고 잠시 수염을 쓰다듬던 검황은 문뜩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우선 서로 인사부터 하는 게 좋겠구려." 검황의 말에 잠시 응접실 내에 잠시 정적이 흐른다 싶었을 때, 평안한 인상의 노인 맞은편에 앉아있던 녹포노인이 먼저 입을 열어 자신을 소개했다. "노부는 당가의 장로직을 맡고 있는 칠독절명(七毒絶命) 당문삼(唐聞森)이라 하네." '과연.' 당문삼의 소개를 들은 그는 턱 끝을 미미하게 끄덕였다. 오신사왕 중 봉천암신(封天暗神)의 사촌으로, 독을 논함에 있어 당가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칠독절명이라면 칠정협칠사마(七正俠七邪魔)의 일인이자 정의성주(正義城主)인 협의검(俠義劍) 장고안(莊高岸)의 맞은편에 앉을 만한 자격이 있다. 그러나 당문삼 실력은 장고안보다 반 수 정도 아래. 그가 신경 쓸만한 수준은 아니다. 자신이 먼저 소개를 했음에도 계속 침묵을 지키는 그의 태도에 당문삼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지만, 수양이 얕지 않은 데다가 자리가 자리였던 만큼 별말 없이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만나서 반갑군. 본인은 황갈산(皇喝山)이다." 차가운 중년인의 소개는 철방이 몸을 흠칫 떨고 금호와 남국이 두 눈을 크게 뜨게 만들었다. 최근 화경의 경지에 올라 오신사왕의 일좌를 차지하고 있는 초고수. 구절창신(九折槍神) 황갈산(皇喝山). 그 정도 되는 고수이기에 그의 둔해진 감각이 정확히 파악해내지 못한 것도 어찌보면 당연하다. 문제는 대체 왜 황갈산이 이곳에 있느냐는 것이다. 화경의 고수이자 구룡회(九龍會)의 회주가 지닌 무게는 한 번의 움직임에 강호의 정세를 뒤흔들 수 있다. 그런 거물이 정의성까지 직접 행차했다면, 필히 그에 따른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헐, 헐, 본도는 천안도괴(天眼道怪)라고 하네. 그냥 도괴라고 부르면 그걸로 충분하네" 복장과 정갈한 선기(仙氣)로 이미 그 정체를 눈치채고 있었기에 꾀죄죄한 노도사의 소개는 그리 놀랍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림삼괴(武林三怪) 중 일인이 지닌 위명이 가벼워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정작 놀라운 사실은 이 자리에 삼황오제(三皇五帝) 중 정의검황을 비롯해 오신사왕(五神四王) 중 불사패신과 구절창신, 무림삼괴(武林三怪) 중 생사판괴, 천안도괴 등 천하에서 손꼽히는 초고수들이 대거 몰려있다는 점이다. 화경의 고수만 해도 무려 세 명이나 되는데다가, 저 어딘가에 있을 무영투괴까지 치자면 천하의 무림삼괴가 모두 정의성에 모여있는 셈이니 가히 천하를 경악하게 할만하다. 이제 그들의 시선은 그를 향해 집중됐다. 명성이 자자한 무림명숙들이 한 수 굽히고 먼저 자신을 밝혔으니, 더 이상 소개를 미룰 수는 없다. "내 이름은 파타시(破墮弑)." 사신(死神) 그림 리퍼(grim reaper)나 생사판괴(生死判怪)라는 별호도, 명성도, 그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가 가진 이름은 오직 단 한가지뿐이며, 그것만이 진정 그라는 존재를 뜻한다. "성은, 없다." 핏줄. 가문. 가족. 혈연. 그런 것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소유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성 따위는 필요치 않다. 그의 소개를 들은 이들은 묘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성은 없되, 이름만 있다? 그것은 신분이 천하다는 뜻이니, 대체로 밝히기를 꺼린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무심한 음성은, 자신의 성이 없다는 것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마치 황족이라도 되는 양 오만하기만 하니 이 또한 미묘하다. 한동안 묘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던 그들은 철방에게도 시선을 돌렸지만, 뭘 보냐는 듯 두 눈을 부라리는 태도에 소개 듣는 것을 일지감치 포기해버렸다. '참으로 묘한 상이로고.' 천안도괴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천지문주처럼 천기를 읽지는 못한다고 해도, 관상을 보는 것만큼은 천하제일이라고 자부하는 천안도괴는 단지 그 무심한 음성이나 행동거지만으로도 상대의 상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부모형제의 성을 읽을 수 없는 고아임을 볼 때 분명 천한 출신이거늘, 그럼에도 천하에 무엇하나 거리낄 것 없는 오만함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하게만 보이는 그 모습은 고귀한 핏줄만이 타고날 수 있는 무언가가 스며들어있다. 몸과 얼굴을 가림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음이니 속세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야 함인데, 천하에는 그 명성이 쟁쟁하여 모르는 이가 없다. 지팡이를 들고 있음은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 듯이 긴 인연을 맺지 못함인데, 그 뒤에는 충직한 수하와 뛰어난 제자가 서있다. 무엇보다, 저 무심한 음성이나 그림자 같은 기세는...속세의 인간이 지닐만한 것이 아니다. 비록 단 한 번도 보지는 못했지만, 도통한 신선이나 그 이상의 존재만이 스스로를 죽임으로서 드러낼 수 있는 음성이요, 기세다. 저런 존재는 존재하더라도 존재해서는 안 되거늘, 두 눈앞에 똑똑히 존재하니 더욱 기괴하고도 묘한 것이다. '이것은...굳이 표현하자면, 마치...' ======================================= 고무림 선작수 3800선 독파로 한 편 올립니다. 무슨 하루이틀만에 100씩 쑥쑥 오르는지... --------------------------------------- 두번째 걸음을 옮겼습니다. 이번편을 보고 여러분은 머리를 싸매고 두 눈을 부릅떠야 하지만...아쉽게도(?) 연참하니 그냥 넘기시겠군요. 하지만 이번 편을 그냥 대충 넘기시면 조금 후회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언: 첫번째 꿈이 끝났을 때, 그대들의 일부는 지나칠 것이나 일부는 알아채리라. 알아챈 자들은 놀람과 의문은 혼란 속에서 그 답을 찾아 헤매리라. 두번째 걸음을 옮겼을 때, 그대들의 일부는 지나칠 것이나 일부는 느끼리라. 느낀 자들은 의문과 호기심과 긴장 속에서 그 느낌의 근원을 찾으리라. 세번째 기억을 회상했을 때, 그대들의 일부는 뒤를 보고 일부는 앞을 보리라. 앞을 보는 이들은 흩어진 흔적 속에서 단서를 찾아 그 해답을 만드리라. 네번째 진실을 보았을 때, 그대들은 숨겨진 해답을 찾고 숨겨진 비밀을 알리라. 그대들은 놀라하고 의아해하고 분노하고 의심할지 언정 그 무엇도 확신치 못하리라.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15 01:34:53 고친날 2005-08-15 01:34:53 읽은수 6697 [ 9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20.천망불루(天網不漏).(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도괴 어르신, 부탁드리외다.] 마악 무언가를 떠올리려던 찰나, 귓가를 파고든 한 줄기 전음에 천안도괴는 미간을 한가득 찌푸렸다. 무인이라기보다는 도사인 도괴에게는 이러한 드문 상을 보고 얻은 작은 깨달음만으로도 도(道)로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거늘, 그것을 놓쳤으니 기분이 편할 리가 없다. '내 연이 안 닿는 게지.' 한숨을 푸욱 내쉰 도괴는 품에서 하나의 동경(銅鏡)을 꺼내들었다. 동경의 전면은 마치 잔잔한 수면과 같이 깨끗하게 사물을 비추는 것이 많은 여인들이 절로 탄성을 내지를 듯 싶었는데, 그 후면은 붉고 푸른 두 마리의 용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도는 태극문양을 이루며 신비스러운 기운을 풍겼다. "태극천리경(太極千里鏡)이로군요." 천무의 나지막한 음성에 그는 무심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느껴지는 기운을 볼 때, 분명 모산파 제일의 보물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다. '과연 천하삼대기보인가.' 금호에게 주긴 했지만, 초혼령(招魂鈴) 또한 대단한 보물이다. 만약 그에게 묵봉이 없었다면 초혼령을 취했을 테지만, 강시술( 尸術)이라면 몰라도 사령술(死靈術)과 흑마술(黑魔術)에는 사신의 낫이 더욱 적합하다. "태극천리경이 거짓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네." 중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태극천리경이 무엇을 얼마나 보여주는가는 모두 술사의 역량에 따라 다르지만, 절대로 거짓을 보여주지 않고 오직 진실만을 보여준다는 것은 천하의 모든 이들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도가 보여주는 것이 믿기 힘들더라도 의심하지 말게." '뭔가 있다.' 사전에 이미 얘기가 오간 듯, 중인들이 굳은 얼굴로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그는 아까 전 한차례 묻어두었던 무언가가 다시 걸리는 것을 느꼈다. 진성하에 관한 일이 아니다. 그것보다 더 크고 중요한 것.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그는 피로를 잊었다. 단지 정신력과 의지력만으로 모든 피로를 억누르고 극도로 정신을 활성화시켜 정신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천안도괴가 태극천리경을 가슴 앞에 들고 청량한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것에 정신을 분산할 틈이 없었다. 작은 실마리, 그 하나를 잡아 점차 걸리던 것의 실체를 잡아가기 위해 모든 정신력을 쏟아 부었다. 이 무언가가 걸리기 시작한 것은 방을 나서면서부터. 그 전에 있었던 무언가가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용건은?- -이, 이 썩을 노옴!! 아예 사생결단을 내자!!- -영감, 좀 진정하라고.- -노야께서 참으세요. 사부님은 원래 저러시잖아요.- -형님께서 이번에 오시는 길에 우연히 천안도괴(天眼道怪) 어르신을 모셔왔습니다.- -일의 처리는?- -이런 썩을 놈! 아직까지 반성의 기미가 없어?!- -그래, 네놈이 흘리고 다닌 일은 다 처리해뒀다. 노부가 그 일을 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안다면 네놈이 내게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없어!- -이 썩을 놈! 노부가 둘째를 위해 언제까지만 참고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만약 네놈이 다시 한 번만 이런 일을 벌이면, 결단코 용서치 않겠다!- 그의 머릿속에서 방안에서 오가던 대화가 멤돌았다. 이 중에 무언가가 있다. 단지 이 자체만이 아니라, 어떤 것이 더해져 더욱 치명적으로 변하는 무언가가... -이 제모는...믿지 않소.- -...대체 어떤 멍청이가...- 뇌리에 예전에 들었던 몇 가지 말이 스친 순간, 그는 자신이 놓치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깨달았다. '그것이었는가.' 평소라면 처음에 그것을 들었을 때나 이곳으로 걸어오는 동안 눈치챘을 텐데, 피로의 누적으로 인해 놓쳐버리고야 말았다. 설사 그렇지 못했더라도 그것을 확실히 잡아낼 때까지는 섣불리 움직이지 말아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서 너무나도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파아아--! 천안도괴의 주문이 절정에 달하며 막대한 도력이 스며든 태극천리경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것을 본 그는 미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늦었군.' 그가 묵봉을 쥔 손에 서서히 힘을 줄 때, 태극천리경에서 흘러나온 빛은 허공에 뭉쳐들어 하나의 영상을 이루며 중인들의 두 눈을 부릅뜨게 했다. [꺄아악!] [아악!!] 밤의 짙은 어둠 가운데 달빛과도 같은 은빛 괘선이 그려졌다 싶은 순간, 촌부임이 분명한 허름한 옷차림의 여인네와 사내가 비명과 함께 목이 떨어져나간다. 검은 옷자락이 펄럭이며 앞으로 쏘아져나간 인영이 마치 벼를 수확하듯 대낫을 휘두를 때마다 촌민들의 목이 허공으로 치솟는다. 하나같이 짙은 공포와 경악에 물든 마지막 표정에는 억울함이나 의문이 들어갈 틈조차 없다. [비명 좀 작작 질러대!] 묵직한 고함과 함께 휘둘러진 대도가 한 청년의 머리를 쪼개며 피와 뇌수로 가득 물든다. 무식하게 휘둘러진 주먹에 복부가 움푹 들어가며 내장이 터져 나가고 움켜쥔 손안에서 목이 동아줄처럼 가늘게 짜여진 아이의 머리가 달랑거린다. 근육만 남아 비쩍 마른 채 흐릿한 잔영이 생겨날 정도의 빠르기로 움직이는 괴물이 사체의 귀와 눈알을 물어뜯는다. 뼈만 남은 채 달그락거리며 병장기를 휘두르는 요괴들의 뼈가 소녀의 쩌억 갈라진 복부에서 뿜어져 나온 뜨거운 피로 한가득 물든다. 어둠에서 튀어나온 그림자의 마귀가 손톱으로 노파의 심장을 뜯어내 씹어 삼킨다. 반투명한 귀신의 옷자락이 허공을 스쳐지나갈 때마다 눈이 새하얗게 뒤집어진 이들의 몸이 털썩털썩 쓰러져 내린다. 잔인한 학살, 학살. 학살! 수많은 시체가 널리는 가운데 남은 생존자들이 온갖 괴물들에게 둘러 쌓인 채 몸을 부들부들 떤다. [원망하면 원망하라고. 정 못 잊겠으면 나중에 지옥으로 찾아오든지.] 거한의 무거운 음성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어디선가 사악한 주문이 무심한 음성에 담겨 울려 퍼진다. 수많은 시체로부터 흘러나온 피가 꿈틀거리며 혈광을 발하기 시작한다. 그 서서히 번져나간 혈광이 결국 마을 전체를 감쌌다며 빛의 기둥을 이룬 순간, 하나의 커다란 낫이 높이 치켜 들려지며 기둥의 한 가운데가 갈라진다. 좌우로 쩌어억 갈라진 거대한 틈으로부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핏빛 바탕에 칠흑이 번뜩이는 비늘로 둘러 쌓인 두 개의 머리. 그 뒤를 이어 주르륵 나오는 긴 목과 넓은 날개, 거목보다 더욱 두터운 네 개의 다리를 지닌 거체(巨體). [내 목적은, 너의 충성이다.] [크르르...] 무심한 음성에 두 개의 머리가 각자 좌우로 기울어졌다 싶은 순간, 하나의 다리가 높이 들어올려지며 두 고개가 하늘로 치켜진다. 쿠웅-! [크롸롸롸롸롸롸--!!!] 그 누가 보기에도 인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대한 힘을 지닌 존재는 인간의 오만함에 분노해 지진과도 같은 진동을 일으키며 포효를 내지른다. [급한 것은 네가 아니던가.] 포효를 멈춘 존재가 두 쌍의 시선을 돌리자, 흑의사내의 무심한 음성이 이어진다. [타락의 저주를 벗어내기 위해서는 막대한 마력이 필요할 터. 지옥에 웅크린 채 마력을 모으는 것으로 만족하는가?] [크르르르...] 두 개의 머리가 이를 드러내며 사나운 울음소리를 흘린다. 분노는 일어나되 부정하지 못하는 정곡을 찌르는 말. [네가 용족의 권위를 되찾는 걸 도와주겠다.] 다물어진 입. 멈춰진 울음소리. 막혀진 숨결. 오직 크고도 날카롭게 뜨여진 두 쌍의 눈동자만이 마치 꿰뚫어보듯 흑의사내를 주시한다. [대신, 나를 따라라.] 흑의장포가 펄럭거리며 그 주변으로 칠흑의 어둠과도 같은 무언가가 퍼져 나오기 시작한다. 빛을 집어삼키고 어둠을 뒤덮는 진정한 어둠이 흑의사내의 뒤로 높이 치솟고 넓게 퍼져 마치 사신의 옷자락이나, 그 그림자와도 같은 형상을 이룬다. [크르르르르르.....] 존재의 거체에서도 어둠이 흘러나온다. 타오르는 듯한 열기를 품은 검붉은 어둠과 검푸른 어둠이 서로 뒤섞이며 존재의 주변으로 거센 바람을 일으킨다. 그러나 영상을 지켜보는 모두든 이들이 느꼈을 정도로 그 차이는 확연했다. 어둠보다 더욱 짙은 어둠으로 이루어진 사신의 그림자는, 밤의 어둠뿐만 아니라 존재의 어둠마저 뒤덮어가고 있었다. [크롸롸롸롸---!!] 거센 포효를 내지른 존재는 서서히 자신의 어둠을 거두고 두 머리를 서서히 낮췄다. 자신보다 더욱 강대하고도 사악하며, 무엇보다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깊디깊은 어둠을 확인한 존재는 스스로의 오만한 자존심을 덮었다. 두 개의 거대한 머리가 지면에 닿도록 내려와 흑의사내의 앞에 놓여졌다. 위대하고도 강대한 존재가 한낮 인간에게 머리를 숙였지만, 무심하고 방관적이기에 더욱더 오만하고 지배적으로 보이는 흑의사내에 의해 그 비현실적인 광경은 동시에 너무나도 당연하게만 느껴졌다. [계약은, 성립됐다.] 한줄기 무심한 흘러나온 순간, 그 뒤에 펼쳐져 있던 사신의 그림자가 서서히 존재의 두 미간으로 스며들어갔다. 존재를 더욱 강력하게 해줄 강대한 힘을 줌과 동시에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각인을 새김으로서 자신의 노예로 삼아버린 흑의사내와, 두 개의 머리를 서서히 생존자들을 향해 돌리는 존재의 모습을 끝으로 조금씩 흐릿해지던 태극천리경의 영상은 결국 허공 속으로 깨끗하게 사라졌다. ======================================= 어둠의기사단장님의 서평으로 한 편 올립니다. 아침에 추가로 올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검황과의 능력비교에 대해 이런저런 말이 있었는데, 서에서 나라를 쓸어버린 건 사령군단이지 파타시 혼자가 아닙니다. 무슨 차이가 있냐고 물으시면...그때 사령군단의 구성을 알면 할 말을 잃으실겁니다.[으쓱] --------------------------------------- 세번째 기억을 회상했습니다. 이번 편은 조금만 수고하시면 쉽게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리플로 커닝하지 마시길. 무적사신은 역시 극악무도잔인함이 컨셉...이라는 게 이번 편으로 한층 더 확실해진 듯. 그리고 전음으로 천안도괴의 상념을 막은 것은 역시...시기적절의 나이스 타이밍! 자, 그럼 마지막 네 번째 예언이 뜻하는 바는? 예언: 첫번째 꿈이 끝났을 때, 그대들의 일부는 지나칠 것이나 일부는 알아채리라. 알아챈 자들은 놀람과 의문은 혼란 속에서 그 답을 찾아 헤매리라. 두번째 걸음을 옮겼을 때, 그대들의 일부는 지나칠 것이나 일부는 느끼리라. 느낀 자들은 의문과 호기심과 긴장 속에서 그 느낌의 근원을 찾으리라. 세번째 기억을 회상했을 때, 그대들의 일부는 뒤를 보고 일부는 앞을 보리라. 앞을 보는 이들은 흩어진 흔적 속에서 단서를 찾아 그 해답을 만드리라. 네번째 진실을 보았을 때, 그대들은 숨겨진 해답을 찾고 숨겨진 비밀을 알리라. 그대들은 놀라하고 의아해하고 분노하고 의심할지 언정 그 무엇도 확신치 못하리라.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15 06:13:02 고친날 2005-08-15 10:29:29 읽은수 6072 [ 10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20.천망불루(天網不漏).(4)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천안도괴가 태극천리경을 품에 갈무리하자, 실내에는 짙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정의검황을 비롯한 구절창신, 협의검, 칠독절명은 반신반의하고 있던 사실을 확인하고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와 천무는 평상시의 태도를 유지하며 침묵을 지켰지만, 철방의 경우 미간을 한가득 찌푸렸고 금호와 남국은 미미한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검황 오도반이 정광 넘치는 눈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염으로써 정적의 공간을 깨트렸다. "이에 대해 뭔가 해명할 것이 있소?" 정적이 깨짐과 함께 그들로부터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 기세를 느낀 금호와 남국은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태극천리경은 거짓을 보이지 않는다. 이토록 확실한 증거가 있는 이상, 발뺌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웬만한 상대라면 살인멸구를 택할 만도 하지만, 아무리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의 면면의 볼 때 그것도 불가능하다. '썩을.' 철방은 서서히 어둠을 일으켰다. 검황 한 명만 상대로 하더라도 승산은 5할 내지는 그 이하. 그런데 천하제일창에다가 천하제일도까지 있으니, 그 승률은 3할 이하로 뚝 떨어진다. 거기다가 검황과 완벽하게 보조를 맞출 수 있을 협의검과 독에 대해 능숙히 대처할 수 있는 칠독절명까지 더하면, 2할 이하다. 철방이 아무리 승률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해도, 이 정도 상황에서 정면대결은 무모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하는데...씨부랄.' 그것이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과연 대형이 피신할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을지는 장담 못하지만, 지금으로써는 별다른 방도가 없다.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것은 그 어떠한 대의명분으로도 변명할 수 없는 대죄! 정의령(正義令)의 이름으로 생사판괴(生死判怪)와 불사패신(不死覇神) 그대들을 심판하겠소!" 쿠웅!! 협의검 장고안이 하나의 원패를 내려놓음과 함께 장내에 있던 이들은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천하의 모든 정파가 그 권위를 인정한 삼대정령(三大正令) 중 하나인 정의령(正義令)! 이 정의령에는 협의지로를 벗어난 이를 심판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한이 있다. 정의령에 심판되는 자, 천하의 모든 정파에 심판되는 것과 같을지니 아무리 드높은 협명을 휘날리던 이라도 하루아침에 죄인으로 탈바꿈되는 것이다. "이 새끼들이...!!" 감히 대형을 심판하고자 하는 작태에 분노한 철방이 두 눈에서 시커먼 묵광을 번뜩이며 대도를 움켜쥐자, 그들 역시 경시치 못하고 각자의 병장기에 손을 가져다댔다. 잠시 당황하던 금호와 남국 역시 입술을 깨물고 주술을 준비함으로써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황이 벌어지려던 찰나, 한줄기 온유한 음성이 응접실 내부에 울려 퍼졌다. "정의령의 심판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철방의 몸에서 일렁거리던 어둠이 멈칫했고, 금호와 남국은 흔들리는 눈으로 천무를 돌아봤다. 이 상황에서 정의령의 심판을 받겠다고 하다니, 이게 제정신으로 할 말인가? 뭔가 조금 묘한 기색을 띈 그들이 잠시 시선을 교차했다 싶은 순간, 천무의 고개가 살짝 가로 저어졌다. "굳이 전음으로 말씀해주시지 않아도 그 심판이 저를 비껴간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뭐?" 얼굴에 지극히 황당한 표정을 떠올린 철방은 급히 그들의 안색을 살폈다. 반박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천무의 말이 단순한 헛소리는 아닐 터. 게다가 저들의 수련이 결코 낮지 않음에도 눈에 뚜렷할 정도로 확연히 드러나는 당혹감은, 천무의 이러한 반응을 전혀 예상치 못했음을 명백히 알려주었다. 그의 수족이 되어 일을 처리했던 철방은 천무가 책사로서 얼마나 많이 그를 보조했는지 알고 있다. 망자들을 늘려야한다는 조언을 한 것도, 호악산 인근의 마을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준 것도, 간단한 정보공작으로 그 일이 외부로 세어나가지 않도록 만든 것도 모두 천무다. 철방이나 그처럼 직접적으로 나서지는 않고 단지 배후에서 머리를 사용했을 뿐이니 그러한 사실을 모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들과 함께 행동한 일행임이 명백한 천무에게만 심판이 빗겨나가는 것은 뭔가 이상하다. "그러나 이미 은공을 따르며 많은 죄를 지은 제가 어찌 심판을 피하겠습니까?" "허어..." 천무의 온유하면서도 흔들림 없는 음성에 검황은 나지막한 탄성을 흘렸다. 이것은 예정에 없던 일이다. 천지문의 후계자인 천무가 얽혀든다면, 그것은 곧 천지문 자체와도 얽혀들게 되니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이다. "네 이노옴!" 그때, 갑작스러운 노성과 함께 하나의 인영이 천장으로부터 떨어져내려 검황의 옆에 가볍게 착지했다. 허름하되 익숙한 외양의 노인, 바로 무영투괴가 평소와는 달리 노화로 뜨겁게 불타오르는 눈으로 노려보자 천무는 조용히 허리를 숙였다. "형님께는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둘째야!" 번복의 여지가 없는 듯한 천무의 평온한 태도에 무영투괴는 재차 노성을 내지르려 했지만, 때맞춰 흘러나온 한 줄기 무심한 음성에 그 노성은 미처 튀어나오지 못했다. "과연." 흠칫한 무영투괴가 입을 다물고 자신을 돌아보자, 그는 생각을 정리하며 서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형님께서 이번에 오시는 길에 우연히 천안도괴(天眼道怪) 어르신을 모셔왔습니다.- '우연히' 천안도괴를 데려왔다. 호악산 인근의 일을 처리하기 위한 한달 동안의 외유에서, 무영투괴가 천하를 떠도는 천안도괴를 '우연히' 만날 수 있을 확률은? 무림과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천안도괴가 '우연히' 무영투괴를 따라올 확률은? 천안도괴가 호악산 인근을 '우연히' 조사해볼 확률은? -이 제모는 우연이라는 것을 믿지 않소.- 그는 우연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하나의 우연조차 그럴 진데, 그 우연이 둘, 셋, 넷으로 계속 겹쳐든다면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썩을 놈! 노부가 둘째를 위해 언제까지만 참고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만약 네놈이 다시 한 번만 이런 일을 벌이면, 결단코 용서치 않겠다!- '다시 한 번만 이런 일을 벌이면' 용서치 않겠다? 천하제일투인 무영투괴는 결코 어리석지 않다. 천하에서 그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고있는 이들 중 하나이자, 동시에 그를 극도로 경계하는 자이기도 하다. 그 정도나 되는 이가 순간의 흥분을 자제하지 못해 그를 경계하는 발언을 했을까? -대체 어떤 멍청이가 도둑놈 말을 믿누- 그는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설사 친혈육이 있을지라도 그럴 진데, 그 대상이 다른 누구도 아닌 천하제일의 도둑이라면 절대적으로 그렇다. "네 짓이었군." 의미가 모호하기 그지없는 말이었지만, 그 의미를 단번에 파악한 무영투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무거운 음성으로 답했다. "그래. 노부가 바로 도괴로 하여금 호악산 인근을 조사하게 함으로서 확실한 증거를 마련하고, 창신과 당장로를 불러모아 네놈을 상대하게 했다." 금호와 남국의 두 눈이 크게 뜨여질 때, 철방의 얼굴은 마치 흉신악살과 같이 일그러졌다. 어째서 느닷없이 그림자를 밟혔는지, 그리고 어째서 천무만은 심판의 대상에서 벗어났던 것인지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이 염병할 영감탱이가...!!" 당장이라도 쳐죽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섣부른 움직임은 해가 될 뿐인 상황임이 명백했기에 철방은 그저 이를 뿌득뿌득 갈며 무영투괴를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이미 말했던 대로, 노부가 그 일을 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았다면 네놈은 그 자리에서 나를 죽였겠지." 무영투괴의 차가운 냉소에 철방은 불끈 움켜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터진 입이라고 지껄여대는 저 영감탱이를 아주 박살내고 싶어 주먹이 울다 못해 아주 으스러지고 있었다. 그때, 한줄기 온유한 음성이 허공에 퍼져나왔다. "정의령에는 한가지 숨겨진 조건이 있는 걸로 압니다." "그만! 그 이상 말한다면 아무리 둘째 너라도 용서치 않겠다!" 천무의 나지막한 음성에 무영투괴는 노성을 내질렀다. 일말의 정을 버리지 못하고 검황에게 간청해 후계자의 자격을 파함과 함께 평생 천지문의 뇌옥에 감금해두는 것으로 처벌을 대신하고자 했거늘, 천무는 기어코 마지막 선을 넘으려 하고 있었다. "커다란 협명을 떨친 적이 있는 경우, 아무리 큰 죄인이라 하더라도 무저항으로 정의령(正義令)의 심판을 받으면 무림명숙을 청해 변호할 기회를 얻을 수 있지요." 검황을 비롯한 그들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 때, 천무의 말에서 무언가 준비된 수가 있음을 눈치챈 철방과 금호, 남국은 잠시간의 망설임 끝에 병장기에서 손을 땠다. "둘째 네가 진정 그 길을 선택했다면...좋다." 비통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무영투괴는 품에서 하나의 옥패를 조용히 꺼내들었다. 예전 호악산에서 천무가 그에게 주었던 것과 비슷한, 그러나 여러 면에서 그보다 좀 더 화려한 느낌을 주는 옥패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다지 대단한 보물로는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본 검황과 창신, 도괴, 협의검, 칠독절명은 하나같이 놀람을 금치 못하고 무영투괴를 주시했다. 털썩. "천지문의 일대제자 천무, 장문영부(掌門令符)를 배알합니다." 천무가 정중하게 무릎을 꿇으며 한 말을 들은 철방의 왕방울 만한 두 눈알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장문영부라 하면 한 문파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신물이다. 그런데 저 옥패가 천지문의 장문영부라면, 그것을 대체 어째서 무영투괴가 지니고 있단 말인가? "천지문의 제자로서 양민을 해하는데 일조한 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대죄! 이를 인정하느냐?" "인정합니다." 위엄이 넘치는 무영투괴의 말에 천무가 평온한 음성으로 답하자, 검황을 비롯한 이들은 뒤에 일어날 일을 어렴풋하게 깨닫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 천지문의 일. 그들이 간섭할 여지는 없다. "노부 천영(擅影)! 천지문(天知門)의 장문인(掌門人)으로서 일대제자 천무의 죄를 물어 파문한다!" 쿠웅-! 장문영부가 탁자에 내려쳐지며 만들어낸 커다란 소리가 한참 동안이나 응접실 내부를 떠돌다 공허하게 흩어져질 때까지, 그의 묵봉은 마치 그 무심함처럼 일말의 미동조차 없이 똑바로 바닥을 짚고있을 뿐이었다. ======================================= 태극기를휘날리며님의 서평으로 한 편 올립니다. --------------------------------------- 네번째 진실을 보았을 때, 그대들은 숨겨진 해답을 찾고 숨겨진 비밀을 알리라. 그대들은 놀라하고 의아해하고 분노하고 의심할지 언정 그 무엇도 확신치 못하리라. 네번째 진실을 보았습니다. 예언이 얼마나 들어맞았는지 한 번 확인해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으실 듯 싶군요. 협의지도는 언제나 바르고 깨끗해야 합니다. 협의와 타협하는 순간 그것은 협의가 아니고 썩은 정파가 넘쳐나게 되겠죠. 그런 면에서 정파를 대표하는 정의성은 결코 양민을 학살한 마인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피터지는 전투를 예감하셨다면 실망이겠지만, 여러 이유로 현재 승산은 지극히 낮습니다. 겨우 여기서 파타시를 죽이고 싶지는 않군요. -이 제모는 우연이라는 것을 믿지 않소- 이건 용봉무서의 사건 때 삼궁삼절 중 한 명이 했던 말입니다. -대체 어떤 멍청이가 도둑놈 말을 믿누- 이건 살각의 추적을 뿌리칠 때 무영투괴가 했던 말입니다. 철궁곡에서 무영투괴는 생각했습니다. -떨어지던 일곱 개의 별 중 하나는 역시 나였던고?- 즉, 무영투괴는 천기를 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무적사신을 잘 보였다면 천기를 읽는 것이 주술이 아닌 현자의 통찰력으로, 특별히 천지문이 발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실 겁니다.[설정상] 예를 들면 두번째 걸음에서도 천안도괴가-천지문주처럼 천기를 읽지는 못한다고 해도-라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정도는 이런저런 말을 붙이면 그냥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간단한 깔개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무적사신을 처음부터 다시 찬찬히 정독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으시는지? -어설픈 복선가지고 독자들을 우롱하는 사기꾼- 예고: 오만무심한 사신이여!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15 08:13:54 고친날 2005-08-15 08:13:54 읽은수 6147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21.고립무원(孤立無援).(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사신, 고립무원의 처지에 처하니 어둠만이 그 곁을 함께한다.- 정의성(正義城)의 응접실이 일반 무사들이 발을 들여놓기를 꿈에 마지않는 곳이라면, 제갈문의 기관지학에 의해 설계된 지하뇌옥(地下牢獄)은 그 어떠한 고수라고 해도 발을 들이기 꺼리는 곳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위치한 금마뇌옥(禁魔牢獄)은 모산파의 주술까지 곁들어져 있기에, 설사 화경의 고수라 해도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알 수 없군.' 금마뇌옥의 한 옥실에서 짙은 그림자 속에 몸을 묻은 채, 그는 무심히 생각에 잠겼다. 이러한 상황은 예정에 없는 일이다. 아니, 정확히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만들어낸 이유를 찾기 위해 지속적으로 정신을 혹사시킴으로써 피로는 첩첩이 쌓여갔다. 이대로 계속 간다면 아무리 그라도 의식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에 처하겠지만, 피로 때문에 이미 한 차례 저지른 과오를 다시 한 번 반복할 수는 없었다. '판단착오.' 무영투괴에 대한 정보가 너무나 부족했다. 천하제일투가 아무나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가 천하삼대지자(天下三大智者) 중 하나라는 천지문의 문주인 것을 파악하지 못한 것은 큰 실수다. 천지문에서 정작 천지문주를 몇 개월 동안이나 보지 못했을 때, 자유분방한 걸로 알려진 무영투괴가 철저한 정사중도를 걷고 있는 천무와 의형제지간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미리 그 점에 대해 의심해둬야만 했다. 만약 무영투괴에 대해 제대로 파악해두었다면, 그를 경계하고 있는 천하삼대지자를 진작 처리했을 것이다. 아니, 하다 못해 호악산의 뒤처리를 맡기지는 않았으리라. '이상하군.' 깊이 생각해보면 무언가 걸리는 것이 더 있다. 호악산에 굳이 무영투괴가 갈 필요는 없었다. 이미 천무가 기본적으로 처리를 마쳤던 만큼, 그 흔적을 읽어낼 수 있는 이는 천하를 뒤지더라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 중에서도 확실하게 증거를 마련할 수 있는 이는 오직 태극천리경을 지닌 천안도괴뿐이었을 텐데, 너무 완벽한 처리를 염두에 둔 나머지 무영투괴를 보내는 자승자박의 악수를 쓰고 말았다. '완벽한 처리.' 무엇이 완벽인가. 강대하고도 사이하며 요악스러운 귀기와 마력이 휩쓸고 지나간 여파로 대다수의 물질적, 비물질적 흔적이 지워진 대지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아무도 그 증거를 잡을 수 없게 하려면, 차라리 천안도괴(天眼道怪)와 태극천리경(太極千里鏡)을 처리하는 편이 더 확실하다. 그렇게 한다면 호악산의 일뿐만 아니라 앞으로 행할 많은 일들도 좀 더 빠르고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답지 않게 호악산의 일에 연연한 행동. 그 행동에 바로 실마리가 있다. '그랬던가.' 하나의 가는 실마리를 차근차근 되짚어가던 드는 결국 어렴풋한 실체를 잡아냈다. 가장 큰 판단착오, 그게 무엇인지 깨달은 것이다. '때가 됐군.' 최소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아직 때가 되기에는 이르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이 일을 대비하지 못했다. 대비하기는커녕 오히려 상태를 악화시켰다. 계획의 실행을 위해 야영귀, 사령기사, 환영기사, 아나벨라, 헬카즈를 비롯한 대다수의 전력을 이동시켰다. 정상적인 상태라 하더라도 종속된 망자들에게 심령만으로 지시를 전할 수 있는 범위는 한정돼있거늘, 피로가 고도로 축적된 지금의 상태는 절대 불가능하다. 남은 것은 기회를 봐서 흑영귀 등을 전령으로 보내는 방법뿐이지만, 무영투괴와 천안도괴의 철저한 감시는 작은 틈조차 허용치 않았다. 철컹. 두 팔목을 묵고있는 금마금쇄(禁魔金鎖)가 흔들리며 서늘한 한기가 몸을 파고든다. 화경의 고수나 삼괴에 준하는 주술사를 대상으로 만들어져 만년한철로 육신을, 주술로 기운을 금제하는 사슬. '과연.' 정파를 대표한다는 정의성이 자랑하는 금마뇌옥은 단순한 허명만이 아니다. 정상인 상태로도 벗어나기 힘들 진데, 본 실력의 반도 발휘하지 못하는 지금과 같은 처지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다. 끼이익. 육중한 마찰음과 함께 뇌옥의 문이 열리는 것을 느낀 그는 무심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제는 엉망으로 흐트러진 감각이지만, 고요하면서도 은은한 위압감을 풍기는 기색으로 상대가 누구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편히...지내지는 못하셨겠구려." "용건은?" 착잡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있던 검황(劍皇)은 그의 무심한 음성에 일말의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부동심을 유지하는 것도, 며칠 전과 조금도 변함이 없는 음성도 검황으로서는 무척이나 의외였다. '진정 알 수 없는 이로다.' 고개를 가로저음으로서 당혹감을 떨친 검황은 깊은 수양으로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무영투괴는 그대를 반드시 처벌하겠다는 의지를 굳건히 하고 있소. 이대로는 그대뿐만 아니라 그대의 일행 모두 엄중한 처벌을 피하기 힘들 것이오." 핵심을 은근히 피하는 말. 그러나 검황의 목적을 유추하기에는 충분한 말이다. 아무리 이름 높은 정파의 명숙이라도, 무림에서 잔뼈가 굵은 노강호라도 결국 한 줄기 탐욕을 저버리지는 못했던 것인가? "제자에 대한 것인가." "...그렇소." 마치 머리 위에 천근만석을 얹어져있기라도 한 듯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정의검황 오도반은 미리 준비해온 설득을 펼쳤다. "그대와 불사패왕은 죄가 너무 뚜렷하고 천공자는 파문까지 당해 번복의 여지가 없소. 하지만, 금소협과 남소협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오." 대협이라는 칭호도, 불사패신이라는 별호도 사라졌다. 그들을 협객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뚜렷하게 드러내는 말. 그에게 명성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정파를 대표하는 정의성으로부터 배척받았다는 것은 이제 정파의 조력은 얻기 힘들다는 뜻이 된다. "천안도괴에게도 확인해본 바, 금소협과 남소협은 아직 배척받을 만한 악행을 한 적이 없소. 살각을 상대하는데 일조 하였으니, 오히려 협행을 해왔다고 할 수 있소." 틀린 말은 아니다. 5년 동안 금호와 남국이 해온 태반은 수련뿐이다. 그나마도 대다수의 기간은 무영투괴로부터 도움을 받았으니 거기에 문제됨이 있을 리가 없다. "본론." 그의 무심한 재촉을 받은 검황은 잠시간의 망설임 끝에 결국 한숨을 토해내듯 본론을 말했다. "이 늙은이가 두 소협의 무고함을 증명해주겠소." 그는 별다른 동요를 일으키지 않았다. 이미 예상했던 말. 그리고 이 이야기에 따를 조건 또한 알고 있다. "검황의 제자로서 말이군." 마치 잘 벼려진 칼날과 같이 정곡을 정확히 찍어낸 그의 말에 검황은 살짝 얼굴을 굳혔지만,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꼭 이 늙은이의 제자가 아니어도 상관없소. 앞으로 무림의 큰 기둥이 될 재목이 곧고도 무사히 성장할 수만 있다면, 교림(敎林)이나 다른 정파에 들어간다고 해도 좋소."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평생 협의를 위해 살아온 대협객답게, 검황은 단지 정의성 하나만이 아니라 모든 정파, 나아가서는 무림과 천하를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니 별다른 죄가 없는 기재가 채 제대로 자라나지도 못하고 꺾이는 것을 도저히 가만히 두고보지 못하는 것이리라. "내게 원하는 것은?" "두 소협을 설득, 또는...파문해주시오." 파문. 그것이 필요한 이유는 검황의 침통한 표정과 음성만으로도 추정이 가능했다. 금호와 남국이 검황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악에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계약이 유지되고 있는 한 금호와 남국은 그를 떠날 수 없다. 만약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한다면, 그들은 스스로의 영혼을 배반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만 한다. 그에게 받은 주술, 귀기, 마력을 모두 잃어버림은 물론이고 예전 거지생활을 하던 때보다 더욱 비참한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죽은 뒤에도 지옥을 끝없이 헤매며 언제까지나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에 신음하게 되리라. 그러한 자세한 사정까지는 모르더라도, 결국 그들을 붙잡아두고 있는 것이 바로 그라는 것을 직감한 검황은 결국 그들을 풀어주도록 청하기 위해 그를 찾아온 것이다. 검황을 향해 고개를 고정시키고 있던 그는 문뜩 물었다. "내가 얻는 것은?" "두 소협으로 하여금 그대의 진전을 그대로 이어나갈 수 있게 해드리겠소. 또한, 두 소협이 반드시 천하의 정점을 헤아릴 수 있는 위치에 오를 수 있도록 모든 협조를 아끼지 않겠소." 무인이든 술사든 한 방면에서 경지를 이룬 이는 자신이 한평생 가꿔온 공부를 그들의 인생 자체나 다름없이 여기고, 자신의 공부를 그대로 전수 받은 제자를 자신의 분신처럼 아낀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조건은 앞날이 어찌될지 모르는 이를 상대로는 최적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나, 그것이 검황 자신만의 착각이라는 것이 밝혀지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필요 없다." 검황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다물었다. 필요 없다니, 이 무슨 말이란 말인가? 설마 자신이 조건을 제대로 지키지 못할까 싶어 그런 것인가? 머릿속이 한가득 혼란스러워져있던 검황을 향해 그는 무심히 말을 이었다. "내게 이득이 되는 조건을 제시해라." 이득이 되는 조건? 그렇다면, 자신의 진전과 제자들의 안전, 나아가서는 그 성공이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뜻인가? 설마, 그럴 리가 없다. 인간인 이상, 생전의 무언가를 후세에 남기는 것은 절대로 버릴 수 없는 본능과 같거늘...! "그대의 진전이, 그리고 두 소협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다는 말씀이시오?" 설마에 설마를 거듭하면서도 결국 그 설마를 버리지 못하고 끝끝내 던지고야만 물음에, 그는 마치 물기가 메마른 사막과 같이 어떠한 감정의 편린도 담겨있지 않은 나지막한 음성으로 답했다. "그딴 것, 내 알 바 아니지." ======================================= 루신淚神님의 추천으로 한 편 올립니다. --------------------------------------- 정말이지...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이나 나올까 의심됩니다. 예고: 하늘의 그물이 펼쳐지나니....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15 08:14:29 고친날 2005-08-15 08:14:29 읽은수 7100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21.고립무원(孤立無援).(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어땠소?" "...허어, 참으로 할 말이 없소이다." 아직까지도 충격의 여파를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검황에게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인 무영투괴는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그 썩을 놈은 원래 천하의 모든 것을 자신의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는 놈이니, 자신의 진전이나 두 제자라고 해서 특별한 가치를 두지는 않는 게 당연하오." "인간이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이오?" "검황께서는 그 놈이 인간으로 보이더이까?" 검황은 잠시 입을 열지 못했다. 냉혹무정함을 넘어 아예 마음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듯만 싶은 생사판괴. 인간임은 분명함에도 인간성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그의 모습은 무영투괴의 말에 묘한 무게를 실어줬다. "무형살검(無形殺劍)이 어찌하여 천하사대마공(天下四大魔功) 중 하나로 꼽히겠소? 오욕칠정과 함께 인성을 말살하고 단지 살인기계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오. 그런데 놈은 무형살검을 대성했던 무정살왕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부족함이 없는 마인(魔人)이니, 언젠가는 천하에 반드시 큰 피바람을 일으킬 것이외다." "그가 벌인 일이 용서받지 못할 죄임은 분명하오. 그러나 앞으로도 꼭 그렇게 되리라고 볼 수는 없지 않겠소?" "한 번 놓친 기회를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법이오. 천하사대마공을 생각해 보시구려." 무명투괴의 날카로운 지적에 검황은 착잡함을 지우지 못했다. 오욕칠정을 말살하는 무형살검(無形殺劍). 광기를 일으키는 천뇌마공(千腦魔功). 주화입마를 촉진하는 흡성대법(吸星大法). 흡혈이 필수적인 사사혈독공(死邪血毒功). 조화를 깸으로써 역천(逆天)의 힘을 추구하는 천하사대마공(天下四大魔功)은 결국 자기 자신과 함께 주변의 이들까지 함께 파멸로 이끈다. 때문에 정파에서는 이 천하사대마공을 철저히 금기시하여 멸절 시키려고 했지만, 천하사대마공의 사이함이 알려졌을 때는 이미 손댈 수 없는 지경에 달해있었기에 분루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놈의 사령술(死靈術)은 배교의 사술보다 더욱 사이하면 사이하지 결코 부족함이 없소. 특히, 흑마술(黑魔術)의 경우 그 사악함이 하늘을 찌를 정도니, 반드시 끝을 내야만 하오." 검황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힘을 가진 이로서 양민을 학살한 것만 하더라도 결코 용서치 못할 대죄. 더구나 일말의 반성이나 후회조차 없는 듯한 그 모습은 아무리 봐도 개과천선을 바라기 힘들다. 그렇지 않아도 살각과 철궁곡의 충돌로 인해 사파와의 분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 있어, 사악한 마두보다 더욱 잔혹한 심성과 강대한 힘을 지닌 생사판괴를 처벌하지 않고 두는 것은 자칫 큰 후환이 될 수 있다. 무영투괴의 말대로 반드시 정의성 내에서 끝을 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소협은 어찌되는 것이오?" "두 아이는 일단 주술에 대한 금제만 걸어두는 것으로 조치를 취할 생각이지만, 과연 생각대로 잘 될지는 장담할 수 없소이다." 심령금제는 아니더라도 오히려 그보다 더욱 질기고 굳건한 영적 속박을 받고 있는 이상, 그가 처벌을 받을 경우 두 아이 또한 무사하지는 못하리라. 무엇보다, 계약 이전에 두 아이의 의지가 문제다. 그의 무정함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힘을 주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너무나도 굳건하여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의지로써 자신들 스스로 영적인 속박을 더욱 강하게 하는 것이다. '천하에서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은 자기자신이지만, 동시에 가장 속이기 쉬운 것 또한 자기 자신인 법이거늘...' 두 아이는 자신들이 이미 뼛속까지 힘을 추구하는 길에 물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계약을 파기한다면 자신들의 길 또한 무너지고 아무 것도 남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아직 어린 만큼 순간이라도 그러한 자기자신을 속이고 검황을 따를 법도 하련만, 사령술과 흑마술을 습득하며 죽음의 공포를 견디고 사악한 유혹을 떨치는 법을 자연스럽게 습득한 두 아이는 공포에 겁먹고 유혹에 이끌려 스스로를 속이는 대신 오히려 자신들의 의지를 더욱 굳히는 길을 선택했다. "도괴가 힘써보고 있긴 하지만, 그 아이들의 의지가 그런 이상 아무래도 힘들 것 같소이다." "허어, 사부만 제대로 만났다면 진정 무림의 재목이 될 아이들이었는데..." 검황의 탄성에 무영투괴는 씁쓸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 썩을 놈은 인간을 도구처럼 여기지만, 그 때문에 인간을 이용하는 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한을 승화시킴으로써 잠재력을 극대화시키고 사악한 마력의 힘으로써 근골을 아예 뒤바꿔버렸다. 비록 방법과 과정이 사이하다고는 하지만, 그 결과만큼은 범인은 물론이고 설사 화경의 고수가 막대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해내기 힘들다. 만약 놈의 손이 닿지 않았다면, 그래도 과연 금호와 남국이 검황이 이토록 탐낼만한 인재가 될 수 있었을까? 구룡팔봉와 대등하게 겨룰만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었을까? 천하에 명성 높은 구룡팔봉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을까? 재능이 평범한 정도를 넘어, 아예 절름발이와 벙어리에 불과했던 그들이 지금의 재능을, 지금의 힘을, 지금의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와의 계약덕분이다. 그 계약이 파기되면 어떻게 될까? 영적인 속박으로 인해 지금의 재능이, 힘이, 명성이 모조리 사라진 뒤에도 그들이 검황의 주목을 받을 수 있을까? 검황은 대협이기는 해도 성인은 아니다. 설사 약조대로 두 아이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모든 것을 잃은 두 아이를 지금과 같이 천하의 기재처럼 아끼기는 힘들리라. 그렇기에 놈은 처음부터 자신이 쓸 도구를 처음부터 철저하게 직접 가다듬어 천하에 둘도 없는 기보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자신이 아니면 그 누구도 사용할 수 없는, 그리고 절대 자신의 손을 떠날 수 없는 도구이자 노예로! 그때, 협의검 장고안이 문을 열고 들어와 공손히 예를 갖췄다. "연락을 보낸 문파들로부터 답변이 왔습니다." "결과는 어떻소?" 기다리던 연락에 무영투괴가 침착하게 결과를 묻자, 장고안은 손에 들고 있던 명단을 훑으며 차례대로 답했다. "창천맹(蒼天盟), 제갈문(諸葛門), 은자림(隱者林), 용왕궁(龍王宮), 풍운회(風雲會)에서 공증인을 수락했습니다." "흐음..." 무영투괴는 곰방대를 입에 문 채 생각에 잠겼다. 그 자신의 천지문(天知門). 협의검의 정의성(正義城). 천안도괴의 모산파(茅山派). 구절창신의 구룡회(九龍會)을 합치면 천하삼십육세 중 무려 사분지일의 문파가 공증인의 요청을 수락한 셈이다. 분명 적은 숫자는 아니지만, 이것이 모두가 아니다. "다른 쪽은 어떻게 됐소?" "교림(敎林), 수정궁(水晶宮), 황금성(黃金城), 낭인맹(浪人盟), 만음곡(萬音谷), 금강전(金剛殿), 천이각(天耳閣), 만물각(萬物閣), 사천당문(四川唐門)에서도 공증인을 수락했습니다." 전자의 문파는 무영투괴가, 후자의 문파는 천무가 무림명숙을 초청한 곳으로 둘을 합치면 천하삼십육세 중 무려 절반에 해당하는 열 여덟 곳에서 그 청을 들어준 셈이다. '과연.' 검황은 내심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무영투괴와 달리 천무가 청한 인맥 중 교림, 수정궁, 황금성은 용봉무서로, 낭인맹, 만음곡, 금강전, 사천당문은 철궁곡에서 구룡팔봉으로 생사판괴와 얽혀들었다고 해도, 정의성에서 인정치 않은 관계로 부르지 못한 사파쪽까지 합치면 아마 천하에 천지문(天知門)의 인맥이 닿지 않은 문파가 없을 것이다. 이 인맥이야말로 그 어떠한 문파도 천지문을 넘보지 못하도록 만든 막대한 저력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천지문의 막대한 인맥이 드러난 와중에도 무영투괴가 쯧쯧 혀를 차자, 칠독절명 당장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워낙 은원을 확실하게 하는 사천당문이다보니, 결국 살각을 멸함으로써 당자소를 구해준 은혜를 저버리지 못한 것이리라. 따지고 보면 사천당문만을 탓할 일이 아니다. 괘씸한 걸로 치자면 그보다 더한 녀석이 둘이나 있으니까. '고얀 놈...셋째 네놈까지 둘째를 편드는 게냐?' 무영투괴는 마치 속이 썩어 들어가는 듯 싶은 심정을 느끼며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어렵다. 어려워도 너무나 어렵다. 그가 아무리 천하제일투이자 천지문주라고는 하지만, 둘째와 셋째를 함께 상대하기에는 곤란함이 크다. 지금의 상황만 해도 너무나 좋지 않았다. 비록 공평을 위한 공증인이라지만, 천무가 부른 문파들은 사천당문과 마찬가지로 그 은원관계 때문에라도 생사판괴에게 한 손을 들어줄 것이다. 정파와 정사중도의 문파에 있어서, 은혜나 빚을 갚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신들의 길을 벗어남을 뜻하니 그것을 비판할 수는 없다. 그래도 정파라면 어디까지나 한 손을 들어주기만 할 뿐, 가능한 공평성을 지키려 할 것이다. 문제는 협의보다는 개인적인 은원에 더욱 무게를 두는 정사중도의 문파다. 특히 수정궁과 금황성의 경우, 협의 따위는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을 가능성이 지극히 높으니 그들이 오기 전에 뭔가 조치를 취해둬야만 한다. '대비라면 이미 생각해뒀다.' 계략을 짜는데 있어서는 천뇌문을 당할 자 없다지만, 천지문의 무게 또한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다. 이 정도 변수는 이미 예측해두었던 무영투괴는 차분히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노부의 계획은 이렇소이다." 검황에서부터 천안도괴, 구절창신에 이르기까지 그 배분이나 명성이 결코 무영투괴에 뒤지지 않았지만, 애초부터 대부분의 준비를 자신이 한데다가 수제자이자 의제인 천무를 파문함으로써 그 의지를 확연히 드러낸 그가 일을 주도하는 것에 특별히 불만을 가진 이는 없었기에, 그 계획은 선선히 받아들여졌다. ======================================= 초극의지님의 추천으로 한 편 올립니다. 정리가 부족한 관계로 이 시간부로 연참 이벤트를 종결합니다. 일단 지금까지 쌓인 이벤트는 며칠동안 나눠서 연참합니다. 정리가 되는대로 계속 이벤트에 따라 연참할 수도 있지만, 장담은 못하는 부도수표입니다. 그리고 팬아트, 팬픽, 감상의 출판 이벤트는 계속 이어집니다. --------------------------------------- 자신이 직접 가다듬은 도구이나 노예...라는 점에서 재차 사신의 무심함이 확인됩니다. 예고: 검은 맹약의 서, 마침내 펼쳐지노라.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16 06:24:54 고친날 2005-08-16 06:24:54 읽은수 6747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21.고립무원(孤立無援).(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검황이 나간 뒤, 그의 상태는 급격히 악화됐다. 피로를 억지로 버텨낸 부작용이 배로 닥쳐든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휴식을 취하며 몸을 회복해야 하지만, 이곳은 휴식을 취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뇌옥인데다가 금마금쇄에 의해 금제 돼있기에 좀처럼 상태가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좋지 않군.' 더 이상 정신을 혹사시키는 것을 멈추고 수면을 취하려든 그는 문뜩 고개를 살짝 들어올렸다. 근거는 없지만, 지금 수면을 취하면 얼마 전에 꾼 꿈을 이어서 꾸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그를 멈추게 만들었다. '수면을 미루는 게 좋겠군.' 수면의 목적이 피로 회복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만약 그 뒤의 꿈을 이어 꾼다면 정신적 피로를 회복하는데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얼마 전 악마를 소환함으로 인해 지옥의 냄새가 아직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데다가 정신력이 한계에 달한 지금이라면, 아주 미약하게나마 몽마(夢魔)가 찾아들 가능성도 있다. '다른 휴식을 취한다.' 묵봉을 압수 당할 때도 흑의장포는 최소한의 예의로 부적을 붙여 망령을 봉해두는 것만으로 끝난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사신의 낫이 지닌 것이 파괴의 힘이라면, 어둠의 옷이 지닌 것은 보호의 힘. 흑의장포의 어둠에 몸을 맡기며 그 안에 담긴 안식(安息)을 이끌어내자, 어둠이 편안하게 그를 감싼다. 감각을 민감하게 해주던 힘이 오히려 역으로 작용해 감각을 둔하게 하기에 웬만한 상황에는 사용하지 않지만, 더 이상 상태가 악화되는 것은 웬만한 상황이라고 하기 힘들다. 영혼이, 정신이, 기운이, 육체가 모두 어둠 속에 스며든다. 의식이 어둠과의 일체화되며 어둠이 된 자신과 자신이 된 어둠을 관조한다. 마치 그를 가득 뒤덮고 있던 피로와 같이 탁하고 흐릿한 어둠. 그러나 그 중심에 있는 가장 순수한 어둠만은 침범 당하지 않고 남아있다. 빛조차 집어삼키는 진정한 근원 된 어둠은 탁하고 흐릿한 어둠을 서서히 빨아들이며 스스로를 확장해간다. 탁함을 멸하고 순수한 어둠만을 남긴다. 영혼조차 짓누르는 피로에도, 금마뇌옥의 금마금쇄에도 속박되지 않고 느리게나마 계속해서 스스로를 불려나가고 있는 어둠이 확연히 느껴진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어둠. 모든 것의 끝에 존재하여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모든 것으로 자신을 이루며 모든 것을 안식으로 이끄는 어둠. 관조가 점차 깊어짐에 따라 어둠 또한 깊어진다. 그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것은 더욱 짙고도 짙으며 가장 순수한 어둠의 파편. 죽음의 비밀과 마의 금기가 시작된 사마(死魔)의 근원이 숨겨진 보고(寶庫). 어둠 자체로 이루어져있는 동시에 어둠 자체를 이루는 검은 맹약의 서(黑盟約之書)가 자신을 관조하고 있는 그에게 자기 자신을 펼쳐 보인다. 정신(情神)의 표면이 아닌 핵심에 직접 각인 되기에,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전해져 절대로 잊혀지지 않으며 마치 종이가 물을 빨아들이듯 빠르게 흡수된다. 그 지식을 얼마나 빠르게 흡수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기운(氣運)과 육체(肉體)의 혹독한 수련과 노력뿐. 얼마나 깊은 지식을 관조할 수 있는지, 얼마나 많은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판단하는 잣대는 영혼(靈魂). 피로에 무겁게 눌려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보다 조금이나마 깊어진 영혼은 검은 맹약의 서에서 새로운 지식을 찾아낸다. 끝없이 무한한 듯만 싶은 서의 지식 중에는 쓰레기 같이 형편없는 것도 무수하다. 그 속에서 보물을 찾아내는 것도, 쓰레기를 모아 보물을 만들어내는 것도 모두 그 자신 역량에 달려있다. 동에 와서는 계약을 통해 영력(靈力)을 모으는 것을 소홀하게 했기 때문인지, 서에서 찾아낸 지식들은 모두 별다른 가치가 없는 얕은 것뿐이다. 검은 맹약의 서가 조용히 다물어지며 다음을 기약하자, 무심히 관조를 돌린다. 어차피 휴식을 겸한 어둠의 관조니 실망할 이유도, 감정도 없다. 단지 더 편안한 휴식을 위해, 더 빠른 회복을 위해 더욱 더 깊은 어둠을 향해 관조를 향한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에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 어둠. 그렇기에 그 무엇으로도 속박할 수 없는 어둠을 받아들이고 어둠에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통해 관조는 더더욱 깊은 어둠 속으로 잠겨든다. 그가 어둠인 것인지, 어둠이 그인 것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는 일체감 속에서도 무심히 관조를 이어나가던 그는 탁해진 어둠과 함께 있기에 더욱 순수한 어둠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깊고도 확연하게 어둠을 느끼고 이해했다. 사마의 술을 펼치는데 있어서 도저히 그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깨달음은 막대한 희열과 함께 찾아왔다. 그 희열에 휩쓸리면 그만큼의 깨달음을 놓치지만, 그것은 아무리 고위의 영적존재라 하더라도 완전히 견뎌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무심함 앞에서는 극한의 영적 희열조차 통하지 않았다. 아무리 희열이 유혹하고 자극해도 조금도 휩쓸리지 않고 깨달음만을 차례대로 받아들이는 그의 모습은, 설사 신이나 악마라 할지라도 묵직한 신음을 막지 못할 무언가를 지니고 있었다. 깨달음을 받아들이는 속도만큼이나 그의 관조 또한 빠르게 어둠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표피부터 차례대로 훑고 지나가는 대신 마치 쏘아진 화살 같이 겹겹의 표피를 꿰뚫는 그 방법은 지극히 그릇된 사도(邪道)였지만, 그만큼 빠르게 어둠의 핵심에 다가갈 수 있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그의 관조는 결국 모든 어둠의 근원이자 모든 죽음과 마(魔)를 만들어낸 진정한 어둠의 핵심 앞에 멈춰졌다. 이것이 한계라는 것을 너무나도 확실하게 느꼈기에, 더 이상 무리한 돌입 대신 그 핵심의 표피를 훑어갔다. 모든 과정을 무시한 채 사도를 통해 들어왔던 만큼, 그가 그 표피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은 거의 전무에 가까웠다. 대신 그는 가장 근원 된 어둠, 그것이 지닌 느낌 자체를 받아들였다. 당장은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훗날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실마리를 준비했다. 한 순간, 어둠에 미세한 틈을 발견한 그는 그것을 통해 그 내부로 관조를 파고 들어갔다. 있을 리가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틈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눈을 뻔히 뜨고 기회를 놓치는 우를 저지를 수는 없었다. 그는 막대한 어둠의 근원을 받아들이며 막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인간으로서 얻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깨달음이었지만, 그는 막을 수 없는 해일 아래 부서지는 대신 그 해일을 타고 치솟음으로써 더욱 고위의 영적 존재로 거듭나는 것을 택했다. 어둠. 어둠. 어둠. 그 무한한 어둠을 받아들이던 그는 결국 그 어둠의 끝에 도달했다. 그곳에 숨겨져 있던 최후의 비밀을 발견했다. 파강! 마침내 최후의 비밀을 풀어헤치려던 순간, 무언가 깨져나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그의 관조는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는 바람같이 너무나도 갑자기 흩어져버렸다. 어둠과의 일체화된 관조에서 벗어난 그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다름 아니라 이마에 닿아있는 하나의 서늘함이었다. "몸이 안 좋으신 듯 싶군요." 낯익은 온유한 음성을 들으며 어둠의 안식을 접고 감각을 일으키자, 그의 앞에 서있는 한 청년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본래의 정갈함을 조금 잃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단정함이 느껴지는 의복과 그에 어울리지 않게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눈가를 가리고 있는 백면서생. 바로 천무가 그의 이마에 닿아있는 손의 주인이었다. 그는 잠시동안 천무에게 고정돼있던 고개를 살짝 숙이며 관조를 통해 얻어난 깨달음을, 그리고 마지막에 보았던 비밀을 되새겨보았다. '틀렸군.'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관조가 깨지는 순간, 관조로써 얻은 것 또한 다시 어둠 속에 묻혀졌다. 지금 당장 다시 관조에 들어간다고 해도 그 깨달음을 얻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리라. '실수인가.' 깨달음을 잃었지만, 서를 통해 정신에 각인된 지식만큼은 남아있다. 만약 그 깨달음으로 어둠을 파고드는 대신 서를 독파하는 것을 선택했다면, 관조가 깨졌어도 더욱 많은 보물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데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당시에 있어서는 서의 지식보다 어둠의 진리를 파헤치는 쪽이 더 합리적이었으니, 지금으로써는 현실에 집중해야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뇌옥에 감금된 옥인인 천무가 지금 이곳에 있다는 것은, 그냥 가벼이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선 몸부터 살피십시오. 감금 전에도 그리 좋아 보이시진 않으셨지만, 예상보다 상태가 나쁜 듯 싶습니다." 천무가 이마에서 손을 때며 한 말에 무심히 고개를 끄덕인 그는 감각을 자기자신의 체내로 돌렸다. 피로로 인해 약해진 저항력. 탁한 기운으로 차있는 뇌옥. 너무나 깊은 관조에 들어가 깨달음에 집중한 나머지 정작 휴식을 취하지 못한 상태. 여러 가지 악조건이 겹쳐져 결국 육체의 약화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어둠의 옷이 지닌 보호력 때문에 외부의 질병이 침범하지는 못했지만, 병이란 단지 육체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만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회복과 운신에 큰 지장이 생기는 것은 분명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조금 심한 감기에 걸린 정도의 약화에 불과하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용건은?" 상태의 점검을 끝낸 그가 무심히 묻자, 천무는 이미 그러한 반응을 예상한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품에서 하나의 열쇠를 꺼내들었다. "제 용건은, 바로 탈옥입니다." ======================================= 조아라 조회수 3800돌파로 한 편 올립니다. "그만! 그 이상 말한다면 아무리 둘째 너라도 용서치 않겠다!" 천무의 나지막한 음성에 무영투괴는 노성을 내질렀다. 일말의 정을 버리지 못하고 검황에게 간청해 후계자의 자격을 파함과 함께 평생 천지문의 뇌옥에 감금해두는 것으로 처벌을 대신하고자 했거늘, 천무는 기어코 마지막 선을 넘으려 하고 있었다. 완전 사면으로 오해하시는 분이 있을 듯 싶어 천망불루 마지막 수정했습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사형대신 무기징역이랄지. --------------------------------------- 강대한 힘을 얻기 직전 방해를 받는 것은 바로 악당의 숙명. 용사물 보자면 꼭 뭔가 제물을 바치기 직전에 마왕에게 쳐들어가는 것도 바로 이러한 숙명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실상 인과율에 의한 것으로 부정하게 힘을 쌓은 대가라고도 할 수 있을 듯. 마공으로 예를 들자면 깨달음 도중 심마가 찾아들기 쉽다는 식이랄지... 물론 헛소리입니다.[먼산] 예고: 또다른 십대고수의 등장. ...근데 이건 또 웬 푼수?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16 17:14:29 고친날 2005-08-16 17:16:37 읽은수 7104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22.사신개안(死神開眼).(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사신이 두 눈을 뜨니, 파멸의 힘 봉인에서 깨어나 천지를 뒤덮는다.- 철컥. 천무가 구멍에 딱 맞아든 열쇠를 돌리자, 팔목을 묶고있던 금마금쇄가 풀리며 촤르륵 떨어져 내렸다. 모조품 따위로는 정교한 기술에 주술적 처리까지 마친 금마금쇄를 풀어낼 수 없다. 그렇다면 천무의 손에 들려진 열쇠가 바로 금마건(禁魔鍵)일 터. "가능성은?" "6할입니다." 예상보다 높은 확률에 그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투괴가 노리고 있는 이상, 가벼우나 무거우나 처벌을 피하기 힘들다. 그럴 바에야 좀 더 확률이 높은 탈옥을 선택하는 편이 낫다. 무엇보다, 이번 기회를 통해 확실히 알아둬야만 한다. "부축이 필요하진 않으십니까?" "필요 없다." 염려의 말을 칼로 딱 자르듯 싶은 그의 음성은 너무나도 무심했지만, 천무는 언제나 그렇듯 평온한 태도를 유지하며 옆에 놓아두었던 것을 앞으로 내밀었다. 감각을 통해 이미 그것을 감지하고 있던 그는 매우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로 사신의 낫을 받아든 뒤 뇌옥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사부님!" "대형! 괜찮으십니까?" 뇌옥을 나선 그는 자신을 맞이하는 철방과 금호, 남국을 무심히 살폈다. 외공을 익힌 만큼 운기 없이도 괴력을 발휘할 수 있는 철방은 상당한 금제를 당했던 듯한 기색이 완연한 반면, 금호와 남국은 검황이 나름대로 신경을 써준 듯 적어도 몸만큼은 그리 불편하지 않게 지낸 듯 싶었다. '전력에는 문제없군.' 몸 상태만이 아니다. 철방의 등에 매여져있는 대도나, 금호의 품에 들어있는 초혼령. 남국의 허리에 차여진 도에 이르기까지 장비 또한 모두 갖춰져 있다. 사신의 낫과 함께 찾아둔 것들일 터. 이 정도로 철저한 준비가 되어있다면 분명 탈옥의 가능성은 높다. 그러나 아무리 천무라고 해도 이 모든 일을 혼자 하지는 못했을 터. 반드시 조력자가 있을 것이다. 약화된 상태로 인해 흐릿해진 감각을 확장해 주변을 둘러보던 그가 문뜩 한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통로 저편에서 세 명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 인영은 모두 여인이었는데, 그 중 가장 앞쪽의 여인은 일견 수수해 보이면서도 군데군데가 보석으로 치장돼 은은한 화려함을 풍기는 백색궁장 밑으로 풍만하고도 농염한 몸매를 드러내고 있었다. 또한 마치 수정을 담아놓은 듯한 매혹적인 눈동자와 대리석과 같이 깨끗하다는 느낌을 주는 오관, 얼음과 같이 투명한 피부와 붉은 꽃잎과 같은 입술, 무엇보다 활짝 개화한 꽃과 같이 화사하여 짙은 염기가 흐르는 미모는 백설과 같은 백발의 맑고 순수한 느낌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팔봉조차 능가하는 절색을 한가득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외모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역량을 전혀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 상태가 악화됨에 따라 감각 또한 더욱 둔해졌다고 하지만, 이토록 완벽하게 그의 감각을 피해낼 수 있다면 지금으로써는 항거불능에 가까운 초고수임이 분명하다. 그가 그녀에게 고개를 고정시킨 채 침묵을 지킴과 함께 주변의 분위기가 왠지 무게를 더해가자, 그녀 뒤에 있던 두 여인은 그것을 감지하고 살짝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호호호, 오랜만에 뵙는군요, 파대인." "진작 인사를 드려야 했는데 이제야 찾아 뵙게 됐습니다." 화사하다 못해 요사스러움마저 느껴지는 미소의 홍색궁장의 미녀와 얼음과 같이 서늘하고도 화려한 미소의 청색궁장의 미녀가 정중하게 예를 갖춰 인사하자, 둘을 향해 고개를 돌렸던 그는 잠시 후 무심히 입을 열었다. "청홍미화(靑紅美花)로군." "대인께서 기억해주시니 소녀 자일화(慈佚花), 정말 영광이에요." "소녀 자일미(慈佚美) 또한 영광입니다." 홍색궁장의 미녀 자일화와 청색궁장의 미녀 자일미. 두 미녀는 다름아니라 용봉무서의 일로 약간의 연이 있던 청홍미화였다. 그렇다면, 청홍미화의 앞에 서있는 백색궁장의 미녀가 누구인지 짐작하는 것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너는 백발여제(白髮女帝)겠군." 백발여제(白髮女帝)! 쌍존삼황오제 중 오제의 일인이자 수정궁의 태상궁주로 이미 은퇴한지 오래인 초고수가 바로 그녀였다. 아무리 주안술에 있어 천하제일로 꼽히는 수정궁의 전대 궁주이자 반로환동을 이룬 화경의 고수라고는 하지만, 세수 100이 넘은 지금까지 이런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쌍존과도 버금가는 심후한 공력 덕분일 것이다. "파대인. 저희 사조님을 알아봐 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아무리 파대인이시라도 평대는 조금 곤란하군요." 천하의 백발여제를 '너'라고 칭하는 그의 발언에 청홍미화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무공이나 배분, 모두 치더라도 천하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백발여제다. 아무리 그가 삼괴 중 하나인 생사판괴라고 하더라도 그녀에 비하면 한 수 부족함이 있거늘, 대놓고 평대를 한다는 것은 곤란함이 있었다. 그러나 백발여제는 특별히 화내는 듯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얼굴에 흥미로운 듯한 기색을 띄웠다. "후훗, 생사판괴의 오만함과 괴팍함이 천하일절이라 하더니, 과연 그 소문답네. 그럼 다른 소문도 확인해볼까?" 시원한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가 절로 연상될 정도로 맑은 음성으로 그의 말을 가볍게 받아넘긴 그녀가 다짜고짜 허공에 손을 흔들자, 그녀의 손으로 하나의 붉은 복면과 긴 붕대가 빨려 들어왔다. 철방이 단지 기척만 어렴풋하게 감지하고 그조차 흐릿하게만 느꼈을 정도로 정교한 능공섭물의 한 수. 만약 저 공력에 살심이 담겨져 있었다면 금호와 남국은 치명적인 부상을 면치 못했을 터이니, 과연 삼황오제의 명성다운 실력이었다. "어?" "어머나?" "아앗!" 감쪽같이 복면과 붕대를 빼앗겨버린 금호와 남국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할 때, 그 둘의 환상적인 미모를 본 세 여인은 각자 탄성을 내질렀다. 천하제일의 주안술을 지닌 만큼 미녀가 넘쳐나는 수정궁이지만, 금호와 남국이 지닌 초월적인 미(美)는 그러한 수정궁의 여인들로써도 전혀 보지 못한 것이었다. 오래 전부터 천하제일미녀로 꼽히던 백발여제의 미모는 그나마 두 청년과 조금 비견될 만했지만, 청홍미화는 아예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어떻게 이런 미모가 있을 수가...' '대체 무슨 주안술을 익힌 거지?' 수정궁의 고수답게 그 미모가 주안술과 같이 반인공적인 무언가로 가다듬어진 결과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챈 청홍미화는 당장이라도 그것을 묻고싶어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사조인 백발여제 앞인지라 차마 추태를 부리지는 못하고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그때, 갑자기 백발여제가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두 청년의 손을 덥석 움켜쥐었다. "너희들, 내 동생하지 않으련?" "예...예에에??" 백발여제의 돌발행동에 당혹해했던 금호와 남국은 마른하늘에 날벼락 치는 듯한 소리에 뜨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그제 서야 그녀에 대해 중요한 사실 한가지를 기억해낸 청홍미화는 묘한 시선을 서로 교환했다. '그러고 보니 사조님은 원래 저러셨지?' '맞아. 괜히 천하제일미가 아니었어.' 수정궁 역대 제일의 고수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주안술을 천하제일의 반석 위에 올려놓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걸로 더 유명한 백발여제. 그녀가 가장 열광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바로 미(美)! 아름다운 것이야말로 진리라는 사상이 바로 지금의 백발여제를 만든 것이다. 오죽했으면 단지 더 아름다워지기 위해, 더 오랫동안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화경의 경지까지 무공을 익혔다는 소문이 정설로 여겨질까? 그런 백발여제가 저러한 미모를 보고 그냥 넘어간다는 것은, 초절정비급을 그냥 지나쳐버리는 것보다 더욱 현실성이 없었다. "잘 생각해보렴. 이 누님은 돈도 많고, 영약도 많고, 비급도 많고, 너희들보다는 좀 못생겼지만 그래도 볼만한 수하들도 많단다. 이 누님의 동생만 돼주면 원하는 대로 모두 줄게. 정 뭣하면 그냥 수정궁을 통째로 줄까? 응?" "사, 사조님..." 청홍미화는 고수답지 않게 삐질삐질 흘러나오는 땀을 주체할 수 없었다. 수정궁을 통째로 준다면, 그것은 즉 궁주직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수정궁 내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백발여제가 나선 다면 못할 것도 없지만, 여인들의 문파인 수정궁에 남자가 입궁 하는 것은 그야말로 유례없는 일이다. 하물며 일반 궁도도 아닌 궁주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란 말인가? 하지만 정작 그녀들을 가장 당혹하게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 어째 배때기는 불쑥 튀어나오고 얼굴에 개기름이 줄줄 흐르는 졸부가 아름다운 소녀나 여인에게 첩 자리를 놓고 하는 말을 연상시키는 백발여제의 언사가 바로 그 이유였다. 수십 년 전에는 여협으로까지 불렸던 백발여제로서는 그런 불순한 의도가 아니라 단지 순수하게 그 미(美)를 아끼는 마음으로 한 말일 테지만, 그렇다고 해도 참으로 주책 맞고 괴팍하게 보이는 것은 분명했다. ====================================== 하하하하 님의 추천으로 한 편 올립니다. 추천 감상 리플 듬북듬북 부탁드립니다. ====================================== 철방:...요즘 화경의 고수는 개나소나 다 되남? 뭐, 요즘은 먼치킨을 찍어내는 세상이니까. 철방:아니, 그래도 저게 말이 되냐고. 단순무식한 너도 화경에 준하는데 이 정도가 안 되려고. 철방:음...그거 어째 말이 되는 거 같긴 한데, 뭔가 좀 거슬린단 말야. 그냥 칭찬이니까 신경꺼, 신경꺼. 철방:그래? 그럼 고맙지...라고 할 줄 알았냐, 이 대갈통 아작내서 뇌수에 소면 비벼먹을 놈의 새끼야!!![콰직!!] 꾸엑!! . . . . . . . . . . . . . . . . 철방:후룩, 후루룩...쩝쩝.[????]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17 07:18:53 고친날 2005-08-17 07:18:53 읽은수 5423 [ 1 K ] 제목 [연참공지]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폭탄투하 준비작업. 아무래도 연참의 단맛을 버리지 못하고 폭탄투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목표는 베스트! 베스트 1위![오오!] 모두 선작, 추천, 감상의 독자삼종세트를 잊지 않아주신다면 원폭[?!]을 보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폭탄 준비를 위해 오늘 하루는 일단 준비작업을 하고 내일부터 투하하도록 하겠습니다. 예고: 오랜 공백을 깨고 사신의 낫을 든 사신의 참전. 동과 서의 사술을 모아 만들어진 또 하나의 비술. 그리고 마침내 드러나는 사마(死魔)의 흑안(黑眼)! 선작. 리플. 추천은 기본 매너! 금호:"누가 그래?" 그야 당연히 이 그림자 없는 어르신이! 남국:[한숨 포옥] ...어이어이, 그 한숨은 뭐야? 천무:"글쎄요...아마 알만한 분은 다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 알만한 분은 누군데? 파타시:"내 알 바 아니지." 뭐, 뭐? 철방:"아 X발! 이 눈깔사탕 뽑아서 기름에 튀겨먹을 새끼가 진짜 X나게 시끄럽네!" 으악! 으아아악--!!!! . . . . . . . . . . . . . . . . 지글지글...으적으적.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18 04:08:12 고친날 2005-08-18 04:08:12 읽은수 5976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22.사신개안(死神開眼).(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이분이 백발여제라고?' 금호가 느끼기에 백발여제는 참으로 특이한 여인이었다. 검황과 거의 동급의 배분을 지니고 있는 초고수이자 무림명숙임에도 불구하고 그 행동거지는 차라리 철이 덜 든 큰 누님이라는 느낌이었다. '여제(女帝)라면 좀더 기품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때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라고 불렸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홀로 살아온 고고한 꽃이라는 소리를 언젠가 스쳐들은 뒤, 나름대로 백발여제는 이럴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금호는 이 세상에 뜬소문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재확인해야만 했다. 무영투괴, 염화궁신, 무정살왕, 정의검황, 구절창신, 천안도괴 등 어지간한 무림명숙이라도 만나기 힘든 초고수들을 많이 봐온 금호의 눈은 상당히 높아져 있었다. 특히, 본디 흉악한 산적이었던 데다가 망자로서의 흉성까지 더해진 철방의 잔혹무도함이나, 마치 황족인 듯만 싶은 그의 오만무심함을 오랫동안 봐왔기 때문에 이제 어지간히 사악한 마두나 웬만큼 신분 높은 이에게도 별다른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백발여제는 검황에게서 느꼈던 신분이나 무위에서 비롯된 위압감이 아닌, 그야말로 기가 센 큰 누님이 동생을 찍어누를 때 사용할법한 기이한 위압감으로 금호와 남국을 압박하고 있었다. "에...그런 건 일단 사부님께 여쭤보시는 게 좋을 듯 싶습니다." 금호가 결국 떠넘기기를 선택하자, 백발여제는 곧바로 그를 향해 시선을 돌리고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멈칫 입을 다물었다. 잠시 동안 그렇게 침묵을 지키며 무언가를 생각해보던 그녀는 곧 어느 때보다도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벽력탄을 터트렸다. "제자들을 동생으로 주면 오라버니로 모실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무에?!' 금호와 남국의 입이 따악 벌어지며 청홍미화의 몸이 쓰러질 듯 비틀거리다가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철방이 왕방울 만한 두 눈을 데굴데굴 굴릴 때, 천무는 평온한 와중에도 뭔가 묘한 기색이 곁들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뒤에 터진 진천뢰에 비하면, 그녀의 벽력탄은 그야말로 작은 불똥에 불과했다. "오라버니가 돼주겠다." "켁!" 콰당! 누군가의 숨막히는 소리와 나자빠지는 소리가 조용하던 금마뇌옥에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는 무심히 말을 이었다. "대신, 나를 따라라." 금호와 남국의 얼굴에 뜨악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런 조건을 대체 누가 받아들인단 말인가? 참으로 일방적인 사기계약이 아닌가? "동생으로서 마땅히 오라버니를 따라야지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만면에 화사한 미소를 떠올린 채 곧바로 대답해버리는 백발여제의 작태에 청홍미화는 결국 현기증을 느끼고 이마를 짚었다. "계약은, 이루어졌다." 이 참으로 말도 안 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사자들은 매우 만족한 듯한 계약에 청홍미화와 두 청년의 머리가 복잡하게 엉켜들었다. 백발여제의 생각이야 불을 보듯 뻔하다. 두 청년의 미모에 주안술과 같은 흔적이 있다면 당연히 그 사부로부터 비롯된 것일 터. 만약 생사판괴가 두 청년 보다 더욱 높은 성취를 이루었다면 그녀로서는 천하에 둘도 없는 보물을 오라버니로 삼는 것이고 설사 아니라도 두 청년을 동생으로 삼을 수 있으니 어찌됐든 본 목적은 이루는 셈이다. 동생이 아닌 오라버니를 거론한 것은, 그녀 자신의 배분을 팔아서라도 제자들과 같은 배분으로 여겨지는 데에서 생기는 불쾌감을 막기 위한 것일 터. 그녀는 진정 미를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영혼까지 팔 수 있는 여인이었다. 그가 백발여제의 생각을 수락한 이유도 명백했다. 정파의 조력을 받기 힘든데다가, 사파와는 이미 철천지원수가 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검황과 능히 비견될만한 고수와의 친분을 거부할 리가 없다. 천하삼십육세 중 한 세력을 후원까지 받을 수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게다가 일단 계약을 하긴 했어도, 친혈육이라도 서슴없이 이용해먹을 수 있는 그라면 조금만 일이 틀어져도 극악무도한 '오라버니'로서 그대로 백발여제의 등을 찌를 수 있으리라. '사조님이 제발 정신 좀 차리셔야 하는데...' '사부님은 정말 피도 눈물도 없다니까.' 동시에 한숨을 토해낸 청홍미화와 두 청년이 서로의 등을 두드려주고 싶은 진한 동질감을 느낄 때, 잠시 동안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쓰며 머리를 긁적이던 철방은 천무에게 은근슬쩍 말을 건넸다. "천공자, 이게 좋은 일이오?" "일단은 긍정적입니다. 백발여제께서는 조금 성격이 별나기는 하셔도 아름다운 것은 보호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신념에 가까운 생각을 가지고 계시니, 적어도 금소협과 남소협에 대해서는 안심해도 좋을 듯 싶습니다." "흠, 그렇군." 대형이 푼수끼 넘치는 할망구의 오라버니가 되는 것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철방이었지만, 상대가 무림에서도 손꼽히는 배분과 무위를 지닌 백발여제인 데다가 대형이 직접 받아들인 일인만큼 그 불만을 뇌리에서 깨끗하게 지워버렸다. "그럼 이만 서두르도록 하지요." 천무의 부드러운 재촉에 백발여제와 그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백발여제가 손을 써 간수를 제압해두고 천무가 약간의 재간을 부려두긴 했지만, 언제까지 여유를 부릴 수야 없는 노릇이다. 어지간한 거대문파라면 철궁곡에 심곡처럼 만약을 대비한 비밀통로가 하나쯤은 있지만, 복잡하게 얽혀진 정의성의 비밀통로 중 하나가 다름 아닌 금마뇌옥(禁魔牢獄)에 위치해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었다. 정해진 방법과 열쇠가 없다면 설사 화경의 고수가 떼거지로 몰려든다 하더라도 열 수 없는 곳이었지만, 백발여제는 바로 그 통로를 통해 침투해왔다. 결국 의문을 참지 못한 금호가 대체 어떻게 방법과 열쇠를 손에 넣었는지 묻자, 백발여제는 아주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우린 단지 천공자가 알려준 대로 했을 뿐이란다." 백발여제의 말에 여전히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천무를 살짝 돌아봤던 금호는 문뜩 뭔가 신경에 걸리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지만,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곧 쓸데없는 잡념을 지웠다. "이제 바로 앞이랍니다." "호호호, 마차도 준비돼있으니 그 뒤로는 일사천리지요." 청홍미화가 눈웃음치며 한 말대로 통로는 곧 끝을 드러냈다. 정의성과 이어진 통로의 입구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작은, 그러나 비밀통로에 맞는 은밀함과 튼튼함을 지니고 있는 석문이 바로 그 끝이었다. 쿠구궁-! "...어머나?" "이런..." 석문을 앞장서 열고 밖으로 나간 청홍미화가 그대로 걸음을 멈추며 신음을 흘리자, 무언가 불길함을 느낀 일행은 잠시 서로 시선을 교환한 뒤 각자의 병장기를 뽑아들고 천천히 통로를 벗어났다. 그들의 불길한 예감은, 조금의 빗나감도 없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더 이상은 보내드리지 못하겠소." 한 자루의 흑창을 똑바로 세워든 채 앞을 가로막고 있는 차가운 인상의 중년인과 금빛 창을 든 아홉 명의 창수들을 확인한 금호는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구절창신(九折槍神)..." "금창풍룡대(金槍風龍隊)도 있군요." 철방이 불사패신에서 불사패왕으로 돌아옴으로써 새롭게 변한 사신오왕(四神五王) 중 사신의 일인인 구절창신(九折槍神). 하나같이 절정고수로 이루어진 구룡회(九龍會) 최고의 정예 금창풍룡대(金槍風龍隊). "형님께서 보내셨습니까?" "그렇다." 구절창신 황갈산의 차가운 대답에 눈치 하나로 반평생을 살아온 청년은 그제 서야 자신의 신경에 걸리던 게 무언지 깨닫고 소름이 오싹 돋았다. 쉬웠다. 탈옥이 쉬워도 너무나 쉬웠다. 천지문의 후계자인 천무가 진즉부터 준비해온 탈옥이라고는 하지만, 그를 잡아넣은 무영투괴는 천지문의 문주다. 더구나 천무에 대해 아마 세상에서 가장 잘 알고 있을 무영투괴가 과연 이 탈출을 예상치 못했을까? 만약 예상했다면, 무슨 조치를 취했을까? 결론은 명백하다. 이미 탈옥을 한 순간부터 그들은 정의령에 불복하게 된 셈이니, 그것을 빌미로 즉결처분을 한다는 것이 바로 무영투괴의 계획이리라. 그렇지 않다면 백발여제와 청홍미화가 들어올 때는 나타나지 않았던 이들이 탈옥 후에야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흥, 이제야 겨우 화경에 접어든 어린 녀석이 지금 본녀의 오라버니와 동생들을 건드리는 소리냐?" 백발여제가 싸늘한 냉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서자 금호는 일말의 희망을 찾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갈산의 얼음 같은 태도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수정궁은 정사중도를 잊지 않는다 들었는데, 이제 사마외도로 돌아설 셈이시오?" "본녀가 보기에 구룡회야말로 정사중도의 문파인 주제에 너무 나서는 거 같은데?" "죄즉참(罪卽斬)! 그것이야말로 구룡회의 중도지로요." 그녀는 자신의 고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수정궁(水晶宮)은 여인의, 여인에 의한, 여인들을 위한 문파. 억울하게 핍박받는 여인들이라면 정사를 가리지 않고 도움을 주지만, 여인의 한에 따라 협의에 거스르는 일도 서슴지 않기에 정사중도에 위치한다. 반면 구룡회(九龍會)는 반쯤 치외법권에 놓여진 무림인들을 같은 무림인으로 상대하고 징벌하기 위해 관부로부터 시작된 문파. 그들은 정사를 가리지 않고 오직 국법에 따라 상대를 심판한다. 국법을 어겼다면 설사 천하에 둘도 없는 대협객이라도 죄인이오, 국법을 어기지 않았다면 천하의 대마두라도 무고한 양민이라는 논리로 정사중도를 지킨다. 만약 이들 중 여인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수정궁의 논리상 어떻게든 개입할 명분을 만들 수 있겠지만, 일행 중 유일한 홍일점이던 진성하는 무영투괴에게 무고함이 확인되어 정중한 대접을 받고 있다. 반면 구룡회는 양민을 무참하게 살육한 생사판괴를 처벌할 명분이 충분했지만, 백발여제는 명분이라는 것에 크게 신경 쓰는 소심한 여인이 아니었다. "호오...좋아. 한판 해보자 이거네?" 눈을 가늘게 뜬 백발여제의 전신으로부터 뭉클뭉클 뿜어져 나오는 막대한 무형지기에 구절창신이 미간을 꿈틀거리며 창을 쥔 손에 힘을 줄 때, 한줄기 무심한 음성이 그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 뭐, 대다수의 독자분들은 예측하고 계셨을 듯... 정사중도-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정파나 사파 쪽에 가까운 문파도 많습니다. 추천. 리플. 선작. 감상. 서평 잊지 마시길. 부족하면 융단폭격은 없습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18 04:08:37 고친날 2005-08-18 04:08:37 읽은수 5566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22.사신개안(死神開眼).(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물러나라." "네, 오라버니." 그의 말에 백발여제가 결국 만면에 한가득 화사한 미소를 지은 채 청홍미화와 함께 선선히 물러나자, 그녀와 구절창신 사이의 긴장감은 그들에게 고스란히 넘겨졌다. 구룡창신이 화경의 고수라고 하나, 철방 역시 무정살왕의 쳐죽인 괴물이니 둘은 거의 동수로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금창풍룡대(金槍風龍隊)일 터. 그들 아홉이 펼치는 구룡금쇄진(九龍擒殺陣)은 무위로는 화경의 고수를, 군세로는 일천대군을 상대할 수 있는 것으로 이름높다. 물론 그렇게 치자면 살각을 휩쓸어버린 그의 사령술 역시 만만치 않다. 비록 살각과의 치열한 전투로 인해 상당수의 망령을 잃어버리기는 했지만, 금호와 남국의 보조까지 더해지면 최소한 지지는 않을 것이다. "일각 안에 지원이 올 테니, 싸움은 가능한 피하고 기회를 틈타시는 것이 좋습니다." 천무의 온유한 음성은 모두의 귀에 똑똑히 파고들었다. 기회란 유령마(幽靈馬)를 말하는 것일 터. 하늘 높은 곳으로 날아가면 분명 구절창신이 아닌 정의검황이 오더라도 어쩔 수 없을 테지만, 수십 장의 간격까지 강기의 운용이 자유로운 화경의 고수로부터 말을 타고 달아날 만한 기회를 만드는 것은 정말이지 쉽지 않은 일이리라. '정 안 되면 몸을 내던져서라도 틈을 만든다!' 의지를 굳게 다진 철방이 일으킨 어둠은 심장으로부터 시작해 전신의 뼈에, 근육에, 혈관에, 피륙에 차례차례 스며들어 십이신력(十二神力)을 십이마력(十二魔力)으로 물들였다. 그야말로 전신이 터져 나갈 듯한 막대한 거력에 둘러 쌓인 채 시커먼 마화가 불타오르는 마령안(魔靈眼)을 구절창신에게 향하자, 황갈산 역시 전신에 아지랑이와 같은 기세를 피어 올리며 철방과 시선을 마주했다. 바로 그 순간, 철방의 앞을 수평으로 가로막는 하나의 검은 묵봉이 있었다. "대형?" 마악 투지에 불을 붙이려던 철방은 갑작스러운 제지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는 그러한 철방의 처지를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묵봉을 서서히 움직였다. 결국 묵봉을 황갈산에게 향한 채 똑바로 고정시킨 그는, 평소와 같은 무심한 음성으로 말했다. "구절창신 황갈산. 네게 비무를 청한다." 금호와 남국은 도저히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비무라니? 그들이 아는 한, 그는 지금과 같이 다급한 상황에서 한가롭게 비무 따위를 할 사람이 결코 아니다. '대체 무슨 생각이시지?' 그들이 혼란으로 인해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대고 있을 때, 황갈산 또한 나름대로 생각을 마치고 서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주술로써 말인가?" 무심히 가로 저어진 고갯짓은 그들을 더욱 환장하게 만들었다. 전력을 동원해도 모자를 판에, 주술까지 제외하고 창신을 상대하겠다는 말인가? 다른 누군가가 했다면 미친 짓 내지는 만용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지만, 지극히 무심한 만큼 합리적이기에 오만하기까지 한 그가 하는 행동에는 필히 그만큼의 이유가 있을 것이기에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좋다. 비무를 받아들이겠다." 황갈산은 냉정한 판단 아래 그의 비무를 받아들였다. 어차피 시간을 끌수록 유리한 것은 자신. 이처럼 유리한 조건의 비무를 거부할 이유가 없다. 어쩌면 비무라는 말로 안심시켜놓고 암수를 사용할 수도 있지만, 그러한 암수까지 미리 염두에 두면 허를 찔리지는 않으리라. "또 하나." 서서히 움직인 그의 묵봉이 이번엔 금창풍룡대를 향하자, 일행은 하나같이 기묘한 표정으로 이번엔 무슨 말을 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드러냈다. "철방. 겨뤄라." 그들은 할 말을 잃었다. 십이마력과 외공으로 무장한 철방이야말로 상대의 숫자와 실력에 제한 받지 않고 싸울 수 있는 괴물딱지이기는 하지만, 현묘함을 갖춘 진법을 상대로는 어느 정도 전력의 감소를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말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모두 산 채로 제압해라." "알겠습니다, 대형!" 대형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철방이 마치 스스로의 손발을 묶는 듯한 제약에도 전혀 거리낌없이 앞으로 나서자, 구절창신 황갈산은 이 또한 선선히 받아들였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나도 전혀 모르겠어.' 백발여제와 청홍미화는 그저 조금 의아한 기색을 보일 뿐이었지만, 그에 대해 잘 아는 금호와 남국이 받은 충격은 장난이 아니었다. 대체 사부는 어째서 스스로 불리함을 감수해내려는 것일까? 대체 왜 죽이지 않고 산 채로 제압하려는 것일까? 아무리 눈치 빠른 금호로서도 그 이유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오직 천무만이 평온함을 유지한 채 상황을 지켜보는 가운데, 그와 황갈산, 철방과 금창풍룡대는 백발여제를 공증인으로 삼아 비무의 시작을 고했다. 우둑. 우둑. "자아, 그럼 아그들아...빨리 끝내자!" 목을 좌우로 꺾으며 큼지막한 미소를 지은 뒤 섬광마각(閃光魔脚)으로 땅을 박차자 역천공(逆天功)으로 가벼워진 몸이 흐릿한 잔영만을 남기고 쏘아져나간다. 어지간한 고수라면 앗 하고 그대로 당해버릴 만한 쾌속함이나, 목표가 된 세 창수는 곧바로 창을 휘둘러 진세를 굳힌다. 그야말로 철벽같은 수비이긴 한데 말이다, 겨우 철벽 정도에 포기하면 철궁곡에서 박살났던 철문이 섭섭하겠지? 그러니까 이 어르신이 공평하게 깨부숴주마! 부우웅-! 흑룡비(黑龍匕)에 뒤덮인 흑룡도(黑龍刀)를 단천일뢰(斷天一雷)의 초식대로 똑바로 내리긋는다. 어둠의 힘으로 도강(刀 )과 맞먹는 파괴력을 지닌 흑룡도에 섬광마각(閃光魔脚)의 속도와 패왕근(覇王筋)의 힘이 붙었으니, 막으면 칭찬해줄 만하다. 투웅--! "어쭈구리?" 서로 교차한 두 개의 금창이 흑룡도의 힘에 밀려 부러질 듯 급격히 휘어졌다가 탄력적으로 펴지며 흑룡도를 튕겨낸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정말 칭찬을 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 하나의 창이 눈을 향해 똑바로 찔러 들어온다. 눈깔사탕은 외공으로 단련시킬 수 있는 곳이 아닌데다가, 본능 때문에 반응이 둔해진다. 살각의 자객들처럼 제대로 공격하는 법을 아는 놈이다. 용호공(龍虎功)을 일으켜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창을 피하고 귀각무영(鬼脚無影)의 초식으로 발을 휘둘러 놈을 물리니, 하나의 핏방울이 뺨의 상처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며 비릿한 혈향을 풍긴다. 놈들의 창에 맺혀있는 푸르스름한 강기( 氣)를 보자니 이제야 기억나는 게 있다. 구룡금쇄진(九龍擒殺陣)은 격체전공(隔體傳功)의 묘리를 중심으로 만들어 내공을 뻥튀기 시킬 수 있다고 했던가? 금강불괴에 가까운 오공마갑은 화경의 고수 정도는 되야 뚫을 수 있지만, 구룡금쇄진에 흐르는 내력은 부족하게나마 화경의 고수와 비견할 만하니 쉽게 제압할 수는 없게 된 셈이다. 대형의 명령을 쉽게 수행하지 못하게 된 건 아쉽지만, 그래도 명색이 금창풍룡대라는 놈들이 힘 하나 쓰지 못하고 제압되면 그건 또 너무 재미없지 않은가? "푸하핫, 그래. 이 정도는 돼야지!" 천하의 모든 강자여, 내게 와라. 그리고 덤벼라. 강하면 강할수록 좋다. 얼마든지 상대해주겠다. 그리고 부수리라. 꺾으리라. 이기리라. 나 자신의 강함을, 나 자신의 힘을 증명하기 위해서!! 투기가 치솟아 오르며 마령안(魔靈眼)에 담긴 마화가 이글이글 불타오른다. 날카로운 귀 끝이, 귀 안에 든 어둠이 꿈틀거리며 무한이(無限耳)에 뒤쪽에서 날카롭게 찔러 들어오는 두 창의 소리가 똑똑히 들려온다. 카강!! "으음...!" 전륜칠뢰(轉輪七雷)의 초식으로 흑룡도를 빙글 돌려 두 창을 그대로 튕겨낸다. 흑룡도를 받아낸 충격에 당장이라도 분질러질 것처럼 부르르 진동하는 창대와 통증으로 미미하게나마 일그러진 창수의 안면이 똑똑히 두 눈에 들어온다. 찢어진 손아귀에서 흘러나온 피가 창대를 적셔도 창을 놓치지 않는 것은 금창풍룡대로서의 자긍심일까, 아니면 피를 토하는 훈련의 성과일까? 채재쟁! 내공을 뻥튀기가 아니라 곱빼기까지 해도 힘으로는 당해내지 못한다는 걸 눈치챘는지, 직접적인 힘 대결을 피하고 대신 서로 돌아가며 세 방향에서 쉴새없이 번갈아 창을 내지른다. 도통 수세를 공세로 전환할 만한 틈이 나지 않는 게, 다구리까는 실력이 장난 아니다. 대체 다구리를 얼마나 많이 까야 이렇게 익숙해지는 걸까? 구룡회에서 따 당해 다구리 맞는 놈들도 참 불쌍하다. 어째든 그 위력만큼은 과연 제갈문에서도 인정하는 절진답지만, 그렇게 치자면 그 또한 혈문과 살각에서 아주 이가 으스러져라 인정해줄 괴물 중 대괴물이 아니던가? 부웅-! 힘껏 내던진 흑룡도가 창수 한 명을 스치고 허무하게 땅에 틀어박힌다. 비록 맞추지는 못했지만, 주의를 흐트러트린 것만으로 그 역할은 이미 반쯤 끝난 셈이다. 촤르르륵-! 어둠을 움직임에 따라. 손목의, 등의 피부가 갈라지며 네 개의 흑룡편이 튀어나와 네 개의 창에 칭칭 감겨든다. 그와 동시에 두 손등으로부터 튀어나오는 것은, 그야말로 어둠을 머금은 듯한 칠흑의 발톱.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 철방의 전투장면이 너무 잔인하다는 의견이... ...뭐, 이 식인괴물의 쌈박질에 대해서는 분명 할 말 없지만서도. 나름대로는 무협답게 호쾌한 액션씬이라고 써대고 있는지라 포기하기가 쉽지 않군요. 추천. 리플. 선작. 감상. 서평 잊지 마시길. 부족하면 융단폭격은 없습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18 04:09:01 고친날 2005-08-18 04:09:01 읽은수 5664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22.사신개안(死神開眼).(4)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주술을 금한 채 화경의 고수를 상대하는 것은 그로서도 상당한 무리다. 몸의 상태가 지금과 같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무리'일뿐. '불가능'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최대한 빨리 끝낸다.' 무심히 생각을 정리한 그는 하단전을 개방했다. 개방된 하단전으로부터 흘러나온 막대한 마력(魔力)이 영기(靈氣)로 보호되는 기맥을 타고 흐르며 전신을 순환한다. 순환하는 속도가 빠르면 빨라질수록 마력은 점차 응축되어간다. 응축. 응축. 응축. 반복된 응축으로 영기를 깨고 기맥에 넘실거리던 마력이 점차 고르게 뒤섞이며 한 순간의 끊김도 없는 강물같이 도도히 흘러든다. 그에 맞춰 일깨워지는 혈도. 그리고 혈도에 잠재되어있던 귀기. 이미 흐르고 있던 마력에 미리 준비돼있던 귀기가 칼날처럼 날카롭게 파고들어 마력을 자극한다. 상처 입은 맹수일수록 더욱 흉폭하게 변하듯, 자극 받은 마력은 더욱 거세게 날뛰며 폭발하듯 부풀어올라 기맥을 터트릴 듯이 가득 채운다. 우웅-! 구절창신이 들고 있던 흑창이 스스로 진동하며 공명음을 흘리자, 뭉클뭉클 솟아 나온 검은 기운이 흑창에 뒤엉켜들며 칠흑(漆黑)의 흑룡(黑龍)과도 같은 형상을 이뤘다. 진기를 응축해 억지로 만들어낸 응축강기(凝縮 氣)가 아니라 기가 스스로 형상을 갖추는 유형강기(有形 氣). 이 유형강기야 말로 하늘을 꿰뚫고 대지를 가를 수 있는 힘을 담고 있는 진정한 강기라 할 수 있다. 부웅! 흑창이 날카롭게 내질러졌다 싶은 순간, 흑창에 감겨있던 칠흑의 흑룡(黑龍)이 마치 빛살과 같은 빠르기로 쏘아져 나와 그를 꿰뚫고 대지를 강타했다. 쿠과과광!! 천하만물을 파괴하는 강대한 힘을 지닌 흑룡에게 물어뜯긴 대지는 그야말로 처참하다 싶을 정도의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정작 흑룡에 관통 당한 그의 모습은 점차 흐릿해지다가 그림자처럼 밤의 어둠에 녹아들었다. '이형환위(以形換位)?' 황갈산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환술(幻術)로 볼 수도 있지만, 저 움직임과 잔영은 분명한 이형환위다. 무영투괴에게 들은 생사판괴의 무위는 이형환위를 펼칠 정도에 미치지 못했다. 하물며 화경의 고수인 황갈산 자신의 눈을 속일 정도의 이형환위라니? 그렇다면, 생사판괴는 자신의 무위를 숨기고 있었다는 말인가? 아니면 주술로 그를 속인 것인가? 분명한 것은 생사판괴가 예상보다 더욱 강하다는 사실. 그렇다면 그 또한 전력을 다해 상대를 하면 되는 것이다. 파밧! 잡념을 떨치고 정신을 통일한 황갈산이 등을 가로지르는 오싹한 냉기를 느끼고 본능적으로 땅을 박차고 앞으로 뛰쳐나가자, 허공에서 튀어나온 하나의 낫이 그의 목이 있던 공간을 날카롭게 가르고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암살공(暗殺功)?' 곧바로 몸을 돌리고 창을 바로잡은 황갈산은 그 유령과도 같은 은신술에 미간을 다시 한차례 찌푸렸다. 일말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은신술(隱身術). 살기를 넘어 감정 자체가 느껴지지 않는 살수(殺手). 황갈산이 아는 한, 이처럼 완벽한 암살공(暗殺功)을 펼칠 수 있는 것은 오직 천하제일자객 무정살왕(無情殺王)뿐이다. 그러나 무정살왕은 죽었다. 바로 불사패왕과 생사판괴의 손에 의해서. 설사 그 과정에서 무정살왕의 암살공을 손에 넣었다고 해도, 단 한 달만에 그것을 대성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오히려 그 전부터 암살공을 익히고 있었다는 것이 합리적이다. 무영투괴가 은신술에 대해 얘기해준 적은 있지만, 그 수준은 기껏해야 천지쌍살이나 십대자객의 수준이었다. 이처럼 완전한 암살공에 대해서는 언급한 적 없다. '능력의 3할을 숨겼다는 건가?' 놀랍다. 동시에 참으로 무섭다. 무정살왕과 비견할만한 암살공. 사사혈괴를 꺾은 주술. 무영투괴를 속인 심계. 이 셋을 단신으로 갖추고 있다면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영투괴가 대체 어째서 생사판괴의 처벌에 그토록 열을 올렸는지,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이 자리에서 생사판괴를 놓친다면 그 후환은 상상도 못할 수준일 터. 반드시 이 자리에서 끝을 내야만 한다. 설사 동귀어진의 한 수를 쓰는 한이 있더라도, 생사판괴의 명을 확실하게 끊을 수만 있다면 결코 주저하지 않으리라. '과연.' 밤의 어둠 속에 스며들어있던 그는 구절창신의 달라진 기세를 감지했다. 강기를 피해냈을 때 방심을 지웠다면, 이제는 필살(必殺)의 각오를 다지고 있다. 은신술은 그저 보여주기 위한 것뿐. 이로써 목적의 반은 이룬 셈이지만, 아직 부족하다. 나머지 반까지 완전히 이루어야 원하는 효과를 끌어낼 수 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약간의 모험은 감수해야한다. 스르륵... 정면에 위치한 구절창신의 미미한 동요가 느껴진다. 유리한 고지를 포기하고 어둠으로부터 빠져 나온 이유를 파악하지 못한 것에서 비롯한 동요일 터. 그러나 그것은 잠시뿐. 곧 냉정을 회복한 황갈산이 흑창의 끝을 빙글빙글 돌려 작은 원을 그리다가 벼락같이 허공을 가르자 두 마리의 흑룡이 서로 뒤엉킨 채 똑바로 날아들었다. '피하기 힘들다.' 하나로 뭉쳐진 듯 보이지만, 만약 회피할 경우 두 흑룡은 두 갈래로 나눠져 사방을 휩쓸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정면돌파를 하는 편이 낫다. 찰나를 찰나로 쪼갠 시간만에 판단을 마친 그는 뚜렷한 잔영을 남기고 유령같이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가며 사신의 낫을 똑바로 세워들었다. 강마(降魔)의 비술(秘術)로 증폭된 마력(魔力)을 사신의 낫에 흘려보낸다. 또 한 번의 증폭을 거쳐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거세게 낫의 내부를 맴돌던 마력이 하나의 일정한 흐름을 이루며 은빛의 날을 은은한 검은빛으로 물들인다. 촤아악-! 묵광을 번뜩이는 사신의 낫이 두 흑룡이 얽혀든 틈을 향해 수직으로 정확히 휘둘러진 순간, 좌우로 쪼개진 두 흑룡이 그의 양옆을 스치고 날아가 허공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콰과광! 흑룡강기(黑龍 氣)가 폭발한 충격파가 등뒤에서부터 덮쳐오자, 그는 그 충격에 대항하는 대신 그 힘을 이용했다. 강마의 비술로 강화된 민첩함에 이종의 힘이 더해지며 허공에 또 하나의 잔영이 생겨났다. 부웅!! 흑룡강기를 날리고 곧바로 그 뒤를 따라붙었던 황갈산의 흑창이 허무하게 잔영을 후려쳤다 싶은 순간, 구절창신을 중심으로 부웅 회전하는 흑창을 따라 한 마리의 흑룡이 나선형으로 용솟음쳤다. 콰앙-! 카강!! 흑룡의 몸이 터져 나가며 그 축을 이루고있던 흑창이 옆쪽에서 튀어나온 사신의 낫을 가로막자,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흑창을 빽빽하게 뒤덮고있던 검은 비늘이 뒤흔들리며 은빛 날에 흐르던 묵광이 살짝 흐릿해졌다. 그때, 흑창이 마치 스스로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과 같은 기기묘묘한 움직임으로 사신의 낫을 휘감아들며 그 창날이 용의 이빨과 같이 사납고도 날카롭게 그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휘우웅! 콰광!! 무시무시한 힘으로 사신의 낫을 휘둘러 흑창을 튕겨내고 섬광과 같은 속도로 뒤로 물러난 그는 황갈산의 앞에 남아있던 잔영이 강기의 폭발에 휩쓸려 산산이 흩어지는 것을 느끼며 어깨를 살폈다. 어둠의 옷에는 자가복구력이 있으니 어깨가 훤히 드러나도록 뜯겨진 옷자락은 문제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 안. 희다 못해 투명하기까지 한 피부가 갈라지며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게 베여진 어깨는 전투력의 하강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증폭된 마력으로 인해 강화된 육체가 아니었다면, 창이 더욱 깊게 파고들기 전에 피하지 않았다면 팔이 통째로 떨어져나갔으리라. '역부족인가.' 이형환위를 펼칠 수 있는 민첩성. 화경의 고수를 떨칠 수 있는 근력. 유형강기를 부술 수 있는 파괴력. 호신강기 못지 않은 보호력. 그러나 역시 정면대결로 화경의 고수를 상대하기에는 부족하다. 그가 사용하는 기술은 일격필살을 위해 은밀히 급소를 노리는 살인기술이지, 무공이 아니다. 아무리 육체적 능력을 강화해도 정면대결이라는 면에서는 무인에게 크게 뒤쳐질 수밖에 없다. 지금이라도 주술을 사용한다면 황갈산을 상대로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정당당한 비무여야만 한다. '일격에 끝낸다.' 무심히 결단을 내린 그는 사신의 낫을 빙글 돌려 거꾸로 쥐었다. 강마의 비술을 사용하는 중이라 재생의 비술을 사용하기 힘든데다가, 강기에 의해 세포 자체가 파괴된 부상은 비술을 사용해도 회복에 시간이 걸린다. 결국 더 이상 시간을 끌수록 불리함만 더해질 뿐이니, 일격으로 끝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때맞춰 구절창신의 주변에서 막대한 진기가 휘몰아치다가 흑창으로 스며들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결정적인 한 수를 사용하려는 것일 터. 이대로 맞부딪친다면 필패(必敗)지만, 그에게는 아직 남은 수가 있다. 스륵... 한 손으로 천천히 눈가를 짚은 그는 마음속으로 서로부터 얻은 주문을 외웠다. 이것은 주문이되 주술이 아니다. 비밀이되 비술이 아니다. 금기이되 금법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열쇠에 불과하다. 잠겨진 문이 열리며 잠들어있던 어둠이 깨어난다. 봉인이 풀린 어둠이 꿈틀거리며 사방을 향해 뻗어 나온다. 위우웅--! 황갈산이 아홉 마리의 흑룡이 휘감긴 흑창을 앞세워 화살처럼 쏘아져들자, 그 또한 눈가에 대고 있던 손을 내리고 황갈산을 향해 마주 미끄러져 나갔다. 그리고 어둠의 봉인이 풀린 사마(死魔)의 흑안(黑眼)은, 황갈산을 똑바로 향한 채 서서히 뜨여지고 있었다. ============================== 사실 명백한 주술사에 속하는 네크로맨서가 치고박는 싸움을 한다는 건 칼쟁이보고 주술 써보라는 것 만큼이나 황당한 일이지만서도... 다른 누구도 아닌 주인공이 너무 뒷전에만 있으면 좀 그렇죠. 파타시는 어쌔신 스킬도 보유하고 있고 말입니다. 철방이 전투의 메인으로 나서고 파타시가 관전에 가까운 태도로 간단히 보조할뿐인 이유는 무적사신이 서먼 네크로맨서 쪽에 중점을 두기 때문입니다. 철방 자체가 파타시에게 종속된 망자인 만큼, 파타시가 지닌 힘의 일부로써 파타시를 대리해서 싸운다고 해야할지. 초반부터 인격을 지닌 망자라는 특이성 덕분에 전투시 주인공보다 비중이 크고 그 중점이 맞춰지는 특이한 조연이 되어버렸다는... 추천. 리플. 선작. 감상. 서평 잊지 마시길. 부족하면 융단폭격은 없습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18 07:18:59 고친날 2005-08-18 07:18:59 읽은수 5719 [ 5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22.사신개안(死神開眼).(5)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네 창수가 뒤로 물러나며 창에 감긴 흑룡편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창을 버리지 않는 것은 창수로서의 긍지인가? 아니면 행동을 속박하고자 함인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 일이다. 패왕근은 고작 이 정도에 구속받지 않는다. 부웅-! 남은 다섯 놈이 다섯 방향에서 창을 찔러 들어오는 것에 맞춰 흑랑조(黑狼爪)를 휘두른다. 세 개의 창이 튕겨나가는 반면, 두 개의 창은 다리와 어깨에 틀어박혀 푸르스름한 빛을 번뜩인다. 퍼엉! 강기( 氣)의 폭발에 살점이 뜯겨나가고 내장이 뒤흔들린다. 하지만 뼈까지 단번에 가르고 들어온 무형살검에 비하면, 몸을 통째로 박살낼 듯 날뛰던 무형살기에 비하면 이 딴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흐흐흐..." 몸에 박힌 두 창대를 움켜쥐고 스산한 미소를 짓자 흠칫한 창수들이 급히 물러난다. 손에 잡힌 두 창을 그대로 포기하고 물러나는 걸 보자니 상황판단은 제법이지만, 이미 늦었다. 촤라락-! 어둠이 꿈틀거리자, 네 개의 흑룡편(黑龍鞭) 중 창에 감겨진 부분이 뚝 떨어지며 남은 부분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사방을 휘젓는다. 어깨에 하나, 다리에 하나, 팔에 하나. 모두 가볍게 스친 상처지만,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다. "자, 이제 슬슬 대갈통에 돌덩이가 들어찰 거다. 아, 머리가 원래 돌대가리면 별 상관없나?" 진세를 재정비하던 창수들의 얼굴이 돌덩이처럼 굳어간다. 비록 제압을 위해 사사혈독을 억눌러뒀지만, 어둠 자체만 하더라도 산공과 마비의 효과를 한가득 지닌다. 두 금창을 각자 한 손에 드니 묵직한 무게가 마음에 닿는다. 창술 따위는 배워본 적 없다. 그러나 창을 사용하는 방법 정도는 안다. 촤르르르륵! 검은 비늘에 뒤덮인 금창이 누런 금빛을 잃고 검게 물들어갈 때, 아홉 명의 창수가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며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부상을 입은 창수들은 피를 뭉클뭉클 흘리며, 창을 잃은 두 창수는 예비용 단창을 들고 진기를 한껏 끌어올린다. "으랏차차!!" 휘우웅-! 힘차게 날아간 두 흑룡창(黑龍槍)이 금창에 의해 옆으로 튕겨나갈 때, 세 명의 창수가 세 방향에서 창을 찔러 들어온다. 하나는 머리를, 하나는 심장을, 하나는 단전을 노린다. 나머지 6명의 공력을 격체전공으로 받아 들여 만든 강기와 수비를 도외시한 동귀어진의 초식. 셋 중 하나는 필히 내주어야만 한다. 오냐, 그렇게 목숨 바쳐 비니 하나 정도는 내주마! 카강-! 흑랑조에 얽혀든 두 금창이 분질러지며 복부에 푸르스름한 창강이 박혀든다. 그 뒤에 이어지는 것은, 강기의 폭발. 퍼엉!! 속이 뒤집어지며 목구멍으로 비릿한 무언가가 울컥 치솟는다. 그러나 고통 따윈 없다. 타격 또한 크지 않다. 전투는 충분히 가능하다. "툇!" "큭?! 복부에서 빠져나가는 창을 손으로 잡으며 입 안에 담아뒀던 피를 뱉는다. 눈이 붉게 물든 채 잽싸게 물러나는 녀석의 창을 그대로 휘두르자 우두둑거리며 갈빗대 부러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갈빗대가 두세 개 부러지고도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놈은 거의 없으니, 한 놈은 반쯤 처리한 셈이다. 하나쯤은 빠져도 진의 운용에는 문제없는지, 남은 여덟 창수는 신속히 진형을 정비한다. 하지만 놈들은 모른다. 또 하나의 암수가 바로 발 밑에, 등뒤에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어둠이 일어난다. 땅에 틀어박힌 흑룡도(黑龍刀)가, 두 개의 흑룡창(黑龍槍)이 그 어둠에 공명하며 비늘을 세운다. 파바바바밧-! 흑룡도와 흑룡창으로부터 폭발하듯 쏟아져 나오는 흑룡비가 사방을 휩쓴다. 진은 유지하기에 힘들 정도의 부상을 입은 건 다리에 비수가 박힌 두 놈과 등에 박힌 한 놈. 이로써 넷. 엉망으로 흐트러진 구룡금쇄진에 파고들어 주먹을 휘두르니, 두 개의 금창이 서로 교차해 주먹을 막아선다. 아까 전 흑룡도를 막아낸 바로 그 수법이지만, 같은 수법을 두 번이나 써먹은 것은 분명한 실수다. 끼이익-! 부러질 듯 휘어지는 두 개의 창. 그러나 그 휘어짐이 정점에 달한 순간, 오공마갑과 패왕근의 힘이 폭발한다. 콰직!! 완전 박살이 난 두 금창과 두 창수가 저 멀리 날려간다. 이로써 여섯. 남은 것은 셋은 품(品)자형의 삼재진을 이룬다. 동료의 태반이 전투불능이 되어 진의 묘용을 발휘하기도 힘든데다가, 점차 어둠에 잠식되어가고 있음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려드는 행동 과연 금창풍룡대의 위명에 걸맞다. "그래, 그 용기가 가상하니 확실하게 끝내주마." 뻐억!! 외공을 익히기 전부터 무쇠로 이름높던 머리에 콧등이 뭉개진 창수가 눈을 까뒤집고 스르륵 무너져 내린다. 사나이라면 얼굴에 흉터 정도는 하나 있어야지. 암. 암. 우드득!! "커억...!" 한 놈의 양쪽 어깨를 잡고 패왕근을 일으키니 어깨뼈가 그대로 으스러져나간다. 한참동안 불편해지겠지만, 대신 마누라가 직접 밥 먹여줄 테니 이만한 선물이 어디 있겠어? 아직까지 마누라가 없다면...음, 이 기회에 만들어보라고. "이런 괴물 같은 놈!" 악에 받친 듯 달려드는 마지막 남은 한 놈의 창을 가뿐히 피하고 두 다리를 잡아든다. 한 손으로도 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그건 인간적으로 너무한 만큼 정중하게 양손으로 잡고 빙글빙글 돌리다가 손을 놓으니 한참을 날아가다가 한 창수와 뒤엉켜 나자빠진다. 목은 안 부러졌나? 아니, 딱히 아쉽다는 건 아니지만...멀쩡한 사람을 보고 괴물이라고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암, 내가 어딜 봐서 괴물이라고. "쩝, 속 쓰리네." 질린 표정의 금창풍룡대를 완전히 제압한 철방이 상처가 난 곳을 쓰다듬자, 내부로부터 뭉클뭉클 흘러나온 어둠이 환부에 스며들며 그 부상을 점차 회복시켰다. 가히 반쯤 불사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철방에게 있어, 어지간한 부상은 그야말로 길 가다가 조금 심하게 나자빠진 것에 불과했다. 그렇게 금창풍룡대를 처리하고 가뿐히 손을 턴 철방은 이제 대형과 구절창신과의 비무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 '너 괴물 맞아. 이 식인괴물놈아.'[중얼중얼] 이쯤에 절단마공을 펼친다면 독자분들 중 최소 서넛 정도는 주화입마로 몰아갈 자신 있으나...그럼 맞아죽을 듯. 추천. 리플. 선작. 감상. 서평 잊지 마시길. 부족하면 융단폭격은 없습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18 10:35:49 고친날 2005-08-18 10:35:49 읽은수 5945 [ 6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22.사신개안(死神開眼).(6)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쩌어억-! 두건의 그림자에 묻혀진 한 쌍의 동공은 그 무엇도 비추지 않았고 그 무엇에도 비춰지지 않았다. 그러나 칠흑의 장막 너머로 한 쌍의 시선이 향한 순간, 소리 없는 파열음과 함께 세상에 한줄기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칠흑의 금은 그를 둘러싸고 있던 암흑에조차 틈을 만들며 허공의 바람과 땅이 흙을 타고 끝없이 퍼져나갔다. 비록 가느다란 금에 불과했지만, 가장 짙은 어둠이자 가장 두려운 죽음이며 가장 잔혹한 파멸으로써 공간조차 집어삼켜 버리는 듯한 그것은 나타났다기보다는 오히려 사라졌다는 표현이 더욱 적절할 듯 싶었다. 그것은 파멸(破滅)의 균열(龜裂). 존재하는 모든 것을 죽음으로 이끌 수 있는 급소이자, 세상을 파멸시킬 수 있는 열쇠. 그리고 사마(死魔)의 흑안(黑眼)이 지닌 첫 번째 권능. 황갈산조차 파멸의 균열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심장을 비롯한 전신의 사혈을 주르륵 잇고 있는 얇지만 선명한 금은, 초인에 가까운 화경의 고수라 해도 결국 죽음을 벗어날 수 없는 필멸자(必滅者)임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노리는 것은 황갈산의 균열이 아니다. 목적은 어디까지나 제압. 그 제압을 가장 수월하게 해낼 수 있는 급소는, 바로 흑룡의 핵심. 위웅--! 흑창의 흔들림에 따라 아홉 마리의 흑룡이 사방으로 뻗어 나왔다. 일부는 가슴을 꿰뚫으려는 듯 빠르게 일직선을 그리며, 일부는 몸을 통째로 깨부수려는 듯 하늘 위로 치솟았다가 갑자기 아래를 향해 강맹하게 꺾이며, 일부는 마치 몸을 감아들려는 듯 유연하게 휘어지며 쏟아져 나오는 아홉 마리의 흑룡. 비록 거의 전력을 쏟아냈다고는 하나, 환(幻)으로써 만들어낸 아홉 줄기의 유형강기에 쾌(快), 패(覇), 유(柔)를 한꺼번에 담아내니 가히 창술의 극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입을 쩌억 벌리고 날아드는 흑룡의 미간을 가로지르는 검은 금이, 기가 극한까지 집결된 유형강기의 중심에 위치한 죽음의 급소가 뚜렷하게 보.였.다. 전신의 마력이 소용돌이친다. 봉인이 풀린 사마의 흑안으로 미친 듯이 빨려 들어가고 있던 힘의 일부가 떨어져 나와 사신의 낫에 더해진다. 한 마리의 흑룡이 아슬아슬하게 옷자락을 꿰뚫고 지나가며 또 다른 흑룡이 부상 입은 어깨를 향해 내려꽂히는 것을 선두로 모든 흑룡이 그를 뒤덮기 직전, 그의 손에 들려져있던 사신의 낫이 휘둘러지며 허공에 한줄기 칠흑의 섬광을 그렸다. 카앙--! 칠흑의 섬광이 끝난 곳은 갈라진 아홉이 시작된 하나의 근원. 그 중에서도 바로 정 중심에 위치한 가장 뚜렷한 금. 실제로는 현란하게 휘둘러지며 흑룡강기를 쏟아내고 있던 흑창의 창두를 가볍게 친 것에 불과했지만, 그로 인해 일어난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도도한 강물처럼 끊임없이 흐르던 진기가 뚝 잘려진 아홉 마리의 흑룡은 그대로 허공에서 얼어붙어 버렸다. 어떤 흑룡은 그의 어깨를 물어뜯으려던 모습으로, 어떤 흑룡은 그의 몸에 감겨들려던 모습으로, 어떤 흑룡은 그의 복부를 꿰뚫으려던 모습으로 멈춰진 광경은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만 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사신의 낫이 그대로 파멸의 균열을 베어낸 순간, 허공에 멈춰져있던 아홉 마리의 흑룡은 마치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쿨럭!" 강기가 멸(滅)해지며 진원에 막대한 타격을 입은 구절창신은 시커멓게 죽은피를 토해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비록 흑창에 몸을 의지하려 하긴 했지만, 창두를 비롯한 그 절반이 깨끗하게 사라진 흑창은 황갈산을 제대로 지탱해주지 못했다. "...뭐였소, 그것은?" 황갈산은 꾸역꾸역 쏟아져 나오는 피를 억지로 삼키며 그에게 물었다. 절대쌍존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패배하게 될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 정도는 이미 옛날에 알고 있었기지만, 자신의 창을 꺾은 그것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네가 느낀 대로." "내가 느낀 대로라." 한 손으로 눈가를 짚고 사마의 흑안을 다시 봉인한 그의 참으로 성의 없는 대답에 황갈산은 처음으로 차가운 표정을 깨고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느낀 것이 무엇이었을까. 압도적으로 강대한 힘? 미쳐버릴 듯만 싶은 공포? 아니다. 굳이 그것을 표현하자면, 마치 죽음과 같이 거역할 수도, 거스를 수도 없는 절대적인 무엇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대는...대체 누구요?" 그 절대적인 무언가 앞에 결국 패배를 인정한 황갈산이 던진, 생사판괴라든가 하는 것을 벗어나 좀더 근본적인 무언가에 대한 물음에 그는 무심히 등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파타시." 흑의장포의 옷자락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마치 바람을 탄 그림자처럼 어둠 속에서 흔들리는 모습이 황갈산의 두 눈에 똑똑히 박혀 들어왔다. "성은, 없다." 그는 딱히 뭐라 정의 내릴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의 황갈산을 뒤로한 채 서서히 발걸음이 옮겼다. 충돌의 순간, 가뜩이나 짙은 밤의 어둠이 순간적으로 더더욱 짙어지며 주변의 모든 빛을 집어 삼켰기에 그 내부에서 일어난 일을 아는 이는 오직 당사자인 그와 황갈산 둘뿐. 심지어 백발여제조차 그 어둠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보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단 하나, 생사판관이 사신오왕 중 하나인 구절창신을 꺾었다는 사실뿐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대형!" '됐군.' 죽지는 않았지만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정도의 부상을 입고 사방에 늘어져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고 있는 금창풍룡대의 가운데서 히죽 웃고있는 철방의 인사를 받으며 그는 무심히 판단을 내렸다. 목적을 이뤘으니 모험은 성공한 셈이지만, 그 모험의 대가는 작지 않았다. '예상이상.' 한계 이상의 마력을 끌어낼 경우 오염(汚染)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부작용을 흑사수(黑死手)의 영력을 통한 기맥의 차단으로 없앴고, 불균형적인 격발을 할 시 힘이 한곳에 몰려 기맥을 터질 수 있는 위험을 막기 위해 사사혈시공(死邪血尸功)을 응용해 혈도에 잠재워둔 귀기를 동시에 촉발시켰다. 이처럼 서(書)의 비술과 동(東)의 강시공을 응용해 창안하고 정밀한 실험과 안정적인 연습을 거쳐 완성한 강마(降魔)의 비술(秘術)은 그 효과를 볼 때 충분히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실전에서 사용한 것이나 모든 마력을 격발 시킨 것 모두 처음인 만큼 여러 가지 문제가 드러났다. '보완이 필요하군.' 우선 지나치게 강맹한 마력의 흐름 때문에 귀기의 운용이 거의 불가능하다. 또한 구멍난 항아리에 담긴 물처럼 오랫동안 유지하기 힘든 반면, 화려한 만큼 허무하게 사라지는 불꽃처럼 사용 후의 후유증이 너무 크다. 전신을 충만하게 채우던 마력은 이제 한 방울도 보이지 않았다. 혈도에 잠재돼있던 귀기 또한 완전 소진됐다. 영문 안에는 아직 약간의 귀기가 남아있지만, 한계 이상의 마력이 폭주한 영향으로 너덜너덜해진 기맥은 귀기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약화돼있던 신체가 강마의 비술에 의해 무리한 부담을 받고 부상을 입어 더욱 나빠진데다가, 마력까지 소진되어 운신조차 힘드니 현재 전투력은 거의 바닥을 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뿌리가 드러날 때 글은 죽어버리는 법. 그러나 이 그림자 없는 이는 뿌리를 적절히 숨기는 법을 모르므로 아주 조금씩 조금씩만 파내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파멸의 균열에 대한 묘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부족한 감이 200%. 어째든 저기 휘말리면 어지간한 건 다 작살. 이라고 생각하면 되실듯...일명 먼치킨 스킬입니다. OTL 하지만 사마에 속한 힘은 강력하긴 해도 그만큼의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명심하시길. 추천. 리플. 선작. 감상. 서평 잊지 마시길. 부족하면 융단폭격은 없습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18 12:48:01 고친날 2005-08-18 12:48:01 읽은수 7018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22.사신개안(死神開眼).(7)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좋지 않군.'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뜨기로 결론을 내린 그가 소매를 떨치자, 불타오르는 듯한 갈기의 반투명한 유령마가 어둠 속에서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무리인가.' 일시적으로 덮어놨던 피로가 다시 솟아나 심신을 짓누름에 따라 통제력까지 떨어지는 것을 느낀 그는 네 마리의 유령마 중 셋의 통제권을 상급의 사령술사인 금호, 남국과 최고위 망자인 철방에게 각자 하나씩 넘기고 말 위에 올랐다. "타라." 한줄기 무심한 음성과 함께 천무가 매우 당연하다는 듯 그의 뒤에 몸을 실을 때, 백발여제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금호와 남국을 돌아보았다. "동생들, 기마술에 자신이 없는 이 누님을 당연히 뒤에 태워줄 거지?" 유령마를 통제하던 금호와 남국은 그녀의 말에 흠칫하며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5년 동안 기마술에도 나름대로 힘을 써왔던 만큼 뒤에 누구 한 명 태운다고 문제될 것은 없지만, 백발여제의 눈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예감은 본능적으로 그들의 고개를 가로젓게 만들었다. "에...저희들도 기마술에 별로 자신이 없습니다." "어머, 그래?" 백발여제의 눈이 살짝 가늘어지자 식은땀을 삐질 흘리던 금호는 문뜩 이독제독이라는 명언을 떠올리고 급히 말을 돌렸다. "아, 그러시면 철방 형님과 같이 타시면 되겠군요. 그럼 형님, 잘 부탁드려요." "험, 내가 한 기마술 하지." 그녀가 말 위에서 가벼운 헛기침을 하는 철방을 살짝 흘겨볼 때, 금호와 남국은 번복의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재빨리 한 유령마 위에 같이 올라탔다. 그러한 두 청년을 본 그녀는 눈을 더더욱 가늘게 떴지만, 잠시 후에는 눈웃음을 지으며 화사한 미소를 회복했다. '훗, 이것도 나름대로 애교로 봐줄까?' 한 번 좋게 보면 뭘 해도 좋게 보이는 법이다. 철방의 뒷자리가 그다지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명색이 사신오왕 중 하나인 불사패왕인데다가 두 동생의 형님이자 오라버니의 수하를 너무 무안하게 할 수는 없었던 만큼 선선히 철방의 뒤에 자리잡았다. 청홍미화가 마지막 말에 합승하자, 네 마리의 유령마는 허공을 박차고 천공을 향해 쭉쭉 뻗어가기 시작했다. 구절창신과 금창풍룡대에겐 더 이상 그들을 막을 생각도, 힘도 남아있지 않았기에 탈옥은 무사히 끝을 맺을 듯 싶었다. 그러나, 짙은 한밤중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 하나의 괴성은 그러한 그들의 희망을 완전히 부숴 버렸다. "쿠오오오오오---!!" 하늘을 울리고 땅을 뒤흔들 듯한 거대한 굉음 안에 담긴 정명한 기운에 유령마의 갈기가 거세게 요동쳤다. "이건 또 웬 개소리야?" 뭔가 낯설면서도 익숙한 듯한 울음소리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던 일행은 어둠 저편의 무언가를 확인하고 하나같이 뜨악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찬란하게 빛나는 푸른 비늘과 머리에 솟아있는 두 개의 뿔. 부릅뜬 두 눈과 쩌억 벌어진 거대한 입. 하나의 거울을 여의주마냥 쥐고있는 앞발과 굵직한 몸통 뒤로 길게 늘어져있는 꼬리는 그들이 아는 어떠한 존재와 참으로 완벽하게 일치하는 모습이었다. "청룡(靑龍)?" 헬카즈와 같이 기이한 생김새에 사악한 기세를 풍기는 쌍두마룡이 아닌, 그야말로 어딘가의 벽풍이나 고대의 신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한 마리의 청룡이 천공의 어둠을 가르며 그들을 뒤쫓아오고 있었다. 이 느닷없는 상황에 총력을 다해 황당해 하고있던 그들을 일깨운 것은 그 청룡으로부터 터져 나온 한줄기 노성이었다. "네 이놈들!! 게 서지 못할까?!" "저, 저 씨부랄 영감탱이가...!" 마령안(魔靈眼)을 일으켜 뒤를 돌아본 철방은 청룡의 등위에 타고있는 무영투괴(無影偸怪)를 확인하고 부릅뜬 두 눈에서 불똥을 튕겼다. 불같이 폭급한 성질을 지닌 철방이 그야말로 불구대천지원수나 다름없는 무영투괴를 보고도 가만 넘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대형!!" 살인허가를 요청하는 철방의 외침에 그는 무심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도봉의 도술에 비추어 볼 때 천안도괴(天眼道怪)의 둔갑인 듯 싶은 청룡의 등위에 있는 것은 무영투괴만이 아니다. 정의검황(正義劍皇), 협의검(俠義劍), 칠독절명(七毒絶命)이 모두 그 뒤에 타고 있다. 또한 저 어둠 저편에서 먼지구름을 일으키는 기마들은 정의성의 정예고수들일 터. 지금 상태로는 승산이 지극히 적을 뿐만 아니라 쓸데없는 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바로 그때, 천안도괴의 둔갑인 청룡의 입이 쩌억 벌어지며 태극천리경과 입 안쪽으로부터 환한 빛과 함께 무시무시한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언젠가 쌍두마룡(雙頭魔龍)으로부터 본 적 있는 듯한 광경에 두 청년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려버렸고, 철방의 두 눈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 부릅떠졌다. "흩어져라." 그의 무심한 음성에 서로 그들은 더 이상 머뭇거릴 틈도 없이 곧바로 따랐다. 철방의 유령마는 아예 미끼가 되기로 작정을 한 듯 속력을 늦추며 직선으로 뻗어갔고, 금호와 남국은 청홍미화와 함께 우측으로 유령마를 몰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뚫어보는 천안(天眼)은 결코 사신의 그림자를 놓치지 않았다. 콰르르르르릉-!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청룡의 입으로부터 한줄기 빛이 터져 나온 순간, 청룡의 입으로부터 뻗어 나온 한줄기 거대한 뇌전(雷電)이 마치 살아있는 뇌룡(雷龍)처럼 꿈틀거리며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안돼!!" 뇌전이 그와 천무의 유령마를 향해 뻗어 가는 것에 기겁한 철방은 다급히 흑룡비를 우수수 쏟아냈고, 백발여제 또한 소매로부터 한줄기 강기를 떨쳤다. 콰과광!! 흑룡비와 강기조차 둔갑으로써 얻은 용의 권능에 주술의 힘까지 더해진 뇌전을 막아내지 못했지만, 그 대신 뇌전의 방향을 아주 약간이나마 비틀 수 있었다. 덕분에 그 뇌전의 줄기는 그와 천무가 탄 유령마를 스쳐 허공으로 날아갔지만, 그렇다고 그와 천무가 뇌전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위험하다' 급히 펼친 귀갑(鬼甲) 고스트 아머(ghost armor)와 귀순(鬼盾) 고스트 실드(ghost shield)의 술로 뇌기(雷氣)를 받아내 뇌전의 영향을 벗어난 그는 비릿한 혈향을 삼키며 빠르게 생각했다. 이번 한 번은 어떻게 넘겼지만, 만약 다시 한 번만 더 뇌전을 받으면 방도가 없으니 방패막이를 내세워 추적을 뿌리치는 수밖에 없다. 냉정하게 판단을 내린 그가 마악 명령을 내리려던 순간, 흐릿해진 감각에 한줄기 날카로운 예기가 파고들었다. 촤악!! "은공!" 가슴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핏줄기가 저 밑의 허공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급히 몸을 비틀어 급소를 피했다고는 하지만, 등을 관통해 가슴으로 튀어나온 뜨거운 무언가는 급소를 비껴낸다고 해서 버텨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 다 죽여버리겠다!!" "형님, 안돼요!" 흐릿해지는 의식으로 사방의 혼잡함이 스쳐 지나가는 가운데, 그는 가슴을 관통한 상처를 통해 생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확실하게 감지했다. '귀기가 필요하다.' 이대로는 재생의 비술로도 죽음을 피할 수 없으나, 불사의 비술을 펼쳐 상처를 치유하기에는 귀기가 부족하다. 필요한 것은 귀기의 보충, 또는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 찰나의 순간, 그는 흑의장포 안에 잠들어있던 망령들로부터 귀기를 뽑아내 불사의 비술을 펼쳤다. 그러나 비술을 펼치기에는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귀기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 덕분에 귀기를 뽑아내는 과정에서 절반이, 혈도에 잠재시키는 과정에서 다시 절반이, 혈도에서 귀기를 격발 시켜 불사의 비술을 펼치는 과정에서 또다시 절반의 귀기가 헛되이 흩뿌려졌다. 가슴의 부상이 회복되는 만큼 흑의장포 안에 든 망령들의 수 또한 급속히 줄어갔다. 무리한 귀기의 운용으로 인해 내상까지 쌓여갔지만, 다른 곳에까지 생명력을 분할할 여유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흑의장포에 든 망령을 단 하나도 남지 않고 흩어버리고 나서야 생기가 유출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부상을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한 그의 상태는 계속 악화돼갔다. "오라버니, 피하세요!" 백발여제의 경호성과 함께 점차 둔감해지고 있던 감각을 저릿하게 울리는 거대한 기운에 그가 급히 유령마를 틀려던 순간, 한줄기 새하얀 백광이 그와 천무를 덮쳤다. 콰르르르르릉--!! =============================================== 좀 강해졌나 싶더니만 결국 다시 한번 작살. 객관적으로 보자면 분명 우라지게 강한데,도 어째 깨지는 걸 피하지 못한다. 다음 장 또한 이번 장 못지 않게 흥미진지합니다. 예고: 경각에 달한 위기. 깨어나는 맹약. 드러나는 혼란의 씨앗. 추천. 리플. 선작. 감상. 서평 잊지 마시길. 부족하면 융단폭격은 없습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19 00:28:00 고친날 2005-08-19 00:28:00 읽은수 5794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23.위기일발(危機一髮).(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사신의 길에는 위험이 따르니, 죽음의 벼랑은 한 치 앞에서 멀어지지 않는다.- "아악!!" 금호는 비명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악몽이라도 꾼 듯 흐릿하게 흔들리는 눈과, 식은땀에 젖은 창백한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금호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정상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탁! 어깨에 놓여진 하나의 섬섬옥수를 반사적으로 쳐낸 금호는 흐릿한 초점을 애써 맞추며 그 손의 주인을 확인했다. "국..국아?" 대리석을 빚어 만든 듯만 싶은 아름다운 얼굴에 한껏 걱정스러운 표정을 띄운 채 자신을 마주보고 있는 친우를 잠시 동안 멍하니 바라보던 금호는 갑자기 남국을 덥석 끌어안았다. 엉겁결에 끌어 안기게 된 남국은 순간 당혹감을 금치 못했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고 천천히 친우의 등을 다독여주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악몽에서 벗어난 금호는 남국을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에, 음...미안." 갑작스러운 행동에 대한 금호의 사과에 남국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무리 악몽 때문인데다가, 사과를 했다고 해도 일말의 멋쩍음을 어쩌지 못한 금호는 뺨을 긁적이며 주변을 줄러보다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백발여제님?" "왜, 동생?" 벽 쪽에 서있던 백발여제는 금호의 말에 화사한 미소를 지었지만, 그때는 이미 청년의 머릿속에 자신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주시하고 있던 그녀의 모습이 똑똑하게 틀어박힌 뒤였다. '표정관리가 아주 변검수준이네.' 아주 극과 극을 달리는 표정변화에 감탄까지 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금호의 모습에 백발여제의 화사한 미소를 타고 한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좋은 구경을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표정관리를 깜빡해버린 것이 문제였다. 삼황오제로서의 체면은 그냥 넘길 수 있어도, 누님으로서의 체면까지는 그냥 넘길 수는 없는 백발여제였다. "호호, 그런데 호칭이 어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동생?" "아...네, 누님." 백발여제의 뭔가 알지 못할 기세에 눌린 금호는 어느새 방금 전 있었던 표정변화를 깨끗하게 잊어버렸다. 노련함으로 그것을 눈치챈 그녀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을 때, 금호는 악몽 때문에 잊고 있던 상황을 기억해내고 얼굴을 굳혔다. "추적을 뿌리친 겁니까?" "동생이 그렇게 딱딱하게 말을 하면 이 누님은 너무 슬픈데..." "...추적을 뿌리친 건가요?" "동생의 생각대로야."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답하는 백발여제의 모습에서 절로 떠오른 '역시 푼수 큰누님.'이라는 생각을 고개를 흔들어 떨친 금호는 재차 질문을 던졌다. "모두 무사하십...신가요?" 청룡의 사나운 포효와 함께 밤하늘을 환하게 밝히던 뇌전과 검강을 머금은 채 허공을 가로지르던 한 자루의 검. 그 밑에서 모든 이들이 무사히 빠져 나왔다면 기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러나 기적이란, 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청홍미화 두 아이는 먼저 수정궁으로 돌아갔단다. 하여튼 요즘 젊은애들은 왜 그렇게 몸이 약한지 모르겠구나." 아무 문제없다는 듯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청홍미화를 타박하는 백발여제였지만, 금호는 그 이면에 숨겨진 상황을 눈치챌 수 있었다. 청홍미화가 멀쩡하다면 사조인 백발여제를 두고 먼저 수정궁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다. 십중팔구는 깊은 중상을 입었을 터이고,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을지도 모른다. 백발여제의 명에 따라 그들을 보호하는데 전력을 다했던 두 여인을 떠올린 금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힘을 쌓고자 노력해도, 아직까지 보호받는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에 대한 무력함이 금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형님과 사부님, 천형은 어떻게 되셨나요?" 검황의 손에서 날려진 한 자루 검이 사부의 등을 꿰뚫던 광경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아무리 온갖 사이한 주술에 통달한 사부라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검황의 검에 등이 관통당하고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오라버니하고 천공자는..." 살짝 흐려지는 말꼬리, 그것은 좋지 않은 예감을 불러들였다. "...결국 잃어버렸단다."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한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 싶었던 금호는 곧 그 '잃어버렸다'가 말 그대로의 의미임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대한 뇌전에 휩쓸린 이후, 그와 천무를 태운 유령마는 어디론가 미친 듯이 날아가 버렸다. 이미 사령술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금호와 남국은 그것이 통제력의 상실에서 비롯된 폭주라는 것을 알았지만, 추적으로 인해 워낙 급박한 상황과 유령마가 스스로의 귀기를 불태움으로써 만들어낸 무시무시한 속도 덕분에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그 바로 뒤, 추적을 견제하려고 꺼낸 사혼귀(死魂鬼)가 정의성주의 검에 박살남으로써 극심한 타격을 받은 금호는 남국에게 자신의 유령마에 대한 통제권을 넘겨주고 그대로 혼절해버렸다. 남국은 금호의 몫까지 유령마를 통제하느라, 백발여제와 철방은 검황과 청룡을 상대하느라, 청홍미화는 남국과 금호를 보호하느라 손이 묶인 통에 결국 폭주하는 유령마를 고스란히 놓쳐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천안도괴 또한 그와 천무를 추적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태극천리경이 있는 이상 완전 따돌릴 수야 없지만, 천안도괴는 한동안 운신하지 못할 정도의 내상을 입었으니 어느 정도 시간을 끌 수 있을 거란다." "다행이로군요." 말로는 다행이라고 했지만, 통제력까지 상실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로 폭주하는 유령마에 실려 사라진 사부가 과연 무사할 지, 설령 무사하다 하더라도 추적은 완전히 뿌리칠 수 있을지, 정의성과 등을 돌린 이제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를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했다. "쯧쯧...걸핏하면 픽픽...쓰러지고도 불알 달린 사내새끼라고..." 익숙한 음성에 고개를 돌린 금호는 문가에 등을 기대서 있는 거한을 향해 부루퉁한 음성으로 답했다. "제가 뭐 어쨌다고요, 형님?" 불편한 심기에 역린까지 건드려진 금호가 두 눈을 치켜 뜨자, 남국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얽혀들고 백발여제의 미소가 살짝 흐릿해졌다. "눈까지...치켜 뜨니까 완전 계집애...구만." "형님!!" "왜...내가 무슨 틀린...말했냐?" 슬쩍 미간을 찌푸린 철방의 퉁명스러운 말대로, 치켜 뜬 두 눈썹이 미려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금호의 얼굴에는 한층 더 진득한 염기가 흐르고 있었다. 체격 또한 호리호리한 것이 어지간한 여인네보다 더 할 정도이니, 만약 얼굴을 드러내고 다닌다면 스스로 아무리 남정네라 우겨도 누구나 어설픈 남장을 한 천하제일미녀라고 여길 터였다. 하지만 진실일수록 더욱 날카롭게 상처를 후벼파는 법. 몸을 부들부들 떨던 금호는 결국 치솟는 화기를 참지 못하고 화풀이 격으로 하나의 비도를 철방에게 날렸다. 투욱! 강철과 같은 근육에 튕겨진 비도가 바닥에 떨어지며 철방의 미간이 꿈틀거리는 것을 본 금호는 조금 떨떠름한 심정이 되었다. 금강불괴에 근접한 피륙을 뚫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지만, 그 여느 때보다 묵직한 철방의 표정은 분명 의외였다. "썩을..." 나지막한 욕설을 내뱉은 철방이 비도를 튕겨낸 목덜미를 천천히 훑자, 손가락이 지나간 부분이 살짝 갈라지며 하나의 핏방울이 또르륵 굴러 내렸다. "형님, 그 상처는...?" 설마 손톱으로 자해라도 한 건가 싶어 물음을 던지자, 장내에는 미묘한 공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남국의 돌덩이 같이 굳은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끼었고, 백발여제의 화사한 미소에는 알게 모르게 난감함이 떠올랐다. 묵직한 얼굴에 무언가 흐릿한 표정을 떠올린 철방은 대답 대신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비도를 주웠다. 그리고 그 허리가 다시 펴졌을 때, 금호의 부릅떠진 두 눈에는 그야말로 못 볼 것을 본 듯한 경악이 떠올라 있었다. 툭. 철방이 던져준 비도가 침상에 가볍게 떨어졌지만, 장내에서 그것을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혀, 형님...?" 우측면만을 보인 채 등을 기대고 있을 때는 미처 보지 못했다가, 비도를 줍기 위해 몸을 돌리고 허리를 숙였을 때서야 시야에 들어온 철방의 좌측면에 할 말을 잃고있던 금호의 귀에 한줄기 전음이 파고들었다. [추격을 뿌리치느라 무리하게 나선 덕분에...] "칼침 맞...은 거 첨 보냐? 닥...치고 잠이나...자라, 엉?" 백발여제의 전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인상을 험악하게 찡그린 철방은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빠져나갔다. 덕분에 그녀의 전음은 묘한 여운만을 남긴 채 끊겨졌지만, 금호의 머릿속에는 그 뒤에 이어질 내용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비도에 의해 베여진 육신. 어눌한 말투. 철방에게 있어 그것이 뜻하는 의미는 단 한가지뿐이다. "...그럴 수가..." 안면이 새파랗게 질려버린 금호는 부디 자신의 추정이 빗나가기만을 기원하며 남국과 백발여제를 돌아보았지만, 그들의 얼굴에 짙게 깔려있는 그림자는 그것을 철저하게 배반했다. 그 추정대로라면 문제는 진정으로 심각하다. 금호와 남국으로서도 그저 약간의 시간을 지체할 수 있을 뿐, 그 외에는 설사 천하삼대신의가 오더라도 어쩌지 못할 것이다.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이는 오직 단 한 명뿐. 잃어버린 그를 다시 찾을 때까지 시간이 기다려주지는 않을 테지만, 그 외의 방도 따위는 없었다. 아무리 넉넉히 잡는다고 해도 남은 시간은 단 한 달. 만약 한 달 안에 그를 찾지 못한다면, 신이 아닌 이상 그 누구도 철방을 구하지 못하리라. ======================================== 한 걸음을 옮겼을 때,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잔영뿐이니...필살의 이형환위! 이번 장은 이형환위가 연달아 펼쳐집니다. 선작. 추천. 감상. 서평. 리플 잊지 마시길. *특히 추천은 사방팔방에 많이많이 해주시길.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19 06:16:31 고친날 2005-08-19 06:16:31 읽은수 5382 [ 5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23.위기일발(危機一髮).(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쏴아아아아-!!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쏟아져 내린 폭우에 의해 산의 봉우리에서 만들어져 더욱 낮은 곳을 향하던 물줄기 중 한 갈래는 바위에 뚫린 작은 구멍에도 여김 없이 스며들었다. 오랜 시간을 거쳐 좁고도 길고 구불구불한 구멍을 통과한 물줄기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짙은 어둠과 축축한 습기로 가득한 동굴의 내부였다. 동굴의 서늘한 벽을 타고 흘러내린 물줄기는 그 밑의 움푹 파인 곳에 고여 하나의 작은 웅덩이를 이뤘다. 구멍을 통과하며 흙먼지 따위가 걸러졌기에 웅덩이의 수면은 마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처럼 맑고도 깨끗했지만, 단 한 줄기의 빛도 비춰지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 깨끗함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했다. 그때, 칙칙한 어둠만을 비추고 있던 웅덩이의 수면에 하나의 빛이 떠올랐다. 시작은 너무나 작고도 흐릿했지만,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그 빛은 점차 크고 또렷해졌다. 은은한 빛을 발하는 하나의 구슬을 들고 모습을 드러낸 청년은 웅덩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그 안에 작은 구슬을 담가본 뒤 한 손으로 물을 떠 입술을 적셨다. 시원한 물을 입안에 담고 맛을 살펴본 청년은 잠시 후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수통에 물을 담았다. 웅덩이의 물은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수통을 반 정도는 채울 수 있었다. 수통을 갈무리하고 몸을 일으킨 청년은 한차례 주변을 둘러본 뒤 매우 주의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청년이 가끔씩 허리를 숙여 세밀한 동작으로 동굴의 바닥을 정리할 때마다 아주 조금씩이나 남아있던 흔적은 깨끗하게 사라졌다. 그렇게 단 하나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신중하게 물러난 청년은 한 지점에서부터 기이한 걸음을 밟았다. 전 일보. 우 일보. 좌 이보. 전 이보. 후 일보. 우 일보의 식으로 조금씩 나아가던 청년이 그 기이한 걸음을 멈춘 것은 대략 3장이나 되는 거리를 지난 뒤였다. 단 3장에 불과했지만, 그 안과밖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첫 번째 차이가 몇 개의 구슬에서 흘러나오는 빛으로 환하게 밝혀져 있는 것이라면, 두 번째 차이는 습하고 서늘한 바깥쪽에 비해 안쪽은 기이할 정도로 상쾌하고 훈훈한 공기가 맴돌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세 번째 차이는, 동굴 한가운데 한 사내가 누여져있다는 점이다. 야명주를 내려놓고 아직까지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사내의 맥을 짚어본 청년은 잠시 후 수통을 꺼냈다. 주르륵... 살짝 기울어진 수통으로부터 흘러나온 맑은 물이 사내의 상처를 적시며 핏물과 함께 흘러내렸다. 굳은 피를 씻어낸 청년은 품에서 꺼낸 금창약을 도구를 사용해 조심스럽게 상처에 발랐다. 피나 상처와 접촉하지 않도록 신중에 신중을 기했기에 오랜 시간이 소모됐지만,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고 정성을 다했다. 희고 깨끗한 피부와 대조되는 흉한 상처를 붕대로 꼼꼼히 감은 청년은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의술의 조예가 깊지 않은 이가 봐도 그 위급함을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사내의 부상은 깊었다. 청년의 응급조치는 상당한 편이었지만, 사내에게 필요한 치료는 단지 부상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품에서 꺼낸 작은 수건을 물에 적신 청년은 평소의 서늘한 체온 대신 후끈한 열기를 흘리고 있는 사내의 이마에 그것을 올려놓았다. 사내의 상태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정상이 아닌 만큼 의원의 제대로 된 치료가 시급한 것은 분명했지만, 이러한 장소와 상황에서 제대로 된 치료하기 힘든 것 또한 명백했다. 쿠궁! 옆에 놓여진 검은 옷자락과 묵봉을 정리하던 청년은 바깥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동굴을 울리는 굉음과 미미한 진동. 청년이 얼굴에 떠올라있던 부드러운 미소에 아주 옅게나마 긴장감이 스쳤다. 저 굉음과 진동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청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진(陣) 너머로 몇몇 이들이 힐끗 모습을 드러냈다. 너무나 짙은 어둠에 워낙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지만, 진의 내부에 있던 청년은 그들의 모습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진 앞에서 잠시 서성거리던 이들은 무언가 신호를 주고받은 뒤 물러났지만, 그렇다고 아예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잠시 후, 어둠 저편으로부터 흐릿한 무언가가 서서히 흘러들어 진 앞을 맴돌았다. 기류조차 차단하는 절진이 아니었다면 고스란히 그 안까지 흘러들었으리라. 그때, 어둠의 저편에서 한줄기 푸르스름한 섬광이 날아와 허공에 박혀들었다. 콰광!! 한 자루의 비수를 중심으로 일어난 폭발은 진을 통째로 뒤흔들었다. 진 자체가 깨지지는 않았지만, 오랜 준비 없이 급하게 만들어진 진이었던 만큼 강렬한 충격에 의해 약간의 균열이 생겨나는 것까지는 피하지 못했다. 미혼향이 진에 생긴 틈을 놓치지 않고 그 내부로 스며들자, 미리 대비하고 있던 청년은 침착히 두 개의 작은 단환을 자신과 사내의 입안에 물렸다. 단환의 공능 덕분에 미혼향은 그들을 해하지 못하는 듯 싶었지만, 시간이 경과해 단환의 힘이 떨어짐에 따라 미혼향의 약효가 점차 침범해오는 것만큼은 불가항력적이었다. 더 이상 방도가 없음을 깨달은 청년은 바닥에 단정히 앉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미동조차 없을 듯만 싶은 그 평온한 태도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모든 것을 각오한 듯 싶었지만, 그 이면에는 일말의 안타까움이 스며있었다. "저는 그렇다 치더라도 은공께서는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되는 분이시거늘...하늘로는 천기를 읽고 땅으로는 지형을 계산하며 사람의 인심을 살피는 삼재지(三才智) 중 무엇하나 소홀히 하지 않았지만, 미처 보지 못하고 놓쳐버린 하나의 변수가 이런 결과로 돌아왔으니 결국 세상에 완전이란 없는가 봅니다." 미혼향은 몸에서 서서히 힘이 빼내기 시작했지만, 이미 몸을 굳힌 청년은 그에 상관치 않고 온유한 음성을 이어갔다. "비록 이런 곳에서 이렇게 지키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째든 은공을 지옥 끝까지 따르기로 한 맹세는 지키게 됐군요." 힘이 빠져나간 몸이 바윗덩어리와 같이 무겁게 늘어지는 가운데 갖가지 지독한 환상이 뇌리를 침범하기 시작했다. 정신력만으로 버틸 수 있는 한계에 달한 청년은 마지막 안타까움을 떨쳤다. "그럼 지옥에서 다시 뵙기를..." 원래 그렇게 하고자 한 것인지, 아니면 더 이상 말 할 기력이 남지 않았기 때문인지 말꼬리를 살짝 흐린 청년은 조용히 눈을 내려 감으며 의식을 잃었다. 바로 그때, 하나의 새하얀 손이 바닥에 놓여있던 묵봉을 서서히 움켜쥐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19 08:06:53 고친날 2005-08-19 08:06:53 읽은수 5857 [ 9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23.위기일발(危機一髮).(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창신과 도괴의 내상이 너무 깊구려." 검황의 침중한 음성에 투괴는 한탄을 금하지 못했다. "허, 어찌 이럴 수가..." 창신이 패한 것은 그들에게 있어 진정 충격이었다. 주술도 사용하지 않은 정정당당한 겨룸에서 화경의 고수가 꺾였다는 것은 그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다. 생사판괴가 화경의 고수라도 되지 않는 이상 뭔가 술수를 쓴 것은 명백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구절창신 본인이 패배를 인정하고 백발여제까지 공증인으로 선 이상 비무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것은 구절창신의 눈을 의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도괴의 내상 또한 창신의 패배 못지 않은 충격이다. 대형의 부상에 격노해 눈을 까뒤집은 채 유령마에서 청룡의 머리 위로 뛰어내린 철방은 무영투괴의 전력을 다한 일장에 옆구리가 통째로 박살날 때도, 협의검의 검에 안면이 베어질 때도, 유형검강에 도술까지 더해진 정의검황의 검이 팔을 자를 때도, 그저 최소한의 방어만을 한 채 청룡으로 둔갑한 천안도괴의 몸에 대도를 박아 넣는 데만 열중했다. 온갖 잡놈에 독종들을 다 봐온 그들로서도 절로 흉신악살이 연상될 정도로 날뛰어대던 철방이 결국 힘을 잃고 무너져 내렸을 때, 천안도괴 또한 피를 폭포수처럼 쏟아내며 땅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그 급급한 상황 때문에 그들은 백발여제가 철방을 구해 가는 것을 막지 못했고, 유령마를 따라잡을 수단이 없어진 이유로 추격은 일단락 됐다. 만약 칠독절명 당장로의 빠른 조치가 없었다면, 극심한 부상과 함께 사사혈독에 중독까지 돼버린 천안도괴는 그날 부로 명을 마감했을 것이다. "태극천리경을 쓸 수 없으니, 하늘로 달아난 그들을 대체 어찌 추격해야되겠소?" 물론 모산파로 가면 태극천리경을 사용할 수 있는 도사야 충분히 있다. 그러나 어느 세월에 모산파에서 도사를 불러온단 말인가? 더구나 그들이 추적하는 대상은 다른 누구도 아닌 무림삼괴의 일인 생사판괴이니, 아무리 태극천리경이 있더라도 추적에 많은 난행을 겪게될 것이다. '어찌하여 이렇게 됐단 말인가?' 무영투괴는 내심 한탄을 금치 못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어떻게든 수를 써서 전력을 더해놨을 것이다. '하필이면 이런 결과가 나오다니.' 이마에 손을 짚고 눈을 감자 여러 가지 상념이 스쳐지나갔다. 무언가 잘못됐다. 잘못돼도 한참이나 잘못됐다. 구절창신과 금창풍룡대가 놈에게 죽는 것에서부터 놈을 놓치는 것까지 여러모로 염두에 두었지만, 놈이 부린 술수는 그 중에서도 최악의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깊은 상념에 잠겨있던 무영투괴는 잠시 후 두 눈을 뜨며 검황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생사판괴는 이미 놓친 것이나 다름없으니, 추적은 포기하겠소." "허어?" 노련한 노강호이자 화경의 고수인 만큼 심신의 수양이 깊은 검황의 얼굴에 순간 주체못할 정도로 뚜렷한 당혹감이 고스란히 스쳐지나갔다. 생사판괴를 잡아 처벌하기 위해 천지문의 후계자까지 파문하며 모든 것을 계획했던 무영투괴가 선선히 추격을 포기하다니? 그러나 추적을 포기했다면 마땅히 그에 따른 대책이 있을 터. 그 대책을 듣기 위해 귀기울이던 검황은 또 한번 당황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겠소?" "검황께서는 이 일에 손을 때시라 하였소."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막힌다. 이 일이 어디 손에서 땐다고 땔 수 있는 일이던가?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마두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 검황의 생각이자, 정의성의 뜻이다. 그렇기에 생사판괴를 처벌하는데 있어 무영투괴 못지 않게 많은 손을 쓴 그들인 만큼, 이대로 그를 놓친다면 후환을 피할 수 없다. "진정이시오?" "농으로 생각하시오?" 천근만근처럼 무겁게 내려앉은 음성을 들은 검황은 더 이상 무영투괴의 진의를 의심하기 힘들었다. "후우...노부가 손을 때고도 대책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오?" "그렇소. 정확히 말하자면, 이 대책은 정의성에서 손을 때야만 제대로 펼칠 수 있소." 결국 묵직한 한숨을 토해낸 검황의 물음에 무영투괴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무엇일까. 무슨 대책이기에 정의성이 손을 때어야한다는 뜻일까? 천하의 검황으로서도 무영투괴의 의도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정파와 정사중도의 문파 또한 이 일을 방관해야하오." "허어!" 정파도 빼고 정사중도의 문파도 빼야한다는 말에 검황은 재차 탄성을 내질렀다. 생사판괴의 힘은 이번 탈옥을 통해 뼈저리게 알게 됐다. 그런데 모든 조력을 제외하면 대체 어떻게 생사판괴를 상대하겠다는 말인가? 아무리 무영투괴의 지혜가 깊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 지혜를 펼칠만한 최소한의 무력이 없는 이상 생사판괴를 상대하겠다는 것은 달걀로 바위 깨기나 다름없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오? 그 이유를 듣기 전까지는 아무래도 납득할 수 없겠구려." "이유라...그것은 그들이 제대로 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오."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니?" 천하에 천하삼십육세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 누가 도움이 된단 말인가? 그 무력이 비교적 약한 것으로 평가되는 문파라도 천하삼십육세에 포함되는 문파와 포함되지 않는 문파의 차이는 천지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들의 힘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나, 아마 대다수의 문파는 알아서 이 일에서 발을 뺄 것이오." "투괴께서 공증인을 청하셨을 때 답해준 문파들만 해도 여럿이거늘, 어찌 그런 말을 하시오?" "그때 놈은 우리에 갇힌 호랑이였으나, 지금은 우리를 빠져나간 상처 입은 호랑이오. 그 스스로 천하삽십육세에 버금가는 일인문파 수준의 주술, 구절창신의 눈을 속일 정도의 은신술, 화경의 고수와 정정당당하게 겨뤄 승리를 겨룬 무력까지 두루 갖춘 맹수와 척을 지고 싶어하는 이가 얼마나 되겠소?" 검황의 얼굴이 삽시간에 경직됐다. 천하사대마공을 방치한 이유가 무엇이던가. 악행을 저지르는 사파를 방치한 이유가 무엇이던가. 그들의 무력이 너무 강하기에, 그들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너무나도 막대한 피와 희생을 필요로 했기에 분루를 삼키며 어쩔 수 없이 방치해야만 했던 것이다. 금마뇌옥에 갇혀있을 때는 단지 심판만 하면 그것으로 곧바로 처벌할 수 있었다. 천안도괴와 힘을 합쳐 추적할 때까지만 해도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번 놓친 이상, 이제 더 이상 쉽게 생사판괴를 처벌할 생각은 포기해야만 한다. 또한 놈에겐 이미 철궁곡에서 살각을 무너트린 전적이 있다. 아무리 협의지로를 걷는 정파라 할지라도, 자칫 잘못하면 멸문지화의 재앙을 입을 수 있는 이상 섣불리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다. "만약 놈이 그저 달아나기만 했다면, 실제로 그렇든 않든 이빨 빠진 호랑이를 상대로 검을 들이대게 이끌 수 있었을 것이오. 차라리 놈이 구절창신과 금창풍룡대를 죽였다면, 하다 못해 사술을 사용하거나 백발여제의 힘이라도 빌렸다면 그것을 부정하고 정파인의 공분이라도 이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외다. 그러나 놈은 정정당당한 비무로써 구절창신과 금창풍룡대를 꺾은 데다가, 그 과정에서 단 한 명도 죽이지 않았소.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아시오?" 일파의 문주 정도 되는 이라면, 목숨을 건 비무에서 단 한 명도 죽이지 않은 그 행동에 '정파와는 척을 질 생각이 없다.'는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을 눈치챌 것이다. 그 간악한 놈은 단 한 번의 비무만으로 무력이라는 채찍과 협상이라는 당근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정파의 간섭을 극도로 축소시켜버린 것이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그에 아랑곳하지 않는 이들이 나서면 헛되이 희생될 수 있으니, 검황께서 그들을 잘 막아주시구려." 탈옥의 긴박한 상황에서도 그런 술수를 부린 생사판괴의 심계에 잠시 할 말을 잊고 있던 검황은 무영투괴의 말에 문뜩 한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정파와 정사중도의 문파가 반드시 물러나야 하는 이유. 그것을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투괴께서는 설마...!" "노부가 벌인 일이니, 그 마무리 또한 노부가 지어야 하지 않겠소이까?" 무영투괴의 안면에 분명히 드러난 굳은 의지에 검황은 다시 한 번 망연자실했다. 아무리 생사판괴가 용서치 못할 악인이라고는 해도, 꼭 그런 수까지 사용해야만 한다는 말인가? 물론 무영투괴는 어디까지나 정사중도의 인물이니 그런 수를 사용하는데 큰 거리낌이 없을 법했지만, 검황이 볼 때 무영투괴의 생사판괴에 대한 집착은 이미 도를 지나쳐있었다. -하다 못해 사술을 사용하거나 백발여제의 힘이라도 빌렸다면 그것을 부정하고 정파인의 공분이라도 이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외다.- 무영투괴가 내뱉었던 말이 문뜩 떠오른 순간, 검황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럴 리가 없지만, 어쩌면 무영투괴는 구절창신과 금창풍룡대를 죽어도 상관없는 버림 패로 사용한 것이 아닐까? 평소라면 섣불리 이런 생각을 떠올리지는 않았겠지만, 후계자를 파문하고 탈옥을 유도해 생사판괴를 처벌하고자 하는 등의 극단적인 조치를 생각해보니 아예 가능성이 없는 것만도 아니었다. '허어, 어찌 이런...!' 설마 싶은 마음에 정신과 진기를 집중해 무영투괴의 눈을 깊이 들여다본 검황은 그 안에 번뜩이는 기이한 광채에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번들거리는 눈빛이나 기이한 안광, 그것은 아무리 봐도 무영투괴와 같은 이가 지닐만한 눈이 아니다. '설마, 심마(心魔)라는 말인가?' 간혹 섭혼술 등의 사이한 술수에 홀린 이가 저런 눈빛을 지니기도 하지만, 무림삼괴 중 일인으로 환술에 있어 천하제일로 불리는 무영투괴가 그런 잡술 따위에 홀릴 리가 없으니 십중팔구는 심마일 것이다. '이 일을 어찌할꼬!' 검황은 그러한 투괴의 모습에서 무언가 잘못된 듯한 불안감을 느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깊은 한탄뿐이었다. ========================================== ...머리 좀 그만 굴려라...글쓰는 내가 다 비참해진다. OTL 그나저나 정파다운 정파 그리기가 정말 쉽지 않은 것이...왜 요즘 위선자 정파가 판치는지 아주 뼈저리게 실감했습니다. 심판으로 이어진다면 파타시는 인맥을 통해 처벌이 가벼워질 수 있습니다. 극악무도의 악인이 법망을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셈이랄까요. 파타시는 살아있는 것 자체만 해도 그 위험도가 핵탄두 급이니 어설픈 처벌은 차라리 안 하니만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걸 그대로 두자면 앞으로도 법망을 빠져나가는 일은 얼마든지 생길 수 있고, 위법을 행하면서까지 독단으로 처리하자면 그건 독선이 됩니다. 그리고 자신과 친인의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악을 응징하기 위해 나서면 그건 협의라는 허신의 광신도가 되기 쉽상입니다. 어느쪽으로 가든지 정파는 바보 아니면 위선자, 독선자 등이 되야하더군요. 그렇기 때문에 대의명분이라는 탈을 쓰고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위선자 정파나, 간단명론한 정선사악론이 나오기 쉬운 거겠지요. 지금까지 '왜 정파에 사파보다 악당이 더 많은거냐!'라고 한탄했던 저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해 뼛속깊이 반성하도록 하겠습니다. 저의 필력부족으로 인해 제대로 된 '정파다운 정파'를 보여드리지 못한 점, 독자분들께 사과드립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19 10:57:37 고친날 2005-08-19 10:57:37 읽은수 6210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23.위기일발(危機一髮).(4)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무엇이 문제였을까.' 비록 사감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가 내린 판단은 정확하고 효율적이었다. '미혼향을 사용한 것?' 독에 대해 내성이 있을 경우를 대비해 약(藥)에 가까운 미혼향을 사용했다. 그것도 다름아니라 독림에서 받은 만큼 그 약효는 확실한 미혼향을 썼다. 이것까지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방심. 놈이 무력화됐을 거라 확신하고 일말의 방심을 한 것이 큰 화를 불러들였다. '동굴을 통째로 무너트리지 않은 것?' 벽력탄의 정밀한 사용으로 진만을 파괴했다. 동굴을 붕괴시키지 않은 것은 혹시나 숨겨진 통로가 있거나, 그 붕괴에서도 놈이 살아남을 것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차라리 대량의 벽력탄과 진천뢰를 사용해서 완전히 붕괴시키는 것이 더욱 확실했으리라. '상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놈이 사용하는 주술과 귀신에 대해서도, 천지문의 진법에 대해서도 이미 최대한 분석을 해두었다. 놈이 검황과 천안도괴에 의해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확신했다. 놈들은 무력했다. 최소한 그의 판단은 그랬다. 그러나 그것은 그릇된 판단이었다. 최소한 세 번의 판단을 거듭해야했는데, 성급함이 화를 불렀다. '놈을 노린 것?' 약자가 설자리는 없는 비정무림에 비록 상처 입었을 망정 아직까지 극독을 품고 있는 독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무엇보다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마지막 남은 저력을 모두 동원하며 사활(死活)을 걸고 이 일에 매달렸다. 배수진에서 배를 얻어 타 명을 부지하면 그 끝에 남는 것은 잡부라는 신분뿐이기에 나아가는 것을 선택했으나, 그 앞에 있는 것은 상처대신 죽음의 낫을 치켜들고 있는 사신이었다. '무엇이 문제였던가, 대체 무엇이...' 그가 망연히 자신의 생각을 더듬는 와중에도 동굴 내에서는 끊임없이 피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kedgan partnor!" "kinor kinor!" 7척 장신의 거대한 거구가 동굴 벽을 타고 미끄러지듯 움직인다. 손에서 휘둘러지는 창은 단번에 머리를 부수고 심장을 꿰뚫는다. 칼날과 같은 손톱이 살을 찢는다. 채찍과 같이 길게 늘어진 꼬리가 바닥을 휩쓴다. 전신을 뒤덮고 있는 비늘은 마치 갑옷과 같이 단단해 도검을 튕겨내고 어둠 속에서도 시퍼렇게 빛나는 도마뱀의 눈은 어둠 속에 스며든 그림자를 똑바로 향한다. "chuikc! chueac!" 들창코가 들썩거리며 거센 숨소리가 흘러나온다. 5척 단신의 땅딸막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길고도 육중한 언월도가 세차게 휘둘러지며 목을 자르고 가슴을 가르며 갈빗대를 쪼갠다. "chui-c! fireball-!" 화르륵! 두터운 가죽과 성성한 털로 뒤덮여있는 손에서 기다란 지팡이가 휘둘러지며 튀어나온 화염구가 어둠을 불태우며 사방을 밝힌다. 그 불꽃에 닿으면 순식간에 피와 살이 지글지글 끓어올라 숯 덩어리로 화한다. "krrrrrr-!" 사나운 울음소리와 함께 내리쳐진 앞발이 내장을 단번에 터트리며 몸을 통째로 날려버린다. 말뚝 같은 이빨이 목덜미를 쫘악 물어뜯으며 살을 찢고 뼈를 으깨 씹어 삼킨다. "네놈은, 네놈은...대체 뭐냐?" 양쪽 팔이 통째로 뜯겨나가고 두 다리가 분질러져 완전한 항거불능의 상태가 된 그가 넋을 잃은 듯 묻자, 묵봉을 쥐고 있던 새하얀 손의 주인으로부터 미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제 성은 크란." 그야말로 모기 목소리만큼이나 자그마한 음성이었지만, 사방의 소란을 무시한 채 오직 상대에게만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그는 그것을 들을 수 있었다. "이름은, 없습니다." 풋! 회광반조(廻光反照)로 한 순간 의식이 또렷해진 그는 마지막 잠력을 모조리 끌어올리며 입을 열어 하나의 구슬이 쏘아냈다. 비록 그 크기는 작지만, 벽력뇌가 비전의 화탄은 능히 사람 머리통 하나를 날려버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퍼엉! 구슬이 폭발하며 사방으로 그 파편이 튀어나왔다.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구슬을 쏘았던 그는 얼굴과 몸에 파편이 박혀 생명의 불씨가 꺼져 들어가는 와중에 흐릿한 눈으로 상대를 확인했다. "굳이 신분을 더하자면...붉은 맹약의 서(赤盟約之書)의 관리자." 순식간에 상대의 앞을 가로막은 인형의 차갑고도 단단한 철갑에는 단 하나의 파편도 박혀들지 않았다. 그리고 상대 또한, 아주 작은 찰과상조차 입지 않았다. 마지막 동귀어진의 수는 결국 허무하게 끝났다. "붉은 맹약자(赤盟約者)라고 할 수 있겠군요." 무언가 무거운 무게가 담긴 음성이었지만, 이미 회광반조의 끝을 향해 치달리던 그에게 그 알지 못할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인(人), 부디 뒷일을...' 마침내 생명의 불이 꺼지기 직전의 순간, 한 사람을 떠올리는 것을 끝으로 그는 고개를 떨궜다. 그의 수하들 역시 차례대로 무너져갔다. 어두운 동굴은 그들에게 있어 최적의 환경이었지만, 그들이 상대하는 존재들에게 있어서도 최적의 환경이었다. 인간이 태곳적에 잃어버린 본능과 야성을 지닌 존재들은 마치 늑대무리와 같이 사납고도 치밀하게 그들을 사냥했다. 마침내 그들이 단 한 명도 남지 않고 동굴의 바닥에 몸을 뉘었을 때, 존재들은 먹이의 피를 마시고 살을 뜯어먹으며 사냥의 성공을 축하했다. 비늘로 덮여있는 살 밑으로 차가운 피가 흐르는 손이 하나의 머리를 목에서 뜯어 고정시키자, 두툼한 가죽과 따듯한 피가 흐르는 손에 들려진 언월도의 칼날이 두개골의 위를 동그랗게 도려냈다. 머리 위에 뻥 뚫린 구멍으로 뇌가 훤히 드러나자, 두 존재는 뇌를 조금씩 퍼먹은 뒤 동료들에게 돌렸다. 철저한 약육강식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들이 압도적으로 강한 무력을 지닌 것도 아닌 이종족과 협력하여 먹이를 나눠먹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그러나 맹약(盟約)으로 이어진 이상, 그들은 이제 동료인 셈이다. "cruk...danke maeca ilda." 한 손에는 지팡이를, 몸에는 복잡한 문양이 그려진 장포를, 얼굴에는 화려한 문신을 한 존재가 두개골을 잘라 만든 잔에 붉은 피를 담아 앞으로 내밀자, 그는 주저 없이 잔을 받아들고 피를 한 모금 삼켰다. 영혼 깊은 곳에 잠들어있던 근원 된 어둠이 목 안으로 넘어온 피에 반응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미한 꿈틀거림일 뿐. 족쇄와도 같은 사슬에 속박된 어둠은 제대로 깨어나지 못했다. 그가 도로 내민 잔을 기울여 단번에 피를 들이킨 문신의 존재는 잔의 바닥을 손가락으로 훑어 피를 묻힌 뒤 그것으로 허공에 기이한 문양을 그렸다. "chuikc...carune canoce, ak-ruin, nours rio-rune!" 존재의 주문과 함께 허공에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빛으로 그린 듯한 붉은 문양이 새겨졌다. 존재의 지팡이가 그 중앙을 꿰뚫자, 허공을 잠시 맴돌던 붉은 문양은 허공 중에 스며들 듯 모습을 감췄다. "rri...aro, chuic. rebian. xain." "raduan" 종족 중에서 특히 예외적으로 뛰어난 지혜와, 태곳적부터 전승되어온 지식을 갖춘 존재의 엄중한 충고에 그는 감사를 표했다. 흉하되 현명함이 담긴 미소를 지은 존재는 그 뒤 동료들과 함께 만찬을 즐겼다. 아무리 예외적이라 해도 존재 또한 종족의 일원임은 분명했다. 그의 종족은 환상에서 비롯된 육체에 기반을 두고 타고난 본능을 추구하는 것을 본성으로 지니니, 인내가 필요한 상황이 아닌 이상 본능적인 욕구를 인내할 필요는 없었다. 숨결이 느껴지지 않는 철갑의 존재와 고요한 눈을 지닌 늑대만이 옆에 남아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운데, 그 둘에게 몇 마디 말을 한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까지 성장해주다니, 정말 다행이야." 비록 육체는 다치고 상처 입었을 망정, 그 영혼의 광대함과 어둠의 깊은 성장까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딱. 묵봉이 바닥을 내려찍을 순간, 흥겨운 만찬을 즐기고 있던 존재들의 밑에서 신비스러운 적광이 흘러나오며 몇 개의 마법진이 생겨났다. 존재들은 사냥한 먹이감과 함께 서서히 마법진으로 빨려 들어갔다. 다시 부름을 받을 때까지, 그들은 자신들이 왔던 곳에서 자신들의 삶을 누려가리라. 깊이 고개를 조아린 늑대와 무릎을 꿇고 예를 취한 철갑의 존재가 마지막으로 몸을 감추자, 홀로 남은 그는 나지막이 혼잣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아직 부족해." 어둠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어둠은 사슬의 속박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눈을 떠갔고, 어둠을 자유롭게 풀어준 사슬은 도로 깊은 심연에 빠져들었다. "그 부족함이 채워졌을 때 다시 보자. 나의 살해자(殺害者)여." 그의 나지막한 음성이 옅게 울리다가 사라졌을 때, 어두운 동굴은 다시 원래의 고요함을 되찾았다. ======================================= 우리의 주인공이 너무 깨지고 사는군요. 대체 어느 점이 무적이라는 건지 무척이나 궁금합니다.[그게 지금 누가 할 말이냐!]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20 01:06:54 고친날 2005-08-20 01:06:54 읽은수 5458 [ 9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24.혈우천하(血雨天下).(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사신의 계획 실행되니, 하늘에서 쏟아지는 피의 비에 천하는 붉게 물든다.- 철검문(鐵劍門)은 천하삼십육세에는 속하지는 않았지만, 칠정협칠사마(七正俠七邪魔) 중 일좌를 차지하고 있는 철검마(鐵劍魔)를 문주로 둠으로써 나름대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사파였다. 패왕지로를 걷는 철검마(鐵劍魔)는 강자를 상대함에 있어서는 물러섬이 없고 약자를 대함에 있어서는 강자의 자비를 아끼지 않으니, 정사를 떠나 대다수의 무림인들은 그를 무림명숙으로 인정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철혈성(鐵血城)에서 반갑자의 세월을 지내며 철검십이식(鐵劍十二式)이라는 절정의 독문검법을 스스로 창안해낸 철검마는 철검십이식 중 절반의 철검육식을 철혈성에 내놓고, 그 대신 자신을 따르는 수하들을 이끌고 독립하여 철검문(鐵劍門)을 개파했다. 그때 철검마를 따라 나온 세 명의 수하는 삼대당주로 활동하며 철검문의 부흥을 위해 반갑자의 인생을 바쳤지만, 장로(長老)직으로 물러난 뒤부터는 제자와 문도들을 가르치는데 전념하며 나름대로 한가롭고 여유로운 생활을 지내고 있었다. 그 세 명의 장로 중에서도 가장 내공이 심후하고 주안술을 익혀 겨우 30대의 중년인의 외모를 갖춘 유장로는 문주의 간만의 부름에 무슨 일인가 싶어 어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겼다가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았다. "바,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문주님?" "제대로 들었을 거다." 반평생이 넘도록 상관이자 주군으로 모셔왔던 만큼 그 반말은 익숙하게 다가왔지만, 그것은 유장로를 비롯한 상장로, 왕장로로 하여금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느끼게 했다. "제 정신이십니까?" "물론이다." "그런데 어찌 천하삽십육세를 치겠다는 말씀입니까! 속하는 절대 납득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철검마가 칠정협칠사마 중 일인이라 해도 그 역사가 반갑자 밖에 되지 않은 철검문의 세력은 철검마의 위명에 비하면 약간의 부족함이 있다. 기라성 같은 고수가 쌓여있는 천하삽십육세에 비하자면 그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철검문의 현실이다. 그래도 천하 백대세력 중 하나로 꼽히는 철검문을 단 삼십 년만에 직접 일궈냈다는 점에서 세 장로는 상당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더구나 칠정협칠사마에 속한 철검마가 만약 그 벽을 넘어 화경에 접어들면, 철검문으로서도 능히 천하삽십육세의 빈자리를 차지할만한 역량을 갖추게 된다. 그때가 되면 천하에 위명을 떨치기 위해서라도 모험을 감수해 볼만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그러한 짓은 자살행위일 뿐이다. 세 장로는 부디 재고해줄 것을 청했지만, 철검마는 그야말로 칼로 자르듯 깨끗하게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강경하게 일을 밀고 나갔다. 참으로 무모한 일이었지만, 장로들에게는 선택이 없었다. 비록 그들이 사마외도의 마두라고는 하나, 철혈성에서부터 강자지존과 상명하복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훈련받았던 만큼 주군을 거역하거나 배반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철검마가 목표로 삼은 문파는, 환장해 나자빠지게도 벽력뇌가(霹靂雷家)였다. 막대한 벽력탄과 진천뢰를 비롯한 갖가지 물품을 꼬박꼬박 바치는 대가로 관으로부터 화약제조에 대한 허가를 받은 유일무이한 무림세가인 벽력뇌가. 그들의 벽력탄과 진천뢰는 제작단가가 비싸다는 단점이 있기는 해도 일정 수준 이상의 고수가 사용할 경우 능히 일당백의 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물품이다. 그런데 그런 벽력탄과 진천뢰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벽력세가를 치겠다는 말은 세 장로들을 더더욱 기막히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대장로가 할 말을 찾지 못한 이유는, 철검마의 '미친 짓'이 단독행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쌍마당(雙魔黨), 묵혼부(墨魂府), 적옥장(赤玉莊), 염라전(閻羅殿). 각자 철검문 만큼은 안되더라도 나름대로 이름을 떨치던 네 사파가 철검문의 행사에 동참할 뜻을 보였다. 무려 다섯 개의 사파가 힘을 합치자, 그 규모는 예상 이상이었다. 벽력뇌가를 상대함에 있어 숫자를 논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만, 절정고수만 해도 거의 십여 명에 가까우니 삼대장로로서도 희망을 가져볼 법했다. '헌데 벽력뇌가가 이처럼 많은 원한을 샀던가?' 비록 벽력뇌가를 무너트릴 경우 얻을 수 있는 명성과 이득이 크다고는 하지만, 그 명성과 이득의 대부분이 철검문과 철검마에게 모일 것을 생각해볼 때 이런 도박과 같은 일을 벌이는 배경에는 뭔가 은원관계가 얽혀있을 있을 가능성이 높다. 확실히 벽력뇌가는 그다지 평이 좋은 편이 아니다. 교묘하게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서 수익을 얻음으로써 정사중도로 활동하고 있지만, 실제로 하는 짓을 보자면 어지간한 사파 뺨치는데다가 불리하다 싶으면 관부의 비호를 받아 우세를 점하기에 정파에서는 물론 사파에서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지나친 원한은 피하도록 적당히 손보는 것이 벽력뇌가의 기본방침인 것을 생각해 볼 때, 다른 곳도 아닌 벽력뇌가의 코앞에 위치한 문파들에게 원한을 샀다는 것은 분명 뭔가 이상하다. 하지만 삼대장로는 그 의문을 깊이 파고들지 못했다. 마치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벽력뇌가에 대한 기습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비록 절반 이상이 제대로 된 무인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삼류무사라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무사인데다가 고수들만 해도 수십에 달하니, 전력을 따지자면 벽력뇌가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허나, 그들은 벽력뇌가 앞에서 숫자를 논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도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아야만 했다. 벽력뇌가에는 벽력탄과 진천뢰와 같이 무림에 흔히 알려져 있지 않은 온갖 병기가 한가득 있었고, 덕분에 그들은 초반의 기습에 의한 효과 외에는 벽력뇌가에 별다른 타격조차 주지 못한 채 순식간에 수백 명의 무사를 잃어야 했다. 만약 상황이 그대로 흘렀다면 그들은 그대로 처참한 패배를 당한 채 물러나야 했을 테지만, 그때 일어난 이변은 싸움의 판도를 단번에 뒤엎었다. 바로 내부에서의 배신! 대체 무슨 수로 혈연주의의 벽력세가에서 방수를 마련해놨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배신자가 화약창고에 불을 지른 덕분에 벽력뇌가는 거의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든든히 믿고 있던 도끼가 그들의 발등을 찍은 것이다. 아니, 입은 피해를 볼 때 발등이 아닌 목을 찍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벽력뇌가의 가주이자 칠정협칠사마의 일인인 천뢰마(天雷魔) 뇌진화(雷秦火)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호신강기 덕분에 폭염에 휩싸이는 것은 피할 수 있었지만, 강한 충격에 의해 호신강기가 뒤흔들리며 심각한 내상을 입은 덕분에 본신의 능력을 반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가 됐다. 그래도 과연 천하삽십육세에 칠정협칠사마라는 것인지, 장로들과 함께 필사적으로 항전하던 그는 결국 쌍마당의 대당주인 흑백쌍마와 철검문의 상장로, 묵혼부의 부주인 묵혼귀를 격살하고 목숨을 잃었다. 배신으로 비밀통로까지 모조리 붕괴돼버린 데다가, 심지어 그 배신자조차 어처구니없게 화약폭발에 휘말려 죽어버린 덕분에 벽력뇌가에서는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남지 않았다. 아무리 자잘한 분가가 남아있다고 해도 본가의 비전이 사라진 이상 오랫동안 강호무림에서 명성을 떨치던 벽력탄과 진천뢰는 이제 대가 끊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했던가?' 무너지는 전각. 짙은 화약냄새. 불타는 시체. 그야말로 그 어떠한 전장보다 더욱 정장답게 보이는 벽력뇌가에서 수하들을 정리하던 유장로는 일말의 씁쓸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다른 사파를 끌어들이는 거나, 기습을 하는 거나, 배신자의 도움을 받는 거나, 생존자를 무참하게 참살해버리는 것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는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것이 사파라고 하지만, 이건 철혈성 출신으로 패왕지로를 걷던 철검마가 할 만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이 모든 일이 자신을 비롯한 장로들과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됐다는 점과 철검문의 무사들이 이제 절반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유장로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변했군.' 30년 전 철혈성을 떠나올 때의 그 철검마는 이렇지 않았다. 비록 불가능에 가까울 망정, 순수한 무력만으로 천하제일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삼던 과거의 그 패기는 유장로를 절로 이끌리게 했다. 그러나 지금의 철검마는 다르다. 무력만이 모든 힘인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의 힘을 기르는 대신 계략을 사용해 벽력뇌가를 무너트린 모습은 힘을 추구하는 패왕지로 대신 그저 명성과 이득에 대한 탐욕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진정 은퇴할 때가 된 것인가.' 원래는 철검마가 태상문주로 물러남과 함께 원로의 형식으로 일선에서 손을 때고 철검문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으로 은퇴를 대신할 생각이었지만, 변해 가는 철검문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강호무림에서 완전히 손을 씻는 편이 나을 듯 싶었다. 진천뢰의 폭발에 휩쓸려 시체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 상장로의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지는 가운데 유장로는 씁쓸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철검문을 바로잡는 쪽이 낫지.] '하지만 어떻게?' [그야 간단하지. 철검마를 치고 직접 문주의 자리에 오르면 된다.] '그래, 그런 방법이...' 채앵! "누구냐?!" 머릿속에 떠오른 상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던 유장로는 순간 흠칫 하며 검을 뽑아들었다. 자신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기는 했지만, 그 상념에 이질감과 사악함이 담겨져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만약 대다수의 사파고수와 같이 내공의 증진만을 중요시한 심법을 익혔다면 그것을 깨닫지 못했을 테지만, 주안술을 익히기 위해 본의 아니게 정신수양에 중점을 두는 정종심법에도 약간의 성취를 이룬 유장로이기에 그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호, 이거 의외로군.] 마치 보이지 않는 문이라도 달린 듯 허공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존재를 보며 유장로는 두 눈을 부릅떴다. 중년남성의 학자차림까지는 그다지 특이하다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등에 달려있는 박쥐의 날개나, 살짝 벌어진 입가에서 은밀하게 드러난 사냥개의 이빨은 아무리 봐도 평범하다고 보기 힘들었다. 일갑자가 넘는 세월을 무림에서 살아오며 온갖 일을 다 겪어온 노강호인 유장로였지만, 그의 기나긴 인생을 통틀어도 이런 일은 처음이다. 아니, 비슷한 경우가 단 한 번 있기는 있었다. "네놈은 무슨 요괴냐!?" 과거 철혈성에서 몸담았을 때 배교의 술사를 통해 한 번 견식 해본 기괴한 요괴는 아직까지 그의 머릿속에 똑똑히 기억돼있었지만, 존재는 그러한 곽장로의 말을 부정했다. [나는 학살자의 총통이자 도사인 글라샬라볼스(Glashalabolas). 네놈이 말하는 저급한 요괴 따위와는 비교도 안되게 고등한 존재인 악마(惡魔)다.] =================================== 글라샬라볼스(Glashalabolas, Glasyalabols, Labolas, Gassimolar) 학살자의 총통이자 도사. 학자와 같은 옷을 입은 중년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등에는 박쥐의 날개가 달려 있고 입가에는 사냥개의 이빨이 엿보인다. 이빨 때문에 인간의 말을 발음하기 힘들다. 또는 그리핀과 같은 날개가 달린 마스티프 개의 모습으로 나타날 때도 있다. 예술과 과학, 미래와 과거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전수하는 대가는 인간의 목숨이다. 그는 항상 피에 굶주려 있으며 살인을 저지르도록 꾀하기도 한다. 원수지간을 화해시키거나 동료들끼리 분쟁을 일으키거나 사람의 모습을 지워버리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솔로몬 왕이 봉인한 72기둥의 마신 중 하나다. 가능한 원판에 가깝게 뜯어고친 글라샬 총통이십니다. 자, 그럼 뒷일을...기대하시길. 정독, 리플, 추천, 선작, 서평, 감상의 육대신공을 잊지 마시길.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20 01:07:25 고친날 2005-08-20 01:07:25 읽은수 5064 [ 9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24.혈우천하(血雨天下).(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악마건 요괴건 무슨 차이가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유장로였지만, 그래도 자신의 앞에 있는 자가 예전에 봤던 요괴보다는 더욱 사악하고도 강대한 괴물이라는 것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어찌됐던 상관없다. 내게 사술을 쓴 목적을 밝혀라!" 그게 외친 유장로는 전음을 통해 수하들에게 놈을 공격할 준비를 시키려고 했지만, 하나같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고 있는 그들의 반응을 통해 놈이 뭔가의 사술로 유장로 자신에게만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을 눈치챈 그는 내심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문주나 다른 장로라도 있으면 마음이 좀 든든해지련만, 그들은 정 반대편에서 수하들을 추스리고 있었으니 당장의 조력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목적이라면 너라면 좀 더 나를 즐겁게 해줄 수 있을 거 같았기 때문이지. 그런데 의외로 철검마라는 녀석보다 영적 방어가 두텁더군.] "그, 그렇다면 문주님이 그렇게 변한 것은 설마 네놈의 수작이란 말이냐?!" 글라샬라볼스의 말에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고 보면 철검마는 이번 벽력뇌가의 일과 관련한 것을 기점으로 급격히 돌변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돌변인 만큼 실망 또한 컸던 것인데, 그것이 이 악마의 수작이라면 그것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호, 글세. 나는 단지 그 인간의 어둠과 욕망을 살짝 손댔을 뿐이야. 더 높이 오르고 싶은 욕망이 큰 만큼 정체된 자신에 대한 어둠도 크더군. 그걸 조금만 비틀고 부추기면, 인간은 자기자신의 욕망과 어둠에 얼마든지 솔직해질 수 있지.] "네놈, 네놈이 감히!!" 유장로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확실히 문주는 환갑을 넘으면서부터 화경의 벽에 대한 절망감에 자주 시달리고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절망감을 이겨내고 패왕지로를 지켰기에 더욱 존경하던 철검마인데, 이 마귀 같은 놈은 그 절망을 칼날 삼아 철검마를 무너트린 것이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목을 베고만 싶었지만, 이 생소한 요괴에게 자신의 검이 통할지 자신할 수 없었던 데다가 철검마에게 걸린 사술을 푸는 방법을 알아야만 했기에 함부로 검을 휘두르지 못했다. [오오, 너무 화내지 말도록.] "대체 무슨 원한이 있다고 문주님께 그런 수작을 벌인 것이냐?" [이유? 이유라?] 글라샬라볼스는 사냥개의 이빨이 훤히 드러나도록 미소를 지었다. 악(惡)으로써 존재하기에 존재 자체가 악(惡)인 악마에게 악행의 이유 따위는 없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그것은 바로 이 학살 때문일까. 존재하기에 학살하는 것이 아니라 학살하기에 존재하며 존재하기 위해 학살하는 게 아니라 학살하기 위해 존재하는 학살의 악마 글라샬라볼스에게 있어서는 학살이야말로 그의 마력이자 존재 자체. 영혼에 깊숙이 파고들어 원수지간을 화해시키거나 동료들끼리 분쟁을 일으키는 등의 일을 벌이는 것도 모두 학살을 일으키기 위해서다. 그러나 스스로의 존재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우매한 인간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터. 이럴 때는 눈 높이 설명이라는 것이 필요한 법이다. [계약 때문이라고 하면 우매한 너라도 납득할 수 있겠지?] "그렇다면 이 일을 사주한 자는 대체 누구냐?" 배교의 술사가 요괴를 부리는 것을 본적 있는 만큼 글라샬라볼스의 배후에도 누군가의 주술이 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던 유장로는 놀라는 대신 날카롭게 그를 다그쳤지만, 그에 대한 글라샬라볼스의 대답은 사악한 미소뿐이었다. [이럴 때 계약자에 대한 것은 비밀인 것이 상식이지. 안 그런가, 인간?] "이이...!" 마치 자신을 가지고 노는 듯한 말투에 노기로 수염을 부르르 떠는 유장로를 보며 글라샬라볼스는 마음껏 기쁨을 누렸다. 일부나마 알게 된 사실에 대한 분노. 그 뒤에 숨겨진 사실에 대한 의문과 혼란. 알지 못할 미지에 대한 일말의 공포가 뒤섞인 감정은 글라샬라볼스의 마력에 흡수되며 쾌감을 주었다. 감정이란 가장 순수한 근원인 영혼(靈魂)으로부터 방출되기에 악마와 같은 고위의 존재는 음적인 감정으로부터 영기를 축출해 힘을 얻는 일이 가능하다. 그래서 종종 인간을 현혹시키고 놀림으로써 음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것을 유희로 삼는 것이다. [아쉽지만 내가 할 일은 이만 끝난 것 같군. 날 다시 만나고 싶으면 지옥으로 찾아와라, 인간.] "가지 못한다!!" 글라샬라볼스가 다시 모습을 감추려는 듯한 기색을 보이자 유장로는 검기를 뽑아내며 보법을 밟아 순식간에 그와의 거리를 좁혔지만, 그가 한 손으로 가볍게 허공을 '열고' 그 안으로 사라져버리자 유장로의 검기는 허무하게 허공을 가로지를 뿐이었다. "이노옴!!!" 바로 코앞에서 이 일의 원흉을 놓쳐버린 유장로는 이를 악물며 사방으로 검을 휘둘렀지만,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그 끝에는 아무 것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한 유장로를 보며 철검문도는 난감함을 금할 수 없었다. 아무도 없는 허공에 뭐라고 외치더니 혼자 칼을 휘두르는 모습이 완전 노망난 노인네 꼴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말려야했지만, 자칫 눈먼 칼에 맞아 죽기라도 했다가는 개죽음이니 그저 유장로가 제정신을 차리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불에 탄 시체들이 가득 쌓여있던 곳의 틈바구니에서 스르륵 모습을 드러낸 하나의 그림자가 사악한 붉은 안광을 번뜩였다. 스르륵... 밤보다 더욱 짙고도 어두운 그림자는 주변에 맴돌고 있던 원령을 자신의 그림자로 뒤덮기 시작했다. 증오와 원한에 들끓고 있던 원령들은 복수를 대가로 내민 영혼의 봉인을 거침없이 받아들였고,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림자의 숫자는 순식간에 불어갔다. 그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 비록 심야의 어둠을 담고있지는 않았지만, 서늘하고 음산하기 그지없는 푸르스름한 두 안광은 그림자가 범상한 망령이 아님을 똑똑히 알려주고 있었다. 생전 칠정협칠사마의 일인이자 벽력뇌가의 가주이던 천뢰마 뇌진화는 식솔이 몰살당한 원한을 갚기 위해 사악한 밤의 왕자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아 음영귀(陰影鬼) 쉐이드(shade)로 화했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이 밤의 왕자 또한 누군가에게 종속돼있으며, 그 누군가야말로 벽력뇌가의 멸문을 유도한 진정한 배후라는 사실을. 만약 그 사실을 알았다면 선택을 달리했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영혼이 봉인돼 완전한 음영귀라는 존재로 화한 이상 이제 그것을 안다고 해도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강제적인 봉인이 아닌 자발적인 봉인 덕분에 적은 힘으로도 다수의 그림자를 만들어낸 야영귀가 한 손을 들어 무사들을 가리키자, 그림자는 하나둘씩 땅으로 스며들었다. [유.희.를.시.작.해.볼.까.] 양팔을 좌우로 펼친 밤의 왕자를 중심으로 하나의 그림자가 일어났다. 마치 빛 한 점 없는 한밤중의 호수와 같이 깊고도 깊으며 짙고도 짙은 그림자는 서서히 범위를 넓히며 무사들과 다른 그림자들을 집어삼켰다. 무사들은 의식 못하는 가운데 양기가 억눌려져 점차 약해진 반면, 그림자들은 음기가 활성화되어 더욱 강해져갔다. '이 기운은...?' 서서히 흥분이 가라앉고 있던 유장로는 무언가 음습한 기운을 느끼고 흠칫 몸을 멈췄다. 평소였다면 그냥 가볍게 넘어갈 법도 했지만, 글라샬라볼스를 찾아내기 위해 감각을 극도로 곤두세우고 있던 그는 이 음습한 힘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이 간섭해있음을 알 수 있었다. "모두 경계해라!" 유장로의 경호성에 무사들은 반사적으로 검을 들었다. 아무리 기괴한 행동을 해도, 그는 엄연한 철검문의 장로였던 것이다. 바로 그때, 무사들의 그림자가 은밀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푸욱! "커억!" 미처 예상치 못한 암습에 그대로 등을 내준 무사들은 심장이 뜯겨나가는 고통에 눈을 뒤집으며 명을 마감했다. 유장로의 경호성 덕분에 일부 무사들은 가까스로 그 일격을 막아낼 수 있었지만, 몇 개의 손톱이 바람보다 빠르게 휘둘러지자 하나같이 목에서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며 짚단인형처럼 무너져 내렸다. "이 요괴들!! 물러서지 못할까!?" 촤좌작! 그림자를 글라샬라볼스와 한 패로 판단한 유장로가 아지랑이와도 같은 무형의 검기가 맺힌 검을 허공에 휘두르자, 검으로부터 화살처럼 쏘아져나간 검기에 꿰뚫어진 그림자들은 마치 안개처럼 허공에 흩어져버렸다. 유장로가 재차 검을 휘두르려던 순간, 그의 앞뒤에서 두 개의 거대한 팔이 튀어나와 그를 향해 휘둘러졌다. 카앙!! "네놈은 또 무슨 요괴냐!" 건원팔방(乾元八方) 보법으로 두 팔을 피해내며 검을 휘두른 유장로는 칼날과 같은 손톱으로 자신의 검을 막아내며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거대한 그림자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검기를 수월하게 막아낸 것을 볼 때 하나만 하더라도 버겁거늘, 거대한 그림자의 숫자는 무려 셋이었다. '문주께 알려야 한다!' 승산이 없음을 깨달은 유장로는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직접 가르친 수하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것을 뒤로하고 피신하자니 억장이 무너지는 듯 싶었지만, 이대로는 그와 수하들뿐만 아니라 철검문 전체가 위험했다. 그렇게 거대한 그림자들의 머리 위를 넘어선 유장로는 재차 땅을 박차며 경공을 펼치려 했지만,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땅에서 은밀하게 튀어나온 하나의 손은 그러한 유장로의 발목을 덥석 붙잡았다. "놓아라, 이노옴!" 한시가 급했던 유장로는 검을 휘둘러 그림자의 손을 잘라버리려 했지만, 그림자는 한 손으로 그의 검을 막아내며 유장로의 발목을 쥔 손을 가득 움켜쥐었다. 우두둑! "크으윽...!" 유장로의 수염이 부들부들 떨렸다. 진기의 보호에도 불구하고 발목이 으스러진 고통도 작진 않았지만, 그 손을 통해 기력이 급격히 빨려 들어가는 고통과 체내로 파고든 한줄기 음산한 기운에 의해 산 채로 피가 차갑게 식어 가는 고통에 비하면 약과에 불과했다. 촤아악! 그 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유장로가 최후로 선택한 방법은 바로 자신의 다리를 자르는 것이었다. 다리의 절단면으로부터 차갑게 식은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와중에도 한 다리만 사용해 가까스로 몸을 날린 그는 혈도를 점해 다리를 지혈하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곳에 있는 것은 오직 잘려진 그 자신의 다리뿐이었다. "어디, 대체 어디에...!" 유장로는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지탱한 채 그림자를 찾기 위해 두 눈을 부릅떴지만, 이미 심신이 극도로 상한 그는 자신의 뒤에서 서서히 솟아나는 하나의 그림자를 미처 감지하지 못했다. ================================== 흑영귀(쉐도우)-암영귀(다크 쉐도우)-대영귀(그레이트 쉐도우)-음영귀(쉐이드)-야영귀(나이트 쉐이드) 언데드를 망자로 해석하는 것도 은근슬쩍 골 때리는군요. 한 독자분의 리플로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딴 녀석들이 지금 천지문에서만 2놈이고, 이제 좀만 더 있으면 자포자기식으로 남은 2문파도 마저 합세해서 머리쓰는 공방전이 성립될탠데... 그 공방전에서 죽어나가는 건. . . . . . . . . . . . . . . . . . . . 주인공도 조연도 아닌 결국 작가님 혼자죠.- 순간, 눈 앞이 깜깜해지며 혀깨물고 죽고싶었다는...(OTL) 정독, 리플, 추천, 선작, 서평, 감상의 육대신공을 잊지 마시길.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20 07:03:29 고친날 2005-08-20 07:03:29 읽은수 4963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24.혈우천하(血雨天下).(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이 어찌, 이 어찌 말도 안돼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 상황에 한탄을 토해내던 왕장로는 허공을 불태우며 날아든 한줄기 불꽃에 더 이상 한탄할 여유도 없이 급히 쌍검을 휘둘렀다. 퍼엉! 쌍검에 의해 잘려나간 불꽃이 산산이 터져 나가는 가운데 안력을 집중해 양손에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는 해골을 확인한 왕장로가 생각할 것도 없이 곧바로 앞을 향해 몸을 날리자, 여러 구의 해골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비키지 못할까!" 평소의 부드러운 성정에 맞지 않게 사나운 고함을 내지른 왕장로가 쌍룡취수(雙龍取水)의 초식에 따라 몸을 땅에 닿을 듯 바짝 낮추며 두 검을 교차해 휘두르자, 칼과 창을 들고 있던 해골들의 다리가 잘려나가며 그 몸이 후두둑 무너져 내렸다. 천룡등공(天龍騰空)에 따라 치솟으며 두 검을 휘둘러 시퍼런 독화살을 막아낸 왕장로가 다시 내려오지 않고 두개골을 징검다리 삼아 앞으로 쭉쭉 나아가자, 과연 절정고수다운 바람과 같은 경공에 해골들의 손은 발목 대신 헛되이 허공만을 붙잡을 뿐이었다. 그때, 하나의 둥근 물체가 왕장로를 향해 강맹한 기세를 담고 휘둘러져왔다. "너...너는?!" 둥근 물체를 가까스로 피해내고 상대를 확인한 왕장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뼈로 이루어진 두터운 갑주의 묵직함에 반해 어깨 위가 허전하기 그지없는 요괴의 모습은 기괴하긴 해도 경악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그 요괴의 한 손에 들려져있는 머리는 분명 경악하고도 남을 정도의 가치가 있었다. "장룡(掌龍) 기소막(棄逍邈)! 네가 어찌하여...?!" 철궁곡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기소막. 그의 머리가 목 없는 요괴의 손에 들려진 채 두 눈을 부릅뜨고 왕장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비록 친분까지는 없었지만, 안면 정도는 숙지해두었던 데다가 명백하게 죽은 걸로 알려진 기소막을 본 왕장로는 그만 심기가 흐트러지고야 말았다. 기소막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핏빛으로 물든 손을 번개처럼 내뻗자, 그것이 수라장(修羅掌)임을 깨달은 왕장로는 기겁하며 쌍검을 교차했다. 카아앙! 심기가 흐트러져 대처가 늦은 덕분에 진기를 제대로 끌어올리지 못한 왕장로는 그 일장을 막아내느라 내상을 입었지만, 노강호답게 약세를 드러내지 않고 곧바로 쌍검을 휘둘렀다. 기소막은 기괴하게도 자기자신의 머리를 방패삼아 쌍검을 막아냈는데, 대체 무슨 사술을 쓴 것인지 검기에 맞고도 머리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오히려 검을 휘두른 손이 얼얼해질 지경이었으니, 절정고수인 왕장로써도 감히 그 머리에 검을 마주 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지가 없다!' 기소막의 흐릿한 동공에 오직 산자에 대한 분노만이 이글거리고 있음을 깨달은 왕장로는 이를 악물었다. 비록 수라장과 같은 초절정 무공을 자유롭게 펼치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이지를 통하기보다는 수련을 통해 체득(體得)한 것을 본능에 가깝게 펼치는 것일 터였다. 왕장로는 노강호답게 단번에 기소막의 공략법을 찾아냈다. 아무리 생전 절정고수였다고는 하지만 나이를 생각하면 경험의 부족함이 있을 텐데, 거기에 이지까지 없다면 변칙적인 수에 약할 것이 분명했다. 그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한평생 무림에서 살아온 노강호만이 펼칠 수 있는 변칙적이고 기기묘묘한 수법에 기소막은 점차 약세를 보였고,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무리한 운신으로 진기가 들끓기 시작한 왕장로는 한시라도 빨리 기소막을 쓰러트리기 위해 공격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그는 잠시 상황을 잊고 기소막에게 지나치게 신경을 집중하는 우를 저지르고야 말았고, 그 대가를 너무나도 확실하게 치러야만 했다. 화르륵! 피비빙! 뜨겁게 불타오르는 화염구가 폭발하며 충격파와 불꽃을 쏟아내는 가운데 독화살이 적아를 구분하지 않고 비오듯 날아들었다. 해골의 뼈밖에 남지 않은 몸을 그대로 스치고 들어온 독화살에 맞은 철검문도들의 몸은 빠르게 녹아들었지만, 해골들은 그저 화살이 스친 부분만이 조금 부스러지는 정도에서 그쳤으니 적아를 구분할 필요 자체가 없었다. "크으윽..." 기소막의 안전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쏘아진 화염구를 미처 피해내지 못한 왕장로는 내상이 심화되어 피를 울컥울컥 쏟아냈지만, 갑옷으로 그 타격을 어느 정도 받아낸 기소막은 살이 타들어 가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수라장을 펼쳤다. 카앙! "쿨럭!!" 내력을 5성도 끌어올리지 못한 왕장로의 쌍검은 너무나도 쉽게 분질러졌고, 그는 피를 한 바가지나 토해내며 실 끊긴 연처럼 뒤로 날아갔다. 그러한 왕장로를 뒤에서 기다리던 것은, 해골들의 손에서 도산검림과 같이 빽빽하게 세워져있는 칼과 창이었다. 철검마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그림자도, 해골도 아니었다. 그것들은 흔히 볼 수 있는 놈들이었지만, 동시에 그의 일생을 통틀어 처음 보는 것이기도 했다. 촤악!! 죽음을 인식하지 못한 듯, 목이 날아간 뒤에도 검은 각질로 이루어진 한 자루의 창을 앞세워 달려들던 두 요물이 그의 좌우를 스치고 지나가고 나서야 풀썩 쓰러졌다. "정말 질긴 놈들이군." 죽은 뒤에도 끊임없이 몸 움찔움찔 거리는 요물의 모습에 철검마는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그에 비하면 약해빠진 요물이었지만, 목이 잘려지고도 마치 다시 살아날 것처럼 보이는 끈질긴 생명력과 창질 한 번에 땅을 움푹움푹 파이게 하는 무지막지한 힘, 갑옷과 같은 단단한 외골격, 끝도 없는 듯만 싶은 머릿수는 그를 점차 지치게 만들었다. 수하들은 이미 요물들에 의해 전멸한지 오래였다. 그 자신의 상황으로 비추어 볼 때, 살아남은 생존자는 절정고수인 철검문의 두 장로와 묵혼부의 도살귀(屠殺鬼), 적옥장주(赤玉莊主), 염라전주(閻羅殿主) 정도가 고작이리라. 철검마는 수하들이 전멸했을 때부터 생존자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요물들의 끈질긴 방해에 의해 결국 아직까지도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있었다. 요물들이 이마에 난 긴 더듬이로 허공을 더듬으며 다시금 포위망을 좁혀오자, 철검마는 검을 쥔 손을 비스듬히 늘어트렸다. 포위망을 뚫는 것은 이미 수 차례나 실패했지만, 그래도 다른 특별한 방도가 없는 이상 성공할 때까지 시도하는 수밖에 없다. '뭐지?' 마악 검을 휘두르려던 철검마는 다가서던 요물들이 몸을 흠칫 떨고 행동을 멈추자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상황을 살폈다. 잠시 더듬이를 움직이던 요물들이 한쪽 포위망을 벌리자, 요물들이 좌우로 주르륵 물러나며 그 사이로 하나의 넓은 길이 생겨났다. 뛰어난 안력으로 그 길의 끝에서부터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을 확인한 철검마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엔 큰개미인가?' 머리높이만 해도 2장이 넘는 괴물을 과연 개미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인간처럼 걸어다니는데다가 손까지 있는 개미들에 비하면 큰개미라고 불러줄 만한 요물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요물들처럼 팔은 없는 듯 여섯 개의 다리를 모두 사용해 걷는다는 점이지만, 다른 개미들을 물러나게 한 저 거대한 개미가 대체 무슨 능력을 지니고 있을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기회 아니면 위기겠지."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던 철검마는 승부수를 내기 위해 진기를 끌어올렸다. 헌데, 큰개미가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그의 시야에 기이한 것이 들어왔다. 코끼리의 등판보다 더욱 넓은 듯한 큰개미의 허리 위에는 하나의 화려한 가마가 올려져있었다. 비록 발이 처져있어 안쪽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것이 장식이 아닌 바에야 안에 누군가가 있음은 당연지사일 터였다. '저 안에 있는 게 요물들을 부리는 술사겠군.' 노련한 노강호인 철검마는 판단과 동시에 행동으로 들어갔다. 경공을 펼쳐 땅을 미끄러지듯 큰개미를 향해 달려간 뒤, 큰개미의 턱 바로 밑에서 치솟아 오르며 철검을 내지르자 푸르스름한 검강이 허공을 꿰뚫으며 가마를 향해 날아갔다. 어지간한 수준의 고수나 술사라 해도 경험이 부족하다면 눈뜨고 박살이 날만한 한 수가 펼쳐진 순간, 발 안에서 살짝 빠져 나온 섬섬옥수가 허공을 움켜쥠과 함께 한줄기 사악한 기운이 검강을 향해 마주 뻗어나갔다. 쿠과광!! 사악한 기운과 충돌한 검강은 허공에서 폭발을 일으켰지만, 그 기운이 검강을 원형으로 감싸며 폭발의 충격을 받아낸 덕분에 큰개미와 가마에는 조금의 피해도 가지 않았다. "사술(邪術)!" 초절정 고수다운 뛰어난 감각 덕분에 그 기운을 똑똑히 감지한 철검마는 그 어떠한 마두에게서도 느끼지 못한 사악한 기운에 치를 떨었다. 단지 기운만으로 상대의 강약을 구분할 수야 없지만, 이 너무나도 사악한 기운은 감히 감당해내기 힘들 정도로 강대했다. 선택은 두 가지. 정면으로 상대를 깨부수던가, 아니면 피해 도망치던가. 이미 승산의 희박함을 느끼고 있던 철검마는 주저 없이 후자를 선택했다. 그렇게 마악 뒤로 몸을 빼내려던 순간, 그의 뇌리에 문뜩 몇 줄기 음성이 스쳐지나갔다. '하핫, 천하제일, 그거 좋군요!' '대주님의 패왕지로, 저도 뒤따르게 해주십시오.' '그 정도면 한평생을 바쳐볼 만하지 않습니까?' 과거 철혈성에서 독립할 때, 모든 것이 불분명함에도 철검마의 패왕지로를 믿고 따랐던 삼대장로의 음성. 그러나 이제 삼대장로는 없고, 그들의 앞에서 당당하게 패왕지로와 천하제일을 논하던 자신 또한 없다. "살기 위해 강해지는가, 강해지기 위해 사는가." 무의식중에 입을 열어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는 철검을 똑바로 쥐었다. 까마득한 옛날 잊어버렸던 문답이 그의 머릿속에서 확연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강함을 추구하기 위해 세웠으나 언제부터 짐이자 부담이 되어버렸던 철검문을 등에서 내린 철검마는 심신의 가벼움을 느꼈다. 모든 것을 던진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강자지존의 패왕지로를 추구하는 순수한 패기(覇氣)뿐. "나는 강해지기 위해 죽으리라." 오랫동안 앞을 막아서고 있던 벽이 무너져 내림과 함께 철검으로부터 폭발하듯 뿜어져 나온 검강이 서서히 하나의 형태를 이루어 가는 가운데, 철검마는 죽음을 향해 몸을 날렸다. ============================================== 위명이 높음에도 이제야 등장하는 망자. 모두 재활용을 합시다. 정독, 리플, 추천, 선작, 서평, 감상의 육대신공을 잊지 마시길. ...일어나자마자 잠결에 오락가락하며 올리다가 연재한담에 연재를 해버린...[털썩]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20 10:45:15 고친날 2005-08-20 10:45:15 읽은수 4998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24.혈우천하(血雨天下).(4)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인간이란 정말 재미있음이다.]" 가마 안에서 비스듬히 팔을 걸치고 안아있던 여인의 말에 가마 한쪽에 스며들어있던 밤의 그림자는 붉은 안광을 번뜩였다. [맞.는.말.이.다.] 한 순간, 갑작스럽게 갑절은 강해진 마지막 인간의 힘은 분명 얕볼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만약 그 인간에게 며칠의 여유만 있었다면, 수많은 암의인(暗蟻人) 다크니스 엔트 맨(darkness ant man) 을 상대하느라 지치지만 않았다면, 그리고 제 1옥의 강대한 망자 야영귀(夜影鬼) 나이트 쉐이드(night shade)가 제 2옥의 사악한 마수 암의여왕(暗蟻女王) 다크니스 엔트 퀸(darkness ant queen)을 도와주러 오지만 않았다면 그 인간을 상대하기 위해 상당한 고생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인간에게는 불행하게도 그 악재에 악재가 모두 겹쳤기에, 그들은 철검마를 생포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 인간의 씨앗으로 뛰어난 일족을 만들 수 있음이리라.]" 번식의 악마 아나벨라는 철검마의 강한 씨앗을 탐냈다. 지옥에 있는 그녀의 권속을 불러낼 수도 있지만, 그로 인해 힘의 균형이 무너진다면 호시탐탐 틈을 노리는 악마들은 곧바로 그녀의 세력을 침범해올 것이다. 때문에 이 지상에서 자급자족해야만 하는 그녀에게 있어 이처럼 강한 정기를 지닌 인간의 씨앗은 매우 탐나는 보물이었다. [그.영.혼.은.따.로.쓸.데.가.있.겠.군.] 야영귀는 철검마의 영혼에 묻은 어둠에 주목했다. 비록 영력이 일깨워지며 흐릿해지기는 했지만, 그 영혼은 분명 글라샬라볼스의 마력에 의해 어둠으로 물들어있다. 강대한 힘을 지닌 야영귀로서도 그 어둠을 끄집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의 주인이라면 능히 그것을 이끌어내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검은 맹약자가 과연 그것을 쓸 수 있음인가?]" [두.고.봐.야.하.겠.지.] 아무리 멀리 떨어져있다고 해도 계약자의 상태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얼마 전, 무언가 극심한 타격을 받아 영적 기운이 죽음에 가까울 만큼 극단적으로 약해진 상태는 모를 라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굳이 그를 도우러 가진 않는다. 그들에게 계약을 이행할 의무는 있을 망정 계약자를 도와줄 의리 따위는 없다. 야영귀는 그를 따르기로 계약하긴 했지만, 그가 내린 지시는 벽력뇌가를 무너트리라는 것뿐이었으니 그후엔 새로운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자유를 즐길 권리가 있다. 지상과의 매개체인 소환자가 죽으면 지옥으로 돌아가게 되겠지만, 강대한 사마인 그들은 계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죽을 경우 계약의 불이행에 대한 대가로 소환자의 영혼을 갈가리 뜯어먹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만약 이 정도로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에게는 저승과 지옥에 존재하는 모든 사마(死魔)의 지배자(支配者)인 검은 맹약자로서의 자격 또한 없을 것이다. 때문에 단두기사(斷頭騎士) 듀라한(dullahan)을 남겨두고 모습을 감춘 망자들에게도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일부 포로를 비롯한 인간들의 시체를 등에 짊어지고 벽력뇌가의 정중앙에 만들어진 거대한 땅굴을 통해 지하 깊은 곳으로 줄줄이 걸어 들어가던 암의인들의 행렬이 끝나자, 아나벨라와 야영귀가 탄 대암의(大暗蟻) 자이언트 다크니스 엔트(giant darkness ant)를 비롯한 일단의 그림자와 단두기사 기소막이 이끄는 망자들을 마지막으로 땅굴은 점차 흙으로 채워지며 그 모습을 감췄다. 그로부터 잠시 후, 허공에서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한 존재가 마치 보이지 않는 밧줄을 잡아당기듯 손을 움직이자, 저 높은 천공에서 마치 장막이 걷히듯 붉은 핏빛의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핏빛의 비늘에 칠흑의 묵광이 흐르는 거대한 쌍두마룡은 잠시 동안 허공을 선회하며 막대한 기운을 입안에 끌어 모았다. 그리고 그 기운이 정점에 달한 순간, 칠흑의 눈동자에 붉은 빛이 번뜩이며 쩌억 벌어진 입으로부터 찬란한 광채가 터져 나왔다. 쿠과과과과광!! 넓게 확산된 적광이 건물을 불태우고 땅을 지글지글 녹이며 폭풍과 같이 대지를 휩쓸고 지나간 대지에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건물 한 채, 시체 한 구 남지 않은 채 오직 무언가 뜨거운 열기에 의해 녹아 내린 흔적만이 가득한 이곳이 과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천하삽십육세 중 하나인 벽력뇌가가 서있던 곳인지 알아볼 수 있는 이는 극히 드물 것이다. [흠, 이제야 완전히 끝났군.] 쌍두마룡(雙頭魔龍) 헬카즈의 모습을 다시 감춰주고 사악한 마력으로 간단히 뒷정리를 한 글라샬라볼스는 짙은 미소를 지으며 사냥개의 이빨을 드러냈다. 조금 부족한 감이 없지만, 그래도 폭죽을 터트리기 위한 불씨치고는 제법 괜찮은 편이다. 그리고 이 불씨에서 시작된 폭죽이 폭발했을 때, 학살의 총통은 행복 속에 환호하리라.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녀의 음성이 차가운 금속의 벽으로 둘러 쌓인 넓은 대청에 울려 퍼지자, 그 중앙에 앉아있던 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그 인사에 답했다. "어서 오세요." 그의 음성은 소리에 대해 어느 정도 식견이 있는 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천하에서 손꼽히는 미성(美聲)임을 인정할 정도로 지극히 아름답고 매끄러웠다. 하지만 만약 소리에 관해 천하에서 손꼽히는 이라면, 그 음성이 티끌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무결하게만 들린다는 사실에 오한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인간이 지니지 못할 완전성을 두려워하기보다는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접근은 순조롭게 이루었습니다." "그럼 불사패왕의 상태는 어떤가요." "시간이 갈수록 상태가 점차 악화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제 한계가 얼마 남지 않은 듯 싶습니다." "그렇군요." 문답이 오가기는 했지만, 그것은 모르는 것을 알게됐다기보다는 이미 알고 있던 것을 확인했다는 듯한 느낌이 더욱 짙었다. 어차피 그 사실을 알고 상황을 고했던 그녀는 살짝 허리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그들이 어디에 계신지 알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에요." 그가 하나의 두루마기를 내밀자, 그것은 자연스럽게 허공을 미끄러져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무공이라 보기에도, 주술이라 보기에도 무언가 기묘함이 있는 한 수였지만, 그녀는 별다운 놀라움 없이 자연스럽게 그 두루마기를 받아들었다. "한동안 다시 만나지 못할 테니, 때를 맞추려면 길을 서두르시는 게 좋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그에 대한 자료가 상세하게 적혀있는 두루마기를 품안에 넣은 그녀는 살짝 고개를 들어올려 그의 모습을 확인했다. 마치 은을 녹여 빚어낸 듯 은은하고도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은발과 무엇이든 꿰뚫어보는 듯한 은빛의 눈동자. 오래고도 오랜 옛날, 그녀의 기억에 새겨졌던 그때로부터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습은 그녀로 하여금 역시 라는 생각이 들도록 했다. 비록 부탁의 형식을 띄고 있기는 하지만, 도저히 그의 말을 거절할 수 없는 것은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럼 앞으로도 수고 부탁드려요." "천주(天主)께서도 옥체 보존하시길 바랍니다."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춘 그녀가 아무 소리도 없이 스르륵 열려진 대청의 문을 통해 걸어나간 뒤, 만년한철로 이루어진 두터운 철문이 다시 닫혀짐으로써 대청에는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물론, 서두른다 해도 얻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겠지만." 온기 따위는 전무한 그 음성에 남아있는 것은, 오직 한줄기의 싸늘한 냉기뿐이었다. 또르륵. 하나의 또렷한 핏방울이 매끄러운 피부를 타고 흘러내렸다. 핏방울이 지나간 자리에는 그 흔적이 남아있었지만, 새하얀 피부는 삽시간에 핏기를 흡수했다. 점차 작게 줄어들던 핏방울이 가볍게 늘어져있던 손톱의 끝에 가볍게 맺혔다 싶은 순간, 그 손가락이 가볍게 튕겨졌다. 파밧! 손가락 끝에서 화살처럼 쏘아져나간 핏방울은 순식간에 벽에 틀어박혔다. 그 자그마한 핏방울이 벽을 종잇장처럼 뚫고 들어간 것도 참으로 놀라웠지만, 그보다 더욱 놀라운 일은 핏방울에 의해 생겨난 구멍이 점차 녹아 내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후후후...전화위복인가?" 기생오라비라는 말이 딱 어울릴 듯싶은 곱상한 외모의 청년은 잠시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주먹을 으드득 움켜쥐었다. "후...모를 일이지. 하지만 분명한 건 있지." 손을 파고든 손톱으로부터 주르륵 흘러내린 핏방울이 목이 부러진 채 바닥에 놓여져 있던 여인의 시체 위로 떨어졌다. "후후...나는 놈에게 복수할 힘을, 놈을 죽일 힘을 손에 넣었다!!" 치이익! 여인의 살을 마치 꿰뚫듯 녹아 내린 핏방울은 시체 내부에 남아있던 피와 그 생기를 촉매로 삼아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찰나의 시간이 지났을 때, 그 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그저 한줌의 독수뿐이었다. "후하하하핫!! 기다려라, 생사판괴 이노옴!!" 수많은 시체와 핏물로 가득한 암실 내에서 광소를 터트리는 청년의 두 눈은, 섬뜩할 정도의 광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 말하지면...저놈들은 역시 악마인 것입니다. 요즘 인정 넘치는 악마마가 넘쳐나는 걸 보자니 역시 말세구나 싶다는. 그리고...이제 깔건 거의(?) 다 깔았다는 생각이드는군요. 누군 기적에 천운이고 누군 바퀴벌레 생명력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종종있긴 하지만, 하여튼 적아를 불문하고 악당의 끈질긴 생명력에는 모두 박수를.-짝짝- 정독, 리플, 추천, 선작, 서평, 감상의 육대신공을 잊지 마시길.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20 14:40:36 고친날 2005-08-20 23:56:16 읽은수 5571 [ 7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24.혈우천하(血雨天下).(5)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저벅. 저벅. 어둠 저편에서 천천히 다가온 단정한 옷차림의 청년은 사내의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 행동에는 사내가 깨어나지 않게 하려는 배려가 가득했고, 눈가를 가린 머리카락 밑으로는 깊은 심려가 한가득 스며들어있었다. 잠시 사내의 안색을 살피던 청년은 상태를 확인하고자 손을 내뻗었지만, 그 손은 사내의 손목을 앞두고 우뚝 멈춰져야만 했다. 촤악-! 가느다란 파육음과 함께 청년의 가슴을 날카롭게 관통한 것은 하나의 예리한 낫. 그리고 그 사신의 낫을 쥐고 있는 투명할 정도로 새하얀 손의 주인은, 바로 청년의 앞에 누워있던 사내였다. "...쿨럭...!" 경악과 의문으로 두 눈을 크게 뜬 채 입으로 피를 울컥 토해낸 청년은 사신의 낫이 뽑혀나감과 함께 가슴으로부터 피를 분수처럼 뿜어냈다. 붉은 선혈로 흠뻑 젖어든 몸을 일으킨 사내가 한 손을 세우자, 그 손끝에서 사악한 기운이 꿈틀거리며 은은한 묵광이 흘렀다. 푸욱!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이빨 같은 사내의 손이 가슴을 파고들어 뼈 사이의 근육을 헤치며 심장을 움켜쥐자, 청년의 몸은 크게 퍼덕이며 경련을 일으켰다. 살아나기 위해 발악을 하는 것처럼 거세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으스러트릴 듯 움켜쥔 사내는 부드러운 살을 꿰뚫고 청년의 목 깊숙이 이빨을 박아 넣었다. 마치 청년이 그 자신에게 생명을 바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그는 무심하기에 그 무엇보다 오만하고도 잔혹해 보이는 표정으로 청년의 목에서 뿜어져 나온 선혈을 그대로 빨아들였다. 그의 입안에서 얼음장같이 차갑게 식은 선혈이 울대의 꿈틀거림에 따라 목 안쪽으로 삼켜질 때마다 한 쌍의 초점 잃은 동공은 점차 흐릿해졌다. 그 동공이 마침내 마지막 빛을 잃고 완전히 탁하게 물든 순간, 하나의 핏기 없는 손이 힘없이 바닥에 떨궈졌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피를 빨아낸 뒤에야 청년의 목덜미에서 이빨을 빼낸 그가 가슴으로부터 손을 빼내자, 손안에 쥐어진 채 덩달아 딸려 나온 심장이 땅에 툭 떨어져 내렸다. 털썩. 청년의 몸이 쓰러지는 소리가 동굴에 고요히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는 자신의 왼쪽 가슴 위에 무심히 한 손을 올려놓았다. 그로부터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바닥까지 치렁치렁하게 늘어져있던 그의 흑발이 하나둘씩 음산한 기운에 휩쓸려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어둠을 빚어만든 것만 같은 머리카락이 허공에서 흔들리다가 다시 고요히 내려앉았을 때, 가슴에서 손을 땐 그는 옆에 놓여져 있던 흑의장포를 걸치며 어둠 저편에서부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검은 인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보오옥수우우르으을 위이이하아안 다아안 하아안 버어언으으의 기이이회에에르으을.] 어둠과도 같은 칠흑의 갑옷과 불타오르는 듯한 붉은 안광의 존재가 칠환도(七環刀)를 똑바로 치켜들자, 갑옷의 틈새에서 물씬 뿜어져 나온 연기 같은 검은 기운이 칠환도에 스며들며 시커먼 묵광을 발했다. 콰드드드득!! 사신의 낫을 비스듬히 기울인 그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주문을 외우며 한 손으로 복잡한 수인을 맺자, 바닥으로부터 솟아난 두터운 골벽(骨壁) 본 월(bone wall)이 인형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묵광을 발하는 칠환도를 십자로 휘둘러 뼈로 이루어진 벽을 순식간에 우르르 무너트린 인형의 육중한 각갑(脚甲)이 바닥을 박찬 순간, 칠흑의 거구가 그를 향해 포탄처럼 튀어나왔다. 콰앙-! 사내의 수인 위에 만들어지기 무섭게 마주 날아드는 골창(骨槍) 본 스피어(bone spear)를 갑옷의 측면을 통해 흘려버린 인형은 그대로 자신의 모든 돌진력를 담아 칠환도를 내리그었다. 카앙!! 칠환도를 사신의 낫으로 받아낸 그의 몸이 뒤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속도로는 사신의 낫이 약간 더 빠르지만, 힘에 있어서는 압도적으로 칠환도가 앞선다. 그리고 또 하나의 차이는, 기술. 곧바로 발로 바닥을 밀어 그를 뒤쫓아온 망자의 손에서 폭발적으로 죽음의 기운을 뿜어낸 칠환도가 전신의 모든 힘을 담고 수직으로 휘둘러진다. 마주 휘둘러지던 사신의 낫이 헛되이 허공을 가른다. 허공에서 벼락같이 내려쳐지던 도중 급격히 비틀어진 칠환도가 훤히 빈틈이 드러난 옆구리로 파고든다. 촤아악!! 흑의장포가 찢겨지며 길게 갈라진 옆구리로부터 뿜어져 나온 피가 칠흑의 갑옷을 지글지글 녹여들 때, 칠환도를 피하기 위해 돌렸던 몸의 회전력이 그대로 사신의 낫에 담겨 칠흑의 투구를 향해 내려쳐진다. 까강! 수갑(手甲)에 의해 궤도가 비틀어진 사신의 낫이 어깨부분의 틈새로 깊숙이 파고들 때, 한 손에 쥐어진 칠환도가 시커먼 묵광을 번뜩이며 그대로 그의 복부의 중앙을 향해 내질러졌다. 날카롭게 피륙을 파고든 칠환도의 칼날이 그대로 몸을 관통해 반대편으로 튀어 나올 때 때, 사신의 낫을 놓고 몸을 비튼 그의 손이 투구의 정면에 딱 붙여지며 완성을 앞두고있던 주술이 시전 된다. 쿠과광!! 칠흑의 투구가 산산조각으로 터져 나가며 갑옷이 우그러진다. 목의 구멍으로부터, 벌어진 틈새로부터 더욱 많은 연기가 뭉클뭉클 뿜어져 나올 때, 그의 옆구리에 박혀있던 칠환도가 비틀어지며 내장을 헤집는다. 우그러진 갑옷을 그대로 꿰뚫으며 내부로 하나의 새하얀 손이 연기와 같이 넘실거리는 검은 기운을 휘젓다가 하나의 검은 보석을 움켜쥔 순간, 칠환도를 비틀던 손이 멈춰진다. 보석을 쥔 손으로 수인을 맺으며 무심한 음성으로 사이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칠흑의 갑옷을 채우고 있던 검은 연기가 보석을 통해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간다. 검은 연기가 줄어드는 것에 비례해 힘을 잃고 늘어지던 갑옷은 결국 고정된 형태를 잃고 검은 연기로 흩어진다. 허공에서 힘을 잃고 떨어져 내리려던 사신의 낫을 다시 손에 쥔 뒤, 검은 보석과 땅에 떨어져있던 붉은 보석을 소매 안에 넣고 몸 안에서 얽혀든 칠환도를 힘을 줘 뽑아낸다. 땡그랑-! 피와 살점으로 범벅이 된 칠환도를 바닥에 던져 날카로운 금속음을 만들어낸 그가 묵봉에 의지해 한쪽 무릎을 꿇으며 한 움큼의 피를 왈칵 토해내자, 무언가 깨져나가는 듯한 기음과 함께 그의 옆구리와 허리에 나있던 상처가 급속히 아물어가기 시작했다. 옆구리에 허리에 이어 내상과 이전에 있던 어깨와 가슴의 부상까지 완전히 회복된 것을 확인한 그는 소매로부터 하나의 붉은 구슬을 꺼내들었다. 생기가 모두 소모돼 쩌저적 갈라진 혈정석(血精石)을 무심히 살핀 그는 그것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몸을 일으켰다. 계약의 조건으로 삼았던 '복수를 위한 단 한 번의 기회'를 사용하기 위해 찾아왔던 환영기사(幻影騎士) 팬텀 나이트(phantom knight)와 사령기사(死靈騎士) 데스 나이트(death knight)로부터 흡수한 귀기로 비술을 펼쳐 부상을 치유하긴 했지만, 연이은 비술의 남용으로 인한 후유증까지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그때, 동굴의 저편에서 하나의 인형이 은은한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일어나신 건 다행입니다만...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한 손에는 야명주를, 다른 한 손에는 물통을 든 채 물음을 던졌던 백면서생은 그가 무심히 침묵을 지키자 야명주의 빛에 의지해 찬찬히 주변을 살폈다. "여기도 안심할 수는 없을 것 같군요. 자리를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동굴에 남은 흔적만으로도 대략적인 상황을 눈치챈 천무가 남아있는 흔적을 정리하는 사이, 그는 무심히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쯤이면 그의 계획이 실행되었을 터. 비록 지나치게 계획에 중점을 둔 덕분에 이런 처지가 되긴 했지만, 이제 더 이상의 오판은 없다. 그를 적대시했던 현자는 서(西)에서도 충분히 있었다. 그들의 지식과 지혜를 몸으로 직접 습득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유익한 경험이었지만, 그로 인해 생사의 고비를 수차례나 넘나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와 그들 중 결국 끝까지 살아남은 것은 그이며, 이번 역시 그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서(西)의 여섯 탑의 현자 중 불의 현자가 화약을 끌어안고 폭사했듯, 물의 현자가 성수에 빠져 익사했듯, 빛의 현자가 스스로의 눈을 파내고 혀를 깨물었듯, 미쳐버린 어둠의 현자가 성난 군중들에 의해 갈가리 찢겨죽었듯, 동(東)의 천하삼대지자 중 하늘의 지자 역시 사신을 우롱한 대가를 치러야 하리라. =========================================== 나무아멘수불.-누구를 위한?- . . . . . . . . . . . . 무려 3일에 걸친 15융단폭격. 이 정도면 1000자(?!) 감상문 15개(?!)는 받아야 하는데...[먼산] . 출판 이벤트-팬픽, 팬아트, 감상-은 아직도 진행중이고...[먼하늘] . 뭐,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21 15:32:24 고친날 2005-08-21 15:32:24 읽은수 3959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25.폭풍전야(暴風前夜).(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사신의 움직임에 이목이 모이니,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천하를 뒤덮는다.- 천하를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뒤흔드는 두 개의 풍문이 있었으니, 그 중 하나는 천하삼십육세(天下三十六勢)에 관련된 것이요, 다른 하나는 무림십이성좌(武林十二聖座)에 관련된 것이었다. 천하삼십육세에 관련된 풍문은 바로 벽력뇌가(霹靂雷家)의 멸문이다. 철검문(鐵劍門) 쌍마당(雙魔黨), 묵혼부(墨魂府), 적옥장(赤玉莊), 염라전(閻羅殿) 등 근방에서 이름을 떨치던 흑도문파가 서로 연합했다고는 해도, 천하삼십육세 중에서도 위력적인 화탄으로 이름 날리던 벽력뇌가가 천하삼십육세에도 들지 못한 세력에 무너질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더구나 벽력뇌가가 최후의 발악 삼아 벌인 일은 더욱 놀라운 충격이었다. 대체 무슨 화탄을 얼마나 터트렸기에 그 정도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화광이 하늘 끝까지 치솟아 오를 정도의 화염은 기둥뿌리조차 남기지 않고 벽력뇌가의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벽력뇌가를 공격하는데 이례적으로 전력을 동원한 사파연합조차 그 폭발로 인해 전멸한 덕분에, 그 동안 벽력뇌가와 사파연합이 쥐고있던 인근의 이권은 그야말로 주인 잃은 황금이 돼버렸다. 협의지로에 어긋나는 이득을 탐내지 않는 정파는 자발적으로 도움을 요청해온 일부 상인들을 보호해주는 정도로 그쳤지만, 힘으로 모든 것을 차지한다는 강자지존을 이념으로 삼고 있는 사파는 그러한 정파와 달리 주인 없는 이권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에 주저 없이 뛰어들었다. 흑도문파끼리의 경쟁은 시간이 흐를수록 단순한 분쟁이 아니라 거의 전쟁에 가까워졌다. 일부 문파는 치명적은 피해를 입고 봉문에 들어갔고, 일부 문파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살인멸구 당하고 멸문의 길을 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권분쟁은 수그러들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극심해졌고, 그만큼 사파의 혼란과 피해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있었다. 무림십이성좌와 관련된 풍문은 바로 생사판괴(生死判怪)와 불사패왕(不死覇王)의 만행이었다. 살각을 물리침으로써 그 명성을 떨치던 그들이 암암리에 수많은 양민을 처참하게 학살한 사실이 천안도괴와 정의성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지금까지 쌓은 협명을 통째로 뒤집고도 남는 경악할 사실에 수많은 협객과 의인이 분노를 터트렸지만, 정작 앞장서서 나서야할 정파들은 침묵을 지켰다. 정의성(正義城)에서 탈출도중 구룡회(九龍會)의 최정예라 할 수 있는 구절창신(九折槍神)과 금창풍룡대(金槍風龍隊)가 어떻게 패배했는지, 그리고 그 패배에 무슨 의미가 담겨있는지 알고 있는 정파로써는 화약고와 같은 생사판괴에게 섣불리 손을 대기 힘들었다. 그에 맞춰 정의성으로부터 날아든 하나의 전서는, 결국 대다수의 정파로 하여금 한동안은 생사판괴의 행보를 지켜보게 만들었다. 사파의 혼란과 정파의 긴장으로 인해 당장이라도 터질 듯만 싶던 정사대전(正邪大戰)의 불씨는 일단 잦아들었지만, 이것이 폭풍전야의 고요함이라는 것을 모르는 무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정사대전의 불씨가 그 폭풍에 올라탔을 때, 천하는 그 화염폭풍에 휩쓸리는 것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스르륵 짙은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희뿌연 광채가 떠올랐다. 산 자는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죽은 자의 혼령(魂靈)은 동굴을 샅샅이 훑으며 남아있는 흔적 하나 하나를 긁어모아갔다. 딸랑딸랑. 하나의 방울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지자, 동굴 안을 돌아다니던 혼령은 그 방울소리를 향해 서서히 몰려들었다. 한줄기 사이한 주문에 따라 혼령들은 자신이 긁어모은 흔적을 내뱉고 흩어졌고, 모든 혼령이 모습을 감췄을 때 방울소리와 주문 또한 멈춰지며 동굴에는 조용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너무 늦었나..." 그야말로 먼지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비워진 동굴에는, 영(靈)적인 흔적마저 완전히 사라져있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나지막한 음성으로 토해낸 욕설이 고요한 동굴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금호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에 대한 정보를 듣자마자 곧바로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한 발 늦어버린 듯 동굴에는 이미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깨끗한 주술적 처리를 볼 때 사부가 무사한 것은 확실한 듯 싶지만, 지금은 사부의 안전에 무조건 안심할 만한 상황이 아니다. "이제 어쩌지, 국아?" 금호의 물음에 남국은 살짝 고개를 가로 저었다. 상황이 아무리 다급하다고 해도 없는 수가 갑자기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유령마를 이용할 경우 사부와 천무의 이동범위는 상상을 초월한다. 거기에 주술에 의한 추적까지 완전히 차단됐으니 천안도괴의 태극천리경이라도 없는 이상 그들을 추적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님, 방법이 없을까요?" "아무래도 힘들 것 같구나." 마지막 희망이나 다름없던 백발여제마저 난색을 표하자 금호는 결국 절망 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하나의 묵직한 음성이 금호의 귀를 파고들었다. "...으로..." "형님?" 마치 남국과 같이 붕대를 얼굴에 휘감은 채 유령마 위에 몸을 걸치고 있던 철방의 말에 금호는 급히 그에게 다가가 손목을 잡고 귀기를 흘려 넣었다. 조금씩 떨어져 내린 빗방울이 가뭄으로 인해 비쩍 마른땅을 적시며 작은 시내를 만들어냈다. 비록 장강과 같이 물이 철철 넘쳐흐르던 예전과 비교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 작은 시내는 죽음의 땅에 미약하게나마 생명을 주었다. "호...산으로..." "호악산이요? 호악산 말이에요, 형님?" 천천히 끄덕여지는 철방의 고개를 본 금호는 얼굴에 복잡 미묘한 감정을 떠올렸다. 분명 천하에 사부가 몸을 숨길만한 곳이라면 호악산 외에는 딱히 생각나는 곳이 없지만, 사부의 곁에는 방대한 지식을 지니고 있는 천무가 있었다. 더구나 금호가 아직까지 호악산을 찾아가 보지 못한 것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지 않던가? "호악산은 이미 노야에게 알려진 곳이잖아요. 아무리 사부님이라고 해도 그곳을 찾아가지는 않았을 텐데..." "...상...다..." 띄엄띄엄 끊기는데다가 불투명한 발음은 아무리 귀가 좋은 이라고 해도 제대로 듣기 힘들 정도였지만, 벙어리인 남국과도 전혀 불편함 없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금호는 철방의 말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상관없다고요?" 지금 현재 그들이 사부를 찾아다니는 이유가 바로 철방 때문이 아니던가? 그런데 정작 본인이 상관없다는 말을 하니 금호로서는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그러나 뒤이어진 철방의 말은, 금호를 그대로 얼어붙게 만들었다. "호악...내...향..." 더 이상은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또는 말할 기력이 없다는 듯 입을 다문 철방의 모습에 금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호악산은 내 고향이다.- 철방이 호악산의 산왕 노릇을 하긴 했지만, 설마 그곳이 고향일 거라고는 미처 짐작치도 못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철방이 고향을 찾아가는 이유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이미 죽은 망자인 철방도 마지막은 호악산에서 맞이하고 싶은 것일까? 그러면 안식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망자란 생전의 죄업에 따라 세상을 떠돌며 고통받아야 하는 지옥의 죄인. 죽음은 죽음이 아니고 삶 또한 삶이 아닌 망자들에게 있어 또 한 번의 죽음이란 안식이 아닌 또 다른 고통의 시작에 불과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지금 철방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것을 평생 후회하게 되리라. "호악산으로...출발하죠." "동생, 괜찮겠어?" 도박과도 같은 금호의 선택에 남국와 백발여제는 우려의 빛을 띄었지만, 어차피 사부와 천무를 추적할 수 없는 이상 달리 갈만한 곳도 없다. 잠자고 숨어 그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릴 바에야, 차라리 도박이라도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야, 거지새끼! 객잔 어디 있어?- 그때, 철방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대로 거지로 살아갔을까? 아니면 객잔을 제대로 부흥시켰을까? 이미 그들을 찍어놨던 걸개방에게 똑같이 누명을 입었을까? -정 여의치 않을 때만 아니라면, 스스로를 용서치 못하거나 평생 후회할 죄만은 저지르지 마라. 이걸로 내 조언은 끝이다.- 살각의 살수를 대상으로 첫 살인을 했을 때, 철방이 해준 조언은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조언이 없었어도 살인이라는 업보를 제대로 감당해낼 수 있었을까? 아니면 그 업보에 짓눌렸을까? -대형께서는...너희를 대형의 제자로 대우하라 하셨다...내 어찌 대형의 제자를 버리고 갈까?- 사부에 의해 버려져 살각의 살수들에 의해 생사의 고비를 넘겼을 때, 철방이 그들을 구하러 와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결국 죽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나 목숨을 건졌을까? "형님, 조금만 더 버티시면 꼭 사부님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철방이 무자비한 살인마이자 잔혹한 식인귀라는 것은 분명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철방이 없었다면, 지금의 그들 또한 없었을 것이다. 부디 이 도박이 성공하기를 기원하며, 금호는 하늘 저편을 향해 유령마를 몰아갔다. ==================================================== 전편에 대해 정리해드리자면, 처음에 나타난 건 위해 천무로 둔갑(?)한 환영기사 팬텀 나이트이고, 다음에 나타난 건 사령기사 데스 나이트입니다. 파타시는 그 둘에게 '등을 찌를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를 조건으로 충성을 받아냈습니다. 파타시가 쇠약해진 걸 감지한 둘은 곧바로 자리를 이탈해 파타시를 죽이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파타시는, 처음부터 둘을 단번에 제압할 수 있는 급소를 고의적으로 만들어 둠으로써 만약을 대비했다가 써먹은 겁니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너무 복잡한 관계로, 이제 삽으로 푹푹 퍼낼 때가 된 듯 싶습니다. 단지 그 때문에 뿌리까지 통째로 파낼까 염려되기는 합니다만... 예고: ??개의 맹약. 계약의 시작. 이름의 비밀. 그리고 마지막으로 폭탄 하나 터트립니다. 그 폭탄이 뭔고 하니... . . . . . . . . . . . . . . . . . . . 비축분이 바닥났습니다. [에헤라 디야 ~(-0-)~] 추천 감상 등등으로 응원해주시는 거 잊지 마시길. 그리고 책방에 무적사신 추천하는 것도 잊지 마시길.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8-22 01:11:02 고친날 2005-08-22 01:11:02 읽은수 1669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25.폭풍전야(暴風前夜).(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생사판괴(生死判怪)는 무정살왕(無情殺王) 수준의 자객이자 사사혈괴(死邪血怪) 수준의 주술사고, 불사패왕(不死覇王)은 사신오왕의 자리에 부족함이 없는 괴물이니 방심은 절대 금물이오." 허름한 외양의 노인이 곰방대를 으스러져라 움켜쥐며 한 엄중한 주의에 탁자를 둘러 앉아있던 이들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삼재지문(三才智門) 중 천지문(天知門)의 문주이자 무림삼괴(武林三怪)의 일인인 무영투괴(無影偸怪)의 말을 가볍게 여길 수 있는 이가 있을 리가 없다. "크흠...독림의 후계자를...크흠...건드린 대가는...크흠...가볍지 않지..." 잡초와 같이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머리카락의 노인은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무영투괴의 말을 받았다. 그 소리는 무적이나 불유쾌하게 들렸지만, 노인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결코 그 소리를 불유쾌하게 여기지 못할 터였다. 삼황오제(三皇五帝) 중에서도 독물을 다루는데 있어 제일로 꼽히는 만독제(萬毒帝)의 심기를 거슬린다면, 언제 지독한 독물에 물려 명을 마감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약한 놈은 뒈져도 할 말 없는 기여. 내는 손주 놈을 단방에 아작 냈다는 새끼가 울매나 강한지 함 붙어보러 온 기고." 손잡이에 일곱 개의 보석이 박혀있는 칠성도(七星刀)가 유독 눈에 띄는 건장한 중년인의 말에 만독제는 미간을 꿈틀거렸다. 만약 어지간한 상대였다면 즉시 노성을 내질렀겠지만, 중년인은 결코 어지간한 상대가 아니다. 도(刀)에 있어서는 천하의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칠성도제(七星刀帝)를 어찌 어지간하게 볼 수 있겠는가?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터. 투괴는 약조를 명심하라." 장내에 있는 이들 중 가장 젊어 보이는 냉막한 청년의 말에 만독제와 칠성도제는 침묵을 지켰고, 무영투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을 끌어내기 위해 그가 들인 노력은 결코 적지 않다. 그러나 이들이 있는 한, 생사판괴는 결코 죽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셋이야." 나지막한 그의 음성이 울려 퍼진다. 무엇이 셋이라는 것인가? "신성(神聖)과 정령(精靈)의 하얀, 연금(鍊金)과 환수(幻獸)의 붉은, 사령(死靈)과 흑마(黑魔)의 검은." '붉은'을 말할 때는 그 자신을, '검은'을 말할 때는 나를 향하는 손가락. '검은'이 검은 맹약의 서를 뜻한다면, '붉은'은 붉은 맹약의 서를 뜻할 터. 납득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그와 나의 힘이 전혀 다른 듯 하면서도 무언가 그 근본을 같이하던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알지 못할 것은 따로 있다. "검은 맹약의 서를 읽을 수 있는 건 사마(死魔)의 흑안(黑眼)을 이어받은 흑안(黑眼)의 일족(一族) 뿐이니까, 네게 준거야." 그의 얼굴에 떠올라있는 것은 옅은 미소. 사마의 흑안이라는 숨겨둔 비수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인가. 그렇다면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 "왜 자살을 택했지?" 그의 가슴 정 중앙에 위치한 파멸의 균열에 정확히 틀어박혀 있는 사신의 낫은 분명 내가 휘두른 것이지만, 그 과정을 유도한 것은 그 자신이다. 골렘(golem)과 몬스터(monster)를 다룰 수 있는 그의 능력은 분명 언데드(undead)와 데빌(devil)을 다스리는 나의 능력에 비해 부족함이 없다. 서(書)를 얻은 시기를 생각해볼 때 그 수준은 오히려 그가 더욱 높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와서도 서(書)의 힘을 사용하지 않고 순순히 그의 낫을 받아들인 것은, 명백한 자살이다. "어째든...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있는 것은 단 한 명뿐이니까." 훈련소 내부에 있던 책의 내용에 따르면, 일반적인 어쌔신 길드(assassin guild)는 10~20%정도의 생존율로 어쌔신을 경쟁시킨다. 그러나 모든 어쌔신 길드 중에서도 최고 최악이라 불리는 다크문(dark moon)의 훈련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단 한 명뿐이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은 100명 중 98명이 죽고 단 한 명의 파트너만이 남게 된 마지막 순간. 거부할 경우 어쌔신들에 의해 즉결척분된다. "서(書)에 대한 것을 숨기지 않으면...어차피 오래 살아남지 못할 거야." 어쌔신에게 필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목표물을 암살하기에 충분한 능력뿐. 그 이상의 능력은 오히려 제거해야할 경계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계약은 어디까지나 각자의 생존을 위했던 것. 그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서의 힘을 사용하더라도 나를 죽였어야 한다. "유품을 주기로 했지만...내가 줄...수 있는 건 한 가지 뿐이야." 사신의 낫이 틀어 박혀있는 파멸의 균열이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한다. 아직까지 버틸 수 있는 것은, 파멸의 균열을 묶어두고 있는 힘 덕분일 터. "처음에...이름을 물었을 때...없다고 했지?" 노예선에서 살아남았을 때도, 그 뒤 다른 배에 구해졌다가 곧바로 어쌔신 길드에 팔려왔을 때도, 서로 죽고 죽이는 훈련소에서도 잊지 않았던 그 미소는 죽음을 앞두고도 그 밝음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니까...내 이름을 줄게...성까지 줄 수 없지만...이름을 너에게 줄게." "이름을 말인가." 노예선이나 훈련소에서는 숫자로 불려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굳이 이름이 필요한가? 말에는 힘이 있고 이름에는 존재가 있다 하지만, 납득할 수 없다. "네 이름은 파타시...내 성은 크란...내게 이름이 없어져도 내 성은 오직 나에게만 주어진 성이듯...네게 성은 없더라도 그 이름은 오직 너에게만 주어진 이름이 되겠지..." 이해할 수 없는 말. 그러나 그와는 이미 유품을 정리해주기로 계약했다. 이름도 유품에 들어가는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굳이 거부할 필요는 없다. "좋다." "그래...그리고...같이 살아남기로 한 계약..." 노예선에서 이루어졌던 계약. 그가 계획으로 나를 살리는 것을 조건으로, 나는 행동으로 그를 살리는 것을 대가로 삼은 계약. 그러나 그 계약은 깨졌다. 그의 계획으로 나는 살아남지만, 나는 행동으로 그를 살리는 대신 살해했다. "행동으로...살리는...대신......" 파멸의 균열이 계속 퍼져나가는 만큼 줄어드는 음성에 청각을 집중한다. 흐릿한 음성이 요청한 대가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것. 어째서 그러한 대가를 청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다. 파강-! 균열이 깨져나가며 그 육신이 바람에 흩어지는 먼지나 빛살에 녹아드는 어둠처럼 깨끗하게 사라진다. 허공에 살짝 떠올랐다 가라앉는 몇 개의 가느다란 녹색 실선을 뒤로하고 등을 돌린다. 유일하게 나의 이름을 물었던 자. 유일하게 나와 거래했던 자. 유일하게 나를 도왔던 자는 영혼조차 남지 않고 사라졌다. 그가 남긴 것은, 단 두 가지뿐. "...계약은, 성립됐다." 의지가 일어나 영혼에 각인을 새긴다. 이것은 모순된 계약. 과연 언제 그 끝을 볼 수 있을지, 생명의 대가를 모두 치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영혼의 각인이 남아있는 한, 그 계약은 이행될 것이다. "27호. 생환을 축하한다." 훈련소의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열 명의 교관. 지금으로서는 서의 힘을 사용하더라도 둘 이상을 상대하기 힘든 강자들. "너는 이제부터 다크문의 정식 어쌔신으로, 1달 주기가 아닌 1년 주기의 해독단을 지급 받는다." 해독단을 주기적으로 먹지 않으면 독이 발작해 죽게된다. 전과 비교할 때 그 주기가 훨씬 길어지긴 했나, 결국 다크문에 종속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저항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여기서 포기해라." 작은 해독단을 올려놓은 채 내밀어지는 손. 그러나 다른 손은 암암리에 허리춤의 검에 대어져있는 것이 느껴진다. 탁. "잘 선택했다." 다크문의 극독 데스 블러드(death blood)는 분명 일년 이상 복용할 경우 어떠한 신관과 마법사도 해독하지 못한다는 극독. 다크문에 대한 저항은 곧 죽음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첫 임무를 주겠다. 27호." "아니." 교관의 눈이 날카로워지며 병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아니, 아직 아니다. 다크문에는 아직 이용가치가 남았다. "나는 27호가 아니다." 데스 블러드의 해약은 없다. 그러나 모든 독에 대해 거의 절대적인 내성을 지니게 된다면, 데스 블러드라 할지라도 통하지 않는다. "내 이름은 파타시." 그가 알려준 비약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핵심적인 재료는 드래곤 블러드(dragon blood). 과연 그것을 구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살아남는다면, 기회는 언제가 찾아온다. 해독단이 필요할 때까지는 다크문을 따른다. 그러나 해독단이 필요 없어졌을 때, 다크문의 이용가치는 사라진다. "성은, 없다." =======================================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25.폭풍전야(暴風前夜).(3) 사각. 작은 뼈의 칼을 쥐고 있는 새하얀 손이 천천히 움직임에 따라 나뭇조각이 조금씩 깎여나갔다. 그 움직임은 너무나 느려 나뭇조각을 완전히 깎으려면 참으로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듯 싶었지만, 기이한 형태의 흑의장포를 걸친 사내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무심히 나뭇조각을 깎아내고 있었다. 어찌 보면 참으로 평화롭고 느긋해 보이는 모습이지만, 그가 무림삼괴(武林三怪)의 일인인 생사판괴(生死判怪)라는 것을 알고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터였다. 환영기사(幻影騎士)와 사령기사(死靈騎士)를 처리한 그는 곧바로 동굴을 떠나 더욱 깊은 산중에 은신했다. 주술적으로 흔적을 처리하고 기척을 완전히 차단했기 때문인지 추적자는 따라붙지 않았지만, 그는 섣불리 움직이는 대신 어느 정도 상태가 회복될 때까지 산중에서 요양을 취하는 것을 택했다. 서(西) 최고의 자객(刺客) 어쌔신(assassin)이었던 만큼 극한의 생존능력을 지닌 그와 파문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천지문(天知門)의 후계자였던 만큼 여러 가지로 박학다식한 천무였기에 생활에는 큰 문제없이 몸을 회복할 수 있었다. "묻겠다."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내려 쬐는 햇볕에서 양기(陽氣)를 취해 생기(生氣)를 회복하며 주술에 사용할 촉매를 만들고 있던 그의 무심한 물음에 천무는 마땅히 답하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무영투괴와의 관계." 현 상태를 볼 때 조금은 당황할 법도 한 질문이었지만, 천무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온유한 음성으로 답했다. "제 의형이시자, 후견인이십니다." 의형이자 후견인. 천지문의 문주와 후계자 사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사승관계는 빠져있다. 천하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을 사부로 여기며 배움을 얻고자 한다는 천지문의 제자다운 방식이다. "형님께서는 일가친척 없이 떠돌던 저를 거둬 모든 후원을 아끼지 않고 해주셨지요." 고생 한 번하지 않고 살아온 백면서생으로만 보이던 천무가 고아였다는 것은 충분히 의외로 느껴질 법했지만, 이미 예상하고 있던 그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의형제인 무영투괴 천영과 천무의 성이 같을 이유라면 얼마 되지 않는다. 아마 무영투괴가 천무를 받아들일 때 자신의 성을 주었으리라. "천형을 타고났기에 무공을 잇지는 못했지만, 형님께서는 무인에게는 무인의 길이 있고 도둑에게는 도둑의 길이 있듯 문사에게는 문사의 길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무림에서 무공을 모른다는 것은 상당히 치명적인 문제다. 호악산에서 그를 꺾었던 천뇌문주인 장일산이 초절정고수였던 것이나 천지문주인 무영투괴가 무림삼괴의 일인인 것만 보더라도 무공의 필요성은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무가 천지문의 후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무공보다는 지혜를 중요시 여기는 삼재지문의 특성과, 천무의 지혜가 무공을 배우지 못한다는 단점을 충분히 채울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기 때문이리라. "투괴에 대한 정이 각별하겠군." "그렇지 않다면 거짓이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무는 결국 무영투괴를 저버리고 파문을 자처했다. 동요가 있어야 함이 당연하건만, 그 평온한 태도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래야 한다. 부드러운 미소와 온유한 음성을 지니고 있더라도, 머리만큼은 냉철한 이성으로 철저하리 만큼 확실하게 계약을 이행해야한다. "천지문을 친다." 그의 무심한 음성이 허공에 퍼져나가다가 사라질 때까지, 천무는 입을 다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목표는 천지문의 멸문." 삼재지문 중 가장 적은 문도를 지니고 있으나, 제갈문조차 뚫지 못한 절진 중 절진인 천변만화대천진(千變萬化戴天陣)에 의해 보호되는 천지문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불청객을 허용한 역사가 없다. 그러나 천지문에 대해 누구보다 잘 하는 천무라면, 능히 천변만화대천진을 파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영투괴의 죽음." 현재 그에게 가장 위협적인 대적은 바로 무영투괴다. 천지문주이자 무림삼괴의 일인인 무영투괴를 상대하기란 결코 쉽지 않지만, 천무의 지혜를 빌린다면 승산은 높다. "계획을 짜라." 그는 의제로 하여금 의형의 목을 조를 밧줄을 준비하도록 명했다. 계약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계약의 조건이 이행되는 한 천무에게 그의 명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 따위는 없다. "그것이 은공의 뜻이시라면..." 여전히 온유한 가운데 유독 나지막하게 느껴지는 천무의 대답을 들으며 그는 고개를 무심히 끄덕였다. 무영투괴 또한 그의 반격을 예상하고 충분한 대비를 해두었을 테지만, 비록 적재적소에 사용하지 못했을 뿐 그가 준비해둔 것 또한 결코 적지 않다.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쌍존삼황오제(雙尊三皇五帝)의 천하십대고수를 상대할만한 망자의 부재다. 야영귀(夜影鬼) 나이트 쉐이드(night shade), 대시귀(大屍鬼) 그레이트 구울(great ghoul) 철방이라는 강대한 망자와 암의여왕(暗蟻女王) 아나벨라, 쌍두마룡(雙頭魔龍) 헬카즈, 학살자(虐殺者)의 총통(總統) 글라샬라볼스라는 사악한 악마를 휘하에 두고 있기는 하지만, 정의검황(正義劍皇)의 무력에 비추어볼 때 아직 부족함이 많다. 아나벨라의 주력은 권능에서 비롯된 막대한 번식력. 글라샬라볼스의 주력은 인간의 마음을 교란시키고 모습을 감추는 마력. 헬카즈의 주력은 모든 것을 일거에 쓸어버리는 브레스 웨폰(breath weapon)이다. 모두 전쟁 단위의 전투를 벌이는데 있어서는 지극히 뛰어난 힘이지만, 천하십대고수나 무림십이성좌 정도의 강자에게는 그 효용성이 크게 떨어진다. 결국 천하십대고수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야영귀와 철방을 중심으로 고위 망자를 다수 붙이는 비효율적인 방법밖에는 없다. '악령기사(惡靈騎士) 데스 템플러(death templar)가 아쉽군.' 지저미궁(地底迷宮)에서 천운으로 얻을 수 있었던 악령기사야말로 그가 서(西)를 휩쓸고 다닐 수 있던 결정적인 이유이자, 아직까지 회복하지 못한 힘의 결정체다. 서의 고금을 통틀어 최고최강최악의 망자였던 악령기사라면 분명 단신으로 천하십대고수를 상대할 수 있을 테지만, 서 최고의 사령술사(死靈術師) 네크로맨서(necromancer)이던 그로서도 그 정도의 망자를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가지 여쭤도 괜찮겠습니까?" 뼈의 칼을 정교하게 움직여 목각인형에 복잡한 문양을 새겨 넣고 있던 그는 천무가 잠시간의 침묵을 깨고 던진 물음에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서(西)로 돌아갈 생각은 없으십니까?" 수천 년 전 있었던 신들의 전쟁 이후, 동과 서의 사이에는 하나의 경계가 생겨났다. 조금의 생기도 없이 바위로만 이루어진 필멸의 사막. 안개와 구름으로 그 끝이 숨겨진 무한의 산맥. 태풍과 소용돌이가 멈추지 않는 불멸의 대해. 이처럼 동과 서의 경계를 이루는 수많은 마역(魔域)에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이 도전했으나, 그들 중 경계를 넘어 살아 돌아온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만약 그를 꺾은 고룡(古龍) 에인션트 드래곤(ancient dragon) 카라트레드가 그를 이곳에 보내 않았다면, 아무리 그라 할지라도 경계를 넘어서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돌아가는 것 또한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다가, 가능하더라도 정작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내가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동이든 서든 그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그에게 막대한 현상금을 걸어두고 있는 서의 수많은 국가나, 사령군을 괴멸시키고 그를 이곳으로 보냈던 고룡(古龍) 에인션트 드래곤(ancient dragon) 카라트레드를 생각해 볼 때 차라리 동에 남아있는 편이 낫다. "태어나 살아온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이 보통이지만...은공께서는 서에 대한 향수나 애착이 없으신 모양이군요." 태어난 곳은 태어난 곳일 뿐. 합리적으로 생각할 때 더 적합한 환경만 있다면 굳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 따위는 없다. 또르륵. 기울어진 물주머니에서 떨어진 핏방울이 목각인형의 머리에 떨어져내려 문양을 타고 서서히 밑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잠시 지켜보던 천무는 문뜩 입을 열었다. "결국, 서쪽에서 은공께 진정으로 의미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고 생각해도 될는지요?" 그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했다. 그에게 서(西)가 지닌 의미란 별 것 아니다. 서가 통째로 멸망한다고 해도 특별한 영향이 없다면 아무 상관없으며, 만약 행할 수 있는 충분한 힘과 행해야할 충분한 필요성만 있다면 그가 직접 멸망시킬 수도 있다. "그 무엇도 아끼지 않고, 그 무엇에도 의미를 두지 않는 은공이시라면 삶에 대한 애착 또한 없으시겠군요." "그렇다." "그렇다면, 은공께서는 대체 어째서 그토록 삶에 집착하시는 겁니까?" 비록 질문의 형태를 띄고 있기는 하지만, 천무의 온유한 음성은 모르는 것에 대한 물음이 아닌 추측과 짐작을 넘어 확신에 대한 확인에 가까웠다. 지하석부에서 1년간의 감금, 살각의 지독한 추격, 정의성에서의 탈옥. 하나같이 범인이라면 죽어도 몇 번은 죽었을 사로(死路)를 그는 헤쳐 나왔다. 그 끈질긴 생명력에는 비술의 도움이 크긴 했지만, 삶에 대한 지독한 집념이 없었다면 결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피가 완전히 스며들어 기이한 색으로 물든 목각인형을 소매 안에 집어넣으며, 그는 무심히 천무의 확신을 확인해주었다. "그것이 계약이니까." ================================================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25.폭풍전야(暴風前夜).(4) [아는가?] 거대한 눈이 감겼다 뜨여지며 의지를 파고 흘러나오는 것은 그 의도를 알 수 없는 물음. 본 드래곤(bone dragon)의 반으로 쪼개진 두개골이 비늘로 뒤덮여있는 거대한 손에 의해 들려진다. 오랫동안 모아둔 힘을 모두 동원한 끝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겨우 살상할 수 있었던 어덜트 드래곤(adult dragon) 카타리아의 유골이 너무나도 작게 느껴질 정도의 거대한 손은 아직까지 피로 물들어있다. [이 아이는 내 손녀였다.]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신경 써본 적 없으며 지금도 신경 쓰고있지 않다. 상대가 인간이라면 모르겠으나, 지금 나를 포박하고 있는 존재는 에인션트 드래곤(ancient dragon)인 카라트레드. "내가 알 바 아니지." 커다란 눈을 돌려 시선을 마주한 채 잠시 침묵하던 카라트레드가 손에 들고 있던 유골을 담담히 내려놓는다. [하긴 상관없는 일이지.] 선한 세력이 득세할 때는 악룡(惡龍)으로서, 악한 세력이 득세할 때는 성룡(聖龍)으로서 세상의 균형을 맞추는 진정한 균형자(均衡者)인 드래곤은 그 오만함 때문에라도 결코 사적인 감정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만약 카라트레드의 행동에 사적인 감정이 들어있었다면,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기둥과 같은 꼬리를 휘둘러 카타리아의 두개골을 박살내버리지는 못했겠지. [내가 이 일에 자원한 이유는, 윤회에 들어가지 않은 드래곤 중 너를 처리할 고룡은 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게 9000년 이상의 세월을 살아온 현존하는 최고령의 드래곤이 직접 나설 가치가 있는가? 알 수 없다. 그러나 전대의 드래곤 로드(dragon lord)인 카라트레드의 전신이 피와 상처로 가득 뒤덮여있는 것을 감안할 때, 다른 드래곤이 나섰다면 좀 더 승률이 높았을 것은 확실하다. "윤회라." 윤회란 죽음과 삶의 반복을 통한 무한한 영혼의 순환. 그러나 카라트레드의 말속에는 뭔가 다른 뜻이 느껴진다. [역시 아직 서의 모든 지식을 얻지는 못했나보군.] 꼬리를 움직여 대지를 뒤덮고있던 망자들의 잔해를 쓸어낸 카라트레드가 그 위에 피로 물든 몸을 앉힌다. [태초에 세 개의 시작이 있으니-그 하나는 이루지 않을 이룸이오, 그 하나는 바뀌지 않는 바뀜이오, 그 하나는 있지 않은 있음이라. 그 진정한 태초로부터 시작된 첫 번째 세상은 분쟁이 없고 평화로움만이 가득했으나, 아주 작은 흔들림에 의해 결국 스스로의 흐름에 묻혀 사라졌다.] 살짝 벌어진 거대한 입에서 태풍과도 같은 숨결이 쏟아져 나옴과 함께 정신을 파고 들어오는 것은 9000년이라는 세월 동안 쌓여온 거대한 의지. [세 개의 시작 뒤로 만물을 이루는 여섯의 근원이 있으니-그 하나는 신성한 창생이오, 그 하나는 자연의 기운이오, 그 하나는 지혜의 정신이오, 그 하나는 본능의 육체이오, 그 하나는 윤회의 영혼이오, 그 하나는 사악의 파괴라. 그 여섯의 근원에서 시작된 두 번째 세상은 서로간의 분쟁 속에 빠르게 발전했으나, 지나친 분쟁으로 인해 결국 빠르게 그 종말을 맞이했다.]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본능에 각인 된 아주 깊고 오래된 기억을 되새기듯, 신중하고 무거우면서도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의지의 무거움이 정신을 압박한다. [여섯 근원 위로 두 개의 행함 있으니-그 하나는 오만의 균형이오, 그 하나는 몽환의 조화리라. 두 개의 행함에서 세 번째 세상이 시작했으니, 균형과 조화로 인해 지켜지고 있는 것이 바로 지금의 세상이다.] 반으로 부러진 뿔로부터 그 파편이 후드득 떨어져 내리는 가운데 서서히 고개를 들어올려 하늘로 향한 카라트레드의 시선이 달에 고정된다. [모든 종족을 세상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추로 여기며, 능히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을 지닌 지상 최강의 종족. 그 오만한 균형이 바로 우리 드래곤이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카라트레드의 날개가 느릿하게 펄럭임에 따라 일어난 바람이 피와 죽음의 냄새를 몰고 사라진다. [세상의 균형을 지키는 우리가 힘을 키우기 위한 방법이 바로 윤회다. 작은 곤충으로써 짓밟힌다. 미약한 금수로써 헤쳐진다. 미개한 야만인으로써 살육한다. 비천한 노예로써 천해진다. 고귀한 귀족으로써 지배한다. 어리석은 우민으로써 실수한다. 위대한 영웅으로써 존경받는다. 그 삶에서 우리는 용족이 아니라 철저한 그 존재로써 살아가는 윤회를 통해 영력을 쌓고, 수면기 동안 윤회를 되새기며 그 영력을 일깨운다.] 턱에 뚫린 상처로부터 뭉클뭉클 솟아난 붉은 핏방울이 다시 숙여지는 고개를 따라 흘러내린다. [우리 용족이 지상 최강의 종족인 이유는, 처음부터 강하게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태어난 순간부터 최후의 순간까지 조금도 쉬지 않고 끝없이 강해지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 년 동안 노력할 수 있는 시간과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강대한 권능을 타고났음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그 대가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평생 쌓아온 영력을 모두 세상에 환원시키는 것으로 치른다.] 드래곤이 1만년 동안 쌓아온 영력은 분명 윤회를 거친다면 신으로써 다시 거듭나기에 부족함이 없는 막대한 힘. 그 막대한 영력을 쏟아버린다는 것은 1만년 동안 쌓아온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만약 긴 수명과 타고난 재능만을 믿고 노력을 게을리 한다면, 강대한 힘에 빠져 주어진 의무를 등한시한다면, 세상을 지켜야하는 대상이 아닌 권리를 행할 놀이터로 여긴다면 그것은 한낱 비만 도마뱀에 지나지 않기에 우리 용족은 한없이 오만하며, 오만해야만 하는 것이다.] 마법의 조종. 지상 최강의 종족. 신보다 오만한 존재. 불멸에 가장 가까운 필멸자이자 필멸하는 불멸자는 결국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이루는 것인가. 그렇다면 진정한 균형자인 드래곤이 위험을 무릅쓰고 세계의 균형을 무너트린 자를 생포해야했던 이유도 짐작할 수 있다. "나의 죽음이 세상의 균형을 더 크게 무너트리기에 생포를 택한 것인가." [그렇다.] 가볍게 답한 뒤 고개를 가볍게 흔들어 눈가에 흐르는 피를 떨친 카라트레드의 의지가 천천히 이어진다. [진정한 태초에 존재했던 세 시작 중 하나를 이었으며, 여섯 근원 중 영혼과 파괴의 뿌리인 흑안의 일족의 마지막 생존자인 네가 사라진다면 검은 맹약자의 맥 또한 끊기겠지.] 비늘이 깨져나가고 살이 갈라진 상처에서 흐르는 핏물이 시내와 연못을 이룬다. 사령군이 모두 전멸하며 이뤄낸 성과. 그러나 결국 승자가 된 것은 카라트레드다. [세상의 균형을 위해서라도 세 개의 맹약은 계속 이어져야 하지만, 이 대륙에서 너의 존재는 균형을 무너트린다.] 땅 위에 거대한 육신을 뉘인 카라트레드의 머리가 겹쳐진 두 손위에 천천히 얹혀지며, 그 시선이 바로 앞까지 다가온다. [그를 위해 나는 우리에게 부여된 마지막 권능. 최후의 최후만큼은 우리의 진정한 고향인 용신계(龍神界)에서 맞이하기 위해 사용하는 권능을 이용해 너를 이 대륙에서 추방하겠다.] 카라트레드의 비늘이 하나둘씩 빛을 발하며 막대한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지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 중 하나가 먼지처럼 스러져간다. "네게는 아직 1000년의 시간이 남았을 텐데." [우리에게 시간이란 무의미할 뿐이다. 아쉬운 게 있다면 고향에서 마지막을 맞이하지 못함이지만...] 모든 비늘이 빛으로 화하며 사방을 대낮과 같이 환하게 밝힘과 함께, 거대한 힘의 기류가 폭풍처럼 일어나 사방을 휩쓴다. [내가 한평생 지켜온 세상이라면, 무덤으로 삼기에 부족함은 없다.] 거대한 눈이 서서히 감기며 마지막까지도 오만한 그 의지와 함께 태산과 같이 거대한 체구가 조금씩 허공에 녹아 들어간다. 빛을 빨아들인 주변의 공간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네가 도착할 곳은 시간의 경계 너머의 동(東). 이동의 과정에서 상당한 힘이 소실된다고 해서 과연 네 악행이 그칠지는 모르겠지만, 운명이 너를 이끌 것이다.] 무언가를 감지하는 순간 곧바로 수면에서 깨어난 그는 옆에 놓여져 있던 사신의 낫을 집어들며 무심히 입을 열었다. "왔는가." 그의 음성이 아무도 없는 허공에 공허하게 울려 퍼지며 천무의 고개가 살짝 돌아갔다 싶은 순간, 흐릿한 그늘 중 유독 짙게 깔려있던 그림자가 일렁이며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도.착.했.습.니.다.] 흑영귀(黑影鬼) 쉐도우(shadow)를 전령 삼아 불러낸 야영귀(夜影鬼)의 사악한 의지에 그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적해있는 동안 그는 그저 휴식만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강마의 비술에 이어 또 하나의 비술을 만들어냈으며, 사령기사와 환영기사로부터 빨아들인 귀기로 힘을 한층 더 회복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냈다. 이제 충분한 귀기를 모으기만 한다면 전성기의 힘을 완전히 회복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그만큼 대량의 귀기를 단시일 내에 끌어 모을 수 있는 장소는, 그가 아는 한 단 한 군데뿐이다. "호악산으로 간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사신의 걸음이 호악산으로 향했을 때, 높은 밤하늘에는 정의성을 탈옥한 뒤 두 번째로 모습을 드러낸 푸른 보름달이 아련한 빛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26.사신지무(死神之舞).(1) -사신의 춤이 시작되니, 하늘의 달빛과 땅의 죽음과 사람의 어둠이 그 춤에 함께하다.- 콰직! 한 마리의 비조처럼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돌멩이가 깊숙이 박혀들며 분질러진 나뭇가지가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허공에서 덜렁거렸다. "질기구나." 멍하니 혼잣말을 중얼거린 붉은 복면인은 또 하나의 돌멩이를 주워들고 손안에서 굴렸다. 생명이란 것은 원래 저처럼 질긴 법이다. '하지만 죽음도 그만큼 깊은 법이지.' 복면인의 손에서 돌멩이가 사라졌다 싶은 순간, 나뭇가지를 지탱하던 부분이 끊겨나가며 그 나머지부분이 뚝 떨어져 내렸다.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복잡한 표정을 짓던 그가 문뜩 자신의 붉은 복면을 벗어들자,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듯한 아름다운 얼굴이 환히 드러나며 그 누구라도 단번에 혹하게 해버릴 정도로 짙은 염기를 흘렸다. "제기랄!" 쫘악! 나지막한 욕설과 함께 신경질적으로 복면을 찢어버린 청년은 벌떡 몸을 일으키며 비도를 뽑아들었다. 아무 쓸데없는 행동임은 알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화풀이를 하지 않으면 속이 터져 버릴 듯 싶었다. 그가 마악 앞쪽의 나무를 향해 비도를 던지려던 순간, 하나의 돌멩이가 청년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팍! 비도를 날려 돌멩이를 떨어트린 금호는 어둠 저편으로부터 천천히 다가오는 남국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새하얀 피부 위로 은은히 비춰지는 달빛과 그 밑에 스며들어있는 짙은 슬픔으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청순하던 미모가 더욱 아련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남국의 모습은 당장이라도 위로해주고 싶은 충돌을 일으켰다. 그러나 남국이 원하는 것이 단순한 말이나 행동의 위로가 아니라는 사실을, 금호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 자신 또한 필요하고 갈구하던 것. 갑갑한 속을 어떻게든 풀어버릴 수 있는 화풀이였다. 챙-! 비도가 밤하늘에 은빛의 선을 그음과 함께 한 자루의 도가 어둠을 가르며 선을 튕겨낸다. 양손에 비도를 쥔 금호의 몸이 땅을 박하고 허공으로 치솟아 오를 때, 남국의 발은 지면에 딱 붙은 채 스르륵 앞으로 미끄러져 간다. 하나의 비도가 튕겨나간다. 하나의 비도가 땅에 박혀든다. 하나의 비도가 옷자락을 베고 지나간다. 하나의 비도가 비껴나간다. 하나의 비도가 몇 개의 머리카락을 가른다. 어떤 비도에 의해서인지 알 수 없는 하나의 얕은 상처로부터 옅은 핏물이 베어져 나왔지만, 금호와 남국 중 그것에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촤아악! 남국의 도에 의해 소매자락이 길게 갈라진 금호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며 남국의 손목을 향해 곧바로 내뻗어지자, 도의 손잡이로 주먹을 막아낸 남국은 그대로 도를 놓는 대신 빈손으로 금호의 몸을 잡아당기며 무릎을 올려쳤다. 퍽! 한 손으로 무릎을 막았음에도 몸이 살짝 떠오르며 그 충격이 내부를 뒤흔드는 가운데 금호의 발이 남국의 발목을 후려쳐 균형을 무너트렸다. 육천권(六天拳)과 귀영각(鬼影脚)을 적절히 사용하며 손발을 주고받던 그들은 언제부터인가 초식을 잃고 마치 시정잡배와도 같은 주먹질로 서로의 몸을 두들겼다. 피륙이 멍들고 뼈까지 저릿저릿한 고통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입술이 찢어지고 살이 까지며 핏방울이 하얀 살결위로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미친 듯이 뒤엉켜들며 서로를 치고 받던 그들의 몸이 멈춘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대(大)자로 누운 그들의 아름답던 얼굴은 엉망으로 변해있었지만, 두 쌍의 눈만큼은 여전히 투명할 정도의 맑음 속에 검은 밤하늘을 담고 있었다. "아프네." 금호의 혼잣말에 남국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진기를 담지 않았다고는 해도 사정을 두지 않고 한 주먹질이니, 동피철골이 아닌 이상 아프지 않을 리가 없다. "내 선택이 잘못됐던 걸까?" 호악산에 끼여있는 안개만큼이나 흐린 금호의 음성에는 짙은 자책감이 묻어 났다. 하나의 선택을 했을 때, 그 선택이 옳은지 그른지는 오직 결과를 봐야만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 금호의 앞에 놓여진 결과는 너무나도 비참했다. 차라리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렇다면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남국은 조용히 금호의 손을 잡아주었다. 산하리에서 누명을 입었을 때, 살각의 추적을 당했을 때, 철궁곡에서 공격을 받았을 때, 정의성에서 탈옥했을 때, 그들은 언제나 무력하기만 했다. 이번만큼은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를 제대로 해내고 싶었지만, 결국 무력감의 늪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우린 대체 언제나 강해질 수 있는 걸까..." 구룡팔봉이라 불린다고 하지만, 그들은 아직 강해지지 못했다. 진정 강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단지 무력의 강함만으로 모든 것이 다 되는 것일까? 그때, 금호의 뇌리에 문뜩 한가지 상념이 스쳐지나갔다. "모처럼 내력을 12성까지 끌어올리면 비도 10개를 모두 던질 수 있게 됐 무영자 글쓴날 2005-05-30 23:57:01 고친날 2005-06-08 18:55:31 읽은수 28308 [ 9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서장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톡 천장으로부터 새어나온 물방울이 검은 머리카락 위에 떨어졌다. 먼지가 가득하고 피로 범벅이 된 머리카락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린 물방울은 혼탁해질 대로 혼탁해진 상태로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또옥 석실의 내부를 반쯤 차지하고 있던 깊은 물웅덩이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갑과 사슬에 의해 벽에 매여 있던 사내의 허리부근까지 차있던 웅덩이의 수면에 미미한 파동이 일었다. 그그긍 사내가 매여 있던 벽의 정 반대편에 있던 석문이 열리며 미약한 빛이 흘러 들어와 그의 모습을 비췄다. 엉망으로 흐트러져있는 긴 흑발사이로 드러난 마른 팔목과 오그라든 피부는 아무리 봐도 건장한 성인 사내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이 석실의 어둠 속에서 결박돼있던 오랜 시간의 상징이자, 눈에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사슬이었다. “클클, 아직도 죽지 않았느냐?” 석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한 명의 노인이었다. 약간 굽은 허리에 작은 체구, 주름이 가득한데다가 온통 흉터 투성인 안면에 더불어 껄끄러운 음성을 지니고 있는 노인은 벽에 매달린 사내를 보며 실실거리다가 한 순간 무섭게 두 눈을 부릅뜨며 한 손으로 허공을 후려갈겼다. 퍼엉!! 촤아악! 노인이 후려갈긴 것은 분명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이었지만, 정작 반응을 보인 것은 석실에 한가득 고여 있던 물이었다. 물웅덩이의 한 중앙에서 갑자기 폭발하듯 튀어나온 물은 석벽을 비롯한 사내의 몸을 흠뻑 적셨다. “내공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장님 놈이, 대체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있는 거지?” 찰랑. 노인의 걸음이 천천히 앞으로 옮겨지다가 마침내 물웅덩이 위에 다다랐다. 노인이 깃털보다 가볍지 않은 이상은 물에 빠져드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놀랍게도 그는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수면을 평지처럼 걸어 사내의 앞으로 다가갔다. “설마 네놈이...진정 불사강시(不死?尸)란 말이냐?” 노인의 손이 사내의 가슴에 천천히 맞닿았다. 비쩍 말라 갈빗대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 가슴 안에는 뜨거운 심장이 들어있어야 하지만, 사내의 체온은 그야말로 시체와 같이 싸늘했다. 웬만해서는 눈치체기 힘들 정도로 미약하기만 한 박동만이 그가 아직까지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럴 리가 없지...나조차 아직 만들어내지 못한 불사강시가 존재할 리가 없어!” 퍼엉!! 철컹! 사내의 가슴에 닿아있던 노인의 손에서 진기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며 그의 몸과 사슬이 크게 들썩거렸다. 일반인이라면 내장이 조각조각 끊겨 칠공으로 피를 토하며 즉사할 정도였지만, 기이하게도 사내는 크게 몸을 들썩거리고 오공에서 잠시 동안 피를 쏟아내다가 멈출 뿐 계속해서 생명을 유지해가고 있었다. “어떻게 이 독수(毒水) 속에서 아무 것도 먹지 않고 1년을 버틸 수 있는 거냐?” 노인의 손이 사내의 턱을 들어 올렸다. 백지장처럼 창백한 안색에 비쩍 말라 광대뼈가 툭 튀어 나와 있는 안면이 더해져 그야말로 시체와 같은 얼굴이었다. “그래...아무리 불사지체(不死之體)라도 진정한 불사강시라고는 할 수 없어. 장님인데다가 금강불괴도 아니라면, 불사지체가 있어도 제대로 된 고수만 못하지. 암, 그렇고 말고. 클클클” 자신이 한 말을 스스로 부정한 노인이 괴팍한 흉소를 흘리며 한 손가락을 치켜들자, 손가락 주변으로 아지랑이 같은 적록색 기운이 울렁거리다가 한 순간 푸르스름한 빛을 번뜩이며 유형화되었다. 주르륵... “어디, 이번에도 네놈이 살아남을 수 있는지 실험해볼까?” 강기가 맺힌 손가락으로 사내의 가슴을 가르고 파고든 노인은 상처를 통해 흘러나오는 붉은 선혈을 보며 광기를 번뜩였다. 1년간 거의 십중팔구 죽을 것을 확신하고 벌인 실험에서도 불사신처럼 수차례나 살아남은 사내의 생명력은 기어코 노인의 인내심을 무너지게 만들었다. “클클, 네가 과연 이 사사혈독(死邪血毒)에도 네가 버틸 수 있을까?” 상처에서 조금씩 흘러나오는 선혈이 점점 더욱 선명하게 변하는 것을 보며 노인은 괴팍한 흉소를 흘렸다. 사사혈독(死邪血毒)은 사천당문(四川唐門)의 무형지독(無形之毒), 독림(毒林)의 흑봉지독(黑蜂之毒)과 함께 천하삼대극독(天下三大劇毒)중 하나다. 특히 천하사대마공(天下四大魔功) 중 하나인 사사혈독공(死邪血毒功)에 의해 펼쳐지는 사사혈독강기(死邪血毒剛氣)는 사사혈독이 극한에 가깝다 할 정도로 농축되어 있기에, 설사 백독불침의 고수라 하더라도 살짝 스치기만 하면 그 즉시 녹아내려 한줌 독수가 돼버리는 무시무시한 독공이다. “이대로 가면 네놈은 전신의 피가 모두 사사혈독이 돼서 네놈의 피에 네놈의 몸이 녹아내릴 거다. 클클, 아무리 불사지체라고 하더라도 이제는 살아남을 수 없지” 갈수록 검게 물들던 피가 이제는 완전히 선홍빛을 잃어버림과 함께 사내의 몸이 미미하게 꿈틀거리며 심장박동이 약해져 가는 것을 느낀 노인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이 불사신 같던 괴물 녀석도 그의 사사혈독에는 버틸 수 없었다. 그의 독이야말로 죽은 이를 살리고 산 이를 죽일 수 있는 천하제일독이니까. “네놈이라면 재료로써는 최상급이니, 분명 좋은 강시가 될 수 있겠지. 클클클” 노인조차 불사강시인지 아닌지 판단 내리지 못하고 결국 독살을 결정한 사내의 특이한 신체라면, 그의 평생 염원이던 불사강시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몰랐다. 진정한 불사강시가 완성된다면 노인의 혈문(血門)이 진정한 천하제일문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네 영혼과 육신은 영원토록 혈문을 위해 살아가게 될 거다. 클클클클!” 마침내 사내의 심장이 멈춘 것을 확인한 노인은 수갑과 사슬을 풀고 사내를 어깨에 짊어지며 몸을 돌렸다. 다른 조잡한 강시도 아닌 불사강시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최대한 빨리 보존액에 담그고 심령금제와 제강을 시작해야 했다. 그그긍 한 손으로 석문을 잡은 노인은 주의 깊게 석문의 기관장치를 조작했다. 현철로 이루어진 두터운 철문에 의해 입구가 봉쇄되고 석실이 통째로 폭발하는 기관이 있는 만큼 노인으로써도 상당한 신경을 기울여야 했다. 이런 기관장치를 준비할 만큼 노인은 사내를 중요하게 여겼다. 어쩌면 불사강시이거나, 아니더라도 그의 필생 염원인 불사강시와 통하는 열쇠를 손에 쥐고 있는 만큼 사내가 탈출할 수 없도록 철저하게 대비한 것이다. “이젠 이 귀찮은 기관도 폐쇄해야...” 석문을 완전히 열고 석실 밖을 향해 한 걸음을 옮기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노인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무언가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싶은 순간, 목덜미가 화끈거리며 뜨거운 선혈이 붉은 용암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퍼엉!! 한 손으로 다급히 혈도를 짚어 목덜미를 지혈하며 사내를 붙들고 있던 손으로 진기를 방출한 노인은 그 충격에 의해 단번에 2장거리의 앞까지 날려진 그가 두 발로 착지해 비틀거리다가 한쪽 무릎을 꿇는 것을 보며 두 눈을 부릅떴다. 분명 죽었던 놈이 멀쩡히 움직여 착지했을 뿐만 아니라, 칼날처럼 예리하게 서있는 손톱에 방울방울 맺혀있는 붉은 핏방울이 노인을 암습한 것이 바로 그였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네, 네놈이...?” 경악한 노인의 몸이 굳어져있는 틈을 타 사내는 다리에 힘을 모아 단번에 앞으로 튀어나왔다. 노인은 반사적으로 사사혈독강기를 일으켜 한줄기 지강(指?)을 쏘아냈지만, 그는 적록색의 가는 선에 의해 어깨가 꿰뚫어지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톱으로 노인의 목을 찔러 들어왔다. “네놈이 감히...!” 동귀어진까지 각오한 듯한 사내의 공격에 노인은 호신강기를 극한까지 일으키며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 사사혈독공에 10성의 성취를 이뤄 검기라도 어렵지 않게 막아낼 수 있는 호신강기였지만, 이미 저 손톱에 동맥이 끊길 뻔했던 노인으로써는 자연히 경계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내가 자신을 뒤쫓는 대신 반쯤 열려있던 석문을 손으로 후려치며 뒤로 몸을 빼는 것을 선택하자, 노인은 경악하며 다시 앞으로 튀어나와야만 했다. “안돼-!!” 쿠궁!! 노인은 신법을 펼쳐 앞으로 튀어나왔을 때, 석문은 이미 빠르게 닫히며 현철로 이루어진 철문을 내리고 있었다. 그가 사내를 잡아두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던 기관장치가 오히려 자신을 가둔 웃지 못 할 상황에 노인은 망연자실해졌지만, 그럼에도 그의 두 손은 본능적으로 진기를 끌어 모으고 있었다. “크아아--!!” 적록색 아지랑이가 무서운 기세로 노인의 두 손에 몰려들며 마치 귀신의 손과 같은 형태로 유형화되었다. 12성의 사사귀혈수(死邪鬼血手)를 사용하기 위해 급격히 진기를 끌어올린 탓에 내상을 입었지만, 그로써는 당장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다. 콰광!! 치이익...! 두터운 석문이 일격에 깨져나가며 그 뒤쪽에 있던 현철로 만들어진 두터운 철문이 대번에 우그러들었다. 그에 더불어 우그러진 철문이 사사혈독에 의해 녹아 들어가는 것은 사사혈독공이 왜 천하사대마공 중 하나인지를 증명하고 있었지만, 철문을 이루고 있는 현철은 호락호락하게 깨지지 않았다. 쾅! 콰앙!! 연달아 휘둘러진 사사귀혈수는 순식간에 철문을 깨부수기 시작했다. 한번씩 철문을 두들길 때마다 갈수록 깊어지는 내상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손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진기를 끌어 모았다. 불사지체인 사내의 탈출을 막기 위해 준비해준 기관인 만큼, 이 안에 남아있다가는 노인 본인이라도 살아남을 수 없었기에 철문을 때려 부수는데 필사적이었던 것이다. 콰과광!! “돼, 됐다!” 마침내 자신이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크기의 구멍이 뚫리자, 노인은 석실이 폭발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던 만큼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구멍 너머로 몸을 날렸다. 그런데 마악 노인의 가슴 부분이 구멍을 빠져 나오려는 찰나, 우그러진 철문의 한기를 타고 날카롭게 그의 목을 파고드는 하나의 손이 있었다. “커억...!?” 손이 목으로 파고들고 나서야 일어난 호신강기와 사사혈시공(死邪血尸功)라는 기공(奇功) 덕분에 즉사를 면한 노인은 철문 아래에 숨어 있다가 은밀하게 손을 뻗어 자신을 암습한 사내를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떻게?’ 절정고수가 귀식대법을 펼치더라도 3장 이내에서라면 단번에 눈치 챌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노인이었지만, 사내 분명히 두 눈에 보이는 지금도 그의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그제 서야 노인은 깨달았다. 자신은 1년 동안 사내를 실험대상물로 삼아 갖가지 실험을 하기만 했을 뿐, 이 사내의 신체 외에 다른 것에 대해서는 뭔가 알기는커녕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1년 동안이나 죽는 것보다 지독한 실험을 받으면서도 시체보다 더 시체처럼 미약한 반응을 보여 불사강시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더했던 놈은, 사실 자신의 경계심이 느슨해져 기회가 생기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어차피 장님에 벙어리라는 생각에 저 안에 얼마나 많은 벽력탄이 매장되어있는지 까지 말해준 적 있거늘, 아무리 불사지체라 하더라도 도망치기는커녕 자신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철문 바로 밑에 은신해있던 사내의 독기는 노인으로 하여금 공포심마저 들도록 만들고 있었다. ‘지, 지독한 놈...!’ 목의 상처를 통해 생기가 급격히 빠져나감을 느낀 노인이 고통에 의해 비틀린 표정을 지은 순간, 마침내 석실에 매장되어 있던 벽력탄이 일제히 화염을 토해냈다. 쿠과광--! ==================== 무적사신 시작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무영자 글쓴날 2005-05-30 23:58:38 고친날 2005-05-31 00:02:53 읽은수 24956 [ 8 K ] 제목 무적사신(무림의 네크로맨서)-1.사신출두(死神出頭).(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사신, 지하석부를 나와 귀곡에 자리를 잡으니 호악에 사신의 그림자가 내린다.- 투둑. “......” 이마에 떨어진 돌 부스러기에 정신을 차린 사내는 곧바로 주변의 기척에 정신을 집중했다. 허공을 통해 흐릿하게 느껴지는 것은 처참하게 무너진 공간. 다행스럽게도 철문이 받침대가 돼준 덕분에 완전히 무너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언제 연쇄붕괴 될지 몰랐다. 우두둑. 몸을 움직이자 비틀어져있던 철문이 살짝 기울어지며, 사내의 위에 있던 무언가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미지근하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주르륵 흘러나와 비릿한 냄새를 퍼트렸다. 그대로 붕괴하는 건 아닌지 정신을 더욱 집중해 살피던 사내는 더 이상 특별한 변동이 없을 것을 느끼고 계속해서 조금씩 떨어지고 있는 액체에 손을 가져다댔다. ‘독혈이군’ 당장 굶어죽지는 않는다고 해도 허기와 갈증은 힘을 떨어트렸기에, 액체를 살짝 맛본 사내는 주저 없이 그것을 한 모금 받아 마셨다. 독에 내성을 지닌 고수라고 해도 단 한 방울만으로 중독 시켜버릴 수 있는 극독 중 극독이었지만, 사내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 ‘피만으로는 부족하다’ 독혈이 흘러나오는 곳을 손으로 천천히 훑은 사내는 순간 손을 날카롭게 세워 살을 뜯어내, 그것을 천천히 씹어 먹었다. 잔악하기 그지없는 사파의 마두들이라도 혀를 내두를 만한 일이었지만, 사내는 피범벅이 된 입가에도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손을 세워 살덩이를 파헤쳤다. ‘힘이 필요하다.’ 주변에 있던 독기를 흡수해 연명하긴 했지만, 1년간의 감금은 그렇지 않아도 약해져있던 육신에서 모든 힘을 앗아갔다. 남은 힘이라고는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으면서까지 유지시켜온 ‘비술’과 손톱을 강인하게 하는 약간의 것뿐. 물론 그 둘이 있었기에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지만, 잃어버린 힘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힘이다. 체내에 흐르는 피는 거의 독혈이 되어 충분한 독기를 담고 있지만, 지금으로써는 그 막대한 독기를 통제해 사용할 수 있는 힘이 남아있지 않다. 그렇기에 필요한 것, 심장을 능숙하게 뼈 사이의 근육을 헤집고 끄집어낸 사내는 그것을 그대로 씹어 삼켰다. 씹어 삼킨 심장으로부터 물씬 치솟아 오르는 것은 농도 짙은 사기(邪氣). 죽은 뒤에 꺼낸 것이기는 하지만, 생전 심장의 주인이 지니고 있던 힘이 워낙 강대했던 덕분에 사내는 상당한 양의 기운을 얻을 수 있었다. 몸 상태가 상태였던 만큼 곧바로 사용하는 것은 무리였지만, 이것으로 당장 움직이는 데는 큰 지장이 없을 듯싶었다. ‘우선 이동해야겠군.’ 몸을 일으킨 사내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비쩍 마른 육신은 걷기는커녕 손 하나 까닥하기도 힘들 듯 보였지만, 그는 느리되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똑바로 통로의 중앙을 걷고 있었다. ‘여기부터 라면 붕괴에서 안전하다’ 마치 눈이 보이는 듯 하나의 석문을 자연스럽게 열고 들어간 사내는 석문을 닫은 뒤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는 해도, 그는 주변의 모든 것을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지금은 상태가 나쁘기 때문에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흐릿하게 느껴질 뿐이지만, 정신을 집중하면 좀더 또렷하게 넓은 공간이 느껴진다. ‘안전하게 힘을 회복할 수 있는 곳은 어디지?’ 미미한 공기의 흐름이 지하의 모습을 흐릿하게 알려줬다.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는 통로와, 그러한 통로 끝과 중간에 간간이 배치되어있는 몇 개의 석실로 가득 찬 지하. 간간히 느껴지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가장 가까운 석실 정도는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었다. ‘우선은 신체의 회복이 중요하다.’ 빠르고 냉철하게 판단을 내린 사내는 석실의 한쪽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피를 촉매로 전신으로 퍼져나간 사사혈독은 사내의 몸을 녹여버리기 위해 요동쳤지만, 그의 끈질긴 생명력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사기(邪氣)를 흡수하고 난 뒤 독기(毒氣)를 제어한다.’ 사기를 완전히 흡수하는데 하루에서 이틀, 독기를 제어하는데 한두 시진 정도면 될 것이다. 노인이 생전에 한 말 대로라면 이 지하는 오직 그밖에 없고 다른 누군가가 들어오기도 힘든 안전한 곳이고, 짙은 음기(陰氣)까지 흐르고 있으니 힘을 회복하기에는 상당히 적합한 환경이다. 다른 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뒤로 밀어놓은 그는 우선 휴식을 취하며 회복에 전념했다. 전신에 흩어져 꿈틀거리고 있는 사기(邪氣)를 심장으로 끌어 모아 순환시키자, 혼탁한 사기(邪氣)가 조금씩 정순한 마기(魔氣)와 음습한 귀기(鬼氣)로 나눠졌다. 몸의 상태가 상태인지라 기운의 순환과 정조가 이루어지는 속도는 지극히 느렸지만 그는 조금도 조급해하지 않고 차분히 정제된 기운을 흡수했다. 귀기(鬼氣)는 ‘비술’에 따라 쇠약해진 생기를 자극해 상한 육신을 가공한 속도로 회복시켰고, 마기(魔氣)는 회복된 신체에 스며들어 급소뿐만 아니라 모든 외피와 근골을 강철과 같이 단단하게 다졌다. 노인의 심장에서 얻은 막대한 양의 사기는 그렇게 사내의 피와 살이 되었다. 완전히 예전 상태를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거동하는데 문제가 없을 정도로 회복되었기에 사사혈독(死邪血毒)의 독기(毒氣)를 제어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랫동안의 휴식을 마친 그는 곧바로 자신의 신체를 점검했다. 귀기(鬼氣)로 생기를 자극해 무리한 회복을 한 탓인지 원래부터 창백한 피부와 호리호리한 체격이 더욱 투명할 정도로 희고 가늘게 변했다. 막 죽은 시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모습이지만, 바로 며칠 전의 목내이나 다름없던 모습에 비하면 무척이나 양호한 편이다. 어차피 보이는 것에 그리 크게 신경 쓰지도 않는 그에게 있어, 외양은 거동에 불편함이 없을 정도면 충분하다. 문제는 바로 힘. 만약 지금의 상태에서 노인과 같은 강자를 다시 한 번 만난다면, 상대는커녕 피신도 힘들다. ‘그걸 찾아야한다’ 얼마 남지 않은 기운을 끌어 올리며 정신을 집중하자 익숙한 파동이 느껴진다. 정확하진 않더라도 근처에 있는 석실은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에 그 파동이 근원지가 어디인지 알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천장에 간간이 야명주가 박혀있는 음습한 지하통로를 지나 한 석문 앞에 도착한 그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앞에 있던 석문을 열었다. 그그긍 낡은 탁자와 의자, 작은 침상, 구석에 있는 커다란 항아리와 비스듬히 세워진 목관(木棺), 그리고 수많은 책이 빼곡하게 꽂혀있는 책장만이 있는 쓸쓸한 방으로 발을 들여놓은 그는 곧바로 걸음을 옮겨 목관에 손을 댔다. ‘독인가.’ 손을 대자마자 피부를 타고 퍼져오기 시작한 독을 느낀 그는 담담하게 독기를 흡수해버렸다. 천하삼대극독 중 하나인 사사혈독조차 흡수해버린, 만독불침을 넘어 독중지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그를 해하기에는 독의 수준이 너무 낮았다. 끼이익... 목관이 껄끄러운 소리와 함께 열리자, 관 안에서부터 사이한 기운이 물씬 풍겨 나오며 조금 특이한 형태의 흑의장포와 하나의 묵봉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한없이 짙은 칠흑색만큼이나 무언가 불길한 기운을 풍기고 있는 흑의장포와 묵봉을 주저 없이 꺼낸 그는 익숙하게 장포를 걸친 뒤 묵봉을 한 손에 쥐었다. 포대